대장장이 성자

 

 

 

  순흥에서 소백산 쪽으로 10여리 떨어진 곳에 배점리라는 마을이 있다. 소백산 기슭이라 크지 않은 마을이지만 사철 맑은 물이 흘러 산수가 수려하고 인심이 순후한 곳이다. 이 마을에 배순이라는 사람의 대장간이 있었다. 배점(裵店)이라는 마을이름은 배순의 대장간이 있던 곳에서 유래한다. 배순은 비록 신분은 쇠를 두드려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이지만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틈틈이 서책을 가까이하여 읽고 쓰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에 대한 목마름은 끝이 없었다.

 

  마침 퇴계 선생께서 풍기군수로 부임해 오셨다. 퇴계 선생은 정기적으로 소수서원에 오셔서 유생들에게 학문을 강하셨다. 소수서원은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배점리를 지나 흐르는 죽계수 가에 자리 잡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소수서원의 처음 이름은 백운동 서원이었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주자의 백록동 서원을 본받아 세웠다.  

 

  고려시대에 이 땅에 처음으로 주자학(성리학)을 들여온 분이 순흥 출신 안향 선생이다. 소수서원은 안향 선생을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서원은 성현을 제사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곳이다. 제사의 기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한다. 서원을 세운 이는 주세붕이지만 사액서원이 되게 한 분은 퇴계 선생이다.

 

  사액서원(賜額書院)은 왕이 현판을 내려준 서원이라는 뜻이다. 사액서원이 되면 단순히 현판만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서 서원을 운영할 전답과 노비를 내려준다. 지역의 선비들이 성리학 공부할 수 있는 보다 나은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다. 퇴계 선생의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일이다.

 

  배순은 퇴계 선생이 서원에 오신다는 말을 들으면 며칠 전부터 가슴이 설레었다. 신분이 미천하니 서원에 학생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순의 발걸음은 자기도 모르게 서원을 향했다. 유생들은 강학당 안에서 선생의 강학을 들을 수 있지만 순은 다만 문밖 댓돌아래 쭈그리고 앉아 창호지 너머에서 들리는 선생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나뭇가지로 마당에 글자를 쓰며 공부할 따름이었다. 이런 일이 잦아지자 선생도 알게 되었다. 하루는 선생이 배순을 불러 강학한 내용을 물어보았다. 순의 대답은 어느 유생보다 훌륭했다. 그날 이후로 순은 명륜당 안에 들어 다른 유생과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다른 유생들의 눈치가 달갑지 않았지만 순은 오로지 학문에 열중할 따름이었다.

 

  퇴계 선생은 풍기군수로 벼슬을 마감하고 고향 도산으로 물러가 도산의 자연을 텍스트 삼아 도에 이르는 길에 매진하셨다.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순은 무쇠로 퇴계 선생의 상을 만들어 모시고 삼년상 내내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렸다. 퇴계의 제자들이 퇴계 사후에 제자의 명단을 기록한 ‘퇴계급문록(退溪及門錄)’에 배순의 이름이 올랐다. 대장장이의 신분으로 퇴계의 학통을 이은 제가가 된 것이다. 그의 학문이 어떠했는가를 미루어 알 따름이다.

 

  순은 효를 몸소 실천한 분이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는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렸고 돌아가신 다음에는 정성으로 제사를 모셨다. 제사에 쓸 곡식은 깨끗한 땅을 따로 마련하여 그곳에서 추수한 곡식으로만 제사를 모셨다. 그 곡식을 재배하고 추하는 손길이 어찌나 정성스러웠는지 마을 사람들이 저절로 그를 우러르게 되었다.

 

  조선조 유생들이 유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가거나 학문을 성취하여 저술로써 그 자취를 남기기 위함이다. 배순은 벼슬을 하지도 저술을 남기지도 않았다. 다만 몸으로 충과 효와 경()을 실천하였을 뿐이다. 전에도 후에도 들어본 일이 없는 대장장이 선비가 된 것이다.

 

  후에 선조대왕이 승하하매 배순은 삼년 상복을 입었다. 초하루 보름이면 국망봉에 올라 북쪽을 향해 절을 올렸다. 배점에서 국망봉에 오르는 길은 등산화를 신고도 오르는데 3시간은 족히 걸린다. 초하루 보름 북향배례를 3년 동안 하였으니 그의 충의 실행이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배순의 대장간에서는 농촌 사람들이 일상으로 쓰는 농기구와 갖가지 도구를 만들었다. , , 도끼, , 보습, 쇠스랑, 괭이, 호미 등 쇠붙이로 만드는 모든 것이었다. 값도 절대 비싸지 않게 받았고 무엇보다도 물건이 단단하고 쓰기에 좋았다. 농사짓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불편함이 없도록 정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농민들이 물건을 쓰다가 잘못되면 언제든지 다시 고쳐서 불편함이 없도록 해 주었다. 판매에서 에이에스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었다. 몸으로 유학을 실천하는 배순의 행실은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우러르게 하였다. 말과 글로 유학을 이룬 것이 아니라 몸으로 유학을 실천하신 유래가 없는 분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태어나면 가야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대장장이 선비 배순도 자연의 질서를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의 세수 78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떠나던 날은 맑은 날이었음에도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고 마당에는 까마귀 떼가 몰려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하늘이 그의 충과 효와 경에 감동한 바라 했다. 이후로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정월 보름이면 배순의 제사를 지낸다. 대장장이로 태어난 그가 선비가 되고 성자가 되고 마을의 수호신이 된 것이다. 정월보름 마을사람들의 제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는 천한 몸으로 태어나 온몸으로 도를 실천하여 성자가 된 것이다.

 

  1615년 광해군 7년에 나라에서 정려(旌閭)하였다. 단곡 곽진이라는 선비는 정려비문에 ‘참된 충과 효를 온전히 행한 선비는 오로지 배순뿐이니 이 유허를 지나는 사람들은 어찌 경건해 하지 않으리오,(純忠純孝惟純耳過此遺墟孰)’라고 했다. 지금도 폐교가 된 배점초등학교 담장 옆에는 그의 정려비각이 서 있다.

 

  몇 년 전 배씨 종친회에서 배순의 묘를 찾아 다시 조성하려하니 묘비의 비문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글줄이나 쓴다는 소문을 들은 모양이다. 정려비문을 다시 조사하고 자료를 찾아 외람되게도 그의 비문을 썼다.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의 도리라 여겼다. 다만 배순의 높은 성품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후손들의 뜻을 존중하여 한자와 한글을 혼용하였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이요 興海人이다. 順興移居하여 을 다루어 生涯를 도우다가 이곳에서 하였다. 孝誠至極하여 父母 계실 때는 至誠으로 奉養하고 死後에는 한 땅에서 따로 秋收穀食으로 祭祀하였다. 스승 退溪先生함에 三年服을 입었으며 鐵像을 만들어 모시고 祭祀하였다. 宣祖大王國喪에도 三年服을 입었으며 매달 초하루 보름에 뒷산에 올라 宮闕하며 祭祀하였다. 이러하듯 은 남다른 稟性篤實함으로 儒道實踐하여 千秋에 빛나는 德行을 이루었다. 나라에서 忠孝를 기려 1615(光海七年)旌閭하였다. 膝下四男一女를 두었으며, 享年七十八歲하심에 맑은 날 큰비가 내리고 뜰에 까마귀 떼가 모이니 이는 忠孝에 하늘이 感動한 바였다. 丹谷旌閭碑文에 참된 와 참된 은 오로지 裵純뿐이라 하였다. 어찌 길이 본받지 않으리오. 辛卯년 六  日 文學博士 權石昌이 삼가 碑文을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