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서서 바라보면 

  

 

여기 서서 바라보면

길 건너 산

한 뼘 밭

비알에서

 

연이 할머니 할아버지

앞서며 뒤서며

일하는 것

다 보인다

 

, , ,

하나도 안 보이고

누구라고 안 해도

다 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하느님,

내가 매일매일

무얼 하고 있는지

왜 모르겠는가

 

 

 

  

슬픔의 서식

-부론 居頓寺址에서

 

 

 

이제 새벽닭은 훼를 치지 않는다

부엉이도 슬픔의 울음을 멈추고 떠났다

부론 거돈사 폐사지 한 쪽에

아직도 팔각기둥에 지신(地神)들로 치장한

원공 국사의 탑만이

지존(至尊)의 역사를 거머쥐고

연자방아를 돌리던 돌쇠의 무딘 힘을

유혹해 떠난 계집의

치맛자락 같은 길을 바라보고 있다

이 거돈사 절이 번창할 때는

냉수 한 사발이라도 얻어마시고

부처님 은공을 온몸으로 느끼고자 했을 것인데

궁궐 같은 대웅전 지붕이 불에 탄 후에는

제비 새끼 한 마리 둥지를 틀지 않는다

기둥을 끙끙거리며 바치고 있던 돌 만이

제 자리를 잃고 옹기종기 모여

슬픔의 서식을 맞추고 있다

세월이라는 흔적, 허공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거돈사 폐사지 돌들은

슬픔의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뼈처럼 슬픔의 서식을 맞추고 있다

 

  

 

 임영석/ 1961년 충남 금산 출생. 1985년 계간 『현대시조』 봄호 천료 등단

 시집으로 『받아쓰기』외 5, 시조집 『꽃불』외 2, 시조선집 『고양이 걸음』, 시론집 『미래를 개척하는 시인』이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및 강원문화재단, 원주문화재단에서 각각 창작기금을 받았다. 1회 시조세계문학상, 15회 천상병귀천문학상 우수상, 38회 강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imim01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