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0호...
   2019년 08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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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384 똥도둑 시인 / 양희영
남태식
29 2019-08-02
똥도둑 시인 양희영 길 건너 비알밭에 잔뜩 눌어붙은 쇠똥 겨울을 난 똥은 나무에도 보약이지 눈감고 딱 세 덩이만 훔쳐 오고 싶었지 한참을 별렀는데 그만 갈아 엎어버린 밭 아깝다 사과나무야 진즉에 집어 올 걸 이 사람 니 똥도둑이가 그러고도 시를 써! *** 그러고도 시를 썼네요. 그저 좋네요. 오늘은 뱀꼬리 사절!  
383 정든 병 / 허수경
남태식
178 2019-06-20
정든 병 허수경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듭니다 가엾은 등불 마음의 살들은 저리도 여려 나 그 살을 세상의 접면에 대고 몸이 상합니다 몸이 상할 때 마음은 저 혼자 버려지고 버려진 마음이 너무 많아 이 세상 모든 길들은 위독합니다 위독한 길을 따라 속수무책의 몸이여 버려진 마음들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아프고 대책없습니다 정든 병이 켜놓은 등불의 세상은 어둑어둑 대책없습니다 *** '늙다'는 나이에 이르지 못하고 고인이 되어버린 시인들의 시는 목숨을 버리기 전 미처 세상에 다 내놓지 못하고 넘겨버린 유고 같습니다. 허수경의 오래된 시 '정든 병'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는지 주변에서 투병하는 지인들을 많이 만납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 전에는 죽음은 막연했으나 그 막연한 죽음이 일없이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한데 죽음의 고비를 한 번 넘기자 신기하게도 되려 죽음이 친근해졌습니다. 물론 병도 친근해졌습니다. 남은 평생을 약을 먹으면서 정기적으로 의사와 대면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되려 편안해졌습니다. 이 마음 나도 모릅니다. 주변에서 진짜 투병생활에 들어간 지인들 중에는 몸의 병으로 마음의 병까지 얻어 고생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분분의 지인들은 병이 곧 삶인 양 투병생활을 일상생활처럼 이어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다행스럽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 과도한 사고의 결과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투병을 일상처럼 이어가면서 좀 더 오래 볼 수 있었으면 더 좋겠다는 바램은 있습니다만.  
382 고잉 고잉 곤 / 김혜순
남태식
210 2019-04-22
고잉 고잉 곤 김혜순 새가 나를 오린다 햇빛이 그림자를 오리듯 오려낸 자리로 구멍이 들어온다 내가 나간다 새가 나를 오린다 시간이 나를 오리듯 오려낸 자리로 벌어진 입이 들어온다 내가 그 입 밖으로 나갔다가 기형아로 돌아온다 다시 나간다 내가 없는 곳으로 한 걸음 내가 없는 곳으로 한 걸음 새가 나를 오리지 않는다 벽 뒤에서 내가 무한히 대기한다 *** 길들여져 맞춤형으로 나갔다가 매번 '기형아'로 돌아와도 나를 버리고 다시 나선 무대에서 무대는 커녕 무대 뒤에서 취사선택되기를 바라며 '무한대기'하는 삶을 사는 어떤 소수자들을 떠올리며, 넓혀서 소수자들을 읽다가 좁혀서 소수자들을 읽기를 반복하는데, 넓혀도 좁혀도 차별을 당하는 소수자인 건 마찬가지여서 가 닿는 공감의 장에는 이해의 바람보다는 느낌의 물결이 먼저 출렁입니다. 섧은.  
381 몇 번째 봄 / 이병률
남태식
228 2019-04-12
몇 번째 봄 이병률 나무 아래 칼을 묻어서 동백나무는 저리도 불꽃을 동강동강 쳐내는구나 겨울 내내 눈을 삼켜서 벚나무는 저리도 종이눈을 뿌리는구나 봄에는 전기가 흘러서 고개만 들어도 화들화들 정신이 없구나 내 무릎 속에는 의자가 들어 있어 오지도 않는 사람을 기다리느라 앉지를 않는구나 *** 낯설다는 생각으로 집었던 시집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낯익은 시들이 자꾸 눈에 띕니다. 이렇게나 자주, 이렇게나 많이 이 시인의 시들을 읽은 기억은 없는데 낯선 시간은 낯익은 시간으로 바뀌어갑니다. 그리고 문득 어느 순간 불이 환히 켜진 듯 한 장소가 떠오르면서 이 시집을 읽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때가 언제였을까요. 언제였던지 시간은 정확하지 않은데 나는 이 시인의 이 시집을 조치원을 지나는 열차 안에서 읽었다는 것을 기억해냅니다. 시간은 기록으로 남고 장소는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날들입니다. 하지만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장소는 기억하는 이가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하니 새삼 기록을 남기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 느끼는 날이기도 합니다. 봄입니다. 어떤 봄으로부터 이 봄은 '몇 번째 봄'인지 얼른 계산이 되지 않아 손가락을 내려다봅니다. 갈수록 손가락을 내려다보는 일이 더 자주 생길 것입니다. 봄입니다. 이 봄은 어떤 봄으로부터 정말 '몇 번째 봄'일까요.  
380 시바 시바 / 하상만
남태식
215 2019-03-17
시바시바 하상만 온통 파란 독이 오른 시바신의 그림 한 장이 침대 머리 위에 걸려 있었다. 시바신은 이마 가운데 눈이 하나 더 있고 그 눈을 뜨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해버린다는 말을 들었다. 내 방 액자 속의 시바신은 가운데 눈을 뜨고 있었다. 이상했다. 여기가 지옥인가? 내 방을 청소하러 온 남자에게 말했다. 시바신이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자 남자가 대답했다. 시바신은 언제나 눈을 뜨고 있었죠. 남자의 이름은 소누. 그는 게스트 하우스의 종업원. 늘 감긴 눈이었다. 그가 내게 물었다. 어제 몇 시에 잤어요?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그가 또 말했다. 전 새벽 세 시에 자서 다섯 시에 일어났어요. 배불뚝이 사장님은 지금 낮잠에 드셨지요. 그건 제 몫인데 말이에요. *** '시바신이 언제나 눈을 뜨고 있'는 '여기'는 누구에게는 '언제나' '지옥'이다. 누구에게만 '지옥'이다. '시바신'은 '언제나 눈을 뜨고 있었'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바뀌지 않으면 신의 이름은 결국 욕으로 남게 되리라. '시바 시바'  
379 메뚜기 강 / 유재복
남태식
1397 2018-07-12
메뚜기 강 유재복 그거 아세요? 가을이 깊어질수록 밤안개 자주 피어오르는 거, 추수 끝난 들판에 저녁이 오고 노을이 땅에 스며드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밭고랑의 풀숲이나 벼 포기 밑동마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거 그게 다 그동안 함께 있던 메뚜기들 하늘로 올라가는 길 도와주려고 말라가는 풀과 꽃들이 땅과 함께 만드는 입김이에요 알 낳고 할 일 다 끝낸 메뚜기들은 가을볕 한쪽 끝에 제 움직임을 내려놓지요 저녁 찬 공기에 다리 끝에 남아있던 가느다란 떨림마저 멈추게 되지요 그럼 하얀 옷으로 갈아입은 메뚜기 영혼이 몸을 빠져나오죠 그런 메뚜기들 태우고 갈 안개를 땅에서 뿜어내는 거래요 여기저기 메뚜기들이 반딧불처럼 떠오르죠 한 움큼씩의 안개가 모여 들판을 자욱하게 만들지요 풀도 꽃들도 낙엽처럼 다 땅으로 떨어지는 계절, 메뚜기들은 땅에서 떠올라 하늘로 진대요 잠자리도 무시무시한 거미나 사마귀들도 모두 어울리죠 쫓기던 메뚜기들이 처음엔 놀라겠지요 먹고 사는 일 내려놓았으니 어떻겠어요? 다들 편한 사이가 되는 거지요 그렇게 큰 강물처럼 한 덩이가 된 메뚜기 강이 들판 위를 흘러 다니죠 좁은 논둑과 벼 사이에서 이리저리 뛰며 풀잎 위에 매달려 살던 삶이 넓은 들판 끝 강물과 검은 산도 다 내려다보니 얼마나 신나겠어요? 벌, 나비들도 이렇게 넓은 곳이라는 걸 그제야 안 거죠 그렇게 메뚜기 강이 밤새 들판을 쏘다니지요 그렇게 새벽이 오면 천사가 내려온대요 그 커다란 강물 끝자락 당겨 하늘로 올라가지요 배웅 마친 안개들이 마구 사람의 마을로 쏟아져 내려오고요 그게 다는 아니에요 이른 봄에 안개 자주 끼는 것 모르세요? 왜 가을 안개는 둥둥 떠 있는데 봄 안개는 긴치마 입은 것처럼 땅을 질질 끌고 다니잖아요? 새싹 내미는 논둑 밭둑 다 덮고 지나는 사람 눈도 가리는 순간, 못 보셨어요? 땅에 바싹 다가선 안개 속에서 메뚜기 알 위로 한 줌의 안개 내려서 스며드는 걸 *** 저 안개, 내게도 스며들었다. 아름답고 감미로운 환상의 나라의 이야기, 마술적 리얼리즘의 땅의 이야기,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명명된 기형도의 '안개'에 버금가는 안개나라의 이야기, 속의 저 안개에 나, 종일 사로잡혔다.  
378 후쿠시마에서 산다는 것 / 요시다 마리카
남태식
1440 2018-06-16
후쿠시마에서 산다는 것 요시다 마리카 후쿠시마에서 산다는 것 내가, 후쿠시마에서 산다는 것 나에게, 후쿠시마에서 산다는 것은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고 심호흡하는 습관이 없어진 것 빨래를 밖에 말릴 수 없다는 것 텃밭에서 수확한 야채를 버린다는 것 내가 말하지 않아도 선량계와 마스크를 챙겨 나가는 어린 딸 모습에 가슴이 저린다는 것 저토록 눈부신 흰 눈을 만져볼 수 없다는 것 "힘내자 후쿠시마" 슬로건에 때때로 희미한 초조감을 느낀다는 것 어느새 호흡이 가늘어진다는 것 후쿠시마에 사는 것을 누군가가 묻지 않아도 "그래도 우리 지역은 아직 선량이 낮기 때문에..." 라고 설명해버리는 것 후쿠시마에는 후쿠시마(福島)와 FUKUSHIMA(알파벳)가 있다는 것 후쿠시마에 "그냥 살아"라고 하면 "사람의 생명을 뭘로 보는 거야!"라고 외치고 싶고 "피난하라"라고 하면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 우리도 사정이 있다고!"라고 외치고 싶어지는 것 6살짜리 내 딸은 결혼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걱정되는 것 후쿠시마에서 산다는 선택의 책임을 팽개치고 싶어지는 것 누군가의 희생과 노력으로 우리 일상이 유지되는 살얼음같은 "안전" 위에 산다는 당연한 현실을 날마다 뼈저리게 이해한다는 것 내일 이 집에서 멀리 떠날지도 모른다고 밤마다 생각하는 것 그래도 내일도 이 집에서 살 수 있기를 밤마다 비는 것 어쨋든 딸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것 그 검은 연기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 그래도 나름대로 나날을 즐겁게 살고 있다고, 누군가한테 이해 받기 원하는 것 날마다 화내는 것 날마다 기도하는 것... *** '수명을 연장하여 가동 중이던 / 후쿠시마 노후 핵발전소 / 반경 30Km 안 / 후타바마치 오쿠마마치 오오카마치 나라하마치...... // 이곳은 그들이 태어난 곳 / 이곳은 그들이 자란 곳 / 제1의 고향 제2의 고향 제3의 고향...... / 숨을 모아 결을 짠 삶의 터전 // 2011년 3월 11일 / 이 노후 핵발전소가 폭발했다. // 그리고 그들은 추방되었다. // 반경 30Km 밖 // 재난의 중심부에서 / 재난의 주변부로 // 안전부재의 중심부에서 / 안전부재의 주변부로 // 안전불감증의 중심부에서 / 안전불감증의 주변부로. // 이곳은 이제 버려진 땅 / 죽음의 중심부 / 그들은 버려졌다. /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으리." (졸시 '30Km' 중 일부) 한수원이 노후 핵발전소인 월성1호기를 폐쇄한다고 결정했다. 월성1호기는 2012년 30년 설계수명이 끝난 노후 핵발전소이다.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뒤 강화된 안전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등 여러가지 문제점이 드러났음에도 2015년 원안위는 10년 수명 연장 결정을 내렸다. 시민단체와 주민들이 낸 소송에서 1심 패소한 원안위가 항소하여 2심 진행 중에 있음에도 폐쇄 결정을 내린 이유 중의 하나로 '경제성 부족'을 들고 '월성1호기는 이미 적자발전소'라고 설명했다지만 핵발전소는 애초부터 '적자 사업'이라는 것을 알 사람은 다 안다. 게다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가 이미 증명하고 있듯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수도 있는 시설이다. 노후 핵발전소인 월성1호기 폐쇄 결정과 더불어 영덕과 삼척에서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하던 신규 핵발전소 건설 사업까지 중단한다고 하니 손실 보상 요구등 부정적인 발언도 일부 있지만 탈핵의 입장에서 일단 환영한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갈 길은 멀다. 위의 시는 '1인 대안언론'이라 불린다는 히로세 다카시 선생이 경주지진 이후에 '지진과 핵발전소'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자료를 바탕으로 엮은『땅이 운다』라는 책의 첫머리에 실린 시이다. 100여쪽의 얇은 책이지만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다. 일독을 권한다. 체르노빌도 후쿠시마도 사고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무도 사고의 끝을 모른다.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377 이것이 날개다 / 문인수
남태식
1557 2018-06-05
이것이 날개다 문인수 뇌성마비 중증 지체•언어장애인 마흔두살 라정식 씨가 죽었다. 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 친구들 여남은 명뿐이다. 이들의 평균수명은 그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 양 턱없이 짧다. 마침, 같은 처지들끼리 감사의 기도를 끝내고 점심식사중이다. 떠먹여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 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 0%•$#%ㅒ#@!$#*?(선생님, 저 죽을 때도 와주실 거죠?) 그녀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보를 터뜨렸다. $#•&@\•%, *&#……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입관돼 누운 정식씨는 뭐랄까,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 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다, 다 왔다, 싶은 모양이다. 이 고요한 얼굴, 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펼친 안심, 창공이다. *** 죽음의 날개만큼은 아니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이들에게 날개는 주어져야 한다. 최근 모 후보의 유세장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 대한 뉴스를 접하면서 마음이 참담하다. 충돌, 테러, 피습, 폭행 등의 막말이 과연 이 사건을 전하는 온전한 표현인지 의심스럽고 또 의심스럽다.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라는 문장에서 또 목이 멘다. 처음 이 시를 알게된 때로부터 지금까지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늘 울컥, 한다. 이 울컥은 자연스럽다. 당연한 반응이다. 아닌가?  
376 우음(偶吟) / 신경림
남태식
1568 2018-05-31
우음(偶吟) - 예산에서 신 경 림 아무리 낮은 산도 산은 산이어서 봉우리도 있고 바위너설도 있고 골짜기도 있고 갈대밭도 있다 품안에는 산짐승도 살게 하고 또 머리칼 속에는 갖가지 새도 기른다 어깨에 겨드랑이에 산꽃을 피우는가 하면 등과 엉덩이에는 이끼도 돋게 하고 가슴팍이며 뱃속에는 금과 은 같은 소중한 것을 감추어두기도 한다 아무리 낮은 산도 알 건 다 알아서 비바람 치는 날은 몸을 웅크리기도 하고 햇볕 따스하면 가슴 활짝 펴고 진종일 해바라기를 하기도 한다 도둑떼들 모여와 함부로 산을 짓밟으면 분노로 몸을 치떨 줄도 알고 때아닌 횡액 닥쳐 산 한 모퉁이 무너져가면 꺼이꺼이 땅에 엎으러져 울 줄도 안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근심어린 눈으로 사람들 사는 꼴 굽어보기도 하고 동네 경사에는 덩달아 신이 나서 덩실덩실 춤을 출 줄도 안다 아무리 낮은 산도 산은 산이어서 있을 것은 있고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알 것은 알고 볼 것은 다 본다 *** 그리하여 때가 되면 낮은 산은 화들짝 놀란듯 쏟아져 내려와 확 세상을 뒤집어 엎기도 하는 바, 낮은 산이야말로 사람살이 세상의 중심이다.  
375 몸살 / 이채민
남태식
1554 2018-05-24
몸살 이채민 집 잃은 미아들이 목 떨어진 칸나를 들고 우르르 몰려왔다 바다를 떠나온 모래알의 울음이 쓰다만 원고지 위로 몇날 며칠을 흘러 넘쳤다 짐작보다 오래 머물다 간 손님 *** 느닷없이 온 그 손님 나 아직 못 떠나보내고 있다. 올 때처럼 느닷없이 그 손님 언젠가 내게서 떠나겠지만 애써 못 떠나보내는 이들도 있다. 느닷없이 온 그 손님 끌어안고 남은 평생 몸살을 앓는 이들.  
374 빈집 / 기형도
남태식
1553 2018-05-12
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2주 전에 기형도 문학관에 갔었다. KTX 광명역 가까운 곳에 있어서 찾기는 쉬웠다. 첫걸음에는 지나쳤다가 한 번 더 돌다가 '빈 집'의 공간이 별도로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빈 집'은 내게는 늘 '빈 방'으로 읽혔고, 이 '빈 집'의 공간을 '빈 방'으로 변형해서 '빈 방'이라는 제목의 시도 한 편 썼었다. 아니 두 편이었던가. 2행시 한 편에, 그 2행시를 변형하여 늘려 쓴 자유시 한 편. 돌아가는 곳 끝자리 어둠 속에 위치해 있어서 기형도의 시를 읽으며 가다가는 지나치기가 쉬운 공간이었다. 그 때도 언뜻 드는 생각은 '빈 방'이었다. 지나쳤다가 돌아가 들여다보는데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에 '빈 집' 시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한 사람이 그 공간 입구에서 멈춰서서 시를 감상하고 있어서, 저 공간에 앉을 자리 하나라도 놓였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바로 돌아섰다. 오래 들여다보지 않고 바로 돌아서와서 나는 되려 지금까지도 그 '빈 집' 아니, '빈 방'을 생각하고 있다. 지금도 이 시가 생각나 다시 찾을 때 나는 '빈 집'이 아닌 '빈 방'을 찾았다.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요즘 논란이 되는 드라마(tvn '나의 아저씨')를 보다가 문득 이 구절이 생각났다. 몰래 도망가서 스님이 된 '애인'을 몇 십 년 동안 못 잊고 그리워하다가 그 사는 곳을 알고 찾아와 "돌아와 돌아와 안 돌아오면 이 절간 다 불 싸질러 버릴" 거라고 악다구니 애원을 퍼붓고 떠난 '옛 애인'을 보낸 뒤 스스로를 '빈 방'에 유폐시키는 장면을 보는 순간이었다. 이미 오래 전 '옛 애인'으로 떠나보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여전히 자신에게도 '애인'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을 느껴서였을까. 아님, 스스로 '옛 애인'이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그 때까지도 여전히 '애인'을 '옛 애인'으로 돌리지 못해 몇 십 년을 그리워하고 애달파하며 살아왔던 '그 사람'의 고통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을까. 내가 본 것은 다만 기거하던 방에 있던 물건들을 다 밖으로 꺼내고 그 방을 '빈 방'으로 만든 뒤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장면에 불과했다. "언제까지요" "몰라" 그 문답 뒤에 문을 닫고 들어가는 스님과 그 방문에 서둘러 자물쇠를 거는 장면 하나.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빈집에 갇혔다. 문을 잠그는 이와 갇힌 이는 분명 달랐지만 그것은 스스로 문을 잠그는 순간이었다. 내게는 오랫 동안 풀리지 않았던 비밀 하나가 풀리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역시 나만의 상상에 불과한 비밀이겠지만. '암종 같은 빈방' 나는 '빈 방'이라는 시의 마지막을 이렇게 풀었었다. '사내는' '암종같은 빈 방을 여럿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장님처럼' 사랑을 얻고 '장님처럼' 사랑을 하다가 그 사랑을 잃고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는 사내. '장님처럼' 와서 '장님처럼' 우리를 붙잡고 있는 사랑의 순간은 언제까지일까. '증오'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던 사랑마저 다시 '사랑'으로 돌아오는 순간들을 늘 맞고 있으니 내게는 '장님' 같은 사랑의 순간은 죽음까지 함께 가리라 생각되는데 여러분은 어떠신지. '암종같은 빈 방을 여럿 주렁주렁 달고' 살면서도 '임종'에는 이르지 않는 사랑을 나는 하고 있다고나 할까. 어쨋든 이 시의 화자가 이 시를 쓴 시인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기형도는 너무 일찍 떠났다. 등단을 포기하고 긴 습작 시절을 견디고 지내던 내게 동갑인 기형도의 어떤 시는 '흉내내기'를 부추겼는데 그 '흉내내기'를 미처 다 하기도 전에 기형도는 너무 일찍 떠났다. 그러나 떠났거나 말거나 나는 '빈 집'의 화자가 스스로를 유폐시킨 그 '빈 방'에 오래 지금까지 머물고 있다. '잃었던 사랑'들마저 다시 찾으면서. '장님처럼' 새로운 사랑을 얻고 또 '장님처럼' 사랑을 하면서. 하니 다시 말하자면 기형도는 떠났으나 떠나지 않았다. 기형도 앞에 선 나는 늘 '장님'이다.  
373 어느 날의 열차표는 역방향이다 / 이해리
남태식
1655 2018-04-01
어느 날의 열차표는 역방향이다 이 해 리 케이티엑스 타고 간다 역방향에 앉아 차창 밖을 내다본다 다가오는 것들은 모두 지나간 것이다 지나가는 것들만 보며 간다 보이는 게 한물간 것뿐인데 새로운 것을 찾아간다 같은 시간 같은 목적지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게 생이라면 나는 출발부터 누군가에게 밀렸음이다 불리한 여정 차별 받은 좌석, 이건 자연스레 피 돌리는 내 박동과는 다른 일 여학교 때 단체로 맞춘 교복 중 내 것에만 나 있던 흠집과도 다른 일 남들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등으로 세상을 더듬어야 하는가 내 자리 비좁고 속 울렁거려도 순방향으로 바꾸고 싶은 꿈 하나는 고속레일보다 뜨겁다 등으로 더듬는 길 덜컹거리며 가지만 도착하면 그뿐, 누가 타고 온 방향을 묻겠는가 *** 가끔은 일부러 역방향을 선택해서 앉는다. 남들 선택하지 않는 역방향을 애써 선택하는 것은 지나가는 것들을 더 오래 보고 싶어서이다. 걷지 않고 뛰던 때도 있었고, 옆도 뒤도 안 보고 앞만 보고 가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앞보다 지나가는 것들을 더 오래 두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으니 나도 나이를 먹어가나 싶다. 며칠 전에도 순방향으로 앉은 남들이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등 뒤에 두고 지나가는 것들을 앞에 두고 보면서 갔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풍경보다 오래 보면서 가는 풍경이 더 좋았다.  
372 저수지가 보이는 식당에서 잠시 / 허문태
남태식
1934 2018-03-31
저수지가 보이는 식당에서 잠시 허 문 태 잠시라는 것도 보인다는 것도 들판의 문제다 어디서부터 흘러왔는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헤어졌는지 문득 들판의 문제다 어느 봄날 민들레를 한없이 보고 있었던 것이 노란 나비가 앉아 있는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냇물의 소리는 부딪치는 소리라서 나보다 맑다고 생각했다 다 들판의 문제다 지금은 겨울 들판에서 저수지가 보였을 때 기러기는 저공비행을 한다 저수지가 보이는 식당에서 세네 명씩 네다섯 명씩 식탁에 둘러앉았다 일인용 식탁은 없고 사인용 식탁에 혼자 식사하는 경우는 있다 잠시 뭔가 보일 때 얼른 봐두자 꽃이 피는 곳은 어디고 나무는 어디로 걸어가는지 나는 아직 늙어서 손에 굳은살이 두틈한 사람들과 식사를 한다 괘종시계 초침소리가 잠시 멈춘다 *** '꽃이 피는 곳은 어디고 나무는 어디로 걸어가는지' 보는 당신은 이미 젊었다. 이미 늙었어도 젊었다. '겨울 들판에 저수지가 보'이면 일단 '저공비행을 ' 해야 한다. 저수지를 보고도 계속 날아가는 새는 아직 힘이 철철 넘치거나 진짜 생존할 본능을 잃었다. 지금 나는 힘 보다는 본능 쪽에 더 기울어 있다. '들판의 문제'에서 들판을 보면서도 들판이 아닌 나에 더 집중하고 있다면 당신은 늙었다. 젊었어도 이미 늙었거나 미리 늙었다.  
371 7월의 거울 / 황희순
남태식
1620 2018-03-30
7월의 거울 황 희 순 개미 떼에 끌려가는 무당벌레 포기한 걸까, 왜 반항하지 않나 누구 편을 들어줄까 개미굴로 끌려 들어갈 즈음 무당벌레가 지그재그로 줄행랑친다 장난삼아 앞을 막았더니 딱 멈춘다 광속으로 몰려온 개미 떼가 다시 끌고 간다 왜 참견했느냐 따지지 마라, 재수 없는 네가 재수 없는 인간을 만난 것일 뿐 살아있는 한, 길 막는 발 깨물고라도 잽싸게 도망쳐야지, 누굴 원망해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숨 끊어질 때까지 빡빡 기어가야지 먹거나 먹히거나, 이도 저도 아니거나 그들의 게임이 어떻게 끝났는지, 나는 모르는 일이다 *** 우리는 결코 게이머가 아니다. 우리는 신처럼 군림하는 자본에 속고 있을 뿐이다. 게임은 저들의 것이다. 저들이 우리들의 게임이라 부르며 붙여놓은 이 아닌 게임에서 우리가 할 일은 탈출하거나 무시하거나이다. 속지 마시라. 우리는 결코 게이머일 수가 없다. 진짜 게임은 저 가짜 신인 자본에게 신청할 일이다.  
370 그렇게 못할 수도 / 제인 케니언
남태식
1897 2018-02-07
그렇게 못할 수도 제인 케니언 건강한 다리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시리얼과 달콤한 우유와 흠 없이 잘 익은 복숭아를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개를 데리고 언덕 위 자작나무 숲으로 산책을 갔다. 오전 내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웠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은촛대가 놓인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벽에 그림이 걸린 방에서 잠을 자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어느 날인가는 그렇게 못하게 되리라는 걸. *** 쉰을 넘기면 그 이후의 삶은 덤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쉰을 넘겨 덤의 삶이 몇 년 계속되자 나는 신기하게도 행복해졌다. 내 주어진 삶이 쉰까지라는 생각의 시작과 이유가 무엇이었든 결과는 쉰을 넘기자 나는 이유 없이 행복해졌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어느 날인가는 / 그렇게 못하게 되리라는 걸.' 이 삶이 언제까지나 계속 되지 않으리라는 걸 나 역시 안다. 하니 이제와서 새삼스레 나는 내 삶에 어떤 과한 목적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크든 작든 욕심은 행복을 해칠 것이다.  
369 천장 / 최라라
남태식
1775 2017-11-20
천장 최라라 나는 저것이 나를 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실눈 살짝 뜨고 바라볼 때 저것도 나를 본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나는 아침마다 사타구니에 베개를 끼우고 저게 다 듣고 있는 줄 알면서도 신음소리를 낸다 저거 반응 좀 보려다가 나도 모르는 내 별꼴 다 보겠다 저거 핑계대고 별짓 다해 보겠다 한 번 보여주고 나서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날마다 하겠다 나는 이제 저것이 나를 안 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 ' 2017년 11월 15일 내 사는 포항 지진 이전에 천장은 다만 애써 김춘수였지만, 지진 이후에 천장은 자연스레 김수영이다. 눈을 감고 뜰 때마다 나는 이제 천장을 모른 척할 수가 없다.' 2017년 11월 15일 제가 사는 포항에 지진이 왔습니다. 진도 5.4 지진으로 작년 경주에 이어 두 번째로 진도가 높은 지진이랍니다. 진도는 경주의 1/ 4 수준이라는데 피해는 더 크답니다. 진앙지에서 멀지 않은 제가 사는 아파트도 여러곳에 지반 침하, 아파트 내외벽에 균열이 왔습니다. 그 날 이후 여진이 계속되고 있는데 어젯밤과 오늘 아침에도 진도 3.0 이상의 꽤 큰 여진이 왔다 갔습니다. 일요일이어서 오랫만에 목욕탕에 들렀다가 아파트 내 커피점에서 커피를 한 잔 하면서 시집을 읽고 가자 들고 나온 시집에서 이 시를 만났습니다. 처음 읽는 시는 아니었는데 확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더군요. 이전과 이후. 어떤 사건의 이전과 이후에 모든 것이 달라지는, 달라져 보이는 경험을 수없이 했습니다. 위에 적은 글은 이번 포항 지진 역시 내 삶에 이전과 이후라는 새로운 한 획을 긋겠구나 생각하는 순간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적은 것입니다.  
368 애국자 / 양진기
남태식
1504 2017-10-09
애국자 양 진 기 민소매에 반바지를 입은 허연 머리의 그가 절뚝거리는 자전거를 끌고 지하철에 승차하셨다 낮술에 불콰해진 얼굴로 좌중을 훑어보며 씨팔, 씨팔 주먹으로 출입문 창을 탕탕 쳤다 손을 권총 모양으로 접고서 앉아있는 가슴들을 겨냥해 또 다시 탕탕 이새낀지 이석긴지 빨갱이들 쓸어버려야 한다고 허공을 향해 주먹질 몇 번 발길질 하다가 제풀에 나동그라진다 통로에 세워진 그의 자전거 라디오에선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왕왕거리고 핸들에 꽂힌 태극기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여 묵념을 한다 벌떡 일어난 그는 정물처럼 앉아있는 승객들에게 호통을 친다 젊은 것들 정신 차려 대한민국 만세야 그는 때가 낀 손톱으로 겨드랑이를 벅벅 긁으며 한 끼 무료급식소가 있는 청량리역에서 내리셨다 그가 내리자 바닥에 깔렸던 눈길들이 수런거리기 시작한다 *** 2015년 7월 11일 한겨레신문 토요판 생명, 태산이 복순이 바다 돌아간 날 "국기에 대한 경례도 않고 돌고래는 떠났다." 시대상황이 반영된 감동이겠지만 이 문장은 멋지다. 과속과 역주행에 슬그머니 발을 거는 아름다운 정주행이다. 국기를 걷는 아침 - 졸시 '국기를 걷는 아침' 전문 오랫만에 국경일에 국기를 내걸었다. 국경일만 되면 애국심 고취 운운하면서 국기 게양을 종용하는 아파트 구내 방송이 몇 일에 걸쳐 여러 번 나왔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번번이 국기 걸기를 포기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우리집만의 일이 아니다. 거의 전 아파트가 어느 날 부터인가 갑자기 국경일에 국기를 내다걸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동안 국경일에 아파트 베란다에 내걸린 국기 보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다. 위의 시가 쓰여진 것이 2015년 10월이고, 위의 시가 쓰여진 신문기사가 실린 것이 시에 나온대로 2015년 7월이니, 국경일에 우리 아파트 각 가정에서 국기를 내걸지 않게 된 것은 훨씬 그 전으로, 추측하건대 아마 국경일에 도로가는 물론이고 아파트 내의 구내 도로까지 국기로 뒤덮이게 된 이후부터가 아닐까 싶다. 도로가야 국경일에 경축의 의미로 국기를 내거는 것이야 오래된 것이어서 조금 더 강화되긴 했어도 그러려니 했지만, 아파트 구내 도로까지 온통 국기로 뒤덮는 것에는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마뜩잖았으리라. 하니 어느 날인가부터 약속이나 한 듯 베란다에서 국기가 한꺼번에 사라졌겠지. 이번 긴 연휴 시작 전에도 역시 언제나처럼 국기 게양을 종용하는 구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멘트는 역시 언제나와 다름없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오랫만에 국기를 내다걸기로 했다. 국기를 걸려고 꽂아놓은 함에서 꺼내니 먼지가 풀쩍 일었다. 세상에 내걸지는 않았어도 가끔 먼지는 털어줄 걸. 내걸고 난 뒤 혹시나 싶어 내다보았더니 아파트 구내 도로에 걸린 국기는 반으로 줄었지만 몇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국기를 내다건 집은 거의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애국심이 어디 인위적으로 강제한다고 되는 것이든가. 국기를 걸어야 할 아침에 되려 국기를 걷는 아침이라는 시를 쓰고 2년만에 나는 국경일에 홀가분하게 정부에서 종용하는대로 국기를 내걸고 열흘 동안 두었다가 내렸다. 오늘이 한글날로 그 열흘의 마지막 날이다. (2017. 10. 09)  
367 꽃 / 김사인
남태식
1976 2017-05-06
꽃 김사인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 아마 그랬을 겁니다. 이왕 누운 것 좀 더 누워 있으려다가도, '새끼들 밥 해멕여 / 학교 보내야지' '일어나거라' 하는 외침에 평생 '꽃'이라는 이름으로 온전하게 불린 적도 없으면서, 제 잘 난 맛에, 제 잘 난 의무감에, 완벽한 딸, 완벽한 아내, 완벽한 며느리, 완벽한 어머니의 짐을 짐 아닌 '꽃'으로 생각하면서, 안 보는 곳에서 아이고 내 팔자야 투덜거리면서 일어나 '새끼들 밥 해멕여' 보낼라고 미처 다 추스리지도 못한 아픈 몸 끌고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을 겁니다. 그렇게 살았을 겁니다. 그렇게 살아서 가슴에 숱한 멍 들었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가슴에 진 멍울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정말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 겁니다. 보일 수 없었을 겁니다. 차마 보일 수 없었을 겁니다. 멍울 보여서 가슴 아파 할 어머니, 아버지, 내 새끼, 아이고 내 새끼, 그리고 동기(同氣)들, 눈에 밟히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였을 겁니다. 가슴에 진 멍울 누군가에게 넘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 겁니다. 혼자 오롯이 지고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고 갔을 겁니다. 이리하여 가고 난 뒤에야 뒤늦게 우리는 부음을 듣습니다. 아내의 친동기는 아니지만 아내가 친동기처럼 가깝게 지내던 동기의 부음을 듣고 조문을 다녀왔습니다. 처음 부음을 듣고 긴가민가 하다가 사실을 확인한 뒤에 갑작스레 울다가 소리치다가 혼잣소리하다가 또 울면서 넋을 놓는 아내를 보아서이기도 했지만, 마지막 가는 길에 미련은 안 남기게 해야지 하는 마음에 어쩔 수 없이 돌아와야만 하는 애매한 상황에 있는 아내를 구슬려 하룻밤을 다른 동기들과 함께 지내고 마지막 가는 길까지 배웅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아내는 먹는둥마는둥 허겁지겁 과일을 잘라 몇 조각 먹더니 저녁도 거르고 안방으로 들어가 누웠습니다. 나도 밀린 신문을 읽고 티브이를 보는둥마는둥 멍하니 앉았다가 평소보다 많이 이른 시간에 잤습니다.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아내의 곁을 지키기는 했지만 나 역시 심사가 복잡했지요. 그리고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 여전히 한밤중입니다. 한 세 시간여이긴 해도 자고 나니 그런대로 정신이 이제 온전히 현실로 돌아온 듯하여 시집을 펼쳤다가 이 시를 만났습니다. 김사인의 '꽃'. 평소 같았으면 '그저 예찬'했을 '명시'로 읽었을 시였지만, 복잡한 심사를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여서인지 슬그머니 부아가 일었습니다. 부아가 일어 '모진 비바람에 / 마침내 꽃이 누웠다 //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 들창을 미느니 // 살아야지 // 일어나거라, 꽃아 / 새끼들 밥 해멕여 / 학교 보내야지' 하는 마음 이제 다 놓고 가거라, 꽃아, 이제 가거라, 꽃아 하면서 첫 연을 마지막 연 뒤에 덧붙여 한 번 더 '모진 비바람에 / 마침내 꽃이 누웠다' 하고 읽고, 그래 이제 가거라, 꽃아, 잘 가거라, 꽃아, 고생했다, 꽃아, 한 번 더, 쓰기에 '꽃'이지 '꽃'이 아닌 아내의 동기의 '본 이름'을 부르며, '꽃' 대접도 않으면서 '꽃'으로 부르는 이들을 향한 부아는 놓아 두고, 보내는 인사를 했습니다. 이런 부아는 시인의 다른 시 '경주 이씨 효열비' '화진'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봄바다' 등에서도 일었던 부아와 거의 같은 부아입니다. '낭만'이 '폭력'이 되기도 하는 지경. 안방에서 마른 기침 소리가 들립니다. 자는 줄로만 알았던 아내도 벌써 깨어나 일어나지만 않은 채 다시 잠 못들고 있나 봅니다.  
366 이 모든 일 이전에 겨울이 있었다 / 황인찬
남태식
1957 2017-04-30
이 모든 일 이전에 겨울이 있었다 황 인 찬 차에서 눈을 뜨면 바깥이 보이지 않는다 창을 닦으면 살짝 보이고 깜빡 잠들었구나 밖은 국경 너머 눈의 고장인 듯 아닌 듯 무인지경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저 새하얀 눈은 언제 다 내렸을까 겨울도 아닌데 같이 웃고 떠들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원래 없었지 또 바깥은 보이지 않는다 창을 닦으면 또 살짝 보이고 눈은 오지 않는다 지금은 겨울이 아니니까 이제 겨울은 없으니까 예전에는 겨울이 있었다 국경도 있었다 안도 있고 밖도 있고 뛰어노는 애들도 있고 좋았다 그때는 눈도 터널도 나라도 다 있었으니까 그런 겨울도 있을 수 있었다 그런 날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저 새하얀 것들은 무엇일까 저걸 뭐라고 부르나 나는 대체 무엇으로 창을 닦은 걸까 또 바깥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모두 하얗다 보이지 않는다 눈은 내리지 않는 것이다 겨울은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인 것이다 그렇다면 저 새하얀 것들은…… 공포에 질려 있을 때 누군가가 창밖에서 문을 두드린다 그렇게 써 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출근길, 터널을 벗어나면 요즘은 늘 만나는 것이 먼지눈입니다. 먼 곳에서 먼지눈이 내립니다. 하얗게 내리는 것이 눈 같아서 처음엔 이 봄에 웬 눈, 그러다가 그걸 먼지눈이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번번이 또 깜빡 잊고 눈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비가 온 뒤 만나는 아침길은 청명한 느낌이어서 시야가 쨍 하고 맑아 보였었는데, 요즘엔 비가 온 뒤 만나는 아침길도 뿌옇게 시야가 흐립니다. 일단 시인의 손을 떠난 시는 독자의 몫이라는 것 다시 느낍니다. 시인이 무엇을 상상했든 독자인 제 상상과는 무관합니다. 어쩌다가 같을 때도 있기야 하겠지만요. 이런 식입니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 수업을 하러 왔다 애들이 아직 오지 않아 큰 일이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 아무도 하지 않는 대답이 있다 아무도 앉지 않는 책걸상도 있다' '나는 출석부를 읽는다 / 하얗게 비어 있는 출석부다'(이상 황인찬의 시 '역사 수업' 일부) 시인이 이런 상상을 했든 안 했든 나는 이 시에서 '안산'과 '단원고'와 '2학년생들'을 떠올립니다. 아직 세월호는 추억의 장으로 넘길 수 없는 기억이고 현재라서 어떤 비슷한 이미지만 나와도 자동적으로 떠오릅니다. 하니 시의 주인은 결국 독자가 되는 셈입니다. 재난시대여서인가요. 시인이 그려내는 정황만으로 나는 또 다른 재난상황을 떠올립니다. 핵폭발 이후의 지구. 먼지, 먼지눈, 재. 내리고 날리고 쌓이고. 핵폭발을 상상하는 것, 핵폭발 이후의 지구를 상상하는 것은 어쩌면 상상이 아닙니다. 이미 재난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큰 재난을 막기 위한 방편을 상상해야 할 때입니다.  
365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 폴레트 켈리
남태식
4826 2017-04-25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ㅡ 피해 여성이 피해 여성에게 주는 편지 폴레트 켈리(가정 폭력 생존자, 여성운동가)(신혜수 번역, 정희진 수정)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제 생일도 아니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우리는 처음으로 말다툼을 했어요. 그가 던진 수많은 잔인한 말들에 저는 정말 가슴이 아팠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미안해하는 것도, 그리고 그가 한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우리의 기념일도 아니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그는 저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어요. 마치 악몽 같았어요. 현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죠. 오늘 아침 깨어났을 때 제 몸은 온통 아프고 멍투성이였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할 거라는 걸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어머니의 날'도 아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그는 저를 또다시 때렸어요. 이제까지 어느 때보다 훨씬 심하게요. 만약에 그를 떠난다면, 저는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제 아이들을 돌보나요? 돈은 어떻게 하고요? 저는 그가 무섭기도 하지만 그를 떠나기도 두려워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할 거라는 걸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답니다. 제 장례식 날이었거든요. 지난밤 그는 결국 저를 죽였습니다. 죽을 때까지 때려서요. 만약에 그를 떠날 만큼 용기와 힘을 냈다면, 저는 아마 오늘 꽃을 받지는 않았을 거예요. *** 이 시는 최근 들어 스스로를 평화학, 여성학 연구자로 부르며, 약력에서 학문 간 경계를 넘나드는 공부와 글쓰기를 지향한다고 하는 정희진이 쓴 '아내 폭럭'에 대한 연구서인 <아주 친밀한 폭력>의 드는 문에 실린 시입니다. 이 시를 읽고 나는 엄청난 충격을 느꼈는데, 문 안으로 들어서서 나올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심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시의 감상은 이로써 충격 한 단어로 충분하지만 굳이 소개하는 것은 이 시와 더불어 정희진의 책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란을 찾으시는 분들께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