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든 병


   허수경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듭니다

   가엾은 등불 마음의 살들은 저리도 여려 나 그 살을 세상의 접면에 대고 몸이 상합니다

   몸이 상할 때 마음은 저 혼자 버려지고 버려진 마음이 너무 많아 이 세상 모든 길들은 위독합니다 위독한 길을 따라 속수무책의 몸이여 버려진 마음들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아프고 대책없습니다 정든 병이 켜놓은 등불의 세상은 어둑어둑 대책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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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다'는 나이에 이르지 못하고 고인이 되어버린 시인들의 시는 목숨을 버리기 전 미처 세상에 다 내놓지 못하고 넘겨버린 유고 같습니다. 허수경의 오래된 시 '정든 병'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는지 주변에서 투병하는 지인들을 많이 만납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 전에는 죽음은 막연했으나 그 막연한 죽음이 일없이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한데 죽음의 고비를 한 번 넘기자 신기하게도 되려 죽음이 친근해졌습니다. 물론 병도 친근해졌습니다. 남은 평생을 약을 먹으면서 정기적으로 의사와 대면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되려 편안해졌습니다. 이 마음 나도 모릅니다.

   주변에서 진짜 투병생활에 들어간 지인들 중에는 몸의 병으로 마음의 병까지 얻어 고생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분분의 지인들은 병이 곧 삶인 양 투병생활을 일상생활처럼 이어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다행스럽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 과도한 사고의 결과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투병을 일상처럼 이어가면서 좀 더 오래 볼 수 있었으면 더 좋겠다는 바램은 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