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쁜 시인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 봐.
민중 시인 K는 유럽을 돌며
분수와 조각과 성벽 앞에서
귀족에게 착취당한 노동을 생각하며
피 끓는 분노를 느꼈다고 하던데

고백컨데
나는 유럽을 돌며
내내 사랑만을 생각했어
목숨의 아름다움과 허무
시간 속의 모든 가변에
목이 메었어.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며
눈물을 흘렸지
아름다운 조각과 분수와 성벽을 바라보며
오래 그 속에 빠지고만 싶었어.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 봐.
곤도라를 젓는 사내에게 홀딱 빠져
밤새도록 그를 조각 속에 가두려고
몸을 떨었어.

중세에 부패한 귀족이 남긴
유적에 숨이 막혔어
그 아름다움 속에
죽고 싶었어.




이 땅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흑과 백이 분명해야하는데

 그 경계가 자꾸  희미해진다

머리카락이 희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지혜롭게 되었다는 것이고 어찌보면 육신의 노쇠을 뜻하는 것인데

나이가 들수록 흑과 백을 구별 못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나

확실한 건 흑백을 다 사랑한다는 것이다 -김재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