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1호...
   2019년 09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 오늘방문자 : 
    259
  • 어제방문자 : 
    594
  • 전체방문자 : 
    410,451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205 달빛과 동침하다/박해자
임술랑
2227 2012-04-20
달빛과 동침하다 박해자 잠이 오지 않아 문을 여는 순간 45도 직사각으로 비스듬히 누운 그 반갑게 맞아주며 훤하게 누워 있다 한눈에 반해 덥석 품에 든다 환한 팔로 나를 포근히 안아주는 그 당신이 나를 찾으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내가 환해지는 밤이다 [2011낙동강] ............................................................................................................................................................. (감상) 대저 物이란 그것도 거친 바탕질 따위 상대자로서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인간은 거의 괘념치 않는 것이다. 그것은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는 여유분의 맘이 부족함 때문도 있어리라.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러한 염려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 틈으로 들어 온 달빛과의 교감을 통해 物에 대한 낯선 인식을 깨고 있는 것이다 .(임술랑)  
204 꽃 피는 철공소 / 백상웅
김재순
2823 2012-04-16
꽃 피는 철공소 / 백상웅 철공소 입구 자목련은 과연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망치질 소리가 앞마당에 울려퍼지면요 목련나무 우듬지에 남은 살얼음에 쨍 하고 금이 가요 내 친구 스물일곱살은 강철을 얇게 펴서 봄볕에 달구죠 한잎 한잎, 끝을 얌전하게 오므려 묶어서 한송이 두송이, 용접봉 푸른 불꽃으로 가지에 붙여요 내 친구 스물일곱살의 팔뚝에도 꽃이 벙글거려요 팔목에 힘을 줄 때마다 자목련꽃이 팽팽하게 열리죠 자색화상 위에 푸른 실핏줄이 돋아나요 그걸 보고 여자들이 봄날처럼 떠나기만 했대요 용접봉을 손아귀에 쥔 내 친구 스물일곱살 오늘은 철공소 마당에서 철목련을 매달아요 가지마다 목련꽃이 벌어져서 햇볕을 뿜어대죠 꽃 핀 철문은 허공에 경첩을 달고 식어가고 있고요 밤에는 하늘에다 꽃잎을 붙이느라 잠도 못 자요 20대는 어쩌면, 꿈을 이루고자 하는 것보다 이성에 대한 열망이 더 강할 수도 있지요 여자들이 떠나고, 폼나는 삶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낮에는 마당에 있는 나무에 꽃을 매달고, 밤에는 하늘에 꽃을 붙이느라 잠도 못자는 것은 친구, 용접공인 자신을 이토록 아름답게 생각하는 친구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 살아가는데 필요한 힘은 많은 그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 하나, 자신을 인정하고 알아주는 한 사람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도 그 한 사람을 더듬어 봅니다 --김재순--  
203 에밀레, 에밀레/서지월
임술랑
3531 2012-03-30
에밀레, 에밀레 서지월 서라벌 깊은 밤에 솥뚜껑이 우는구나 에밀레 -, 에밀레 - 어미의 간장 녹아서 발목 없는 귀신 천 리를 가듯 하늘엔 달이야 하나인데 부뚜막 위의 솥뚜껑, 부엌문 열고 나와서 눈물 흘리는 달빛 사이로 찢어진 천 갈래 만 갈래의 풀벌레 울음소리 찌르르 찌르르 문살을 훑고 누가 이 밤중 홀로 깨어 길을 가는가 부엌 아궁이 재도 사그라진 밤 솥뚜껑 저만이 허기진 배 움켜쥐고서 에밀레 -, 에밀레 - 토함산 그늘 아래 누가 만파식적 불어제껴 동해의 차운 물 덥혀 끌어올 수 있을까 어미는 절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 밤 형체 없는 아기가 부뚜막 위에 걸터앉아 솥뚜껑 잡고 우는구나 애끓는 쇳물 속으로 들어간 아기가 오늘 밤은 어미 없는 부엌에 찾아와 밥 달라고 울어쌓는구나 [유심] 2012년 3/4월호 .................................................................................................................................................................................................................................................... (감상) 수시로 행주로 훔치고 닦았던 어머니의 솥, 솥뚜껑. 그 무쇠 표면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던 어릴 때의 부엌. 밥이라도 실컷 먹을 수 있기를 어머니는 솥을 닦으며 빌었을 것이다. 경주박물관 성덕대왕신종의 그 무쇳덩이가 내는 에밀레 소리. 서지월의 상상이 구수한 밥 내음으로 어린 나를 이끈다.(임술랑)  
202 저 못된 것들 / 이재무
김재순
1921 2012-03-26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 나를 꼬드기네 어깨에 둘러맨 가방 그만 내려놓고 오는 차 아무거나 잡아타라네 저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 나를 충동질하네 멀쩡한 아내 버리고 젊은 새 여자 얻어 살림을 차려보라네 저 못된 것들 좀 보소 흐르는 냇물 시켜 가지 밖으로 얼굴 내민 연초록 시켜 지갑 속 명함을 버리라네 기어이 문제아가 되라 하네 저 밝은 햇살, 저 붉은 매화는 저기, 저만치서 희희덕거립니다. 젊은 남자와의 로맨스에 내 마음이 혹할 수 있을까 내 마음의 꽃잎을 벌어지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봄날이 오히려 우울합니다. -김재순-  
201 글쎄, 목련꽃 한 송이가/김은령
임술랑
2012 2012-03-14
글쎄, 목련꽃 한 송이가/김은령 수타사 요사채에 우중충한 사람 여럿 모여있었는데요 저마다 수만 가지 생각들을 품고 수만 가지 알력을 겨루며 앉아있었는데요 마당 가 한 그루 목련 나무에서 봉긋한 꽃송이 하나가 공양주 보살 손에 살랑살랑 따라와서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맑은 차 주전자 속으로 살폿 들어갔다 이겁니다 아이쿠, 저 여린 꽃잎 다 짓무르겠다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그 꽃송이 스르르 저를 다 열어젖히고는 달짝지근 젖 내음 뿜어내는데 아 글쎄, 그 순간 방안 가득 뻗쳐있던 그 수만 가지 알력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 꼭 목련꽃 피는 소리로 들려 사람들 뱃속에 찰랑찰랑 꽃 피고, 마당 가득 꽃 피고 물결, 꽃물결 골목 밖으로 찰랑찰랑 넘쳐서는 세상도 덩달아 봄이 됩디다 피어남도 좋지만 순절도 참 괜찮다 싶데요 시집『차경借憬』 2012 황금알 ............................................................................................................................................................... (감상) 목련만큼 기쁜 꽃은 없습니다. "우중충한"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꽃, 그 꽃 보여주려고 또 봄이 오려나 봅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 "스르르 저를 다 열어젖히"는. 이처럼 가뜬한 세상으로 이끌리고 싶습니다.(임술랑)  
200 논산 백반집 / 문태준
김재순
2617 2012-03-13
논산 백반집 / 문태준 논산 백반집 여주인이 졸고 있었습니다 불룩한 배 위에 팔을 모은 채 고개를 천천히, 한없이 끄덕거리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며 왼팔을 긁고 있었습니다 고개가 뒤로 넘어가 이내 수양버들처럼 가지를 축 늘어뜨렸습니다 나붓나붓하게 흔들렸습니다 나는 값을 쳐 술잔 옆에 놔두고 숨소리가 쌔근대는 논산 백반집을 떠나왔습니다 손님 대신 밀려온 졸음이지만 달콤합니다 여주인의 몸은 무거움에서 벗어나 나붓나붓 흔들립니다 시인은 웃거나 소리쳐 깨우지 않습니다 그 고달픔을 동정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편안한 잠을 잠시라도 지켜줍니다 모든 사랑의 기본은 이런 것이겠지요 이런 시인을 사랑합니다 / 김재순  
199 채소밭에서/정대호
임술랑
2668 2012-03-02
채소밭에서/정대호 채소밭에 쪼그리고 앉아 상추와 배추를 뽑는다. 먼저 뽑는 기준은 조금 더 자랐고 조금 더 튼튼해 보이는 것이다. 조금 더 무성해 보이는 놈은 조금 더 욕심이 많은 것 같고 옆에 있는 것들에서 물 한 방울이라도 더 빼앗아 먹은 것 같고 제 혼자만 잘난 체 으스대는 것 같고 그놈을 뽑아야 바로 옆에 기 한 번 펴지 못하고 파리하게 비실거리는 것도 다음에는 조금 더 튼튼하게 자랄 것 같고 잘난 놈 그늘에 고개 한 번 내밀지 못하던 것들도 가슴 펴고 당당하게 바로 설 것 같고 바로 서서 제 말도 떳떳하게 해볼 것 같고 상추는 상추끼리 배추는 배추끼리 끼리끼리 잘 어울릴 것 같고 잘 어울려 재미나게 살 것 같고. 2012 『내가 뽑은 나의 시』 한국작가회의 ............................................................................................................................................................... (감상) 욕심껏 많이 먹고 웃자란 상추는 일찍 뽑히나 봅니다. "그놈을 뽑아야" 허허 ~, 좋은 자리라고 줄창 꿰차고 내놓지 않아도 뽑아야 합니다. 어지간히 해 먹었으면 내 놓을 것이지 쫓겨나야 되겠습니까. 옆자리도 좀 돌아보고 물러 설 줄도 알아야 안 되겠습니까. 작금 대선(2012.3.4)을 앞 둔 러시아 정국이 그것입니다. 푸틴이 8년을 집권하고도, 4년을 총리로 물러나 있다가(연임 금지 규정에 걸려서), 다시 대권을 쥐겠다고 나선 것 말입니다. 물론 그가 집권했을 때 러시아 주체성 확립에 어느 정도 공이 있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내가 좀 했으면 너도 좀하고 또 다른 사람도 대통령 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꼭 나만을 고집해야 되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잘 났다고 생각해도 더 잘 난 사람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다수가 돌아가며 다스려 볼 때 다양한 사회발전이 되지 않겠습니까. 한 자리 꿰찼다고 죽을 때까지 물려주지 않는다면 그게 미개사회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언젠가는 뒤집힐 북한은 말도 안 되는 현실이고요. 이 시에서 시인은 함께 어울려 잘 사는 법을 일러주고 있습니다.(임술랑)  
198 풍기아지매 / 안상학
김재순
2988 2012-02-14
풍기아지매 / 안상학 밤실 풍기아지매 이름은 신몽주래요 돌아가시고서야 처음 이름을 알았지요 영안실 밖 알림판에 망 신몽주 그 예쁜 이름 옷고름에 묻어두고 그저 풍기아지매로 평생을 살았지요 소실로 시집살이 안채에서 하룻밤 정도 없이 바깥채에서 그래도 배 아파 가며 아들 낳았지요 그나마 그 아들 소식 없이 객지 떠돌다 마흔 넘어 돌아와 장가들고 손주도 낳아 한 이태 사람 사는 것처럼 사는가 싶더니 박복한 인생이란 그런 것인가요 더운 여름날 홀연 평생 묻어둔 이름 앞세우고 참으로 쓸쓸한 빈소를 차렸더이다. 상주는 달랑 하나지만 곡소리는 열 상주이더이다. 풍기아지매 울 아지매 죽어서도 남촌아제 옆에 못 가고 먼발치서 봉긋한 저승살림 차린 풍기아지매요. 소학교 여선생 출신, 면장집네 작은할머니 나 그 할머니를 얼마나 동경했는지 몰라 골목의 잡풀들은 그 할머니 때문에 양산을 펼친 듯 활짝 꽃 피웠는지도 몰라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땟국물이 흐르던 그 마을에서 어린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고 지금도 궁금한 그 할머니의 안부, 그 할머니의 삶 그것이 비록 허무한 것일지라도... 어차피 다 허무한 것이니...--김재순--  
197 만행卍行 / 차영호
임술랑
2224 2012-02-11
만행卍行/차영호 생선가시가 목에 걸렸다 목젖 뒤에서 가치작가치작 똥끝 타는 노루새끼 한나절 동당거렸다 크악 켘,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졌다 미늘 없는 직침直針으로 더 큰 고기 낚겠다고 너른 세상으로 튕겨나간 것일까 귓구멍도 없는 그 바늘 너불너불 해어진 내 속 찍어매려고 더 깊은 곳으로 몸피 가라앉혔는지도 모르지 시집『바람과 똥』2012 아르코 .................................................................................................................................................................................................................................... (감상) 알량한 먹이를 바늘끝에 꿰어 잔챙이 물고기를 울리던 그 가시(낚시바늘)가 내 목에 걸렸다. 버둥대는 나는 꼴 좋은 신세가 되었다. 너도 내 주둥일 꿰어 둘머쳤으니, 내가 찌르는 바늘 맛을 보아라. 槍劍이 水陸을 넘나든다. 허허! 재밌어요 ^^ (임술랑)  
196 눈/서정주
임술랑
2909 2012-01-19
눈/서정주 그때에도 나는 눈을 보고 있었다. 솔나무 나막신에 紅唐木 조끼 입고 생겨나서 처음으로 歲拜 가는 길이였다. 그때에도 나는 눈을 보고 있었다. 萬歲 부르다가 채찍으로 얻어맞고 학교에서 쫓겨나서 帽子 벗어 팽개치고 홀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였다. 그때에도 나는 눈을 보고 있었다. 風月 팔아 술 마시고 좁쌀도 쌀도 없는 주린 아내 곁으로 黃土재의 언덕을 넘어가는 길이였다. 시방도 나는 눈을 보고 있다. 거느린 것은 한 떼의 바람과 形體도 없는 몇 사람의 亡靈 뿐, 이제는 갈 데도 올 데도 없는 미련한 미련한 韻律의 實務曺長이여. 눈을 보러 눈을 보러 온 것이다. 나는 해마다 내려서는 내 앞에 쌓이는 하이얀 하이얀 눈을 보려고 까닭없는 이 땅을 다니러 온 것이다. ............................................................................................................................................................................................................................................................ (감상) 미당이 일군 운율은 가히 마약과도 같다. 읽고 또 읽어도 그 律은 죽지를 않고 오히려 맘 속에 녹아서 노래로 부활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7.5조 가락이 숨어 한몫 하는 것도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미당의 시적 감각과 시적 상상이 그 중요한 힘일 것이다. "그때에도 나는 눈을 보고 있었다."라고 시간대별로 반복되는 이 시는 미당의 생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 같기도 하다. 온 천지가 순백의 환한 세상을 만드는 눈을 보고 경이에 찼으나 이내 녹고마는 허무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까닭없는 이 땅을 다니러 온 것이다."라고 귀결되는 슬픔을 읽게되는 것이다.(임술랑)  
195 눈이 내린다 / 박영근
김재순
2398 2012-01-09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나는 평양에 가겠다 공단거리 지쳐버린 사원임대아파트에 핏빛으로 몰려 오는 눈보라로 가겠다 일용직으로 떨어져 일용직으로 떨어져 바라보는 인원감축합의문 벌겋게 찍힌 노동조합 그 이름으로 가겠다 거리엔 백화점과 술집들이 온통 불빛들을 터트리고 그 불빛 속에 내 눈물속에 비치는 외줄기 낭떨어지길로 가겠다 이것이 노여움인지 사랑인지 나는 모른다 쌀이 좋다는 재령평야도 눈이 많다는 국경 마을도 나는 모른다 이 눈물이 아픔인지 비굴함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바람 속에 저렇게 떨고 있는 눈송이들을 위해 시커멓게 밟혀버릴 눈송이들을 위해 단 한번만이라도 단 한번만이라도 신경림 시인은 이 시를 읽으면서 속으로 몇 번인가 울며 최상의 시란 어떤 것인가 생각했다고 합니다 조정래 선생은 아리랑을 집필하면서 일본 침략기 때 죽어간 400만 우리 동포를 원고지 칸칸이 채웠다고 합니다 '작가 정신' 의 ㅈ 도 모르면서 나는 무얼 詩 라고 주장하며 쓰고 있는지... - 김재순-  
194 황태덕장에 내리는 눈/임연규
임술랑
2601 2011-12-25
황태덕장에 내리는 눈/임연규 이승의 곡기穀氣를 어쩌지 못하고 있구나. 하늘 향해 일제히 벌린 입 한낮 청빈한 겨울 햇살만 입에 가득 고이고 오늘도 지척을 알 수 없이 퍼붓는 폭설이 게걸한 네 입에는 밥이 되지 않는구나. 우리는 이렇게 살았구나. 일생 먹잇감을 쫓다 붙잡힌 불경죄로 대관령 산중에서 내 죄를 내가 아는 줄줄이 형을 받고도 닫지 못하는 입 끝내 어쩌지 못하고 있구나. 시집『산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2008 ................................................................................................................................................................................................................................................ (감상) 우리가 입에 당기는 맛과 허기를 어쩌지 못 하듯 깨끗한 바닷속을 헤엄치는 명태도 그 게걸스런 입이 욕이 되어 대관령 춥디 추운 벌판에 입을 꿰어 형벌을 받고 있으니. 오죽하랴. 내 죄! 내가 알렸다.(임술랑)  
193 진눈깨비 / 기형도
김재순
3000 2011-12-19
진눈깨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비도 눈도 아닌 진눈깨비, 그래서 더 빨리 사라지는 진눈깨비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던 젊은 엘리트, 기형도 시인은 진눈깨비를 보며 왜 이토록 절망하는 것일까요 숨이 막히는 현실에서 몸부림을 쳤던 그는 구호적인 시를 쓰지는 않았지만 저항 시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불행하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고 눈물 흘리는 젊은 기형도 시인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의 어깨라도 감싸주고 싶습니다. -김재순-  
192 노래-경주남산 / 정일근 image
이종암
2479 2011-12-13
노래 -경주남산 -정일근 그리운 그 노래 나는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아주 아주아주 오랜 옛날 황룡사 탑 그늘에 기대어 서서 당신은 그 노래 들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나는 아직 그 노래 듣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탑도 사라지고 절과 사직도 사라져 고즈넉한 가을 절터와 당간지주만 남아 쓸쓸한데 나의 눈과 귀는 돌 속에 묻혀서도 여전히 천 년 신라쪽으로 속절없이 열려 있습니다 언제쯤 노래를 들려주시렵니까 그 언제쯤 서라벌 쪽에서 부는 바람 편에 당신의 안부와 주소가 적힌 길고 긴 사랑의 편지를 보내 주시렵니까 그 편지 받을 수 있다면 비파암 진신석가께서 낮잠에 들면 바위 위에 벗어 둔 가사를 훔쳐 입고 어느 하루 당신을 만나러 저잣거리로 내려가고 싶습니다 내려가 그리운 당신 노래 한 소절만 들을 수 있다면 다시 돌 속에 잠겨 흘러 갈 오랜 잠이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 노래 허리에 감고 또 한 천 년 무작정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정일근 시집『경주 남산』(문학동네,2004) -------------------------------------------------------------------------------------------------- 경주 남산은 우리나라의 보물산입니다. 산 전체가 문화유적의 천연 야외 박물관입니다. 유네스코에서도 국제문화유산으로 등재해놓았습니다. 경주 남산을 제재로 한 현대시만 해도 여러 수백 편에 이를 것입니다. 우리나라 시인 가운데 정일근 시인만큼 경주 남산을 많이 노래한 시인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시집 한 권이 아예『경주 남산』입니다. 시인은 노래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 노래는 대부분 환희의 찬가(讃歌)가 보다는 눈물의 비가(悲歌)가 많습니다. 시인은 어쩌면 이 비가를 한 평생 불러야 하는 운명의 천형(天刑)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경주에 가고 싶거나 경주 남산을 오르고 싶은 밤이면 나는 정일근 시인의『경주 남산』펼쳐듭니다. “그리운 그 노래”로 시작되고 있는 정일근의「노래」는 신라 천년의 유적과 역사가 한 축이 되고, 그리운 당신이 한 축이 되어 씌어진 애절하고도 가슴 저린 슬픈 연가(戀歌)입니다. 시인이여, 단언컨대 그 “그리운 당신 노래”를 결코 듣지 못할 것입니다. 끝도 없이 그 “그리운 노래”를 찾아 시인은 길 찾아 나서고 노래를 불러야하겠지요. 독자인 우리는 시인이 부르는 이 슬픈 노래를 들으며 다만 고개 들어 먼 데를 바라볼 뿐입니다. 아, 사람이 가고 세월이 가도 노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시인의 아름답고 슬픈 노래는 불멸(不滅)입니다. -이종암(시인)  
191 불타는 나무/이은봉
임술랑
2964 2011-12-04
불타는 나무 이은봉 불타는 나무리! 허공 떠도는 바람들 불러 모아 반야심경 외게 하누나 나무는 불타리! 공중 헤매는 제비들 불러 모아 천수경 외게 하누나 머리칼 풀어헤친 채 온몸 가득, 푸른 하늘 빨아들이고 있는 나무여 그대 이미 불타거늘! 땅에 내린 뿌리 너무 얕아 여태 절 믿지 못 하누나. 시집『책바위』2008 ..................................................................................................................................................................................... (감상) 나무(南無)는 범어로 歸依한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나무(木)는 그 이름부터 오묘한 것이다. 이제 시인(이은봉)이 나무는 불타(佛陀)므로 결국에는 부처라는 말을 하고 있다. 나무는 자기 몸을 태워 남을 따뜻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무는 불타이고 불타는 나무라는 것이다. 나는 여태 그걸 모르고 날카로운 낫으로 자르고 자귀로 찍었으니 부처는 얼마나 아팠을까. 이후 내 주변에 심겨진 나무는 모두 부처님으로 모실 것이다. (임술랑)  
190 붉은 밭 / 최정례 imagemovie
이종암
3484 2011-12-02
붉은 밭 -최정례 깜빡 잠이 들었었나 봅니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푸른 골짜기 사이 붉은 밭 보았습니다 고랑 따라 부드럽게 구불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풀 한포기 없었습니다 그러곤 사라졌습니다 잠깐이었습니다 거길 지날 때마다 유심히 살폈는데 그 밭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엄마가 내 교과서를 아궁이에 쳐넣었습니다 학교 같은 건 다녀 뭐하느냐고 했습니다 나는 아궁이를 뒤져 가장자리가 검게 구불거리는 책을 싸들고 한학기 동안 학교에 다녔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릅니다 타다 만 책가방 그후 어찌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밭 왜 풀 한포기 내밀지 않기로 작정했는지 그러다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끔 한밤중에 깨어보면 내가 붉은 밭에 누워 있기도 했습니다 -최정례 시집『붉은 밭』(창작과비평사,2001) ---------------------------------------------------------------------------------------------------------- 위 시에서 '붉은 밭'은 "풀 한포기 내밀지 않기로 작정"한 기억 속에 있는 상처의 굳은 딱지로 남은 황무지다. "육체는 감옥이라서"(「비행기 떴다 비행기 사라졌다」) 그 붉은 밭은 내 몸에 구불거리며 계속 살아있다. 이런 황폐화된 마음속의 붉은 밭이 시인으로 하여금 끝없이 언어를 만지게 한다. 몸에 상처의 기억을 많이 새겨져 있는 시인은 행복하다. 최정례의 시는 의식 혹은 무의식이 밀어내고 있는 지난 삶의 얼룩들을 무질서하게 흩어놓고만 있는 책임 없는 난해시는 결코 아니다. 시의 모티프는 기억 속의 파편화된 삶에서 가져오지만 시인은 그것을 시라는 형식에 안착시킬 때는 고도의 시적 전략 속에서 진행시킨다. 최정례의 시를 거듭해서 읽어보면 산문시에서도 시의 율격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고도의 계산된 어법으로 얻어내는 시의 리듬, 그리고 냉정하리만큼 감정을 절제한 구문들 모두 그의 시를 훌륭하게 떠받치고 있는 시적 장치들이다. 누구든 시간의 흐름에는 어찌할 수 없고, 그 시간이 남긴 흔적에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최정례의 시를 읽으면서 “삶은 거대한 시간의 이삿짐이다”라고 한 윤제림 시인의 시구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다. 현재의 나는 지난 시간으로부터 유배되어 살고 있는 몸인지도 모른다. 최정례는 과거 기억 속의 결핍과 얼룩에 포박되어 있다. 시인은 "그 결핍의 얼룩을 통해 다른 이의 얼룩을 안고 덧없는 순간으로부터 벗어나 세계와 닿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새 길을 열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종암(시인)  
189 나는 나쁜 시인 / 문정희
김재순
3613 2011-11-29
나는 나쁜 시인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 봐. 민중 시인 K는 유럽을 돌며 분수와 조각과 성벽 앞에서 귀족에게 착취당한 노동을 생각하며 피 끓는 분노를 느꼈다고 하던데 고백컨데 나는 유럽을 돌며 내내 사랑만을 생각했어 목숨의 아름다움과 허무 시간 속의 모든 가변에 목이 메었어.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며 눈물을 흘렸지 아름다운 조각과 분수와 성벽을 바라보며 오래 그 속에 빠지고만 싶었어.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 봐. 곤도라를 젓는 사내에게 홀딱 빠져 밤새도록 그를 조각 속에 가두려고 몸을 떨었어. 중세에 부패한 귀족이 남긴 유적에 숨이 막혔어 그 아름다움 속에 죽고 싶었어. 이 땅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흑과 백이 분명해야하는데 그 경계가 자꾸 희미해진다 머리카락이 희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지혜롭게 되었다는 것이고 어찌보면 육신의 노쇠을 뜻하는 것인데 나이가 들수록 흑과 백을 구별 못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나 확실한 건 흑백을 다 사랑한다는 것이다 -김재순-  
188 살가죽 구두 / 손택수
김재순
3308 2011-11-15
살가죽 구두 세상은 그에게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맨발로 세상을 떠돌아다닌 그에게 검은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부산역 광장 앞 낮술에 취해 술병처럼 쓰러져 잠이 든 사내 맨발이 캉가루 구두약을 칠한 듯 반들거리고 있네 세상의 온갖 흙먼지와 기름때를 입혀 광을 내고 있네 벗겨지지 않는 구두, 그 누구도 벗겨 갈 수 없는 맞춤 구두 한 켤레 죽음만이 벗겨줄 수 있네 죽음까지 껴 신고 가야 한다네 여름이면 정오가 되지도 않았는데 골목 담벼락 좁은 그늘에 몸을 걸치고 퍼드러진 사내들을 가끔 본다 나는 그들을 유심히 본다 혹시,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얼굴은 아닐까 올케가 먼저 죽은 후 홀로 남겨진 내 오라버니들의 모습은 아닐까 나는, 올케들과 다정다감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들이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란다 그들에게 내 오라버니를 부탁한다. -김재순-  
187 돌의 새 / 장석남 imagemovie
이종암
3242 2011-11-02
돌의 새 -장석남 노란 꽃 피어 산수유나무가 새가 되어 날아갔다 산수유나무 새가 되어 날아가도 남은 산수유나무만으로도 충분히 산수유나무 너는 가고 가고 남는 이것만으로도 너무 많은 너를 달리 무엇이라고 부르나 길 모퉁이에 박힌 돌에 앉아서 돌에 감도는 이 냉기마저도 어떻게 나누어 가져볼 궁리를 하는 것도 새롭게 새롭게 돋는 어떤 새살(肉)인 모양인데 이 돌멩이 속에 목이 너처럼이나 긴 새가 한 마리 날아간다 날아가긴 해도 그 자리에서만 날아가고 있다 -장석남 시집『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작과비평사,2001) -------------------------------------------------------------------------------- 장석남의 이 시를 거듭 읽다보면 갑자기“ 돌 속으로 그 여자 들어갔네,”라는 이성복의 그 유명한 시「남해금산」이 떠오른다. 「돌의 새」는 돌(石)과 새(鳥)라는 사물을 필기구로 해서 씌어진 연시(戀詩)이다. 이 시의 창작 모티프는 2연에 놓여있다. “너는 가고/가고 남는 이것만으로도 너무 많은/너를” 어쩌란 말이냐, “달리 무엇이라고 부르나”가 그것이다. 이 내용은 1연의 산수유나무와 새의 관계에 기대고 있다. 우리 전통 시가의 구성법인 선경후정(先景後情)의 구도와 유사하다. 1연이 선경(先景)이고 2연이 후정(後情)이라면, 3연과 4연은 너(새)를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내 몸(돌)의 힘겨운 떨림 혹은 그 여운이랄 수 있겠다. 마지막 “날아가긴 해도 그 자리에서만 날아가고 있다”라는 시행은 서정의 주체가 결코 너를 떠나보낼 수 없다는 결의에 찬 표현이다. 아니다, 너(새) 속에 내(돌)가 갇혀있는 지독한 사랑의 외마디 절규다. 너무 아픈 사랑 이야기다. -이종암(시인)  
186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 정희성
김재순
3064 2011-11-01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 정희성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이 추억이 나부끼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날은 꽃피고 열매 맺던 날, 그러나 지금은 안다네, 폭풍우 몰아치던 날들도 그대와 함께 해서 빛났던 날들이었음을 노란잎이 나부끼는 은행나무에 기대어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되풀이하네 --김재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