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4호...
   2019년 12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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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97 만행卍行 / 차영호
임술랑
2397 2012-02-11
만행卍行/차영호 생선가시가 목에 걸렸다 목젖 뒤에서 가치작가치작 똥끝 타는 노루새끼 한나절 동당거렸다 크악 켘,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졌다 미늘 없는 직침直針으로 더 큰 고기 낚겠다고 너른 세상으로 튕겨나간 것일까 귓구멍도 없는 그 바늘 너불너불 해어진 내 속 찍어매려고 더 깊은 곳으로 몸피 가라앉혔는지도 모르지 시집『바람과 똥』2012 아르코 .................................................................................................................................................................................................................................... (감상) 알량한 먹이를 바늘끝에 꿰어 잔챙이 물고기를 울리던 그 가시(낚시바늘)가 내 목에 걸렸다. 버둥대는 나는 꼴 좋은 신세가 되었다. 너도 내 주둥일 꿰어 둘머쳤으니, 내가 찌르는 바늘 맛을 보아라. 槍劍이 水陸을 넘나든다. 허허! 재밌어요 ^^ (임술랑)  
196 눈/서정주
임술랑
3106 2012-01-19
눈/서정주 그때에도 나는 눈을 보고 있었다. 솔나무 나막신에 紅唐木 조끼 입고 생겨나서 처음으로 歲拜 가는 길이였다. 그때에도 나는 눈을 보고 있었다. 萬歲 부르다가 채찍으로 얻어맞고 학교에서 쫓겨나서 帽子 벗어 팽개치고 홀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였다. 그때에도 나는 눈을 보고 있었다. 風月 팔아 술 마시고 좁쌀도 쌀도 없는 주린 아내 곁으로 黃土재의 언덕을 넘어가는 길이였다. 시방도 나는 눈을 보고 있다. 거느린 것은 한 떼의 바람과 形體도 없는 몇 사람의 亡靈 뿐, 이제는 갈 데도 올 데도 없는 미련한 미련한 韻律의 實務曺長이여. 눈을 보러 눈을 보러 온 것이다. 나는 해마다 내려서는 내 앞에 쌓이는 하이얀 하이얀 눈을 보려고 까닭없는 이 땅을 다니러 온 것이다. ............................................................................................................................................................................................................................................................ (감상) 미당이 일군 운율은 가히 마약과도 같다. 읽고 또 읽어도 그 律은 죽지를 않고 오히려 맘 속에 녹아서 노래로 부활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7.5조 가락이 숨어 한몫 하는 것도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미당의 시적 감각과 시적 상상이 그 중요한 힘일 것이다. "그때에도 나는 눈을 보고 있었다."라고 시간대별로 반복되는 이 시는 미당의 생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 같기도 하다. 온 천지가 순백의 환한 세상을 만드는 눈을 보고 경이에 찼으나 이내 녹고마는 허무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까닭없는 이 땅을 다니러 온 것이다."라고 귀결되는 슬픔을 읽게되는 것이다.(임술랑)  
195 눈이 내린다 / 박영근
김재순
2578 2012-01-09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나는 평양에 가겠다 공단거리 지쳐버린 사원임대아파트에 핏빛으로 몰려 오는 눈보라로 가겠다 일용직으로 떨어져 일용직으로 떨어져 바라보는 인원감축합의문 벌겋게 찍힌 노동조합 그 이름으로 가겠다 거리엔 백화점과 술집들이 온통 불빛들을 터트리고 그 불빛 속에 내 눈물속에 비치는 외줄기 낭떨어지길로 가겠다 이것이 노여움인지 사랑인지 나는 모른다 쌀이 좋다는 재령평야도 눈이 많다는 국경 마을도 나는 모른다 이 눈물이 아픔인지 비굴함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바람 속에 저렇게 떨고 있는 눈송이들을 위해 시커멓게 밟혀버릴 눈송이들을 위해 단 한번만이라도 단 한번만이라도 신경림 시인은 이 시를 읽으면서 속으로 몇 번인가 울며 최상의 시란 어떤 것인가 생각했다고 합니다 조정래 선생은 아리랑을 집필하면서 일본 침략기 때 죽어간 400만 우리 동포를 원고지 칸칸이 채웠다고 합니다 '작가 정신' 의 ㅈ 도 모르면서 나는 무얼 詩 라고 주장하며 쓰고 있는지... - 김재순-  
194 황태덕장에 내리는 눈/임연규
임술랑
2777 2011-12-25
황태덕장에 내리는 눈/임연규 이승의 곡기穀氣를 어쩌지 못하고 있구나. 하늘 향해 일제히 벌린 입 한낮 청빈한 겨울 햇살만 입에 가득 고이고 오늘도 지척을 알 수 없이 퍼붓는 폭설이 게걸한 네 입에는 밥이 되지 않는구나. 우리는 이렇게 살았구나. 일생 먹잇감을 쫓다 붙잡힌 불경죄로 대관령 산중에서 내 죄를 내가 아는 줄줄이 형을 받고도 닫지 못하는 입 끝내 어쩌지 못하고 있구나. 시집『산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2008 ................................................................................................................................................................................................................................................ (감상) 우리가 입에 당기는 맛과 허기를 어쩌지 못 하듯 깨끗한 바닷속을 헤엄치는 명태도 그 게걸스런 입이 욕이 되어 대관령 춥디 추운 벌판에 입을 꿰어 형벌을 받고 있으니. 오죽하랴. 내 죄! 내가 알렸다.(임술랑)  
193 진눈깨비 / 기형도
김재순
3221 2011-12-19
진눈깨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비도 눈도 아닌 진눈깨비, 그래서 더 빨리 사라지는 진눈깨비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던 젊은 엘리트, 기형도 시인은 진눈깨비를 보며 왜 이토록 절망하는 것일까요 숨이 막히는 현실에서 몸부림을 쳤던 그는 구호적인 시를 쓰지는 않았지만 저항 시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불행하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고 눈물 흘리는 젊은 기형도 시인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의 어깨라도 감싸주고 싶습니다. -김재순-  
192 노래-경주남산 / 정일근 image
이종암
2708 2011-12-13
노래 -경주남산 -정일근 그리운 그 노래 나는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아주 아주아주 오랜 옛날 황룡사 탑 그늘에 기대어 서서 당신은 그 노래 들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나는 아직 그 노래 듣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탑도 사라지고 절과 사직도 사라져 고즈넉한 가을 절터와 당간지주만 남아 쓸쓸한데 나의 눈과 귀는 돌 속에 묻혀서도 여전히 천 년 신라쪽으로 속절없이 열려 있습니다 언제쯤 노래를 들려주시렵니까 그 언제쯤 서라벌 쪽에서 부는 바람 편에 당신의 안부와 주소가 적힌 길고 긴 사랑의 편지를 보내 주시렵니까 그 편지 받을 수 있다면 비파암 진신석가께서 낮잠에 들면 바위 위에 벗어 둔 가사를 훔쳐 입고 어느 하루 당신을 만나러 저잣거리로 내려가고 싶습니다 내려가 그리운 당신 노래 한 소절만 들을 수 있다면 다시 돌 속에 잠겨 흘러 갈 오랜 잠이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 노래 허리에 감고 또 한 천 년 무작정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정일근 시집『경주 남산』(문학동네,2004) -------------------------------------------------------------------------------------------------- 경주 남산은 우리나라의 보물산입니다. 산 전체가 문화유적의 천연 야외 박물관입니다. 유네스코에서도 국제문화유산으로 등재해놓았습니다. 경주 남산을 제재로 한 현대시만 해도 여러 수백 편에 이를 것입니다. 우리나라 시인 가운데 정일근 시인만큼 경주 남산을 많이 노래한 시인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시집 한 권이 아예『경주 남산』입니다. 시인은 노래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 노래는 대부분 환희의 찬가(讃歌)가 보다는 눈물의 비가(悲歌)가 많습니다. 시인은 어쩌면 이 비가를 한 평생 불러야 하는 운명의 천형(天刑)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경주에 가고 싶거나 경주 남산을 오르고 싶은 밤이면 나는 정일근 시인의『경주 남산』펼쳐듭니다. “그리운 그 노래”로 시작되고 있는 정일근의「노래」는 신라 천년의 유적과 역사가 한 축이 되고, 그리운 당신이 한 축이 되어 씌어진 애절하고도 가슴 저린 슬픈 연가(戀歌)입니다. 시인이여, 단언컨대 그 “그리운 당신 노래”를 결코 듣지 못할 것입니다. 끝도 없이 그 “그리운 노래”를 찾아 시인은 길 찾아 나서고 노래를 불러야하겠지요. 독자인 우리는 시인이 부르는 이 슬픈 노래를 들으며 다만 고개 들어 먼 데를 바라볼 뿐입니다. 아, 사람이 가고 세월이 가도 노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시인의 아름답고 슬픈 노래는 불멸(不滅)입니다. -이종암(시인)  
191 불타는 나무/이은봉
임술랑
3153 2011-12-04
불타는 나무 이은봉 불타는 나무리! 허공 떠도는 바람들 불러 모아 반야심경 외게 하누나 나무는 불타리! 공중 헤매는 제비들 불러 모아 천수경 외게 하누나 머리칼 풀어헤친 채 온몸 가득, 푸른 하늘 빨아들이고 있는 나무여 그대 이미 불타거늘! 땅에 내린 뿌리 너무 얕아 여태 절 믿지 못 하누나. 시집『책바위』2008 ..................................................................................................................................................................................... (감상) 나무(南無)는 범어로 歸依한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나무(木)는 그 이름부터 오묘한 것이다. 이제 시인(이은봉)이 나무는 불타(佛陀)므로 결국에는 부처라는 말을 하고 있다. 나무는 자기 몸을 태워 남을 따뜻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무는 불타이고 불타는 나무라는 것이다. 나는 여태 그걸 모르고 날카로운 낫으로 자르고 자귀로 찍었으니 부처는 얼마나 아팠을까. 이후 내 주변에 심겨진 나무는 모두 부처님으로 모실 것이다. (임술랑)  
190 붉은 밭 / 최정례 imagemovie
이종암
3728 2011-12-02
붉은 밭 -최정례 깜빡 잠이 들었었나 봅니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푸른 골짜기 사이 붉은 밭 보았습니다 고랑 따라 부드럽게 구불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풀 한포기 없었습니다 그러곤 사라졌습니다 잠깐이었습니다 거길 지날 때마다 유심히 살폈는데 그 밭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엄마가 내 교과서를 아궁이에 쳐넣었습니다 학교 같은 건 다녀 뭐하느냐고 했습니다 나는 아궁이를 뒤져 가장자리가 검게 구불거리는 책을 싸들고 한학기 동안 학교에 다녔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릅니다 타다 만 책가방 그후 어찌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밭 왜 풀 한포기 내밀지 않기로 작정했는지 그러다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끔 한밤중에 깨어보면 내가 붉은 밭에 누워 있기도 했습니다 -최정례 시집『붉은 밭』(창작과비평사,2001) ---------------------------------------------------------------------------------------------------------- 위 시에서 '붉은 밭'은 "풀 한포기 내밀지 않기로 작정"한 기억 속에 있는 상처의 굳은 딱지로 남은 황무지다. "육체는 감옥이라서"(「비행기 떴다 비행기 사라졌다」) 그 붉은 밭은 내 몸에 구불거리며 계속 살아있다. 이런 황폐화된 마음속의 붉은 밭이 시인으로 하여금 끝없이 언어를 만지게 한다. 몸에 상처의 기억을 많이 새겨져 있는 시인은 행복하다. 최정례의 시는 의식 혹은 무의식이 밀어내고 있는 지난 삶의 얼룩들을 무질서하게 흩어놓고만 있는 책임 없는 난해시는 결코 아니다. 시의 모티프는 기억 속의 파편화된 삶에서 가져오지만 시인은 그것을 시라는 형식에 안착시킬 때는 고도의 시적 전략 속에서 진행시킨다. 최정례의 시를 거듭해서 읽어보면 산문시에서도 시의 율격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고도의 계산된 어법으로 얻어내는 시의 리듬, 그리고 냉정하리만큼 감정을 절제한 구문들 모두 그의 시를 훌륭하게 떠받치고 있는 시적 장치들이다. 누구든 시간의 흐름에는 어찌할 수 없고, 그 시간이 남긴 흔적에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최정례의 시를 읽으면서 “삶은 거대한 시간의 이삿짐이다”라고 한 윤제림 시인의 시구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다. 현재의 나는 지난 시간으로부터 유배되어 살고 있는 몸인지도 모른다. 최정례는 과거 기억 속의 결핍과 얼룩에 포박되어 있다. 시인은 "그 결핍의 얼룩을 통해 다른 이의 얼룩을 안고 덧없는 순간으로부터 벗어나 세계와 닿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새 길을 열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종암(시인)  
189 나는 나쁜 시인 / 문정희
김재순
3871 2011-11-29
나는 나쁜 시인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 봐. 민중 시인 K는 유럽을 돌며 분수와 조각과 성벽 앞에서 귀족에게 착취당한 노동을 생각하며 피 끓는 분노를 느꼈다고 하던데 고백컨데 나는 유럽을 돌며 내내 사랑만을 생각했어 목숨의 아름다움과 허무 시간 속의 모든 가변에 목이 메었어.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며 눈물을 흘렸지 아름다운 조각과 분수와 성벽을 바라보며 오래 그 속에 빠지고만 싶었어.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 봐. 곤도라를 젓는 사내에게 홀딱 빠져 밤새도록 그를 조각 속에 가두려고 몸을 떨었어. 중세에 부패한 귀족이 남긴 유적에 숨이 막혔어 그 아름다움 속에 죽고 싶었어. 이 땅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흑과 백이 분명해야하는데 그 경계가 자꾸 희미해진다 머리카락이 희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지혜롭게 되었다는 것이고 어찌보면 육신의 노쇠을 뜻하는 것인데 나이가 들수록 흑과 백을 구별 못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나 확실한 건 흑백을 다 사랑한다는 것이다 -김재순-  
188 살가죽 구두 / 손택수
김재순
3579 2011-11-15
살가죽 구두 세상은 그에게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맨발로 세상을 떠돌아다닌 그에게 검은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부산역 광장 앞 낮술에 취해 술병처럼 쓰러져 잠이 든 사내 맨발이 캉가루 구두약을 칠한 듯 반들거리고 있네 세상의 온갖 흙먼지와 기름때를 입혀 광을 내고 있네 벗겨지지 않는 구두, 그 누구도 벗겨 갈 수 없는 맞춤 구두 한 켤레 죽음만이 벗겨줄 수 있네 죽음까지 껴 신고 가야 한다네 여름이면 정오가 되지도 않았는데 골목 담벼락 좁은 그늘에 몸을 걸치고 퍼드러진 사내들을 가끔 본다 나는 그들을 유심히 본다 혹시,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얼굴은 아닐까 올케가 먼저 죽은 후 홀로 남겨진 내 오라버니들의 모습은 아닐까 나는, 올케들과 다정다감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들이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란다 그들에게 내 오라버니를 부탁한다. -김재순-  
187 돌의 새 / 장석남 imagemovie
이종암
3541 2011-11-02
돌의 새 -장석남 노란 꽃 피어 산수유나무가 새가 되어 날아갔다 산수유나무 새가 되어 날아가도 남은 산수유나무만으로도 충분히 산수유나무 너는 가고 가고 남는 이것만으로도 너무 많은 너를 달리 무엇이라고 부르나 길 모퉁이에 박힌 돌에 앉아서 돌에 감도는 이 냉기마저도 어떻게 나누어 가져볼 궁리를 하는 것도 새롭게 새롭게 돋는 어떤 새살(肉)인 모양인데 이 돌멩이 속에 목이 너처럼이나 긴 새가 한 마리 날아간다 날아가긴 해도 그 자리에서만 날아가고 있다 -장석남 시집『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작과비평사,2001) -------------------------------------------------------------------------------- 장석남의 이 시를 거듭 읽다보면 갑자기“ 돌 속으로 그 여자 들어갔네,”라는 이성복의 그 유명한 시「남해금산」이 떠오른다. 「돌의 새」는 돌(石)과 새(鳥)라는 사물을 필기구로 해서 씌어진 연시(戀詩)이다. 이 시의 창작 모티프는 2연에 놓여있다. “너는 가고/가고 남는 이것만으로도 너무 많은/너를” 어쩌란 말이냐, “달리 무엇이라고 부르나”가 그것이다. 이 내용은 1연의 산수유나무와 새의 관계에 기대고 있다. 우리 전통 시가의 구성법인 선경후정(先景後情)의 구도와 유사하다. 1연이 선경(先景)이고 2연이 후정(後情)이라면, 3연과 4연은 너(새)를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내 몸(돌)의 힘겨운 떨림 혹은 그 여운이랄 수 있겠다. 마지막 “날아가긴 해도 그 자리에서만 날아가고 있다”라는 시행은 서정의 주체가 결코 너를 떠나보낼 수 없다는 결의에 찬 표현이다. 아니다, 너(새) 속에 내(돌)가 갇혀있는 지독한 사랑의 외마디 절규다. 너무 아픈 사랑 이야기다. -이종암(시인)  
186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 정희성
김재순
3299 2011-11-01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 정희성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이 추억이 나부끼네 그대와 함께한 빛났던 날은 꽃피고 열매 맺던 날, 그러나 지금은 안다네, 폭풍우 몰아치던 날들도 그대와 함께 해서 빛났던 날들이었음을 노란잎이 나부끼는 은행나무에 기대어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되풀이하네 --김재순--  
185 시작일기(詩作日記) / 윤순열 [1]
임술랑
3450 2011-10-23
시작일기(詩作日記) / 윤순열 시란 놈이 도무지 찾아오지 않더니 갑자기 왔다 가방을 뒤져도 연필도 종이도 없다 텅 빈 내 곳간엔 허접스러운 화장품 몇 개 그냥 가려는 시를 억지로 붙잡고 헤매다 겨우 찾은 서점 아무렇게 뽑아든 책이 시들만 사는 시집(詩集)이다 그 흔한 시의 집안에 내 시가 들어가야 할 자리는 없네 어쩌랴 립스틱으로 신나게 그려낸 그 점 위로 비로소 빨갛게 웃고 앉은 내 시(詩) [2011 낙동강] ................................................................................................................................................................. (감상) 시란 놈은 바깥을 빙빙 돌기만 하고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남의 집에는 시들이 가지런히 자리하여 화목한 집을 이루고 있지만 거기 내 시가 쉴 곳은 없다. 그때 갑자기 오랫만에 찾아든 내 시. 그러나 마땅히 그 시를 앉힐 곳간이 없다. 그래 립스틱으로 그려서 임시로 잡아들인 내 시(子息). 허허 빨갛게 웃고 있다. 좋네여 ^^ (임술랑)  
184 풍장19 / 황동규 image
이종암
3822 2011-10-19
풍장 19 -황동규 아 번역하고 싶다, 이 늦가을 저 허옇게 깔린 갈대 위로 환히 타고 있는 단풍숲의 색깔을. 생각을 줄줄이 끄집어내 매듭진 줄 들고 꺼내 그 위에 얹어 그냥 태워! -황동규 시집『풍장』(문학과지성사,1995) ----------------------------------------------------------------------------------------------------- 내가 이십여 년 전 황동규 시에 처음 매료되었을 때 만난 시가 바로「풍장」이라는 연작시였다. 풍장(風葬)은 시신을 묻거나(埋葬) 태우거나(火葬) 하지 않고 그냥 산속 나뭇가지 위에다 햇빛과 비바람에 자연 탈골(奪骨)되는 특이한 장례 방식의 하나다. 우리나라 서남쪽 섬 지방에서 간혹 행해지는 것이라는데, 시인은 이걸 딱 한 번 본적이 있다고 했다. 시인은「풍장」연작을 통해서 ‘죽음’이라는 인간의 근원적이고 문제적인 한계 상황을 극복하고자 치열한 시적 투쟁을 감행해 왔다. 그 사유의 결과물은 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70편으로 구성된 연작 시집『풍장』으로 완결된다. 위 시는 늦가을 불타는 단풍을 풍장(風葬) 이미지와 연결하고 있다. 시의 마지막 행인 “그냥 태워!”는 어떤 이미지로 다가오는가? 또 다른 시「풍장 36」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내 마지막 기쁨은/시(詩)의 액설레이터 밟고 또 밟아/시계(視界) 좁아질 만큼 내리밟아/한 무리 환한 참단풍에 눈이 열려/벨트 맨 채 한계령 절벽 너머로/환한 다이빙./몸과 허공 0밀리 간격의 만남.” 아, 짧은 가을이 다 가고 있다. 이 귀하고 아름다운 가을빛 아래서 여태 나는 제대로 된 시 한 편 못 쓰고 뭐하고 있는 가. 숙살지기(肅殺之氣)에 마지막 안간힘으로 맞장 뜨며 제 삶의 빛깔을 다하고 있는 산야(山野)의 들풀과 나뭇잎에게로 걸어가 삶의 아름다운 노래를 배워야겠다. -이종암(시인)  
183 만술아비의 축문 / 박목월 image
이종암
7314 2011-10-17
萬述아비의 祝文 -박목월 아배요 아배요 내 눈이 티눈인 걸 아배도 알지러요. 등잔불도 없는 제삿상에 축문이 당한기요. 눌러 눌러 소금에 밥이나마 많이 묵고 가이소. 윤사월 보리고개 아배도 알지러요. 간고등어 한손이믄 아배 소원 풀어들이련만 저승길 배고플라요 소금에 밥이나마 많이 묵고 묵고 가이소. * 여보게 만술 아비 니 정성이 엄첩다. 이승 저승 다 다녀도 인정보다 귀한 것 있을락꼬, 亡靈도 感應하여, 되돌아가는 저승길에 니 정성 느껴느껴 세상에는 굵은 밤이슬이 온다. -이남호 편『박목월 시전집』(민음사,2003) ----------------------------------------------------------------------------------------------------------- 박목월 시인이 53세 때 펴낸 시집『慶上道의 가랑잎』(민중서관,1968)에는 경상도 사투리가 구수하게 녹아있는 명편(名篇)들이 여럿 있다. 그 가운데 “뭐락카노”로 시작되는, 아우의 죽음을 애 터지게 부른「이별가」와「만술아비의 축문」은 단연 돋보이는 수작(秀作)이다. 이 노래의 무대는 만술아비가 펼쳐놓은 아버지 제사상 앞이다. 일자무식이요, 찢어지게 가난한 만술아비가 아버지의 제사상에 경상도 사투리 입말로 올리는 축문(祝文) 아닌 축문과 그 축문에 감응하여 죽은 아버지(亡靈)가 내리는 말씀이 전체 시의 내용이다. 이 제사상은 등잔불과 축문, 간고등어 한손도 없이 소금에 밥이나마 눌러눌러 담은 것이지만 ‘만술아비의 축문’의 간절한 말씀으로 그 어떤 제사상보다도 정성스럽고 푸지다. 그렇다. 죽은 아버지의 말씀처럼 이승과 저승 그 어디에도 사람의 정성(人情)이 제일로 소중하다. 죽은 아버지가 되돌아가는 길에 내리는 굵은 밤이슬은 만술아비의 정성에 흐느껴 우는 그 아비의 눈물이리라. 부모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다 모셔두고 있음이다. 정성을 다하는 사람의 마음은 그 어떤 물질보다도 값지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내게 남은 세상을 걸어갈 일이다. -이종암(시인)  
182 추억 / 김규동 movie
이종암
3862 2011-10-11
추억 -김규동 아내의 결혼반지를 팔아 첫 시집을 낸 지 쉰해 가깝도록 그 빚을 갚지 못했다 시집이 팔리는 대로 수금을 해서는 박인환이랑 수영이랑 함께 술을 마셔버렸다 거짓말쟁이에게도 때로 눈물은 있다 -김규동 시집『느릅나무에게』(창비,2005) ---------------------------------------------------------------------------------------------------------- 지난 2011년 9월 28일 원로 시인 김규동 시인께서 돌아가셨다. 지난 2005년, 선생께서는 실로 오랜만에 새 시집『느릅나무에게』를 상재하셨다. 시집은 김규동 시인께서 지난 14년 동안 써온 300여 편의 작품 가운데 직접 고른 83편으로 채워져 있다고 한다. 젊은 시절 문우(文友)들과의 추억, 어린 시절 고향 마을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통일에 대한 열망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위 작품에 진술된 것처럼 김규동 시인은 박인환, 김수영 시인과는 동인 활동을 함께한 친구 사이다. 한국 전쟁 직후 이들과 ‘후반기’동인 활동을 함께 할 때 김규동의 시는 문명 비판적이고 철학적이었다.「나비와 광장」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 후 김규동 시인의 작품은 북에 남겨두고 온 고향과 가족들, 특히 어머님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노래하는 통일 지향의 내용으로 변모를 하게 된다. 김규동 시인은 이 시집으로 지난 2006년 제2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50여 년 전, 첫 시집 낸다고 아내에게 진 빚을 이제 갚을 수가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선생의 진정한 ‘빚’은 1948년 고향과 부모를 두고 월남하면서 갖게 된 ‘마음의 빚’이 아닐까. 그 빚은 ‘민족 분단’이라는 우리 모두의 빚이기도 하다. 평생을 이북의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워했던 고 김규동 선생님, 이제 혼백이라도 고향땅과 어머니 품속으로 돌아가 평안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종암(시인)  
181 석류 / 조운 image
이종암
5614 2011-10-10
石榴 -조운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조운 기념사업회『조운 시조집』(작가,2000) ------------------------------------------------------------------------------------------------ 1900년 전남 영광 출신의 시조 시인 조운. 일제강점기에 항일민족주의자였던 그가 50세가 되던 1949년에 돌연 가족과 월북하면서 우리 문학사에서 시조 시인 조운의 이름은 말끔히 지워졌다. 1947년 조선사에 간행된『조운 시조집』이 분단 50년이 지나서였지만 재 간행된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이름이 유폐된 것을 안타까워하던 조운기념사업회가 주도하여 펴낸『조운 시조집』(작가,2000)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 인해 조운의 빼어난 시조 작품이 일반 독자들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조운은 주로 단형 시조에서 그 빼어난 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의 단시조「古梅」가 이른 봄의 풍경을,「상치쌈」이 여름의 풍경을 그려낸 것이라면, 위 시조「석류」는 가을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음이다. 석류를 의인화하고 있는 이 작품은 가을의 한 풍경을 그려내면서도 그 속에 화자의 정서를 밀도 있게 담아내고 있다. 초장(1연)이 석류의 외양을 단순히 묘사하면서 시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면, 중장(2연)은 붉은 석류와 그 속 알알이 맺혀있는 석류 열매를 펼쳐놓음으로써 그 그림의 색칠을 완성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미완의 그림이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 있어야 한다. 시적 화자의 간절한 서정(임에 대한 붉은 그리움)을 폭발적으로 그려놓고 있는 종장(3연)이 바로 그것이다. “보소라 임아 보소라/빠개 젖힌/이 가슴.”의 반복과 도치법으로 표현된 종장이 보여주는 시적 미학은 가히 탁월하다. -이종암(시인)  
180 서울역 그 식당 / 함민복
김재순
3681 2011-10-09
서울역 그 식당 / 함민복 그리움이 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대가 일하는 전부를 보려고 구석에 앉았을 때 어디론가 떠나가는 기적소리 들려오고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른 채 푸른 호수 끌어 정수기에 물 담는 데 열중인 그대 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고 술 취한 고백을 하던 그날 밤처럼 그냥 웃으면서 밥을 놓고 분주히 뒤돌아서는 그대 아침, 뒤주에서 쌀 한바가지 퍼 나오시던 어머니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습니다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고 나옵니다 이제는 다 잊었다고 말을 해도 너무 멀리 흘러와 돌아가기 힘들다고 말을 해도 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는 사람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리움이 솟아나 견딜 수 없을 때 밥 먹으러 간 사람처럼 구석에 앉아 밥만 먹고 나옵니다 하고 싶었던 말들은 가슴에 묻어두고 기적소리 쓸쓸한 기차를 타고 또 어디로 떠나겠지요 더 늦지 말기를, 가을의 한 가운데서 단풍처럼 타오르기를, 겨울이 오기 전에... -김재순-  
179 평구역에서 자다(宿平邱) / 정약용 image
임술랑
3613 2011-10-02
평구역에서 자다(宿平邱) / 정약용 종 최가야 너와 서로 작별한 지 십 년인데 / 奴崔與汝別十年 오늘밤에 내가 와 네 집에서 자는구나 / 今宵我來汝家眠 너는 지금 넓고도 환하게 집을 짓고 / 汝今築室乃弘敞 술단지며 가재도구 모두가 화려하네 / 甁罌桁卓皆華鮮 밭에다는 채소 심고 논에는 벼를 심고 / 沙田種菜水種稻 첩 시켜 술을 팔고 자식은 배를 타며 / 敎妾當壚兒騎船 매질하는 상전 없고 빚진 것도 하나 없이 / 上無笞罵下無債 일생을 강호에서 호탕하게 산다마는 / 一生浩蕩江湖邊 벼슬깨나 했다는 나 내놓을 게 무엇일까 / 我雖簪笏將何補 나이 사십 다 되도록 번거롭고 고생이요 / 行年四十猶煩苦 천 권 책을 읽고서도 배고프긴 일반이며 / 讀書千卷不救飢 고을살이 삼 년에 한 치의 땅도 없어 / 佩符三歲無寸土 흘겨보는 눈들만 세상에 가득하므로 / 白眼盱滿世間 초췌한 얼굴 붉히며 늘 문 닫고 앉았다오 / 朱顔憔悴常閉戶 자로 재고 저울로 달아 너와 만약 다툰다면 / 度絜衡秤與汝爭 일백 번 싸운대도 네 이기고 내 지리라 / 我眞百輸汝百贏 가을 되면 순갱노회* 고향 찾아 돌아가서 / 秋風會借蓴鱸興 너와 함께 분을 풀고 수치도 씻어보리 / 雪耻酬憤與汝幷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3권 / 한국고전번역원 번역 * 순갱노회(蓴羹鱸膾) : 진(晉)나라의 장한(張翰)이 고향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생각나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었음.《晉書 卷九十二》 ................................................................................................................................................................................................................................................ (감상) 벼슬아치 된 자의 가난과 고뇌를 읊은 다산의 이 시는 오늘날 공직자가 반드시 읽어야 할 시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 시를 읽는다면, 그 어느 부모가 판검사 등 높은 관직을 얻으라고 자녀를 닥달 할 수 있겠는가. 다산 자신이 공복의 자세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부귀와 공명과는 거리가 먼 공직자 말이다. 아울러 강호에서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하고 호탕하게 사는 최씨는 그 신분이 종이었지만 신분의 존비에 개의치 않는 다복한 생활인인 것이다. 실학자인 다산은 어느 것이 더 행복한 삶인가를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이다. (임술랑)  
178 사마 천 / 박경리
이종암
4166 2011-09-27
司馬 遷 -박경리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긴 낯 긴 밤을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당하고 인생을 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박경리 시집『자유』(솔출판사,1994) ----------------------------------------------------------------------------------------------------------------- 1994년『토지』전16권이 완간되면서 이를 기념하여 그동안 작가가 틈틈이 써온 시들을 묶어 한 권의 시집을 묶어내게 된다.『자유』(솔출판사,1994)라는 시집이 그것이다. 시집『자유』는 작가가 이미 상재한 바 있는 두 권의 시집『못 떠나는 배』와『도시의 고양이들』에서 가려 뽑은 것이다. 소설가에게 있어 산문이 아닌 운문은 작가의 가장 진솔한 내면의 웅얼거림과도 같은 것이다. 시의 내용은 작가의 삶에서 직접 발원되는 서정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 작가의 실체를 가장 적나라하게 머금고 있는 문학의 갈래다. 박경리의 시집『자유』의 맨 앞장에 게재되어 있는 이 시는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의 이야기와 연관된 것이다.『史記』'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의하면 전쟁에 패한 그의 친구 이릉(李陵)의 참형에 반대하는 주장을 내세우다 한나라 무제에게 거세형(去勢刑)인 궁형(宮刑)을 당하고서 남은 일생을 모두 바쳐서『사기』를 기술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는 실제로 사마 천의 자서전이며 동시에『史記』 해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박경리의 시「司馬 遷」을 사마천의 그 기막힌 삶과 그의 저술 활동에 시인이 보내는 안타까움만으로 읽는다는 것은 온전한 시 해독이 될 수 없다. 시의 전면에 나타나있지는 않지만 숨어있는 시적 화자는 분명 박경리 시인 자신으로 볼 수 있다. 시의 화자는 엄청난 시공간적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지금껏 자신이 살아 온 일생과 거의 흡사한 삶을 살다간 사마 천의 기막힌 삶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 속에 자신의 속 이야기를 살짝 올려놓는다. 시인이 내뱉는 숨결의 속살, 혹은 표현하고자 하는 본래의 의미는 시인 자신이 지금껏 엄청나게 겪어온 고통스런 삶의 일생 이야기이다. 그러니 이 시는 바로 사랑의 기억도 없이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시간을 앓으며, 육체를 거세당하고, 인생을 거세당한 '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그렇게 진실을 기록해온 작가 박경리 자신이 직접 되돌아 본 자신의 일생담이기도 하다. -이종암(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