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4호...
   2019년 12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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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77 꽃 한 송이 / 이성선 image
이종암
3751 2011-09-20
꽃 한 송이 -山詩․35 -이성선 꽃잎 속에 감싸인 황금벌레가 몸 오그리고 예쁘게 잠들 듯이 동짓날 서산 위에 삐죽삐죽 솟은 설악산 위에 꼬부려 누운 초승달 산이 한 송이 꽃이구나 지금 세상 전체가 아름다운 순간을 받드는 화엄의 손이구나 -이성선 시집『산시』(시와시학사,1999) ----------------------------------------------------------------------------------------------------------------- 강원도 고성 출신의 이성선 시인. 아마도 그는 우리나라 시인들 가운데 산(山)을 가장 좋아했던 시인이 아니었을까? 2001년 5월, 그는 죽어 몇 줌의 하얀 가루가 되어 시인이 생전에 그렇게 좋아하던 설악산 백담계곡에 뿌려졌다. 그는 죽어 온전히 산이 되었다.『산시』는 시집 한 권이 모두 54편의 ‘山詩’ 연작시로 채워져 있다. 그 가운데 山詩․35인「꽃 한 송이」를 다시 읽는다. “삐죽비죽 솟은 설악산 위에/꼬부려 누운//초승달”을 두고 이성선 시인은 “꽃잎 속에 감싸인 황금벌레”로 보고 있다. 견자(見者)인 시인은 이렇게 사물을 새롭게 보고 있다. 시인의 이러한 새로운 눈이 “산이 한 송이 꽃”임을 또 보게 한다. 그러면 “세상 전체가” 곧 “화엄의 손”이라는 절대 긍정의 깨달음의 세계에까지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윤동주의 시가 그랬듯이 이성선의 순진무구한 눈빛은 우주적 상상력으로까지 확대된다. “큰 산이 한 마리/나비 되어//짙은 안개 속을/헤맨다”(「산이 나비로 변해-山詩․22」전문)라는 이 짧은 시는 그걸 잘 보여주고 있다. 이성선 시인, 그는 지금 설악의 어느 산등성이에서 꽃과 나비와 동무하며 놀고 있을까? -이종암(시인)  
176 사루비아 마담 / 송진권
김재순
4316 2011-09-20
사루비아 마담 / 송진권 703번 버스 종점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키 큰 사루비아꽃 있지요 이파리는 조금 말라 시들었지만 고운 태가 아직은 남은 붉은 입술 붉은 매니큐어가 안쓰러운 햇빛을 못 받아 키만 크고 마른 사루비아 마담 있지요 홀엔 퀴퀴한 곰팡내 한물 간 뽕짝 질펀한 홀엔 한 두엇 늙은네들 쌍화차를 마시고 마담은 늙은이 옆에 앉아 매니큐어를 지우지요 커피나 얻어 마시며 나를 읽어보시라고 늙은네들에게 손금이나 보이지요 아직 젊은 나이지만 세상풍진 다 알아버린 이미 늙어버린 여자 세상에 사내에게 단물 쓴물 다 빨리고 몸에 병도 깊어 더 갈 곳 없어 밀려온 변두리 다방 얼굴마담 몸 주고 정준 것들은 왜 하나 같이 죽거나 통장 들고 전세금 빼내 도망을 갔는지 스물 안팎에 낳은 아이는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래도 그 때가 좋았다고 필터에 묻은 웃음을 눌러 끄며 늙은네들 얘기나 들어주는 사루비아 사루비아꽃 헤픈 웃음이 계단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지요 세상풍진 다 알아 이미 늙어버린 젊은 여자 부초처럼 떠돌다 변두리 다방에서 얼굴마담을 합니다 그녀를 만나는 게 유일한 즐거움인 동네 할아버지들은 그녀를 그냥 가련한 누이동생으로 생각하고 커피를 사주고 손금도 봐 주고, 그녀도 그들을 그냥 고향의 오라버니들로 생각하겠지요 그 변두리 다방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붉게 타오를 때까지 그녀의 안식처가 되기를...-김재순-  
175 향수 / 서정주 imagemovie
이종암
3589 2011-09-16
鄕愁 -서정주 봄 여루 내가 키운 내 마음 속 기러기 인제는 날을만큼 날개 힘이 생겨서 내 고향 질마재 수수밭길 우에 뜬다. 어머님이 가꾸시던 밭길 가의 들국화, 그 옆에 또 길르시던 하이연 산돌, 그 들국화 그 산돌 우를 돌고 또 돈다. -『미당 서정주 시전집 2』(민음사,1991) ------------------------------------------------------------------------------------------------------------ 독자 여러분, 지난 추석 명절날 고향에는 다들 다녀오셨는지요?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 바쁜 생활로 자주 갈 수는 없지만 고향(故鄕)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내 어린 시절의 삶이 그대로 남아 있어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나를 키워주신 어머니처럼 고향도 어린 나를 길러준 것이어서 언제 어디서나 달려가 안기고 싶은 절대 그리움의 품입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한 서정주의 짧은 시「鄕愁」에도 고향의 어머니가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머니가 고향이고 고향이 곧 어머니일 것입니다. 향수(鄕愁)의 비유인 “내 마음속 기러기”는 “봄 여루 내가 키운” 것이라지만 육십여 년 동안이나 미당의 마음속에서 자라고 또 자라난 것일 것입니다. 이 시는 단 두 개의 문장으로 되어있습니다. 앞 문장이 ‘내 마음 속 기러기’가 먼 고향으로 날아가는 긴 비행선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뒷 문장은 절대 그리움의 대상인 고향의 어머니와 들국화, 산돌 위를 돌고 또 도는 동심원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어머니도 계시질 않고, 나를 길러주던 어린 시절 그때의 고향, 즉 지워지지 않는 내 마음 속의 고향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내 고향 질마재 수수밭길 우에 뜬” 시 속의 “내 마음 속 기러기”는 “그 옆에 또 길르시던 하이연 산돌,/그 들국화 그 산돌 우를 돌고 또 돈다.”고 미당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지시대명사 ‘그’와 부사어 ‘또’의 반복적 사용이 시적 화자의 어질머리가 날 정도의 깊은 향수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종암(시인)  
174 이 세상에서 제일로 좋은 것 / 서정주 imagemovie
이종암
3780 2011-09-16
이 세상에서 제일로 좋은 것 -서정주 이 세상에서 제일로 좋은 것은 낳아서 백일쯤 되는 어린 애기가 저의 할머니보고 빙그레 웃다가 반가워라 옹알옹알 아직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뭐라고 열심히 옹알대고 있는 것. 그리고는 하늘의 바람이 오고 가시며 창가의 나뭇잎을 건드려 알은 체하게 하고 있는 것. -『미당 서정주 시전집 3』(민음사,1994) --------------------------------------------------------------------------------------------------------- 시「이 세상에서 제일로 좋은 것」은 서정주의 제14시집『늙은 떠돌이의 詩』(민음사,1993)의 마직막 노래이면서, 민음사에서 간행한『미당 서정주 시전집 』3권의 맨 마지막 시편이다. 미당이 노래한 ‘이 세상에서 제일로 좋은 것’이 뭐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냥 2연 10행의 이 짧은 시를 내밀 수밖에. 생명의 혈연(血緣) 저 깊은 곳에서 무작정 반응하는 생후 백일의 애기가 내는 “옹알옹알” 소리와 그걸 “알은 체하”는 우주의 기척을 접속부사 ‘그리고는’이라는 큰 다리가 잇고 있다는 것만 슬쩍 말해야겠다. 미당(未堂)이 저 세상으로 건너간 지도 벌써 십여 년이 다 되어간다. 그가 생전에 펴낸 시집이 모두 15권이었는데, 시집『늙은 떠돌이의 詩』는 미당이 79세에 펴낸 열넷째 시집이다. 미당의『서정주시선』이나『동천』에는 수록된 시편들도 좋지만 팔십 노(老) 시인이 부른 해맑고 깊은 이 노래도 참 좋다. 누가 내게 좋은 시가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로 좋은 것’이 미당의 노래라고 말하리라. 앞으로도 자주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그 시편들에 대해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리라. -이종암(시인)  
173 이도 저도 아닌 밤 / 고은
임술랑
3515 2011-09-12
이도 저도 아닌 밤 고은 무문관 33측 마음 아니기 부처 아니기(非心非佛) 이 문패 언저리 누가 끼적인 것 시인 아닌 녀석 앞에서 시 읊조리지 말기 술꾼 아닌 놈하고 술 마시지 말기 (頌曰 不遇詩人莫獻 非酒客莫飮) 하나는 다 시인인 줄 다 술꾼인 줄 모르나 보군 하고 혀 차고 말까 둘은 그럼 어느 시러베아들놈하고 시를 놀아야 하지 어느 후레자식하고 2차 간다지 하고 투덜대고 말까 무문관 내던지고 시도 술도 면목없는 날 안개도 는개도 아닌 날 [유심] 2011년 9/10월호 .................................................................................................................................................................................... (감상) 이 시에서 시인은 시러베아들놈이요 술꾼은 후레자식이 된다. 그러므로 시도 술도 면목이 없다. 안개도 아니고 는개도 아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닌 밤에 혼자서 시를 쓰고 혼자서 술을 따른다.(임술랑)  
172 팽나무가 쓰러지셨다 / 이재무 image
이종암
4846 2011-09-08
팽나무가 쓰러지셨다 -이재무 우리 마을의 제일 오래된 어른 쓰러지셨다 고집스럽게 생가를 지켜주던 이 입적하셨다 단 한 장의 수의, 만장, 서러운 곡도 없이 불로 가시고 흙으로 돌아, 가시었다 잘 늙는 일이 결국 비우는 일이라는 것을 내부의 텅 빈 몸으로 보여주시던 당신 당신의 그늘 안에서 나는 하모니카를 불었고 이웃마을 숙이를 기다렸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아이스께끼 장수가 다녀갔고 방물장수가 다녀갔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부은 발등이 들어와 오래 머물다 갔다 우리 마을의 제일 두꺼운 그늘이 사라졌다 내 생애의 한 토막이 그렇게 부러졌다 -이재무 시선집『오래된 농담』(북인,2008) -------------------------------------------------------------------------------------------------------- 이 시는 “우리 마을의 제일 오래된 어른”인 고목 팽나무의 쓰러짐에 대한 조사(弔詞)이다. 쓰러진 고목 팽나무는 이재무의 어린 시절 꿈과 어설픈 연애를 다 받아주던 ‘당신’이었다. 당신, 고향 마을에 입구에 서 있던 노거수인 팽나무와 그 행위에 시인은 시종 극존칭(당신)과 주체높임(-시-)을 쓰고 있다. 이는 시인의 삶에 그만큼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던 존재의 쓰러짐이기 때문이다. 텅 빈 몸으로 입적하는 마지막까지도 “잘 늙는 일이 결국 비우는 일이라는” 삶의 깨달음을 준 당신의 쓰러짐에 대한 화자의 애석함이 시 행간 곳곳에 배어있다. “돌아, 가시었다”의 <돌아>와 <가시었다> 사이의 쉼표(,) 사용에 이는 단적으로 드러난다. 고향 마을을 지키고 있던 이 팽나무의 쓰러짐은 지난 연대의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래서 화자는 “내 생애의 한 토막이 그렇게 부러졌다”라고 말로 시를 끝맺고 있다. 고향 마을의 당나무, 고향집, 고향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쓰러짐은 이렇게 젖은 물기를 띠고 나타날 수밖에 없다. 애석하고 슬픈 일이다. 고향으로 돌아가 사라진 그들을 올려다보자. -이종암(시인)  
171 주저흔 / 김경주
김재순
6923 2011-09-06
주저흔(躊躇痕) / 김경주 몇 세기 전 지층이 발견되었다 그는 지층에 묻혀 있던 짐승의 울음소리를 조심히 벗겨 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발굴한 화석의 연대기를 물었고 다투어서 생몰연대를 찾았다 그는 다시 몇 세기 전 돌 속으로 스민 빗방울을 조금씩 긁어내면서 자꾸만 캄캄한 동굴 속에서 자신이 흐느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굴 밖에선 횃불이 마구 날아들었고 눈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간을 오래 가진 돌들은 역한 냄새를 풍기는 법인데 그것은 속으로 들어간 몇 세기 전 바람과 빛덩이들이 곤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썩지 못하고 땅을 뒤집어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일 시간에 귀속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전이를 일으키기도 한다 화석의 내부에서 빗방울과 햇빛과 바람을 다 빼내면 이 화석은 죽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연구결과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바람은 죽으려 한 적이 있다> 어머니와 나는 같은 피를 나누어 가졌다기 보단 어쩐지 똑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시인은 울음소리의 기원을 추적한다. 수백 년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 끝에 시인은 추적의 결과를 타이핑한다. '바람은 죽으려 한 적이 있다' 울음소리와 바람소리의 이미지가 묘하게 겹쳐지고, 그 위에 주저흔 (Hesitation makks, 자살하기 직전 머뭇거린 흔적)"의 이미지가 다시 포개진다. 똑 떨어지게 설명할 순 없어도 이해가 되지 않은 건 아니다. 수백 년의 역사를 품고 있지만 결국 시인이 귀속되는 건 '똑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어미다. 문법을 어기고 맞춤법을 무시하는 시적 전략이 드러나지만 시를 지배하는 정서는 삶을 향한 어떠한 절실함이다. 깊은 사색의 흔적이 느껴지면서도 '바람은 죽으려 한 적이 있다'와 같은 표현은 입안을 달콤하게 감돈다.('중앙일보')에서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이 죽으려 한 적이 있다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 그를 바람으로 떠돌게 하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면 그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는 차라리 죽으려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김삿갓처럼... --김재순--  
170 水墨 정원 9 / 장석남 movie
이종암
3827 2011-08-30
水墨 정원 9 -번짐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장석남 시집『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작과비평사,2001) ----------------------------------------------------------------------------------------- 8년 전, 장석남의 넷째 시집『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을 읽고 나서 나는 한동안 가슴이 얼얼했다. 시와 노래를 담아두고 가끔 퍼내기도 하는 내 오른쪽 가슴이 불에 데인 듯 십일월의 가을 바람이 들어찬 듯 서늘했다. 통증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노래의 흥분에 휩싸이는 행복한 통증이었다. 다시 그 행복한 통증을 즐긴다. 시집 속에는「수묵 정원」서시를 비롯하여「수묵 정원1」에서「수묵 정원9」까지 모두 10편의 연작시가 있다. 장석남 시인이 물(水)과 먹(墨)으로 만든 그의 정원은 소슬(蕭瑟)하면서도 품격 높은 것이다. 그가 만든「수묵 정원9」에 들어선다. ‘번짐’이라는 말이 이 노래의 매개항이다. 시인은 “번져야 살지” “번져야 사랑이지”라고 노래한다. 또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고,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면서. ‘번짐’이 사랑과 예술, 삶과 죽음을 깁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노래한다. 2연으로 구분된 시의 마지막 두 행이 좀 엉뚱한 소리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옛 노래에 장단을 맞추는 장구 소리처럼 앞쪽 1연의 노래로 잘 번지고 있다. 네게로 번지는 내 노래를 너는 듣고 있는가? -이종암(시인)  
169 개처럼·2 / 나태주
임술랑
3789 2011-08-29
개처럼·2 / 나태주 새벽에 깨어 서너 시간 글 쓰고 동이 틀 무렵 다시 자리에 누워 늦잠이 들고 말았다 아마도 죽은 듯 꼼짝 않고 자고 있었을 것이다 자다가 부시시 눈을 떠보니 누군가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있었다 의아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 안방 침대에서 자고 있던 아내가 잠 깨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당신 왜 거기 그렇게 앉아 있는 거야? 당신이 안 일어나길래 여기 이렇게 개처럼 앉아 있는 거예요 개처럼? 우리는 또 그 ‘개처럼’이란 말에 마주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시에] 2011가을호 .................................................................................................................................................................................................................................................. (감상) 부부가 함께 살고 같이 늙는다는 것은 아름답다. 개처럼 앉아 있다는 말에서 사랑하는 사람 곁에 가장 낮은 자세를 취하는 모습을 읽는다. 마당에 기르는 충직한 개는 늘 주인 곁에서 왔다갔다하며 꼬리를 흔든다. 주인이 두들겨 패도 도망가지 않는다. 아내가 늦잠을 잘 때 시인은 또 개처럼 그 곁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임술랑)  
168 적멸보궁 / 이홍섭
이종암
3621 2011-08-23
적멸보궁 -설악산 봉정암 -이홍섭 젊은 장정도 오르기 힘든 깔딱고개를 넘어온 노파는 향 한 뭉치와 쌀 한 봉지를 꺼냈다 이제 살아서 다시 오지 못할 거라며 속곳 뒤집어 꼬깃꼬깃한 쌈짓돈도 모두 내놓았다 그리고는 보이지도 않는 부처님전에 절 세 번을 올리고 내처 깔딱고개를 내려갔다 시방 영감이 아프다고 저녁상을 차려야 한다고 -이홍섭 시집『숨결』(현대문학북스,2002) ------------------------------------------------------------------------------------------------------------------------------------- “깔딱고개”라는 시어가 참 재미있다. 깔딱고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봉정암(설악산 소청봉 서북쪽 해발1244m) 가는 고갯길 이름이다. 이 깔딱고개는 오르기가 너무 힘들어 숨이 깔딱깔딱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겠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노파와 병든 영감의 목숨이라는 의미도 내장하고 있는 것 같다. 시어 ‘깔딱고개’는 8行의 짧은 위 시에서 시적 분위기와 주제를 피워 올리는 중요한 장작불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부처의 사리가 봉안된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인 봉정암으로 한 노파가 이 깔딱고개를 깔딱깔딱 넘어간다. 젊은 장정도 오르기 힘들다는 깔딱고개를 넘어와 향 한 뭉치와 쌀 한 봉지, 이제 살아서 다시 오지 못할 거라며 속곡 뒤집어 꼬깃꼬깃 쌈짓돈 모두 내놓는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다. 적멸보궁이라는 부처님 진신사리가 설악산 봉정암에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잘은 모르지만, “시방 영감이 아프다고/ 저녁상을 차려야 한다고”, “내처 깔딱고개를 내려”가는 저 노파의 마음자리가 바로 적멸보궁이 아닐까. 부처(佛陀)가 어디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내 집에 있는 부모가 부처요, 부부가, 자식이 곧 부처다. 또 내 이웃이 부처다. 우리들 살아가는 곳곳의 마당이 법당이고 예배당이어야 한다. 그러면 이 세상은 죽임의 곳이 아니라 살림의 곳이 될 터. -이종암(시인)  
167 꽃을 꺾어 그대 앞에 / 양성우
김재순
3469 2011-08-15
꽃을 꺾어 그대 앞에/양성우 그대 큰 산 넘어 오랜만에 오시는 임. 꽃을 꺾어 그대 앞에 떨리는 손으로 받들고, 두 눈에 넘치는 눈물 애써 누르며 끝없이 그대를 바라보게 하라. 그대 큰 산 넘어 이슬 털고 오시는 임. 꽃을 꺾어 그대 앞에 떨리는 손으로 받들고 그대의 발, 머리 풀어 닦으며, 오히려 기쁨에 잦아드는 목소리로 그대를 위하여 길고 뜨거운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라. 아직 애국 애족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오늘 8.15, 괜스레 사무치어 독립운동 하신 모든 분들의 영전에 이 시를 놓아 드리고 싶습니다.-김재순-  
166 시인/허형만
임술랑
3749 2011-08-12
시인/허형만 귀가 없는 뱀은 혀로 듣고 개구리는 눈으로 듣는다는데 시인이여, 무엇으로 듣는가 세상으로 열린 귀가 멀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오늘 눈발이 날리는 텃밭에 쭈그려 앉아 그동안 헛소리에 병든 시들을 불태우나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감상) 문득 돌아보니 내가 이제껏 쓴 시들이 피곤해 보인다. 제대로 세상을 보고 듣지도 못하고 막 쓴 시라 여겨졌다. 눈 내린 들판에서 찬 바람에 떨며, 태워 내 몸 하나 밖에 녹이지 못 할 시들.(임술랑)  
165 사라진 손바닥 / 나희덕 movie
이종암
4068 2011-08-12
사라진 손바닥 -나희덕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나희덕 시집『사라진 손바닥』(문학과지성사,2004) ----------------------------------------------------------------------------------------------------------- 지금쯤 연못에 연꽃은 가고 연밥이 익어가고 있을까? 시의 제목 ‘사라진 손바닥’은 철지나 사라진 연못 속의 연꽃을 뜻한다. 시의 도입부에서 그려낸 연꽃의 한해살이 묘사는 참으로 절묘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연꽃이 지고 연밥 달린 대궁마저 꺾여져 연못 속으로 처박힌 그 풍광을 “수많은 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라고 한 이 빼어난 표현은 기막힌 것이다. 그런데 정작으로 시인이 표현하고자 한 속내는 시의 후반부에 모여 있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에서 짐작할 수 있듯 나는 그것을 떠나간 옛사랑에 대한 그리움으로 읽는다. ‘회산’이라는 지명이 어딘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시적 화자는 이 곳에서 떠나간 사랑을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이다. ‘사라진 손바닥’은 그러니 화자의 지나간 옛 사랑의 얼굴이다. 불교의 인연설(因緣說)을 바탕에 두고 있는 나희덕의「사라진 손바닥」은 ‘찬란한 슬픔’의 아름다운 시다. -이종암(시인)  
164 백석의 ‘여승’을 가르치는 시간/ 김경윤
김재순
3709 2011-07-28
백석의 ‘여승’을 가르치는 시간/김경윤 창밖에는 봄꽃들이 만발했다 저 홀로 핀 화사한 꽃들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꽃들은 저희들끼리 수런거리며 논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한 행 두 행 시를 읽는다 산절의 마당귀에 떨어진 여승의 머리올처럼* 가슴 속에 스미는 낱말들 아이들보다 내가 먼저 시에 취해 눈앞이 흐리다 선생의 목소린 아랑곳없이 무논에 악머구리 끓듯 조잘대던 아이들 내 젖은 눈빛에 전염이라도 된 듯 아이들 눈동자에도 영산홍 붉게 피었다 진다 일순, 교실 안이 물방개 놀다간 못물처럼 고요하다. *백석 시 ⌜여승⌟중에서 여 승(女僧)/백석 여승은 합장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수업 시간에 무논의 악머구리처럼 떠들던 아이들은 백석 시인의 여승을 읽어 내려가다가 목소리가 젖고 눈빛이 젖는 선생님의 마음이 번져 함께 못물이 되었습니다. 내 고향 뒷산에도 금굴이 3개 정도 있는데 여승은 어쩌면 내 고향 뒷산까지 와서 옥수수를 팔았고 내 할머니와 친분이 있을 수도 있겠군요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는 내 할아버지의 동료가 아니었을까 참으로 힘든 시대를 헤치며 살다간 사람들, 김경윤 선생님과 아이들처럼 내 마음도 젖습니다. -김재순-  
163 산 / 유승도 image
이종암
3314 2011-07-25
산 -유승도 나는 둥그런 산에 산다 나무와 밭으로 뒤덮인 산, 숲에서 나온 물줄기는 밭을 가로질러 산 아래 들판으로 흐른다 가끔은 구름이 내 오두막을 감싸기도 한다 내 산엔 산 같은 무덤들이 있다 아버지 어머니도 산에 묻혔다 아버진 말이 없는 분이셨다 얼굴을 본 기억이 없는 어머닌 노래를 잘 부르셨다고 한다 이제 출산 날이 다가온 아내의 배를 보니 무덤을 참 많이도 닮았다 -유승도 시집『작은 침묵들을 위하여』(창작과비평사,1999) ------------------------------------------------------------------------------------------------------ 유승도의 첫 시집『작은 침묵들을 위하여』의 여러 시편들 가운데 위「산」이라는 시가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유승도 시인은 시의 언술처럼 지금도 산에서 살고 있다. 그는 산의 팔부 능선에 화전민들이 버리고 간 빈집과 밭뙈기를 얻어다가 아내와 어린 자식 하나를 데리고 벌을 치고 밭농사를 하며 살고 있다. 낮에는 흙을 만지고 밤에는 밤바람 소리 아래서 언어를 매만지며 시를 쓰는 이른바 자연산 시인이다. 높은 산 위에 있는 그의 현주소지 강원도 영월군 예밀리 267번지에 두 번째로 갔다 온 지가 벌써 몇 해가 지나가버린 지 모르겠다. 가까이 있는 시인들 몇이 찾아가 가을걷이를 도와주겠다고 한 약속도 그렇게 몇 년을 넘겨버렸다. 그리 별로 말이 없던 시인의 아들 녀석은 지금쯤 중학생이 되었을라나, 잘 있는지 궁금하다. 둥그런 산에는 산 같이 둥그런, 불룩한 무덤이 많다. 저 무덤들 속에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들어가 계시고, 또 어머니의 어머니, 아버지의 아버지도 들어가 계신다. 나중에 나도 그리로 들어가야만 한다. 무덤은 우리의 영원한 집(幽宅)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인은 출산 직전 아내의 둥그런 배가 무덤과 참 많이 닮았다 한다. 그 둥그런 아내의 배는 이 세상 내 끈을 이어나갈 아이가 들어가 있는 곳이다. 나는 한때 경주 대릉원 담장 너머로 보이는 왕릉의 곡선에 매료되어 뻔질나게 경주를 찾은 적이 있다. 단언하건대, 이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곡선은 출산 날이 다가온 아내의 불룩한 배가 그려내는 그 곡선이다. -이종암(시인)  
162 하릴없이/이기와
임술랑
3280 2011-07-24
하릴없이 - 이기와 오리를 데리고 개울가로 간다 오리를 안아보니 속이 빈 구름이다 구름이 허공에 잠기지 않는 건 마음이 없기 때문인가 무심(無心)한 오리가 개울물에 구름처럼 종이배처럼 떠 있다 오리의 유쾌한 목욕을 반나절 지켜보고 있는 나를 누군가 불쾌하게 지켜보며 혀를 찬다 그렇게 할 일이 없냐고, 생을 가벼이 살아서야 되냐고 방울 달린 혀가 내 심심(深深)한 생각의 수면에 방울을 던져 소음의 파문을 일으킨다 오리와 내가 저속(低俗)에 빠지지 않고 물 위에 떠 있는 일 말고, 더 나은 비중(比重)의 일이란 어떤 것일까 아무리 무게를 실어 깊이 잠겨보려 해도 물은 공을 차듯 오리를 수심(水心) 밖으로 튕겨낸다 물과 놀아도 물에 젖지 않는 오리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렇게 할 일이 없냐고, 생을 가벼이 살아서야 되냐고 시집『그녀들 비탈에 서다』2007 서정시학 ................................................................................................................. (감상) 우리는 지상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아, 가볍게 둥둥 떠 다니는 오리를 그저 바라만 볼 뿐인가. 저 물 속에(低俗)에 빠저 허우적거리는 나를 보는 것 같다. 나는 어느 나이가 되서야 생을 가벼이 살 수 있는 경지에 이를까. (임술랑)  
161 물의 베개 / 박성우 imagemovie
이종암
3515 2011-07-07
물의 베개 -박성우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 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 강가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 -박성우 시집『가뜬한 잠』(창비,2007) ------------------------------------------------------------------------------------------------------------------------------------------------ 물도 잠을 자는가? 만약에 잠을 잔다면 강물도 베개를 베고 자는가? 박성우 시인은 그렇다고 말한다. 시인이 그걸 시골 마을에서 직접 보았다는데 어쩔 것인가. 어느 여름날 밤, 고향에 내려간 시인이 잠이 오지 않아 마을 앞의 강가로 나간 모양이다. 그리고 강 건너편에 앉아 밤이 이슥토록 마을 앞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다가 문득 마음의 화폭에 새겨진 커다란 그림 한 장이 바로 시「물의 베개」가 되었다.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인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를 나는 왜 보지 못했던가. 여름날 밤, 내 고향 마을 앞 동창천에서 수도 없이 봐 왔던 이 그림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는 위 시 4연에 열거된 것처럼 우리네 살림살이가 그대로 수놓아져 있다. 고된 농사일로 관절을 상한 늙은 농부의 신음 소리와 자식 대학등록금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중년 부부의 대화도, 술에 찌든 서방을 탓하는 젊은 베트남 새댁의 서툰 악다구니와 몇 명 되지는 않지만 새근새근 잠자는 아이의 숨소리도 수놓아져 있을 테다. 나는 박성우 시인의 둘째 시집『가뜬한 잠』을 읽으며 그가 언어로 짜 올린 이러한 감동적인 큰 그림을 여럿 만날 수 있어 참 행복했다. -이종암(시인)  
160 시골길 또는 술통 / 송수권 movie
이종암
3535 2011-07-05
시골길 또는 술통 -송수권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차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송수권 시선집『여승』(모아드림,2002) -------------------------------------------------------------------------------------------- 1975년『문학사상』신인상에 「山門에 기대어」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한 송수권 시인. 그의 등단 작품이자 대표작이기도 한 「山門에 기대어」는 한국문단과 독자들에게 오래 회자되고 있는 작품이다.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으로 비유된 죽은 누이(실제는 남동생이었다고 함)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과 한(恨)을 유장하고 처연한 가락에 실어 놓은 송수권의 노래는 가히 절창이었다. 송수권 선생이 며칠 후면 ‘푸른시인학교’ 초청 시인으로 포항에 온다고 한다. 어서 달려가 그의 노래를 듣고 싶다. 비교적 선생의 최근작인「시골길 또는 술통」이라는 시를 읽는다. 무척 재미가 있다. 시 속의 저 시골길, 1970년대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의 시골길이 꼭 이랬다. 학교가 있고 버스가 다니던 명대 마을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가득 실은 커다란 짐자전거가 이웃 마을인 사깔, 북지, 그리고 우리 동네 길명의 신작로로 들락날락 했다. 짐칸엔 두 말들이 하얀 플라스틱 술통이, 자전거 바퀴 양옆에도 쇠고리에 술통을 매달고 비포장도로에 자전거가 씩씩 달려가던 그 풍광이 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런 살아 숨쉬는, 생명력 넘치는 시를 만나면 괜히 즐겁다. 시골길도 술을 마신 것 같고, 이 시를 읽는 나도 詩도 술을 마신 것만 같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는 마지막 행이 기막힌 표현이다. 주모의 치마 속은 아주아주 무서운 곳이다. -이종암(시인)  
159 부드러운 산소/ 박승민
임술랑
3290 2011-07-04
부드러운 산소 박승민 약 기운에 쓰러져 잠든 아이의 손을 꼭 잡는다 아이의 손이 내 손을 찾는다 "엄마, 돈 벌면 아빠 다-줘-이 씨!" "앞으로 내 이름은 그레고리오야" 이 말을 끝으로 아이는 말문을 닫았다 양파껍질을 벗기듯 하루씩, 꼭 하루씩, 빠르게 지구의 껍질을 벗기며 아주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가 보다 지구는 아무래도 산소가 부족한가 보다 허기사 누군들 아침에 입던 옷을 접어 머리맡에 수의처럼 놓고 잠들지 않은 밤이 있으랴 네가 벗기다만 껍질을 마저 벗기며 나 또한 하루하루 가벼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주에는 부드러운 산소(山所)가 아주 많을 것 같다 시집[지붕의 등뼈] 2011푸른사상 .................................................................................................................................................................................................. (감상) 사랑하는 아이가 산소(O)가 많은 산소(山所)에 가 있으므로 해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불분명해 졌다. 시인이 자주 아이를 찾아 그 경계를 넘나들기 때문이리라. 하여 부드러운 산소를 호흡하게 되는 것이다.(임술랑)  
158 소리의 거처 / 조용미 imagemovie
이종암
3639 2011-07-01
소리의 거처 -조용미 비 오는 숲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다 숲의 벚나무 가지들이 검게 변한다 숲 속의 모든 빛은 벚나무 껍질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흑탄처럼 검어진 우람한 벚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숲에서 사라진 모든 소리의 중심에는 그 검은빛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른 연못에 물이 들어차고 연못에 벚나무와 느티나무의 검은 가지와 잎과 흐린 하늘 몇 쪽과 빗방울들이 만드는 둥근 징소리의 무늬들 가득하다 계류의 물소리는 숲을 내려가는 돌다리 위에서 어느 순간 가장 밝아지다가 뚝 떨어지며 이내 캄캄해진다 현통사 霽月堂의 月자가 옆으로, 누워 있다 계곡 물소리에 쓸린 것인지 물 흐르는 방향으로 올려 붙은 달, 물에 비친 달도 현통사 옆에선 떠내려 갈 듯하다 비 오는 날 숲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 뒤에 숨는다 -『2009현대문학 수상 시집』(현대문학,2008) ----------------------------------------------------------------------------------------------------- 다른 사람이 쓴 좋은 시를 베껴 옮겨 적은 내 공책에서 조용미 시인의 시를 찾아 읽는다.「魚飛山」「삼베옷을 입은 自畵像」「검은 담즙」「소나무」「물소리를 듣는다-묵계리」「겨울 논」「門을 열다」와 같은 시를 읽으며 조용미의 시는 벼랑의 삶에서 생(生)과 사(死)의 긴 고랑을 깁는 환(幻)의 노래라는 생각을 했다. 위 시에서 나는 소리(音)라는 말, 거처(居處)라는 말은 알겠는데, ‘소리의 거처’는 잘 모르겠다. 검은 빛이라는 말은 알지만서도, “숲에서 사라진 모든 소리의 중심에는 그 검은빛이 관여하고 있음”이라는 것은 잘 모르겠다. 조용미의 시「소리의 거처」는 어렵다. 시적 의미의 해독이 분명하지 않는데도 이 시는 거듭 나를 자기 안으로 끌어당긴다. 그래서 자꾸 읽는다. 분명치 않은 시의 의미가 거문고 소리처럼 내 몸을 통과한다. 내 몸에 “둥근 징소리의 무늬들”이 쌓이는 것만 같다. 좀 더 있으면 제월당의 月자가 옆으로 누운 이유도, 소리의 거처도, 소리에 관여하는 검은빛도 이해할 것만 같다. 뻥이다. 어이쿠, 얼른 저 물소리 뒤로 숨어야겠다. -이종암(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