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20호...
   2020년 06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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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371 7월의 거울 / 황희순
남태식
2421 2018-03-30
7월의 거울 황 희 순 개미 떼에 끌려가는 무당벌레 포기한 걸까, 왜 반항하지 않나 누구 편을 들어줄까 개미굴로 끌려 들어갈 즈음 무당벌레가 지그재그로 줄행랑친다 장난삼아 앞을 막았더니 딱 멈춘다 광속으로 몰려온 개미 떼가 다시 끌고 간다 왜 참견했느냐 따지지 마라, 재수 없는 네가 재수 없는 인간을 만난 것일 뿐 살아있는 한, 길 막는 발 깨물고라도 잽싸게 도망쳐야지, 누굴 원망해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숨 끊어질 때까지 빡빡 기어가야지 먹거나 먹히거나, 이도 저도 아니거나 그들의 게임이 어떻게 끝났는지, 나는 모르는 일이다 *** 우리는 결코 게이머가 아니다. 우리는 신처럼 군림하는 자본에 속고 있을 뿐이다. 게임은 저들의 것이다. 저들이 우리들의 게임이라 부르며 붙여놓은 이 아닌 게임에서 우리가 할 일은 탈출하거나 무시하거나이다. 속지 마시라. 우리는 결코 게이머일 수가 없다. 진짜 게임은 저 가짜 신인 자본에게 신청할 일이다.  
370 그렇게 못할 수도 / 제인 케니언
남태식
2946 2018-02-07
그렇게 못할 수도 제인 케니언(류시화 옮김) 건강한 다리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시리얼과 달콤한 우유와 흠 없이 잘 익은 복숭아를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개를 데리고 언덕 위 자작나무 숲으로 산책을 갔다. 오전 내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웠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은촛대가 놓인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벽에 그림이 걸린 방에서 잠을 자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어느 날인가는 그렇게 못하게 되리라는 걸. *** 쉰을 넘기면 그 이후의 삶은 덤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쉰을 넘겨 덤의 삶이 몇 년 계속되자 나는 신기하게도 행복해졌다. 내 주어진 삶이 쉰까지라는 생각의 시작과 이유가 무엇이었든 결과는 쉰을 넘기자 나는 이유 없이 행복해졌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어느 날인가는 / 그렇게 못하게 되리라는 걸.' 이 삶이 언제까지나 계속 되지 않으리라는 걸 나 역시 안다. 하니 이제와서 새삼스레 나는 내 삶에 어떤 과한 목적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크든 작든 욕심은 행복을 해칠 것이다.  
369 천장 / 최라라
남태식
2564 2017-11-20
천장 최라라 나는 저것이 나를 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실눈 살짝 뜨고 바라볼 때 저것도 나를 본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나는 아침마다 사타구니에 베개를 끼우고 저게 다 듣고 있는 줄 알면서도 신음소리를 낸다 저거 반응 좀 보려다가 나도 모르는 내 별꼴 다 보겠다 저거 핑계대고 별짓 다해 보겠다 한 번 보여주고 나서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날마다 하겠다 나는 이제 저것이 나를 안 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 ' 2017년 11월 15일 내 사는 포항 지진 이전에 천장은 다만 애써 김춘수였지만, 지진 이후에 천장은 자연스레 김수영이다. 눈을 감고 뜰 때마다 나는 이제 천장을 모른 척할 수가 없다.' 2017년 11월 15일 제가 사는 포항에 지진이 왔습니다. 진도 5.4 지진으로 작년 경주에 이어 두 번째로 진도가 높은 지진이랍니다. 진도는 경주의 1/ 4 수준이라는데 피해는 더 크답니다. 진앙지에서 멀지 않은 제가 사는 아파트도 여러곳에 지반 침하, 아파트 내외벽에 균열이 왔습니다. 그 날 이후 여진이 계속되고 있는데 어젯밤과 오늘 아침에도 진도 3.0 이상의 꽤 큰 여진이 왔다 갔습니다. 일요일이어서 오랫만에 목욕탕에 들렀다가 아파트 내 커피점에서 커피를 한 잔 하면서 시집을 읽고 가자 들고 나온 시집에서 이 시를 만났습니다. 처음 읽는 시는 아니었는데 확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더군요. 이전과 이후. 어떤 사건의 이전과 이후에 모든 것이 달라지는, 달라져 보이는 경험을 수없이 했습니다. 위에 적은 글은 이번 포항 지진 역시 내 삶에 이전과 이후라는 새로운 한 획을 긋겠구나 생각하는 순간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적은 것입니다.  
368 애국자 / 양진기
남태식
2195 2017-10-09
애국자 양 진 기 민소매에 반바지를 입은 허연 머리의 그가 절뚝거리는 자전거를 끌고 지하철에 승차하셨다 낮술에 불콰해진 얼굴로 좌중을 훑어보며 씨팔, 씨팔 주먹으로 출입문 창을 탕탕 쳤다 손을 권총 모양으로 접고서 앉아있는 가슴들을 겨냥해 또 다시 탕탕 이새낀지 이석긴지 빨갱이들 쓸어버려야 한다고 허공을 향해 주먹질 몇 번 발길질 하다가 제풀에 나동그라진다 통로에 세워진 그의 자전거 라디오에선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왕왕거리고 핸들에 꽂힌 태극기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여 묵념을 한다 벌떡 일어난 그는 정물처럼 앉아있는 승객들에게 호통을 친다 젊은 것들 정신 차려 대한민국 만세야 그는 때가 낀 손톱으로 겨드랑이를 벅벅 긁으며 한 끼 무료급식소가 있는 청량리역에서 내리셨다 그가 내리자 바닥에 깔렸던 눈길들이 수런거리기 시작한다 *** 2015년 7월 11일 한겨레신문 토요판 생명, 태산이 복순이 바다 돌아간 날 "국기에 대한 경례도 않고 돌고래는 떠났다." 시대상황이 반영된 감동이겠지만 이 문장은 멋지다. 과속과 역주행에 슬그머니 발을 거는 아름다운 정주행이다. 국기를 걷는 아침 - 졸시 '국기를 걷는 아침' 전문 오랫만에 국경일에 국기를 내걸었다. 국경일만 되면 애국심 고취 운운하면서 국기 게양을 종용하는 아파트 구내 방송이 몇 일에 걸쳐 여러 번 나왔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번번이 국기 걸기를 포기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우리집만의 일이 아니다. 거의 전 아파트가 어느 날 부터인가 갑자기 국경일에 국기를 내다걸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동안 국경일에 아파트 베란다에 내걸린 국기 보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다. 위의 시가 쓰여진 것이 2015년 10월이고, 위의 시가 쓰여진 신문기사가 실린 것이 시에 나온대로 2015년 7월이니, 국경일에 우리 아파트 각 가정에서 국기를 내걸지 않게 된 것은 훨씬 그 전으로, 추측하건대 아마 국경일에 도로가는 물론이고 아파트 내의 구내 도로까지 국기로 뒤덮이게 된 이후부터가 아닐까 싶다. 도로가야 국경일에 경축의 의미로 국기를 내거는 것이야 오래된 것이어서 조금 더 강화되긴 했어도 그러려니 했지만, 아파트 구내 도로까지 온통 국기로 뒤덮는 것에는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마뜩잖았으리라. 하니 어느 날인가부터 약속이나 한 듯 베란다에서 국기가 한꺼번에 사라졌겠지. 이번 긴 연휴 시작 전에도 역시 언제나처럼 국기 게양을 종용하는 구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멘트는 역시 언제나와 다름없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오랫만에 국기를 내다걸기로 했다. 국기를 걸려고 꽂아놓은 함에서 꺼내니 먼지가 풀쩍 일었다. 세상에 내걸지는 않았어도 가끔 먼지는 털어줄 걸. 내걸고 난 뒤 혹시나 싶어 내다보았더니 아파트 구내 도로에 걸린 국기는 반으로 줄었지만 몇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국기를 내다건 집은 거의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애국심이 어디 인위적으로 강제한다고 되는 것이든가. 국기를 걸어야 할 아침에 되려 국기를 걷는 아침이라는 시를 쓰고 2년만에 나는 국경일에 홀가분하게 정부에서 종용하는대로 국기를 내걸고 열흘 동안 두었다가 내렸다. 오늘이 한글날로 그 열흘의 마지막 날이다. (2017. 10. 09)  
367 꽃 / 김사인
남태식
3046 2017-05-06
꽃 김사인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 아마 그랬을 겁니다. 이왕 누운 것 좀 더 누워 있으려다가도, '새끼들 밥 해멕여 / 학교 보내야지' '일어나거라' 하는 외침에 평생 '꽃'이라는 이름으로 온전하게 불린 적도 없으면서, 제 잘 난 맛에, 제 잘 난 의무감에, 완벽한 딸, 완벽한 아내, 완벽한 며느리, 완벽한 어머니의 짐을 짐 아닌 '꽃'으로 생각하면서, 안 보는 곳에서 아이고 내 팔자야 투덜거리면서 일어나 '새끼들 밥 해멕여' 보낼라고 미처 다 추스리지도 못한 아픈 몸 끌고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을 겁니다. 그렇게 살았을 겁니다. 그렇게 살아서 가슴에 숱한 멍 들었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가슴에 진 멍울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정말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 겁니다. 보일 수 없었을 겁니다. 차마 보일 수 없었을 겁니다. 멍울 보여서 가슴 아파 할 어머니, 아버지, 내 새끼, 아이고 내 새끼, 그리고 동기(同氣)들, 눈에 밟히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였을 겁니다. 가슴에 진 멍울 누군가에게 넘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 겁니다. 혼자 오롯이 지고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고 갔을 겁니다. 이리하여 가고 난 뒤에야 뒤늦게 우리는 부음을 듣습니다. 아내의 친동기는 아니지만 아내가 친동기처럼 가깝게 지내던 동기의 부음을 듣고 조문을 다녀왔습니다. 처음 부음을 듣고 긴가민가 하다가 사실을 확인한 뒤에 갑작스레 울다가 소리치다가 혼잣소리하다가 또 울면서 넋을 놓는 아내를 보아서이기도 했지만, 마지막 가는 길에 미련은 안 남기게 해야지 하는 마음에 어쩔 수 없이 돌아와야만 하는 애매한 상황에 있는 아내를 구슬려 하룻밤을 다른 동기들과 함께 지내고 마지막 가는 길까지 배웅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아내는 먹는둥마는둥 허겁지겁 과일을 잘라 몇 조각 먹더니 저녁도 거르고 안방으로 들어가 누웠습니다. 나도 밀린 신문을 읽고 티브이를 보는둥마는둥 멍하니 앉았다가 평소보다 많이 이른 시간에 잤습니다.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아내의 곁을 지키기는 했지만 나 역시 심사가 복잡했지요. 그리고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 여전히 한밤중입니다. 한 세 시간여이긴 해도 자고 나니 그런대로 정신이 이제 온전히 현실로 돌아온 듯하여 시집을 펼쳤다가 이 시를 만났습니다. 김사인의 '꽃'. 평소 같았으면 '그저 예찬'했을 '명시'로 읽었을 시였지만, 복잡한 심사를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여서인지 슬그머니 부아가 일었습니다. 부아가 일어 '모진 비바람에 / 마침내 꽃이 누웠다 //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 들창을 미느니 // 살아야지 // 일어나거라, 꽃아 / 새끼들 밥 해멕여 / 학교 보내야지' 하는 마음 이제 다 놓고 가거라, 꽃아, 이제 가거라, 꽃아 하면서 첫 연을 마지막 연 뒤에 덧붙여 한 번 더 '모진 비바람에 / 마침내 꽃이 누웠다' 하고 읽고, 그래 이제 가거라, 꽃아, 잘 가거라, 꽃아, 고생했다, 꽃아, 한 번 더, 쓰기에 '꽃'이지 '꽃'이 아닌 아내의 동기의 '본 이름'을 부르며, '꽃' 대접도 않으면서 '꽃'으로 부르는 이들을 향한 부아는 놓아 두고, 보내는 인사를 했습니다. 이런 부아는 시인의 다른 시 '경주 이씨 효열비' '화진'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봄바다' 등에서도 일었던 부아와 거의 같은 부아입니다. '낭만'이 '폭력'이 되기도 하는 지경. 안방에서 마른 기침 소리가 들립니다. 자는 줄로만 알았던 아내도 벌써 깨어나 일어나지만 않은 채 다시 잠 못들고 있나 봅니다.  
366 이 모든 일 이전에 겨울이 있었다 / 황인찬
남태식
2773 2017-04-30
이 모든 일 이전에 겨울이 있었다 황 인 찬 차에서 눈을 뜨면 바깥이 보이지 않는다 창을 닦으면 살짝 보이고 깜빡 잠들었구나 밖은 국경 너머 눈의 고장인 듯 아닌 듯 무인지경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저 새하얀 눈은 언제 다 내렸을까 겨울도 아닌데 같이 웃고 떠들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원래 없었지 또 바깥은 보이지 않는다 창을 닦으면 또 살짝 보이고 눈은 오지 않는다 지금은 겨울이 아니니까 이제 겨울은 없으니까 예전에는 겨울이 있었다 국경도 있었다 안도 있고 밖도 있고 뛰어노는 애들도 있고 좋았다 그때는 눈도 터널도 나라도 다 있었으니까 그런 겨울도 있을 수 있었다 그런 날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저 새하얀 것들은 무엇일까 저걸 뭐라고 부르나 나는 대체 무엇으로 창을 닦은 걸까 또 바깥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모두 하얗다 보이지 않는다 눈은 내리지 않는 것이다 겨울은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인 것이다 그렇다면 저 새하얀 것들은…… 공포에 질려 있을 때 누군가가 창밖에서 문을 두드린다 그렇게 써 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출근길, 터널을 벗어나면 요즘은 늘 만나는 것이 먼지눈입니다. 먼 곳에서 먼지눈이 내립니다. 하얗게 내리는 것이 눈 같아서 처음엔 이 봄에 웬 눈, 그러다가 그걸 먼지눈이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번번이 또 깜빡 잊고 눈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비가 온 뒤 만나는 아침길은 청명한 느낌이어서 시야가 쨍 하고 맑아 보였었는데, 요즘엔 비가 온 뒤 만나는 아침길도 뿌옇게 시야가 흐립니다. 일단 시인의 손을 떠난 시는 독자의 몫이라는 것 다시 느낍니다. 시인이 무엇을 상상했든 독자인 제 상상과는 무관합니다. 어쩌다가 같을 때도 있기야 하겠지만요. 이런 식입니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 수업을 하러 왔다 애들이 아직 오지 않아 큰 일이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 아무도 하지 않는 대답이 있다 아무도 앉지 않는 책걸상도 있다' '나는 출석부를 읽는다 / 하얗게 비어 있는 출석부다'(이상 황인찬의 시 '역사 수업' 일부) 시인이 이런 상상을 했든 안 했든 나는 이 시에서 '안산'과 '단원고'와 '2학년생들'을 떠올립니다. 아직 세월호는 추억의 장으로 넘길 수 없는 기억이고 현재라서 어떤 비슷한 이미지만 나와도 자동적으로 떠오릅니다. 하니 시의 주인은 결국 독자가 되는 셈입니다. 재난시대여서인가요. 시인이 그려내는 정황만으로 나는 또 다른 재난상황을 떠올립니다. 핵폭발 이후의 지구. 먼지, 먼지눈, 재. 내리고 날리고 쌓이고. 핵폭발을 상상하는 것, 핵폭발 이후의 지구를 상상하는 것은 어쩌면 상상이 아닙니다. 이미 재난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큰 재난을 막기 위한 방편을 상상해야 할 때입니다.  
365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 폴레트 켈리
남태식
7054 2017-04-25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ㅡ 피해 여성이 피해 여성에게 주는 편지 폴레트 켈리(가정 폭력 생존자, 여성운동가)(신혜수 번역, 정희진 수정)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제 생일도 아니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우리는 처음으로 말다툼을 했어요. 그가 던진 수많은 잔인한 말들에 저는 정말 가슴이 아팠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미안해하는 것도, 그리고 그가 한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우리의 기념일도 아니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그는 저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어요. 마치 악몽 같았어요. 현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죠. 오늘 아침 깨어났을 때 제 몸은 온통 아프고 멍투성이였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할 거라는 걸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어머니의 날'도 아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그는 저를 또다시 때렸어요. 이제까지 어느 때보다 훨씬 심하게요. 만약에 그를 떠난다면, 저는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제 아이들을 돌보나요? 돈은 어떻게 하고요? 저는 그가 무섭기도 하지만 그를 떠나기도 두려워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할 거라는 걸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답니다. 제 장례식 날이었거든요. 지난밤 그는 결국 저를 죽였습니다. 죽을 때까지 때려서요. 만약에 그를 떠날 만큼 용기와 힘을 냈다면, 저는 아마 오늘 꽃을 받지는 않았을 거예요. *** 이 시는 최근 들어 스스로를 평화학, 여성학 연구자로 부르며, 약력에서 학문 간 경계를 넘나드는 공부와 글쓰기를 지향한다고 하는 정희진이 쓴 '아내 폭럭'에 대한 연구서인 <아주 친밀한 폭력>의 드는 문에 실린 시입니다. 이 시를 읽고 나는 엄청난 충격을 느꼈는데, 문 안으로 들어서서 나올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심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시의 감상은 이로써 충격 한 단어로 충분하지만 굳이 소개하는 것은 이 시와 더불어 정희진의 책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란을 찾으시는 분들께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364 가면과의 입맞춤 / 김형술 [1]
남태식
2637 2017-03-28
가면과의 입맞춤 김형술 거래는 끝났다. 목에 걸린 얼굴을 풀어 서류가방 속에 숨긴다 카메라, 꽃다발, 목걸이, 선글라스 목에 걸어 마땅한 것들을 찾아 호주머니를 헤집는 손은 온통 피투성이 날카롭게 금이 간 거울로 뒤덮인 세상에 갇힌다 사람들 붉은 혀를 가진 거울들 열세 개의 눈을 가진 벽 앞에서 사정없이 흔들리는 얼굴을 본다 나, 사분오열하는 불편한 물체 모든 거래는 제 얼굴을 거는 것 아니 얼굴 없는 몸, 가슴 없는 손의 뒷거래로 얼굴을 숨기는 일 뜨겁고 탐욕스런 손발 노래를 잃은 산문의 입술 영혼을 잘라버리는 위험한 흉기로 거래는 언제나 시작되고 날마다 새로운 얼굴을 목에 걸어야 하는 얼굴 없는 목숨 처음부터 얼굴이 없었던 종족인 수천 번 수만 번 허기진 내 그리움은 주검과의 조우 딱딱하게 굳어 악취마저 풍기지 않는 가면과의 차가운 입맞춤 신분증, 안경, USB, 넥타이 거래는 끝나지 않는다 내 얼굴은 늘 가슴께에 매달려 있다 *** 시를 읽는 행위는 만남의 행위입니다. 가끔 잊고는 하지만 어떤 상황 앞에서 종종 잊었던 이 사실을 새삼 깨닫고는 합니다. 이 시는 상주에서 포항 오는 버스 안에서 만났습니다. 상주에서 오늘까지 열고 있는 이 문학웹진의 고창근 편집인의 전시장에 들렀다가 오는 길이었습니다. 그 전날에는 서울 인사동에서 열고 있는 제 고향친구의 전시장에 들렀었지요. 제 친구의 전시 주제는 '색으로 떠나는 여행', 고창근 작가의 전시 주제는 '나는 누구인가'로 대상과 주제 모두 달랐습니다. 하지만 서울에서 본 것은 온통 뭉갠 풍경이었고, 상주에서 본 건 온통 뭉갠 얼굴이었으니, '뭉갬'이라는 표현 방법으로 보면 공통적인 것도 있구나 싶습니다. 하지만 뭉갰다고 해서 대상이 보이지 않는 건 아닙니다. 한참을 들여다보니 친구의 그림 속에서는 애초에 보여주고자 했던 풍경이, 고창근 작가의 그림 속에서는 역시 보여주고자 했던 얼굴이 보였습니다. 야경을 그린 친구의 그림 속에서는 친구의 고향 산과 바다, 친구가 잠시 머물렀던 외국의 어느 도시, 아마 스케치 여행을 떠나서 만났지 싶은 항구의 풍경들이 희미한 빛과 어둠 속에서 보였습니다. 고창근 작가가 선택한 거울캔버스(미러지, 거울)는 그림 속의 얼굴과 보는 이의 얼굴을 겹쳐서 보라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보여준 표정들이 너무 많고 강해서 미처 내 얼굴을 같이 담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친구의 기억 속의 풍경은 내 기억과 많이 겹쳐 있었으나, 고창근 작가가 그린 얼굴 표정은 내 얼굴 표정과는 겹치는 부분이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시집을 펼쳤는데 이 시를 만났습니다. '가면과의 입맞춤' 아, 했습니다. 전시장에서 보았던 그 많은 표정과 표정의 얼굴들을 내가 미처 못 느끼고 지나갔을 뿐이지 내게도 저렇게 많은 표정과 표정의 얼굴들이 있거나 있었겠다 싶은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습니다. 숨긴 얼굴들과 숨겨야 했던 얼굴들. 잊은 얼굴들과 잊어야 했던 얼굴들. 그리고, 또 그리고 ...... 나 역시 '얼굴'에 대한 시를 썼던 적이 있었구나 했습니다. 아래는 제가 쓴 얼굴에 대한 시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미 내 얼굴 잊은 지 오래 그대는 그대 얼굴 잊지 않았는가 숲의 얼굴 보리라 물 되어 강 아래로 흐르기도 하고 구름 되어 비로 내리기도 하고 돌 되어 이리저리 구르기도 하고 새 되어 나무와 나무 건너뛰며 노래 부르기도 해 돌아서면 밤새 내 목덜미 훔치던 숲의 부드럽고 거친 숨소리 연신 내 허리 휘감던 숲의 손길 단내 풍기며 누르던 알싸한 숲의 입술에 취해 온 몸으로 피워 올렸던 내 꽃밭의 꽃잎 수도 없이 뚝 뚝 떨어뜨리며 아아 드디어 보겠네 고개 들면 숲은 그저 얼굴 없는 짐승일 뿐 애초부터 숲은 얼굴 없는 짐승이었던가 하여 다시 나는 찾으리라 하지만 찾을 수 없어 혹여 잠 속에서 찾을까 깊은 잠에 들지만 잠 속에서도 보이지 않아 밤새 뒤척이다 아침이면 비에 씻긴 햇살에 찰랑대는 잎새처럼 늘 말갛게 방긋거리며 거리로 나서지만 나는 이미 내 얼굴 잊은 지 오래 거리로 함께 나선 그대는 아직 기억하시는가 혹여 그대는 잠 속에서나마 그대 얼굴 보시는가 - 졸시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하다'  
363 고드름 / 백우선
남태식
2457 2017-03-22
고드름 백우선 온 가족이 흘리고 흘린 눈물이 깊고 어두운 집집에 가득 차올라 넘쳐 처마에서 뚝뚝 떨어졌네 날로 더 흐리고 추워지자 얼어서 창이 되었네 그치지 않는 눈물과 한숨에 길어지는 창의 끝은 그들의 머리를 향해 점점 내려왔네 *** 봄이 오고 있습니다. 낮밤 기온차가 높고 때로 세찬 바람이 몰아치기도 하지만, 그래도 봄이 오고 있습니다. 오는 봄에는 그 해에 잃은 꽃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을까요. 다시 불러도 그 해 이전에 불렀던 노래와 같을 수는 없어도 잃었던 꽃노래를 다시 부르고 싶은 마음 여전 간절합니다. 깊고 어두운 집집에서 창이 되어 가슴을 찌르는 눈물을 흘리고 흘린 가족들의 간절함이야 이루 말로 다 할 수는 없겠지만, 이 봄에는 드디어, 마침내, 결국, 아! 머리를 향해 내려온 창이 봄눈 녹듯 다 녹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362 고라니에게 몸살을 옮다 / 박승민
남태식
2343 2017-03-20
고라니에게 몸살을 옮다 박승민 메밀밭이 있던 눈밭에서 고라니가 운다. 희미한 비음이 눈보라에 밤새도록 쓸려 온다. 나는 자는 척 베개에 목을 괴고 누웠지만 다시 몸을 뒤척여 민물새우처럼 등을 구부려 돌아누워 보지만 눈바람에 실려오는 울음소리가 달팽이관을 자꾸 건드린다. 바람소리와 울음소리가 비벼진 두 소리를 떼어내 보느라 눈알을 말똥거린다. 눈밭에 묻힌 발이 내게 건너오는지 흘러내리는 찬 콧물이 옮겨오는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코가 맹맹하고 팔다리가 자꾸 쑤신다. 어떤 생각만으로도 몸살은 오는지 몸살은 몸속의 한기를 내보내서 몸을 살리라는 뜻인데 나도 모르는 어떤 응달이 아직 살고 있는지 귀를 쫑긋한다. 아내에게는 고라니에게 몸살을 옮았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혼자 약 지으러 간다. *** 한 해에 한 번은 오지게 몸살을 앓습니다. 몸과 마음이 피곤하면 몸살기야 한 해에 여러 번 알게도 모르게도 왔다 가지만, 몸과 마음이 다 지쳐 떨어질 정도의 심한 몸살은 기억으로는 한 해에 딱 한 번 옵니다. 제 이런 몸살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때 쯤에 주로 옵니다. 해서 언제 오든 그 철이 겨울에서 봄 사이에 있으면 아 올해는 봄이 빨리 오나 보다, 어머나 올해는 봄이 늦네 하고 단정을 짓고는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 봄이 왔다고 하기도 하고 봄이 아직 안 왔다고 하기도 합니다. 봄이 오는 것은 제 몸살이 오고 안 오고에 딸려있기 때문입니다. 제게 있어 '어떤 생각만으로도 몸살은' 옵니다. '나도 모르는 어떤 응달이' 내 몸과 마음의 어딘가에 여전 '살고 있는지' '생각만으로도' 어느날 갑자기 온 몸과 마음에 찬 기운이 돌고, 감당할 수 없을만큼 큰 아픔과 슬픔이 오고, 마침내 그리움, 어떤 알 수 없는 그리움까지 찾아오면 제 몸과 마음은 나도 모르는 낭떠러지로 밀려가 추락합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씻은 듯 말끔하게 일어서서 돌아옵니다. 돌아오면 늘 창 밖에 봄이 와 있습니다. 올해는 아직 몸살을 안 앓았는데 밖은 벌써 봄이니 올봄에는 이런 몸살 없이 봄을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이 시의 화자도 심한 그리움을 앓고 있나 봅니다. 화자의 그리움은 이 겨울 지금은 '눈밭'이 된 '메밀밭' 자리에도 있나 봅니다. '고라니' 핑계를 대며 훌쩍거리고 있는 이제는 중년을 넘긴 어떤 사내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코가 막혔으니 그 그리움은 이미 도를 넘고 있겠습니다. 대체 '아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그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애써 추궁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누가 제게 수십 년 간 안고 오는 제 오진 그 그리움이 무언지 묻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같습니다. 그래도 시간은 가고 철은 넘어서 봄은 여전히 오고 있습니다.  
361 걷는다는 것 / 장옥관
남태식
2568 2017-03-16
걷는다는 것 장옥관 길에도 뼈가 있었구나 차도로만 다닐 때는 몰랐던 길의 등뼈 육차선 대로변 인도 한가운데 우둘투둘 뼈마디 샛노랗게 뻗어 있다 뼈마디를 밟고 저기 저 사람 한 걸음 한 걸음 걸음을 만들어 내고 있다 밑창이 들릴 때마다 나타나는 검은 혓바닥 갈라진 거울처럼 대낮의 허리가 시큰거린다 온몸이 혓바닥이 되어 핥아야 할 뼈마디 내 등짝에도 숨어 있다 *** 지난 여름 제 친구 중 한 친구가 쓰러졌습니다. 고객과 상담 겸 해서 점심을 먹던 식사자리에서였다네요. 이런 것을 두고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도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이 친구 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어 위기는 넘겼으나 반신마비가 왔지요. 꾸준한 재활치료로 말을 먼저 찾더니 얼마전부터는 입이 다 풀려서 옛날의 수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꾸준한 운동에도 근육은 거의 안 풀려서 거동은 여전히 불편한 상태인 이 친구 많이 답답해서인지 어제도 전화를 해서 푸념을 한참 풀어놓았습니다. 이 시는 처음 대하는 시는 아닙니다. 여기저기에서 꽤 자주 만났던 시임에도 저리도록 시린 감정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문득 친구가 떠오르면서 무심하게 보았거나 이해하지 못했던 시어들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차로로만 다니던 시인이 대로변을 직접 걷게 되면서 ' 우둘투둘 샛노란 뼈마디 길'을 새삼 만났듯이, 저는 제 친구의 일을 겪으면서 이 시를 새삼 제대로 만난 셈입니다. '우둘투둘 샛노란 뼈마디 길'이 아니더라도 제 친구가 일어서서 다시 만나는 길은 모두 뼈마디 길처럼 우둘투둘할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런 길이라도 '한 걸음 한 걸음' 만들어 내는 걸음일지라도 제 친구는 무척 절실할 것입니다. 말은 조급해하지 말라고, 꾸준하게 운동하다 보면 걸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 했지만, 저 역시 제 친구가 빨리 걸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360 시 / 파블로 네루다
남태식
2382 2017-02-27
시 파블로 네루다(김현균 옮김) 그래 그 무렵이었다 ...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밤의 가지들로부터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얼굴도 없이 저만치 지키고 섰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입술은 얼어붙었고 눈먼 사람처럼 앞이 캄캄했다. 그때 무언가가 내 영혼 속에서 꿈틀거렸다. 열병 혹은 잃어버린 날개들. 그 불탄 상처를 해독하며 난 고독해져 갔다. 그리고 막연히 첫 행을 썼다. 형체도 없는, 어렴풋한, 순전한 헛소리, 쥐뿔도 모르는 자의 알랑한 지혜, 그때 나는 갑자기 보았다. 하늘이 흩어지고 열리는 것을 행성들을 고동치는 농장들을 화살과 불과 꽃에 들쑤셔진 그림자를 소용돌이치는 밤을, 우주를 보았다. 그리고 나, 티끌만 한 존재는 신비를 닮은, 신비의. 형상을 한, 별이 가득 뿌려진 거대한 허공에 취해 스스로 순수한 심연의 일부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별들과 함께 떠돌았고 내 가슴은 바람 속에 풀려났다. *** 죽은 땅을 뚫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봄은 마른 겨울을 밀치고 오려나, 라고 썼다가, 죽은 땅을 뚫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봄은 마른 겨울을 밀치고 온다, 라고 고쳐 쓴다. 우리는 지금 겨울과 봄의 경계에 서 있다. 무모한 희망은 없다. 불현듯 시가 오고, 불현듯 촛불이 왔듯이, 이렇게 불현듯 봄도 오리라. 하지만 사실 어느 것 하나도 불현듯 오거나 온 것은 없다.  
359 저온 화상 / 안상학
남태식
3279 2017-02-21
저온화상 안상학 혹한의 집에 들어 전기난로를 쬔다 간밤 내 정강이를 지진 주범에게 손을 내밀다니 그래, 사실, 너는 잘못이 없다 따뜻함에 취해 술에 취해 잠에 취해 너무 오래 너를 가까이한 내 죄를 손 비빈다 네 덕분에 외과 의사에게서 한 수 배웠다 화상이란 치료하기에 따라서 잘하면 있던 병도 고칠 수 있고 잘못하면 없던 병도 얻을 수 있다 했다 따뜻한 것에게도 상처를 입을 수 있다 했다 상처를 치료하는 의사의 손을 보면서 나는 마음의 상처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따뜻한 너를 너무 오래 가까이해서 천천히 익어버린 정강이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나는 내 마음에도 무엇을 오래 가까이해서 생긴 상처들이 여러 군데 있는 것을 알았다 잘 아물어서 더 빛나는 것들과 덧나서 오래 진물이 흐르는 것들의 잔해 전기난로를 적당히 다가 끼고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히 언 손을 내밀며 생각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파리처럼 손을 비비며 내가 잘못했다고 그럴 수만 있다면 다 늦은 마음의 상처들을 불러내고 따뜻하기만 했던 상처의 주인들도 모셔다가 중재를 시켜주고도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전기난로를 아주 가까이는 마주하지 않으면서 뜨뜻미지근하게 쳐다보기만은 하면서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하면서 손을 쬔다 *** 상처는 어디에서나 온다. 안에서도 오고 밖에서도 온다. 위에서도 오고 아래에서도 온다. 멀리하는 이에게서도 오고 친한 이에게서도 온다. 천천히 오기도 하고 순식간에 오기도 한다. 책에서도 오고 신문에서도 온다. 소리에서도 오고 소음에서도 온다. 상처가 무서워서, 상처를 입을까 무서워서, 어떤 신문은 멀리한다. 어떤 텔레비전 채널은 멀리한다. 어떤 책은 멀리한다. 어떤 사람은 멀리하지 않아도 어떤 사람들의 무리는 멀리한다. 피할 수 있다면 당연히 피하고, 피할 수 없을 때는 될수록 모른 체 한다. 오래 대해도 또 오래 모른 체 하면 대부분의 경우 신기하게도 모르는 것이 되기도 한다. 멀리 하고 피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주로 내 약한 심장을 이유로 대지만 이것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 중도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알았기 때문에 멀리하는 것이고 피하는 것이다. 이건 변명일 수 있지만 삶의 진리다. 살기 위한 진리다. 어떤 이는 상처를 덧내지 않고 아물린다. 애초에 상처를 안 받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주 보니 세상에 상처를 안 받는 이는 없다. 하니 사람에 따라 상처를 덧내지 않고 잘 아물리는 사람이 있고, 상처 아물리기를 잘 못해서 결국 덧나게 만들어 병으로 키우는 이도 있다. 덧나게 만든다? 만드는 주체에 대해서는 곰곰 더 생각해봐야겠다. 키우는 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상처를 입힌 자인지, 입은 자인지. 스스로 상처 입지 않도록 늘 잘 다스리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날아오는 공 받아 툭 쳐올리듯이 쳐올리고 말면 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떤 상처는 가능했다. 그래도 입은 상처라면 언제 한 번 상처의 주인들을 모셔다가 중재를 시키면 덧나고 있던 상처 쯤이야 충분하게 금방 아물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는 한 방에 무너졌다. 피할 수 없는 상처가 있었다. 멀리하고 어쩌고 가늠할 시간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상처가 있었다. 손 한 번 잡고 툭 툭 털면 아물리는 상처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왔지만 와서는 쉬 가지 않는 상처였다. 이런 상처는 파고 도려내어 다시는 덧나지 않도록 꼭꼭 메워야 한다. 더 꼭꼭 잘 메웠다고 두 번 세 번 생각하도록 메워야 한다. 그래도 이런 상처는 결코 다 아물릴 수 없다. 결코 다 아물릴 수 없기에 더 조심스럽게 더 철저하게 해야 한다. 다 아물릴 수는 없어도 더 덧나게는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광장에 모인 자들은 모두 상처 입은 자들이다. 지금 광장에 모인 이들에게 함께 눈길을 주고 있는 자들도 모두 상처 입은 자들이다. 따뜻함이든 술이든 잠이든 모두 무엇엔가 취해 있다가 문득 상처 입었음을 깨달은 자들이다. 잘하면 있던 병을 고칠 수 있지만 잘못하면 없던 병까지 더해 더 덧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들이다. 상처는 우리의 상처다. 우리 모두의 상처다. 우리는 모두 이 상처를 아물려야 한다. 함께. 손을 합쳐.  
358 꽃 / 박양균
남태식
2361 2017-02-19
꽃 - 그 신은 너에게 침묵으로 답하리라, 릴케 박양균(1924~1990)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망한 이 황무한 전장에서 이름도 모를 꽃 한 송이 뉘의 위촉으로 피어났기에 상냥함을 발돋움하여 하늘과 맞섬이뇨. 그 무지한 포성과 폭음과 고함과 마지막 살육의 피에 젖어 그렇게 육중한 지축이 흔들리었거늘 너는 오히려 정밀 속 끝없는 부드러움으로 자랐기에 가늘은 모가지를 하고 푸르른 천심에의 길 위에서 한 점 웃음으로 지우려는가 ㅡ *** 이 시는 1952년에 발간된 박양균 시인의 첫 시집 <두고 온 지표>에 수록된 시입니다. 시를 반복해서 읽는데 문득 촛불이 떠올랐습니다. '전쟁시'라고 분류되어질 50년대의 시를 읽으면서 자꾸만 지금 전국에서 타오르고 있는 촛불이 떠오른 것은 이 시에서 깊은 슬픔과 함께 어떤 희망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357 그것 안 먹으면 / 정양
남태식
1685 2017-01-18
그것 안 먹으면 정 양 아침저녁 한 움큼씩 약을 먹는다 약 먹는 걸 더러 잊는다고 했더니 의사 선생은 벌컥 화를 내면서 그게 목숨 걸린 일이란다 꼬박꼬박 챙기며 깜박 잊으며 약에 걸린 목숨이 하릴없이 늙는다 약 먹는 일 말고도 꾸역꾸역 마지못해 하고 사는 게 깜박 잊고 사는 게 어디 한두 가지랴 쭈글거리는 내 몰골이 안돼 보였던지 제자 하나가 날더러 제발 나이 좀 먹지 말라는데 그거 안 먹으면 깜박 죽는다는 걸 녀석도 깜박 잊었나보다 *** 한 움큼씩의 약을 처음 먹기 시작했을 때 약 먹는 걸 잊을까봐 봉지에 날짜를 적어놓았다. 약 먹는 걸 잊을까봐 어떤 이는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거나 사선을 긋는다고도 하는데, 약을 먹고 동그라미를 치거나 사선 긋는 걸 깜박 잊는 경우도 있어 아예 약봉지에 날짜를 적어놓기로 했다. 그렇게 얼마를 지나 습관이 제대로 밴 다음부터는 날짜 적는 걸 그만 두었는데 가끔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가 또 헷갈려서 쓰레기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날이 생기기도 한다. 하여튼 약 먹는 것 보다 약 먹는 걸 안 잊으려고 더 애쓰는 꼴이 되어서 가끔은 씁쓰레하다. 약이 문제인지 망각이 문제인지...... 애초에 품었던 의사에게 의지해서 목숨을 연장하며 늙지는 말아야지 하는 생각은 처음부터 헛 것이 될 게 뻔했다. . 타고나기를 약하게 타고난 장기가 여럿인 걸 뻔히 알면서도 의사에게 의지하지 않고 곱게 늙으리라 생각하다니, 정말 택도 없는 생각이었다. 나는 늙음의 문턱도 못 넘고 고꾸라져 의사에게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몇 년 동안 정기적으로 진료 받고, 1년에 한 번 쯤은 검사도 받고, 약 처방 받아 매일매일 꼭꼭 먹으면서 이제는 애초의 생각은 무뎌지는 정도가 아니라 사라졌다. 그래도 남은 생각은 조금은 있어 꿈꾸는 것이 존엄사이다. 과도한 연명치료를 거부하게 하는 것이 그것. 삶이 존엄하다면 죽음도 존엄해야 한다.  
356 옐로 오션 / 치타, 장성환
남태식
1821 2017-01-09
옐로 오션 치타, 장성환 그땐 눈 감고 눈 뜰 때 숨 쉬는 것도 미안해서 난 입을 틀어막고 두 손 모아 기도하길 반복했어 단언코 진실도 있었지 인양해야 할 건 진실은 이제 조금씩 떠오르고 있어 규명이 빠진 진상 그들은 의지가 없고 구경하고 다 조작 오보 연기였고 그 뒤로 많은 날이 지났지만 오늘도 기억해 우린 촛불과 함께 밝혀야 할 것들이 남았기에 지금쯤이면 누구보다 아름다웠을 피지 못한 꽃들과 희망 도대체 무엇을 위한 일이었는지 이유도 모른 채 아직 거기 있을 가없고 죄 없는 이들과 아이들 거긴 그 사람들의 심장처럼 차갑지 않길 남은 이들의 시린 가슴이 하루라도 빨리 낫길 좋은 곳으로 가야 할 너희들을 아직 맘 편히 놓아주지 못해 미안해 잊지 않을게요 흐르는 세월 속 잊지 않을 세월, 호 우리의 빛 그들의 어둠을 이길 거야 Yellow ribbons in the ocean 진실은 침몰하지 않을 거야 Yellow ribbons in the ocean Ocean oh shine 밖에 누구 없어요? 없어요. 벽에다 치는 아우성 얼마나 갑갑했어요? 난 그때만 생각하면 내 눈물이 앞을 가려 지금은 2016 잊지 말아야 돼 당시에 빅이슈 이 얘길 가져온 이유 But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가는 세월 배워야 할 시기에 왜 이런 일을 당해야만 했냐고 대체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 시간 동안 알 수 없어 바다보다 더 차가운 그들의 맘 선배여야 했던 아이들은 여전히 18살 친구로 머물러 수많은 사망자 실종자 학생뿐 아닌 이들 자랑스러운 영웅들까지도 거기선 편안하길 바래요 아직 봄이 많이 춥네 그때 일처럼 거긴 어때요? 흐르는 세월 속 잊지 않을 세월, 호 우리의 빛 그들의 어둠을 이길 거야 Yellow ribbons in the ocean 진실은 침몰하지 않을 거야 Yellow ribbons in the ocean Ocean oh shine 나의 봄이 아직 시린 이유 떨어지는 꽃잎이 너무나 슬픈 이유 기우는 배 주위에 파도처럼 시간이 흘러가도 잊지 마 잊지 마 눈물에 젖은 꽃잎 우리의 봄 반성 없는 그들 미안함은 우리의 몫 그날 이후 코앞까지 드리운 시작만 있지 끝이 안 보이는 그리움 Remember 4.16 Remember 4.16 눈물이 차올라 내 가슴 속에 새겨진 2014년 4월 16일 Remember 4.16 Remember 4.16 눈물이 차올라 내 가슴 속에 새겨진 2014년 4월 16일 흐르는 세월 속 잊지 않을 세월, 호 우리의 빛 그들의 어둠을 이길 거야 Yellow ribbons in the ocean 진실은 침몰하지 않을 거야 Yellow ribbons in the ocean Ocean oh shine Remember 4.16 Remember 4.16 눈물이 차올라 내 가슴 속에 새겨진 2014년 4월 16일 *** 함께 시 공부를 하는 지인이 '오늘은 울컥울컥 하는 날'이라고 톡을 했네요. 오늘은 세월호가 침몰한 2014년 4월 16일로부터 '1,000일'이 되는 날이라네요. 1,000일 동안 울컥울컥 하는 날이 오늘 뿐이었을까요. 시도 때도 없이 울컥, 울컥거렸지요. 위에 올린 글은 시가 아닌 노래입니다. jtbc에서 방영하고 있는 힙합 경연 프로그램인 '힙합의 민족2'에 출연한 힙합가수 치타와 신인모델 장성환이 읊은 랩입니다. 각자 읊을 랩 가사를 본인들이 직접 썼다고 하는데 저는 방영 당시(작년 12월) 18살이라는 장성환 군이 '밖에 누구 없어요?' 하고 잔잔하게 읊조리는 물음에서 울먹거리기 시작해서 '거긴 어때요?' 하고 맺으며 다시 묻는 물음에 앙! 터져버렸지요. '거긴 어때요?' 여긴 어떤가요? '거긴 어때요?' 여긴 어떤가요? 이 물음은 아직까지 끊임없이 되풀이해야 할 물음입니다. '거긴 어때요?' 여긴 어떤가요? 속절없음과 속수무책 사이에서 그 속절없음과 속수무책을 끝낼 때까지 되물어야 할 물음입니다. '거긴 어때요?' 여긴 어떤가요? 어쩌면 끝이 나서도 되새겨야 할 물음입니다. '거긴 어때요?' '여긴 어떤가요? 이제 정말 미안하다는 말도 못 할 정도로 시간이 흘렀습니다. 오늘은 세월호 참사 발생 1,000일입니다.  
355 손가락이 뜨겁다 / 채호기
남태식
1864 2016-12-28
손가락이 뜨겁다 채호기 하늘의 별은 뜨겁다. 밤은 차갑다. 벌거벗은 네 등은 차갑다. 내 손은 뜨겁다. 비가 오고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뿌연 수증기. 내 손가락들이 수증기에 갇힌다. 물렁물렁해진 진흙에 발이 빠지듯 네 등을 산책하는 손가락들이 빠져든다. 네 등에 손톱 끝으로 고랑을 내며 글씨를 쓴다. 씨앗을 뿌린다. 흙이 글자를 끌어당긴다. 네 등에 묻힌 글자에서 싹이 돋고, 들꽃들이 피어났다. 밤은 뜨겁다. 꽃은 뜨겁다. 꽃의 향기는 시가 되어 손가락 끝에 만져진다. 네 등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영원히 새겨졌다. 별은 뜨겁다. 손가락도 뜨겁다. *** 한 해가 몇 일 남지 않았습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라고 연말이면 늘 회고하지만, 올해야말로 돌이켜보니 정말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습니다. 그 중 어떤 다사다난은 여전히 계속되어 새해까지 쭉 이어질 모양이지만, 이쯤에서 올해의 다사다난은 마무리를 합시다. 오늘의 해는 어제의 해와 다름없어 보이지만, 어제는 어제, 오늘은 오늘이니까요. 새해에는 뜨거운 별의 기운을 받아 뜨거워진 손으로 차가운 밤과 네 등을 뜨겁게 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렇게 새해 인사를 드리니 뜨거운 들꽃들이 벌써 피는 것 같습니다. 건강, 건필, 다복하십시오.  
354 미영밭 / 이남순
남태식
1732 2016-12-08
미영밭 이 남 순 "정신 섯낱 남아씰 때 얼라들을 봐야 것다 집으로 다 오라 캐라 내도 집에 갈끼다" 너덧 개 주사액 매달고 끝내 오신 아버지 빈 몸집 아흔하나 기둥 풀썩 무너진 채 타드는 마른 혀로 밭은 말씀 이으신다 "애비가 너거들한테 미안허고 고마뱄다" "'느거매가 나 때문에 억시기 욕을 봤다 주체 못할 역마살로 천지만지 나돌 때도 꿋꿋한 느거매 덕에 욕 안 먹고 잘 살았다" "암만 캐도 고향 선산 거까정은 몬가것제 집하고 울매 안 되는 미영밭도 내는 좋다 거서는 훤히 다 빈다 기차역도 터미널도" 아버지 그 말씀을 여기 와서 새겨본다 한번 가신 후론 꿈에서도 못 뵈는데 꽃송이 만발한 지금, 저 바람이 낯익다 * 미영밭 ; 목화밭 *** '바람'처럼 떠돌며 살았어도, 자식들 앞에서 당당하게 죽음을 선택하고 죽음의 자리를 알리는 화자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존엄하게 태어났으면 존엄하게 살다가 죽을 때도 존엄하게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353 살아남은 자의 아픔 / 프리모 레비
남태식
2127 2016-11-09
살아남은 자의 아픔 - 생존자 B.V에게 프리모 레비(이산하 옮김) 언제부터인가 그 끔찍한 순간들이 되살아나 그 얘기를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내 가슴은 너무나 쓰라리고 저려왔다. 그는 희미하게 밝아오는 새벽이면 온통 시멘트 가루로 뒤덮인 잿빛 얼굴이며 다음날을 기약할 수 없는 불안한 잠자리로 죽은 송장이나 다름없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밤마다 악몽을 꾸며 너무 배고픈 나머지 무 같은 거라도 씹는 듯 마구 턱을 움직이며 애절한 목소리로 잠꼬대를 하곤 했다. "돌아가게! 제발 나를 내버려두고 돌아가게, 먼저 간 동료들이여! 난 아직 어느 누구의 것도 빼앗은 적이 없고 어느 누구의 빵 한 조각도 훔친 적이 없네. 그리고 지금까지 나 때문에 정말 단 한 사람도 죽은 적이 없네. 제발 그대들은 그대들의 세상으로 어서 돌아가게. 내가 아직 살아서 내가 아직 죽지 못해서 먹고, 입고, 잠자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게 어찌 내 탓이고 내 잘못이란 말인가!" *** 프리모 레비는 24세에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끌려갔으나 살아났다. 이 후 생존작가가 되어 증언자로서의 삶을 살았으나 67세의 나이에 돌연 투신자살하였다. 시국이 상상도 못할 이상한 상황으로 전개되는 것을 보면서 '나도 혹 생존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다. <이것이 인간인가>을 읽으면서 내 생각이 얼마나 뜬금없는 어리석은 생각인지 즉시 깨달았다. 어떤 고통을 알기에 네가 감히 생존자 운운하는가. 피로감을 말하면서 '이제 그만'을 외치는 자들이 있다. 보라, 생각없이 의심없이 '피로감' 운운하면서 '이제 그만'을 외치는 사이 저들은 더 큰 죄를 감추고 있다. 하니 '피로감'을 말하면서 '이제 그만'을 외치는 자들은 모두 공동정범의 자격을 갖춘 것이 된다. 어느 누구도 '피로감'과 '이제 그만'을 외칠 자격은 없다. 혹 합의된 어떤 해결점이 나와도 마찬가지다.  
352 옛일 / 박성우
남태식
2065 2016-10-21
옛일 박성우 한때 나는, 내가 살던 강마을 언덕에 별정우체국을 내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개살구 익는 강가의 아침 안개와 미루나무가 쓸어버린 초저녁 풋별 냄새와 싸락눈이 싸락싸락 치는 차고 긴 밤, 넣을 봉투를 구할 재간이 없어 그만둔 적이 있다 *** '밤새 편지와 씨름하다가 / 퀭한 눈으로 이 아침 다리 끌며 / 밖으로 나서면 / 오늘도 나는 / 편지가 되어 / 당신 앞에 서 있고 / 어김없이 당신은 나를 배달하시려고 / 기다리고 계십니다 / 언제나 고마운 우편배달부마냥' - 졸시 '편지2 - 우편배달부이신 당신' 20대 후반에 여의도우체국 우편발착부서에서 24시간 교대근무를 할 때 쓴 시입니다. 현실의 우체국은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듯 그리 낭만적인 공간은 아닙니다. 저 역시 우체국에 입사해서 근무를 하면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낭만적인 부분은 꽤나 남아 있어서 이런 낭만을 보탠 시를 쓸 수도 있었습니다. 우체국장 시인, 시인 우체국장. 2000년도에 등단을 하고, 2001년도에 처음 우체국장으로 발령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포항에서 열린 영호남작가대회에 참석했더랬는데 이렇게 제 소개가 되었습니다. 우체국장이라는 직함이 시인들에게 얼마나 크게 다가오는지 그 때 알았습니다. 반응은 뜨거웠고, 내 젊은 시절 엄청 좋아했던 민 영 시인님은 젊을 때 꿈이 우체국장이었다면서 다가와 포옹까지 하셨습니다. 이 후에도 이런저런 자리에서 우체국장 시인으로 소개를 받고는 했고, 이게 그다지 나쁘지는 않아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저 자신도 제 소개를 이렇게 합니다. 중간에 잠깐씩 총괄우체국의 실,계장을 맡아 근무하기는 했지만, 그 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이 곳 저 곳을 옮겨 거의 쭉 우체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니 계속 우체국장 시인입니다. 하지만 2003년에 첫 시집을 낸 이후로 저는 우체국에 관한 시를 더 이상 쓰지는 않습니다. 낭만적인 공간으로서의 우체국은 저 아닌 많은 다른 우체국 시인들이 쓰고 있거나 쓸 것이고, 또한 많은 시인들도 쓰고 있으니, 저는 여느 회사와 다르지 않는 기업 공간으로서의 우체국의 현실에 관한 시를 쓰자 하고 몇 편을 쓰서 첫 시집에 수록한 이후 더 이상 쓰지 않습니다. 반응이 별로였던 점도 있었지만 우체국을 시인의 공간으로 남아 있게 두자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우체국을 현실의 공간이 아닌 몽상의 공간으로 남겨 두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해서 우체국(우체국장)과 관련된 시를 보면 반갑습니다. 이 반가움은 무조건에 가깝습니다. 그 시적 공간이 현실의 공간이든 몽상의 공간이든 관계없이 다 반갑습니다. 별정우체국은 사설우체국입니다. 하지만 사기업체는 아닙니다. 별정국장의 땅과 건물을 무상임차하여 국가기관에서 운영하는 우체국이니 성격은 공기업입니다. 별정우체국(별정우체국장)을 소재로 쓴 시편들 중에는 유명세를 탄 시들이 더러 있습니다. 저는 별정우체국장은 아닙니다. 공무원입니다. 시인의 별정우체국에 대한 꿈은 몽상에 가깝습니다. 아니 단정적으로 몽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의 꿈으로 이루려고 하지 않고 몽상의 세계에 두고 끝낸 것이 시인으로서 참 다행이다 싶습니다. 하지만 다시 이런 꿈을 몽상이 아닌 현실의 꿈으로 꿔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몽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자주 일어나는 시대이니 역행처럼 보이는 이런 현실을 몽상에서 현실로 다시 불러들여도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