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5호...
   2020년 01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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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302 민요의 발전 / 조재도
김재순
1879 2014-01-10
민요의 발전 밭일 하면서 어머닌 이런 노래 즐겨 불렀네 “ 저 건너 저 새악시 궁뎅이 보소 요리 씰룩 조리 씰룩 멋들어진다,, 어디서 배웠느냐면 배우긴 워서 배운다니 긴긴 해에 일허다 보믄 아주아주 멀짜 날 때가 있어 그런 때 제절로 흥얼거려지는 게지 어머니 노쇠하여 밭에 가지 않고 쌀밥처럼 윤기 나던 노랫말 바람의 등을 타고 넘던 노랫가락 CD에 담겼네 조재도의 시집: 좋은 날에 우는 사람 대대로 기층민이었던 우리의 할머니와 어머니들 그 세월을 어떻게 견뎌내셨을까 그 세월을 묵묵히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겨울밤 마실가서 흥얼거리던 민요와 잡가와 음담패설의 위안 때문이기도 하리라 그래서 민요와 더불어 잡가와 음담패설도 위대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생각한다.  
301 치마 / 최재경
윤임수
2114 2014-01-06
치마 최재경 문방구집 딸 미영이는 내 친구다 머리를 양 갈래로 따고 이쁜 치마를 입고 오면 나는 툭하면 치마를 훌러덩 걷어 올렸다 미영이는 눈을 가리고 울었다 도망치다 몰래 쳐다보면 참말로 운 적은 없었다 그리고 선생님께도 부모님께도 일러바친 적도 없었다 가끔 나를 때리거나 꼬집었어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어느 날은,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연필도 주고 크레용도 몰래 주었다 애들은 쑥덕거리고, 변소에는 누구누구하고 연애 걸었다는 낙서도 있었다 내가 아파서 결석을 하면, 먼 길 찾아왔다가 그냥 돌아간 적도 있었다 아파 누워있어도 미영이 치마가 생각났다 다른 애들은 감히 미영이 치마를 걷어붙일 생각을 못했다 쓰봉을 입고 오는 날은 나는 심심했다 일부러 생글거리며 내 곁을 자꾸 왔다 갔다 지나쳤다 살랑살랑 세월이 이렇게나 많이 흘렀나 가끔 만나는 초등학교 동창회 때도 할머니 미영이는 치마를 입고 나온다 또 걷어붙일까 봐 치마 끝을 꼭 잡고 내 곁으로 온다 - 시집 "솔깃"에서 - * 치마 끝을 꼭 잡고 곁으로 다가오는 할머니 미영이는 어린 시절을 더욱 곱게 엮어주는 소중한 친구 치마를 훌러덩 걷어올려도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이르지 않고 아파서 결석을 하면 먼 길을 찾아와 걱정을 안고 되돌아 간 정다운 친구 그 친구 있어 시인은 더욱 행복하겠다 그 친구들 있어 시를 읽는 나도 행복해졌다.  
300 한거(寒居) / 정희성
임술랑
1588 2014-01-05
한거(寒居) / 정희성 이제 다 내려놓고 단순하게 살고 싶네 콩댐을 한 장판방 머리맡엔 목침 하나 몸 이긴 마음이 어디 있을까 창호지에 들이치는 싸락눈 소리 시집『그리운 나무』창비 2013.10 ....................................................................................................................................................................................................................................................... (감상)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멋스럽고 높은 건축물에는 금동부처님이 사신다. 그런 건물을 짓고 유지하고자 할 때는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헤아림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장엄한 부처님의 위엄인 것이다. 아 죽지않는 몸, 부처님의 법(法)이여. 그러나 나는 이렇게 농촌에서 한거(寒居)할 뿐이다. 시인의 말처럼 "몸 이긴 마음이/ 어디 있을까" 몸 없는 마음이 어디에 있겠는가. 어허 불초 보잘것 없고 부실한 몸이기에. 쓸쓸한 산기슭에 묻은 잔설(殘雪)처럼 그렇게 가난하게 살라는 님의 말씀. 그러므로 이 겨울 따뜻한 전기장판 한 장이 고맙다. (임술랑)  
299 분홍 나막신 / 송찬호
남태식
3054 2014-01-01
분홍 나막신 송 찬 호 님께서 새 나막신을 사오셨다 나는, 아이 좋아라 발톱을 깎고 발뒤꿈치와 복숭아뼈를 깎고 새 신에 발을 꼬옥 맞추었다 그리고, 나는 짓찧어진 맨드라미즙을 나막신 코에 문질렀다 발이 부르트고 피가 배어 나와도 이 춤을 멈출 수 없음을 예감하면서 님께서는 오직 사랑만을 발명하셨으니 - 계간『시와표현』2013 겨울 *** 사랑이라는데 굳이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이 사랑이라면 눈 먼 사랑입니다. 발뒤꿈치와 복숭아뼈를 깎아 가면서까지 새 신발에 발을 맞추는 것이 사랑일 수도 있겠지만, 일방적으로 구걸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새 신발은 발뒤꿈치와 복숭아뼈를 깎지 않고도 신을 수 있는 것이면 좋겠지요. 사랑의 속성 중에 하나가 눈을 잃는 것이니 다시 이것이 또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폭력을 동반한 듯한 사랑의 속성에 마음 오락가락합니다. 나, 아직 눈을 잃지 않아서일까요.  
298 오천 원 / 최종천
윤임수
1928 2013-12-20
오천 원 오천 원은 추상이 아니고 상징도 아니다 오천 원은 애인도 미스 김도 아니요 사랑도 아니다 오천 원을 어떻게 잊으라는 말이냐! 이회창씨는 옥탑방을 모르고 정몽준 의원은 버스비가 70원이라고 하는데 오천 원은 나에게 거금이다 오천 원을 가지고 나는 애인과 이별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오천 원이여! 버스 요금 통에 집어넣고 거스름돈을 받지 않은 오천 원의 그림자여 오천 원어치의 걸음을 걸으며 사랑보다 오천 원이 더 믿을 만한 것이라고 버스 요금통에 실려 가는 오천 원을 생각한다 - 시집 "고양이의 마술"에서 * 오천 원, 두부에 막걸리를 마시며 취할 수 있고 새우깡에 소주를 마시며 달아오를 수 있는 돈 오천 원 술 취한 밤을 비틀거리지 않고 택시를 잡아 후닥닥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돈 오천 원 때로 한 끼 밥값도 못되지만 다섯 명에게 밥 한 공기씩을 돌릴 수 있는 돈 오천 원 그 돈 오천 원이면 나는 너에게 오래오래 전화를 할 수도 있고 몇 달 동안은 사무치게 그리운 엽서를 보낼 수도 있다 그러니 오천 원은 내게도 거금이다 그런 오천 원이 속절없이 버스 요금통에 실려 가고 있구나 오호 애재라, 아아 슬프구나,  
297 석류/신순말
임술랑
2421 2013-12-16
석류/신순말 저 단단한 슬픔이 익을 대로 익으면 스스로 가슴팍을 열어젖히곤 하는데 하늘 귀 어둠별 오르면 내려서는 뜨락의 별 꽃노을 붉은 울음 하늘 강에 풀 때 알알의 여문 결정 저리도 빛이 난다 자기를 쪼개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다 시집『단단한 슬픔』2013 시와에세이 ............................................................................................................................................................................................................................................... (감상) 莊子에는 (존재의 의문에 대한 대답 중에 나오는 글귀가 있는데) 원래의 하나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의 말이 쓰여있다. 하나에서 출발했으며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쪼개져 있어도 그 본질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의 세계에서는 그 상대성이 없다는 것이다. 너와 나의 구분이 없었던 초기 우주의 시기를 시작으로 우주는 팽창하고 있는 것이다. 신순말의 이 시 석류에서는 단단한 슬픔이 익을 대로 익으면 쪼개진다는 것인데, 쪼개져서 원래의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물론 사랑이다) . 뭉쳐 경직된 세계가 슬픔이라면 쪼개서 나누는 개방하는 보여주는 이러한 것들이 사랑이며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우주의 섭리(과정)라는 것이다.(임술랑)  
296 기침 / 이윤학
김재순
1902 2013-12-16
기침 / 이윤학 주먹을 불끈 쥐고 기침을 시작하는 아버지, 금 캐러 광산에 다닌 아버지. 돌가루 쌓아놓고 사는 아버지. 새벽 4시를 알리는 아버지의 기침소리. 뭉텅이별이 쏟아지는 아버지의 기침소리. 네가 갓난아기였을 때 너희 아버지는 금 캐러 가기 전에 금 캐러 갔다와서 네 눈을 바라보곤 했다. 삼십 후반이 된 아들에게 아버지 얘기를 흘려놓고 어머니 비닐집 속으로 사라진다. 뿌옇게 물방울 열린 비닐집. 갈빗대 튀어나온 비닐집. 경운기 몰고 풀 깎으러 가는 넥타이 허리띠 졸라맨 아버지. * 이윤학의 시집: 그림자를 마신다 (문학과 지성 2005) 이윤학의 산문을 보면 그는 음주와 부주의로 몸 어딘가가 늘 터지고 깨지고 부러지고 마른 몸에 상처없는 날이 드물다 그래서 나이보다 삭은 것 같다 광산에 다니는 아버지는 어린 윤학을 보며 얼마나 많은 기대를 하셨을까 그는 분명 아버지의 기대를 무너뜨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넥타이 허리띠를 졸라맨 아버지는 아들이 자랑스러울 것이다. 여러 권의 책도 냈고 가슴에 따뜻함을 품었으며 정말로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아들이라서...  
295 꽃벼랑 / 손택수
남태식
1848 2013-12-12
꽃벼랑 손 택 수 애써 피어난 자리가 하필이면 낭떠러지다 아슬아슬하다 합정 재개발지구 벼랑 위에 벚꽃이 한창이다 무너져내리는 흙벽에 달라붙어 나무는 꽃을 날리고 있다 출구 쪽 계단에 발 하나를 걸치고, 아찔한 체위로 시집을 읽던 날이 내게도 있었던가 나름으로는 용맹정진이었으나, 부끄럽구나 벼랑을 평지로 태평하게 피어나는 꽃이여 저 꽃벼랑 위에서 오늘도 누가 밥을 짓고 있나 칭얼대는 어린 것을 업고 옥상 위에 깃발처럼 빨래를 내다 말리고 있나 찡그리면서도 꽃은 핀다 아니, 찡그림마저도 피어나 꽃이다 구겨진 옷주름을 몇 번 더 구기면서, 착지 못한 나머지 발을 올려놓으려 틈을 노리는 버스 안 벼랑 끝 휘청대는 가지 하나가 나를 받쳐주고 있다 - 계간『시와사람』2013 가을 *** ‘찡그리면서도 꽃은 핀다 / 아니, 찡그림마저도 피어나 꽃이다’ 절실입니다. 하니, 절창입니다.  
294 부위별로 팔아요 / 황희순
윤임수
2186 2013-11-24
부위별로 팔아요 나를 사가세요. 부위별로 팝니다. 흐벅지진 않지만 오십여 년 숙성된 살이 말랑말랑할 거예요. 세상을 휘젓고 다닌 팔과 다리는 좀 싸게 팔아요. 엉덩이에 난 바람구멍은 살짝 도려내고 드세요. 가슴에 영영 메울 수 없는 구멍을 만들지도 몰라요. 젖가슴과 허벅지는 할인되지 않아요. 입술은 혀를 끼워 팝니다. 혀 없는 입술은 좀 싱거울 테니까요. 갈비뼈 사이엔 아팠던 흔적이 사리처럼 끼어있을 거예요. 약이라 생각하고 꼭꼭 씹어 드세요. 간장은 다 녹아 못쓰게 됐을 거예요. 진창도 풍덩풍덩 밟았던 발과 아무나 덥석덥석 잡았던 손이 문제군요. 아랫도리를 통째로 사가면 손은 덤으로 드릴게요. 잠 안 오는 밤 혹시 위안이 될지 모르니까요. 발은 팔지 않을래요. 갈 곳이 있거든요. 꼭 한번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껍질은 살살 벗기세요. 입맛에 맞게 회를 뜨든지 탄력이 없다 싶으면 소금구이해 드세요. 뼈는 잘 고아 조금씩 마셔요. 뼛속 깊이 사무쳤던 일 많아 독이 있을지 몰라요. 아, 당신이군요. 어떤 부위를 잘라드릴까요. - 나 : 아랫도리를 통째로 사면 손은 덤으로 주신다고 했죠? 그 손 잡고 어디든 가도 될까요? 여기저기 룰루랄라~~ - 황희순 시인 : ㅋㅋ 품절됨 - 나 : 후렴 (나는 이제 품절이다. 단 윤임수에게만은 아니다) ㅋㅋ - 황희순 시인 : ㅋㅋ 마음이라는 부위 콜!  
293 가을 저녁의 시 / 김춘수
김재순
1886 2013-11-12
가을 저녁의 시 / 김춘수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 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 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출처: 한국의 명시를 찾아서 문덕수편에서 당신은 어디로 가는가 애터지게 부르던 그 목소리 나 이제야 들었는데 우리의 모든 날들은 지금부터 시작인데 당신은 나를 두고 어디로 가는가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어둠 속으로 떠나는 당신 이제 내가 애터지게 불러도 속절없는 당신,  
292 전지훈련 / 현택훈
남태식
2227 2013-10-27
전지훈련 현 택 훈 우리가 지난 겨울에 다녀온 전지훈련지는 작은 항구도시였다. 겨울에도 따뜻한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푸른 남쪽이었다. 전지훈련이야 해마다 겨울이면 가는 것이지만 그 도시는 처음이었다. 갈매기가 시청 앞까지 날아오고 맑은 날엔 돌고래의 유영을 볼 수 있는 낯설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곳의 사람들은 걸음이 느렸다. 횡단보도를 아주 천천히 건너는데 차들은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차들도 느릿느릿 솔바람처럼 다녔다. 우리는 오전엔 몸을 살살 푸는 것이 전부였다. 결과가 중요하지 않았기에 느슨하게 연습경기를 했다. 평화롭고 부드러운 경기였다. 다음 시즌에 대한 포부나 준비가 점점 옅어졌다. 우리는 마법에 걸린 듯 느리게 움직였다. 시간도 달팽이처럼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봄이 되자 라인업이 짜였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그 도시를 빠져나왔다. 이제 다시 시즌이 시작될 테고 환희와 절망의 미로를 헤맬 것이고 치명적인 부상을 입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난 겨울에 다녀온 전지훈련지는 작은 항구도시였다.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아 다시는 전지훈련지로 택하지 않겠지만 경기 도중에도 문득문득 그곳을 그리워할 것 같다. 벤치에 앉아 경기장 위를 나는 갈매기를 그려볼 것이다. 락커룸에서 유니폼을 벗다가 푸른 바다가 떠오를 것이다. 우리가 지난 겨울에 다녀온 전지훈련지는 작은 항구도시였다. - 계간『리토피아』2013 가을 ***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며 사는 날들의 연속입니다. 찾아보면 뭐 유별나거나 특별하다고 할 일과 사물은 하나 없는데 나는 또 불안합니다. 이유 없는 불안입니다. 이유 없이 이어지며 사라지지 않는 불안의 날들입니다. 하루는 마음을 고요히 하고 앉아서 불안의 조건을 살펴봅니다. 이것? 아님, 저것? 아님, 그것? 아님, 이것과 저것? 아님, 이것과 저것과 그것? 이리 둘러보고 저리 살펴보고, 이것과 저것과 그것을 떼었다가 보고 붙였다가 보아도 어디에도 지금의 이 이어지는 불안을 충족시킬만한 조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 대체 스멀스멀 샘처럼 솟아오르며 뱀처럼 기어오르는 이 불안의 정체는 무엇? 천천히 걷는 사람들과 느릿느릿 다니는 차들과 느리게 흐르는 시간들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아무런 꿈이나 욕정이나 생각도 없이 그 자연스레 흐르는 리듬을 타고, 하루, 이틀, 사흘...... 흐르고 싶어라. 시의 리듬을 타다가 멈추자 나도 모르게 불쑥 한 문장이 입에서 터집니다. 아, 그 곳에 가고 싶다. ‘우리가 지난 겨울에 다녀온 전지훈련지는 작은 항구도시였다.’ ‘우리가 지난 겨울에 다녀온 전지훈련지는......’ ‘우리가 지난 겨울에 다녀온......’ ‘우리가 지난 겨울에......’ ‘우리가 지난......’ ‘우리가......’  
291 만추 / 김광선
윤임수
3068 2013-10-25
만 추 이십 년을 넘게 산 아내가 빈 지갑을 펴 보이며 나 만 원만 주면 안 되느냐고 한다 낡은 금고 얼른 열어 파란 지폐 한 장 선뜻 내주고 일일 장부에 ‘꽃값 만 원’이라고 적었더니 꽃은 무슨 꽃, 아내의 귀밑에 감물이 든다. *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저마다 우주를 품고 있고 스스로 아름다운 존재이기에 그러하다. 간혹 분노와 미움이 따르기도 하지만 나는 끝까지 그 아름다운 꽃을 믿고 싶다.  
290 사냥개 / 장종권
남태식
1751 2013-10-25
사냥개 장종권 애시당초 태생이 좋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혈통 관리에 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혈통이 없는 것은 특별히 더 잔인해진다는 것이다. 전사가 되기 위해 꼬리를 자른다는 것이다. 다른 존재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냥감을 보면 결사적으로 덤빈다는 것이다. 한 번 물면 죽을 때까지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먹이를 챙겨주는 주인에게만 충성한다는 것이다. 굶주림이 가장 큰 공포라는 것이다. 주인 외에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냥 이외에는 할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이란 썩은 똥 속에 묻어 둔 지 오래라는 것이다. 팔팔해야 먹이라도 얻어먹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언젠가는 주인을 물기도 한다는 것이다. 쓸모가 없어지면 보신탕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꼬리를 아무리 잘라도 개일 뿐이라는 것이다. - 장종권『호박꽃나라』리토피아 2013 *** 요즘 이런 개 천지입니다. 없는 혈통도 짓고, 없는 역사도 지어서, 시도 때도 없이 짖고 자르고 덤비고 물고 하며 모든 판을 개판을 만드는 개 천지입니다. 혈통 좋은 사냥개라고요? 그래봤자 ‘개일 뿐’이지요.  
289 단풍 / 박성우
김재순
2002 2013-10-24
단풍 / 박성우 맑은 계곡으로 단풍이 진다 온몸에 수천 개의 입술을 숨기고도 사내 하나 유혹하지 못했을까 하루종일 거울 앞에 앉아 빨간 립스틱을 지우는 길손다방 늙은 여자 볼 밑으로 투명한 물이 흐른다 부르다 만 슬픈 노래를 마저 부르려는 듯 그 여자 반쯤 지워진 입술을 부르르 비튼다 세상이 서둘러 단풍들게 한 그 여자 지우다 만 입술을 깊은 계곡으로 떨군다 박성우의 시집: 거미 길손 다방 늙은 여자 한 때는 입술을 붉게 칠하고 수많은 남자들에게 에워싸였던 꽃 같은 날들은 모두 흘러갔다 젊은 날의 탱고는 모두 끝났다 그러나 그녀 마음 속 열정은 아직도 끓고 있어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봄꽃보다 아름다운 단풍으로 지는 게 아닐까 그녀의 마지막이 황홀하다  
288 음력 삼월의 눈 / 이병률
남태식
4074 2013-10-17
음력 삼월의 눈 이병률 한 사람과 너는 며칠 간격으로 떠났다 마비였다. 심장이, 태엽이 멈추었다 때 아닌 눈발이 쏟아졌고 눈발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길가에서 더러워졌다 널어놓은 양말은 비틀어졌으며 생활은 모든 비밀번호를 잃어버렸다 불 옆에 있어도 어두워졌다 재를 주워 먹어서 헛헛하였다 얻어 온 지난 철의 과일은 등을 맞대고 며칠을 익어갈 것인데 두 사람의 심장이 멈추었다는데 이별 앞에 눈보라가 친다 잘 살고 있으므로 나는 충분히 실패한 것이다 사무치는 것은 봄으로 온다 너는 그렇게만 알아라 - 이병률 『눈사람 여관』문학과지성사 2013 *** 태풍 다나스의 영향으로 비 쏟아지는 날에 늦은 눈 내리는 날의 이별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음력 삼월이니 양력으로는 삼월 하순이나 사월입니다. 봄을 바로 앞에 두고 내리는 눈이니 때 아닌 눈발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으니 살아있는 자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어떤 삶과의 이별을 맞이해야 합니다. 죽음의 때를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맞닥뜨린 죽음은 늘 때 아닌 죽음이 됩니다. 오려나, 오려나, 생각하던 찰나에 쏟아지는 빗소리에 귀가 먹먹합니다. 이별 뒤에 그려지는 아픔의 정황이 너무 절절하여 이별의 이야기를 듣는 제 가슴이 턱 막힙니다. 그러나 또 어쩌겠습니까. 산 자는 또 살아야 하니까 이별의 절절한 감정은 삶 앞에서 늘 ‘실패’하고 맙니다. ‘사무치는 것은 봄으로 온다 / 너는 그렇게만 알아라’ 그렇게 알고 이 이별의 이야기, 저도 이만 거두렵니다.  
287 나비 / 송진권
김재순
2439 2013-10-01
나비 / 송진권 창우야 기구한 팔자로다 니 피 더우니 어쩔 것이냐 태이길 그리 태인걸 은근짜 논다니 왈패들 자꾸 니 속에서 쏘삭이는데 슬슬 꼬드기며 뒷덜미 잡아끄는데 제주나 팔면서 허랑허랑 밥이나 빌다 어느 길섶 돌무덤에나 묻힐 팔자인데 창우야 정분 둔 계집도 내 피 받은 자식도 무정하더라 부질없더라 창우야 오늘은 꽃을 꺾으며 간다만 내일은 또 어느 동리서 곰뱅이를 틀꼬 창우야 어정시럽게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제 혼자도 겨워 흑흑대면서 가는 창우야 송진권의 시집: 자라는 돌 허랑허랑 제주를 팔고 밥을 빌며 허랑허랑 이 동네 저 동네 떠돌아도 나비처럼 아름답고 자유롭고 가벼운 창우의 삶은 얼마나 멋진가 그것마저 부질없을 때 몸과 마음을 돌무덤에 사뿐히 내려놓을 창우 미련없이 후회없이 한 세상 잘 살다 갈 창우 정말로 그러한가? 창우야.  
286 창평국밥집 1 / 김완
윤임수
2435 2013-09-20
창평국밥집 · 1 살가운 사람이 그리운 날이면 사람들 북적대는 시장 통 안 담양 창평국밥집으로 가자 기다려 지치고 곤한 뱃속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뚝배기 가득 고기 반 국물 반 흰밥 말아 후루루 넘기면 넉넉한 한 세상이 담기는 듯하다 깍두기, 묵은 김치 곁들여 햇양파, 매운 고추, 된장 찍어 먹으면 저마다 다른 몸부림으로 견뎌 온 세월 세상살이 지친 가슴들 어느새 땀이 차오른다 기다릴수록 사람들이 몰리는 삶 어깨 부대끼며 더불어 있어 힘이 되는 마음들을 안다 오래 참을수록 게미*가 있는 쓰디쓴 절망들, 아픔들, 상처들 넉넉한 국밥에 담아 훈훈하게 녹여내는 사람이 아름다운 풍경 하나 만날 수 있다 * 게미 : 깊고 은근한 음식 맛을 뜻하는 전라도 방언. - 김완 시집 "그리운 풍경에는 원근법이 없다"에서 * 나는 하루하루, 그 모든 날마다 살가운 사람이 그립다. 깍두기에 묵은 김치 곁들여 막걸리 한 사발 마실 수 있는 사람 세상살이에 지친 가슴이더라도 더불어 부대낄 수 있는 사람 절망도 아픔도 상처도 게미로 살려내는 사람 그리하여 언제든지 기꺼이 넉넉하고 훈훈한 사람 그런 사람과 함께 진정으로 사람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고 싶다 늘, 언제나, 영원토록...  
285 그것은 동물원에 시작되었다 / 김성대
남태식
1833 2013-09-15
그것은 동물원에서 시작되었다 김성대 그것은 필요 이상의 전력 질주였고 예상외로 빨랐다 그들은 자신의 특징을 하나둘 지워나갔다 코끼리는 코를 얼룩무늬뱀은 얼룩을 긴꼬리원숭이는 꼬리를 그것은 결핍도 절실이나 잉여도 아닌 무엇이라 해야 할지 모를 무엇을 닮아가기 위한 질주 같았다 모두가 나인 것 같지만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것들이 뒤섞인 어떤 마비 그들은 예상을 벗어나 인간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몸에 가뭄이 들 만큼 긴 울음으로 코끼리는 인간의 입술을 얼룩무늬뱀은 살갗을 긴꼬리원숭이는 손을 인간을 닮아가는 일이 그들에게는 감염 같은 것이어서 그들은 점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맡지 못하게 되었다 자신을 지우고 인간의 몸을 살아가는 그것은 인간의 감각으로 인간을 망각해보려는 것이었을까 인간의 몸으로 자신을 만지면서 그들은 자신의 외부에 있게 되는 것일까 그들이 들고 서 있는 하나의 얼굴로 동물원은 고요해졌다 그들의 몸 밖에서 울음이 말라붙는 동안 추위가 시작되었다 자신을 보러 겨울 동물원에 가는 일 인간들이 인간을 지우기 시작한다 - 김성대 『사막 식당』창비 2013 *** ‘나는 하류 인생’이라 느끼는 이가 늘고 있다. 한국소비자원이 성인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나타난 결과다. 소비 수준을 기준으로 자신을 하류층으로 인식하는 비율은 2002년 17.7%에서 올해 34.8%로 2배 가까이 급증했다. 반면 같은 기간 자신을 중산층으로 생각하는 비율은 80.1%에서 62.5%로 쪼그라들었다. 가계에 가장 부담을 주는 소비 항목은 11년 전의 교육비에서 최근 식비로 바뀌었다. 먹고 사는 자체가 팍팍하게 느껴진다는 의미이다. ‘중산층 70% 재건’을 약속한 정부는 이 결과를 보며 이렇게 다짐할지도 모르겠다. 제가 해결할게요, 느낌 아니까~. 레알? (「한겨레21」 2013.9.16 제978호 ‘통계 뒤집기 - 나도 하류다’) 시와 기사가 동시에 같은 느낌으로 왔습니다. ‘왜?’냐고 묻지는 마세요. 느낌이니까. 불안한 공기가 떠돌고 있습니다. 차곡차곡 쌓아둔 그 무엇을 차례대로 풀어내는 흐름이 떠도는 불안한 공기에서 느껴집니다. 어떤 경우에는 느낌이 말보다 더 정확합니다. ‘그것은 결핍도 절실이나 잉여도 아닌 무엇이라 해야 할지 모를’ ‘필요 이상의 전력 질주였고 예상외로 빨랐다’ 우리는 너무 빨리 눈을 감았습니다. ‘인간들이 인간을 지우기 시작한다’ 느낌이 오시나요. 이제라도 감았던 눈 뜨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 느낌, 아시지요. 익숙한 느낌이지요.  
284 효자가 될라 카머 / 이종문
김재순
2226 2013-09-08
효자가 될라 카머-김선굉 시인의 말 / 이종문 아우야, 니가 만약 효자가 될라 카머 너거무이 보자마자 다짜고짜 안아뿌라 그라고 젖 만져뿌라, 그라머 효자 된다 너거무이 기겁하며 화를 벌컥 내실끼다 다 큰 기 와이카노, 미쳤나, 하실끼다 그래도 확 만져뿌라, 그라머 효자 된다 -권갑하의 도전 시조 암송 100편- 억센 사투리로 유명한 경상도 그러나 이 곳 중서부의 작은 도시는 이제 억양에서 사투리의 그루터기를 볼 수 있을 뿐 외곽 지역의 할머니들에게도 온전한 형태의 사투리는 없다 상대방을 경계하여 온몸에 가시를 세우고 긴장해도 그가 불쑥 사투리를 내밀면 곧 가시는 결이 고운 털로 눕는다 우락부락해도 묘한 매력이 있는 사투리, 우리말. 이제 사라져가니 아쉽다, 그립다.  
283 틈, 기다리다 / 김명원
윤임수
1883 2013-08-29
틈, 기다리다 사랑아 조금 늦게 울어도 되지 않겠니 배고프다 칭얼대는 저 초승달에게 늙은 젖을 먹인 뒤 아파요, 으아리 근처서 깨어난 이슬이 마지막 숲 그림자에 가 닿은 뒤 자음으로만 머뭇 머무는 먹구름 우레로 퍼부은 뒤 두근거리는 상사화 꽃대가 차마 둥그러진 뒤 밤새 술 취하던 그의 조등이 점점점 붉게 사윈 뒤 사랑아 그때 우리 울어도 늦진 않겠지 - 2013 대전작가시선 제9집 "질문들"에서 - * 사랑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결국 떠날 수밖에 없겠지만 조금만 더 늦게 떠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진정 사랑이지 이별의 울음이 언제 준비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영원히 준비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충분히 울 수 있을 때까지 사랑아 조금만 더 늦게 떠나다오 초승달도 이슬도 먹구름도 상사화 꽃대도 조등도 모두 안타깝지 않을 때까지 조금만, 조금만 더 머물러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