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황희순

 

청개구리 날개는 언제 사라졌을까

사람의 꼬리는, 너를 그리워하던 마음은

언제 슬며시 사라진 걸까

쥐똥나무 울타리에서 청개구리가 운다

저거 무슨 새소리야?

지나가는 아이가 제 어미에게 묻는다

글쎄, 무슨 새지?

저렇게 우는 새가 있었나 생각하다 나도 그만

새소리로 듣는다

손톱만한 초록색 등에 노란 날개를 그려 넣는다

그러니 얘야, 새로 알고 자라도 괜찮단다

태초 우린 모두 한 점에서 시작한 생물이니

뭐라 부른들 어떤가

서로서로 이름 없는 아무것도 아니어서

마주본 적조차 없으므로

사라진 것도 사라지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날개를 꼬리를 마음을 몸속에 사려두고

억겁을 피고 또 지면서

제 목소리로 출렁이고 있을 뿐이다

 

- 황희순 시집 『미끼』종려나무 2013

 

 

***

   오랫동안 이별의 아픔에 빠져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별은 낭떠러지로 떨어진 듯 너무나 아파 어떻게 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이별은 슬픔을 낳고, 슬픔은 아픔을 낳고, 아픔은 외로움을 낳고, 외로움은 눈물을 낳았습니다. 눈물은 눈물을 불러 더 큰 눈물을 낳고 결국에는 다시 외로움을 낳고, 외로움은 외로움을 불러 더 큰 외로움을 낳고 결국에는 다시 아픔을 낳고, 아픔은 아픔을 불러 더 큰 아픔을 낳고 결국에는 다시 슬픔을 낳았습니다. 슬픔은 슬픔을 불러 더 큰 슬픔을 낳고,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영혼은 결국 이어지는 사소한 많은 이별을 낳았습니다. 사소한 만남이 있을 수 없듯이 사소하다고 이름 지어도 괜찮을 이별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그 이별의 상황에서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있는 영혼에게 그 이별 이후의 이별은 모두 사소한 것들이 되는 셈이었지요.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알았습니다. 그 이별 또한 순간이었고 지나간다는 것을요, 지나갔다는 것을요.

   과도한 집착은 과도한 감정을 일으킵니다. 놓으면 편안한 자연 상태로 되돌아오는 감정을 과도한 집착은 왜곡까지 시키면서 감정을 오랫동안 부자연스런 상태로 잡아두지요. 이별도 이별의 상황에만 집착해 있을 때는 한없는 슬픔과 아픔과 외로움을 일으키지만 그 상황을 의도적으로 벗어나거나 잊으려 하면 자연스레 잊혀지고 사라집니다. ‘너를 그리워하던 마음은 언제 슬며시 사라진 걸까’ 하고 묻고, ‘사라진 것도 사라지지 않은 것도 아니다’ 면서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위안의 말을 전하는 화자의 모습에 마음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면서도 아프지 않은 건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난 화자의 편안한 모습이 눈앞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감정이 체념인지 해탈인지 알 수는 없지만 보기에는 좋습니다. 잡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한 번쯤은 놓아봐야 합니다. 그것이 계속 잡고 있어도 괜찮은 것인지 놓아봐야 알 수가 있고, 놓아야 새로운 것을 또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태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