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상자 / 이정록


스티로폼 상자 위로

물뿌리개 같은 저녁 햇살이 번지네

골목길 담을 따라 열무와 고추와 졸과 상추 상자들

그 중 한 상자엔 채송화며 봉숭아꽃이 피어 있네

채소의 푸른 이파리를 건너온 나비가 꽃송이에 앉아 있네

먹다 놀다 심심하면 종아리에 꽃가루도 매달고

푸성귀 위를 날아갈 것이네 나비나 아주머니나

채소를 거쳐야 꽃송이로 갈 수 있네

두보라면 푸성귀 푸르니 나비 더욱 희다라고

먹물을 찍었을 것이네 나는 일곱 상자 모두

풋것을 심지 않은 마음에다 오래 팔장을 끼네

몽땅 꽃밭이었다면 골목은 더 누추했을 것이네

몽땅 채소였다면 열무 이파리처럼 잔가시가 돋아났을 것이네

일곱 상자 가운데 딱 한 상자, 배냇니처럼 눈부시네

가로등마다 천천히 봉숭아 물이 고이고 있네

방금 빨아놓은 젖은 운동화가

벽돌담 위에 물방울을 내려놓네


                                                


누추한 골목에 상추를 비롯한 푸성귀 여섯 상자 그 가운데

꽃상자 하나가 놓여 있다, 채송화 봉숭화가 함께 핀 상자다

촌스럽기 그지없는 이 꽃들은 심고 가꾸는 이에게 무엇일까

삶에 대한 적극적인 마음이고 기쁨이고 사랑이리라

어떤 시련이 있더라도 삶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뜻이리라

그리하여

방문이 대문도 되는 그 골목의 그 사람은

깨끗하게 빤 운동화를 조여 신고

흰 모란 붉은 모란, 흰 장미 붉은 장미 어우러진 곳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리라   --김재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