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5호...
   2020년 01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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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새소리를 듣다 보면 / 박정춘
남태식
1871 2013-08-25
새소리를 듣다 보면 박정춘 새소릴 듣다가 보면, 하도 지지대서 쉰 목소리 새가 있다 새라고 다 꾀꼬리 소리는 아니다 새는 하루 종일 카악카악 날 비웃고, 해는 저물어 가는데 나는 아직도 불편하게 살고 있다 여자의 화증禍症은 하나님도 누르지 못한다는데 난 앵그리 버드, 보는 대로 날아가서 몸으로 깨뜨리는 화난 새다 새소릴 듣다 보면, 하도 지지대서 쉰 목소리 새가 있다 새라고 다 꾀꼬리 소리는 아니다 - 계간『예술가』2013 여름 *** 심상찮다. 아내의 눈동자가, 아내의 표정이, 아내의 숨소리가 오늘따라 심상찮다. 주방으로 향하는 아내의 발걸음과 설거지통의 그릇을 꺼내는 아내의 손길마저. 하니, 불안하다. 설거지통에서 나오는 밥공기가 불안하다. 설거지통에서 나오는 국사발에 숟가락과 젓가락, 국자, 주걱, 칼 모두. 하니 또 수상하기까지 하다. 가스렌지 위에서 열 올리고 있는 찌개냄비가, 그 냄비의 찌개와 쿵쾅쿵쾅 거친 숨을 내뱉는 압력밥솥과 그 밥솥의 밥까지. 이게 뭐지, 슬쩍 쳐다보는데 주방에서 몰려오는 쏴~~한 기운에 바닥에 바짝 엎드리는 거실의 공기. 순간 거실 벽에 걸린 사진이 한 쪽으로 기우뚱하고, 그 옆에 걸린 그림 속의 집도 한쪽으로 따라 기우뚱. 이럴 때는 눈 내리깔고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눈 내리깔고 슬금슬금 일어나 베란다로 가서 널어놓은 빨래라도 걷어서 거실에 앉아 개기라도 한다면 상책 위의 최상책이겠고, 이왕 시작한 김에 청소기라도 들고 나서면 더 좋겠지. 이유는 묻지 마시라. 불문율이다. 아내는 오늘 ‘앵그리 버드’. 같이 화를 내는 것은 전쟁 선포다. 전쟁은 어떤 전쟁이든지 끝이 안 좋다. ‘여자의 화증은 하나님도 누르지 못한다는데’ 일단 침묵하자. 오래 안 간다. 곧 평화가 찾아오겠지.  
281 좌광우도/ 김진수
임술랑
2336 2013-08-21
좌광우도/김진수 외길로 뚫린 마래터널을 지나 만성리까지 무사히 가려면 오른쪽으로 몇 번쯤은 비켜 설줄 아는 게 요령이다. 굴 밖 비렁에는 요령없이 터널을 빠져 나가다 손가락 총에 수장된 수많은 통곡소리가 아직 파도치고 태풍이 쓸고 간 만성리 횟집은 밤이 되도 캄캄하다. 활어통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광어 도다리들이 순환모터가 멈춰 선 수조를 뛰쳐나와 땅바닥에 온통 널브러진 횟집 앞에서 구경꾼들의 논란이 우왕좌왕 하고 있다 ‘눈이 왼쪽으로 쏠려 있으면 광어고 오른쪽으로 쏠려 있으면 도다리’라며 광어와 도다리 구분법을 확실히 잘 안다는 자 그 자의 높은 목청 아래 결코 갈라져선 안 될 세상 하나가 또, 분류되고 있다. 좌우지간이란 손 내밀면 가장 가까운 거리 팽팽히 맞서 보면 좌광우도가 어깨를 나란히 동무하고 보니 두 말 할 필요 없이 우광좌도다! 그렇다. 광어는 본래부터 광어였고 도다리도 그냥 도다리였을 뿐이다. 계간 《詩로 여는 세상》2007 겨울호 .................................................................................................................................................................................................................................................. (감상) 사실 끝까지 몰아세우는 것만큼(그것이 사상이랄지 物理를 따지는 일이랄지)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우리가 살면서 가지는 생각들이 좌면 어떻고 우면 또 어떤가. 생각들의 극단이 사건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무지는 그른 판단을 하고 욕망은 그 보다 더한 죄악을 저지를 뿐이다. 공자는 태산에 올라 천하가 좁음을 한탄했다지만, 우리들은 왜 세상이 작고 인간이 무력함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걸까. 그러므로 타협하지 못하고 반대쪽을 끝까지 밀어 붙이는 죄악이 발생하는 것이다. 1948년 여순사건을 염두해 두고 쓴 여수에 사는 김진수시인의 위 시를 읽으며 눈이 왼쪽으로 쏠려 광어면 어떻고 오른쪽으로 쏠려 도다리면 어떤가라는 생각이다. 똑같이 비슷한 모습(가자미목)을 하고 있는 바다고기일 뿐인데. 여순사건으로 사망(행불포함)한 사람이 무려 3,500명에 이른다.(임술랑) P.S. 진수야! 《여수작가》창간호 잘 받았다. 고맙다 ^^  
280 흔한 장면 / 정재학
남태식
1691 2013-08-19
흔한 장면 정재학 군무群舞처럼 같은 각도로 고개를 숙이고 똑같이 흔들리고 있다. 손가락들이 먹을 것을 찾아 꼼지락거리는 벌레처럼 움직인다. 식욕을 다 채우기 전에는 앞자리에 앉은 예쁜 어린아이도, 불쑥 지나가는 걸인도 보지 못한다. 보지 않는다. 직접 만난 지 몇 년이 넘은 친구와 간혹 짧은 문자를 나누지만 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도 모르고…… 무선으로 간신히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 죽기 전에 서로 몇 번은 만날 것이다. 현재 시간 2013년 4월 25일 목요일 오전 7시 24분. 지하철에서 시집을 읽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지하철 칸마다 손가락들이 꿈틀대고 있다. - 계간『예술가』2013 여름 *** 앞을 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 옆을 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 뒤를 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 앞을 보지 않으니 앞사람의 눈을 보지 못한다. 옆을 보지 않으니 옆사람의 귀를 보지 못한다. 뒤를 보지 않으니 뒤에 있는 건 무엇? 음…… 얼굴? 머리? 허공? 빈? 입이 없다. 입만 없는 것이 아니라 코도 없고 귀도 없고 눈도 없다. 오로지 꼼지락거리는 손가락만 있다. 말이 없다. 우리는 모두 아래만 아래만 내려다보며 손가락들에게 군무를 추게하고 있다. 엇 둘! 엇 둘! 꼼지락꼼지락. 하는 동안, 사라졌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사라졌다. 가까이 있는 골목이, 거리가 사라졌다. 가까이 있는 강이, 산이, 하늘이, 풍경이 사라졌다. 가까이, ‘가까이’가 사라졌다. 사라져 숨었다. 사람 골목 거리 강 산 하늘이 모두 이미지가 되었다. 풍경이 모두 이미지 속에 갇혔다. 과자를 빼앗긴 아이가 울고 있다 그 옆에 술을 빼앗긴 어른이 울고 있다 그 옆에 장난감을 빼앗긴 막내가 울고 있다 그 옆에 한 달 만에 들어온 여자가 울고 있다 그 옆에 살이 숭숭 빠진 생선이 울고 있다 그 옆에 어떤 최후가 울고 있다 그 옆에 모든 옆이 와서 울고 있다 그 옆에 생글생글 눈 내리는 창가 그 옆에 밑 빠진 독처럼 앉은 하느님이 멀뚱멀뚱 하늘만 쳐다본다 우리는 옆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 박지웅 ‘옆이 없다’ (계간『예술가』2013 여름) 옆을 잃고, 이미지 속에 갇힌 풍경에만 말걸기하는 이건 소통? 불통? (남태식)  
279 머석과 거석 / 박재삼
김재순
1779 2013-08-16
머석과 거석 내 젊었을 적 고향의 한 늙은이가 사투리로 이렇게 말했네 “내가 웬만큼 머석하면 거석했을 낀데, 원청 거석하다 보니까 머석할 수가 없었네,, 얼릉 무슨 말이 안 나와 그저 지칭이 애매한 머석과 거석을 들고 나와 말을 때우고 있었으니 ‘저 노인 보게,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건만, 이제는 그것이 어느새 내게 오게 된 멍청한 나날이여. *박재삼 시집: 다시 그리움으로 1연에서 큰소리로 깔깔 웃다가 2연에서 숙연했습니다 시인이 투병하면서 쓴 시, 그토록 아름답고 풍부한 서정의 시인도 세월의 바람결에는 속절없이 퇴락하는가 봅니다 한 잎 두 잎 떨어지다가 밑둥까지 사라졌지만 허무의 세계로 갔을까요 아니, 아니요 제 가슴에 있습니다 그의 시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 있을 것입니다. --김재순--  
278 누님 / 고재종
김재순
1887 2013-08-05
누님 / 고재종 저것 좀 보아 저 아가씨 봉선화 따서 손톱 묶네 저 아가씨 얼굴 좀 보아 홍색 자색 연분홍 드네 가슴 봉긋한 저 아가씨 이윽한 눈빛의 저 아가씨 꽃물 든 손 가슴에 얹네 말만한 엉덩이 저 아가씨 바알갛게 달아오르네 숨쉬기조차 힘들어하네 아아, 저 아가씨 눈이슬 짓네 내사 차마는 못 보겠네 진저리치다 깨어나니 울밑의 봉선화 비에 젖네 - 고재종시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지금 생각해도 그 시절의 나의 언니는 순정만화의 주인공처럼 아름다웠습니다 무명실로 손가락을 처매고 난 후 내 작은 손톱에도 꽃물을 들여주던 언니 (나는 답답해서 곧 풀어버리지만) 손톱에서 꽃물이 빠지기 전에 첫눈이 온다면 첫사랑도 이루어진다는 속설처럼 언니의 첫사랑은 이루어졌을까 이제 그 풍경은 너무도 아련하여 꿈결인 듯 싶습니다 -김재순-  
277 쉰 / 유진택
윤임수
1710 2013-08-02
쉰 쉰이라는 말, 참 여유롭다 마흔과 예순 사이에 끼인 나이, 할딱고개를 넘다가 힘들면 쉬어 가는 나이처럼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누구는 황혼으로 가는 길목이라고 했지만 노을이 들어앉은 자리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쉰이라는 나이, 부끄러워 할 나이 아니다 아직은 한창 일할 나이 세상이 더러워 밥줄 잘리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절망하지 마라 쉰이라는 말, 지지대 감아 오르는 나팔꽃 줄기처럼 힘들면 쉬어 가는 나이, 쉰이라는 말, 참 여유롭다 - 시집 "달콤한 세월"에서 - * 벌써 나이를 생각할 나이가 되었나, 유진택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을 읽다가 이 시가 눈에 들어왔다. 쉰이라는 말, 참 낯설다. 그러나 외면하지 않으리라, 두려워하지도 않으리라. 지금까지처럼 또 그렇게 나는 내 나이, 내 길을 갈 뿐이다.  
276 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 / 양성우
남태식
1677 2013-07-30
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 양성우 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 나를 낙심케 하지 마라 여기까지 오는 길에 수렁에 빠진 적이 몇 번이었고 얼음에 누운 적이 몇 번이었던가 내 가슴의 상처들이 시가 되었다 남모르게 흘린 눈물까지도 웬일인지는 몰라도 차라리 온몸에 멍들고 응어리진 것들이 시가 되었다 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 흐르는 물을 보며 소리 지를까 들어보라 내 모든 슬픔이 시가 되었다 눈비바람 어둡고 거친 길, 발끝에 차이는 잔 돌멩이 지푸라기들도 - 양성우 『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실천문학 2012 *** 한 시대의 아픔과 슬픔을 짊어지고 저항의 투사로 살았던 노시인의 육성을 듣습니다. 시가 된 상처와 눈물, 멍과 응어리로 내지르는 통곡을 듣습니다. ‘시가 된 모든 슬픔’이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겨졌으면 바라는데 이건 한낱 꿈일까요. ‘나를 낙심케 하지 마라’고 여전 외치는 시인을 보며 그저 죄스럽고 미안합니다. (남태식)  
275 소행성을 지나는 늙은 선로공 / 황병승
남태식
1818 2013-07-20
소행성을 지나는 늙은 선로공 황병승 하늘은 맑고 시원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오후 빛바랜 작업복 차림의 한 늙은 선로공이 보수를 마치고 선로를 따라 걷고 있다 앙상한 그의 어깨 너머로 끝내 만날 수 없는 운명처럼 이어진 은빛 선로 그러나 언제였던가, 아득한 저 멀리로 화살표의 끝처럼 애틋한 키스를 나누던 기억 보수를 마친 한 늙은 선로공이 커다란 공구를 흔들며 선로를 따라 걷고 있다 - 황병승 『육체쇼와 전집』문학과지성사 2013 *** 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새와 작별하듯 / 그대 떠나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 눈물 나누나 // 그대 보내고 아주 지는 별빛 바라볼 때 / 눈에 흘러내리는 못 다한 말들 / 그 아픈 사랑 지울 수 있을까 // 어느 하루 비라도 추억처럼 흩날리는 거리에서 / 쓸쓸한 사랑되어 고개 숙이면 그대 목소리 //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 어느 하루 바람이 젖은 어깨 스치며 지나가고 / 내 지친 시간들이 창에 어리면 그대 미워져 //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 / 그립던 날들도 묻어 버리기 / 못 다한 사랑 //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풍경이 너무 쓸쓸합니다. 쓸쓸하다 못해 아프기까지 합니다. 쓸쓸한 풍경 속에서 ‘선로를 따라 걷고 있는 늙은 선로공’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따라가는데 문득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는 노래가 떠오릅니다. 쓸쓸한 풍경이 불러온 하나의 연상입니다. 소행성의 선로공이라니까 또 생 떽쥐뻬리의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소혹성에 산다는 점등인, 전철수도 떠오릅니다. 이 점등인과 전철수가 살고 있는 소혹성도 무척 쓸쓸해 보이는 별입니다. 점등인과 전철수의 모습도 다른 소혹성에 산다는 많은 등장인물들처럼 물론 쓸쓸합니다. ‘키스를 나누던 기억’이라고만 했다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상상을 마무리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 앞에 붙은 ‘애틋한’이 키스의 기억을 아픔의 기억으로 떠오르게 하면서 어쩌면 풍경이 더 쓸쓸해졌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풍경을 더 쓸쓸하게 보이게 만들었겠습니다. 아픈 키스의 기억이라, 이렇게 말하고 보니 제게도 오래 전 있었던 기억의 한 풍경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쓸쓸함마저도 함께 해서 말입니다. (남태식)  
274 희망의 연옥 / 김승희
남태식
2397 2013-07-13
희망의 연옥 “이 세상은 항상 폐허야. 하지만 우리에겐 작은 기회가 있어. 만약 우리가 아주, 아주 열심히 노력한다면, 우리는 선을 상상할 수 있을 거야. 우리는 파손된 것을 복구할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낼 수 있어. 조금씩, 조금씩. - 제이 파리니,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에서 김 승 희 그리고 그는 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 작은 마을 안전지대에 도착한 뒤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세상은 항상 그런 최후로 가득 차 있다 파손된 것들을 복구하는 방법 너머로 가을이 온다 어디서 그런 절벽들이 푸른 포도밭 과수원 뒤에 아득하다 포도밭 주인은 어디로 갔을까 피레네산맥을 백 번을 넘어도 그 너머 그 너머에도 폐허와 절벽이 가득 차 있는 가을 풍경 팔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눈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감옥 그 너머의 감옥, 절벽 그 너머의 절벽, 최후 그 너머의 최후 산맥을 넘고 넘어도 산맥 산맥 그 너머의 산맥, 절벽 그 너머의 절벽, 최후 그 너머의 최후 우리는 그런 것을 감옥이라고 부른다 희망의 연옥이라고 - 시집 『희망이 외롭다』문학동네 2012 ***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을 탁월하게 분석한 불우한 사상가 발터 베냐민(1892~1940)은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가,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에서 스페인 입국이 좌절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최성일의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에서 인용) ‘그리고 그는 피레네산맥을 넘어 / 스페인 작은 마을 / 안전지대에 도착한 뒤 /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안전지대’라니? ‘안전지대’였는데? ‘안전지대’에서? ‘이 세상은 그런 최후로 가득 차 있다’ ‘감옥 그 너머의 감옥, 절벽 그 너머의 절벽, 최후 그 너머의 최후 / 산맥을 넘고 넘어도 산맥 / 산맥 그 너머의 산맥, 절벽 그 너머의 절벽, 최후 그 너머의 최후’ 이것은 끔찍한 풍경이다. 화자의 진술처럼 이런 세상은 ‘감옥’이다. 그런데 막판에 이것을 뒤집어 ‘희망의 연옥’이라니 이건 또 무슨? ‘간신히 희망’(시인의 말)이라더니, 이건 ‘그래도 희망’이라는 것일까. (남태식)  
273 세다가 새는 / 김사이
김재순
1796 2013-07-12
세다가 새는 / 김사이 땅거미 가만가만 내려앉는 구종점 네거리 언덕배기 인력사무소 앞에 야전가방 하나씩 둘러맨 사람들 오야지를 에워싸고 내밀어진 손들에 하루치 몸값이 착착, 20년 날일 쫑내고 낙향한 노총각 조 씨가 툴툴거리며 그랬던 것처럼 센다 천 원짜리 닳고 닳도록 세고 또 세본다 아무리 세어도 한 장이 두 장, 열 장이 되지는 않고 하루를 세고 열흘을 세고 일 년을 세며 생을 셈해보며 탁 풀리는 손안에 움켜쥔 서푼짜리 삶이 샌다 노가다판에도 초록은 우우 우거져 여름은 깊어가고 김사이: 반성하다 그만둔 날. 2008년 실천문학사 노가다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주색잡기로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을 물려받았거나 열심히 성실하게 살다가 추락한 사람들이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책임이 그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서푼짜리 삶과 열푼짜리 삶이 가지런하게 늘어서는 날은 언제 오는지... 양심이 있는 지식인들, 그대들을 믿어본다. -김재순-  
272 여수로 오이다 / 김진수
윤임수
1815 2013-06-27
여수로 오이다 그대 그리운 날은 여수로 오이다! 세상의 모든 봄은 여기서 시작되고 세상의 모든 맹서도 여기서는 굳어지나니 사랑을 잃고 시를 잃고 꿈과 희망마저 까마득해지는 날이거든 얼릉 오이다! 여수로 오이다! 세상의 모든 슬픔 여기 와서 다 푸이다 가슴을 활짝 열고 두 팔을 벌리면 다시금 푸른 바다 빈 마음 가득할 때 여수가 바로 시여라. 아름다운 꿈이여라. - "창작21" 2013년 봄호에서 - * 여수에 가고 싶다. 사랑을 잃어서도 시를 잃어서도 아니다. 시인이 운영하는 거북수산에 들러 바다 비린내 한 점에 소주를 들이키고 그저 슬픔까지 반겨주는 아름다운 사람에 취하고 싶어 그렇다. 그리운 여수, 무엇이 더 필요하랴.  
271 러브호텔 / 문정희
김재순
1819 2013-06-21
러브호텔 / 문정희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다 나는 그 호텔에 자주 드나든다 상대를 묻지 말기를 바란다 수시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 몸 안에 교회가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에 들어가 기도한다 가끔 울 때도 있다 내 몸 안에 시인이 있다 늘 시를 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아주 드물다 오늘, 강연에서 한 유명 교수가 말했다 최근 이 나라에 가장 많은 것 세 가지가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라고 나는 온몸이 후들거렸다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 가장 많은 곳은 바로 내 몸 안이었으니까 러브호텔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까 교회와 시인들 속에 진정한 꿈과 노래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는 것은 교회가 많고, 시인이 많은 것은 참 쓸쓸한 일이다 오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며 나는 오늘도 러브호텔로 들어간다 그대여 나를 잘 안다고 말하지 마라 내 안에 겹겹이 쌓인 내가 있어 나도 나의 한 자락만을 알고 있을 뿐 나도 그대를 잘 몰라 다만, 그대는 하얀 구미호라고 나의 직감이 슬그머니 일러주네 그렇지만 나는 그대를 사랑하네  
270 남루한 시인/ 김용락
임술랑
1936 2013-06-18
남루한 시인/ 김용락 박재삼 시인의 고향 삼천포에서 주는 박재삼문학상 1차 예심에 올라온 서른 댓 권의 시집 목록을 보니 대부분이 유명 출판사 刊 2차 예심에 올라온 열 한 권의 시집을 봐도 역시 유명 출판사 ㄱ,ㄴ,ㄷ 뿐 개중에는 시집을 내기 위해 2~3년은 족히 기다려야한다는 출판사도 있다고 한다 한국의 비교적 괜찮다는 시인들은 왜 상업적 판로망을 가진 큰 출판사에서만 시집을 내나? 가끔씩은 아침 풀섶의 이슬 속에 바알간 산딸기같이 수줍게 묻혀 있는 마이너 출판사에서 가난한 군소출판사에서 시집을 내는 관용과 여유는 보이지 않나? 냉혹한 자본주의를 가장 미워한다는 시인정신이 자기 시집을 낼 때는 상품과 물신의 자본주의 아가리 속에 고귀한 영혼을 그렇게 일관되게 쑤셔 박는지 어느 선배의 詩句처럼 숨어도 그 남루한 옷자락이 보인다 시인이여? 《불교문예》2013.여름호 ............................................................................................................................................................................................................... (감상) "숨어도 그 남루한 옷자락이 보인다/ 시인이여?" 이런 聖人에 가까운 삶은 살 수 없어도, 적어도 "관용과 여유"를 가지는 자세로 시를 쓰고 싶다. 유명 출판사가 아닌 지방에 작은 인쇄소에서 시집을 내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배짱도 필요하다. (임술랑)  
269 살구나무/ 유금옥
임술랑
2028 2013-06-15
살구나무/ 유금옥 노암동사무소 입구에 ‘바르게 살자!’라고 쓰인 바위 옆에 나무 한 그루 서 있다 허리는 구부정하고 한쪽 팔은 부러졌다 다른 한쪽 팔은 비비 비틀렸고 다리는 작달막하고 무릎은 툭 튀어나왔다 술 냄새가 나는 나무다 화투판을 뒤집어엎는 나무다 태풍에는 비굴하게 굽실거리는 나무다 누런 이빨 같은 살구가 듬성듬성 달리는 나무다 나를 보면 반가워 나무 밖으로 걸어 나오는 나무다 누가, 아는 나무냐고 물으면 모르는 나무라고 말하는 나무다 《유심》2013.6 ....................................................................................................................................................................................................................... (감상) 살구나무에 노란 살구가 달렸다. 보기만해도 시큼하다. 떨어진 살구는 아무나 줏어 먹어도 되는 푸근한 과실이다. 둥치는 시커멓고 볼품은 없지만, 이른 봄 하얀꽃을 아련하게 피운다. "누가, 아는 나무냐고 물으면/ 모르는 나무라고 말하는" 소유도 집착도 일찌감치 털어버린 나무다. (임술랑)  
268 자전거 / 이병률
남태식
1988 2013-06-12
자전거 이병률 녹슨 물이 하늘을 덮는 세상 끝나는 날, 집 앞에 세워두었다가 잃어버린 자전거를 닮은 자전거를 사야겠다 성을 물려주지 못하는 개미들의 아비 되어 꽃밭의 사정이나 살피다 세상 끝나는 시간, 자전거를 타고 그의 집과 내 집 사이로 난 오르막길 한가운데를 달려야겠다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춥겠다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문득 누군가 그리울 때 내가 알던 말, 이름 곁에 생각난 듯이 자전거를 세워놓아야겠다 마침내 추운 바람 불고 어둠 시작되는 세상 끝나는 시간, 나는 맘놓고 불러보지도 못한 이름들 곁에 가만히 누워 있어야겠다 -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문학동네 2003 *** 상실을 전제로 한 사랑은 아프겠습니다. 이별을 예견한 만남은 서럽겠습니다. “결혼해주실래요” 같은 청혼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만 더 함께 있어주세요” 같은 매달림도 허용되지 않는다면, 마지막 사랑이 아니더라도 춥겠습니다. 피가 거꾸로 돌아 한여름에도 얼음장처럼 손발이 시리겠습니다. 시려 더 서럽겠습니다. 서러워 더 아프겠습니다. 아파도 ‘맘놓고’ 부르지도 못하니 새삼 슬프겠습니다. 부르지도 못했으니 엄살 또한 못 부려서 정말 더 슬프겠습니다. ‘세상 끝나는 날’이 아니더라도 ‘녹슨 물이 하늘을 덮’겠습니다. ‘세상 끝나는 시간’이 아니더라도 바람은 춥고 길 떠날 때마다 어둠이 길을 가리겠습니다. 그러다가 비록 ‘세상 끝나는 시간’일지라도 ‘맘놓고 불러보지도 못한 이름들 곁에 가만히 누워’ 있을 수라도 있다면, 되려 ‘세상 끝나는 시간’의 바람은 따스하고 누운 길 앞에는 빛이 따사로이 비치겠습니다. 그리하여 누군가에게는 시작되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이때부터 마지막은 없겠습니다. 마지막 사랑도 없겠습니다. 마지막이라고 부를 사랑이 없으니 사랑은 늘 첫사랑이겠습니다. 첫사랑이어서 하냥 따뜻하겠습니다, 가슴 두근거리겠습니다, 뜬금없이 자꾸 무너지겠습니다. 꿈이라도 너무 화사해져서 아아 정말 갈앉겠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때가 되면 이것이 정녕 꿈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남태식)  
267 만월 / 정윤천
윤임수
2465 2013-06-09
만월 언제였던가 내 지치고 때묻은 신발 한 켤레 어두워진 밤길 한 비탈을 말없이 끌고 돌아와 고향집 부실한 토방 어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부르면 당신의 저 민둥산 같은 가슴의 떨리는 반가움 위로 여직도 다 재우지 못한 눈물 한 타래 말보담도 앞을 세워 먼저 비치고 부산한 몸짓 서둘러 늦은 밥상을 챙기시던 그 떨리는 어깨 너머로 꼭 누군가의 옛 얼굴을 빼다 박은 저 한도 끝도 없는 영원함이여 - 시집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에서 - * 어머니는 내게 줄 것이 없어서 늘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어머니께서 내게 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안타까운 시선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어머니에게서 나는 참 많은 것을 받았다. 한겨울 시린 새벽에 일어나 아들 녀석의 차가운 발을 어루만지는 어머니로부터 참으로 따뜻함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가난하지만 남들 앞에서 전혀 개의치 않고 비굴하게 굴지 않는 모습에서 실로 처연한 당당함을 배웠다. 따뜻함과 당당함, 그 둘만으로도 내 세상은 충분히 행복하다. 이제는 다 주었다는 듯 꿈에서조차 뵙기 어렵지만 만월이 뜨면 그 한도 끝도 없는 영원함을 거듭 새겨볼 것이다.  
266 못 / 박제영
윤임수
1768 2013-05-30
못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던 삼촌은 죽어서 못이 되었네 엄마야 누나야 가슴 속에서 시커멓게 녹이 슬고 있는 못이 되었네 - 엄마야 이제 그 못 뽑자 제발 엄마는 이십 년을 보챘지만 외할머니는 죽을 때까지 심장에 못을 키웠네 - 못 된 것 못 된 것 외할머니 울음을 삼킬 때마다 못은 조금씩 깊어졌네 눈물샘이 다 마를 때까지 깊어진 못이 마침내 외할머니를 삼켰네 외할머니 봉분 올린 그 밤 엄마는 외할머니가 막내 삼촌 젖을 물리고 있는 꿈을 꾸었네 - 엄마가 이제야 못을 뽑았구나 엄마가 환하게 울고 있었네 - 시집 "식구"에서 - * 엄마보다 먼저 죽어 엄마 가슴에 못이 된 못 된 것 채 자라지 못하여 아무 것도 되지 못한 못 된 것 살면서 잊혀지기는 커녕 슬픔이나 더 키운 못 된 것 그 못이 드디어 "못 된 것"을 벗어나 평온을 찾고 있구나 따뜻한 슬픔으로 가족에게 돌아오는구나 환한 울음으로 서로의 가슴을 쓰다듬는구나  
265 절정/정세훈 image
임술랑
1800 2013-05-28
절정/정세훈 햇볕 쨍쨍한 날 지렁이가 기어가고 있다. 저렇게 기어가다간 말라죽을 수밖에 없는 메마른 보도블록 위를 꿈틀꿈틀 기어가고 있다.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아니 될 그 길을, 목숨 걸고 가고 있다. 시집『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2006 시평사 ............................................................................................................................................................................. (감상) 목숨이란 이렇게 잔인하다. 오늘 우리집 개가 쥐약 먹어 비실거리던 쥐를 깨물어 죽였다. 쥐약을 먹어 가만히 있어도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죽을 것인데, 그 쥐가 마당으로 자꾸 기어 나와서 내가 쫓으니 묶여 있는 깜동이(개) 쪽으로 비실비실 도망가다가 깜동이 이빨에 깨물린 것이었다. "지금 당장 / 가지 않으면 아니 될" 그 길이었던가 .마른 마당에 기어나온 지렁이처럼, 깨물려 눈알이 튀어나온 現象이 우리가 가진 목숨의 앞날인가. 生이란 이렇게 슬프다.(임술랑) 태그저장 취소  
264 딱 한 상자 / 이정록
김재순
1888 2013-05-21
딱 한 상자 / 이정록 스티로폼 상자 위로 물뿌리개 같은 저녁 햇살이 번지네 골목길 담을 따라 열무와 고추와 졸과 상추 상자들 그 중 한 상자엔 채송화며 봉숭아꽃이 피어 있네 채소의 푸른 이파리를 건너온 나비가 꽃송이에 앉아 있네 먹다 놀다 심심하면 종아리에 꽃가루도 매달고 푸성귀 위를 날아갈 것이네 나비나 아주머니나 채소를 거쳐야 꽃송이로 갈 수 있네 두보라면 푸성귀 푸르니 나비 더욱 희다라고 먹물을 찍었을 것이네 나는 일곱 상자 모두 풋것을 심지 않은 마음에다 오래 팔장을 끼네 몽땅 꽃밭이었다면 골목은 더 누추했을 것이네 몽땅 채소였다면 열무 이파리처럼 잔가시가 돋아났을 것이네 일곱 상자 가운데 딱 한 상자, 배냇니처럼 눈부시네 가로등마다 천천히 봉숭아 물이 고이고 있네 방금 빨아놓은 젖은 운동화가 벽돌담 위에 물방울을 내려놓네 누추한 골목에 상추를 비롯한 푸성귀 여섯 상자 그 가운데 꽃상자 하나가 놓여 있다, 채송화 봉숭화가 함께 핀 상자다 촌스럽기 그지없는 이 꽃들은 심고 가꾸는 이에게 무엇일까 삶에 대한 적극적인 마음이고 기쁨이고 사랑이리라 어떤 시련이 있더라도 삶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뜻이리라 그리하여 방문이 대문도 되는 그 골목의 그 사람은 깨끗하게 빤 운동화를 조여 신고 흰 모란 붉은 모란, 흰 장미 붉은 장미 어우러진 곳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리라 --김재순--  
263 다시, / 김길녀
윤임수
1630 2013-05-20
다시, 키 작은 늦겨울 햇살 두꺼운 바람의 껍질 벗겨내며 연두를 빚고 있다 주산지 수양버들 물결의 적막과 내통 중이다 * 이런 내통이라면, 그대여 용서하시라 나 늘 내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