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나무, 사과나무, 사과나무

 

한명희

 

내가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던

그해

 

가을사과는 몇 배는 더

탐스럽게 열렸나

 

봄마다 가지가 찢어질 만치 사과꽃이 피고

나는 애써 사과향기를 외면했나

 

반쯤은 억울하고 반쯤은 그리워서

사실은 사과나무를 아주 잊을 수는 없었나

 

잊지는 못하고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위로의 말을 원수로 삼았나

 

사과나무를 흐르던 시간이 내게도 흘러

이제 나는 사과나무 사과나무 말할 수는 있게 되었나

 

손을 뻗으면 만져질 것도 같은 사과나무

맘먹고 지우자면 가지 서너 개쯤 너끈히 지워낼 것도 같은 사과나무

 

눈에서는 지워져도

입술에는 남아있을 사과나무, 사과나무, 사과나무

 

 

(2013년 『예술가』봄호)

 

 

 

***

  지우려 한 것은 사과였나요, 사과나무였나요. 잊으려 한 것은 사과였나요, 사과꽃이었나요, 사과꽃향기였나요. 떠난 적이 있습니다. 떠날 때의 이유는 갖가지입니다. 지겨워서이기도 하고, 답답해서이기도 하고, 전망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불안해서이기도 하고, 실망해서이기도 하고, 배신감을 느껴서이기도 하고 해서 떠납니다. 떠날 때는 말없이 단호하게 절이 싫어 떠나는 중처럼 하고 떠납니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것처럼 하고 떠납니다. 다시는 눈길도 주지 않을 것처럼 하고 떠납니다. 그리고 절로 흐르는 시간을 타다가 넘다가 하며 다 지웠다 하고 삽니다. 다 잊었다 하며 생각도 안하고 삽니다. 그리고 또, 그리고……

  역시 밀어내지 않아도 절로 흐르는 시간을 타다가 넘다가 하며 문득 멈춰서면 아아, 떠나오던 그 자리에 누군가가 소금기둥처럼 붙박혀 있는 것이 보입니다. 지워지고 있는 가지 끝에 정지셔터를 누른 꽃처럼 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보입니다. 떨어진 것은 떠난 것이 아니라 내쳐진 것이라는 걸 새삼 알았다는 변명은 안 해도 되겠지요. 사과꽃 향기를 맡으려고 누군가가 이 봄 코를 몇 자나 쭉 쭉 늘이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의 누군가도. (남태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