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20호...
   2020년 06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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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271 러브호텔 / 문정희
김재순
2021 2013-06-21
러브호텔 / 문정희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다 나는 그 호텔에 자주 드나든다 상대를 묻지 말기를 바란다 수시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 몸 안에 교회가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에 들어가 기도한다 가끔 울 때도 있다 내 몸 안에 시인이 있다 늘 시를 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아주 드물다 오늘, 강연에서 한 유명 교수가 말했다 최근 이 나라에 가장 많은 것 세 가지가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라고 나는 온몸이 후들거렸다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 가장 많은 곳은 바로 내 몸 안이었으니까 러브호텔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까 교회와 시인들 속에 진정한 꿈과 노래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는 것은 교회가 많고, 시인이 많은 것은 참 쓸쓸한 일이다 오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며 나는 오늘도 러브호텔로 들어간다 그대여 나를 잘 안다고 말하지 마라 내 안에 겹겹이 쌓인 내가 있어 나도 나의 한 자락만을 알고 있을 뿐 나도 그대를 잘 몰라 다만, 그대는 하얀 구미호라고 나의 직감이 슬그머니 일러주네 그렇지만 나는 그대를 사랑하네  
270 남루한 시인/ 김용락
임술랑
2133 2013-06-18
남루한 시인/ 김용락 박재삼 시인의 고향 삼천포에서 주는 박재삼문학상 1차 예심에 올라온 서른 댓 권의 시집 목록을 보니 대부분이 유명 출판사 刊 2차 예심에 올라온 열 한 권의 시집을 봐도 역시 유명 출판사 ㄱ,ㄴ,ㄷ 뿐 개중에는 시집을 내기 위해 2~3년은 족히 기다려야한다는 출판사도 있다고 한다 한국의 비교적 괜찮다는 시인들은 왜 상업적 판로망을 가진 큰 출판사에서만 시집을 내나? 가끔씩은 아침 풀섶의 이슬 속에 바알간 산딸기같이 수줍게 묻혀 있는 마이너 출판사에서 가난한 군소출판사에서 시집을 내는 관용과 여유는 보이지 않나? 냉혹한 자본주의를 가장 미워한다는 시인정신이 자기 시집을 낼 때는 상품과 물신의 자본주의 아가리 속에 고귀한 영혼을 그렇게 일관되게 쑤셔 박는지 어느 선배의 詩句처럼 숨어도 그 남루한 옷자락이 보인다 시인이여? 《불교문예》2013.여름호 ............................................................................................................................................................................................................... (감상) "숨어도 그 남루한 옷자락이 보인다/ 시인이여?" 이런 聖人에 가까운 삶은 살 수 없어도, 적어도 "관용과 여유"를 가지는 자세로 시를 쓰고 싶다. 유명 출판사가 아닌 지방에 작은 인쇄소에서 시집을 내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배짱도 필요하다. (임술랑)  
269 살구나무/ 유금옥
임술랑
2216 2013-06-15
살구나무/ 유금옥 노암동사무소 입구에 ‘바르게 살자!’라고 쓰인 바위 옆에 나무 한 그루 서 있다 허리는 구부정하고 한쪽 팔은 부러졌다 다른 한쪽 팔은 비비 비틀렸고 다리는 작달막하고 무릎은 툭 튀어나왔다 술 냄새가 나는 나무다 화투판을 뒤집어엎는 나무다 태풍에는 비굴하게 굽실거리는 나무다 누런 이빨 같은 살구가 듬성듬성 달리는 나무다 나를 보면 반가워 나무 밖으로 걸어 나오는 나무다 누가, 아는 나무냐고 물으면 모르는 나무라고 말하는 나무다 《유심》2013.6 ....................................................................................................................................................................................................................... (감상) 살구나무에 노란 살구가 달렸다. 보기만해도 시큼하다. 떨어진 살구는 아무나 줏어 먹어도 되는 푸근한 과실이다. 둥치는 시커멓고 볼품은 없지만, 이른 봄 하얀꽃을 아련하게 피운다. "누가, 아는 나무냐고 물으면/ 모르는 나무라고 말하는" 소유도 집착도 일찌감치 털어버린 나무다. (임술랑)  
268 자전거 / 이병률
남태식
2133 2013-06-12
자전거 이병률 녹슨 물이 하늘을 덮는 세상 끝나는 날, 집 앞에 세워두었다가 잃어버린 자전거를 닮은 자전거를 사야겠다 성을 물려주지 못하는 개미들의 아비 되어 꽃밭의 사정이나 살피다 세상 끝나는 시간, 자전거를 타고 그의 집과 내 집 사이로 난 오르막길 한가운데를 달려야겠다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춥겠다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문득 누군가 그리울 때 내가 알던 말, 이름 곁에 생각난 듯이 자전거를 세워놓아야겠다 마침내 추운 바람 불고 어둠 시작되는 세상 끝나는 시간, 나는 맘놓고 불러보지도 못한 이름들 곁에 가만히 누워 있어야겠다 -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문학동네 2003 *** 상실을 전제로 한 사랑은 아프겠습니다. 이별을 예견한 만남은 서럽겠습니다. “결혼해주실래요” 같은 청혼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만 더 함께 있어주세요” 같은 매달림도 허용되지 않는다면, 마지막 사랑이 아니더라도 춥겠습니다. 피가 거꾸로 돌아 한여름에도 얼음장처럼 손발이 시리겠습니다. 시려 더 서럽겠습니다. 서러워 더 아프겠습니다. 아파도 ‘맘놓고’ 부르지도 못하니 새삼 슬프겠습니다. 부르지도 못했으니 엄살 또한 못 부려서 정말 더 슬프겠습니다. ‘세상 끝나는 날’이 아니더라도 ‘녹슨 물이 하늘을 덮’겠습니다. ‘세상 끝나는 시간’이 아니더라도 바람은 춥고 길 떠날 때마다 어둠이 길을 가리겠습니다. 그러다가 비록 ‘세상 끝나는 시간’일지라도 ‘맘놓고 불러보지도 못한 이름들 곁에 가만히 누워’ 있을 수라도 있다면, 되려 ‘세상 끝나는 시간’의 바람은 따스하고 누운 길 앞에는 빛이 따사로이 비치겠습니다. 그리하여 누군가에게는 시작되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이때부터 마지막은 없겠습니다. 마지막 사랑도 없겠습니다. 마지막이라고 부를 사랑이 없으니 사랑은 늘 첫사랑이겠습니다. 첫사랑이어서 하냥 따뜻하겠습니다, 가슴 두근거리겠습니다, 뜬금없이 자꾸 무너지겠습니다. 꿈이라도 너무 화사해져서 아아 정말 갈앉겠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때가 되면 이것이 정녕 꿈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남태식)  
267 만월 / 정윤천
윤임수
2601 2013-06-09
만월 언제였던가 내 지치고 때묻은 신발 한 켤레 어두워진 밤길 한 비탈을 말없이 끌고 돌아와 고향집 부실한 토방 어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부르면 당신의 저 민둥산 같은 가슴의 떨리는 반가움 위로 여직도 다 재우지 못한 눈물 한 타래 말보담도 앞을 세워 먼저 비치고 부산한 몸짓 서둘러 늦은 밥상을 챙기시던 그 떨리는 어깨 너머로 꼭 누군가의 옛 얼굴을 빼다 박은 저 한도 끝도 없는 영원함이여 - 시집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에서 - * 어머니는 내게 줄 것이 없어서 늘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어머니께서 내게 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안타까운 시선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어머니에게서 나는 참 많은 것을 받았다. 한겨울 시린 새벽에 일어나 아들 녀석의 차가운 발을 어루만지는 어머니로부터 참으로 따뜻함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가난하지만 남들 앞에서 전혀 개의치 않고 비굴하게 굴지 않는 모습에서 실로 처연한 당당함을 배웠다. 따뜻함과 당당함, 그 둘만으로도 내 세상은 충분히 행복하다. 이제는 다 주었다는 듯 꿈에서조차 뵙기 어렵지만 만월이 뜨면 그 한도 끝도 없는 영원함을 거듭 새겨볼 것이다.  
266 못 / 박제영
윤임수
1948 2013-05-30
못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던 삼촌은 죽어서 못이 되었네 엄마야 누나야 가슴 속에서 시커멓게 녹이 슬고 있는 못이 되었네 - 엄마야 이제 그 못 뽑자 제발 엄마는 이십 년을 보챘지만 외할머니는 죽을 때까지 심장에 못을 키웠네 - 못 된 것 못 된 것 외할머니 울음을 삼킬 때마다 못은 조금씩 깊어졌네 눈물샘이 다 마를 때까지 깊어진 못이 마침내 외할머니를 삼켰네 외할머니 봉분 올린 그 밤 엄마는 외할머니가 막내 삼촌 젖을 물리고 있는 꿈을 꾸었네 - 엄마가 이제야 못을 뽑았구나 엄마가 환하게 울고 있었네 - 시집 "식구"에서 - * 엄마보다 먼저 죽어 엄마 가슴에 못이 된 못 된 것 채 자라지 못하여 아무 것도 되지 못한 못 된 것 살면서 잊혀지기는 커녕 슬픔이나 더 키운 못 된 것 그 못이 드디어 "못 된 것"을 벗어나 평온을 찾고 있구나 따뜻한 슬픔으로 가족에게 돌아오는구나 환한 울음으로 서로의 가슴을 쓰다듬는구나  
265 절정/정세훈 image
임술랑
1979 2013-05-28
절정/정세훈 햇볕 쨍쨍한 날 지렁이가 기어가고 있다. 저렇게 기어가다간 말라죽을 수밖에 없는 메마른 보도블록 위를 꿈틀꿈틀 기어가고 있다.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아니 될 그 길을, 목숨 걸고 가고 있다. 시집『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2006 시평사 ............................................................................................................................................................................. (감상) 목숨이란 이렇게 잔인하다. 오늘 우리집 개가 쥐약 먹어 비실거리던 쥐를 깨물어 죽였다. 쥐약을 먹어 가만히 있어도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죽을 것인데, 그 쥐가 마당으로 자꾸 기어 나와서 내가 쫓으니 묶여 있는 깜동이(개) 쪽으로 비실비실 도망가다가 깜동이 이빨에 깨물린 것이었다. "지금 당장 / 가지 않으면 아니 될" 그 길이었던가 .마른 마당에 기어나온 지렁이처럼, 깨물려 눈알이 튀어나온 現象이 우리가 가진 목숨의 앞날인가. 生이란 이렇게 슬프다.(임술랑) 태그저장 취소  
264 딱 한 상자 / 이정록
김재순
2072 2013-05-21
딱 한 상자 / 이정록 스티로폼 상자 위로 물뿌리개 같은 저녁 햇살이 번지네 골목길 담을 따라 열무와 고추와 졸과 상추 상자들 그 중 한 상자엔 채송화며 봉숭아꽃이 피어 있네 채소의 푸른 이파리를 건너온 나비가 꽃송이에 앉아 있네 먹다 놀다 심심하면 종아리에 꽃가루도 매달고 푸성귀 위를 날아갈 것이네 나비나 아주머니나 채소를 거쳐야 꽃송이로 갈 수 있네 두보라면 푸성귀 푸르니 나비 더욱 희다라고 먹물을 찍었을 것이네 나는 일곱 상자 모두 풋것을 심지 않은 마음에다 오래 팔장을 끼네 몽땅 꽃밭이었다면 골목은 더 누추했을 것이네 몽땅 채소였다면 열무 이파리처럼 잔가시가 돋아났을 것이네 일곱 상자 가운데 딱 한 상자, 배냇니처럼 눈부시네 가로등마다 천천히 봉숭아 물이 고이고 있네 방금 빨아놓은 젖은 운동화가 벽돌담 위에 물방울을 내려놓네 누추한 골목에 상추를 비롯한 푸성귀 여섯 상자 그 가운데 꽃상자 하나가 놓여 있다, 채송화 봉숭화가 함께 핀 상자다 촌스럽기 그지없는 이 꽃들은 심고 가꾸는 이에게 무엇일까 삶에 대한 적극적인 마음이고 기쁨이고 사랑이리라 어떤 시련이 있더라도 삶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뜻이리라 그리하여 방문이 대문도 되는 그 골목의 그 사람은 깨끗하게 빤 운동화를 조여 신고 흰 모란 붉은 모란, 흰 장미 붉은 장미 어우러진 곳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리라 --김재순--  
263 다시, / 김길녀
윤임수
1791 2013-05-20
다시, 키 작은 늦겨울 햇살 두꺼운 바람의 껍질 벗겨내며 연두를 빚고 있다 주산지 수양버들 물결의 적막과 내통 중이다 * 이런 내통이라면, 그대여 용서하시라 나 늘 내통하고 싶다.  
262 아무것도 아닌 / 황희순
남태식
1902 2013-05-11
아무것도 아닌 황희순 청개구리 날개는 언제 사라졌을까 사람의 꼬리는, 너를 그리워하던 마음은 언제 슬며시 사라진 걸까 쥐똥나무 울타리에서 청개구리가 운다 저거 무슨 새소리야? 지나가는 아이가 제 어미에게 묻는다 글쎄, 무슨 새지? 저렇게 우는 새가 있었나 생각하다 나도 그만 새소리로 듣는다 손톱만한 초록색 등에 노란 날개를 그려 넣는다 그러니 얘야, 새로 알고 자라도 괜찮단다 태초 우린 모두 한 점에서 시작한 생물이니 뭐라 부른들 어떤가 서로서로 이름 없는 아무것도 아니어서 마주본 적조차 없으므로 사라진 것도 사라지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날개를 꼬리를 마음을 몸속에 사려두고 억겁을 피고 또 지면서 제 목소리로 출렁이고 있을 뿐이다 - 황희순 시집 『미끼』종려나무 2013 *** 오랫동안 이별의 아픔에 빠져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별은 낭떠러지로 떨어진 듯 너무나 아파 어떻게 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이별은 슬픔을 낳고, 슬픔은 아픔을 낳고, 아픔은 외로움을 낳고, 외로움은 눈물을 낳았습니다. 눈물은 눈물을 불러 더 큰 눈물을 낳고 결국에는 다시 외로움을 낳고, 외로움은 외로움을 불러 더 큰 외로움을 낳고 결국에는 다시 아픔을 낳고, 아픔은 아픔을 불러 더 큰 아픔을 낳고 결국에는 다시 슬픔을 낳았습니다. 슬픔은 슬픔을 불러 더 큰 슬픔을 낳고,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영혼은 결국 이어지는 사소한 많은 이별을 낳았습니다. 사소한 만남이 있을 수 없듯이 사소하다고 이름 지어도 괜찮을 이별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그 이별의 상황에서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있는 영혼에게 그 이별 이후의 이별은 모두 사소한 것들이 되는 셈이었지요.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알았습니다. 그 이별 또한 순간이었고 지나간다는 것을요, 지나갔다는 것을요. 과도한 집착은 과도한 감정을 일으킵니다. 놓으면 편안한 자연 상태로 되돌아오는 감정을 과도한 집착은 왜곡까지 시키면서 감정을 오랫동안 부자연스런 상태로 잡아두지요. 이별도 이별의 상황에만 집착해 있을 때는 한없는 슬픔과 아픔과 외로움을 일으키지만 그 상황을 의도적으로 벗어나거나 잊으려 하면 자연스레 잊혀지고 사라집니다. ‘너를 그리워하던 마음은 언제 슬며시 사라진 걸까’ 하고 묻고, ‘사라진 것도 사라지지 않은 것도 아니다’ 면서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위안의 말을 전하는 화자의 모습에 마음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면서도 아프지 않은 건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난 화자의 편안한 모습이 눈앞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감정이 체념인지 해탈인지 알 수는 없지만 보기에는 좋습니다. 잡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한 번쯤은 놓아봐야 합니다. 그것이 계속 잡고 있어도 괜찮은 것인지 놓아봐야 알 수가 있고, 놓아야 새로운 것을 또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태식)  
261 동해남부선 / 천향미
윤임수
2603 2013-05-08
동해남부선 천 향 미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방향 창가에 앉아 내 유년에 개가한 엄마의 철길 위로 엄마, 하고 나직이 불러본다 입김어린 차창에 언니 이름 먼저 쓰고 차창이 흐려지기를 기다렸다 다시 ‘미야’ 작은 글씨로 내 이름을 적었을 그리고는 이내 뿌옇게 지워졌을, 왜 과거는 멀미가 날까 역방향 좌석처럼 엄마가 떠나던 그날 기차는 지축을 흔들며 미포 구덕포를 돌아 북으로 가고 서러움에 울던 레일의 평행선은 다음 기차가 지나간 후에라야 아닌 듯 지워졌을 것인데- 늘 안개 속을 달려야만 했던 기차 등 돌리고 앉은 나처럼 등 뒤의 풍경이 그리워 애틋하였을 애틋하여 서러웠을 시간을 만나러 간다 풀어내는 기적소리에 온기를 느끼며 쉬고 싶은 간이역 다음 역은 ‘월내역’이다 애써 ‘원래’라고 발음하며 처음 그랬던 것처럼 내 잃어버렸던 여정의 출발점을 만나면 그때 기적보다 크게 울 수 있을까 동해남부선 열차는 파도가 바퀴다 울음 같은 파도 잠잠해지면 나 거꾸로 앉았던 자리 앞으로 앉을 것이다 - 시집 "바다빛에 물들기" 에서 * 누군가에게 기차는 낭만이고 아직도 가슴 설레는 추억이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채 가시지 않은 슬픔이고 애틋한 사연일 수도 있다. 어린 딸들을 남겨두고 개가하는 엄마는 기차를 따라 홀가분하게 떠날 수 없기에 좌석을 역방향으로 돌려놓고 떠나온 곳을 바라보면서 서러운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으릐라. 그날따라 철길 옆 바다는 커다란 속울음처럼 유난히도 크게 밀려왔으리라. 그러나 이제 한 세월을 다독이며 기차가 달렸으니 철길에 뿌린 서러움을 거두시라 말하고 싶다. 이제 정방향으로 앉아서 마음을 추스르고 푸르게 다가오는 오늘과 내일을 끌어안아 달라고 말하고 싶다. 기차가 모든 오욕의 역사를 끌어안고 지금껏 달려왔듯이, 더 밝은 내일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듯이,  
260 칠성시장 무실댁/고운기
임술랑
2416 2013-04-30
칠성시장 무실댁 고운기 안동 사는 무실댁 칠성시장 배추 팔러 나와 떨이 털어내면 찾아가는 곳 시장 모퉁이 네온 번쩍이는 칠성카바레에서 구두 끝 반짝이는 남자 하나 만났는데 이 남자 아무리 손님이라 해도 마른 배추 같은 무실댁 보니 한숨 나왔겠지 아지매 올 몇 살인교? 손끝 잡고 한 바퀴 돌리면서 물었더니 오~십 하고도…… 황홀한 무실댁 정신 놓고 돌며 대답하는데 남자 그 사이 줄행랑 놨다나 한 바퀴 돌아 제자리 서니 남자는 없고 구두 끝 반짝이던 그 남자 너무 아쉬워 무실댁 칠성카바레 플로어 구석구석 돌며 아잰교? 아잰교?…… 남자마다 붙들고 물었다는데 색소폰 소리 높아가고 반짝등만 심없이 돌아갔다는데. 시집『구름의 이동속도』2012 문예중앙 ........................................................................................................................................... (감상) 어흐. "너무 아쉬워" 짚북데기 같은 인생이건만 "반짝이던 그 남자 너무 아쉬워" 찾고 찾는 무실댁. 방황하는 모습이 슬프다. 대저 인간 개체란 어떤 것이길래. 아쉬움을 털어내지 못하는 것 으로 얼마나 많은 사건은 발생하는가. 磁性과 慣性에 끌리어 파탄하고 마는가."아잰교?" "아잰교?" 애원하는 영혼이 슬프다.(임술랑)  
259 꽃잎 인연 / 도종환
김재순
2920 2013-04-24
꽃잎 인연 / 도종환 옷깃을 스치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마음을 흔들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저녁 하늘과 만나고 간 기러기 수만큼이었을까. 앞강에 흔들리던 보름달 수만큼이었을까. 가지 끝에 모여와 주는 오늘 저 수천 개 꽃잎도 때가 되면 비 오고 바람 불어 속절없이 흩어지리라. 살아 있는 동안은 바람 불어 언제나 쓸쓸하고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도 빗발과 꽃나무들 만나고 헤어지는 일과 같으리라. 마음을 흔들고만 간 것이 아니라 꽃잎을 때리는 빗발처럼 갈기갈기 찢어놓고 그냥 가버려 으드득 이를 갈며 칼을 벼리기도 하지만 그가 있어 삶의 어느 한 순간이 반짝였음도 기억하겠지요 이제 그 반짝임이 희뿌옇더라도 그 빛은 아직도 벼린 칼쯤은 단번에 녹여버릴 수 있어 우리는 또 새로운 꽃을 품는지도 모르지요, 바보같이. -김재순-  
258 아름다운 진화 / 김은경
윤임수
2201 2013-04-22
아름다운 진화 꽃 속으로는 고운 사람의 발길만 오가는 게 아니어서 꽃 속으로는 꽃 소식만 오가는 게 아니어서 화염처럼 터지기도 하고 황하를 건넌 모래바람에 짓눌려 꽃씨들은 미처 부화하기도 전에 허공으로 흩어집니다 신이 우리에게 부친 편지를 다 읽기 전에 해는 시들고 물새들이 강을 건너오기 전에 강물은 바짝 말라버릴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발자국 소리를 듣기도 전에 내 기다림은 지루함과 고독으로 병들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오늘처럼 빛나는 날이면 나는 한 포기의 꽃나무를 심고 바람에 부스스 잠이 깬 열매들을 거두어 술을 담글 겁니다 항아리는 옹기쟁이의 체온으로 아직 따뜻하고 신의 입김으로 인해 우물물은 아직 썩지 않았습니다 사과 속엔 벌레가 지나간 무수한 길들이 있고 단내 나는 그 길에는 발효의 시간을 기다리는 당신과 내가 있습니다 오랜 침묵이 빚어내는 풍화의 쓴맛, 우리도 곧 보게 되겠지요 별빛 쏟아지는 취향의 그 길 위에 언젠가 우리가 함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문을 열어주세요 당신 일몰이 서역을 넘기 전에 손을 잡아주세요 피와 살 한데 섞어 우리 사과향 짙어가는 그곳으로 함께 가요 퍼붓는 총알을 멈추고 겨자씨만한 한 생명도 흙 속에 품어낼 사람 아주 먼 사막이라도 온밤을 걸어 나와 함께 갈 사람, 사랑은 그렇게 천천히 어둠을 거두는 것 향기는 그늘도 모르게 익어가고 있어요 다시 태어나는 법을 나는 모르므로 어둠이 뿌린 빗살 계단을 밟고 오세요 당신, 기꺼이 손을 잡아드릴 테니 금간 당신 뼛속에 내 입김을 불어넣어 드릴 테니 - 시집 "불량 젤리"에서 * 온통 꽃세상이다. 하얗고 노랗고 붉으스름한 꽃들이 세상을 밝게 비추고 있다. 나도 그대에게 꽃으로 빛나고 싶다. 그대를 위해 한 포기의 꽃나무를 심고 그 나무에 열매가 열리면 그대를 위해 달콤한 술을 빚고 싶다. 그러니 우리 총알 따위는 버리고 겨자씨만한 생명이라도 하나씩 품고 함께 가자. 온밤을 걸어서 천천히 어둠을 거두면서 함께 가자. 함께 가는 우리 옆에서 그늘도 기꺼이 곱게 익어갈 것이니...  
257 둥근 사이 / 박덕규
남태식
2738 2013-04-14
 둥근 사이 박덕규 연탄집게로 연탄을 집어든 어머니가 마당을 뛰어가신다. 연탄을 든 어머니의 한쪽 어깨가 올라가고 반대편 어깨가 낮아졌다. 어머니의 연탄 든 팔과 기운 몸 사이에 큰 틈이 생겨나 있다. 그 틈으로 바람이 예사롭게 지나다닌다. 지금 내 아내보다 더 젊은 어머니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연탄을 집어 들어 마당을 뛰어가신다. 어머니의 연탄 든 팔과 기운 몸 사이의 틈으로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어머니가 입은 치마가 살랑거린다. 한번은 그 연탄에서 불이 뿜어져 나와 어머니 몸이 공중에 떠오르기도 했다. 그 때도 어머니는 공중을 뛰어가셨다. 꼬리치며 쳐다보던 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머니의 연탄 든 팔과 몸 사이가 크게 벌어져 그 틈으로 비행기가 지나가기도 했다. 아내는 어머니 흉내를 잘 낸다. 그래도 연탄을 집는 일은 없다. 연탄 힘으로 공중에 떠오르는 일은 상상도 못한다. 아내와 아내보다 젊은 어머니 사이에 틈을 그려 본다. 나는 그 틈으로 들어간다. 어느새 내 몸이 공중으로 떠올라 있다. (2013년 『시와정신』봄호) *** 세어 봐도 세어 봐도 모자라긴 여전하고 / 한낮에도 방구석에 쳐박힌 자식 보면 / 속이 상해 죽고 싶다 소리 죽여 넋두리를 / 뱉아내곤 돌아보며 히죽 웃는 어매야 / 그렇거나 말거나 불어오는 봄바람에 / 이 옷 저 옷 없는 옷을 있는 대로 꺼내놓고 / 앞을 보며 거울 한 번 뒤로 돌며 거울 한 번 / 괜찮니 어떠니 낄낄대는 어매야 (20대의 내 습작시 ‘시’ 중 ‘4. 바람’) 엄마(어머니)를 노래하는 시들은 거의가 축축하거나 촉촉합니다. 심지어는 어떤 시들에서는 칙칙하기까지 합니다. 젖어 있습니다. 축축하게 젖어있든 촉촉하게 젖어있든 젖어 있습니다. 혹 푹 젖어 있지는 않을지라도 어느 한 귀퉁이는 언제 젖었는지 젖어 너덜너덜해져 있습니다. 40대 초반에 과부가 되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우리 엄마도 아마 때때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을 겁니다. 사는 게 바빠 축축하게까지 젖을 시간까지는 없었을지라도 아마 이따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우리 엄마가 만드는 칙칙한 분위기는 상상이 안됩니다. 우리 엄마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세상은 그저 생기발랄했습니다. 봄 되면 봄을 타고, 외출할 때면(외출이라 해봐야 하숙생들과 가족들의 찬거리 사러 시장 나가는 거였지만) 30분 이상을 화장대 앞에서 얼굴을 정성스레 만지고, 부엌에서는 김추자의 ‘무인도’ 노래를 흥얼거리는 늘 젊은 여자였으니 그 여자가 보여주는 세상이 생기발랄할 수밖에요. 이런 기억 속의 엄마를 앞에 두고 칙칙이야 당연하게 아니겠지만 촉촉하거나 축축한 시인들 어떻게 쓰겠습니까. 시를 열심히 쓰던 동기들은 모두 어머니가 아팠다. 암부터 관절염까지, 최근에 흰머리가 늘었다는 것도 쉽게 병으로 바뀌었다. 한 날 술자리에서 / 가장 아픈 엄마를 가진 동기가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우리는 은연중에 동의했다. 우리는 좋은 시를 쓰고 싶었다. 서로가 서로의 불행을 부러워하면서, 읽고, 찢고, 마셨다. // (중략) / 녀석들은 모두 좋은 시를 썼다. / 엄마가 아팠으니까. // (중략) // 형식적으로 그들은 모두 엄마가 아팠다. 모두 시골 출생이었고, 흡연자였다. // (중략) 너무나도 증상이 같은 엄마와 너무나도 같은 병을 앓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 (중략) // (중략) // 그리고 등단자가 나타났다. / 우리의 모임이 해산되었다. // 시인은 덜 새로운 시를 쓰기 위해 담배를 끊었고, 그제야 우리의 아픈 엄마가 더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박성준 시 ‘대학 문학상’ 일부, 시집『몰아 쓴 일기』에서) 시인이 그리는 엄마는 샤갈이나 미로, 마그리트 같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델 같습니다. 샤갈의 우리 마을에 나오는 신부가 떠오릅니다. 부케가 아닌 연탄집게를 들긴 했지만 시인의 엄마는 샤갈의 신부만큼이나 예쁩니다. 또 불타는 연탄을 집은 연탄집게를 들고 공중을 뛰는 엄마는 불꽃 쇼를 벌이는 무술인들 같기도 합니다. 움직임이 날렵합니다. 황당하기는 하지만 화면 구도는 너무나 잘 짜여진 영화의 한 장면 같습니다. 나는 시인의 엄마의 공중 뛰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영화 쿵푸허슬의 코믹한 무술인들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시인이 추억하는 젊은 엄마는 내가 추억하는 젊은 엄마입니다. 축축하지도 촉촉하지도 물론 칙칙하지도 않습니다. 발랄합니다. 명랑합니다. 불에 놀라 개처럼 공중으로 풀쩍 뛰어 올랐어도 구차하지 않습니다. 빵 터진 웃음이 땅에서 하늘로 강처럼 길을 내어 달려갑니다. 시인이 아내와 젊은 엄마의 틈 사이로 들어가 공중으로 떠오르는 순간, 나도 함께 떠올라 젊은 엄마와의 추억여행을 떠났다가 그 틈 사이로 다시 돌아와 이 글을 씁니다. (남태식)  
256 유턴을 하는 동안 / 강인한
남태식
2126 2013-04-07
유턴을 하는 동안 강인한 좌회전으로 들어서야 하는데 좌회전 신호가 없다. 지나친다. 한참을 더 부질없이 달리다가 붉은 신호의 비호 아래 유턴을 한다. 들어가지 못한 길목을 뒤늦게 찾아간다. 꽃을 기다리다가 잠시 바람결로 며칠 떠돌다가 돌아왔을 뿐인데 목련이 한꺼번에 다 져버렸다. 목련나무 둥치 아래 흰 깃털이 흙빛으로 누워 있다. 이번 세상에서 만나지 못한 꽃 그대여, 그럼 다음 생에서 나는 문득 되돌아와야 하나. 한참을 더 부질없이 달리다가 이 생이 다 저물어간다. *** 이 시를 오십대 중반에 들어선 친구들끼리 연을 맺고 있는 카페에 올렸더니 이런 감상 댓글이 올라왔습니다. (친구1) 시체처럼 땅바닥에 드러누운 목련꽃잎, 가버린 봄날, 가버린 청춘이 아쉬운데, 그게 유턴할 수만 있다면…… 그 애잔한 느낌이 확 다가오네. 그런데 유턴하는 게 좋기는 좋은가? 좋다면 어디서? 언제쯤? (필자) 유턴 자리까지 가서 좌회전 신호 없었다고 하는 건 핑계거리. 꽃 피는 그 새를 못 참아서 한 바퀴 돌다가 꽃 볼 때를 놓쳤으면 놓친 대로, 이왕 갔으면 그냥 가고 말지 새삼 유턴은 무슨 유턴. 내생이 있다 해도 내생에는 안 가고 싶고 이생에서 그냥 팍 사라져 지워지고 싶은 마음인데, 그 시인 참 싱겁네, 돌아보긴 뭘 돌아봐. (친구2) 나에게는 다음 세상이 없으니 이번 세상에서 꼭 만나고 가시오. 잘 읽고 갑니다. (친구3) 다 청춘을 그리워하고 젊음이 좋다고들 하지만 막상 돌아가라고 하면 다들 주저한다는군요. 지났으니 그립고 아름다운 것이지, 돌아가기는 싫다는 것. 꽃은 지니까 아름다운것이지요. 피어있는 시간이 짧아서 그리운 것이지요. 딱 오십대의 마음이지요. 독자님들의 마음도 궁금합니다. 그냥 궁금할 뿐입니다. 궁금하다고 애써 들여다볼 수는 없지요.(남태식)  
255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 / 이성복
남태식
3061 2013-04-01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 이성복 언젠가 그가 말했다, 어렵고 막막하던 시절 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고 (그것은 비정규직의 늦은 밤 무거운 가방으로 걸어 나오던 길 끝의 느티나무였을까) 그는 한 번도 우리 사이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우연히 그를 보기 전엔 그가 있는 줄 몰랐다 (어두운 실내에서 문득 커텐을 걷으면 거기, 한 그루 나무가 있듯이) 그는 누구에게도, 그 자신에게조차 짐이 되지 않았다 (나무가 저를 구박하거나 제 곁의 다른 나무를 경멸하지 않듯이) 도저히, 부탁하기 어려운 일을 부탁하러 갔을 때 그의 잎새는 또 잔잔히 떨리며 속삭였다 — 아니 그건 제가 할 일이지요 어쩌면 그는 나무 얘기를 들려주러 우리에게 온 나무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무 얘기를 들으러 갔다가 나무가 된 사람 (그것은 우리의 섣부른 짐작일 테지만 나무들 사이에는 공공연한 비밀) - 이성복 시집 『래여애반다라』문학과지성사 2013 *** 흐느끼며 바라보매 이슬 밝힌 달이 흰 구름 따라 떠간 언저리 모래 가르며 흐르는 기랑의 모습이로다, 수풀이여 일오逸烏의 냇가 자갈벌에서 낭郎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좇고 있노라 아아, 잣나무 가지 높아 눈이라도 덮지 못할 고깔이여 - 충담사忠談師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는 이성복 시집 『래여애반다라』의 마지막에 실려 있습니다. ‘죽지랑을 그리는 노래’로 시작해서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로 끝을 맺었는데 시작하는 시와 끝맺는 시의 제목을 보고 궁금해서 두 시를 먼저 읽었습니다.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의 어느 구절에서였을까요, 단박 누군가가 떠올랐습니다. 지난 겨울 몇몇 지인들과 찾아간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 뒤편 주차장에서 본, 새도 아니면서 철탑 송전탑 공중에 집을 짓고 머리에 고압전류를 이고 공중부양하고 있는, 정규직이면서 칼바람에 온 몸으로 맞서며 사내 하청 협력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온전한 삶의 복원을 몸으로 절규하는……… 정말 어느 구절에서였을까요? 나무 얘기를 들으러 갔다가 나무가 된 사람? 아니면, 비정규직의 늦은 밤 길 끝의 느티나무? 그도 아니면, 문득 커텐을 걷으면 거기, 한 그루 나무가 있듯이 그를 보기 전엔 그가 있는 줄 몰랐던?……… 처음 읽으면서 떠오른 이 사람은 시집을 읽는 내내, 생각나 다른 시를 읽다가도 읽고 또 읽어 수십 번을 더 읽는 동안에도, 시집을 덮은 뒤에도 꽤 오랜 시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시인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시를 끝끝내 기파랑을 찬讚하는 노래가 아닌 새도 아니면서 공중에 집을 짓고 새가 되어 절규하는 이 사람을 찬讚하는 노래로 읽고 말았습니다. 누군지는 다 아시겠지요. 최병승님. 그리하여 내가 읽은 노래는 '최병승을 기리는 노래', '찬讚최병승가歌'. 그리고 또 더 많은 '최병승들을 기리는 노래'. 이것은 울산에서 돌아온 뒤 꽤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그 곳에 남아 맴도는 내 마음과 내 마음의 짐에게 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아아,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 ‘오다, 서럽더라’ (남태식)  
254 메꽃/이윤학
임술랑
2428 2013-03-31
메꽃/이윤학 비닐하우스, 코아합판 문짝 옆댕이 두 겹 비닐에 메꽃들이 붙었다 불룩한 줄기와 이파리를 비집고 창문에 입술들을 밀착시켰다 흙에서 올라온 수증기가 끼었다 사라졌다 다시 끼기를 반복했다 할아버지와 살던 소녀는 반만 벙어리였다 한쪽 날개를 늘어뜨린 칠면조가 비닐하우스, 졸라맨 갈빗대 속을 느릿느릿 희미하게 거닐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소녀는 창문에 붙어 코로 숨을 쉬고 있었다 《불교문예》2013.봄 ........................................................................................................................................................................................................................... (감상) 최근 이윤학의 시편들은 그 본래 사유의 시들로부터 풍경이 있는 관찰자적 모색으로 진화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시의 제목이기도한 메꽃은 논두렁 밭두렁에 피는 나팔꽃 같은 작은 풀꽃인데, 그 여린 꽃잎에서 할아버지와 같이 사는 벙어리 소녀를 병치시키고 있다. 이런 소시민적 인물을 객관화하기는 백석으로부터인가 싶다. 이럴테면 백석의 "定州城" 이라는 시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그것이다. 山턱 원두막은 뷔었나 불빛이 외롭다 헌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리 조을든 문허진 城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山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城門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백석 시 "정주성" 전문) 그러고보면 이 시는 박목월의 "귀밑사마귀"와도 궤를 같이 한다. 산수유꽃 노랗게 피는 봄날, 그리움에 젖어 울음우는 옛 小姐도 이윤학의 반만 벙어리 소녀와 닮아 있다. 잠자듯 고운 눈섭 위에 달빛이 나린다 눈이 쌓인다 옛날의 슬픈 피가 맺힌다 어느 江을 건너서 다시 그를 만나랴 살 눈섭 길슴한 옛 사람을 山수유꽃 노랗게 흐느끼는 봄마다 도사리고 앉인채 도사리고 앉인채 울음 우는 사람 귀밑 사마귀 (박목월 시 "귀밑 사마귀" 전문) 이처럼 닮아있는 시들을 비교해 보는 것도 시를 읽는 즐거움의 하나일 것이다. (임술랑)  
253 사과나무, 사과나무, 사과나무 / 한명희
남태식
2212 2013-03-28
 사과나무, 사과나무, 사과나무 한명희 내가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던 그해 가을사과는 몇 배는 더 탐스럽게 열렸나 봄마다 가지가 찢어질 만치 사과꽃이 피고 나는 애써 사과향기를 외면했나 반쯤은 억울하고 반쯤은 그리워서 사실은 사과나무를 아주 잊을 수는 없었나 잊지는 못하고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위로의 말을 원수로 삼았나 사과나무를 흐르던 시간이 내게도 흘러 이제 나는 사과나무 사과나무 말할 수는 있게 되었나 손을 뻗으면 만져질 것도 같은 사과나무 맘먹고 지우자면 가지 서너 개쯤 너끈히 지워낼 것도 같은 사과나무 눈에서는 지워져도 입술에는 남아있을 사과나무, 사과나무, 사과나무 (2013년 『예술가』봄호) *** 지우려 한 것은 사과였나요, 사과나무였나요. 잊으려 한 것은 사과였나요, 사과꽃이었나요, 사과꽃향기였나요. 떠난 적이 있습니다. 떠날 때의 이유는 갖가지입니다. 지겨워서이기도 하고, 답답해서이기도 하고, 전망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불안해서이기도 하고, 실망해서이기도 하고, 배신감을 느껴서이기도 하고 해서 떠납니다. 떠날 때는 말없이 단호하게 절이 싫어 떠나는 중처럼 하고 떠납니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것처럼 하고 떠납니다. 다시는 눈길도 주지 않을 것처럼 하고 떠납니다. 그리고 절로 흐르는 시간을 타다가 넘다가 하며 다 지웠다 하고 삽니다. 다 잊었다 하며 생각도 안하고 삽니다. 그리고 또, 그리고…… 역시 밀어내지 않아도 절로 흐르는 시간을 타다가 넘다가 하며 문득 멈춰서면 아아, 떠나오던 그 자리에 누군가가 소금기둥처럼 붙박혀 있는 것이 보입니다. 지워지고 있는 가지 끝에 정지셔터를 누른 꽃처럼 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보입니다. 떨어진 것은 떠난 것이 아니라 내쳐진 것이라는 걸 새삼 알았다는 변명은 안 해도 되겠지요. 사과꽃 향기를 맡으려고 누군가가 이 봄 코를 몇 자나 쭉 쭉 늘이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의 누군가도. (남태식)  
252 봄은 / 이대흠
김재순
2203 2013-03-27
봄은 / 이대흠 조용한 오후다 무슨 큰 일이 닥칠 것 같다 나무의 가지들 세상 곳곳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숨쉬지 말라. 그대 언 영혼을 향해 언제 방아쇠가 당겨질 지 알 수 없다. 마침내 곳곳에서 탕,탕,탕,탕 세상을 향해 쏘아대는 저 꽃들 피할 새도 없이 하늘과 땅에 저 꽃들 전쟁은 시작되었다 전쟁이다. 꽃이 막 피고 있습니다 어느 시인은 돌에도 피가 끓는 봄이라고 했는데 이팔청춘들이야 얼마나 발광이 솟을까요 아침 저녁으로 오가는 길목에서 저도 꽃들에게 빨려드는 제 마음을 다잡느라 식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