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9호...
   2020년 05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 오늘방문자 : 
    114
  • 어제방문자 : 
    430
  • 전체방문자 : 
    569,829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251 뻥의 나라에서 / 우대식
윤임수
2286 2013-03-25
뻥의 나라에서 초등학교 3학년 막내와 돈키호테를 읽는 밤 11월 바람은 창을 두드리고 키득키득 책을 읽던 놈이 불현듯 묻는다 "아빠 이거 다 뻥이지요?" 그와 깊은 가을로 여행을 하는 중이다 뻥의 마을에서 서성이다가 어린 그와 목로주점에 들어 설탕을 듬뿍 탄 와인을 한 잔 시켜주고 싶은 것이다 독한 술 한 잔을 단숨에 마시면 창을 꼬나들고 달리는 늙은 기사도 만날 것이다 도무지 세상에는 없는 공주들과 긴 늦잠을 자고 풍차 아래서 휘파람을 불고 싶은 것이다 뻥이 없으면 이 세상은 도무지 허무하여 살 수 없음을 그 아이가 불현듯 깨닫기를 중세의 성당에 앉아 기도하고픈 것이다 * 정말로 뻥이 없으면 이 세상은 얼마나 허무하고 단조로울까? 얼마나 건조하고 밋밋할까? 늘상 주절거리는 '뻥쟁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끔은 '뻥'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 줄 알아?"라고 큰소리치는 뻥 "오호 오늘은 천사보다도 더 예쁜데..."라고 치켜세우는 뻥 " 네가 있어서 세상살이가 참 좋아"라고 다독거리는 뻥 이런 뻥들이 가끔은 사실보다 더 훌륭한 말씀임을 아는 그대라면 내 오늘 기꺼이 이렇게 뻥을 치겠다. " 뭐든지 말만 해, 내가 다 해줄게"라고.  
250 출판기념회 / 이안
윤임수
2190 2013-03-20
출판기념회 두 번째 시집 내면 봄 가으내 부춧단 묶어 이고 제천장 가시던 어머니처럼 시집 한 보퉁이 싸 들고는 오일장으로 가는 거다 가서, 반 평 남짓 수상한 냄새 뽕뽕 풍기며 냉이처럼 자반고등어처럼 옷가지처럼 긴 하루 발 저리게 앉았는 거다 푸성귀 내음 생선 비린내 사람들 냄새 없는 것들 구석구석 찍어 바르고 기다리는 것도 없으면서 파리떼나 쫓으며 거, 뭐하는 거유? 분명 누군가는 한 번쯤 물어봐 올 때 죽도 밥도 찬거리도 되잖는 것,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다만 한 사내의 허기진 밥상밖에 되지 못한 그걸 환한 장바닥에 펴놓고 또 몇 년, 배부르게 뜯어 먹어보는 거다 - 이안 시집, "치워라, 꽃!"에서 - * 정말이지 오일장에 냉이처럼 자반고등어처럼 시집을 늘어놓고 왼종일 발 저리게 앉아있어 보고 싶다. 그리하면 분명 호기심 많은 누군가가 거, 뭐하는거유? 물어올테고, 나는 그저 빙긋 웃으며 왜? 시답잖게 보이우?라고 답을 해 줄테다. 그리하다가 날이 저물면 죽도 밥도 찬거리도 되잖는 것이지만 정성스럽게 싸들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올테다. 돌아오면서 여린 빛으로 떠있는 초생달 에게 실없이 한쪽 눈이나 깜박여줄테다.   
249 경찰서가 망했다/송은영
임술랑
2219 2013-03-16
경찰서가 망했다 송은영 사람들이 쓸만큼 돈을 벌어 놀고먹는 게으름뱅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부모도 자식을 버리지 않았고 자식도 부모를 버리지 않아 행복하단다 어제까지 사기전과자였던 사람들이 피 보일 상대가 없어지자 평범한 이웃이 되었다 교회당 십자가 밑에는 안식하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그리하여 우리 동네는 이날 이후로 사건 사고가 사라졌다 출근해서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경찰들이 눈치 밥을 먹다가 하나 둘 사표를 냈고 급기야 세계동 네거리 노른자 땅에 점포 세를 붙였다 설탕 한 숟갈의 회유에도 납작 엎드린 경찰들은 전성기의 이름값을 분칠하다 버텨낼 재간이 없었던지 자신을 여러 번 개종했다 경찰서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더 이상 미치고 팔짝 뛰지 않았다 시집『별것 아니었다』2013화남 ..................................................................................................................................................................................................................... (감상) 노자의 도덕경에는 위정자가 있는지 없는지 느끼지 못하는 사회를 상급으로 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매일 매시간마다 TV에서 위정자들의 얼굴을 보는 저급 사회에 살고 있다. 마치 위정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국민인 것처럼 매시간 마다 국민을 두고 저희끼리 쌈박질을 한다. 이 시대 뉴스에서 우리는 언제쯤 정치인들을 보지 않고 살 것인가. 뉴스는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어야 한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겨진 아름다운 미담을 발굴하여 뉴스화하지 못하고, 노상 그 역겨운 얼굴들만 비춰주는 방송사도 문제다. 위정자 권력자들이 설쳐대지 않고 망하는 사회는 과연 올 것인가. 송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언제쯤 "경찰서가 망했다"는 소식을 접할 것인가. (아 오늘 종로 경찰서가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내일은 포항남부 경찰서가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라고.(임술랑)  
248 마음의 집 / 홍영철
남태식
2362 2013-03-07
마음의 집 홍영철 집으로 가는 길은 많습니다. 사당동 쪽으로 가도 영등포 쪽으로 가도 서초동이나 신림동 쪽으로 가도 집이 나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참 많기도 합니다 길이 너무 많아서 가끔 길을 잃습니다 몸이 때때로 방향감각을 잃어버립니다 마음이 때때로 어지럼증을 일으킵니다 마음에도 길이 많아서 헤매나 봅니다 어디로 가야 제 집이 나올지 잘 모를 때가 있나 봅니다 마음이 집으로 가는 길을 찾느라 몸이 밤을 꼬박 세웠습니다 책상 위의 제라늄이 아파 보입니다. 내가 나에게 미안합니다 - 홍영철 시집 『여기 수선화가 있어요』문학과지성사 2012 *** 몸의 집으로 가는 여러 길에서 시인이 길을 잃고 헤맨 이야기를 할 때, 나 역시 몸의 집으로 가다가 잃어버렸던 길을 생각합니다. 몸의 집으로 가는 길을 이야기하다가 시인이 갑자기 말을 돌려 마음의 집으로 가는 길을 이야기하자, 내가 몸의 집으로 가다가 길을 잃은 까닭이 무엇인지 문득 생각납니다. 내가 몸의 집으로 가는 길을 가다가 길을 잃은 것은 마음의 집이 생각나 마음의 집으로 가는 길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입니다. 나 참 많이 헤맸습니다. 타의로 헤맨 적도 있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른 뒤 생각해보니 타의로 헤맨 시간도 실은 자의를 숨긴 타의일 뿐, 역시 자의였습니다. 마음의 집으로 가는 길을 찾느라 몸이 밤을 꼬박 새운 뒤 바라본 책상 위의 제라늄이 아파 보인다면서 시인은 내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는데 나는 늦게서야 책상 위의 제라늄에게 미안합니다. 육아도 가사도 모두 떠맡기고 혼자 마음에 몸을 묶고 훌훌 길을 떠다닐 때 몸과 마음 모두 나처럼 아파하면서도 말도 못하고 아픔과 외로움을 홀로 견디고 삼켰을 그 제라늄에게 자꾸 미안합니다. 내가 나에게 미안한 마음은 전혀 안 들고 오직 제라늄에게만 미안합니다.(남태식)  
247 월담의 공식 / 김산
김재순
2354 2013-02-25
월담의 공식 스물두 살에 야간 여상을 마친 봉자 누나가 첫 봉급을 쓰리 당했다 울음은 몇 갈래로 터져 나왔다 오장 근처를 휘돌던 설운 마음은 먼저 목구멍을 타고 올랐다 분노는 휘발성이 강해 가녀린 팔뚝으로 내려가 주먹을 불끈 쥐게 했으나 곧 스르르 풀렸다 애증의 덩어리들은 눈 코 입에서 짠 분비물로 흘렀다 베개가 흥건해지면서 새롭던 각오는 축축해졌고 희망은 이불을 비집고 빗소리를 찢으며 처마에 기댔다 기침까지 섞인 울음은 오토바이 쓰리꾼처럼 급커브를 틀더니 급기야, 우리집 토담벽을 넘었다 울음은 감잎을 몇 장 들었다가 간장독을 폭삭 깨고 살금살금 기어와 벌어진 곳간의 문을 삐거덕 열었다 터진 쌀자루에서 불어터진 밥알들이 쏟아졌다 아! 이 정체불명의 도둑은 어찌하여 내 귓바퀴를 넘어서는가? 悲인가, 飛인가, 수학 문제집의 도무지 풀리지 않는 根의 공식처럼, 토닥토닥, 봉자 누나네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빈 독을 메우는 雨 뒤늦게 야간 여상을 마치고 취직을 해서 받은 첫 월급 참 좋은 나이의 봉자 누나가 날치기 당한 것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소 한 마리를 팔면 몇 마지기 논을 사거나 자식 하나 대학을 시킨다던 시절 내 어머니가 병으로 잃은 것은 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들의 울음소리는 같을 것입니다 꿈을 날치기 당한 사람들의 처절한 울음소리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토닥여 새로운 비상을 했을 것입니다. 파이팅! ---김재순---  
246 반과 반 / 백상웅
남태식
3134 2013-02-13
반과 반 백상웅 거기를 지날 때마다 나는 반반을 고민한다. 간판에는 장의사라고 반듯하게 박혀있고 미닫이문에는 영어로 드럼 레슨이라 적혀 있는, 거기는 낡았지만 웃기는 구석이 있다. 관을 짜는 사람과 드럼을 두드리는 사람이 한 건물에 다른 연장과 집기를 들여놓고는 하나가 염을 할 때 다른 하나는 스틱을 닦을 거기, 나는 그들의 반반이 궁금하다. 다달이 나눠서 내야 할 임대료 문제와 죽음과 음악을 다툼없이 공유하는 법을 그들은 한자리에서 해결하고 있을 테다. 프라이드 반 양념 반을 처음 시켜 먹었을 때의 느낌과 사뭇 다른 거기, 시체가 굳는 동안 로큰롤의 비트가 펄쩍 뛰는 이 무엄한 광경. 그들이야말로 경계를 아는 자들이 아닐까. 책상 가운데에 그어진 금과 비슷한 그 경계. 여기까지가 하나의 가설이다. 거기 주인이 시체를 닦으며 드럼을 치는 사람이거나 장의사가 망한 자리에 드럼 치는 사람이 싼값에 들어온 것일 수도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이 가설들도 진실과 거짓 사이의 이야기.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반과 반을 고민한다. 내 생의 반쪽과 사과 한 알의 반쪽, 적도의 위아래 그리고 건물주와 세입자, 내가 꼭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손쉬운 이분법도 거기를 지날 때 시작되었다. 나는 아직까지 거기의 문이 열린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분명 이 동네에 거기는 존재하지만 드럼소리도 곡소리도 듣지 못했을 뿐이다. - 백상웅 시집 『거인을 보았다』창비 2012 *** 처음엔 한참을 웃었습니다. 장의사와 음악교습소가 함께 있는 건물이라는 설정이 너무 웃겼습니다. 유심히 보지 않았을 뿐이지 제가 사는 이 도시 어디쯤에도 이런 설정의 건물이 한둘은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저도 시인처럼 제 반과 반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좌와 우, 남과 북, 보수와 진보, 흑과 백, 죽음과 삶. 반과 반으로 나눌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떠올리고 나는 이 반과 반의 어느 쪽에 서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정말 저는 어느 쪽에 서 있을까요. 그 반과 반 사이의 경계, 그 가운데, 중립에 서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꽤나 있으시던데 제가 보기에는 그것은 착각이거나 착각을 가장한 위장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자신이 어느 쪽에 서 있는가는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듯하기도 합니다. 진정이라면 살아가는 모습에서 절로 그 반이 다 보일 테니까요.(남태식)  
245 경음鯨音의 바다/임정옥
임술랑
2549 2013-01-31
경음鯨音의 바다 -신라抄 임정옥 한 번 치면 바다가 엎드리고 두 번 치면 포뢰*가 놀라는 신라의 종소리는 동해 고래의 소리 성덕대왕신종이 울릴 때마다 서라벌은 경음(鯨音)의 바다 어머니의 어머니, 할머니의 할머니 그 바다의 고래였으니 내 피의 반은 신라, 나머지 반은 고래 그 뱃속에서 배워온 입맛으로 몸이 웅 웅 종소리를 내는 날이면 고래가 제 새끼 낳고 먹던 미역으로 더운 국 끓여 먹는다 바다를 헤쳐 이만 킬로미터 오가며 살아 있는 날의 사분의 일을 회유하는 귀신고래 있듯이, 내 생의 전부를 헤엄쳐 경음의 바다로 회유하는 고래 고래 당목으로 바다를 쳐 울리고 싶은 날 그때 신라로 돌아오던 고래를 만나고 싶은 날 *용생구자전설龍生九子傳說에 나오는 아홉 용 중 하나. 포뢰는 바다에 사는 고래를 무서워하여 놀라 비명을 크게 지른다 한다. 신라인들은 포뢰 모양을 종 위에 앉히고 고래 모양의 당鯨撞으로 종을 치면, 고래를 만난 포뢰가 놀라 지르는 소리처럼 종소리도 크고 우렁찰 거라고 믿어 범종소리를 경음鯨音이라고 하였다.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의 당목이 고래 모양인 것도 이런 연유이다. 일본, 중국에는 없는 우리 특유의 범종 장식물이며, 우리 범종만이 고래소리를 낸다고 한다. 시집『어머니의 완장』2012년 황금알 ................................................................................................................................................................................... (감상) 이 시를 읽으면서 예전에 들었던 녹음된 귀신고래 울음소리가 생각났다. 홀로이 경주 박물관에서 성덕대왕신종 소리를 들었던 생각도 났다. 울음은 외로움이다. 깊은 바다 속에서나, 깊은 산 속에서나. 고래 모양의 당목(종을 치는 나무 둥치)과 포뢰라는 잘 놀라서 크게 우는 용이 성덕대왕신종에 같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미몽에 헤메는 존재라는 것은 외롭기에 늘 이렇게 우는 것이리라. (임술랑)  
244 태백산행 / 정희성
김재순
3419 2013-01-28
태백산행 / 정희성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 일곱 살이야 열 아홉 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 일곱이라고 그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마음은 잘 늙지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스무살 그 때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그러나 군에서 휴가를 나온 조카들이나 예비군 훈련에 소집된 군인들을 보면 귀때기 뽀송뽀송한 그냥 아이들입니다 그 때에 나의 연식을 깨닫게 됩니다 위문 편지를 보내던 시절의 군인들은 완전 아저씨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김재순--  
243 먼 방 빈 방 / 최승자
남태식
4452 2013-01-25
먼 방 빈 방 최승자 빈 방에서 저 먼, 없는 폭포 소리를 듣는다 (먼저는 내가 빈 방을 만들어냈고 빈 방이 저 먼, 없는 폭포 소리를 만들어냈다) 먼 방 빈 방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폭포 소리는 흘러내리는데 호젓이 고즈넉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먼 방, 빈 방 - 최승자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 문학과지성사 2010 *** 한 친구에게서 "새해 복 많이 받으"라가 아닌 "새해 복 많이 지으"라는 덕담을 받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지으"라니, '짓는다'는 의미에 대해 곰곰 생각합니다. 최승자 시인은 '빈 방'을 지었네요. '빈 방'이라, 쓸쓸한 풍경입니다. 그런데 빈 방을 짓는 것으로 끝났으면 정말 그냥 쓸쓸했을 터인데 이 먼 빈 방에서 폭포 소리를 듣는다니 이건 놀라운 변화입니다. 저는 소리를 듣는 능력은 부족해서 눈 앞에 그림을 그립니다. 빈 방을 그리고 그 빈 방에 폭포 떨어지는 풍경을 눈 앞에 떠올리는데 어어, 능력이 부족해서 안 들리는 소리도 들리는지 갑자기 귀가 먹먹해집니다. 쓸쓸하면서도 가슴 아리게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폭포 소리 다음에 그 빈 방은 또 무엇으로 채워질 것인가 문득 궁금해집니다. 문학마실 독자님들 새해 복 많이 지으시길 바랍니다. (남태식)  
242 포장마차에서 / 김인육
남태식
2959 2013-01-19
포장마차에서 김인육 젖는다, 붉게 펄럭이는 포장마차 사내의 동공이 젖는다 달처럼 울컥울컥 부풀던 여자 물 아래 가던 달 맨발로 안고 가던 여자 새가 되었다던가 바람이 되었다던가 사내는 매운 강술로 자신을 적시고 있다 어둑어둑 치욕이 숨어드는 저녁 붉게 술기운이 달처럼 오른다 젖는다, 사내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으로 도망간 여우 중심을 잃은 빈 술병이 젖는다 일렁이는 동공 가득히 화악, 휘발유 냄새가 난다 제 몸을 다 비워낸 술병은 뱀이 빠져나간 허물같이 어처구니없다 청산도 아닌데 어디선가 함부로 날아드는 돌들 사내가 깜깜하게 젖는다 (김인육 시집 <잘가라, 여우> 문학세계사 2012) *** 포장마차에서 술병을 비우며 눈물에, 날아오는 돌들에 젖는 것은 사내인데, 나는 젖는 사내가 아닌 사내의 젖는 동공에 맺히는 여자에게 더 마음이 갑니다. 달처럼 울컥울컥 부푸는 여자, 물 아래 잠긴 달이라도 잡으려는 듯 맨발로 첨벙첨벙 물속으로 사라지는 여자, 살으리 살으리랏다 청산으로 날아가는 여자, 새가 되는 여자, 바람이 되는 여자. 새 되고 바람 되어 날아가고 흩어진 다음에야 사내의 가슴에서 불타오르는 여자. 시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사내를 바라보고 있는데, 나는 갑자기 이 사내가 짜증스럽습니다. 울화가 치밉니다. 나쁘다, 나쁘다, 악이라도 한바탕 퍼붓고 싶은 심정입니다. (남태식)  
241 소문 / 권위상
남태식
2666 2013-01-11
소문 권위상 목포 유달산 기슭에는 히틀러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수많은 희생자를 낸 전쟁의 주범 히틀러, 그가 어떻게 유달산에 묻혀 있는지 소문만 분분하고 그 소문조차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얼마 전 히틀러의 제사가 있었다. 은밀히 모인 그들은 히틀러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그 유해가 여기까지 흘러 온 것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일 년에 한 번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그들이 두 손 모아 절을 하는지, 손을 뻗어 하잇, 히틀러 하고 외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생전에 채식주의자였던 그를 위해 제사상에는 채소가 가득했다고 한다. 히틀러 제사 날 엄청나게 비가 쏟아졌다. 산 일부가 잘려나가고 하산하던 그들 중 하나는 무너지는 흙더미와 함께 굴러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사람은 참석자 중 누군가가 마음이 경건하지 못해 노여움을 산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유럽에는 발 디딜 수조차 없던 히틀러의 시신은 원래 동맹국 일본으로 몰래 옮기려 하다 미 해군에 발각돼 쫓기던 중 목포 인근으로 간신히 상륙해 유달산까지 오게 되었다고 설명하는 그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했다. 지금도 비가 많이 오면 유달산의 숲은 히틀러, 히틀러 하고 소리 지른다고 한다. 소문은 그래서 무섭다. (2012년 『예술가』겨울호) *** 구라도 이쯤 되면 환상적인 수준입니다. 사전을 확인했더니 구라는 거짓말의 비속어라고 풀어놓았네요. 거짓말이야 표준어이기는 하지만 의미상으로 따지면 그다지 아름다운 말은 아닌데 그런 말의 비속어라고 설명이 되어 있으니 아예 구라에 대해서는 말을 말라는 말 같습니다. 요즘은 다르게 풀어서 긍정적으로 구라를 말하는 님들도 가끔 있으시던데 비속어까지는 안 가더라도 구라에는 ‘뻥’이 어느 정도는 섞여야 구라가 된다고 하니 무조건 전부 믿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적당한 수준에서 어느 정도는 믿되 말이 안 된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가차없이 버리는 게 옳을 듯합니다. 그런데 이 구라가 전부 사실이고 진실이라고 믿고 이 구라교의 광신도가 되어 한 목숨 바치는 이들도 있으니 이건 걱정이 안 될 수 없습니다. 시인은 점잖게 이걸 소문으로 치부하면서 소문이 무섭다고 하는데 이건 구라입니다. 그리고 구라가 무서운 게 아니라 구라를 사실로 진실로 믿고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는 광신이 무섭습니다. (남태식)  
240 새해 첫 기적 / 반칠환
임술랑
2906 2013-01-10
새해 첫 기적 반칠환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시집『웃음의 힘』2012지혜 ............................................................................................................................................................................................. (감상) 저마다 차이는 있으나 본질은 같다. 남과 나를 비교할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처지대로 사는 것이다. 高低 長短 强弱 尊卑의 차이는 본래 없는 것이다. 하물며 그 비교를 어찌 허용할 수 있을까. 부질없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하하하... (임술랑)  
239 그대집 / 박정대
김재순
2466 2013-01-03
그대 집 창포 강에 싸락눈이 내리는 오후 그대는 물을 긷고 나는 듣고 있었네 그대 발길에 스치는 조약돌의 음악 소리 아득한 산맥을 넘어온 시간들의 풍경 소리 내 마음이 가고 싶어 하던 곳에서 오롯이 돋아나던 낮은 숨결의 불빛들 그 희미한 불빛의 계단을 살풋이 밟으며 내려오던 싸락눈, 싸락눈, 싸락눈의 화음 창포 강에 싸락눈이 내리는 오후 그대 물동이에 담겨 나 여기 그대 집까지 왔네 그대는 검은 천막에 사는 여인 오늘 저녁 그대는 또 한줌의 쌀을 끊이네 저물어가는 창포 강가엔 아직도 눈이 내리는데 눈발 속으로 또 다른 눈이 내리는데 천막 속의 고요, 고요 속의 음악 나는 끓고 그대는 웃네 그대 집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이제사 그대 입술 끝에 닿은 나, 고요한 한 잔의 창포 강 흰 눈이 소리없이 내리는 오후는 그 곳에, 그대에게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너무 먼 그대 몸보다 마음이 멀어진 그대 그대에게 어떻게 갈까요 저 눈송이로 갈까요 처음으로 마음을 주고받던 강가 그 맑던 강물처럼 한 잔의 물로 그대에게 닿을까요 ---김재순--  
238 한 뼘 전어/김영승
임술랑
2296 2012-12-26
한 뼘 전어 김영승 저것들이 微物인 게 낫지 思惟를 한다면 抗辯을 한다면 트럭 위 작은 수족관 대보니 한 뼘 어부는 滿船이면 불쌍하다고 통곡하고 凶漁면 그냥 훌쩍이고 스티로폼 한 팩에 만 원 배터리인지 어디서 끌어다 쓰는 電氣인지 카바이트 불빛 같은 燈 아래 膾를 뜨는 사나이 흐르는 눈물 지긋한 微笑 저것들이 수족관 구석에 모여 기도를 한다면 저것들이 저 샛별 같은 눈동자로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면 《불교문예》2012년겨울호 ................................................................................................................................................. (감상) 손바닥만한 전어, 은빛이 유난하다. 그 작고 까만 눈깔을 보았나. 수족관에 갇힌 그들을 뜰채로 휘저어 잡으려고 할 때, 구석으로 몰리어 가서 "기도를 한다면" 그래도 떠 낼 것인가. 사람의 自性만큼 그 고기들의 自性 또한 있을 것인데, 먹이사슬 최상위에 있다는 이유로 잡아 먹고마는 잔인함이란. "저것들이/저 샛별 같은 눈동자로/가만히 나를 바라본다면" 본다면 어쩔것인가. (임술랑)  
237 담배 피우는 여자/윤임수 [1]
임술랑
2429 2012-12-13
담배 피우는 여자 윤임수 아침 출근길에 만나는 여자, 오십이 훨씬 넘어 보이는 여자, 지난밤도 편치 않았던 것일까, 아파트 모서리 중국단풍 아래에 서 연방 담배를 피워대는 여자, 채 달아나지 못한 연기 꼬리에 또 연기를 더하는 여자, 숨 가쁘게 살아온 날들을 모두 내려놓 겠다는 듯 연방 연기를 토해놓는 여자, 처음 볼 때는 거북했으 나 날이 지나면서 연민으로 다가온 여자, 어쩌다 보이지 않는 날이면, 웬일일까, 조금 걱정도 되는 여자, 걱정과 함께 담배 연 기가 그 여자의 거친 날들을 모두 거두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 하게 하는 여자, 아무것도 모르지만 마치 오래된 관심처럼, 이 제는 중국단풍만 봐도 떠오르는 그 여자 『낙동강』2012 *********************************************************** (감상) 담배 피우는 여자는 저마다 다 사연이 있다. 그 사연을 속으로 데우느라고 연기를 지피고 있는 것이다. 담배 피우는 여자는 "연민으로 다가온 여자"다. 그가 가진 사연이 애처러워지기 때문이다. 무슨무슨 사연인지 그 사연들 다 풀고 편안한 여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좋은 아내도 되고, 좋은 엄마가 되기 때문이다.(임술랑)  
236 러시아 혁명사를 싣고 가는 밤 / 박정대
김재순
2342 2012-12-12
러시아 혁명사를 싣고 가는 밤 / 박정대 고백처럼 몇 마리의 말이 갔다. 말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별들이 쏟아질 듯 빛나던 약사전 길이었다. 원주나 망종 근처 409번 국도를 따라 누군가 러시아를 향해 달려가던 깊은 밤이었다 죽은 빅또르 조이의 노래를 듣는 것도 좋았겠으나, 차 뒤편에 실린 낡고 오래된 러시아 혁명사만이 허밍으로 출렁거리던 아주 깊고 고요한 밤이었다 러시아 혁명사라는 말에 왜 이렇게 내 가슴이 쿵쿵거리는지요 그 혁명에 관한 자세한 지식은 없지만 누대에 걸친 피지배계층의 한이 흘러 내 핏속에도 머물기 때문일까요 혁명은 성자처럼 거룩해서 혁명사를 싣고 가는 밤도 성탄의 밤처럼 별들이 푸르게 빛나고 즐겁고 깊고 고요한 성스런 밤이 되겠지요 --김재순--  
235 숭어 / 주병율
남태식
2267 2012-12-04
숭어 주병율 지난겨울에도 나는 바다의 숭어를 사랑하고 눈이 멀었네 어두워지는 포구의 뱃전에 앉거나 기대어서 귀기울여 보지만 삼남 천지에 네가 왔다간 소리는 듣지 못했네 먼 바다를 건너와 하루 종일 내리던 눈보라 속 아직도 젖은 하늘에 길이 있다면 지워버리고 지워버리고 싶은 은종이 같은 비늘 하나 이제 어디로 가랴고 내게 다그쳐 부는 바람만 곁에 있어서 지난겨울에도 여전히 나는 바다의 숭어를 사랑하고 눈이 멀었네 (2012년 <리토피아> 겨울) *** 첫 눈 내리던 날 당신은 길거리로 나선 적이 있었지요. 내리는 듯 마는 듯 어설프게 날리는 눈바람을 맞으며 하루를 종일 길거리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린 적이 있었지요. 첫 눈 내리는 날 만나자는 약속을 믿고 나선 거리였지만 기다려도 만나자는 약속을 했던 그 누군가는 오지 않고 찬바람만 맞으며 허무하게 시간을 눈발과 함께 날려버린 적이 있었지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당신은 그 누군가와 언제 그런 약속이라는 걸 한 적이 있긴 있었든가 의심하다가 돌아선 적이 있었지요. 밤마다 당신은 어느 골목을 서성이던 적이 있었지요. 그 골목은 그 누군가와 함께 할 때만 존재하는 골목이었는데 그 때는 이미 함께 하던 그 누군가는 사라진 골목이어서 당신에게는 벌써 없는 골목이었음에도 당신은 그 골목을 버리지 못하고 오랫동안 골목의 이 끝에서 저 끝, 저 끝에서 이 끝까지 밤새워 돌던 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어느 날 돌기를 멈추자 그 골목은 당신의 그림자를 꼭 잡고 따라왔고 당신은 모르는 척 또 오랫동안 그 골목 그림자를 내치지 않고 그 그림자와 함께 산 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어느 날 당신은 그 첫 눈 내리던 날 서 있었던 길거리를 떠났지요. 그리고 이미 사라진 없는 골목도 떠났지요. 물론 그 골목의 그림자도 내쳤지요. 그리고 잊었지요. 그 약속도 그 골목도 그 골목의 그림자도 다 잊었지요. 당연히 다 잊었지요. 왜냐고요? 그로부터 세월은 수 십 년이 흐르고 당신은 수 만 리의 길을 걸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갑자기 뜬금없이 드는 의문 하나. 당신, 정말 잊기는 잊은 건가요. 미래의 또 다른 어느 날 첫 눈은 아니지만 눈발이 날리고 눈발 날리는 길거리에서 당신은 문득 오래 전의 그 약속을 떠올리는 건 아닌지요. 하여 마주 보이는 길거리에서 여전히 눈발을 맞으며 서 있는 당신을 보는 건 아닌지요. 없는 골목의 이 끝에서 저 끝, 저 끝에서 이 끝까지 돌고 또 도는 당신마저 보는 건 아닌지요. 아니, 아니지요. 어쩜 당신은 벌써 오랫동안 안 보는 듯 그 길과 골목을, 그 길에 서 있는 당신과 그 골목을 도는 당신마저 계속 보고 있었던 건 아닌지요. 모르는 척 모르는 척 하면서요. 지난겨울에도 여전히 바다의 숭어를 사랑하고 눈이 먼 어떤 시인처럼요. (남태식)  
234 태업의 강도 / 백상웅
김재순
2347 2012-12-03
태업의 강도 나는 오늘 태업하오. 볼펜만 돌리며 껌을 씹겠소. 밥을 축내다가 변기에 앉을 때, 힘은 그 때 쓰고 되도록 멍해지겠소. 화분에 심은 벚나무는 그러다가 죽었소. 근육의 긴장을 풀어서 꽃피지 않았단 말이오. 비명횡사한 나무가 불쌍해 보여도, 나는 의자와 한 몸이 되어 의자에 물들라오. 학연, 지연, 혈연 모두 동원하여 조금은 딱딱해도 의자와 붙어먹겠소.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날, 조직이 낡아가고 동네가 부러지고 가문이 주저앉아서 다리 밑에 버려져도 꿋꿋하게 버티겠소. 월급은 꼬박꼬박 받아 챙길 것이오. 나도 꽃 피는 법은 배워야지 않겠소. 아침부터 저녁까지 쥐 죽은 듯이 있을 것이오. 그러다가 순식간에 죽어도 나는 모르오. 나는 의자니까, 몸이 굳어 있어도 오늘은 태업하오. 나와 그도 태업을 자주한다 어디 볼펜만 돌릴까 인터넷 기사를 읽고 동영상을 보고 쇼핑을 하고 음악을 듣고 쪽지를 주고 받는다 그러나 의자를 창고로 옮긴다면 나와 그는 아마 단식을 할 것이다 왜, 나와 그는 꽃 피우는 걸 원하고 그리하여 이 작은 도시가 거침없이 순환 하는데 작은 힘을 보태고 싶으니까....후후후. --김재순--  
233 목숨을 걸고 / 이광웅
남태식
2779 2012-11-27
목숨을 걸고 이광웅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기획 ‘대밭시인’ 이광웅, <리토피아> 2012년 겨울) *** 위 시 '목숨을 걸고'를 쓴 시인 이광웅은 1989년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된 해직교사입니다. 1982년 '오송회' 사건에 연루되어 6년동안 감옥살이를 했고, 92년 쉰세살의 나이로 '지병'인 위암으로 투병하다가 사망했습니다. '오송회' 사건은 2008년 관련자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고, 2011년 피해자에 대한 150억원의 대법원 배상 판결이 있었습니다. 어제는 영화 '남영동 1985'를 보았습니다. '야만野蠻'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습니다. 시간들 내어서 이 영화 꼭 한 번 보시기를 권합니다. (남태식)  
232 한 끼/김주대
임술랑
3835 2012-11-25
한 끼 김주대 무릎이 많이도 튀어나온 때에 전 바지의 사내가 마른 명태 같은 팔로 몸의 추위를 감싸고 표정 없이 걷다가 시장 입구 버려진 사과 앞에 멈추어 선다 산발한 머리를 들어 사방을 한번 둘러보더니 발가락이 삐져나온 시커먼 운동화 발로 슬쩍슬쩍 사과를 굴려 구석으로 몰고 간다 * 인간과 동물의 사이에 있는 그는 인간을 버리지 않았다. 버려진 사과를 바로 주워들어 입으로 가져가지 않고, 사람들 눈치를 보며 발로 굴려가는 모습이 그랬다. 그는 여태 사람이었다. 그는 몇 달 전 빌려간 돈 천 원까지 다 기억하고 있었다. 몇년 전 대한문 앞에서 만나 사준 담배 한 갑, 용산참사 현장에서 먹은 막걸리 한 병까지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문학상 시상식장의 뒤풀이장에서도 만났다. 시위 현장이나 주로 먹을 곳이 있는 곳은 다 찾아다니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곳에는 오게 되었는지, 한강에서 우연히 또 그를 만났다. 지갑에 천 원짜리 달랑 세 장 있던 걸 줘 보냈다. 현금인출기가 선착장까지만 뛰어가면 있었는데, 만 원짜리 한 장은 뽑아 줬어야 했는데, 보내놓고 후회했다. 그는 지금 시청 앞이나 광화문 근처에서 또 누군가를 기다리며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을 것이다. 새까맣게 탄 얼굴에 눈만 하얗게 빛나던 그는 빌린 돈 100원, 얻은 돈 만 원, 얻어먹은 막걸리 한 병을 기억하면서 끊임없이 걷고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박영근 시인의 장례식장에서도 그를 보았던 것 같다. 글쟁이들 노는 문학판에 그를 아는 사람이 꽤 되는 모양인데 나는 아직 그의 이름을 모른다. 그는 끊임없이 내 이름을 이르집으며 시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를 잘 아는 그는 누구일까. 보통 사람들은 뒷모습이 쓸쓸해 보일 때가 있는데, 그는 뒷모습 앞모습 옆모습 모두 쓸쓸해 보였다. 누구일까. 갑자기 모든 것이 미안하다.(김주대) ************************************************************************************************************************* (감상) 김주대시인은 함창고등학교를 나온 상주출신 시인이더군요. 현재 거주는 서울에서 하고요. 제 페이스북 친구인데 이 시인이 올린 글들이 다 좋았습니다. 위 시 "한 끼"를 읽고 감동 먹어서 여기 옮겨 봅니다.(임술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