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8호...
   2020년 04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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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402 쥐들의 세계 / 김승희
남태식
57 2020-01-15
쥐들의 세계 김승희 선(線) 하나를 잘못 그어 독을 만들었다 독 안에 든 쥐들이 독 안에 바글바글하다 독 안의 쥐는 독 안의 쥐들밖에 모른다 독 안에 든 쥐는 독 안에 든 쥐에 잠식당한다 독 안의 쥐는 독서를 모른다 독 안의 쥐는 국정 교과서만 배우면 된다 독 안에 든 쥐는 미래를 모른다 독 안에도 바벨탑이 있다 독 안에 든 쥐는 거짓말같이 바벨탑 아래서 독 안에 든 쥐를 사랑하기도 한다 독 안의 쥐는 독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 독 안의 쥐는 독 안이 유일한 세계여서 다른 가능한 세계를 모른다 독 안의 쥐는 또 독 안의 쥐와 피 터지게 싸운다 바벨탑 아래서 독 안의 쥐는 독 안의 쥐들밖에 적도 없다 먹는 쥐와 먹히는 쥐, 무서운 쥐와 무서워하는 쥐, 세계는 그렇게 무식할 정도로 간명하다 얼굴의 살이 떨어져나가고 뼈가 보이고 벌거숭이들은 아예 살 전체가 떨어져나갔다 진로도 없고 퇴로도 없이 독 안에 든 쥐는 독 안에 든 쥐처럼 살다가 죽어서도 독 속에 묻힌다 독 안에 든 바벨탑 아래 묻힌다 피 묻은 깨소금 같은 별들이 독 뚜껑 아래 반짝인다 *** '독 안에 든 쥐'가 너무 많아 '독 안에 든 쥐' '독 안에 든 쥐' 하고 따라가다가 문득 시의 첫 문을 연 저 '선'이 무얼까가 새삼 궁금해졌는데, 저 '선'은 혹 피리부는 사내가 불던 피리소리?  
401 단퀴에스 / 이르사 데일리워드
남태식
171 2020-01-02
단퀴에스 이르사 데일리워드(김선형 옮김) 오늘은 남은 날들의 첫날이다. 물론 또다른 첫날들이 오겠지만 꼭 이런 날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 단퀴에스(dankyes) : 마침내(나이지리아 무그하불어) *** 하니 오늘은 힘껏 쉽시다. 힘껏 쉼을 힘껏 즐깁시다. 잘 쉼과 잘 즐김은 한 몸입니다. 쉼과 즐김에 따라붙는 꼬리나 꼬리 같은 것은 애초 붙이지도 말고 혹 붙었으면 힘껏 뗍시다. '오늘은' 오로지 '남은 날들의' '첫날'이고 '오늘'이라는 '첫날'입니다. 아니, 둘도 없는 '단퀴에스' '첫날'입니다. 둘도 없는그냥 한 날입니다. '마침내' '단퀴에스'  
400 와인 / 이르사 데일리워드
남태식
181 2019-12-31
와인 이르사 데일리워드(김선형 옮김) 현명해지기에 너무 늦은 때는 없다. 네 영혼이 그간 발효된 것을 보라. ***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한 해 동안 다들 부패하지 않고 잘 숙성하셨는지요? 숙성의 정도는 자신이 확인할 수가 없지요. 부패와 숙성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난장판이 새해 끝날까지 어딘가에서는 이어지더라도 우리는, 우리는 오늘도 잘, 숙성합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399 416의 목소리/팟캐스트/2016.01.13.~2017.04.13. / 함성호
남태식
211 2019-12-21
416의 목소리/팟캐스트/2016.01.13.~2017.04.13. 함성호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 . . . . (그의 얼굴은 잠시 시간을 잃어버린 듯 멍하게 보였다가 이내 두 무릎 사이로 떨 어졌다 그의 굽은 등이 흔들리고 있는 걸 나는 바람에 저물녁의 광장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 너무, 는, 의태어였다) . . . . . 너무, 너무……보고 싶어요 *** 하여 뿌리가 뽑힌 나무들은 하루에도 몇 번 씩이나 바람도 없는 하늘 아래에서 '흔들리'다가 '흔들리'다가 '기울어지고' '기울어지고'는 했다. '너무, 는, 의태어였다' 아직도 그 나무들은 '흔들리'고 '흔들리'다가 '기울어지고' '기울어지고' 있다. '너무'처럼, '너무'같이.  
398 파란 돌 / 한강
남태식
215 2019-12-20
파란 돌 한강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들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川)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 그 거친 상처마저도 오래 묵어 익고 또 익으면 문득 단내 풍기며 다가오는 시간이 있다. 어떤 말로 딱 규정 지을 수 없는 눈물이 얼비치는 시간. 아프다는 흐릿한 느낌만으로도 완성되는 부활의 시간.  
397 죄와 벌 / 강성은
남태식
375 2019-12-06
죄와 벌 강성은 좋은 사람들이 몰려왔다가 자꾸 나를 먼 곳에 옮겨 놓고 가버린다 나는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일어나 좋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쌀을 씻고 두부를 썰다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 생각한다 생각한다 생각한다 *** 고로 나 역시 '생각한다' '좋은 사람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일까. '좋은 사람들'이라는 믿음이 모든 희망을 걸어도 된다는 믿음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쉬 놓지 못하는 '좋은 사람들'에 대한 이 믿음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리고 또 무엇을 '생각한다' '생각한다'  
396 Ghost / 강성은
남태식
266 2019-12-06
Ghost 강성은 그 여자는 살아 있을 땐 죽은 여자 같더니 죽고 나선 산 여자처럼 밤의 정원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 다니는 작은 새처럼 밤하늘을 떠다니는 검은 연처럼 장갑을 끼면 손가락이 생겨나고 양말을 신으면 발가락이 생겨나고 모자를 쓰면 머리가 생겨난다 책을 읽으면 눈이 생겨나고 음악을 들을 땐 귀가 생겨나고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면 입술이 생겨나는데 그 여자는 살아 있을 때도 죽어서도 입이 있어도 말은 못한다 *** 사회적 합의 운운은 구차하다. 합의 이후에 이루어진 것보다 합의 이전에 이루어진 것들이 많은 분야도 있다. 나중에,라고 미루다가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실상은 얻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지만.  
395 하늘 / 김시종
남태식
271 2019-12-01
하늘 김시종(이진경, 카게모또 쓰요시 옮김) 아득하여 좋은 것이다 오제(尾瀬)는. 들어가서는 안되는 오지의 거처 하나 가슴에 품어 그려봐도 좋은 것이다. 함부로 오르지 마라. 전승(傳承)의 신이 뻗쳐 있는 봉우리 정도는 멀리서 우러러 절을 해두라. 아득하여 좋은 것이다 떨어져 있는 나라는. 목소리 하나 이를 수 없는 울타리 안에서는 이마 위 오른손 물들어도 좋은 것이다. 구경 삼아 가지 마라. 오래된 길에 이정표 하나 천년의 침묵에 가라앉아 있다. 가서 더럽힐 맨몸으로는 가지 마라. 아득하여 좋은 것이다. 방치된 무덤과 희미해진 가향(家鄕) 함께 등 돌린 세월은 그것대로 아득해도 좋은 것이다. * 오제(尾瀬) : 일본 군마현, 후꾸시마현, 니이가따현 경계 지역에 있는 일본 최대의 고원습지 지대. *** 투어리스티피케이션으로 시작한 시인의 눈이 결국 머무는 '희미해진 가향'을 향한 '아득하여 좋은 것이다.'라는 중얼거림에 잠시 눈 앞이 아뜩해졌다. '구경 삼아'도 '가서 더럽힐 맨몸으로'도 '가지 마라.'고 단호하게 맺는 말 끝에서 느껴지는 것은 반어의 간절함이리라.  
394 두 잔 집 / 길상호
남태식
309 2019-11-19
두 잔 집 길상호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나는 사이, 아니 전생에 두 번쯤은 만난 적 있는 사이 창유리 먼지 낀 불빛에 홀려 결이 고운 나무탁자에 마주앉았네 찌개가 줄지도 않고 식어가는 동안 혓바닥 위에 들깨소금만 몇 알씩 털어 넣으며 옆자리 사람들이 하나둘 희뿌연 김 속으로 사라지는 것도 알지 못했네 한 잔 또 한 잔 전생이 가까워질수록 소주병처럼 푸른 밤이 쌓여가고 주인 할머니는 윤회의 문턱을 드나들면서 몇 번이고 안주를 데워다 주었네 우리는 만난 적이 없는 사이, 아니 이미 전생에 두 번은 헤어진 사이 술잔 테두리를 따라 돌고 돌다가 서로의 발소리를 놓쳐 까마득히 헤매다가 끊어진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또다시 두 잔의 술이 필요해 *** 나는 현생과 전생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경계에서 너무 오래 머무는 사람. 취한 듯 홀린 듯 '두 잔의 술'을 잇는 사람. 하지만 '두 잔의 술'을 놓고 마주보고 앉은 나와 너는' '전생에 두 번쯤은 만난 적 있는 사이'였으나 '이미 전생에 두 번은 헤어진 사이'이니 결국 나는 '두 잔의 술'만 잇는 사람. 결국 한 잔의 말만 잇는 사람. 연연해 하지 않는다면 아파할 일도 슬퍼할 일도 없고, 소멸 같은 꿈을 꿀 일은 더더구나 없을테니, 나는 아직도 현생과 전생의 경계에서 홀린 듯 취한 듯 서성이고 있는 사람.  
393 이사 / 이철산
남태식
350 2019-11-15
이사 이철산 낡은 것이 문제였다 그나마 더부살이로 시작한 살림이건만 하나씩 장만한 것들이 풀어놓으니 짐이다 버려라 가져가자 한 치의 양보도 없다 가득 쌓아놓은 짐 무더기에 쪼그리고 앉아 밤늦도록 작은 시비가 멈추지 않는다 버린다는 것이 문제였다 밤새워 잡동사니를 풀었다 묶었다 다시 풀었다 묶는다 결국 버리지 못하고 새로 장만하지 못하고 더부살이 낡은 살림이 오롯이 새집을 채웠다 이사하는 날 버려라 필요없다 천대했던 존재들이 기막히게 자리를 잡았다 낡은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낡았다는 기준이 문제였다 낡았다고 부끄러워하던 시간들이 문제였다 *** 결혼하고 10년만에 이사하는 날, 이삿짐센터 사장 왈 "버리고 가지 않나요" "아뇨, 이건 다 가져가요" 결국 차 1대를 더 불러 결혼할 때 장만한 가구들을 다 싣고 왔다. 그때만 해도 꽤나 유명하고 잘 나갔던 가구 회사에 전화를 했더니 찾아와 자리 다시 잡아주고 낡았다고 생각되는 부분 손 봐주고 갔다. 되려 "고맙습니다." 했다. 가구들이 다시 새 가구가 되었다. 그 가구 아직 쓰고 있다. '낡았다는 기준이 문제'일 수도 있지만, '낡았다고' 다 버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392 흰 토끼 일곱마리는 / 고영민
남태식
348 2019-11-08
흰 토끼 일곱마리는 고영민 청보리밭을 보면 나는 왜 흰 토끼 일곱마리가 떠오를까 우리 밭의 보리싹을 누가 뭉텅뭉텅 낫으로 베어가고 아버지가 그 집을 찾아가 어린 토끼를 한마리씩 우리에서 꺼내 귀때기를 잡고 마당 한가운데 힘껏 내동댕이치는데 토끼가 먹었으니 토끼를 죽여야지! 어린 토끼는 땅을 맞고 바르르 떨다가 죽고 죽고 죽고 또 죽고 어스름 녘 일곱마리 토끼가 죽어 있는 그 집 마당 그 집 식구들 아버지가 내 손을 잡아끌며 큰 소리로 집에 가자! 토끼가 먹었으니 토끼를 죽인겨! 싹둑 베어진 청보리밭을 지날 때쯤 뒤돌아보았던 그 집 마당의 작고 어린 흰 토끼 일곱마리는 *** 잔혹동화다. 원칙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이 힘을 동반한 권위는 폭력에 불과하다. 흔하디 흔한 막장드라마다. 읽고 난 뒤 한참 동안 내 속에서 치미는 이것은 고운 말은 아닐 것이나, 바른 말이기는 할 것이다. 곱다고 어디 다 바르더냐. 가장된 폭력이 주장하는 원칙은 빌미에 불과하다. 시에서 표현되는 그로테스크는 과거의 행위에 불과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보다 더한 그로테스크한 현실을 끔찍하게도 선명하게 마주 대하고 있다.  
391 눈알 / 배창환
남태식
379 2019-11-01
눈알 배창환 분명 산짐승이었다 이른 새벽 포도(鋪道)에 종잇장처럼 납작 얼어붙은 몸뚱이에서, 헤드라이트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게 보였다. 눈알이었다. 아니, 간밤에 내린 서리가 둥글게 뭉쳐진 것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 별뫼산 내려오는 밤길에 반짝이는 물체를 보았다 그것이 산토끼였는지, 오소리였는지, 청설모였는지 알 수 없지만 작은 구슬 눈으로 헤드라이트 불빛 빤히 쳐다보다가, 내 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차바퀴가 둥근 몸뚱이에 닿을 만큼 가까워져서야 어슬렁어슬렁 길가 작은 가시덤불 어둠으로 사라졌었다 그가 내게서 보고 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그의 집이었다 지금 누룽지처럼 언 땅바닥에 눌어붙어 반짝이는 저것은, 어쩌면 그가 덮고 다니던 빛나는 털이었는지, 털을 받쳐 주던 살이었는지, 살이 뭉개고 다니던 붉은 흙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저렇게 큰 길에 대자(大字)로 누워서 알몸 부드럽게 감싸던 어둠 한 겹씩 벗어 놓고 돌아가는 그런 제 모습 끝내 응시하려고 잘 닦은 눈알 하나쯤, 허리춤 깊숙이 감춰두었는지도 모른다 *** '끝내 응시'하는 눈알을 생각한 적이 있다. 본 적이 있다. 생각한 적이 있는 생각 속의 눈알은 생각만으로도 여전 섬찟한 풍경으로 남아 있는데, 본 적이 있는 눈알은 생각보다는 부드러웠다. 우수에 차 있었다고 해야 하려나, 연민의 감정이 느껴졌다고 해야 하려나.  
390 물고기와 불고기 / 김언
남태식
391 2019-10-29
물고기와 불고기 김언 둘 중 어느 고기로 하시겠습니까? 어느 고기라도 좋습니다. 먹을 수만 있다면. 그는 주방으로 가서 물고기를 내어왔다. 맛이 좀 비리군요. 아무래도 물고기니까요. 다른 걸로 내어드릴까요? 내가 주저하자 그는 주저 없이 주방으로 가서 다른 고기를 내어왔다. 비린 맛은 없을 겁니다. 살아 있는 맛도 없는 고기네요. 아무래도 불에 달군 고기니까요. 다른 고기는 없습니까? 그는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주방으로 갔다. 한참을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고기를 준비하는 걸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기를 상상하고 있을 때 주방에서 그가 나왔다. 손에는 고기 한 점이 들려 있었다. 식탁 위에 턱 하니 내려놓는 그의 손에서 핏물이 흘렀다. 지금 막 잡은 고깁니다. 어떤 고깁니까? 불에 닿지도 않았고 물에서 건져올린 고기도 아닙니다. 나는 물에서 건져올리지도 않고 불에도 닿지 않은 그 고기를 영문도 모르고 씹었다. 영문도 모르게 맛있었다. 그 고기가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다. 이제 어떤 고긴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식당을 나왔다. 잇속에 낀 누군가의 살점을 마저 씹으면서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을 곰곰이 생각했다. *** 하니 결국 피를 보아야 끝이 나는구나. 하니 결국 피맛을 보아야 끝이 나는구나. 문장가도 아니면서 말을 만들더니, 사상가도 아니면서 말을 풀더니, 미식가도 아니면서 말의 맛을 음미하더니, 결국 피를 보고, 피맛을 보아야 끝이 나는구나. '어느 고기로 하시겠습니까? / 어느 고기라도 좋습니다. 먹을 수만 있다면.' '맛이 좀 비리군요' '살아 있는 맛'이' ' 없는 고기네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기를 상상'해봐야 하늘을 찌르는 허세의 길이야 뻔하구나. 미처 다 못 버린 숨긴 식인의 습성 되살리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가 않았구나. 문명인으로 행세하더니 결국 '십 년 묵은 체증'을 이렇게 다 내리는구나. 하여 없는 중립을 버리고, 없는 중도를 버리고, 없는 선택지를 버리고, '장례식장으로', '장례식장으로' 가는 발걸음이 날렵해지더냐. '끄덕' '끄덕이'는 '고개'ㅅ짓이 경쾌해지더냐.  
389 전봇대와 고양이의 마을 / 김언
남태식
362 2019-10-27
전봇대와 고양이의 마을 김언 아침마다 썩는 냄새가 푹푹 쌓이는 마을, 이 마을 정중앙엔 커다란 전봇대가 하나 서 있다 사람들은 이 전봇대를 중심으로 밤새 쓰레기를 쌓아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날이 밝으면 전봇대 꼭대기에서 도둑고양이들이 내려와 쓰레기 더미를 뒤진다 꼬리를 잔뜩 세운 고양이들은 밤새 참아왔던 허기를 게워내고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썩는 냄새를 꾹꾹 채워 넣는다 오전과 오후 내내 도둑고양이들이 만찬을 즐기는 동안 집집마다 인간들은 밤새 내놓을 쓰레기들을 장만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윽고 쓰레기를 장만하지 못한 집들의 불안과 초조에 뒤섞여 저녁이 몰려온다 저녁이 밤으로 바뀌기 전에 도둑고양이들은 전봇대 꼭대기로 올라가고 잔업에 밀린 인간들은 피곤함도 잊은 채 마지막까지 쓰레기 만드는 일에 열중한다 전봇대를 중심으로 밤새 쓰레기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가까스로 목표량에 도달한 인간들은 오늘도 무사히,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돌아간다. *** 저 쓰레기산의 사기꾼이 도망자가 되기 이전부터 저보다 더 크고 높은 쓰레기산을 우리가 만들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과생산 과소비가 만든 저 쓰레기들의 무덤이 언젠가는 우리 모두를 묻으리라.  
388 지렁이들 / 이경림
남태식
412 2019-09-27
지렁이들 이경림 가을비 잠깐 다녀가신 뒤 물기 질척한 보도블럭에 지렁이 두분 뒹굴고 계십니다 한분이 천천히 몸을 틀어 S? 물으십니다 그러니까 다른 한분, 천천히 하반신을 구부려 L `````` 하십니다 그렇게 천천히 U? 하시면 C`````` 하시고 J? 하시면 O````` 하시고 쬐한 가을 햇살에 붉고 탱탱한 몸 시나브로 마르는 줄도 모르고 그분들, 하염없이 동문서답 중이십니다 그 사이, 볼일 급한 왕개미 두분 지나가시고 어디선가 젖은 낙엽 한분 날아와 척, 붙으십니다 아아, 그때, 우리 이목구비는 계셨습니까? 주둥이도 똥구멍도 계셨습니까? 그 진창에서 도대체 당신은 몇번이나 C 하시고 나는 또 몇번이나 S 하셨던 겁니까? *** 때로는 3:1이었다가, 때로는 1:3이었다가, 어쩌다가 2:2가 될 때도 있지만, 말은 어긋나 서로는 서로의 말에 답하지 않고 하던 말만 계속하며 우리는 지금 우리끼리 팽팽하다. 달리는 기차는 없고 '동문서답'만 평행선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끼리 팽팽하다. 이러다가 모르는 새 '붉고 탱탱한 몸 시나브로' 다 '마른' 다음에야 잊은 기차를 기억하려는지 우리는 지금 우리끼리 팽팽하다. 그 기차 이미 달리기를 멈추고 얼굴 숨긴 채 파놓은 '진창'을 비켜나 슬금슬금 뒷걸음질인대도 우리는 지금 우리끼리 팽팽하다. '아아, 그때, 우리 /' 이목구비는 계셨습니까? / 주둥이도 똥구멍도 계셨습니까?' 탄식할 날이 다시 온대도 우리는 언제까지 우리끼리 팽팽팽 하려나.  
387 겨울산 / 윤홍조
남태식
452 2019-09-18
겨울산 윤홍조 눈 기다려 함박눈 기다려 고요한 적소의 폭설 기다려 단단히 더욱 단단히 강철 같은 겨울을 마주 기다려, 아무도 갈 수 없는 막다른 허방 같은 구렁 더는 다가설 수 없을 때 다시 솟구치는 힘 부활의 꽃눈 기다려 꺾이고 꺽인 외가지 수풀들 무너져도 절망하지 않는 혼신의 힘을 기다려 허기져도 굽히지 않는 최후의 뿌리 근성 박토의 용트림을 기다려 물러설 수 없는 생명의 끈 팽팽하게 무장한 방풍림을 기다려 막막한 세상 기다려, 기다려, 저 적소의 폭설 기다려, 이제 봄눈 떠지는 짙푸른 녹수의 해갈을 기다려 *** 何必曰利 돈이 신이 된 자본의 시대 의를 향한 기다림은 처절하다. 何必曰利 공정과 평등을 앞세우고는 있으나 속내는 돈을 향한 경쟁이다. 何必曰利 이미 쥔 돈을 놓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벌이는 게임이 이렇게 막강할 줄이야. 何必曰利 뻔한 싸움이니 끝이야 당연 빤하다고 짐작한 것은 오판이다. 何必曰利 기다림은 애초부터 장기전이었으니 좀 더 기다린들 어쩌랴 싶지만, 何必曰利 기다림이 악착같으면 겨울은 끝내 끝을 드러낼 것이다.  
386 확실한 것은 없다 / 최승호
남태식
438 2019-09-17
확실한 것은 없다 최승호 노자는 태어나기 전에 노인이었고 한 살 때 이미 백발이었다 귀가 사막여우처럼 컸다 석가의 스승이었다 서역의 도서관장을 하다가 어느 날 사막으로 홀연히 사라졌는데 아직도 어딘가에 은거하고 있다 얼굴은 누구도 알 수 없는데 사막에 뜨는 초승달이 그의 흰 눈썹이다 *** '확실한 것은 없다' 최상층을 뒷배로 삼아 기득권 상층이 벌이는 전쟁에는 팩트가 없다. 없어서 없고 있어도 없다. 싸움의 끝이 최소 현상유지이고 급급한 방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맑은 물은, 있고, 없다. 보이는 건 모두 이미지이다. 물은 흐를 뿐이다. 흐르는 물이야말로 팩트다.  
385 폭염 / 허문태
남태식
453 2019-09-01
폭염 허문태 등골이 오싹하다 온 산하 초목이 벌벌 떤다 매미들이 울음을 뚝 그쳤다 시장에서 폐지 줍던 최씨 병원으로 실려갔다 푸성귀 진열하고 파 다듬고 열무 다듬던 노점 할머니들은 전멸이다 말라붙은 강은 유적이 될 것이다 물고기들은 화석으로 발견될 것이다 가을 호수에서 빈 달을 건져올리던 사내도 사라질 것이다 포도나무는 그림자 없이 경전에서 포도를 익힐 것이다 빙하의 눈물 뚝 뚝 떨어질 때마다 해안 절벽을 부서져라 때리는 파도에서 종소리가 들린다 폭염 너머 폭염 폭염에서 섬뜩한 냉기가 흐른다 간담이 서늘하다 *** 재난은 가난한 이들을 먼저 덮치지만 멸망은 계급을 구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384 똥도둑 시인 / 양희영
남태식
503 2019-08-02
똥도둑 시인 양희영 길 건너 비알밭에 잔뜩 눌어붙은 쇠똥 겨울을 난 똥은 나무에도 보약이지 눈감고 딱 세 덩이만 훔쳐 오고 싶었지 한참을 별렀는데 그만 갈아 엎어버린 밭 아깝다 사과나무야 진즉에 집어 올 걸 이 사람 니 똥도둑이가 그러고도 시를 써! *** 그러고도 시를 썼네요. 그저 좋네요. 오늘은 뱀꼬리 사절!  
383 정든 병 / 허수경
남태식
649 2019-06-20
정든 병 허수경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듭니다 가엾은 등불 마음의 살들은 저리도 여려 나 그 살을 세상의 접면에 대고 몸이 상합니다 몸이 상할 때 마음은 저 혼자 버려지고 버려진 마음이 너무 많아 이 세상 모든 길들은 위독합니다 위독한 길을 따라 속수무책의 몸이여 버려진 마음들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아프고 대책없습니다 정든 병이 켜놓은 등불의 세상은 어둑어둑 대책없습니다 *** '늙다'는 나이에 이르지 못하고 고인이 되어버린 시인들의 시는 목숨을 버리기 전 미처 세상에 다 내놓지 못하고 넘겨버린 유고 같습니다. 허수경의 오래된 시 '정든 병'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는지 주변에서 투병하는 지인들을 많이 만납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 전에는 죽음은 막연했으나 그 막연한 죽음이 일없이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한데 죽음의 고비를 한 번 넘기자 신기하게도 되려 죽음이 친근해졌습니다. 물론 병도 친근해졌습니다. 남은 평생을 약을 먹으면서 정기적으로 의사와 대면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되려 편안해졌습니다. 이 마음 나도 모릅니다. 주변에서 진짜 투병생활에 들어간 지인들 중에는 몸의 병으로 마음의 병까지 얻어 고생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분분의 지인들은 병이 곧 삶인 양 투병생활을 일상생활처럼 이어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다행스럽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 과도한 사고의 결과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투병을 일상처럼 이어가면서 좀 더 오래 볼 수 있었으면 더 좋겠다는 바램은 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