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99호...
   2018년 09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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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379 메뚜기 강 / 유재복
남태식
244 2018-07-12
메뚜기 강 유재복 그거 아세요? 가을이 깊어질수록 밤안개 자주 피어오르는 거, 추수 끝난 들판에 저녁이 오고 노을이 땅에 스며드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밭고랑의 풀숲이나 벼 포기 밑동마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거 그게 다 그동안 함께 있던 메뚜기들 하늘로 올라가는 길 도와주려고 말라가는 풀과 꽃들이 땅과 함께 만드는 입김이에요 알 낳고 할 일 다 끝낸 메뚜기들은 가을볕 한쪽 끝에 제 움직임을 내려놓지요 저녁 찬 공기에 다리 끝에 남아있던 가느다란 떨림마저 멈추게 되지요 그럼 하얀 옷으로 갈아입은 메뚜기 영혼이 몸을 빠져나오죠 그런 메뚜기들 태우고 갈 안개를 땅에서 뿜어내는 거래요 여기저기 메뚜기들이 반딧불처럼 떠오르죠 한 움큼씩의 안개가 모여 들판을 자욱하게 만들지요 풀도 꽃들도 낙엽처럼 다 땅으로 떨어지는 계절, 메뚜기들은 땅에서 떠올라 하늘로 진대요 잠자리도 무시무시한 거미나 사마귀들도 모두 어울리죠 쫓기던 메뚜기들이 처음엔 놀라겠지요 먹고 사는 일 내려놓았으니 어떻겠어요? 다들 편한 사이가 되는 거지요 그렇게 큰 강물처럼 한 덩이가 된 메뚜기 강이 들판 위를 흘러 다니죠 좁은 논둑과 벼 사이에서 이리저리 뛰며 풀잎 위에 매달려 살던 삶이 넓은 들판 끝 강물과 검은 산도 다 내려다보니 얼마나 신나겠어요? 벌, 나비들도 이렇게 넓은 곳이라는 걸 그제야 안 거죠 그렇게 메뚜기 강이 밤새 들판을 쏘다니지요 그렇게 새벽이 오면 천사가 내려온대요 그 커다란 강물 끝자락 당겨 하늘로 올라가지요 배웅 마친 안개들이 마구 사람의 마을로 쏟아져 내려오고요 그게 다는 아니에요 이른 봄에 안개 자주 끼는 것 모르세요? 왜 가을 안개는 둥둥 떠 있는데 봄 안개는 긴치마 입은 것처럼 땅을 질질 끌고 다니잖아요? 새싹 내미는 논둑 밭둑 다 덮고 지나는 사람 눈도 가리는 순간, 못 보셨어요? 땅에 바싹 다가선 안개 속에서 메뚜기 알 위로 한 줌의 안개 내려서 스며드는 걸 *** 저 안개, 내게도 스며들었다. 아름답고 감미로운 환상의 나라의 이야기, 마술적 리얼리즘의 땅의 이야기,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명명된 기형도의 '안개'에 버금가는 안개나라의 이야기, 속의 저 안개에 나, 종일 사로잡혔다.  
378 후쿠시마에서 산다는 것 / 요시다 마리카
남태식
344 2018-06-16
후쿠시마에서 산다는 것 요시다 마리카 후쿠시마에서 산다는 것 내가, 후쿠시마에서 산다는 것 나에게, 후쿠시마에서 산다는 것은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고 심호흡하는 습관이 없어진 것 빨래를 밖에 말릴 수 없다는 것 텃밭에서 수확한 야채를 버린다는 것 내가 말하지 않아도 선량계와 마스크를 챙겨 나가는 어린 딸 모습에 가슴이 저린다는 것 저토록 눈부신 흰 눈을 만져볼 수 없다는 것 "힘내자 후쿠시마" 슬로건에 때때로 희미한 초조감을 느낀다는 것 어느새 호흡이 가늘어진다는 것 후쿠시마에 사는 것을 누군가가 묻지 않아도 "그래도 우리 지역은 아직 선량이 낮기 때문에..." 라고 설명해버리는 것 후쿠시마에는 후쿠시마(福島)와 FUKUSHIMA(알파벳)가 있다는 것 후쿠시마에 "그냥 살아"라고 하면 "사람의 생명을 뭘로 보는 거야!"라고 외치고 싶고 "피난하라"라고 하면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 우리도 사정이 있다고!"라고 외치고 싶어지는 것 6살짜리 내 딸은 결혼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걱정되는 것 후쿠시마에서 산다는 선택의 책임을 팽개치고 싶어지는 것 누군가의 희생과 노력으로 우리 일상이 유지되는 살얼음같은 "안전" 위에 산다는 당연한 현실을 날마다 뼈저리게 이해한다는 것 내일 이 집에서 멀리 떠날지도 모른다고 밤마다 생각하는 것 그래도 내일도 이 집에서 살 수 있기를 밤마다 비는 것 어쨋든 딸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것 그 검은 연기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 그래도 나름대로 나날을 즐겁게 살고 있다고, 누군가한테 이해 받기 원하는 것 날마다 화내는 것 날마다 기도하는 것... *** '수명을 연장하여 가동 중이던 / 후쿠시마 노후 핵발전소 / 반경 30Km 안 / 후타바마치 오쿠마마치 오오카마치 나라하마치...... // 이곳은 그들이 태어난 곳 / 이곳은 그들이 자란 곳 / 제1의 고향 제2의 고향 제3의 고향...... / 숨을 모아 결을 짠 삶의 터전 // 2011년 3월 11일 / 이 노후 핵발전소가 폭발했다. // 그리고 그들은 추방되었다. // 반경 30Km 밖 // 재난의 중심부에서 / 재난의 주변부로 // 안전부재의 중심부에서 / 안전부재의 주변부로 // 안전불감증의 중심부에서 / 안전불감증의 주변부로. // 이곳은 이제 버려진 땅 / 죽음의 중심부 / 그들은 버려졌다. /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으리." (졸시 '30Km' 중 일부) 한수원이 노후 핵발전소인 월성1호기를 폐쇄한다고 결정했다. 월성1호기는 2012년 30년 설계수명이 끝난 노후 핵발전소이다.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뒤 강화된 안전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등 여러가지 문제점이 드러났음에도 2015년 원안위는 10년 수명 연장 결정을 내렸다. 시민단체와 주민들이 낸 소송에서 1심 패소한 원안위가 항소하여 2심 진행 중에 있음에도 폐쇄 결정을 내린 이유 중의 하나로 '경제성 부족'을 들고 '월성1호기는 이미 적자발전소'라고 설명했다지만 핵발전소는 애초부터 '적자 사업'이라는 것을 알 사람은 다 안다. 게다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가 이미 증명하고 있듯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수도 있는 시설이다. 노후 핵발전소인 월성1호기 폐쇄 결정과 더불어 영덕과 삼척에서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하던 신규 핵발전소 건설 사업까지 중단한다고 하니 손실 보상 요구등 부정적인 발언도 일부 있지만 탈핵의 입장에서 일단 환영한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갈 길은 멀다. 위의 시는 '1인 대안언론'이라 불린다는 히로세 다카시 선생이 경주지진 이후에 '지진과 핵발전소'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자료를 바탕으로 엮은『땅이 운다』라는 책의 첫머리에 실린 시이다. 100여쪽의 얇은 책이지만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다. 일독을 권한다. 체르노빌도 후쿠시마도 사고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무도 사고의 끝을 모른다.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377 이것이 날개다 / 문인수
남태식
428 2018-06-05
이것이 날개다 문인수 뇌성마비 중증 지체•언어장애인 마흔두살 라정식 씨가 죽었다. 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 친구들 여남은 명뿐이다. 이들의 평균수명은 그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 양 턱없이 짧다. 마침, 같은 처지들끼리 감사의 기도를 끝내고 점심식사중이다. 떠먹여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 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 0%•$#%ㅒ#@!$#*?(선생님, 저 죽을 때도 와주실 거죠?) 그녀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보를 터뜨렸다. $#•&@\•%, *&#……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입관돼 누운 정식씨는 뭐랄까,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 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다, 다 왔다, 싶은 모양이다. 이 고요한 얼굴, 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펼친 안심, 창공이다. *** 죽음의 날개만큼은 아니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이들에게 날개는 주어져야 한다. 최근 모 후보의 유세장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 대한 뉴스를 접하면서 마음이 참담하다. 충돌, 테러, 피습, 폭행 등의 막말이 과연 이 사건을 전하는 온전한 표현인지 의심스럽고 또 의심스럽다.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라는 문장에서 또 목이 멘다. 처음 이 시를 알게된 때로부터 지금까지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늘 울컥, 한다. 이 울컥은 자연스럽다. 당연한 반응이다. 아닌가?  
376 우음(偶吟) / 신경림
남태식
467 2018-05-31
우음(偶吟) - 예산에서 신 경 림 아무리 낮은 산도 산은 산이어서 봉우리도 있고 바위너설도 있고 골짜기도 있고 갈대밭도 있다 품안에는 산짐승도 살게 하고 또 머리칼 속에는 갖가지 새도 기른다 어깨에 겨드랑이에 산꽃을 피우는가 하면 등과 엉덩이에는 이끼도 돋게 하고 가슴팍이며 뱃속에는 금과 은 같은 소중한 것을 감추어두기도 한다 아무리 낮은 산도 알 건 다 알아서 비바람 치는 날은 몸을 웅크리기도 하고 햇볕 따스하면 가슴 활짝 펴고 진종일 해바라기를 하기도 한다 도둑떼들 모여와 함부로 산을 짓밟으면 분노로 몸을 치떨 줄도 알고 때아닌 횡액 닥쳐 산 한 모퉁이 무너져가면 꺼이꺼이 땅에 엎으러져 울 줄도 안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근심어린 눈으로 사람들 사는 꼴 굽어보기도 하고 동네 경사에는 덩달아 신이 나서 덩실덩실 춤을 출 줄도 안다 아무리 낮은 산도 산은 산이어서 있을 것은 있고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알 것은 알고 볼 것은 다 본다 *** 그리하여 때가 되면 낮은 산은 화들짝 놀란듯 쏟아져 내려와 확 세상을 뒤집어 엎기도 하는 바, 낮은 산이야말로 사람살이 세상의 중심이다.  
375 몸살 / 이채민
남태식
425 2018-05-24
몸살 이채민 집 잃은 미아들이 목 떨어진 칸나를 들고 우르르 몰려왔다 바다를 떠나온 모래알의 울음이 쓰다만 원고지 위로 몇날 며칠을 흘러 넘쳤다 짐작보다 오래 머물다 간 손님 *** 느닷없이 온 그 손님 나 아직 못 떠나보내고 있다. 올 때처럼 느닷없이 그 손님 언젠가 내게서 떠나겠지만 애써 못 떠나보내는 이들도 있다. 느닷없이 온 그 손님 끌어안고 남은 평생 몸살을 앓는 이들.  
374 빈집 / 기형도
남태식
440 2018-05-12
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2주 전에 기형도 문학관에 갔었다. KTX 광명역 가까운 곳에 있어서 찾기는 쉬웠다. 첫걸음에는 지나쳤다가 한 번 더 돌다가 '빈 집'의 공간이 별도로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빈 집'은 내게는 늘 '빈 방'으로 읽혔고, 이 '빈 집'의 공간을 '빈 방'으로 변형해서 '빈 방'이라는 제목의 시도 한 편 썼었다. 아니 두 편이었던가. 2행시 한 편에, 그 2행시를 변형하여 늘려 쓴 자유시 한 편. 돌아가는 곳 끝자리 어둠 속에 위치해 있어서 기형도의 시를 읽으며 가다가는 지나치기가 쉬운 공간이었다. 그 때도 언뜻 드는 생각은 '빈 방'이었다. 지나쳤다가 돌아가 들여다보는데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에 '빈 집' 시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한 사람이 그 공간 입구에서 멈춰서서 시를 감상하고 있어서, 저 공간에 앉을 자리 하나라도 놓였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바로 돌아섰다. 오래 들여다보지 않고 바로 돌아서와서 나는 되려 지금까지도 그 '빈 집' 아니, '빈 방'을 생각하고 있다. 지금도 이 시가 생각나 다시 찾을 때 나는 '빈 집'이 아닌 '빈 방'을 찾았다.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요즘 논란이 되는 드라마(tvn '나의 아저씨')를 보다가 문득 이 구절이 생각났다. 몰래 도망가서 스님이 된 '애인'을 몇 십 년 동안 못 잊고 그리워하다가 그 사는 곳을 알고 찾아와 "돌아와 돌아와 안 돌아오면 이 절간 다 불 싸질러 버릴" 거라고 악다구니 애원을 퍼붓고 떠난 '옛 애인'을 보낸 뒤 스스로를 '빈 방'에 유폐시키는 장면을 보는 순간이었다. 이미 오래 전 '옛 애인'으로 떠나보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여전히 자신에게도 '애인'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을 느껴서였을까. 아님, 스스로 '옛 애인'이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그 때까지도 여전히 '애인'을 '옛 애인'으로 돌리지 못해 몇 십 년을 그리워하고 애달파하며 살아왔던 '그 사람'의 고통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을까. 내가 본 것은 다만 기거하던 방에 있던 물건들을 다 밖으로 꺼내고 그 방을 '빈 방'으로 만든 뒤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장면에 불과했다. "언제까지요" "몰라" 그 문답 뒤에 문을 닫고 들어가는 스님과 그 방문에 서둘러 자물쇠를 거는 장면 하나.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빈집에 갇혔다. 문을 잠그는 이와 갇힌 이는 분명 달랐지만 그것은 스스로 문을 잠그는 순간이었다. 내게는 오랫 동안 풀리지 않았던 비밀 하나가 풀리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역시 나만의 상상에 불과한 비밀이겠지만. '암종 같은 빈방' 나는 '빈 방'이라는 시의 마지막을 이렇게 풀었었다. '사내는' '암종같은 빈 방을 여럿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장님처럼' 사랑을 얻고 '장님처럼' 사랑을 하다가 그 사랑을 잃고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는 사내. '장님처럼' 와서 '장님처럼' 우리를 붙잡고 있는 사랑의 순간은 언제까지일까. '증오'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던 사랑마저 다시 '사랑'으로 돌아오는 순간들을 늘 맞고 있으니 내게는 '장님' 같은 사랑의 순간은 죽음까지 함께 가리라 생각되는데 여러분은 어떠신지. '암종같은 빈 방을 여럿 주렁주렁 달고' 살면서도 '임종'에는 이르지 않는 사랑을 나는 하고 있다고나 할까. 어쨋든 이 시의 화자가 이 시를 쓴 시인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기형도는 너무 일찍 떠났다. 등단을 포기하고 긴 습작 시절을 견디고 지내던 내게 동갑인 기형도의 어떤 시는 '흉내내기'를 부추겼는데 그 '흉내내기'를 미처 다 하기도 전에 기형도는 너무 일찍 떠났다. 그러나 떠났거나 말거나 나는 '빈 집'의 화자가 스스로를 유폐시킨 그 '빈 방'에 오래 지금까지 머물고 있다. '잃었던 사랑'들마저 다시 찾으면서. '장님처럼' 새로운 사랑을 얻고 또 '장님처럼' 사랑을 하면서. 하니 다시 말하자면 기형도는 떠났으나 떠나지 않았다. 기형도 앞에 선 나는 늘 '장님'이다.  
373 어느 날의 열차표는 역방향이다 / 이해리
남태식
598 2018-04-01
어느 날의 열차표는 역방향이다 이 해 리 케이티엑스 타고 간다 역방향에 앉아 차창 밖을 내다본다 다가오는 것들은 모두 지나간 것이다 지나가는 것들만 보며 간다 보이는 게 한물간 것뿐인데 새로운 것을 찾아간다 같은 시간 같은 목적지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게 생이라면 나는 출발부터 누군가에게 밀렸음이다 불리한 여정 차별 받은 좌석, 이건 자연스레 피 돌리는 내 박동과는 다른 일 여학교 때 단체로 맞춘 교복 중 내 것에만 나 있던 흠집과도 다른 일 남들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등으로 세상을 더듬어야 하는가 내 자리 비좁고 속 울렁거려도 순방향으로 바꾸고 싶은 꿈 하나는 고속레일보다 뜨겁다 등으로 더듬는 길 덜컹거리며 가지만 도착하면 그뿐, 누가 타고 온 방향을 묻겠는가 *** 가끔은 일부러 역방향을 선택해서 앉는다. 남들 선택하지 않는 역방향을 애써 선택하는 것은 지나가는 것들을 더 오래 보고 싶어서이다. 걷지 않고 뛰던 때도 있었고, 옆도 뒤도 안 보고 앞만 보고 가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앞보다 지나가는 것들을 더 오래 두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으니 나도 나이를 먹어가나 싶다. 며칠 전에도 순방향으로 앉은 남들이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등 뒤에 두고 지나가는 것들을 앞에 두고 보면서 갔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풍경보다 오래 보면서 가는 풍경이 더 좋았다.  
372 저수지가 보이는 식당에서 잠시 / 허문태
남태식
659 2018-03-31
저수지가 보이는 식당에서 잠시 허 문 태 잠시라는 것도 보인다는 것도 들판의 문제다 어디서부터 흘러왔는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헤어졌는지 문득 들판의 문제다 어느 봄날 민들레를 한없이 보고 있었던 것이 노란 나비가 앉아 있는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냇물의 소리는 부딪치는 소리라서 나보다 맑다고 생각했다 다 들판의 문제다 지금은 겨울 들판에서 저수지가 보였을 때 기러기는 저공비행을 한다 저수지가 보이는 식당에서 세네 명씩 네다섯 명씩 식탁에 둘러앉았다 일인용 식탁은 없고 사인용 식탁에 혼자 식사하는 경우는 있다 잠시 뭔가 보일 때 얼른 봐두자 꽃이 피는 곳은 어디고 나무는 어디로 걸어가는지 나는 아직 늙어서 손에 굳은살이 두틈한 사람들과 식사를 한다 괘종시계 초침소리가 잠시 멈춘다 *** '꽃이 피는 곳은 어디고 나무는 어디로 걸어가는지' 보는 당신은 이미 젊었다. 이미 늙었어도 젊었다. '겨울 들판에 저수지가 보'이면 일단 '저공비행을 ' 해야 한다. 저수지를 보고도 계속 날아가는 새는 아직 힘이 철철 넘치거나 진짜 생존할 본능을 잃었다. 지금 나는 힘 보다는 본능 쪽에 더 기울어 있다. '들판의 문제'에서 들판을 보면서도 들판이 아닌 나에 더 집중하고 있다면 당신은 늙었다. 젊었어도 이미 늙었거나 미리 늙었다.  
371 7월의 거울 / 황희순
남태식
502 2018-03-30
7월의 거울 황 희 순 개미 떼에 끌려가는 무당벌레 포기한 걸까, 왜 반항하지 않나 누구 편을 들어줄까 개미굴로 끌려 들어갈 즈음 무당벌레가 지그재그로 줄행랑친다 장난삼아 앞을 막았더니 딱 멈춘다 광속으로 몰려온 개미 떼가 다시 끌고 간다 왜 참견했느냐 따지지 마라, 재수 없는 네가 재수 없는 인간을 만난 것일 뿐 살아있는 한, 길 막는 발 깨물고라도 잽싸게 도망쳐야지, 누굴 원망해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숨 끊어질 때까지 빡빡 기어가야지 먹거나 먹히거나, 이도 저도 아니거나 그들의 게임이 어떻게 끝났는지, 나는 모르는 일이다 *** 우리는 결코 게이머가 아니다. 우리는 신처럼 군림하는 자본에 속고 있을 뿐이다. 게임은 저들의 것이다. 저들이 우리들의 게임이라 부르며 붙여놓은 이 아닌 게임에서 우리가 할 일은 탈출하거나 무시하거나이다. 속지 마시라. 우리는 결코 게이머일 수가 없다. 진짜 게임은 저 가짜 신인 자본에게 신청할 일이다.  
370 그렇게 못할 수도 / 제인 케니언
남태식
644 2018-02-07
그렇게 못할 수도 제인 케니언 건강한 다리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시리얼과 달콤한 우유와 흠 없이 잘 익은 복숭아를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개를 데리고 언덕 위 자작나무 숲으로 산책을 갔다. 오전 내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웠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은촛대가 놓인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벽에 그림이 걸린 방에서 잠을 자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어느 날인가는 그렇게 못하게 되리라는 걸. *** 쉰을 넘기면 그 이후의 삶은 덤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쉰을 넘겨 덤의 삶이 몇 년 계속되자 나는 신기하게도 행복해졌다. 내 주어진 삶이 쉰까지라는 생각의 시작과 이유가 무엇이었든 결과는 쉰을 넘기자 나는 이유 없이 행복해졌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어느 날인가는 / 그렇게 못하게 되리라는 걸.' 이 삶이 언제까지나 계속 되지 않으리라는 걸 나 역시 안다. 하니 이제와서 새삼스레 나는 내 삶에 어떤 과한 목적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크든 작든 욕심은 행복을 해칠 것이다.  
369 천장 / 최라라
남태식
601 2017-11-20
천장 최라라 나는 저것이 나를 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실눈 살짝 뜨고 바라볼 때 저것도 나를 본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나는 아침마다 사타구니에 베개를 끼우고 저게 다 듣고 있는 줄 알면서도 신음소리를 낸다 저거 반응 좀 보려다가 나도 모르는 내 별꼴 다 보겠다 저거 핑계대고 별짓 다해 보겠다 한 번 보여주고 나서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날마다 하겠다 나는 이제 저것이 나를 안 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 ' 2017년 11월 15일 내 사는 포항 지진 이전에 천장은 다만 애써 김춘수였지만, 지진 이후에 천장은 자연스레 김수영이다. 눈을 감고 뜰 때마다 나는 이제 천장을 모른 척할 수가 없다.' 2017년 11월 15일 제가 사는 포항에 지진이 왔습니다. 진도 5.4 지진으로 작년 경주에 이어 두 번째로 진도가 높은 지진이랍니다. 진도는 경주의 1/ 4 수준이라는데 피해는 더 크답니다. 진앙지에서 멀지 않은 제가 사는 아파트도 여러곳에 지반 침하, 아파트 내외벽에 균열이 왔습니다. 그 날 이후 여진이 계속되고 있는데 어젯밤과 오늘 아침에도 진도 3.0 이상의 꽤 큰 여진이 왔다 갔습니다. 일요일이어서 오랫만에 목욕탕에 들렀다가 아파트 내 커피점에서 커피를 한 잔 하면서 시집을 읽고 가자 들고 나온 시집에서 이 시를 만났습니다. 처음 읽는 시는 아니었는데 확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더군요. 이전과 이후. 어떤 사건의 이전과 이후에 모든 것이 달라지는, 달라져 보이는 경험을 수없이 했습니다. 위에 적은 글은 이번 포항 지진 역시 내 삶에 이전과 이후라는 새로운 한 획을 긋겠구나 생각하는 순간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적은 것입니다.  
368 애국자 / 양진기
남태식
577 2017-10-09
애국자 양 진 기 민소매에 반바지를 입은 허연 머리의 그가 절뚝거리는 자전거를 끌고 지하철에 승차하셨다 낮술에 불콰해진 얼굴로 좌중을 훑어보며 씨팔, 씨팔 주먹으로 출입문 창을 탕탕 쳤다 손을 권총 모양으로 접고서 앉아있는 가슴들을 겨냥해 또 다시 탕탕 이새낀지 이석긴지 빨갱이들 쓸어버려야 한다고 허공을 향해 주먹질 몇 번 발길질 하다가 제풀에 나동그라진다 통로에 세워진 그의 자전거 라디오에선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왕왕거리고 핸들에 꽂힌 태극기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여 묵념을 한다 벌떡 일어난 그는 정물처럼 앉아있는 승객들에게 호통을 친다 젊은 것들 정신 차려 대한민국 만세야 그는 때가 낀 손톱으로 겨드랑이를 벅벅 긁으며 한 끼 무료급식소가 있는 청량리역에서 내리셨다 그가 내리자 바닥에 깔렸던 눈길들이 수런거리기 시작한다 *** 2015년 7월 11일 한겨레신문 토요판 생명, 태산이 복순이 바다 돌아간 날 "국기에 대한 경례도 않고 돌고래는 떠났다." 시대상황이 반영된 감동이겠지만 이 문장은 멋지다. 과속과 역주행에 슬그머니 발을 거는 아름다운 정주행이다. 국기를 걷는 아침 - 졸시 '국기를 걷는 아침' 전문 오랫만에 국경일에 국기를 내걸었다. 국경일만 되면 애국심 고취 운운하면서 국기 게양을 종용하는 아파트 구내 방송이 몇 일에 걸쳐 여러 번 나왔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번번이 국기 걸기를 포기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우리집만의 일이 아니다. 거의 전 아파트가 어느 날 부터인가 갑자기 국경일에 국기를 내다걸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동안 국경일에 아파트 베란다에 내걸린 국기 보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다. 위의 시가 쓰여진 것이 2015년 10월이고, 위의 시가 쓰여진 신문기사가 실린 것이 시에 나온대로 2015년 7월이니, 국경일에 우리 아파트 각 가정에서 국기를 내걸지 않게 된 것은 훨씬 그 전으로, 추측하건대 아마 국경일에 도로가는 물론이고 아파트 내의 구내 도로까지 국기로 뒤덮이게 된 이후부터가 아닐까 싶다. 도로가야 국경일에 경축의 의미로 국기를 내거는 것이야 오래된 것이어서 조금 더 강화되긴 했어도 그러려니 했지만, 아파트 구내 도로까지 온통 국기로 뒤덮는 것에는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마뜩잖았으리라. 하니 어느 날인가부터 약속이나 한 듯 베란다에서 국기가 한꺼번에 사라졌겠지. 이번 긴 연휴 시작 전에도 역시 언제나처럼 국기 게양을 종용하는 구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멘트는 역시 언제나와 다름없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오랫만에 국기를 내다걸기로 했다. 국기를 걸려고 꽂아놓은 함에서 꺼내니 먼지가 풀쩍 일었다. 세상에 내걸지는 않았어도 가끔 먼지는 털어줄 걸. 내걸고 난 뒤 혹시나 싶어 내다보았더니 아파트 구내 도로에 걸린 국기는 반으로 줄었지만 몇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국기를 내다건 집은 거의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애국심이 어디 인위적으로 강제한다고 되는 것이든가. 국기를 걸어야 할 아침에 되려 국기를 걷는 아침이라는 시를 쓰고 2년만에 나는 국경일에 홀가분하게 정부에서 종용하는대로 국기를 내걸고 열흘 동안 두었다가 내렸다. 오늘이 한글날로 그 열흘의 마지막 날이다. (2017. 10. 09)  
367 꽃 / 김사인
남태식
751 2017-05-06
꽃 김사인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 아마 그랬을 겁니다. 이왕 누운 것 좀 더 누워 있으려다가도, '새끼들 밥 해멕여 / 학교 보내야지' '일어나거라' 하는 외침에 평생 '꽃'이라는 이름으로 온전하게 불린 적도 없으면서, 제 잘 난 맛에, 제 잘 난 의무감에, 완벽한 딸, 완벽한 아내, 완벽한 며느리, 완벽한 어머니의 짐을 짐 아닌 '꽃'으로 생각하면서, 안 보는 곳에서 아이고 내 팔자야 투덜거리면서 일어나 '새끼들 밥 해멕여' 보낼라고 미처 다 추스리지도 못한 아픈 몸 끌고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을 겁니다. 그렇게 살았을 겁니다. 그렇게 살아서 가슴에 숱한 멍 들었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가슴에 진 멍울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정말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 겁니다. 보일 수 없었을 겁니다. 차마 보일 수 없었을 겁니다. 멍울 보여서 가슴 아파 할 어머니, 아버지, 내 새끼, 아이고 내 새끼, 그리고 동기(同氣)들, 눈에 밟히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였을 겁니다. 가슴에 진 멍울 누군가에게 넘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 겁니다. 혼자 오롯이 지고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고 갔을 겁니다. 이리하여 가고 난 뒤에야 뒤늦게 우리는 부음을 듣습니다. 아내의 친동기는 아니지만 아내가 친동기처럼 가깝게 지내던 동기의 부음을 듣고 조문을 다녀왔습니다. 처음 부음을 듣고 긴가민가 하다가 사실을 확인한 뒤에 갑작스레 울다가 소리치다가 혼잣소리하다가 또 울면서 넋을 놓는 아내를 보아서이기도 했지만, 마지막 가는 길에 미련은 안 남기게 해야지 하는 마음에 어쩔 수 없이 돌아와야만 하는 애매한 상황에 있는 아내를 구슬려 하룻밤을 다른 동기들과 함께 지내고 마지막 가는 길까지 배웅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아내는 먹는둥마는둥 허겁지겁 과일을 잘라 몇 조각 먹더니 저녁도 거르고 안방으로 들어가 누웠습니다. 나도 밀린 신문을 읽고 티브이를 보는둥마는둥 멍하니 앉았다가 평소보다 많이 이른 시간에 잤습니다.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아내의 곁을 지키기는 했지만 나 역시 심사가 복잡했지요. 그리고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 여전히 한밤중입니다. 한 세 시간여이긴 해도 자고 나니 그런대로 정신이 이제 온전히 현실로 돌아온 듯하여 시집을 펼쳤다가 이 시를 만났습니다. 김사인의 '꽃'. 평소 같았으면 '그저 예찬'했을 '명시'로 읽었을 시였지만, 복잡한 심사를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여서인지 슬그머니 부아가 일었습니다. 부아가 일어 '모진 비바람에 / 마침내 꽃이 누웠다 //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 들창을 미느니 // 살아야지 // 일어나거라, 꽃아 / 새끼들 밥 해멕여 / 학교 보내야지' 하는 마음 이제 다 놓고 가거라, 꽃아, 이제 가거라, 꽃아 하면서 첫 연을 마지막 연 뒤에 덧붙여 한 번 더 '모진 비바람에 / 마침내 꽃이 누웠다' 하고 읽고, 그래 이제 가거라, 꽃아, 잘 가거라, 꽃아, 고생했다, 꽃아, 한 번 더, 쓰기에 '꽃'이지 '꽃'이 아닌 아내의 동기의 '본 이름'을 부르며, '꽃' 대접도 않으면서 '꽃'으로 부르는 이들을 향한 부아는 놓아 두고, 보내는 인사를 했습니다. 이런 부아는 시인의 다른 시 '경주 이씨 효열비' '화진'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봄바다' 등에서도 일었던 부아와 거의 같은 부아입니다. '낭만'이 '폭력'이 되기도 하는 지경. 안방에서 마른 기침 소리가 들립니다. 자는 줄로만 알았던 아내도 벌써 깨어나 일어나지만 않은 채 다시 잠 못들고 있나 봅니다.  
366 이 모든 일 이전에 겨울이 있었다 / 황인찬
남태식
787 2017-04-30
이 모든 일 이전에 겨울이 있었다 황 인 찬 차에서 눈을 뜨면 바깥이 보이지 않는다 창을 닦으면 살짝 보이고 깜빡 잠들었구나 밖은 국경 너머 눈의 고장인 듯 아닌 듯 무인지경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저 새하얀 눈은 언제 다 내렸을까 겨울도 아닌데 같이 웃고 떠들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원래 없었지 또 바깥은 보이지 않는다 창을 닦으면 또 살짝 보이고 눈은 오지 않는다 지금은 겨울이 아니니까 이제 겨울은 없으니까 예전에는 겨울이 있었다 국경도 있었다 안도 있고 밖도 있고 뛰어노는 애들도 있고 좋았다 그때는 눈도 터널도 나라도 다 있었으니까 그런 겨울도 있을 수 있었다 그런 날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저 새하얀 것들은 무엇일까 저걸 뭐라고 부르나 나는 대체 무엇으로 창을 닦은 걸까 또 바깥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모두 하얗다 보이지 않는다 눈은 내리지 않는 것이다 겨울은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인 것이다 그렇다면 저 새하얀 것들은…… 공포에 질려 있을 때 누군가가 창밖에서 문을 두드린다 그렇게 써 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출근길, 터널을 벗어나면 요즘은 늘 만나는 것이 먼지눈입니다. 먼 곳에서 먼지눈이 내립니다. 하얗게 내리는 것이 눈 같아서 처음엔 이 봄에 웬 눈, 그러다가 그걸 먼지눈이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번번이 또 깜빡 잊고 눈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비가 온 뒤 만나는 아침길은 청명한 느낌이어서 시야가 쨍 하고 맑아 보였었는데, 요즘엔 비가 온 뒤 만나는 아침길도 뿌옇게 시야가 흐립니다. 일단 시인의 손을 떠난 시는 독자의 몫이라는 것 다시 느낍니다. 시인이 무엇을 상상했든 독자인 제 상상과는 무관합니다. 어쩌다가 같을 때도 있기야 하겠지만요. 이런 식입니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 수업을 하러 왔다 애들이 아직 오지 않아 큰 일이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 아무도 하지 않는 대답이 있다 아무도 앉지 않는 책걸상도 있다' '나는 출석부를 읽는다 / 하얗게 비어 있는 출석부다'(이상 황인찬의 시 '역사 수업' 일부) 시인이 이런 상상을 했든 안 했든 나는 이 시에서 '안산'과 '단원고'와 '2학년생들'을 떠올립니다. 아직 세월호는 추억의 장으로 넘길 수 없는 기억이고 현재라서 어떤 비슷한 이미지만 나와도 자동적으로 떠오릅니다. 하니 시의 주인은 결국 독자가 되는 셈입니다. 재난시대여서인가요. 시인이 그려내는 정황만으로 나는 또 다른 재난상황을 떠올립니다. 핵폭발 이후의 지구. 먼지, 먼지눈, 재. 내리고 날리고 쌓이고. 핵폭발을 상상하는 것, 핵폭발 이후의 지구를 상상하는 것은 어쩌면 상상이 아닙니다. 이미 재난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큰 재난을 막기 위한 방편을 상상해야 할 때입니다.  
365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 폴레트 켈리
남태식
1578 2017-04-25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ㅡ 피해 여성이 피해 여성에게 주는 편지 폴레트 켈리(가정 폭력 생존자, 여성운동가)(신혜수 번역, 정희진 수정)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제 생일도 아니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우리는 처음으로 말다툼을 했어요. 그가 던진 수많은 잔인한 말들에 저는 정말 가슴이 아팠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미안해하는 것도, 그리고 그가 한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우리의 기념일도 아니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그는 저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어요. 마치 악몽 같았어요. 현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죠. 오늘 아침 깨어났을 때 제 몸은 온통 아프고 멍투성이였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할 거라는 걸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어머니의 날'도 아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그는 저를 또다시 때렸어요. 이제까지 어느 때보다 훨씬 심하게요. 만약에 그를 떠난다면, 저는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제 아이들을 돌보나요? 돈은 어떻게 하고요? 저는 그가 무섭기도 하지만 그를 떠나기도 두려워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할 거라는 걸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답니다. 제 장례식 날이었거든요. 지난밤 그는 결국 저를 죽였습니다. 죽을 때까지 때려서요. 만약에 그를 떠날 만큼 용기와 힘을 냈다면, 저는 아마 오늘 꽃을 받지는 않았을 거예요. *** 이 시는 최근 들어 스스로를 평화학, 여성학 연구자로 부르며, 약력에서 학문 간 경계를 넘나드는 공부와 글쓰기를 지향한다고 하는 정희진이 쓴 '아내 폭럭'에 대한 연구서인 <아주 친밀한 폭력>의 드는 문에 실린 시입니다. 이 시를 읽고 나는 엄청난 충격을 느꼈는데, 문 안으로 들어서서 나올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심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시의 감상은 이로써 충격 한 단어로 충분하지만 굳이 소개하는 것은 이 시와 더불어 정희진의 책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란을 찾으시는 분들께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364 가면과의 입맞춤 / 김형술 [1]
남태식
709 2017-03-28
가면과의 입맞춤 김형술 거래는 끝났다. 목에 걸린 얼굴을 풀어 서류가방 속에 숨긴다 카메라, 꽃다발, 목걸이, 선글라스 목에 걸어 마땅한 것들을 찾아 호주머니를 헤집는 손은 온통 피투성이 날카롭게 금이 간 거울로 뒤덮인 세상에 갇힌다 사람들 붉은 혀를 가진 거울들 열세 개의 눈을 가진 벽 앞에서 사정없이 흔들리는 얼굴을 본다 나, 사분오열하는 불편한 물체 모든 거래는 제 얼굴을 거는 것 아니 얼굴 없는 몸, 가슴 없는 손의 뒷거래로 얼굴을 숨기는 일 뜨겁고 탐욕스런 손발 노래를 잃은 산문의 입술 영혼을 잘라버리는 위험한 흉기로 거래는 언제나 시작되고 날마다 새로운 얼굴을 목에 걸어야 하는 얼굴 없는 목숨 처음부터 얼굴이 없었던 종족인 수천 번 수만 번 허기진 내 그리움은 주검과의 조우 딱딱하게 굳어 악취마저 풍기지 않는 가면과의 차가운 입맞춤 신분증, 안경, USB, 넥타이 거래는 끝나지 않는다 내 얼굴은 늘 가슴께에 매달려 있다 *** 시를 읽는 행위는 만남의 행위입니다. 가끔 잊고는 하지만 어떤 상황 앞에서 종종 잊었던 이 사실을 새삼 깨닫고는 합니다. 이 시는 상주에서 포항 오는 버스 안에서 만났습니다. 상주에서 오늘까지 열고 있는 이 문학웹진의 고창근 편집인의 전시장에 들렀다가 오는 길이었습니다. 그 전날에는 서울 인사동에서 열고 있는 제 고향친구의 전시장에 들렀었지요. 제 친구의 전시 주제는 '색으로 떠나는 여행', 고창근 작가의 전시 주제는 '나는 누구인가'로 대상과 주제 모두 달랐습니다. 하지만 서울에서 본 것은 온통 뭉갠 풍경이었고, 상주에서 본 건 온통 뭉갠 얼굴이었으니, '뭉갬'이라는 표현 방법으로 보면 공통적인 것도 있구나 싶습니다. 하지만 뭉갰다고 해서 대상이 보이지 않는 건 아닙니다. 한참을 들여다보니 친구의 그림 속에서는 애초에 보여주고자 했던 풍경이, 고창근 작가의 그림 속에서는 역시 보여주고자 했던 얼굴이 보였습니다. 야경을 그린 친구의 그림 속에서는 친구의 고향 산과 바다, 친구가 잠시 머물렀던 외국의 어느 도시, 아마 스케치 여행을 떠나서 만났지 싶은 항구의 풍경들이 희미한 빛과 어둠 속에서 보였습니다. 고창근 작가가 선택한 거울캔버스(미러지, 거울)는 그림 속의 얼굴과 보는 이의 얼굴을 겹쳐서 보라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보여준 표정들이 너무 많고 강해서 미처 내 얼굴을 같이 담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친구의 기억 속의 풍경은 내 기억과 많이 겹쳐 있었으나, 고창근 작가가 그린 얼굴 표정은 내 얼굴 표정과는 겹치는 부분이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시집을 펼쳤는데 이 시를 만났습니다. '가면과의 입맞춤' 아, 했습니다. 전시장에서 보았던 그 많은 표정과 표정의 얼굴들을 내가 미처 못 느끼고 지나갔을 뿐이지 내게도 저렇게 많은 표정과 표정의 얼굴들이 있거나 있었겠다 싶은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습니다. 숨긴 얼굴들과 숨겨야 했던 얼굴들. 잊은 얼굴들과 잊어야 했던 얼굴들. 그리고, 또 그리고 ...... 나 역시 '얼굴'에 대한 시를 썼던 적이 있었구나 했습니다. 아래는 제가 쓴 얼굴에 대한 시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미 내 얼굴 잊은 지 오래 그대는 그대 얼굴 잊지 않았는가 숲의 얼굴 보리라 물 되어 강 아래로 흐르기도 하고 구름 되어 비로 내리기도 하고 돌 되어 이리저리 구르기도 하고 새 되어 나무와 나무 건너뛰며 노래 부르기도 해 돌아서면 밤새 내 목덜미 훔치던 숲의 부드럽고 거친 숨소리 연신 내 허리 휘감던 숲의 손길 단내 풍기며 누르던 알싸한 숲의 입술에 취해 온 몸으로 피워 올렸던 내 꽃밭의 꽃잎 수도 없이 뚝 뚝 떨어뜨리며 아아 드디어 보겠네 고개 들면 숲은 그저 얼굴 없는 짐승일 뿐 애초부터 숲은 얼굴 없는 짐승이었던가 하여 다시 나는 찾으리라 하지만 찾을 수 없어 혹여 잠 속에서 찾을까 깊은 잠에 들지만 잠 속에서도 보이지 않아 밤새 뒤척이다 아침이면 비에 씻긴 햇살에 찰랑대는 잎새처럼 늘 말갛게 방긋거리며 거리로 나서지만 나는 이미 내 얼굴 잊은 지 오래 거리로 함께 나선 그대는 아직 기억하시는가 혹여 그대는 잠 속에서나마 그대 얼굴 보시는가 - 졸시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하다'  
363 고드름 / 백우선
남태식
684 2017-03-22
고드름 백우선 온 가족이 흘리고 흘린 눈물이 깊고 어두운 집집에 가득 차올라 넘쳐 처마에서 뚝뚝 떨어졌네 날로 더 흐리고 추워지자 얼어서 창이 되었네 그치지 않는 눈물과 한숨에 길어지는 창의 끝은 그들의 머리를 향해 점점 내려왔네 *** 봄이 오고 있습니다. 낮밤 기온차가 높고 때로 세찬 바람이 몰아치기도 하지만, 그래도 봄이 오고 있습니다. 오는 봄에는 그 해에 잃은 꽃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을까요. 다시 불러도 그 해 이전에 불렀던 노래와 같을 수는 없어도 잃었던 꽃노래를 다시 부르고 싶은 마음 여전 간절합니다. 깊고 어두운 집집에서 창이 되어 가슴을 찌르는 눈물을 흘리고 흘린 가족들의 간절함이야 이루 말로 다 할 수는 없겠지만, 이 봄에는 드디어, 마침내, 결국, 아! 머리를 향해 내려온 창이 봄눈 녹듯 다 녹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362 고라니에게 몸살을 옮다 / 박승민
남태식
727 2017-03-20
고라니에게 몸살을 옮다 박승민 메밀밭이 있던 눈밭에서 고라니가 운다. 희미한 비음이 눈보라에 밤새도록 쓸려 온다. 나는 자는 척 베개에 목을 괴고 누웠지만 다시 몸을 뒤척여 민물새우처럼 등을 구부려 돌아누워 보지만 눈바람에 실려오는 울음소리가 달팽이관을 자꾸 건드린다. 바람소리와 울음소리가 비벼진 두 소리를 떼어내 보느라 눈알을 말똥거린다. 눈밭에 묻힌 발이 내게 건너오는지 흘러내리는 찬 콧물이 옮겨오는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코가 맹맹하고 팔다리가 자꾸 쑤신다. 어떤 생각만으로도 몸살은 오는지 몸살은 몸속의 한기를 내보내서 몸을 살리라는 뜻인데 나도 모르는 어떤 응달이 아직 살고 있는지 귀를 쫑긋한다. 아내에게는 고라니에게 몸살을 옮았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혼자 약 지으러 간다. *** 한 해에 한 번은 오지게 몸살을 앓습니다. 몸과 마음이 피곤하면 몸살기야 한 해에 여러 번 알게도 모르게도 왔다 가지만, 몸과 마음이 다 지쳐 떨어질 정도의 심한 몸살은 기억으로는 한 해에 딱 한 번 옵니다. 제 이런 몸살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때 쯤에 주로 옵니다. 해서 언제 오든 그 철이 겨울에서 봄 사이에 있으면 아 올해는 봄이 빨리 오나 보다, 어머나 올해는 봄이 늦네 하고 단정을 짓고는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 봄이 왔다고 하기도 하고 봄이 아직 안 왔다고 하기도 합니다. 봄이 오는 것은 제 몸살이 오고 안 오고에 딸려있기 때문입니다. 제게 있어 '어떤 생각만으로도 몸살은' 옵니다. '나도 모르는 어떤 응달이' 내 몸과 마음의 어딘가에 여전 '살고 있는지' '생각만으로도' 어느날 갑자기 온 몸과 마음에 찬 기운이 돌고, 감당할 수 없을만큼 큰 아픔과 슬픔이 오고, 마침내 그리움, 어떤 알 수 없는 그리움까지 찾아오면 제 몸과 마음은 나도 모르는 낭떠러지로 밀려가 추락합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씻은 듯 말끔하게 일어서서 돌아옵니다. 돌아오면 늘 창 밖에 봄이 와 있습니다. 올해는 아직 몸살을 안 앓았는데 밖은 벌써 봄이니 올봄에는 이런 몸살 없이 봄을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이 시의 화자도 심한 그리움을 앓고 있나 봅니다. 화자의 그리움은 이 겨울 지금은 '눈밭'이 된 '메밀밭' 자리에도 있나 봅니다. '고라니' 핑계를 대며 훌쩍거리고 있는 이제는 중년을 넘긴 어떤 사내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코가 막혔으니 그 그리움은 이미 도를 넘고 있겠습니다. 대체 '아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그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애써 추궁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누가 제게 수십 년 간 안고 오는 제 오진 그 그리움이 무언지 묻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같습니다. 그래도 시간은 가고 철은 넘어서 봄은 여전히 오고 있습니다.  
361 걷는다는 것 / 장옥관
남태식
821 2017-03-16
걷는다는 것 장옥관 길에도 뼈가 있었구나 차도로만 다닐 때는 몰랐던 길의 등뼈 육차선 대로변 인도 한가운데 우둘투둘 뼈마디 샛노랗게 뻗어 있다 뼈마디를 밟고 저기 저 사람 한 걸음 한 걸음 걸음을 만들어 내고 있다 밑창이 들릴 때마다 나타나는 검은 혓바닥 갈라진 거울처럼 대낮의 허리가 시큰거린다 온몸이 혓바닥이 되어 핥아야 할 뼈마디 내 등짝에도 숨어 있다 *** 지난 여름 제 친구 중 한 친구가 쓰러졌습니다. 고객과 상담 겸 해서 점심을 먹던 식사자리에서였다네요. 이런 것을 두고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도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이 친구 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어 위기는 넘겼으나 반신마비가 왔지요. 꾸준한 재활치료로 말을 먼저 찾더니 얼마전부터는 입이 다 풀려서 옛날의 수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꾸준한 운동에도 근육은 거의 안 풀려서 거동은 여전히 불편한 상태인 이 친구 많이 답답해서인지 어제도 전화를 해서 푸념을 한참 풀어놓았습니다. 이 시는 처음 대하는 시는 아닙니다. 여기저기에서 꽤 자주 만났던 시임에도 저리도록 시린 감정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문득 친구가 떠오르면서 무심하게 보았거나 이해하지 못했던 시어들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차로로만 다니던 시인이 대로변을 직접 걷게 되면서 ' 우둘투둘 샛노란 뼈마디 길'을 새삼 만났듯이, 저는 제 친구의 일을 겪으면서 이 시를 새삼 제대로 만난 셈입니다. '우둘투둘 샛노란 뼈마디 길'이 아니더라도 제 친구가 일어서서 다시 만나는 길은 모두 뼈마디 길처럼 우둘투둘할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런 길이라도 '한 걸음 한 걸음' 만들어 내는 걸음일지라도 제 친구는 무척 절실할 것입니다. 말은 조급해하지 말라고, 꾸준하게 운동하다 보면 걸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 했지만, 저 역시 제 친구가 빨리 걸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360 시 / 파블로 네루다
남태식
724 2017-02-27
시 파블로 네루다(김현균 옮김) 그래 그 무렵이었다 ...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밤의 가지들로부터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얼굴도 없이 저만치 지키고 섰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입술은 얼어붙었고 눈먼 사람처럼 앞이 캄캄했다. 그때 무언가가 내 영혼 속에서 꿈틀거렸다. 열병 혹은 잃어버린 날개들. 그 불탄 상처를 해독하며 난 고독해져 갔다. 그리고 막연히 첫 행을 썼다. 형체도 없는, 어렴풋한, 순전한 헛소리, 쥐뿔도 모르는 자의 알랑한 지혜, 그때 나는 갑자기 보았다. 하늘이 흩어지고 열리는 것을 행성들을 고동치는 농장들을 화살과 불과 꽃에 들쑤셔진 그림자를 소용돌이치는 밤을, 우주를 보았다. 그리고 나, 티끌만 한 존재는 신비를 닮은, 신비의. 형상을 한, 별이 가득 뿌려진 거대한 허공에 취해 스스로 순수한 심연의 일부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별들과 함께 떠돌았고 내 가슴은 바람 속에 풀려났다. *** 죽은 땅을 뚫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봄은 마른 겨울을 밀치고 오려나, 라고 썼다가, 죽은 땅을 뚫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봄은 마른 겨울을 밀치고 온다, 라고 고쳐 쓴다. 우리는 지금 겨울과 봄의 경계에 서 있다. 무모한 희망은 없다. 불현듯 시가 오고, 불현듯 촛불이 왔듯이, 이렇게 불현듯 봄도 오리라. 하지만 사실 어느 것 하나도 불현듯 오거나 온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