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伶

 

-박정대

 

 

유령이 내게 말하길, 시가 잘 씌어지지 않을 때는 술을 마셔라

 

태풍의 한가운데서라도 술은 너를 위로하리니 사랑이 오지 않을 때도 한세월 술을 마셔라

 

살아서 네가 마시는 술은 굳건한 너의 生. 너의 생을 생으로 빛나게 하는 것도 술이었나니 술이 다 떨어지는 시간이 오면 그때 시를 써라

 

사랑이 다 떨어지는 시간이 오면 그때 시를 써라

 

시를 쓰고 쓰고 또 쓰다가 그래도 시가 되지 않을 땐 술병座에서 출렁이는 까만 밤의 머루주를 마셔라

 

살아 있는 것들이 내게 말하길, 시가 잘 씌어지지 않을 때는 月下獨酌 스스로 빛나는 시가 돼라

 

 

 

-박정대 시집『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뿔,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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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시인들 가운데 박정대 보다 술과 음악 그리고 담배를 좋아하는 시인이 또 있을까 싶다. 그간 박정대가 펴낸 네 권의 시집에서 독한 음악과 담배 그리고 술에 중독된 삶을 노래한 시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슨 철학 논문이나 과학실험 보고서의 제목 같은 별난 이름의 넷째 시집『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에도 술과 음악과 담배로 표현되는 대책 없는 낭만주의 시편들이 가득하다. 박정대의 넷째 시집『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은 첫머리에 기록된 것처럼 “체 게바라/그리고 로맹 가리에게”에게 헌사된 것이다. 이 시집의 시적 화자는 게바라가 거닐었던 볼리비아의 삼림과 로맹 가리의 고향인 메트러 12호선 뤼 뒤 바크역을 비롯하여 프라하, 시베리아 횡단 열차, 뮌헨, 중국 산뚱의 벌판, 눈 내리는 고군산열도, 줄 없는 갱부르 기타 속, 담배 연기 위, 자정의 라디오 레벨데 채널 등 세계 곳곳을 떠돌고 있다. 이러한 시적 화자를 우리는 도저한 낭만주의에 붙들린 집시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시집 속에 표현된 시적 화자는 “나는 세계를 떠도는 부랑자로서” “나의 쓸쓸함에는 기원이 없”고 “나는 지금 나를 연주할 수 없는 고독의 대평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왜 심장의 풍경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가” 되물으면서 “영혼의 발전소를 지겠다”며 “말을 타고 노래를 부르며 한세상을 건너”간다. 그렇게 그는 “생의 주파수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유령은 幽靈이 아니고 劉伶이다. 伶은 악공, 광대를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 유령은 언어 유희로 쓰여져 귀신이면서 뮤즈이겠다. 유령이 “月下獨酌 스스로 빛나는 시”이니 술을 마셔라 한다. 그러니 “바람의 경전”을 읽기 위해 우리는 술을 마셔야 한다.

-이종암(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