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5호...
   2020년 01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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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62 하릴없이/이기와
임술랑
3333 2011-07-24
하릴없이 - 이기와 오리를 데리고 개울가로 간다 오리를 안아보니 속이 빈 구름이다 구름이 허공에 잠기지 않는 건 마음이 없기 때문인가 무심(無心)한 오리가 개울물에 구름처럼 종이배처럼 떠 있다 오리의 유쾌한 목욕을 반나절 지켜보고 있는 나를 누군가 불쾌하게 지켜보며 혀를 찬다 그렇게 할 일이 없냐고, 생을 가벼이 살아서야 되냐고 방울 달린 혀가 내 심심(深深)한 생각의 수면에 방울을 던져 소음의 파문을 일으킨다 오리와 내가 저속(低俗)에 빠지지 않고 물 위에 떠 있는 일 말고, 더 나은 비중(比重)의 일이란 어떤 것일까 아무리 무게를 실어 깊이 잠겨보려 해도 물은 공을 차듯 오리를 수심(水心) 밖으로 튕겨낸다 물과 놀아도 물에 젖지 않는 오리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렇게 할 일이 없냐고, 생을 가벼이 살아서야 되냐고 시집『그녀들 비탈에 서다』2007 서정시학 ................................................................................................................. (감상) 우리는 지상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아, 가볍게 둥둥 떠 다니는 오리를 그저 바라만 볼 뿐인가. 저 물 속에(低俗)에 빠저 허우적거리는 나를 보는 것 같다. 나는 어느 나이가 되서야 생을 가벼이 살 수 있는 경지에 이를까. (임술랑)  
161 물의 베개 / 박성우 imagemovie
이종암
3594 2011-07-07
물의 베개 -박성우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 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 강가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 -박성우 시집『가뜬한 잠』(창비,2007) ------------------------------------------------------------------------------------------------------------------------------------------------ 물도 잠을 자는가? 만약에 잠을 잔다면 강물도 베개를 베고 자는가? 박성우 시인은 그렇다고 말한다. 시인이 그걸 시골 마을에서 직접 보았다는데 어쩔 것인가. 어느 여름날 밤, 고향에 내려간 시인이 잠이 오지 않아 마을 앞의 강가로 나간 모양이다. 그리고 강 건너편에 앉아 밤이 이슥토록 마을 앞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다가 문득 마음의 화폭에 새겨진 커다란 그림 한 장이 바로 시「물의 베개」가 되었다.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인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를 나는 왜 보지 못했던가. 여름날 밤, 내 고향 마을 앞 동창천에서 수도 없이 봐 왔던 이 그림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는 위 시 4연에 열거된 것처럼 우리네 살림살이가 그대로 수놓아져 있다. 고된 농사일로 관절을 상한 늙은 농부의 신음 소리와 자식 대학등록금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중년 부부의 대화도, 술에 찌든 서방을 탓하는 젊은 베트남 새댁의 서툰 악다구니와 몇 명 되지는 않지만 새근새근 잠자는 아이의 숨소리도 수놓아져 있을 테다. 나는 박성우 시인의 둘째 시집『가뜬한 잠』을 읽으며 그가 언어로 짜 올린 이러한 감동적인 큰 그림을 여럿 만날 수 있어 참 행복했다. -이종암(시인)  
160 시골길 또는 술통 / 송수권 movie
이종암
3616 2011-07-05
시골길 또는 술통 -송수권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차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송수권 시선집『여승』(모아드림,2002) -------------------------------------------------------------------------------------------- 1975년『문학사상』신인상에 「山門에 기대어」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한 송수권 시인. 그의 등단 작품이자 대표작이기도 한 「山門에 기대어」는 한국문단과 독자들에게 오래 회자되고 있는 작품이다.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으로 비유된 죽은 누이(실제는 남동생이었다고 함)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과 한(恨)을 유장하고 처연한 가락에 실어 놓은 송수권의 노래는 가히 절창이었다. 송수권 선생이 며칠 후면 ‘푸른시인학교’ 초청 시인으로 포항에 온다고 한다. 어서 달려가 그의 노래를 듣고 싶다. 비교적 선생의 최근작인「시골길 또는 술통」이라는 시를 읽는다. 무척 재미가 있다. 시 속의 저 시골길, 1970년대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의 시골길이 꼭 이랬다. 학교가 있고 버스가 다니던 명대 마을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가득 실은 커다란 짐자전거가 이웃 마을인 사깔, 북지, 그리고 우리 동네 길명의 신작로로 들락날락 했다. 짐칸엔 두 말들이 하얀 플라스틱 술통이, 자전거 바퀴 양옆에도 쇠고리에 술통을 매달고 비포장도로에 자전거가 씩씩 달려가던 그 풍광이 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런 살아 숨쉬는, 생명력 넘치는 시를 만나면 괜히 즐겁다. 시골길도 술을 마신 것 같고, 이 시를 읽는 나도 詩도 술을 마신 것만 같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는 마지막 행이 기막힌 표현이다. 주모의 치마 속은 아주아주 무서운 곳이다. -이종암(시인)  
159 부드러운 산소/ 박승민
임술랑
3361 2011-07-04
부드러운 산소 박승민 약 기운에 쓰러져 잠든 아이의 손을 꼭 잡는다 아이의 손이 내 손을 찾는다 "엄마, 돈 벌면 아빠 다-줘-이 씨!" "앞으로 내 이름은 그레고리오야" 이 말을 끝으로 아이는 말문을 닫았다 양파껍질을 벗기듯 하루씩, 꼭 하루씩, 빠르게 지구의 껍질을 벗기며 아주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가 보다 지구는 아무래도 산소가 부족한가 보다 허기사 누군들 아침에 입던 옷을 접어 머리맡에 수의처럼 놓고 잠들지 않은 밤이 있으랴 네가 벗기다만 껍질을 마저 벗기며 나 또한 하루하루 가벼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주에는 부드러운 산소(山所)가 아주 많을 것 같다 시집[지붕의 등뼈] 2011푸른사상 .................................................................................................................................................................................................. (감상) 사랑하는 아이가 산소(O)가 많은 산소(山所)에 가 있으므로 해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불분명해 졌다. 시인이 자주 아이를 찾아 그 경계를 넘나들기 때문이리라. 하여 부드러운 산소를 호흡하게 되는 것이다.(임술랑)  
158 소리의 거처 / 조용미 imagemovie
이종암
3727 2011-07-01
소리의 거처 -조용미 비 오는 숲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다 숲의 벚나무 가지들이 검게 변한다 숲 속의 모든 빛은 벚나무 껍질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흑탄처럼 검어진 우람한 벚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숲에서 사라진 모든 소리의 중심에는 그 검은빛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른 연못에 물이 들어차고 연못에 벚나무와 느티나무의 검은 가지와 잎과 흐린 하늘 몇 쪽과 빗방울들이 만드는 둥근 징소리의 무늬들 가득하다 계류의 물소리는 숲을 내려가는 돌다리 위에서 어느 순간 가장 밝아지다가 뚝 떨어지며 이내 캄캄해진다 현통사 霽月堂의 月자가 옆으로, 누워 있다 계곡 물소리에 쓸린 것인지 물 흐르는 방향으로 올려 붙은 달, 물에 비친 달도 현통사 옆에선 떠내려 갈 듯하다 비 오는 날 숲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 뒤에 숨는다 -『2009현대문학 수상 시집』(현대문학,2008) ----------------------------------------------------------------------------------------------------- 다른 사람이 쓴 좋은 시를 베껴 옮겨 적은 내 공책에서 조용미 시인의 시를 찾아 읽는다.「魚飛山」「삼베옷을 입은 自畵像」「검은 담즙」「소나무」「물소리를 듣는다-묵계리」「겨울 논」「門을 열다」와 같은 시를 읽으며 조용미의 시는 벼랑의 삶에서 생(生)과 사(死)의 긴 고랑을 깁는 환(幻)의 노래라는 생각을 했다. 위 시에서 나는 소리(音)라는 말, 거처(居處)라는 말은 알겠는데, ‘소리의 거처’는 잘 모르겠다. 검은 빛이라는 말은 알지만서도, “숲에서 사라진 모든 소리의 중심에는 그 검은빛이 관여하고 있음”이라는 것은 잘 모르겠다. 조용미의 시「소리의 거처」는 어렵다. 시적 의미의 해독이 분명하지 않는데도 이 시는 거듭 나를 자기 안으로 끌어당긴다. 그래서 자꾸 읽는다. 분명치 않은 시의 의미가 거문고 소리처럼 내 몸을 통과한다. 내 몸에 “둥근 징소리의 무늬들”이 쌓이는 것만 같다. 좀 더 있으면 제월당의 月자가 옆으로 누운 이유도, 소리의 거처도, 소리에 관여하는 검은빛도 이해할 것만 같다. 뻥이다. 어이쿠, 얼른 저 물소리 뒤로 숨어야겠다. -이종암(시인)  
157 소나기 내린다/이대흠
김재순
3405 2011-06-28
소나기 내린다 소나기 내린다 저 인사불성의 사내 비 내린다 법도 도덕도 없이 비는 흙의 가슴이며 허벅지며 푹푹 찔러댄다 천년의 여인 흙은 불쑥불숙 엉덩이를 들어올린다 음탕하게 한바탕 소나기 내린다 저 잡것들 후줄근한 땀방울 없이 눈에 보이는 데서 세상의 가장 은밀한 일을 치러버린다 이윽고 비 그친 뒤 햇살 따스한 날 빠뿌쟁이 푸른 머리 툭 튀어나온다 그 여인으로부터 툭 튀어나오는 빠뿌쟁이의 푸른 머리는 법도 도덕도 없는 한바탕의 음탕함을 뛰어넘어 그저 놀랍고 신기하고 거룩함까지 보여주지요. 그렇게 생명은 이어지고 ....--김재순--  
156 당혹 / 박찬 movie
이종암
3276 2011-06-22
당혹 -박찬 이게 내가 잡아보던 손이라니 이게 내가 만지던 젖무덤이라니 이게 하얀 국화꽃에 싸여 모란같이 웃으시던 모습이시라니 세의야 세연아 평소 유언처럼 얘기해오던 내 말에 내가 이토록 당혹스러워하는구나 이제 바람에 날려버릴 한줌 가루에 그 많은 추억들이 담겨있었다니…… 이게 너희들이 잡아보던 아빠 손이라니 이게 너희들이 안겼던 아빠의 가슴이라니 이게 너희들이 꽃입술로 뽀뽀하던 아빠의 뺨이라니 -박찬 시집『외로운 식량』(문학동네,2008) ------------------------------------------------------------------------------------------------- 2007년 1월 박찬 시인의 죽음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갑작스런 그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은 당혹스러워 했다. 박찬 시인의 다섯째 시집『외로운 식량』은 그러니까 그의 유고 시집인 셈이다. 시집 속의 시편들은 병마(病魔)로 점점 꺼져가는 몸과 마음으로 박찬 시인이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피워 올린 언어의 불꽃이다. 그 불꽃의 내용은 떠나는 자의 외로움과 남은 사람에 대한 사랑의 빛으로 일렁인다. “외로움은 그의 식량” “누가 내 몸에 들어와 앓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가야 할 곳인데/싸목싸목 가면 되지 않겠니” “-세상 참, 괜히 왔다 간다” “문득 돌아보면 이제는 아스라한 풍경들……” “정처 없는 길을 가네./다시는 오지 않을……” “어디에도 울기 좋은 곳은 없더라” “지루하고 막막한 날이 끝나간다” 등의 시구에서 보듯 그는 참으로 외로워 하다가 우리 곁을 떠나갔다. 어쩌면 박찬 시인이 남긴 이 유고 시편들은 마지막 그의 ‘외로운 식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당혹」을 읽으니 무척 당혹스럽다. 아직 살아 있는 시인이 죽어 한 줌 가루가 된 자신을 시적 화자로 내세워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져야 하는 안타까움, 그 당혹을 목 놓아 울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두 딸과 아내 그리고 먼저 떠난 어머니와 이제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러나 받아들여야만 하는 분명한 사실을 눈앞에 두고 당혹해하는 시인의 캄캄한 마음이 먹물처럼 시의 행간에서 번져온다. 이 시를 읽는 남은 가족의 당혹감은 또 어떠했을까? 아, 삶과 죽음의 갈라섬이여! -이종암(시인)  
155 빈센트 / 황동규
이종암
3702 2011-06-21
빈센트 -황동규 빈센트 반 고흐처럼 계속 물감을 바르라 보채는 캔버스를 벗어나 어디 숨 좀 쉴 공기를 찾아 피스톨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 까마귀 줄지어 나르는 누런 밀밭이 아직 있을까? 가며가며 금속피로처럼 쌓이는 마음의 안개 잠시 밀어내고 과일과 과자 꾸러미를 사들고 뵈지 않게 숨어서 우는 아이들을 찾아가 ‘눈물 그만, 여기 맛있는 사과와 과자가 있네!’ 달래 울음을 그치게 하고 파워레인저 로봇들을 하나씩 손에 쥐어주고 ‘이제 나는 가도 되지?’ 말하고 넌지시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눈 한번 딱 감고 걸어 사방에 아무도 없이 밑불들만 간지럼 타듯 타는 곳으로 나갈 수 있을까? -황동규 시집『겨울밤 0시 50분』(현대문학,2009) ------------------------------------------------------------------------------------------------------------------- 황동규 시인의 근작 시집『겨울밤 0시 50분』에 읽은 이 작품은 죽음에 관한 시이다. 황동규 시인은 일찍이 죽음에 관한 시적 사유를 십몇 년에 걸쳐 진행하면서『풍장』(문학과지성사,1995)이라는 기념비적인 연작 시집을 상재한 바 있다. 죽음은 삶과 불가결의 요소를 이루고 있다. 죽음 없이는 삶도 없고, 삶 없이 죽음 또한 없다. “계속 물감을 바르라 보채는 캔버스”가 고단한 여기의 삶을 비유한 것이라면, “사방에 아무도 없이 밑불들만 간지럼 타듯 타는 곳”이 저기의 죽음을 비유한 것이리라. 여기(이승)에서 저기(저승)로 건너가기 전에 노(老) 시인이 하려고 하는 것은 우는 아이를 찾아가 과일과 과자 꾸러미를 내밀어 울음을 그치게 하고 파워레인저 로봇들을 아이들 손에 들려주는 일이다. 그리고 “넌지시 세상 밖으로 나갈”려고 한다.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장면이다. 여기의 삶과 저기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황동규 선생의 마음의 색깔은 부사어 ‘넌지시’에 모아져있다 하겠다. 요란스럽지 않게 있는 듯 없는 듯 슬쩍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가려 한다. 그러나 죽어보지 않고서는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시의 마지막 행 “나갈 수 있을까?”에 삶과 죽음에 관한 내 마음을 얹고 고개를 바닥에다 숙인다. -이종암(시인)  
154 배꼽 시계 / 안도현 imagemovie
이종암
3790 2011-06-20
배꼽 시계 -안도현 (배) 배가 고프니? (꼬) 꼬르륵 꼬르륵 (ㅂ) 밥 먹어야 할 (시) 시간이라고? (계) 계산 하나는 잘하네 -안도현 동시집『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실천문학사,2007) ---------------------------------------------------------------------------------------------------------------- 안도현 시인이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동화, 소년소설을 펴낸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새 동시집도 펴냈다. 그의 집필 활동은 이제 전천후다. 어린아이의 마음과 눈으로 세상과 사물을 만나는 일, 이는 정작 어른들이 해야 할 일 아닌가? 그러니 아이들이야 원래 그러하니, 세상살이의 물욕에 찌든 우리 어른들이 동시를 읽어야할 것 같다. 동시「배꼽 시계」는 이른바 ‘5행시 짓기’ 놀이 형태로 짜여져 있다. 재미가 있다. 다시 시를 가만히 보니 일상적 삶에서 흔히 보는 아이와 엄마가 다투는 듯한 대화체로 되어있어 그 말놀이가 살아 있다. 1행과 5행이 엄마의 말이라면 2-4행은 어린아이의 말이다. 또박또박 ‘배꼽 시계’를 읽어내는 저 아이가 놀랍다. “개구리가/풍덩,/뛰어들면/연못은 팔을 벌리고/개구리를 덥석,/안아준다”(「개구리」전문), “보름달 같은/수박 한 통//혼자서는/먹을 수 없지/다 함께/먹어야지/나눠서 먹어야지//달무리처럼/빙빙/둘러앉아/먹어야지”(「수박 한 통」전문), “여치를 잡아/여치집 속에 가뒀더니//여치 소리만 뛰쳐나와/찌릿 찌릿 찌찌 찌릿/풀밭에서 우네”(「여치집」전문)와 같은 안도현의 동시에서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지는 삶의 화평을 본다. 이는 우리 어른들이 잃어버린, 우리가 되찾아야 할 순정한 마음의 빛이다. 세상을 맑고 아름답게 노래하는 동시를 많이 읽어야 할 일이다. -이종암(시인)  
153 백석에 관한 추억 / 서정춘 movie
이종암
4250 2011-06-17
백석에 관한 추억 -서정춘 아버지는 새 봄맞이 남새밭에 똥 찌글고 있고 어머니는 어덕배기 구덩이에 호박씨 놓고 있고 땋머리 정순이는 떽끼칼로 떽끼칼로 나물 캐고 있고 할머니는 복구를 불러서 손자 놈 똥이나 핥아 먹이고 나는 나는 나는 몽당손이 몽당손이 아재비를 따라 백석 시집 얻어보러 고개를 넘고 -서정춘 시집『봄, 파르티잔』(시와시학사,2001) ------------------------------------------------------------------------------------------------------------------------------ 김소월의 고향 평북 정주의 10년 후배 시인 백석. 그가 우리 현대시에 끼친 영향은 소월의 그것 못지않게 대단한 것이었다. 백석은 일제강점기 때 해체되어가던 농촌공동체의 민속 문화를 그만의 독특한 어법과 평안도 사투리로 훌륭하게 복원시켜내고, 식민지 민중적 삶의 애환을 여실히 담은 수작(秀作)을 여럿 남겨놓았다. 그리고 그가 남겨놓은 이러한 작품들은 여러 후배 시인들의 시 창작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신경림, 서정춘, 이시영 같은 시인들은 자신들의 시작(詩作)에 백석의 시가 결정적이었음을 공공연하게 말한다. 안도현 시인은 아예 둘째 시집 제목을 백석의 대표작 ‘모닥불’로, 넷째 시집 제목을 백석의「흰 바람벽이 있어」의 한 구절인 ‘외롭고 높고 쓸쓸한’으로 차용하고 있다. 또 최근에 나온 시집『간절하게 참 철없이』의 2부는 백석의 시가 그랬던 것처럼 유년시절의 놀이와 음식에 관련된 서정시를 담고 있다. 안도현 시인이 백석 시의 내용면에서 깊이 영향을 받았다면, 셋째 시집『가재미』를 펴낸 문태준은 시적 표현의 어법 측면에서 백석의 직접적 영향을 떠안고 있음이다. 전남 순천 출신인 서정춘 시인의「백석에 관한 추억」도 문학소년 시절 우연히 백석의 시집을 얻어 보게 된 경험을 노래하고 있다. ‘아버지, 어머니, 정순이, 할머니, 나’로 이어지는 인물의 나열과 각 시행의 종결부의 ‘-고’의 반복적 병치 또 진한 전라도 사투리의 사용이 서정춘 시인의 어린 시절 고향의 정서는 물론 백석 시의 맛까지 솟아나게 한다. 백석은 아직도 우리 시대 현역 시인들의 시 속에 시퍼렇게 살아있다. -이종암(시인)  
152 여뀌꽃과 흰 해오라기/李奎報
임술랑
4271 2011-06-14
여뀌꽃과 흰 해오라기[蓼花白鷺] 이규보(李奎報) 앞 여울에 고기와 새우 많으매 / 前灘富魚蝦 백로가 물결을 뚫고 들어가려다 / 有意劈波入 사람을 보고 문득 놀라 일어나 / 見人忽驚起 여뀌꽃 언덕에 도로 날아 앉았네 / 蓼岸還飛集 목을 들고 사람 가기 기다리나니 / 翹頸待人歸 보슬비에 온 몸의 털 다 젖는구나 / 細雨毛衣濕 그 마음은 오히려 여울 고기에 있는데 / 心猶在灘魚 사람들은 그를 한가하게 서 있다고 이르네 / 人噵忘機立 [東文選 제4권] 한국고전번역원 譯 ...................................................................................................................................................................... (감상) 사람은 해오라기를 보고 한가하다고 하지만, 해오라기는 사람이 어서 가기만을 기다린다. 그가 보기에는 사람이란 귀찮은 존재인 것이다. 맛있는 고기와 새우를 먹고 싶어서 침이 꼴깍 넘어간다.(임술랑)  
151 구룡포 사랑/송기원
김재순
3466 2011-06-13
구룡포 사랑 어디로 흘러가는 것이냐 스무살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곳을 떠돌아다녀 진 데 마른 데 가리지 않고 몸을 던져 하다못해 천방지축 개망초꽃으로도 피어나보지 못한 채 이제 다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이냐 돌아보면 어디에서나 소주 몇 잔에도 벌써 젖가슴을 더듬는 몸과 마음이 허한 사내들 이 몸을 기다리는데 해당화 하염없이 피어나는 밤을 지나 이제 다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이냐. 낮은 스레이트 지붕이 어깨를 맞댄 골목, 깊은 곳에 밤이면 붉고 노란 꽃등을 내거는 주점 정착지, 나도, 그 곳을 지날 때는 팔을 뻗으면 검게 선팅한 유리문 때묻은 손잡이가 잡힐 듯한 거리에서 안을 기웃거립니다. 그대나 나나 여태 떠돌았지만 정착지에는 한 번도 들리지 않았군요 그 정착지 밀실, 붉은 등 아래서, 그대 개망초꽃이라도 한 송이 피운다면 그 꽃 한 송이 가슴에 꽂겠네 --김재순--  
150 향 / 황동규 imagemovie
이종암
3249 2011-06-08
향(香) -황동규 비 긋자 아이들이 공 차며 싱그럽게 자라는 원구 초등교 자리, 가톨릭 대구 교구 영해 수련장 현관 앞에 서 있는 향나무 선들바람 속에 짙은 초록으로 불타고 있다. 나무들 가운데 불의 형상으로 살고 있는 게 바로 향나무지. 중얼대며 자세히 살펴보면 몇 년 전 출토된 백제 금동 향로 모습이 타고 있다. 선들바람 속에 타고 있다. 혹시 금동장(金銅匠)이 새로 앉힐 향로의 틀을 찾다 향의 속내를 더듬다 저도 몰래 향나무 속으로 들어간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금 밖으로 흘리는 공을 되차주기도 하며 운동장을 몇 바퀴 돌고 나무 앞에 선다. 아이 둘이 부딪쳐 나뒹굴어졌다 툭툭 털며 일어난다. 이 살아 불타고 있는 향로 앞에서 이 세상에 태울 향 아닌 게 무엇이 있나? 속으로 가만히 물어본다. -황동규 시집『꽃의 고요』(문학과지성사,2006) ---------------------------------------------------------------------------------------------------------------------- 나는 향(香)이라는 말을 무척 좋아한다. 고급 향수도 향을 피운 냄새도 그리 좋아하지 않으면서 왜 그럴까? 황동규 시인의「향(香)」이라는 시도 무척 좋다. 나는 황동규 시인이 그동안 펴낸 열네 권의 시집 가운데 열셋 째 시집『꽃의 고요』를 제일 많이 읽었다. 시집 표지가 나달나달해졌다. 시집 속에는 종교 간의 벽을 허물고 예수와 부처 그리고 원효가 서로 만나 자유자재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 그 대화는 모두 이 세상 삶의 이치와 고달프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비의 눈길로 보듬고 있는 내용들이다. 나는 향나무의 이파리가 불(불꽃)의 형상이라는 걸 이 시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렇다. 가지마다 촘촘히 이파리를 모아서 하늘로 향하고 있는 게 꼭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 그대로다. 시인은 향나무를 보면서 “백제 금동 향로 모습이 타고 있”는 것으로 느끼고, 그 금동 향로를 만든 장인(匠人)이 “새로 앉힐 향로의 틀을 찾다/향의 속내를 더듬다/저도 몰래 향나무 속으로 들어간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싱그럽게 자라는” 아이들을 두고 “살아 불타고 있는 향로”라고 보는 시인의 깊은 눈이다. 시의 종결부에 “이 세상에 태울 향 아닌 게 무엇이 있나?”라는 설의적 표현이 의미하는 바, 세상의 사람과 사물이 모두 향(香)이다. 우리 모두 이승에 갖고 온 제 고유의 향(香)을 한 평생 올곧게 피우다 갈이다. -이종암(시인)  
149 일기예보/이덕규
임술랑
3375 2011-06-08
일기예보/이덕규 농약 먹고 죽은 친구의 부인이 어떤 남자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새 얼굴이 보름달처럼 포동포동 밝아보였다 지나치며 서로 눈인사를 했는데 그 순간 맑은 허공에서 대형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느닷없이 내 뺨을 스치는 빗방울에서 싸늘하게 식어버린 어떤 언약이 느껴졌다 햇살이 참 좋은 오후였는데 남자는 막일하는 옷차림에다 한 손에 접이식 우산을 들고 있었다 [유심] 2011. 5/6 .............................................................................................................................................................................................................................................. (감상) 죽은 사람은 죽었어도 산 사람은 살아야 되니까라고 할 수 있지만, 보약은 아니더라도 밥 멕여야 될 가장을 농약 멕인 여자. 또 누굴 잡을려고 하는 이런 생각이 든다. 막일하는 고단한 남자여! 천기를 잘 읽고 살아야 살게 될 것 같다. 일기예보 잘 챙겨 보기 바란다. (임술랑)  
148 유령 / 박정대 movie
이종암
3498 2011-06-03
劉伶 -박정대 유령이 내게 말하길, 시가 잘 씌어지지 않을 때는 술을 마셔라 태풍의 한가운데서라도 술은 너를 위로하리니 사랑이 오지 않을 때도 한세월 술을 마셔라 살아서 네가 마시는 술은 굳건한 너의 生. 너의 생을 생으로 빛나게 하는 것도 술이었나니 술이 다 떨어지는 시간이 오면 그때 시를 써라 사랑이 다 떨어지는 시간이 오면 그때 시를 써라 시를 쓰고 쓰고 또 쓰다가 그래도 시가 되지 않을 땐 술병座에서 출렁이는 까만 밤의 머루주를 마셔라 살아 있는 것들이 내게 말하길, 시가 잘 씌어지지 않을 때는 月下獨酌 스스로 빛나는 시가 돼라 -박정대 시집『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뿔,2007) ------------------------------------------------------------------------------------------------- 우리나라 시인들 가운데 박정대 보다 술과 음악 그리고 담배를 좋아하는 시인이 또 있을까 싶다. 그간 박정대가 펴낸 네 권의 시집에서 독한 음악과 담배 그리고 술에 중독된 삶을 노래한 시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슨 철학 논문이나 과학실험 보고서의 제목 같은 별난 이름의 넷째 시집『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에도 술과 음악과 담배로 표현되는 대책 없는 낭만주의 시편들이 가득하다. 박정대의 넷째 시집『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은 첫머리에 기록된 것처럼 “체 게바라/그리고 로맹 가리에게”에게 헌사된 것이다. 이 시집의 시적 화자는 게바라가 거닐었던 볼리비아의 삼림과 로맹 가리의 고향인 메트러 12호선 뤼 뒤 바크역을 비롯하여 프라하, 시베리아 횡단 열차, 뮌헨, 중국 산뚱의 벌판, 눈 내리는 고군산열도, 줄 없는 갱부르 기타 속, 담배 연기 위, 자정의 라디오 레벨데 채널 등 세계 곳곳을 떠돌고 있다. 이러한 시적 화자를 우리는 도저한 낭만주의에 붙들린 집시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시집 속에 표현된 시적 화자는 “나는 세계를 떠도는 부랑자로서” “나의 쓸쓸함에는 기원이 없”고 “나는 지금 나를 연주할 수 없는 고독의 대평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왜 심장의 풍경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가” 되물으면서 “영혼의 발전소를 지겠다”며 “말을 타고 노래를 부르며 한세상을 건너”간다. 그렇게 그는 “생의 주파수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유령은 幽靈이 아니고 劉伶이다. 伶은 악공, 광대를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 유령은 언어 유희로 쓰여져 귀신이면서 뮤즈이겠다. 유령이 “月下獨酌 스스로 빛나는 시”이니 술을 마셔라 한다. 그러니 “바람의 경전”을 읽기 위해 우리는 술을 마셔야 한다. -이종암(시인)  
147 집장구 / 손택수 imagemovie
이종암
3774 2011-05-30
집장구 -손택수 일년에 한 번은 집이 장구소리를 냈다 뜯어낸 문에 풀비로 쓱싹쓱싹 새 창호지를 바른 날이었다 한 입 가득 머금은 물을 푸- 푸 - 골고루 뿌려준 뒤 그늘에서 말리면 빳빳하게 당겨지던 창호문 너덜너덜 해어진 안팎의 경계가 탱탱해져서, 수저 부딪는 소리도 새 소리 닭울음소리도 한결 울림이 좋았다 대나무 그림자가 장구채처럼 문에 어리던 날이었다 그런 날이면 코 고는 소리에도 정든 가락이 실려 있었다 -손택수 시집『목련 전차』(창비,2006) ------------------------------------------------------------------------------------------------------ 시 제목이 ‘집장구’다. 우리 노래에 장단을 맞추는 장구는 알겠는데, 도대체 ‘집장구’는 무엇인가? 그 표현이 재미있다. 시골집 문짝을 떼어내어 새 창호지를 바른 것이 장구처럼 당당당 소리를 내는 것을 나도 어린 시절 여러 번 경험한 바다. 손택수 시인의 진술처럼 “뜯어낸 문에/풀비로 쓱싹쓱싹/새 창호지를 바”르고 “한 입 가득 머금은 물을/푸- 푸 - 골고루 뿌려준 뒤/그늘에서 말리면/빳빳하게 당겨지던 창호문”은 영판 장구다. 뜯어낸 이 문짝을 손가락이나 대나무 잔가지로 두드리면 정말 당, 당, 당 장구소리가 마구 솟아났다. 이런 장구를 집의 아가리인 문에 매달아 놓았으면 집이 장구일 수밖에. 창호지 새로 바른 문을 걸어놓은 집을 장구로 본 작은 시적 발상의 전환이 멋진 시「집장구」를 만들게 했다. 손택수 시인의 둘째 시집『목련 전차』에 수록된 「방심」「추석달」「살가죽구두」「목련전차」같은 명편(名篇)들이 그러하듯 이 시도 시인의 구체적 삶의 체험이 시적 형상화의 바탕 무늬를 이루고 있다. 그러니 그가 부르는 노래들은 하나같이 공허하지 않고 우리네 삶의 진정성에 가 닿아 있다. 탱탱하고 한결 울림 좋은 저 집장구처럼 손택수의 시가 우리 한국 시단에 노래의 새 길을 여는 장구가 되기를 바란다. 다음에 나올 그의 셋째 시집은 손택수 장구의 어떤 음색(音色)일지 자못 궁금하다. -이종암(시인)  
146 기차는 간다 / 허수경 image
이종암
5319 2011-05-27
기차는 간다 -허수경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 -허수경 시집『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1992) -------------------------------------------------------------------------------------------------------- 허수경 둘째 시집『혼자 가는 먼집』은 사랑의 단절로 생겨난 마음의 폐허에서 격정적으로 솟아나는 울음과 탄식의 노래들로 가득 차 있다. 표제 시「혼자 가는 먼 집」에서 “무를 수도 없는 참혹”의 그리운 당신을 “킥킥 당신”이라 명명한 역설적 표현을 비롯하여 “더는 취하지 않아/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날 묶어”(「不醉不歸」), “내 상처의 실개천엔/세월도 물에 빠져나오지 않고”(「상처의 실개천엔 저녁해가 빠지고」), “버려진 마음들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아프고 대책없습니다”(「정든 병」), “넌 왜 날 버렸니? 내가 언제 널?/살아가는 게, 살아내는 게 상처였지”(「서늘한 점심상」) 등의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의 노래는 사랑의 단절로 상처나고 병든 몸에서 터져 나오는 절망의 슬픈 노래들이다. 기형도의 한 시를 연상케 하는, “사카린같이 스며들던 상처야”로 시작하는 시「봄날은 간다」와 시집 앞뒤로 편재된「기차는 간다」도 이별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시적 화자 앞에 남자의 성적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밤꽃과 기차는 지고 지나가고 없다. 6행의 이 짧은 시에 ‘지다’와 ‘가다’라는 동사가 범벅이 되어 있다. 대조와 단정적인 시구인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에서 보듯 이는 당신이 떠나가는 데 대한 시적 화자의 통곡과 탄식의 절규다. 시집『혼자 가는 먼 집』이 나온 지 벌써 17년이나 지났다. 지금 허수경 시인은 만리 타국 독일로 유학하여 고고학을 연구하면서 새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이제는 그 그리움과 서러움으로 인한 마음의 집착(執着)을 다 내려놓을까? -이종암(시인)  
145 애월 / 엄원태 image
이종암
3680 2011-05-24
애월 -엄원태 하귀에서 애월 가는 해안도로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길이었다 밤이 짧았다는 얘긴 아니다 우린 애월포구 콘크리트 방파제 위를 맨발로 천천히 걷기도 했으니까 달의 안색이 마냥 샐쭉했지만 사랑스러웠다 그래선지, 내가 널 업기까지 했으니까 먼 갈치잡이 뱃불까지 내게 업혔던가 샐쭉하던 초생달까지 내게 업혔던가 업혀 기우뚱했던가, 묶여 있던 배들마저 컴컴하게 기우뚱거렸던가, 머리칼처럼 검고 긴, 밤바람 속살을 내가 문득 스쳤던가 손톱반달처럼 짧아, 가뭇없는 것들만 뇌수에 인화되듯 새겨졌던 거다 이젠 백지처럼 흰 그늘만 남았다 사람들 애월, 애월 하고 말한다면 흰 그늘 백지 한 장, 말없이 내밀겠다 -엄원태 시집『물방울 무덤』(창비,2007) --------------------------------------------------------------------------------------------------------------- 엄원태의 시「애월」은 절절한 별리(別離)의 슬픈 노래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아니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 “이젠 백지처럼 흰 그늘만”이 “뇌수에 인화되듯 새겨”진 가슴 아픈 사랑 노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던 그 길이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길이었다”라는 도입부의 단정적 시구가 독자의 가슴을 더욱 후벼 판다. 시「애월」에서 시인의 감정이 최고조에 도달한 곳은 단연 3연이다. 쉼표가 거듭 쿡, 쿡 찍혀 있고, “-던가”라는 표현이 무려 5번이나 이어지는 이러한 시적 표현은 가버린 지난 사랑을 회억(回憶)하는 시인의 애절함이 가히 폭발적임을 잘 보여준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지명(地名)인 ‘애월’을 거듭 말한다면 엄원태 시인은 “흰 그늘 백지 한 장, 말없이 내밀겠다”고 한다. 아, 나는 시인이 내민 이 백지 위에 다른 말씀 한 자(字)도 달리 적지 못하겠다. -이종암(시인)  
144 쟁반탑/복효근
김재순
3461 2011-05-24
쟁반탑/복효근 탑이 춤추듯 걸어가네 5층탑이네 좁은 시장골목을 배달 나가는 김씨 아줌마 머리에 얹혀 쟁반이 탑을 이루었네 아슬아슬 무너질 듯 양은 쟁반 옥개석 아래 사리합 같은 스텐 그릇에 하얀 밥알이 사리로 담겨서 저 아니 석가탑이겠는가 다보탑이겠는가 한 층씩 헐어서 밥을 먹으면 밥먹은 시장 사람들 부처만 같아서 싸는 똥도 향그런 탑만 같겠네 비나이다. 배달하시는 아주머니가 쌓아올린 쟁반탑 다보탑이나 석가탑처럼 국보가 되는 거 원하지 않습니다. 산골마을 빈터를 지키는 유물로 남는 거 바라지 않습니다 쟁반탑을 무너뜨리고, 아주머니께 콧노래 흥얼거리며 꽃들이 흐드러진 냇둑을 거니는 날들이게 하소서 두 손 모아 비나이다. -김재순-   
143 새로 생긴 저녁 / 장석남 imagemovie
이종암
3808 2011-05-21
새로 생긴 저녁 -장석남 보고 싶어도 참는 것 손 내밀고 싶어도 그저 손으로 손가락들을 만지작이고 있는 것 그런 게 바위도 되고 바위 밑의 꽃도 되고 蘭도 되고 하는 걸까? 아니면 웅덩이가 되어서 지나는 구름 같은 걸 둘둘 말아 가슴에 넣어두는 걸까? 빠져나갈 자리 마땅찮은 구름떼 바쁜 새로 생긴 저녁 -장석남 시집『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지성사,2005) -------------------------------------------------------------------------------- 시의 제목이 ‘생로 생긴 저녁’이라니, 저녁이 새로 생길 수도 있는가? 그렇다. 너 때문이다. 사랑하는 당신 때문에, 애타는 그리움으로 몸과 마음이 다 젖어 “바위도 되고 /바위 밑의 꽃도 되고 蘭도 되고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랑의 마음을 “웅덩이가 되어서/지나는 구름 같은 걸 둘둘 말아/가슴에 넣어두는”것이라고 표현한 장석남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목석같은 내 마음이 사랑의 보자기 속으로 수루룩 다 말려드는 것만 같다. 그리움과 사랑의 눈빛인데 아침이든 저녁이든 새로 생기지 않을 수 있으랴. 남자라도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과는 석 달 열흘 쯤 함께 살며 그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싶다.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혹은 ‘혹은 당신 때문에 흘린 눈물은 다 어디로 가시려는가?’ 라는 물음을 되새기면서 장석남의 시집을 읽는 즐거움을 그대도 가져보시라. -이종암(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