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는 배후가 없다 / 임영조


청량한 가을볕에

피를 말린다

소슬한 바람으로

살을 말린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 들어 禪門에 들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저 꼿꼿한 老後여!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뿐

배후가 없다, 다만

끼리끼리 시린 몸을 기댄 채

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

反骨의 同志가 있을 뿐

갈대는 갈 데도 없다


그리하여 이 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피를 말린다

몸을 말린다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에 대하여 잘 안다. 속을 비우면 존재조차도 홀가분하게 버릴 수 있음을 잘 안다. 그러나, 그러나 나는 아직 그리하지 못한다. 그리할 수 없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고 좀 더 오래 그 길을 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그러나, “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저 꼿꼿한 老後”의 갈대는 절대로 기억에서 지우지 않을 것이다. 때가 되었을 때,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하여! (윤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