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9호...
   2020년 05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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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1 식구 / 이정록
윤임수
4251 2010-06-09
식구 / 이정록 그릇 기(器)라는 한자를 들여다보면 개고기 삶아 그릇에 담아놓고 한껏 뜯어먹는 행복한 식구(食口)들이 있다 작은 입이 둘이고 크게 벌린 입이 둘이다 그중 큰 입 둘 사라지자 울 곡(哭)이다 식은 개고기만 엉겨붙어 있다 개처럼 엎드려 땅을 치는 통곡이 있다 아니다, 다시 한참을 들여다보면, 기(器)란 글자엔 개 한 마리 가운데에 두고 방싯방싯 웃는 행복한 가족이 있다 옹기종기 그릇이 늘어나는 경사가 있다 곡(哭)이란 글자엔, 일터로 나간 어른 대신 남은 아이들 지키느라 컹컹 짓는 개가 있다 집은 제가 지킬게요 저도 밥그릇 받는 식구잖아요 밤하늘 별자리까지 흔들어대는 목청이 있다 - 시집『정말』에서 - * 식구는 밥을 같이 먹는 사람들이다. 이 시의 1연에는 개고기를 삶아 함께 먹는 부모와 아이 둘의 행복한 모습이 담겨 있다. 그러다가 부모를 잃고 통곡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나온다. 이때의 개는 그냥 식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정록 시인은 곧 그것이 그릇 기(器)의 참모습이 아니라고 말한다. 2연에서 밝히고 있는 그릇 기(器)의 참모습은 개도 한 식구다. 개도 밥그릇을 받으므로 한 식구다. 일터로 나간 부모 대신 집을 지키고 아이들을 돌보는 개도 한 식구인 것이다. 아하, 그렇구나,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치게 되는 식구(食口). 한동안 동네 개들이 다 식구로 보일 것 같다. 어릴 적 그토록 귀여워했던 동생, 누렁이처럼, (윤임수)  
10 곶감이야기/서정주
임술랑
3932 2010-06-06
곶감이야기 서정주 맨드래미 물드리신 무명 핫저고리에, 핫보선에, 꽃다님에, 나막신 신고 감나무 집 할머니께 세배를 갔네. 곶감이 먹고 싶어 세배를 갔네. 그 할머니 눈창은 고추장 빛이신데 그래도 절을 하면 곶감 한 개는 주었네. “그 할머니 눈창이 왜 그리 붉어?” 집에 와서 내 할머니한테 물어 보니까 “도깨비 서방을 얻어 살어서 그래”라고 내 할머니는 내게 말해주셨네. “도깨비 서방 얻어 호강하는 게 찔려서 쑥국새 솟작새 같이 울고만 지낸다더니 두 눈창자가 그만 그렇게 고추장 빛이 다아 되어버렸지“ ................................................................................................................................................................................... (감상) 漢武帝는 “秋風辭”에서 “歡樂極兮 哀情多”라고 했다. 기쁨이란 넘치고 넘치면 그 슬픔 또한 깊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因果없는 기쁨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묘한 인간의 정신구조가 아닌가. “호강하는 게 찔려서” 왜 “울고만 지”내는 것일까. 그 “도깨비 서방”은 할머니의 옳은 서방이 아니었으므로, 이것은 호강이 아니라 눈물이 되는 것이다. 곶감 하나 얻으며 어린 未堂이 깨우친 사실이리라.(임술랑)  
9 백중 / 이종암
현담
3707 2010-06-04
百中 -이종암 늦은 밤 방문을 열고 나오다가 하늘에 떠 있는 살빛 꽃 한 송이를 보았다 엷은 구름 속 보름달이어서 그 모양 갖가지로 보이는데 고향집 툇마루에서 허허 웃고 있는 아버지가 거기에 있고, 나 때문에 삐쳐 토라진 동생이 있고, 6․25때 운문산 어디에서 전사하였다는 삼촌도 있고, 왜정 때 일본에서 객사하였다는 우리 할아버지도 있는데 저 커다란 달꽃 한 송이 내 속으로 자꾸 건너오고 살빛 속으로 내가 마구 스며드는 것은 그래, 피의 일은 멈춤 없이 속수무책 흘러흘러 내려오는 것이어서 -월간 시전문지『현대시학』(2006년 12월호) -------------------------------------------------------------------------------------------------------------------- 부끄럽게도 내 시를 독자들과 함께 읽는다. 죽음의 세계로 건너간 뭇 생명들의 평안과 안식을 위무한다는 음력 칠월 보름인 오늘 백중날에 졸시「百中」을 독자들과 같이 읽고 싶었다. 몇 해 전 백중날 밤에 중천에 걸린 보름달을 보고 쓴 시다. 백중날 밤 우연히 쳐다본 하늘의 보름달이 내게는 마치 사람의 살빛으로 채색된 한 송이의 둥근 꽃으로 보였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그 달꽃을 쪼그려 앉아 골똘히 쳐다보니 그 달꽃 속에서 또 새로운 그림이 거듭 그려졌다. 이미 이승을 버리고 저 끝없는 하늘로 건너 가버린 그립고도 애처로운 혈육(血肉)의 모습들이었다. 그것이 2연에서 줄글로 처리한 아버지, 동생, 삼촌, 할아버지의 얼굴이다. 피의 일, 그러니까 혈연(血緣)이 내게는 어쩔 수 없는, “멈춤 없이 속수무책 흘러흘러 내려오는 것이어서” 이 시를 쓸 수밖에 없었다. 단숨에 써내려갔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들을 찾아나서는, 어쩔 수 없는 깊고 깊은 길을 만났다. 어느 해 백중날 밤하늘의 달꽃이 내게 일러준 길(道)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한다. -이종암(시인)  
8 금강경 몇 줄 / 고증식
수마노
3881 2010-06-04
금강경 몇 줄 고증식 팔순 지난 할머니 꼬물꼬물 진종일 기어간 자리 침 묻혀 다듬었나 기름 발라 빚어냈나 늦가을 햇살 아래 푸른 배추밭 하나 둘 세 이랑 ....................................................................................................... 풍경이 잔잔하다. 아니 경건하다. 육신도 건사하기 벅찰 팔순의 노구가 늦가을 햇살 아래 꼬물꼬물 기어가며 진종일 행한 노동으로 배추밭은 침 묻힌 듯, 기름 바른 듯, 가지런한 이랑을 이루었다. 쇠잔한 노인의 노동 행위에서 법신(法身)을 친견하고, 경(經)을 받아 적는 시인. 낯설지 않은, 저 풍경들을 나는 왜 무심코 지나쳐 왔는지....... 시인의 시선을 따라 가 보니 도처에 법구(法具)요. 말씀이다. 마땅히 받들어 모셔야 할 일이다.  
7 국수가 먹고 싶다/이상국
박승민
4509 2010-06-03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끊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휜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 집 떠나 있을 때 국수가 먹고 싶어 시장거리를 헤매다닌 적이 있었다. 밥도 아닌 고기도 아닌 국수가 왜 먹고 싶었을까? 국수 한 그릇을 찿아 왜 시장 바닥을 한 시간 이상 돌아 다녔을까? 혹,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쳐서가 아니었을까?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혼자 조금 울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국수발이 요즘 그립다  
6 노란 봄 / 김해화 [1]
윤임수
4082 2010-06-03
노란 봄/김해화 꽃다지꽃 노랗습니다 산수유 개나리 낮은 민들레꽃 노랗습니다 지친 아내 얼굴도 노랗습니다 일 끊겨 넉달 오늘도 새벽 로타리 허탕치고 돌아서는 노가다 이십년 내 인생도 노랗습니다 말짱 황입니다 * 9행의 짧은 시에 어려운 삶이 빼곡하게 담겨 있습니다. 새벽 인력시장에서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돌아서는 김해화 시인의 봄은 맑고 깨끗해서 가슴 설레는 봄이 아닙니다. 그냥 삶에 지친 누런 봄입니다. 노가다 이십 년의 시인도 지치고 시인의 아내도 지쳐 있습니다. 이 시가 발표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 땅의 많은 사람이 희망보다는 '지침'의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여름으로 들어서면서 그 '지침'이 널브러지지는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다만, 마지막 행에서 '말짱 황입니다'라고 표현했듯이 아직 우리에게는 삶을 끌어안고 있는 해학이 남아있으니 내년 봄은 조금 밝아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서 말입니다. (윤임수) 시인. yunis007@hanmail.net 시집<상처의 집>  
5 돌담/ 김영석
평강이발소
3970 2010-05-29
돌담 / 김영석 막막한 세상의 끝 천지에 더 이상 갈 곳이 없고 더 이상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나는 홀로 돌담을 마주하고 선다 조용히 돌거울을 들여다보면 거기 내가 길이 되어 누워 있다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한 줄기 길이 되어 외롭게 누워 있다. -거울 앞에 서는 이유는 나를 보기 위해서지요. 날마다 거울 앞에서 매무새 다듬는 것도 내 눈을 내가 한 번 더 또렷이 보기 위함입니다. 그래요. 나를 보려는 게 거울이라면, 나를 보여주는 게 거울이라면 거울은 도처에 있지요. 응달에 핀 훤칠 키 큰 풀포기나 떠나지 못하고 둥지에 홀로 남은 새 한 마리를 만날 때 풀이나 새가 아닌 놀랍게도 나를 보고만 적, 있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홀로일 때 비로소 보이는 나, 외로움이 가끔은 참 맑고 솔직한 거울이기도 하네요. (권선희) gsh6007@hanmail.net 시집<구룡포로 간다>  
4 소리의 거처 / 조용미
현담
4144 2010-05-25
소리의 거처 -조용미 비 오는 숲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다 숲의 벚나무 가지들이 검게 변한다 숲 속의 모든 빛은 벚나무 껍질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흑탄처럼 검어진 우람한 벚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숲에서 사라진 모든 소리의 중심에는 그 검은빛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른 연못에 물이 들어차고 연못에 벚나무와 느티나무의 검은 가지와 잎과 흐린 하늘 몇 쪽과 빗방울들이 만드는 둥근 징소리의 무늬들 가득하다 계류의 물소리는 숲을 내려가는 돌다리 위에서 어느 순간 가장 밝아지다가 뚝 떨어지며 이내 캄캄해진다 현통사 霽月堂의 月자가 옆으로, 누워 있다 계곡 물소리에 쓸린 것인지 물 흐르는 방향으로 올려 붙은 달, 물에 비친 달도 현통사 옆에선 떠내려 갈 듯하다 비 오는 날 숲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 뒤에 숨는다 -『2009현대문학 수상 시집』(현대문학,2008) ------------------------------------------------------------------------------------------------------------------------------------------------- 다른 사람이 쓴 좋은 시를 베껴 옮겨 적은 내 공책에서 조용미 시인의 시를 찾아 읽는다.「魚飛山」「삼베옷을 입은 自畵像」「검은 담즙」「소나무」「물소리를 듣는다-묵계리」「겨울 논」「門을 열다」와 같은 시를 읽으며 조용미의 시는 벼랑의 삶에서 생(生)과 사(死)의 긴 고랑을 깁는 환(幻)의 노래라는 생각을 했다. 위 시에서 나는 소리(音)라는 말, 거처(居處)라는 말은 알겠는데, ‘소리의 거처’는 잘 모르겠다. 검은 빛이라는 말은 알지만서도, “숲에서 사라진 모든 소리의 중심에는 그 검은빛이 관여하고 있음”이라는 것은 잘 모른다. 조용미의 시「소리의 거처」는 어렵다. 시적 의미의 해독이 분명하지 않는데도 이 시는 거듭 나를 자기 안으로 끌어당긴다. 그래서 자꾸 읽는다. 분명치 않은 시의 의미가 거문고 소리처럼 내 몸을 통과한다. 내 몸에 “둥근 징소리의 무늬들”이 쌓이는 것만 같다. 좀 더 있으면 제월당의 月자가 옆으로 누운 이유도, 소리의 거처도, 소리에 관여하는 검은빛도 이해할 것만 같다. 뻥이다. 어이쿠, 얼른 저 물소리 뒤로 숨어야겠다. -이종암(시인)  
3 부처님 오신 날 / 서정주
현담
3482 2010-05-20
부처님 오신 날 -서정주 獅子가 업고 있는 房에서 공부하던 少年들은 蓮꽃이 이고 있는 房으로 一學年씩 進級하고, 불쌍한 아이야. 불쌍한 아이야. 세상에서 제일로 불쌍한 아이야. 너는 세상에서도 제일로 남을 불쌍히 여기는 아이가 되고, 돌을 울리는 물아. 물을 울리는 돌아. 너희들도 한결 더 소리를 높이고, 萬 사랑의 沈淸이를 가진 뭇 沈 봉사들도 바람결에 그냥 눈을 떠 보고, 텔레비여. 텔레비여. 兜率天 너머 無雲天 非想非非想天 너머 阿彌陀佛土의 사진들을 비치어 오라, 오늘은……. 三千年前 자는 永遠을 불러 잠을 깨우고, 거기 두루 電話를 架設하고 우리 宇宙에 비로소 작고 큰 온갖 通路를 마련하신 釋迦牟尼 生日날에 앉아 계시나니. *1968년 5월. -『미당서정주시전집1』(민음사,1991) ---------------------------------------------------------------------------------------------------------------------------------------- 「부처님 오신 날」이 작품은 미당 서정주 시인이 1968년 5월,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여 쓴 시로 보인다. 나는 이 작품을 이번 부처님 오신 날에 세상에 소개하지 못했다. 토요일이라 신문이 발행되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그 인연이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불국토의 서라벌 보문벌 진평왕릉에 앉아 이 시를 읽고 또 해설을 쓰는 것 또한 부처님과 미당과 나와의 작은 인연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것으로 인해서 “공부하던 소년들은” “獅子가 업고 있는 房에서” “蓮꽃이 이고 있는 房으로/一學年씩 進級하고” “세상에서 제일로 불쌍한 아이”는 “세상에서도 제일로/남을 불쌍히 여기는 아이가 되고”로 미당은 적고 있다. 그리고 또 이어진다. 이 세상의 사물인 ‘돌’과 ‘물’도 “한결 더 소리를 높이고” “뭇 沈 봉사들도/바람결에 그냥 눈을 떠 보고” 이렇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한층 더 맑고 선한 삶이 비롯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위 시에서 미당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시적 전언(傳言)의 핵심은 “자는 永遠을 불러 잠을 깨우고” “兜率天 너머/無雲天 非想非非想天 너머”에서 우리네 삶까지 “두루 電話를 架設하고” “작고 큰 온갖 通路를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천수천안의 부처님 지혜로 밝혀놓은 이 ‘통로’는 바로 인연(因緣)과 인과(因果)의 법칙일 게다. ‘부처님 오신 날’을 계기로 인연의 지엄함과 소중함을 깨닫고 절하고 기도하는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야 함이다. 절하고 기도하는 삶은 결국 자기 참회를 통한 자기 변화일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 생명의 거름을 주는 삶의 실천이 중요함을 깨닫는 하루다. -이종암(시인)  
2 겨울 강가에서/안도현
관리자
4959 2010-04-06
겨울 강가에서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내리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도현 시집『그리운 여우』(창작과비평사,1997) --------------------------------------------------------------------------------------------------------------------------------------------- 첫 시집『서울로 가는 전봉준』(민음사,1985)으로 민중적 역사의식을 노래하던 안도현 시인은 삭막한 사람들의 마을에 사랑의 밑불을 여기저기 오래 지펴온 시인이다. 그의 넷째 시집『외롭고 높고 쓸쓸한』(문학동네,1997)에서 읽었던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라는 시인의 간절한 목소리가 우리 독자의 뇌리 속에 오래 남아있다. 위 시「겨울 강가에서」도 그런 사랑의 시다. 강물 속으로 뛰어내려 형체도 없이 녹아내리는 어린 눈발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강이 제 몸을 바꿔 그 눈을 받아내려는 사랑의 이야기. 저 강의 마음이 바로 어린 아들을 받아 안는 어미의 마음이요, 사랑하는 사람을 붙드는 애인의 마음이겠다. 시인이 어린 눈발과 강이라는 자연물을 빌려 ‘관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이런 따스한 사랑이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이고, 애인을 죽이는 날 선 칼바람이 거세게 부는 우리 사회에 좀더 많이 번져나가야 하리라. -이종암(시인)  
1 어처구니/이덕규 이종암 4361 2010-03-12
어처구니 -이덕규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마늘밭에 덮어놓았던 비닐을 겨울 속치마 벗기듯 확 걷어버렸는데요 거기, 아주 예민한 숫처녀 성감대 같은 노란 마늘 싹들이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요 나도 모르게 그걸 살짝 건드려보고는 갑자기 손끝이 후끈거려서 그 옆, 어떤 싹눈에 오롯이 맺혀 있는 물방울을 두근두근 만져보려는데요 세상에나! 맑고 깨끗해서 속이 환히 다 비치는 그 물방울이요 아 글쎄 탱탱한 알몸의 그 잡년이요 내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그냥 와락 단번에 앵겨붙는 거였습니다 어쩝니까 벌건 대낮에 한바탕 잘 젖었다 싶었는데요 근데요, 이를 또 어쩌지요 손가락이,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습니다요 -이덕규 시집『다국적 구름 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2003) ---------------------------------------------------------------------------------------------------------- 지금껏 내가 읽어본 이 세상 시인들의 첫 시집 가운데 <自序>가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이덕규의 첫 시집『다국적 구름 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2003)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시집 첫 페이지를 읽고 나서 내 몸으로 건너오는 감동 그 자체로 나는 몸을 부르르 떨어야했습니다. 오랫동안 다음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지요. 이덕규는 지금 경기도 화성에서 시를 짓듯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사는 시인입니다. 시「어처구니」는 그가 농사(農事) 체험에서 얻은 작품이지요. 이른 봄날 마늘밭에서 비닐을 걷다가 노란, 어린 마늘 싹에 맺힌 이슬을 손끝으로 건드린 것에서 시의 내용이 만들어졌습니다. ‘어처구니’ 없게도 시적 표현이 상당히 성적(性的)이고도 속(俗)됩니다. 그리고 그걸 뛰어넘어 생명(生命)의 기운이 넘치고 있는 작품입니다.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는다고 늘어놓은 시인의 엄살 섞인 너스레가 하나도 밉지 않습니다. ‘어처구니’가 뭔지는 아시지요? 이덕규의 재미있는 이 시에 나는 그저 “한바탕 잘 젖었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