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8호...
   2020년 04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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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323 이명 / 김안
남태식
1941 2015-09-21
이명耳鳴 김 안 귀가 없으니 완전하구나. 가끔 우는 것, 가끔 죽는 것, 가끔 따뜻해지는 것. 병을 나눠 먹으며 내 아이는 자라나 귀신이 된다. 심장처럼 붉은 바람 나눠 먹고 또 다른 아이들은 자라나 전쟁이 되거나 동정이 된다. 내 시체를 봤다는 사람들이 있다. 내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 때문에 울고, 죽고, 죽이다가 따뜻해지거나 멸망한다. 제 지방紙榜을 쓰는 법을 가르쳐주던 노인의 굽은 등 속에 거대한 알이 자란다. 그 속에는 쓴 물 같은 호흡. 먼저 태어난 자가 더 오래 살 수도 있다. 저기 걸어가는 것은 늙은 울음 귀가 없으니 완전하구나. **** 꽤 오래전부터 저는 아침에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저녁 퇴근 후에 들어가 저녁을 먹고 늘 신문을 읽고는 하는데 하니 제가 읽는 신문은 신문이 아니라 항상 구문이 됩니다. 언젠가 친구들 카톡방에 "아침부터 웬 신문을 읽냐, 건강을 위해 새벽에 신문 읽기를 멈추자"고 했더니 기자인 한 친구가 발끈(?) 하더군요. 모두가 듣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을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어나지 않아도 될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도록 하는 데 귀가 미치는 힘은 클 것입니다. 이런 시절에 '귀가 없으니 완전하구나' 노래하는 시인의 말에는 백번 공감이 됩니다. '귀가 없으니 완전하구나.' 아, 문득 제 귀를 버리고 완전해지고 싶네요.  
322 하모니카 소리 / 장이지
남태식
1693 2015-09-16
하모니카소리 - 원자력 시대의 시 장이지 체육관은 천장이 높고 쓸쓸했다. 하얀 벽에 가슴이 휑한 창이 나 있었다. 낮에 코피를 흘리며 파랗게 쓰러진 남자 생각이 났다. 남자는 죽었을까. 죽어서 원혼이 되었을까. 우라늄의 달빛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체육관을 네 구역으로 나누어 난민들을 채워나갔다. 가족의 소식이 궁금한 노파 하나가 쭈그러진 얼굴을 하고 이불 보따리 위에 앉아 있었다. 어디선가 나지막하게 전화를 거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술을 마신 남자들이 배를 세우고 오랫동안 당국에 화를 냈다. 그러고는 다시 적막했다. 모두들 마음의 끝이 눅눅해졌다. 길 잃은 개가 꼬리를 말고 와서 체육관 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어디에도 주인은 없었다. 체육관 한구석에서 한 소년이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했다. 저러다가 어른들에게 야단맞지 않을까 싶었다. 아저씨의 충혈된 눈이 소년 쪽을 잠시 훑었다. 모두들 소년 쪽을 외면하면서도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눈치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멀고먼 외국의 민요처럼 처량했다. 달과 별이 수놓인 어머니의 치마와도 같이 나풀거렸다. 아, 어머니 냄새......, 소년은 울음이 잦아든 맑은 얼굴로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다. 누군가 화를 내면 어쩌나 싶기도 했지만, 누구나 묵묵히 하모니카 소리에 귀를 적시고 있었다. 높고 쓸쓸한 체육관의 천장까지 소리는 날아올랐다가 하얗고 하얀 깃털로 내려앉고 있었다. *** '원자력 시대의 시'라는 부제가 붙은 장이지 시인의 여러 편의 시 중 한 편입니다. 난민촌에서 하모니카를 부는 소년의 모습은 만화 영화에서 본 듯한 풍경입니다만 이것은 시인이 시적 상상력으로 구성한 이야기가 아닌 2011년 3월 11일 이후 일본의 어느 지역의 실제 상황을 재구성해서 쓴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읽는 내내 가을의 끝자락에 선 듯 쓸쓸하고 적막해졌습니다. 2011년 3월 11일 이후, 원자력 시대를 사는 인간으로서 저 역시 이 시인처럼 미처 장마를 다 못 벗어난 빨래마냥 자주 처량하게 눅눅해지고는 합니다.  
321 붉은 접시꽃 / 이중우
김재순
1749 2015-08-11
붉은 접시꽃 / 이중우 스물다섯에 청상과부 되어 홀로 사신 풍곡댁 할매 처음 오신 그 길 따라 가시던 날 외딴집 대문간에 홀로 산 뻐꾸기 그리도 서글프게 울었지 항상 누구를 기다리시는지 둘방산 산 그림자 집에 들 때까지 마루만 걸레로 닦고 또 닦아 마음까지 들어오는 저녁 햇살이 마루만 반짝이게 빛나게 했지 풍곡댁 할매 처음 길 따라 가시고 난 후 홀로 살 던 뻐꾸기도 떠나가고 그 자리를 오고 가는 바람만 지키더니 핏빛같이 붉은 접시꽃 홀로 피었네 외딴집 대문간에 홀로 핀 핏빛 접시꽃 아무도 오는 이 없는지 알면서 바람 따라 밖만 쳐다보고 둘방산 산 그림자 오늘도 빈 집에 들어 먼지 앉은 마루를 닦아주고 있네 청상이 되어 평생 홀로 사신 할머니 마루를 닦고 또 닦으면 무엇을 기다리며 소망했을까 열녀문은 옛이야기에서나 들을 수 있었다지만 인습과 편견의 견고한 담장 안에서 평생 기다렸던 건 젊은 날 잠시 인연 맺었던 남편 같은 건 아닐 것이리라 뻐꾸기처럼 구슬프게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고 그 긴 세월 묻어 둔 뜨거운 가슴 그 한과 열정의 덩어리를 활짝 펼치는 날이 아니었을까, 붉은 접시꽃처럼. 이 시는 내 친구의 시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쓰면서 어느 문학단체에도 속하지 않고 시집도 엮지 않은 그, 문득, 그의 팔뚝을 몇 대 때리고 싶다.  
320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 정끝별
남태식
1827 2015-08-06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정끝별 정전과 암흑과 지진과 해일이 있었어 그 해 가을 후쿠시마 단풍은 유난히 아름다웠다지 타들어가기 직전이었을테니 발끝까지 뜨거웠을 거야 수천의 핵토파스칼로 쏘아올린 별별 위성이 밤하늘에 별을 대신하는 동안 고리가 월성을 낳고 월성이 영광을 낳고 영광이 맨홀과 씽크홀과 블랙홀을 낳고 천당 가까운 분당에는 산성구름이 떠 있고 낙진과 낙태가 베란다에 깊숙하고 강원도 농가에서는 암퇘지가 머리를 둘 달린 새끼를 낳았대 지구가 새고 해안이 터지고 물고기들이 뒤집히고 새떼들이 검은 물을 뒤집어쓰고 여의도가 인재를 낳고 인재가 재앙을 낳고 재앙이 유리창과 와장창과 만신창을 낳고 난 불치야 기형이야 천 길을 휩쓴 태풍의 사생아야 발을 뗀 무릎을 끌안고 돌연변이로 떠돌다 사라질 거야 벌건 숯불에 떨어진 정체불명의 고깃덩어리처럼 타들어갈 거야 떨어진 사과가 날아가고 있다 화살은 날아갔고 당겨졌던 시위는 아직 떨고 있다 *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 요한계시록 6:12 ***** '' 시는 실용이어서는 안 된다."는 어느 시인의 발언을 곰곰 되풀이하여 생각합니다. 실용의 사전적 설명은 실제로 쓰거나 쓰임, 또는 실생활의 쓸모라고 되어 있는데, 이 설명을 그대로 시인의 발언에 붙이면, '시는 실제로 쓰거나 쓰이거나 실생활의 쓸모가 되어서는 안된다.'가 되는군요. '실제로 쓰거나 쓰이거나 실생활의 쓸모가 되어서는 안되는 시'라는 것의 존재가 가능한지 어떤지도 알 수 없지만, 이 시인은 또 '절대순수'를 말하는군요. '실용이 아닌 절대순수의 시'. 시에서의 '순수'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애써 알려고 해보지 않은 제게 '절대순수'는 더 난감하기는 하지만, 이 발언이 순수의 대척점에 실용을 놓고 한 발언이라고 보고 이렇게 한 번 '순수, 절대순수의 시'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봅니다. '시는 실용이어서만은 안된다'.  
319 가을장마 / 강문출
남태식
1899 2015-07-19
가을장마 강문출 벚나무 매미들이 떼지어 운다 내가 가까이 가는데도 사람들이 가까이 가는데도 꿈쩍도 않고 운다 차바퀴 안쪽에 앉은 고양이들이 나를 빤히 본다 내가 가까이 가는데도 사람들이 가까이 가는데도 꿈쩍도 않고 물끄러미 본다 언제부터 저랬을까 무너지는 지붕에서 침몰하는 배에서 속수무책을 보았을까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저만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인간, 저만 빠져나가려고 바둥대는 인간, 인간 아닌 인간을 보았기 때문일까 입씨름이나 하는 사이 수상한 가을장마가 찾아와 매미들은 벌써 떠났고 고양이들도 젖지 않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해법을 찾지 못한 인간들만 속절없이 젖고 있다 ****** 제 때가 되어서야 피는 꽃인데 이상기온으로 너무 일찍 피었다가 또 일찍 진 꽃들 때문에 괜스레 늦게 핀다고 오해받는 꽃들 있습니다. 하지만 피는 꽃은 있어도 정녕 늦게 피는 꽃은 없습니다. 피어라, 꽃! 핀 꽃들은 언제 피든 모두 아름답습니다. (2014.04.08) 올해는 목련 재재거리는 노래 못 들었습니다. 일찍 핀 벚꽃 화사한 얼굴에 취해 불렀어도 미처 못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침 화단에 영산홍 붉게 피더군요. 벚꽃 일찍 피었다가 일찍 져 조금 섭섭했는데 영산홍 붉은 마음이 섭섭함을 날려주네요. 한동안은 이 영산홍 붉은 마음 잡고 살아야겠습니다. (2014.04.09) 봄꽃들이 몇일째 피기를 멈췄습니다. 피어있는 꽃들도 갑작스레 모두 색을 잃었습니다. 아직은 아닌데... 아직은 아닌데... 꽃들이 집니다. 자꾸 집니다. 미처 다 피지도 않은 꽃들이 어쩌나 어쩌나 자꾸 집니다. 딱! 몇일째 생각이 멈췄습니다. (2014.04.19) 색을 잃은 꽃들을 봅니다. 빛을 잃은 색들을 봅니다. 하여 빛도 색도 다 잃은 꽃들을 봅니다. 꽃들 색색깔로 아무리 흐드러지게 피어도 빛을 잃었으니 색은 더 이상 색이 아닙니다. 다 지나지 않은 이 봄에 불러야 할 꽃노래는 아직도 너무 많은데 빛을 잃은 색을 잃은 꽃들 앞에서 노래가 안 나옵니다. 기껏 나오는 노래는 그저 눈물입니다. 신음입니다. 이 봄에 천지간에 신음하는 꽃들만 널렸습니다. 천지간에 눈물만 넘쳤습니다. (2014.04.23) 3월에 매화꽃 피는 것 보고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4월의 꽃을 그리다가 딱 상상이 멈추어버렸습니다. 어찌 어찌 시어 하나 넣었다가 뺐다가, 바꾸었다가 뒤집었다가, 한 줄 채웠다가 비웠다가, 썼다가 지웠다가, 행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붙였다가 뗐다가, 쉼표를 찍었다가 마침표를 찍었다가, 이도저도 안되어 말줄임표를 찍을까 말까 하는 사이, 봄이 다 가고 여름도 꽤 깊이 든 7월 중순에야 10행의 짧은 시를 겨우 탈고를 하고, 철 지난 문예지를 읽는데 4월이 또 가슴을 치네요. '속수무책'과 '속절없이' 사이에서 하던 그 때 시작한 '입씨름'은 여전하고, 이제는 언제나의 수순처럼 '속수무책'과 '속절없이' 사이에 '폭력'이 들어서네요. 힘없는 자식 잃은 이들의 몸부림에 힘 있는 이들이 내세우는 법치를 앞세운 인권유린이 도가 넘어서는데 '속수무책' 당하면서 '속절없이' 한탄만 하고 있어야 하는지 가슴 또 답.답.해지네요. 펌프를 늙혀서 / 등이 저리다. // 삼월 // 길가 개조심 집 마당에 / 매화꽃이 / 폈다. // 난분분~~ // 아, // 4.16 // 하리야. (졸시 '삼월' 전문)  
318 비단공장 폐업 / 박승민
김재순
1604 2015-07-03
비단공장 폐업 / 박승민 하지를 넘긴 내성천 노을이 뒷산 솔숲으로 막 숨넘어가기 전 강물 위로 붉은 천연비단을 줄줄이 뽑아내고 있는데 놀란 쇠백로 부부가 입을 쩌억 벌리고 물비단 끝자락을 보 고 있는데 따라 가도 따라 가도 끝이 없는 사이 입에서 떨어져 나온 새끼 은어 한 마리가 재빠르게 비단 치마폭으로 숨는데 이런 장엄들이 가장 흔한 일상이지만 풍경은 돈이 아니어 서 곧 기천 억짜리 댐에 갇혀 명년 연말로 이 공장은 문을 닫 게 된다 출처:박승민의 시집: 지붕의 등뼈 그토록 아름다운 시냇가에서 우리들 유년의 한 때는 얼마나 즐거웠던가요 그 방둑 미루나무 아래서 청년 시절의 한 순간은 또 얼마나 황홀했던가요 뒷산에서 시작되는 맑은 물의 빨래터는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과도 같았지요 그러나 그토록 아름다운 것들은 돈이 안 돼서 허물고 또 돈이 되어서 사라졌습니다 가끔 생각합니다 우리 후손들의 가슴에 전선이 연결되는 날이 오면 그 책임은 우리가 져야한다고  
317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 이규리
남태식
3262 2015-06-28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이규리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 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 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 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꼭 그 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 아, 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 죄송해요 꼭 그 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 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인 것을요 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인데 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 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 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 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 잊을만하면 전화를 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잊을만하면 전화를 해서 울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울면서 하던 레퍼토리는 늘 같은 이야기. 지겨워서 전화를 끊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러다가 또 오래 전화가 없으면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화성 씨랜드 화재사고가 나던 그 해에는 전화를 받으면서 같이 울기도 했습니다. 내가 운 건 친구의 사연 때문도 친구의 울음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 때 우리 아이들의 나이가 딱 씨랜드 화재에서 숨진 아이들 또래였고 친구가 자기 딸이 보고 싶다고 해서였습니다. 잊을만하면 전화를 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잊을만하면 전화를 해서 울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늘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저녁 먹고 쉴 때 쯤. 늘 술에 조금 취한 목소리였습니다. '갈까' 그러면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디야' 하면 늘 집이라 했습니다. 집, 어머니의 집. 친구가 고향으로 내려왔을 때 살아계셨던 어머니는 그 해에 돌아가셨더랬습니다. 하니 친구의 고향집에는 친구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혼자 있는 집에서 혼자 밥을 먹으며 반주로 술 몇 잔 걸치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다가 전화를 한 것이었을까요. 아님 친구의 집 바로 아래 집 구멍가게 평상에 앉아 혼자 소주를 홀짝이다 전화를 한 걸까요. '갈까' 말만 꺼내놓고 오지말라는 친구의 말을 핑계 삼곤 한 번도 가지 않았으니 실상 친구가 어디에서 전화를 했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잊을만하면 전화를 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잊을만하면 전화를 해서 울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중학교 동창이었던 이 친구를 다시 만난 건 거의 이십여년만이었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났었고 그 동안 아무와도 연락이 없었습니다. 초등학교는 또 우리 동창들보다 한 해 선배여서 바닷가 작은 마을 앞뒷집에 살았던 친구들 몇몇만 어쩌다 소식을 듣는 정도였습니다. '어쩌다'라는 말 아시지요. 우연히, 오다가다, 어떤 의도도 없이. 이십여년만에 이 친구를 다시 만났을 때 이 친구는 몸도 마음도 모두 많이 망가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십여년만에 내가 다시 만난 이 친구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친구가 먼저 전화를 하고 찾아와서 만났더랬습니다. 몇 번 술도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자주 만날 수 없는 시간에 이 친구 잊을만하면 전화를 하곤 했습니다. 잊을만하면 전화를 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잊을만하면 전화를 해서 울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쩌다 한 동안 연락이 없기에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느 도시에 있는 병원이라면서 전화를 했습니다. '갈까' 했더니 곧 퇴원할 거라고 퇴원해서 보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연락이 끊겼습니다. 꽤 오랫동안 전화가 없었습니다. 잊을만하면 전화를 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잊을만하면 전화를 해서 울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때 식구들을 떠나 혼자 타지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나는 그 날도 직원들과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자정이 다 되어 자취방에 들어왔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친구의 전화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친구의 전화였습니다. 친구를 통한 친구의 전화. "그 친구 죽었단다. 소식 들은 여기 있는 우리들은 누군지 몰라서 그냥 있었는데 늦게서야 네가 안다는 생각이 났다." 누님인가 유일한 혈육이 살고 있던 도시의 병원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 도시에 살고 있던 친구들이 어찌어찌 중학교 동창의 부음을 듣고 부랴부랴 병원을 찾긴 했는데 아무도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이 없다더군요. 기억이 없는 죽은 동창 앞에서 그 친구들, 한 동네 뒷집에 살던 비행기 조종사를 하는 친구가 새벽에 도착할 때까지는 있겠다고 하더라는군요. 잊을만하면 전화를 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잊을만하면 전화를 해서 울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밤 택시와 기차를 번갈아 타고 도착한 그 도시의 화장장에서 나는 친구의 아내와 딸을 처음 보았습니다. 아내는 젊었고 딸은 어렸습니다. 식구들과 거의 떨어져 살다가 아이가 미처 말을 배우기도 전에 헤어졌다고 하니 아이는 아빠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영정을 들고 물끄러미 아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눈동자는 그저 맑았습니다. 아이는 아직 슬픔을 알기 전의 나이였습니다. 화장장에는 친구에 대한 기억이 없는 친구들은 다 가고 없고 새벽에 도착한 조종사 친구만 남아 쓸쓸히 공원묘지의 무덤들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잊을만하면 전화를 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잊을만하면 전화를 해서 울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친구, 내게는 이후 절대 잊을 수 없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어서 어쩌다 한 번씩 떠오르더니 이번엔 이규리 시인의 시에 실려 떠오르는군요. 잊을만하면 전화를 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잊을만하면 전화를 해서 울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 떠난지도 벌써 십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316 상상식당 / 박영기
남태식
1598 2015-06-17
상상식당 박영기 대구 예술발전소 앞 상상식당 조금 젊은 남녀가 삼겹살에 소주 반주로 점심을 먹고 있다 내가 따를게 첫 잔 따를 때 나는 이 꼴꼴거림이 좋아 세 잔씩 나눠 마시고 한 잔 남기고 더 젊은 여자가 하루에 내가 얼마짜린지 알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그 말 얼마짜리일까 당신에게 당신은 나에게 나는 *** '얼마짜리일까' '당신에게 당신은' '당신은 나에게' '나에게 나는' '나는 당신에게' 점심 먹으러 간 식당에서 음식 기다리다가 이 시를 읽고 밥 먹는 동안 내내 상상에 빠졌습니다. 얼마? 얼마? 얼마?  
315 농담 / 김중일
남태식
1824 2015-06-12
농담 김중일 전 지구상의 사람들이 동시에 울음을 터뜨린다면 바다위 수위는 얼마나 올라갈까 세상의 어느 낮은 섬부터 외진 모서리부터 차례로 잠길까 선잠 위로 차오르는 바다의 수위가 구름까지 닿으면 구름이 철썩철썩 파도처럼 부서질까 필요 이상으로 구름은 또 얼마나 많이 피어나 지구를 빈틈없이 모두 뒤덮고도 남아 우주로 새어 나갈까 난민촌 밥 짓는 연기처럼 모락모락 새어 나갈까 구름이 우주 밖으로 백기처럼 휘날릴까 구겨진 백지처럼 버려질까 전 지구상의 사람 누구든 펑펑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 방금도 일어난 잔혹하고 끔찍하며 슬픈 일이 우리 모두에게 단 한 번만 공평히 동시에 일어난다면 어떨까 그러면 그 누구에 의해서든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텐데 ***** '방금도 일어난 잔혹하고 끔찍하며 슬픈 일이 우리 모두에게 / 단 한 번만 공평히 동시에 일어'나지도 않겠지만, 혹 '일어난다면' 과연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 잠깐 해봤습니다.  
314 뻐꾸기 우는 날은 / 박기섭
남태식
1613 2015-06-07
뻐꾸기 우는 날은 박기섭 뻐꾸기 우는 날은 뻐꾸기 울음터에 여남은 개 스무 개씩 돌팔매를 날려본다 돌팔매 날아간 족족 앉는 족족 너 있다 아니면 또 한나절을 꽃밭 가에 나앉아서 봉숭아 채숭아를 송이송이 헤어본다 다홍빛 분홍빛 속에 그 꽃 속에 너 있다 뻐꾸기 우는 날은 뻐꾸기 울음 따라 십 리쯤 시오 리쯤 자드락길 걸어본다 하현달 사위는 서녘 그 서녘에 너 있다 *** 오래 전 만났던 풍경 속에 순간 빠져듭니다. 재고 자시고 할 새도 없습니다. 이제는 기억도 흐린 추억이 떠오릅니다. 그림이 선명합니다.  
313 허공은 가지를 / 이규리
남태식
2007 2015-05-24
허공은 가지를 이규리 종일 바람 부는 날, 밖을 보면 누가 떠나고 있는 것 같다 바람을 위해 허공은 가지를 빌려주었을까 그 바람, 밖에서 부는데 왜 늘 안이 흔들리는지 종일 바람을 보면 간간히 말 건너 말을 한다 밖으로 나와, 어서 나와 안이 더 위험한 곳이야 하염없이 때때로 덧없이 떠나보내는 일도 익숙한 그것이 바람만의 일일까 나무가 나무를 밀고 바람이 바람을 다 밀고 *** '밖으로 나와' '안이 더 위험한 곳이야' 지난 4월 이후로 꽃이나 바다나 배, 안이나 밖같은어떤 언어에 대한 상상력은 모두 한 곳에 묶인 듯 합니다. 미네르바에서 주관하는 질마재문학상 올해의 수상자인 이규리 시인의 대표시를 읽는데도 꽤 많은 문장에서 이를 느낍니다. 하필이면 시어들이 또 모두 그렇습니다. 아님 이규리 시인의 상상력도 그곳에 묶인 것이던지요.  
312 꽃벼랑 / 손택수
남태식
1605 2015-05-21
꽃벼랑 손택수 벼랑을 쥐고 꽃이 피네 실은 벼랑이 품을 내어준 거라네 저 위에서 오늘도 누가 밥을 짓고 있나 칭얼대는 어린 것을 업고 옥상 위에 깃발처럼 빨래를 내다 말리고 있나 구겨진 옷주름을 몇 번 더 구기면서, 착지 못한 나머지 발을 올려놓으려 틈을 노리는 출근버스 창밖 찡그리면서도 꽃은 피네 실은 찡그림마저도 피어나 꽃이라네 - 시집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2014. 창비. *** '어떤 이에게 사랑은 / 벼랑 끝에 핀 꽃이다. // 굳이 숨기지 않더라도 / 숨은 꽃이다.'(졸시 '숨은 꽃' 중에서) '벼랑을 쥐고' 피어나는 꽃은 잘 안 보입니다. 숨기지 않고 환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애써 숨은 듯 안 보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이 숨은 듯 잘 안 보이는 벼랑에 핀 꽃을, 꽃의 벼랑을 보는군요. 그것도 만원버스 안에서 발도 제대로 다 못 딛고 구겨져 가면서요. '찡그리면서도 꽃은 피네 / 실은 찡그림마저도 피어나 꽃이라네' 라고 읊은 문장을 두고 절창이라고 예전에 한 번 감상평을 했습니다.(목록 295번) 시의 모양새는 바뀌었어도 시인의 절절함은 바뀌지 않았군요.  
311 내곡동 블루스 / 김사인
남태식
2134 2015-05-17
내곡동 블루스 김사인 국정원은 내곡동에 있고 뭐랄 수도 없는 국정원은 내곡동에나 있고 모두 무서워만 하는 국정원은 알 사람이나 아는 내곡동에 박혀 있고 국정원은 내 친구 박정원과 이름이 같고 제자 전정원은 아직도 시집을 못 갔을 것 같고 최정원 김정원도 여럿이었고 성이 국씨가 아닌 줄은 알지만 그러나 정원이란 이름은 얼마나 품위 있고 서정적인가 정다울 정 집 원, 비원 곁에 있음직한 이름 나라 국은 또 얼마나 장중한 관형어인가 국정원은 내곡동에 있고 내곡동에는 비가 내리고 바바리 깃을 세운 <카사블랑카>의 주인공 사내가 지포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며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죄우를 빠르게 훑어볼 것 같은 국정원의 정문에는 <007 두번 산다>의 그런 인물들은 보이지 않고 다만 비가 내리고 어깨에 뽕을 넣은 깍둑머리 젊은 병사가 충성을 외칠 뿐이고 할 수만 있다면 저 우울하고 뻣뻣한 목과 어깨와 눈빛에 대고 그 또한 나쁘지 않다고 위로하고 싶은 것이고 자신도 자기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 모른다고 하니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는 성경 말씀과 같고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고 하니 좀 음산하지만 또 겸허하게도 느껴지고 아무튼 모른다 아무도 다만 비가 내릴 뿐 우울히 비가 내릴 뿐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그밖의 삼인칭 우수마발도 알 리 없고 원격 투시하는 천안통 빅브라더께서는? 그러나 그야 관심이나 있을까 내곡동의 비에 대해 내뿜는 담배연기에 대해 우수 어린 내곡동 바바리코트에 대해 신경질적인 가래침에 대해 하느님은 아실까 그러나 그걸 알 사람도 또한 국정원뿐 그러나 내곡동엔 다만 비가 내릴 뿐 ***** 김사인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를 덮으면서, 아홉살에 겪은 가난의 기억을 노래한 '비둘기호'에 대하여, 언젠가 시로도 쓴 내 대여섯살쯤의 기억에 대하여 쓰려고 했는데, 언젠가 추억팔이 영화에 모 문화평론가가 한마디 했다가 크게 논란이 된 '정신승리가 문득 떠올라 접고, 지금 현재의 노래, 잘 나가는 현재의 리듬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써놓고 보니 이것 또한 추억이 되어야 할 추억팔이 영화라는, 이런 추억팔이 영화를 지금껏 보고 사는 우리 모두가 정신승리라는, 이런 얄궂은 생각 또 문득 떠오르네요. 얄궂네요.  
310 목련 장수 / 안상학
김재순
1912 2015-05-04
목련 장수 / 안상학 이마 벗겨진 뻥튀기 장수가 리어카에 뻥튀기를 가득 싣 고 가다가 리어카도 장사도 팽개치고 목련나무 올려다보 며 폰카로 목련꽃 똥꼬를 열심히 찍으며 싱글벙글 뻥튀기 를 사러 왔던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뻥튀기는 제쳐두고 뻥 튀기 장수 폰카를 기웃거리며 싱글벙글 뻥튀기 장수 아랫 배는 점점 부푸는데 그 뒷전 지키던 리어카의 뻥튀기들은 목련나무 그림자에 누워 목련꽃 송이송이 째려보며 볼이 잔뜩 부어 있다. * 안상학의 시집: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생활의 전사들에게도 마약을 투여하거나 정신의 나사 하나를 뽑아버리는 꽃 산이나 들에 온통 꽃을 심는다면 크고 붉고 노란 온갖 빛깔의 꽃들을 심는다면 범죄나 전쟁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신없이 해롱거리는 사이 그것을 이용해서 더욱 강력하고 잔인하게 지배하는 무리는 또 있겠지요 꽃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오늘도 눈을 반쯤 감고 코도 반을 닫습니다.  
309 사월회상 / 양성우
남태식
1739 2015-04-30
사월회상 양성우 들어 보아라. 지금도 광화문 그 부근에 가서 한나절 귀기울여 들어 보아라. 시린 목덜미를 움추려가며, 다친 팔다리를 어루만지며, 여기저기 숨죽이며 들어 보아라. 온몸에 시뻘건 피투성이로 길바닥에 나뒹굴며 발을 구르며 죽어간 영혼들의 신음소리가 구천에 가득차서 번쩍이면서 성난 물결로 밀려오지 않느냐. 바람이어라. 진흙 위에 뜨겁게 일어나는 바람이어라. 끈끈한 설움 짓씹어가며 우수수 우수수 몰아쳐 오는 눈물이어라. 서울의 칼날 뿐인 하늘 아래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4월 그 아침, 남은 목숨으로 치달으면서 목이 터지도록 외치며 가던 햇살이어라. 총창 끝에 쓰러지며 난자당하며 우수수 우수수 몰아쳐 오는 바람이어라. 진흙 위에 뜨겁게 일어나는 바람이어라. 사방에서 피비린내만 나더라. 어디서나 총든 놈만 즐거워하고, 날마다 사람들은 밥이 되어서 안개처럼 흐르다가 사라져 가고, 사방에서 증오만 자라고 사방에서 피비린내만 나더라. 대낮에 흘린 피가 날아 올라서 칙칙한 밤하늘의 큰별이 되고, 대낮에 흘린 피가 스며들어서 먼지뿐인 이 땅의 큰 꽃이 되어 이글이글 타오르며 손짓하면서 찢어진 가슴팍을 긁어대면서 한밤에도 악몽속에 소리치며 운다. 들어보아라. 빼앗긴 사람들아. 한 세월 땅속에 눈물로 고여서 적막강산 바라보며 눈물로 고여서 지금도 광화문 그 부근에 살며 밤새워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 4월 영혼들의 신음소리를 한나절 귀기울여 들어보아라. 물묻은 휴지처럼 군화끝에 채이며 얼음 위에 떠도는 빼앗긴 사람들아. 들어보아라. 온몸에 시뻘건 피투성이로 소리치며 소리치며 오지 않느냐. 지금도 광화문 그 부근에 살며. *** 4월이 갑니다. 4월이 또 갑니다. 시인이 있어 꽃이 쉼없이 핀다는 4월에 미처 꽃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4월이, 또, 4월이 갑니다. 가는 4월에 오래된 4월의 노래를 찿아 읊는데, 40여년이나 지난 노래에서 전혀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난감합니다. 난감해서 어찌할 줄 몰라 허둥대는 사이에 난감한 4월이 또, 가는데, 노래마저 난감하니 참 난감합니다.  
308 우리들의 중세 / 박후기
남태식
1932 2015-04-05
우리들의 중세 박후기 맨 처음, 죽은 자의 무덤에 돌을 얹고자 했던 인간의 마음을 헤아린다 가슴에 무거운 돌을 얹었으니, 더 이상 죽음을 피해 달아나지 말라는 당부였을까? 가슴에 돌처럼 무거운 손을 얹으며, 교황은 아침 늦게 광장에 도착했다 교황이 머문 며칠 동안 해가 지지 않았다 어둠 또한 사라지지 않았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성의 여왕은 말문마저 닫은 채 연대기적 패륜의 완성에 몰두했다 소년 소녀들은 제물이 되어 바닷속으로 던져졌고, 그들은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딸을 잃고 말을 잃은 한 소녀의 아버지가 광장 구석에서 돌베개를 베고 미라가 되어갔다 여왕의 힘 센 정부는 소문대로 그녀의 임시정부였으므로, 무너지는 나라 안에서 검은 음모만 무성했다 산 채로, 인간을 매장하던 시절이 있었다 *** 아물지도, 제대로 이름을 얻지도 못한 상처들이 또 해를 넘어옵니다. 이름을 제대로 얻어야 상처를 아물릴 건데, 아물리기는커녕 상처에 패륜과 음모의 더 큰 온갖 상처를 덧대면서 해는 또 넘어옵니다. '산 채로, / 인간을 매장하던' 시절이 끝이 났다고, 나리라고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만, 그 시절이 멀지 않은 듯한데 어째 아마득합니다.  
307 개나리 처녀 / 송진권
김재순
2610 2015-03-04
개나리 처녀 개나리 처녀가 다듬잇돌로 두부를 눌러놓고 굳기를 기 다리는 동안 종달새가 울어 울어 이팔청춘 봄이 갑니다 개나리 처녀는 질질 신발 끌고 나와 굳은 두부가 네모지게 칼로 긋고 먹기 좋게 잘라 신김치 곁들여 소반에 담아 김치 고갱이 쌈 싸서 낭군님 드리고요 넙죽넙죽 미어지게 낭군님 은 잡수시고요 낭군님은 옷을 입고 나와 잿간에 소피를 보 시고는 괴나리봇짐 메고 감발하고 삽짝을 나섭니다 소쩍새 우는 봄밤을 낭군님은 가시고요 소쩍새 울음소리 울컥울컥 솟아나고요 낭군님은 그때 가서 영 오시질 않고요 노발대발 소문은 꼬리를 물고요 개나리 처녀는 폭삭가 늙어가서 치마 저고리 쪽진 머리로 영정사진 속에 들어앉으셔서 아들 손 주 절 받으시고요 느 아부지는 두부를 좋아하셨느니라 두릿 두릿한 눈으로 상에 두부가 있는가 없는가 살피시고요 죽은 시어미가 저승 시집살이까지 다 시킨다고 이집 며느리는 구시렁구시렁하고요 *출처- 송진권의 시집: 자라는 돌 3월입니다. 곧, 담장 안으로 밖으로 개나리꽃 만발할 것입니다 구순의 할머니도 흐드러진 꽃가지 꺾어 자신의 골방에 꽂을 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봄의 힘이 아닐까요 수십 번 흘러 보낸 봄, 봄날이 가서 얼굴에 주름 깊어 폭삭 늙었지만 다시 봄이 오면 마음도 다시 두근거려 꽃을 꺾어 들겠지요 나 늙어서도 그러하고 싶습니다.  
306 인지능력/나병서
작은
1798 2015-01-30
입체를 평면화 하시오, 허락된 시간은 10분. 뒤는 푸른색 앞은 봄에 피는 꽃이어야 함 아래는 흰색이어야하며 서있는 들풀들을 기록할 것 부족함.벽면을 입체화하시오,허락된 시간은 7분 담쟁이 넝쿨같은 것 내부의 창은 닫혀있음 늘어지는 것들은 고정시킬 것 기둥은 가로로 나란히 늘어서야 함 보완하시오, 허락된 시간은 4분 계단식 표면은 붉은 벽돌 기본적인 세트구성 시간의 여백은 임의로 활용할 것 마지막 1분을 활용하시오 질적 부족은 양적 완화로 보충하실 것  
305 거북손 / 김해자
남태식
2081 2015-01-08
거북손 김해자 제1의 아이가 땡볕에서 모래를 파고 있소 제2의 아이가 채석장에 팔려와 망치질하고 있소 (해가 뜨고 질 때까지 주먹밥 두 개 목장갑도 없소) 제3의 아이가 한쪽 다리로 지뢰밭을 헤치오 제4의 아이가 딱 붙어 푸르딩딩한 거북손으로 카펫을 짜고 있소 (해가 지고 달이 뜰 때까지 국밥 한 그릇 매듭이 끝나지 않소) 제5의 아이가 쓰레기더미 헤치며 벌레처럼 엎드려 있소 제6의 아이가 밤거리에서 짧은 치마를 걷어 올리오 제7의 아이가 축구공을 깁고 있소 (조각난 살가죽 12개의 오각형과 20개의 육각형 백번 넘게 바늘에 찔려야 공에 날개가 달린다오) 제8의 아이가 지하에서 석탄을 캐고 있소 제9의 아이가 갱도에서 기어 나오고 있소 제10의 아이가 굴 깊숙이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고 있소 제11의 아이가 달리기를 하오 무섭다 하오 모든 아이들이 달리기를 하오 오각 육각 테두리 안에서 달리기를 하오 이 세계엔 출구가 없소 살바도르, 살바도르, 지하엔 구세주도 없소 차라리 없는 게 낫소 *** 이 세계에 출구도 없고 구세주도 없는 게 낫다는 시인의 절망적인 목소리를 듣기 전 일찍 울어버려서인지 시인의 너무나 당연한 목소리에 오히려 담담합니다. 담담해서 어쩌자는 것인지 울었으니 이제 그만이라는 것인지 나도 내가 어이가 없어 한참동안 답답합니다.  
304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및 공무집행방해죄 / 김영주 [1]
남태식
2089 2014-12-19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및 공무집행방해죄 김영주 팔다 만 귤바구니가 구둣발에 동그라진다 솟구치는 서러움을 울컥 토해 냈다가 죄보다 죄목이 더 큰 그런 죄를 지었다 * 시를 읽다가 가슴에 울컥 올라오는 것이 있어 옮겼는데 옮기고 나니 감상평이라고 쓰는 내 글이 사족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멈추고 이렇게 옮기는 것으로 끝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