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어느 날의 일기

                                                                                       이 성 준



 


 

   늘, 2010년 5월 26일 수요일. 자애롭고 존경스러운 힐러리 클링턴 미국무장관님께서 서울에 오신답니다. 천안함 침몰이 북괴의 무력도발에 의해 자행된 행위임이 명백히 드러난 직후, 인정 많고 우방의 어려움을 결코 좌시하지 않는 자비의 나라 미국의 발빠른 행보에 감사드리기 위해, 자애로운 모습을 보기 위해, 위태로움을 함께 극복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시는 힐러리님을 열렬히 온 가슴으로 환영하기 위해 우리는 성남 서울공항 앞에 모였습니다. 태극기와 성조기 아니, 별이 52개나 빛나는 성조기와 마지막 별 하나인 듯 선명한 태극기를 손에손에 들고 우리는 새로운 별 New-Light로 빛나기 위해, 북괴의 만행을 더 이상 참고 볼 수가 없어서,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위대한 영도자 이명박 대통령 각하께서 즐거워하시겠죠. 6․2지방선거가 이제 딱 일주일 남은 이 시점에서 우리의 이런 모습을 대견해하시겠죠. 이런 우리의 노력이 지방선거에서 여당의 압승으로 이어지겠죠. 참, 세상 살기 쉽죠? 이런 걸 마당 쓸고 돈 줍는다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다고 한댔나요? 금수강산(禽獸江山), 우리나라는 말 그대로 아름다운 곳이고 참 살만한 곳 아닙니까? 그래서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힘이 넘치는 이명박 대통령 각하와 한나라를 만들기 위해, 돈 한 푼 받지 않고, 완전 지원봉사자로 이곳에 모였습니다. 이제 성조기를 단 비행기가 내리겠죠? 기다려집니다. 그런데, 세 시간 넘게 서 있었더니 다리가 아파서 조금 앉아 있어야 할까 봅니다. 참되고 든든한 우리의 정다운 친구, 경찰의 보호 아래 도로변에 신문지를 깔고, 아차 조중동밖에 없어서 신문지는 안 되겠고 집을 나서기 전에 깨끗이 다려놓은 손수건이라도 깔고 앉아 있어야겠습니다. 그래야 힐러리 장관님께서 지나가실 때 가까이서, 정확하게, 손을 흔들어, 한 사람이라도 더 왔음을 알릴 수 있을테니까요.

  상 있는 일이지만, 함께 존재하고 있음이 부끄러운 사람들이 많지만, 오늘 서울 공항 앞에 펼쳐진 힐러리 환영 인파를 보며 숨이 턱 막히고, 오금이 다 저리고, 눈꺼풀마저 파들거렸다. 그야말로 부끄러움의 극치였다. 서울공항 정문 바로 앞 오층 옥상에서 내려다본, 말쑥한 차림에 남들보다 흰 피부를 가진 그들은 분명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들이었다. 갈수록 무성해지는 녹음만큼이나, 봄비 뒤끝에 모처럼 깨끗하고 파란 하늘만큼이나 아름다운 한국인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한국인이 아닌 바나나맨만 같아, 닦지 못한 똥구멍을 남에게 보이는 것만 같아, 니코틴 진한 한숨만. 침침해지는 눈을 대신하듯 생생하게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 ‘동물의 왕국’ 내레이터의 비아냥거리는 듯하면서도 냉혹한 내레이션이 가슴을 파고든다.

  역사를 알 리 없는
  역사 앞에서 두려움을 모르는
  오로지 현재와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동물들은
  항상 힘 있는 편에 선다. 잠시
  한눈을 팔다가도
  기민한 동물적 촉각을 이용하여
  힘 있는 편을 재빠르게 감지하고
  잽싸게 이동한다.
  기민함이 곧 생존수단이기에
  그들은 바쁜 시간을 쪼개서 매일
  운동을 하고 운동을 통해 기민한 촉각의 날을 세워둔다.
  그래서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진화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멜레온
  잠시, 배경색에 몸을 숨기기도 하지만
  배경색보다도 화려한 빛깔을 뽐내며 날아올라
  세상을 덮는 불나방
  불을 좋아하는 그들은
  밝은 곳만을 찾아 이동하고
  불구덩이 속에서도
  화려한 부활을 꿈꾸는 존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