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자연과학자 박 아무개 교수에게  

 

생명을 창조하는 인간에게

신이 설 자리는 없다

 

다윈을 믿고 따르던 어느 발생학자의  

호기로운 말을 기억한다

 

둘이서 서로의 말을 주고받으며 논쟁하는 날은

 

존재는 겉껍질을 벗고 말랑한 속살로 탈각하였고

관념은 번데기를 벗고 화려한 날개로 우화하였다

 

수백 개의 새로운 하늘이 만들어지고

그만큼의 낡고 오래된 땅이 허물어졌다

 

우리는 경계를 벗어난

전지전능한 창조주-신이었고

 

인류가 피땀 흘려 쌓아올린

정교한 지성의 바벨탑을 경배하는 학자였다

 

따뜻한 감성의 피가 흐르는 이성의 차가운 판단을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는

 

행복한 순교자로 진리의 제단에

기꺼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학문은 영혼의 배고픔을 채우지 못하는가

 

나의 나를 복제하여 무한수열로 줄 세우고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삶을 꿈꾸던 그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죽는다는

자명한 자연의 이치를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나를 가두고 얽어매는 관념에 굴복하여

노예로 사느니

 

긴 창을 꼬나물고 앞으로 엎어져 죽을지라도

 

자유인으로 살리라

 

결기를 세우고 사는 나는  

   

진화론을 부정하고 창조론에 허리 꺽은  

그 자연과학자가 미워졌다

 



담판

- 손 아무개 교수에게

 

텅 빈 카페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다고

노래도 감미롭고 울기 좋다고

 

억지웃음으로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갈바람에 서걱대며 억새 부딪는 소리가 났다  

 

울지 마라, 말하지 못하고

우는 만큼 행복하여라, 궁색하게 위로하는 내게 그가 말한다  

 

불의한 현실에서 물러서면 비겁하잖아요

 

그는 지금 덧칠된 대학 역사의 민낯을 벗기고

늙어 구부러진 정의의 허리를 펴는 중이다

 

먼지 낀 검은 현실을 붓에 찍어

교룡의 얼굴에 까만 눈동자를 그리는 중이다

 

양심과 지성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면

머잖아 정의로운 사회가 오겠지요

 

불의한 현실에 온몸으로 맞서고 깨지면서도

그는 가치 있고 고귀한 걸음을 걷고

 

예수의 십자가를 등에 메고

힘겹게 골고다 언덕을 오르고 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진 사람에게는

신앙에 물든 순교자가 흘리는 진한 피 냄새가 난다

 

그렇다, 그는 강고한 현실의 제단에

기꺼이 자신의 몸을 희생물로 바칠 것이다

 

신은 그의 옆구리에 날카롭고 예리한 칼날을 꽂아 넣고는

외길 구석으로 세차게 몰아치겠지

 

약속은 약속

내게 한 약속을 지키라

 

 

너의 심장 가장 가까이에서

살덩이 일 파운드를 뭉텅 잘라 내게 바치라  

 

그는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신과 거룩한 담판을 벌이리라

 

좋습니다, 신이여!

 

오늘 나는 기꺼이 심장을 내놓을 것이니

정의로 포장된 칼과 저울을 준비하시오  

 

머리카락 한 올의 오차도 없이

분노로 살아 펄떡이는 내 심장 가장 가까이에서

 

살덩이 일 파운드를

한 방울의 피도 흐르지 않게 잘라 가시오

 

그는 지고 싶어도 이길 것이고

신은 이기고 싶어도 질 것이니

 

검은 법복으로 가린 포샤의 날선 비웃음이

할렐루야 신의 영광을 길이 찬송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