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커의 문법


              


당신하고 자러 갈 일은 없을 테니 천천히 마셔요. 천천히… 말하는 나를 의아한 듯 쳐다보는 눈길이 돌연 차갑군요. 괜찮아요. 이제 시작인걸요. 내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는 사이 당신은 앞에 놓인 잔을 홀짝 털어 넣듯 마시는군요.

스티로폼 접시에 담긴 무지개떡이 참 예쁘네요. 연두색 귀퉁이를 떼어내 우물우물 씹는 당신 표정이 소 같아요. 개업 떡을 많이 먹으면 새로 시작하는 일이 다 잘될 거라고, 카운터를 지키는 아저씨가 갑자기 끼어드는군요. 당신이 사레들린 듯 잔기침을 하더니 주방 쪽을 보며 소주 한 병을 외치는군요. 하긴 오늘처럼 꽃샘추위가 매운 날은 소주가 나을 거예요. 소처럼 순해진 얼굴 위로 경련이 이는 걸 보니 살짝 미안해지는데요. 내내 잘 견디다 결국 메일을 보내고 만 것, 전화를 걸고 만 것이요.

지난 금요일이었어요. 프린터기 앞에 서서 교열대장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문화면 대장이 먼저 밀려나왔어요. 나무의 방식. 새로 시집을 냈다는 그의 인터뷰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려 있더군요. 아, 제가 지금 ‘그’라고 했나요? 당신 앞에서, 당신을 ‘그’라고 하다니 우습군요. 근데 썩 그럴듯하지 않나요. 아무튼 그날 저는 나무처럼 풀잎처럼 존재하는 삶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인이라는 서평에 어울리는 그의 표정을 한참 들여다보았지요. 운명처럼, 그를, 예전의 당신을 바라보던 때가 있었다는, 붉고 슬픈 생각들이 내 앞에 슬며시 내려앉더군요. 그러나 그를 다시 만나는 건 차마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알아요,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싶을 거예요. 그러나 잠시만요. 잠시만 그냥 제 얘기를 들어주실래요? 한번쯤은 당신과 내가, 내가 알던 예전의 당신을, 그를 안주 삼아 술잔을 들 수도 있지 않겠어요. 아, 막상 말을 하려니 어렵군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기사가 실린 대장을 프린터기에 내려놓고 돌아서지 못한 것은, 아니오, 결혼을 앞두고 있고, 그래서 행복하다는 인터뷰 내용이 놀랍기는 했지요. 놀랍긴 했지만, 저를 돌려세운 건 기사 말미에 들어있던 시였어요. ‘나무의 방식’이라는 표제시요.


끌어안지 못하여 / 나무는 그저 바라봅니다 / 목숨처럼 꽃가루 날리며 / 전하는 이에게 교태를 부려야 하는 / 겨운 운명을 지녔습니다 / 마음으로 보듬은 사이로 / 바람이 붑니다 / 다가서지도 멀어지지도 않은 채 / 한 풍경을 이루며 / 나무는 늙어갑니다


포옹하지 못하는 나무의 사랑은 온천천변을 걸으면서 당신이, 아니 그가 내게 들려주었던 밀어였죠. 강대나무가 무리를 이루고 서있는 곳에서요.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더 멀어지지 않은 채,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거리에서 다시 돌아선 것, 당신을 찾아온 것, 그런 이유에서죠.

놀라지 않으시네요. 그래요, 지금 나를 바라보는, 차분하고 무심한 그 눈길이오. 나를 사로잡았던 눈길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죠. 조심하노라 했는데 아차 하는 순간 종이컵을 놓치고 말았던 그때……. 커피가 쏟아진 탁자에서 다리를 뒤로 물린 그가 나를 천천히 돌아봤지요. 내가 아차 했던 건 종이컵을 놓친 순간이 아니라 초빙강사로 온 기자에게 인사말을 건네던 순간이었죠. 누가 귀를 잡고 당긴 듯 그의 얼굴이 한쪽으로 심하게 쏠리면서 움찔거리던 순간, 그러니까 그와 내가 눈길이 마주쳤던 그 순간. 괜찮아요? 그가 물었고, 괜찮으세요? 내가 동시에 물었죠. 묻는 내 입술이 조금 전 그의 얼굴을 지나간 경련에 전염된 것처럼 불불불 떨렸구요. 웃음이 나왔어요. 내가 웃는 걸 본 그가 따라 웃더군요. 눈과 입이 한쪽으로 쏠린 얼굴로 비죽이 웃는 그를 보는데 눈물이 핑 돌더군요. 모르겠어요. 푸르르 웃다가 왜 갑자기 울컥 뜨거운 응어리가 치밀었는지.

병원에서는 혈행장애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산소부족 때문이겠죠. 모든 병이 다 그럴 거지만요. 정말로 그렇게 믿어서 하는 말인지, 소장이 잡아끈 뒤풀이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증상을 산소부족 탓이라 설명했어요. 그래서 제 소원이 산소 같은 여자랍니다. 그의 농담에 장애인 문화유적탐방 프로그램에 그를 강사로 넣었던 소장이 호탕하게 웃었고, 따라 웃던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보더군요.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오른쪽 뺨이 실룩거리면서 부드러운 미소가 입가에 얹혔지요.

그 이튿날 소장님을 설득해 문화신문 한 부를 신청했어요. 신문을 받으면 먼저 그가 쓴 기사가 있는지 찾아보았죠. 그리곤 신문홈피로 들어가서 그가 쓴 유적순례 기획기사를 다시 찾아 읽었고요. 지름 약 14m에 너비 약 2m 안팎, 깊이가 최고 2m 내외로 밝혀진 토층이 확인됐다는 낯선 문장에 밑줄을 긋고, 우물과 기둥 구멍 흔적이 드러났다는 문장을 눈으로 꾹꾹 누르며 읽곤 했어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원형우물의 흔적 위로 그를 떠올리면 잊고 있던 오래전 내 몸속의 떨림이 뱃속을 짜르르 지나갔지요.

신문을 빠짐없이 들여다보기도 했지만 아마 그런 걸 운명의 계시라고 하겠죠. 계약직 교열기자 모집. 문화신문에 입사원서를 보내놓고 시험일 새벽까지 외래어사전을 통째로 외웠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간 출판사에 다녔던 이력도 도움이 됐을 거예요. 출근하고 며칠은 분위기도 낯설고, 행여 오타를 잡아내지 못하면 어쩌나 긴장이 돼서 옆에 누가 오고가는지 신경 쓸 틈도 없었어요. 사흘째 되던 날 출입구를 들어오는 그를 보았죠.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서 잠시 나를 바라보던 그가 웃더군요. 커피를 쏟고 눈이 마주쳤을 때처럼 웃으려는데 딸꾹질이 나왔어요. 한 해 사이에 머리가 희끗희끗 센 채 후줄근한 카디건 차림으로 서있는 그가 문득 허깨비나무처럼 보였지요.

우린 자주 함께 걸었어요. 회사근처 온천천변은 우리가 특히 좋아했던 산책코스였죠. 평소 등을 꼿꼿이 세우고 마음속으로 박자를 세며 규칙적으로 걸음을 내디딜 때면 무릎과 고관절 쪽으로 저릿한 통증이 일었는데, 그와 함께 걸을 때는 달랐어요. 나직나직 들려주는 그의 말이 하나의 이미지가 되고 따뜻한 기운이 되고 내가 걷는 리듬이 되었죠. 그는 종종 멈추어 서서 담배를 꺼내 물었고 반 박자쯤 어긋나는 걸음으로 따라가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곤 했어요. 그를 향해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면 온몸이 노곤하게 풀어지는 느낌이었죠.

온천천변을 걸으며 그는 지난 한 해 자신에게 일어난 불운을 털어놓았어요. 노후에 살 전원 주택지를 마련해두자는 친구의 말에 무리를 해서 사들인 임야가 이중계약 사기를 당했고 그 일로 크게 빚을 지게 됐다고요. 공동매입을 했던 친구의 대출보증까지 서는 바람에 다달이 갚아야 할 돈이 월급여의 절반이 넘고, 그 와중에 사사건건 부딪치던 아내와도 갈라섰노라고. 

온천천변 산책 말고 그가 좋아했던 건 막걸리를 마시는 술자리였죠. 아참, 여기 혹시 막걸리도 파는지 물어볼까요? 소주는 별로 안 좋아했잖아요? 하긴 섞어 마시면 뒤끝이 안 좋죠. 술꾼은요, 이런 몸으로 술꾼 흉내나 낼 수 있나요. 그를 따라다니며 막걸리 맛을 배우긴 했죠. 그를 따라 제일 많이 간 데가 서부시장 안쪽에 있던 막걸리 집일 거예요. 거기서 대학시절부터 시 공부를 같이 했다는 그의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죠. 친구들하고 있을 때면 그는 말을 하기보다는 듣는 쪽이었어요.

막걸리 집에서 나오면 전철역 쪽으로 걸어가 새벽까지 영업을 하는 카페를 찾아들었어요. 카페에 앉을 때면 이상하게 우린 늘 마주앉았지요. 옆으로 나란히 앉게 되지가 않았죠. 옆자리에 내려놓은 그의 묵직한 가방 때문이었을 거예요. 하긴 그보다 더 이상했던 건, 이상했다기보다 서운했던 건 내 이야기를 전혀 묻지 않았던 거죠. 내가 왜 멀쩡하게 잘 다니다가도 한 번씩 다리를 몹시 저는지, 어깨에 메고 다니던 가방을 들어 올리지 못해 어정쩡하게 들고 서있는지, 까끌까끌한 피부가 가려워 몸을 비트는지, 약을 거른 다음날이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코미디언처럼 인상을 쓰며 간신히 웃는지.

생각난 김에 약을 먹어야겠군요. 오늘처럼 저녁 대신 술을 먹는 날은 약 먹을 타이밍을 놓치기가 쉽죠. 요즘은 눈이 문제예요. 기자들도 교열부에 있어보지 않으면 잘 몰라요. 장편소설 한 권 읽는 것보다 하루저녁 교정지 열댓 장 보는 게 눈이 더 피곤하다는 거. 오늘 낮에도 출근하는 길에 안과를 들렀는데 당장 일을 그만두셔야겠다, 거의 협박을 하더라고요. 근데 머 일을 관둘 순 없죠. 병원비며 아파트관리비며……. 옆에 앉은 선배 말이 교열부에서 몇 년 근무하다보면 안구건조증은 기본옵션으로 따라붙는 거라니까 그런가보다 하죠. 물론 괴롭죠. 간지대장을 보고 좀 쉬었다 저녁 6시30분께부터 교정지를 보기 시작하는데 본판대장 나올 때쯤이면 활자가 제멋대로 튀어 오르는걸요. 그럴 때는 눈을 감고 먼 곳 어딘가를 보곤 해요. 먼 천장, 먼 나무, 먼 산, 먼 섬, 그리운 먼 그를 생각하면 눈이 시려오고 마침내 눈물이 고이고 촉촉해지는 걸 느낄 수 있거든요.

자료를 찾으러 간 조사실에서 그가 긴 파마머리의 여직원 곁에 비스듬히 서있는 포즈를 볼 때도 눈이 시려오곤 했어요. 유적지에 관련된 화보며 발굴사진을 부탁하는 그의 목소리는 어눌하고 나직하고 부드러웠죠. 여자 가까이 고개를 기울이고 선하게 웃는 모습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그만한 질투쯤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갈 수 있었어요. 어차피 견뎌내야 할 일인걸요. 사실 저는 견딘다는 말을 무척 좋아해요. 그 말 속에 들어앉은 외로움 때문에요. 외로움에는 스스로를 결연케 하는 무엇인가가 있잖아요. 그래서 견딘다는 것에는, 견딘다는 말을 관통하는 단단한 뼈 같은 것이 느껴져요.

근골무력증 진단을 받은 뒤 나는 눈 감고 귀 막은 채 서른 나이들을 건둥건둥 건너왔어요. 옷을 벗고 돌아서서 거울을 보면 곱사등이처럼 휜 척추는 내가 봐도 징그러웠죠. 몸이 굳지 않도록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시시로 찾아오는 통증과 일주일씩 열흘씩 계속되는 불면을 견디면서 나는 좀 달랐어요. 다른 환자들처럼 우울증에 걸리지도 않았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어요. 몇 년간 차도를 보이는 것 같지 않더니, 어느 날부터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병원에서 알게 된 인연으로 장애인인권센터 간사 일을 맡게 되었죠. 소장님이 퍽 인간적이었어요. 시민단체라는 게 결국 사람 장산데 제가 센터에 오는 사람들과 쉬 어울리지 못해도 그러려니 넘어가주기도 했고요.

신문사에 들어온 뒤 그를 만나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술을 마시고 그가 쓴 시를 읽으면서 내내 그를 바라만 보았던 것도 그래서였죠. 그저 바라보는 거리에서 멈추는 것, 포기하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았어요. 국밥을 파는 막걸리 집에서 느릿느릿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카페 유리창 가 맞은편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 앉은 그를 보면서 생각했어요. 그에게로 가는 길이 천리만큼 멀어져도 견딜 수 있을 거라고.

그 일이 있었던 건 작년 3월이었어요. 가만가만 내리는 봄비에 마음이 젖어들던 수요일 밤이었지요.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는데 그가 불렀어요. 우산이 없느냐고, 오늘은 마침 차를 가져왔으니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회사에 차를 가지고 오는 적이 거의 없었는데 그날은 아마 어디 지방취재를 다녀왔던가 봐요. 제 아파트주차장에 차를 대고 그가 잠시만 앉아있자고 했을 때 제가 그랬어요. 같이 올라가자고요. 그의 얼굴이 한쪽으로 당겨지면서 경련이 일었고, 나는 웃는 주름이 잡히는 얼굴이, 그의 모습이 좋았어요. 뱃속이 따뜻해지더군요. 내 안에서 오래된 무언가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어요.

그때 생각을 하니 지금도 여기 아랫배가 아프네요. 상상력이 뛰어난 게 아니라 실제로 아픈걸요. 한동안은 엄청 고통스럽기까지 했죠. 그게 이상하긴 해요. 지독하게 아프던 게 차차 덜해지는데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결정적으로 뭔가를 잃어버린 듯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이요. 그게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데, 지금의 당신 표정 같았겠죠, 아마.

방안에서 둘이 멀뚱하게 앉아있자니 어색하더군요. 마실 걸 가져오겠다며 일어섰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와인이라도 사둘걸 그랬다고, 서둘러 커피를 끓이고 귤과 사과를 챙겨 들어가자 그가 등을 보인 채 비스듬히 누워있더군요. 탁상시계를 보니 10시를 넘어가고 있었죠. 그는 비스듬히 누운 채 건네주는 사과를 먹으며 주절주절 말을 이어갔어요. 온천천변을 걸으면서,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서 들려주던 이야기를 다시 들으며 나는 그를 마주보고 싶었는데 돌아누우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어요.

오래된 비석을 찾아가는 일이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자식놈만큼 좋다고 잠긴 목소리를 내던 그가 문득 몸을 돌려 눕더니 나를 잡아끌었어요. 여기서부터는 말하기가 참 쑥스러운데, 이왕 시작한 거니까 계속할게요. 퇴행성류머티즘과 합병증으로 무력해진, 엉성한 몸을 드러내면서 나는 그의 표정을 돌아보지 못했어요. 한숨 소리 같은 게 났던 것도 같고, 도무지 민망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지요. 그가 엉거주춤 앉은 나를 눕히고는 묵묵히 내려다봤어요. 그의 표정이 어딘지 화난 사람처럼 사나워 보여 나는 눈을 딴 데로 돌려버렸어요. 그가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바로 내 몸속으로 들어왔어요.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죠. 병색이 있고 혼자 사는 여자라 해도 설마 이 나이에 성관계를 한 적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겠죠. 그의 이름을 부르며 힘껏 밀어냈는데 그는 내 양팔을 방바닥에 누른 채 막무가내였죠. 아팠어요.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아팠는데 더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어요. 속절없이 바라보기만 했던 그가, 그의 성기가 내 몸속에 들어와 있다는 감격에 엉치뼈가 어긋나는 것 같았어도 이를 악물고 참았어요. 그렇게 짓누르는 통증과 함께 비로소 그와 한몸이 되는 거라고, 그가 토해내는 숨소리에만 매달렸어요. 그게 얼마나 미련한 짓이었는지 나중에 병원치료를 받으러 다니면서 알게 됐지만요.

거칠게 움직이던 그가 움찔 하더니 몸을 옆으로 굴려 방바닥에 누웠어요. 나는 그대로 누워 얼얼해진 아랫도리의 감각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몸을 일으켰죠. 그의 이름을 불렀어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있는 그의 곁에 앉아 대답을 기다렸어요. 숨을 고르느라 오르내리는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서요. 그는 곧 잠이 들었죠. 낮게 코를 골면서요.

작년 이맘때 일인데 말을 하고보니 그때처럼 몸이 옥죄는 거 같네요. 아, 한 병 더 시키시려고요? 주인아저씨가 힐끔 쳐다보는 게 우릴 걱정하는 눈치 같아요. 그래봐야 겨우 세 병짼걸. 당신은 영 기분이 가라앉는 눈치군요. 잠시 이쪽으로 와서 바깥골목을 한번 내다봐요. 마치 영화세트장 같지 않나요? 여닫이 유리문이며 파르스름한 빛이 흘러내리는 저 가로등이며……. 당신하고 나하고 이렇게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영화세트 속 장면 같겠지요.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는 모든 게 영화처럼, 아니 악몽처럼 흘러갔지요. 다음날 아침 샤워를 하고 나온 그가 젖은 수건을 이불위로 던져놓고 허둥지둥 옷을 입더니 현관문을 나섰어요. 쫓기는 사람처럼 그가 몹시 서두르는 바람에 나도 허둥거려지더군요. 아침을 차려주겠다는 말을 꺼내지도 못할 만큼요. 복도를 지나는 동안 그는 내 쪽으로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지요. 엘리베이터에 탄 그를 보며 정박아처럼 웃었을 때도 그는 웃지 않았어요. 그때 이후 지금까지 그는 나를 보며 웃은 적이 없었지요.

그날 나는 삼판 당직이어서 다른 날보다 늦게 출근했어요. 그는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있더군요. 교정지를 읽다 한 번씩 그를 돌아보았고, 그때마다 아랫배를 칼로 긁는 듯한 통증이 지나갔어요. 저녁 내내 이마랑 코에 굵은 땀방울이 맺히는데, 그는 교열부 옆으로 지나가면서도 내가 보내는 눈길을 모른 척했어요. 그도 나처럼 컨디션이 몹시 좋지 않은가 보다, 불안하고 서운한 맘을 달랬죠. 그런데 퇴근시간이 다돼갈 때였어요. 흡연장소로 사용되던 복사실에서 나오던 그가 나하고 맞닥뜨렸죠. 회사에서는 가급적 서로 말을 건네지 않고 지냈지만 그때는 내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뗐어요. 입을 떼려고 했지요. 그가 몸을 홱 돌리더니 복사실 안으로 도로 들어가 버리더군요. 황당했죠. 그때 우리 두 사람 말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는 전화조차 받지 않았어요.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길게 신호를 보내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어요. 그는 내 눈길을 피했고 내가 있는 자리를 피해 다녔어요. 그게 이해가 되나요? 당신은? 하긴 당신 역시 설명하기가 힘들 거라 생각해요. 나는 그의 이상행동을 나 자신에게 설명해야 했어요. 한번 이혼을 했으니 여자를 대하는 게 힘들겠지, 남모를 상처가 있겠지. 나를 피하는 그를 볼 때마다 주문을 외우듯 반복했던 말이었죠.

알아요, 지금 당신 기분이 어떨 거라는 것, 당신 입장에서는 왜 내가 이 자리에 앉아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 이게 웬 뒷북인지 어이없고 불쾌하기도 할 거예요. 그러나 부탁인데 잠시만 더 앉아계세요. 저는 꼬박 한 달을 그렇게 보냈어요. 전화조차 받지 않는 그를 보며 속을 끓이다 메일을 보냈죠. 내게 왜 이러는지, 귀찮게 매달릴까 겁이 나는 거라면 부담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내가 불편하거나 기분 나쁘게 한 게 있다면 솔직히 말해달라고. 그는 답장을 하지 않았어요. 구구절절 변명하는 게 귀찮았다면 단한번의 표정, 단한번의 눈짓만 보내왔어도 됐을 텐데……. 그리고 알다시피 그는 여름 끝 무렵 회사를 나갔구요. 이거, 당신 가방에서 나는 소리 같은데요. 벨소리, 다운받으셨나 봐요. 요즘 뜨는 드라마 오에스티죠. 음, 잠시만요.

화장실이 깨끗하네요. 개업이라 구석구석 신경을 썼나본데 손님이 이렇게 없으니 내가 괜히 미안해지는데요. 안주를 조금 더 시켜야 하나 어쩌나. 메일이요? 이제 봤나 보군요. 아까 회사에서 나오기 전에 그 여자에게 메일을 보냈거든요.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험악해 보여요. 어쨌든 블로그에 올려 사람들이 다 보게 하는 것보다 낫지 않나요?

구조조정 명단이 돌고 이튿날 등산백과 쇼핑백 가득 짐을 챙겨 나가는 그를 지켜보는데, 내가 앉은 쪽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울적하더군요. 브랜드시인이 아닌 다음에야 전업시인으로 살기 힘든 세상이니까요. 명예퇴직이니 어쩌니 해도 결국 고과점수에서 밀려 회사를 나가게 된 그를 위로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의 블로그를 찾아들어갔던 거고요. 비어두다시피 했던 블로그에 예상대로 글이 올라와 있더군요. 지면을 뺏겼어도 기자본능이 어디 가겠어요. 퇴직한 뒤의 일상사가 차곡차곡 올라오는 블로그를 하루도 빠짐없이 방문했어요. 그런데 막상 방명록을 열고나면 입이 떨어지질 않는 거예요. 원망을 해야 할지 위로를 해야 할지 헷갈렸던 거죠.

몇 달을 아무 말 없이 들여다보다 온천천 겨울풍경을 방명록에 올렸어요. 강대나무를 찍은 사진이었죠. 그가 떠난 뒤에도 나는 온천천변을 자주 걸었고, 강대나무를 보면 어떤 견딜 수 없는 심정이었거든요. 내게서 돌아섰지만 아직 내 마음이 이러니 그가 나를 모른 척하건 말건 상관없다고 사진 밑에 덧붙이기까지 했어요. 상관없노라 해놓고도 매일, 하루에 열 번도 넘게 그의 블로그를 들락거리며 방명록을 확인했어요. 일주일째던가, 답글이 달리지 않고 있던 내 방문글이 삭제됐지요. 그가 일본에 갔다 왔노라며 후기를 올려놓은 날이었죠. 기가 막혀 조금 웃기까지 했어요. 그는 나를 삭제하고 싶었던 걸까요. 일본여행 중 찍은 사진에서 그의 어깨에 착 붙어선 여자가 긴 파마머리의 조사실 여자라는 사실보다 무심하게 눌렀을 삭제키가 가슴을 세게 쳐왔어요.

그땐 눈에 뵈는 게 없더군요. 다시 글을 올렸어요. 거두절미하고 물었죠. 나한테 왜 그랬느냐고. 그래도 한때 나를 좋아하지 않았느냐고. 엉겁결에 잠자리 한번 같이 한 게 이렇게까지 나를 피할 이유가 되는지, 뼈마디마디가 휘어진 몸뚱어리가 그토록 끔찍했는지 정말 알고 싶다고. 당신이란 인간의 진짜 이유가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라고. 비밀글이 아닌 공개글로 버젓이 올려놓았으니 모르긴 해도 블로그 자체를 삭제하고 싶었겠죠. 그러나 자기이름으로 낸 시집을 소개하면서 꽤 많은 독자가 찾아드는 블로그를 포기하는 게 어디 쉽겠어요. 들어가 보니 내 글은 삭제돼 있고, 글쓰기를 금지해 놨더군요. 접근하면 발포하겠다는 경고팻말 앞에 서있는 기분이었죠. 솔직히 닉을 바꿔가면서까지 글을 올려 그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어요. 욱하는 마음에 까발리듯 따지기는 했어도, 그는 내게 가장 가까이 왔던 사람이고, 내 고통을 함께했던 단 한 사람인걸요.

인터뷰기사를 본 날, 다시 그의 블로그를 찾았죠.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그 여자, 알고 보니 그의 블로그를 대신 관리하고 있더군요. 귀여운 폰트며 요즘 뜨는 드라마 촬영지로 꾸며놓은 배경화면이 딱 서른 중반의 여자취향이던걸요. 그 여자 닉을 클릭해 메일주소를 알아냈어요. 그가 성욕을 풀고 간 지 사흘째 되던 날부터 출혈이 시작됐다, 첨부한 건 핏줄이 터진 채 부어오른 질 천장과 자궁경부를 찍은 사진이다, 몇 달째 출혈이 멈추지 않았고 스트레스성 출혈이라 소견을 밝힌 의사의 진료기록과 처방전을 스킨해서 보낸다. 그 여자, 메일을 열어보고 꽤 놀란 모양이네요. 병원을 찾아가서 겨우 얻어낸 사진이랑 진료기록을 오늘 그 여자에게 보내고, 그러고 나서 당신한테 전화를 한 거거든요.

스토커요? 정신병자 같은 집착이라고요?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굳세게 믿는 척하고 내 사랑을 증명하겠노라 애쓰는 것이, 내 시간 내 정열 내 사랑을 바치는 게 다 집착일 뿐이라고요? 내가 그를 실제로는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랑의 절망을 감추려는 꾸며낸 집착일 뿐이라는 건가요? 하, 어쩌면요. 좀 이상한 논리이긴 하지만, 당신 말대로 제가 어차피 스토커라면 내가 내 사랑을 포기해야 할 이유는 더욱이 없는 거겠지요. 당신을 통해 그를, 내 사랑의 끝을 따라가야겠지요. 아무리 그래봐야 죽은 나무에 꽃이 피겠느냐고 빈정거리는 당신의 말투도, 노려보는 눈길도 다시 냉랭하네요. 제 말이 아직 이해가 안 되는가 봅니다. 당신이 내 마음속에서 강대나무로 서있는 거라는 것. 그 사람에게로 가는 말라죽은 나무의 방식이라는 것.

답답해하지 말아요,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죠. 그는 지금 당신 뒤에 숨어 나를 지겹고 역겨운 스토커로 몰고 있지만, 내가 그를 놓을 수 없음은 당신의 존재 깊은 곳에서 그 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나를 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기형의 외로운 몸으로 그를 껴안았던 내 사랑이 나날이 순정해지듯 그 또한 나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거라면, 당신이 내게 일러준 게 그것이 아니던가요. 사랑하는 대상보다 사랑을 전하는 메신저에게 교태를 부려야 하는 나무의 방식이오. 처음 정해진 거리 그대로 세상의 풍경을 이루며 늙어가는 나무의 방식 말이지요.

네? 눌러주다니요? 갑자기 그게 무슨……? 아,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당신답지 않아요. 당신을 통해 당신 뒤에 숨은 그를 사랑한다느니 에두를 것 없이 그렇게 소원이라면 다시 한번 눌러주겠다는 식의 천박한 말투라니요. 취하신 거 같으니 넘어가 드릴게요. 아뇨, 제 손은 놓고 앉아보세요. 아까도 말했지만, 당신하고 잠은 자지 않을 거니까. 당연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게 두려워서죠.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 말이에요. 야윈 가슴과 마디마디 부어오른 등뼈와 살점 없는 엉덩이에 욕정을 쏟고 나면 누구랄 것 없이 기분이 좋지 않을 텐데 말이지요. 견딜 수 없는 사랑보다도,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게 여자로서 두렵고 치명적인 것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전화, 또 그 여잔가요? 받아보세요. 그래요 그럼, 짧게 할게요. 간사직을 집어던지고 나온 장애인센터까지 끌어들여 당신을 초청시인으로 모셔 달라 부탁하고, 그걸 빙자해 당신을 만나려한 것……. 그가 회사를 나가고 난 뒤 나 혼자서도 종종 온천천변을 걷는다는 말은 했지요. 때로는 집까지 한 시간이 넘는 길을 걸어서 퇴근하기도 했는데, 강대나무가 늘어선 둔치를 지날 때면 늘 그가 생각났어요. 그것도 봄비 내리던 3월 방바닥에 누운 나를 묵묵히 내려다보던 사납고 무심한 표정의 그가 떠올랐어요. 어김없이 아랫배에 냉기가 스치는 게 느껴졌고요. 서늘한 사막처럼 뱃속이 비워져 가는 그 느낌에는 묘하지만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뭔가가 있었어요. 아마 내 몸에 일어난 변화 때문일 거예요. 그와 관계를 한 뒤 몇 달간 지속되던 출혈이 멈추면서 생리도 같이 끊겼지요. 치료를 해준 의사 말로는 스트레스로 인한 출혈성 질환이 폐경을 앞당긴 듯하다더군요. 그게 아니라면 관절치료를 위해 장기간 복용해온 스테로이드제가 조기폐경의 원인일 수도 있다고요.

이제 마흔둘,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던 인생이지만 어찌 보면 흔하디흔한 삶이었어요. 딴엔 눈앞에서 놓쳤던 많은 것들을 아쉬워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았지요. 내 몸에 깃든 병과의 오랜 싸움 끝에 드디어 생을 달관해서가 아니라 독한 약에 절어 남들보다 빠르게 늙는 몸에 맞춰 마음이 낡아버렸기 때문일 거예요. 이젠 애를 써도 꼿꼿할 수가 없어요. 오랜만에 찾아뵀는데 센터 소장님도 제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매년 장애인 시화전 행사에 초청되는 시인이 따로 있다는 걸 알면서 굳이 당신을 추천하는 의도가 뭐냐고요. 나에 대해 무슨 말을 전해 들었는지, 내가 내 마음을 어찌하지 못해 강간에 가까운 상황을 상상한 거라고, 치료를 받아보는 게 어떻겠느냐고요.

당신, 내게 그랬듯, 그날 나와 있었던 일을 소장님한테 감추고 싶어한 거 이해해요. 사랑이란 게 원래 감추는 거니까요. 나 또한 오늘 당신을 찾아온 것, 우리 두 사람 감쪽같이 숨어들 서늘한 사막 같은 공간을 품고 있노라 알려주고 싶어서인걸요. 설사 당신이 이미 내가 내민 강사초청장을 던진 채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해도요. 그 전에 당신이 밥이라도 먹자며 끄는 내 손길을 마다한 채 택시를 잡아타고서 진작 가버렸고, 나 혼자 여기 들어와 빈 소주병을 늘려가며 넋두리를 하는 거라 할지라도요. 어쩌면 당신을 만난 적조차 없이 늘어놓는 이 장황한 고백 앞에서 여전히 침묵하는 그를 만나 토란액처럼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나 혼자 젖어든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그리운 몸으로 촉촉이 스며들고 싶었던 것뿐이라는 것, 아실 테니까요, 당신.

 

안지숙  annum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