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말에 구멍이 났다 

지렁이가 땅속에 살듯 

늘 밑에서만 살았다.

옥죄는 가죽이나 질긴 고무

고얀 화학재질의 깁 속에 갇혀 

영어囹圄의 세월을 보냈다.

잘못 내닫은 발길의 끝 

닭똥냄새는 안개처럼 자욱하고 

벗겨져 내동댕이처졌다.

꽈배기처럼 뒤틀려

시원한 날 몇 날이나 있었던가 

낮은 대로 임하라는 그 분의 말씀을 

한 시도 잊은 적이 없는데

눌리고 짓밟히면서도 

보자기로 감싸듯 지켜왔는데 

양말에 구멍이 났다. 

이제야 맨살이 보였다.

동그랗게 하늘이 보였다.     


    길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비는 오래된 사랑을 불러온다.


푸른 잎들 사이로 분홍빛 꽃잎을 내미는 봉선화처럼

소리 없이 지난날들이 피어난다.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달렸던 융단 같은 풀밭 길

싸락눈이 살짝 깔린 초겨울,산촌의 찻집에서 마신 커피향

늦은 밤 잘 익은 감빛 포장마차의 소주 

발목을 덮었던 산 속의 눈길


어느 날 문득 생활에 눌려 두고 온 우산을 생각하고

유월에 피는 선홍빛 석류꽃에 눈을 멈춘다.


생각이 머문다는 것은 저울추가 기울듯

가벼운 오늘이 어디론가 쏠리고 있다는 것


우리는 잊고 벗어나기 위해

아니 그리움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적한 옛길을 간다.


바닷가에서 온 젊은 소설가를 만난 산 속 주막

붉은 햇살을 얼굴에 받으며

겨울나무들이 기도하듯 팔 벌려 서 있는 산길을 연다.


보호수로 지정된 묵은 나무가 선 마을이나

오랜 침묵의 물이 담긴 저수지가 있는 골짜기를 돌아

빗속에 회상의 길을 간다.


눈에 남았던 석상은 간 곳이 없고

이정표도 세월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길은 지난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묵은 사랑의 그리움만 남길 뿐이다.

 

 

박찬선   sun631@paran.com 시집<돌담쌓기><상주>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