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책과 함께

 

여행가방 안에서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철지난 옷가지 속에

여전히 향기와 기품이 느껴지는

그 오래된 책이

깊숙한 곳에 파묻혀

아직 누구의 영혼과도 만난 적이 없어요

고백이라도 하듯

내 눈길을 바라고 있었다

커다랗고 순진한 눈망울을 굴리며

마치 사랑의 재회를 꿈꾸는 연인처럼

 

그것들, 이제 내다버리지

끝내 버리지 못하는 몇 권의 책이 있고

아직도 떠나지 못한

단 한 번의 여행이 내게 남아 있다.

 

 

 

안녕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모두 안녕

행복과 불행도 안녕

선생이 안녕 장난꾸러기 학생이 안녕

파블로 아저씨 안녕

생의 최대의 사건이 죽음이라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여

영원히, 아침 꽃이여 안녕

 

나 죽을 때

푸른 강물에 누워 흐를 때

저 울음소리 목이 쉰 물오리 떼 강안으로 날아오르리

저 세상에서

그렇게 시작했으면 좋을 걸, 안녕

 

그녀의 낡은 옷소매처럼 다정한 말

시작이면서 끝인 침묵의 그 말

사랑이 너무 빠른 슬픔이었던 것처럼

그리하여 힘겹게 하루를 마감하고

일생을 걸어 잠글 수 있다고 생각했던 말

 

그윽한 것들은 남으리라 영원히

새로움을 감춘 후대들이여 안녕

 

산비탈을 달려 내려오는 아이들처럼

버찌를 따먹다

떡갈나뭇잎 모자를 엮어 쓰다

주머니 안의 도토리 몇 알을 만지작거리다

여름은 두 번째 계절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알다

 

이제는 그대여 안녕

생의 물음표에 대한 완벽한 답을 갖고 있는 저녁 새에

대하여

물고기가 뛰어오를 때의 그 말

 

나는 지금 누워서 어두워오는 산의 뒷면을 보고 있다

눈을 감은 채

죽음의 역광을, 생을.

 

 

 

 

이승호

춘천 출생. 2003년『창작21』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어느 겨울을 지나며』『행복에게 바친 숱한 거짓말』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