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9호...
   2020년 05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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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92652 2014-11-03
805 호환마마虎患媽媽 외1편/강규 file
편집자
302 2020-03-31
호환마마虎患媽媽 칠백리 밖 역병소식에 맘 졸이다가 지척의 역병에 갇혀본다 밥벌이를 하는 건물 높이는 4층이고 한 달에 보름이상은 1층에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한다 그저께는 구제역병 예방접종을 마무리하고 어저께는 신새벽에 암코양이 둘 수술을 하고 오늘에는 숫코양이를 했다 내일이면 울타리 병동에서 자연으로 간다 더 이상 번식을 못하는 생들이다, 이제 4층에 사는 건물주인이 내려온다 3층에 사는 부부의 딸이 만리나 떨어진 스페인 유학중에 열흘전 3층에 머물다 어저께 격리병동이 있는 도시로 갔다고 한다 젊은 날 전염병연구로 밥벌이를 했던 연유로 자발적 유폐를 결정했다 때맞추어 보건소장의 전화목소리를 듣는다 개울건너 보건소 마당에서 멀리서 듣던 역병검사를 했다 처지가 저 고양이 셋과 같다고 생각하다가 모처럼 느긋하게, 겨를없이 놓친 친구들이나 형님들이나 저만치 이국으로 가버렸을 숙, 희, 경 들도 떠올려본다, 호사스럽게 죄다 호환마마 덕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대견하다 근심도 역병인 모양이다 두려움조차 생존의 미덕일 것 같다 사월십오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축일이기도 하고 올해는 대한민국도 그럴 것 같다 경증이든 중증이든 미쳐있는 시절인 것 같다 시의 첫 행이라든지 신문의 첫 제목들이 소문의 전파력과 같이 힘이 쌔다 십이척 위에 면식도 없는 신종 역병환자와 건물 위로 지척한 날들 오일 정도 되니, 그냥 첫 행이 된다 가축병원집 딸이 스페인을 다녀왔다… 건물 주인집 딸이 스페인을 다녀왔다… 송아지 설사약 처방을 받은 김씨도 걱정, 수술 실밥을 뽑으러 왔던 홍이네도, 신풍에서 소 여럿 먹이는 장씨도, 읍내 단골식당 경이네도, 점봉산 마을의 편사장댁도, 덕산 마을의 정사장댁도, 성산이 형님, 병헌이 형님도, 사월십오일이면 평온하리니, 아니, 당장 내일 오후 검사결과를 기다리며 미리 평화와 고요를 다스릴지니, 근심을 애써 빗겨 서서 ‘지구에 호모 싸피엔스가 너무 많은가’ 생각하다가 시적시적 걱정을 대신하는 이웃들 보니 지금의 대한민국이 대견하다  
804 도시에 나타난 말 외1편/이원준 file
편집자
224 2020-03-31
도시에 나타난 말 잠든 도시의 등허리를 무람없이 지르밟고 말이 나타난 것은 막차가 막 차고로 들어간 후였다 잠자던 시민들은 폐경기로 돌아누운 어둠의 머리채를 뒤흔들어 깨웠고 서둘러 창마다 불 밝히고 뒤숭숭한 가슴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목장이나 경마장에 있어야 할 말이 보도블록을 턱하니 밟고 서 있는 사실을 두고 도시는 머리마다 요란스레 사이렌을 켜댔지만 말은 도무지 숨으려 하질 않았다 더 이상한 건 말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방법이었는데 모두들 한손을 망원경처럼 오므리고 그 안으로 들여다보는 거였다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마치 그 말이 희고 커다란 알이라도 낳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아이들은 물론 다 자란 어른들까지 한결같았다 그렇게 말은 꼼짝없이 손 안에 들어와 버렸고 한쪽 눈을 감고 있는 시민들은 말 이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그 밖의 빌딩들과 도로표지판 그리고 각종의 불빛들은 의식 속으로 숨어버렸고 한밤중 예고 없이 출현한 말만이 시민들의 떨리는 가슴을 지배하고 있었다 사이렌소리가 꼬리를 감출 무렵 말은 분명 자의에 의해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는데 시민들은 쉽게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느새 새벽이 오고 있었는데도 창가에 모여 소문처럼 웅성거리며 오므린 한손을 오랫동안 바로 펴지 못하고 있었다 더더욱 이상한 건 아침이 되자 도시 한복판으로 말들이 이끄는 낯익은 꽃상여가 쉬지 않고 지나가고 있었는데 겨울동화 아직 추운 겨울이 좋아요 날 안아줄 수 있으니까요 이원준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1991년 《현대시세계》로 등단한 시인, 소설가. 저서 《김오랑》 《김구》 《이상》 《권정생》 《노먼 베순》 《넬슨 만델라》 《정약용의 편지》 《조선왕들의 속마음》 《누가 조선의 영의정인가》 《한국사 그 숨겨진 역사를 만나다》 외 jjun63@naver.com  
803 전지(剪枝) 외1편/유재호 file
편집자
2384 2020-03-31
전지(剪枝) 바람이 차다 이월 바람 비탈길을 오르는 어떤 행렬처럼 감나무 잔가지들이 바람에 쿨럭이고 있다 이십 년 넘게 잎을 피워 올리고 열매를 매달았을 나무 큰 뼈대는 이루었지만 쓸데없는 잔가지는 무시로 자라난다 더 많이 피워 올리려는 허무의 언어들 햇살에 번쩍이는 전지가위로 잔가지를 추려낸다. 덤불 같은 수식어를 도려낸다 쓸쓸한 풀대 소롯길 다한 곳 흔들리는 풀잎 위로 여린 햇볕 내려앉고 바람 한 점 지나가고 자벌레, 굽은 등으로 아득한 세월 재고 있다 스러지는 가을빛 마당귀에 선 어머니 자꾸만 떨리는 다리 구순(九旬)의 버거운 생 오소소 낙엽 지는 담 밖 쓸쓸한 풀대 무너진다 유재호 상주 출생, 상주들문학회 및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 시집 <붉은 발자국>  
802 거리 두기 외1편/송은영 file
편집자
321 2020-03-31
거리 두기 매일 변하는 너는 날씨니? 솟구치는 아드레날린 주체를 못해 미쳐 날뛰는 세상 잘난 놈 못난 놈 모자란 놈 혐오에 길들여진 너의 민낯이 보여 남을 배려하라는 신의 회초리 시작과 끝을 분실한거니? ​ 애증이 없기에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힘든 너와 나의 자폐적 고립 ​말을 잃어버리면 완고해진다 ​ 공허인지 공복인지 마음 마스크 한 장 없는 말은 부러 꺼내지 않았네 전염병 바이러스를 로그인시킨 사람들이 온천지를 돌아다니며 무차별 숙주로 거듭납니다 불안불안한 안전안내문자는 지난날 편리함과 풍요가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가를 알려주고요 피리부는 사나이도 없는데 세상천지 삼라만상을 두루 살펴주는 관음보살도 없는데 이번에도 별탈없이 지나 날까요? 아무 병 없는 사람들끼리 한 식구처럼 사는 일이 오늘부터 가장 중요한 뉴스가 되었습니다 □ 프로필: 경북 포항출생 2007년 시와 상상으로 등단 □ 시집 : 별것 아니었다  
801 나를 심어 보는 봄날 외1편/신구자 file
편집자
1424 2020-03-31
나를 심어 보는 봄날 눈부신 햇살 지천으로 찔러대는 봄날 솜사탕처럼 뭉개뭉개 피어 오르고 있는 저 붉은 철쭉들 속에 도둑처럼 슬쩍 숨어들어 나를 심어놓으면 나도 저렇게 피끓는 청춘으로 피어날 수 있을까 붉게붉게 그리움 토해내고 있는 저 속에 나를 심어보는 화창한 봄날 포기란 말 포기란 배추를 헤아릴 때만 쓰는 언어인 줄 알았다는, 먼저 출가한 선배 스님이 벽에 써놓은 포기란 구절을 마음에 새기며 수행을 하셨다는, 청암사 외국인 스님의 좌충우돌 신행담에 미소를 지운다 사람들은 자기의 교육과 생각만큼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관용하며 발 아래만 내려다 보며 걸어간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우주의 이치를 잊어버린 채 그저 흘러가고,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경북 칠곡군 약목 출생 1994년[대구문학]과 1999년[불교문예]신인상 시 당선 대구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대구여성문인협회, 불교문인협회 회원 '솔뫼'동인, 반짇고리문학회 회장 역임 시집 [낫골 가는 길][지금도 능소화는 피고 있을까] sgj1918@hanmail.net  
800 담쟁이 별사 외1편/위초하 file
편집자
243 2020-03-31
담쟁이 별사 지난 계절 퍼부어 놓았던 앙상한 말들의 뼈들만 드러났다고 비워낸 것들이 그냥 비워진 것들이 아니라고 벽들은 불손했고 바람은 냉혹했다고 등을 때리는 햇볕이 기력을 다할 무렵 비로소 꽃처럼 붉었지만 향기는 없었다고 습관적으로 팽창하는 무한질주도 잠들 수 없는 퍼레이드도 멈출 수 없는 징벌이었다고 전생과 헌생, 그리고 후생을 넘나들어도 끝내 닿지 못하는 어떤 해후였다고 갈대울음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서러움이란 지천명에 관절이 삐걱이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나란히 서기보다 서로 부둥켜안는 것이다 가랑 잎사귀만 쓸어 담은 붉은 노을들이 그 가슴팍에 피멍이 들도록 슥슥 문지르겠지 서설이 펑펑 내리는 날엔 흩어진 구름조각들만 쓸어 담았다가 눅눅한 졸음처럼 펴 말려야겠지 푸른 울음이라도 후미진 봄날을 적실 때 깨진 담벼락이 일렬로 죽 늘어선 수도원에서 풍문처럼 빠져나오는 수녀들처럼 헤지고 상한 인고의 날들이 넘실넘실 강물처럼 흘러간다 참으로 캄캄한 울음 갈수만 있다면 붙들려있기보다 도무지 모를 곳이라도 건너가고 싶은 날 질주하는 바람이 앞을 턱, 가로 막는다 위초하: 경북 예천출생. 작가회의 회원, 한내글모임동인.  
799 여기 서서 바라보면 외 1편/임영석 file
편집자
277 2020-02-29
여기 서서 바라보면 여기 서서 바라보면 길 건너 산 한 뼘 밭 비알에서 연이 할머니 할아버지 앞서며 뒤서며 일하는 것 다 보인다 눈, 코, 입, 귀 하나도 안 보이고 누구라고 안 해도 다 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하느님, 내가 매일매일 무얼 하고 있는지 왜 모르겠는가 슬픔의 서식 -부론 居頓寺址에서 이제 새벽닭은 훼를 치지 않는다 부엉이도 슬픔의 울음을 멈추고 떠났다 부론 거돈사 폐사지 한 쪽에 아직도 팔각기둥에 지신(地神)들로 치장한 원공 국사의 탑만이 지존(至尊)의 역사를 거머쥐고 연자방아를 돌리던 돌쇠의 무딘 힘을 유혹해 떠난 계집의 치맛자락 같은 길을 바라보고 있다 이 거돈사 절이 번창할 때는 냉수 한 사발이라도 얻어마시고 부처님 은공을 온몸으로 느끼고자 했을 것인데 궁궐 같은 대웅전 지붕이 불에 탄 후에는 제비 새끼 한 마리 둥지를 틀지 않는다 기둥을 끙끙거리며 바치고 있던 돌 만이 제 자리를 잃고 옹기종기 모여 슬픔의 서식을 맞추고 있다 세월이라는 흔적, 허공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거돈사 폐사지 돌들은 슬픔의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뼈처럼 슬픔의 서식을 맞추고 있다 임영석/ 1961년 충남 금산 출생. 1985년 계간 『현대시조』 봄호 천료 등단 시집으로 『받아쓰기』외 5권, 시조집 『꽃불』외 2권, 시조선집 『고양이 걸음』, 시론집 『미래를 개척하는 시인』이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및 강원문화재단, 원주문화재단에서 각각 창작기금을 받았다. 제1회 시조세계문학상, 제15회 천상병귀천문학상 우수상, 제38회 강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imim0123@naver.com  
798 여수에 갔었다 외1편/김재순 file
편집자
237 2020-02-29
여수에 갔었다 오래 전 애양병원 진료 받으러 여수에 갔을 때 무서웠다 전라도, 여수 어디서 왔느냐는 택시기사의 물음에 경상도 어디라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바다도 시퍼런 파도를 거칠게 올렸다 얼마 전 여수에 갔을 때는 거기 붙어살고 싶었다 여수 밤바다 여수 낮바다에 마구 지폐를 날리며 환상을 즐기고 싶었지만 그런 깜냥이 되지 못하고 가끔씩 가녀린 파도 한 줄기 뛰어들 수 있는 산자락 낮은 집 마당에 노란 플라스틱 의자 하나 바다로 향해 놓고 오지 않는 여객선을 기다리고 싶었다 오래 전 그 때는 왜 그랬을까 그 시절의 보호를 받으며, 어쩌면 우민화 정책의 1호 대상자였을 경상도 사람들 어린 학생들은 얼마나 먹기 좋은 떡이었을까 유언비어의 이식지로 얼마나 비옥했을까 전라도와 경상도는 그 시절의 광풍에 함께 못 쓰게 됐음을 이제는 안다 전라좌수영로라는 도로명 표지판 이순신장군 동상, 거북선 모형물 우리는 이렇게 그를 잊지 않으려 하고 그를 통해 뭉친다 선착장 들머리부터 미역 한 오리 멸치 한 됫박 놓고 난전을 펼친 늙은 사람들과 그 푸른 바다, 선박이 그림 같은 풍경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순신은 자신을 죽이며 왜 그토록 그 곳을 지켰는가를 여수, 여수 내 가슴에 그리움으로 옹이 맺힌 려수(麗水) 유전자 인간의 유전자는 오백 년을 기억한다고 어느 유전학자가 학설을 냈지만 거기까지는 모르겠고 5촌까지는 확실하다 작은아버지 장례식에서 소복을 입은 갓스물 정도의 아이를 보고 4촌 오빠의 딸이라 생각했다 혈족을 찾는 인간의 습성대로 누구를 닮았나 살피는데 저도 당기는지 미소를 조금 보였다 그 때 불똥처럼 튀어오는 우리 아이라는 것 웃을 때 살짝 뒤집어 지는 윗입술 그 입모양은 내 아버지와 나 그 아이의 아버지 내 사촌 오빠다 거울을 보며 당겨 내리기도 했던 입술 그 날은 어느 조상이 품에 넣어준 붉은 징표가 되었다 일찍 어미를 잃은 아이 그러고 보니 불운도 서로 닮았네 이런 유전자 말고 그 아이 후손에게는 시 쓰던 조상의 유전자와 시 쓰는 내 유전자가 온통 흘러든다면, 그리하여 천년의 시작(詩作)*이 된다면, *출판사 천년의 시작에서 차용 김재순: 2002년 작가정신으로 작품활동. 시집『복숭아 꽃밭은 어디에 있을까』  
797 바람의 눈으로 외1편/이승호 file
편집자
4819 2020-02-29
바람의 눈으로 그대의 눈으로 보리라 떠돌이의 떠돌이 아들은 연인들 이민족(異民族) 반인반수 미치광이들의 노래가 대양과 사막을 건너 울려온다 신이 흡족해하는 노래가 아니라 인간들이 열광하는 노래를 불러라 끝내 읽을 수 없는 바람의 표식들 무지한 나의 생을 어루만져주며 진정 나는 모든 것에게 마음을 빼앗겼으니 한순간에 냉랭해진 여인에게서 더욱 벗어날 수 없었듯이 저토록 맹랑하고 무자비하며 사랑스럽게 어느 재주꾼 놈이 순결하고 높은 한 여인의 손목을 잡아끄는 것을. 시왕의 잠 우리가 그에게 바친 찬사는 단 몇 줄도 되지 않는다 수많은 시인의 등장과 더불어 쏟아졌던 현란한 수사에 비하면, 그는 마치 저쪽 누군가가 불러준 것처럼 제 울림의 반향도 모르고 우리들 곁에서 떠난다 백성이 없는 왕이여 위대함이란 안락에 빠진 우리를 불러내어 두려움을 갖도록 만들며 신이 아니라 그가 신의 옷을 훔친 자임을 뒤늦게 알게 되더라도 우리의 찬미는 그의 귀에 닿지 않을 것이다 정원의 시큼한 열매가 맛이 들어 그가 응시하는 대로 허망하게 밤의 공간으로 떨어지는 것을 우리는 긴 탄식 속에 바라본다 나 자신을 어쩌지 못해 쩔쩔매는 시를 안타까워하며 여인의 슬픔이 아름다운 육체에 있다면 왕의 슬픔은 죽음에 있으니 고독은 검은 항아리처럼 익고 그는 진정 왕이 되어 우리를 구속한다 이제 우리는 겨우 배타적인 것들의 등가성을 눈치채고 어둠과 빛, 세라핌과 사탄의 노래를 구별하지 못할 때 악이여 너는 이 땅에서 뜻을 이루었으니 그만 쉬어라 하고 농담을 던질 수 있다 영원한 창공의 평화로운 아이러니가 꽃과 같이 속절없이 아름다우며* 그가 살았던 시대의 울타리마저 그의 영속성 위에 형체를 잃어버렸다 램프 아래서 작은 나무 책상 하나가 꿈을 꾸듯 그의 영예는 고귀하며 마침내 불구덩이에 던져져 활활 타오르리라 밤에로의 귀환 이제 그에겐 인간 자체가 지닌 그 어떤 모순도 없다 한 종족도 거느리지 않았으므로 누가 시왕의 영원한 잠을 깨우겠는가 우리는 그가 만든 정연한 세계에서 마음을 놓을 뿐 여기 췌사를 올린다 아아 장미나무 관을 쓴 긍지의 종지기여! *말라르메, <창천 (蒼天)>에서 이승호 2003년 <창작21>등단. 시집 <행복에게 바친 숱한 거짓말> 외. nacham1@hanmail.net  
796 홀로그램 외1편/조재학 file
편집자
216 2020-02-29
홀로그램 마우스가 뒤집혀서 눌러두었던 붉은 마음을 들킨다 흰 것의 속이 저렇게 붉다니 어제는 냄새의 도시에서 보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청춘들이 붙안고 얼굴을 포개고 있는 것을 손잡이를 꼭 잡고 내려가는 나의 얼굴을 청춘들은 눈을 감고 눈을 감은 것은 얼굴이 없었다 시장통 어느 화장품집 앞을 지날 때 네 향기가 났다 뒤를 돌아보았다고 문득 사람들 모두 사라지고 낯익은 골목 앞에 서 있었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팔랑거리는 향내에 기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물속에서 빠져나온 길처럼 후줄근해져서 어둠이 내리는 거리를 걸었다 낯선 별과 별의 거리를 재다 다 닳은 구두를 신고 돌아왔다 대체 너는 어떤 별의 숲을 헤맨 것일까 네 옷엔 숲의 냄새가 도깨비풀처럼 붙어있었다 너는(나는) “수잔”하고 불렀다 수잔의 얼굴은 없었다 나는 수잔의 걸음걸이로 이곳에 도착한 적이 있었던 것일까 마우스를 잡고 클릭 클릭 한다 웹사이트에서 ‘네 향내’란 아이디를 클릭한다 오스카 로션의 햐얀 향내를 지운다 죽음 죽음은 마르고 허리가 구부정하다 죽음은 느릿느릿 걸어서 방문을 열고 나간다 마루에는 쏟아지듯 빛이 내리고 죽음은 빛으로 들어간다 보이지 않는다 층층나무 가지 사이로 햇빛 같은 것이 바람 같은 것이 누군가 얹어놓고 간 엷은 마음 한 장 같은 것이 가만히 흔들리고 있었다  
795 농담 외1편/이순영 file
편집자
224 2020-02-29
농담 젊을 때 술독을 떠 메고 다니던 남자 서울우유와 같이 들어오고 조선일보와 함께 들어오기도 했지만 그리 밉지는 않았다 딱, 한 번 뒷동 801호를 찾아들어 소란스런 새벽을 창으로 내려다본 일 외엔 주정을 한다든지 자신의 일을 소흘히 한 적 없었기에 산등성이 넘고 넘어 새벽잠이 없어진 지금 4시 반이면 눈이 떠지네 그날도 골군 짠지 무를 써는데 무딘 칼이 TV 살림 9단에서 배운대로 국사발을 엎어놓고 빠르게 벼리고 있었다 슥삭슥 삭슥삭 기지개를 켜면서 나오던 그 남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슬며시 방문이 닫히는 것이다 퇴고 아침 댓바람에 트럭 너댓대 들이친다 평균 나이 63세 송창골 청년회 회원들 전지가위 전기톱 앞세워 술렁술렁 복숭아나무 우듬지 혼신 다 해 발그레 물들이지 않았을까 아마 단물을 품었을지도 겨우내 칼바람 마주한 보람없다 쭉쭉 뻗어 올린 가지초리 뻗나간 묵은 가지 거침없이 쳐 내려 바닥에 흥근하다 툭툭 얹힌 잔가지 마저 털어내니 나지막이 퍼진 밑동 어슴푸레 안갯속 혼연한 뒤태는 다산한 여인 방뎅이를 닮았다 저 튼실한 앉음새라니 이순영/경북 상주 출신. 느티나무시 동인으로 활동  
794 (특집)세월호 詩/권순자, 김길전, 정대호, 최기종
편집자
331 2020-01-31
열여덟의 웃음 권순자 낮이 가방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바다는 네 방에 가득 몰려와 밤마다 파도친다 바다의 목소리들 내일을 미리 열고 들어간 너의 밤이 물결에 철썩인다 네 부푼 꿈이 오므라지고 늘어놓은 책들이 스르르 일어서서 네 방문을 연다 비상구가 떠올라 허공으로 올라간다 기웃거리는 밤 깜빡이며 바다를 뒤척이는 밤 어제의 노을이 돌돌 말려서 가슴속으로 밀려온다 파도처럼 모래는 바람에 실려 창자 속으로 뒤틀리며 몰려온다 길 잃어버린 바람이 문 앞에서 울음처럼 펄럭거린다 분해된 꿈들이 조개들 따라 입을 다물었다 물살을 헤치고 이름들이 솟구친다 슬픔이 너무 오래 말라갔어 몸을 짜내는 기다림이 너무 길어졌어 널뛰는 그리움이 해일처럼 밀려왔어 아름다운 목덜미에 열여덟의 시간이 새겨지고 얼음처럼 차가운 실망 끙끙 앓는 혀 어미의 수심은 빈방에서 철썩거렸다 비가 오면 귀가 열린다 너를 듣는 밤이 길다 밤이 젖어 뱀처럼 느리게 기어간다 너는 움켜쥔 소라로 소리를 들으며 고둥으로 나팔을 불고 영원을 호출하며 세상 밖으로 가는 길로 헤엄을 치고 갔다 달이 뜨고 삶을 습격한 폭력과 혼돈의 문턱을 넘어갔다 벚꽃망울 터뜨리던 열여덟의 웃음이 그립다 권순자/1986년 《포항문학》에 「사루비아」외 2편으로 작품 활동 시작, 2003년 《심상》신인상 수상. 시집으로 『낭만적인 악수』,『붉은 꽃에 대한 명상』,『순례자』,『천개의 눈물』,『청춘 고래』등이 있음. 한국작가회의회원 그들에게는 노을도 바다에 슨 녹이다 김길전 그곳 목포 신항 철제부두에는 망각의 뜰채에 채집된 부레인 듯 그럼에도 아직 바로세우지 못한 시공에 세월이 동기화되어 벌겋게 녹슬고 있다 건저올린 그녀 그 유기遺棄의 경계에서 진저리를 치며 삼백네 걸음을 찬찬히 세어 물러서면 그러나 녹슬지 않은 아이들의 표정이 노을 속 나비의 무늬로 정연하다 아이들은 저마다 여러 발의 총을 맞은 채 발소리 죽인 저녁바람에 떠는 노란 리본이 힘겨웠다 근접사격에 그 아름다운 이마와 눈길 꽃 봉우리 가슴과 귀가 찢기고 관통된 채로 이승의 노을에 걸려 있었다 보라, 신은 이미 함구하지 않았는가 이제 산 것들이 불쌍해야할 차례이다 끼어들지 못한 해류 속 관 안에 또 다른 관이 들어 있는 척색동물문 멍게의 유충은 끊임없이 야광충의 해류 속을 표류하는데 이윽고 살아남은 멍게가 자리를 잡아 정착하게 되면 우선 제 뇌를 먹어치운다 뇌는 동물에서 가장 에너지의 소모가 큰 기관으로 의식과 행동을 제어하는데 이미 멍게이므로 더 이상 기억과 행위를 삼켜 스스로 자아를 소거해버리는 것이다. 그 배설의 입과 가늘고도 긴 창자를 이은 소화시키지 못한 말의 항문뿐인 멍게의 아종처럼 제 방아쇠수지증후군을 치켜들고 킬킬거리던 호모하빌리스의 그 받침 없는 귀곡성과 무정란의 납색 깃발 그들에게는 저 노을도 끝내 바다에 슨 녹이어야할 것이다 *거기 세월호 아이들의 사진은 호모사피엔스의 비비탄에 뻥뻥 뚫려있었다. 김길전/2018년 시 동인지 『씨앗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발간 동인 2019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팽목항의 사진을 보며 ―내일을 여는 작가 65호(2014년 여름호)를 보고 정대호 엄마들이 줄을 지어 바다를 보고 섰다. 눈 앞에 잠겨버린 배 눈 앞에 떠 있는 배 그 배 너머 흐릿하게 서 있는 섬, 섬, 섬…… 돌아오겠다 하고 집을 떠난 아들들 돌아오겠다 하고 집을 떠난 딸들 돌아오겠다 하고 집을 떠난 아버지들, 어머니들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서 먼 섬처럼 멀어질 것만 같아서 소리 내어 불러보고 소리 죽여 불어보고 소리 없이 불어본다. 경찰들은 줄을 지어 땅을 보고 섰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땅을 보고 섰다. 바다는 출렁출렁 그리움으로 밀려오고 바다는 파랗게 물깊이로 막고 섰다. 그렇게 짧은 거리가 그렇게 먼 거리가 되어 아들아, 딸아, 아버지, 어머니, 바다를 바라보고 섰는 사람들은 땅을 향해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렇게 살아 있어서 미안하다. 땅을 향해 섰는 사람들은 마음속을 향해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렇게 가슴으로 보고만 있어서 미안하다. 정대호/1958년 경북 청송 출생. 1984년 『분단시대』동인으로 활동, 시집:『다시 봄을 위하여』, 『겨울산을 오르며』, 『지상의 아름다운 사랑』, 『어둠의 축복』, 『마네킹도 옷을 갈아입는다』 평론집:『작가의식과 현실』, 『세계화 시대의 지역문학』, 『현실의 눈, 작가의 눈』 아직도 물속이다 최기종 아직도 물속이다.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아직도 진실은 인양되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이 말도 안 되는 사고로 말도 안 되는 대응으로 말도 안 되는 기다림 속에서 천 개의 바람이 되고 나비가 되고 리본이 되고 팔찌가 되고 풍등이 되고 종이배가 되어 아직도 물속이다. 아직도 세월네월이다. 왜 침몰사고는 일어났는지 왜 선내에 대기하라고 방송했는지 해경은 왜 구할 수 있는데도 구하지 않았는지 도대체 왜 CCTV영상은 바꿔치기 했는지 사고발생 어언 5년이 흘러갔는데도 사고발생 무려 1,825일이 지났는데도 우리 아이들이 아프다, 원통하다, 미안하다. 누구는 아직도 세월호냐고 아직도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이냐고 그것, 다 끝난 것 아니냐고 지겹다고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아프다, 원통하다, 미안하다. 아직도 물속인데 아직도 오리무중인데 아직도 진실은 인양 중인데 내일의 아이들을 위하여 내일의 세월호를 위하여 다시는 이런 사고가 일어나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거짓거리들이 숨어 있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아프다, 원통하다, 미안하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희망이다, 생명이다, 안전이다. 기다림의 버스를 타고 팽목항에서 색 바랜 리본은 멈추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질 않고 우리 아이들은 이제 그만 떠나고자 하나 아직도 세상은 물속이라고 최기종/전북 부안 출생, 1992년 교육문예창작회 활동, 『나무 위의 여자』, 『슬픔아 놀자』외, 목포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 ************* 위의 시는 2019년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문집- <녹두꽃 필 때>에 특집으로 실린 것임을 밝혀둡니다.  
793 (특집)제주 4·3 항쟁 詩 10편-제주작가회의
편집자
337 2020-01-01
노루귀 산천 김연미 기다림에 지친 숲이 봄으로 갔어요 신동엽의 진달래 산천 아직은 먼 삼월 어귀 노루귀 분홍 노루귀 해방구가 여기네요 마지막 산사람이 귀 한 쪽 열어두고 냉전의 뿌리를 베고 잠이 들던 그 자리 지워진 파편자국에 귀만 남아 피네요 빈숲에 겨누었던 총부리 거두는 봄 햇살 환한 사람들이 한 줄로 찾아와서 노루귀 하얀 노루귀 무릎 꿇고 있네요 김연미 / 2009년 『연인』으로 등단.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산문집 『비 오는 날의 오후』.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 수상.제주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회원. 33383331@hanmail.net 바람의 집 이종형 당신은 물었다 봄이 주춤 뒷걸음치는 이 바람, 어디서 오는 거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4월의 섬 바람은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 돌담 아래 제 몸의 피 다 쏟은 채 모가지 뚝뚝 부러진 동백꽃의 주검을 당신은 보지 못했겠으나 섬은 오래전부터 통풍을 앓아온 환자처럼 살갗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 4월의 섬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 그러므로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람의 집이었던 것 이종형 / 2004년 『제주작가』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2018년 5·18문학상 본상 수상 .제주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회원. lee56oh@naver.com. 4·3이라 쓰고 사·삶이라 읽는다 강봉수 손을 들면 손간데 꽃들이 지고 길나서면 닿는 곳마다 불이 태워졌다 몸을 숨긴 자왈 속 동굴은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다, 무덤이었네 남의 손으로 얻은 빼앗겼던 조국산천 꽃이 피는 것조차 아픔이었다 살이 묻힌 대지를 밟고 살아야 했던 죄스러운 칠십 고개를 넘어도 바다는 여전히 슬픔으로 출렁이네 바람은 오늘도 멈추지 않고 한라산은 때때로 몸을 숨기며 속삭이네 자주독립 민족해방 통일조국 언제면 찾아올까 죽고 사는 일이 억압 없는 세상 강봉수 / 2011년 『문예춘추』로 등단. 현재 제주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회원, 우당도서관 근무. 삽시(揷匙) 김영란 제주섬 바람소리엔 뼈 맞추는 소리가 난다 일어나 아우성치는 이백육 마디마디 사월의 제단 앞에선 산목숨이 죄만 같아 애비 아들 보내는 날 가슴 치며 울던 바다 육십년 만에 찾아온 육신 젓갈 삭 듯 녹아내려 생살점 떼어내듯이 봄꽃 벌써 지려 하네 머리 하나에 팔다리 맞춰는 놓았다만 내 남편 내 아들 맞기는 한 것이냐 어디다 하소를 할까 혼절했던 시간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절뚝이는 저승길 열두 대문 훠이훠이 고이 넘어 가시라 어머니, 고운 멧밥에 떨며 꽂는 숟가락 김영란 / 2011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 오늘의시조시인상. 시조집 『꽃들의 수사修辭』. 제주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회원. puppy6571@hanmail.net 선작지왓 털진달래 -종이배의 표류기 김성주 한라산 선작지왓 망망 분홍 물결 자맥질하며 노는 어미 노루 새끼노루를 따라가던 시선이 뚝 끊긴다. 나의 종이배는 표류를 시작한다. 첫 기항지(유골 봉안실) 살아생전 봄을 제대로 그리고 싶었던 외할아버지, 군화 발걸음 소리 쇠 부딪는 소리들이 할퀴고 간 돌담 무너진 올레 어귀, 밑둥치부터 온 몸 푸르뎅뎅한 기세로 옥죄고 있는 송악 앙상한 가지를 매섭게 후려치고 있는 낯선 굴거리나무, 비명을 잃어버린 늙은 감나무 위로 2월의 마지막 노을은 붉게 번지는데 매서운 서북풍이 동남풍으로 바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분홍 물감 통을 든 손은 덜덜 떨리는데 꽃이 피어야 봄바람이 분다는 앞선자의 외침이 가슴 속 진격의 북소리를 둥둥 울리는 것이었다. 분홍 물감 듬뿍 묻힌 붓이 북소리 따라 휘둘려지고 제주 섬 한복판에 굿판이 펼쳐진 것인데, 벌거벗은 이웃들은 두 손 비비며 동남풍 불어오길 기원한 것인데, 돌풍으로 몰아친 서북풍이 굿판을 뒤엎는 것이었다. 봄으로 가는 길목에서 곶자왈의 싸움은 그렇게 시작 된 것이었다. 벌거벗긴 채, 땅속에 묻힌 채, 분노를 삭이던 무리들이 겨우내 기세등등했던 사스레피나무 송악 굴거리나무 그 패거리에 저항하여 오름 오름 마다 산벚꽃은 아우성으로 피어나고 거센 비바람은 산벚꽃잎을 비비산산(飛飛散散) 찢어발기는 것이었다. 제주비행장 한옆, 구덩이로 낙화한 그 꽃잎 하나 70년 지나 하얀 유골함에 담겨 4․3평화공원 유골 봉안실에 앉아 있다. 분홍물감 통 꽉 붙들고., 둘째 기항지(행불인 비석 ) 사냥꾼은 피 묻은 자루를 내려놓으며 암노루라 했다. 도망치는 새끼노루를 놓친 게 무척 아쉽다고 했다. 국장은 몸보신에 특효라며 따끈한 피 한 사발을 단숨에 마셨다. 도막 낸 고깃덩이들은 곱게 포장하여 서울 본사 윗선에 보내기로 했다. 고깃덩이가 상자에 담기는 동안 나는 새끼를 향한 어미의 눈에 반짝 피었다 진 꽃 한 송이를 떠올린다. 고도성장에 목매던 그 시절 다른 회사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높은 자리의 사람들은 왜 한라산 노루 고기에 환장했던 것일까? 70년 전 사람 사냥의 시절, 눈 덮인 한라산 계곡에 숨어 내게 젖을 물리시던 어머니 탕 탕 하얀 눈 위에 빨갛게 쓰러졌다. 같이 도망치던 젊은 처녀가 후다닥 나를 안고 숲으로 뛴다. 몇이 쓰러졌는지 모른다. 사냥꾼들이 주검을 발라먹고 뼈다귀까지 다 먹어 치워버려 흔적이 없다. 종이배가 닿은 곳은 흔적 없음을 흔적으로 남긴 행불인 비석 앞이다. 셋째 기항지(위폐 봉안실) 분홍 물감으로 봄을 그리려던 아버지 종갓집 며느리로 있다가 산으로 피신한 누님 연분홍 봄바람을 기다리던 동료들 피어나지 못한 채, 시뻘겋게 질 때마다 핏물을 뒤집어써 빨개진 외삼촌, 사살당했다. 4․3평화공원 내 위폐 봉안실, 수많은 위폐 속에 놓인 「김상훈 」 이름 석 자, 내 눈에는 흰 바탕에 검은 글씨가 다른 위폐들과 똑같아 보이는데, 아무리 봐도 빨간색은 보이지 않는데, 빨갛다 한다. 빨개서 치우라 한다. 눈이 푹푹 쏟아지던 밤 죽음을 무릅쓰고 산에서 내려와 아직 목숨이 붙은 핏덩이 하나 할머니 품에 툭 던지고, 하얀 눈 속으로 떠난 귀항 (선작지왓 털진달레) 쫓길 때까지 쫓겨 선작지왓에 오른 작고 앙상한 몸뚱어리들이 온 힘으로 흩뿌려놓은 분홍 물결, 바람에 일렁이며 윗세오름으로 번져 철쭉꽃 피워내면 목마른 노루 백록담 물로 목을 축이고 컹컹 하늘 향해 봄을 알릴 수 있겠지. 초록 위로 색색의 꽃들이 자유로이 피어날 수 있겠지. 저 아랫마을 키 큰 나무 그늘에도 춘란이 향기를 내뿜을 수 있겠지. 김성주 / 1996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 『비, 바람길』, 『구멍』.제주작가회의 회원. ksj2519@hanmail.net 소남머리 김 영 숙 생목숨 탕탕탕탕 절벽에서 떨어져 그런 날은 정방폭포 물빛도 바뀌어서 빨간 섬 붉은 바다가 겨울 내내 울었대 면회 가던 어머니 즉결처형 아버지 십일월엔 제사가 두 번 감저막이 기른 아이 하효동 오 선생 오면 터엉텅 우는 바다 씨멜족 임씨 일가도 여기서 죽었다고 등에 업은 애기까지 죽창으로 찔렀다고 폭포수 증언을 듣다 늙어버린 나무야 어릴 적 손 꼭 쥐고 고개 돌려 지나던 여기가 집단학살 터 아, 떼까마귀 고향 같은 바다 쪽 아찔한 체위 헛손 하는 곰솔아 김영숙 / 2006년 『시선』으로 등단. 제주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회원. thfqlcqkek@hanmail.net 숟가락을 드는 봄 김진숙 사월 어깨너머 푸른 저녁이 온다 이 빠진 사발처럼 걸려 있는 초승달 누구의 가슴 한쪽이 저리 시려 오는지 그림자 빛을 가두며 내 뒤를 따라 온다 한 걸음 딛고 나면 달아나는 발자국 온 섬을 불 지르고 간 그날에 가닿을까 꽃이라 불렀지만 눈물이라 읽힌다 제주 땅 어디에나 울먹울먹 피어나 뿌리째 흔들고 간다, 내가 모른 봄 저편 눈물은 그런 거여 퍼내도 우물 같은 함께 울 줄 알아야 세상을 배우는 거여 힘겹게 숟가락 하나 눈물 한 술 뜨는 봄 김진숙 / 2006년 《제주작가》로 작품 활동 시작. 2008년《시조21》 등단. 시집 『미스킴라일락』, 『눈물이 참 싱겁다』.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 수상. 제주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회원. jinsook67@hanmail.net. 아무런 이유 없이 김경훈 많은 사람들이 제주4・3에서 무수한 제주도민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억울하게 죽어갔다고 말한다 그런가 정말 그러한가 1947년 3월 1일의 그 거대한 군집의 운동을 뒤이은 3・10총파업의 열정을 나라 반쪽 만드는 5・10단독선거를 저지한 동력을 우리는 그 4・3의 봄을 애써 잊고 있는가 4・3의 겨울은 최고조에 이른 열정을 끄기 위한 그 몇 배 분량의 극한의 공포와 탄압 이것은 공동체의 파괴와 개인의 해체 이것은 정체성의 상실과 인간성의 말살 이것은 사유하는 세포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주4・3에서 죽음만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진실을 말하자 제주4・3은 아무런 이유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아무런 이유가 없어져버린 것이 억울한 것이다 제주4・3에서 선대들은 이재수 항쟁군들처럼, 동학농민군들처럼, 5・18 시민군들처럼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싸우다 스러져갔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빨치산 항쟁과 일맥상통한다 분명히 결단코 말하자 이유 있는 죽음들이다 고귀한 죽음들이다 의로운 죽음은 의로운 행진을 부른다 고귀한 죽음은 고귀한 결단을 부른다 이제 후대들의 몫이다! 김경훈 / 1993년 「통일문학통일예술」로 등단. 시집 『삼돌이네집』, 『그날 우리는 하늘을 보았다』 등, 산문집 『낭푼밥 공동체』 등. 제주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회원. kimkh4597@hanmail.net 어쩌면 잊혀졌을 풍경 - 멀구슬나무와 팡돌과 나 홍 경 희 일 흔해 묵혀둔 말 쉽사리 꺼내지 못해 연필만 만지작만지작 선 한줄 겨우 그렸어 어렵게 말문을 트자 꽃눈들도 틔어났어 메마른 손가락으로 조바심 내며 피운 꽃들 저지른 잘못 없이 기다림조차 죄가 된, 무너진 하늘 아래서도 살아 있어 고마웠어 달을 쳐다보며 내가 앉아 있던 팡돌 푸릇한 꿈 한 채 기다리는 것 같아서 돌아온 가족을 맞듯 멀구슬나무 그렸어 비바람 흔적이나 기미는 어디에도 없어서 금세 다닥다닥 붙어 앉은 햇살들 여덟 살 나의 친구들이 올레에서 불렀어 백지로 비어 있던 유년과 우영팥에 동백꽃, 해바라기, 양애와 배채기꽃 또 다시 연필로 심고 붓끝으로 피워 놓았어 오늘도 꽃을 그려, 아프지 않은 꽃을 그려 고요히 느릿느릿 철도 없이 피어나 다시는 지지 않을 꽃, 향 피우듯 꽃을 그려 홍경희 / 2003년 『제주작가』 신인상, 제3회 오누이시조공모전 장원. 시집 『그리움의 원근법』. 제주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회원. jejugod@hanmail.net. 표석 앞에 서다 오 영 호 무자년 원혼들이 올레길 산길 돌아 거친오름자락 등 굽은 느티나무 굴곡 진 나이테 돌아 새싹으로 피어나는 4월의 평화공원 신원의 꿈 등에 진 9순길 어머니와 7순의 유복자가 연둣빛 잔디밭 너머 표석 앞에 서다 뼈 하나 찾지 못해 새겨진 이름 보며 뭣이라, 한 마디 말이라도 해야겠는데 후, 하고 터지는 한숨 눈시울만 붉어지는 술 한 잔 올려놓고 절하는 아들 보며 쌓이고 쌓인 한(限)이 한 겹이라도 벗겨질까 이제는 많이 용서했다고 흠향(歆饗)하고 가실까 그만 돌아서다 돌비에 손을 얹고 ‘다시 못 올 것 같아요 하늘에서 만나요’ 어머니 젖은 목소리 명치끝이 아리다 오영호 / 1986년 『시조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현대시조 100인 선 「등신아 까불지마라」 등. 한국시조비평문학상‧제주도문화상 수상. 제주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회원. jeju500@hanmail.net. *** 위 시 10편은 2019년 상주동학기념문집 『녹두꽃 필 때』에 실렸습니다.  
792 짚 1. 외 1편/박찬선 file
편집자
603 2019-11-30
짚 1 다 주고 떠나는 마지막 가는 길은 부드럽다. 빈들로 사라지는 종소리의 여운이듯 해질녘 집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이듯 땡볕과 장마 속에서 초병처럼 서서 버틴 무서리 내린 찬 논바닥에 누워 덕장의 명태처럼 바람과 햇살에 몸 말리는 초분草墳 가벼운 육신 무더기로 꽁꽁 묶여서 수의 같은 흰 비닐에 싸여서 누룩 뜨듯 익혀 진한 맛을 들여 온 몸을 소처럼 고스란히 공양 올리는 우걱우걱 되새김질하는 저물녘의 우리 움직이는 붉은 꽃으로 불어나는 은밀한 시간 함께 머물렀던 빈자리 벼 그루터기 추워 보인다. 마른 눈물 자국 보인다. 짚 2. 아버지 짚이 되셨네. 햇살 밝은 가을날 벼 거둔 천수답에서 퇴비 깔고 보리씨앗 넣으시며 '참 좋다 참 좋다' 이르시고 짚이 되셨네. 마당 가득 처마보다 높게 차곡차곡 쌓인 낟가리 볏짚으로 쌓은 황금의 성 그때는 정말 넉넉한 부자였네. 은은한 달빛 넣어 꼬아낸 새끼줄보다 질긴 삼신 줄을 엮어 오신 우리 아버지 포성이 오갔던 그해 여름 문경 새재 보국대 다녀오신 뒤 목마를 해서 건넜던 낙동강 아버지의 높은 어께에서 솟아났던 쇠죽솥의 구수한 짚 냄새 한가한 날 약주를 즐기셨던 아버지의 불그레한 얼굴이 근심을 태우셨던 아궁이의 불기운으로 상기된 그 모습으로 나도 홍시가 되면 멍석에 누워 별 헤며 들었던 가마니 치는 소리 솟아나고 이엉 엮어 새로 덮은 집의 따뜻한 겨울밤에 닿는데 짚 거둬간 빈 들 썰렁하다 못해 차가움으로 오는 대설 지난 지금에야 조금 알 듯도 하네. 짚이 되신, 흙이 되신 아버지의 길지 않은 생애를 약력 경북 상주 출생. 1976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돌담 쌓기』『상주』『우리도 사람입니다』외  
791 불턱 방담放談 외1편/김요아킴 file
편집자
491 2019-11-30
불턱 방담放談 서로의 심장에 총탄을 재던 그해 六月, 고향 갯가로 끌려나온 무수한 유령들이 광목천에 묶이어 역사 저 편으로 수장되었다는 어른들의 음계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문득 남도의 외로운 섬 하나가 떠올랐다 그 총알이 왼쪽 눈에 깊은 슬픔으로 커져, 三月의 차가운 물 밖으로 떠올라 증인으로 서자 고향의 수많은 발자국들이 거리거리에 찍어놓은 분노를 활자로 읽으며 그 섬마을의 하도리가 생각났다 한 치의 틈도 내주지 않은 고향의 날선 목소리 속에, 태어나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사진 속의 인물을 용의자로 지목하자 낯선 국방색 표지들이 두더지처럼 十月의 마음을 도굴하는 장면을 눈으로 지켜보며 그 하도리의 불턱이 자꾸 스쳐갔다 골다공증을 앓는 아낙들의 숨비소리가 쌓아올린 부도, 매일같이 저승의 문턱을 닳아 없앤 물질을 제쳐두고 한지보다 더한 젖가슴을 아이에게 물리며 한라에서 불어오는 四月의 냉기어린 들숨마저 화톳불로 이겨내는 영원한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부암역 빛 발한 네온사인을 위하여 흥청대는 값싼 말투와 본능이 자본으로 덧씌워지는 원심을 향하여 지독히도 땅 밑을 환승하며, 아래로 아래로 파묻혀가는 것을 감내해야 한다 한 끼의 밥과 교환할 노동은 여전히 살아 끊임없는 무표정과 침묵으로 재생되고 덜컹거리는 레일 위의 불규칙한 일상으로 낯설게 불거져오는 서로의 얼굴을 비춰보며 고대의 커다란 무덤을 생각해 본다 개찰구 쪽으로 맞닿은 저 벽 너머로 엷은 향내와 둔탁한 곡소리가 수런거리고 눈높이로 가로지르는 주검이 누워 매번 스칠 때마다 이곳은, 순장될 듯한 전생의 기억으로 떠오른다 여전히 햇빛은 광합성을 하는 무리들에 유효하고 낙하하는 빗줄기에 몸을 정화할 기회는 기득의 울타리에 한정되지만 오늘도 살아남아야 할 당위當爲 앞에 생과 사의 거리는 너무도 짧기만 하다 김요아킴 1969년 경남 마산 출생. 2003년 계간 <시의나라>와 2010년 계간 <문학청춘> 신인상으로 등단.『왼손잡이 투수』『행복한 목욕탕』『그녀의 시모노세끼항』외 다수. 산문집『야구, 21개의 생을 말하다』서평집『푸른 책 푸른 꿈』. 한국작가회의와 부산작가회의 회원. 현재 부산 경원고 교사.  
790 훈연 외1편/유준화 file
편집자
472 2019-11-30
훈연(燻煙) 외증조할머니는 연산 대추골에서 동학군에 가담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죽었다 사구라꽃이 극성으로 피던 대추골에서 징용으로 끌려간 아들을 기다리던 외종조할머니도 죽었다 ✽상강 지나서 얼음이 멍가나무 대궁에 빨갛게 얼던 날 의용군에 끌려간 아들을 기다리던 외할머니는 컹컹컹 마른기침을 하며 윗방에서 곰방대에 성낭 불을 켰다 그런 밤이면 하얀 사기대접의 자리끼에는 살얼음이 얼었다 오장육부가 타고 있는 외할머니의 입에서는 연기가 났다 기다리다 지친 눈두덩이를 훈연하던 그 연기가 매웠던지 어머니는 끌려가지 말라고 나를 삼대독자로 만들었다 제사복이 확 터진 아내가 구시렁거린다 간 사람도, 기다리던 사람도 신생대의 먼지가 된 지금 외할머니의 손자도 할아버지가 되어 훈연되고 있는 중이다 ✽ 서리가 오기 시작한다는 날 순대 순대 국밥을 먹는다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 누군가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점심때 시장에서 순대국밥을 먹는다 마음에 점 하나 툭 찍어놓는 점 심 때 순하지만 대차게 한 번 살아보라는 순대국밥을 먹는다 순대를 채우기 위해 평생 땅이나 후빈 돼지는 이승을 떠나고 나서 남의 살과 피로 순대를 채웠다 땅이나 바라보고 살은 늙은 아내를 데리고 오물오물 순대를 채우기 위해 순대 국밥을 먹는다 목숨 부지 한다는 것은 늘 허기가 심해서 남의 피와 살로 내 순대를 채우는 것이다 이승을 떠난 돼지가 보시한 순대로 늙은 아내와 나는 행복하지만, 잠시 윤회하는 시간 속에서 마주 보는 것이다 유준화 충남공주출생 2003년 불교문예 시집. 초저녁 빗소리 울안에 서성대는 밤 네가 웃으면 나도 웃는다. 외 수상 : 충남시인협회. 충남문인협회 작품상  
789 화관 외1편/박경조 file
편집자
474 2019-11-30
화관 전생을 온전히 지워내야만 비로소 꽃이 된다는 상사화 봄에서 겨울로, 머리끝에서 발끝으로 눈물로 꽉 찬 당신의 비밀과 빗물로 꽉 찬 나의 생각까지 다 닦아내지 못하고도 한 통속이라 기운차게, 이 습한 화단을 뚫고 내 필생 속에 핀 당신 참 명랑한 화관입니다 미완(未完)은 여기서 이렇게도 지극하나 봅니다 새벽 비 내리는 구간 모란 촉에 스며드는 수국 꽃방을 넓히는 놀이터에서 저 혼자 미끄럼틀 타는 발정 난 길고양이 울음, 마음 쓰이는 인력시장 박 씨 발목 잡는 새벽에 홀로 깨어 나를 단련시키는, 나를 움직이게 하는, 약력/경북 군위출생 2001년 계간 『사람의 문학』으로 등단. 현재 『사람의 문학』편집위원 시집 『밥 한 봉지』, 『별자리』 출간  
788 늙은 호박 외1편/채형복 file
편집자
473 2019-11-30
늙은 호박 친구 농장에서 얻어온 호박을 가득 싣고는 집으로 돌아와 차 트렁크를 여는데 늙은 호박 하나 떨어져 내리막길을 굴러 데굴데굴 마을 아래로 신나게 치달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잡을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지켜만 보는데 달달하고 맛있는 전을 부쳐 냠냠 짭짭 먹을까 몸에 좋은 진액을 우려내어 주욱 쭉 빨아 먹을까 행복한 상상이 저 멀리 도망가고 있다 자신을 죽인 뒤 시신을 토막 쳐서 세상의 구경거리로 삼지나 않을까 여러 대의 수레에 팔다리를 나누어 묶고는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게 겁이 났을까 사지를 탈출한 둥근 호박, 경사진 길을 가로질러 잘도 굴러간다 하늘이 사람에게 준 권리 중에 자유보다 귀한 것이 없다던 근엄한 인권법학자는 어디 갔나 풀숲에서 꼼짝 않고 숨어있는 늙은 호박을 기어이 찾아내 포박하고는 다시는 도망하지 못하도록 음습한 창고에 가두어 두었다 호박손 팔다리가 없는 호박은 순 백수건달 심보로 와, 우짤낀데 죽일라카마 한 번 죽이봐라 일단 머리를 들이밀며 앞으로 쑥쑥 나아가고 넝쿨을 똥배 삼아 땅을 힘차게 딛고 일어선다 벽을 만나면 허리를 꺾어 수직으로 덤불을 만나면 가시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는 슬그머니 기어올라 넓고 거친 잎으로 덮어버리고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꽃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호박이 호기를 부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가늘고 긴 덩굴손이 있어 누구든 잡히는 대로 꼼짝 못하게 꽁꽁 얽어매고 마는 까닭이다 호박은 세상에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하늘 향해 뻗는 호박손의 희망은 헛되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호박손아, 너의 갈라진 손가락을 활짝 펴 비겁한 세상의 목울대를 콱 조아버려 숨통을 끊어버려 한여름 무더위에 지친 텃밭 작물은 모두 날개를 꺾고 고개 푹 숙인 채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는데 덩굴손을 죽창으로 앞세운 호박만 삼삼오오 대열 지어 기세등등 힘차게 진군하고 있다 채형복/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경작가회의 회원. 펴낸 시집으로 <바람이 시의 목을 베고>(2017년 상반기 세종도서 문학나눔 시부문 선정) 및 <칼을 갈아도 날이 서질 않고>(2018)를 비롯 여러 권이 있다.  
787 우리 집이 없다 /美山정경해 file
편집자
501 2019-11-01
우리 집이 없다 / 고향 친구가 모친상을 당했다. 그동안 멀리 떨어져 산다는 핑계로 고향의 경조사에 일일이 참석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직접 가서 조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집을 나서기 전,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는 친구 근자에게 함께 가자고 연락했다. 근자는 조의금만 전하기로 했다면서 참석하지 않을 뜻을 비쳤다. 고향에 대한 애착이 많고 동창생들의 경조사에 빠지지 않는 근자가 왜 그럴까. 의아했다. 하지만 조문하고 우리 엄마 집에서 같이 하룻밤 묵자는 말에 그러겠다고 말을 바꿨다. 그러면서 이번에 가면 고향 마을을 안뜸까지 샅샅이 훑어보자고 한 마디 덧붙였다. 고향땅에 있는 장례식장을 찾았다. 영정 속에서도 너그러운 인상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망자亡者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상주에게 조문했다. 89세의 망자가 돌아가시기 전 크게 고생하지 않았고, 자손들에게 할 이야기도 하고 가셨다는 말에 ‘망자가 복 받으신 분’이라며 모친상 당한 친구를 위로했다. 동창생들이 모여 있는 탁자로 다가갔다. 오랜만에 모인 동창생들은 망자가 내 준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다시금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유쾌했다. 우리는 조문하러 왔다는 사실도 잊은 채 웃고 떠들었다. 술잔도 몇 순배 돌았다. “우린 우리 집이 없다!”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에 열을 올리던 근자가 갑자기 볼멘소리를 했다. 뜬금없는 그 말에 나는 무슨 그런 말을 있느냐며 웃었다. 근자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그분들이 사시던 고향집은 마을 입구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근자는 집안의 외아들인 오빠가 한 달 전에 돌아가셨고, 고향집은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갔다고 말했다. 둘러앉은 동창생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근자는, 우리 집이 남의 집으로 되었다는 말을 피붙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그것도 며칠 전에야 전해 들었다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밤이 이슥해서 장례식장을 나왔다. 조문을 함께 했던 동창생의 차를 타고 고향 마을에 이르렀을 때, 근자가 여기서 내려달라고 말했다. 근자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마을 입구 첫 번째 집인 자신의 고향집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기웃거리지도 않고, 새롭게 둘러쳐진 철망을 따라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가 역시 철망으로 만든 대문 앞에서 한동안 서성거렸다. 그 모습을 이만큼 떨어져서 바라보며 먹먹했다. 우리는 한밤중에 나타난 딸과 딸의 친구를 보며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는 엄마와 하룻밤을 보냈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친정집을 나섰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마을 안쪽 길로 향했다. 가족이 종종 함께 둘러보긴 했지만 친구와 나란히 걸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마을 안쪽은 추억 속에 남아 있는 삼사십 년 전 모습이 아니었다. 그 시절, ‘큰길’로 부르던 대로大路는 골목길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조붓하다. 길 양 옆으로 다닥다닥 붙어서 돌담을 사이에 두고 소곤거리던 기억속의 집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멋스런 집들이 우뚝 우뚝 서 있었다. 삼거리 미애네 집 옆 느티나무만이 옛날과 같은 모습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마을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새로 지은 번듯한 집 일색이다. 그에 반해 가뭄에 콩 나듯 두어 채 남아 있는 옛집은 장난감처럼 작고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에는 대궐 같던 집이 저렇게 초라할 수 있는지. 그나마 내가 어릴 적 아늑하게 느꼈던 우리 옛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풀밭으로 변했다. 안마당은 화단을 만들 수 없을 만큼 비좁아도 집채는 제법 컸다고 기억하는데, 집터를 보니 ‘나 혼자 누우면 딱 맞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았다.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까지 핑 돌았다. 삼거리를 지나 고샅길로 들어서니 발을 내딛기 어려울 정도로 풀이 무성했다. 풀숲을 헤치며 순예네 집, 병수네 집, 애란네 집, 범순네 집, 현순네 집을 더듬었다. 그 반대쪽에 있던 훈자네 집, 종수네 집도 훑었다. 그 집들도 어김없이 큰 건물이나 텃밭으로 변했다. 근자는 집에 대한 기억이 남달랐다. 풀밭으로 변한 집터만으로도 집의 형태와 집주인을 빠짐없이 기억해냈다. 겉모습이 이미 낯설게 변해서 집은커녕 그곳에 살던 사람의 이름조차 가물가물했는데, 선훈네 집, 경선네 집, 성기네 집, 금숙이네 집, 종국이네 집, 옥순네 집을 읊었다. 나는 근자의 말을 듣고 나서야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근자네가 여러 번 이사를 했다는 사실도 그렇게 기억해냈다. 막연하게 마을 입구에 있는 집이 근자네의 유일한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달랐다. 위뜸에만 해도 두 집을 거쳤다. 근자는 성기네 집 옆에서도 살았고, 금숙이네 집 위쪽에서도 살았다. 아래뜸으로 내려온 것은 십여 채의 개량주택이 들어서던 1980년이었다. 최근 남의 손에 넘어갔다던 마을 입구 첫 번째 집은 근자네 소유의 밭에 새로 지은 집으로 근자가 결혼한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근자는 고향집에 대해 애틋했다. 그래서일까. 전에 없이 말이 많았다. 집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만으로도 한참이나 걸렸다. 눈빛은 허망하게 허공을 응시한 채 고향집 추억을 곱씹었다. 우리 집이 없다며 침통한 표정이던 근자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근자가 힘주어 말했던 ‘우리 집’이 부모님께서 살아계셨어도 남의 손으로 넘어갔을까. 부모님이 안 계신 것도 서러운데 정들었던 집까지 남의 것이 되었을 때, 그 마음이 어떨까. 내가 걸어 온 지난날을 모두 알고 있고, 그것을 추억하게 해 주며, 부모님처럼 언제라도 두 팔 벌려 반겨줄 ‘집’이 고향땅에 없다는 것은 얼마나 서글픈 일일까. ‘오빠가 고향집을 팔려고 내놓았다는 말을 들었더라면 빚내서라도 그 집을 샀을 것’이라고 한탄하던 근자. 허공에 대고 소리치던 근자의 말이 귓전을 맴돈다. “부모님이 장만해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시던 집은 오빠의 집도 아니고, 오빠의 아들인 장손의 집도 아니야. 그것은 그 누구의 집도 아닌 우리 집이야. 우리집! 우린 이제 그 ‘우리 집’이 없어진 것이라고!” 정경해 약력) 국제PEN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경북문인협회, 숲문학회 회원 수필집 <같은 빛깔로 물들어 간다는 것은>, <까치발 딛고>, <내 마음의 덧신> 출간  
786 이별의 공식 외1편/남태식 file
편집자
3730 2019-11-01
이별의 공식 잎이 돋기 전에 꽃이 먼저 피듯 꽃이 진 뒤에 잎이 뒤늦게 돋듯 이별 전에 이별이 있었고 이별 후에 이별이 있었다. 바람이 오기 전에 눕는 풀처럼 바람이 지난 뒤에 굳는 뿌리처럼 머물 수가 없어서 서둘러 울고 오래 아팠지만 망각은 없었다. 상처 가장 먼저 떠오르거나 떠올렸어야 하는 말이었으나 그 날 늦어서야 떠올랐던 말은 상처였다. 내 의식의 밑바닥에도 어떤 강박이 있었을까. 강박이 있었다면 이 강박 역시 상처이겠지. 드러내어야 함에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상처. * 약력 남 태 식 2003년『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속살 드러낸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내 슬픈 전설의 그 뱀』『망상가들의 마을』, 리토피아문학상(2012) 김구용시문학상(2016)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