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골문자

 

 

주인장은 뿌연 안개라고 했지만 철가방 이음새마다 얼룩진 손금이 앉아있는 줄은 몰랐어 잘 우러난 노을이 철가방의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토바이가 땀으로 범벅이 된 눈을 비비자 철가방, 허공을 날지 뭐야 이 빠진 그릇은 한동안 공중그네 타고 허공에 머물렀지

 

깨진 무릎과 등에선 금세 능소화가 피었지 흡반(吸盤)이라 부르는 뿌리는 사내의 몸을 타고 곧장 주인장한테 달라붙었지 주인장은 정신과의사고 배가 볼록하여 복어같이 생겼고 낚싯바늘에도 잘 매달렸지, 주사기는 매번 팔뚝을 찌르고 무슨 박사라고 했는데 꼭 돌팔이 같아 가끔 정신도 깜빡이는, 수술실, 붉은 조명이 켜지자 그는 푸른 전투복을 입고 사라졌지

 

촘촘히 바느질된

깨진 등,

한 번도 기록되지 못한 운명선은

차라리 깊게 패인 운명이라고 해두지

 

칠일 째인가 추위에 견디지 못한 덩굴나무는 주황색꽃이 피었고 영양실조였는지 기억상실증이었는지 몰라도, 새벽 별을 보며, 와디럼 낙타처럼

 

마침내 하얀 병동 붉은 꽃으로 지고 말았지 한 번도 기록되지 못한 꿈을 적어보겠다고 그 난리를 치더니 몽유병환자처럼 중얼거리더니

 

 

 

 

 

벽화에 세 들어 사는 남자

 

방천시장, 김광석 벽화거리

사람들이 흘리고 간 지문을 지우며 비가 온다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무료하다

골목 한 쪽에 쪽방 사내가 있다

 

벽화에 얹혀 산 지 두 달 남짓

한 달에 세 번씩 맡기던 와이셔츠도

세탁소비닐을 덮어쓴 채 봉인되었고

수염은 텁수룩한 시간만큼 자랐다

그새 제법 골방 같다

 

방천 둑길을 따라 개나리가 휘어지면

사내도 제법 휘어진 사연을 둘둘 말아

투고하거나 이 거리를 벗어날 것이다

골목은 사내가 빠져나간 것과

상관없이 낡아갈 것이고

점점 무덤의 둥근 곡선을 닮아갈 것이다

 

서른 즈음의 휴식도

잠깐 동안의 불륜이거나

짧은 사랑으로 끝나는 것이다

어쩌면 사내는 詩를 낳기도 전에

꼬리 없는 온음표로 태어나고

 

어느 새벽, 내리는 비처럼

많이 가벼워진 것들이

종국엔 떠나거나 무너질 것이다

 

 

◎ 정훈교 : 2010년 계간 『사람의 문학』등단, 젊은시인들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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