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

 

김진희

 

 

아무도 손대지 않은 새 책

지문 묻히는 맛으로 도서관에 간다

그 맛에 혼자 우쭐하며

마종기 시집을 넘기는데

누런 얼룩이 보인다

보일 듯 말 듯한 얼룩

아무도 몰래 오줌을 지린 자국 같기도 한

맑은 하늘에 살짝 구름이 스친 것 같기도 한

얼룩

 

‘자장가’라는 시가 쓰인 책장은

모서리부분이 아주 미세하게

삼각으로 접혀있다

누군가 그 시를 읽고 속으로 울었나보다

치매 걸린 늙은 어머니에게 자장가 불러주는

나이든 아들의 모습을 자신에게 겹치며

가슴이 짜안해져

조용히 모서리를 접으며 붉어지는 두 눈을 누르며

무너지는 자신의 가슴 한쪽에도 슬그머니

사선으로 작대기를 받쳐두었나

 

나는 자국을 따라 살짝 접었다 펴본다

 

책장 모서리가 고개 숙이며 안녕,

인사를 한다

 

 

느닷없는, 죽음

  

 

겨울이 시작될 무렵,

밤길에 느닷없이 튀어나온 고라니에

가슴 쓸어내린 일이 있다 자동차

범퍼에 부딪치는 둔탁한 느낌에 브레이크도 밟지 못하고

두 발을 벌벌 떨었다 어린 고라니는

다시 일어나 겅중겅중 제 집을 찾아 떠났지만

가끔 고라니의 안부가 궁금했다 그리고

 

느닷없는 죽음이 이어졌다

80년대 민주화 투쟁으로 심한 고문을 받은 이가

고문후유증으로 느닷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괴롭힘 당하고 두드려 맞았던

중학생이 또 느닷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학교는

서둘러 방학을 했다 아이는 친구들에게 맞아

멍이 들면서도 엄마, 아빠 앞에서 겅중겅중 걸으며

어리광을 부렸다 백 년이고 천 년이고 하늘나라에서

엄마, 아빠를 기다릴거라고 유서에 남겼다

어린 몸 받아줄 따뜻한 두 손이 없어서

공중의 몸 땅에 내려줄 부드러운 목이 없어서

계단 난간에 아이를 매달고 겨울바람 속에서 부르르

떠는 아파트, 그 안의 우리

 

오래 고통 받은 영혼은 이 땅에 두 발 붙이는 걸 거부하고 안식처를 찾아 서둘러 방학식을 하는가

 

우리는 늘, 뒤늦게, 브레이크 밟을 정신도 없이

멍청하게 경악을 한다 두 발을 벌벌

떨면서도 다시 시동을 걸고 가던 길을 간다

비루한 일상을 향해

속도를 올린다

 

 

**1969년 부산 출생. 제1회 경남작가 신인상, 시집 <굿바이,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