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마다 칼을 품고 산다

 

고창근

 

 

동료들은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더 사람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드디어 삼성이 이겼다고. 이대로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그는 어젯밤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 하고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동료들에게 한 말을 되풀이했다. 9회 초. 양준혁의 역전 3점 홈런. 얼마나 짜릿한 홈런이었던가. 9회 말에는 구원투수인 오승환이 나와 퍼펙트로 막아냈다.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1점차 승부였다. 삼성의 4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이었다.

“무슨 소리야? 하마터면 쏟을 뻔 했잖아.”

정이 그를 보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커피가 들은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맞아, 정대리. 자네는 에스케이가 이길 거라고 했었지. 거봐. 결국은 삼성이 이겼잖아. 내 말이 맞았지?”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킥킥.”

경리를 보는 미스 박이 혼자 킥킥 웃었지만 아무도 따라 웃지 않았다.

“에이 이 사람, 싱겁긴. 하긴 아쉬운 경기였지. 다들 삼성이 이길 줄 알았는데.”

이번엔 홍이 나섰다.

“이길 줄 알았는 게 아니라 분명히 이겼다고. 양준혁이 홈런 치는 걸 봤잖아. 그 만세 타법 말이야.”

그는 왼손으로 공을 치고 나서 두 팔을 하늘을 향해 쭉 뻗는 시늉을 했다. 오른손잡이인 그의 행동이 약간 어색했지만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솟아오르는 환희는 어쩔 수 없었다.

“아, 저 양반은 아침부터. 그리고 제발 면도 좀 하지.”

“뭐라고? 아침에 했는데.”

“했는 게 꼭 원숭이 같아?”

“됐어, 그만하자구. 그래도 우리 자동차샵에서 판매왕이잖아.”

정이 홍의 등을 두드리며 커피를 마신 종이컵을 꾸겨 휴지통에 집어넣었다. 모닝커피를 마신 게 아니라 쓴 한약을 마신 표정이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다들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믹스 커피를 종이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는 좀 더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다들 자리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도 자신의 자리로 앉았다. 동료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컴퓨터가 부팅되기를 기다렸다. 바탕 화면이 뜨자 양준혁의 만세 타법이 화면 가득 채워졌다. 그는 다시 한 번 어젯밤의 역전 3점 홈런을 떠올리며 인터넷 아이콘을 클릭했다. 초기 화면인 H일간 스포츠 사이트가 뜨기를 기다렸다. 대리점장은 그의 초기화면에 대해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다. 포르셰가 초기화면으로 뜨도록 명령을 내렸지만 그는 하루 이틀 미루고 있던 참이었다. 어젯밤의 환희를 한 번 더 느끼기 위해 빨리 인터넷이 연결되기를 바랐다.

“현대리님, 점장님이 찾으시는데요.”

미스 박이 그를 불렀지만 그는 컴퓨터에 정신이 팔려 듣지를 못 했다.

“이거 뭐야.”

그는 하마터면 커피를 자판기에 쏟을 뻔했다.

SK ‘퍼펙트 우승’ 4년 새 세 번째 정상. 야구 명문 확인. MVP 박정권.

모니터에 눈을 박고 있던 그는 몇 번이나 눈을 끔벅이며 화면을 보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SK가 우승이라니. 그는 다른 스포츠 사이트로 옮겨갔지만 내용은 다들 비슷비슷했다. SK의 완승, 삼성의 완패였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어젯밤을 떠올렸다. 분명히 저녁 6시에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처음엔 김재현의 홈런으로 SK가 2점을 앞서 갔고 그 점수가 투수전으로 이어지며 8회까지 갔다. 9회 초가 되자 그때까지 잘 던지던 김광현이 힘이 떨어져 조동찬에게 볼넷을 주더니 박한이에게 안타를 맞고 강판 당했다. 주자는 무사 1 3루. 4번 타자로 들어선 양준혁이 바뀐 구원 투수 김대현으로부터 3점 홈런을 치지 않았던가. 극적인 삼성 역전 우승. 자막엔 그렇게 크게 나왔다. 그는 우산이 없어 가을비를 흠뻑 맞은 느낌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현대리님 점장님이 찾으셔요!”

미스 박의 말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빨리 가 보셔요. 몇 번이나 말해야…….”

미스 박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그를 보다 눈이 마주치자 말을 끊었다. 그는 얼른 스포츠 사이트를 닫았다.

“참, 양준혁이 은퇴한 것은 알고 있지?”

홍이 점장실로 가는 그의 등 뒤에 말을 던졌다.

“그런 양준혁이 언제 엔트리에 포함 되어 홈런을 쳤지?”

정의 말이 그의 뒤통수에 와 꽂혔다. 순간, 그는 양준혁의 은퇴 경기를 떠올렸다. 관중들의 환호에 눈물을 흘리던 모습에 그도 울컥, 했었다. 양준혁이 은퇴한 것은 맞은데 어떻게 된 거지? 어제 홈런 친 것은 무엇인가. 그는 무슨 속임수에 빠진 느낌이 들면서 등골이 서늘했다. 며칠 전에도 비슷한 느낌이 든 일이 있었다. 퇴근을 하고 아파트로 차를 몰고 들어가는데 살고 있는 동이 생각나지 않았다. 수위실에 있는 수위의 얼굴은 낯익은데 건물은 낯설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동과 호수를 생각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환장할 일이었다. 차를 몰고 이쪽 동에서 저쪽 동 끝까지 몇 번이나 오갔지만 눈에 익은 동은 띄지 않았다.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겨우 사는 동과 호수를 알았다. J와 잠자리를 한 후에는 그 증세가 심하게 나타났다. 제기랄! 그는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그때의 등골이 서늘한 느낌을 지금도 그는 잊을 수 없었다. 그 후로도 자주 무엇을 잊어버렸다. 출근하려고 차 문을 열려다 열쇠를 안 가져온 것을 알았고 고객과의 약속도 번번이 잊어 고객과 점장에게 비난을 받곤 했다. 그는 심호흡을 한번 하곤 점장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안에서 점장의 커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갑자기 긴장이 되었고 자신도 모르게 손이 윗옷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칼의 손잡이가 손바닥에 전해 왔고 그제야 그는 다소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꼈다.

“어서 와요.”

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그는 친절한 점장의 태도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요즘 힘들지요? 우선 자리에 앉아요.”

점장은 그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하곤 손수 커피를 타왔다. 그는 긴장을 했다. 점장이 손수 커피를 타는 경우는 드물었다.

“자, 한 잔 마셔요. 요즘 힘들 텐데 쉬엄쉬엄 해요. 우리 샵의 실적이 현대리 손에 달렸는데 무리하면 안 되지.”

점장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권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커피를 마시며 점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점장은 오늘은 주식이 올랐다는 둥, 하나마나한 소리만 지껄였다. 그는 사약을 먹는 심정으로 커피를 마시며 점장 뒷벽에 붙은 그래프를 바라보았다. 직원들의 이름이 가로로 적혀 있었고 이름 위에는 막대그래프가 그려져 있었다. 그의 이름 위에 있는 막대가 제일 길었다. 그 옆에 10월의 목표, 현재 누적 실적이 적혀 있었다. 10월의 목표에 현재까지의 누계가 3대가 모자랐다. 오늘이 10월 29일. 그렇다면 이틀 내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저 3의 숫자는 채워야 할 것이었다. 2대는 곧 계약 될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 문제는 한 대였다.

“다 마셨으면 나가봐요.”

점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뜻일까. 그는 점장의 속마음을 짐작하려고 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한 대가 남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자 명치께가 싸르르 쓰려왔다. 점장은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밤에 통 잠을 못 잔다던데, 정말이에요?”

그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키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아니지요. 우리 샵의 판매왕께서 몸이 아프면 안 되지요. 몸이 건강해야 돼요. 며칠 사이에 많이 말랐어요. 힘내요. 돈을 많이 벌어야지요.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인데.”

“…….”

“참, 면도 좀 해요.”

“했는데…….”

그는 손바닥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까칠한 느낌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왔다. 최근 들어 수염이 급속도로 자랐다. 아침에 면도하고 출근해서 거울을 보면 어느새 길게 자라나 있었다. 털이 난 부위도 늘어 눈 주위만 빼곤 온통 털이었다. 몸에도 처음엔 가슴에만 털이 좀 나는가 싶더니 온 몸이 갈색 털로 뒤덮었다. 샤워를 할 때 옷을 벗고 거울 보면 마치 원숭이 같았다.

“했는 게 왜 그래요? 얼굴이 온통 털인데. 전에도 그렇게 털이 많았었나요? 깔끔해야지요. 그게 영업하는 사람의 기본이고 고객에 대한 예의고.”

“알겠습니다.”

“이제 곧 과장으로 승진도 할 텐데.”

점장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점장실을 나왔다. 등에는 땀이 식어 서늘했다. 그가 점장실을 나오자 동료들이 그를 일제히 바라보았다. 그는 되도록 그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벌써 10월인데도 사무실이 후덥지근한 것 같았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세 가지는 항상 가지고 다녀야 한데이.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가 어릴 때부터 한 말이었다. 첫째가 돈, 남자가 수중에 돈이 떨어지면 안 된다. 둘째는 거짓말, 셋째는 우산.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모르고 들었는데도 그 말이 잊히지 않고 계속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우산이 없어 가을비를 흠뻑 맞은 느낌은 여전했다.

“현대리, 무슨 기미 없어? 오늘 내일 중에 우리 팀이 한 대는 팔아야 하는데.”

팀장이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 그는 점장에게 얻어 마신 커피 맛이 아직 입안에 있는 듯 침을 삼켰다.

“없는데요.”

“허허. 이거 어쩐다? 안 그래도 우리 팀이 꼴찐데 말이야.”

팀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개인 실적은 1위지만 그가 속한 팀은 샵에서 꼴찌였다.

“하여튼 신경 써봐.”

팀장은 자신의 자리로 가며 말했다. 자폭하라는 의미였다.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팀원들이 차를 사서 실적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한다? 그는 곰곰이 생각했지만 하루 이틀 만에 한 대를 팔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곧 과장이 된다는 점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 갑자기 가슴이 방망이질 치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손에는 금방 땀이 나서 축축해졌다. 언제나 불안은 이유 없이 갑자기 찾아왔고 심장은 즉각 반응을 나타냈다. 몇 개월 동안 불면증에 시달리고부터 그 증세가 부쩍 심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에 손을 넣어 칼을 만지작거렸다. 불안하거나 가슴이 두근거릴 때 칼을 만지면 안정이 되었다. 칼은 미국 SLP2였다. 손잡이 위에 후레쉬가 달렸고 불꽃스틸점화 장치도 되어 있었다. 칼날은 스테인리스로 3인치짜리였다. 그는 아무래도 어젯밤 잠을 못 자서 그렇다고 칼을 만지며 생각했다.

그가 칼을 구입한 것은 우연이었다. 몇 년 전 차를 팔고 고객과 함께 갤러리에 들렀다가 칼을 사게 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작품은 생각나는 게 없고 딱 한 작품만이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작품은 단순했다. 사람 키만 한 거울 위쪽에 식칼을 붙여놓은 작품이었다. 이런 것도 작품인가 하며 그냥 지나치르던 순간이었다. 식칼이 천장의 불빛에 반짝 빛났고 그 느낌이 강하게 가슴으로 느껴졌다. 그는 작품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마음이 긴장되었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작품 앞에 섰다. 그때 그의 전신이 거울에 드러났고 정확하게 이마 부분에 식칼이 걸려 있었다. 옆에는 ‘나는 날마다 칼을 품고 산다’란 제목이 붙어 있었다. 처음 든 섬뜩한 느낌이 서서히 잦아들었고 곧이어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그는 한동안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자신과 이마에 걸린 칼을 바라보며 작품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마치 칼이 자신이 품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을 느꼈다. 그 작품을 보고 칼을 사게 된 것이었다. 칼을 만지고 있으면 불안하지 않았고 가슴도 두근거리지 않았다.

그 후로 그는 칼을 몸에서 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외출할 때면 지갑이나 차 열쇠보다도 칼을 먼저 챙겼다. 칼이 품속에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안정되었고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나 사람은 실수가 있는 법이었다. 언젠가 까다로운 고객과 상담을 앞둔 때였다. 며칠 동안 공을 들였는데 살 듯 말 듯했다. 그 날은 이상했다.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불안한 느낌이 스멀거렸다. 그는 단지 어제 잠을 자지 못 해 그럴 거라고 위안하며 고객과 상담 시간을 기다렸다. 고객과 상담 시간이 다가오는데 불안 증세가 더 심해졌다.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았다. 사무실에 앉아 있지 못 하고 연신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스포츠 신문의 야구란을 보기도 했다. 그래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곧 고객이 닥칠 시간이었고 차를 파느냐 마느냐 기로에 있던 상담이었다. 그는 고객이 올 시간이 되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칼을 만지면 좀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칼이 없었다. 그는 허둥대었다. 이럴 일이 없는데. 분명 칼을 가지고 나왔는데. 그는 상의 양복 왼쪽 오른쪽뿐만 아니라 바지의 모든 주머니도 뒤졌다. 칼이 없었다. 그제야 그는 아침에 출근하다 양복에 얼룩이 진 것을 보고 집으로 되돌아가서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왔다는 걸 알았다. 창밖을 보니 고객이 사무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불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칼을 확인하기 전에는 불안해도 칼을 만지면 된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을 참을 수 있었는데 칼이 주머니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마음은 더욱 더 불안했고 가슴은 곧 터질 듯이 뛰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고객은 자신을 맞이하러 나오는 줄 알고 그에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는 불안해서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연히 고객을 그냥 지나쳤고 택시를 타고 정신없이 집으로 갔다. 아내는 외출하고 없었고 옷은 안방 침대 위에 있었다. 다행히 칼은 양복 안쪽 주머니에 그대로 있었다. 그는 재빨리 칼을 꺼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칼을 움켜쥐었다. 마음이 서서히 안정이 되었다. 그렇게 30여 분이 지났을 때에야 그는 고객이 사무실로 들어오는 걸 봤다는 기억을 했고 부리나케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사무실에서 기다리는 건 고객이 아니라 점장과 팀장이었다. 점장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날렸고 팀장은 잡아먹을 듯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변명을 하지 못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외출할 때면 몇 번이나 칼이 주머니에 있는지 확인했다.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고객 명단을 훑어보았다. 급하게 차를 부탁할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달에는 자폭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는 J에게 전화를 했다. 어젯밤에 만났지만 전화를 해 봐도 손해 볼 거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J는 잠이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점심이나 같이 할까 해서.”

그는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J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을 했다.

“월말이구나.”

“응. 하지만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건 아니고. 내 실적은 채웠거든.”

그는 J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체면은 구겨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알았어.”

J는 대신 드라이브를 시켜달라고 했다. 점심은 선약이 있다고 했다. 차를 팔아줄 테니 드라이브 시켜달라는데 거절할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좋지.”

그는 흔쾌히 대답하며 며칠 전 그녀에게 판 스포츠카 포르셰를 떠올렸다. 개구리 모양으로 납작 엎드려 눈을 동그랗게 뜬 모양의 911은 카레라s였다. 그가 미소를 짓고 있을 때 팀장은 그를 보았고 그는 팀장을 향해 엄지와 중지를 모아 동그라미 사인을 보냈다. 팀장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랍에서 면도기를 꺼내 화장실로 갔다. 어느새 수염은 얼굴을 덮고 있었다. 아무래도 병원에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얼굴에 거품비누를 발랐다. 그의 온 몸에도 점점 긴 털이 많이 나기 시작했다. J를 만나 섹스하고 나면 털이 부쩍 빠른 속도로 자랐다.

그는 면도를 하고 나서 사무실로 와 자리에 앉았다. J를 만나기 전 잠시 눈을 붙일 요량이었다. J를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의자에 머리를 뒤로 눕히고 눈을 감았다. 그리곤 J의 벗은 몸을 상상했다. 커다란 유방, 그 큰 유방 사이에 얼굴을 묻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J는 30대 중반의 나이로는 믿기는 않는 몸매였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몸매였다. 하루에 무슨 일이 있어도 2시간 이상은 운동한다는 그녀였다. 그는 처음 J를 만났을 때를 생각하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J는 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었는데 호박이 덩굴째 굴러온다는 말을 그때만큼 실감한 적은 없었다.

처음부터 J를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J는 고객으로 샵을 찾았고 그는 딜러로서 그녀를 맞이했다. 그녀는 붉은 색 원피스를 입고 갈색 선글라스를 쓴 채 사무실에서 마주 앉았다. 선글라스나 옷이나 가방이나 구두나 모두가 명품이었다. 보는 순간 주눅이 들 정도였다.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이 속옷이 보일까 아슬아슬하기도 했다. J는 처음부터 차종을 얘기했다. 포르셰였다. 포르셰는 외국차종에서도 고급이긴 했지만 더욱 의아한 것은 남자들이 주로 타는 스포츠카였다. 처음에 그는 우아한 벤츠나 BMW를 권할 작정이었다.

“아니에요. 구일일 카레라 에스로 해주세요.”

J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스포츠를 좋아하시나 봐요?”

그는 재빨리 포르셰의 자료를 챙기며 말했다. 그녀는 대답 없이 역시 미소만 지었다. 그는 포르셰에 대해 설명했다.

“일반 차량은 클러치가 하나인데 반해 포르셰는 피디케이 차량으로서 클러치가 두 개입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대꾸 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듣는 둥 마는 둥 자신의 얼굴만 바라보는 그녀가 신경 쓰였지만 그는 열심히 설명했다.

“…… 기어가 바뀔 때 클러치가 떨어지는 느낌, 즉 공회전 느낌이 전혀 없으며 빠른 변속을 자랑합니다. 그러니까 기존 기어 오단이 아니라 칠 단 기어로서 …… 또한 포르셰는 엔진이 뒤에 있습니다.”

역시 그녀는 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는 눈치 안 채게 심호흡을 한 후 계속 설명했다.

“…… 이는 브레이크를 밟을 때 전륜과 후륜의 밸런스를 맞추기가 쉽고 가속 때는 구동되는 후륜에 좀 더 많은 힘이 실리기 때문에 바퀴가 헛돌 확률이 낮아지는 장점이…… 또한 시속 백 킬로로 주행하다 발에 조금만 힘을 줘도 시속 이백 킬로가 쉽게 넘어 버리고…… 가고 싶은 방향을 머릿속으로만 생각해도 어느새 차의 앞머리는 그쪽을 향해 버리는…… .”

“어, 됐어.”

갑자기 J가 말을 끊고 반말을 했다. 그는 잘못 들었나 싶어 말을 멈추고 J를 바라보았다. 그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는 J는 선글라스를 벗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야 나. 전유정.”

J는 하얗고 조그마한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는 손을 잡고 J를 빤히 쳐다보았다.

“예?”

“삼동초등학교. 전유정. 너 현수혁 아냐? 맞지?”

J는 맞지? 하면서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깔깔깔 웃었다. 그는 잠시 의아하게 J를 바라보았다. 전유정. 그는 분명 아는 이름이었다.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을 뿐만 아니라 그가 살던 시골의 옆 동네에 살았기에 아는 것은 당연했다. 초등학교 졸업 뒤 가족이 서울로 이사하고 난 뒤 만나거나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다. 순간 그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솟구쳐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인생을 살다보면 예기치 않은 행운이 올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예감하고 있었다.

“설마, 그 유정이?”

그는 반신반의했다. 단발머리에 코 흘리게 그 유정이가 이 유정이라니.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았다.

“그래. 유정이. 아는구나.”

J는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샵에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모두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동료들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찬찬히 J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약간 갸름한 얼굴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닮은 구석이라곤 없었다.

“야, 여기서 만나다니 반갑다야. 동창회는 나가니?”

말투까지 서울말을 쓰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럼. 서울에만 초등 동기가 많아. 난 총무 맡고 있고. 아이러브서쿨에 홈쥐도 있어. 근데 어떻게 그렇게 연락이 없냐?”

그제야 그는 그 유정이가 이 유정인 것을 알았다. 코흘리개 시절의 동기들의 이름과 안부를 서로 묻고 하다가 이럴 게 아니라 점심이나 먹으며 얘기하자며 일어섰다. 그는 그런 와중에도 서류를 챙겨 J 코앞에 내밀었다. J는 계약서를 작성하고 계약금 5백만 원을 카드로 계산했다. 차 나오면 곧장 결제할게, 예쁘게 웃었다. 차가 나왔을 때 결제한 사람은 J가 아니라 모르는 남자였다. 그 남자에 대해서 그는 당연히 물어보지 않았다. 그와 J는 점심을 먹고 술을 간단히 한 잔 했다. 그러나 낮술은 금방 취했고 둘은 후식으로 커피를 한 잔 마시자며 함께 나가다가 호텔로 직행했다. 이런 행운이 찾아오다니. 그 날 그는 몇 번이나 믿기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보기까지 했다. 그 후로 그는 J를 자주 만났고 그리곤 술을 마시고 당연한 것처럼 섹스를 했다. 섹스는 또한 당연한 것처럼 J가 주도했다.

점심을 먹고 나자 J가 빨간 포르셰를 몰고 사무실에 나타났다. 동료들은 그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는 의기양양하게 J에게 갔다.

“타.”

J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 그는 차에 탔다. 어디 갈 거냐고 그는 묻지 않았다. 운전대는 J가 잡고 있었다.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충주 갈까? J가 혼잣말로 하다가 네비를 켰다. 충주를 입력했다. 170km로였다. 중부내륙고속으로 고! J는 차를 쌩 몰았다. 운전은 계속 J가 했다. 그가 하려고 했지만 오랜만에 스릴 좀 즐기자며 자기가 하겠다고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목표량은 채웠겠다 오늘 오후엔 마음 놓고 놀고 싶었다. 그는 차가 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전 J의 가슴을 살짝 꼬집었다. J는 아야. 콧소리를 냈다. 마치 발정난 암컷 고양이 울음소리 같았다.

차는 엄청 빨랐다. 포르셰를 팔기만 했지 직접 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100km에서 순간적으로 200km로 넘어갔다. 고개가 뒤로 저절로 젖혀졌다. 차가 앞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사물들이 뒤로 재빠르게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앞서 가던 차들도 죄다 뒤로 물러났다. 그는 은근히 두려움에 오줌을 약간 지렸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이런 속도로 가는 것은 그의 생애 처음이었다.

아.

하지만 J는 그와 달리 탄성을 질렀다.

“난 있지. 이럴 때 오르가즘을 느껴. 마치 오줌보가 터져 나갈 거 같아. 아, 좋다.”

J는 비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오르가즘을 느끼는가. 섹스할 때처럼 비음 섞인 신음 소리를 냈다. 속도계가 어느새 250km를 가리켰다. 정말로 J의 오줌보가 터질까 걱정이 되었다.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주먹을 쥔 채 앞만 바라보았다. 이러다 사고 나서 죽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J를 만날수록 그는 걱정 되는 게 또 있었다. 물론 아내에게 들킬까, 하는 그런 좀팽이 같은 걱정은 아니었다. J와 만나 섹스를 거듭 할수록 그는 혼돈을 느끼는 일이 잦아졌다. 수시로 차 열쇠 놓은 곳을 잊어버리기도 했고 사는 아파트 동 호수를 잊어버리기도 했다. 당신 그러다 나까지 몰라보는 거 아니에요? 아내가 근심스런 눈길로 묻기까지 했다. 몸에도 서서히 털이 길게 자랐다. 거뭇하던 털이 J를 만날수록 손가락으로 잡으면 잡힐 만큼 자랐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면도는 자주 하면 되었고 몸에 난 털은 옷을 입으니 괜찮았다. 무엇보다 J를 통해 섹스를 하고 차를 파는 것이었다. 그는 사실 J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아직 미혼이라는 것. 일본에 자주 간다는 것. 그리고 남자들, 특히 나이 많은 남자 몇이 주위에 있다는 것 정도였다. 사는 곳도 몰랐고 하는 일도 몰랐다. 다만 굉장히 돈이 많았고, 돈이 많은 사람들을 많이 알았다. 한 달에 몇 번씩 J는 그에게 고객을 소개해 주었다.

어느새 차는 충주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충주까지 채 40여 분이 안 걸린다는 사실에 그는 놀랐다.

“어디 갈까?”

J가 말했다.

“탄금대 갈까?”

그가 말했다. 언젠가 친구들과 함께 간 기억이 있었다.

“탄금대?”

“옛날 우륵이 가야금 연주하던 대라지?”

“렛츠 고!”

J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잘 숙련된 말처럼 그들을 금방 탄금대로 데려다 주었다. 그와 J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다정한 연인처럼 손을 잡고 탄금대로 올라갔다. 울창한 송림이 우거져 있고 절벽을 따라 시퍼런 남한강이 휘감아 돌고 있어 경관이 매우 아름다웠다.

"야, 좋다."

J는 시퍼런 강을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그도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두 팔을 들어 기지개를 폈다.

"저기 앉자."

그는 나무 의자에 J를 데리고 가 앉았다. 앉아서 앞을 바라보니 저 멀리 계명산과 남산 그리고 충주 시가지가 한 눈에 보였다. 또한 넓은 평야지대가 그림같이 펼쳐져 절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와 J는 한동안 강물과 평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몇 되지 않았다.

"나 내일 일본 가."

J가 말했다. 그는 왜 가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언제 오냐고 물었다.

"글쎄. 가 봐야 될 거 같아."

J는 확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순간 다시는 J를 못 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행운을 놓치다니. 그는 아쉽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일찍 와. 보고 싶잖아."

그는 J의 손을 잡았다.

"그래. 가능하면."

J는 그의 귓불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으며 말했다. 그는 손으로 J의 가슴을 만졌다. 탱탱한 느낌이 손에 전해왔다. 귓불을 깨물던 J가 그의 바지 앞섶을 더듬거리더니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는 손을 J의 윗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J의 몸이 움찔거렸다.

"저리로 가자."

그는 아무래도 트인 공간에서는 신경이 쓰였다. J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솔숲 속으로 들어갔다. 소나무 밑에서 J는 그를 쓰러뜨리고 바지를 벗겼다. 그는 J가 하는 대로 가만히 두었다. 그의 옷이 다 벗겨지자 그도 J의 옷을 벗겼다.

아.

J는 그의 몸 위에 올라가 신음 소리를 냈다. 솔숲이라 해도 시퍼런 남한강과 넓은 평야가 보였다. 또한 짙푸른 하늘에 눈이 부셨다. J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는 J의 율동에 따라 엉덩이를 움직여주었다. 그러다 그는 문득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J가 아닌 전혀 낯선 사람하고 하는 것 같았다. 며칠마다 섹스를 했기에 그 느낌이 생생한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달랐다. 눈을 뜨니 커다란 유방을 흔들며 올라탄 여자는 분명 J가 맞았다. 그는 J의 유방을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이번엔 몸 어디서 피시시, 하고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몸이 쭈그려드는 것 같았다. 그는 어젯밤에 잠을 못 자서 몸이 피곤해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아.

J의 몸놀림이 빨라졌고 그에 따라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더 크게 나는 것 같았다. 몸은 쭈그려들어 이제 한 줌만 남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그만 하자고 일어설 수는 없었다. 그의 몸에서 바람이 죄다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을 때 그는 끙, 하며 사정을 했고, 몸을 비틀던 J가 그의 몸에서 내려왔다.

"어마. 털 좀 봐."

J는 그의 몸을 바라보며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몸을 보았다. 온통 까만 털로 덮여 있었다. 어제 보다 2-3cm는 더 자란 것 같았다.

"동물 같아."

J는 그의 몸에 난 털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는 너무나 피곤해 대답을 않고 한동안 그대로 누워 있었다.

어떻게 서울로 돌아왔는지 그는 기억에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차가 그를 태우고 아파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피곤했기에 가장 가까운 빈자리에 차를 주차시켰다. 그리곤 곧장 아파트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거울속의 자신의 모습에 그는 흠칫 놀랐다. 눈은 퀭하니 들어갔고 얼굴 전체가 수염으로 텁수룩했으며 볼은 움푹 꺼졌다. 그는 며칠 동안 아무 일도 안 하고 잠만 잤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7층에 내렸다. 그리고 자기 집 초인종을 눌렀다. 아득히 먼 곳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시 한 번 더 눌렀다. 하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아내는 어디 간 것 같았다. 그는 급하게 열쇠로 문을 따고 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몸을 누일 작정이었다.

앗!

그는 들어가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남의 집이었다. 그는 흐릿한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문 앞 팻말을 보았다. 706. 자신의 집 호수가 맞았다.

이런.

그는 다시 한 번 더 확인한 후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역시 남의 집이었다. 우선 자주 보던 텔레비전이 달랐다. 자신의 것은 스탠드형의 낡은 텔레비전이었는데 거실에 있는 것은 새것의 LED 텔레비전이었고 벽에 걸려 있었다. 크기도 엄청 더 컸다. 주방에 있는 탁자도 달랐다. 닮은 것은 냉장고뿐이었다. 냉장고에 붙은 치킨이나 중국식당 병따개만 눈에 익숙했다. 그는 누구 안 계셔요? 하고 불러 보았다. 인기척이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 드러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한 10분만 드러누울까.

하지만 그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라도 피해를 준 적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풀려오는 다리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아마도 동을 잘못 찾은 듯 했다.

에이, 하필이면 오늘같이 피곤한 날에.

그는 윗주머니에서 칼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중년의 여자 한 사람과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사내애가 타고 있었는데 역시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그는 한 쪽 구석으로 가 서 있었다. 여자와 남자애가 자꾸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만약 피곤하지 않다면 계단으로 내려갔을 텐데. 그는 자신을 타일렀다.

밖으로 나온 그는 하늘을 향해 삐쭉이 솟아 있는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거의 집마다 불이 들어와 아늑하게 보였다. 그는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서둘렀다. 몹시 피곤했기에 빨리 집으로 가서 드러눕는 게 급선무였다.

그는 아파트를 둘러보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 103동이 맞았다. 아파트 입구에서 들어오면 왼쪽의 두 번째 동이 확실했다. 그는 마치 꿈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확실하게 해야겠다며 아파트 입구로 걸어갔다. 그때 입구 왼쪽에 있는 관리실의 경비원이 그를 보고 알은 체를 했다. 그리곤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아랑곳 않고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했다. 맞구나.

그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7층에 내려 706호 앞에 섰다. 호수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아득한 소리만 들릴 뿐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그는 몹시 피곤했기에 열쇠로 문을 열었다. 집으로 들어간 그는 또다시 에이! 하고 고함을 질렀다. 역시 남의 집이었다. 아까 다녀온 그 집이었다.

제기랄!

그는 가래침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파트 밖으로 나온 그는 갈 데가 없어 화단 앞에 앉았다. 칼을 꺼냈다. 칼날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날카로운 느낌에 그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그는 칼을 두 손으로 가슴에 품었다. 마음이 편해졌다. 순간 그는 얼굴에서 열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갑자기 온 몸이 뜨거워졌다. 그는 양복을 벗었다. 그래도 더웠다. 그는 와이셔츠를 벗었다. 그래도 더웠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치기 위해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그러나 얼굴에서 느껴지는 건 길고 꺼칠한 털이었다. 그는 뭔가 잘못 됐다는 걸 느끼면서 너무나 더워 바지를 벗었다. 팬티까지 벗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너무 피곤했기에 칼을 가슴에 품고 옆으로 누웠다. 참으로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곧 졸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엄마, 여기 이상한 동물이 있어.”

“어머. 이게 무슨 동물이지?”

“곰인가? 근데 팬티까지 입었네.”

“가슴에 칼도 있어요.”

“이상하네. 무슨 동물이지. 빨리 경비원한테 알려.”

“동물보호소에 연락해야 되는 거 아냐?”

그는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는 걸 느꼈다. 그는 일어서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했기에 일어설 수가 없었다. 끝

 

 

*경북 상주 출생. 한국작가회의 회원.

소설집 『소도(蘇塗)』『아버지의 알리바이』 서양화 개인전 1회(2011년)

문학웹진 <문학마실>편집인 이메일: sgam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