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장창 내는 문

김인기

아마도 참사 현장을 둘러본 탓일 것이다. 중앙로역을 지날 적마다 나는 아득해진다. 바로 여기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고 다쳤다. ‘우리들이 으레 그러려니 믿고 이용하는 영조물이 이렇게나 허술하다니…….’ 당일 인근에 있던 나도 경악했다. 그로부터 9년 세월이 흘렀다. 문득 궁금하다. ‘우리들이 여기에서 교훈을 얼마나 얻었을까?’ 이내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간에도 갖가지 사고들이 일어났다. ‘이러다가 또 당하고야 말지…….’ 이것도 기우일까?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손으로 출입문을 만지며, 눈으로 안내문을 읽으며, 나는 의심한다. ‘만약에 지시대로 해도 문이 열리지 않으면 어떡하지?’ 나는 또 이러기도 한다. ‘사람들이 당황할 수도 있다.’ 이러면 우리들은 속절없이 불에 타 죽어야 하는가? 아니다, 이건 아니다. 나라도 출입문이든 무엇이든 부숴야 한다! 시설물도 마땅히 유사시에 맞춰 설계해야지. “이것저것 다 안 되면 유리창을 깨고 나가세요.” 이렇게도 가르쳐야 한다. 아무렴, 승객들 목숨이 중하지, 이까짓 유리판 몇 장이 중하랴.

나는 과거 그 사건도 다시 따진다. ‘그 많은 승객들이 왜 유리창을 깨뜨리지 못했을까? 그게 그렇게나 튼튼했던가?’ 내 눈에는 이게 단지 과거사로만 보이지가 않는다. 곳곳에 위험이 있다. 출입문도 종류가 많거니와 이의 개폐법도 동일하지 않다. 누구라도 다 익히기 어렵다. 손님들이 찻집에서 정담을 나누는 중에 불이 났다고 하자. 이들이 부랴부랴 바깥으로 나가려는데, 점주가 우선 찻값부터 받겠다며 출구를 가로막는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지 않느냐.

이런 판국에는 나도 잠잠하지 못할 것이다. “이봐요, 지금 이럴 게 아니잖아요?” 이래도 답답이가 걸리적거리면 이런다. “어허, 이 사람이!” 나는 완력을 숭상하지도 않거니와 그러면서 살지도 않았다. 이런 나도 급기야 주먹을 휘두르며 고함을 지르고야 말 것이다. 달리 방법도 없다. 내가 녀석을 와락 밀치거나 의자 또는 탁자 따위로 문이나 유리벽을 와장창 깨뜨리겠지. 우물쭈물하다가는 연기에 질식할 테니까. 여기에 대단한 지능이나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니다.

통계자료는 없어도 감각으로 짐작한다. ‘아마도 능히 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던 분들이 허둥대다가 많이 죽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허망한 죽음이 잇따를 것이다.’ 이래도 선무당들이 횡행한다. “어쨌든 파괴는 나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상말을 해? 쯧쯧, 역시 천박하고 과격해.” 구경꾼들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어 손가락을 입에 문다. 나는 뜨악하다. ‘어떻게 당사자들이 이렇게나 어설픈 주문(呪文)에 마비가 되어 판단력을 상실하나…….’ 바보가 따로 없다.

육신은 놓였으나 정신은 얽매였다. “당신은 이제부터 노예가 아니요. 그러니 앞으로는 본인 재량으로 다 하세요.” 누가 이러자, 녀석이 울먹였다. “주인님, 어쩌면 그렇게나 모진 말씀을 다 하십니까? 소인을 내내 거두어주십시오.” 이 나라에도 과거에 토지개혁이 있었다. 이것도 이래야만 할 사정이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어느 소작농은 ‘남의 땅을 내가 공짜로 받을 수 없다.’며 버텼다나. 이 시대에도 개혁해야만 할 것들이 있다. 미래에도 아마 ‘황당한 착각’을 ‘올곧은 소신’으로 여기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대안이 여럿 있으면 위기에도 차분하다. 여유가 있으니까. 전철의 출입문도 승객들이 이래야 더 잘 연다. 만사가 이렇지 않을까? 그러니까 여기에도 소화기만이 아니라 탈출용 망치도 비치하자. 사고가 어디에서 어떻게 터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구라도 이래야 할 때가 있다. “창문이 아니라 벽이나 지붕이라도 부수자.” 그런데 이런 발언에도 두려움을 느끼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매사가 저런 식이면 내 모가지도 잘리겠구나!’ 이런 지질한 작자들한테는 멀쩡한 상식도 몹시 불온하다.

서민들도 집권층의 횡포에 시달리면서 각성한다. ‘저것들을 그냥 그대로 뒀다가는 우리들이 도저히 살 수가 없겠구나.’ 주권재민의 원칙대로라면 잘나도 내 탓이고 못나도 내 탓이니, 누가 누굴 탓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런 대원칙마저 무너지고 말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뭘 어떻게 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역사를 돌아보라. 혁명 또는 폭동에는 피바람이 분다. 이 와중에 참혹한 일들이 벌어진다. 이를 미연에 막는 장치가 민주제도이다. 사람들이 우선 이걸 명심해야 한다.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정치인도 아니고 사학자도 아니다. 나는 외려 문외한에 가깝다. 이런 내 단견으로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몰상식하다. 언론인들도 그렇고, 법조인들도 그렇고, 종교인들도 그렇다. 문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왜 이래? 미쳤어? 이들이 잘 알면서 이런다면 교활한 것이고, 이들이 뭘 몰라서 이런다면 멍청한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정치과정을 두고도 이들이 뭐가 어떻단다. 이러면서 불신과 혐오를 양산한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세사에 초연한 것도 아니다.

의원들이 갑론을박으로 밤낮을 보낸다. 이들이 볼썽사납게 드잡이도 한다. 유권자들도 짜증이 난다. 그렇다고 이런 소란이 무가치하지만도 않다. 의원들이 국회의사당을 벗어난 모처에 끼리끼리 한통속으로 모여 조용히 법률을 제정해 보라. “재적 의원 과반 참석, 참석 의원 과반 찬성!” 오직 자리만 옮겼을 뿐이라고 해도, 이러면 후유증이 따른다. 그러니 누가 흉기를 들고 설치지 않는 이상은 그 ‘맹활약’도 모두 감내해야 한다. 그러다가 누군가는 ‘현실’을 깨닫고는 ‘말썽꾼’한테 ‘마아, 이제 그만해라!’ 하는 거다.

수십억 인류를 대표한다는 국제기구에서도 형편이 다르지 않다.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게 인간들이다. 여기에서 누가 나서서 나라의 실체조차 부인하고 그 발언권조차 박탈해 보라. 저마다의 체험에 뿌리를 둔 저마다의 진실로 누군가는 폭탄을 터뜨린다. 때로는 핵무장도 감행한다. 이들한테도 확신이 있다. 우리들 주위의 자그마한 동호회에서라면 누군가 이렇게 어깃장을 놓는다. “그래, 똑똑한 그대들이나 그렇게 열심히 하시든가.” 이런 꼴로 뭐가 제대로 되기는 어렵다.

그게 허영이었을까? 아니야, 그것도 애정이었을지 몰라. 권력자들이 지독했다는 건 분명하다. 이들은 저승에서도 확고할 것이다. “그런 절차 따위는 다 낭비야, 낭비!” 이들은 여전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풍문도 있나 보다. “내가 그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누구는 이러기도 했다더라. “그 분을 지금도 역시 존경하지만, 나는 그 때문에라도 그 분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궤변으로 자신들의 만행을 치장하는 자들도 부지기수이다. 어느 경우든 이건 불행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사려 깊지 못하다. “저것들이 호강에 겨워 저러니, 이참에 모조리 잡아다가 물고를 내야 해, 물고를!” 그 연놈들이 밉다. “상명하복(上命下服)! 일사불란(一絲不亂)!” 이런 걸 금과옥조로 삼는 터라 이견의 존재 자체가 애초부터 못마땅하다. “너희들이 뭘 안다고 따져?” 이렇게 반문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들은 극언도 예사로 한다. 그러면 이들의 언행에는 모순이 없는가? 그렇지도 않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초월과 예외가 넘쳐난다.

구성원들의 균일성이 집단의 화합을 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해롭다. 다양성의 상실은 불화의 조건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동일한 가치관으로 함께 생활하면, 이들이 우열에 따르는 서열을 가리느라 바쁘다. 이 불길도 치열하다. 이들은 서로 다를 게 없는 처지이다. 이러니까 더 환장하지. 남들과 다르면 따돌려질까 두렵고, 남들과 같으면 존재감이 없다. 도도해도 안 되고, 데데해도 안 된다. 남들이 선망하는 것들을 나도 해야겠는데, 이게 남들보다 조금은 더 나아야겠는데, 이런 사정마저 모두 같다.

너나없이 피곤하다. 급기야 진저리를 친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우리들이 정말 이럴 수밖에 없나?’ 그나마 이들은 철이 들었다. 성찰은 하니까. 과연 누구라도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이래서 이들이 가만가만 쉼터를 마련한다. 끝끝내 문을 내지 못해 불구덩이에서 나오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체제에 기생하는 무리들의 수작에 휘둘리지는 않으려 한다. 대다수 동료들이야 미련스레 만신창이가 될지라도 이들은 고요한 눈길로 만상을 응시할 줄도 안다.

사사물물은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그러므로 철이 든 위인들을 칭하는 용어들도 다양하다. 몽상가, 자유인, 낙오자, 방외인, 탈주범, 반역자, 지성인……. 누가 코딱지나 귀지를 바라보면서 물질의 시원과 종말을 헤아린다고 하자. 이게 수십억 광년 저 너머에서 명멸하는 은하계와 무관하냐? 그렇지 않다. 이것들도 따지고 보면 피차 통섭하는 우주의 먼지들이다. 하물며 그대가 겨우 그런 것들로 따따부따하겠다고? 차라리 산으로 들로 다니며 바람이나 붙들어라.

지하철은 실물이다. 탈이 나면, 나도 금방 감지한다. 그러나 이 공동체가 위기에 처한다면 한동안은 모르지 않을까? 누구라도 사태의 핵심을 깨닫지 못할 수가 있다. 만약에 이 사회가 불길에 휩싸인 집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야 너나없이 합심하여 불을 꺼야지. 여기에 실패하면? 어느 제독이 패배의 책임을 지고 전함과 함께 사라졌듯 일부의 사람들은 화염과 함께 타버려야 할 것이다. ‘나 어디에 가서 무슨 꼴을 더 보자고?’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일부의 사람들이다.

그래도 불이 난 곳이 지하철이나 집이라면 피할 곳이 있으나, 삼계(三界)가 화택(火宅)이라면 난감하다. 자문(自問)한다. ‘문을 낼 수 있을까?’ 자답(自答)한다. ‘물론이다.’ 그러니까 부처님도 설법하지 않았더냐. 오로지 각자가 아는 그 영역만이 자기 세계이다. 이건 아무리 뽐내봤자 그게 그저 그렇고 그런 누옥(陋屋)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에 불이 났다고? 놀랄 것 없다. 혹시라도 문이 없으면 발로 벽이라도 박차라. 이렇게라도 해서 밖으로 나가야지. 집이야 다시 지으면 된다.

나도 살면서 체득한다. ‘그때는 그게 대단했으나, 지나고 보니, 그것도 시시하더라.’ 자탄한다. “후회막급이다. 내가 왜 그렇게나 조급했던가!” 자신의 옹졸했던 속내가 다 드러났다. 시야가 좁으면 이렇게 된다. 무식한 자들이 용감한 척은 할 수 있어도 진실로 용감할 수는 없다. 이런 자들은 지레 겁을 집어먹고 자중지란에 빠진다. 그러므로 자신의 상상력에 맞추어 남들의 의견을 허황하다 이르지 말자. 그게 그런 경우도 없지 않으나, 그게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까.

우르릉 쿵쾅! 고대인들은 천둥소리를 자신들의 잘못을 꾸짖는 천신들의 경고로 들었다. 이들이 천둥이나 벼락의 정체를 몰랐으니 무지했다고도 하겠으나, 그래도 결과가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그 인간들이 더 선량해졌으니까. “네 이놈!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요즘은 아무도 이런 호통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들한테 두려움이 없어졌느냐? 천만의 말씀이다. 천지신명들한테 맡겼던 것들을 이제는 자신들이 직접 해야 하니 이래저래 고민거리가 더 늘었다.

오늘도 나는 지하철을 이용하며 안내방송을 듣는다. 비상시 출입문 여는 방법을 알린 이후 이어지는 끝말이 이러하다. “호기심 또는 장난으로 출입문을 열면 매우 위험합니다.” 출입문을 열 줄 몰라서 많은 승객들이 죽었으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는 뜻이렷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이런 생각도 한다. ‘누군가는 호기심 또는 장난으로 진작 그렇게라도 해 봤더라면, 그 사람들이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 거야.’ 이래서 나는 종종 ‘매우 위험하다’는 그 짓도 저지르고 싶다.

 

 

김인기

경상북도 영천 출생(1962).

《월간에세이》로 등단(1991)

수필집『함께 가는 우리들』(1999),『참 좋은 날』(2006).

대구작가회의 회원

전자우편: gagozig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