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홍아 산홍아

 

하아무

 

1

“하하하, 산홍(山紅)아. 어서 오너라.”

귀에 익은 목소리에 산홍은 흠칫 몸을 떨었다.

중추원(中樞院) 의장 이지용이었다. 부러 호탕함을 가장한 목소리는 턱없이 높고 쇳소리가 섞여 거부감부터 일었다. 하지만 얼굴을 찌푸릴 수는 없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일인자라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자리 아니던가.

“네가 진주에서 한양에 올라왔다는 말을 듣고 내 한달음에 달려왔느니라.”

산홍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말보다 한숨이 먼저 새어나왔다.

2

그는 서너 발자국 앞서 걸어간다. 앞쪽으로는 배꽃이 하늘하늘 비처럼 내린다. 꽃잎은 흩날릴 땐 나비 같다가 지고나면 구름 같다가 한다. 그는 마치 천상의 신선처럼 꽃비를 맞으며 걷는다. 고개를 돌려 부안 명기 매창(梅窓)의 시를 읊는 그의 표정은 평화롭고 아름답다.

배꽃 비처럼 휘날릴 때 울며 잡고 이별한 임

가을바람 지는 잎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는구나

산홍도 화답하는 시로 흥취를 잇는다. 죽은 정인의 시묘살이까지 했던 기생 홍랑(洪娘)의 시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그와 이렇게 함께 걷는 것이 꿈만 같다. 꿈이 아니기를, 꿈이라면 제발 깨지 않기를 빈다. 하지만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졌던 희망이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기에 불안하다.

아니나 다를까. 일식이 닥친 듯 갑자기 해가 빛을 잃고 사위는 어둠속으로 빠져든다. 두리번거리는 사이 어디선가 크고 시커먼 그림자 둘이 나타나 돌연 그를 에워싼다. 그를 붙잡아 오라를 지운 그림자는 일경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있다. 아아, 안 돼! 그 분은 아무 죄가 없어! 산홍은 다급하게 소리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소리는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림자는 비웃듯 야비한 웃음을 흘리며 멀어진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죄가 될 수 없어.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다. 하지만 그때 산홍은 그 말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의 유난히 빛나는 눈빛, 짙은 눈썹과 오똑한 코, 막 자라기 시작한 콧수염, 섬처럼 오똑 솟은 목젖 따위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마음을 뒤흔드는 목소리의 파장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느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미처 따져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순사들에게 끌려가는 그를 보고서야 산홍은 비로소 깨닫는다. 사내다운 외모뿐만 아니라 품은 생각, 하는 행동 모두 자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대단하다는 것을. 나라 잃은 설움에 가슴 아파하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멀어져가는 그를 안타깝게 불러보지만 대답은 없고 이내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산홍은 애타는 마음에 손짓을 해보고 힘껏 달려가 보지만 그럴수록 무언가 자신을 붙잡고 억누르는 것만 같다. 급기야 산홍은 두 팔을 휘저으며 발버둥을 쳐댄다. 도련님, 도련니임…….

3

낯선 방안이다. 비교적 넓은 방에 장과 농이 정연하게 놓여 있다. 갓밝이의 어슴푸레한 빛이 윗목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삼층장을 비추었다. 다른 벽 한 켠에는 반닫이와 이불장이 하나씩 놓여 있다. 모두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임을 주장하듯 작은 빛에도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돌았다. 산홍은 그제야 자신이 진주의 기방(妓房)이 아닌 한양에 있음을 깨달았다. 문을 연지 이제 서너 달 남짓 된 명월관 뒤편의 한성기생조합 숙소였다.

“산홍아, 무슨 일이 있느냐?”

옆방 문이 열리고 걱정하는 완자(完子)의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닙니다. 아무 일 없습니다. 그냥 나쁜 꿈을 좀 꾸었을 뿐입니다.”

“그래, 어제 천릿길을 오느라고 몹시 고단하였던 모양이구나. 좀 더 눈을 붙이거라.”

산홍은 대답하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밤늦게까지 춤추고 노래하며 술시중까지 드느라 피곤하였는지 기생 셋이 어빡자빡 엎드러져 자고 있다. 코까지 고는 모습이나 시큼한 술냄새까지 진주나 한양이나 다를 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이 한양 땅에 있다. 지난해 겨울, 진주 기방에 왔을 때 그의 친구들이 분명 보성전문학교에 공부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산홍은 꿈속에서 본 그의 표정이 잘 떠오르지 않아 안타까운 한숨을 몰아쉬었다.

‘아아, 내가 한양에 올라온 걸 알릴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그에게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다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그건 다행히 꿈이었다. 너무나 생생하기는 했지만 꿈임에 분명했다. 안도의 한숨이 저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그래도 꿈에서처럼 그가 순사들에게 붙잡히기라도 했으면? 아니, 혹시라도 다른 좋지 않은 일이 생겨서 다시 만날 수 없다면?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본래 꿈은 생시와 반대라 하였으니 붙잡혀 가지 않았을 거야. 또 혹시 알아? 그 분과 이별이 아닌 뜻밖의 해후를 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어. 좋게 생각하자. 다 잘 될 거야.

산홍은 부러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눈을 꼭 감고 걱정거리를 밀어내고 좋은 생각만 키웠다. 방문 틈으로 신선한 새벽 공기가 새어 들어왔다. 머리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하였다.

4

완자는 정성스레 산홍의 머리를 오래 매만져 주었다. 그녀가 진주에 있을 때도 자주 그랬다. 완자도 이제 스물을 갓 넘겼지만 산홍의 머릿결과 피부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

“산홍이 넌 갈수록 더 고와지는 것 같아.”

완자의 칭찬에 산홍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언니도 참, 그거야 뭐 언니가 발라준 백분 덕이겠지요.”

완자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산홍에게 미안수(美顔水)로 씻도록 하였다. 수세미를 잘라 넣고 삶은 물에 박하잎을 넣어 향이 좋았다. 살결을 곱고 부드럽게 하고 윤기 흐르는 피부로 가꾸기 위한 것이었다. 게다가 얼굴에 꿀 찌꺼기를 펴 발랐다가 조금 후에 떼어내는 미안법(美顔法)을 가르쳐주기까지 하였다. 그런 다음 활석과 쌀가루를 섞어 만든 백분을 얼굴에 정성스레 발랐다. 얼굴이 지나치게 하얗게 보이는 것을 산홍이 싫어하는 줄 아는 완자는 상체를 뒤로 젖혀 괜찮나 보았다가 다가앉곤 하였다. 이어 눈썹먹[眉墨]으로 눈썹을 칠했다. 눈썹먹은 목화의 자색꽃을 태워, 그 재를 관솔에서 나오는 유연(油煙)에 묻혀 참기름에 갠 것을 썼다. 마지막으로 잇꽃[紅花]연지보다 색깔이 선명하다는 주사(朱砂)로 만든 연지[丹脂]로 입술과 뺨을 붉게 칠하여 화장을 마무리했다.

“오늘은 네 재주를 처음 선보이는 날이니까 단지(丹脂)를 썼지만 이건 자주 안 쓰는 게 좋아. 단독(丹毒)에 걸릴 수도 있거든. 피부가 빨갛게 붓고 나중엔 썩어들어가는 병이야. 웬만하면 잇꽃연지를 쓰는 게 좋아.”

완자의 설명에 산홍은 말없이 고개만 주억였다. 재주를 처음 선보이는 날이라는 완자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듯하였다.

산홍은 생각했다. 변학도의 기생 점고(點考)에 나갈 수밖에 없었던 춘향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자신을 불러내어 기어이 수청을 들게 하기 위한 술수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춘향은 백분을 바르고 연지를 발랐을까? 언제 올지, 올 수나 있을지 알 수 없는 몽룡을 생각하며 침착할 수 있었을까?

“너, 또 그 도련님을 생각하고 있느냐? 이름이 강학수라 했던가?”

완자의 손길이 돌연 뚝 멈추었다.

“아, 아니에요, 언니. 제가 어떻게 감히…….”

부정해놓고 보니 목소리나 내저은 손사래가 턱없이 컸다. 속마음을 고스란히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이것아, 기녀가 사랑에 빠지면 그날로 볼장 다 본 게야. 내가 몇 번을 얘기했지 않느냐. 그리 되면 사랑도 못 건지고 기녀 노릇도 끝장난다는 말이다.”

안다. 기방의 언니들로부터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었다. 그런데 왠지 오늘은 그 말이 야속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산홍의 마음인 양 바닥에 떨어진 눈물방울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5

“그래, 네가 산홍이냐? 완자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예, 언니가 저를 진주에 있을 때부터 어여삐 봐주셨지요.”

산홍은 대답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한성기생조합의 행수기생 초란(草蘭)이다. 마흔이 넘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곱고 예뻐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여자 나이 서른이면 환갑’이라 한다지만 초란은 완숙미까지 더해져 중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다만 눈매에 서늘한 기운이 돌아 왠지 모르게 선뜻 다가서지 못하게 저어하는 듯하였다.

“넌 소리를 잘 한다더구나. 시에도 능하고…….”

“과찬입니다. 그저 조금 흉내를 낼 줄 아는 정도입니다.”

“네 소리를 한번 들어보자꾸나. 제일 자신 있는 대목을 불러보거라.”

“예, 춘향가 중에서 기생점고(妓生點考)하는 대목을 부르겠습니다. 여자로는 처음으로 명창이 되었던 진채선이 특히 잘 불렀다는 대목이지요.”

산홍은 앉은자리에서 일어나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 자리를 잡았다. 이어 북을 잡고 준비하고 있던 고수의 북장단에 맞춰 아니리로 소리를 시작했다.

“객사에 연명허고 동헌에 좌정하야 도임상 잡수신 후에 삼행수(三行首) 입례 받고 육방하인 현신 후에, 호장 부르라. 숙이라. 호장이요. 네. 여봐라. 예이. 육방하인 점고는 제삼일로 물리치고 우선 기생점고부터 하여라. 예이. 호장이 기안을 안고 영창 밑에 엎드리며 기생점고를 하는디…….”

이어 능소화를 바라보듯 진양조 가락으로 넘어갔다.

“우후 동산의 명월이, 명월이가 들어온다. 명월이라 허는 기생은 기생 중에는 일행수라, 점고를 맞으랴고 큰머리 단장을 곱게 허고 아장아장 이긋거려서 예 등대나오. 좌부진퇴(左部進退)로 물러난다. 청정자연이나 불개서래로다. 기불탁속 굳은 절개 만수문장의 채봉이요. 채봉이가 들어온다…….”

초란은 손으로 무릎을 가볍게 두드리거나 몸을 좌우로 흔들기도 하면서 소리를 음미했다. 고수도 오랜만에 제대로 된 소리꾼을 만났다는 듯 신명을 내었다.

소리를 마치자 완자가 나섰다.

“지금껏 여러 소리꾼의 기생점고 대목을 들어보았지만 저리 맛깔나게 부르는 건 산홍이뿐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마음을 한꺼번에 사로잡은 진채선 명창이 살아온 듯합니다. 신재효 선생도 계셨다면 아마 감탄했을 것이요. 어떠시오, 언니. 정말 잘 하지요?”

“그래, 그럭저럭 들을 만하구나.”

초란은 기뻐하는 얼굴빛을 숨기려 애쓰는 것이 역력했다. 초란이 처음부터 칭찬을 하는 법이 없다는 것은 완자도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최고인 줄 착각하여 기고만장해지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오늘까지는 푹 쉬고, 내일부터는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여라.”

6

한양은 한창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중이었다. 오래된 집을 부순 자리에 넓은 길이 생기고 신식 건물이 들어섰다. 자전거상회와 양장점, 큰 요릿집이 생기고 밤이면 전등을 밝혀 휘황한 불야성을 이루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양복을 입은 신사, 세련된 신여성과 함께 기모노와 게다를 신은 일본인들이 거리를 활보했다. 자전거와 인력거가 분주히 오가고 간혹 자동차가 거만스레 경적을 울리며 사람들을 길에서 쫓아내기도 하였다.

“얘, 너무 두리번거리지 마. 촌티난다.”

완자는 여러 번 산홍이에게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산홍은 무심한 듯 걷다가도 어느새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연신 감탄사를 토해내고 만다. 서너 번 주의를 주던 완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기만 했다.

“자, 우선 옷부터 맞추자. 너도 신여성이 되는 거야.”

완자는 단골인 듯한 양장점으로 산홍을 이끌었다. 완자는 왜말을 섞어 산홍에게 몇 벌을 입어볼 수 있게 청하였다.

“어머, 넌 정말 무얼 입어도 잘 어울리는구나.”

“하지만 전 입었는지 말았는지, 도무지 어색하고 민망하기만 한 걸요.”

“아니야, 너무 잘 어울려. 다 잘 어울리니 무엇으로 선택할 지 고민이구나. 참, 기왕 나온 김에 양장 한 벌 하고 기모노도 한 벌 사자.”

“기모노요? 그건 뭐하게요?”

“일본 손님도 심심찮게 있고, 간혹 손님 중에는 일부러 기모노를 입고 나와주기를 요구하는 사람도 있단다.”

“저는 싫습니다. 손님이 원하면 거절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건 내키지 않습니다.”

“얘, 누군들 내켜서 기모노를 입겠느냐?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게지.”

“아무리 그래도 언니, 제가 명색이 소리기생인데 왜옷을 걸치고 춘향가니, 심청가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걸 요구할 얼뜨기 손님도 없겠지만, 설령 원한다손 쳐도 그럴 수야 없지요. 왜옷을 입는 순간 소리가 탁 막혀서 목구멍을 넘지도 못할 것입니다. 차라리 벌거벗고 깨춤을 추지요.”

완자는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7

둘은 상점을 몇 군데 더 돌았다. 주로 박래품(舶來品,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물품)을 취급하는 곳이 많았는데, 주로 산홍이 쓸 화장품과 속옷을 샀다. 생전 처음 보는 속옷들은 무엇 하나 제대로 가리지도 못할 것처럼 작고 몸을 조이는 것들이라 불편해 보여 손을 내저었지만 완자는 제멋대로 골라 담았다.

“저기는 어딘데 저리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요?”

완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응, 저기는 ‘팔딱사진’ 보는 데야.”

“‘팔딱사진’요?”

“활동사진 있잖니, 팔딱팔딱 넘어가는 사진. 2, 3년 전에 문을 연 단성사란 극장인데 항상 저리 북적거린단다.”

“아아……. 저도 본 적 있어요. 호준가 미국인가 선교사가 남강가에 천막을 치고 보여준 적이 있어요. 저걸 보기 위해 집을 따로 짓기도 하는구나.”

“그래. 오늘은 이것저것 짐이 있으니까 다음에 같이 와서 보자꾸나.”

산홍은 극장을 처음 보았다. 건물 앞면에는 커다란 광고판이 붙어 있는데, 수염이 덥수룩한 외국사람의 모습과 함께 <噫, 無情>이란 제목이 크게 도드라져 보였다.

“우리, 들어가기 전에 저기 들렀다 가자.”

완자가 자그마한 간판을 가리켰다. 거기엔 <아네모네 茶房>이라 적혀 있었다.

완자는 산홍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코오피 두 잔을 시켰다. 코오피는 쓰기도 하고 달기도 했다. 산홍은 마시면서 얼굴을 살풋 찡그렸다가 풀었다.

“호호호, 처음엔 그래도 마시다보면 자꾸 찾게 된단다.”

산홍은 어설프게 웃어 보이며 한 모금 더 홀짝였다.

“그런데 언니, 아네모네가 뭐예요?”

“서양 꽃이름. 저기 저 그림 속에 있는 꽃이라더라.”

그림 속에는 붉은색, 자색, 청색, 흰색 따위의 잎이 큰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예쁘네요. 화려하고…….”

“그런데, 꽃말이라고,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으로 붙인 말이 있다는구나. 백합꽃은 순결, 클로버는 행운 하는 식으로 말이다.”

“아네모네는 뭔데요?”

“그게……, ‘사랑의 괴로움’이라는구나.”

산홍은 혼잣말처럼 ‘사랑의 괴로움’을 되뇌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까만 코오피 속에서 강학수의 얼굴이 떠오르는 듯했다. 그러자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한 코오피의 맛이 입속을 맴도는 것 같았다.

그런 양을 보고 있던 완자가 한참 후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네가 마음 아파할 것 같아서 말 안 하고 있었는데…….”

산홍은 물끄러미 완자의 얇은 입술을 바라보았다.

“강학수 도령이…….”

“아니, 언니. 도련님이 어디 있는지 안단 말이우?”

“그게 말이다…….”

“왜 빨리 말을 못하시오. 어디 아프시오? 아니면…….”

완자는 엽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래, 어차피 말할 거, 다 얘기해주마.”

“언니, 답답하요. 빨리 얘기해주시오.”

“학수 도령이 말이다…….”

8

학수는 피가 끓었다. 나라를 팔아먹고서도 버젓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들을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처음엔 젊은 혈기에 을사오적의 집에 돌팔매질을 하거나 욕을 퍼붓고 도망가기도 하였다. 그러다 같은 학교 선배에게 호된 질책을 당하였다. 그런 얼뜨기 반편이 같은 짓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결국 학수는 ‘을사오적척결단’의 조직원이 되었다. 전문학교 학생들로만 조직된 척결단은 다 합쳐 여남은 명 남짓에 불과하였다. 몸이 약한 학수는 주로 을사오적의 집 주변을 맴돌며 그들이 드나드는 시각과 행동반경, 주변인물 등을 파악하는 일을 맡았다. 그들을 응징하는 일은 행동이 민첩하고 덩치가 큰 고학년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워낙 경비가 삼엄한 데다가 일경과 헌병들까지 그들을 비호하는 바람에 쉽지 않았다.

군부대신 이근택 습격사건 때 학수도 붙잡혔다. 다행히 그는 단순가담자로 분류되어 이틀 만에 풀려났다. 하지만 진주 본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공부하러 간 줄로만 알고 있던 아들이 경무청에서 붙잡아 갔다는 소식에 어머니는 실신하기까지 했다. 풀려나자마자 진주 집에 불려 내려가야 했다. 겨우 학업에만 열중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며칠 동안 부모를 설득한 후에야 한양행 기차를 탈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학수의 피는 여전히 뜨겁게 끓어올랐고, 점점 더 항일운동에 조금씩 더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자연히 크고 작은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일경은 전력이 있는 그들부터 불러들여 불문곡직하고 심문을 해대었다.

척결단은 이지용을 암살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이지용은 고종 임금의 종질(從姪)로 대표적인 친일파 중 한 사람이었다. 내부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찬성하였고, 일본으로부터 훈장과 은사금을 두둑이 받았다. 나라를 팔아먹는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와 “국가의 일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느냐”고 했다던가. 그 얘기를 들은 이들 중에는 침을 뱉고 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척결단의 비밀이 새나가는 바람에 암살은 계획 단계에서 무산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 계획을 모의한 학수와 두 명의 동지가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미 1907년 3월 을사오적암살단이 암살에 실패한 후 일경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던 상황이었다.

문제는 학수가 감옥에서 병을 얻은 것이었다. 본래 몸이 허약한 데다가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모진 겨울 한파를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산홍이 한양으로 올라오기 전, 출소를 기념해 명월관에 들른 사람들 틈에 학수가 있는 것을 완자가 발견하였다. 방학 때면 고향에 내려와 친구들과 한번씩 기방에 들르곤 해서 안면이 있었던 것이다. 완자는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밖에서 기침을 해대던 학수가 피묻은 손수건을 숨기던 것도 놓치지 않았다.

“술 취한 학수 도령이 그러더라. 산홍이 네 소리가 듣고 싶다고, 네가 부르는 ‘심봉사 눈뜨는 대목’이 듣고 싶다고 말이다. 내가 그렇지 않아도 네 재주가 아까워 한양으로 불러올리려고 했었니라. 그런 참에 학수 도령의 말을 들으니 더 지체할 수가 없더구나. 그래서 당장 올라오라고 기별했던 것이니라. 네가 학수 도령을 사모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9

그러나 학수는 한양이 없었다. 폐병을 치료하고 요양할 겸해서 하동 악양에 내려가 있었다. 학교 선배의 소개를 받았다고 했다.

산홍은 절망했다. 학수는 노류장화의 몸으로 감히 사모한다 말조차 할 수 없는 집안의 장남이었다. 그래도 학수가 있는 한양 하늘 아래에 머무른다는 희망, 스치듯, 혹은 먼 발치에서라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천릿길을 거슬러 올라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이다. 권번에 매인 몸으로 그를 찾아 떠날 수도 없고.

어디선가 최고의 명기 황진이(黃眞伊)의 노래가 아련히 들려오는 듯하였다.

꿈길밖에 길 없는 우리 신세

님 만나러 가니 님은 날 찾아갔구나

원컨대 아득하게 어긋나는 꿈으로 하여금

동시에 길 한가운데서 서로 만나게 했으면.

아, 학수 도련님은 이런 산홍의 마음을 알고나 있는지…….

10

“네 이년, 산홍이가 왔으면 진즉 나한테 먼저 알렸어야지.”

이지용은 짐짓 목소리를 엄하게 꾸며 초란을 나무랐다.

“아니, 대감마님은 워낙 자주 오시고 우리 명월관 주인과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명월관에 관한 거라면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한테 새삼스럽게 알리다니요?”

초란도 부러 콧소리를 내며 살짝 눈을 흘겼다.

“어허, 너는 산홍이의 미색과 재주를 보고도 그런 한가한 소리가 나오느냐. 북평양 남진주는 말할 것도 없고 전국의 기생들이 한양으로 모여들고, 하다못해 일본 게이샤들까지 들어오는 판이다만 어디 산홍이만한 년이 있더냐. 게다가 미색이 출중한 년 치고 소리 잘하는 년 없고 거꾸로 소리 잘하는 년 치고 미색 출중한 년 없는 법. 그건 너도 잘 아는 사실 아니더냐. 그런데 저리 곱고 소리 잘하는 산홍이를 언제 어느 시러배 같은 놈이 채갈 지 모르는 판에 앉아서 기다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 대감마님. 언제는 이 조선팔도에서 제가 제일 곱다면서요?”

“어? 내가 그랬나? 허허…….”

“밉습니다. 전 그 말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는데…….”

“허허, 이 여우 같은 년. 그건 산홍이가 오기 전 일이고, 이제 산홍이가 왔으니 니가 두 번째니라.”

“흥, 그럼 어디 첫 번째와 잘해 보십시오. 저는 나가서 눈삔 두 번째 낭군님이나 찾아볼랍니다.”

초란은 나가면서까지 이지용과 농을 주고받았다. 그녀가 나가자 기다리고 있던 미월(眉月)이 쪼르르 이지용의 곁에 가 앉았다.

“근데요, 대감마니임. 잠자리에서는 제가 최고인 거 맞지요? 전에 그러셨잖아요.”

미월의 찢어진 눈가로 색기가 흘렀다.

“떽! 헛소리 하지 말고 술이나 따르거라.”

이지용은 소리 내어 한잔 들이킨 후 고기산적을 우물거렸다.

산홍은 고개를 외로 꼬고 앉아 그들을 외면했다. 학수가 암살을 계획할 정도의 매국노 앞에서 소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자아, 산홍아. 이제 네 소리를 들어보자꾸나.”

엉거주춤 비켜나 앉아 있던 산홍이 가운데로 자리를 잡았다.

“대감께서 특히 좋아하시는 대목이지요. <춘향가> 중에서 기생점고하는 대목입니다.”

이어 고수가 “얼쑤” 하고 추임새를 넣으며 ‘쿵다닥’ 북을 쳤다.

11

이지용을 진주를 좋아했다. 10여 년 전, 경상관찰사로 진주에 부임해가면서부터였다. 조선 왕실의 종친으로 출세의 길은 탄탄대로로 열려 있는 셈이었다. 사도세자의 5대손으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인 이최응의 손자인데, 완영군 이재긍에게 입양되었기 때문에 고종의 종질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그런 것보다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광대놀음이나 판소리와 같은 풍류를 즐기고 늘 도박판을 기웃거리며 기생을 끼고 살았다. 그런 그에게 진주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지리산이 바라다 보이고 남강을 낀 촉석루의 풍광은 더 말할 것도 없었고, 한 자리 얻어보려고 도박 판돈을 슬금슬금 들이미는 재력가도 있었으며, 조선 최고의 기생도 즐비했다. 특히 그는 판소리를 좋아했다. 소리 좀 한다 하는 소리꾼은 죄다 불러서 먹이고 입히고 소리채까지 두둑이 쥐어주었다. 그 중에는 <새타령>으로 유명한 이동백 명창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동백은 한낱 이름 없는 소리꾼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지용은 천인절벽에 떨어지는 폭포 같고 원기는 창공을 찌를 듯한 이동백의 소리에 매료되었다. 이지용은 그를 극진히 대접하고 연회가 있을 때마다 불렀다. 이때부터 이동백은 명창으로 이름을 얻고 날개를 펴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전라도에서 소리 배워 경상도에서 시험 본다”든가, “전라도에서 배워 경상도에서 풀어먹는다”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명창이 진주에 머물면서 기생들한테 소리를 가르쳐주게.”

이지용은 이동백에게 지시했다. 경상도는 시나위조의 판소리보다 메나리조 민요가 성행해 제대로 소리를 할 줄 아는 기생이 없었던 것이다. 이지용은 소리기생을 키우는 데 각별히 관심을 두었는데, 이유가 있었다. 절대권력자였던 흥선대원군이 여류 명창 진채선에게 마음을 뺏겨 궁중에 머물게 하면서 곁에 두었던 것이 부러웠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갓 권번에 들었던 산홍이 판소리를 배우게 되었는데, 그녀의 나이 여덟 살이던 때었다. 소리를 배우는 여러 기생 중에 산홍이 가장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지용은 한번씩 소리를 얼마나 익혔는지 점검하곤 했는데, 산홍의 영특함을 칭찬하곤 했다. 그 후 진주를 떠난 뒤에도 경상도에 갈 일이 있으면 꼭 진주에 들러 산홍의 소리를 듣곤 하였다.

“산홍아, 이리 오너라. 내가 오늘 네 머리를 올려주겠다.”

한번은 술이 거나해진 이지용이 산홍의 소리를 청해 듣고 흐느적거리며 안으려 했다. 행수기생은 산홍이 아직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간신히 말렸다. 산홍이 열두 살 때였는데 워낙 조숙해서 처녀티가 완연하였다. 이지용은 한 해 두어 차례 들를 때마다 비슷한 행패를 부려 진땀을 빼게 했다. 제 권력과 금력만 믿고 시정잡배처럼 패악을 부리는 데에는 모두들 진절머리를 쳤다.

“열여섯은 되어야 머리를 올리든 속치마에 그림을 그리든 할 것 아닙니까.”

행수기생은 매번 같은 말로 산홍을 감싸안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이곳은 진주권번도 아니고, 이제 산홍이도 열여섯이 되었기 때문이다.

12

“네이년, 지금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이지용은 술상을 소리나게 내리치면서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섰다. 하지만 어디서 마셨는지 이미 대취한 터라 혀는 꼬부라지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였다.

“제가 어찌 감히 대감마님을 능멸하겠습니까. 저는 다만 있는 그대로 고했을 따름입니다.”

처음엔 한양으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심신이 지쳤다고 했다. 보름 쯤 지난 뒤에는 잦은달거리로 곤란을 겪고 있다고 했다. 다시 보름 쯤 지나서는 고뿔에 몸살기로 굴신조차 어렵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많은달거리로 허리가 아픈 데다가 어지럽다고 고하던 참이었다.

“내가 너를 찾을 때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피하였다. 그러는 것이 나를 능멸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핑계가 아닙니다. 행수 언니에게 물어보면 다 아실 것입니다.”

“필요 없다! 달거리를 하든 말든 상관없으니 오늘은 내 침소로 들거라!”

그러나 이지용이 강경하게 나올수록 산홍도 물러서지 않았다.

“절대 그럴 수는 없사옵니다.”

돌연 이지용이 야비한 웃음을 빼물며 이기죽거렸다.

“오호라, 네년한테 따로 정인이 있다는 말이 사실인 게로구나.”

그러더니 미월이를 불렀다. 문 뒤에 서 있던 미월이 쪼르르 이지용 곁으로 가 섰다.

“미월이 네가 나한테 말한 대로 다시 얘기해 보아라.”

“사실입니다요. 제가 이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진주 사는 도령이라는데 지금은 어디 전문학교 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불경하게도 대감을 죽이려고 한다는 얘기까지 틀림없이 들었다니까요.”

산홍은 음란살(淫亂煞)이라는, 미월의 눈꼬리에 낀 주름살을 노려보았다.

“그건 완자 언니가 넘겨짚어 얘기한 것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어려서 부모에게 버림받아 돈 몇 푼에 기생이 된 계집입니다. 그런 제가 감히 지체 높은 집 도련님을 사랑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그 분의 부모형제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저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십니까? 지난해인가 지지난해인가 진주 기방에 친구분들과 같이 온 것을 잠깐 본 후로 다시는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13

이지용의 눈에 선 핏발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초란이 달려오고 미월까지 제발 진정하라고 빌다시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씩씩대며 마구 고함을 질러댔다. 밖에서는 하인들과 부엌어멈까지 주루룩 나와 안의 눈치를 살피는 판이었다. 게다가 다른 방에서 술을 마시던 손님들과 명월관 밖 인력거꾼들과 행인들까지 무슨 일이 났는지 기웃거리고 있었다.

“좋다. 그놈이 네 정인이 아니라면 나한테 못 올 이유도 없겠지. 지금 이 자리에서 선택을 하거라. 내 너에게 천금을 주겠다. 아니 천금 아니라 만금을 달라 해도 주겠다. 내 첩이 되어 주거라.”

돌연 소란스러움이 싹 가셨다. 모두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이지용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네가 원하는 만큼 돈이면 돈, 집이면 집, 뭐든 주겠다 그 말이다. 내 첩이 되어 다오.”

그제야 초란과 미월이 얼었다가 풀리기라도 한듯 이지용을 말렸다.

“오늘 너무 취하셨습니다. 우선 좌정을 하시고 좀 쉬시지요.”

“마음에도 없는 말씀 하시지 말고 진정하시어요.”

하지만 이지용을 발을 구르며 상을 걷어차 버렸다.

“네 이년들, 썩 비키지 못할까! 내가 술에 취해서 앞뒤 없이 내뱉는 말인 줄 아느냐. 내가 산홍이를 마음에 둔 지 이미 수삼년이 되었다. 내가 못할 것 같으냐? 내가 대일본제국으로부터 훈장과 함께 은사금 받은 것만 해도 너희들이 상상도 못할 큰 돈이다. 돈을 원하면 돈을 주겠다. 한강변 언덕 위에 커다란 양옥집을 달라면 그것도 주겠다. 집과 돈을 다 달라면 그것도 문제 없다. 산홍이 네가 내 첩만 되어준다면 다 주겠단 말이다.”

산홍은 미동도 없다. 그것이 이지용의 신경을 긁었다.

“하지만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지. 네가 나를 죽이려 했던 놈을 연모한다고 믿을 수밖에. 그렇다면 나는 네년도 죽이고 그놈도 찾아내 숨통을 끊어놓고 말 것이다. 너도 알 것이다. 세상 누구도 나를 말릴 자는 없다. 명월관이고 뭐고 문을 닫게 하는 건 물론이고 무슨 기생조합? 내 모조리 물고를 내고 말 것이다. 자, 솔직하게 말해 보아라. 내 첩이 되어 주겠느냐 말겠느냐. 이제는 더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얼른 마음 속 말을 꺼내보아라.”

여기저기서 두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낮게 이지용을 욕하고 혀를 차는 소리였다. 하지만 누구도 이지용의 귀에 들릴 정도의 크기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지용이 박차고 나와 좌중을 둘러볼 때 다들 헛기침만 해댈 뿐이었다.

14

“대감께서 원하시는 대로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점잖게 제 머리를 올려주시겠다 하실 때는 승낙도 거절도 하기 어렵더이다. 헌데 수천 수만금을 주시겠다 하고 집도 주시겠다 하니까 좀더 말씀드리기 쉬워지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 많은 재물을 어떻게 가져보겠습니까. 설령 그 많은 재물이 당장 제 것이 되었다 해도 제 것이라 생각할 수도, 한 푼 쓸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대감께서 제가 첩이 되지 않으면 저를 죽이고 이 일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도령까지 찾아내어 숨통을 끊어 놓는다 하시니 더욱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재물을 얻기 위해,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대감의 첩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진주의 도령에게도 가지 않을 것입니다. 왜인 줄 아십니까? 대감은 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진주의 도령도 저 혼자 연모하는 것일 뿐 그 도령이 아직 저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혼자만 그러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러니 저는 누구에게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다시 두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요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대감도 아시겠지만,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고들 하더이다. 대감의 그 많은 돈이 어떤 돈입니까. 왕실의 종친으로 뇌물을 받고 군수직을 열다섯 개나 팔았기 때문 아닙니까. 할아버지 때부터 매관매직으로 온갖 보화를 긁어들인 결과가 아닙니까. 게다가 왜놈들이 주는 돈을 받고 여기저기 도장을 함부로 찍어준 결과가 아니냐 말입니다. 대감뿐만이 아니더군요. 부인도 한일부인회인지 뭔지 하는 친일단체를 조직해 대감 못지 않게 나라를 좀먹는 데 앞장서고 있다더군요. 여러 일본인들과 드러내놓고 정을 통하고 있다는 건 장안의 코흘리개도 다 아는 사실이구요. 이게 도대체 사람이 사람의 탈을 쓰고 할 짓입니까? 제가 비록 천하디 천한 기생이라고 하나 사람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 사람이 사람의 탈을 쓴 이리의 노리개 노릇을 할 수야 없지요.”

이지용은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일본 요릿집 하월루에서 함께 술을 마셨던 총독부 관리들은 이미 헤어지고 없었다. 그는 혼자 구종배 하나만 데리고 명월관에 온 터였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이지용은 하인놈에게 헌병을 부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산홍이의 일갈에 손님들과 인력거꾼, 지나가던 행인들까지 호응하며 몰려들었다. 하인이 겨우 몸을 빼 명월관을 나서려고 할 때 몸이 두 배나 되는 거구의 왈짜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명월관에서 고용한 ‘어깨’였다.

15

완자는 산홍의 손을 꼭 잡았다.

“알겠니? 진주나 하동으로 가면 안 돼. 발이 빠른 사람을 그쪽으로 보내 학수 도령이 피하도록 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알았지?”

“미안해요, 언니.”

“무슨 소리니. 그런 생각 아예 하지도 마. 다들 얼마나 시원하게 생각하는지 몰라. 누가 이지용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니. 아마 네 이야기가 며칠 안으로 장안에 파다할 거야.”

옆에서 하인 박서방이 재촉하듯 헛기침을 했다.

“아예 북쪽으로 가거나 청나라 만주나 홍콩으로 가는 것도 괜찮을 거야. 저기 박서방이 알아서 잘 해줄 거야. 그리고 이건 행수언니가 주는 거야. 이 반지는 혹시 급할 때 팔아서 쓰고…….”

완자는 노자가 두둑이 든 보자기와 함께 자신이 끼고 있던 금반지를 건내었다. 이내 산홍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고마워요, 언니.”

“무사해야 돼. 산홍아…….”

산홍은 앞장서 걷는 박서방의 뒤를 쫓아 무거운 걸음을 떼었다. 이내 짙은 새벽 안개가 그녀를 숨기듯 하얗게 내려앉았다.

 

하아무 약력

1966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3년 <작가와 사회>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와 2008년 MBC창작동화공모대상을 수상했다. 소설과 동화를 써왔지만 최근 단편소설 「백제고시원」을 각색해 연극무대(극단 현장)에 올린 이후 희곡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창작집으로 『마우스브리더』와 『황새』가 있고, 그 외에 5권의 민중자서전을 기획하고 엮었다. 현재 <예술IN 예술人> 편집장이고, MBC금성동화문학회와 (사)한국작가회의 회원이며, 경남소설가협회 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