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 피다 

 

이민숙

 

지금은 깊은 밤

희디흰 도라지꽃 아주 작은 망울 하나

보일 듯 사라질 듯 언제부터였을까

그 자리, 9층 아파트 베란다 끄트머리

고요하다

온 허공 숨 멈췄다

 

세상은 언제나 저 깊은 우물로부터 깨어난다

내 어릴 적 먼 새벽

샘물 길어 항아리에 붓던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

들리는 듯 사라져가는 듯

 

목숨 피워내는 것들 이 밤

가볍게 한숨 쉰다

붓질 없이 형체도 없이

허공의 흙 후벼 태어난 저 도라지꽃

눈 비끼면

날아갈 것 같은 천 길 낭떠러지

에 나를 세워버린다

 

아슬아슬 아슬아슬

새벽과 밤 사이 흰, 소리 없는 천둥 번개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어

돗자리에 누워 구름처럼 흘러나가고 있는데

칼 가는 소리 들린다

시스 스시 스스슥

남편 웬일, 저토록 뜨거운 눈빛,

칼을 가는 걸까

갑자기 더위 물러난다

저 날카롭게 빛나는 칼로

탁 잘라서, 내 병든 육체처럼 시들어가고 있는

절망의 꼬리 하나

휙 창밖으로 던진다면

붉푸른 핏방울들

안개 속 한들거리고 있는 애기단풍잎에 뿌려지고

노란 핏방울은

내 무의식의 은행잎에 물을 들이리

칼,

한 번도 제대로 갈아본 적 없는 나는

기억 속 썩은 혹, 욕망, 썩은 질투,

쓰윽 베어본 날 언제일까

누군가 갈아준 길 위의 칼 아닌

미련마저 던져 갈아 날카로운 칼날 아래

너덜너덜 곪은 발, 저 꼬리의 상처

싹둑 잘라 던지고 싶다

새 살이야 오르건 말건

꿈꾸듯 생경하게 몸통 하나인 저 고양이

내일 없이 오늘 피비린내 나는 저 고양이처럼

단애의 숫돌에 곧추 서서

내 휘청거리는 날개 버린다는 것,

칼을 간다는 것,

 

 

이민숙 약력 :

 1998년 <사람의 깊이>를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나비 그리는 여자>

한국작가회의 회원. 여수에 작은 도서관 ‘샘뿔 인문학 연구소’를 열었으며 소 박한 인문학적 사유의 시간을 통해 이웃들과 소통하며 지내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