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목에서 허명칠

 

 

세월을 끌고

범이 이사한다

소란스러운 이 세상

내키지 않나 보다

구름 같은 범띠 인생

범 이삿짐에 묻혀

해 저무는 가을을 거쳐 

앙상한 겨울로 가고 있다

미련을 밟으니 지나온 길엔 

울음과 웃음 널려 있다 

그 웃음 자국마다

황홀한 그림자 스며 있고

그 울음 자국들엔

처진 어깨 드리워 있다

바람과 서리로 엮인 

인생길 무겁기만 하다

앞길엔 안개 자욱한 데

산 토끼 빨간 눈

찬란하게 슬픈 추파

보내오고 있다

검둥이 범을 배웅하여

그믐달을 짖고 

보름달을 재촉하여

토끼를 마중한다.

 

경인년 섣달 그믐날 범해를 보내는 범띠의 감개

 

 

 

친구 만나 허명칠

 

 

고개 들면 보고

고개 숙이면 못 보는

먼지 깔린 고샅길에서

누군가와 어긋나

무슨 예감이 들었던지

뒤돌아보니 그이였다

10여 년 전 친구인 그이는

역경에 처한 내 가슴을

밟고 떠난 후 무소식이었다

그때로부터 내 가슴엔

배심의 돌담이 쌓이고 

친구 잃어 울적한 나날을 보내었다

그는 나처럼 고개 숙이고 걸었을까?

아니면 보고도 못 본 체했을까?

10년 넘는 세월이 지나

얼음이 풀리고 새봄을 맞아

내 마음속의 돌담도 녹아버렸건만

그를 포용하지 않으리라 짐작해서일까?

나는 그이를 불렀다

흡사 기다렸다는 듯이

그이는 돌아서면서 다가왔다

나의 내민 손을 잡으며

아무 말 없이 눈시울만 축인다

용서하란 그 이기적인 말도 없이

그렇다우리 사이엔 용서가 필요 없다

차가운 손을 잡은 나

두 손으로 힘껏 흔들어주면서

"우린 아직도 친구야!"

한 발 헛디딘 친구를 부축하지 않으면

나는 그의 친구가 될 자격이 없지.

 

 

 

자연의 품으로 허명칠

 

 

여기엔눈을 잡는 건 많아도

마음에 가라앉는 건 적다

코를 찌르는 건 많아도

퀴퀴하게 묵은 것들뿐이다

귀를 당기는 건 많지만

여과된 건 적다

눈을 감고 숨죽여 들어도

 

풀빛 숲으로 가자

거기 가면

반기는 꽃들이 만발하여 

눈을 잡고 놓질 않고

솔 향기 꿀 냄새 

쪽빛 공기 가슴 적시고

풀벌레 교향악 귀를 당긴다

어서 가자

옹달샘 부르는 언덕으로

거기 가면

비린내 없는 샘물 맑은 냄새

목을 축이고

민들레꽃 노란 웃음으로 손짓해

가슴은 한 뙈기 꽃밭이 된다

어서 가자

산기슭 시냇가로

거기 가면

우거진 버들 숲

여울 물 졸졸 장단 맞춰

하늘하늘 춤추어

어깨도 덩달아 춤 나온다

 

어서 가자

종 내 싸움 없는 자연의 품으로.

 

 

 

장벽 / 허명칠

 

 

살아 있는 한

언젠가 만날 수 있으리라

안개 걷으면

 

무정한 세월 

만나고 싶어도 안 되고

만날 수 있어도 안 되는 이 세상

 

만남의 기쁨

어찌하여 슬픔이 되어야 하나

기쁨이자 슬픔인 이 세상

 

뜨거운 찻잔 같은 만남의 기쁨

식어가는 찻잔처럼 쓸쓸하나니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슬픔

 

생기 넘치는 글로벌 시대

화강암처럼 땅땅한 주름 장벽

언제면 철들어 녹으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