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때는 누군가에게 금발의 제니였을까? 찬란했던 청춘의 날들에 누군가는 내 금발의 제니였을까? ‘제국익문사’의 작가 강동수의 두 번째 소설집 ‘금발의 제니’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소설집 안에 실린 ‘수도원 부근’을 읽으면서, ‘호반에서 만나다’를 읽으면서 쓸쓸하게, 적막하게 웃었다. 아마도 나 역시 누군가의 제니였을 거니까. 누군가는 나의 제니였고, 한때 제니였던 중년의 우리는 새벽녘 베란다에 서서 ‘금발의 제니’를 반추하는 작가 강동수처럼 청춘의 한 시절을 건너왔으니까.

 

 

촉촉한 윤기와 바스러짐, 그 쓸쓸함의 정체

 

몇 년 전 강동수 작가가 낀 여럿의 소주자리에서 풋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다들 <금발의 제니>에 등장하는 첫사랑쯤보다 더 어린 나이 귓볼 발개지는 연정 한 자락씩을 고백했던 것인데, 중년이 되어 우연한 재회를 가졌다는 이에게 강동수 작가가 건넸던 말 한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쓸쓸해서 어떻게 그 마른 만남을 가졌느냐고.

 

그 자리에서 들은 다른 이야기보다 이상하게 그 말의 여운이 오래 남더니, <금발의 제니>을 읽으면서 알 것 같았다. 신문사 논설위원이자 보수적인 가장의 체통을 겨울담요처럼 걸치고 있는 중년의 사내와 별을 노래하고픈 천진한 심성이 천성인 소년의 부조화 같은.

 

이런저런 술자리에서 곧잘 드러내던 그의 고백의 연장선으로 <금발의 제니>를 보더라도, 7편의 소설을 관통하는 건 ‘촉촉한 윤기와 바스러짐’이다. 금발의 제니들은 청춘의 자체발광으로 찬란했으나 생의 너덜길을 건너오는 동안 아름다웠던 모습은 윤기 없이 바스러진다. 서로의 후줄근한 모습을 바라보며 ‘오래전 책갈피에 넣어둔 마른 야생화 같은 묵은 그리움이 살아나는 것’을 느끼지만, ‘담뱃불을 끄듯 마음속에서 솟아오른 격정을 눌러끄고 만다’. 세월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

 

욕망도 그리움도 회한의 여지도 남아있지 않은, 그래서 마른키스로밖에 만날 수 없는 과거와의 재회는, 어지간히 허망한데, 이 지점에서 작가는 무심한 어조로 별을 노래한다. 별을 노래하되, 물론 중년답게 말이다.

 

아름다웠던 금발의 제니에 대해 꺼져가는 불씨가 살아나듯 일어나는 욕망을 담뱃불 눌러 끄듯 꺼버리는 무기력한 중년은 삶의 덧없음과 함께 아름다움의 근원을 눈치채버린 자의 쓸쓸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쓸쓸함의 정체는 싱싱하고 팽팽했던 젊음이 물기 없이 바스러진 중년으로 되어가는 과정에서 사랑이 사라지고, 욕망과 기쁨과 분노가 사라져 간 시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 강동수가 풀어내는 쓸쓸함은 금발의 제니들이 살아온 시간 저편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는 별을 그들이 잊지 않았다는 데서 기인한다.

 

 

별이 흐르듯 우주를 돌아가는 시간처럼

 

2010년 오영수문학상 수상작인 '수도원 부근'에서 작가는 청춘의 꿈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중년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 어릴 때 ‘나’와 같은 성당에 다녔던 안드레아와 체칠리아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수사가 되었고, 체칠리아는 수녀원에 가서 종신서원을 했다. 소설가로 나오는 ‘나’는 안드레아가 재벌의 레저단지 개발에 반대해 단식 투쟁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간다. 그리고 안드레아로부터 체칠리아 소식을 듣는다. 체칠리아는 수녀원에서 나와 달동네에 사는 남자와 결혼해 그의 아이들을 돌보며 살고 있다.

 

두 친구가 살아온 내력이 펼쳐지는 것과 병행해 수도원 현장은 용역깡패들이 들이닥쳐 행패를 부리는 사태를 맞는다. 안드레아는 그들이 던진 돌에 이마를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그들과의 대치를 계속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는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안드레아도 알고 있지만(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체칠리아도 알고 있었으리라), 별이 흐르듯 우주를 돌아가는 시간처럼 스스로가 선택하는 모양새인 운명 또한 도무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한 번의 여행이 끝나도 길은 다시 시작되는 것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채 수도원을 떠난다. 그리고 국도 쪽으로 길을 잡는다(옆길로 잠깐 새자면, 소설집 <금발의 제니>는 독립적인 7편의 단편을 다루고 있지만 화자가 서성이는 배경에서 튀어나오는 키워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일테면 ‘수도원부근’ 마지막에서 ‘국도’ 쪽으로 길을 잡은 ‘나’의 발걸음은 아들의 사고소식을 듣고 ‘7번 국도’로 들어서는 중년남자의 막막한 길로 이어진다. 그리고 소설 마지막 문장, ‘갑자기 몰아닥친 한낮의 어둠에 나는 눈을 비볐다’는 ‘명왕성이란 이름에서 왜행성 132340으로 격하돼 아내의 궤도에서 퇴출당한 전직시인의 후줄근한 시간을 그린 ‘청조문학회 일본 방문기’에 겹쳐진다.)

 

구비를 돌자 수도원 뒷산이 보였다. 산자락에 걸린 호수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 옛날 체칠리아가 술에 취해 중얼거리던 말이 떠오른 것은.

아름다운 것은 멀리 있다.

그게 칸트의 말이었던가 아니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멀리 있지만, 그러나 역으로 분명한 것은 아름다운 것을 놓지 않는 한, 무력하게 지친 중년의 시간 속에서 잊지 않고 바라보는 한 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존재해 있다는 것이다. 하고 보면 청춘이 중년보다 스스로 아름다운 건, 별이 얼마나 아득하고 멀리 있는지 몰랐기 때문은 아닐까.

 

결국 작가 강동수가 <금발의 제니>를 통해 일관되게 다루고 있는 것은 ‘별과의 거리’일진대, 현재의 시간을 단단히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결코 가능한 작업이 아니었을 성싶다. ‘아름다운 것은 멀리 있는’ 만큼, 한 번의 여행이 끝나도 길은 다시 시작되는 것이리라.

 

여간해서 눈치 채기 어렵지만, 작가와 이런저런 일로 어울리며 감지한, 놀라울 정도의 자기애로 스스로의 삶에 몰두하여 급기야 스스로 별이 되기도 하는 천진함을 소설의 군불로 삼는 작가 강동수의 다음 여정이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