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절


       정  복  태

 느티나무는 마을의 중심에 있었다. 여름철이면 거의 모든 마을 사람들의 쉼터로써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더러는 세상의 가장 나른한 모습으로 낮잠을 즐기던 동네 노인네들의 잠을 깨우는 바람에 시끄럽게 하던 아이들이 혼줄을 당하는 때도 자주 일어나기도 했다. 느티나무 가지속의 새들이 그런 광경을 보면서 소리를 질러대면 아이들은 언제 우리가 혼줄을 당했느냐는 모습으로 이곳 저곳을 쏜살같이 내달리고 있었다. 마을 앞은 강이 흘렀고 사람들은 그 강물을 퍼다 밥을 해먹었고 묵혀 두었던 빨래거리를 강물에서 빨았다. 강은 마을의 동쪽 끝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흘렀는데 여름철에는 더위를 못 참은 아이들이 해마다 그곳에서 빠져 죽었다. 그러면서  여름철 강물은 범람하여 마을의 논밭을 다 지은 농작물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강 맞은 편에는 산의 낮은 자락으로 나있는 신작로가 펼쳐져 있는데 그 길의 언덕머리에 관수루 정자가 우뚝 서있었다. 15C부터 세워져 그 당시의 시인묵객들이 주연과 더불어 시를 읊조리며 가까운 곳의 역참에서 밤을 보내고 정자의 한 자리에 자신의 시 한 편 씩을 남기고 떠난 곳이었다. 관수루에서 바라다 보면 동쪽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흘러가는 강의 전모가 한 눈에 드러나고 긴 모래밭이 강을 따라 길게 펼쳐져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름의 홍수를 위하여 강 입구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버드나무는 그 연한 목질로 하여 목재의 역할을 못하였지만 성큼성큼 자라는 성장 속도로 하여 사람들이 즐겨 심었던 수종이었다. 여름철 홍수로 불었던 물이 빠져나가면 동네 사람들은 버드나무 사이로 천렵을 하였다. 붕어며 버들치, 강새우 그리고 잉어 등 사시사철 보리밥 한 덩이로 단백질 부족의 마을 사람들의 영양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무엇보다 이 곳의 장관은 두 마을을 강이 막아서 서로 간 단절된 두 공간을 큰 목선을 만들어 서로 간을 소통하도록 이어주었다는데 있었다. 하루에 몇 차례 지나가는 버스도 이 목선으로 건넜다. 목선에서 일하는 사람을 사공이라고 했다. 대부분 뱃사공들은 이쪽 마을의 버드나무가 우거진 나루의 입구에 얼기설기 임시로 만든 집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부실한 목재로 지어진 처소에서 살았다. 목선의 입구로 신작로 옆으로 버스 승객들이 잠시 강을 건널 때의 머묾을 이용하여 작은 요기를 파는 가게들이 나란히 줄을 이어 생겼다. 그곳에는 막걸리만도 흡족하게 마시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처음보는 싸구려지만 양주도 있었고 양과자며 일본제 과자도 팔았다. 마을의 아이들은 목에 나무로 만든 목판을 만들어 목에 걸고 땅콩이며 자잘한 주로 먹을 것 중심으로 된 물품들을 버스 승객들에게 팔았다. 강물은 사공들의 튼실한 두 어깨에 의해 긴 장대로 강을 건넸다. 대부분 사공들은 아침이면 막소주 한 사발로 그런 힘든 일을 시작하여 종일 그렇게 거의 취해서 그 일을 하곤 했다.

 해방 후 선거철마다 강으로 막힌 두 지역을 이어줄 다리를 국회의원 선거에 나선 입후보자들은 약속했지만 국회로 간 그들은 그 이후 그 약속을 까맣게 잊었고 조금 양심이 있는 인사는 그 곳에다 다리를 준비하는 다릿목을 하나씩 박았다. 그것이 선거용 다릿발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선량들을 비웃었다. 그러나 두 마을을 이어주는 다리는 세워지지 않았다. 더욱 난감한 일은 해마다 여름철의 홍수로 하여 수십만 년의 흐름으로 만들어진 삼각주 마을 평야의 다자란 곡식들이 물에 잠겨서 마을사람들의 한숨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라는 이런 작은 마을까지 국가적 지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옛적 목선에서 수십 걸음 가까이 일제 시대의 주재소와 동척 지소가 있었다고 하는 곳은 이제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도로를 따라 대부분 논으로 이어져 있고 그 뒤로는 밭이 넓게 펼쳐 있었다.

 마을에는 초등학교가 하나 도로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세워져 있었다. 유일한 이곳의 교육기관인 이 초등학교는 마을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봄과 가을 두 차례 있었던 학교 운동회는 마을의 축제였다. 백군 청군으로 나누어 학부형은 자신의 아이들 편에서 어른들과 아이들은 맹렬한 응원으로 운동회에 열광하게 만들었다. 그 날은 마을의 축제였다. 술에 취한 어른들이 더러 말다툼을 넘어 드잡이도 벌어지곤 하는 것이 다반사였지만 마을 사람들은 운동회에 모두 모여 농사일로 힘들었던 시름겨웠던 일들을 이 날 하루만은 모두 잊어버리는 시끄러우면서 활기와 즐거움이 가득한 하루를 보냈다. 봄 가을 두 차례의 초등학교 운동회는 그렇게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공동 축제의 장 역할을 해 냈었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기 전 아주까리 기름이나 겨우 동네 시장의 철물점에서 한됫박 사온 석유 등잔이 마을 사람들의 어둠을 밝혀주는 재료였다. 우리는 어렸을 때 그런 어둠침침한 속에서 연필에 춤을 묻혀가며 숙제를 했고 이튿날이면 코끝이 새까매진 것을 서로 보며 웃기도 했다. 언제나 먹는 문제가 가장 큰 이 곳 사람들의 걱정이었다. 대부분 소작농이었던 마을 사람들은 사시사철 온몸으로 일을 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식량은 늘 모자랐다. 아이들은 그것을 못참아했고 그 어린 아이들을 보는 부모들은 돌아서서 한숨을 쉬었고 어미는 눈물을 훔쳤다. 봄이면 벌써 보릿쌀까지도 떨어지고 먹을 것이 없는 집들은 아직 겨우 올라온 쑥을 뜯어서 기울에 버물러 끼니를 이어가는 참으로 흉측한 궁핍을 견뎌야 했다. 그래도 철없는 우리는 앞산에 뛰어노는 야생 산짐승처럼 동네를 휩쓸며 뛰어 놀았다.

 동네 한 가운데 동네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수령이 500년도 더 되었다고 전해 내려오는 느티나무는 자고 일어나면 우리 어린 것들이 뛰어놀던 놀이터였다. 느티는 아fot도리가 패져서 깊은 상흔에도 불구하고 희안하게 봄이 되면 잔잔한 잎을 솟구치며 여름으로 들어서면 짙은 녹음으로 우리 어린애들의 놀이터를 만들어 주었다. 단오가 되기 한 달 전부터 마을 장정들은 마을 어른들의 지시를 받으며 그네줄을 꼬았다. 느티나무의 실한 가지에 한 달 정도를 꼬은 굵은 동아줄로 그네를 매었다. 단오 전 날 마을 어른 한 분이 부디 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기원을 드리는 고사를 드리고 나서 이튿날 단오가 되면 동네 사람들은 동네 아낙네와 처녀애들의 치마와 함께 하늘 위로 솟구치는 아름다운 모습에 마을 사람들의 환성과 고함소리로 느티나무 밑은 분주해 지기 시작하여 거의 열흘 정도의 그네 타는 즐거운 축제가 이어졌다. 이 날 단오에는 아낙네들도 더러 치마가 바람에 휘날려 속 옷이 조금 드러나도 흠이 되지 않았다. 여인들에게 이 날 단오는 집안 담 안에서 지내다가 마음껏 바깥세계를 구경하는 날이었다. 오후가 되면 마을 풍악대가 흥겨운 풍악을 울리며 흥을 돋우며 한 켠에서는 돼지 한 마리가 삶겨져 온 마을 사람들의 뱃속을 즐겁게 하였고 술이 한 순배 돌아가면서 마을의 느티나무 아래는 최고의 놀이판이 벌어져서 여기저기서 춤을 치면서 왁자한 즐거운 웃음이 퍼져 올랐다. 그러면 우리 어린 것들은 덩달아 어른들 사이를 돌면서 한껏 단오의 기운과 무한한 즐거움을 느꼈다. 어른이 되어서야 옛 어른들이 단오절을 지켰던 세시풍속의 의미에 의하면 단오는 남자의 정기가 가장 강한 날이고 남의 집 일을 하는 머슴들에게도 이 날만은 용돈과 술과 고기를 주인이 대접했고 편안한 하루의 휴식을 허락한 날이라고 한다. 여인네들은 청포로 머리를 정갈히 감기도 했다. 단오도 끝나고 끊겨 나간  그네줄을 멍하니 보면서 흥겨웠던 단오의 기쁨을 떠올리며 시무룩히 느티나무 가지 위에 올라가 멀리 강물을 바라보면 강물은 미루나무 사이로 투명하게 빛을 품어내고 있었다. 긴 삿대로 목선이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까지 먼 빛으로 보였다. 동네의 장난꾸러기 아이들은 갑자기 할 일을 잊어버린 듯 시무룩해져 활기를 잃어버렸다. 빛을 반사시키는 강물 위로 목선이 움직이는 광경을 보면서 저 목선을 건넌 버스는 어디까지 가는 지 그 향방이 늘 동경과 더불어 마을의 아이들은 몹시 궁금하기만 했다. 그때 우리가 알던 거리 감각은 고개를 넘은 바로 그 저쪽이 사람들이 가는 대구란 곳인 줄 알았다. 사실 우리는 초등학교를 마친 삼촌들이 돈을 벌기 위해 갔던 서울에서 명절날 고향을 다니러 온 일이 신기하기만 했다. 우리 아이들은 한 번도 서울은 커녕 대구조차 가본 적이 없는 피안의 저쪽 땅이었다. 강어귀에서 놀다가 목선에 실려 가던 버스에서 잠시 내린 손님들은 우리들에게 특별한 사람처럼 신기하게만 보였다. 강의 저 먼 곳으로 주름지어 끝없이 이어진 산들의 겹친 모습처럼 느티나무 위에서 바라보는 버스의 향방은 언제나 그리움과 더불어 깊은 동경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때 이르게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여름이 천천히 저 멀리서 오고 있었다.

 여름철에는 강물이 불어서 마을 옆으로 냇물조차 강폭처럼 깊어질 때가 있었다. 처음 비가 시작하면서 논배미마다 있는 작은 보에서 물이 흘러 강으로 흐를 때면 우리는 작은 찌그러진 양동이를 들고 시냇물이 모래밭을 적시며 보에서 강으로 향하던 붕어며 강새우와 메기들을 주어 담았다. 점점 강물이 불어서 강어귀로 밀려나온 피라미들도 양동이에 담기에 바빴다. 대충 반 시간쯤 되면 양동이는 민물고기로 거의 반쯤을 채워져 집으로 오면 그날은 각자의 집에서 매운탕을 끓여서 집안 어른들의 술추렴이 벌어졌다. 어른들의 누렇고   탁한 이빨 사이로 일제시대와 해방 후의 아팠던 사람들의 드난살이의 슬픔이 배어든 유행가가 육자배기의 민요와 함께 집집마다 흘러 나왔다. 그러나 대체로 동네 사랑의 장년층 사내들의 사랑방에서 함께 합창으로 흘러나오는 일이 많았다. 빗소리와 그 합창의 유행가 가락은 참으로 끈적하게 밀착하여 두 소리의 교합을 몹시 듣는 사람에게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마력을 가졌다. 그것은 이 땅의 장삼이사가 겪었던 사람살이의 공통된 슬픔이었기 때문일까. 밖에는 비가 내리고 노래 소리는 이윽하니 취한 장년 사내들의 힘든 농사일에서 겨우 한숨을 쉬게하는 축복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여름의 일은 이런 기쁨만은 아니었다. 뙤약볕을 견디지 못했던 조무래기 동네 애들 중의 하나가 강물에 익사하는 날이던지 이웃 마을의 처녀를 사모하던 떠거머리 못난 청춘이 큰 못에 몸을 던져서 동네를 온통 눈물 바다로 흥건하게 젖게 할 때는 마을에는 신원 굿이 벌어졌다. 원혼을 풀어주는 신원굿을 하는 큰 무당은 마을의 외곽지에 혼자 살았다. 젊은 나이에 원통하게 이승을 떠난 가여운 넋을 그 원혼을 풀어주는 굿은 온 동네 아낙네들이 모인 곳에서 사고로 죽은 집의 마당에서 벌어졌다. 무당의 징소리와 온갖 원색의 무녀의 옷차림, 머리에 쓴 모자, 듣는 사람의 마음을 헤집어 놓는 음색, 대나무을 잡은 대잡이가 무당의 신통력으로 죽음에 이른 과정을 쏟아놓게 될 때, 마을의 모든 사람들은 하릴없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고 눈물의 강을 이루었다. 남정네들은 차마 아낙네 틈서리에서 울지 못하고 멀리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사람의 슬픔은 무녀의 귀기서린 단장의 애끓는 타령에 무녀의 신통력에 감탄하며 흑흑하며 그 슬픔에 목이 메였다. 해마다 강의 신은 이런 어린 동네 아이들을 한둘씩 희생시켰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이 마을의 액운이라고 했다. 억울한 죽음에 대하여 신원을 풀어주어야 동네의 피해가 없어진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여름은 그렇게 길게 이어지면서 뜨거운 햇빛과 며칠씩 계속되는 지루한 장마와 지겨운 콩밭이며 논의 피살이 같은 힘든 노동과 더불어 깊어 갔다. 동네 한 가운데 서있는 느티나무는 오후의 한 때 마을 사람들의 휴식 공간을 톡톡히 해냈다. 우리 어린애들은 어머니의 걱정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느티나무로 올라가 술래잡기도 했고 소꼬리털로 매미를 잡기도 했다. 홍수로 강이 불어나면 강을 마주한 두 마을 사람들의 왕래가 당분 간 끊기기도 했다. 목선은 그 와중에도 마을을 지나는 버스와 트럭을 옮겨주기 위해 위험한 도강을 하기도 했다. 1930년 무렵 강은 그 아래의 바다에서 내륙으로 소금을 실어나르던 경유지였다. 나루라 불리어 지던 그 시절에는 주막이라는 이름의 밥집이 있었다. 보부상이라 불리어 지던  한 무리의 상인들이 나루에서 소금을 받아 더 큰 마을로 소금을 날랐다. 나루에서 마을의 중심을 지나 ‘부치데이 고개’라는 고갯길이 있었다. 근처에서 가장 높은 나각산이 뻗어내린 곳으로 가끔 화적이 출몰하기도 해서 도부꾼들은 고개에다 부처를 모시는 절을 세웠다. 그래서 이 고개를 ‘부처당 고개’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강의 선창은 언제나 막소주에 벌건 얼굴을 한 사공들과 동네 왈패들의 불콰한 술에 취한 모습이 있었다. 아비의 담배 심부름으로 나루에 가면 빼꼼히 내민 저고리가 풀어 헤쳐진 술집 작부들의 모습들을 보고 기이한 마음을 아이들에게 가져다 주기도 했다. ‘삐루’라 불리어지던 캔 맥주도 이곳 선창에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언감생심의 술이었다. 6.25전란과 더불어 유행한 이 삐루란 맥주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천상의 술로 마시기에는 너무 고가의 상품이었다. 6.25전란으로 나라가 어지럽던 시절 강은 피난민들이 여기저기 모진 목숨을 유지시켜 주기도 한 주요한 터전이기도 했다. 이 곳 강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남부여대하여 청도 밀양까지 걸어서 한많은 피난을 갔었다. 멀고 가까이 포성이 울리는 그 때 굶주림과 의식주가 최악의 상황에서 오직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마을 사람들은 난리를 피해야 했다. 마을마다 집안에 거름터라는 곳이 있었다. 이즈음으로 보면 쓰레기를 모아 놓는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다. 피난을 가는 사람들은 가벼운 귀중품은 피난살이에서 즉시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휴대해서 가져 갔지만 무거운 것들은 대체로 자신의 집 거름터에다 깊이 묻고 떠났다. 전란이 끝난 후 돌아온 마을은 가옥은 물론이고 논밭까지 샅샅이 폐허화 되어 있었다. 한숨을 쉴 사이도 없이 먼저 어른들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논밭마다 묻혀 있는 포탄알의 빼냈고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을 베어내고 먹을 수 있는 작물을 심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미국이 준 구호시품인 밀가루, 옥수수 가루, 분유 가루를 받아서 집으로 가져왔다. 들에서 자라는 먹을 수 있는 산채를 뜯어서 아이들이 가져온 가루에 버물러 겨우 죽지 않을 만큼 끼니를 이었다. 모질고 너무나 배고픈 시절이 계속되었다. 강물은 그래도 푸르게 흘렀다. 때 이르게 닥친 장마는 굶주림에 지친 마을 사람들을 영양결핍의 온몸을 나른하게 가라앉혔다. 강물이 불어나는 그 사이로 흘러들던 작은 시내에서 봇물에 갇혔던 민물고기를 쪽대로 후려 마을 어른들은 막소주를 마져댔다. 모두가 절대적으로 빈곤한 시절이어서 자고 나면 첫 인사가 식사에 대한 말이었다. 견디지 못할 정도의 결핍의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강 둔덕에 서있는 산복숭아나무에서 까칠한 설익은 복숭아를 따먹으며 소를 뜯겼다. 산복숭아 열매는 떫고 입안에서 까끄러웠지만 배룰 채우는 고마운 것이었다. 모두가 허기졌고 마음은 저녁 하늘처럼 힘을 잃었다.

 강은 수만 년을 흘러서 마을을 휘돌아 흐르면서 종은 지질의 퇴적층 땅을 형성하여 대체로 물이 잘 공급될 수 있는 곳은 벼를 심었고 그 외는 밭으로 어떤 작물을 심어도 잘 되었다. 강 옆으로 여름의 끝에 칠칠한 녹청색의 남자 어른의 종아리 크기만한 무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무가 무성하기 전에 이 곳은 원두막을 설치하여 참외, 수박 농사를 지어서 여름 한 철의 수입을 거두어 들였다. 무는 그 때쯤 도시에서 온 트럭이 줄을 이어 실어 날랐다. 칠칠한 잘 자란 무는 산더미처럼 트럭에 실려서 마을 사람들이 입을 함지만하게 만드는 효자 작물이었다. 가을이 되면서 마을의 뒷산으로 잘 익은 밤알들이 떨어지면서 아이들은 주인 몰래 밤을 털어서 집으로 가져갔다. 햇밤은 간식으로 더할 수 없이 감미롭고 은근하게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 강어귀에서는 민물게가 통통한 살을 올려서 어른들의 술안주감으로 최고였다. 특히 가을의 미꾸라지는 노란 몸통을 굴려 농사철 수확이 끝난 뒤 못을 퍼내서 몇 동이의 미꾸라지를 잡아서 마을의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절대적 빈곤의 시절이었지만 그러나 모두가 같은 처지였기에 인심은 너무나 도탑고 정겨웠다. 공동체가 가진 인심이 그런 대로 궁핍한 시대를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작은 위안이었다. 인정은 풍요로운 시절이었다. 가을이 되면 마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여름내내 궁핍한 어려운 시절을 지내면서 가꾼 곡식들과 과일들이 마을 이곳저곳에서 황금색으로 빛나는 풍요로운 현장을 보는 기쁨이었다. 비록 소작농으로 힘든 노동에 비해서는 보잘 것 없는 몫을 가져갈 뿐이지만 가을의 황금색 들녘은 사람들의 마음을 풍성한 환상으로 가득 채워 주었다.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 맞이하는 추석, 집집마다 이 날만은 조상에 추원보본하기 위해서 떡을 빚고 먹지 못하던 고기근을 사서 삶고 지지고 볶았고 갖가지 나물을 새로 짠 참기름에 묻히면 마을은 고소하고 기름진 음식 냄새와 더불어 마을 사람들은 행복으로 이끌어 주었다. 아이들은 전을 부치던 가마솥에서 날쌔게 고기 한 점을 먹다가 어미에게 치도곤을 맞곤 했다. 또 누렇게 익어가는 논배미의 둔덕에서 잘 익은 햇콩을 뽑아서 쇠죽솥에 쇠죽과 함께 끓이면 햇콩맛의 구수함 그 맛은 참으로 최고의 미각을 느끼게 하였다. 소는 늘 우리네 농사꾼들과 함께 살아가는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 지금이사 소고기 수입 문제로 건강을 걱정하는 시절이 되었지만 그 시절은 소고기보다 소 한 마리는 한 집안의 재산 그 자체였다. 그런데 어떻게 가족 같은 소를 잡아 먹을 수 있었겠는가. 재산상의 가치는 고사하고 가족과 같은 그 정을 어찌 그 인연을 없앨 수 있었겠는가. 아이들은 학교를 다녀와 맨처음하는 일은 소를 이끌고 풀을 뜯기러 가서 소풀을 베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어느 곳에 가면 소가 좋아하는 풀이 많은 줄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고 그 곳에 닿으면 소를 풀어서 자유롭게 풀을 뜯게하고 풀을 베어서 망탱이에 채웠다. 마을을 굽어보는 산들은 대체로 낮았고 그 아래의 강은 마을 전체를 돌아서 유장하게 흘렀다. 마을 맞은 편은 옛날 역참이었고 이 곳은 멀리 부산포에서 소금을 내륙의 끝 지점인 안동 지역까지 실어다 주는 수운의 관문이었다. 장천이라고 옛날부터 불리어 졌다고 어른들이 말씀하는 것을 아이들은 들었다. 이 마을의 지역적 특성이어서인지 몰라도 마을의 구성원들 중 특별히 뛰어난 사람들도 없었고 거부의 대농장 경영자도 없었고 고만고만하게 찢어지는 가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햇빛과 산과 강과 논밭이 그들의 삶의 고단하면서도 즐겁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가을걷이가 거의 끝나면서 매서운 바람이 불어재키면서 겨울이 왔다. 겨울은 마을 사람들이 지게며 보따리를 가족수대로 하여 가까운 마을의 뒷산으로 땔감을 하러 다녔다. 유난히 오리나무와 참나무와 소나무도 많았다. 소나무 바늘끝 같은 갈색의 잎을 갈비라고 하여 아낙네들이 특히 많이 긁어 모은 땔감이었다. 갈비는 집안의 제삿날이나 축제 때 전을 부칠 때 매우 쓸모가 많은 땔감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은 대체로 소나무의 삭정이와 나뭇잎을 긁어모아 집체만한 땔감을 지게에 재워서 집으로 날랐다. 우리는 겨우 꼴망태 정도의 솔잎을 개미 보따리처럼 매고 어른들의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산 위로는 파아란 더 없이 맑고 높을 하늘을 기러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보리밥 한 덩이로 배를 채웠던 배는 다시 꼬르륵하는 소리가 났고 우리는 서둘러 감자며 고구마를 쇠죽 끓이는 부엌 아궁이에 넣었다.

 겨울이 들면서 학교를 가야하는 아이들은 동네 골목의 따뜻한 양광이 비치는 곳으로 모였다가 함께 시끄럽게 재잘대면서 학교로 걸어갔다. 학교는 마을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십리나 떨어져 있는 아이들이 등에 책보따리를 매는 일에 비해서는 편했다. 대체로 교실 바닥은 가마니가 깔려 있었고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건물을 지어서 목재로 지어진 마루로 바뀌었다. 6학년이 되어도 아이들의 코 밑은 번들거렸고 옷소매는 콧물을 닦은 흔적이 햇빛에 반짝였다. 체육 시간은 언제나 달리기 한 종목이었다. 분단별 경쟁을 하면서 우리는 고함을 쳐대며 열광했다. 학교 운동장 담은 대체로 측백수로 빽빽이 줄을 이어서 둘레를 지었다. 일제 시대의 벚나무가 운동장 가로 서있기도 했다. 벚꽃은 봄에 꿈처럼 꽃망울을 터뜨려 어린 우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도 했다. 시험은 원지에 긁은 글씨 위로 등사 잉크를 발라 롤러도 눌러 시커먼 시험지에 등사하여 시험을 치렀는데 간혹 여러 번 눌러서 글자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늙은 대통령이 통치하던 그 시절 조회 시간이라는 아침 모임이면 애국가가 끝난 뒤 우리의 맹서를 소리 높여 암송하였었다. 당시의 선생님들은 마을 사람들의 우상이었고 숭앙의 대상이었고 마을의 처녀들 마음을 달뜨게 하는 대상이었다.

 학교에서 우리는 토끼를 사육하였다. 물론 상급 학년이 되어야 그 임무가 맡겨졌다. 우리는 나각산 근처까지 올라 토끼가 좋아하던 씻냉이 혹은 씀바퀴를 뜯어러 당번이 되면 그 풀을 한 자루씩 뜯어서 학교로 돌아와 붉은 눈망울을 한 흰 빛과 잿빛을 띤 토끼에게 던져주면 토끼는 오물거리며 우리가 뜯어온 씀바퀴를 열심히 먹었다. 토끼들은 선생님들의 토요일 오후 술안주로 한 마리씩 희생되는 것을 우리 조무래기들은 이비 알고 서로 소리 낮추어 그 야만적 권위주의을 비웃곤 했다. 그러나 그 때 우리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은 정말 지극정성으로 우리의 교육에 열심이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군사부일체라는 동양의 고전적 이념에 우리는 일제시대가 끝난 때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일본인이 우리에게 남겨준 군국주의적 의식 교육도 더러 받기도 했다.

 겨울이 들어서면 마을의 사랑방에서는 볏짚으로 가마니를 짰다. 가마니를 짜는 나무로 만든 기계와 함께 마을 어른들은 밤마다 모여서 술내기 화투도 쳤고 옛날 이야기를 목청 좋은 마을의 어른 한 분이 읽으면 가마니 짜는 소리를 탓하며 귀를 귀울려 이야기 삼매경에 빠지기도 했다. 마을에는 대부분 누구네 제삿날이라도 모두 꿰고 있었고 살아있는 집안 어른들의 생일까지 두루 알고 있었다. 제사를 지내면 음식을 한 밤중 돌려서 은근히 기다리기도 하는 풍습이 일반화 되었다. 동짓날 집안의 선조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 집안의 좋은 운세를 비는 고사를 지냈다. 갓 빻은 찹쌀로 팥고물을 뿌려서 시루떡을 공통적으로 해서 고사를 지낸 집은 한 조각씩 집집마다 아이들을 통하여 빠짐없이 돌렸다. 찰지면서도 또 그 양이 많지 않아서였는지 맛이 너무 입에 감겼다. 쫀덕거리며 혀 끝에 감겨드는 그 찹쌀 시루떡 맛은 이웃 간의 인정을 그렇게 긴밀하게 연결시키는 매개체였다.

 그런 겨울의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밤에 돌아다니던 아이들은 고뿔이라는 감기에 걸린다. 아이의 콜록이는 기침 소리가 심해지면 집안의 할머니는 액운을 몰아내는 의식을 하여 몸살로 열이 오른 아이를 깨워서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어 머리카락을 세 번 문대고 침을 세 번 뱉어내라고 한다. 고뿔에 시달리던 아이는 고만 그 시퍼런 칼날에 간담이 콩알만 해진다. 문을 닫고 나가신 할머니는 천지신명과 조왕신에 간절히 빌다가 그만 바가지를 엎고 그 위에 칼을 꼽았다. 아마 이열치열의 고뿔퇴치법이었는지 모른다. 겨울이 더 깊어지면 마을 앞의 강이 얼어붙었다. 강이 얼면 목선을 띄우지 못할까 사공들은 밤새 얼어붙는 강물을 왔다갔다 하면서 얼지 못하게 했다. 적어도 그들은 그 일을 잠을 한 숨도 자지 않고 왕복하면서 계속했다. 도끼로 내려쳐도 언 강물이 얼음으로 단단해지면 우리는 나무 아래에 쇠줄을 씌운 썰매를 지치기 시작하였다. 더러 아이에 대한 엄한 어미들은 그런 아이를 강으로 가지 못하게 불호령을 내리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몰래 제 또래들과 지치도록 얼음판에서 썰매를 탔다. 썰매의 속도는 썰매 밑에 댄 쇠줄의 날카로움에 의해서 우열이 가려졌다. 동네 대장간에서 잘 연마된 쇠줄을 가진 아이들은 그 위에 대는 나무 조각도 매우 질 좋은 것을 대서 다른 아이들에게 과시하기도 하였다.

 가난한 그 시대의 겨울밤은 너무 길고 길었다. 마을의 남자 어른들은 어느 집의 큰 사랑에서 가마니를 쳤고 그리고 묵내기 화투를 쳤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서 그렇게 긴 겨울밤을 보냈고 아낙들은 더러 길쌈을 하여 광목천을 짜기도 했고 아이들의 떨어진 옷을 꿰매기도 하고 양말짝도 깁으면서 한 없는 겨울밤을 견디었다. 그러다가 출출하게 배가 허전해지면 가을에 담가둔 쉬원한 통무우김치를 꺼내어 우적우적 씹기도 하면서 가까운 마을의 장터까지 걸어가 메밀묵을 사와서 신김치에 말아서 먹었다. 사실 어려운 살림살이에서 먹을 것을 돈으로 구한다는 일은 사치한 일이었고 또 그것을 살 돈도 그들은 없었다. 김장 때 묻어두었던 배추뿌리며 알맞게 물이 마른 고구마도 긴 겨울밤을 보내는데 요긴한 식품이었다. 배추뿌리는 적당히 물기가 빠져 껍데기를 깎아서 씹으면 그 알싸한 매운 맛과 더불어 한참을 씹으면 은근히 혀끝으로 느껴지는 단맛은 일품의 맛이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긴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동지가 되면 팥죽을 쑤어서 마을의 재앙을 쫒는 의식을 치르면서 죽 속의 새알심을 나이에 맞추어 먹었다. 더러는 마을 전체의 앞날의 무운장수와 행운을 빌기 위하여 수수떡을 빚어서 동네의 한 가운데 서있는 느티나무에 가서 치성을 올렸다. 느티의 둘레에 사람으로 말하자면 옷 같은 그 해 생산된 볏짚으로 엮은 연개를 휘둘렀다. 마을의 가장 나이 많은 할머니가 지극정성으로 손을 모아 빌면서 마을의 무사태평을 정성껏 빌었다. 느티나무 속에서 잠을 자던 새가 부리나케 날아가기도 하고 더러는 게으른 새는 두 눈을 껌벅이며 횃불 속의 이 광경을 내려다 보기도 했다. 그리고 일 때문에 미루어 두었던 처녀 총각들의 결혼식이 벌어진다. 대체로 두어 마장 떨어진 이웃과 사둔관계를 맺었고 이 날 사모관대를 한 신랑이나 청홍 비단으로 단장한 신부는 마을 사람들의 과분한 찬사를 받으며 전통 혼례식의 주인공이 되었다. 혼례를 준비하는 집에서는 돼지를 한 마리 정도는 잡았는데 결혼식 당일 마을 사람들의 식욕을 돋구어서 마을 전체가 즐거움의 극한으로 몰아가게 하였다. 겨울 밤에 우리 개구쟁이 어린애들은 어렵게 구한 전짓불을 가지고 처마마다 잠자는 참새를 손으로 잡았다. 간혹 처마에서 구렁이가 나와 기겁을 하는 낭패고 겪어 소란을 떨기도 했지만 작은 마을의 초갓집 처마마다 참새는 자주 우리 개구쟁이들의 손에 잡혀 나와 애처롭게 파닥이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겨울에는 가을에 말린 무청과 배추 시레기로 보리밥에 된장과 고추장을 비벼서 먹는 맛도 겨울만이 주는 한 맛이었다. 모두가 어려운 살림살이에 먹는 행위가 마을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리고 어느날 망을의 남자 어른들은 도끼와 새끼줄과 긴 장대를 들고 꽁꽁 얼어붙은 강으로 함께 나간다. 숨구멍을 도끼로 둘레를 깨서 만들어 긴 장대 끝에 못을 박아 강바닥으로 휘적이면 한참후 민물장어가 거짓말처럼 대롱대롱 대달려 못에 박혀 딸려 나왔다. 민물장어는 단백질이 부족한 마을 사람들에게 긴 겨울을 이겨내게 하는 영양분을 제공하는 귀한 물고기였다. 특히 장어 작살을 하는 날은 눈이 뿌리면 더욱 실하고 튼실한 굵은 장어가 많이 잡혔다. 장어들은 추위 때문에 강의 바닥에서 겨울잠을 자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끌려 나왔다. 간혹 많이 잡힌 날은 장어에다 고추장을 발라 구워먹는 맛도 천하 일미였다.

 설날은 일년 중 가장 신성한 날이면서 가장 풍요로운 명절 중의 명절이었다. 서울까지 돈별러 갔던 청년들이 이 날만은 모두 번쩍이는 신사복을 입고 선물을 사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집집마다 그 해 농사 지은 것중 가장 귀하고 좋은 곡식으로 차례상을 준비하였고 우리들도 설빔이라하여 비록 광묵천에 염색한 옷감으로 만든 옷이지만 새로운 옷을 입게 되고 양말도 새로 마련하여 아이들은 설날이 오기를 참으로 간절하게 기다렸다. 조상님들께 차례를 드리고 마을의 어른들을 나이순으로 차례차례 세배를 드렸다. 아이들은 색색의 팽이를 꺼내 돌렸고 처녀애들도 이 날 더 예쁜 얼굴 표정으로 생글거렸다. 정월 대보름의 쥐불놀이, 부름 깨물기 귀밝이 술 ‘내 더위 사라’는 말장난 등 이때쯤이면 지난 보름 전의 강정들이 집안 여기저기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대체로 쌀강정이나 깨강정은 처음 선호하는 강정이었고 들깨강정이나 콩강정은 그 맛과 단단함 때문에 손이 잘 가지 않던 강정이 보름이 지나면 콩강정까지도 아쉽게 사라지게 되었다.

 음력 이월이면 집집마다 소지를 올렸다. 한 해 농사의 풍년을 베풀어 준다는 영등 할머니신에게 비는 간절한 기원의 지성님 소지의 제를 지냈다. 이월 초하룻날 새벽은 할머니의 주름진 손에서 얇은 한지로 만들어진 소지가 식구들 수대로 사루어졌다. 대체로 영등 할머니신이 들어 온다는 부엌에서 이 의식을 치렀다. 못자리에 사용할 짚단을 밑에 깐 그 위에 소반을 놓고 몇 가지의 정성을 다한 나물을 올리고 신성한 물 한동이를 옆에 두고 할머니는 집안의 식구들 각자의 이름을 호명하며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간절히 기원하는 치성을 드렸다. 그 날 이후 집안의 며느리는 정화수를 매일매일 떠 받쳤다. 그 지극정성의 섬김은 사람들의 머리에 각인된 운명론적 간구, 절대적 종교와 같은 것이었다. 신령스러움조차 간직한 외경심의 극치였다.

 차돌처럼 단단히 결빙되었던 강물이 풀리면서 겨울이 끝나고 먼빛으로 봄이 오고 있었다. 강물 위로 겨우내 찬기운이 풀리면서 엷은 안개가 조금씩 밀려왔다. 강어귀의 수양 버들 가지에서도 여린 잎사귀의 싹이 안간힘으로 솟아 올랐다. 다시 마을 사람들은 농사 준비로 바빠지기 시작하였다. 집집마다 외양간에 있던 쇠똥이며 돼지울을 치워서 얻은 거름을 논에다 뿌렸다. 집식구들의 뒷간도 말끔하게 퍼서 밭에다 뿌렸다. 겨우내 꼼짝대지 않던 개들도 함부로 뛰어 다니기 시작했다. 마을이 침묵 속에 갇혀 있다가 한바탕 크게 기지개를 펴면서 봄을 맞고 있었다. 목선이 있는 나루에도 버스에서 내린 손님들의 왁자한 소리들이 활기에 넘쳤다. 땅콩과 과자를 파는 소녀애들도 덩달아 신명나게 물건을 팔기에 고함을 돋구었다. 목선의 사공들은 일이 없는 늦은 밤에 막소주를 너무 많이 마셔대어 서로 간 드잡이도 자주 벌어지고 하는 것이 겨울이 끝나고 봄이 되면서 한층 고함 소리로 드높였다. 계절이 가져다 주는 따뜻한 축복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겨우내 움추렸던 마음을 한꺼번에 바꾸고 있었다. 봄이 되면 이웃 마을 사람들이 가득 목선을 건너서 장터로 몰려드는 때도 이 때였다. 장은 닷새마다 열렸지만 봄을 맞으면서 열리는 장터가 더욱 활기를 띄었다. 가축전에는 강아지와 어린 병아리가 둥주리 채로 가져와 팔았다. 아직은 쌀쌀한 기온에 이 가여운 강아지와 병아리들은 오소소 떨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연민에 잠기게 하였다. 국밥집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솟구쳐 장꾼들을 끌어 모았고 순대를 넣은 뜨껀한 국밥은 인기를 끌었다. 비단전이며 옷전은 별 재미를 볼 수 없었고 오직 사람들 발길이 이어지는 곳은 작물 씨앗전과 농기구를 파는 철물전과 농기구를 수선하는 대장간이었다. 건장한 사내의 땀이 흐르는 망치질 소리와 식칼이며 쟁기날이며 호미날, 괭이등을 두드리며 야금하는 주인 대장간 나이 든 대장장이의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일을 다 본 마을 사람들은 저녁에 돌아올 때 간고등어 한 손, 호미 고기 한 줄 간혹 파란 연록빛 싱기 한 묶음을 사가지고 돌아갔다. 이튿날은 무를 넣은 간고등어국이 밥상에 올라 땀을 흘리면서 그것을 먹어댔다. 싱기는 물에 풀어서 돌을 가려내고 물을 짜내고 양념을 하여 참기름과 파와 다진 마늘을 넣어 조근조근 무치면 그 맛도 일품이었다. 우리는 호미고기를 쇠죽 끓이는 부엌에서 구워 먹었다. 간혹 호미고기에서 알이라도 나오면 그 날은 행재를 만난 날이었다.

 먼 빛으로 보이는 나각산도 부우윰하게 회색과 아른아른한 푸른 빛을 비치고 있었다. 비록 높지는 않은 산이지만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산은 늘 위엄을 가지고 그 곳에 서있었다. 우리들은 그 곳에서 학교에서 키우던 토끼며 닭을 위하여 지천으로 풀이 우거진 나각산으로 즐겨 오르곤 했었다. 나각산 정상에서는 강물이 휘돌아 마을로 스며들 듯이 한 눈에 들어왔고 마을 전체가 손바닥만하게 아스라이 보였다. 산의 정상 바로 밑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바위 곳곳에 이상하게 조개껍질이 박혀 있는 형상이 신비했다. 아마 수만 년 전 바다던 지층이 화산 폭발로 융기하여 지금의 산으로 형상화된 모양이었다. 언제나 그 산을 오르면 가슴이 탁 트이는 쉬원함이 있었다. 나각산의 끝에 이 곳 저 곳의 마을이 올망졸망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같은 성씨로 마을을 이룬 곳도 있었고 옛날 서울에서 큰 벼슬을 했다는 낙향한 집안의 기와집은 그들의 위세를 자랑하는 제실과 더불어 망루처럼 대단히 크고 위용이 넘쳤다. 흔히 그 집을 가르켜 마을 사람들은 ‘대감댁’이라 불렀다. 지금에사 신분제가 폐지된 사회지만 적어도 마을 사람들은 옛날의 상감마마 아래서 벼슬을 했던 그 집의 조상에 대한 극진한 예우를 해 주었다. 그런 마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윗 상전에 대한 자연스런 의식이 끊이지 않고 적어도 그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하였다. 사실 그 큰 고대광실의 기와집의 주인은 먼 일가가 살고 있을 뿐 정작 대감의 후손들은 그곳에 살고 있지 않았다. 해마다 그 기와집의 뒷산에 있는 제실에서 일가 문중이 모여들어 훌륭한 조상들을 위한 묘제를 올리곤 했다. 마을의 배고픈 아이들은 묘제를 지낼 때 쯤 슬며시 구경꾼으로 끼어들면 그 사람들은 아이 어른 가리지 않고 묘제에 올렸던 음식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언제부터인가 용바위라 불리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명주 실꾸러미 한 통이 다 들어가는 깊은 곳이라 일켣든 용바위 주변에 고무로 만든 기괴한 옷을 입은 사람이 입에 담배대 같은 것을 물고 들어가 가마니로 잉어를 잡아 올렸다. 잠수부가 건져올린 잉어는 꼬리를 세차게 흔들면서 잉어 본래의 힘찬 용틀림을 하며 퍼득였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얼마간의 적은 돈을 주고 잉어를 샀다. 잉어는 닭과 더불어 가마솥에 푹 고와서 특히 아이를 낳은 아낙네들에게 귀한 음식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용봉탕’이라 불리어진 이 잉어탕은 사실 맛은 별로였다. 용바위가 마을의 맞은 편에 있었는데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그 곳은 바위가 유난히 날카롭게 솟구쳐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곳이었다. 아이들도 수영에 능했지만 용바위 근처로는 수영을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곳에는 강신이 살기 때문에 해마다 제물을 필요로 해서 강신에게 잡혀간다는 전설이 전해져 왔기에 마을 사람들에게는 외경의 장소였다. 그런 곳이 위험해서인지 차 사고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아마 길이 험해서 운전하는 사람들도 용바위를 지날 때는 속도를 줄이고 유난히 조심스럽게 운전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마을 쪽에는 언덕이 있어 여름날 소를 뜯기러 가서 언덕 위에서 우리는 강물로 뛰어드는 담력 겨루기를 하기도 했다. 언덕 옆 방죽에는 복숭아며 산 사과나무와 돌배나무가 있어서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배를 채워주는 고마운 과일나무가 있던 곳이었다. 산복숭의 열매는 떫고 거친 맛이었고 돌배의 속살은 못이 박힌 것처럼 단단하기만 했고 사과 열매조차 사과의 조상이라는 능금처럼 그 크기가 너무나 작았다. 그러나 가난한 시대 아이들의 간식용으로 그 열매들은 반갑고 고마운 것들이었다. 강을 마주한 모랫벌 뒤의 긴 방죽은 소를 마음대로 풀어놓을 수 있었고 대체로 소풀이 언제나 풍성하게 자라 있는 곳이었다. 우리들은 그 강을 마주한 방죽에서 장난을 쳤고 풀을 뜯었고 소에게 풀을 먹게 하였다. 서쪽 하늘로 붉은 놀이 마지막 빛을 품어낼 때쯤 우리는 망태기와 소를 몰고 집으로 천천히 돌아왔다. 노을빛에 비친 우리들과 소의 그림자는 길게 돌아오는 우리들과 함께 길게 그리고 배 고픈 마음처럼 늘어져서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강은 그 시절의 마실 물이었고 사계를 마을의 아낙네들의 빨래터였고 농사 짓는 물을 공급해 주던 생명의 젖줄이었다. 수만 년 전부터 흘러왔고 끝없이 흘러갈 강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그렇게 끈질기고 온유하게 흐르는 강을 닮게 하는 어떤 힘을 가진 존재였다.

 대부분 마을 사람들의 집은 근처의 산흙을 파와서 짚을 썩어서 흙벽돌을 찍어 만들었다. 나지막한 구조로 집의 높이는 그렇게 되었었고 아궁이에 산에서 나뭇잎과 삭정이를 해와 밥과 추위을 피하기 위하여 불을 때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여름에는 시원했고 겨울에는 따뜻했다. 가을철 타작을 한 뒤에 남은 볏짚을 이엉으로 엮어 해마다 지붕을 이었다. 마을 사람들 사이 품앗이로 그 일은 이루어졌다. 이엉을 올리고 그 위에 굵게 꼬은 새끼줄로 단단히 묶어서 지붕을 새로 덮었다. 벗겨낸 지난 해 이엉은 좋은 거름이 되었다. 집의 방 앞에는 툇마루가 놓여 있었다. 어머니가 매일 닦아서 마루의 표면은 오래된 고색창연한 오래된 빛깔로 어두운 빛과 더불어 거울처럼 맑게 비칠 정도로 은은한 빛살을 품어내고 있었다. 할아버지 거처 옆으로 ㄱ자로 꺽여진 곳에는 성주 단지를 모신 집안의 성스러운 곳이 각목으로 받침을 해서 일 년 내내 그곳에 안치하고 있는 곳이 있었다. 명절을 모신 뒤에도 그 곳에는 다시 상을 차려서 집안의 성주신에게 경건한 마음으로 절을 하였다. 마루위의 서까래 끝에는 제비집이 늘 봄에 와서 새끼를 길러서 가을이면 먼 곳으로 날아갔다. 간혹 제비가 눈 분비물이 마루에 떨어져 추했지만 집안의 그 누구도 제비를 탓하지는 않았다. 제비에 대한 우리 나라의 전래 동화에서 유래된 흥부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 제비란 존재는 신비한 우리가 갈 수 없는 이상향의 높은 곳에서 우리들 곁을 찾아준 외경의 새로 제비를 생각했고 봄날 새로 새끼를 얻은 뒤 어미 새가 가져온 먹이를 서로 탐을 내는 노란 여린 입이 너무나 귀엽게 느껴졌다. 서까래 끝에서는 어린 제비 새끼가 살았고 마을 사람들은 그 제비 새끼 같은 어린 자식들을 낳아서 길렀다. 마당마다 새로 부화하여 어미 닭이 갓 태어난 병아리를 몰고 다니면서 마당가의 풀잎이나 지렁이아 벌레들을 쪼으면서 종종걸음을 쳤다. 개는 봄날의 긴 기지개를 켜며 온몸을 길게 빼면서 한껏 게으른 몸짓을 하였다. 미국이 가져다준 밀가루 우윳가루 강냉이가루를 먹는 고단하고 궁핍한 시절인데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게 슬프지도 괴롭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시절이었다. 봄이면 겨우내 얼어붙었던 논밭을 갈면서 사람들은 비록 작은 소작의 전답이었지만 가을의 풍요로운 황금들판을 떠올리며 정성으로 일을 시작했다. 마을 앞으로 길게 흘러가는 강과 강에서 비롯된 기름진 땅에서 일을 했고 뒷산으로 이어진 산비탈에는 과실나무를 심었고 사람들은 정신적인 풍요로움에 모두 어느 정도는 느긋한 즐겁고 행복함을 서로 나누며 살고 있었다.

 겨울의 끝에는 6 년간의 배움에서 떠나는 졸업식이 있었다. 교실 두 칸을 터서 교단 여러 개를 포개서 단을 만들고 만국기를 게양하고 작은 음악회도 마련하고 그리고 근처 장터의 노점상들이 주변을 채우고 졸업하는 아이가 없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졸업식을 하는 날이면 마을의 축제가 되었다. 특히 송사와 답사가 낭독될 즈음이면 여기저기 여자애들이 하나씩 울기 시작하여 이윽고 전체 졸업생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울어대는 가운데 졸업식은 절정에 이르른다. 더러 마을의 아낙네들도 두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기에 바빴다. 이월의 여린 햇살이 비쳐드는 졸업식의 광경은 기쁜 슬픔의 한 순간으로 삶의 한 잊을 수 없는 절대의 모습으로 마을 모든 사람들의 머릿 속에 간직되는 일이 되었다. 아이들은 더러 중학교로 가기도 하고 그 때만 해도 어렵던 시절이라 대부분 가정을 위하여 일을 하기 위해 그 공부 기간이 그것으로 끝은 맺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졸업하는 아이들은 정말 그렇게 섧게 울었는지 모른다. 새로올 삶이 그들을 기다리는 그런 졸업식이 그 때는 마을의 한 큰 축제였다.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끝>          정복태

경북 상주 출생. 영남대 국문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한국 소설가 협회 회원. 상주문협지회장. 작품 <환상의 덫> <행어의 죽음> <혜국사> <나른한 오후> <깊은 산 속 옹달샘> <언젠가 그런 시간이 온다> 외 다수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