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는 이유  


                                                  이숲


해는 지고 사위는 막 어두워지는데 이상하게 눈앞이 환했다. 가로등은 아직 켜지지 않았다. 그는 손등으로 눈을 씻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벚꽃이다. 하천 둑길을 따라 임립한 수십 년생 벚나무들이 팝콘 같은 꽃을 넘치도록 달고 있었다. 꽃이 어둠을 밝히기도 하는구나. 그런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처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꽃은 그래서 피는구나.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피는구나,’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연이어 꽃으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 준 조물주에게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여든 해를 넘게 살면서 수없이 봄을 맞고 벚꽃을 비롯한 숱한 꽃을 보았으며 그 아름다움에 경탄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꽃이 피는 이유라든지, 꽃을 피워 준 존재에게 감사함을 느낀다든지. 서글프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남은 삶을 가늠하기 어려운 오늘에야 그런 사실을 알게 되다니. 심사가 엉킨 실타래처럼 어지러웠다.

  전립선암 치료를 받느라 입퇴원을 반복하고부터 꼭 제시간에 맞춰 약을 먹으려고 식사시간을 엄격하게 지켰다. 식사 전후로는 늘 이렇게 가벼운 산책을 하려고 애썼다. 그러지 않으면 입맛도 없고 소화도 잘 되지 않았다.

  “회장님, 사꾸라 꽃이 절정인 것 같습니다.”

  벚꽃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자 최성환이 한마디 했다.

  “저녁 진지 드시려면 이제 슬슬 돌아가야 겠는데요,”  

  발걸음을 돌이키는데 어찔해지더니 다리가 휘청거렸다. 최사장이 얼른 노인을 부축했다. 기운이 없어 몸이 허방을 떠다니는 것 같아 가끔 현기증을 느끼는데도 아무도 지팡이를 권하지 않았다. 하기는 아직까지는 혼자 걸을 수 있었다. 곧 기운을 차리면 현기증도 없어지고 다리 힘도 생길 것이다. 공기 좋은 곳에서 지내면서 식사에도 특별히 신경 쓰고 좋다는 건강식품도 매일 먹고 있으니 곧 좋아질 것이다. 의사나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들 말했다.

  하천 둑이 끝나는 내리막길에서는 최성환이 숫제 옆에서 부축을 했다. 건강할 때 5분이면 닿을 길을 10여분이나 걸었다. 대문이 저만큼 보이는데 운전하는 박 과장이 랜턴을 들고 대문을 막 나서고 있었다.

  “아직 훤한데 뭐 하러 불을 들고 와.”

  노인이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그래도 길바닥은 어두운 걸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시면 큰일이죠. 지팡이라도 짚으시     면...... .”

  최사장이 주의하라고 헛기침을 한 번 하자 박과장은 입을 다물었다. 가끔 쓸데없는 말을 하는 버릇이 있어서 마음에 안들 때도 있지만 그만큼 순진한 속이 다 들여다보여서 이십 년 째 운전을 맡기고 있었다. 어느 때는 몇 년 전에 먼저 간 아내처럼 잔소리 같은 걸 할 때도 있었다. 모처럼 입맛이 좋아서 입에 맞는 음식을 건강할 때처럼 양껏 먹으려고 하면 꼭, 괜찮으시겠어요? 하고 물었다. 그 말을 무시하고 좀 더 먹으면 꼭 소화가 안돼서 고생을 했다. 최사장은 박과장이 너무 허물없이 군다고 노인의 식탁에 앉는 걸 탐탁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성환이 가끔 며칠씩 내려와 머물 때는 박과장이 알아서 나중에 따로 밥을 먹었다.

  “머위나물은 뒤뜰에 막 올라 온 걸 뜯어다 무쳐서 땅기운이 그대로 살아있고요, 이 두릅은 뒷산에서 조금 전에 뜯어 데친 거니까 아주 싱싱합니다.”

  이곳 시골 집 살림을 맡아서 하는 먼 조카뻘 되는 애 어멈이 냅킨을 앞 접시 옆에 놓으며 말했다. 노인에게 먹는 게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 버린 걸 아는지 애 어멈은 식탁 차리는 일에 무척 애를 썼다. 그리고 한 접시 한 접시 마다 특별한 사연과 의미를 만들었다. 하기는 같은 나물이라도 그저 시장에서 사다 무친 것보다 어느 땅에서 나고 어떻게 자란 걸 알고 먹는 게 훨씬 맛이 있었다. 음식 접시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건 최사장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해서든 식사를 제대로 하게 하려는 노력 같아서 노인은 한 수저라도 더 먹으려고 노력했다.

  “금방 뜯어다 무친 이런 머위나물은 서울선 구경하기도 힘듭니다. 섬유질도 많고 순전히     흙냄새만 맡고 자란 무공해 나물이니까 몸에 약이 되지요.”

  어린 머위를 데쳐서 된장에 무친 건 아내도 즐기던 것이다. 특히 복 더위가 기승일 때는 다 자란 머윗대를 베어다 손질을 해서 들깻국물에 뭉근히 볶아 먹는 좋아했다. 그걸 한 해도 빠뜨린 적이 없었다. 서울 집에 있다가도 그 무렵이면 어김없이 시골집에 전화를 해서 머윗대를 베어서 올려 보내게 했다. 몇 년 만이라도 더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내가 죽은 다음부터 늘 그런 생각을 했는데 오늘 따라 더욱 그런 생각이 간절했다. 젊은 시절에 옷감 장사를 하며 환기 안 되는 공장에서 먼지를 많이 마셔서 그랬는지 폐가 약했던 아내는 결국 폐암으로 세상을 버렸다. 돈으로 낫게 할 병이 아닌데도 일본으로 미국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마지막 길마저 고생을 시키고 말았다.               

   아내는 아이를 낳지 못했던 것 외에는 아무런 걱정이 없던, 도량 넓고 속 깊은 여자였다. 일이 안 풀려 몇 번이나 빚더미에 올라앉아도 매번 다시 시작하고 결국에는 큰돈을 모으게 된 것도 그 사람 덕이었다.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서 하나 얻은 아들을 애지중지 자기자식으로 길렀지만 마지막 길에는 그 아들 손을 잡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아들은 생모와 기른 어미 사이에서 그 누구의 온전한 아들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였는지 유학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고 이국에서 그 나라 사람이나 다를 바 없는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 아들이 누린 물질의 풍요와 어른들의 일방적인 사랑은 아들을 박정한 사람으로 만든 것만 같았다. 아들은 부모가 병이 들면 의사와 간병인과 식사 수발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밥을 먹어 줄 사람과 병원에 데려다 줄 운전사가 있으면 그 필요가 다 채워지는 줄 아는 것 같다. 더구나 이생에 작별을 고하는 순간에 늙은이가 느낄법한 두려움과 슬픔을 자식이 덜어 줄 수도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노인 역시 그랬다.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왜 불효가 되는지 늙어서야 비로소 이해를 했다. 비록 남들과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라 초년에 마음고생을 했다고는 해도 자신이 누리는 현재의 행복이 부모와 조상 덕분임을 알지 못하는 아들에게 그런 것까지 바란다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일 듯하다.

  언짢은 생각 때문에 영 입맛이 없어 아욱국에 밥을 말아 겨우 반 그릇을 비웠다. 거실로 나와 어멈이 쌀가루와 강낭콩으로 직접 만들었다는 화과자 반쪽과 최사장이 비싸게 주고 구했다는 푸얼차를 마셨다. 약 먹을 식후 삼십 분까지 거실에 앉아 있으려고 하니 최성환이 뉴스를 보시라며 티비를 켰다. 요즘 뉴스에는 한반도에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알려주는 듯 한 보도가 한두 가지는 꼭 나왔다. 순식간에 지나간 세월이지만 그 동안 두 번이나 전쟁을 겪었다.

  소년시절에는 선박 엔지니어였던 아버지 덕에 일본에서 고생 모르고 자랐지만 대동아 전쟁 말기에는 공습과 식량 부족을 겪으며 난생 처음 전쟁의 공포를 알았다. 대학 졸업반이던 해에 육이오 전쟁이 났다. 통역 장교로 미군 부대에서 몇 년을 보냈다. 동년배들보다는 몸고생을 덜한 편이었지만 전쟁의 참혹함까지 덜 겪은 건 아니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때의 처지가 그대로 나오는 꿈을 꾼다. 학교에서 일본승전기원 웅변 연습을 하고 허기진 채 집에 돌아와 텅 빈 솥 안을 들여다보며 허망하해 하는 소년의 모습, 길가에도 논밭에도 숲에도 빈집에도 어디에 가도 부패해가는 시신들이 넘쳐나던 모습.

   그 숱한 죽음에서 살아남아 말년에 이르렀는데 다시 전쟁이라니. 몇 년 만 더 살았으면 하는 소망으로 하루하루 살고 있지만 전쟁이라면 어서 눈을 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노인들처럼 지금까지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살아왔지만 한 번도 전쟁을 해서 공산주의자들을 쳐부숴야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평생 기업가로 손익을 따지는 일만 하며 살아서 그런지 전쟁만큼 손해나는, 어리석은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고귀한 생명을 셀 수 없이 잃는 일과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면서 애써 이루어놓은 산업을 잿더미로 만드는 일이 그 일인데. 숱한 애국자들은 전쟁을 해서라도 공산주의자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야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만이 애국의 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평생 돈벌이만 골몰하며 살았지만 나름대로 수출에 공을 세워 산업훈장도 받고 했으니 그만하면 애국을 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 군부 통치 시절에 정부의 특혜를 받으며 돈을 벌었다는 비난도 받은 적이 있지만 부끄러울 것은 없었다. 예편한 군인들 몇몇을 고위 관리자로 활용한 일을 두고 그렇게 말하면 억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들에게 나쁜 전력이 있다면 그 보응은 그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안정된 직장을 얻었고 노인은 든든한 바람막이를 활용했을 뿐이었다.

  모름지기 애국이란 것은 내나라 내 민족에게 도움을 베푸는 일이지 아무리 선한 동기를 내세워도 사람을 죽이는 일일 수밖에 없는 전쟁을 운운하는 것은 결국 악행이라고 생각했다. 병마에 시달리며 죽음 눈앞에 두고 그 애국이란 걸 생각하니 참 우습고 부질없는 게 그것 같다. 아버님은 일찍이 고학으로 일본 유학을 해서 유능한 선박 엔지니어로 일본에 충성한 셈이고 그 아들인 노인은 통역장교로 연합국과 미국을 위해, 또한 이후에는 외화벌이로 조국에도 충성했다. 노인의 외아들은 미국의 일등시민으로, 기업가로 살면서 그 나라에 기여하고 있다. 손녀는 중국의, 세계적인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그 나라 국적의 남자와 교제한다니 어쩌면 그 나라의 애국 시민으로 살는지도 모른다.

  국가주의자들의 시선으로는 가족 모두가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를 했겠지만 자신이 처한 그때의 그 상황에서 자신의 삶에 충실했고 동족이든 이민족이든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은 삶을 살았다면 최상의 인생을 산 셈이 아닌가. 그는 꺼릴 것이 없었다.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것은 무엇이라도 빼앗지 않는다면 손가락질 받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그런 말씀을 자주하셨다. 나이가 들어 생각해보면 그 말씀이 어쩌면 일본에 기여한 당신의 불편한 마음을 위로하고자 했던 교훈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아버님 말씀이 마음에 박혀서인지 다른 사람이 원망할 일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았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후사를 얻으려고 조강지처에게 아픔을 준 일이다. 아내가 스스로 권했던 일이라고는 해도 아내로서 여자로서 무척 힘든 일이었을 것이었다. 아들과 아들의 생모가 받았을 고통이 있다고 해도 아내에 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한 번도 그런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아내는 전쟁 직후에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구제 옷으로 장사를 시작해서 남편의 사업 밑천을 모을 만큼 수완이 뛰어나고 적극적인 여장부였지만 아이 문제는 구시대적으로 대처했다.

   입양도 양자 들이는 일도 모두 마다 하고 굳이 남편의 핏줄을 원했다. 남편의 피를 이은 아이를 기르는 어미의 행복을 누리고 싶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아내는 잠깐 그 행복을 맛보긴 했다. 그러나 결국 그 사람이 얻은 건 어미에게 행복을 주는 아들이 아니라 상속자였다. 상속자. 어떤 이는 애완동물이나 소나무에게도 상속을 했고 또 어떤 이는 자선 단체에 재산을 남기기도 한다. 아무려면 어떤가. 돈이 신의 자리에서 군림하는 세상이라지만 그것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돈 자랑하는 일, 무익한 일일 뿐이다. 아들에게 갈 것은 이미 해외 투자 형식으로 모두 상속했다. 빌딩 서너 개와 회사 주식에서 나오는 수익금은 이공계 우수학생지원과 연구 기금 지원을 위해 설립한 재단에 상속될 것이다. 매각되지 않아 세금만 축내는 각지의 부동산도 최성환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 재단에서 맡을 것이다. 

  노인이 뉴스를 잘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최성환은 NHK를 보시라며 채널을 바꾸었다. 이십대 후반에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경영자까지 한 최사장은 지금껏 35년을 곁에 두었다. 그도 이젠 예순을 넘은 사람인데 여전히 젊은 비서 시절처럼 사소한 것까지 챙긴다. 들어가서 쉬라고 해도 10시까지 앉아 있겠다고 한다. 일본어 방송에서도 여전히 뉴스를 한다. 뉴스나 신문을 안 보게 된 게 몇 년은 되었다. 병치레를 하면서 세상의 변화에 무관심해지고 희비에도 감정 변화가 둔하게 되었다.

  사람을 만나도 현재나 미래의 이야기보다는 지나간 시절의 얘기를 하게 된다. 지나간 시절, 공장을 늘려 짓고 수출량을 늘리고 어떤 사람을 데려다가 어떻게 일을 했는지 하는 얘기들이 대부분이다. 방금도 최성환은 오사카 지방 뉴스가 나오자 지난 시절에 알게 된, 그곳 출신의 일본인 바이어 우에다 얘기를 했다. 지금도 한국에 나올 때마다 연락을 해서 식사를 하곤 하는 사람이다. 그가 두어 번 초청을 해서 오사카에 가서 관광을 하고 골프를 하기도 했다. 유난히 개를 좋아하던 우에다상이 공장 경비견으로 키우던 진돗개를 만지다가 물렸던 적이 있었다. 문병을 가서 백구를 없애야겠다는 최성환의 말에 그는 입원실 침상에 무릎을 꿇고 백구를 용서해달라고 절을 해서 최성환을 당황하게 했다. 이십여 년 전 일이지만 그 얘기는 언제나 재미있었다. 우에다상 덕분에 오랜만에 유쾌하게 웃어보았다.

  화살처럼 순식간에 날아 가버린 세월이지만 지난 일을 생각하면 어떤 일들은 수백 년 전 얘기처럼 아득하다. 순식간에 지나간 시간이지만 아득하게 기억되는 시간이라니, 참으로 모순이다. 일본의 간토 지방 소도시에도 벚꽃이 만개한 모양이다. 꽃구경 나온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그림이 나온다. 바쁘게 일만 하던 지난 시절, 꽃놀이 나온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저런 한가로운 뉴스로 바뀐 계절을 알아차리며 살았다. 열심히 살았고 성공한 삶이었다고 자부한 일생이었다. 그러나 무언가 여전히 미진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성공한 삶이었는가. 무엇을 두고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지 갑자기 의심스러워 진다. 큰 재산을 모으고 풍요로운 말년을 보내는 것을 두고 그렇게 말할 수 있나?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최성환이 방에 들어가 주무시라고 말을 해서 정신이 들었다. 방으로 들어가시겠느냐고 물었지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따라 침실로 들어가기 싫었다. 넓고 천정이 높아 썰렁하기만 하던 거실이 더 편안하다. 최성환은 먼저 들어가겠다며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몸과 정신의 모든 정기가 빠져나간 듯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목소리조차 잠겼다. 앉은 채로 몸을 소파에 기댄다. 이대로 모든 정기가 빠져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불러야하나. 노인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내 단념한다.

  눈앞이 환해졌다. 벚꽃이다. 아까 어스름해질 때 본 꽃인지, 방금 전에 뉴스에서 본 간토지방의 꽃인지, 우에다와 함께 본 오사카의 벚꽃인지 알 수 없지만 무척이나 찬란한 빛이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아, 그래서 꽃은 피는 거였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