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잔 이야기


이번 북유럽 여행에서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의 눈은 오직 한 곳에 머물렀다. 매장 진열대에는 갖가지 종류의 화려한 물건이 관광객의 눈길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건성으로 바라보았다. 그저 진열된 커피잔에 발길을 고정시킨 채 몇 번이고 반복해서 훑었다.

일행 중 한 명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녀는 나의 귓전에 대고 또 커피잔 살 것이냐고 묻는다.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미소의 의미를 그녀가 모를 리 없다. 그녀만이 아니다. 단 한 번이라도 나와 함께 여행을 했던 사람이라면 저절로 알게 되는 사실이다.

나는 커피잔 모으는 취미를 갖고 있다. 어디에 가든 커피잔을 산다.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잔을 모으는 것이 아니다. 대상이 어떤 것이든 그것이 상징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것은 지역의 축제를 알리는 것이기도 하고, 뮤지컬 공연을 기념하는 것일 때도 있다. 박물관이나 기념관에 가서도 그 나름의 특색을 드러낸 커피잔을 사 온다.

나는 커피잔에 새겨진 디자인에 의미를 둔다. 그렇다보니 다양한 의미를 지닌 잔을 꽤 많이 모았다. 그 중에는 아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 받은 잔도 있다.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강의를 하고 나오면서 받아온 잔도 있다. 표면에는 그 학교 로고가 새겨져 있다. 커피잔 모으는 취미가 있다는 나의 말에 선뜻 내 준 것들이다.

커피잔에 나름의 의미를 붙이기도 한다. 친정에서 가져 온 것으로 소싯적에 산 나뭇잎 커피잔이 있다. 작은어머니와 막내이모가 쓰시던 커피잔도 있다. 그것에는 흔히 볼 수 있는 꽃 그림이나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지만 유달리 애착이 간다. 그 커피잔에 커피를 마시면 그들과 함께 했던 시절이 떠올라 감미롭다.

새로운 커피 잔에 대한 기대로 설레기도 한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해외문학기행을 앞두고 있을 때다. 나는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챙기기도 전에 미리 모아놓은 포장지(일명 뽁뽁이)부터 가방에 넣는다. 포장지가 하나 둘 줄어들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커피잔이 채워지면 말할 수 없이 뿌듯하다.

커피잔을 모으기 시작한지 십년 정도 되었다. 2008년 2월에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했다. 서유럽을 여행하던 그때, 우리는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이리저리 따라다녔다. 바쁜 일정 탓에 끌리는 것이 있어서 좀 더 보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주어진 시간이 후딱 지나가기 일쑤였다.

비스듬히 기울어져 유명한 피사의 사탑 주변을 돌아볼 때였다. 그 사탑 모양을 닮은 커피잔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사진을 찍느라 바빴고, 주어진 시간을 다 썼다. 가족들은 시간이 없다며 커피잔은 일행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가서 사자고 했다. 하지만 우리들 모습이 보이자 일행은 기다렸다는 듯 재빠르게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 커피잔은 끝내 손에 쥘 수 없었다.

독특했던 그 커피잔을 사지 못해서 속이 쓰렸다. 그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 마음이 커피잔에 대한 집착을 만들었던 것일까. 그 이후로는 가는 곳마다 눈에 들어오는 커피잔을 손에 넣기 시작했다. 한번 여행을 떠날 때마다 십여 개의 커피잔이 귀가하는 나를 따라왔다.

여행지에서 돌아오면 며칠에 걸쳐 그 커피잔에 맛을 본다. 커피잔마다 맛은 다르다. 유난히 커피 맛이 좋은 잔이 있고, 뭔가 모르게 씁쓸한 잔도 있다. 어떤 잔은 쌉쌀하기도 하다. 또 어떤 잔은 유난히 감미로워서 연거푸 마시기도 한다. 그렇게 맛을 본 커피잔은 여행지의 추억과 함께 장식장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모은 커피 잔이 삼백여개다.

커피잔에는 수많은 추억이 담겨 있다. 그 나라의 모습이 있고, 그곳의 거리를 거닐던 기억이 있다. 거닐다가 만난 사람들의 모습도 있다. 커피잔을 구입할 때의 다채로운 모습도 고스란히 묻어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점원에게 사정하던 순간의 안타까움이 있다. 고개만 가로젓는 점원의 모습에 당황하여 통역이 가능한 일행에게 다급히 도움을 청하던 기억도 한편에 저장되어 있다. 그런 과정조차 기쁨이었다.

커피잔은 내 삶의 엔도르핀이다. 삶이 버거운 날에는 푸쉬킨을 음미하고, 마음이 답답할 땐 헤르만 해세를 마주하며 알을 깨고 나오는 한 마리 새를 떠올린다. 프로이드와 마주하면 그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동영상과 그것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던 외국인들의 애틋한 마음을 생각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죄와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의 숫자를 세며 걷던 순간과 무릎을 꿇고 대지에 입맞춤하는 장면으로 가슴이 저리다. 기분 좋은 날은 모차르트를, 우울한 날은 유난히 짙은 눈썹에 우수어린 동그란 눈을 가진 카프카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 속으로 빠져든다. 때로는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바라보며 신비로운 어딘가로 한없이 달린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한다. 나는 좋아하는 커피와 함께 수많은 추억을 매일 마신다. 그것을 음미하는 하루하루가 즐겁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커피잔 추억을 갖게 될 것인가. 그 추억으로 인해 나의 삶은 또 얼마나 설렐까.

매장 진열대에 진열된 수많은 커피잔 중에서 헨릭 입센에게 눈길이 간다. 나는 그의 모습이 담긴 커피잔을 손에 들고 미소를 짓는다.


 * 美山정경해

* 경기 안성 출생

* 수필집 『같은 빛깔로 물들어 간다는 것은』2008

『까치발 딛고』2011

『내 마음의 덧신』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