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원 호텔

                                                            

 

문지기 없는 로비로 들어가는 입구

손 때 묻은 통나무문 빗장 풀면

백 년을 떠돌던 유목민 어깨에

묻어온 싸라기눈과 햇살

높은 천장으로 천천히 흩어진다

 

매일 조금씩 키가 자라는 사다리가 놓인 방

흑백 사진들 제멋대로 마른 덩굴에

걸려 있는 누군가의 작업실

열린 창문에 기대선 나그네나무

지워 가는 얼굴과 이야기 잎사귀마다 스미어

멀리멀리 날아가고 있다

 

오랫동안 병마와 싸우며 남은 나날이

지루하여 어찌 살아야 할까,를 궁리하던

마흔 살 언저리의 사람이 호텔 정원에서

청포도를 따고 있는 손은 온통 연두색이다

 

홀로를 위한 최고의 장소로 가는 길

 

몇 날 며칠 걸어야만 닿을 수 있다

오로지,

 

 

 

 

 

 

 

 

망명자의 일기장

                             

 

지루하지 않을 만큼의 묵직함

아프지 않을 만큼의 고통

기다려도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는 마른 장마의 날들

 

그 시절은

침울해서 좋았다

 

적도의 바람은 한결같이 포근했다

 

꽃들은 열흘에 또 열흘 지칠 줄 모르고

피어서 지는 날이 없었다

침울하지 않아서 슬픈 날들이었다

 



*약력

1990년 《시와 비평》 등단

시집 『푸른 징조』 등

여행산문집 『시인이 만난 인도네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