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20호...
   2020년 06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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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93365 2014-11-03
312 심지心地 외1편/이설야
편집자
2550 2013-09-30
13.10월 41호 시 심지心地 이 설 야 촛농이 눈물처럼 길게 흘러내리는 것은 심지가 제때에 태워야할 초를 다 태우지 못한 나태함 때문이리 사방의 문을 꼭꼭 닫아도 촛불이 일렁이는 것은 내 마음이 고요의 경지에 들지 못한 탓이리 어둠은 어둠대로 그냥 둬야지 굳이 불을 밝히려는 마음 한 자락이 이미 어둠을 통달하지 못함이리 보살 이 설 야 좁은 방구석에 연꽃같은 보살 한 분 얌전히 앉아계셨음 좋겠다 정물처럼 정좌를 하고 탱화처럼 낡아가면 어쩌나 행여, 부처님이신가 싶어 염주를 돌리며 날마다 삼배를 드려도 좋으리 행여, 마음이 같은 법문처럼 흐르면 서로의 눈동자엔 부처님이 앉아 계시고, 2006년 불교문예 신인상 수상, 현대불교문인협회 회원, 시집<수채화로 그린 여인>, 경주시 용강동 용강주공A 106/612 010-9871-0105  
311 격포에서 외1편/신성철
편집자
2600 2013-09-30
13.10월 41호 시 격포에서 신성철 격포에 가면 바다가 글을 읽는다. 밤새 무엇을 읽으려는지 노을빛도 모자라 산마루 바위 끝에 촛대 하나 밝혔다. 이름 없는 민박집에 누우면 바다가 넘기는 책갈피마다 잠이 접힌다. 헛헛할 땐 얼큰한 게 제일이지라 매운탕을 끓여내는 주인집 아낙도 갯가에서 잔뼈가 굵어 한때는 은비늘 번쩍이며 솟구친 적도 있었당께 하던 김씨도 한 냄비 지글지글 서로를 끓이며 살아왔겠지 나를 읽으려 또 다른 페이지로 다가온 아내 붉게 밑줄 그어가며 시처럼 읽는다. 그때는 몰랐다. 한마디 말과 조용한 발자국 뒤에서 기다리는 사소한 것들조차 깊은 그늘이 된다는 것을 또다시 일렁이며 페이지가 열리고 한줌 갯바람이 스치며 나를 읽는다 성냥 고 쬐그만 암자 속 말라깽이 납자들이 모여 앉지도 못하고 포개 포개 누워서 참선하는 곳 부처도 쇠북도 목탁도 뒤집어쓰고 모시고 울리며 두드리는데 도솔천 미륵불 기다릴 것 없다 내 한 몸 불태우면 그만이지 한 어둠 사르는데 스님 하나 죽는다 까까머리 불꽃에 네 번뇌를 사뤄라 사뤄라 온몸으로 온몸으로 죽어주리라 약력 1950년 12월22일생 2004년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수상 2010년 열린시학 등단 2011년 백교문학상 수상 2013년 지필문학 신인상 수상  
310 당신이 신발을 신을 때까지 외1편/임술랑 file
편집자
2869 2013-09-01
13.09월 40호 시 당신이 신발을 신을 때까지 임술랑 방에서 식사를 하다가 마치고 홀(hall)로 나와서 집에 가려고 당신이 신발을 신는다 좀 먼저 나온 나는 당신의 그 큐백이 반짝이는 어여쁜 구두를 신을 때까지 구부려 도와주고 있었다 근데 홀에서는 식사 주문을 하던 전 국회의원과 시장출마예정자가 서 있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얼른 인사를 차리고 자기들대로 일정을 진행하려던 것이었는데 당신이 더뎌서 그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아 그러나 나는 당신이 신발을 다 신을 때까지 걸음마를 뗄 때까지 엎드려 신발 끈을 고치며 보살피고 있었던 것이었다 돌아보다 죽은 완이가 남장사에서 천배(千拜)를 올리면서 영단(靈壇)에 절하러 온 여인네를 보지 말자 보지 말자 하다가 엎드린 채 힐끗 쳐다보았다 했는데, 서울 가는 고속버스 옆자리에 앉은 긴 머리 처녀한테 계속 신경이 쓰인다 궁금한데 그렇다고 상체를 돌려 쳐다보기도 민망한 노릇 양파 껍질 겹겹이 쌓이듯 그렇게 없던 인연의 끝은 이렇듯 아련하고 무거운 것인가 돌아보지 말자고 굳은 맘이 그 매듭은 끊어지지 않고 킁킁 냄새만 들어 마시다가 재채기를 하는데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의 거리만큼 아득한 그대와 나 끝내 눈 맞추지 못하고 가방 들고 차를 내렸으므로 그는 길에서 멀어졌다 완아! 이것은 자유인가 또 다른 구속인가  
309 어머니, 죄송합니다 미쳐 몰랐습니다 외1편/권화빈 file [1]
편집자
4262 2013-08-31
13.09월 40호 시 어머니, 죄송합니다 미쳐 몰랐습니다 권화빈 어머니, 죄송합니다 미쳐 몰랐습니다 나이 먹어도 헛 살았습니다 맛있는 과일이나 다달이 용돈 얼마 드리는 걸로 효도를 다 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꼼짝달싹 못하시고 누워계신 어머니께서 가만히 나의 손을 당신 앞으로 잡아끌어 당기시며 눈시울 촉촉이 적시는 걸 보았습니다 여태껏 손톱 한 번 깍아드린 적 없고 발 한 번 씻겨드릴 줄 몰랐습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미쳐 몰랐습니다 이제부터는 제 지갑을 여는 것 보다 어머니 손 한 번 더 포근히 감싸 내 가슴에 안아주는 걸 먼저 하겠습니다 아, 오늘도 소중한 나의 엄니! 성묘(省墓) / 정직하게 살아야지 아버지 앞에 무릎 꿇는다. 옆에서 실눈을 뜨고 아들 녀석이 나를 째려보며 히 - 웃는다. - 착하게 살아야지 - 그렇게 살아야지 언제 들었는지 녀석이 또 삐죽 입술을 내민다. 내 등 뒤에서 소나무 몇 그루 부르르 몸을 떤다. 만 10년 만에 다시 아버지, 하고 불러놓고 다시 한 번 오지게 무릎 꺽는다. - 세상만사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어야지요 - 산비둘기 몇 꾸꾸루르..... 그만 산을 넘는다.  
308 드라이버스 하이 외 1편/이영혜 file [1]
편집자
3694 2013-08-31
13.09월 40호 시 드라이버스 하이* 이영혜 하루에 지친 당신, 어서 오십시요 달빛도 환한 멋진 밤입니다 먼저 불안한 마음부터 단단히 붙들어 매시구요 그대 희고 가는 손가락으로 내 중심에 가볍게 접속하면 시작입니다 은은하게 조명을 켜신 후 내 탄탄한 가슴에 양손을 부드럽게 얹고 두 다리를 편안하게 벌려 주십시요 주도권은 그대에게 있으니 좋아하는 체위로 맘껏 즐기시면 됩니다 나 비록 6기통 근육질의 힘세고 날렵한 스포츠형은 아니지만 발끝에서 온몸으로 전해오는 떨림에 집중하며 다루어 보세요 내 타코미터에 당신의 심박수를 서라운드 선율의 비트에 호흡을 맞춰보세요 우리, 몸은 점점 뜨거워지고 심장의 고동은 거칠고 빨라질 겁니다 이 길은 당신 욕망에 브레이크를 밟을 필요가 없는 자유로입니다 그저 그대의 감각으로 연애의 완급을 조절하고 당신 뜻대로 원하는 절정을 리드하면 그 뿐 부끄러워할 필요도 감정을 억누를 필요도 없답니다 소심한 과속 경고나 음흉한 카메라쯤은 대담하게 무시하시구요 얼굴 발그레해지고 손바닥 촉촉해진 것을 보니 하이에 오를 준비가 되셨나보군요 하지만 클라이맥스의 순간에도 두 눈을 감아서는 절대 안됩니다 자아, 이제 흥분이 가라앉았으면 아쉽지만 다시 정숙한 그대의 자리로 천천히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원하신다면 담배 한 대나 커피 한 캔의 여운도 제 앞에선 눈치 보지 말고 느긋하게 즐기십시요 오랜 만에 즐거웠습니다 저는 당신이 버리기 전에는 절대 먼저 등 돌리지 않는 그대만의 듬직하고 충직한 종이랍니다 언제라도 저를 달려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 통상 30분 이상 달릴 때 얻어지는 도취감, 혹은 달리기의 쾌감을 말하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용어에서 가져옴 빗방울 무덤 빗소리가 황홀하다는 당신과 함께 맨몸으로 달려와 부서지는 주검들의 비명을 듣고 있어요 빗방울 전주곡 같은 달콤한 슬픔이면 좋겠지만 내게는 비창보다 더 비장한 비트로 몰아치네요 그대에게 저 소리는 카푸치노 같겠지만 내게는 에스프레소처럼 씁쓸하지요 넓은 통유리창은 빗방울 무덤 내 달팽이관은 소리의 무덤 부서지지 않는 사랑, 흔적도 남기지 않는 죽음 어디 없을까요 당신에게서 떠난 담배 연기와 내게서 떨어져 나간 머리카락은 지금쯤 사소하게 사라졌을까요 부둥켜안은 연인이 털며 들어오는 작은 우산 흥건하게 흐르는 빗방울 무덤 위로 태양의 시취 커피향기 내려 쌓이고 산산조각 부서진 빗소리와 비에 젖어 불어터진 소리들이 무덕무덕 내 귀에 쌓여 넘치고 저리 캄캄한 것이 먹장구름의 가슴 뿐일까요 이토록 쏟아지고 싶은 것이 내 눈시울 뿐일까요 이영혜 (李泳潓) 2008년 <불교문예>로 등단 전화 : 011-739-7201 주소 : 서울 강남구 삼성2동 117, 쌍용 플래티넘 A-1302 이메일 : hident@hanmail.net  
307 오르가즘 외 1편/김종경 file [1]
편집자
4026 2013-08-31
13.09월 40호 시 오르가즘 김종경 무단 횡단하던 고양이 한 마리 과속 중인 불빛에 스쳐 쓰러졌다 매일 밤 아름답고 따듯했던 그 불빛이 짧았던 한 생을 해체중이다 새까맣게 타버린, 그 위를 자동차 행렬이 가볍게 지나간다 선혈 낭자한 몸뚱이 차갑다 아랫도리로 그놈을 살며시 타고 넘는 순간, 신음소리 헐떡거리더니 거칠면서도 따듯한 혓바닥이 사타구니를 아주 부드럽고 짜릿하게 ……쓰윽……, 핥으며 살아난다 아! 죽음의 공포가 오르가즘의 동의어인 줄이야 역주행 하루의 생계가 가득 실린 리어카 한 대가 보란 듯이 한 생애를 밀고 있다 자신보다 더 큰 그림자를 밟으며 천천히 흘러간다 구겨진 모자를 눌러쓰고 자동차들의 성난 경적과 거친 불빛을 뚫고 역주행 중이다 눈앞을 가로막는 생계의 짐과 뒷등을 보이기 싫어 느릿느릿 거꾸로 가고 있다 푸른 신호등 켜지자 한 생애를 역주행 하던 자동차들이 일제히 경적을 울린다 경기 용인출생 2008년 계간 <불교문예> 등단  
306 응망(凝望)/고창근 file
편집자
2751 2013-07-31
13.08월 39호 소설  응망(凝望) 고창근 아내는 집을 떠났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했다. 평소처럼 차분해 보였다. 어젯밤 미리 짐을 싸놓았는지 아침을 먹자마자 여행용 가방을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아침부터 날씨가 무더웠다. 장마가 끝나고 전국의 대부분 지역이 폭염 특보가 내렸고 매일 열대야가 나타났다. * 농업기술센터에서 양봉농가 150여 명을 대상으로 한 꿀벌사양 및 계상관리를 위한 기술교육에 특강을 하였다. 시장은 인사말을 1시간 동안이나 하였다. 과수농가와 양봉농가간의 협의체를 구성해서 농약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고 상생 발전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나는 뻑뻑한 눈을 손바닥으로 비볐고 교육생들은 하품을 했다. 내가 특강할 시간보다 길어질 참이었다. 나는 단상에 올라가 멱살이라도 잡고 끄집어 내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시장의 끝날 듯하던 인사말이 또 이어졌다. 양봉농가는 지속적인 기술교육과 로열 젤리, 봉독 등 기능성 양봉산물 생산을 통한 소득원의 다변화에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누구나 다 필요성을 느끼는 얘기였고 이미 일부는 시도하고 있는 바였다. 시장의 인사말이 끝나고 내가 특강을 했지만 강의는 종종 맥이 끊겼고 중심을 잡지 못 해 갈팡질팡 했다. “……벌 중에서 열심히 하는 벌들은 20%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20%의 벌이 꿀의 80%를 생산하는 거지요. 나머지 80%의 벌들은 20%밖에 생산 안 한다는 것입니다. 20%의 벌들만 죽어라 일한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하마터면 인간 사회도 그와 같다는 말을 덧붙일 뻔했다. 죽어라 일하는 사람 따로 있고 일하지 않고 물려받은 재산으로 땅 투기나 하며 빈둥거리며 노는 사람들 따로 있다는 말이 입안에서 맴도는 것을 억지로 목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다. 제일 앞줄에 앉은 젊은이가 그러면 그 벌의 20%만으로 양봉을 치면 더 효율적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실험 결과 그 20%를 모아 집단을 만들었더니 그 집단은 또다시 20%만 일하고 나머지 80%는 빈둥거리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빈둥거리던 80%의 벌들로 집단을 만들어 놓아도 또다시 20%만 일하고 80%는 게으르게 일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말하면서도 창밖으로 눈을 흘끗거렸다. 창밖은 무더위로 하얀 막이 쳐진 것 같았다. 다들 지친 표정들이었고 이제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인데 오십대가 손을 들고 일어섰다. 농업센터 직원이 재빨리 마이크를 갖다 주었다. 나는 눈을 끔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근데요. 아까 수벌이 짝짓기가 끝나면 다 죽는다고 했잖아요. 그건 왜 그렇지요?” 수벌의 행태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려다 그냥 간단하게 넘어간 부분이었다. 당기지 않는 질문이었다. 나는 대답 않고 넘어가려다 다시 마이크 앞으로 갔다. “일벌은 꿀을 따오고 꽃가루도 수집하여 벌들을 치송할 뿐만 아니라 적이 침입하려 할 때는 죽을힘을 다해 싸우지요. 그러나 수벌은 일은 거의 안 합니다. 평상시엔 거들먹거리고 유유자적 놀기만 합니다. 그러다 새로 탄생한 여왕벌이 수정의 필요성을 느낄 때 하늘에서 여왕벌과 교미를 합니다. 교미한 수벌은 정자 주머니 자체를 여왕벌에게 주고 죽지요. 교미를 하지 못 한 수벌은 패잔병처럼 벌통으로 돌아갑니다. 근데 이게 말이지요, 그때부터 수벌의 생활은 말이 아닙니다. 일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을 뿐만 아니라 심하면 구타를 당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특히 겨울이 올 무렵이면 벌통 안에 꿀이, 그러니까 양식이 없어질 때면 수벌들은 쫓겨나 떠돌다 죽고 말지요.” 나는 이쯤에서 컵에 든 물을 마셨다. 일순 양봉농가들은 조용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쭉 둘러보았다. 이쯤에서 끝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얘기할 기운도 없었고 의욕도 없었다. 또 한 사람이 일어섰다. 이번엔 육십대로 보였다. “근데요, 벌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이유는 뭡니까? 그냥 뒀는데 다음날 보니 벌통에 벌이 한 마리도 없더라고요. 분봉도 아니고.” 육십대의 말에 여러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경우가 학계에 보고되긴 했습니다만, 아직 이유는 정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습니다. 인간들이 쓰는 휴대전화 같은 전자파의 교란으로 벌들이 방향 감각에 혼란을 느껴 꿀 따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 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엔 아마도 벌통의 습도나 온도가 맞지 않기 때문에 더 좋은 자리로 옮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서둘러 말을 마쳤다. 몇 사람이 박수를 쳤고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던 사람들도 박수를 뒤따라 쳤다. 나는 사무실에 들러 통장 계좌번호를 가르쳐 주곤 집으로 곧장 왔다. 역시나 아내는 없었다. 아침에 여행 가방을 들고 떠나버렸으니 괜한 바람이었는지 몰랐다. 순간 더 좋은 자리로 옮기는 벌들이 떠올랐고 일벌들에게 구박받는 수벌을 생각했다. 둘 다 영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겼다. 나는 머뭇거리다 아내 방으로 들어갔다. 일인용 침대 중앙엔 시트가 말려 있어 아내가 누웠던 표시가 났다. 나는 침대 옆의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창 쪽에 있는 화장대가 눈에 띄었다. 화장품이 그대로 있었다. 아내는 떠나면서 왜 화장품을 가져가지 않았을까.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뻑뻑한 눈을 감았다. 아내는 떠났다. 아무 얘기도 없이 집을 나섰다가 들어온 지 6일만이었고 내리 3일 동안 잠만 자고 일어난, 오늘 아침이었다. 아내는 몇 개월 전부터 온전하게 자신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했다. 문화센터에 나간 지 여러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나는 무슨 말이냐고 물었고 아내는 일주일에 딱 한 번만이라도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했다. 아내는 일주일에 하루 밥도 하지 않고 집안 청소를 하지 않았다. 방 안에 처박혀 하루 종일 밖으로 나오지 않거나 새벽에 집을 나가 밤늦게 들어오곤 했다. * 먼저 당신에게 미안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 일전에 당신에게 말했지요. 통하는 사람이 생겼다고요. 그러나 당신은 누군지 묻지도 않고 그거 잘 되었는데, 그랬죠. 그래요. 당신이 권한 문화센터에서 만난 사람이에요. 이제 와서 고백합니다만 제게 그림을 가르치는 화가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놀라시겠지요. 저는 당신과 결혼하면서 적성에 맞지도 않는 교사직을 그만둔 후 계속 살림만 했지요. 처음엔 당신이 출근한 후 청소를 하고 난 뒤 거실에 앉아 창밖을 보며 커피를 한 잔 마시면 행복했어요. 그리고 책을 읽기도 하고 드라마를 보기도 했습니다. 나름대로 행복했지요. 결혼 다음해 아기가 태어났고 아무 탈 없이 잘 컸지요. 대학도 당신의 전공을 따라 들어갔고요. 제가 살면서 나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습니다.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왔다는 느낌입니다. 어릴 때나 학교 다닐 때는 모범생이었고 대학은 학력고사 성적대로 대학을 들어갔고 책 읽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별 생각 없이 국문학을 전공했고요. 대학 때 교직 강의를 들은 덕분에 졸업하면서 중등교사 2급 자격증을 가졌고 곧장 사립학교에 국어 교사로 들어갔지요. 요즘엔 하늘의 별따기라는 교사를 그때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할 때였지요. 그러다 결혼하자마자 그만두었고요. 제가 당신에게 왜 이런 말 하냐면 전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당신에게도 불만이 없었고 나 자신에게도 불만이 없었지요. 당신은 가정적이지 않았지만 교수로서 벌에 대해 열심히 연구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다만 당신이 그토록 신경을 써서 연구하시는 벌에 대해 나한테는 한 번도 얘기를 한 적이 없었지요. 좀 아쉽기는 했습니다. 그러다 아이는 대학을 가고 저는 좀 따분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뭐 심하지는 않았고요. 여전히 당신이 출근하고 나면 청소를 하고 거실에 앉아 커피를 마셨고 책을 읽었지요. 오후엔 수영장에 다녀온 후 뒷산에 산책을 가기도 했고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요. 당신이 출근한 후 평소처럼 청소를 끝낸 후 당신과 나의 속옷을 손빨래 한 후 느긋하게 커피를 한 잔 마시는데, 글쎄, 눈물이 핑 도는 거예요. 아무 이유도 없었어요. 그냥 창밖을,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원, 이거 참. 나는 손등으로 쓰윽 닦은 후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데. 글쎄, 목이 콱 메이는 거예요. 나는 사레가 들려 켁켁거렸지요. 한참동안 켁켁거리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고개를 드니 창밖의 햇살이 나뭇잎에 떨어져 하얗게 빛나더군요. 조금 지나 아무 일도 없었듯이 평상시로 돌아왔습니다. 아마 그 무렵이었을 거예요. 당신이 문화센터에 한 번 나가보라고 권한 거요. 당신 보기에 내가 좀 불안해 보였나 봐요. 저는 뭘요, 그냥 이대로가 좋아요, 그랬지요. 맞아요. 전 별로 배우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지요. 그러다 우연히 여성회관 문화센터에서 서양화 강좌를 연다는 알림판을 보았어요. 저기 한 번 나가볼까. 저는 그렇게 문화센터에 그림을 배우러 나갔습니다. 유화 물감과 붓을 사고 팔레트와 앞치마를 사고 이젤을 사고. 저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처음엔 크게 내키지 않았는데 뭔가 이 나이에 새로운 것을 한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저는 그때 당신에게 고백했듯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문화센터의 서양화반에서 저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여성회관에서 15명 정원에 13명이 매주 화요일 오후 2시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리고 나면 꼭 뒤풀이를 하였지요. 화가의 화실에 가거나 찻집에 가서 수다를 떨었지요. 사실 저는 공부 못하는 학동처럼 그림 그리는 것보다 뒤풀이를 더 재미있어 했습니다. 거기서 그림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으니까요. 그림 그리는 시간엔 기교만 배우는 시간이었고요. 화가는 그림 그리는 자세에 대해 많은 애기를 했는데 그 중에서도 이런 말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욕망에 충실하라.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지 못 하면 그림도 가짜 그림이 된다나요. 남의 시선에 아랑곳 말고 마음이 가는 대로 붓을 움직이라고 했습니다. 그 분은 주로 인물화를 그리는데 주로 풍경화를 그리는 저희들에게 좀 답답함을 느끼시더라고요. 저는 그 말이 좋았어요. 욕망에 충실하라.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요. 문화센터에서 그림을 미처 다 그리지 못 한 날이었지요. 찻집에서 뒤풀이를 하고 난 뒤 그림을 더 그릴 사람은 자기 화실에 가서 그려도 된다고 하시더군요. 물론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개강 때부터 오전 시간만 빼고 언제든 그림 그릴 사람은 자기 화실에 오라고 했지만 사실 전 남자 혼자 있는 화실에 가는 건 좀 꺼려지더라고요. 말씀 안 드렸나요? 그 분은 나이가 마흔 넘었지만 아직 미혼인데다 화실 구석에 방을 꾸며 거기서 밥을 먹고 잠도 자고 그랬습니다. 오전은 그 분 혼자서 화실에서 그림 그리는 시간이라고 하더군요. 그 날은 몇몇이 화구를 들고 화실로 갔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네댓 명이 가니까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사실 전 그때까지 수강생들과 잘 어울리지는 못 했습니다. 뒤풀이를 좋아해 참석해도 뒤에서 주로 듣는 입장이었지요. 다른 수강생들은 몇몇이 어울려 화실에 놀려가기도 하는 모양이었지만 전 화실에 한 번도 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주로 옆에서 그림을 그리던 사람의 강권에 따라 화실로 갔지요. 갔는데, 글쎄, 전 엄청 놀랐습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인물화를 주로 그리신다고 말씀드렸는데 구체적으로 주로 누드화를 그리시는 분이었어요. 화실 벽면이 온통 여자의 누드화로 채워져 있더라고요. 저는 부끄러워 고개도 못 들 정도였어요. 그때 누군가 화실 옆에 있는 식당에서 막걸리와 지짐을 사 왔고 우리는 그림 그리기는커녕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지요. 그분은 주로 몸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몸이다. 그리고 몸에 자유를 주어야 한다. 의식이 몸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주로 그런 말을 했는데 글쎄, 전 너무 가슴에 와 닿는 말이었습니다. 그 분이 얘기를 하면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저녁을 지어야겠다고 가는데 전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계속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몸에 대해서. 영혼의 지배를 안 받는, 자유로운 몸에 대해서 계속 얘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이제야 만나다니. 아쉽지만 집에 왔습니다. 하지만 집에 와서도, 당신께 죄송하지만 계속 그 분 생각뿐이었습니다. 저녁을 지으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그 분과 뭔가 끊임없이 얘기를 나누는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 후로 저는 자주 화실에 놀러갔습니다. 화가가 있을 때도 있었고 없을 때도 있었는데, 없을 때는 출입문 옆에 있는 배전반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혼자 누드화를 바라보다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옷 하나 걸치지 않은 그림의 주인공들이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세상 외에 또 다른 세상이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화가가 있을 때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말이 통했습니다. 얘기를 나눌 때면 화장실 가는 것조차 시간이 아까울 지경이었습니다. 누드화는 인문학이라고 했습니다. 인체를 관찰하고 표현하기 때문이지요. 또한 화가는 모델과 많은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고 합니다. 모델의 삶 전체를 이해해야 제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합니다. 저도 누드화를 그려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우선 자신의 몸부터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구도니 이런 거 따지지 말고 원하는 색으로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자신의 몸이 눈에 확 들어오는 날이 있다나요. 그래서 저는 매일 집에서 옷을 벗고 거울 앞에서 제 몸을 그렸습니다. 근데요, 처음 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섰을 때 그렇게 제 몸이 낯설게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샤워를 할 때마다 보는 몸인데 막상 그림을 그리려고 보니 생전 처음 보는 몸뚱이인 거 같았습니다. 마치 남의 몸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안 그래도 그림 그릴 줄 모르는데 내 몸까지 낯서니 그림이 될 일이 없지요. 그래도 노란색으로 붉은 색으로 푸른색으로 캔버스에 막 그렸습니다. 차마 그림은 화가에게 보여주지 못 하고 말로 다 했습니다. 화가는 빙그레 웃더군요. 이 세상엔 잘 그린 그림과 못 그린 그림은 없다더군요. 다만 얼마나 인체가 품고 있는 그 무엇을 봤느냐 못 봤느냐가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전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화가가 무슨 일인가 무척 화가 나 있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도 대답도 잘 안 하더니 서울서 일주일에 한 번씩 내려오는 모델이 아파서 못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개인전을 준비하던 화가는 화가 날 수밖에요. 다른 모델을 부르면 안 되느냐고 물었더니 할 수 없이 그래야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무척이나 아쉬운 듯 했습니다. 몇 년 동안 작업을 같이 해온 모델인데 마음이 무척 잘 맞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런 모델을 앞으로 만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 저는 이제껏 그렇게 아쉬운 표정을 짓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며칠 동안 고민했습니다. 제가 그 분의 모델이 되고 싶은데 자신이 없었습니다. 나이 쉰이 넘은 여자가 무슨 모델을. 제 자신을 책망했습니다. 축 늘어진 가슴이며 불어난 뱃살. 처음으로 이런 몸에 경멸감까지 느꼈습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당신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전 그 분의 모델이 되고 싶었습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그러던 어느 날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제가 모델해도 될까요? 하고 저도 모르게 불쑥 물었습니다. 제가 말해놓고도 마치 다른 사람이 말한 것처럼 느껴져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예? 그 분은 놀란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얼굴이 화끈거려 더 이상 말을 못 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그 분의 말이 마치 하늘에서, 허공에서 공명처럼 울렸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요. 어떻게 모델을 섰는지 지금도 기억에 별로 남은 게 없습니다. 옷을 벗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그 분이 제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억만이 선명하게 납니다. 부끄럽다거나 창피하다거나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머리가 텅 빈 느낌이었습니다. 요즘 힘든가요? 그가 물었습니다. 예? 저는 무슨 말인가 물었습니다. 몸이 굳어 있어요. 딱딱하고요. 그리고, 엉켜 있어요? 예? 저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질 못 했습니다. 저는 제 몸의 늙은 것에만 신경을 썼다는 게 솔직한 심정일 거예요. 몸은 마음을 드러냅니다. 화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제 몸이 굳어 있고, 딱딱하고, 엉켜 있고. 글쎄요. 이 말처럼 제 생활, 마음을 정확히 표현한 게 있을까요. 몸은 마음을 표현한다고 했는데 아마도 그런가 봅니다. 편안히, 마음을 편안히 하세요. 화가는 계속 저에게 편안하게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편안하게 있었습니다. 아니, 편안하게 있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분이 틀어준 클래식을 들으며 음악에 빠져들려고 했고, 허공을 바라보며 텅 빈 내 마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그 분은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의 모습이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무언가가 터져 나올 듯 하더라고요. 그래서 크로키 포즈만 몇 번 취하고 옷을 주워 입는데 그제야 부끄러움이, 수치심이 와락 몰려왔습니다. 옷을 벗을 땐 몰랐는데 막상 옷을 입으려니까 수치심이 몰려오다니요. 그러나 어쨌든 옷을 벗고 모델을 섰을 땐 편안한 마음이 들었던 건 사실입니다. * 아내가 누군가 통한다고 얘기했을 때 나는 눈치를 챘어야 했을까. 사실 나는 그 상대가 그 화가인지 몰랐고 전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왜 당연히 여자라고 단정 지었을까.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아내의 침대로 걸어가 앉았다. 아내의 냄새가 나는 듯 했다. 얼마 만에 아내의 채취를 느끼는가. 막상 아내와 함께 지낼 땐 느끼지 못하던 냄새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 걸 느꼈다. 이런. 몇 해 동안 살을 비비며 살아도 느껴보지 못 한 향기에 이러다니. 나는 나를 책망했다. 아내는 문화센터에 나가고 얼마 후 자신의 방을 꾸며야겠다고 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러라고 했다. 아내는 아들이 대학 간 후 비어 있는 방을 자신의 방으로 꾸몄다. 침대는 그대로 썼고 나머지는 모두 버리거나 다용도실에 갖다 놓았다. 일인용 소파와 화장대를 가져놓았고 커다란 거울을 벽에 걸었다. 단출했으나 뭔가 짜임새가 있는 방이었다. 아내는 낮에는 그 방에 있는 듯 했고 밤에도 그 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잠은 꼬박 안방에 와서 잤다. 어쩌다 거기서 잠을 자기도 했는데 솔직히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자기 방에서 자는가 보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일주일에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 사람이 왜 이럴까 생각했지만 나 또한 수벌의 생태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이라 밖으로 벌의 생활을 관찰하느라 바빴기에 아무 생각 없이 그러라고 했다. 아마 그렇게 하고 난 뒤 나는 나대로 바빴고 아내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계속 자신의 방에서 자고 싶다고 했다. 애원하는 눈치였다. 나는 무심히, 그러라고 했다. 그러자 아내는 분명히 바라던 일이었을 것 같은데 표정이 밝지 않았다. 그 뒤로 아내는 계속 그 방에서 잤고 나 또한 크게 불편한 점을 못 느꼈기에 그냥 넘어 갔다. 그러다 아내는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번도 외박하지 않던 아내였다. 하다못해 친정엘 가더라도 이틀을 못 자고 집에 오는 성격이었다. 집이 편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나가다니. 나는 주위에 수소문할 생각은 없었다.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아내는 자기의 방을 갖고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뭔가 이상한 기색은 있었다. 결혼한 지 30여 년이 됐는데도 어떨 땐 전혀 딴 사람처럼 느낄 때도 있었다. 그때라도 아내를 잡았더라면 혹, 아내는 집을 나가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아내가 집을 나간 후의 어느 날이었다. 아마도 6일쯤 지난 날이었을 것이다. 나는 퇴근하여 집에 왔을 때 현관문은 열려 있는데 거실의 불은 꺼져 있었다. 나는 마당에 들어설 무렵부터 혹 아내가 들어왔나 싶었다. 아니 속마음이 그랬다. 나는 계단에 올라서서 현관문에 열쇠를 꽂았다. 그러나 현관문은 쉽게 열렸다. 나는 아침에 현관문을 잠그지 않고 출근했나. 반신반의하면서 벽을 더듬거리며 거실의 불을 켰다. 나는 이상한 느낌으로 내 방으로 가면서 아내의 방을 흘끔거렸다. 그때 느낌이 묘했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는데 문득 저기 아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때는 그랬다. 나는 살며시 아내의 방문을 열었고, 그리고 나는 보았다. 아내의 나신을. 아내는 옷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나신으로 웅크리고 잠이 들어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빛으로 아내의 나신은 하얗게 빛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6일 만에 들어온 아내는 그렇게 옷 하나 걸치지 않고 나신으로 내리 3일 동안 잠만 잤다. 참으로 평온하게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으로 어처구니없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아내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집을 떠났다. 나는 아내의 방에 더 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내 방으로 가 등산복으로 갈아입었다. 폭염 경보가 전국의 대부분 지역에 내려졌고 나머지 지역에도 폭염 주의보가 내려진 상태였다. 나는 그렇다고 집에 있을 수는 없었다. 등산복을 입고 가까운 산에라도 오르고 싶었다. 벌써 시간이 오후 5시를 향하고 있으니 그리 덥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마당으로 나와 일본 토종개인 아키다에게 사료와 물을 주었다. 평소에 아내가 개에게 사료와 물을 주곤 했다. 개는 사료를 먹지 않고 나에게 매달렸다. 아내도 나도 개를 산책 시켜주지 못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두 앞발로 달려드는 개를 뿌리치고 차에 올라탔다. 그리곤 곧장 마을을 벗어났다. 그제야 번쩍 머리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내가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했을 때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 그 말이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지 않았을까. 나는 머리를 오른손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았다. 왜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 여자라고 단정 지었을까. 왜 남자라는 생각은 못 했을까.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오히려 잘 되었다고. 잘 지내보라고까지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산 밑에 차를 주차하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몇 발자국 떼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몸에서 열이 났고 이마에 땀이 맺혔다. 아내는 6일 동안 뭐 하고 지냈나. 의문이 떠올랐다. 그 화가라는 놈하고 지낸 게 분명한데.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 속에서 열이 치솟았다. 화가와 뒹구는 아내의 벗은 몸이 눈에 선했다. 아내의 벗은 몸은 매끈하고 탄력 있는 몸매였다. 날씬하고 군더더기 하나 없는 몸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평소엔 축 늘어진 가슴, 튀어나온 뱃살에다 나잇살이 찐 허리였는데. 자꾸만 늘씬한 아내의 벗은 몸이 화가와 뒹구는 모습으로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내와 언제 관계를 가졌나. 아내의 벗은 몸을 본 지가 언제인가. 그리고 보니 아내와 잠자리를 한 지가 몇 년은 흘렸던 것 같았다. 아내가 원한 적은 있었던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나도 관심이 없었고 아내 또한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도 자꾸만 화가와 함께 옷을 벗은 모습이 상상 되었다. 수치심이 확 몰려 왔다.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산에 오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무리하지 말자.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며 걷는데도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빨라졌다. 작은 언덕을 넘는데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머리가 띵, 했다. 이러다 무슨 탈이라도 나지. 나는 언덕을 다 오르자마자 나무그늘 아래 풀에 쓰러지듯 앉았다. 배낭에서 생수통을 꺼내 주둥이를 입에 물고 꿀꺽꿀꺽 마셨다. 순식간에 한 병을 다 마셨다. 이제야 정신이 좀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나는 생수통을 배낭에 넣고 고개를 돌리는데 배낭 옆에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벌레를 한 마리를 보았다. 등이 파란색인데 꼭 나뭇잎 같았다. 동그랗게 벌레 먹은 듯한 문양도 보였다. 언뜻 보면 나뭇잎과 흡사했다. 너는 보호색을 띠고 어디를 해매는 것이냐. 내 속에서 누군가 벌레에게 말을 걸었다. 벌레는 먹이를 찾는 모양으로 여전히 주위를 돌아다녔다. 넌 가족이 없는가. 그런데도 외롭지 않은가. 왜 인간은 가족이 필요한가. 왜 가족이란 게 있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나. 군집 생활을 하는 벌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지 않는가. 내 몸 속에서 누군가 자꾸만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곤충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너는 외롭겠구나. 내 속의 누군가 말을 했다. “저, 천왕봉 가려면 이쪽으로 가면 되나요?”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신혼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똑같은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 “예. 저, 저 쪽으로.” 나는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 봐 내 말이 맞잖아.”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서 오른 쪽 길로 들어서며 여자가 남자를 타박했다. 나는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한 번도 등산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일어서서 젊은 부부가 간 길 반대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자꾸만 허방을 걷는 듯했다. * 내가 사는 세상 외에 다른 세상을 발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나 황홀한 세상입니다. 이제 그걸 아는 이상, 더 이상 지금의 세상에서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든 것은 아마도 당신에게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제 시간을 달라고 할 때였을 겁니다. 저는 처음 모델 서는 것을 실패한 후에도 여전히 화실에 자주 갔습니다. 가면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림을 그리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도 그냥 있는 것 자체가 편안했습니다. 여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아니라 딴 세상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인가 화실에서 저는 깜박 잠이 들었는가 봅니다. 제가 소파에 누워 있는데 화가가 열심히 저를 그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잠깐요. 움직이지 마세요. 화가는 내가 일어서려고 하자 황급히 애원했습니다. 나는 순간 내가 옷을 모두 벗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제가 누드화를 보다가 옷을 벗었다는 기억이 났습니다. 그러다 소파로 와서 잠시 있다는 게 깜박 잠이 들었나 봅니다. 저는 누워 있는 자세 그대로 있었습니다. 화가는 열심히 붓을 놀리고 있었고 저는 눈을 감은 채였습니다. 마음이 평온했습니다. 화가의 붓이 내 몸을 간질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내 생애 이렇게 편안할 때도 있었나 싶을 만큼 그야말로 무아지경에 빠졌습니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빙그레 웃는 화가의 모습을 보자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렸고 얼른 옷을 입었습니다. 옷을 입을 때에야 부끄러움이 닥치더라고요. 너무 편안하게 잠을 자기에 깨울 수 없었어요. 그래서 무례하게. 화가는 사과를 했습니다. 아니요, 아니에요.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대신 나는 화가가 그린 그림을 보았습니다. 중년의 부인이 곤하게 잠든 모습인데 참으로 편안해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축 늘어진 가슴이며 튀어나온 뱃살, 울퉁불퉁한 허릿살이 여자의 지나온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과히 나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름다웠습니다. 내 몸이 저렇게 아름답다니. 폐경기가 지난 여자의 몸은 더 이상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제 자신이 어리석었습니다. 차라리 20대 처녀들의 몸매하고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그때야 깨달았습니다. 이제야 저는 제 몸에 대해 용기를 가졌습니다. 제 몸의 아름다움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 한 나는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뒤로 저는 수시로 화가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제가 자청했지요. 캔버스 앞에 옷을 벗고 서면 무엇보다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마치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화가도 무척 좋아했습니다. 중년 여인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는데 그동안 모델을 구하지 못 했다고 하더군요. 아직은 화가가 어떻게 포즈를 취하라고 말을 합니다. 제가 모델 공부를 하지 않았기에 어떻게 포즈를 취하는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화가는 주로 등 뒤의 모습을 좋아했습니다. 뒤에서 본 사람의 모습에는 그 사람의 지나온 삶의 궤적이 있다나요. 지금까지 주로 눕거나 혹은 앉은 뒷모습의 포즈를 취했습니다. 이제 곧 앞의 모습으로 포즈를 취할 날이 오겠지요. 포즈를 취하면 화가와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물론 무언의 대화지요. 보지 않는데도 화가가 지금쯤 제 어느 모습을 그리고 있구나, 느껴집니다. 그리고…… 제가 살아온 인생을 얘기합니다. 시골의 어느 집 담벼락 따라 서 있던 접시꽃을 바라보던 소녀의 얘기도 하고요. 시장에 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울고 있는 아이의 얘기도 합니다. 지금껏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얘기들이지요. 그러면 화가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랬어요? 하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첫 생리 때의 당황했던 기억들. 언젠가 가슴이 갑자기 커졌다고 느꼈던 순간들. 엄마 몰래 지갑에서 돈을 꺼내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갔던 일. 책 산다고 돈을 달래서 군것질 한 일. 화가는 열심히 제 얘기를 듣습니다. 통한다는 건 이런 건가봅니다. 제 생의 모든 것을 다 들어줄 수 있는 상대. 가장 추한 것도 얘기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통하는 사람이고, 또 화가라는 사실에 전 너무나 기뻤습니다. 한참동안 얘기를 하다보면 시간은 몇 시간이 흘렀고 화가는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말을 하면 그제야 제가 옷을 벗고 있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화가는 지치지도 않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제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냥 저는 편안한 마음으로 있었을 뿐인데도 말이지요. 원래 모델은 체력을 많이 길러야 한다나요. 여러 포즈를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으려면 말이지요. 하지만 전 한 번도 힘들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림이 끝나면 아쉬울 지경입니다. 시간가는 게 아까울 지경입니다. 밤새도록 이대로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 제가 다시 태어난 느낌입니다. 이제는 옷을 입고 있는 것보다 벗은 모습이 저에겐 더 편안합니다. 옷이 거추장스럽습니다. 옷을 벗고 있으면 그제야 제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반대로 얘기하면 옷을 입으면 숨쉬기가 답답하다는 것이지요. 당신이 출근하고 나면 저는 옷을 벗고 지낼 때가 많았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딴 세상이 있는 줄 아는 이상, 지금의 세상에서 살 수 없습니다. 전 그 화가를 사랑합니다. 얘기 안 했지만…… 사실 사랑도 나누었습니다. 포즈가 끝난 후 화가와 전 깊은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 한 황홀경이었습니다. 부부로서, 의무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몸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의 사랑놀이였습니다. 이 얘기는……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멀리하는 것인가 봅니다. 남녀 관계에 있어서 말이지요. 모델을 서고부터 점점 당신과 멀어지는 제 자신을 느꼈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당신과 함께 자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당신에게 말했지요. 제 방에서 자겠다고. 당신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러라고 했고요. 당신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모델을 서면 설수록 점점 당신과의 사이가 서먹서먹해지더군요. 그때는 알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자다가 당신 몸이 내 몸에 닿으면 저는 화들짝 놀라곤 했습니다. 몸이 먼저 당신을 멀리 했습니다. 당신이 제가 제 방에서 자는 걸 허락하셔서 다행이었습니다. 아니면 그때 이미 집을 뛰쳐나왔는지 모릅니다. 전 제 방에서 혼자 지낼 때가 좋았습니다. 그를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그를 따라 일산으로 갑니다. 그가 일산에 화실을 얻고 그곳에서 활동한다고 했습니다. 저를 데려가주세요. 저는 간청했답니다. 저도 일산에 가서 모델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서 계속 모델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아직 그 분 외에는 아무에게도 모델을 선 적은 없지만 상상만 해도 황홀합니다. 체력도 기르고 그림 공부도 많이 해서 모델로 남은 인생 살아가고자 합니다. 당신에게 염치없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끝.  
305 단상(斷想) 이제(二題)/김재수 file
편집자
2080 2013-07-31
13.08월 39호 수필  단상(斷想) 이제(二題) 김 재 수 1. 진안여객의 추억 버스 한 대가 신호를 받고 서 있습니다. 내 차도 그 뒤에서 기다리고 서 있습니다. “어 ‘진안여객’이네!” 아내의 말입니다. 벌써 백 번도 더 들은 말입니다. 그 순간 아내는 또 40여년의 세월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진안여객’ 1973년에 결혼을 했으니까 올 해로 39년이 되는 셈입니다. 홀시어머니 모시고 신혼을 시작했지만 ‘문학을 합네.’, ‘그림을 그리네.’라고 바깥으로만 쏘다니는 신랑은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습니다. 첫돌 지나면서 우리와 함께 살아온 사촌 여동생은 고등학생이었고, 거기에 또 고등학교 입학한 외사촌 남동생까지 어머니가 대려와 우리 집에서 생활을 했으니 아침마다 세 개의 도시락을 싸는 일은 아내의 몫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내가 어떤 시집살이를 하고 어떤 고민이 있는지 그 땐 몰랐습니다. 이런 아내에게 1년에 두 번 자유로운 시간이 있었으니 바로 친정엘 가는 날입니다. 안동에 있는 친정으로 가는 유일한 직행버스가 바로 ‘진안여객’이었습니다. 친정엘 가 봐야 별 신통한 일도 없었지만 그래도 아내로서는 ‘시집살이’란 어둡고 답답한 터널에서 자유로운 길로 나오는 유일한 해방구였습니다. 신랑이란 사람은 책 한 권 손에 달랑 거머쥐고 시(詩) 한 줄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 차멀미로 보채는 아이들의 칭얼거림과 몇 개의 보따리를 관리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아내를 괴롭혔지만 아내는 전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비포장 도로 두 시간을 가는 내내 흙먼지 이는 차창에 비친 아내의 얼굴은 시외버스 주차장에 들어 설 때까지 환한 복사꽃이 피었습니다. 그 추억의 친정길이 40년의 세월 속에 빛이 많이 바래졌습니다. 장인어른도, 장모님도 돌아가시고 그 때 그 정겹던 가족들도 흩어져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좁아도 아랫목 하나는 참 따뜻했던 옛집은 이제는 다른 사람의 문패를 달고 퇴락하고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세월의 흔적 속에 모습조차 변하고, 그리운 사람들마저 떠나고 있지만 아내의 가슴속엔 아직도 변하지 않은 추억 하나 생생하게 살아 있음이 고맙습니다. 남들이 보면 아무것도 아닌 그 이상한 추억 하나가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일 있을 때 마다 힘이 되어 주는 가 봅니다. ‘진안여객’ 숱한 여객회사들의 부침이 있었지만 4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아내의 가슴에 행복한 추억을 되살려 주는 참 고마운 버스 회사 이름입니다. 또 언제 우연히 만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 저 버스의 이름 속으로 여행을 떠나고 있는 아내의 행복한 모습을 자주 볼 수 있게 되기를 빌어 봅니다. 2. 아들의 등 인간관계에서 친밀해 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주 만나는 일이고 다음은 음식을 서로 나누는 일입니다. ‘음식 끝에 정 난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또 하나는 함께 여행을 하는 일이요 함께 목욕을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가릴 것 없는 알몸으로 서로의 등을 밀어주노라면 훨씬 친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입니다. 주말마다 오는 아들 가족을 데리고 모처럼 성주봉에 있는 한방사우나를 갔습니다. 여느 때처럼 혼자 앉아 때를 미는데 아들이 다가와 등을 밀어 줍니다. 그 런데 등을 내밀고 있는 내가 몸 둘 바를 모르도록 어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나를 모르는지 아들은 내 등을 부지런히 밀고 있었습니다. 이젠 내가 아들의 등을 밀어줄 차례입니다. 내 눈 앞에 딱 버티고 앉은 튼튼하고 믿음직한 아들의 등. 그런데 내가 아들의 등을 미는 순간 갑자기 왈칵 하고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되돌아보면 아들 나이 마흔이 되도록 한 번도 그의 등을 밀어준 기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늘 그랬습니다. 직장이 내 가정보다 늘 우선이었습니다. 여름과 겨울 그 방학동안도 집에 있기보다 학교에 가 앉았으면 마음이 편했습니다. 지난 41년의 교직 생활. 아무리 더듬어 봐도 생각 날만큼 뚜렷하게 해 놓은 일 하나도 없이 바쁘게만 달려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들에겐 일상인 아들과 함께 목욕탕 다니는 일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아들의 등을 보는 순간 자식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아비의 처신에 대해 미안함과 자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들 역시 아버지와 함께 목욕하는 일이 얼마나 어색했는지 내내 몸 둘 바를 몰랐다는 겁니다. 우리말에 ‘낯가림’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어린아이들이 낯선 사람을 가리어 대한다는 말이지만 결국은 쉬운 일이라도 평소에 자주 하지 않으면 어색해 지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둘러보니 어린 아이와 함께 온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보입니다. 함께 물장난도 치고 몸을 씻어주기도 하며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런 추억 하나 만들어 주지 못한 자격 없는 애비의 모습이 자꾸 부끄러워 눈시울이 붉어 졌습니다. 하지만 땀으로 범벅된 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아무도 보지 못한 게 참으로 다행스러웠습니다. 김재수 : 경북 상주시 신봉동 293(상산로 71-20)  
304 광배 뒤로 숨었다 외 1편 /강태규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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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6 2013-07-31
13.08월 39호 시  광배 뒤로 숨었다 강태규 설악이 해를 감춘다 광배가 부처 뒤로 숨는다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해 아래서 숨바꼭질 중이다 술래 된 눈으로 감아보면 너의 숨과 냄새를 좇는다는 것 너의 이름을 묵송하는 것 너를 잃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조차 숨을 곳 없어 내일이면 잊을, 다 버렸다는 거짓말까지 광배 뒤로 숨겼다 개에게 길을 물어본 적 있다 꽃그늘 봄바람 속에 절집 개를 기다리는 마을 감집 마당 개에게 전생을 물어본 적이 있다 누구의 보시물이 될 것인지 괜히 물어본 적이 있다 너를 끌어낸 반 평의 햇빛과 너의 그늘과 너의 이슬과 너의 망막에 드는 만상이 너와 나만 빼고 새장 밖의 축생들인데 코가 꿰인 나도 쓸데없는 자유를 가졌다고 투덜댄 적이 있다 나는 두 발로 앉아계신 부처님을 기다리는데 너는 네 발로 웅크리신 부처님을 기다린다고 생각했다 농협사료 냄비 한 개와 떡라면 냄비 하나를 마주하고서 우리의 전생을 이야기하다가 당장 배급받은 잉여 한 토막 거룩하다 넘기시자고 남장사 벚꽃 그늘 아래, 또 우리의 후생을 이야기했다 강태규 서울 출생. 2003년 산문집 『평창이야기』, 2009년 시집 『늙은 대추나무를 위하여』로 등단. 한국작가회의 회원 주소: 217-763 강원도 속초시 교동 설악현대아파트 101동 1402호 전자주소: kang.taegyu@gmail.com  
303 영춘永春을 지나며 외1편/차영호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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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3 2013-07-31
13.08월 39호 시  영춘永春을 지나며 차영호 1 강모롱이 굽도는 돌밭둑에 붙박여 봄 산을 넘기며 입술 달싹이는 저 꽃 사는 게 다 뒤웅박 팔자소관이어서…… 풍류風流랑 어우러지면 산도화山桃花 나 같은 무지렁이를 품으면 개복상꽃 2 내가 바다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바다색 주름을 나풀거리기 시작하여 바닷가에 눈 딱 감고 눌러 살아도 바다 가득 찰람대는 바다색 주름 치마 기왕 도둑맞을 양이면 아랫도리까지 내줄 걸 오늘도 남한강을 거슬러 어상천魚上川 모실*까지 치고 오르는 쌉싸래한 수수미꾸리 떼 * 충북 단양군 어상천면 연곡리 자고새가 나는 밀밭* 정오가 배꼽 위로 엎어지자 기지개를 켜는 관객 가늠쇠 선단 위로 자고새 날고…… 소스라친 고공高空에는 노고지리 한 톨 아아, 그리운 총성 바다로 열린 밀밭길에서는 구름이 요분질하지 않아도 소낙비 그립다 * 빈센트 반 고흐, 1887년, 캔버스에 유화, 53.7×65.2cm ․ 1986년 《내륙문학》으로 작품 활동. ․ 한국작가회의 회원, 「푸른시」동인 ․ 시집 『어제 내린 비를 오늘 맞는다』,『애기앉은부채』,『바람과 똥』이 있음 ․ youngghc@hanmail.net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대도동 512 상도빌라 303  
302 쌍계사를 떠나는 거북이 외1편/박승민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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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1 2013-07-31
13.08월 39호 시  쌍계사를 떠나는 거북이 박승민 게릴라성 호우가 밀물처럼 절 마당에 들어온다. 左溪와 右溪가 용틀임치는 쌍계계곡으로 나 이제 떠나고 싶네. 살아서 지은 죄, 한 천년쯤 진감禪師를 등에 태우고 한 발짝도 山門을 나가지 않았으면 그만 탕감되지 않았겠는가. 물위를 떠가는 하동 십리 벚꽃 길 지나고 지나서 섬진강변 매화마을마저 지나고 저 노량해협 넘어 남해의 미조항까지 흘러가야겠네. 조도와 호도를 돌아 사람 살지 않는 밤섬을 지나 서해와 남해의 파도가 만나고 헤어지는 그 어디쯤에 깎아지른 12폭 병풍 같은 노을은 없어도 등 하나는 따뜻하게 가릴 수 있는 조선소나무나 한 수 거느리고 나, 다시 한 천년쯤 선사의 부도탑도 전생의 죄업도 탁 털어버리고 둥둥 부표처럼 흔들리고 싶네. 여기도 아니다 싶으면 네발로 어설프게 헤엄쳐 죽어서도 그 아무 곳도 아닌 머나먼 쪽빛 속으로 그냥 가라앉았으면 좋겠네. 수만리 심해의 산호초 옆에 바윗돌 하나로 비스듬히 누워 바다 밑으로 벌겋게 물들어오는 오색단풍이나 구경하다가 그러다가 더 쓸쓸해지면 낮잠처럼 고요히 숨을 놓겠네. *진감선사는 통일신라후기의 유명한 고승으로 귀부에 세운 탑비에는 고운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있다 party의 性的 傾向 액션, 액션이야! 슬쩍 태클만 걸었는데 한 바퀴 허공을 돌아 픽, 그라운드에 쓰러져 뒹구는, 엘로 카드를 유도하는 우파의 헐리웃 액션도 문제지만 좌파의 허슬 문장도 중대형 급 평수는 훨, 넘지. 지난밤의 비분강개는 술 깨는 속도로 깨고 우파가 주는 상을 어제의 좌파가 넙죽, 받지 좌파의 파티에 오늘의 우파가 동석도 하지 뒷머리나 한번 스-윽 긁고, 교제 폭도 유연하게 어장관리도 깔끔하게 -마, 인생 머 그런 거지, 알어 알어 짜쌰! 니 마음 왜 모르겠어 -근데 -근데 말이야 -야! 씨방아 지금이 일제 강점기냐? 박통 때냐? 에라 잉!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진짜 아픈 사람은 긴 밤, 홀로 -홀로 긴 밤, 개울에 나가 쓸려가는 달빛 안쓰러워 밤새도록 세숫대야로 물 퍼 나르는 -줄줄 흐르는 노른자를 양손에 들고 물 중심에 달을 갖다 박는 -퉁퉁 부은 눈으로 -퉁퉁 부은 목젖으로 -긴-밤-지-새-우-는- 그런 석청 같은 사람 서너 명 남아서 오늘밤 달이 뜬다는 사실, 숙연하게도 하루라는 이 지구가 무사히 도착하고 있다는 이 사실 party가 party가 되는 세상이라니! 박승민 경북 영주출생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활동시작, 시집으로 『지붕의 등뼈』가 있음  
301 오체투지 외1편/하재영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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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9 2013-07-31
13.08월 39호 시  오체투지 - 상그릴라에서 하재영 아름아름 한 아름 허공 위 허공에 덧입히는 몸짓 제일 낮은 곳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향하는 춤사위다 수식이 필요 없어 꽃이 피고 피는 매미소리 여름 오후 한낮 겨드랑이 털 대책없이 매미가 소리로 간지른다 깜박 놓고 온 무선전화기에서 쓰르람 쓰르람 삽 한 자루 어께에 메고 그늘 진 텃밭에 들어가 푸른 답장 받아적어야겠다 -------------------------------------------------------------------- 하재영(河在英) 199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1992년 계몽사아동문학상 장편소년소설 당선, 시집『별빛의 길을 닦는 나무들』, 동화집 『할아버지의 비밀』 등. 현, 포항문예아카데미원장, 포항제철지곡초등학교 교사 주소 경북 포항시 남구 지곡로 295 포항제철지곡초등학교 메일주소 7feeling@hanmail.net  
300 호모 사피엔스, 호모 라피엔스*/권현수 file
편집자
3142 2013-07-31
13.08월 39호 시  호모 사피엔스, 호모 라피엔스* 권 현 수 호모 사피엔스가 지옥의 문 위에 벌거벗고 앉아서 오늘 저녁 식탁에는 무슨 옷을 입어야 하나 궁리를 하는 동안 호모 라피엔스는 제대로 차려 입은 옷 위에 복면까지 하고 이웃집 창고를 털고 있었다고 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며 고민하고 있는 동안에 호모 라피엔스는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너고 있었다는 것이고 혹자는 호모 사피엔스는 머리통이 크고 호모 라피엔스는 팔다리 근육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큰 머리통을 한 호모 라피엔스가 호모 사피엔스의 큰 머리통을 통째로 꿀꺽 삼키기도 했다니까 말이다 나는 짧은 치마를 입을까 긴 바지를 입을까 망서릴 때는 호모 사피엔스의 딸임이 분명하지만 한 끼를 굶은 저녁 때 쯤에는 동생의 입으로 들어가는 빵 조각도 빼앗아 먹는 것을 보면 호모 라피엔스의 후예임이 분명하다. 나도 가끔 헷갈리기는 한다. *호모 라피엔스;‘생각하는 인류’를 뜻하는 호모 사피엔스 를 패러디하여 ‘약탈하는 인류’라는 뜻으로 쓰인다  
299 이데올로기 외1편/송은영 file
편집자
2527 2013-07-31
13.08월 39호 시  이데올로기 송은영 아침 신문을 보면 학연,지연,내편.니편 변절자,배신자,빨갱이,수구꼴통 주류,비주류만 있고 서민은 없다 진짜 서민은 언제쯤 제대로 대접 받나 달이 지고 해가 뜨면 내일은 오늘이 된다 죄지은 자 떳떳하고 죄짓지 않는 자 두부처럼 단숨에 으깨진다 없는 것이 너무 많은 하늘 어디에도 구원은 없다 거머쥘 가방 끈 하나 없는 자유 없는 것이 차라리 구원이고 이데올로기다 겨울 과메기 낡은 외투를 걸친 초라한 노숙자같이 설한풍 되받아 치며 그렇게 견디고 있다 치욕의 모서리를 뽑아 코뚜레를 만들었다 난무하듯 헝클린 덕장곳곳에서 내장까지 훑어낸 납작한 뱃가죽을 드러내고 바다를 버린다 바람은 제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좀처럼 요약되지 않는 몸은 공복을 채워줄 누군가를 위한 것인가 밤새워 내리는 눈발을 미친 듯이 받아내며 완성된 또 다른 생 뼈를 추려낸 몸은 찬란한 지느러미를 키운다 축문처럼 지나가는 파도 소리에 살갑게 지나온 길 돌아볼 새도 없이 등푸른 육신을 쫀득쫀득하게 해탈한 겨울 과메기 풍경만 남은 수행자가 된다  
298 죽음 또는 영상 외1편/정선호 file
편집자
2800 2013-07-31
13.08월 39호 시 죽음 또는 영상 정선호 모두 떠났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노래는 끝났다 좋아했던 가수는 스스로 죽었고 조금은 위안이 됐던 정치지도자도 스스로 죽었고 절친했던 노동시인 형은 술병으로 죽었다 지금 남은 것은 그들이 남겨놓은 영상뿐이다 가수는 노래공연 장면과 정치지도자는 청와대에서의 집무 장면을 노동시인은 시낭송 장면을 남겨놓았다 난 조시(弔詩) 몇 편으로 그들 죽음을 애도했으며 가끔씩 그들의 영상 보며 흐느꼈다 그들이 남긴 노래하며 살아있음에 안도했고 죽어 고인돌이 된 그들 몸 위에 일상의 욕심으로 만든 내 육체의 돌을 얹었다 추억이 깊으면 은하수가 될까 내 추억의 힘이 우주에 흩어진 그들 별에 도착해 그들을 만날 날은 언제인지 내 사랑이 완성되는 그날들*), 그날들인지 그날들은 별들을 만나러 떠나는 날이다 *) 그날들 : 가수 고 김광석의 노래 제목인 “그날들”에서 인용함. Sleepness에서 놀다 그 편의점 이름은 Sleepness이며 종일 문을 열었다 작은 마을엔 필리핀인, 인도인, 한국인이 살았고 Sleepness는 마을의 유일한 편의점이다 Sleepness는 잠이 오지 않는 손님을 맞기 위해선 잠을 자서는 안 되었다 새벽에 Sleepness 앞, 간이 테이블에 피부가 검은 사람, 흰 사람, 황색인 사람, 그들의 혼혈인 사람들이 앉아 눈웃음으로 인사하고 대화를 하곤 한다 몇은 시간도 사려 편의점으로 오기도 했고 몇은 식사를 위해 편의점에 오기도 하는데 가장 쉽게 식사할 수 있는 곳이 Sleepness다 잠이 오지 않는데 식사를 한다는 것은 인류의 참 가혹한 본능이다 잠에 드는 것은 곧 죽음이다 잠에 빠진 사람은 이미 지구인이 아닌 제 고향인 다른 별의 사람이 되는 것, 잠이 오지 않는 사람은 Sleepness에 가보라 그곳에선 시간이 멈추어 있다  
297 청매화 꽃그림자에 밟히다 외1편/정 숙 file
편집자
2728 2013-06-30
13.07월 38호 시  청매화 꽃그림자에 밟히다 청매화 피어나는 열사흘 달밤 거울을 보며 물안개 빛 머리카락 비비꼬아 돌리다가 젊은 날 그려두었던 그림을 다시 살펴본다 겨우 A포 용지 두 장짜리 크기의 한지에 참 많은 꿈 그려 넣었구나 새하얀 물감으로 붉은 연꽃송이들과 연밥들 지워보다가 걷잡을 수 없던 욕심들, 양심에 걸린다 진한 먹물로 그 많은 새와 나비들 마구 지워버린다 흉한 상처로 온통 얼룩자국만 남는 나의 세월들 그 흔적 무게에 짓눌린 나의 한지는 달빛도 지나 가버린 어두운 봄밤을 지새우는데 그래도 미련이 다 지워버리지 못한 창백한 나부상은 슬픈 눈빛으로 도톰한 입술 달싹거린다 노오란 나비 한 마리와 청승스런 봄 달빛 그윽히 바라보면서 남편이 -애절양 6 [식칼 갈아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자식 낳은 것이 바로 죄로다!"]다산의 애절양 부분 1. 아들을 낳으면 아버지, 본인, 갓 태어난 아기까지 군역을 하는 것으로 등록되어 가혹한 세금을 추징당하는 것이 두려워 남근을 잘라버리거나 제 갓난아기를 끓여먹기도 하는 갈대들의 슬픈 시를 읽는 밤 2.'수령이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인가, 백성이 수령방백을 위해 태어난 것인가? ' 유배지에서 다산은 비로소 눈, 귀 열려 민주 생명의 불씨 하나 심을 수 있었으니 200년 전보다 지금은 좀 살기 나아진 것일까 남편이 택배기사여서 자식을 네 명이나 내다버린 에미 구제역으로 마구 살 처분한 소 돼지들 바람소식은 사흘이 멀다 하고 남의 애간장 끓인다 안테나 속 높은음자리표는 돌아가면서 유배 세상 아프게 맛보고 있다 3. 이젠 또 소 값이 개 값이어서 비싼 사료 때문에 소를 굶겨 죽이는 농민들, 갈밭울음과 한숨 삶아 치대는 소리 얼시구! 한술 더 떠 소를 굶겨 죽인 농가에 과태료를 부과한다니 갈잎들의 갈잎눈물 머금은 별똥별이 얼마나 떨어져야 저 무딘 철가슴들 뚫어 실낱 빛 바라볼 수 있는가 이 판국에 나는 무엇을 거세해야 사나 먼 바다 바라보며 겨우 시나 몇 수 적어 한을 풀어야 하는 한 사내의 마음 밑바닥, 그 골짜기 후벼 파 뒤적여 보는 수밖에 4. 사마천은 그것을 잘랐다고? 갈잎들은 목구멍 거미줄을 위해 기둥을 자르고 지금 여덟 살 여아들에게도 마구 연장을 휘두르며 기둥 세우기 바쁜 이 시대의 사이코패스들 저 야차들의 길 잃은 양물은 왜, 그대로 두는가  
296 한때 흐리고 비 외1편/김세형 file
편집자
2888 2013-06-30
13.07월 38호 시  한때 흐리고 비 김 세형 그 여자가 내게로 온다고 했다 그래서 올 때라고 했다 그 여자는 사랑이라고 했다 난 구름이라고 했다 그 여자가 내게서 간다고 했다 그래서 갈 때라고 했다 그 여자는 이별이라고 했다 난 바람이라고 했다 그 여자가 울며 간다고 했다 그래서 울 때라고 했다 그 여자는 눈물이라고 했다 난 비라고 했다 새 김 세형 축 처진 내 좌우 양 귓불 사이를 파닥, 파다닥, 번갈아 부산스럽게 오가며 늘 귀여운 새처럼 재잘~ 재잘~ 지저귀던 그녀가 어느 날 내게 뜬금없이 새장 속 새 한 마릴 선물했다. 평생 새를 사랑해 주라며····· 난 새를 선물 받자마자 새장 문을 활짝 열어 창공으로 훨~훨~날려 보냈다. 평생 새를 사랑하노라며····· 약력-2005년《불교문예》봄호로 등단 시집-『모래인어』『사라진 얼굴』『찬란을 위하여』 이메일-nalibul@hanmail.net  
295 간격 외1편/이창한 file
편집자
2772 2013-06-30
13.07월 38호 시  간 격 바람은 창틈으로 감겨들어와 나른함과 졸음의 사이에 끼어 토닥이며 끝없이 밀어 넣는 여유 어깨에 걸친 가벼움으로 읽다만 소설의 마지막 장을 접어놓고 다시 중반으로 회귀하면 대사를 상실한 기억 저편에서 서투런 잠꼬대로 이어진다 실바람에 온몸이 감겨 소설의 종착역에 도달한 주인공은 빼꼼히 작가의 손짓을 바라보다가 바닥에서 아직 이르지 못한 꿈과 현실의 간격을 재고 있다. 고 백 서러워 한꺼번에 몰리는 봄의 몸살이 감은 눈속에 자잘하게 오만색으로 녹아 있다 꽃피는 계절에 지쳐서 뭉게어 지는 꿈만 꾸는 걸까 물에 비치는 얼굴이 잘게 부숴지는 파문아래 떨어져 날리는 꽃을 보며 꼬박꼬박 변명만 하고 있다 꽃을 피워낸 그 아픔 떨어져 보내는 고통은 계절에 감전당한 아 ! 흔적을 지울수 없는 …… 내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라 당신 생각대로 따라 준 것인데 약력 : 성명 이 창 한 (홍소 泓沼) 경북 상주시 석단로 1706(개운동) 054)535-4411, 010-5535-4411 시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2009) 영강 지상백일장 시부문 당선 (2010) 월간 문예사조신인상 시 당선 (2010) 월간 문예사조신인상 수필 당선 (2011. 2.) 월간 문예사조문학상 본상 수상 (2012. 2. 17.) 상주문협회원 E-mail : saman01@hanmail.net  
294 七浦에서 외1편/권형하 file
편집자
2504 2013-06-30
13.07월 38호 시  七浦에서 바람이 파도잎에 싸여 한 생을 앓고 있다 집도 절도 다 버리고 낮달 하나 흔들면서 때로는 산을 돌아 나온 헛기침이나 토할까. 실눈 같은 수평선에 묻어나는 햇살들이 채마밭에 풀 자라듯 생각들이 무성하고 돌아갈 내 몸까지 묶고 있는 섬 하나. 귀산(歸山) 버릴 게 더 없어서 막막하게 돌아볼 때 저 청송 하늘빛이 푸르게 만져졌다 첩첩이 밀려오는 파도 푸근한 숨소리. 동해도 오고 싶을 때 비워놓은 저 바다 보름사리 멸치 떼가 희번덕이는 오월 쯤 산마을 젓갈 한 독을 박꽃 꺾어 담겠다. 다람쥐 몇 번이나 나뭇가지 툭툭 찢어 내고 늦가을 다 마른 삭정이 낮달로 떨어져 눈 내린 꼭두방재 넘으면 진동하는 수박냄새.  
293 변의(便意) 외1편/임술랑 file
편집자
2961 2013-05-30
13. 6월 37호 시  변의(便意) 임술랑 아침에 일어나면 똥이 마려울 것이다 걱정하지마라 시원하게 똥을 누고나면 모든 것이 용서될 것이다 술 먹고 떠든 얘기 너에게 먹었던 모진 마음들 하루 동안 쌓이고 찼던 이승의 무거운 짐들이 내게 와서 엉기고 설켜 또 하나의 변화를 이루고 드디어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변의(便意) 이건 무슨 위대한 예언 같은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똥을 누고나면 속이 편안해 질 테니 다시 또 하루를 살 수 있도록 허락 될 테니 끝이 없어 미친다 임술랑 우리가 로켓을 타고 일직선으로 날아간다면 계속해서 날아간다면 우주는 그 끝이 없다고 가정했을 때 한없이 무한정으로 날아서 가도 그 끝에 닿지 않는 것이다 그 끝을 향하여 내 생각으로 계속 날아가는 상상을 하다 보면 내 머리는 터질 것 같다 미치는 것 같다 머리통이 팍 터져서 산산조각 나서 그 끝과 마주할 것 같다 그래서 그 끝을 쓸어 담을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끄트머리는 잡히지 않는다 도대체 끝이 어디요? 그 끝은 인간의 상상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이다 그런 생각에 잠겨 내가 미쳐 죽으면 끝인가 이건 말도 안 돼 세상에는 나만 살고 있는 게 아니니까 상상조차 불허한 그 진리는 누가 조작한 것인가 인간의 한 쪽 뇌는 고장 난 불량품이고 보면 그런 상상에 이르는 게 이상한가 아무튼 그 끝을 생각하면 내가 못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