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6호...
   2020년 02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 오늘방문자 : 
    272
  • 어제방문자 : 
    558
  • 전체방문자 : 
    522,140

지난호 보기

분류에서 보고싶은 호를 선택한후 GO 를 누르세요.

번호 닉네임 조회 등록일
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88165 2014-11-03
273 추억 속의 그녀/노정희 file
편집자
2203 2013-03-31
13.04월 35호 수필  추억 속의 그녀 노 정 희 해마다 한번 씩 다녀가는 그녀다. 며칠 동안 뜨거운 날을 함께 보내다가 홀연히 떠나가 버린다. 사실은 그 며칠이 안타까운 것이다. 게으름 피우다가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면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 낯선 사람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낯선 얼굴을 보기위해 만남을 주선했다. 민물매운탕이 유명하다는 비슬산 서쪽편, 용연사 연못 부근의 식당에서 사인방에 합류할 또 한 사람을 마주했다. 주거니 받거니 소주잔이 오고갔다. 술을 마셔보면 상대의 성품을 대략 알 수 있다. 몸가짐은 반듯한지, 인품이 있는지.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며 목젖을 드러내고 웃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문학친구, 술친구들은 이쯤해서 해마다 딱 한번 씩 다녀가는 그녀를 보러가자고 입을 모았다. 술기운이 도니 운전하기가 그렇지 않느냐, 해서 대리운전을 부르니 20여분 기다려야 도착이란다. 그러면 저~기, 그녀가 마중 나와 있을 모퉁이까지만 가서 기다리자며 차량제공을 한 동희가 차에 오른다. 그러다 단속에 걸리면 어떡하려구, 조금 기다렸다가 그녀에게로 가자는 뒷사람의 만류에도 막무가내다. 할 수없이 일행은 차에 올랐다. 먼 곳에서 바라보아주는 것도 미덕일 수 있다. 그러나 직접 찾아가서 마주하고픈 마음이 더 간절했던 것이다. 특히 마음 맞는 지인들끼리 모였으니 더욱 그러하였으리라. 그녀를 만나는 순간을 기대했다. 벙글어진 미소로 맞아줄 그녀이기에 우리의 마음도 붕붕 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를 사모하는 마음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좁은 산골길은 차량으로 미어졌다. 밀고 밀리는 대열에 합류해 설렘의 마음을 다독이는데, 갑자기 차가 정차해 버린다. 왜 그러지?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음주단속중이다. 큰일이다. 모두들 술에 취해 있었고 차를 후진 할 수도 유턴을 할 수도 없는 지경이다. 불빛 번쩍이는 도깨비방망이를 치켜들은 경찰이 쫘악 깔렸다. 차량 한 대 한 대를 세워놓고 입에다 피리를 가져다주며 불어보라고, 아주 친절하게 권유한다. 이를 어쩌나, 모두들 애를 태우는데 갑자기 동희가 생수를 찾는다. 1.8리터를 벌컥벌컥 단숨에 마신다. “어서 불어보십시오.” 살짝 회유적이면서도 강압적인 피리장수는 끈질기게 독촉을 한다. 우리의 동희도 사람 상대에는 이골이 난 편이다. 잠깐 차에서 내려야겠다며 시간을 벌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이미 우리의 허점을 간파했고, 우리는 빠져나올 수 없는 그물 속으로 옥죄여 갔다. ‘운전면허 정지, 벌금 *백만 원’, 숨이 턱 막힌다. 울어줘야 하나, 아님 허허 웃어야 하나. 어차피 깨진 쪽박이니 위로 겸 위문공연이나 열어줄 수밖에 더 있으랴. 4월 초순의 밤공기는 싸늘했다. 벼논의 그루터기가 발길에 차이는 논바닥에서 노랫가락을 뽑아 올리며 몸을 흔들었다. 한쪽 편에 쪼그리고 앉아서 바라보노라니 그 풍경 또한 가관이다. 동희의 의연한 모습이 더 아리다. 동희를 위해 몸을 흔드는 송희와 선화의 웃음소리 뒤끝이 왠지 공허한 여운으로 남는다. 우리의 밤벚꽃 놀이는 이렇게도 비싸고도 아팠던 것이다. 그 후로 벚꽃만 피면 용연사 벚꽃길을 떠올린다. “그때 참말로 막막했었다.” 말을 받아치며 선화가 깔깔 웃는다. “지나고 나니, 그 만큼 기억에 남는 추억이 없더라구. 논바닥에서 얼마나 신발을 비볐던지, 집에 와서 보니 바지에 온통 흙먼지가 가득한 거야.” 동희는 그 사건 이후로 차를 몰고 모임에 오는 날이면 술은 아예 사절이다. 얼마나 놀랐는지 음주운전 소리만 들어도 고개를 휘휘 젓는다. 돌이켜 보니 그때가 참 좋았었다. 송희를 처음 만나던 날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아마 송희도 우리의 첫 만남을 특별한 추억으로 기억할 것이다. 쉽게 만난 친구는 우리 같은 추억이 없을게야, 큰 자랑거리도 아니면서 한번 씩 끄집어내어 기억을 닦는다. 척박한 땅에서 피어난 꽃일수록 강인하고 향기도 귀하다며 우리 사인방은 가끔씩 만나 깔깔거린다. 세상에 낯선 사람은 없다고 한다. 아직 알지 못한 친구가 있을 뿐이지. 이 모든 것은 고년, 일 년에 한번 씩 다녀가며 애간장 녹이는, 벚꽃 때문이었지. 애꿎은 누명을 씌워본다. 노정희 한국수필가협회 대구문인협회 대구작가회의 대구수필가협회 계간《문장》편집위원 수필집『빨간수필』 대구시 수성구 범물2동 서한화성타운 102동 1002호 010-9870-4117 -roh-@hanmail.net  
272 칡소/권홍열 file
편집자
2652 2013-03-31
13. 04월 35호 소설 칡 소 권 홍 열 바람은 샛강물이 흘러가는 좁은 물길을 따라 산기슭을 스치며 큰 강으로 떠나야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율동을 타지 못하는 바람은 고달프다. 어느 때는 느리고 여리게 춤추는 듯이또 어떤 때는 빠르고 강하게 고저장단을 맞추며 앞으로만 날아가는 것이 바람의 길이건만 어느 때부터인지는 몰라도 바람은 율동을 타지 못했다. 때로는 좀 더 강한 힘으로 한 떼의 온기를 담은 무리를 이끌고 줄달음쳐 달려가고 싶으나 앞길을 꽉 막은 철벽을 넘기에는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다. 태풍이라고 일컫는 강한 바람만이 그 철벽을 넘을 수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바람길 언저리에 옹송거리며 떨고 있는 풀꽃들이 추운 겨울도 아닌데 으스스 몸을 움츠리는 것은 우뚝 선 대단지 아파트의 콘크리트벽이 흐름에 혼돈을 주어 수천년을 거슬려 온 바람길에 자리잡은 황토색을 드러낸 개발단지 때문이었다. 개발이란 이름으로 인간들이 좀 더 안락을 누리기 위하여 환경이 파괴되어지는 것이 이제는 통상의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왠지 칙칙한 공기가 가슴을 누르는 느낌이다. 강을 사이두고 반대편에는 대조적으로 청보리 밭 둔덕비탈에 달맞이꽃이며 망초꽃이 별로 잘나지도 못한 얼굴을 서로 시샘하며 키 자랑이라도 하는 듯 삐쭉 자라 올랐다. 그 옆에 어딘지 모르게 서로 닮은 쑥부쟁이며 구철초가 작은 키를 뽑아올리려고 하늘을 향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옛적에 바람은 언덕에서부터 아래로 이어지는 갈참나무가 듬성한 활엽수림을 지나서 낙엽송이 미끈하게 자리한 우듬지부터 선택의 여지없이 큰 강으로 향했지만 반대편 산등성이가 깍이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부터는 그 방향이 껵이었다. 그 대신에 잘 개발된 대단지 아파트가 단장된 모습으로 도시의 모습을 대변했다. 그 때문인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밀려난 철 지난 바람이 심술을 부리곤 했다. 짧은 봄에서나 간간이 불던 북서풍의 방향이 우측으로 틀어진 것은 여름이라는 것, 계절은 봄인데 그렇게 철 이른 여름으로 치달아 더운 느낌이다. 날씨는 맑고 청명한데 공기가 혼탁한 것이 왠지 축쳐진 기분이다. 남자는 청보리 밭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구릿빛으로 탄 남자의 피부와 이마에 굵게 자리잡은 잔주름이 진 얼굴은 뚜렷한 윤곽을 이루어 젊었을 때는 상당한 미남형의 얼굴인듯 하다. 꽉 다문 입과 코로 이어지는 인중에 가느다란 선이 그어진 것으로 보아 고집스런 모습은 어쩔수 없다. 먹고 살기 어려울 적에는 청보리가 누렇게 익을 때를 기다린 배부른 공상도 했을 터, 쌀로 주식이 바뀐지 오래된 지금에 그런 상상은 아닐 것이고 남자의 눈길은 청보리 밭을 줄곧 응시하고 있었다. 남동풍을 탄 바람이 빠르게 스치듯 지나가자 하늘거리는 푸른 잎이 하얀 선을 타고 물 흐르듯 일렁이며 쓰러진다. ‘청보리의 물길, 그래, 저것이 물길인거야. 영원으로 가는 물길.....’ 남자의 마음 속에 청보리가 흘리는 바람결이 물길로 변해 역광이 가져다주는 신비로움으로 은은하게 초록으로 물든 청보리 밭에 녹아내렸다. 어디에도 붙잡아 둘 수 없는 바람이기에 잔물결을 이루는 청보리의 일렁거림을 보면서 남자는 호수에서 깨어지는 물결과 대조해본다. ‘저건 호수에서 일렁이는 푸른 이파리, 그래 그때 축제장에서도 이런 물결이었지......’ 바람결에 일렁이는 잔물결은 분명 넓은 못이나 호수에서만 볼 수 있을 터였지만 청보리 밭에서도 일고 있었다. 투명한 햇빛이 녹색과 만나 이루어지는 만남의 조화가 바람에 의하여 수만 가지로 변화를 부리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래 바람결을 따라 가야겠지, 길다면 긴 인생 후회없게 살았지. 떠난다는 건 다시 만나기 위함이지......’ 남들이 알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뇌이며 남자는 옛 기억을 더듬었다. 순간 기억 저편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청보리 밭을 일렁이는 은물결을 타고 넘어왔다. ‘지평선 청보리 축제’ ‘자연과 만남의 광장’라고 적힌 하늘에서 아래로 두가닥 길게 늘어뜨린 거대한 애드밸룬 아래에 사람들이 개미떼가 꼬리를 물고 이동하는듯 가물거렸다. 오후의 번득이는 역광이 스치는 곳에 수를 셀 수 없도록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청보리 축제장으로 완만한 곡선을 따라 길게 줄을 이었다. 축제장이 원래 사람들의 집합장소지만, 자연과 어울려 함께 하려고 하는 독특하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담긴 축제장은 더욱 많은 사람들의 집합장소였다. 멀리 삥 둘러쳐진 산과 잘 어울린 초록의 향연에 마음을 열어두고 사람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이름도 색다른 녹색 축제의 정경을 마음껏 눈에 담았다. 먼 곳으로 부터 불어온 어디에도 머물기를 거절하는 바람이 부드럽게 청보리를 흔들었다. 이제 갓 까칠한 수염을 얼굴에 뽑아올린 청보리의 머리가 전후 좌우로 일렁이며 반갑다는 인사를 건냈다. 푸른 대지를 쓰다듬은 녹색을 가득 담은 바람의 청량한 기운이 사람들을 누르고 넓게 퍼졌다. 어깨를 맞대고 걸어가는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 틈에서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남자의 손에 여자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가슴이 찡해옴을 느끼며 옆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이 맞닿을 때마다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느껴졌다. “참 사람도 많다. 저 사람들 중에는 우리와 같은 사람도 무수히 많겠지. 사랑이란 이름으로 목숨을 건 사람도 있을 거고, 거짓으로 참인양하면서 가면을 쓴 사랑도 있겠지. 어쨌든 사랑은 참 아름다운 거야.” “우리와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의 사랑인데요?.” “글쎄, 일테면 뜨거운 가슴으로 아껴주고 싶은 사랑, 불같은 열정을 태우고 싶은 사랑, 그 중간에 있는 어중간한 사랑.” “오라버닌 어떤 사랑의 사람인데요?.” 여자가 말을 끊고 옆 사람에게로 얼굴을 돌리자, 남자의 눈길과 부딪쳤다. “글쎄, 가슴으로 사랑을 여는 사람. 아니면, 갈망하는 눈으로 사랑하는 사람” “피, 미지근한 사랑의 여린 사람은 아니고요.” “미지근한 사랑은 뜨거워질 가능성이 있는 전단계 이기도 하고.” “여유가 있어 좋겠네요.” “여유라, 그 여유가 뜨거운 가슴으로 늘 곁에서 아끼고 돌봐주고 싶은 사랑이 아닐까. 호반우를 영원히 아껴주고 싶은 농부의 마음이랄까.” “호반우라뇨. 그런 사람이 있었나요.?. 호씨라?.” “그럼 칡소라고 해야할까.” “칡소, 칡소는 옛날 우리나라 토종 누렁소를 말하는 거예요.” “알긴 아네, 칡소를 호반우라고 부르기도 하지.” “......” 순간 여자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칡소는 누렁소라기 보다는 얼룩소라고 해야지, 옛날 우리의 토종소가 바로 칡소였어,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라고 우리가 아는 동화 속에 나오는 얼룩소가 칡소지. 문제는 이소가 우리나라에 100여마리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거야. 축산하는 사람들이 비육우로 하기에는 수지가 맞지 않아, 축산업이 생산성 위주로 바뀌면서 칡소를 비롯한 흑우 등 토종 가축이 멸종단계에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인거야.” “많이도 아네요. 동물 애호가 같이.” “청보리 밭, 아니 청보리 축제장에서 우리의 또 다른 만남이네, 소민의 모습이 더욱 아름다워, 이대로 옆에 두고 싶은데. 이런 걸 사랑이라고 하나봐. 사람들은 때때로 사랑하는 사람과 단 둘이 있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다지. 나 역시 그런가 봐.” “그 사랑이 어떤 건데요. 사랑에 목숨을 걸 자신 있나요.” “큐피트의 화살이 다른 곳으로 향하길 바랬지만 그러질 못한다면 그게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그런 건 현실에 비추면 꿈같은 애기지요.” “누군가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사람들은 꿈을 먹고 사는 동물이기에 가능하단 말이지. 박힌 화살을 뽑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데.....” “여자로 보지말고 동생으로 봐 주신다면.” “동생이라,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어야하는 것 같은데, 만날 때마다 선이 조금씩 짧아지기는 한데 머리가 따라가 줄지......” “역시 수학문제는 어렵지, 오라버니......” 남자는 여자를 따뜻한 품으로 세상을 감싸주고 싶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닌 것 같아 마치 어디선가 한번 만나고 또 다시 만나는 것처럼. 이런 것을 두고 인연이라 한다지.” “인연, 그래요 아무래도 그런가 봐요. 오빠.” “오빠라, 오라버니 보다는 듣기 좋은데. 앞으로 오빠라고 해.” “그래요, 난 오빠가 없어요.” “그래, 언제나 편한 오빠로 옆에 있어 줄꺼야.” “네.” ‘참 아름다운 사람이었지. 사랑은 아름다운 거야.’ 남자는 혼자 미소를 지었다. 햇살이 서쪽으로 떨어져 내리고 검은색 커튼이 주위를 둘러지자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 속으로 스며들었다. 노래방으로 통하는 입구가 어둠을 가득 물고 텅빈 공간 쪽으로 입을 벌렸다. 시간만 되면 팽팽한 기운이 흐른다. 이윽고 거미줄을 친 전선이 떨린다. 신경을 거미줄에 곤두세우니 꿍꿍거리는 소리가인가하면 꽁꽁대는 발소리도 들린다. 구석에 몸을 숨긴 거미의 신경이 긴장을 한다. 암거미의 안테나가 소리의 진동을 감지하고 신경을 곤두세운다. 자동차가 사람들 곁을 천천히 지나가는 동안 눈길은 자동차의 색깔을 감지한다. 검정색을 띤 자동차가 연기푸 지나갔다. 그 안에서 운전대를 잡은 사람을 어림잡아 본다. 목표물이 거미줄에 걸리길 바라지만 좀처럼 걸리지 않는다. 기다린지도 벌써 이테가 넘었다. 아름다운 날개짓을 하던 매미도 걸리고, 여린 날개를 가진 잠자리도 걸리고, 아무런 쓸모없는 독나방도 걸렸는데, 목표물은 걸릴듯 하면서도 비껴가기 일수였다. 어쩌면 목표물이 암거미의 천적일지도 모른다. 운전대를 잡은 남자의 눈길이 짙게 썬팅 된 창문을 통하여 거미집을 훑는다. 암거미가 어딘가에 있을거라고 느낀다. 이윽고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 울려나오는 음향을 듣는다. 그리고서는 좋아하는 노래를 연거푸 불려대면서 암거미의 구미가 당기도록 유도해본다.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암거미의 얼굴 표정이지만 가슴이 일렁거리는 것으로 보아 생각을 무너뜨린 것인지 약간의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다. 남자는 여자를 그곳에서 만났다. 처음 만난 여자는 얼룩말 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검은색 가로 무늬가 빙 둘러 처진 가슴에서 아래로 흐르는 곡선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때때로 연한 갈색 무늬가 있는 옷을 번갈아 즐겨 입었던 여인은 얼굴 또한 예뻐 남자는 한 눈에 여자에 빠져들었다. 얼룩말 무늬를 띤 옷을 입은 여자는 호반우같았다. 여자의 예쁜 얼굴과 어깨까지 치렁거리는 웨이브진 머리카락이 어디에도 걱정거리 같은 건 없어 보였지만 사실상은 그렇지 않음을 남자는 느꼈다. 남자만이 느낄 수 있었던 여자의 가느다란 숨소리는 여자가 혼자일거라는 것을 감 잡고부터는 연민의 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 정이란 것이 귓바퀴만 맴도는 작은 사랑이기도 하고 심장을 고동치게 하고 크게 진동하는 헐떡거림을 연속하는 피장이 긴 열정이기도 했다. 남자는 여자의 가슴을 만지고 싶었다. 사랑이란 것을 전제로 남들이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의 마음이 ‘에이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능동적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을 터였지만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판단이 서지않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여자는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았다. 마치 고고한 두루미인양 눈길을 아무에게나 던지지 않았다. “이름이나 알고 지냅시다. 속이지 말고.” “소민이라고 불러주세요” 거미집을 찾아가기를 여러 번 만에 남자는 여자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여자가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다린지 오랜만에 얻은 기회였는데 왠지 차가운 얼굴이라 더 이상은 묻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계절 따라 들러오는 소리에 귀를 닫고 살아온 듯 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훒는 소리나 소나기 내리기전에 일어나는 천둥소리마저도 듣지 못한 심한 귀머거리처럼 보였다. 여자는 나들목을 돌아나가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혼자라는 외로움을 다른 방법으로 달래고도 싶기는 해도 하늘과 땅을 이어 붙이지지 못한 듯 했다. 남자는 사랑의 가시거리내에 하나의 빈자리를 두기로 하고 여자를 잊었다. 그리고는 그 자리를 만들지 않으려고 먼 길을 돌아갔다.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감정을 억지로 접으려고 하니 삶의 비늘이 떨어져나가는 듯 했다. 그리고 다시 그 여자를 우연히 몇 번 먼발치 길거리에서 조우했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강한 꽃송이가 피어오름을 느꼈다. ‘그래 이건 우연이 아니고 하나의 인연인 거야. 어쩌면 필연인지 모르고’라고 몇 번의 우연한 만남으로 필연이란 단어를 연거푸 뇌이며 남자의 마음은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거미줄에 걸린듯 자기도 모르게 거미집으로 발길을 돌리곤했다. 먼 기억의 저편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바람소리를 되새기며 남자의 눈은 길게 이어진 선을 쫓으며 빛이 부서지는 바람의 소리를 들으려고 벌써 몇 시간째 청보리밭을 보고 있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아니 혼자만이 알고 있었던 사연이 남자의 지워진 기억의 잔영을 걷어들었다. 그때 온 몸에 칡덩굴 같은 어릉어릉한 얼룩무늬를 띤 소 한마리가 잔영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 놈은 호랑이 무늬를 닮았다고 하여 호반우라고도 부르는 칡소였다. 칡소를 스쳐간 가장자리 길 언덕에는 길다랗게 이어진 금계국의 노오란 물결이 바람에 쓰러지고 있었다. 칡소는 남자가 아낀 얼룩두렁이 암소였다. 무슨 까닭인지 남자는 칡소만을 고집했다. 남자의 부인보다도 칡소를 더 아낀다고 부인이 흘리는 넋두리가 가끔 부부싸움으로 번져도 얼룩두릉이는 농기계가 농사일을 대신하고도 휠씬 오래도록 가족으로 있었다. 농사에 필요 없는 소를 팔지 않고 키운다는 무수한 핀잔에도 남자의 얼룩두릉이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었다. 십수년을 함께한 얼룩두릉이가 죽고 청보리 밭머리에 묻던 날 남자는 많이 울었다. 그 이후부터 남자에게 심적 변화가 오기시작했는지 마음이 울적한 날이나 혼자 있고 싶은 시간이면 남자는 늘 청보리 밭을 찾아가기도 하고 잘 보이는 먼 곳에서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이 손으로, 지금까지 잘 살았지, 재물을 지킬 생명선이라.....’ 남자는 손바닥을 펴고 더덕하게 굳은살로 덮흰 손바닥에 굵은 재물선과 가늘게 이어진 생명선을 바라보았다. ‘거참. 이 생명선이 끝나는 지점에 내가 서 있는 것인가.’ 남자는 삶이 고달프다고 느낄 때 손바닥을 보곤했다. 손금을 잘 본다는 점장이가 ‘재물복은 있다마는 재물을 지킬 생명선이 따라주지 않네......’라고 하는 말을 우습게 생각했는데 그 말이 맞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혼자 빙그레 웃었다. 남자는 절룩거리는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나이가 들고는 그 왕성하던 신체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음을 노인들이 다 겪는 통례로 느꼈는데, 퇴행성관절염의 말기적 증세로 다리를 영 못쓰게 된다는 의사의 말에 삶의 의욕을 잠시 상실하기도 했다. 농사를 짓는 농사꾼에게는 건강한 신체가 요구되는데 남자의 다리는 농사꾼이 가지고자하는 욕망감의 충족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언제부터인가 다리에 이상이 있고 자식들이 농사를 그만두고 편히 여생을 보내라는 말을 건성으로 여기고 기력이 있는 한 농사일을 할 것이라 했는데 그 생각을 접기로 한 것이 불과 달포 전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제법 딴딴한 종아리었건만 삭정이마냥 가늘어진 것이 영 볼품이 없었다. 그래도 그 종아리로 무거운 등짐을 지고 논밭을 열심히 가꾸어 농촌살림으로는 제법 탄탄한 부자였었다. 젊은 시절에는 마을의 같은 또래들이 도시로 나가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때는 마음의 변화가 있긴해어도 시골에서 부모 모시고 농사를 짓는 것을 보람으로 느꼈다. 농사를 버리려고 하니 낯선 풍경 속에 서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장승처럼 서 있는 자신의 존재가치가 느껴지지 않았다. 젊었을 때는 자존심 하나로 자신의 가치를 세우고 그것 때문에 뭇 여인들이 좋아 했고, 그 중에 한 여인을 오래도록 가슴에 두고 무척 사랑하기도 했다. “올해도 또 농사를 짓는구먼. 안 짓는다고 하고서는.” 지나가던 정노인이 남자의 뒤통수를 보면서 말을 던졌다. “누구여 돌반이 아니여. 땅 파먹고 사는 넘이라 그게 어디 잘 되는감, 아무래도 다리 때문에도 접어야 겠구먼.” 남자가 바짝 마른 등짝을 돌리면서 뒤돌아 보면서 응답했다. 돌반이라 불리는 연배의 남자가 삽을 들고 가던 삽자루를 바닥에 놓으며 옆에 앉으며 돌아선 남자의 눈과 마주쳤다. 바람이 살랑거리고 연한 구름이 산 쪽으로 밀려났다. 비개인 탓인지 선명하게 성큼 다가선 푸른 산, 그 무성한 신록의 갈피에서 진한 꽃 향기와 풀냄새가 묻어났다. 그 때 어디선가 뻐꾸기 울음 소리가 들렸다. “저놈의 뻐꾸기, 또 울어대는구먼, 저 소리 들으면 속이 터지단 말이야. 지 둥지도 아니면서 둥지 비우라고 또 소리치는 것이 영 거슬려, 지놈의 새끼가 숲 어딘가에 있겠지. 참 뻐꾸기는 묘한 동물이야 남의 둥지에 알을 낳고 속으로 애태우고 키우기는 다른 새가 키우고.” “다 살아가는 방편인거야. 우리가 사는 세상사도 마찬가질세, 세상에는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고, 젊을 때는 괜쟎은데 늙어서 불행한 사람도 있고......” “세상은 뻐꾸기 같은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환경이야. 양심껏 사는 사람은 어쩌면 저들의 희생물이고.” “근데, 축 늘어진게 어째 영 생기가 없어 보이는구먼, 아들 놈 때문인겨. 내가 뭐랬나, 죽을 때까지 농토를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했제이." “그것 때메 그런게 아니랑게.” “아니면, 왜 죽을 상인겨.” “할망구가 밉어, 집에 들어가기 싫고, 아들 놈도 그렇고.” “아들 놈은 그렇다 치고 할망구가 왜 미운겨. 늙으면 할망구가 최고라던데.” “나이는 먹어 기력은 점점 약해지고 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 “늙어서 기력으로 살려고 했남, 그럭저럭 사는 거지. 살고 싶지 않다니 또 그 소린 겨, 그랑게 내가 뭐랬나. 있을 때 돈 좀 쓰라고 했제 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니라고. 자식에게 물려 줘 봤자. 우리 아버지 고맙소 하지 않는다고 입이 닳도록 했제이, 어이구 불쌍한 영감탱이. 내가 내 아들 한데 당한 것처럼 자네도 당했구먼. 쯧 쯧 쯧...., 아들이 재산을 받은 처음에는 잘했지, 해가 지날수록 바쁘다는 핑게로 섬기는 태도가 달라 지지, 그게 요즘 자식들의 속성이야 이 사람아.” “그라게, 돌반이 말이 맞는가 보이. 근데 부모의 마음은 그게 아니쟎는가. 다 지놈들 잘 되기를 비는 것이 부모의 마음 아닌감. 우리 노인네는 가시고기신세일 그려.” “새끼 다 키우고 죽으면 그 살을 먹이로 먹고 사는 그 고기 말인겨, 이제는 아니여. 세월이 바뀌었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우리 때 하고는 완전히 달라졌네. 물려준 재산 지키고 다시 자식에서 물려주었던 우리 때하고는 생각하는 자체가 다르단 말일세. 토바우골 박영감도 전 재산 자식한데 증여해 줬더니만, 사업하는 아들이 부도나 재산 다말아 먹었다고, 남은 건 집 밖에 없다고 속병이나서 다 죽어간다고 하던데 자네도 그 꼴인감?.” “아니, 박영감 아들이 처음부터 사업하다가 부도나서 그런게 아니고?. 땅 팔아 사업 확장하다가 망했다는 소문이던데. 박영감도 집마저 날아가면 가시고길셀 그려.” “그렇게 되었남. 그랑게 땅은 죽을 때까지 지켜야 했제이. 우리 노인네는 너나없이 전부 다 그렇다니깐.” “내가 죽어야겠지. 이 손으로 일구고 지킨 땅인데, 농사를 천직으로 여기고 살았제이, 청보리밭, 혹여 내가 죽으면 저 청보리밭 얼룩두릉이 옆에 묻어달란다고 전해주게나.” “이 사람은 그게 무슨 소린겨, 죽다니 왜, 이 좋은 세상에 왜?. 선산 놔두고 청보리 밭은 또 왜?.” “언젠가는 죽을 게 아닌감. 자넨 안 죽고 백년까지 살겨. “그래, 백년해로는 옛말인겨.” “......” 남자의 손등 위로 굵은 눈물 방울이 떨어졌다. 그때 청보리 밭을 스친 풀 향기를 담은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하긴” “청보리 밭, 저 청보리밭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어. 저 곳에 영원히 묻히고 싶다네.” “우째 청보리하고 무슨 사연이라고 있는감?. 젊을 때 청보리 밭에 첫사랑을 묻기라도 했는감. 우리 땐 청보리하곤 누구나 사연이 많지만서도.” “그런 일이 좀 있긴 하지. 돌반이 자네도 청보리하면 생소한 기억이 아닐텐데.” “그렇지. 청보리가 아니고 보리밭에서 그런 일이 있긴 하지.” “허허허, 허허허” 인생의 황혼으로 접어든 두 늙은이의 마음은 아련히 떠오르는 지난 날의 기억으로 빠져들었다. 같은 기억을 더듬던 돌반이 노인이 청보리 밭의 추억을 떠올리고 떠나가자 남자의 얼굴에 검은 기운이 돌기시작했다. 바람에 쓸리다 다시 일어서기를 헤아릴 수 없이 반복하는 청보리 잎이 내는 소리가 스스스 하고 들렸다. 푸르른 잎사귀가 쓰러지면서 흘리는 선은 부드러운 여인의 곡선이다. 남자의 영혼이 그 소리의 곡선을 따라 나풀대드니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정성을 다하던 마음에 균열이 생기면 사람은 누구나 우울증에 시달린다. 이 우울증의 단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게 극단적인 행동으로 이어는 것이다. ‘삶이란 아름답고 귀중한 것인데, 더 살아야할까? 절박한 현실을 이기는 것이 악착같이 산다는 것인데, 아니야. 그래, 이제 갈 때가 되었지. 미련 없이 저 청보리 밭 호반우 곁으로 떠나야지. 눈을 감는다는 건 기울어져가는 빛을 거두는 것이라고 했지, 그래, 이제 떠날 때가 다 되었지.....’ 남자가 마음을 굳힌 듯 촛점 잃은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다. 이윽고 먼 산을 응시하던 남자는 준비해 온 소주에 무엇인가를 타고 마셨다. 핏줄기를 타고 온 몸을 돌기도 전에 갈증이 찾아왔다.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바람이 흔들렸다. 시간의 흐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우주가 정지된 듯한 어두운 그림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남자의 입에서 물을 찾는 소리가 연이어 터지고 어깨가 먼저 닿은 몸으로 바닥을 딩굴기 시작했다. 남자의 기억속에서 어지럽게 돌아가는 인생의 필름이 파노라마로 이어졌다. 어디에서는 잘리고 어디에서는 잠시 스치고 또 어디에서는 오래 머물고 그러다가 또 이어지기를 계속했다. 흩어지는 시간을 잡으려는 기억이 모였다가 사라졌다. 호반우를 부르는 남자의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남자의 눈동자가 소리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따라 움직이다가 제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그 때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칡소가 다가오는 발꿉소리가 남자를 찾아오는 발자국 소리가 되어 둥둥둥 북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끝.  
271 야근 외1편/박관서 file
편집자
2838 2013-02-28
13.03월.34호 시  야근 잘 모를 것이여 물안개로 부서져내리는 형광불빛을이불 삼아살진어둠을 담요삼아각진철제 의자에몸을담가반쯤 잠들고반쯤잠들지못한 몸뚱이로꽃배를타고둥 둥떠다니는이맛,모를 것이여책상에부린팔뚝 깊이잠든얼굴로 침 흥건히고이기도하여 부끄럽기도하지만참 어쩔것이여별할애비 가온다해도쏟아지 는달디단이잠을! 눈비비며긴 밤을 미 루 나 무 처 럼 홀로견디는것은 이런재미때문인것을어쩔것이여 빨간 면장갑 빨간 면장갑을 낀다.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빨간 면장갑을 끼면 편안해진다. 기름때도 선뜩선뜩한 서릿발도 함부로 범치 못하는 빨간 면장갑을 끼면 그가 생각난다. 더벅머리 서툰 조차원 시절 본무조차였던 그를 생각하면 뜨거워진다. 바람먼지 이는 역구내 자갈밭을 어린 짐승처럼 뛰다 뒹굴다 눈에 박힌 쇳가루를, 가만히 있으라며 치뜬 눈동자에 따순 입김을 불어넣으며 침바른 이쑤시개로 발라내는 그의 손길을 따라, 떨리는 마음 차오르는 땀에 움찔거리던 빨간 면장갑이어. 그대, 기차에 받혀 꺾인 허리 접힌 몸을 품에 안은 검은 하늘 아래 은사시나무처럼 흔들리는 가지 끝에 핀 붉은 장갑이어. 울면서 똥창까지 깊이 손가락을 껴본 이는 안다. 꽃잎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어둠에 뿌리를 내린 야간열차의 기적이 온몸을 감싸면 우리는 안온해졌던가. 그랬던가. 빨간 면장갑을 끼고 선로변에 나서면 금세 하늘 아래 무서운 게 없어지는 그대와 나는 천상 철도원인거다. 박관서/ 조선대대학원 국어교육과 졸, 1996년 계간『삶, 사회 그리고 문학』신인추천, 1997년 제7회 윤상원문학상 수상. 시집『철도원 일기』간행. 호남선 무안역 근무중. 현재 광주전남작가회의 부회장. 리얼리스트100 회원.  
270 아버지 외1편/김숙자 file
편집자
2767 2013-02-28
13.03월.34호 시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네요. 저희들을 버리고 저 멀리 떠났습니다. 힘든 농사일 버리고 편안한 저 세상이 좋았습니까. 아버지 손길이 미친 곶감은 엄동설한(嚴冬雪寒) 추위를 견디고 고운 속살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하시던 삽, 손에 들고 딸이 시(詩) 낭송하는 모습을 못 보실까봐 흙 묻은 신발, 그대로 오셨었지요. 아버지, 곱게 한복 입고 시 낭송하는 딸 자식 모습을 지금도 멀리서 보고 계시겠지요. 거북이 등처럼 거친 핏빛 손으로 터줏 대감으로 자리 지키시면서 농사지어 베푸셨지요. 칠백리 유유히 흐르는 퇴강의 꽃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앨범 모나리자 같은 미소 지으시며 앨범 속에서 누렇게 색바랜 채 딸의 졸업식 날 꽃다발 안겨주고 함께 사진 찍으신 빨간 넥타이 까만 양복 입고 흐트러지지 않은 핸섬한 모습으로 24년 동안 학사모 쓴 딸의 곁을 떠나지 않으신 딸의 성적표 보고도 마음으로 훈도 하셨던 아버지 아호:명헌(茗軒) 김숙자 드라마를 사랑하는모임 (작가) 3기수료 샘터인간승리상 수상 여성동아 체험수기공모 수상 전국독도사랑작품공모대회 안용복 장군상 수상 문학세계 시 등단 문학세계 신인문학상수상 나래시조 신인문학상수상 이육사 시낭송경연대회 수상 세계문학문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상주문인협회 회원 상주아동문학회 회원 경북 향토문화연구사 회원 정기룡장군 추진사업회 회원 함창초등학교 논술강사 역임 저서:날고싶은 제비(장편소설) 공저:아름다운사람들(1,2,3,4,5,6,7,8,9,10집) 내마음은 독도, 푸른잔디, 경북의 얼굴 시조시인 100인선집외 다수 상주문화관광해설사 회장역임 다사랑복지센터 논술강사 역임 문경글사냥문학회 부회장 국학연구회 이사  
269 갑골문자 외1편/정훈교 file
편집자
2651 2013-02-28
13.03월.34호 시  갑골문자 주인장은 뿌연 안개라고 했지만 철가방 이음새마다 얼룩진 손금이 앉아있는 줄은 몰랐어 잘 우러난 노을이 철가방의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토바이가 땀으로 범벅이 된 눈을 비비자 철가방, 허공을 날지 뭐야 이 빠진 그릇은 한동안 공중그네 타고 허공에 머물렀지 깨진 무릎과 등에선 금세 능소화가 피었지 흡반(吸盤)이라 부르는 뿌리는 사내의 몸을 타고 곧장 주인장한테 달라붙었지 주인장은 정신과의사고 배가 볼록하여 복어같이 생겼고 낚싯바늘에도 잘 매달렸지, 주사기는 매번 팔뚝을 찌르고 무슨 박사라고 했는데 꼭 돌팔이 같아 가끔 정신도 깜빡이는, 수술실, 붉은 조명이 켜지자 그는 푸른 전투복을 입고 사라졌지 촘촘히 바느질된 깨진 등, 한 번도 기록되지 못한 운명선은 차라리 깊게 패인 운명이라고 해두지 칠일 째인가 추위에 견디지 못한 덩굴나무는 주황색꽃이 피었고 영양실조였는지 기억상실증이었는지 몰라도, 새벽 별을 보며, 와디럼 낙타처럼 마침내 하얀 병동 붉은 꽃으로 지고 말았지 한 번도 기록되지 못한 꿈을 적어보겠다고 그 난리를 치더니 몽유병환자처럼 중얼거리더니 벽화에 세 들어 사는 남자 방천시장, 김광석 벽화거리 사람들이 흘리고 간 지문을 지우며 비가 온다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무료하다 골목 한 쪽에 쪽방 사내가 있다 벽화에 얹혀 산 지 두 달 남짓 한 달에 세 번씩 맡기던 와이셔츠도 세탁소비닐을 덮어쓴 채 봉인되었고 수염은 텁수룩한 시간만큼 자랐다 그새 제법 골방 같다 방천 둑길을 따라 개나리가 휘어지면 사내도 제법 휘어진 사연을 둘둘 말아 투고하거나 이 거리를 벗어날 것이다 골목은 사내가 빠져나간 것과 상관없이 낡아갈 것이고 점점 무덤의 둥근 곡선을 닮아갈 것이다 서른 즈음의 휴식도 잠깐 동안의 불륜이거나 짧은 사랑으로 끝나는 것이다 어쩌면 사내는 詩를 낳기도 전에 꼬리 없는 온음표로 태어나고 어느 새벽, 내리는 비처럼 많이 가벼워진 것들이 종국엔 떠나거나 무너질 것이다 ◎ 정훈교 : 2010년 계간 『사람의 문학』등단, 젊은시인들 동인 010-6560-4530, poetry2000@daum.net 대구광역시 북구 대현2동 502-3번지 청우빌딩 3층  
268 장다리꽃 외1편/김연자 file
편집자
3408 2013-02-28
13.03월.34호 시  장다리꽃 김연자 병든 어머니가 밭도랑에 앉아 쑥을 캔다 딱정벌레처럼 엎드려 느리게 느리게 시간 속 헤집으며 봄날을 캔다 요런 것이라동 한 개썩 캠시롱 아픈 몸땡이 다 이저분께 조아야! 에릴 때 너물 캐던 칭구덜 생각도 험서 씰데없이 묵혔던 원망도 실그시 없어진당께! 남은 날들 또 어처께 살어야 쓰까 조곤조곤 생각해 봐야제 쌕쌕대는 어머니 숨소리가 잔기침 물고 도란거리는 사설들 먼 산 보듯 듣다가 그만, 서녘하늘 툭 건드리고 말아 왁자그르르 붉은 노을 엎질러진다 살아온 날들 통점마다 혼잣말로 꾹꾹 짚어가는 알뜰한 그 매엥~세~에 보~옴날~은 가~아안다 유행가 한 소절마저 숨 가쁘게 넘기는 홑겹운동복 속 앙상한 어머니 휜 등뼈 너머로 장다리꽃 봄날 하얗게 지고 있다 아직 500m 더 뿔이 주체할 수 없이 자라 가려워질 때면 사슴들은 이마를 맞대고 새끼사슴 떠나보낸 수탄장 앞에서 서로의 뿔을 긁어준다 늙은 사슴 한 마리가 웅크려 앉은 봄 나절 녹동항 뭍을 보고 몸을 떤다 나무 등걸 같은 몸으로는 서로 손잡고 갈 수 없는 길 동백꽃 뚝뚝 모가지 잘려나가는 천형의 칼날 앞에서도 먼먼 뭍으로만 뻗고 있는 가슴은 만조가 되면 긴 그림자 푸른 바다에 내리며 자란다 가끔은 뭍이 아닌 하늘로 돌아가는 사슴도 있어서 그는 바닷가 화장장에서 가장 먼저 가려운 뿔을 태우고 몇 개 남지 않은 손가락과 발가락이 없는 발굽을 태우고 움켜 쥔 성경과 염주와 묵주를 놓는다 소록도에는 가슴이 젖은 사슴들만 산다 갯바람에 시커멓게 멍든 가슴과 말미잘처럼 꼬물거리는 비애를 바닷가에 말리느라 바람 부는 날은 섬이 간간히 소란하다 * 약력 1962년 전남 장성 출생 1998년 계간 시대문학 등단 현재, 글쓰기논술 강사 시집으로 "막막한 어둠을 버티는 일" "흑백영화 이야기" *주소 경기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양지마을아파트 104동 402호 * 메일:kyj-si@hanmail.net  
267 바닷가에서 외1편/ 임영석 file
편집자
2469 2013-02-01
13.2월 33호 시  바닷가에서 임영석 이 세상 슬픔이란 슬픔, 기쁨이란 기쁨 바다에 가득 채워 놓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허공이 더 높고 넓구나. 철썩철썩 제 가슴 물어뜯는 것이라 생각했던 파도 갈매기의 발목을 제 가슴에 묶어 두려고 허공을 잡아당기는 힘인 줄은 몰랐다. 무엇이 가득하다고 바다가 되는 것은 아니구나, 가득함을 품어주는 허공이 바다였구나. 희망록(希望錄) 달팽이는 더듬이로 어둠을 더듬으며 별빛까지 가겠다는 제 몸을 잠시 쉬며 만삭의 부처바위를 물꾸럼이 바라본다 천 년 전 입덧하여 배만 부른 부처바위 한 걸음도 꿈쩍 않고 서 있는 모습에서 기어서 가는 달팽이 더 느리게 기어간다 토끼가 껑충껑충 얼마나 살았는가 사람이 성큼성큼 몇 년을 살았는가 기거나 걸어서 가나 한 세상은 똑 같다 임영석_ 1961년 충남 금산 출생, 1985년 『현대시조』 천료, 시집으로 『이중 창문을 굳게 닫고』 ,『사랑 옆서』 ,『나는 빈 항아리를 보면 소금을 담아 놓고 싶다』 ,『어둠을 묶어야 별이 뜬다』 ,『배경』 ,『고래 발자국』_(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지원 발간 시집) ,『초승달을 보며』_(2012년 강원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지원 발간 시조집) 있고, 계간 스토리문학 부주간, 2011년 제1회 시조세계문학상 수상, (주) 만도 근무  
266 사과꽃향기 날릴 때 외1편/권순자 file
편집자
2942 2013-02-01
13.2월 33호 시  사과꽃향기 날릴 때 권순자 무르익은 봄빛이 왔네 봄빛 따라 고양이 만나러 갔네 누가 버린 건지 잃은 건지 보호센터에서 마주한 고양이 겁이 묻어있었네 야생은 오래 전에 탈색되었나 쭈뼛쭈뼛 새 주인을 따라 사과꽃향기 가로질러 작은 집에 왔네 겁이 나서 우는 것도 잊어버렸나 사랑을 잃어버려서 자꾸 쭈뼛거리나 수척한 몸에서 털이 자주 빠지네 사과꽃향기 진해지면 고양이 눈망울 붉어질까 잃어버린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길 떠나버린 꽃잎들 허공에서 뱅뱅 돌다 다시 올까 봄은 아린 고양이 눈에 머물다가 꽃무늬 치마폭에 사과꽃씨 심는지 젖은 바람과 펄럭이네 바람의 혀 불안한 소리들이 달려온다 나무들의 몸부림이 소란하다 흔들리며 휘어지는 것들의 아우성 무성한 잎들이 후드득 바람의 혀는 날카롭고 빠르다 바람의 거친 발소리에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는 가여운 몸들 쓰라린 후회는 아픈 유산이다 가슴에 박힌 가시 하얗게 말라가는 잔가지들 흩어져 날리는 이파리들의 신음 키워준 것들을 하나씩 잃어가는 건 가슴에 허공을 하나씩 키워가는 일 그러나 나무의 어깨는 단단하다 흔들리더라도 쓰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바람의 혀가 나른한 유혹을 뿌린다 해도 말발굽처럼 굽이치며 후려친다 해도 진실은 어둠에 매몰되지 않는 힘을 지녔으므로 매서운 갈퀴에 아물지 못하는 상처는 정신을 깨우는 쓰리고 쓰린 약이므로. 경북 경주 출생. 2003년 《심상》신인상. 시집『우목횟집』『검은 늪』『낭만적인 악수』『Mother's Dawn』등이 있음. 시인통신 동인. 주소: 158-837 서울시 양천구 신월2동 475 서울가든아파트 101동 803호 이메일: skjm70@empas.com  
265 가을, 꽃잎 그리고 허기 외1편/진란 file
편집자
2629 2013-02-01
13.2월 33호 시  가을, 꽃잎 그리고 허기 진 란 이별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에는 이미 그대의 등이 차가워지는 쯤이다 이별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혼자가 아니다 등을 밀어 보내고, 그 그림자까지 다 밀어 보내고 둘이 함께 숨쉬던 자리 둘이 함께 피었던 자리 둘이 함께 뜨겁던 자리 그 꽃자리에 바람만 오갈 때 비로소 홀로 서는 것이다 비로소 외로운 것이다 비로소 완전한 이별이 끝난 것이다 그리고 꽃잎이 피었던 자리 그 꽃잎이 진 자리 들여다보면서 환하게 피었던 순간의, 날숨과 들숨에 대하여 하늘로 돌아간, 이후의 깊어짐에 대하여 고요히 땅으로, 깊이 뿌리를 묻는 중이다 배가 고프다 아직은 습작 중인 번지점프를 하다-이은주* 아리안의 한 왕족 그녀의 눈동자는 푸르게 젖어 있었네 눈부신 꽃송이의 배경 그 꽃 안으로 남모르는 슬픔이 일곤 했었지 눈을 뜰 수 없는 영혼의 윤슬, 그 깊이에 누구도 들여다 볼 수 없었던 그 터널에, 눅눅하고 무겁고 지친 그림자를 부려놓고 어느 날 아슬한 허공에 올라 스물 다섯의 얽혔던 옷을 벗어버렸네 영혼을 자아서 그네를 걸었네 황량한 크레바스에 마지막 꽃물을 찍어 우울한 자음 모음을 남겨놓고 그 여자 한 줄의 그네를 탔네 아무도 알지 못하리 탯줄에 매달려 비상하는 나비의 꿈에 대하여 그 여자 다시는 길 위에 서지 않았네 (그녀의 우울은 또한 나의 우울이다 그녀를 따라간 우울은 돌아오지 말아라) *이은주: 배우 '오! 수정'(2000), '번지점프를 하다'(2000) 등 다수의 작품이 있음 2005년 2월 22일 돌연사 함 진 란 전북 전주 출생 2002년 계간《주변인과 詩》 편집동인으로 작품 활동, 편집위원 편집장 역임 2009년 월간《우리詩》편집교정위원 2012년 계간《시와소금》기획위원 시집 『혼자 노는 숲』 이메일 ranigy21@hanmail.net  
264 그래도 빨래는 말라야 한다 외1편/정선호 file
편집자
2577 2013-02-01
13.2월 33호 시  그래도 빨래는 말라야 한다 필리핀의 우기(雨期)는 수많은 태풍을 만들어 북녘으로 올려 보내고 비를 연신 만들어냈다 휴일에도 비 내리지만 여자들은 빨래를 했다 많은 여자들이 세탁기도 없이 흐르는 강물이나 수돗물로 빨래를 했다 우기에 사람들은 늘 가난에 젖어있었고 여자들은 마르지 않을 빨래를 널었다 빨래는 줄에 매달려 햇볕을 기다렸지만 해는 나오지 않고 젖어만 갔다 사람과 모든 것들 구름 안에 똬리를 틀었다 구름의 벌레들은 빨래 속에서 번식되었고 무직의 남자들은 길가에 퍼질러 앉았다 구름만 마르지 않을 물감을 뿌리며 비를 주제로 한 노래를 되뇌었다 그렇게 하루도 쉬지 않고 비가 내렸으며 빨래에 대한 걱정은 원시부터 사라졌다 우기엔 체념처럼 빨래는 늘 젖어있어야 했다 누가 빨래는 말라야 한대도 상관 안했다 성탄절, 적도에 눈 내리면 지구 생성 후 처음으로 적도지방에 눈이 왔다 망고나무와 야자수 나무에도 꽃들 위에도 겨울에 벼가 자라는 논에도 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갑작스런 눈에 어쩔 줄 몰라 했으며 간밤에 내린 눈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거리엔 시체가 온 곳곳에 쌓여 난리다 완전한 생지옥이다 크리스마스고 뭐고 다 끝장 이었다 겨울에도 벼와 많은 과일이 자라났으나 한 번의 눈으로 식량들이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집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거리에는 아무도 나가지 않았다 몇 명의 아이들만이 옷을 두껍게 입고 눈이 신기한 듯 뭉쳐보고 눈싸움도 했다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에 특별히 시험에 들게 한 하나님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거리에 걸어 두었던 장식을 떼어내고 다시는 눈 오는 성탄절을 원하지 않았다 성탄절 후 다시 눈은 내리지 않았으며 얼마 후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연인과 해변을 걸었다 충남 서천 출생, 2001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03년『시와상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내 몸속의 지구』가 있다  
263 흰 고무신 외1편/임연규 file
편집자
2771 2013-02-01
13.2월 33호 시  흰 고무신 임 연 규 거사님 술추렴 한번 하러 갈라요? 스님을 따라 희미한 산 길을 한나절 고개를 넘어 가니 산 아래 마을에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내려가 연기가 나는 집에 이르러 스님께서는 잠시 나를 울타리 밖에서 기다리라 하시는 겁니다. 스님은 웅성대는 몇 안되는 마을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더니 방에 들어서고 시달ㄹ림 염불 하시는 겁니다 그러던 차 사립문 박에 사자 밥상이 차려지고 아주 낡았지만 눈부시게 흰 려자 고무신이 놓여졌습니다. 임자를 잃은 고무신은 가을 볕에 윤기를 받아 유난히 하얗습니다. 고무신은 사람을 神처럼 모시고 다니다 마침내 신이 되어 떠난 주인을 따라 대문 밖이 저승길인 사자밥상 아래 다소곳이 주인을 쫓아 나설 채비를 하고 있는 듯 합니다. 마을 아낙이 망연히 담장 밖을 서성이는 저를 불러 차려 내오는 술상을 받고 보니술추렴은 제대로 온 듯 합니다. 스님의 염불은 더욱 산마을에 낭랑하고 내 술잔은 한나절을 비우며 산그늘도 들어와 앉습니다 해가 설핏해서 그 상가 집을 나섰는데 돌아오는 산길에 시월 보름달이 참으로 속절 없습니다. 처사님 이 산길은 이제 임자가 없어 졌습니다. 홀로되신 어머니께서 초하루 보름이면 이 산길을 넘어와 부처님 뵈러 왔다고 삼십년을 넘게 홀로 다니시던 산길입니다. 나는 어머니께 고무신이 닳으면 다시 흰 고무신을 사 준 것 뿐이지라. 맑은 나무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도 마냥 不姙의 날은 아니어서 대웅전 처마의 고드름 겨울 끝 기다림을 송곳처럼 키우고 한나절 따스한 햇살에 스르르 그리움을 풀고 장열하게 生을 놓으며 우주의 심장으로 五體投止 하는 맑은 나무 -------- 임 연 규 : 충북 괴산 출생 * 시와 산문 조병화 .박희진 추천으로 등단 * 충주 문협 . 한국 현대 시인협회. 불교문인 협회.사람과 시 동인 현 중원문학 회장 * 시집 1) 제비는 산으로 깃들지 않는다 2) 꽃을 보고 가시게 3) 산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262 시를 돌에 쓰면 외1편/서병진 file
편집자
2524 2013-02-01
13.2월 33호 시  시를 돌에 쓰면 가산(嘉山)/서 병 진 하늘까지 땅속까지 숨을 쉬는 것이라면 숨을 다 쉬는가 시를 돌에 쓰면 내 마음 스며들어 나를 부른다 내 마음 가득 실어 신나게 노래 부르면 사랑의 이야기를 나눈다 시를 돌에 쓰면 돌이 숨을 쉰다 시를 돌에 쓰면 하늘에서 별이 내린다. 보고픈 그 사람 요동치는 마음 그 사람보고 싶어 나뭇가지 매달려 놓고 흔들흔들 발자국 찧는다 자동차 그림자 빈자리에 싸늘한 흔적이 감돌아 와짝 법석거리든 소리도 고요해 잔잔한 물결처럼 일고 있다 건물 벽 하얀 종이에 이렇다 저렇다 임대란 글자로 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어 허줄한 마음 쪼임을 주었다 수도권 떠돌이 장터 새 장터 또 새 장터로 지갑 채우는 그 사람 인의 장벽 천기 누설하는지 · 교육부 교육전문직 공채시험합격(전) · 인문계고등학교장(전) · 타고난적성찾기국민실천본부위원장(현) · 국제펜회원(현) · 한국문인협회남북문학교류위원(현) · 한국현대시인협회이사(현) · 이메일 : abajin@hanmail.net  
261 내 아들을 공개수배 합니다 /이상실 file
편집자
3050 2013-02-01
13.2월 33호 소설  내 아들을 공개수배 합니다 어둠에 덮인 문 밖에서 소리가 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우웅, 쿠구궁, 쩍쩍, 픽픽픽... 하늘에서 무엇인가 내리는 소리, 덜커덩... 누군가가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 저벅저벅... 저승사자의 발걸음소리, 사뿐사뿐...’ 소리는 이불 속에 누워 있는 여든 두 살 노파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노파는 덜커덩거리는 소리 하나에 집착했다. 현관문 여닫는 소리가 틀림없을 터였다. 이불을 잽싸게 걷어 냈다. 일 년 사 개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은 아들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인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노파는 방문을 열고 맨발로 밖으로 나갔다. 벽에 손을 짚으며 계단을 오른 노파는 현관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비가 오고 있었고 번개가 번쩍거렸다. 바람이 불었고 천둥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노파가 쟁여둔 박스더미에서도 도둑고양이가 쥐를 찾는 중인지 박스더미가 꿈틀거렸다. 노파는 현관 안쪽에 세워 둔 지팡이를 들어서 박스더미를 내리쳤다. 순간 박스 몇 장이 솟구쳐 올랐고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 아이가 박스더미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노파는 움찔 놀라며 문간의 벽에 등을 기대었다. 아이는 대 여섯 장의 박스로 얼굴을 가리며 대문 밖으로 부리나케 줄행랑을 쳤다. 노파는 멀어져가는 아이의 등 뒤에 대고 고성을 질렀다. ‘네 이놈아! 도둑놈아! 잡어라, 도둑!’ 그러나 도둑은 사라졌고 주위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노파는 사방을 멀끔히 바라보았다. 기다리는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노파는 허공을 향해 아들을 불렀다. ‘창원어, 아들놈어!’ 절규에 가까운 노파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아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다음 날이었다.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의 발걸음소리가 방안의 벽에 기대어 앉은 노파의 귀에 점점 가까이 울렸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노파가 말했다. “누구여, 아들이냐?” 대답도 없이 문이 열렸다. 여자주인이었다. 주인은 문밖에 서서 노파를 내려다보며 다짜고짜 말했다. “아직도 방을 안 비웠어요?” “내 아들이 오꺼이요. 와뿔먼 갚을 텐께, 쪼깐만 지달려 주씨요야.” 주인은 입술을 삐쭉거렸다. “오늘 온다, 내일 온다, 온다, 온다, 온다, 그 온다는 말을 한 지가 벌써 일 년도 지났는데 도대체 온다는 날이 언젭니까?” 주인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주인은 사방으로 눈길을 쏘아댔다. “아유, 더러워.” 주인은 빗물로 얼룩진 벽지를 푹 찢었다. “아까운 방 다 버리네. 이걸 어쩌, 이거어얼.” 주인은 너덜거리는 벽지를 연방 뜯어냈다. 노파는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주인의 동태만 유심히 살폈다. 주인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노파는 그녀의 꽁무니를 좇으며 주인의 등 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주인은 코를 시큰거렸다. “돼지우리가 따로 없네. 돼지우리가......으윽, 고약한 냄새.” 주인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노파를 향해 눈총을 쏘아댔다. “돈도 필요 없으니까. 나가세요. 양로원엘 가든지 쩌어 서울역에서 노숙자로 사시든지 하세요. 딱 일주일 여유 줄게요...... 일주일입니다...... 안 나가면 .......” 주인은 협박조의 어투만 입 밖으로 쏟아냈다. 노파는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쪼깐만 지달려 주시오야. 열하루만 있으먼 내 생일인께 그때는 내 아들네미가 올 거구만이라.” 주인은 또 입술을 비틀었다. “이 할망구가 말귀를 못 알아듣네. 일주일입니다. 따악, 일,주,일!” 그러면서 주인은 노파의 손을 뿌리쳤다. 주인은 노파가 잡았던 팔에 코를 갖다 댔다. “으윽, 드런 냄새.” 주인은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으로 오르려다 말고 주인은 노파에게 삿대질을 했다. “일주일 안에 방을 안 비우면, 노인네도 끌어내고, 현관문도 잠가버릴 거니까, 그리 아세요.” 주인은 거친 숨소리를 토해내며 노파의 집을 나갔다. 노파는 낡은 유모차를 끌고 거리로 나갔다. 우편물 하나가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허리를 굽혀서 유모차에 올려놓았다. 편의점도 기웃거리다 세탁소를 지났다. 치킨집에 이르자 닭다리와 닭 날개 사진이 박힌 전단지 하나가 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 노파는 전단지를 집어 들고 입맛을 다셨다. 치킨집 옆에는 미용실이었고 그 옆은 슈퍼였다. 슈퍼 입구의 수박더미 옆에는 과자박스와 라면박스가 널브러져 있었다. 노파는 박스를 주웠다. 그것을 유모차에 올렸다. 그리고 아들을 불렀다. 창원어으! 아들의 이름을 불러대며 길바닥에 떨어진 재활용품을 수거한 노파는 짐수레가 된 유모차를 굴리며 지하철 입구와 상가를 지나 초등학교 정문에 이르렀고 교문 앞 문방구 가장귀에서는 골판지도 하나 건져 올렸다. 주위를 살피던 노파의 시선은 학교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입구에는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한 소년이 학교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점심때가 되기에는 이른 시간에 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교문 밖에서 학교를 엿보는 꼴이라니. 노파는 유모차를 세워둔 채 소년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학교 쪽으로 목을 길게 내밀던 소년은 노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년은 노파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땅으로 내리깔며 노파의 유모차를 유심히 살폈다. 소년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노파를 향해 다가왔다. 발소리를 따박따박 내며 스멀스멀 다가오던 소년은 느닷없이 유모차에 실린 과자박스와 골판지를 거머쥐고 문방구 윗길의 골목으로 내달렸다. 노파는 유모차를 버려두고 도주한 소년의 꽁무니를 쫓았다. 그러나 노파의 달음질은 소년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잰걸음에 불과했다. 소년은 멀어져갔다. 노파는 소년을 향해 소리쳤다. 도적놈아, 이놈아야! 허,허어... 소년은 노파와는 더 아득해지며 오른쪽 골목으로 꺾어 돌았고 금세 노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노파가 소년이 시야에서 사라진 골목에 다다랐을 때에는 소년의 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노파는 되돌아 걸었다. 그러면서 노파는 집집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썩을 놈아, 내 빡스 내놔라! 안 내노먼 순갱 데꼬 올란다아! ... 노파는 어딘가에 숨어 있을 도둑소년에게 악을 썼지만 소년은 나타나지 않았다. 파란색 대문이 달린 집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대문 앞에 전단지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치킨집을 알리는 광고 전단지였다. 노파는 전단지를 집어 들었다. 소년에게 폐지를 빼앗기기 전에 노파가 길에서 주웠던 전단지와 같아보였다. 까막눈인 탓에 누구네 집 치킨을 알리는 광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군침이 도는 닭다리와 닭날개의 사진이 아까 보았던 사진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파란색 대문은 열려 있었다. 노파는 집안에 대고 소리쳤다. 이, 꼬맹아! 내 놔라, 내꺼! 노파가 악을 써대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닫혔다. 도둑소년의 집이 틀림없을 터였다. 잘 걸랬다, 이노옴! 시 개 실 때 까장 언능 안 내 노먼 순갱 데꼬 온다이! 한나, 두울, 인자 진짜 한나 남았다......싯. 노파의 말이 끝나자 담 너머에서 박스 몇 개가 날아왔다. 박스는 소년이 훔친 것들이었다. 덤으로 박스 몇 개와 너덜거리는 공책 한 권이 담 밑으로 떨어졌다. 덤으로 떨어진 박스는 노파가 방금 전까지 모은 폐지보다 더 두꺼웠고 무거웠다. 노파는 그것들을 집어 들고 담 너머로 몇 마디를 더 던졌다. 오늘은 봐 줬응께. 한 번만 더 그래봐라. 그 때는 순갱이다, 순갱. 노파는 폐지를 유모차에 싣고 집으로 왔다. 폐지더미에 박스를 올리려는 순간 박스 안에서 공책 하나가 떨어졌다. 소년이 담 너머로 던져버렸던 공책이었다. 노파는 공책을 집어 들었다. 펼쳤다. 넘겨보았다. 삐뚤빼뚤한 글자가 듬성듬성 적혀있었다. 그 아이가 던져준 공책이므로 그 아이의 공책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책의 주인이 도둑소년이라면 도둑일기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뭐라고 썼을까. 그러나 노파는 까막눈이었다. 그 까닭에 그만 공책을 덮어버렸고 방 안의 문갑위에 올려놓았다. 글자를 아는 누군가를 만나면 공책에 적힌 내용을 알아볼 심산이었다. 그러나저러나 오늘도 아들은 소식도 없었다. 허,허허,허어. 현관 밖에 쟁여둔 폐지를 뒤적거리던 노파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룻밤 사이에 박스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제 도둑소년에게 덤으로 받았던 두껍고 무거운 것 두 개가 사라지고 말았다. 행방이 묘연한 두 개쯤이야 다시 채우면 그만일 수도 있겠지만 노파가 허탈한 웃음을 흘린 건 도둑이 누구라는 걸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목격은 못했지만 도둑소년의 소행이 분명해 보였다. 노파는 혼잣말을 했다. 지가 준건디, 또 지꺼라고 다시 훔채서 가져가야? 이 작 것을 그냥 콱! 근디 내 집을 어츠케 알았으까이. 도둑소년이 두고 간 것은 너저분한 공책 한 권뿐이었다. 노파는 곧장, 소년이 머물고 있을 파란 대문 집으로 갔다. 어제처럼 그 아이의 집에 대고 소리를 지르지 않았고 적의를 품지도 않았다. 지금은 오히려 적의 동태를 살피는 정탐꾼처럼 몸을 숨겼다. 대문은 닫혀 있었다. 노파는 대문 창살에 눈을 들이밀며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못된 짓을 하려고 밖으로 싸돌고 있는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림자도 없었다. 노파는 골목을 빠져 나왔다. 초등학교 쪽으로 걸었다. 초등학교 정문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였다. 정문에는 초등학교 사․오학년으로 보이는 소년이 박스 몇 개를 땅바닥에 깔고 앉아서 학교 운동장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노파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노파가 찾던 도둑소년이었다. 소년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던 소년은 벌떡 일어서며 깔고 앉은 박스를 겨드랑이에 차고 뒷걸음질을 했다. 노파는 소년과 박스를 노려보았다. 소년은 달렸다. 노파는 소년을 쫓지 않았다. 우두커니 바라보며 멀어져가는 아이에게 쇳소리를 냈다. 아가, 할미한테 줬다가 다시 몰래 곶고 가먼 도둑놈이제. 순갱 불른데이. 소년의 손에는 어제 노파에게 던져주었던 박스가 들려 있었다. 소년은 대답도 없이 사라졌다. 노파는 멀어져가는 그 아이의 뒷모습만 멀거니 바라보았다. 거리를 활보하며 폐지를 줍던 노파는 점심때를 훌쩍 넘긴 다음에야 집으로 왔다. 노파의 머릿속에는 도둑소년이 떠나지 않았다. 그 아이가 보여 준 일련의 행동에 의구심이 일었다. 노파는 소년이 버렸던 공책을 만지작거리다 공책에 쓰인 삐뚤한 글씨가 어떤 내용인지 궁금증이 일었다. 노파는 그것을 들고 ‘드림슈퍼’로 갔다. 단골 슈퍼였다. 여주인이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노파는 공책을 내보였다. “먼 아기가 나한테 줬는디, 뭔 내용인지 쪼깐 좀 읽어주먼 안 되까라우?” 공책을 받아든 주인은 눈대중으로 대충 넘겼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주인의 낯빛이 붉으락 푸르락거렸다. 주인이 말했다. “아는 아이예요?” “쪼깐 알기는 알어요.” “욕도 써 있고 읽기가 좀 그러네요.” “그라먼 욕은 빼불고 읽어주씨요.” 주인은 소리 내어 읽었다. ‘아빠 술 술 술.’ 한 장을 넘겼다. ‘엄마, 엄마, 엄마, 우리 엄마.’ 또 넘겼다. ‘보고 싶다, 경태야. 학교 잘 다니지?’ 마지막 쪽을 읽었다. ‘술, 술병, 아빠 때리지 마.’ 주인은 공책을 덮었다. “아이가 학교를 안 다니나 봐요. 엄마는 없는 것 같고 아빠는 알콜중독잔가? 대충 그런 내용이네요.” 소년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노파는 공책을 건네받고 슈퍼를 나왔다. 오늘은 노파의 생일이다. 노파가 살고 있는 반지하 월세방의 주인은 내일까지 밀린 세를 갚지 않으면 모레부터는 방을 비우라며 일방적으로 또 통고를 했다. 지난번 노파의 집을 찾아왔을 때 일주일내로 방을 비우라고 선언해놓고 갔지만 생일까지만 참아달라는 노파의 간곡한 부탁으로 노파의 생일까지 관용을 베풀겠노라고 그 나름대로의 배려를 한 터라 노파에게는 생일인 오늘이 특별한 날이었고 특별한 일이 일어나야만 했다. 노파는 쇠고기 한 근을 사서 미역국을 끓였고 아들이 좋아하는 미나리무침도 무쳤다. 콩을 넣고 밥을 했고 호박전도 붙였다. 생일음식을 끝낸 노파는 청소를 했다. 방을 쓸고 닦았고 구석구석에 먼지도 털어냈다. 아들이 내려올 계단에도 걸레질을 했다. 청소를 마친 노파는 돌부처마냥 전화통 앞에서 전화가 걸려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노파를 찾는 전화 한 통 없었다. 며느리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손자에게도 없었다. 노파는 전화코드를 만지작거렸고 수화기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고장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전화기에서 눈을 떼지 않은 노파는 벽에 기댄 채 혼잣말을 했다. 창원아, 내 아들놈아. 오메, 어째 그렇게 전화가 없냐? 오냐아, 안 오냐? 너 올 때 까장 기다리고 있을란다. 오늘이 니 엄니 생일인거 알고 있지야? 나는 니 올 거라고 미역국도 끓애 놓고 밥도 아직까장 안 먹고 기다리고 있다. 어디만치...... 노파는 갑자기 말을 끊었다. 밖에서 문 여닫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노파는 몸을 일으키며 부리나케 현관으로 갔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문 밖으로 나갔다. 거기도 없었다. 노파는 한참동안 문밖에 우두커니 서서 혹여 아들이 다가올세라 눈을 둥그렇게 뜨고 지나가는 행인들의 얼굴과 차림새와 걸음걸이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낯선자들이었다. 노파는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가까이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현관문을 열었다. 벨은 노파의 방에서 울려댔다. 노파는 허둥지둥 방으로 들어갔다. 전화벨이 아직 울리고 있었다. 수화기를 든 노파는 다짜고짜 물었다. 창원이냐? 아니었다. 걸려온 전화는 기계음이었다. 전화국이었다. 귀하의 전화요금이 연체되었으므로 3일 이내에 납부하지 않으면 끊어버리겠다는 협박성 전화였다. 노파는 전화를 끊었다. 정지예정을 알리는 전화였는데도 노파는 초조한 기색이 없었다. 통화가능 시한이 3일이나 남았으므로 그 사이에 아들에게 전화가 걸려온다면 전화가 끊어지더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다독거림 때문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렀다. 햇볕도 어둠 속으로 빠져버렸다. 아들이 앉아야 할 밥상머리에는 어둠이 앉아 있었다. 벼르고 별러서 끓인 미역국에 모자가 얼굴을 마주보고 목을 축여가며 오붓하게 밥숟가락을 뜰 수 있을 거라는 풍선처럼 부푼 바람도 쭈그러들고 말았다. 노파는 방문에 대고 처량한 목소리를 흘렸다. 일요일인디 왜 안 오냐? 일주일에 한 번은 오겄다고 간 니가 왜 안 오냐? 길이 맥혀서 못 오냐, 차가 없어서 못 오냐? 지하철을 타고 오재, 버스를 타면 되재. 차비가 없어 못 오냐? 케이크 살 돈이 없어 안 오냐? 밥에 미역국 먹으먼 되제. 오메 어째야 쓰까이. 길을 잃었냐, 오다가 다쳤냐. 왜 안 오냐? 추석 때 올라고 그라냐, 식구대로 설 때 올라고 안 오냐? 그 때는 안 와도 되는디. 오늘 와야 되는디. 쥔이 날 쫓아 내먼 그 때는 이 에미가 어딨는 줄 어츠케 알겄냐. 며늘 아이는 어디갔냐. 손주는 뭐하냐. 어째 그렇게 전화 한통도 없냐? 허허 인자 나는 어째야 쓰까이. 니 어멈 사는디가 더러워서 안 오냐? 그래서 오늘은 깨깟이 청소해 놨다. 저승길도 아닌디 이승길을 왜 못 오냐. 바다로 건너갔냐. 쩌어 먼 나라로 가부렀냐? 죽었냐 살었냐? 허허 인자 어째야 쓰까이. 말을 멈춘 노파는 식은 미역국을 데웠고 상을 차렸다. 수저를 두 개 놓았고 밥도 두 공기를 펐다. 미역국도 두 대접을 퍼서 상 위에 올렸다. 아들이 좋아하는 미나리무침도 올렸다. 노파는 혼자서 밥을 먹었다. 노파는 밥상을 차려두고 밤이 늦도록 아들을 기다렸지만 아들은 오지 않았다. 상을 거두었다. 그리고 중얼댔다. 창원아, 안 오면 어츠게 한다냐? 아들아, 느그 에미 생일이다아. 허허, 내가 죽어야 쓸란거이다. 노파는 울었다. “아들을 쪼깐 찾아야 되는디......” 주민센터의 ‘등초본’이라는 안내팻말 아래서 노파는 첫마디를 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여직원은 일어서며 노파에게 물었다. “아드님을 찾으신다구요?” “그려요. 내 아들을 찾어야 혀요.” “아드님이 어디로 가신건가요?” “예, 갔제라우.” “저희들이 뭘 도와드리면 돼죠?” “내 아들내미가 어디 사는 줄도 몰러. 그랑께 사는 데라도 쪼깐 알아야 쓰겄오.” “주소가 손님과 함께 실려 있지 않나요?” “잘 모르겄는디요.” “신분증 가져 오셨죠?” “그라제요.” 노파는 치마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냈고 직원에게 건넸다. 신분증을 받아든 직원은 컴퓨터의 자판기를 두드리며 화면을 살폈다. “손님 주소는 손님만 돼 있고 아드님은 없는데요...... 확인 할 수가 없네요.” “어째 그라요. 우창원이라고 안 나왔오?” “예, 손님 같은 경우는 참 난감하네요......우,창,원.” 직원은 자판기를 다시 두드렸다. “우창원씨라고 있기는 있겠죠. 주소가 나온다고 해도 저희들은 가르쳐 줄 수 없어요.” 가르쳐 줄 수 없다는 말에 노파는 컴퓨터 쪽으로 목을 길게 빼며 말했다. “우리 아들이 참말로 안 죽고 살아 있제라우? 좀 봐 주씨요. 서울 독립문에서 살았는디 이사를 가부렀단 말이요. 나이가 오십이 훨썩 넘었고라우. 인자는 어뜬 동네서 사는가만 조깐 잔 가르쳐 주씨요.” 직원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호적등본을 한통 떼 드릴게요. 경찰지구대로 가보세요. 경찰에서 헤어진 가족 찾아주기를 한다고 들었거든요.” “그라먼 쓰까라우.” “일단 가 보세요.” 노파는 호적등본을 받아 들고 주민센터를 나왔다. 버스가 다니는 큰 길로 갔다. 마트가 나왔다. 마트 맞은편에는 경찰지구대였다. 노파는 지구대로 들어갔다. “여그가 지구댄가 하는 거그다요?” 젊은 경찰이 노파를 바라보았다. “예.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우리 아들 좀 찾아 주씨요.” “아들이 어디로 갔나요?” “통 연락도 안 되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좀 찾어야 쓰겄오. 이것 잔 보씨요. 동사무소서 이것을 주든디라우.” 경찰은 노인이 건네준 호적등본을 받아들고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렸다. “우,창,원......” 경찰은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아드님에 대해서 아시는대로 말씀 좀 해 주세요.” “그란께 내 아들이 오십 야닯살 묵었고 서울 독립문에서 살았는디, 나가 언제 아들한테 가본께 이사를 안 가부렀오.” 경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쪽에는 안 사는 것이 맞네요......혹시 아드님 전화번호 있으세요?” “있제라우.” 노파는 속치마 주머니에서 너덜너덜한 쪽지 하나를 꺼내서 건넸다. “우리 아들이 옛날에 전화번호라고 써서 준 건디.” 경찰은 노파가 건네 준 번호로 전화를 했다. “결번으로 나오는데요?” “갤번이 뭐시다요?” “없는 전화라구요.” “그란 거 같드란 말이오. 그라먼 인자 어째야 쓰겄오?” 경찰은 아들의 행적을 물었고 노파는 진술했다. “그랑께 시방 우리 아들이 연락이 없단 말이오. 한 2년도 다 되가는디 안즉 한 번도 연락이 없단 말이오. 내가 쩌어그 먼 시골에서 살고 있지 않았겄오. 그랑께 영감이 죽어서 혼자 살고 있었는디. 시골 동네사람들이 우리 아들한테 욕을 막 안하요. 늙은 할멈 혼자 살게 한다고 나쁘다고. 그랑께 우리 아들이 나를 서울 독립문으로 안 데려가부요. 그랬는디 거그서 며느리랑 다 큰 아들 손주랑 함께 살았구먼이라. 긍께 그렇게 한 1년을 같이 살았는디 우리 아들이 회사에서 여그 인천으로 발령이 난다고 안 하겄오. 그람시롱 나보고 먼저 이쪽으로 이사를 하라고 안 하요. 그래 갖고 내 아들이 여그 우리 동네에다 방을 구해 줌시롱, 한 열흘 있으먼 아들도 이쪽으로 이사를 온다고 혔지라우. 그래 갖고 나가 먼첨 이사와서 지달리고 있었는디 진짜로 영 안 와부요. 전화도 없고, 핀지도 없고, 오도 안 하고. 아참 갱찰 아저씨 우리 아그가 여그 인천에 사는지 좀 봐 줄랑가요?” 경찰은 모니터를 응시했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경찰이 말했다. “아드님이 어떤 회사에 다니셨어요?” “그 머시냐. 그 라면박스 같은 박스 만드는 회사에 댕긴다고 했는디. 회사 이름은 모르겄고라우.” 노파의 진술은 여기까지였다. 경찰은 수소문해서 결과가 나오면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노파는 지구대를 나왔다. 노파는 붉은 색 보드마카로 “창원아, 엄마다.”라고 쓴 허연 수건을 두르고 까치산역으로 갔다. 아들을 찾으러 갔다. 아들이 까치산역 인근의 화곡동에 산다는 경찰의 귀띔으로 노파는 아들을 찾아 나섰다. 전철을 이용해 까치산역에 내린 노파는 출구로 나왔다. 출구에는 간이매점이 있었고 매점 옆에는 텔레비전과 의자가 놓인 쉼터가 있었다. 노파는 쉼터에 앉았다. 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백령도인근에서 침몰 된 천안함에 대한 관련소식이 장시간 나왔다. 이어진 뉴스는 서울 문래동의 한 고시원에서 불이 나서 신원을 알 수 없는 50대 남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다음은 인천행 경인고속도로에서 일가족 3명이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보도였다. 뉴스를 지켜보던 노파는 혀를 끌끌 차며 짠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쉼터보다 더 깊은 곳에서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전철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안내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승객들이 출구를 향해 봇물처럼 밀려나왔다. 노파는 수건을 이마에 두른 채 출구 쪽으로 다가갔다. 출구를 빠져나온 사람들은 노파를 지나치거나 우두커니 서서 노파를 지켜보았고 곁눈질을 했다. 노파는 그들의 시선에는 아랑곳없이 전동차에서 출구를 향해 다가오는 승객들의 면면을 뜯어 보았다. 아이들과 허리가 굽은 노파들 그리고 여자들도 노파에게는 솎아내야 할 대상이었다. 노파의 눈길은 오직 오십은 지나 보이고 육십은 덜 돼 보이는 아들 또래에게 집중되었다. 노파는 눈동자를 부지런히 굴렸다. 그러나 승객 속에서 아들은커녕 아들 같은 풍모를 지닌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승객들이 모두 빠져나오자 노파는 쉼터로 돌아왔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노파는 전동차가 오면 출구를 향했고 승객들이 사라지면 쉼터로 되돌아오곤 했다. 열 댓 번을 마중 나갔지만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노파는 속치마에서 사진한 장을 꺼냈다. 십여 년 전에 아들과 함께 시골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노파는 사진을 들고 쉼터 옆의 간이매점으로 갔다. 매점에는 아들또래의 남자가 있었다. 노파는 남자에게 사진을 내보였다. “저그 혹시 요롷게 생긴 남자 못 봤오?” 사진을 건네받은 남자는 한참 동안 사진을 바라보더니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못 봤는데요.”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디. 요 동네서 산단 말이오. 잔 똑땍이 봐 보씨오.” 남자는 안면이 없다며 사진을 돌려주었다. 노파는 사진을 들고 개찰구 주변에 서있는 지하철 직원 곁으로 다가갔다. 노파는 사진을 디밀었다. “우리 아들인디요. 이 사람이 표 끊으로 오고 그랬지라우.” 직원은 입을 다물고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노파는 다시 쉼터로 갔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째야 쓰까이. 노파는 혼잣말을 했다. 노파의 입에서는 혼잣말이 줄줄 새어나왔다. 창원아, 내가 죽어야 쓸란 거이다. 어째서 그라냐? 이 에미가 진짜로 보기 싫으냐? 파출소 순갱이 나 한테 그라더라. 니가 이 동네에 사는디 시방은 이 에미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함서 주소도 갈쳐주지 말라고 했담서. 창원아, 에미는 그 소릴 듣고 얼매나 짠했는지 아냐? 못 오먼 못 온다고 에미한테 전화라도 한 통화 하지 어째 그라고 매정하냐? 진짜로 순갱한테 그런 말 안 했지야? 허허, 창원아, 아들아! 밤 10시가 되자 노파는 지친 나머지 인천행 표를 출구에 넣고 전동차를 기다렸다. 전철을 기다리며 의자에 앉은 노파는 아까 쉼터에서 흘러나왔던 뉴스를 되뇌며 중얼거렸다. 고시원에서 불 타 죽어뿐 사람이 내 아들놈은 앵기겄제. 인천에 오다가 차 사고로 죽어 뿐 사람들도 내 아들, 내 매느리, 내 손주는 절대 앵기겄제. 노파는 인천행 전철을 탔다. 다음날은 새벽부터 까치산역으로 갔고 밤 10시가 넘어서까지 기다렸다. 노파의 눈앞에는 아들이 없었다. 그 다음날은 까치산역 근방의 버스정류장에서 아들을 기다렸다. 아들은 오지 않았다. 노파는 머리에 두른 수건을 벗어서 정류장 옆에 서 있는 은행나무에 동여맸다. ‘창원아, 엄마다.’ 오전이었다.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덜컹거리며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렸다. 아침도 거른 채 방에 누워있던 노파는 이불을 거둬내고 엉금엉금 기어서 방문을 열었다. “창원이냐?” 대답이 없었다. 발걸음 소리는 더 크고 둔탁하게 울리는가 싶더니 누군가가 노파 앞으로 다가왔다. 노파는 고개를 들었다. 주인여자였다. 집 주인은 팔짱을 낀 채 노파를 내립떠보았다. “사람을 불렀습니다. 빨리 짐 챙기세요.” 노파는 주저앉고 말았다. “오늘 하루만 좀 봐 주먼 안 되겄오? 우리 아들이 까치산역에 사는디, 오늘은 내 아들이 올거구먼이라.” “오늘만 내일만이 벌써 몇 번째입니까? 올 거면 벌써 왔지. 아들은 안 와요. 게다가 노인네 전화까지 끊긴 마당에 오늘 올 거라뇨. 전보가 왔어요, 아님 편지가 오길 했어요, 인편이 왔어요? 그만 보따리 싸세요!”노파는 무릎을 꿇었다. “이사 갈 디를 잔 알아 볼텐께, 오늘 하루만 봐 주씨요.” “지난번에도 그런 말 하지 않으셨어요? 오늘 하루만 봐 달라고. 더 이상 얘기 할 필요 없고 이젠 나가세요. 어디로 가실래요? 양로원으로 모실까요, 까치산역으로 모실까요, 서울역으로 모실까요?” “아니여, 나는 못가요, 아무데도 못 간단 말이오. 우리 아들이 올 때 까장 참말로 못 간단 말이오.” 노파의 말이 끝나자 지상의 창문에서 그리고 현관에서 문 열리는 소리와 박스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노파는 맨발로 계단을 올라갔다. 트럭 한 대가 문 앞에 코를 박고 있었다. 노파는 건장한 청년과 마주쳤다. “누구다요?” “이삿짐 나르러 왔습니다.” 청년은 노파의 방으로 내려갔다. 그때 현관 옆 창문가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났다. 노파는 소리 나는 쪽으로 갔다. 어린아이가 폐지더미 옆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누구데이?” 어린 아이가 몸을 일으키며 얼굴을 내밀었다. 도둑소년이었다. “너, 거기서 뭐하냐? 또 박스 훔체 갈라고 왔냐?” 도둑소년은 노파의 눈을 피하며 대문 밖으로 줄행랑을 쳤다. “네, 이놈 도둑놈아. 박스가 뭉태기로 없어져서 어뜬 놈인가 했는디, 저 육실할 놈이 도둑질해 갔구나. 거그 섰거라. 이놈!” 노파는 소리를 지르며 맨발로 아이의 뒤를 쫓았다. 소년은 큰 길로 사라졌다. 추격을 단념한 노파는 집으로 왔다. 집주인과 청년이 신발을 신은 채 방문 앞에서 노파를 기다리고 있었다. “짐 빨리 챙기세요. 이사비는 내가 대신 냅니다.” 노파는 또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한참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몸을 일으킨 노파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서랍장을 열었다. 옷가지가 든 서랍장이었다. 노파는 서랍 밑바닥에서 하얀 옷을 꺼냈다. 노파는 옷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노파가 부엌에서 나왔을 때에는 소복차림이었다. 주인은 실눈을 뜨고 노파를 바라보았다. “이사 하는 날 때타게 흰 옷을......” 주인은 말을 잇지 못했지만 노파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여그서 쪼깐 기다려 보씨요. 내가 지금 대리가 아파서 그란디, 요 앞에 병원에 잔 갔다 와야 쓰겄오. 병원에 가는디 깨깟한 옷을 입어야 의사 선상님이 안 좋아 하겄오.” 노파의 말에 주인은 인상을 구겼다. “얼마나 걸립니까?” “한 십오분이먼 되제라우. 지달린 동안에 요것도 실고 저 놈도 차에 실으면 되꺼이요.” “빨리 오셔야 돼요.” 주인은 손을 내 저었다. 노파는 절름거리며 대문 밖으로 나왔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도로로 나간 노파는 정형외과를 향해 걷다가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인의 모습도 트럭을 몰고 온 청년도 보이지 않았다. 노파는 병원 반대쪽으로 급한 걸음을 했다. 곧장 가면 지구대였다. 노파는 경찰지구대로 갔다. 지난번에 보았던 젊은 경찰관도 있었다. 노파는 젊은 경찰에게 부탁하여 노란쪽지 하나와 하얀 쪽지 하나를 받아들고 지구대를 나왔다. 노파는 또 다른 부탁을 들어 줄만한 누군가를 찾기 위해 막연한 걸음을 했다. 초등학교 쪽이었다. 초등학교 정문에 이르렀을 때였다. 정문 한 켠에 도둑소년이 박스 몇 장을 깔고 앉은 채 학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노파는 몸을 움츠리며 문방구 옆 슈퍼로 들어갔다. 노파는 슈퍼에서 물건이 든 검은 비닐을 감싸 쥐고 학교 정문으로 갔다. 소년은 여전히 학교 안을 주시했다. 노파는 소년 곁으로 갔다. “아가!”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소년은 벌떡 일어섰다. “나,나 오,오느을 도,도,도둑질 아,아,안 했어요.” 버벅거린 소년은 침을 꿀꺽 꿀꺽 삼키며 박스를 바닥에 내버려두고 뒷걸음질을 했다. “아, 아니여. 이거 줄 거여. 어, 어서 와봐아.” 노파는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며 비닐봉지에서 우유 두 개를 꺼냈다. 흰 우유와 초코우유였다. 노파는 소년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괜찮혀. 할미가 혼낼라고 그런 거 아니여. 이거 먹어.” 소년은 노파에게 다가왔다. 노파는 손바닥으로 박스를 툭툭 내리치며 말했다. “앉어라. 여그 앉고, 이놈 묵을래, 요놈 묵을래?” 초코우유를 가리킨 소년은 몸을 비틀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노파는 소년을 끌어당기며 박스 위에 앉혔다. “묵어라.” 노파는 초코우유에 빨대를 꽂아서 건넸다. 노파와 소년은 우유를 마셨다. 노파는 우유 한 모금을 꿀꺽 넘기며 말했다. “핵교 어째서 안 댕기냐?” “다니다가 말았어요.” 우유 한 모금을 또 마셨다. “이거이 느그 핵교였냐?” “예.” “할미가 니한테 부탁 쪼깐 할라고 그란디. 집에 누가 계시냐?” 소년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소년이 말했다. “할머니 주인집에서 쫓겨나세요?” “니가 고거를 어츠게 알고.” “아까 할머니 계시나 보러 갔다가 다 들었어요.” 노파는 소년에게 지구대에서 받은 쪽지 두 개를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소년의 귀에 대고 한참을 떠들어댔다. 우유를 모두 비운 노파와 소년은 함께 문구점에 들렀다가 소년의 집으로 갔다. 소년의 집은 노파가 알고 있는 파란 대문집의 반지하방이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무니하고 어디 가셨냐?” “엄마는 원래 없어요.” “아부지는?” “술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했어요.” “밥은 어츠게 해서 묵고 사냐?” 소년은 대답이 없었다. 노파는 소복을 벗어서 소년의 무릎 앞에 놓고 노란 쪽지를 소복위에 얹었다. “여그다 아까 핵교 앞에서 이 할미가 말한 것 잔 하고 있어라.” 노파는 소년에게 일거리를 주고 나서 쌀을 씻었고 밥을 했다. 찬거리를 사서 국도 끓였다. 상을 차려서 소년 앞에 놓았다. “다혔지? 밥 묵어라.” 소년은 노파의 저고리와 치마에 붉은 물감을 덕지덕지 칠해서 노파 앞에 놓았다. “이거이 그거이냐?” “네 할머니.” “알었다. 밥 묵고 설거지 해 두거라.” 노파는 소복을 곱게 접어서 무릎 맡에 놓고는 소년이 밥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할머니, 이제 할머니꺼 안 훔칠게요.” “그래, 알었다. 이 할미가 이사 가먼 훔칠 일도 없제.” “어디로 가세요?” “오늘 우리 아들 찾어 보고, 못 찾으먼 쩌어 하늘로 날러 가든지. 아직은 몰러.” 소년은 밥을 먹다 말고 숟가락을 놓았다. “당장 갈 데도 없으시잖아요......우리 할머니라면 좋겠어요.” “쯧쯧, 불쌍한 것.” 노파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렸다. 도둑소년의 집을 나온 노파는 붉은 물이 든 소복을 손에 들고 지하철역으로 갔다. 까치산으로 가는 전철을 탔다. 아들을 찾으러 떠나는 길이었다. 까치산역이 서너 정거장 남았을 때였다. 경로석에 앉아 있던 노파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들고 있던 소복을 겉옷에 껴입었다. 느닷없는 노파의 겉치레에 승객들은 아연한 얼굴로 노파를 바라보았다. 노파는 승객들의 틈을 비집고 건너편 차량의 문을 열었다. 핏빛에 버무린 소복을 입은 노파의 행색에 다음 차량의 승객들도 시선집중이었다. 앉거나 선 승객들의 일부는 휴대폰을 꺼내서 노파와 노파의 소복에 휴대폰을 들이대며 사진을 찍었다. 승객들의 몇몇은 노파의 뒤를 졸졸 따라가서 붉게 물든 노파의 저고리와 치마를 응시하며 킥킥킥 웃는가하면, 흠칫 놀라며 몸을 비틀었고, 입을 헤헤 벌렸다. 노파가 다음 칸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노파의 주변에는 둥그런 눈동자들과 벌린 입, 웃음소리, 휴대폰의 빛으로 가득했다. 까치산역에서 내린 노파는 휘뚝거리며 출구로 나왔다. 빗줄기가 한바탕 내렸는지 길은 젖어 있었다. 길 위에 선 노파는 윗옷 주머니에서 곱게 접힌 하얀 쪽지를 꺼냈다. 지구대에서 받았던 쪽지였다. 쪽지를 펼쳤다. “아들내미 집 가차운 데에 뭣이 있다고 적기는 적었다는디.” 노파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처에 ‘헤어 닷 넷’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미용실 간판이었다. 노파는 미용실로 들어갔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마귀할멈이라도 출몰한 듯 노파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노파의 얼굴에 가위를 들이대며 위협을 가하는가 하면 머리카락이 묻은 빗자루로 노파를 문 밖으로 쓸어냈다. 구경꾼들이 삽시간에 몰려들었다. 쪽지를 든 노파는 구경꾼들에게 쪽지를 보이며 말했다. “여그에 뭐라고 적혔는가 쪼깐 읽어 주씨요.” 구경꾼들은 일제히 쪽지를 읽었다. ‘까치산 스포츠센타 맞은편, 소망당 안경점 근처.’ 안경점 근처가 어디쯤인지 노파가 묻자 구경꾼 중 일부가 손가락으로 그 곳을 가리켰다. 노파는 소망당 안경점 앞으로 갔다. 안경점 앞에는 인도였고 인도에는 은행나무가로수가 푸르렀다. 노파는 은행나무에 기대어 앉으며 아들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창원아!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노파는 은행나무 아래서 한 시간도 넘게 앉아 있었고, 안경점 윗길의 주택가 골목을 오랜 시간 쏘다녔다. 아들은 없었다. 노파는 휘청거리며 다시 은행나무에 기대어 섰다. 눈을 감았다. 여자들의 웅성거림과 새실대는 소리가 났다. “이 할머니 좀 아까 인터넷에 떴어. 아들인가 누굴 찾는다고 하던데 아직도 꽝인가 봐. 조회수 완전 대박이더라.”“날도 궂은 데 못할 짓이다. 쯧쯧쯧.”“할머니, 아들이 어디쯤에 사신데요?” 노파는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여그 쪽에서 산다고 갱찰이 말했는디.” 여자들의 음성이 멀어지자 끼드득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렸고 목소리가 팬 남자들의 목소리도 두런두런 울렸다. 그러고는 아무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잠들었던 노파는 눈을 떴다. 눈을 뜬 건 빗방울 때문이었다. 노파의 앞에는 검은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빗방울은 몸 깊숙이 스며들었다. 비에 젖어 붉은 물감이 흘러내린 소복을 걸친 채 주택가가 밀집한 안경점 윗길로 노파는 다리를 끌며 걸었다. 아들을 불렀다. 창원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창원아! 노파는 울었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또 아들을 불렀다. 내, 아들아, 내 아들 창,원,아...... 길을 걷던 노파는 비트적거리며 쓰러졌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진 노파의 눈동자에 빗속을 걸어오는 남자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남자는 노파를 향해 다가왔다. 다가오는 남자의 눈은 검은 안경에 가려 있었고 입도 하얀 마스크로 가려져 있었다. 남자는 비를 흠뻑 맞으며 노파에게 저벅저벅 다가왔지만 노파의 눈꺼풀은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노파의 눈에는 다가오는 남자의 형상이 사라졌다. 노파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쓰러진 노파의 귓가에 소복을 추스르는 소리가 났고 낯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나이는 오십 여덟, 이름은 우창원. 내 아들을 공개 수배합니다’ 가늘고 낮은 목소리가 또 울렸다. 어무니. <끝> 이상실 1964년 전남 완도 출생 2005년 장편소설 『사람도 사는 마을』이 계간「문학과 의식」신인상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현재 인천작가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소설집 『월운리 사람들』이 있음. leessil21@hanmail.net  
260 님의 침묵 /이한걸 file
편집자
2675 2013-02-01
13.2월 33호 수필  님의 침묵 이한걸 변변한 그림 한 폭 없는 빈곤한 우리 집에 자랑거리를 들라면 단연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이라는 서예작품이다. 가로 175cm 세로 43cm 폭에 빼꼭히 수놓은 서예작품은 우리 집 거실을 빛나게 하는 문화재다. 한국의 대표적 저항시인 “님의 침묵”을 받게 된 연유는 순전히 아내의 공이다. 그해 가을, 처음으로 백담사를 다녀온 아내는 “님의 침묵”에 반해버렸다. 남편이 노동문학을 하는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평소 시에 대해 무관심했던 아내는 백담사를 가서야 시의 가치를 발견했던 모양이다. “님의 침묵”을 노래 부르던 아내는 우연히 알게 된 서예가 남곡 선생을 졸라 작품을 선물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벗으로 사귄지 몇 개월 되지 않은 남곡 선생이 아내의 청을 흔쾌히 들어준 성의가 고마울 따름이다. 1947년생 남곡 선생을 만난 곳은 강원도 주문진에서다. 마산에서 살던 나는 일 관계로 2009년 7월부터 2010년 12월까지 혼자 주문진에서 살았다. 광활한 동해바다와 주문진 읍내가 훤히 보이는 아파트에서 살았다. 33년 만에 찾은 고향 강릉! 머나먼 타향에서 심신이 지쳤던 나는 고향이 그처럼 좋을 수 없었다. 바다에서 막 건저올린 생선이 펄떡이는 주문진어시장, 밤이고 낮이고 달려가 파도와 장난치는 모래톱, 보릿골 산책로, 소금강, 진고개, 절경의 해안도로,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수십 년 만에 찾은 정든 고향에서 남곡 선생을 만난 것은 뜻밖의 행운이다. 남곡 선생은, 내가 사는 아파트의 이웃집 남자와 친구 사이였다. 직업군인이었던 이웃집 남자는 나와 사돈의 팔촌지간이다. 강릉지역에서 군대생활을 했던 이웃집 남자는 정든 주문진을 떠나기 싫어 정년퇴임 후에도 그대로 눌러 살고 있었다. 바다낚시를 다니면서 노후의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사돈 간이라 그들 부부는 우리부부와 자주 어울렸다. “내 친구가 예술가랍니다” 내가 글을 쓰는 문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웃집 남자는 어느 날 남곡 선생을 소개시켜 주었다. 남곡 선생은 술은 냄새도 맡지 못하면서 술좌석을 피하지 않는 사람이다. 유모감각이 뛰어나 언제나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내가 문인이라서 그런지 선생은 나를 편안하게 대해주었다. 남곡 선생! 선생은 서예, 그림, 조각을 두루 섭렵한 다재다능한 예술가다. 이미 20년 전 세종문화예술관에서 서예전을 열었을 만큼 명성을 떨쳤다 한다. 선생이 쓴 8폭 병풍이 사오백 만원을 호가한다는 것이다. 선생이 그린 노무현 전직대통령을 비롯 장미희, 장동건, 채시라, 손담비의 초상화는 압권이다. 선생이 그린 연예인은 탄성을 지를 만큼 아름다웠다. 이효석문학축제가 열리는 봉평에서 그려온 나의 초상화를 보고 “이건 그림 축에도 못 듭니다.”하던 말을 실감했다. 선생의 작업실에서 손수 작업한 여러 가지 조각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선생은 또 한의원을 운영한 한의사였다. 남쪽의 공단도시에서 수 십 년간 한의원과 서예학원을 운영한 경력이 있다는 것이다. 선생은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3년 전부터 주문진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보낸 주문진의 1년! 이웃집 남자는 나와 사돈이고 남곡 선생은 같은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 우리는 금방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마산과 주문진을 오르내렸던 아내는 주문진에만 오면 그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낚시를 즐겼던 그들은 우리부부를 바다로 안내하였다. 바위를 뛰어다니면서 낚시를 하는 재미는 의외로 즐거웠다. 남자들은 우럭을 낚아 회를 뜨고 여자들은 게를 잡아 즉석에서 찌개를 끓였다. 바다에서 마시는 소주는 취하지 않는다. 수평선에는 오징어배가 떠있고 갈매기가 끼룩거리는 남애항에서 여러 날을 보냈다. 냇가에서 벌인 천렵도 재미있는 놀이다. 우리는 동심으로 돌아가 벌판을 가로 지른 연곡 천을 첨벙거렸다. 왁자지껄 모래바닥을 휘저으며 미꾸라지를 잡고 바위를 들썩이며 꺽지를 잡았다. 냇가에서 먹는 추어탕 꿀맛이다. 5일장이 열리는 북평, 양양 장거리를 기웃거리다 국밥으로 배를 채우고 푸짐하게 한보따리씩 장을 보던 일도 즐거웠다. 추암, 하조대를 구경하면서 풍월을 읊었을 옛날 선비들이 부럽지 않았다. 남곡 선생이 사는 텃밭이 있는 마당에서 양미리와 도루묵을 숯불에 구워먹던 만찬도 빼놓을 수 없다.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찻집을 찾아다니며 인생을 논하고, 또 예술에 관해 이야기꽃을 피우던 추억은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 님의 침묵을 써 주실 수 없을까요?” 어느 날 백담사를 갔다 온 후 아내는 남곡 선생에게 글을 부탁했다. 아니, 부탁이 아니라 떼를 썼다. 나는 이미 나의 시 5편과 한문 작품 몇 편을 받아 방에 걸어뒀던 터라 아내의 장단에 보조를 맞출 수 없었다. 그러나 아내는 막무가내였다. 얼굴만 마주치면 “님의 침묵”을 들먹였다. 선생에게 붓을 놓은 지 오래 되었다는 말을 들었기에 아내의 부탁은 부질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써 드리지요.” 아내의 끈질긴 부탁에 남곡 선생은 손을 들었다. 나는 농담인줄 알았다. “님의 침묵”은 19행에 364자나 되는 긴 작품이다. 이것을 쓰려면 여간 공을 들이지 않고는 어려운 작업이다. 하지만,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선생은 두루마리 작품을 들고 왔다. “붓을 놓은 지 오래되었지만 사모님이 하도 간절하게 부탁해서 썼습니다. 두 편을 썼으니 마음에 드는 작품을 표구 하시면 됩니다. 먼저 써준 선생님의 시와 한문 글귀는 두고 보다가 찢어버리십시오. 이곳 방이 허전해서 공간을 메우느라 대충 쓴 것이지요.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렇게 해서 남곡 선생의 귀한 서예작품을 얻을 수 있었다. 아내는 마산에 내려온 즉시 한 편을 표구하여 거실의 가장 어울리는 곳에 걸어 두었다. 예술작품 하나 없는 삭막한 거실에는 “님의 침묵”이라는 명시의 서예작품이 걸려있어 어느 정도 품위를 갖추고 있다. 나는 “님의 침묵”을 볼 때마다 기계로 찍어낸 듯 일정한 규격을 유지한 붓글씨의 묘미를 감상한다. 한 획, 한 획, 어쩌면 저토록 바르게 쓸 수 있을까? 붓글씨는 한문보다 한글이 어렵다고 한다. 한 글자만 균형을 맞추지 못해도 작품전체가 이상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루 4-5시간 10여년의 수련을 쌓아야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는 붓글씨 작업, 그래서 서예가는 존경받는 예술인이다. 남곡 선생과 이별한지도 벌써 2년이 넘었다. 우리는 귀한 서예작품을 얻고도 변변한 답례를 못했다. 강릉을 갈 기회가 있으면 선생을 찾아봐야 겠다. 아직은 건강하시겠지. 선생의 작업실을 찾아 다시 한 번 연예인들의 초상화를 하나하나 감상하고 싶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그때처럼 바다낚시를 하고 냇물을 첨벙거리며 미꾸라지를 잡을 것이다. 남곡 선생도 그런 날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선생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주문진으로 달려가고 싶다. 주소: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1동 105-13 101호 이메일 주소: l-rorxh@hanmail.net  
259 나는 날마다 칼을 품고 산다/고창근 file
편집자
3146 2013-01-01
13.1월 32호 소설  나는 날마다 칼을 품고 산다 고창근 동료들은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더 사람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드디어 삼성이 이겼다고. 이대로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그는 어젯밤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 하고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동료들에게 한 말을 되풀이했다. 9회 초. 양준혁의 역전 3점 홈런. 얼마나 짜릿한 홈런이었던가. 9회 말에는 구원투수인 오승환이 나와 퍼펙트로 막아냈다.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1점차 승부였다. 삼성의 4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이었다. “무슨 소리야? 하마터면 쏟을 뻔 했잖아.” 정이 그를 보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커피가 들은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맞아, 정대리. 자네는 에스케이가 이길 거라고 했었지. 거봐. 결국은 삼성이 이겼잖아. 내 말이 맞았지?”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킥킥.” 경리를 보는 미스 박이 혼자 킥킥 웃었지만 아무도 따라 웃지 않았다. “에이 이 사람, 싱겁긴. 하긴 아쉬운 경기였지. 다들 삼성이 이길 줄 알았는데.” 이번엔 홍이 나섰다. “이길 줄 알았는 게 아니라 분명히 이겼다고. 양준혁이 홈런 치는 걸 봤잖아. 그 만세 타법 말이야.” 그는 왼손으로 공을 치고 나서 두 팔을 하늘을 향해 쭉 뻗는 시늉을 했다. 오른손잡이인 그의 행동이 약간 어색했지만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솟아오르는 환희는 어쩔 수 없었다. “아, 저 양반은 아침부터. 그리고 제발 면도 좀 하지.” “뭐라고? 아침에 했는데.” “했는 게 꼭 원숭이 같아?” “됐어, 그만하자구. 그래도 우리 자동차샵에서 판매왕이잖아.” 정이 홍의 등을 두드리며 커피를 마신 종이컵을 꾸겨 휴지통에 집어넣었다. 모닝커피를 마신 게 아니라 쓴 한약을 마신 표정이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다들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믹스 커피를 종이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는 좀 더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다들 자리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도 자신의 자리로 앉았다. 동료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컴퓨터가 부팅되기를 기다렸다. 바탕 화면이 뜨자 양준혁의 만세 타법이 화면 가득 채워졌다. 그는 다시 한 번 어젯밤의 역전 3점 홈런을 떠올리며 인터넷 아이콘을 클릭했다. 초기 화면인 H일간 스포츠 사이트가 뜨기를 기다렸다. 대리점장은 그의 초기화면에 대해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다. 포르셰가 초기화면으로 뜨도록 명령을 내렸지만 그는 하루 이틀 미루고 있던 참이었다. 어젯밤의 환희를 한 번 더 느끼기 위해 빨리 인터넷이 연결되기를 바랐다. “현대리님, 점장님이 찾으시는데요.” 미스 박이 그를 불렀지만 그는 컴퓨터에 정신이 팔려 듣지를 못 했다. “이거 뭐야.” 그는 하마터면 커피를 자판기에 쏟을 뻔했다. SK ‘퍼펙트 우승’ 4년 새 세 번째 정상. 야구 명문 확인. MVP 박정권. 모니터에 눈을 박고 있던 그는 몇 번이나 눈을 끔벅이며 화면을 보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SK가 우승이라니. 그는 다른 스포츠 사이트로 옮겨갔지만 내용은 다들 비슷비슷했다. SK의 완승, 삼성의 완패였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어젯밤을 떠올렸다. 분명히 저녁 6시에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처음엔 김재현의 홈런으로 SK가 2점을 앞서 갔고 그 점수가 투수전으로 이어지며 8회까지 갔다. 9회 초가 되자 그때까지 잘 던지던 김광현이 힘이 떨어져 조동찬에게 볼넷을 주더니 박한이에게 안타를 맞고 강판 당했다. 주자는 무사 1 3루. 4번 타자로 들어선 양준혁이 바뀐 구원 투수 김대현으로부터 3점 홈런을 치지 않았던가. 극적인 삼성 역전 우승. 자막엔 그렇게 크게 나왔다. 그는 우산이 없어 가을비를 흠뻑 맞은 느낌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현대리님 점장님이 찾으셔요!” 미스 박의 말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빨리 가 보셔요. 몇 번이나 말해야…….” 미스 박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그를 보다 눈이 마주치자 말을 끊었다. 그는 얼른 스포츠 사이트를 닫았다. “참, 양준혁이 은퇴한 것은 알고 있지?” 홍이 점장실로 가는 그의 등 뒤에 말을 던졌다. “그런 양준혁이 언제 엔트리에 포함 되어 홈런을 쳤지?” 정의 말이 그의 뒤통수에 와 꽂혔다. 순간, 그는 양준혁의 은퇴 경기를 떠올렸다. 관중들의 환호에 눈물을 흘리던 모습에 그도 울컥, 했었다. 양준혁이 은퇴한 것은 맞은데 어떻게 된 거지? 어제 홈런 친 것은 무엇인가. 그는 무슨 속임수에 빠진 느낌이 들면서 등골이 서늘했다. 며칠 전에도 비슷한 느낌이 든 일이 있었다. 퇴근을 하고 아파트로 차를 몰고 들어가는데 살고 있는 동이 생각나지 않았다. 수위실에 있는 수위의 얼굴은 낯익은데 건물은 낯설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동과 호수를 생각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환장할 일이었다. 차를 몰고 이쪽 동에서 저쪽 동 끝까지 몇 번이나 오갔지만 눈에 익은 동은 띄지 않았다.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겨우 사는 동과 호수를 알았다. J와 잠자리를 한 후에는 그 증세가 심하게 나타났다. 제기랄! 그는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그때의 등골이 서늘한 느낌을 지금도 그는 잊을 수 없었다. 그 후로도 자주 무엇을 잊어버렸다. 출근하려고 차 문을 열려다 열쇠를 안 가져온 것을 알았고 고객과의 약속도 번번이 잊어 고객과 점장에게 비난을 받곤 했다. 그는 심호흡을 한번 하곤 점장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안에서 점장의 커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갑자기 긴장이 되었고 자신도 모르게 손이 윗옷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칼의 손잡이가 손바닥에 전해 왔고 그제야 그는 다소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꼈다. “어서 와요.” 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그는 친절한 점장의 태도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요즘 힘들지요? 우선 자리에 앉아요.” 점장은 그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하곤 손수 커피를 타왔다. 그는 긴장을 했다. 점장이 손수 커피를 타는 경우는 드물었다. “자, 한 잔 마셔요. 요즘 힘들 텐데 쉬엄쉬엄 해요. 우리 샵의 실적이 현대리 손에 달렸는데 무리하면 안 되지.” 점장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권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커피를 마시며 점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점장은 오늘은 주식이 올랐다는 둥, 하나마나한 소리만 지껄였다. 그는 사약을 먹는 심정으로 커피를 마시며 점장 뒷벽에 붙은 그래프를 바라보았다. 직원들의 이름이 가로로 적혀 있었고 이름 위에는 막대그래프가 그려져 있었다. 그의 이름 위에 있는 막대가 제일 길었다. 그 옆에 10월의 목표, 현재 누적 실적이 적혀 있었다. 10월의 목표에 현재까지의 누계가 3대가 모자랐다. 오늘이 10월 29일. 그렇다면 이틀 내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저 3의 숫자는 채워야 할 것이었다. 2대는 곧 계약 될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 문제는 한 대였다. “다 마셨으면 나가봐요.” 점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뜻일까. 그는 점장의 속마음을 짐작하려고 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한 대가 남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자 명치께가 싸르르 쓰려왔다. 점장은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밤에 통 잠을 못 잔다던데, 정말이에요?” 그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키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아니지요. 우리 샵의 판매왕께서 몸이 아프면 안 되지요. 몸이 건강해야 돼요. 며칠 사이에 많이 말랐어요. 힘내요. 돈을 많이 벌어야지요.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인데.” “…….” “참, 면도 좀 해요.” “했는데…….” 그는 손바닥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까칠한 느낌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왔다. 최근 들어 수염이 급속도로 자랐다. 아침에 면도하고 출근해서 거울을 보면 어느새 길게 자라나 있었다. 털이 난 부위도 늘어 눈 주위만 빼곤 온통 털이었다. 몸에도 처음엔 가슴에만 털이 좀 나는가 싶더니 온 몸이 갈색 털로 뒤덮었다. 샤워를 할 때 옷을 벗고 거울 보면 마치 원숭이 같았다. “했는 게 왜 그래요? 얼굴이 온통 털인데. 전에도 그렇게 털이 많았었나요? 깔끔해야지요. 그게 영업하는 사람의 기본이고 고객에 대한 예의고.” “알겠습니다.” “이제 곧 과장으로 승진도 할 텐데.” 점장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점장실을 나왔다. 등에는 땀이 식어 서늘했다. 그가 점장실을 나오자 동료들이 그를 일제히 바라보았다. 그는 되도록 그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벌써 10월인데도 사무실이 후덥지근한 것 같았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세 가지는 항상 가지고 다녀야 한데이.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가 어릴 때부터 한 말이었다. 첫째가 돈, 남자가 수중에 돈이 떨어지면 안 된다. 둘째는 거짓말, 셋째는 우산.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모르고 들었는데도 그 말이 잊히지 않고 계속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우산이 없어 가을비를 흠뻑 맞은 느낌은 여전했다. “현대리, 무슨 기미 없어? 오늘 내일 중에 우리 팀이 한 대는 팔아야 하는데.” 팀장이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 그는 점장에게 얻어 마신 커피 맛이 아직 입안에 있는 듯 침을 삼켰다. “없는데요.” “허허. 이거 어쩐다? 안 그래도 우리 팀이 꼴찐데 말이야.” 팀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개인 실적은 1위지만 그가 속한 팀은 샵에서 꼴찌였다. “하여튼 신경 써봐.” 팀장은 자신의 자리로 가며 말했다. 자폭하라는 의미였다.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팀원들이 차를 사서 실적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한다? 그는 곰곰이 생각했지만 하루 이틀 만에 한 대를 팔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곧 과장이 된다는 점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 갑자기 가슴이 방망이질 치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손에는 금방 땀이 나서 축축해졌다. 언제나 불안은 이유 없이 갑자기 찾아왔고 심장은 즉각 반응을 나타냈다. 몇 개월 동안 불면증에 시달리고부터 그 증세가 부쩍 심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에 손을 넣어 칼을 만지작거렸다. 불안하거나 가슴이 두근거릴 때 칼을 만지면 안정이 되었다. 칼은 미국 SLP2였다. 손잡이 위에 후레쉬가 달렸고 불꽃스틸점화 장치도 되어 있었다. 칼날은 스테인리스로 3인치짜리였다. 그는 아무래도 어젯밤 잠을 못 자서 그렇다고 칼을 만지며 생각했다. 그가 칼을 구입한 것은 우연이었다. 몇 년 전 차를 팔고 고객과 함께 갤러리에 들렀다가 칼을 사게 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작품은 생각나는 게 없고 딱 한 작품만이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작품은 단순했다. 사람 키만 한 거울 위쪽에 식칼을 붙여놓은 작품이었다. 이런 것도 작품인가 하며 그냥 지나치르던 순간이었다. 식칼이 천장의 불빛에 반짝 빛났고 그 느낌이 강하게 가슴으로 느껴졌다. 그는 작품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마음이 긴장되었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작품 앞에 섰다. 그때 그의 전신이 거울에 드러났고 정확하게 이마 부분에 식칼이 걸려 있었다. 옆에는 ‘나는 날마다 칼을 품고 산다’란 제목이 붙어 있었다. 처음 든 섬뜩한 느낌이 서서히 잦아들었고 곧이어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그는 한동안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자신과 이마에 걸린 칼을 바라보며 작품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마치 칼이 자신이 품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을 느꼈다. 그 작품을 보고 칼을 사게 된 것이었다. 칼을 만지고 있으면 불안하지 않았고 가슴도 두근거리지 않았다. 그 후로 그는 칼을 몸에서 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외출할 때면 지갑이나 차 열쇠보다도 칼을 먼저 챙겼다. 칼이 품속에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안정되었고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나 사람은 실수가 있는 법이었다. 언젠가 까다로운 고객과 상담을 앞둔 때였다. 며칠 동안 공을 들였는데 살 듯 말 듯했다. 그 날은 이상했다.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불안한 느낌이 스멀거렸다. 그는 단지 어제 잠을 자지 못 해 그럴 거라고 위안하며 고객과 상담 시간을 기다렸다. 고객과 상담 시간이 다가오는데 불안 증세가 더 심해졌다.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았다. 사무실에 앉아 있지 못 하고 연신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스포츠 신문의 야구란을 보기도 했다. 그래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곧 고객이 닥칠 시간이었고 차를 파느냐 마느냐 기로에 있던 상담이었다. 그는 고객이 올 시간이 되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칼을 만지면 좀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칼이 없었다. 그는 허둥대었다. 이럴 일이 없는데. 분명 칼을 가지고 나왔는데. 그는 상의 양복 왼쪽 오른쪽뿐만 아니라 바지의 모든 주머니도 뒤졌다. 칼이 없었다. 그제야 그는 아침에 출근하다 양복에 얼룩이 진 것을 보고 집으로 되돌아가서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왔다는 걸 알았다. 창밖을 보니 고객이 사무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불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칼을 확인하기 전에는 불안해도 칼을 만지면 된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을 참을 수 있었는데 칼이 주머니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마음은 더욱 더 불안했고 가슴은 곧 터질 듯이 뛰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고객은 자신을 맞이하러 나오는 줄 알고 그에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는 불안해서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연히 고객을 그냥 지나쳤고 택시를 타고 정신없이 집으로 갔다. 아내는 외출하고 없었고 옷은 안방 침대 위에 있었다. 다행히 칼은 양복 안쪽 주머니에 그대로 있었다. 그는 재빨리 칼을 꺼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칼을 움켜쥐었다. 마음이 서서히 안정이 되었다. 그렇게 30여 분이 지났을 때에야 그는 고객이 사무실로 들어오는 걸 봤다는 기억을 했고 부리나케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사무실에서 기다리는 건 고객이 아니라 점장과 팀장이었다. 점장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날렸고 팀장은 잡아먹을 듯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변명을 하지 못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외출할 때면 몇 번이나 칼이 주머니에 있는지 확인했다.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고객 명단을 훑어보았다. 급하게 차를 부탁할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달에는 자폭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는 J에게 전화를 했다. 어젯밤에 만났지만 전화를 해 봐도 손해 볼 거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J는 잠이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점심이나 같이 할까 해서.” 그는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J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을 했다. “월말이구나.” “응. 하지만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건 아니고. 내 실적은 채웠거든.” 그는 J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체면은 구겨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알았어.” J는 대신 드라이브를 시켜달라고 했다. 점심은 선약이 있다고 했다. 차를 팔아줄 테니 드라이브 시켜달라는데 거절할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좋지.” 그는 흔쾌히 대답하며 며칠 전 그녀에게 판 스포츠카 포르셰를 떠올렸다. 개구리 모양으로 납작 엎드려 눈을 동그랗게 뜬 모양의 911은 카레라s였다. 그가 미소를 짓고 있을 때 팀장은 그를 보았고 그는 팀장을 향해 엄지와 중지를 모아 동그라미 사인을 보냈다. 팀장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랍에서 면도기를 꺼내 화장실로 갔다. 어느새 수염은 얼굴을 덮고 있었다. 아무래도 병원에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얼굴에 거품비누를 발랐다. 그의 온 몸에도 점점 긴 털이 많이 나기 시작했다. J를 만나 섹스하고 나면 털이 부쩍 빠른 속도로 자랐다. 그는 면도를 하고 나서 사무실로 와 자리에 앉았다. J를 만나기 전 잠시 눈을 붙일 요량이었다. J를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의자에 머리를 뒤로 눕히고 눈을 감았다. 그리곤 J의 벗은 몸을 상상했다. 커다란 유방, 그 큰 유방 사이에 얼굴을 묻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J는 30대 중반의 나이로는 믿기는 않는 몸매였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몸매였다. 하루에 무슨 일이 있어도 2시간 이상은 운동한다는 그녀였다. 그는 처음 J를 만났을 때를 생각하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J는 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었는데 호박이 덩굴째 굴러온다는 말을 그때만큼 실감한 적은 없었다. 처음부터 J를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J는 고객으로 샵을 찾았고 그는 딜러로서 그녀를 맞이했다. 그녀는 붉은 색 원피스를 입고 갈색 선글라스를 쓴 채 사무실에서 마주 앉았다. 선글라스나 옷이나 가방이나 구두나 모두가 명품이었다. 보는 순간 주눅이 들 정도였다.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이 속옷이 보일까 아슬아슬하기도 했다. J는 처음부터 차종을 얘기했다. 포르셰였다. 포르셰는 외국차종에서도 고급이긴 했지만 더욱 의아한 것은 남자들이 주로 타는 스포츠카였다. 처음에 그는 우아한 벤츠나 BMW를 권할 작정이었다. “아니에요. 구일일 카레라 에스로 해주세요.” J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스포츠를 좋아하시나 봐요?” 그는 재빨리 포르셰의 자료를 챙기며 말했다. 그녀는 대답 없이 역시 미소만 지었다. 그는 포르셰에 대해 설명했다. “일반 차량은 클러치가 하나인데 반해 포르셰는 피디케이 차량으로서 클러치가 두 개입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대꾸 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듣는 둥 마는 둥 자신의 얼굴만 바라보는 그녀가 신경 쓰였지만 그는 열심히 설명했다. “…… 기어가 바뀔 때 클러치가 떨어지는 느낌, 즉 공회전 느낌이 전혀 없으며 빠른 변속을 자랑합니다. 그러니까 기존 기어 오단이 아니라 칠 단 기어로서 …… 또한 포르셰는 엔진이 뒤에 있습니다.” 역시 그녀는 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는 눈치 안 채게 심호흡을 한 후 계속 설명했다. “…… 이는 브레이크를 밟을 때 전륜과 후륜의 밸런스를 맞추기가 쉽고 가속 때는 구동되는 후륜에 좀 더 많은 힘이 실리기 때문에 바퀴가 헛돌 확률이 낮아지는 장점이…… 또한 시속 백 킬로로 주행하다 발에 조금만 힘을 줘도 시속 이백 킬로가 쉽게 넘어 버리고…… 가고 싶은 방향을 머릿속으로만 생각해도 어느새 차의 앞머리는 그쪽을 향해 버리는…… .” “어, 됐어.” 갑자기 J가 말을 끊고 반말을 했다. 그는 잘못 들었나 싶어 말을 멈추고 J를 바라보았다. 그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는 J는 선글라스를 벗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야 나. 전유정.” J는 하얗고 조그마한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는 손을 잡고 J를 빤히 쳐다보았다. “예?” “삼동초등학교. 전유정. 너 현수혁 아냐? 맞지?” J는 맞지? 하면서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깔깔깔 웃었다. 그는 잠시 의아하게 J를 바라보았다. 전유정. 그는 분명 아는 이름이었다.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을 뿐만 아니라 그가 살던 시골의 옆 동네에 살았기에 아는 것은 당연했다. 초등학교 졸업 뒤 가족이 서울로 이사하고 난 뒤 만나거나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다. 순간 그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솟구쳐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인생을 살다보면 예기치 않은 행운이 올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예감하고 있었다. “설마, 그 유정이?” 그는 반신반의했다. 단발머리에 코 흘리게 그 유정이가 이 유정이라니.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았다. “그래. 유정이. 아는구나.” J는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샵에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모두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동료들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찬찬히 J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약간 갸름한 얼굴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닮은 구석이라곤 없었다. “야, 여기서 만나다니 반갑다야. 동창회는 나가니?” 말투까지 서울말을 쓰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럼. 서울에만 초등 동기가 많아. 난 총무 맡고 있고. 아이러브서쿨에 홈쥐도 있어. 근데 어떻게 그렇게 연락이 없냐?” 그제야 그는 그 유정이가 이 유정인 것을 알았다. 코흘리개 시절의 동기들의 이름과 안부를 서로 묻고 하다가 이럴 게 아니라 점심이나 먹으며 얘기하자며 일어섰다. 그는 그런 와중에도 서류를 챙겨 J 코앞에 내밀었다. J는 계약서를 작성하고 계약금 5백만 원을 카드로 계산했다. 차 나오면 곧장 결제할게, 예쁘게 웃었다. 차가 나왔을 때 결제한 사람은 J가 아니라 모르는 남자였다. 그 남자에 대해서 그는 당연히 물어보지 않았다. 그와 J는 점심을 먹고 술을 간단히 한 잔 했다. 그러나 낮술은 금방 취했고 둘은 후식으로 커피를 한 잔 마시자며 함께 나가다가 호텔로 직행했다. 이런 행운이 찾아오다니. 그 날 그는 몇 번이나 믿기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보기까지 했다. 그 후로 그는 J를 자주 만났고 그리곤 술을 마시고 당연한 것처럼 섹스를 했다. 섹스는 또한 당연한 것처럼 J가 주도했다. 점심을 먹고 나자 J가 빨간 포르셰를 몰고 사무실에 나타났다. 동료들은 그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는 의기양양하게 J에게 갔다. “타.” J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 그는 차에 탔다. 어디 갈 거냐고 그는 묻지 않았다. 운전대는 J가 잡고 있었다.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충주 갈까? J가 혼잣말로 하다가 네비를 켰다. 충주를 입력했다. 170km로였다. 중부내륙고속으로 고! J는 차를 쌩 몰았다. 운전은 계속 J가 했다. 그가 하려고 했지만 오랜만에 스릴 좀 즐기자며 자기가 하겠다고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목표량은 채웠겠다 오늘 오후엔 마음 놓고 놀고 싶었다. 그는 차가 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전 J의 가슴을 살짝 꼬집었다. J는 아야. 콧소리를 냈다. 마치 발정난 암컷 고양이 울음소리 같았다. 차는 엄청 빨랐다. 포르셰를 팔기만 했지 직접 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100km에서 순간적으로 200km로 넘어갔다. 고개가 뒤로 저절로 젖혀졌다. 차가 앞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사물들이 뒤로 재빠르게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앞서 가던 차들도 죄다 뒤로 물러났다. 그는 은근히 두려움에 오줌을 약간 지렸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이런 속도로 가는 것은 그의 생애 처음이었다. 아. 하지만 J는 그와 달리 탄성을 질렀다. “난 있지. 이럴 때 오르가즘을 느껴. 마치 오줌보가 터져 나갈 거 같아. 아, 좋다.” J는 비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오르가즘을 느끼는가. 섹스할 때처럼 비음 섞인 신음 소리를 냈다. 속도계가 어느새 250km를 가리켰다. 정말로 J의 오줌보가 터질까 걱정이 되었다.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주먹을 쥔 채 앞만 바라보았다. 이러다 사고 나서 죽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J를 만날수록 그는 걱정 되는 게 또 있었다. 물론 아내에게 들킬까, 하는 그런 좀팽이 같은 걱정은 아니었다. J와 만나 섹스를 거듭 할수록 그는 혼돈을 느끼는 일이 잦아졌다. 수시로 차 열쇠 놓은 곳을 잊어버리기도 했고 사는 아파트 동 호수를 잊어버리기도 했다. 당신 그러다 나까지 몰라보는 거 아니에요? 아내가 근심스런 눈길로 묻기까지 했다. 몸에도 서서히 털이 길게 자랐다. 거뭇하던 털이 J를 만날수록 손가락으로 잡으면 잡힐 만큼 자랐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면도는 자주 하면 되었고 몸에 난 털은 옷을 입으니 괜찮았다. 무엇보다 J를 통해 섹스를 하고 차를 파는 것이었다. 그는 사실 J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아직 미혼이라는 것. 일본에 자주 간다는 것. 그리고 남자들, 특히 나이 많은 남자 몇이 주위에 있다는 것 정도였다. 사는 곳도 몰랐고 하는 일도 몰랐다. 다만 굉장히 돈이 많았고, 돈이 많은 사람들을 많이 알았다. 한 달에 몇 번씩 J는 그에게 고객을 소개해 주었다. 어느새 차는 충주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충주까지 채 40여 분이 안 걸린다는 사실에 그는 놀랐다. “어디 갈까?” J가 말했다. “탄금대 갈까?” 그가 말했다. 언젠가 친구들과 함께 간 기억이 있었다. “탄금대?” “옛날 우륵이 가야금 연주하던 대라지?” “렛츠 고!” J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잘 숙련된 말처럼 그들을 금방 탄금대로 데려다 주었다. 그와 J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다정한 연인처럼 손을 잡고 탄금대로 올라갔다. 울창한 송림이 우거져 있고 절벽을 따라 시퍼런 남한강이 휘감아 돌고 있어 경관이 매우 아름다웠다. "야, 좋다." J는 시퍼런 강을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그도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두 팔을 들어 기지개를 폈다. "저기 앉자." 그는 나무 의자에 J를 데리고 가 앉았다. 앉아서 앞을 바라보니 저 멀리 계명산과 남산 그리고 충주 시가지가 한 눈에 보였다. 또한 넓은 평야지대가 그림같이 펼쳐져 절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와 J는 한동안 강물과 평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몇 되지 않았다. "나 내일 일본 가." J가 말했다. 그는 왜 가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언제 오냐고 물었다. "글쎄. 가 봐야 될 거 같아." J는 확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순간 다시는 J를 못 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행운을 놓치다니. 그는 아쉽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일찍 와. 보고 싶잖아." 그는 J의 손을 잡았다. "그래. 가능하면." J는 그의 귓불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으며 말했다. 그는 손으로 J의 가슴을 만졌다. 탱탱한 느낌이 손에 전해왔다. 귓불을 깨물던 J가 그의 바지 앞섶을 더듬거리더니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는 손을 J의 윗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J의 몸이 움찔거렸다. "저리로 가자." 그는 아무래도 트인 공간에서는 신경이 쓰였다. J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솔숲 속으로 들어갔다. 소나무 밑에서 J는 그를 쓰러뜨리고 바지를 벗겼다. 그는 J가 하는 대로 가만히 두었다. 그의 옷이 다 벗겨지자 그도 J의 옷을 벗겼다. 아. J는 그의 몸 위에 올라가 신음 소리를 냈다. 솔숲이라 해도 시퍼런 남한강과 넓은 평야가 보였다. 또한 짙푸른 하늘에 눈이 부셨다. J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는 J의 율동에 따라 엉덩이를 움직여주었다. 그러다 그는 문득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J가 아닌 전혀 낯선 사람하고 하는 것 같았다. 며칠마다 섹스를 했기에 그 느낌이 생생한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달랐다. 눈을 뜨니 커다란 유방을 흔들며 올라탄 여자는 분명 J가 맞았다. 그는 J의 유방을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이번엔 몸 어디서 피시시, 하고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몸이 쭈그려드는 것 같았다. 그는 어젯밤에 잠을 못 자서 몸이 피곤해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아. J의 몸놀림이 빨라졌고 그에 따라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더 크게 나는 것 같았다. 몸은 쭈그려들어 이제 한 줌만 남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그만 하자고 일어설 수는 없었다. 그의 몸에서 바람이 죄다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을 때 그는 끙, 하며 사정을 했고, 몸을 비틀던 J가 그의 몸에서 내려왔다. "어마. 털 좀 봐." J는 그의 몸을 바라보며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몸을 보았다. 온통 까만 털로 덮여 있었다. 어제 보다 2-3cm는 더 자란 것 같았다. "동물 같아." J는 그의 몸에 난 털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는 너무나 피곤해 대답을 않고 한동안 그대로 누워 있었다. 어떻게 서울로 돌아왔는지 그는 기억에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차가 그를 태우고 아파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피곤했기에 가장 가까운 빈자리에 차를 주차시켰다. 그리곤 곧장 아파트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거울속의 자신의 모습에 그는 흠칫 놀랐다. 눈은 퀭하니 들어갔고 얼굴 전체가 수염으로 텁수룩했으며 볼은 움푹 꺼졌다. 그는 며칠 동안 아무 일도 안 하고 잠만 잤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7층에 내렸다. 그리고 자기 집 초인종을 눌렀다. 아득히 먼 곳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시 한 번 더 눌렀다. 하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아내는 어디 간 것 같았다. 그는 급하게 열쇠로 문을 따고 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몸을 누일 작정이었다. 앗! 그는 들어가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남의 집이었다. 그는 흐릿한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문 앞 팻말을 보았다. 706. 자신의 집 호수가 맞았다. 이런. 그는 다시 한 번 더 확인한 후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역시 남의 집이었다. 우선 자주 보던 텔레비전이 달랐다. 자신의 것은 스탠드형의 낡은 텔레비전이었는데 거실에 있는 것은 새것의 LED 텔레비전이었고 벽에 걸려 있었다. 크기도 엄청 더 컸다. 주방에 있는 탁자도 달랐다. 닮은 것은 냉장고뿐이었다. 냉장고에 붙은 치킨이나 중국식당 병따개만 눈에 익숙했다. 그는 누구 안 계셔요? 하고 불러 보았다. 인기척이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 드러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한 10분만 드러누울까. 하지만 그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라도 피해를 준 적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풀려오는 다리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아마도 동을 잘못 찾은 듯 했다. 에이, 하필이면 오늘같이 피곤한 날에. 그는 윗주머니에서 칼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중년의 여자 한 사람과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사내애가 타고 있었는데 역시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그는 한 쪽 구석으로 가 서 있었다. 여자와 남자애가 자꾸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만약 피곤하지 않다면 계단으로 내려갔을 텐데. 그는 자신을 타일렀다. 밖으로 나온 그는 하늘을 향해 삐쭉이 솟아 있는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거의 집마다 불이 들어와 아늑하게 보였다. 그는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서둘렀다. 몹시 피곤했기에 빨리 집으로 가서 드러눕는 게 급선무였다. 그는 아파트를 둘러보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 103동이 맞았다. 아파트 입구에서 들어오면 왼쪽의 두 번째 동이 확실했다. 그는 마치 꿈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확실하게 해야겠다며 아파트 입구로 걸어갔다. 그때 입구 왼쪽에 있는 관리실의 경비원이 그를 보고 알은 체를 했다. 그리곤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아랑곳 않고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했다. 맞구나. 그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7층에 내려 706호 앞에 섰다. 호수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아득한 소리만 들릴 뿐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그는 몹시 피곤했기에 열쇠로 문을 열었다. 집으로 들어간 그는 또다시 에이! 하고 고함을 질렀다. 역시 남의 집이었다. 아까 다녀온 그 집이었다. 제기랄! 그는 가래침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파트 밖으로 나온 그는 갈 데가 없어 화단 앞에 앉았다. 칼을 꺼냈다. 칼날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날카로운 느낌에 그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그는 칼을 두 손으로 가슴에 품었다. 마음이 편해졌다. 순간 그는 얼굴에서 열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갑자기 온 몸이 뜨거워졌다. 그는 양복을 벗었다. 그래도 더웠다. 그는 와이셔츠를 벗었다. 그래도 더웠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치기 위해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그러나 얼굴에서 느껴지는 건 길고 꺼칠한 털이었다. 그는 뭔가 잘못 됐다는 걸 느끼면서 너무나 더워 바지를 벗었다. 팬티까지 벗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너무 피곤했기에 칼을 가슴에 품고 옆으로 누웠다. 참으로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곧 졸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엄마, 여기 이상한 동물이 있어.” “어머. 이게 무슨 동물이지?” “곰인가? 근데 팬티까지 입었네.” “가슴에 칼도 있어요.” “이상하네. 무슨 동물이지. 빨리 경비원한테 알려.” “동물보호소에 연락해야 되는 거 아냐?” 그는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는 걸 느꼈다. 그는 일어서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했기에 일어설 수가 없었다. 끝 *경북 상주 출생. 한국작가회의 회원. 소설집 『소도(蘇塗)』『아버지의 알리바이』 서양화 개인전 1회(2011년) 문학웹진 <문학마실>편집인 이메일: sgamm@hanmail.net  
258 얼룩 외1편/김진희 file
편집자
2789 2013-01-01
13.1월 32호 시  얼룩 김진희 아무도 손대지 않은 새 책 지문 묻히는 맛으로 도서관에 간다 그 맛에 혼자 우쭐하며 마종기 시집을 넘기는데 누런 얼룩이 보인다 보일 듯 말 듯한 얼룩 아무도 몰래 오줌을 지린 자국 같기도 한 맑은 하늘에 살짝 구름이 스친 것 같기도 한 얼룩 ‘자장가’라는 시가 쓰인 책장은 모서리부분이 아주 미세하게 삼각으로 접혀있다 누군가 그 시를 읽고 속으로 울었나보다 치매 걸린 늙은 어머니에게 자장가 불러주는 나이든 아들의 모습을 자신에게 겹치며 가슴이 짜안해져 조용히 모서리를 접으며 붉어지는 두 눈을 누르며 무너지는 자신의 가슴 한쪽에도 슬그머니 사선으로 작대기를 받쳐두었나 나는 자국을 따라 살짝 접었다 펴본다 책장 모서리가 고개 숙이며 안녕, 인사를 한다 느닷없는, 죽음 겨울이 시작될 무렵, 밤길에 느닷없이 튀어나온 고라니에 가슴 쓸어내린 일이 있다 자동차 범퍼에 부딪치는 둔탁한 느낌에 브레이크도 밟지 못하고 두 발을 벌벌 떨었다 어린 고라니는 다시 일어나 겅중겅중 제 집을 찾아 떠났지만 가끔 고라니의 안부가 궁금했다 그리고 느닷없는 죽음이 이어졌다 80년대 민주화 투쟁으로 심한 고문을 받은 이가 고문후유증으로 느닷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괴롭힘 당하고 두드려 맞았던 중학생이 또 느닷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학교는 서둘러 방학을 했다 아이는 친구들에게 맞아 멍이 들면서도 엄마, 아빠 앞에서 겅중겅중 걸으며 어리광을 부렸다 백 년이고 천 년이고 하늘나라에서 엄마, 아빠를 기다릴거라고 유서에 남겼다 어린 몸 받아줄 따뜻한 두 손이 없어서 공중의 몸 땅에 내려줄 부드러운 목이 없어서 계단 난간에 아이를 매달고 겨울바람 속에서 부르르 떠는 아파트, 그 안의 우리 오래 고통 받은 영혼은 이 땅에 두 발 붙이는 걸 거부하고 안식처를 찾아 서둘러 방학식을 하는가 우리는 늘, 뒤늦게, 브레이크 밟을 정신도 없이 멍청하게 경악을 한다 두 발을 벌벌 떨면서도 다시 시동을 걸고 가던 길을 간다 비루한 일상을 향해 속도를 올린다 **1969년 부산 출생. 제1회 경남작가 신인상, 시집 <굿바이, 겨울>  
257 번호판 없는 고라니 외1편/오형근 file
편집자
2656 2013-01-01
13.1월 32호 시  번호판 없는 고라니 오형근 깜깜밤중 고속도로, 길 잃은 한 마리의 고라니가 달린다 두 동강 난 산기슭에서 떨어진 고라니에게는 질긴 타이어가 없다 지칠 줄 모르는 엔진도 없다 놀란 가슴만 있는 고라니의 숨결은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고 눈에서는 점점 눈물이 맺히는데 건너편 차선에서 사납게 달려오는 자동차의 불빛에 고라니의 몸뚱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몇 번, 고라니에게는 질긴 타이어가 없다 지칠 줄 모르는 엔진도 없다 자동차처럼 좌우측 깜빡이도 없다 이제는 고라니의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끼어 있던, 엄마와 형제의 오줌 냄새가 스며 있는 달콤한 흙마저 떨어져 나갔다 고라니의 뒤에서 자동차가 냅다 덮친다 사람의 비명 소리가 칼날을 펴고 화들짝 날아올랐지만 자동차처럼 번호판 없어서, 나동그라진 고라니가 어떤 고라니인지 알 수 없었다 無題 ……인간에대한절망인간에대한희망 사 이 내가건너야할세상이구름다리처럼흔들흔들놓였는데일단은똥잘싸고밥잘먹을일이다잠도잘자고숙제인금생今生을,일단은견디고잘견디고볼일이다잘! **1988년 《불교문학》신인상, 2004년 《불교문예》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시집 『나무껍질 속은 따뜻하다』와『환한 빈자리』  
256 늪 외1편/박경조 file
편집자
2463 2013-01-01
13.1월 32호 시  늪 박경조 자두 밭 진입로에 느닷없이 빠져버린 자동차 바퀴 호위하듯 비행하는 고추잠자리 떼 레커차가 도착하고 늪의 깊이를, 상심한 나를 들어 올려야 한다는 것, 모를 일이다 다시 먹구름 떼로 몰아오는 장대비 빠져 나오려 발버둥 칠수록 그 오기만큼 깊어지는 미궁 앞에서 이미 잘못 든 길이라는 것 알아차렸을 때 직진도 후진도 불가능한, 저 수렁 속 끝이 어딘지를 지금 나는 묻지 않기로한다 소용돌이 선명한 바퀴자국에도 당당하게 꽃 피우고 지워내는 법칙 있을 것이므로 자동차와 레커차, 당신과 나 비 개일 이 늪에도 젖무덤 돌아 갈 길 없는 벼랑 이다 북부지방에서 출발한 칼자루 쥔 안락사 파문 온 몸을 헐어서라도 제 새끼만은 결코 포기 하지 않는 세상어미들의 최후의 사랑 법 퉁퉁 불은 젖 실컷 한 번 먹이고 난 어미소 아, 깊이깊이 주저앉은 붉은 몸자리 필사적인, 노산의 마른 젖 염치없이 빨아대던 막내 잦은 젖몸살로 키워 낸 내 엄마의 역사도 저러했을까 나 언제 되돌아가 팔베개하고 어루만질 살갗을 맞댄 것들의 뜨거운 눈 맞춤 ** 경북 군위출생 2001년 계간<사람의 문학>등단 시집<밥 한 봉지>  
255 우리말 공부1 외1편/김종인 file
편집자
2738 2012-12-01
12.12월 31호 시  우리말 공부1 - 가을귀* 김종인 도라지, 패랭이, 마타리, 개억새 같은 꽃무더기 지천으로 피는 가을꽃떼 위로 가이없는 갈기슭에 갈새가 우네 갈매하늘 아래 어디로 흘러가는가 가을하고 난 강벌을 지나가는 강물나그네 강여울 따라 눈부시게 빛나는 강심 모진 세월 억세게 견디어 온 가톨 같은 벗이여 하늘하늘 갈꽃처럼 또 헤어져야 하는가 갈기슭 오솔길 너머 흘러가야 하는가 바삭거리는 갈비를 밟으며 세월의 미세한 흐름까지 읽는 가을귀, 간들바람에 낙엽이 지는 소리 그대는 떠나고, 떠나가고 낙엽이 지네 가을꽃떼는 지천으로 피고 낙엽이 지네 * 가을귀 : 가을의 예민한 소리를 들어내는 섬세한 귀를 비유한 말. 가을꽃떼 : 도라지꽃, 패랭이꽃, 마타리꽃, 싸리 등 가을에 피는 꽃무더기. 가톨 : 세톨박이 밤의 양쪽 가에 박힌 밤톨. 가이없다 : 끝이 없다. 한이 없다. 강물나그네: 강을 곧잘 건너는 사람. 떠돌이를 비유한 말. 강가슴 : 강의 한가운데. 강심. 우리말 공부2 - 꽃무덤* 같은 사랑 꽃담 속에서 살아본 적 없노라 꽃트림 한 번 해 본 적 없고 꽃타래 한 번 목에 걸지 않았노라 꽃국물 진하게 먹어보지 못하고 평생을, 가시울타리나 돌담, 철창 속에서 보냈노라 진달래 꽃비처럼 떨어져 이제 꽃그늘 속에 묻혔거늘 산 자여 여기와 노래하지 마라 꽃눈개비 떨어지는 꽃불무덤으로 꽃처럼 아름다운 이름이라 부르며 꽃울음 흐느끼지 마라 꽃샘추위만 와도 이불 속에서 꽃처럼 붉은 눈물, 어쩌구 할 테니 차라리 꽃바다에 빠져 죽어버려라 꽃무덤 같은, 사랑이여. * 꽃무덤 : 아까운 나이에 죽은 젊은이의 무덤. 꽃국물 : 고기를 삶아낸 뒤에 물을 타지 아니한 진한 국물. 꽃멀미 : 꽃의 아름다움이나 향기에 취하여 일어나는 어지러운 증세. 꽃불무덤 : 불이 일어날 정도로 뜨거운 가슴을 죽음의 상태로 비유한 말. 꽃타래 : 꽃이 주절이주절이 많이 피어 있음을 실타래에 비유한 말. 1954년 경북 금릉 초실 출생. 1983년 겨울 『세계의 문학』에 작품 발표 시집『흉어기의 꿈』 (서울, 온누리),『나무들의 사랑』(대구, 문예미학사), 『내 마음의 수평선』(서울, 시에) 등 분단시대 동인,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현재 김천생명과학고 교사로 근무 * 주소 : 740-070 경북 김천시 황금동 74-2번지 * 메일 : kmt820@hanmail.net  
254 허공 앨범 외1편/하재영 file
편집자
2629 2012-12-01
12.12월 31호 시  허공 앨범 이담에는 셔터를 누를 수 있겠지 놓친 풍경을 바라보며 약속한 후일 꿈같은 집 짓고 꽃씨 뿌린 텃밭에 물을 주는 그러면서 더딘 열매도 기다리는 감나무 몇 천천히 걸어가는 시골 풍경도 그랬다 머문 주소지를 바꾸는 것들의 손수건만 풍경 조각보 잇듯 이어 한 묶음 추억으로 담은 허공 앨범 어머니는 늙어 제대로 걷지 못하고 아이들은 자라 어른이 되었다 아무 때나 넘겨보아도 사람의 어깨 높이 머문 붉은 노을로 마음 밭 이쪽저쪽 인화해 놓은 허공 앨범 주사위 창문을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내는 바닷가 집 짓는 곳에 떨어진 허드레 나무를 정육면체로 잘라 주사위를 만든다 머리를 이등변삼각형으로 올리고 그 아래 직육면체의 남자와 정육면체의 여자가 작은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하는 삼각뿔 다락방에서 내다보는 창문으로 팽팽한 연실처럼 수평선은 걸려있다 수평선은 몇 척의 배를 얼레로 띄우고 아침 하늘에 태양을 올린다 천천히 사포로 문지르는 주사위 동서남북 사방으로 맨질맨질 희노애락을 새기고 그리고 빈 공간 두 면에 유효한 하늘과 땅을 놓는다 완성한 주사위를 던진다 창문으로 보이는 바다에서 봄과 여름이, 여름과 가을이, 가을과 겨울이, 겨울과 봄이 데굴데굴 구른다 주사위 한 개 집 안에서 음표로 흐른다 <충청일보> 신춘문예 동화,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계몽아동문학상 장편소년소설 당선. 지은 책 동화집 : 『안경낀 향나무』, 『할아버지의 비밀』, 시집 『별빛의 길을 닦는 나무들』 현, 포항문예아카데미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