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8호...
   2020년 04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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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89951 2014-11-03
259 나는 날마다 칼을 품고 산다/고창근 file
편집자
3202 2013-01-01
13.1월 32호 소설  나는 날마다 칼을 품고 산다 고창근 동료들은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더 사람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드디어 삼성이 이겼다고. 이대로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그는 어젯밤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 하고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동료들에게 한 말을 되풀이했다. 9회 초. 양준혁의 역전 3점 홈런. 얼마나 짜릿한 홈런이었던가. 9회 말에는 구원투수인 오승환이 나와 퍼펙트로 막아냈다.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1점차 승부였다. 삼성의 4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이었다. “무슨 소리야? 하마터면 쏟을 뻔 했잖아.” 정이 그를 보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커피가 들은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맞아, 정대리. 자네는 에스케이가 이길 거라고 했었지. 거봐. 결국은 삼성이 이겼잖아. 내 말이 맞았지?”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킥킥.” 경리를 보는 미스 박이 혼자 킥킥 웃었지만 아무도 따라 웃지 않았다. “에이 이 사람, 싱겁긴. 하긴 아쉬운 경기였지. 다들 삼성이 이길 줄 알았는데.” 이번엔 홍이 나섰다. “이길 줄 알았는 게 아니라 분명히 이겼다고. 양준혁이 홈런 치는 걸 봤잖아. 그 만세 타법 말이야.” 그는 왼손으로 공을 치고 나서 두 팔을 하늘을 향해 쭉 뻗는 시늉을 했다. 오른손잡이인 그의 행동이 약간 어색했지만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솟아오르는 환희는 어쩔 수 없었다. “아, 저 양반은 아침부터. 그리고 제발 면도 좀 하지.” “뭐라고? 아침에 했는데.” “했는 게 꼭 원숭이 같아?” “됐어, 그만하자구. 그래도 우리 자동차샵에서 판매왕이잖아.” 정이 홍의 등을 두드리며 커피를 마신 종이컵을 꾸겨 휴지통에 집어넣었다. 모닝커피를 마신 게 아니라 쓴 한약을 마신 표정이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다들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믹스 커피를 종이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는 좀 더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다들 자리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도 자신의 자리로 앉았다. 동료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컴퓨터가 부팅되기를 기다렸다. 바탕 화면이 뜨자 양준혁의 만세 타법이 화면 가득 채워졌다. 그는 다시 한 번 어젯밤의 역전 3점 홈런을 떠올리며 인터넷 아이콘을 클릭했다. 초기 화면인 H일간 스포츠 사이트가 뜨기를 기다렸다. 대리점장은 그의 초기화면에 대해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다. 포르셰가 초기화면으로 뜨도록 명령을 내렸지만 그는 하루 이틀 미루고 있던 참이었다. 어젯밤의 환희를 한 번 더 느끼기 위해 빨리 인터넷이 연결되기를 바랐다. “현대리님, 점장님이 찾으시는데요.” 미스 박이 그를 불렀지만 그는 컴퓨터에 정신이 팔려 듣지를 못 했다. “이거 뭐야.” 그는 하마터면 커피를 자판기에 쏟을 뻔했다. SK ‘퍼펙트 우승’ 4년 새 세 번째 정상. 야구 명문 확인. MVP 박정권. 모니터에 눈을 박고 있던 그는 몇 번이나 눈을 끔벅이며 화면을 보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SK가 우승이라니. 그는 다른 스포츠 사이트로 옮겨갔지만 내용은 다들 비슷비슷했다. SK의 완승, 삼성의 완패였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어젯밤을 떠올렸다. 분명히 저녁 6시에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처음엔 김재현의 홈런으로 SK가 2점을 앞서 갔고 그 점수가 투수전으로 이어지며 8회까지 갔다. 9회 초가 되자 그때까지 잘 던지던 김광현이 힘이 떨어져 조동찬에게 볼넷을 주더니 박한이에게 안타를 맞고 강판 당했다. 주자는 무사 1 3루. 4번 타자로 들어선 양준혁이 바뀐 구원 투수 김대현으로부터 3점 홈런을 치지 않았던가. 극적인 삼성 역전 우승. 자막엔 그렇게 크게 나왔다. 그는 우산이 없어 가을비를 흠뻑 맞은 느낌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현대리님 점장님이 찾으셔요!” 미스 박의 말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빨리 가 보셔요. 몇 번이나 말해야…….” 미스 박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그를 보다 눈이 마주치자 말을 끊었다. 그는 얼른 스포츠 사이트를 닫았다. “참, 양준혁이 은퇴한 것은 알고 있지?” 홍이 점장실로 가는 그의 등 뒤에 말을 던졌다. “그런 양준혁이 언제 엔트리에 포함 되어 홈런을 쳤지?” 정의 말이 그의 뒤통수에 와 꽂혔다. 순간, 그는 양준혁의 은퇴 경기를 떠올렸다. 관중들의 환호에 눈물을 흘리던 모습에 그도 울컥, 했었다. 양준혁이 은퇴한 것은 맞은데 어떻게 된 거지? 어제 홈런 친 것은 무엇인가. 그는 무슨 속임수에 빠진 느낌이 들면서 등골이 서늘했다. 며칠 전에도 비슷한 느낌이 든 일이 있었다. 퇴근을 하고 아파트로 차를 몰고 들어가는데 살고 있는 동이 생각나지 않았다. 수위실에 있는 수위의 얼굴은 낯익은데 건물은 낯설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동과 호수를 생각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환장할 일이었다. 차를 몰고 이쪽 동에서 저쪽 동 끝까지 몇 번이나 오갔지만 눈에 익은 동은 띄지 않았다.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겨우 사는 동과 호수를 알았다. J와 잠자리를 한 후에는 그 증세가 심하게 나타났다. 제기랄! 그는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그때의 등골이 서늘한 느낌을 지금도 그는 잊을 수 없었다. 그 후로도 자주 무엇을 잊어버렸다. 출근하려고 차 문을 열려다 열쇠를 안 가져온 것을 알았고 고객과의 약속도 번번이 잊어 고객과 점장에게 비난을 받곤 했다. 그는 심호흡을 한번 하곤 점장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안에서 점장의 커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갑자기 긴장이 되었고 자신도 모르게 손이 윗옷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칼의 손잡이가 손바닥에 전해 왔고 그제야 그는 다소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꼈다. “어서 와요.” 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그는 친절한 점장의 태도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요즘 힘들지요? 우선 자리에 앉아요.” 점장은 그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하곤 손수 커피를 타왔다. 그는 긴장을 했다. 점장이 손수 커피를 타는 경우는 드물었다. “자, 한 잔 마셔요. 요즘 힘들 텐데 쉬엄쉬엄 해요. 우리 샵의 실적이 현대리 손에 달렸는데 무리하면 안 되지.” 점장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권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커피를 마시며 점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점장은 오늘은 주식이 올랐다는 둥, 하나마나한 소리만 지껄였다. 그는 사약을 먹는 심정으로 커피를 마시며 점장 뒷벽에 붙은 그래프를 바라보았다. 직원들의 이름이 가로로 적혀 있었고 이름 위에는 막대그래프가 그려져 있었다. 그의 이름 위에 있는 막대가 제일 길었다. 그 옆에 10월의 목표, 현재 누적 실적이 적혀 있었다. 10월의 목표에 현재까지의 누계가 3대가 모자랐다. 오늘이 10월 29일. 그렇다면 이틀 내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저 3의 숫자는 채워야 할 것이었다. 2대는 곧 계약 될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 문제는 한 대였다. “다 마셨으면 나가봐요.” 점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뜻일까. 그는 점장의 속마음을 짐작하려고 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한 대가 남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자 명치께가 싸르르 쓰려왔다. 점장은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밤에 통 잠을 못 잔다던데, 정말이에요?” 그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키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아니지요. 우리 샵의 판매왕께서 몸이 아프면 안 되지요. 몸이 건강해야 돼요. 며칠 사이에 많이 말랐어요. 힘내요. 돈을 많이 벌어야지요.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인데.” “…….” “참, 면도 좀 해요.” “했는데…….” 그는 손바닥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까칠한 느낌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왔다. 최근 들어 수염이 급속도로 자랐다. 아침에 면도하고 출근해서 거울을 보면 어느새 길게 자라나 있었다. 털이 난 부위도 늘어 눈 주위만 빼곤 온통 털이었다. 몸에도 처음엔 가슴에만 털이 좀 나는가 싶더니 온 몸이 갈색 털로 뒤덮었다. 샤워를 할 때 옷을 벗고 거울 보면 마치 원숭이 같았다. “했는 게 왜 그래요? 얼굴이 온통 털인데. 전에도 그렇게 털이 많았었나요? 깔끔해야지요. 그게 영업하는 사람의 기본이고 고객에 대한 예의고.” “알겠습니다.” “이제 곧 과장으로 승진도 할 텐데.” 점장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점장실을 나왔다. 등에는 땀이 식어 서늘했다. 그가 점장실을 나오자 동료들이 그를 일제히 바라보았다. 그는 되도록 그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벌써 10월인데도 사무실이 후덥지근한 것 같았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세 가지는 항상 가지고 다녀야 한데이.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가 어릴 때부터 한 말이었다. 첫째가 돈, 남자가 수중에 돈이 떨어지면 안 된다. 둘째는 거짓말, 셋째는 우산.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모르고 들었는데도 그 말이 잊히지 않고 계속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우산이 없어 가을비를 흠뻑 맞은 느낌은 여전했다. “현대리, 무슨 기미 없어? 오늘 내일 중에 우리 팀이 한 대는 팔아야 하는데.” 팀장이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 그는 점장에게 얻어 마신 커피 맛이 아직 입안에 있는 듯 침을 삼켰다. “없는데요.” “허허. 이거 어쩐다? 안 그래도 우리 팀이 꼴찐데 말이야.” 팀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개인 실적은 1위지만 그가 속한 팀은 샵에서 꼴찌였다. “하여튼 신경 써봐.” 팀장은 자신의 자리로 가며 말했다. 자폭하라는 의미였다.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팀원들이 차를 사서 실적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한다? 그는 곰곰이 생각했지만 하루 이틀 만에 한 대를 팔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곧 과장이 된다는 점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 갑자기 가슴이 방망이질 치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손에는 금방 땀이 나서 축축해졌다. 언제나 불안은 이유 없이 갑자기 찾아왔고 심장은 즉각 반응을 나타냈다. 몇 개월 동안 불면증에 시달리고부터 그 증세가 부쩍 심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에 손을 넣어 칼을 만지작거렸다. 불안하거나 가슴이 두근거릴 때 칼을 만지면 안정이 되었다. 칼은 미국 SLP2였다. 손잡이 위에 후레쉬가 달렸고 불꽃스틸점화 장치도 되어 있었다. 칼날은 스테인리스로 3인치짜리였다. 그는 아무래도 어젯밤 잠을 못 자서 그렇다고 칼을 만지며 생각했다. 그가 칼을 구입한 것은 우연이었다. 몇 년 전 차를 팔고 고객과 함께 갤러리에 들렀다가 칼을 사게 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작품은 생각나는 게 없고 딱 한 작품만이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작품은 단순했다. 사람 키만 한 거울 위쪽에 식칼을 붙여놓은 작품이었다. 이런 것도 작품인가 하며 그냥 지나치르던 순간이었다. 식칼이 천장의 불빛에 반짝 빛났고 그 느낌이 강하게 가슴으로 느껴졌다. 그는 작품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마음이 긴장되었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작품 앞에 섰다. 그때 그의 전신이 거울에 드러났고 정확하게 이마 부분에 식칼이 걸려 있었다. 옆에는 ‘나는 날마다 칼을 품고 산다’란 제목이 붙어 있었다. 처음 든 섬뜩한 느낌이 서서히 잦아들었고 곧이어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그는 한동안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자신과 이마에 걸린 칼을 바라보며 작품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마치 칼이 자신이 품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을 느꼈다. 그 작품을 보고 칼을 사게 된 것이었다. 칼을 만지고 있으면 불안하지 않았고 가슴도 두근거리지 않았다. 그 후로 그는 칼을 몸에서 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외출할 때면 지갑이나 차 열쇠보다도 칼을 먼저 챙겼다. 칼이 품속에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안정되었고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나 사람은 실수가 있는 법이었다. 언젠가 까다로운 고객과 상담을 앞둔 때였다. 며칠 동안 공을 들였는데 살 듯 말 듯했다. 그 날은 이상했다.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불안한 느낌이 스멀거렸다. 그는 단지 어제 잠을 자지 못 해 그럴 거라고 위안하며 고객과 상담 시간을 기다렸다. 고객과 상담 시간이 다가오는데 불안 증세가 더 심해졌다.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았다. 사무실에 앉아 있지 못 하고 연신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스포츠 신문의 야구란을 보기도 했다. 그래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곧 고객이 닥칠 시간이었고 차를 파느냐 마느냐 기로에 있던 상담이었다. 그는 고객이 올 시간이 되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칼을 만지면 좀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칼이 없었다. 그는 허둥대었다. 이럴 일이 없는데. 분명 칼을 가지고 나왔는데. 그는 상의 양복 왼쪽 오른쪽뿐만 아니라 바지의 모든 주머니도 뒤졌다. 칼이 없었다. 그제야 그는 아침에 출근하다 양복에 얼룩이 진 것을 보고 집으로 되돌아가서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왔다는 걸 알았다. 창밖을 보니 고객이 사무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불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칼을 확인하기 전에는 불안해도 칼을 만지면 된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을 참을 수 있었는데 칼이 주머니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마음은 더욱 더 불안했고 가슴은 곧 터질 듯이 뛰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고객은 자신을 맞이하러 나오는 줄 알고 그에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는 불안해서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연히 고객을 그냥 지나쳤고 택시를 타고 정신없이 집으로 갔다. 아내는 외출하고 없었고 옷은 안방 침대 위에 있었다. 다행히 칼은 양복 안쪽 주머니에 그대로 있었다. 그는 재빨리 칼을 꺼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칼을 움켜쥐었다. 마음이 서서히 안정이 되었다. 그렇게 30여 분이 지났을 때에야 그는 고객이 사무실로 들어오는 걸 봤다는 기억을 했고 부리나케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사무실에서 기다리는 건 고객이 아니라 점장과 팀장이었다. 점장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날렸고 팀장은 잡아먹을 듯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변명을 하지 못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외출할 때면 몇 번이나 칼이 주머니에 있는지 확인했다.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고객 명단을 훑어보았다. 급하게 차를 부탁할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달에는 자폭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는 J에게 전화를 했다. 어젯밤에 만났지만 전화를 해 봐도 손해 볼 거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J는 잠이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점심이나 같이 할까 해서.” 그는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J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을 했다. “월말이구나.” “응. 하지만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건 아니고. 내 실적은 채웠거든.” 그는 J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체면은 구겨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알았어.” J는 대신 드라이브를 시켜달라고 했다. 점심은 선약이 있다고 했다. 차를 팔아줄 테니 드라이브 시켜달라는데 거절할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좋지.” 그는 흔쾌히 대답하며 며칠 전 그녀에게 판 스포츠카 포르셰를 떠올렸다. 개구리 모양으로 납작 엎드려 눈을 동그랗게 뜬 모양의 911은 카레라s였다. 그가 미소를 짓고 있을 때 팀장은 그를 보았고 그는 팀장을 향해 엄지와 중지를 모아 동그라미 사인을 보냈다. 팀장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랍에서 면도기를 꺼내 화장실로 갔다. 어느새 수염은 얼굴을 덮고 있었다. 아무래도 병원에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얼굴에 거품비누를 발랐다. 그의 온 몸에도 점점 긴 털이 많이 나기 시작했다. J를 만나 섹스하고 나면 털이 부쩍 빠른 속도로 자랐다. 그는 면도를 하고 나서 사무실로 와 자리에 앉았다. J를 만나기 전 잠시 눈을 붙일 요량이었다. J를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의자에 머리를 뒤로 눕히고 눈을 감았다. 그리곤 J의 벗은 몸을 상상했다. 커다란 유방, 그 큰 유방 사이에 얼굴을 묻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J는 30대 중반의 나이로는 믿기는 않는 몸매였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몸매였다. 하루에 무슨 일이 있어도 2시간 이상은 운동한다는 그녀였다. 그는 처음 J를 만났을 때를 생각하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J는 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었는데 호박이 덩굴째 굴러온다는 말을 그때만큼 실감한 적은 없었다. 처음부터 J를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J는 고객으로 샵을 찾았고 그는 딜러로서 그녀를 맞이했다. 그녀는 붉은 색 원피스를 입고 갈색 선글라스를 쓴 채 사무실에서 마주 앉았다. 선글라스나 옷이나 가방이나 구두나 모두가 명품이었다. 보는 순간 주눅이 들 정도였다.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이 속옷이 보일까 아슬아슬하기도 했다. J는 처음부터 차종을 얘기했다. 포르셰였다. 포르셰는 외국차종에서도 고급이긴 했지만 더욱 의아한 것은 남자들이 주로 타는 스포츠카였다. 처음에 그는 우아한 벤츠나 BMW를 권할 작정이었다. “아니에요. 구일일 카레라 에스로 해주세요.” J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스포츠를 좋아하시나 봐요?” 그는 재빨리 포르셰의 자료를 챙기며 말했다. 그녀는 대답 없이 역시 미소만 지었다. 그는 포르셰에 대해 설명했다. “일반 차량은 클러치가 하나인데 반해 포르셰는 피디케이 차량으로서 클러치가 두 개입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대꾸 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듣는 둥 마는 둥 자신의 얼굴만 바라보는 그녀가 신경 쓰였지만 그는 열심히 설명했다. “…… 기어가 바뀔 때 클러치가 떨어지는 느낌, 즉 공회전 느낌이 전혀 없으며 빠른 변속을 자랑합니다. 그러니까 기존 기어 오단이 아니라 칠 단 기어로서 …… 또한 포르셰는 엔진이 뒤에 있습니다.” 역시 그녀는 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는 눈치 안 채게 심호흡을 한 후 계속 설명했다. “…… 이는 브레이크를 밟을 때 전륜과 후륜의 밸런스를 맞추기가 쉽고 가속 때는 구동되는 후륜에 좀 더 많은 힘이 실리기 때문에 바퀴가 헛돌 확률이 낮아지는 장점이…… 또한 시속 백 킬로로 주행하다 발에 조금만 힘을 줘도 시속 이백 킬로가 쉽게 넘어 버리고…… 가고 싶은 방향을 머릿속으로만 생각해도 어느새 차의 앞머리는 그쪽을 향해 버리는…… .” “어, 됐어.” 갑자기 J가 말을 끊고 반말을 했다. 그는 잘못 들었나 싶어 말을 멈추고 J를 바라보았다. 그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는 J는 선글라스를 벗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야 나. 전유정.” J는 하얗고 조그마한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는 손을 잡고 J를 빤히 쳐다보았다. “예?” “삼동초등학교. 전유정. 너 현수혁 아냐? 맞지?” J는 맞지? 하면서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깔깔깔 웃었다. 그는 잠시 의아하게 J를 바라보았다. 전유정. 그는 분명 아는 이름이었다.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을 뿐만 아니라 그가 살던 시골의 옆 동네에 살았기에 아는 것은 당연했다. 초등학교 졸업 뒤 가족이 서울로 이사하고 난 뒤 만나거나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다. 순간 그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솟구쳐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인생을 살다보면 예기치 않은 행운이 올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예감하고 있었다. “설마, 그 유정이?” 그는 반신반의했다. 단발머리에 코 흘리게 그 유정이가 이 유정이라니.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았다. “그래. 유정이. 아는구나.” J는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샵에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모두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동료들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찬찬히 J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약간 갸름한 얼굴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닮은 구석이라곤 없었다. “야, 여기서 만나다니 반갑다야. 동창회는 나가니?” 말투까지 서울말을 쓰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럼. 서울에만 초등 동기가 많아. 난 총무 맡고 있고. 아이러브서쿨에 홈쥐도 있어. 근데 어떻게 그렇게 연락이 없냐?” 그제야 그는 그 유정이가 이 유정인 것을 알았다. 코흘리개 시절의 동기들의 이름과 안부를 서로 묻고 하다가 이럴 게 아니라 점심이나 먹으며 얘기하자며 일어섰다. 그는 그런 와중에도 서류를 챙겨 J 코앞에 내밀었다. J는 계약서를 작성하고 계약금 5백만 원을 카드로 계산했다. 차 나오면 곧장 결제할게, 예쁘게 웃었다. 차가 나왔을 때 결제한 사람은 J가 아니라 모르는 남자였다. 그 남자에 대해서 그는 당연히 물어보지 않았다. 그와 J는 점심을 먹고 술을 간단히 한 잔 했다. 그러나 낮술은 금방 취했고 둘은 후식으로 커피를 한 잔 마시자며 함께 나가다가 호텔로 직행했다. 이런 행운이 찾아오다니. 그 날 그는 몇 번이나 믿기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보기까지 했다. 그 후로 그는 J를 자주 만났고 그리곤 술을 마시고 당연한 것처럼 섹스를 했다. 섹스는 또한 당연한 것처럼 J가 주도했다. 점심을 먹고 나자 J가 빨간 포르셰를 몰고 사무실에 나타났다. 동료들은 그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는 의기양양하게 J에게 갔다. “타.” J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 그는 차에 탔다. 어디 갈 거냐고 그는 묻지 않았다. 운전대는 J가 잡고 있었다.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충주 갈까? J가 혼잣말로 하다가 네비를 켰다. 충주를 입력했다. 170km로였다. 중부내륙고속으로 고! J는 차를 쌩 몰았다. 운전은 계속 J가 했다. 그가 하려고 했지만 오랜만에 스릴 좀 즐기자며 자기가 하겠다고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목표량은 채웠겠다 오늘 오후엔 마음 놓고 놀고 싶었다. 그는 차가 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전 J의 가슴을 살짝 꼬집었다. J는 아야. 콧소리를 냈다. 마치 발정난 암컷 고양이 울음소리 같았다. 차는 엄청 빨랐다. 포르셰를 팔기만 했지 직접 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100km에서 순간적으로 200km로 넘어갔다. 고개가 뒤로 저절로 젖혀졌다. 차가 앞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사물들이 뒤로 재빠르게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앞서 가던 차들도 죄다 뒤로 물러났다. 그는 은근히 두려움에 오줌을 약간 지렸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이런 속도로 가는 것은 그의 생애 처음이었다. 아. 하지만 J는 그와 달리 탄성을 질렀다. “난 있지. 이럴 때 오르가즘을 느껴. 마치 오줌보가 터져 나갈 거 같아. 아, 좋다.” J는 비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오르가즘을 느끼는가. 섹스할 때처럼 비음 섞인 신음 소리를 냈다. 속도계가 어느새 250km를 가리켰다. 정말로 J의 오줌보가 터질까 걱정이 되었다.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주먹을 쥔 채 앞만 바라보았다. 이러다 사고 나서 죽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J를 만날수록 그는 걱정 되는 게 또 있었다. 물론 아내에게 들킬까, 하는 그런 좀팽이 같은 걱정은 아니었다. J와 만나 섹스를 거듭 할수록 그는 혼돈을 느끼는 일이 잦아졌다. 수시로 차 열쇠 놓은 곳을 잊어버리기도 했고 사는 아파트 동 호수를 잊어버리기도 했다. 당신 그러다 나까지 몰라보는 거 아니에요? 아내가 근심스런 눈길로 묻기까지 했다. 몸에도 서서히 털이 길게 자랐다. 거뭇하던 털이 J를 만날수록 손가락으로 잡으면 잡힐 만큼 자랐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면도는 자주 하면 되었고 몸에 난 털은 옷을 입으니 괜찮았다. 무엇보다 J를 통해 섹스를 하고 차를 파는 것이었다. 그는 사실 J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아직 미혼이라는 것. 일본에 자주 간다는 것. 그리고 남자들, 특히 나이 많은 남자 몇이 주위에 있다는 것 정도였다. 사는 곳도 몰랐고 하는 일도 몰랐다. 다만 굉장히 돈이 많았고, 돈이 많은 사람들을 많이 알았다. 한 달에 몇 번씩 J는 그에게 고객을 소개해 주었다. 어느새 차는 충주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충주까지 채 40여 분이 안 걸린다는 사실에 그는 놀랐다. “어디 갈까?” J가 말했다. “탄금대 갈까?” 그가 말했다. 언젠가 친구들과 함께 간 기억이 있었다. “탄금대?” “옛날 우륵이 가야금 연주하던 대라지?” “렛츠 고!” J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잘 숙련된 말처럼 그들을 금방 탄금대로 데려다 주었다. 그와 J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다정한 연인처럼 손을 잡고 탄금대로 올라갔다. 울창한 송림이 우거져 있고 절벽을 따라 시퍼런 남한강이 휘감아 돌고 있어 경관이 매우 아름다웠다. "야, 좋다." J는 시퍼런 강을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그도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두 팔을 들어 기지개를 폈다. "저기 앉자." 그는 나무 의자에 J를 데리고 가 앉았다. 앉아서 앞을 바라보니 저 멀리 계명산과 남산 그리고 충주 시가지가 한 눈에 보였다. 또한 넓은 평야지대가 그림같이 펼쳐져 절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와 J는 한동안 강물과 평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몇 되지 않았다. "나 내일 일본 가." J가 말했다. 그는 왜 가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언제 오냐고 물었다. "글쎄. 가 봐야 될 거 같아." J는 확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순간 다시는 J를 못 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행운을 놓치다니. 그는 아쉽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일찍 와. 보고 싶잖아." 그는 J의 손을 잡았다. "그래. 가능하면." J는 그의 귓불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으며 말했다. 그는 손으로 J의 가슴을 만졌다. 탱탱한 느낌이 손에 전해왔다. 귓불을 깨물던 J가 그의 바지 앞섶을 더듬거리더니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는 손을 J의 윗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J의 몸이 움찔거렸다. "저리로 가자." 그는 아무래도 트인 공간에서는 신경이 쓰였다. J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솔숲 속으로 들어갔다. 소나무 밑에서 J는 그를 쓰러뜨리고 바지를 벗겼다. 그는 J가 하는 대로 가만히 두었다. 그의 옷이 다 벗겨지자 그도 J의 옷을 벗겼다. 아. J는 그의 몸 위에 올라가 신음 소리를 냈다. 솔숲이라 해도 시퍼런 남한강과 넓은 평야가 보였다. 또한 짙푸른 하늘에 눈이 부셨다. J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는 J의 율동에 따라 엉덩이를 움직여주었다. 그러다 그는 문득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J가 아닌 전혀 낯선 사람하고 하는 것 같았다. 며칠마다 섹스를 했기에 그 느낌이 생생한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달랐다. 눈을 뜨니 커다란 유방을 흔들며 올라탄 여자는 분명 J가 맞았다. 그는 J의 유방을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이번엔 몸 어디서 피시시, 하고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몸이 쭈그려드는 것 같았다. 그는 어젯밤에 잠을 못 자서 몸이 피곤해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아. J의 몸놀림이 빨라졌고 그에 따라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더 크게 나는 것 같았다. 몸은 쭈그려들어 이제 한 줌만 남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그만 하자고 일어설 수는 없었다. 그의 몸에서 바람이 죄다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을 때 그는 끙, 하며 사정을 했고, 몸을 비틀던 J가 그의 몸에서 내려왔다. "어마. 털 좀 봐." J는 그의 몸을 바라보며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몸을 보았다. 온통 까만 털로 덮여 있었다. 어제 보다 2-3cm는 더 자란 것 같았다. "동물 같아." J는 그의 몸에 난 털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는 너무나 피곤해 대답을 않고 한동안 그대로 누워 있었다. 어떻게 서울로 돌아왔는지 그는 기억에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차가 그를 태우고 아파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피곤했기에 가장 가까운 빈자리에 차를 주차시켰다. 그리곤 곧장 아파트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거울속의 자신의 모습에 그는 흠칫 놀랐다. 눈은 퀭하니 들어갔고 얼굴 전체가 수염으로 텁수룩했으며 볼은 움푹 꺼졌다. 그는 며칠 동안 아무 일도 안 하고 잠만 잤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7층에 내렸다. 그리고 자기 집 초인종을 눌렀다. 아득히 먼 곳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시 한 번 더 눌렀다. 하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아내는 어디 간 것 같았다. 그는 급하게 열쇠로 문을 따고 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몸을 누일 작정이었다. 앗! 그는 들어가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남의 집이었다. 그는 흐릿한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문 앞 팻말을 보았다. 706. 자신의 집 호수가 맞았다. 이런. 그는 다시 한 번 더 확인한 후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역시 남의 집이었다. 우선 자주 보던 텔레비전이 달랐다. 자신의 것은 스탠드형의 낡은 텔레비전이었는데 거실에 있는 것은 새것의 LED 텔레비전이었고 벽에 걸려 있었다. 크기도 엄청 더 컸다. 주방에 있는 탁자도 달랐다. 닮은 것은 냉장고뿐이었다. 냉장고에 붙은 치킨이나 중국식당 병따개만 눈에 익숙했다. 그는 누구 안 계셔요? 하고 불러 보았다. 인기척이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 드러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한 10분만 드러누울까. 하지만 그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라도 피해를 준 적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풀려오는 다리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아마도 동을 잘못 찾은 듯 했다. 에이, 하필이면 오늘같이 피곤한 날에. 그는 윗주머니에서 칼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중년의 여자 한 사람과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사내애가 타고 있었는데 역시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그는 한 쪽 구석으로 가 서 있었다. 여자와 남자애가 자꾸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만약 피곤하지 않다면 계단으로 내려갔을 텐데. 그는 자신을 타일렀다. 밖으로 나온 그는 하늘을 향해 삐쭉이 솟아 있는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거의 집마다 불이 들어와 아늑하게 보였다. 그는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서둘렀다. 몹시 피곤했기에 빨리 집으로 가서 드러눕는 게 급선무였다. 그는 아파트를 둘러보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 103동이 맞았다. 아파트 입구에서 들어오면 왼쪽의 두 번째 동이 확실했다. 그는 마치 꿈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확실하게 해야겠다며 아파트 입구로 걸어갔다. 그때 입구 왼쪽에 있는 관리실의 경비원이 그를 보고 알은 체를 했다. 그리곤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아랑곳 않고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했다. 맞구나. 그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7층에 내려 706호 앞에 섰다. 호수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아득한 소리만 들릴 뿐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그는 몹시 피곤했기에 열쇠로 문을 열었다. 집으로 들어간 그는 또다시 에이! 하고 고함을 질렀다. 역시 남의 집이었다. 아까 다녀온 그 집이었다. 제기랄! 그는 가래침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파트 밖으로 나온 그는 갈 데가 없어 화단 앞에 앉았다. 칼을 꺼냈다. 칼날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날카로운 느낌에 그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그는 칼을 두 손으로 가슴에 품었다. 마음이 편해졌다. 순간 그는 얼굴에서 열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갑자기 온 몸이 뜨거워졌다. 그는 양복을 벗었다. 그래도 더웠다. 그는 와이셔츠를 벗었다. 그래도 더웠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치기 위해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그러나 얼굴에서 느껴지는 건 길고 꺼칠한 털이었다. 그는 뭔가 잘못 됐다는 걸 느끼면서 너무나 더워 바지를 벗었다. 팬티까지 벗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너무 피곤했기에 칼을 가슴에 품고 옆으로 누웠다. 참으로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곧 졸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엄마, 여기 이상한 동물이 있어.” “어머. 이게 무슨 동물이지?” “곰인가? 근데 팬티까지 입었네.” “가슴에 칼도 있어요.” “이상하네. 무슨 동물이지. 빨리 경비원한테 알려.” “동물보호소에 연락해야 되는 거 아냐?” 그는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는 걸 느꼈다. 그는 일어서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했기에 일어설 수가 없었다. 끝 *경북 상주 출생. 한국작가회의 회원. 소설집 『소도(蘇塗)』『아버지의 알리바이』 서양화 개인전 1회(2011년) 문학웹진 <문학마실>편집인 이메일: sgamm@hanmail.net  
258 얼룩 외1편/김진희 file
편집자
2836 2013-01-01
13.1월 32호 시  얼룩 김진희 아무도 손대지 않은 새 책 지문 묻히는 맛으로 도서관에 간다 그 맛에 혼자 우쭐하며 마종기 시집을 넘기는데 누런 얼룩이 보인다 보일 듯 말 듯한 얼룩 아무도 몰래 오줌을 지린 자국 같기도 한 맑은 하늘에 살짝 구름이 스친 것 같기도 한 얼룩 ‘자장가’라는 시가 쓰인 책장은 모서리부분이 아주 미세하게 삼각으로 접혀있다 누군가 그 시를 읽고 속으로 울었나보다 치매 걸린 늙은 어머니에게 자장가 불러주는 나이든 아들의 모습을 자신에게 겹치며 가슴이 짜안해져 조용히 모서리를 접으며 붉어지는 두 눈을 누르며 무너지는 자신의 가슴 한쪽에도 슬그머니 사선으로 작대기를 받쳐두었나 나는 자국을 따라 살짝 접었다 펴본다 책장 모서리가 고개 숙이며 안녕, 인사를 한다 느닷없는, 죽음 겨울이 시작될 무렵, 밤길에 느닷없이 튀어나온 고라니에 가슴 쓸어내린 일이 있다 자동차 범퍼에 부딪치는 둔탁한 느낌에 브레이크도 밟지 못하고 두 발을 벌벌 떨었다 어린 고라니는 다시 일어나 겅중겅중 제 집을 찾아 떠났지만 가끔 고라니의 안부가 궁금했다 그리고 느닷없는 죽음이 이어졌다 80년대 민주화 투쟁으로 심한 고문을 받은 이가 고문후유증으로 느닷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괴롭힘 당하고 두드려 맞았던 중학생이 또 느닷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학교는 서둘러 방학을 했다 아이는 친구들에게 맞아 멍이 들면서도 엄마, 아빠 앞에서 겅중겅중 걸으며 어리광을 부렸다 백 년이고 천 년이고 하늘나라에서 엄마, 아빠를 기다릴거라고 유서에 남겼다 어린 몸 받아줄 따뜻한 두 손이 없어서 공중의 몸 땅에 내려줄 부드러운 목이 없어서 계단 난간에 아이를 매달고 겨울바람 속에서 부르르 떠는 아파트, 그 안의 우리 오래 고통 받은 영혼은 이 땅에 두 발 붙이는 걸 거부하고 안식처를 찾아 서둘러 방학식을 하는가 우리는 늘, 뒤늦게, 브레이크 밟을 정신도 없이 멍청하게 경악을 한다 두 발을 벌벌 떨면서도 다시 시동을 걸고 가던 길을 간다 비루한 일상을 향해 속도를 올린다 **1969년 부산 출생. 제1회 경남작가 신인상, 시집 <굿바이, 겨울>  
257 번호판 없는 고라니 외1편/오형근 file
편집자
2708 2013-01-01
13.1월 32호 시  번호판 없는 고라니 오형근 깜깜밤중 고속도로, 길 잃은 한 마리의 고라니가 달린다 두 동강 난 산기슭에서 떨어진 고라니에게는 질긴 타이어가 없다 지칠 줄 모르는 엔진도 없다 놀란 가슴만 있는 고라니의 숨결은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고 눈에서는 점점 눈물이 맺히는데 건너편 차선에서 사납게 달려오는 자동차의 불빛에 고라니의 몸뚱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몇 번, 고라니에게는 질긴 타이어가 없다 지칠 줄 모르는 엔진도 없다 자동차처럼 좌우측 깜빡이도 없다 이제는 고라니의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끼어 있던, 엄마와 형제의 오줌 냄새가 스며 있는 달콤한 흙마저 떨어져 나갔다 고라니의 뒤에서 자동차가 냅다 덮친다 사람의 비명 소리가 칼날을 펴고 화들짝 날아올랐지만 자동차처럼 번호판 없어서, 나동그라진 고라니가 어떤 고라니인지 알 수 없었다 無題 ……인간에대한절망인간에대한희망 사 이 내가건너야할세상이구름다리처럼흔들흔들놓였는데일단은똥잘싸고밥잘먹을일이다잠도잘자고숙제인금생今生을,일단은견디고잘견디고볼일이다잘! **1988년 《불교문학》신인상, 2004년 《불교문예》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시집 『나무껍질 속은 따뜻하다』와『환한 빈자리』  
256 늪 외1편/박경조 file
편집자
2505 2013-01-01
13.1월 32호 시  늪 박경조 자두 밭 진입로에 느닷없이 빠져버린 자동차 바퀴 호위하듯 비행하는 고추잠자리 떼 레커차가 도착하고 늪의 깊이를, 상심한 나를 들어 올려야 한다는 것, 모를 일이다 다시 먹구름 떼로 몰아오는 장대비 빠져 나오려 발버둥 칠수록 그 오기만큼 깊어지는 미궁 앞에서 이미 잘못 든 길이라는 것 알아차렸을 때 직진도 후진도 불가능한, 저 수렁 속 끝이 어딘지를 지금 나는 묻지 않기로한다 소용돌이 선명한 바퀴자국에도 당당하게 꽃 피우고 지워내는 법칙 있을 것이므로 자동차와 레커차, 당신과 나 비 개일 이 늪에도 젖무덤 돌아 갈 길 없는 벼랑 이다 북부지방에서 출발한 칼자루 쥔 안락사 파문 온 몸을 헐어서라도 제 새끼만은 결코 포기 하지 않는 세상어미들의 최후의 사랑 법 퉁퉁 불은 젖 실컷 한 번 먹이고 난 어미소 아, 깊이깊이 주저앉은 붉은 몸자리 필사적인, 노산의 마른 젖 염치없이 빨아대던 막내 잦은 젖몸살로 키워 낸 내 엄마의 역사도 저러했을까 나 언제 되돌아가 팔베개하고 어루만질 살갗을 맞댄 것들의 뜨거운 눈 맞춤 ** 경북 군위출생 2001년 계간<사람의 문학>등단 시집<밥 한 봉지>  
255 우리말 공부1 외1편/김종인 file
편집자
2792 2012-12-01
12.12월 31호 시  우리말 공부1 - 가을귀* 김종인 도라지, 패랭이, 마타리, 개억새 같은 꽃무더기 지천으로 피는 가을꽃떼 위로 가이없는 갈기슭에 갈새가 우네 갈매하늘 아래 어디로 흘러가는가 가을하고 난 강벌을 지나가는 강물나그네 강여울 따라 눈부시게 빛나는 강심 모진 세월 억세게 견디어 온 가톨 같은 벗이여 하늘하늘 갈꽃처럼 또 헤어져야 하는가 갈기슭 오솔길 너머 흘러가야 하는가 바삭거리는 갈비를 밟으며 세월의 미세한 흐름까지 읽는 가을귀, 간들바람에 낙엽이 지는 소리 그대는 떠나고, 떠나가고 낙엽이 지네 가을꽃떼는 지천으로 피고 낙엽이 지네 * 가을귀 : 가을의 예민한 소리를 들어내는 섬세한 귀를 비유한 말. 가을꽃떼 : 도라지꽃, 패랭이꽃, 마타리꽃, 싸리 등 가을에 피는 꽃무더기. 가톨 : 세톨박이 밤의 양쪽 가에 박힌 밤톨. 가이없다 : 끝이 없다. 한이 없다. 강물나그네: 강을 곧잘 건너는 사람. 떠돌이를 비유한 말. 강가슴 : 강의 한가운데. 강심. 우리말 공부2 - 꽃무덤* 같은 사랑 꽃담 속에서 살아본 적 없노라 꽃트림 한 번 해 본 적 없고 꽃타래 한 번 목에 걸지 않았노라 꽃국물 진하게 먹어보지 못하고 평생을, 가시울타리나 돌담, 철창 속에서 보냈노라 진달래 꽃비처럼 떨어져 이제 꽃그늘 속에 묻혔거늘 산 자여 여기와 노래하지 마라 꽃눈개비 떨어지는 꽃불무덤으로 꽃처럼 아름다운 이름이라 부르며 꽃울음 흐느끼지 마라 꽃샘추위만 와도 이불 속에서 꽃처럼 붉은 눈물, 어쩌구 할 테니 차라리 꽃바다에 빠져 죽어버려라 꽃무덤 같은, 사랑이여. * 꽃무덤 : 아까운 나이에 죽은 젊은이의 무덤. 꽃국물 : 고기를 삶아낸 뒤에 물을 타지 아니한 진한 국물. 꽃멀미 : 꽃의 아름다움이나 향기에 취하여 일어나는 어지러운 증세. 꽃불무덤 : 불이 일어날 정도로 뜨거운 가슴을 죽음의 상태로 비유한 말. 꽃타래 : 꽃이 주절이주절이 많이 피어 있음을 실타래에 비유한 말. 1954년 경북 금릉 초실 출생. 1983년 겨울 『세계의 문학』에 작품 발표 시집『흉어기의 꿈』 (서울, 온누리),『나무들의 사랑』(대구, 문예미학사), 『내 마음의 수평선』(서울, 시에) 등 분단시대 동인,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현재 김천생명과학고 교사로 근무 * 주소 : 740-070 경북 김천시 황금동 74-2번지 * 메일 : kmt820@hanmail.net  
254 허공 앨범 외1편/하재영 file
편집자
2677 2012-12-01
12.12월 31호 시  허공 앨범 이담에는 셔터를 누를 수 있겠지 놓친 풍경을 바라보며 약속한 후일 꿈같은 집 짓고 꽃씨 뿌린 텃밭에 물을 주는 그러면서 더딘 열매도 기다리는 감나무 몇 천천히 걸어가는 시골 풍경도 그랬다 머문 주소지를 바꾸는 것들의 손수건만 풍경 조각보 잇듯 이어 한 묶음 추억으로 담은 허공 앨범 어머니는 늙어 제대로 걷지 못하고 아이들은 자라 어른이 되었다 아무 때나 넘겨보아도 사람의 어깨 높이 머문 붉은 노을로 마음 밭 이쪽저쪽 인화해 놓은 허공 앨범 주사위 창문을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내는 바닷가 집 짓는 곳에 떨어진 허드레 나무를 정육면체로 잘라 주사위를 만든다 머리를 이등변삼각형으로 올리고 그 아래 직육면체의 남자와 정육면체의 여자가 작은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하는 삼각뿔 다락방에서 내다보는 창문으로 팽팽한 연실처럼 수평선은 걸려있다 수평선은 몇 척의 배를 얼레로 띄우고 아침 하늘에 태양을 올린다 천천히 사포로 문지르는 주사위 동서남북 사방으로 맨질맨질 희노애락을 새기고 그리고 빈 공간 두 면에 유효한 하늘과 땅을 놓는다 완성한 주사위를 던진다 창문으로 보이는 바다에서 봄과 여름이, 여름과 가을이, 가을과 겨울이, 겨울과 봄이 데굴데굴 구른다 주사위 한 개 집 안에서 음표로 흐른다 <충청일보> 신춘문예 동화,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계몽아동문학상 장편소년소설 당선. 지은 책 동화집 : 『안경낀 향나무』, 『할아버지의 비밀』, 시집 『별빛의 길을 닦는 나무들』 현, 포항문예아카데미원장  
253 그리움 박물관 외1편/이승진 file
편집자
2955 2012-12-01
12.12월 31호 시  그리움 박물관 이승진 50년 지난 촌집도 사람이 살면 무너지지 않는다. 내 보내고 싶지만 마음 안에 살던 촌년 그대로 두기로 한다. 50년 지난 이 촌놈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눈이 그네를 타는 아침 눈이 내린 아침 놀이터에 가 봐. 몇몇 녀석이 그네에 앉아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참 이상해 어떻게 그네에 앉을 생각을 했지 밤새 이곳까지 오려고 힘들었을 눈을 생각해 봐 그네에 앉은 녀석들이 등을 밀어주길 기다리고 있을 거야 살금살금 다가가 녀석들이 앉아있는 그네를 밀어보아 눈이 그네를 타는 아침 누군가 그대가 탄 아름다운 놀이터를 살살 밀어줄 거야 상주문협회원. 시집『사랑박물관』 폰) 016-456-0676 메일)snonggu@gyo6.net  
252 목로주점 외 1편/이창한 file
편집자
2814 2012-12-01
12.12월 31호 시  목로주점 홍소 이 창 한 겨울 해지고 어스름이 깔리면 탁자위에 백열등이 말갛게 켜지고 가지런한 나무의자는 가로 세로 높이를 맞춘채 반질거리는 얼굴로 손님을 기다린다. 칸막이 쳐진 부엌쪽에서 나무타는 냄새가 푸르스럼하게 깔리고 연신 사기그릇 부딪는 소리가 구부려 드나드는 쪽문 사이로 드문드문 새어나온다. 한데 바람은 가게 문 밖에서 유리문을 잡고 흔들며 징징거리고 신작로쪽 떡방앗간 짚가리 돌아서 패를 이루며 왁자한 소리로 들이닥치는 술꾼들 싸늘한 바람과 함께 얼어 푸석한 얼굴을 연신 문지르며 부엌쪽으로 인사를 건넨다. 순간 바람에 흔들거리며 어두움에 발그레한 빛의 파문을 일으키는 백열등 구석구석 벽을 어루며 비추는 낮은 촉수 검은 그림자로 길었다 짧아졌다를 반복한다. 뜨거운 국물이 나오고 서둘러 후후 불어가며 주객들의 입김이 천정으로 향할 때 마다 더운 입김은 따뜻한 백열등빛에 비추어 직선으로 곡선으로 둥글게 말리며 무대위의 조명처럼 현란하다. 권하며 술 따르는 소리사이로 간간이 섞여 나오는 호탕한 웃음과 탁자를 두드리는 손바닥 소리 주인은 저쪽에 멀뚱히 혼자 앉아 마른 명태의 눈알을 씹고 있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저 깊은 어두움의 시간은 이어지고 겨울바람은 목로주점 밖에서 유리문을 흔들며 마냥 서성이고 있다. 자 존 심 비오는날 고인 빗물에 수많은 파문이 동글동글 눅눅한 대문간에 목줄도 없는 그래서 더욱 갈데도 없는 반질반질한 검은 승용차 촤-아 빗물을 틩긴다 흠뻑 뒤집어쓴 개한마리 후루루 빗물을 털며 고급 승용차 뒤쪽을 보고 야! 이! 개새끼야!! 경북 상주시 개운동 605-12 054)535-4411, 010-5535-4411 시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2009) 영강 지상백일장 시부문 당선 (2010) 월간 문예사조 신인상 시 당선 (2010) 월간 문예사조 신인상 수필 당선 (2011. 2) 상주문협회원 E-mail : saman01@hanmail.net  
251 시간의 저편/박문구
편집자
2609 2012-12-01
12.11월 30호 소설  「시간의 저편」 박 문 구 Ⅰ 입술과 목이 계속 말라 갔다. 낮 열두 시. 2리터짜리 석수를 벌써 두 통째 마시고 있지만 그것도 이미 달리는 봉고의 요동에 따라 물통 바닥에서 찰랑거렸다. 하늘에는 뭉툭뭉툭 흩어져 떠 있는 흰 구름 몇 점이 낮은 구릉 위에서 정물화처럼 박혀 있다가 가끔 부는 약한 바람에 천천히 이동했다. 다시 물통 뚜껑을 열면서 운전기사 옆에 앉아 정면만 응시하는 규호의 뒷머리에 대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야, 다 와 가는 거야?」 아주 낮게 천천히 물었지만 그 속에는 목마름에 지친 나의 짜증이 숨어 있었고 규호는 물론 그 말의 속뜻을 금방 알았을 것이다. 「거의 다 왔어. 좀 서둘지 말고 느긋하게 기다려야 이놈아. 여기서는 급한 놈 못 사는 곳이라는데 자꾸 그러네.」 도착한 지 이틀째부터 입안이 깔깔해지기 시작하더니 오늘 4일째에는 증세가 더 심해졌다. 그냥 목만 마르면 냉수로 적시면 되겠다지만, 입 안 전체가 바짝바짝 마르는 것뿐 아니라 아예 입술 언저리까지 죽죽 갈라지는 형편이었다. 물을 입 안 가득 넣고 몇 번 입 속에서 물을 굴리다가 시원한 물기가 머릿속까지 적셨다고 생각되면 조금 마신 후, 남아 있는 물로 혀를 가능한 한 길게 내밀어 입 주변을 둥글게 핥아댔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잠시 후면 다시 바짝 마른 입술이 쩍쩍 붙으며 갈라지는 것이었다. 달아오른 대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낮의 열기마저 갈라지는 입술에 한몫했다. 눈길이 닿는 곳은 오직 발목에도 미치지 못할 키 작은 풀로 덮인 대초원과 평면으로 펼쳐진 지평선의 단조로움에 조금씩 변화를 주는 야트막한 구릉뿐. 그 사이를 질주하는 국산 그레이스 봉고의 딱딱한 좌석에서 우리는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의 장관만 계속 보고 있었다. 그 광경은 동일 장면을 연속으로 찍어낸 필름을 보는 것처럼 계속 이어져서, 바라보는 나는 혀뿌리가 뽑힐 정도로 길게 혀를 내밀어 연신 입술 주위를 핥아댈 일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나마 가끔씩 그들의 주거지인 겔이 멀리서 보이고 그 주변에 말떼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모습이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움직임의 맛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람이 없다는 것.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아득한 저 멀리 얕은 구릉이 지평선을 이루고, 그 지평선과 하늘이 맞닿은 부분이 푸르스름한 몽환의 세계를 펼쳐내는 광경은 나에게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경이로운 것이었다. 지난 시간, 숱한 사람들과 부딪쳐 온 그림들로 이루어진 내 머릿속을 다 지워버리고, 다시 백지 위에 원시의 광막함을 가득 담은 새로운 그림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나로서는 손 댈 수 없는, 이곳 사람들의 삶만이 스며든 곳에서 난 값싼 이방인으로서 그냥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다시 목이 말라 물통을 통째로 입에 쑤셔 박았다. 아랫배에 다시 묵직하게 통증이 왔다. 역시 이곳에 와서부터 목마름과 함께 나타난 증상이었다. 도무지 시원하지 않았다. 밤에 우리나라의 보통 여관 급 정도인 이곳의 호텔에서 몇 번이나 배변의 욕망을 풀고자 노력했지만, 헛방귀 끝에 토끼똥만큼 떨어지는 느낌 이외에는 답답하게 고여 있는 내 몸의 찌꺼기가 그저 아랫배 속에서 묵묵히 남아 있었다. 그놈은 내가 이곳에서 지낼 십여 일 동안 나와 같이 먹고 자고 움직일 생각으로, 내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술로 엷어진 대장 속에서 죽치고 있을 것처럼 생각됐다. 나는 평소에는 배변의 습관이 철저하게 몸에 배어서 아침 세수 전에는 반드시 변을 시원하게 보고야 모든 일을 시작했었다. 그저 변기에 앉으면 자연스럽게 간밤의 내 모든 영양식의 잔해가 너무나 쉽게 빠져나왔다. 「평소에 변 한번 시원하게 보는 것이 소원이요.」 언젠가 공무원인 사촌 동생이 90킬로의 거대한 몸뚱이를 삼겹살이 익어가는 술상 앞에서 비스듬히 뒷벽에 기대며 하던 답답한 말도 난 그냥 우습게 지나쳤던 일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 말이 유독 기억에 남은 것은, 모두들 맛있게 먹고 마시던 사촌들과의 오랜만에 갖는 저녁 식사에서 가장 몸이 비대하면서도 도무지 젓가락을 대지 않고 퉁퉁한 몸만 이리저리 흔들어 대던 그의 커다랗고 다분히 우스꽝스러운 얼굴 탓도 있었지만, 맛있는 음식 앞에서 그의 몸짓만큼이나 서툴게 새어나오는 그의 몇 마디 단어가 나를 눈살 찌푸리게 했던 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를 괴롭혔던 변비의 고통을 그때는 이해하면서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생각되었지만, 막상 이곳에서 그 고통이 나에게 다가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기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벌써 3일째. 현지인 기사를 포함하여 모두 다섯인 우리는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에 눈길을 보내면서도 그것들을 익히 알고 있었던 양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잡담을 풀어내거나 아니면 규호에게 하릴없는 물음을 던졌는데, 그러나 던지는 말도 되던지는 말도 서로의 시간을 조금씩 잠식해 들어간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딱히 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건조하고 지루해서 날짝지근하게 느껴지는 시간의 틈을 농담으로 메우면서 우리는 계속 나아갔다. 야트막한 언덕 옆을 지나가자 길 오른편으로 나무가 우거진 그 틈에 뭔가 햇볕에 반짝였다. 「형! 저기 냇가에서 좀 쉬다 갈까?」 운전석 뒤 여자 곁에 앉아 말 한마디 없이 잠잠하던 병호도 그것을 본 모양이었다. 지루한 얼굴로 뒤돌아보며 말했다. 「야, 규호야. 좀 쉬었다 가자. 저 냇가에서 얼굴도 좀 씻고……급한 일 있나.」 규호가 현지말로 운전기사에게 뭐라고 중얼거리자 봉고는 길 한편으로 비스듬히 섰다. 모두들 구겨진 몸을 펴면서 나와 옷을 털었다. 막막한 초원에서 차가 다니는 황톳길은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워낙 요철이 심하고 굽이가 많아서 속도를 낼 수 없는데, 그나마 조금이라도 속도를 줄이면 뒤에서 불어오는 황토먼지가 그대로 차창으로 밀려들어 와서 차 안은 먼지로 가득 차 버렸다. 우린 먼지를 털면서 냇가에 얼굴과 손을 씻었다. 신기한 장면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이 초원 한복판을 사행(蛇行)하면서 흘러가는 냇물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저 넓은 초원과 푸른 하늘과 힘찬 말과 한가한 양떼의 상상으로 우리 머릿속은 가득 차 있었으니까. 더구나 버드나무와 자작나무가 냇가 주변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광경은 저 멀리 뻗어나간 초원만 아니었더라면 흔히 볼 수 있는 우리의 고향 언덕을 연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는 습기를 머금은 풀밭 위에서 시원하게 흐르는 냇물로 얼굴과 손을 씻었다. 냇물은 이곳 더위와는 다르게 아주 차가왔다. 나와 규호, 병호와 그가 데리고 온 삼십 대의 애화라는 여자, 그리고 퉁퉁하게 살이 붙고 검게 타서 뒤웅스럽게 보이는 사십 대 운전기사 엘카, 이렇게 다섯은 먼지투성이의 옷을 털면서 굳은 몸을 폈다. 대학 동창인 규호는 이곳 몽골에서 8년째 살아가고 있어서 거의 현지인이 다 됐다. 현지어를 유창하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의 습관과 풍습을 본능적으로 몸이 익혔다. 더구나 인적 관계의 다양함으로 인해 울란바토르 시내에 펼쳐 놓은 네 군데 사업장은 그런 대로 운영되는 것처럼 보였다. 「애화씨도 얼굴을 씻으세요. 아주 시원한 게 정신이 번쩍 듭니다.」 손만 살짝 씻고는 우리들 뒤에서 서성대고 있는 여자에게 말했다. 그러나 난 여자가 결코 얼굴을 씻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 병호 녀석이 데리고 왔을 때부터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키를 숨기고자 밑창이 거의 5센티나 될 정도의 높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는데, 인천 공항에서 만날 때부터 여자는 거울이나 유리창만 보이면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얼굴 화장이나 옷맵시를 고치곤 했다. 그리 길지 않은 머리를 참새 꽁지처럼 뒤로 묶어서 산뜻하고 젊은 맛을 보이고 있었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얼굴 이곳저곳에 살짝 드러난 주름살을 짙은 화장으로 숨기고 있었다. 눈이 유난히 작았고 턱이 약간 길게 느껴져 반드레한 모습이었다. 눈썹을 밀어버리고 아이펜슬로 짙푸르게 가느다란 반달 모양으로 그린, 때문에 훤한 대낮의 세수란 아예 금기일 것이라는 것도 짐작했다. 「전 괜찮아요. 물이 굉장히 시원하군요.」 세수를 하면서 난 그녀를 보았다. 앉아서 손을 씻고 있었다. 손마디에 살이 별로 없고 가늘게 말랐다. 그러나 그녀의 엉덩이는 밋밋한 가슴과는 달리 통통하니 살이 붙어서 가느다란 허리를 받쳐주고 있었다. 허리띠 없는 푸른 청바지와 녹색 짧은 상의 사이에 허연 뒷등이 드러났다. 그 밑으로 살짝 검은 망사의 팬티가 보였다. 어제는 흰색 팬티를 입었었다. 그녀는 상의를 정확하게 바지 허리선에 닿도록 상의 아랫부분을 그 선에 맞추고 남은 부분은 안으로 접어 넣었으므로 식사 때 의자에 앉거나 조금이라도 허리를 굽히면 허리 살과 속옷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때로는 마주 보며 이야기할 때 상체를 위로 살짝 젖히면 깨어진 흰 바둑돌 같은 배꼽도 볼 수 있었는데, 그런 점에 그녀는 신경이 가는지 가끔 웃옷을 잡아 내리기는 했지만 그 순간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매를 숨기는 척하면서도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보이면서 자신의 날씬한 허리선을 자랑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병호는 물론 이런 점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었지만 그저 슬슬 웃고만 있었다.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가벼운 역겨움 정도는 이런저런 여자들 틈에서 많이 겪었던 터이므로. 다시 차를 탔다. 2 오후 한 시를 넘기고부터는 초원을 가르는 포장도로를 따라 계속 달렸다. 말만 포장도로였다. 사이사이에 이빨 빠진 듯이 싯누런 황토가 벌려 있어서 엘카는 계속 곡예운전을 했다. 우리들의 일정은 국립공원인 헤렐지를 들르고 돌아오는 길에 얼림벌랑이라는 분지에 있는 유목민 통나무집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규호는 헤렐지는 못 가더라도 얼림벌랑만은 반드시 보아야 한다고 우겼다. 왜냐고 물으면, ‘가 보면 안다’는 한 마디로 우리들의 입을 막았다. 「저어기, 저것 보이지? 여기가 한국의 소금강처럼 유려한 곳이라고. 깎아지른 산도 있고 깊은 강도 있고, 나무도 울창한 게 딱 소금강 닮았어.」 운전석 옆에 앉아 얼굴을 뒤로 돌리면서 손짓하는 차창 밖의 풍경은 그가 말하지 않더라도 좌석의 맨 뒤에 혼자 앉아 있는 나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가파른 돌산과 그 사이사이에서 힘들게 솟아 있는 수목들이 검게 드러났다. 나는 ‘이런 메마른 곳에도 숲이 우거져 있구나’ 하는 정도의 감흥밖엔 일어나지 않았다. 비록 메마른 곳이라도 하늘과 땅과 물이 숨 쉬고 있고, 당연히 수목도 깊이 박혀 있을 터였다. 울란바토르를 안고 흐르는 톨강의 울창한 숲과 벌판을 사행하는 강물의 깊이와 수량을 보아온 우리에게는 그리 새로운 풍경은 아니었지만 규호는 ‘그래도 이런 곳에 저런 것도 있네’ 하는 어투로 오사바사하게 설명했다. 난 귀를 기울이는 척했다. 다시 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내 머릿속은 정선 골짜기를 그리고 있었다. 화암 약수터의 가을은 현란했다. 맑은 약수가 흐르는 계곡과 그 곁을 따라 길게 이어진 식당, 기념품 가게, 한적한 여관까지 모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짙붉은 단풍으로 덮인 지표에서 슬며시 솟아오른 조형물이었다. 약수와 어우러져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물도 그 밑바닥은 온통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깔려 있었다. 그곳에서 일주일을 그와 같이 보냈다. 그리고 그는 떠났다. 이것저것 자기중심으로 요구만 하는 까다로운 여자들 숲에서 직장 생활을 해 오던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동안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 시달림을 받았다는 느낌만 던져 주고 그는 떠났다. 마흔 중반까지 지방의 금융회사에서 지내오면서, 복잡한 업무보다도 그들을 관리하면서 다가왔던 많은 여사원들의 터무니없는 생태를 보아 온 나는 단순하면서도 표정 하나, 간단한 단어 하나로 자신의 의사를 나타내는 그의 명료한 머리 구조에 마음을 던졌다. 우리는 긴 이야기가 필요 없었다. 그의 이야기는 항상 한 발 앞에서 살아 움직였다. 내가 첫마디를 시작하면 그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서너 마디를 듣고는 즉시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몇 발자국 건너편에서 짧은 말로 내 생각의 끝을 마무리하곤 했다. 처음, 그곳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우리가 보아온 세계의 평범한 그림을 한순간에 지워버리고, 새로운 화선지에 엷은 녹색과 주황색, 핏빛이 혼합된 그 모든 풍경을 옮겨 놓은 듯한 계곡의 가을 속으로 서슴없이 뛰어들어 두 팔을 푸른 하늘로 뻗어 올리고는 크게 소리쳤다. ‘화이야―’하는 외침의 순간 탄탄하게 부풀은 그의 가슴과 함께 나는 십 몇 년의 출퇴근에 짓눌린 마음을 계곡 속으로 던져버렸다. 앞으로 전개될 불확실한 시간이 슬며시 끌어당기던, 망막하고 어두운 미래도 순간 잊어버렸다. 승진이라는 도가니 속에서 우글거리던 동료들의 영상도, 그들과 별다른 척하면서도 틈틈이 책과 씨름하던 지난 모든 일들도 버렸다. 승진에 탈락되던 그 순간의 모멸감과 아내와의 별다른 상의도 없이 종이 하나로 직장을 떠나던 그 씁쓸한 마지막 날도 잊었다. 그리고 아이의 사건도 잊어버렸다. 우리는 일주일을 보냈다. 언덕을 넘자 아래편으로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넓은 평야에 두 줄기의 강물이 합수하여 수목이 울창한 협곡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 사이에 현대식 호텔과 상가가 보였다. 「저기야! 울란바토르 사람들이 일 년에 한 번 올까 말까한 곳이지. 돈 있는 놈들이나 애인 데리고 하룻밤 자고 가는 덴데, 일반인들의 한 달 생활비가 몽땅 빠져나가니 함부로 올 수가 없는 곳이지. 아마 한국인들이 태반일 걸. 여름 한 철은 한국 놈들이 먹여 살린다고.」 차츰 가까워질수록 숲은 더욱 높고 무성해졌다. 건물들을 언덕 위에서 볼 때는 여름의 땡볕 아래에서 자글거리는 것 같았는데, 다가갈수록 무성한 숲의 그늘 속에서 서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3층 호텔 앞에서 내렸다. 관광객들은 모두 더위를 피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는지 밖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호텔 뒤쪽의 강가 숲에서는 띄엄띄엄 모여서 햇볕을 피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규호는 우리를 냇가로 데리고 갔다. 엘카는 우리를 내려놓고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작은 아치를 건너서 두 갈래 강물이 아우러지는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일 년에 3백 밀리도 채 안 되는 강수량이라 햇볕 아래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솟았지만 그늘로만 들어가면 습기가 없어서 아주 시원했다. 나는 신과 양말을 벗어치우고 바로 물속으로 들어갔다. 태백의 깊은 산중에서나 맞을 싸늘한 한기가 발바닥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갔다. 「굉장히 차네! 너무 차! 물도 참 깨끗한 게 그냥 마셔도 되겠어.」 「한국에서는 일급수다. 그냥 마셔도 돼. 강 위쪽엔 원시림뿐이니까. 물고기도 팔뚝만한 것들이 우글대는데 몽골인들은 물고기를 잘 안 먹지. 그러니 더 올라가면 물 반 고기 반이라니까.」 병호와 여자는 머뭇거렸다. 내가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자 마지못한 듯 여자가 들어왔다. 굵은 종아리가 유난히 희게 보였다. 병호는 그냥 그늘 아래의 썩은 통나무 토막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병호씨도 들어가 봐요. 몽골에서도 설악산 골짝 물맛이 살아 있으니까.」 규호는 바지 아랫단을 무릎 위로 말아 올리고는 물속으로 들어가면서 말했지만 병호는 씨익 웃을 뿐 담배만 부지런히 빨아댔다. 「야, 혁민이, 어떠냐? 말라비틀어진 한국에서 우글대는 것보다 여기가 낫지 않냐? 좀 생각을 바꿀만한 곳이잖아?」 「여긴 여기대로, 거긴 거기대로……. 전 단지 잠시 떠나서 있을 곳일 뿐, 다른…… 의미는 없어요.」 규호가 나에게 말을 던졌지만 담배만 줄곧 빨아대던 병호가 불쑥 말했다. 역시 얼굴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도착하던 날만 좀 밝은 표정을 지었을 뿐 그 다음날부터는 얼굴의 실근육 하나까지도 굳어버린 석고처럼 변함없이 그저 묵묵할 뿐이었다. 울란바토르에서 이곳까지 오면서도 별로 말이 없었던 그였다. 올해 갓 마흔인 병호의 호리호리한 몸집에 어울리게 목소리는 평소 가늘었지만, 지금은 말을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내뱉듯이 말했다. 난 이미 병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특히 병호에 대한 여자의 반응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두 남녀의 관계를 병호에게 직접 들은 바는 없었지만, 또 병호가 그런 일들을 나에게 말할 녀석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근 이십 년 간 우리들이 함께 한 모든 일들에서 병호의 세세한 성격 정도는 손금 보듯 알고 있었으므로 이곳까지 와서 씁쓸하게 뒷모습 보이듯 하는 일탈의 한 부분을 흥미 있게 보고 있었다. 건축사인 병호는 내 고등학교 후배이자 술친구로 지내왔었다. 특히 역사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는 편으로, 그의 서재는 온통 역사서, 그 중에서도 고대사에 관한 서적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아직 마흔의 나이로 보이지 않은 맑은 얼굴이지만 한번이라도 관심 분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반드시 자신의 논리로 끝장을 보는 성미여서 나는 가끔 그와 다투는 일이 많았다. 그런 녀석을 이곳으로 가자고 내가 슬며시 꼬이자 바로 ‘그럽시다’ 한마디로 옆에 여자를 붙이고 공항에 나타났다. 「넌 탈출이지, 난 여행이고. 마침 여긴 규호도 있고 해서 온 거지만.」 난 어색한 분위기를 돌리고자 떠들었다. 규호는 물론 그 의미를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친구였다. 경영대학 전체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4년 학자금 면제의 혜택 속에서 졸업한 후 우수한 성적으로 회사에 입사했다. 녀석은 그 후 화장실에 가서도 영어 회화 서적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뛰어난 업무 능력을 인정받고 미국과 프랑스에 십 년이 넘도록 주재하고 돌아왔을 때 이미 그가 차지할 자리는 없었다. 중요 부서는 명문 출신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그들의 세상으로 돌아가 있었다. 실력이란 종이 한 장 차이로 인식되는 세계에서 지방대 출신으로 인맥 하나 없는 규호의 입지는 극히 좁아져 있었다. 발붙일 곳 없었던 그는 결국 회사를 나왔다. 몽골은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원시의 공간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아니, 형은 너무 단순하게 말하네. 잘 알고 있으면서도……. 형이 여행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현실에서 잠시 피한 것이고, 난 말로는 잠시 머물 곳이라 했지만 나야말로 여행이란 뜻에 가깝겠어.」 병호는 썩어서 부석대는 나무 등걸에 앉아서 계속 담배만 피워대고 있었다. 그는 여자를 의식적으로 멀리 하는 기색이었다. 사실 그건 이미 도착한 그 다음날부터 알고 있었다. 같이 왔으면서도 병호는 여자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에만 신경을 써 줄 뿐 그저 방임하고 있었고, 여자도 여자대로 그의 가벼운 대화에 마지못해 대답은 하지만 친밀감 있는 분위기를 거부하는 표정을 보였다. 몽골에 온 지 사흘 된 아침, 병호는 나에게 말했다. 「저 여자, 공주병이 돋쳤어. 난 여기 데려오면서 그걸 굉장히 걱정했는데, 결국 어딜 가야 말이지. 남자들이 치켜세우니까 아주 부웅 떠버린 거야. 왜, 도착한 첫날밤에 규호씨 몽골 친구들과 같이 술 마셨잖아? 그때 규호씨와 몽골인들이 치켜 주니 아예 뿌리까지 녹아버린 거라고.」 「그래서, 너가 뭐라고 한마디 했을 것 같은데?」 「뭐라긴 내가 뭐라 해? 그냥 내 생각대로 말해줬지 뭐. 그러니 저 모양이야.」 병호가 무심하게 말은 하지만 이미 그는 여자를 마음속으로부터 떠나보냈음이 틀림없었다. 병호가 7년여의 결혼 생활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언했을 때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이든 했어야만 했다. 십대 말엽부터 같이 지내온 후배의 현실에 대한 작은 조언이라도 했어야 했지만, 그러나 난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병호도 나의 조언은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병호의 가정사보다 나에게 다가온 그 사건의 충격이 더 컸기 때문에 병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 당시 퇴근하면 나의 첫 발걸음은 선술집이었다. 지난 생각이 잠시 소름같이 돋아 오르자 다시 아랫배가 살살 아파 왔다. 변기에 앉아도 나오지 않을 배설물들이 다시 꿈틀거렸다. 난 얼굴을 찡그리며 손으로 배를 눌렀다. 「왜? 아직도 그 모양이냐? 미친 놈! 좋은 곳에 와서 좋은 양고기 먹고 배는 왜 그리도 못났냐?」 「시끄러. 거참 죽겠네, 이 노므 뱃속을 쑤실 작대기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병호, 넌 분명 잠시 탈출한 거고, 내가 여행한 거지. 애화씨 하고 잠시 벗어난 게 맞잖아?」 나는 슬쩍 여자를 병호와 결부시키며 여자의 반응을 살폈는데, 예상대로 펄쩍 뛰었다. 「아니, 무슨 말씀을……. 같이 벗어나다니요? 그런 게 아닌데……?」 여자가 물속에서 발을 담그며 ‘같이’라는 말에 유난히 힘을 주면서 정색을 하듯 말했다. 둘 사이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말이었다. 난 순간 밀알진 여자의 얼굴과 동시에 병호를 보았지만 역시 그는 들은 듯 못 들은 듯 무표정했다.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런가? 그럼 그렇다고 하고. 자, 난 괜찮은데 모두들 출출하지도 않은 모양이지?」 난 얼버무려버렸다. 쑤시는 아랫배를 문지르면서, 뻔한 사이를 그렇게 간단히 부정하는 여자의 얼굴에서 만들어지는 웃음에 오만한 백치미가 섞여 있음을 보았다. 또한 미간에 살짝 집힌 주름살 양편으로 멀쩡한 눈썹을 밀어버리고 검고 푸른 아이펜슬로 가늘게 그린 인조눈썹의 한끝이 지워져 있음도 놓치지 않았다. 3 헤렐지를 벗어나면서 난 계속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물도 계속 마셨다. 마시고 마셔도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물을 마실 때만 잠시 수그러들었다가 다시 입술이 부풀어 올랐다. 이들은 모두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갖고 간 진한 몽골 산 보드카를 몇 잔 들이켰을 뿐 난 포크를 잠시 손아귀에 잡았다가 바로 접시 옆에 던져버렸다. 양고기로 요리한 음식은 맛이 있었지만 도저히 씹어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깨끗하게 비웠다. 기름진 음식을 평소 못 먹는 것이 아니었다. 술안주로 먹는 기름기 넘치는 고기는 난 잘 먹었다. 특히 돼지비계를 좋아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봉고는 오던 길로 계속 가다가 왼쪽 곁길로 꺾어들었다. 그나마 국립공원 부근에만 엉성하게 지표에 붙어 있던 아스팔트는 어느 새 요철이 심하고 바짝 마른 황톳길로 바뀌었다. 「이제 얼림벌랑이란 곳으로 가는 게다. 가 보면 혁민이 넌 아마 까무러칠 게다. 그냥 분지가 수백 만 평이 너 발 밑에 기다리고 있을 테니. 잘못하면 혁민이 넌 안 나온다고 그냥 자빠질지도 몰라. 너 마누라 과부되기에 딱 좋은 곳이니까.」 규호는 되는 대로 뱉어대었다. 항상 자신만만한 표정과 어투가 이곳에서도 그를 지탱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한국으로 돌아오면 항상 나를 찾아 와서, 역시 지금이나 다름없이 자신만만하게 대화를 이끌어가곤 했었다. 그러나 난 알고 있었다. 왜 그가 이 황량한 곳에서 뿌리를 박았는지, 박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자신만만함 그 뒤에서 꿈틀거리는 현실의 어려움이 역설적으로 새어나오고 있음을 규호 자신도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규호는 현명했다. 학훈단의 겨울 제복을 멋지게 걸친 규호의 또렷한 구두 소리가 작은 어물가게로 이어진 골목길을 당당하게 울리면, 춥고 어질한 밤의 기온은 물기 먹은 시멘트 바닥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꿋꿋하게 그가 가는 곳은 단 한 곳뿐. 어머니의 두어 평 가게였다. 중앙에 연탄불이 항상 뜨겁게 피어오르는 원탁 두 개가 놓이고, 벽 쪽으로 낮게 임시 잠자리를 갖춘 시장터 구석의 술집에서 그의 어머니는 허름한 옷을 걸치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추위로 얼은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어슬렁거리면서 문을 열면, 규호 어머니는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고 우리를 맞았다. 자식의 장교후보생 복장이 영원한 출세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그곳에서 우리는 김 한 톳과 바다로 갈 시내버스 차비를 얻었다. 우리에게는 그런 가벼운 경비도 조달할 길이 막힌 터이므로. 값싼 소주 몇 병도 검게 물들인 내 야전군복 점퍼에 넣으면 우리들의 발걸음은 이미 바닷가 모래사장 위에 가 있었다. 겨울의 눈발이 점차 무거워지는 밤에 둘은 모래사장 위에서 김을 안주로 술잔 없이 들이키기 시작했다. 해안 초소의 서치라이트가 길게 부챗살처럼 퍼지면서 흰 이빨이 번뜩이는 바다 위를 한두 번 쓸고 지나갔다. 흰 눈은 규호의 베레모 위와 그의 검은 제복에, 내 머리와 점퍼에 쌓이고 있었다. 말이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밤바다의 검고 칙칙한 촉수가 내리는 눈발을 헤치고 다가와 우리들의 대화를 휘감아버리고는 파도 속으로 숨어들었다. 눈은 계속 내리고 쌓이고, 우리는 점차 눈사람으로 변해갔다. 가끔씩 손이 눈 더미 속에서 삐져나와 술병을 잡고는 입으로 가져가는 동작만 되풀이 될 뿐. 그의 술은 항상 울음으로 끝을 맺었다. 명문대에 다니는 애인 이야기의 끝에서도 울었고, 어머니를 들먹일 때도 울었다. 정식 결혼을 미루고 아이를 낳은 여동생 이야기에서도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자학으로 뭉친 내면의 덩어리가 술이라는 열쇠 하나로 단단한 눈물샘의 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한순간 내뱉곤 했다. ‘야, 우리, 저 바다를 쳐나가는 군함처럼 그렇게 힘 있게 지내자!’ 당시 나는 그의 울음에 공감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극히 어려운 환경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고, 모든 사물에서 받아들이는 부분이 어둠으로 치우친 점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해도 그의 울음은 나에게 깊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와 같이 울 수도 있었으니까. 나 역시 앞뒤로 꽉 막힌 상태였다. 그러나 난 울지 않았다. 그냥 속으로 삼켰을 뿐이었다. 술 깬 다음날, 왜 울음과 그리 친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냥 씩 웃었다. 나도 웃었다. 하지만 그 울음에 대한 의문은 지금도 난 버리지 않고 있다. 70년대. 당시 절박하게 다가오던 궁핍과 젊음의 고독을 약간의 과장된 절망감으로 포장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울음만은 딱히 그렇게 설명해도 뭔가 미흡함이 있었다. 혹시 자신도 몰랐던 삶의 원형질에 그의 휘어진 운명의 편린 한 점이 부딪쳤을 때 일어나는 희미한 불꽃같은 것, 그런 것이었을까. 졸업 후 군 입대와 제대의 수순을 밟은 다음 그가 그럴듯한 중견 회사에 입사하고 서울에서 만났을 때는 나는 아직 4학년의 늙은 학생이었다. 그는 술을 피했다. 「며칠 전 양동 술집에서 하루 자고 왔더니, 여기가 이상해서 병원에 좀 들락거리는 중이다.」 한 손으로 사타구니를 툭툭 쳤다. 학교 시절부터 그는 여자들에게 집요한 관심을 보였음을 생각하며 난 그냥 웃었다. 그는 주로 술집 여자들에게 접근했는데, 세상없는 중요한 일이 눈앞에 있어도 기회가 닿는 여자와의 하룻밤을 놓치는 일이 없었다. 소식이 끊긴 지 5년이 지난 어느 여름날 나에게 왔다. 꽤나 요염하게 생긴 부인과 딸애 하나를 데리고. 다시 몇 년이 지나자 어린 사내애를 덧붙여 찾아왔다. 프랑스 지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턱을 아래로 지긋이 깔고 가족을 소개하면서 그동안의 작은 성공을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지만 이미 삶의 단단함이 나에게 전해질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몽골에서 마지막 삶을 이어가리라고는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시골의 작은 금융업에서 밥을 먹던 나는 그렇게도 단단하던 그를 밀쳐낸 거대한 사회의 날카로운 손톱을 직접 맛보고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낡은 봉고는 얕은 구릉 사이를 넘다가 나무 울타리가 쳐진 곳에서 멈췄다. 겔 하나를 중심으로 사방이 낮은 나무울타리로 막혀 있었다. 봉고는 이리저리 돌면서 돌파구를 찾으려 했지만 가는 곳마다 막혀 있었다. 온 천지에 키 낮은 풀더미만 지표를 덮고 있는 완만한 구릉 지대에서 차 한 대가 지나갈 곳이 없다는 것이 신기했다. 투덜거리는 우리를 보고 규호가 말했다. 「한국 놈들이 이곳을 사서 골프장인가 뭔가 한다고 말뚝을 박아놓은 거야. 좆같은 놈들이지. 그저 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들이 바로 한국 놈이 아닌가. 한국서 하던 버릇이 어딜 가나?」 우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땅값이 없으니 이곳 관리들만 잘 구슬리면 몇 십만 평 정도는 그냥 빌릴 수 있는 곳이 몽골이야. 몇 푼 집어 주면 안 되는 일이 없는 곳이니까. 하여튼 한국 놈들은 알아줘야 해!」 겨우 울타리를 헤쳐 나가는 데는 삼십 분 이상 걸렸다. 오후 3시가 넘었다. 험한 언덕과 너설지대를 지나 바위와 부스러지는 마사토를 헤치고 내려갔다. 평지에서 우리는 차에서 내려 잠시 쉬었다. 여자는 병호와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나와 규호에게는 말을 걸면서 생글거렸다. 재미있는 분 같아요. 부인은 뭐 하세요? 사랑해 보신 적 있으세요? 눈빛에서 나타나는데? 아이 참,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니까요. 역시 병호는 무표정했다. 8월의 따가운 햇살이 내리꽂히는 풀 위에 앉아 잠시 쉬었다. 무심코 주위를 훑어보던 내 눈에 키 작은 꽃이 보였다. 둥글게 여러 개로 퍼진 잎의 표면에 은회색의 솜털이 보얗게 덮여 있는 아담한 꽃이었다. 에델바이스였다. 설악산에서 가끔 보던 꽃이 이곳에도 있었다. 그리고 쑥부쟁이도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한국에서 흔히 보던 쑥부쟁이를 이곳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이 설렜다. 「야, 이것 봐라! 별것 다 있네, 이게 쑥부쟁이고 요건 에델바이스야. 솜다리라고도 부르는. 거 참…….」 「왜? 한국에 있던 게 여기라고 없으란 법이 있냐? 거기나 여기나 별 차이가 없어. 인종도 같은 것들인데 별 다른 게 있냐?」 규호는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여자는 신기하다는 듯 몇 송이를 꺾어서 규호에게 내밀었다. 「형! 애화, 저 여자 말이야. 난 불안해. 저 여자가 어떻게 변할지, 어떤 행동을 할지 불안해.」 병호가 슬며시 다가와서 옆에 앉으며 낮게 말했다. 「그럼, 저런 여자를 데리고 오긴 왜 와? 가만 보니 속은 비어도 성깔 하나는 날이 선 것 같은데.」 「……그래도 부드러운 점도 있어. 내가 여길 간다니까 가곤 싶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머뭇거리는 게 좀 그래서 그냥 데리고 왔거든. 그런데 오자마자 저 모양이니……. 돌아가면 저 여자가 나에게 뭐라고 할지 궁금도 하고. 웃기지. 문제는 지금이야. 안심을 못하겠어. 꼭 무슨 사건을 벌일 것만 같아서. 럭비공처럼 행동하는 게…….」 사실 병호에게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몇 달 동안 보지 못하고 내 문제에만 잠겨 있었다. 병호가 이혼 후 어린 사내애 하나를 데리고 아이 할머니 집에서 기거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난 전화 한통 하지 못했다. 그의 부인이 테니스 코치와 붙어 지내다가 갑자기 이혼장을 내밀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몇 번 그 집을 갔을 때 그의 부인은 정중하게 술상도 차리고 정갈한 안주를 만들어 내놓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뜻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삶에서 어디 예측과 법칙대로만 굴러가는 일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으로 병호를 멀리서 보고만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일에 무관하지는 않았으므로. 「아이는 없고 결혼은 전에 했었는데 지금은 혼자 지내고 있어. 그림을 그리는데, 솜씨는 별로지만……. 평소는 부드럽고 괜찮거든. 역시 막상 자신을 벗어날 환경만 되면 본바탕이 드러나는 모양이야. 전에도 몇 번 그런 일이 있긴 있었지만 그냥 넘어갔었는데, 이젠 참 못 봐주겠어. 착각으로 똘똘 뭉친 허깨비처럼 노네. 그래도 동네에서는 제법 인기도 있는 편인데, 저렇게 뿌리 약한 걸 누가 알겠어?」 「할 수 없어. 이젠 끝까지 끌고 나갈 수밖에. 우리가 맞춰 줘야지. 여기서 그럼 어쩔 거야? 도대체 여잘 끌고 오긴 왜 끌고 와. 미친놈!」 규호가 봉고에 바짝 붙어 서서 여자와 웃음을 주고받고 있었다. 여자도 그와 거의 바짝 붙어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팔을 휘두르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 규호는 즐거운 듯 오른손으로 여자의 엉덩이를 슬쩍 쳤는데, 여자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생글거리는 얼굴로 규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 귀에 여자의 약한 말소리가 들렸다. 난 엉덩이에 살이 많아서 차를 오래 타도 괜찮아요. 여자의 는실난실하는 꼴이 진한 아교풀을 발라놓은 마네킹처럼 보였다. 「혼자 와야지. 그래야 여기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파묻혀 지내다가 다 털고 나가는 겐데……. 아마 규호가 저 여자 때문에 우릴 좋은 곳에도 못 데리고 갈 걸.」 「아휴 형! 그런 얘긴 그만 합시다. 정말 마음에도 없는 얘긴 듣기도 싫고. 저 여잔 그래도 마음으로 도와주고 싶었었는데…… 또 도움이 필요한 여자였는데, 이젠 다 귀찮네.」 병호는 손사래를 쳤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다. 병호의 사정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아래로 천천히 흘러내리듯이 완만하게 내리뻗은 길 좌측 언덕에 거대한 바위산이 보였다. 식물 한 포기 없이 뾰족하게 솟은 메마른 바위산은 몇 조각으로 벌어져 있고, 그 중 커다란 바위 하나는 타원형의 큼직한 덩어리를 등에 지고 있었다. 마치 거북 한 마리가 정상을 향해 기어오르다가 마지막 고비에서 힘이 다해 잠시 쉬고 있는 형상이었다. 목을 움추린 머리 부분과 둥근 등판이 여기서도 완연했다. 순간 짧은 생각이 반짝 스쳐갔다. 잠시 쳐다보고 있던 나는 규호에게 슬며시 다가갔다. 「야, 규호. 잠시 나 좀…….」 나는 애화와 규호를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잠시만 저기 저 바위산에 올랐다가 가자! 한 10분이면 넉넉하겠지. 생김새가 묘해서, 잠시만 보고와도 되겠지?」 「저기까지 왕복으로 한 이십 분은 잡아야 될 걸. 빨리 갔다 와. 사진도 한판 찍고.」 규호는 엘카를 부르더니 바위산을 손짓하면서 뭐라고 이야기하고는 카메라를 넘겼다. 마음씨 좋게 생긴 엘카는 우리를 보고는 웃으면서 앞장서서 걸어 올라갔다. 나는 병호와 애화를 곁눈질하면서 같이 갈 의사를 전했지만 둘 다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애화는 그냥 빤히 쳐다보면서 거부의 의사를 슬쩍 내보였다. 싫다는 병호를 강제로 끌고 천천히 올라갔다. 뒤에서 비치는 햇빛에 우리들의 그림자가 발밑에서 짧게 움직였다. 천천히 오르면서 나는 뭔가 하나 놓친 듯 가슴 한 구석에 저려오는 것이 있음을 알았다. 난 어렴풋한 윤곽을 잡았다고 생각했으나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그것을 떨쳐버렸다. 앞장서서 올라갔다. 오를수록 거북의 형상은 그냥 평범한 돌덩이로 변해갔다. 정상에 오르자 거대한 돌덩이들이 흩어져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가쁜 숨을 진정시키면서 우리는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몽골의 초원과 멀리 보이는 산기슭에 박혀 있는 원시림의 검은 수목, 그 사이를 가늘게 흘러가는 강물이 햇빛에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 높지 않은 곳이지만 우리가 있는 곳이 시력의 한계 내에서는 가장 높은 곳처럼 보였다. 아득한 곳에 완만히 솟은 구릉의 어깨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 위로 파르스름하면서도 옅은 회색빛의 기운이 땅과 하늘을 구분하고 있었다. 넓고도 황량한 천지에 우리 셋만 덩그러니 내려앉아 스치는 시간의 바람 속에 내팽개쳐진 느낌이었다. 「형! 돌아가면 애 엄말 다시 만나야겠어. 아무 것도 아니야. 우린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성깔만 살아서 갈라섰어. 애 문제도 힘들고.」 병호가 말했다. 그는 햇빛의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고 초원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관심은 병호의 반대편에 있었다. 봉고 곁의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난 병호와 같은 방향으로 몸은 돌렸지만 마음의 눈은 봉고를 주시하고 있었다. 병호가 눈치채지 않도록 병호의 말에 가볍게 응응거리면서 계속 뒤편의 저 아래에서 조용하게 일어나는 일을 감지하고 있었다. 난 담배를 꺼내어 병호에게 권하면서 빨리 시간이 지나가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몇 분 후면 그들이 차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담배 한 대 피울 동안 그들의 일이 끝날까. 난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그들이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사이일 것이다. 웃음소리에 병호가 내 얼굴을 보자, 난 병호의 말에 동의하는 척하면서 다시 말꼬리를 이어갔다. 그러면서 난 스스로 물었다. 규호에게 상황을 만들어 준 것이 내가 아닌가. 이곳에 오르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우리가 사라질 만한 장소가 마침 보였기에 온 것이 아닐까. 내가 언덕을 오른다고 말했을 때 이미 규호와 난 교감을 나눈 것이고, 바위산으로 오른다고 말한 그 순간 여자의 얼굴과 몸에서부터 나에게 전해지던 욕망의 내면을 난 파악하고 있지나 않았을까. 사실은 내가 바라던 그런 일을 은근히 기다리지나 않았을까. 담배를 거푸 두 대를 피우고 난 후 사진을 찍고 우리는 내려왔다. 규호가 운전석에 앉아 담배를 맨숭맨숭 피우고 있었다. 여자는 뒤에 새침하게 앉아 손거울을 위 아래로 돌리며 얼굴을 매만졌다. 엘카가 운전석에 앉는 것을 보자 병호가 말했다. 「내가 뒤에 탈 테니 형이 앞에 타요.」 난 뒷말 없이 운전석 뒤의 여자와 같이 앉았다. 병호는 뒷자리에 혼자 앉았다. 차가 출발하자 병호의 두 무릎이 내 좌석 뒤를 밀치는 느낌을 받는 순간 난 병호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바위산 위에서 병호가 움직이지 않고 계속 봉고와 반대편 쪽 정면만 주시하던 모습을 그렸다. 슬쩍 여자의 얼굴을 보자 아무 표정 없이 창밖으로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여자는 차창 밖으로 스치는 경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은 창밖으로 향했지만 자신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감정의 잔재를 보듬고 있음을 짐작했다. 바늘귀 같은 그 감정마저 깨뜨려버리고 싶었다. 나는, ‘지루하지 않느냐’고 낮게 말했다. 여자는 그대로 있었다. ‘답답하게 보여서 내가 도리어 답답하다, 차 안에 있는 것보다 같이 바위산에 올랐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가볍게 혀를 차듯이 말했다. 여자는 잠시 그대로 있다가 얼굴만 나에게 돌리고는, ‘고맙지만 신경 쓰지 마시라’고 신경질 섞인 어투로 말했다. 물론 나는 그런 말을 유도한 것이었고 여자는 그렇게 응답했다. 병호를 무시하면서도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겉으로는 안차 보여도 속은 더럽게도 가시센 여자라는 생각으로 난 담배를 물었다. 여자는 담배 연기에 얼굴을 찡그리며 나에게 고개를 돌렸지만 난 무시했다. 봉고는 거칠게 달렸다. 끝없이 이어진 황톳길은 엷은 초원 사이로 내려갔다가 어느 순간에 다시 오르막으로 변했다. 마지막 언덕인가 하면 다시 내리막으로 변하고 평원을 가로지르다가 언덕을 오르면 다시 눈 아래로 광막하게 널린 초원이 펼쳐졌다. 지루한 시간을 규호가 깨뜨리며 말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저 언덕 옆으로 여러 길이 보이지? 거기만 넘으면 혁민이 너가 자빠질 곳이니, 괜히 안 돌아간다고 떼쓰지나 마라. 애화, 엉덩이가 아프지 않아? 내가 좀 주물러주면 되는데?」 「전 괜찮아요. 거의 다 왔는데요, 뭘.」 규호의 걸쭉한 말에도 여자는 자깝스럽게 남저음의 콧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여자의 음성에는 비음이 유난히 많이 섞여서 감정이 정돈된 것 같아도 듣는 이에게 끈적끈적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었다. 난 규호가 여자에 대한 말투를 반말로 바꿨다는 것을 생각했다. 봉고가 마지막이라는 언덕을 막 넘을 때 길 옆에 붉은 깃발이 꽂힌 돌무더기가 있었다. 엘카는 차를 세우고는 가볍게 클랙슨을 세 번 울렸다. 몽골 성황당을 지나면서 참배 대신 던지는 작은 예의였다. 그리고 우리는 정면 아래편으로 펼쳐진 짙푸른 신세계를 내려다보았다. 아스라한 산과 산이 겹쳐 두르며 완만하게 솟은 산맥이 이 넓은 분지를 둘러쌓고 있었다. 희미한 안개가 하늘과 맞닿은 곳이 내가 볼 수 있는 한계였다. 산허리가 계속 둘러쳐진 사이로 부연 빛이 잠겨 있었고, 서쪽에서 비치는 햇빛의 경사면으로는 검은 빛이 뚜렷하게 보였다. 아마 원시림의 군락인 것처럼 보였다. 분지의 중앙에서 조금 오른쪽으로 비껴난 곳에 통나무집과 울타리가 손톱 만하게 보이고 그 너머에 흰 자작나무가 분명할 수목이 우거져 있었다. 수목 사이사이로 강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황톳길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빽빽하게 피어난 풀 위로 갖가지 흩뿌린 물감에 물든 야생화가 점점이 뒤섞여 있는, 전인미답의 공간만이 눈 아래 펼쳐져 있었다. 작은 움직임도 있었다. 그건 점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콩알처럼 보이지만 어슬렁거리는 몇 마리의 말일 것이었다. 「봤지? 어때? 잘 보이냐? 여기가 바로 내가 바라던 곳이다, 짜슥아! 수백만 평의 이 광활한 곳에 내가 뿌리를 내릴 곳이야. 적어도 수천 마리의 양이나 말떼를 기를 만한 곳이지. 강물도 있고…… 앞으로 내 뼈가 묻힐 곳이 여기야. 혁민이 너, 잘 봐 둬라. 맨날 좁쌀만한 곳에서 오글거리며 볶아대다가 이런 곳을 보니 눈이 확 안 뒤집히냐, 임마!」 얼마 전의 일과는 전혀 상관없을 규호의 말에 여자가 감탄의 콧소리를 내면서 차창을 썩 열어젖혔다. 뒤에 있던 병호는 말이 없었다. 난 눈만 크게 뜰 뿐 아무 말도 못했다. 굳이 입을 열 필요가 없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몽골의 초원은 붉은 황토 흙에 푸른 풀과 말라비틀어진 누런 풀들이 뒤섞여 있거나 피부가 벗겨져 붉은 내장을 처참하게 드러낸 풍경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건 아니었다. 황토의 흔적은 짙푸른 빛에 완전히 흡수되어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단 하나뿐! 「좋다!」 무심코 입에서 한 마디가 터져 나왔다. 「좋을 정도가 아니야. 몽골 애들도 이곳을 아는 놈들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이 넓은 곳에 지금 저 보이는 통나무집 하나만 살아. 내가 잘 아는 영감인데, 앞으로 같이 살게 될 곳이야. 여긴 부족한 게 없어. 물도 있고 말먹이 풀도 무진장이고……, 바람 많은 몽골에서 이렇게 푹 파인 분지라 바람도 심하지 않고……, 메마른 사막도 물은 흐르지만 기복이 심한데, 이곳 물은 수량이 일정해서 항상 그대로야. 그러니 가축은 무한대로 기를 수 있는 곳이야. 혁민이 너, 어때? 다 때려치우고 여기 와 살지 그래? 들볶아대며 살아봐야 그게 그거지 뭐 그래. 한세상 배짱 편하게 말 타고 살다가 콱 죽어버리면 그만이지. 뭔 한이 있냐, 혁민아.」 평소 습습하면서도 감상적인 규호는 목을 한껏 뒤로 돌려서 나에게 내뱉어대었다. 나는 그 말에 공감했다. 그러나 그건 삶에 대한 깊은 자신감이 필요한 문제임도 알고 있었다. 나는 흔적을 버릴 수 없는 놈임을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필름처럼 이어지는 흔적들과 나는 결별할 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봉고는 험한 내리막길을 천천히 내려갔다. 찻길이 따로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방향을 잡고 풀밭을 짓이기면서 나가면 됐다. 멀리 통나무집 옆에 한가롭게 풀을 뜯는 말들이 보이는 곳으로 밀고 나갔다. 바퀴에 짓이겨지는 잘 자란 풀과 야생 꽃들이 안타까웠다. 말발굽에 밟혀나가도 인공물에는 결코 스러져서는 안 될 것들이지만 봉고는 아랑곳없이 뭉개버리면서 다가가 통나무집을 둘러싼 나무판자 울타리 곁에 섰다. 모두 내렸다. 겨울 준비를 벌써 하고 있는지 군데군데 마른 풀더미가 높이 쌓여 있는 사이로 흑갈색 혹은 짙은 황색의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잘 발달된 근육이 단단한 털가죽 겉으로 삐져나올 것처럼 튼실한 놈들이었다. 우리가 넓은 마당으로 들어가자 차 소리를 듣고 늙은 부부가 나왔다. 규호는 부부와 구면인 모양이었다. 서로 반갑게 손을 잡고 그들이 둔징 바이신이란 부르는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우리들에게도 들어오라는 손시늉을 했다. 우리도 따라 들어갔다. 「사인 바이노.」 여자는 그 질척한 비음으로 인사를 했다. 몽골인을 만날 때마다 우리 중 맨 먼저 인사를 하곤 했다. 언뜻 보기에 귀틀집처럼 생긴 그 내부는 입구 이외에는 창문이라고는 없어 어두컴컴했다. 겨우 다섯 평 정도의 면적에 낡은 풍로와 엉덩이를 걸칠 ㄱ자 형태의 앉을 곳, 세 식구가 겨우 잘 수 있는 공간엔 낡은 담요와 그릇 같은 세간들이 널려 있었다. 50세라는 규호의 설명에도 주인은 너무 늙어 보였다. 겨울이면 영하 30°의 추위와 여름의 건조한 직사광선 밑에서 평생 가축의 뒷바라지에 그냥 삭아버린 모습이었다. 8살 난 어린 손자를 키우고 있는데, 아들 부부는 도시로 돈 벌러 갔다고 했다. 한국의 시골 모습이 생각났다. 겉으로 드러난 피부의 주름살 깊이에 따라 추함과 늙음을 한 묶음으로 가르는 우리들의 판단이 잘못임을 알 수 있는, 선량한 표정의 늙은 부인은 낡은 네발 탁자 위에 말 젖으로 만든 음료수인 희부연 아이락과, 역시 그것으로 만든 치즈 조각을 평화로운 미소와 같이 내 놓고 작은 사발에 아이락을 가득 담았다. 우린 가져간 담배와 과자, 사탕을 선물로 내 놓고 조금씩 아이락을 마셨다. 시금털털한 막걸리맛과 비슷했다. 주인은 여유가 있었다. 무엇 하나 바쁜 것 없는 사람처럼 규호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직감했다. 비록 손은 거친 황야에 시달려 죽죽 갈라지고 터져서 상처투성이지만, 한 번도 물맛을 본 적이 없었을 지저분한 작업복과, 남발한 회색빛 머리칼 속에 마른 검불이 틈틈이 박히고, 필터가 타들어갈 정도로 독한 담배를 연신 피워대지만, 그는 바람의 강약과 습한 정도에 따라 말과 양들이 그 해 먹어치울 풀의 성장점을 정확히 짐작할 수 있으며, 한겨울 북풍의 거센 눈보라 속에서도 말의 가벼운 신음이 두터운 천막의 올올을 헤집고 들어오는 미세한 소리도 끄집어 낼 수 있는 예민한 청각과, 8월의 아침 일찍 일어나 겔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서, 누런 황토를 빽빽이 덮고 있는 이슬 먹은 풀의 날선 눈초리만 보아도 곧 밀려 올 가을의 메마른 바람과 겨울의 칼날 같은 눈의 깊이까지도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들은 그렇게 가축의 커다란 눈빛에 잠기며 대초원의 밀밀하게 다가오는 바람의 틈에서 살아오고 살아갈 자연의 적자가 분명했다. 규호와 주인은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나는 답답해 졌다. 비록 어지럽고 지저분한 내부지만 그래도 세 식구가 평화롭게 생활하는 공간은 옛 우리 시골 풍경과 크게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광활한 대지 위에 한 점 통나무로 컴컴하게 막아놓은 내부 속에서 나를 계속 박아놓기는 싫었다. 바람을 받고 싶었다. 대륙의 거친 바람 속에 자신을 내 놓고 싶었다. 여자와 병호가 서로 외면을 하면서 앉아 있는 꼴도 보기 싫었다. 밖으로 나왔다. 역시 바람은 있었다. 해는 야트막한 좌측 산머리에서 한 발 정도 떨어져 아직 한여름의 뜨거움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끝을 모르는 광막한 대륙의 하늘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달아오른 가슴 속으로 깊게깊게 파고들었다. 계속 크게 들이마셨다. ‘너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 끝까지 올라가서 산산이 터져 죽어라!’ 고교 시절 일기장의 한 대목이었다. 그때 왜 그런 섬뜩한 말을 썼는지 지금은 명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다. 다만 빡빡한 삶의 그늘이 어린 나이에도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을 것임을 지금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의 실패 끝에 들어간 3류 대학의 경영학과를 거치고, 마흔 중반을 넘기면서도 붙어 있었던 금융회사. 그리고 어린 아들의 영상. 나를 이 몽골의 대초원으로 몰아온 것은 지금까지 쌓아온 예정된 삶의 한 지표일 것이다. 아들이 사라진 것도, 회사를 버린 것도, 그녀와의 짧았던 시간도, 현실의 자신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지표에 속할 것이다. 딸애와 아내와 난 지난 2년 간 서로 말을 아끼면서 지내왔었다. 겉은 멀쩡하지만 이미 밑돌부터 바스러지는 집이었다. 아내도 알고 있을 것이다. 굳이 그 사건을 내뱉어 멀쩡하게 보이는 집을 서까래 들어내듯 들쑤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가족 중 하나가 이 지상에서 사라졌다 해도 남아 있는 나머지 가족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해야만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에 모두들 말없이 따라주었다. 만약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면,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발을 뻗고 손을 펴고 고개를 쳐들어 혓바닥을 나불댈 것인가. 그저 말없이 현상을 따라갈 뿐이었다.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거의 마흔이 다 되어서 본 아들이었다. 나보다도 아내가 더 즐거워했다. 대개 사람들은 아내가 딸을 원하고 아비는 아들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잘못된 말이었다. 적어도 내 집에서는 그랬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아내는 큰 딸애를 낳고 은근히 아들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둘째를 잉태했을 때 아내는 자신의 둥근 복부를 쓰다듬으면서 계속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물었지만 무언가 차지 않은, 기대한 정량에 모자란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속에 들은 것이 힘이 없다는 거였다. 배냇짓이 약하다는 표정이었다. 난 그 사건 이후에야 당시 그 표정이 아들이 아니고 딸인 것 같다는 표현이었음을 알았다. 그렇게도 난 무심했었다. 아내가 집에 드러누웠다. 약한 소독약 냄새가 났다. 그리고 낮은 음성으로 ‘ 후련한 짬뽕 국물을 먹고 싶다’ 고 했다. 난 알아차렸다. 이미 뱃속의 아기는 사라졌음을. 난 아내의 생각을 존중했다. 나와 의견을 나누지도 않고 일방적인 행동을 벌인 아내에게 약간의 섭섭함마저 숨길 수는 없었지만, 아들을 원하는 생각에 그리 반대할 마음은 없었다. 병원에서 아들인지 딸인지를 은밀히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 일 후에도 2년이나 지나서야 본 아이였다. 아기 때 낮엔 잘도 자다가 밤만 되면 눈을 동글동글 뜨고 우리를 못살게 굴던 아이였다. 우리가 조금만 눈을 붙이면 악을 쓰며 울어댔다. 정말 잘 울던 애였다. 그 애는 6살이 채 되기도 전에 한길에서 덤프트럭 밑으로 사라졌다. 그녀를 만난 건 그 후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승진 시험을 앞두고 오후엔 근처 도서관에서 책에 묻혀 쓰린 기억을 잊던 어느 날 저녁, 지하 구내식당에서 식판에 음식을 담아서 층계로 오르다가 아래로 내려오는 사람과 부딪쳤다. 뜨거운 국과 밥과 김치 종류의 반찬이 그녀의 허리 아래 곧게 뻗어 내린 흰 종아리에 쏟아졌다. 서른 중반의 그녀는 하는 일없이 책만 보러 도서관으로 들락거리는 낡은 백조 신세였다. 사람의 정신이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창고는 차고 넘치는 부분과 모자라서 계속 추구하고 원하는 부분이 서로 충돌하면서 분열되고 결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세포를 만들어 내는 곳이라면, 우리는 그 창고에서 모자람과 넘침의 적절한 배급을 균형 있게 운영할 수 있는 공간을 서로 확인할 수 있었다. 몇 잔의 술이 오고가면서 서로에게 부족함과 넘치고 뻗는 부분을 서로 보듬어 나갈 길을 우리는 확인했다. 사학을 전공한 그녀는 나의 밀착된 실물 경제학적 사고를 지적했으며, 나는 민족 흐름의 원류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그녀의 행동과 말에 일침을 놓았다. 우리는 저녁만 되면 만나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인근 도시의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럴 때면 거역할 수 없던 아이의 가쁜 기억이 잠시 숨을 멈추었다. 남들의 눈을 피해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승용차 속에서 섹스를 나눴다. 먹고 마시고 섹스하고……. 그녀는 솔직했다. 웃어야 할 때에 웃고 말을 멈춰야 할 때 침묵했으며, 내가 사물에 깊이 파고들면서 거친 언사를 내뱉으면 가벼운 미소 속으로 끌어들여 휘어진 언어를 펴 주곤 했다. 몇 달의 만남으로 인해 승진 시험은 자연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직장 내에서의 내 위치는 가벼운 깃발처럼 미미한 바람에도 흔들렸다. 더 이상 버텨 내기가 힘들었다. 그녀와 같이 강원도 정선으로 떠났다. 4 해가 산등성에 두어 뼘 정도 다가섰다. 일행들은 통나무집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해가 있는 산기슭에서 작은 움직임이 보였다. 수많은 작은 물체들이 감실감실하게 계곡에서부터 빠져나오면서 부챗살처럼 넓게 퍼졌다. 그것들은 점점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는 것이 틀림없었다. 서둘러 햇덧 안으로 그들의 안식처를 찾아 내려오는 말떼들과 억센 몽골 청년들일 것이다. 그들이 이곳에 도착하게 될 때면 우리도 자리를 털고 나서야 한다. 무한한 공간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먹으며 커 가는 저 무리들에게 내가 앉은 자리를 양보해야 할 시간이었다. 다시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바람은 내 가슴 속에서 매듭지고 뒤틀리고 삭아가던 모든 잡것들을 휘몰아 내 가슴뼈 사이를 헤집고 등 뒤로 빠져나갔다. 따가운 햇살을 가리던 모자를 벗었다. 바람은 얼굴 정면을 향해 덤벼들었다. 맴도는 먼지구덩이처럼 어지럽던 머릿속 세포 덩어리가 일시에 세척되면서 허공으로 솟았다. 발밑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오직 이곳에서 자생하는 바람만 가득 차올랐다. 나는 바람처럼 가볍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몸을 버릴 수 있다면 나를 지탱하던 마지막 정신의 끝줄기도 이곳에서 사라지는 바람에게 맡길 수 있을 것이다. 다 버릴 수 있었다. 일행들이 나오자 간단한 작별 인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차가 막 출발할 즈음 무겁고 둔탁하게 지표를 울리면서 산기슭에서 달려온 말떼들이 도착했다. 그것들은 단순하게 땅만 밟아대는 것이 아니라 차 속에 앉아 있는 우리들의 가슴팍까지 짓밟아대듯 육중한 몸체를 이긴 단단한 말굽으로 바닥을 치면서 사방으로 돌아쳤다. 그것들은 흥분한 상태였음이 틀림없었다. 대략 백여 마리가 됨직한 살진 말들이 하루 종일 영양가 있는 풀을 마음껏 뜯어먹고, 넘치는 기운을 억제치 못하며 연신 콧김을 내뿜으며 차 주위를 돌며 날뛰었다. 검게 탄 피부의 억센 목동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긴 회초리를 연신 휘두르며 말떼를 진정시키고 있었지만 말들은 막무가내였다. 사람은 없었다. 말들이 이 천지의 주인인 것처럼 보였다. 아득한 옛날부터 이 대자연의 주인은 우리라는 듯 말떼들은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앞발을 높이 치켜들고 탐스러운 갈퀴와 꼬리를 감아 돌리면서 콧김을 연신 사방 천지를 향해 뿜어댔다. 털빛이 검거나 희고 갈기가 검은 것, 붉은 빛깔의, 주둥이만 검고 누른 빛깔, 거무스름한 것, 털은 희고 갈기만 검은 것 등 가지각색의 말떼들이 서로 앞발을 세우면서 목을 비비대거나 부딪치고 뛰어다니는 서슬에 봉고는 그냥 엔진만 달구면서 그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 주변은 갈초 더미에서 일어나는 티끌과 황토먼지로 가득 찼다. 여자는 얕은 비명을 지르며 차창을 닫았다. 「야, 가만 놔 둿!」 갑자기 뒷자리에서 병호가 소리쳤다. 그 소리는 여자의 뒷머리를 낚아채듯 거칠게 쏟아졌다. 여자는 움찔하며 뒤롤 돌아보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나 역시 그 먼지의 맛을 보고 싶었다. 옆의 차창을 활짝 열었다. 먼지가 안으로 부옇게 밀려들어왔다. 여자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래, 좋다! 여기 먼지는 보약이 될 수도 있어! 좀 마셔 봐라. 먼지도 등급이 있다면 이 먼지가 맨 꼭대기를 차지할 게다. 이런 장면도 좀처럼 보기 힘들어. 저 말들이 미쳐 날뛰는 걸 봐라! 요즘이 한창 살이 올랐을 때야. 힘이 넘쳐서 때론 저 녀석들도 함부로 다루지 못할 때도 있어. 혁민이, 어떠냐? 저 속에서 말을 타 볼 생각이 안 나냐?」 어떤 놈들은 떼 지어 차창에 커다란 머리를 바짝 들이밀기도 했다. 거대한 앞발을 번쩍 쳐들고 봉고의 앞 유리창으로 다가서는 놈들도 있었다. 남자 주인이 목동들에게 뭐라고 손짓을 하며 차를 가리키자 목동들이 일제히 차 앞으로 몰려와서 말떼들을 갈라놓기 시작했다. 엘카가 거푸 클랙슨을 울리면서 차를 출발시켰다. 봉고는 엘카의 능숙한 핸들 솜씨에 따라 날뛰는 말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왁실덕실한 틈으로 연신 급정거를 반복하면서 겨우 빠져나오자 우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말들이 계속 돌아치고 있는 사이사이로 아직도 들어가지 않고 손을 흔드는 통나무 주인 부부가 보였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그들이 보던 안 보던 상관없이. 역시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던 규호가 손을 멈추고 뒤로 돌아보면서 말했다. 「천고마비란 말이 흔한 말이지만 그 뜻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나? 나도 한국에선 몰랐지. 천고마비의 진정한 의미를 여기 몽골에 와서야 알게 된 거야. 방금 봤지? 지금이 몽골의 늦여름 초가을이거든. 겨울의 눈구덩이를 헤치고 얼어붙은 풀을 겨우 얻어먹어 바짝 말랐던 말들이 눈이 녹는 봄부터 지금까지 마음껏 풀을 뜯어먹고 힘이 넘쳐 날뛰는 살진 말로 변한 거야. 저런 광경을 봐야 천고마비의 의미를 알지. 흐흐흐흐흐…….」 「몽골 와서 볼 거 하나는 아주 제대로 봤네.」 병호가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장관이란 말이 바로 이런 때 써먹을 말이야. 정말 굉장했어. 백 마리가 넘는 말떼들이 미쳐 날뛰는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어? 정말 굉장한 걸 봤네!」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건 진정이었다. 영화 속에서 상상력을 덧붙여야 가능할 광경을 실제로 경험했다는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아직 볼 게 많은데 뭘 그래? 애화, 어때? 내일 말 한번 타 보지? 어차피 낼 계획은 시골로 가서 종일 말 타고 돌아치는 건데.」 「저도 타보고 싶어요. 그런데 정말 저 말들처럼 사납게 움직이면 힘들 것 같아요.」 「아니, 우리가 타는 말은 순하지. 특별히 애화에겐 큼직하고 사나운 말을 주지.」 규호는 뒤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여자도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럴 땐 꼭 잡아주셔야 해요. 무서우니까.」 봉고는 오던 길을 따라 북쪽으로 달렸다. 해는 이젠 산등성이 바로 위에 걸쳐 있었다. 우리는 모두 조용히 주변 경치만 바라보며 조금 전의 흥분을 삭였다. 가끔 정면에서 불어오는 회오리바람이 황톳길 좌우에서 하늘로 누렇게 치솟아 올랐다. 황량한 초원의 뿌리가 파헤쳐진 듯 군데군데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구덩이를 피해 봉고는 속도를 올렸다. 바람이 앞에서 부는 탓으로 먼지는 차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차창을 활짝 열었다. 대낮의 마른 바람과는 다르게 약간 습습한 바람이 불었다. 뭔가 정면 창에 작은 이물질이 달라붙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아주 작은 점처럼 보였는데 점점 커지더니 내가 앉은 좌석 속으로도 날아들었다. 작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띄엄띄엄 떨어지는 빗방울은 그리 굵지 않았지만 마른 몽골의 대지에 비가 내리는 광경을 지금 보고 있었다. 규호가 떠들었다. 「야, 이것 봐라! 지금은 비 오는 계절이 아닌데도 비가 오네! 혁민이 너, 참 좋은 때 왔다! 이런 데서 비 구경을 다 하고 말이야!」 그게 아니었다. 차 정면 북쪽 저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부연 기운이 점차 저녁 햇발을 먹어치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점점 넓게 퍼지면서 낮은 언덕을 삼키더니 어느 새 차 정면을 가득 덮을 정도로 가까이 와 있었다. 엄청난 먼지폭풍이었다. 강한 바람은 바짝 말라버려 뿌리가 약해진 풀뿌리를 할퀴고 파헤치면서 온 사방을 누런 황토로 가렸다.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서둘러 창문을 닫았다. 차창으로 바람은 금속성 음향을 울리며 맹렬히 스치며 지나갔다. 우리는 그 황토바람 한가운데 있었다. 「먼지바람이야. 한번 지나가면 괜찮아 져. 잠시 기다려 보자. 이 몽골 초원에서는 가끔 부는 바람이야.」 우리는 차 안에서 숨죽이며 앉아 있었다. 세계는 황토바람이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천지에는 달리고 꺾이며 멈추다가 휘돌고 솟구치거나 지표를 갉아먹으며 낮추 파고드는 황토 바람이 내뿜는 기운에 놀란 모든 물상들이 몸을 내맡기면서 부르짖는 위낮은청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때로는 날리는 모래나 작은 돌조각이 차창에 부딪치면서 자르랑거리는 소리도 들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그 모든 소리를 들었다. 시간의 저편에서 태고의 지표를 울리면서 다가오는 원시의 음향이 거대한 날개로 광막한 허공을 수만 갈래로 찢으면서 태양의 반대편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밤바다의 허연 이빨이 바위에 부딪쳐 깨어지는 소리를. 기억조차 희미한 규호의 울음도 있었다. 수백 마리의 말떼가 뒤섞여 토해내는 울부짖음도 들었다. 또 있었다. 단단한 지표가 갈라진 틈으로 거대한 알 하나가 밀려 내려가며 깨어지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어린애 울음으로 바뀌었다. 분명히 들었다. 순간 나는 숨 쉴 수가 없었다. 가슴이 수만 갈래로 찢어지는 소리 없는 비명을 들었다. 차 문을 열고 바람 속으로 들어갔다. 밀려오는 바람 정면으로 서서 온몸으로 파고드는 황토바람을 마음껏 들이마셨다. 텅 빈 내 몸 속으로 바람을 한없이 집어넣고 또 넣었다. 갑자기 아랫배에 감각이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배꼽노리 부근에서 점차 아래로 퍼지면서 맹렬하게 밑으로 밀려내려 갔다. 나는 한 움큼이라도 놓칠세라 벌린 입을 더 크게 벌려 마시면서 바지 허리띠를 풀었다. 그리고 차 뒤쪽으로 걸어갔다. 바지를 발목까지 내리고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눌리고 눌렸던 모든 것들이 내 몸에서 빠져나오고 있음을 알았다. 눌어붙어 있던 마지막 한 조각도 남김없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통쾌했다. 배변의 쾌락과는 또 다른 통쾌감이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전해졌다. 정신이 아늑했다. 바람에 밀려 온 미세한 황토가 차의 배면에서 세차게 맴돌면서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방이 흐릿하게 보였다. 눈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았다. 난 눈물을 닦지 않았다. 그대로 두었다. 황토와 눈물이 뒤엉켜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하나는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작은 인형 같은 물체가 나에게서 벗어나 바람을 타고 허공으로 구르며 치솟는 것을. 그것은 누런 황토바람 속으로 잠겨 들어가 순식간에 흔적 없이 사라졌다. 숨이 막혔다. 허공으로 얼굴을 곧추 세운 내 눈에 다시 진한 기운이 밀려들어 앞이 더욱 흐릿해졌다. 그것은 배변의 쾌감으로 인한 눈물 때문인지, 몰아치는 황토 때문인지, 몸에서 다 빠져나가고 마지막으로 남은 심장이 떨면서 남긴 눈물 때문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1.박문구 2. 강원일보 신춘문예 소설 3. 강원일보 중편소설 연재 4.단행본 '환영이 있는 거리' 출간 5. urimal21@hanmail.net  
250 와장창 내는 문/김인기 file
편집자
2517 2012-11-01
13.1월 32호 수필  와장창 내는 문 김인기 아마도 참사 현장을 둘러본 탓일 것이다. 중앙로역을 지날 적마다 나는 아득해진다. 바로 여기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고 다쳤다. ‘우리들이 으레 그러려니 믿고 이용하는 영조물이 이렇게나 허술하다니…….’ 당일 인근에 있던 나도 경악했다. 그로부터 9년 세월이 흘렀다. 문득 궁금하다. ‘우리들이 여기에서 교훈을 얼마나 얻었을까?’ 이내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간에도 갖가지 사고들이 일어났다. ‘이러다가 또 당하고야 말지…….’ 이것도 기우일까?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손으로 출입문을 만지며, 눈으로 안내문을 읽으며, 나는 의심한다. ‘만약에 지시대로 해도 문이 열리지 않으면 어떡하지?’ 나는 또 이러기도 한다. ‘사람들이 당황할 수도 있다.’ 이러면 우리들은 속절없이 불에 타 죽어야 하는가? 아니다, 이건 아니다. 나라도 출입문이든 무엇이든 부숴야 한다! 시설물도 마땅히 유사시에 맞춰 설계해야지. “이것저것 다 안 되면 유리창을 깨고 나가세요.” 이렇게도 가르쳐야 한다. 아무렴, 승객들 목숨이 중하지, 이까짓 유리판 몇 장이 중하랴. 나는 과거 그 사건도 다시 따진다. ‘그 많은 승객들이 왜 유리창을 깨뜨리지 못했을까? 그게 그렇게나 튼튼했던가?’ 내 눈에는 이게 단지 과거사로만 보이지가 않는다. 곳곳에 위험이 있다. 출입문도 종류가 많거니와 이의 개폐법도 동일하지 않다. 누구라도 다 익히기 어렵다. 손님들이 찻집에서 정담을 나누는 중에 불이 났다고 하자. 이들이 부랴부랴 바깥으로 나가려는데, 점주가 우선 찻값부터 받겠다며 출구를 가로막는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지 않느냐. 이런 판국에는 나도 잠잠하지 못할 것이다. “이봐요, 지금 이럴 게 아니잖아요?” 이래도 답답이가 걸리적거리면 이런다. “어허, 이 사람이!” 나는 완력을 숭상하지도 않거니와 그러면서 살지도 않았다. 이런 나도 급기야 주먹을 휘두르며 고함을 지르고야 말 것이다. 달리 방법도 없다. 내가 녀석을 와락 밀치거나 의자 또는 탁자 따위로 문이나 유리벽을 와장창 깨뜨리겠지. 우물쭈물하다가는 연기에 질식할 테니까. 여기에 대단한 지능이나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니다. 통계자료는 없어도 감각으로 짐작한다. ‘아마도 능히 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던 분들이 허둥대다가 많이 죽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허망한 죽음이 잇따를 것이다.’ 이래도 선무당들이 횡행한다. “어쨌든 파괴는 나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상말을 해? 쯧쯧, 역시 천박하고 과격해.” 구경꾼들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어 손가락을 입에 문다. 나는 뜨악하다. ‘어떻게 당사자들이 이렇게나 어설픈 주문(呪文)에 마비가 되어 판단력을 상실하나…….’ 바보가 따로 없다. 육신은 놓였으나 정신은 얽매였다. “당신은 이제부터 노예가 아니요. 그러니 앞으로는 본인 재량으로 다 하세요.” 누가 이러자, 녀석이 울먹였다. “주인님, 어쩌면 그렇게나 모진 말씀을 다 하십니까? 소인을 내내 거두어주십시오.” 이 나라에도 과거에 토지개혁이 있었다. 이것도 이래야만 할 사정이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어느 소작농은 ‘남의 땅을 내가 공짜로 받을 수 없다.’며 버텼다나. 이 시대에도 개혁해야만 할 것들이 있다. 미래에도 아마 ‘황당한 착각’을 ‘올곧은 소신’으로 여기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대안이 여럿 있으면 위기에도 차분하다. 여유가 있으니까. 전철의 출입문도 승객들이 이래야 더 잘 연다. 만사가 이렇지 않을까? 그러니까 여기에도 소화기만이 아니라 탈출용 망치도 비치하자. 사고가 어디에서 어떻게 터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구라도 이래야 할 때가 있다. “창문이 아니라 벽이나 지붕이라도 부수자.” 그런데 이런 발언에도 두려움을 느끼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매사가 저런 식이면 내 모가지도 잘리겠구나!’ 이런 지질한 작자들한테는 멀쩡한 상식도 몹시 불온하다. 서민들도 집권층의 횡포에 시달리면서 각성한다. ‘저것들을 그냥 그대로 뒀다가는 우리들이 도저히 살 수가 없겠구나.’ 주권재민의 원칙대로라면 잘나도 내 탓이고 못나도 내 탓이니, 누가 누굴 탓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런 대원칙마저 무너지고 말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뭘 어떻게 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역사를 돌아보라. 혁명 또는 폭동에는 피바람이 분다. 이 와중에 참혹한 일들이 벌어진다. 이를 미연에 막는 장치가 민주제도이다. 사람들이 우선 이걸 명심해야 한다.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정치인도 아니고 사학자도 아니다. 나는 외려 문외한에 가깝다. 이런 내 단견으로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몰상식하다. 언론인들도 그렇고, 법조인들도 그렇고, 종교인들도 그렇다. 문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왜 이래? 미쳤어? 이들이 잘 알면서 이런다면 교활한 것이고, 이들이 뭘 몰라서 이런다면 멍청한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정치과정을 두고도 이들이 뭐가 어떻단다. 이러면서 불신과 혐오를 양산한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세사에 초연한 것도 아니다. 의원들이 갑론을박으로 밤낮을 보낸다. 이들이 볼썽사납게 드잡이도 한다. 유권자들도 짜증이 난다. 그렇다고 이런 소란이 무가치하지만도 않다. 의원들이 국회의사당을 벗어난 모처에 끼리끼리 한통속으로 모여 조용히 법률을 제정해 보라. “재적 의원 과반 참석, 참석 의원 과반 찬성!” 오직 자리만 옮겼을 뿐이라고 해도, 이러면 후유증이 따른다. 그러니 누가 흉기를 들고 설치지 않는 이상은 그 ‘맹활약’도 모두 감내해야 한다. 그러다가 누군가는 ‘현실’을 깨닫고는 ‘말썽꾼’한테 ‘마아, 이제 그만해라!’ 하는 거다. 수십억 인류를 대표한다는 국제기구에서도 형편이 다르지 않다.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게 인간들이다. 여기에서 누가 나서서 나라의 실체조차 부인하고 그 발언권조차 박탈해 보라. 저마다의 체험에 뿌리를 둔 저마다의 진실로 누군가는 폭탄을 터뜨린다. 때로는 핵무장도 감행한다. 이들한테도 확신이 있다. 우리들 주위의 자그마한 동호회에서라면 누군가 이렇게 어깃장을 놓는다. “그래, 똑똑한 그대들이나 그렇게 열심히 하시든가.” 이런 꼴로 뭐가 제대로 되기는 어렵다. 그게 허영이었을까? 아니야, 그것도 애정이었을지 몰라. 권력자들이 지독했다는 건 분명하다. 이들은 저승에서도 확고할 것이다. “그런 절차 따위는 다 낭비야, 낭비!” 이들은 여전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풍문도 있나 보다. “내가 그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누구는 이러기도 했다더라. “그 분을 지금도 역시 존경하지만, 나는 그 때문에라도 그 분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궤변으로 자신들의 만행을 치장하는 자들도 부지기수이다. 어느 경우든 이건 불행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사려 깊지 못하다. “저것들이 호강에 겨워 저러니, 이참에 모조리 잡아다가 물고를 내야 해, 물고를!” 그 연놈들이 밉다. “상명하복(上命下服)! 일사불란(一絲不亂)!” 이런 걸 금과옥조로 삼는 터라 이견의 존재 자체가 애초부터 못마땅하다. “너희들이 뭘 안다고 따져?” 이렇게 반문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들은 극언도 예사로 한다. 그러면 이들의 언행에는 모순이 없는가? 그렇지도 않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초월과 예외가 넘쳐난다. 구성원들의 균일성이 집단의 화합을 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해롭다. 다양성의 상실은 불화의 조건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동일한 가치관으로 함께 생활하면, 이들이 우열에 따르는 서열을 가리느라 바쁘다. 이 불길도 치열하다. 이들은 서로 다를 게 없는 처지이다. 이러니까 더 환장하지. 남들과 다르면 따돌려질까 두렵고, 남들과 같으면 존재감이 없다. 도도해도 안 되고, 데데해도 안 된다. 남들이 선망하는 것들을 나도 해야겠는데, 이게 남들보다 조금은 더 나아야겠는데, 이런 사정마저 모두 같다. 너나없이 피곤하다. 급기야 진저리를 친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우리들이 정말 이럴 수밖에 없나?’ 그나마 이들은 철이 들었다. 성찰은 하니까. 과연 누구라도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이래서 이들이 가만가만 쉼터를 마련한다. 끝끝내 문을 내지 못해 불구덩이에서 나오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체제에 기생하는 무리들의 수작에 휘둘리지는 않으려 한다. 대다수 동료들이야 미련스레 만신창이가 될지라도 이들은 고요한 눈길로 만상을 응시할 줄도 안다. 사사물물은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그러므로 철이 든 위인들을 칭하는 용어들도 다양하다. 몽상가, 자유인, 낙오자, 방외인, 탈주범, 반역자, 지성인……. 누가 코딱지나 귀지를 바라보면서 물질의 시원과 종말을 헤아린다고 하자. 이게 수십억 광년 저 너머에서 명멸하는 은하계와 무관하냐? 그렇지 않다. 이것들도 따지고 보면 피차 통섭하는 우주의 먼지들이다. 하물며 그대가 겨우 그런 것들로 따따부따하겠다고? 차라리 산으로 들로 다니며 바람이나 붙들어라. 지하철은 실물이다. 탈이 나면, 나도 금방 감지한다. 그러나 이 공동체가 위기에 처한다면 한동안은 모르지 않을까? 누구라도 사태의 핵심을 깨닫지 못할 수가 있다. 만약에 이 사회가 불길에 휩싸인 집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야 너나없이 합심하여 불을 꺼야지. 여기에 실패하면? 어느 제독이 패배의 책임을 지고 전함과 함께 사라졌듯 일부의 사람들은 화염과 함께 타버려야 할 것이다. ‘나 어디에 가서 무슨 꼴을 더 보자고?’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일부의 사람들이다. 그래도 불이 난 곳이 지하철이나 집이라면 피할 곳이 있으나, 삼계(三界)가 화택(火宅)이라면 난감하다. 자문(自問)한다. ‘문을 낼 수 있을까?’ 자답(自答)한다. ‘물론이다.’ 그러니까 부처님도 설법하지 않았더냐. 오로지 각자가 아는 그 영역만이 자기 세계이다. 이건 아무리 뽐내봤자 그게 그저 그렇고 그런 누옥(陋屋)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에 불이 났다고? 놀랄 것 없다. 혹시라도 문이 없으면 발로 벽이라도 박차라. 이렇게라도 해서 밖으로 나가야지. 집이야 다시 지으면 된다. 나도 살면서 체득한다. ‘그때는 그게 대단했으나, 지나고 보니, 그것도 시시하더라.’ 자탄한다. “후회막급이다. 내가 왜 그렇게나 조급했던가!” 자신의 옹졸했던 속내가 다 드러났다. 시야가 좁으면 이렇게 된다. 무식한 자들이 용감한 척은 할 수 있어도 진실로 용감할 수는 없다. 이런 자들은 지레 겁을 집어먹고 자중지란에 빠진다. 그러므로 자신의 상상력에 맞추어 남들의 의견을 허황하다 이르지 말자. 그게 그런 경우도 없지 않으나, 그게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까. 우르릉 쿵쾅! 고대인들은 천둥소리를 자신들의 잘못을 꾸짖는 천신들의 경고로 들었다. 이들이 천둥이나 벼락의 정체를 몰랐으니 무지했다고도 하겠으나, 그래도 결과가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그 인간들이 더 선량해졌으니까. “네 이놈!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요즘은 아무도 이런 호통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들한테 두려움이 없어졌느냐? 천만의 말씀이다. 천지신명들한테 맡겼던 것들을 이제는 자신들이 직접 해야 하니 이래저래 고민거리가 더 늘었다. 오늘도 나는 지하철을 이용하며 안내방송을 듣는다. 비상시 출입문 여는 방법을 알린 이후 이어지는 끝말이 이러하다. “호기심 또는 장난으로 출입문을 열면 매우 위험합니다.” 출입문을 열 줄 몰라서 많은 승객들이 죽었으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는 뜻이렷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이런 생각도 한다. ‘누군가는 호기심 또는 장난으로 진작 그렇게라도 해 봤더라면, 그 사람들이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 거야.’ 이래서 나는 종종 ‘매우 위험하다’는 그 짓도 저지르고 싶다. 김인기 경상북도 영천 출생(1962). 《월간에세이》로 등단(1991) 수필집『함께 가는 우리들』(1999),『참 좋은 날』(2006). 대구작가회의 회원 전자우편: gagozigo@hanmail.net  
249 게자리 외1편/최형심 file
편집자
3614 2012-11-01
12.11월 30호 시  게자리 최형심 음영이 없는 내부로 물소리가 차오른다. 단단한 품안, 푸른 방 한 칸이 안으로 눕는다. 우두커니 바닥이다. 머리 위에 판각된 하늘을 기억한다. 환절기의 입질도 드물어지는 저문 밤, 물소리 너머 지상에서 꽃잎을 열고 닫는 소리 들려온다. 나비 한 마리가 읽어 내린 하늘과 바다 사이의 행간, 짓눌리는 수압이 바다의 연보가 된다. 물길을 풀어 이마를 헹구는 일이란 연질의 내부에 뼈마디가 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물길이 안으로 휘고 있다. 물렁한 내면이 맨 처음 두고 온 천공을 만지던 날, 그물에 걸린 노을 한가운데 서서 스스로 미로가 된 내력이 공중으로 흘렀다. 수중의 계단을 올라 야광의 무표정이나 될까. 견고해지는 감각이 갑각이 되면 모천에 이르기 위해 집을 짓는다. 질긴 파도소리에 묶였다. 물소리가 천공의 한때를 지나 천문학자의 눈가로 몰려갈 것이다. 균열이 없어 깊어진다고 그늘에 누워 썩은 살을 먹었다. 어떤 고요를 견디는 것은 갑각의 외연 안에 머무는 일이라고 거품을 문다. 바닥의 서사를 살아내는 저만치 여울이 있다. 모래시계 아래로 향하는 것들은 쌓여간다. 일기예보를 따라 누군가 모래시계를 뒤집는다. 도마뱀이 차도로 뛰어들고 있다고 양손에 가득한 전언이 뚝뚝 떨어지면 버찌의 시절은 가고 핏빛의 바닥을 건너는 발꿈치가 젖는다. 이내 물러지는 살들이 녹아내리고 인적은 드물어진다. 부나비들 사르르 내리는 소리 듣는다. 불빛은 불친절한 안내자라고 책방 점원은 비스듬히 앉아 책의 낡은 깃털을 만진다. 바람이 때로 방향이 될 때 서쪽 주방에서 마리, 마리아, 마리사가 운다고 끄적인다. 가는 목을 가진 시간이 휘어지고 맨 처음의 얼굴들은 낱알이 되고 오른편으로 저만치 기우는 슬픔을 가진 꽃들에게서 미립자의 꽃말을 빌린다. 흐느끼는 목덜미들이 멀리 갈 것 같다. 유성우 쏟아질 때, 갈잎큰키나무는 거꾸로 서서 숲이 된다. 발아래 낱말을 묻기 위해 지루한 수염은 자란다. 얼룩을 따라 푸른 파열이 유랑의 무리들을 저만치 보내고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목각의 시계를 지나 한 시절이 오고 한 시절이 갔다. 녹색 군무를 빠져나오는 잎 하나 기억한다. 피곤한 마리와 천천히 잠드는 천체가 나란히 이별한다. 마지막 모래알이 바닥을 향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약력 : 2008년 <현대시> 등단, 2009년 <아동문예>문학상 동화부문 수상, 2012년 <한국소설> 신인상 수상. 주소 : 133-850 서울시 성북구 용답동 232-1번지 신창 비바패밀리 406호 최형심 메일주소 : elqut@hanmail.net  
248 우포늪 외1편/김수화 file
편집자
2835 2012-11-01
12.11월 30호 시  우포늪 김수화 해질녘 방천길 따라 아버지 마중 나설 때처럼 옛길 그대로 반긴다. 깊은 잠에 빠져 든 아늑한 늪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심연에 잠겨 있던 오래된 기억들이 안개 되어 피어오르고 강물로 뛰어든 시간조차도 불러들이면 새들은 날갯짓으로 추억을 퍼 나르고 묶인 채, 물결 따라 꿈꾸는 사공 없는 배 위에 단발머리 소녀가 아버지를 기다린다. 그늘과 풍경 사이 달빛의 향기로 꽃물들인 달맞이 꽃 참매미 나무 품에서 한 생을 풀어 놓고 새들은 나뭇가지에 발자국을 남긴다 잠자리 풀잎 끝에 까무룩 선잠 들면 소나기 서러운 가락에 불어나는 도랑물 사는 게 달과도 같아 날마다 채우고 비우며 누구나 생의 여울목 소나기처럼 만나도 세월은 눈금 따라 삶의 무늬 새기며 가을빛 머문 산처럼 고웁게도 저문다 경북 선산 출생, <자유문학> 등단, 한국문협, 경북문협, 김천문협 회원, 경북여성문학회 부회장, 김천시 청소년 문화의 집 논술 토론 강사 시집 <햇살에 갇히다>, sohie4280@hanmail.net  
247 영천장(永川場) 외1편/권오윤 file
편집자
3197 2012-11-01
12.11월 30호 시  영천장(永川場) 이리가고 저기가도 영천장 가면 다 만나지 잘 가는 말도 영천장 못 가는 말도 영천장 거기서 다 만나지 콩 팔러 왔던 할매 쌀 팔러 왔던 아제 먼저 일어서고 뒤에 남아도 만불사 납골당 가면 다 만나지 사랑으로 다투고 원망으로 사랑해도 거기서 다 만나 더는 말없이 얌전하지 큰스님 큰스님, 노스님, 큰소리로 부르지 마라. 뜰 앞에 삼백년 배롱보살 계시고 산신각 향나무거사 오백세 넘으셨다. 연못엔 부처님 길 밝히던 연꽃동자 뒷산 숲 참나무나한 팔만사천 묵언수행 중 동자야, 다들 웃으신다. 귓속말로 하려무나.  
246 쌀벌레를 잡으며 외1편/김영애 file
편집자
2734 2012-11-01
12.11월 30호 시  쌀벌레를 잡으며 김영애 무더운 여름날 쌀자루에 벌레가 꼼틀댄다 빛깔 수수한 날개를 달기 위해 몸을 비비고 살을 에이면서 고행의 길을 간다 넓다란 그릇에 부어놓고 손가락으로 정신없이 잡아내는데 도망가던 한 놈이 꼼지락 거리며 문자를 쓴다 ‘나도 쌀벌레, 너도 쌀을 먹고 사는 벌레’ 몇 번을 읽어봐도 그렇게만 읽힌다. 봄 매화나무 한 그루가 창백한 얼굴로 나오는 사람도 들어가는 사람도 없는 잠긴 대문 앞에서 긴 잠에 빠졌다 열차의 긴 정적 트럭의 털털거림 아무것도 눈 감은 매화나무를 깨우지 못했다 어디서 왔을까 작은 새 한 마리가 바람을 물고와 가녀린 발로 가지 끝에 앉아서 모둠발로 뱅뱅 뛰어가며 바람을 꼭꼭 찍어 넣더니 매화만 알아듣는 긴 언어를 종알거렸다 봐줄 이 없어서 웃지도 못했다며 그제야 봄새 앞에서 감았던 눈을 뜨고 입술을 배시시 연다 골목이 출렁인다 머지않아 대문 열리는 소리도 날 것 같다. 여영 김영애 경북 영주 한맥문학 2005년11월호 신인상. 시조문학 2007년 가을호 신인상한국문인협회, 경북문인협회회 영주지부 회원한국시조시인협회. 월하시조문학회. 시조문학문우회원 .영주시조. 한국시조사랑운동본부저서 시조집: 별이 되는 꽃. 초승달에 걸린 반지, 쪽빛 하늘 한 조각 수상.국제문화 예술상.허난설헌 문학상 .에피포트 문학상. 시조문학 제4회 좋은 작품집상 2012 시조문학 작품상 연락처 경북 영주시 휴천2동 642-111 9010-7232-8054)  
245 작은 것 하나도 감사하자 외1편/박규해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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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2 2012-11-01
12.11월 30호 시  작은 것 하나도 감사하자 時調 翠松 朴 圭 海 따뜻한 마음이 전해올 때 큰 기쁨 아픈 마음 달래주며 위로하여 주는 마음 그 마음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이 로구나 감사하는 마음이 주렁주렁 영글면 서로서로 상부상조 하는 세상 된다면 세상은 더 좋은 일이 번져가게 되겠지 나를 잊게 만든 마음 고마움이 존재하고 정으로 사는 세상 더 커지면 좋겠고 마음 속 평생 감사한 마음들이 있겠다 노인과 노을 강가에 앉은 노인 지는 해를 바라보고 시간흐름 세월흐름 가는 것을 보면서 세월이 빠져 가는 것 허허롭게 웃는다 강물이 유유히 아무 말도 없이 흐르고 노을빛에 물들었는지 강물도 붉으스레 노인의 허전한 마음 강물 따라 가고 있네 불빛들이 하나 둘 일제히 일어서니 긴 한숨 꺾어들고 지팡이에 의존하며 집으로 걸어가면서 깊은 생각 잠긴다 박 규 해 프로필 ㅇ 아호 : 취송(翠松) ㅇ 고향 : 경북 상주 ㅇ 단국대학교 국어국문과 졸 ㅇ 사랑․ 소설계사 기자 근무 ㅇ 함창중고등학교 근무 정년퇴임 ㅇ 현대시조 “바램”으로 천료(97) ㅇ 97 ~새 시대시조(계간) 출품 외 9곳 문예지 출품 ㅇ 시조집 : 희망의 횃불. 찔레꽃이 피면 ㅇ 수상 : 시와 수상문학 특별상 ㅇ 동인지: 시인파라다이스 외 50권 ㅇ 현재 : 한국 문인 협회 경북 지회 회원. 현대시조 인단 회원. 한울문학 회원. 창작과 의식동인. 만다라 문학 회원. 파라문예회원. 시와 수상문학. 국보문학 회원. 한비문학 회원. 시와 늪 문학 회원. 시와 글 사랑 회원 ㅇ 주소 : 경북 상주시 복룡동 2길 15 대신 아파트 301호 휴대011-9382-3375  
244 붉은 신호등 외 1편/고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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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2 2012-11-01
12.11월 30호 시  붉은 신호등 \死後에도 그 존재가 확실한 용도의 돼지나 소 막창같이 질긴, 저 붉은 신호등의 붉음 앞에서 멈추고 멈추어 온 나는 지금도 멈춘다 저 붉은 신호등의 붉은 색은 다만 나를 잠깐 멈추게 하는 가식인가 내가 진짜 멈추는 이유는 신호등의 저 붉은 색이 질서를 아름답게 만든다는 환상 때문인가 그 무렵, 흙의 수염인 앞마당 잔디를 야금야금 가로질렀겠다 그 옛날 소 꼬랑지 벽을 문지르던 자리쯤 서서 팔짱을 끼자말자 눈높 이의 남산너머로 유월 석양이 한순간에 꼴까닥! 누군가 파심은 채송화와 매발톱 흰 쪽문 아래의 애기똥풀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얼어 붙었다 석양이 우리와는 확연히 다 른 존재라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엷은 술 냄새에 빈혈기마저 화악 끼치던 석양은 온 몸이 한 개의 등신불인 그것이 퉁 퉁 붓는다 그리고 특유의 이별식으로 우릴 새 피의 공급처 혹은 쓸쓸한 강가로 데려갔으니 꽃같이 죽은 아이 감꽃처럼 꽃 맺지 못할 송화처럼 분하고 부운 젖, 그 강에 가면 언어가 가난해지고 반대가 자유이다 기다리지 않고 기다리지 않아도 한 개도 없는 전화번호에 도시가 필요없다 너는 한 개의 강으로 누워 우리는 네 곁에서 무당꽃처럼 잠들고 준비한 한 필의 무명천같은 손길로 일상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한 접시의 박나물처럼 남기지 않을 짧은 순간을 오래 대접하는 너는 바로 하나의 희귀한 미련이며 하나의 속속한 정 유월이 자리해* 유감없이 낮은 석양은 강물따라 살아생전 끝낼 수 없는 장편, ‘소신공양’이 되었다 토란의 넓은 귀에 고인 이슬조차 생사의 눈물 구구절절 하였다 이 무렵, 온 나라는 강을 앓고 울음소리 끊이지 않았다 *인용구  
243 창/이병순 file
편집자
2845 2012-10-02
12.11월 30호 소설  창(窓) 이 병 순 기타를 튕길 줄 알지만 걸터앉을 창턱이 없었던 내게 창은 마냥 스테인드글라스 사탕 빛 정서는 아니었다. 남녀 한 쌍이 별 박힌 하늘을 바라보며 와인 잔을 들고 있거나 누군가 열어젖힌 창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창틀에 기대선 모습들은 창 아래서 연인을 향해 세레나데를 부르는 영화 장면처럼 실감나지 않은 이미지였다. 내게 창은 알맞은 양분의 햇빛을 관통시키는 프리즘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창은 프리즘도 사탕 빛 정서도 아닌 틀과 유리로 이루어진 건축구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깨달았다. 오전에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텅 빈 창틀을 언제 다 메울까 아득했다. 깨진 유리조각이 창틀 곳곳에 끼어 있었다. 나는 코팅장갑을 끼고 창틀이나 베란다 바닥의 유리조각부터 치웠다. 거실 베란다와 바깥 베란다 유리 모두 깨진 채 창틀이 뚫려 있어 28 층은 공중에 붕 뜬 것 같았다. 깨진 유리조각이 든 커다란 쓰레기봉투들이 베란다 한쪽 통로를 막고 있어서 작업하는데 거치적거렸다. 쓰레기봉투를 찢고나온 유리조각은 두껍고 날카로웠다. 과장을 따라다닌 지 열 달가량 동안 같은 집을 다섯 번 오기는 처음이다. A/S를 십 년 넘게 해 온 과장도 같은 집을 이렇게 자주 오기는 처음이며 새시에 묻은 가느다란 선 한 줄 갖고 보수수리를 신청하는 집도 이 집이 처음이라고 한다. 현관 입구에 있는 화장실 앞 마루판이 컵 받침 만하게 팬 것은 창틀 새시의 가느다란 줄에 비해 큰 하자인데도 집 주인 여자는 보수공사 신청을 하지 않았는지 올 때마다 마루판은 팬 채 그대로다. 과장 말 대로 여자는 창에만 붙어 있는지도 모른다. 사다리에 올라선 과장이 드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콧잔등으로 흘러내리는 안경을 밀어 올린다. 나는 잡았던 창틀을 벽에 기대세우고 과장한테 드릴을 건넨다. 치이잉. 과장이 드릴로 문고리를 겨누자 짧은 비명이 터진다. 과장이 입은 연회색 작업복의 왼쪽 가슴에는 ‘창에 대한 긴 생각’의 본사 로고가 붉게 박혀 있고 여기저기 허연 실리콘이 묻어 있다. 재바른 손놀림과 서두르지 않는 과장의 행동에서 오랫동안 현장을 누벼온 관록이 엿보인다. 과장이 문고리를 딸깍딸깍 매만지는 소리 사이로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쇼 호스트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자는 과장과 내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짜증어린 말투를 쏟아내던 때와 달리 오늘은 조용한 편이다. 이 집에 처음 불려 왔을 때는 창틀이 헐거워 유리가 흔들거렸다. 창틀을 조이고 실리콘을 먹여 틀에 유리를 고정시켜 주었다. 두 번 째 왔을 때는 문짝 손잡이 부분에 거뭇한 선이 쳐져 있어 제거해 주었다. 세 번 째 왔을 때는 베란다 맨 안쪽 새시문짝의 밑면에 못 자국 만하게 꺼진 홈이 있어 열풍기를 불어넣어 평평하게 펴주었다. 그것은 어지간한 눈썰미가 아니면 찾아내기 힘든 하자였다. 네 번 째 찾아온 그저께는 안쪽과 바깥쪽 베란다 유리문 모두 박살이 나 있었다. 관리사무실을 거치지 않고 여자 남편이 과장한테 전화를 했을 때부터 낌새를 알아차렸어야 했다. 서비스센터에 접수되지 않은 하자보수는 굳이 과장이 해주지 않아도 되지만 요즘 계속 이 단지를 돌고 있던 중이어서 우리는 지나는 길에 이 집을 들렀다. 깨진 유리는 A/S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과장의 말이 채 나가기도 전에 여자 남편은 다급하게 말을 뱉었다. 업무 중에 유리 때문에 잠시 들렀다는 그의 말투는 사정조였다. “동네에 있는 유리 집에서 맞추는 것보다 이왕이면 이 아파트 시공업체에서 담당하는 유리가 낫지 않을까 해서 전화했습니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여자는 그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샌들을 신은 발로 유리파편을 휘저었다. 유리조각에 여자의 발길이 닿자 짜랑짜랑 소리가 났다. 유리조각에 찍힌 거실 마루판 여기저기는 생채기처럼 긁혀 있었다. “일단 유리조각부터 다 치우시고 다시 연락하십시오.” 과장의 말투는 차분하고 단호했다. 유리 파편을 발로 살살 밀어내며 딛던 과장의 모습은 현장 감식을 끝낸 노련한 형사 같았다. 공구함을 들고 과장 뒤를 따라 나가던 나도 조심스레 바닥을 디뎠다. 아령으로 유리창을 향해 던졌다지요, 아마. 오늘 오전에 과장과 내가 유리를 맞잡고 승강기에 타는 것을 본 경비가 몸서리치는 시늉을 하며 중얼거렸다. 경비는 우리가 유리를 맞잡고 경비실 앞을 지날 때마다 한 마디씩 보탰다. 여자의 남편은 지방의 고위공무원이며 며칠에 한 번씩 집에 들렀다. 여자가 베란다에 뛰어내리려는 것을 그녀의 남편과 아들이 붙들었다는 말을 하며 경비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파트를 돌아다니다보면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저절로 귀에 들어왔다. 창틀에 끼운 창은 문짝끼리 딱 맞물려 있다. 과장은 사다리에 한 발을 땅에 내리고 창틀 롤러 쪽을 훑어본다. 문이 쓰륵쓰륵 열고 닫힐 때마다 우기에 젖은 텁텁한 바람이 들쳐든다. 어둑한 숲이 반사된 창유리에 드릴을 쥔 과장의 옆모습이 흐릿하게 비친다. 어디선가 창문 닫는 소리가 탁탁 들린다. 밤을 맞는 소리는 창문 닫는 소리부터 시작된다. 일곱 시가 조금 지나 있다. 여느 때 같으면 A/S를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도로 위에 있거나 사무실에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을 시간이다. 집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수진과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다보면 어느새 내릴 때가 되곤 했다. 수진은 요즘 학습지 회원 수가 많이 늘어 집에 도착하면 거의 열 한 시라고 했다. 나는 수진을 만나기 위해 도서관에 갔지만 이제 수진은 도서관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수진은 교직 임용고시 준비 때문에 주말이면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했다. 몇 달 전부터 수진은 임용고시에 대한 불안감이나 시험을 대비하는 새로운 각오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두 번이나 연거푸 임용고시 시험에 낙방한 수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수진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것뿐이라 여겼었다. 수진이 학습지 지국장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내 문자메시지에 답하는 걸 소홀히 했고 내 전화를 잘 받지 않았다. 그것은 도서관에도 나타나지 않은 시기와 비슷했다. 나는 답답한 마음을 친구 몇에게 털어놓았다. 친구들은 오래된 연인들이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수진이 제 발로 떠나는 걸 고맙게 여겨라 했다. “자, 여기.” 과장은 창의 위 칸 손잡이를 잡으며 내게 드릴을 건넨다. 텅 빈 창틀은 번들거리는 유리로 다 메워졌다. 일머리를 훤히 꿰고 있는 과장이 아니라면 하루 만에 끝내기는 힘든 작업이었다. 과장은 내가 보조를 착착 잘 맞춰줘서 일이 순조롭게 끝난다고 하지만 나는 고작 유리나 창틀을 맞잡아주거나 창틀에 매달린 과장에게 연장을 건네주는 일밖에 하지 않았다. 내가 복학을 하고 회사를 그만 두면 누가 과장보조로 나설 것인지 과장은 벌써 걱정이었다. 2학기에 복학을 하려면 여기서의 아르바이트는 보름가량이면 끝이다. 회사에 처음 올 때는 생산 현장의 바쁜 일손을 거드는 게 내 일이었다. 생산 라인뿐만 아니라 포장이나 래핑까지 각 팀마다 일손이 모자라 과장 보조로 외근 나올 만한 사람은 마땅히 없었다. 회사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람은 나뿐이었다. 낮은 임금에 비해 공단지역 주변의 집세는 비싼 편이라 일꾼 구하기는 어려웠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아니면 물량을 제대로 출하해내지 못할 만큼 일손은 귀했다. 본사에서 지시하는 주문량과 주문날짜를 맞추려면 생산 현장은 늘 밤 9 시까지 기계를 가동시켜야 했다. 나는 생산품 작업지를 뽑아 복사를 해 현장에 보내고 공문과 팩스를 챙겨 본부장한테 보고하고 남는 시간은 래핑이나 포장 실을 오가며 모자라는 일손을 거들어야 했다. 래핑실에 늘린 체리 빛이나 원목 색을 입혀놓은 창틀을 보고 있으면 창틀에 비칠 풍경들이 머리에 스쳤다. 본사 광고모델인 여배우가 창을 어루만지며 ‘창에 대한 긴 생각은 당신에 대한 긴 생각이에요’라고 속삭이는 것을 들었을 때는 군 내무반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대기업에서 새시문짝에까지 손을 뻗치는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을 뿐, 창에 대한 긴 생각을 하고 있기에는 생각할 게 너무 많은 제대말년이었다. 인문학부를 졸업해서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것을 몰라서 입학한 것은 아니었지만 제대말년쯤 되니 그런 공부에 대한 회의감부터 들었다. 복학하지 않고 공무원채용시험 대비를 착실히 하는 게 실속 있겠다는 것과, 복학을 해 학교 다니면서 언론고시공채 준비를 할까하는 생각들이 오가기도 했고 무엇보다 평생 엄마 아버지가 꾸려왔던 철물점을 비워줘야 한다는 게 마음이 무거웠다. 집 주인이 집을 헐어 5 층짜리 건물을 지어 새로 임대를 하겠다고 했지만 새 건물에 철물점을 임대하는 가격은 비싸서 다른 곳을 알아봐야 했다. 제대한 지 며칠 만에 나는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군에 가기 전에는 독서실이 내 거처였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밥 먹을 때 말고는 대부분을 집 근처에 있는 독서실에서 생활했다. 좀 더 빨리 독서실을 거처로 삼아야 했었다. 고등학생이면 부모가 단칸방에서 다 큰 아들과 함께 자야한다는 게 얼마나 커다란 고역인가 알 만한 때였다. 창문으로 어두운 색 도배지로 모조리 가린 독서실이었지만 그곳이 우리 집보다 편했다. 커튼을 드리워 엄마 아버지 방과 내 방을 나누었지만 커튼은 휘장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커튼의 벌어진 틈으로 보이는 거울에는 엄마 아버지가 다 보였다. 실금 같은 커튼의 틈이라도 거울로 보면 엄마 아버지 모습이 훤히 보였다. 자라면서 나는 커튼 사이로 벌어진 틈을 보지 않으려고 커튼을 등지고 벽을 향해 눕기 시작했다. 엄마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조금만 기다리면 창이 넓고 전망이 트인 곳에 내 방을 멋지게 꾸며주겠다는 말을 자주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보였다. 대형마트에서 공구나 철물을 팔기 시작하면서 철물점을 찾는 사람들은 나날이 줄었다. 겨우 세 식구 호구지책 하기에도 급급했다. 어릴 때부터 농짝에 창이 가려져있어 나는 창이라는 개념을 지니지 못했다. 다만 부모가 전망이 트인 창을 들먹일 때마다 창이 삶의 핵심 부품처럼 귀에 와 박혔다. 철물점 입구에는 개 줄이 주렴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바닥에는 똬리를 틀어 둘둘 말린 고무호스가 늘려있고 문 옆에는 삼지창처럼 마대가 버티고 있었다. 손님이 찾는 물건을 꺼내려면 선반에서 먼지가 풀풀 날렸다. 가게에 앉아 밖을 바라보면 호프집 간판 너머 역광이 비쳐 흘렀다. 역광은 우리 가게 유리문을 비추었고 그 빛은 호프집 유리에 되비쳤다. 유리끼리 반사된 빛이 우리 집에 어른거린 유일한 빛이었다. 넌 우리의 빛이다. 제대를 하던 날 아버지가 내 어깨를 두들기며 소주잔을 건네며 했던 말이다. 그것은 연기에 서툰 배우가 겨우 외워서 뱉는 대사 같았다. 빛이라는 말이 그토록 무겁게 들리기는 처음이었다. 엄마는 상추에 삼겹살을 싸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육십 살도 채 되지 않은 부모가 내 눈엔 노인으로 보였고 그들을 컴컴한 동굴에서 벗어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날 나는 삼겹살을 오래 씹었고 소주는 급하게 들이켰다. “터치펜으로 여기 좀.” 과장은 새로 끼운 문짝의 흠을 손가락으로 짚는다. 새시 문짝에 난 작은 흠집은 터치펜으로 문지르면 감쪽같다. 흰색 래핑에 얼룩을 지우는 도구가 물파스라는 걸 아는 입주민은 거의 없다. 그들은 로고가 찍힌 작업복과 덜컥거리는 공구함을 믿음직스러워 했다. “알았다니까요? 글쎄 잘 끼워졌어요. 네? 어디 걔만 고3인가? 고3, 고3 그만해요. 고3 엄마가 뭔 죄라도 지었어요? 일단 알았어요.” 여자의 목소리가 베란다로 흘러나온다. 우리가 처음 왔을 때처럼 다소 앙칼진 목소리다. G그룹이라는 대 기업에서 만든 창이 이게 뭐예요? 내가 마음만 먹으면 유리가 쑥 빠지겠어, 정말. 여자는 창틀에 벗겨진 실리콘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툴툴댔다. 우리 회사는 G그룹이 아니라 G그룹의 하청업체라는 말까지 여자한테 할 필요는 없었다. 과장은 여자가 가리킨 곳 말고도 흠집을 샅샅이 찾아 실리콘을 먹였다. 나는 커팅 칼로 창틀에 묻은 실리콘을 긁어냈다. 여자가 덜 마른 실리콘을 자꾸 손가락으로 문질러대는 바람에 짧게 끝날 일을 조금 지체했던 날이었다. 과장은 주스 잔에 빠진 날벌레를 손가락으로 건져내고 주스를 꿀꺽꿀꺽 마신다. 바지 뒷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온다. 스팸이다. 핸드폰 바탕 창에 수진이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웃는 모습이 떠 있다. 제대하고 얼마 있다 수진과 함께 튤립축제에 갔다가 찍은 사진이다. 부재중 세 통 중에 두 통은 엄마한테 온 것이다. 끼니 거르지 말라는 똑 같은 말을 엄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했다. 나는 더 이상 수진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수진의 핸드폰에 표시된 부재중 내 이름이 문자메시라면 문자메시지일 것이다. 나는 창틀 홈에 유리 모서리를 끼우고 손바닥을 탁탁 쳐보지만 과장처럼 단박에 쏙 들어가지 않는다. 과장이 하는 게 쉬워보였던 것은 과장이 문을 어루만지는 게 아니라 문짝을 갖고 노는 것처럼 비쳤기 때문이었다. 과장이 내 반대편 문짝을 잡고 창틀을 기울여 유리를 톡톡 치니 유리는 창틀에 쏙 들어간다. 과장이 한쪽을 훌렁 들자 맞잡은 내 팔이 문짝에 딸려가는 것 같다. 창틀과 유리가 축축하다. 는개인지 안개인지 모르겠다. 아침에 출근준비를 하면서 텔레비전에서 밤부터 비가 온다는 소리를 듣고도 나는 고시원의 창을 닫지 않고 나왔다. 그것은 창이라기보다 숨구멍 같은 쪽창이었다. 그 구멍으로 거미가 기어오르거나 날벌레들이 날아 들어오곤 했지만 요즘처럼 더운 때는 늘 열어두었다. 쪽창으로 팔을 뻗으면 옆 고시원 벽이 닿기 때문에 빗발이 들이칠 틈도 없을 터였다. 싼 월세에 비해 교통이 편리하고 주위의 싼 밥집도 많아 다른 곳으로 옮길 이유는 굳이 없었다. 간혹 고시원 주변의 편의점 앞에 놓인 간이 테이블에 나와 같은 고시원에 묵는 사람들이 맥주를 들이켜며 앉아 있곤 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나를 잡고 말을 했다. 갑갑해서 나왔슴다. 우리 고시원 말이오, 다 좋은데 창문이 좀 넓었으면 얼마나 좋겠소. 나는 쪽창이라도 좋으니 앞에 가리는 벽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답해 주었다. “앞이 트였다고 모두 전망인 것은 아니라고. 김 군도 아파트를 많이 다녀봐서 알겠지만 창 앞에 볼 게 뭐 있었어? 전망, 전망들 하지만 정작 전망 좋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전망이라 하지 않지. 요새 사람들, 세계로 어디로 다니면서 좋은 것은 다 보고 사는데 뭘 더 보고 싶겠어. 사람들이 넓은 창을 원하는 것은 뭘 보겠다는 뜻이 아니라 누가 저들을 봐주기를 바라는 거지.” 얼마 전 이 아파트 109동에서 우울증을 앓던 중년 남자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이야기는 입주민들 사이에 쉬쉬하던 이야깃거리였다. 과장은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베란다 창으로 뛰어내린 이야기는 또 언급하고 싶지도 않은 눈치였다. 좀 다른 방법으로 죽든가 하지, 참. 과장은 라디오볼륨을 더 높이고 가속기를 조금 더 세게 밟았다. 차창으로 바람이 펄럭펄럭 들쳐들었지만 나는 창을 쑥 내렸다. 과장의 말에 창밖이 절벽처럼 느껴져 섬쩍지근했지만 창이란 열어젖히는 맛이라는 게 창에 대한 나의 간명한 생각이었다. 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버스를 탔을 때 나는 창가에 앉아 바깥 풍경에 눈길을 주었다. 창으로 스치는 풍경에 눈길을 주고 있으니 내무반과 연병장을 누볐던 지난 시간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행군 때 발바닥이 갈라지는 듯한 고통과 특공훈련 때 무술 연습을 하던 것과 공수훈련 때 낙하하는 연습을 하던 것 등 힘들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시간만 흐르면 모든 게 끝이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그러나 제대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자 답답했다. 창이라도 확 열어젖히고 싶었지만 내가 탄 고속버스는 창을 열 수 없게 되어있었다. 유리는 차고 단단한 벽이었다. 접촉되지 않는 바깥 공기는 풍경이 아니라 감질 나는 미끼였다. 아파트도 창 광고와 다름없이 풍경을 미끼로 삼았다. 사람들이 모두 창 앞을 서성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아파트 분양 광고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베란다 창 앞에 선 광고 속의 여자는 펄럭이는 흰 커튼자락을 살포시 거머쥐며 속삭였다. 나는 ‘창밖은 햇살’에서 살아요. 아파트 광고인지 창 광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다니다보면 전망이 그럴싸한 곳이 많았다. 강줄기와 억새 숲이 보이는 아파트들, 구불구불한 기찻길이 펼쳐진 산 중턱의 빌라들, 바다가 훤히 보이는 마린시티의 타워들, 벽의 디귿자가 유리로 된 전원주택에 다녀온 날이면 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엄마 아버지의 골방이 떠올랐다. 엄마 아버지는 이사하면서 받은 전세금으로 예전에 받은 내 학자금 대출금을 갚아버렸다. 나머지 돈으로 집을 구하려면 전보다 더 나을 수는 없었다. 옮긴 철물점은 건물이 낡아 비가 많이 오면 벽에 물이 뱄고 창 앞에는 술 상자들이 쟁여져 있었다. 주점을 하는 옆집의 자지레한 물건들은 모두 뒷마당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둡고 습진 엄마 아버지의 방을 생각하면 내 마음은 눅눅했다. 유리에 빛이 달궈진 것만 보면 마음을 그 위에 올려놓고 싶었다. 가끔 사무실에서 복사물을 복사하기 전에 네모난 유리에 나를 비춰보았다. 복사기 유리 밑에 깔린 어둠이 투명한 거울이 되어주었다. 나는 거기에 비친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턱밑의 뾰루지도 어깨의 툭툭한 살집도 제대하고 나서 생긴 변화였다. 복사기의 검은 유리는 우물 같았다. 아무런 특징 없는 스물다섯 살의 희멀건 얼굴이 검은 우물에 풍덩 빠져 있었다. 넌 우리의 빛이다. 아버지의 그 말은 ‘우린 너의 빚이다’라는 말로 울려 퍼졌다. 우리 조금 떨어져 있어 보기로 해. 떨어져 있다 보면 뭔가 좋은 해결책이 있을 거야. 스물다섯 살의 여자에게 동갑나기 예비복학생 연인이 어떤 존재인지 떨어져 있지 않아도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 기계공학과도 졸업해 봐야 어차피 기름밥 먹어. 기계공학과가 바로 공돌이를 배출하는 과 아니야? 너 복학하지 말고 그 회사에 말뚝 박아. 공대 다니는 친구의 말이었다. 전공을 살려 취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정상적인 월급쟁이를 해서 평균적인 생활을 누리지도 못한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조바심이 약간 사라지곤 했다. 나는 우물을 휘젓고 싶어 복사기 전원을 켰다. 드르륵거리는 렌즈 조절기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시작’이라는 단추에 푸른 불빛이 들어오자 나는 복사기 뚜껑을 들고 유리판에 얼굴을 대고 버튼을 눌렀다. 위이잉 하고 복사기가 가동되면서 빛이 번쩍 터졌다. 눈이 부셨다. 옆모습도 찍고 손바닥도 찍었다. 용지 배출구로 빠져나온 비 포 용지는 검은 색이었다. 뭉텅 빨려 들어간 빛은 흔적도 없었다. 시커먼 용지를 꾸깃꾸깃 접어서 쓰레기통에 넣는데 본부장이 인터폰으로 나를 불렀다. “할 일이 없나? 저것 보라고, 본사에서 막 부려놓은 자재를 실장 혼자서 자재실에 옮기고 있다구. 어서 가서 자네가 맡아하게.” 본부장이 가리킨 곳은 벽 모퉁이에 달린 CC카메라였다. 거기에는 다섯 개의 CC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자재실, 래핑실, 포장실, 창틀 생산 라인, 사무실 등의 모니터에 나타난 사람들의 움직임은 꿈틀거리는 아메바 같았다. 어깨에 멘 새시뭉치들을 자재실에 쟁여놓는 실장의 모습도 보였다. 자재과 박 반장이 자는 모습을 잡은 것도 CC카메라였다. 박 반장은 정상 업무를 마친 뒤 밤 열 두 시까지 경비를 서서 업무 외의 수당을 챙겨야 아이 셋 뒷바라지를 할 수 있다는 거였다. 잠이 모자라는 그는 점심을 일찍 먹고 자재실에 가서 자곤 했다. 점심시간이 끝난 줄도 모르고 계속 자던 그는 CC카메라에 잡히고 말았다. 그 뒤 회사 여기저기에는 CC카메라가 몇 대 설치되었고 본부장은 박 반장에게 경비 업무를 보지 못하게 했다. 박 반장은 얼마 있다 회사를 그만두었다. 박 반장이 그만 둔 뒤 현장의 생산량은 다른 때보다 더 많다는 말이 들렸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1 층에서 살았어요. 베란다에 방범창을 가린 거기는 감옥 같았어요.” 언제 왔는지 여자가 베란다 문턱 앞에 서서 중얼거린다. 여자는 거실 벽에 기대 세워진 가족사진 앞에 서 있다. 가족사진은 이 집에 올 때부터 안방 입구의 벽에 세워져 있었다. 사진 속의 여자는 웨이브 진 단발머리에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다. 안경을 쓴 여자 남편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다.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아들은 여자 옆에 앉아 있다. 저때의 여자는 베란다 창가에 놓인 티 테이블에 앉아 남편과 찻잔을 기울였을지도 모른다. 계절마다 커튼을 바꿔 달고 그 앞에 예쁜 꽃병을 놓았을지도 모른다. 창 앞에 서성거리는 것만으로 행복했을 시절이 분명 여자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우울증은 남 얘기인줄 알았을 것이다. “이곳으로 이사 오고부터는 덜 마른 옷을 입은 것처럼 몸에 젖은 습기가 기분 나빠. 아저씨, 다른 아파트들도 이래요?” 베란다 안쪽에 있는 과장은 여자 말을 듣지 못한 것 같다. “이 아파트는 강을 끼고 있는데다 오늘 날씨까지 이러니 더 그렇겠지요. 이 아파트 25 층 이상에 사는 입주민들 중 빨래가 잘 마르지 않는다고 하는 집이 더러 있더라고요. 안개가 걸쳐지는 지점이라서 그러던데요.” 나는 그동안 보고 들은 깜냥에서 아는 체 했다. 여자는 우리를 볼 때마다 이사 온 이곳이 싫다는 불만을 나타냈다. 변기와 세면대가 모델하우스에서 본 것과 다르다든가 지하주차장에 고인 빗물이 웅덩이 같다는 말은 그렇다 쳐도 숲에 바바리맨이 숨어있다는 말을 할 때 여자는 꼭 여중생 같았다. 저 숲에 바바리맨이 숨어 있어요. 숨어 있다가 으쓱할 무렵에 아파트 뒷길에 나타나 여자들 앞에서 바바리자락을 젖힌다더라고요. 바바리맨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면서 호기심이 도사린 말투였다. 바바리맨이 바바리자락을 펼쳤을 때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면 그는 바바리 자락을 펼치지 않을 걸? 바바리 자락을 펼치는 순간, 괴성을 지르며 달아나는 여자가 있어야 그가 재미를 느끼겠지. 김 군은 폭우가 쏟아지는 높은 산봉우리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외로울 때가 없었나? 아마 처음부터 바바리맨으로 타고난 사람은 없을 거야. 모든 것을 창과 연결 지어 이야기하는 과장의 말이 재미있었다. 그때 차창 너머로 바라보이는 아파트 창들 모두가 바바리자락처럼 보였다. “아, 연락드린다는 게 깜빡 했네요. 여기서 마치면 바로 가겠습니다. 사모님이 도착하는 시간과 비슷하게 이곳 일도 마쳐질 것 같습니다. 예, 있다 뵙죠.” 맞벌이하는 입주자들의 하자보수 수리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이 퇴근한 뒤 찾아야 했다. 과장이 받은 전화는 며칠 전에 접수된 105동의 롤러 교환 건일 터였다. 밤 업무는 주로 과장 혼자 했다. 먼저 퇴근하는 내가 미안해하자 과장은 아무도 없는 빈집에 들어가기 싫어 일부러 밤일을 만드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말고 나 먼저 퇴근하라고 했다. 빈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말을 할 때마다 나는 과장과 결혼할 뻔 했다는 여자가 궁금했지만 물을 용기는 없었다. 혼자 빈 집에 들어서는 마음은 과장이라고 나와 다르지는 않은 것 같았다. 두 달 전쯤 회사 회식 때 나는 술을 좀 마셨다. 여느 때는 회식자리에 끼지 않거나 끼더라도 나는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늦게 시작한 회식자리였기 때문에 다음 날 아침 여덟 시까지 출근하려면 2차까지 갈 여유는 없었다. 더러 몇 사람은 2차를 가는 듯했지만 과장과 나는 자리를 빠져나왔다. 나는 과장이 자기 집에 가서 자고 다음날 함께 출근하자는 말에 따랐다. 과장 집은 원룸이었지만 베란다와 넓은 창도 있었다. 블라인드가 창을 가렸어도 공단지역이라 창밖 풍경은 짐작할 수 있었다. 창틀에 담배꽁초가 드문드문 끼어 있었고 베란다 한쪽에는 빈 소주병과 빈 맥주 캔이 수북했다. 입가심 해야지. 과장은 거실 바닥에 캔 맥주를 내려놓으며 텔레비전을 켰다. 우리는 텔레비전 마감뉴스에 눈길을 주면서 맥주 캔을 하나하나 비워냈다. 복학은 하라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학교를 다니면서 고민하고. 그날 과장도 대학교 2학년까지 마치고 군에 갔다가 제대를 한 뒤 복학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과장이 군에 가기 전에 사귀던 여자 얘기를 하는 바람에 나도 수진 얘기를 해버렸다. 그 아가씨가 김 군이 제대할 때까지 기다린 게 실수고, 김 군이 그 아가씨와 끝내지 않고 군에 간 것도 실수고. 과장은 알아듣기 어려운 알쏭달쏭한 말을 중얼거리며 소파 밑에 있던 무협지를 당겨 베고 누웠다. 잠든 과장의 얼굴 그 어디에도 커다란 창틀을 훌쩍 들어 올리던 기운 찬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새벽 한 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고 어두운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오렌지 빛 가로등이 희미했다. 그 빛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창에 엉겨 붙은 날벌레들이 꼼지락거렸다. 나는 수진에게 전화를 했다. 발신음이 떨어지자 이내 끊었다. 발신버튼을 눌렀다 끊었다 서너 번을 반복한 뒤 나는 바탕 화면에서 웃고 있는 수진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 뒤 나는 일을 마친 뒤 과장과 가끔 회사 부근의 피시방에서 'WAR ROCK'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윈도라는 영어자막이 뜨면서 퍼런색 화면이 떴다. 피시방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컴퓨터 창에 펼쳐진 장면과 대화를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화면을 보며 웃는 사람, 인상을 찌푸린 사람, 입술을 실그러뜨리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람 등 표정은 갖가지였다. 모두들 키보드를 다급하게 누르고 있었다. 나는 게임을 멈추고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나마나한 복학수속을 또 훑어보았다. 홈페이지 창 사진에는 대학생들이 책을 안고 활짝 웃으면서 본관 앞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모습들이 실려 있었다. 사진 속의 학생들은 나보다 몇 살 적을 뿐일 텐데 나는 그들보다 열 살 이상이나 더 먹어버린 느낌이었다. 아르바이트 일거리들을 훑어보았다. 시급을 많이 주는 곳은 여전히 치킨 배달원이었다. 복학을 한다는 것은 치킨 배달원이 된다는 뜻이었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과장의 창을 엿보았다. 과장의 창에는 ‘GAME OVER'라는 자막이 깜빡거렸고 과장은 의자에 기대 졸고 있었다. 컴퓨터의 알록달록한 화면은 충혈 된 눈동자 같았다. “영수증입니다.” 과장은 여자에게 창 설치대금 영수증을 내민다. "한 번 확인해 보시고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십시오, 그럼.” 과장은 접은 사다리를 옆구리에 끼고 현관을 향해 걷는다. 여자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고 거실 베란다 창틀을 잡고 서서 바깥을 바라본다. 어둠이 꽉 찬 창은 맑은 거울이다. 거기에는 과장의 뒷모습과 창턱을 딛고 선 여자의 모습과 공구함을 들고 두리번거리는 내 모습이 비친다. 여자는 베란다로 내려서서 창을 손으로 쓰윽 문지른다. 여자가 창에 다가갈수록 부스스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싸인 여자 얼굴이 또렷하게 비친다. 여자는 창밖에 서 있는 것 같다. 여자가 달그락거리며 갈고리를 만지는 소리가 창에 노크를 하는 것처럼 들린다. 여자가 창을 열자 빗소리가 세차게 들린다. 방충망 얼개 사이로 빗물이 들쳐드는데도 여자는 창 앞에서 꼼짝 않고 그대로 서 있다. 나는 실리콘 튜브와 커팅 칼을 주워 공구함에 챙겨 넣고 여자에게 인사말을 건넨다. 여자는 내 말을 듣지 못했는지 뒤돌아보지 않는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온다. 엄마다. 전화기를 귀에 대면서 현관문을 나온다. 빗줄기는 굵다. 아파트 뒤 공터에 주차된 차는 우리 트럭뿐이다. 나는 조수석 뒷자리에 공구함을 놓고 의자 레버를 당긴다. 과장은 트럭 시동을 걸어 둔 차창 앞으로 가 와이퍼를 들고 젖은 방문차량 스티커를 걷어낸다. 차창에 흐릿하게 비치는 과장의 얼굴에 창 앞에서 꼼짝하지 않던 방금 전의 여자 모습이 겹쳐진다. 창에만 붙어있는 사람은 여자만이 아닌 것 같다. 앞이 너무 어둡다. 나는 운전석으로 몸을 기울여 쌍 라이트를 켜준다.(끝) 부산 201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끌’로 당선  
242 꽃손/박종희 file
편집자
2777 2012-10-02
12.10월 29호 수필  꽃손 박종희 베란다에 가득 찬 볕살에 눈이 부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분으로 꽉 차있던 자리에 햇발이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같이 이름 있는 날 들어온 화분과 화원을 지날 때마다 사들인 화분이 오십 개가 넘었다. 아침저녁으로 화분을 들여다볼 때면 흐뭇했다. 그러나 예쁜 꽃을 보며 호사를 누리는 만큼 관리하는 것이 일이었다. 계절이 바뀔 때면 화분을 들여놓거나 분갈이하는 일이 어려웠다. 또, 추운 겨울에는 화초가 얼어 죽는 일도 있었다. 내 생활이 나태해지면 화초도 덩달아 게을러졌다. 이파리도 시들고 꽃도 피우지 않았다. 하나, 둘 말라비틀어지는 화초를 볼 때마다 화분정리를 해야겠다고 벼르다가 작정하고 베란다로 나섰다. 우선, 화분에 꽂혀있는 꽃손을 모두 뽑았다. 기린초와 베고니아, 수선화 등, 가늘고 여린 꽃나무가 쓰러질까 봐 세워놓은 꽃손이 제법 많았다. 플라스틱이나 철사로 된 것과 다급할 때 임시로 꽂아 쓴 나무젓가락도 눈에 띄었다. 그렇게 요긴하게 쓰이던 꽃손은 묶어 따로 두었다. 몇 차례 끙끙거리며 내다 놓은 화분을 지나가던 동네 아줌마들이 한개 두개씩 들고 갔다. 어떤 이는 나한테 화분을 가져가도 되겠느냐고 하더니 아예 열댓 개를 가져가는 이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 많던 화분이 순식간에 모두 없어졌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이 정말 신기했다. 요즘은 버리는 일이 더 큰 일이라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 고민스러웠는데, 뜻밖에도 쉽게 해결된 것이다. 옮기다 깨진 화분을 버리고 들어오며 나한테 쓸모없어진 물건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화분을 없애고 나니 새로운 공간이 생겼다. 학교에서 돌아온 딸애가 집 안이 훨씬 너르고 깨끗해 보인다고 좋아했다. 화초 때문에 속 태우는 나를 못마땅해하던 남편도 아주 잘했다고 했다. 서운해할 줄 알았던 두 사람이 좋아하니 스산하던 기분이 좀 나아졌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화초를 좋아했다. 친정 부모님도 꽃을 좋아하셨다. 자랄 때 집 마당에 꽃이 많아 우리 집을 꽃집이라고 했었다. 그래서 인지 길을 걷다 작은 풀꽃을 봐도 그냥 지나치질 못했다. 이른 봄, 돌 틈에 피는 제비꽃을 보면 집에 데려오고 싶어 안달했다. 그런 내 성격을 아는 남편이 가끔 종이컵에 제비꽃을 심어 내밀기도 했다. 화초를 좋아하다 보니 마치 화초가 집주인 같았다. 한 개, 두 개 늘어나던 화분이 거실을 넘어 안방까지 차지했다. 여름철엔 모기가 생겨 안 좋은 점도 있었지만, 꽃이 필 때면 참 좋았다. 눈을 뜨면 콧속으로 전해오는 향기와 황홀한 자태에 시름을 덜곤 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색색깔의 바이올렛은 한 번 피면 꽤 오래도록 지지 않았고, 까다롭게 구는 프리지어의 향기는 잠결에서도 매혹적이었다. 남편과 등산하다 가져온 야생 난도 일 년 내내 하얀 꽃을 피웠다. 아주 작고 가냘파 보기에도 안쓰러운 난이라 더 애정이 갔다. 거기에 질세라 제라늄과 시클라멘, 베고니아도 다투어 꽃을 피웠다. 어쩌다 한 번씩 물을 줘도 잘 크는 사랑 초와 기린 초, 영산홍, 공기 정화에 큰 몫을 하는 스마트 필름도 오래도록 정이 들었다. 다육 식물도 서른 개가 넘었다. 키우기 쉬워 주부들한테 인기 있는 다육선인장을 한꺼번에 서른 개나 사서 분갈이한 적이 있다. 아주 작아 앙증맞은 선인장을 화분에 옮겨 심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퇴근하고부터 시작한 분갈이가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화분을 선반에 올려놓고 나니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 덕분에 며칠을 호되게 앓았다. 딸애는 그렇게 미련스러운 엄마 때문에 화초가 보기 싫다고 했다. 화분을 정리하고 다시 며칠을 앓았다. 말이 오십 개지, 화분 오십 개 옮기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버릴 때는 몰랐는데 날이 갈수록 팔이며 어깨, 허리가 아파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내 살처럼 아끼던 화초를 버려야 했던 마음마저 같이 아팠다. 여기저기 파스를 붙였더니 꽃향기 대신 집안에 온통 파스 냄새가 진동했다. 이번에도 딸애는 매련스럽게 혼자 내다 버려 병이 났다고 툴툴거렸다. 화분을 버리고 나서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이유 없이 자주 베란다를 나가보는 일이다. 물을 줄 일도, 꽃 손을 세워 줄 일도 없는 데 말이다. 아마, 10년이 넘도록 몸에 배어 있던 일이라 그런가 보다. 이제 나는 여유로워졌다. 덕분에 화분에서 늘 벌쓰던 꽃손도 한가해졌다. 요즘은 나도 꽃손도 할 일 없는 ‘우두커니’가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아직도 화원을 지나는 길은 자유롭지 않다. 나도 모르게 눈길이 꽃으로 가고 자꾸 발걸음을 멈춘다. 언제쯤이면 이런 마음에서 자유로워지려는지 모르겠다.  약력 2000년 월간문학세계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 제3회 서울시 음식문화개선을 위한 전국수필공모전 대상수상 제5회 올해의 여성문학상 수상 제10회 전국시흥문학상 우수상 수상 외 다수 충북여성문인협회 부회장, 충북수필가협회 회원,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 한국작가회의 회원, 한국작가회의 충북지회 사무국장 충청일보, 중부매일 수필연재, 현 충북일보 ‘에세이 뜨락’ 연재 중 저서: 나와 너의 울림, 가리개 이메일: essay0228@hanmail.net  
241 숨은 꽃 외 1편/남태식 file
편집자
2675 2012-10-02
12.10월 29호 시  숨은 꽃 어떤 이에게 사랑은 벼랑 끝에 핀 꽃이다. 굳이 숨기지 않더라도 숨은 꽃이다. 사랑의 절정! 같은 말은 어울리지 않아라. 가슴 깊숙이 감춘 손은 오래 전에 자라기를 멈추었으니.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 사랑은 손닿을 수 없는 벼랑 끝의 영원히 손닿지 않는 꽃이다. 꽃과 새가 있는 집 1. 꽃들이 창백하다. 이 집에 든 꽃들이 창백하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이름만으로도 앞뒤 어떤 꾸밈말 없이 색깔만으로도 어울림만으로도 어여쁘고 빛나는 이름들이 이 집에 들어 창백하다. 하늘의 무지개 하늘의 별도 이 집에서는 경쟁이다! 전쟁이다! 모두, 창백하다. 2. 일요일, 봄맞이 산행을 갔다. 마른 나무껍질을 비집고 틘 어린 새들을 보았다. 무엇을 버티는 것일까, 날개를 한껏 오므린 어린 새들. 내려올 때 보니 올라갈 때보다 더 날개를 말며 웅크리고 있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뒤집힌 계절의 깡 추위와 오랜 가뭄이 이 어린 새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감옥이구나, 무덤이구나. 뒤이어 떠오르는 아이 생각. 0740 0730 0720 0710 0700 에서 2300 2310 2320 2330 2340 까지. 아이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학교에 갔다. 3. 나의 꽃잎, 너의 꽃잎, 나의 깃털, 너의 깃털, 하나만이라도, 창백한 꽃잎, 오므린 깃털, 그러하더라도, 하나만이라도, 내밀어, 내밀게 바꾸면, 자꾸 내밀고 또 내밀게 바꾸면, 처음엔 한 이파리 스치듯 지나는 가벼운 바람일지라도, 내민 꽃잎 내민 깃털 함께 꼭 잡게 바꾸면, 협력의 물결 고요하게 일렁이고, 공생의 바람 반란처럼 온 이파리 흔들어, 마침내 바뀌는 집, 마침내 따라 다 바뀌는 세상. 우선 하나만이라도, 내밀어, 내밀게 바꾸면, * 남 태 식 약력 : 2003년『리토피아』 등단, 시집 『속살 드러낸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내 슬픈 전설의 그 뱀』, 리토피아문학상 수상 주소 : 791-754 경북 포항시 북구 대안길 56, 103동 1408호(용흥동 우방타운) tsnbd@hanmail.net  
240 무화과無花果 외1편/최순섭 file
편집자
3771 2012-10-02
12.10월 29호 시  무화과無花果 꽃 피울 새 없이 아이들 낳고 세월만 흘렀다. 서러워 마라 지상의 나무들아 뼈마디 꺾이고 흐느끼는 것이 어디 너뿐인가 언제 우리 환한 꽃 한 번 피워 낸 적 있더냐 피웠어도 아주 잠시 세상에 왔다가기나 한 건지 꽃 목이 떨어지고 진물 고인 잔가지에 새순이 돋자 비로소 열리는 하늘 그래서 지상의 나무들은 모두가 無花果, 크든 작든 상처 끝에는 열매가 달렸다. 훈장처럼 달랑달랑 새하얀 구름젖 물고 달달한 숨 내쉬고 있다. 드럼통 화독 어둑새벽 인력시장에 서성이는 사람들 누군가 불씨하나 들고 와서 우두커니 서있는 드럼통에 불을 사른다. 온갖 잡동사니 어둠을 쏘시개로 활활 타오르는 화통 세상 사람들은 날아가는 불티를 보며 높이 올라갈수록 재수가 좋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모닥불은 식어가며 말한다. 내 비록 재가 될지라도 불씨는 남겨야지 눈감고 하얀 재가 되기를 기도한다. 화독보다 더 뜨거운 불씨 하나 하루 일자리 찾아 떠나는 사람을 위해 얼른 자리를 떠야 할 사람을 위해 드럼통은 뜨거운 몸을 이끌고 슬금슬금 먼저 자리를 뜬다. 최순섭 : 충남 대전 출생. 1978년<시밭>동인으로 작품활동시작. 2007년 <작가연대> 등단. 고양작가회 이사. 창작21작가회, 열린시조학회 회원. 주소 : 서울 은평구 불광동 미성아파트 5동 205호 전자주소 : css0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