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6호...
   2020년 02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 오늘방문자 : 
    551
  • 어제방문자 : 
    609
  • 전체방문자 : 
    519,584

지난호 보기

분류에서 보고싶은 호를 선택한후 GO 를 누르세요.

번호 닉네임 조회 등록일
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87888 2014-11-03
253 그리움 박물관 외1편/이승진 file
편집자
2891 2012-12-01
12.12월 31호 시  그리움 박물관 이승진 50년 지난 촌집도 사람이 살면 무너지지 않는다. 내 보내고 싶지만 마음 안에 살던 촌년 그대로 두기로 한다. 50년 지난 이 촌놈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눈이 그네를 타는 아침 눈이 내린 아침 놀이터에 가 봐. 몇몇 녀석이 그네에 앉아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참 이상해 어떻게 그네에 앉을 생각을 했지 밤새 이곳까지 오려고 힘들었을 눈을 생각해 봐 그네에 앉은 녀석들이 등을 밀어주길 기다리고 있을 거야 살금살금 다가가 녀석들이 앉아있는 그네를 밀어보아 눈이 그네를 타는 아침 누군가 그대가 탄 아름다운 놀이터를 살살 밀어줄 거야 상주문협회원. 시집『사랑박물관』 폰) 016-456-0676 메일)snonggu@gyo6.net  
252 목로주점 외 1편/이창한 file
편집자
2745 2012-12-01
12.12월 31호 시  목로주점 홍소 이 창 한 겨울 해지고 어스름이 깔리면 탁자위에 백열등이 말갛게 켜지고 가지런한 나무의자는 가로 세로 높이를 맞춘채 반질거리는 얼굴로 손님을 기다린다. 칸막이 쳐진 부엌쪽에서 나무타는 냄새가 푸르스럼하게 깔리고 연신 사기그릇 부딪는 소리가 구부려 드나드는 쪽문 사이로 드문드문 새어나온다. 한데 바람은 가게 문 밖에서 유리문을 잡고 흔들며 징징거리고 신작로쪽 떡방앗간 짚가리 돌아서 패를 이루며 왁자한 소리로 들이닥치는 술꾼들 싸늘한 바람과 함께 얼어 푸석한 얼굴을 연신 문지르며 부엌쪽으로 인사를 건넨다. 순간 바람에 흔들거리며 어두움에 발그레한 빛의 파문을 일으키는 백열등 구석구석 벽을 어루며 비추는 낮은 촉수 검은 그림자로 길었다 짧아졌다를 반복한다. 뜨거운 국물이 나오고 서둘러 후후 불어가며 주객들의 입김이 천정으로 향할 때 마다 더운 입김은 따뜻한 백열등빛에 비추어 직선으로 곡선으로 둥글게 말리며 무대위의 조명처럼 현란하다. 권하며 술 따르는 소리사이로 간간이 섞여 나오는 호탕한 웃음과 탁자를 두드리는 손바닥 소리 주인은 저쪽에 멀뚱히 혼자 앉아 마른 명태의 눈알을 씹고 있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저 깊은 어두움의 시간은 이어지고 겨울바람은 목로주점 밖에서 유리문을 흔들며 마냥 서성이고 있다. 자 존 심 비오는날 고인 빗물에 수많은 파문이 동글동글 눅눅한 대문간에 목줄도 없는 그래서 더욱 갈데도 없는 반질반질한 검은 승용차 촤-아 빗물을 틩긴다 흠뻑 뒤집어쓴 개한마리 후루루 빗물을 털며 고급 승용차 뒤쪽을 보고 야! 이! 개새끼야!! 경북 상주시 개운동 605-12 054)535-4411, 010-5535-4411 시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2009) 영강 지상백일장 시부문 당선 (2010) 월간 문예사조 신인상 시 당선 (2010) 월간 문예사조 신인상 수필 당선 (2011. 2) 상주문협회원 E-mail : saman01@hanmail.net  
251 시간의 저편/박문구
편집자
2561 2012-12-01
12.11월 30호 소설  「시간의 저편」 박 문 구 Ⅰ 입술과 목이 계속 말라 갔다. 낮 열두 시. 2리터짜리 석수를 벌써 두 통째 마시고 있지만 그것도 이미 달리는 봉고의 요동에 따라 물통 바닥에서 찰랑거렸다. 하늘에는 뭉툭뭉툭 흩어져 떠 있는 흰 구름 몇 점이 낮은 구릉 위에서 정물화처럼 박혀 있다가 가끔 부는 약한 바람에 천천히 이동했다. 다시 물통 뚜껑을 열면서 운전기사 옆에 앉아 정면만 응시하는 규호의 뒷머리에 대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야, 다 와 가는 거야?」 아주 낮게 천천히 물었지만 그 속에는 목마름에 지친 나의 짜증이 숨어 있었고 규호는 물론 그 말의 속뜻을 금방 알았을 것이다. 「거의 다 왔어. 좀 서둘지 말고 느긋하게 기다려야 이놈아. 여기서는 급한 놈 못 사는 곳이라는데 자꾸 그러네.」 도착한 지 이틀째부터 입안이 깔깔해지기 시작하더니 오늘 4일째에는 증세가 더 심해졌다. 그냥 목만 마르면 냉수로 적시면 되겠다지만, 입 안 전체가 바짝바짝 마르는 것뿐 아니라 아예 입술 언저리까지 죽죽 갈라지는 형편이었다. 물을 입 안 가득 넣고 몇 번 입 속에서 물을 굴리다가 시원한 물기가 머릿속까지 적셨다고 생각되면 조금 마신 후, 남아 있는 물로 혀를 가능한 한 길게 내밀어 입 주변을 둥글게 핥아댔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잠시 후면 다시 바짝 마른 입술이 쩍쩍 붙으며 갈라지는 것이었다. 달아오른 대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낮의 열기마저 갈라지는 입술에 한몫했다. 눈길이 닿는 곳은 오직 발목에도 미치지 못할 키 작은 풀로 덮인 대초원과 평면으로 펼쳐진 지평선의 단조로움에 조금씩 변화를 주는 야트막한 구릉뿐. 그 사이를 질주하는 국산 그레이스 봉고의 딱딱한 좌석에서 우리는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의 장관만 계속 보고 있었다. 그 광경은 동일 장면을 연속으로 찍어낸 필름을 보는 것처럼 계속 이어져서, 바라보는 나는 혀뿌리가 뽑힐 정도로 길게 혀를 내밀어 연신 입술 주위를 핥아댈 일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나마 가끔씩 그들의 주거지인 겔이 멀리서 보이고 그 주변에 말떼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모습이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움직임의 맛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람이 없다는 것.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아득한 저 멀리 얕은 구릉이 지평선을 이루고, 그 지평선과 하늘이 맞닿은 부분이 푸르스름한 몽환의 세계를 펼쳐내는 광경은 나에게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경이로운 것이었다. 지난 시간, 숱한 사람들과 부딪쳐 온 그림들로 이루어진 내 머릿속을 다 지워버리고, 다시 백지 위에 원시의 광막함을 가득 담은 새로운 그림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나로서는 손 댈 수 없는, 이곳 사람들의 삶만이 스며든 곳에서 난 값싼 이방인으로서 그냥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다시 목이 말라 물통을 통째로 입에 쑤셔 박았다. 아랫배에 다시 묵직하게 통증이 왔다. 역시 이곳에 와서부터 목마름과 함께 나타난 증상이었다. 도무지 시원하지 않았다. 밤에 우리나라의 보통 여관 급 정도인 이곳의 호텔에서 몇 번이나 배변의 욕망을 풀고자 노력했지만, 헛방귀 끝에 토끼똥만큼 떨어지는 느낌 이외에는 답답하게 고여 있는 내 몸의 찌꺼기가 그저 아랫배 속에서 묵묵히 남아 있었다. 그놈은 내가 이곳에서 지낼 십여 일 동안 나와 같이 먹고 자고 움직일 생각으로, 내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술로 엷어진 대장 속에서 죽치고 있을 것처럼 생각됐다. 나는 평소에는 배변의 습관이 철저하게 몸에 배어서 아침 세수 전에는 반드시 변을 시원하게 보고야 모든 일을 시작했었다. 그저 변기에 앉으면 자연스럽게 간밤의 내 모든 영양식의 잔해가 너무나 쉽게 빠져나왔다. 「평소에 변 한번 시원하게 보는 것이 소원이요.」 언젠가 공무원인 사촌 동생이 90킬로의 거대한 몸뚱이를 삼겹살이 익어가는 술상 앞에서 비스듬히 뒷벽에 기대며 하던 답답한 말도 난 그냥 우습게 지나쳤던 일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 말이 유독 기억에 남은 것은, 모두들 맛있게 먹고 마시던 사촌들과의 오랜만에 갖는 저녁 식사에서 가장 몸이 비대하면서도 도무지 젓가락을 대지 않고 퉁퉁한 몸만 이리저리 흔들어 대던 그의 커다랗고 다분히 우스꽝스러운 얼굴 탓도 있었지만, 맛있는 음식 앞에서 그의 몸짓만큼이나 서툴게 새어나오는 그의 몇 마디 단어가 나를 눈살 찌푸리게 했던 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를 괴롭혔던 변비의 고통을 그때는 이해하면서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생각되었지만, 막상 이곳에서 그 고통이 나에게 다가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기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벌써 3일째. 현지인 기사를 포함하여 모두 다섯인 우리는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에 눈길을 보내면서도 그것들을 익히 알고 있었던 양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잡담을 풀어내거나 아니면 규호에게 하릴없는 물음을 던졌는데, 그러나 던지는 말도 되던지는 말도 서로의 시간을 조금씩 잠식해 들어간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딱히 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건조하고 지루해서 날짝지근하게 느껴지는 시간의 틈을 농담으로 메우면서 우리는 계속 나아갔다. 야트막한 언덕 옆을 지나가자 길 오른편으로 나무가 우거진 그 틈에 뭔가 햇볕에 반짝였다. 「형! 저기 냇가에서 좀 쉬다 갈까?」 운전석 뒤 여자 곁에 앉아 말 한마디 없이 잠잠하던 병호도 그것을 본 모양이었다. 지루한 얼굴로 뒤돌아보며 말했다. 「야, 규호야. 좀 쉬었다 가자. 저 냇가에서 얼굴도 좀 씻고……급한 일 있나.」 규호가 현지말로 운전기사에게 뭐라고 중얼거리자 봉고는 길 한편으로 비스듬히 섰다. 모두들 구겨진 몸을 펴면서 나와 옷을 털었다. 막막한 초원에서 차가 다니는 황톳길은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워낙 요철이 심하고 굽이가 많아서 속도를 낼 수 없는데, 그나마 조금이라도 속도를 줄이면 뒤에서 불어오는 황토먼지가 그대로 차창으로 밀려들어 와서 차 안은 먼지로 가득 차 버렸다. 우린 먼지를 털면서 냇가에 얼굴과 손을 씻었다. 신기한 장면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이 초원 한복판을 사행(蛇行)하면서 흘러가는 냇물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저 넓은 초원과 푸른 하늘과 힘찬 말과 한가한 양떼의 상상으로 우리 머릿속은 가득 차 있었으니까. 더구나 버드나무와 자작나무가 냇가 주변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광경은 저 멀리 뻗어나간 초원만 아니었더라면 흔히 볼 수 있는 우리의 고향 언덕을 연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는 습기를 머금은 풀밭 위에서 시원하게 흐르는 냇물로 얼굴과 손을 씻었다. 냇물은 이곳 더위와는 다르게 아주 차가왔다. 나와 규호, 병호와 그가 데리고 온 삼십 대의 애화라는 여자, 그리고 퉁퉁하게 살이 붙고 검게 타서 뒤웅스럽게 보이는 사십 대 운전기사 엘카, 이렇게 다섯은 먼지투성이의 옷을 털면서 굳은 몸을 폈다. 대학 동창인 규호는 이곳 몽골에서 8년째 살아가고 있어서 거의 현지인이 다 됐다. 현지어를 유창하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의 습관과 풍습을 본능적으로 몸이 익혔다. 더구나 인적 관계의 다양함으로 인해 울란바토르 시내에 펼쳐 놓은 네 군데 사업장은 그런 대로 운영되는 것처럼 보였다. 「애화씨도 얼굴을 씻으세요. 아주 시원한 게 정신이 번쩍 듭니다.」 손만 살짝 씻고는 우리들 뒤에서 서성대고 있는 여자에게 말했다. 그러나 난 여자가 결코 얼굴을 씻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 병호 녀석이 데리고 왔을 때부터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키를 숨기고자 밑창이 거의 5센티나 될 정도의 높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는데, 인천 공항에서 만날 때부터 여자는 거울이나 유리창만 보이면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얼굴 화장이나 옷맵시를 고치곤 했다. 그리 길지 않은 머리를 참새 꽁지처럼 뒤로 묶어서 산뜻하고 젊은 맛을 보이고 있었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얼굴 이곳저곳에 살짝 드러난 주름살을 짙은 화장으로 숨기고 있었다. 눈이 유난히 작았고 턱이 약간 길게 느껴져 반드레한 모습이었다. 눈썹을 밀어버리고 아이펜슬로 짙푸르게 가느다란 반달 모양으로 그린, 때문에 훤한 대낮의 세수란 아예 금기일 것이라는 것도 짐작했다. 「전 괜찮아요. 물이 굉장히 시원하군요.」 세수를 하면서 난 그녀를 보았다. 앉아서 손을 씻고 있었다. 손마디에 살이 별로 없고 가늘게 말랐다. 그러나 그녀의 엉덩이는 밋밋한 가슴과는 달리 통통하니 살이 붙어서 가느다란 허리를 받쳐주고 있었다. 허리띠 없는 푸른 청바지와 녹색 짧은 상의 사이에 허연 뒷등이 드러났다. 그 밑으로 살짝 검은 망사의 팬티가 보였다. 어제는 흰색 팬티를 입었었다. 그녀는 상의를 정확하게 바지 허리선에 닿도록 상의 아랫부분을 그 선에 맞추고 남은 부분은 안으로 접어 넣었으므로 식사 때 의자에 앉거나 조금이라도 허리를 굽히면 허리 살과 속옷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때로는 마주 보며 이야기할 때 상체를 위로 살짝 젖히면 깨어진 흰 바둑돌 같은 배꼽도 볼 수 있었는데, 그런 점에 그녀는 신경이 가는지 가끔 웃옷을 잡아 내리기는 했지만 그 순간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매를 숨기는 척하면서도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보이면서 자신의 날씬한 허리선을 자랑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병호는 물론 이런 점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었지만 그저 슬슬 웃고만 있었다.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가벼운 역겨움 정도는 이런저런 여자들 틈에서 많이 겪었던 터이므로. 다시 차를 탔다. 2 오후 한 시를 넘기고부터는 초원을 가르는 포장도로를 따라 계속 달렸다. 말만 포장도로였다. 사이사이에 이빨 빠진 듯이 싯누런 황토가 벌려 있어서 엘카는 계속 곡예운전을 했다. 우리들의 일정은 국립공원인 헤렐지를 들르고 돌아오는 길에 얼림벌랑이라는 분지에 있는 유목민 통나무집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규호는 헤렐지는 못 가더라도 얼림벌랑만은 반드시 보아야 한다고 우겼다. 왜냐고 물으면, ‘가 보면 안다’는 한 마디로 우리들의 입을 막았다. 「저어기, 저것 보이지? 여기가 한국의 소금강처럼 유려한 곳이라고. 깎아지른 산도 있고 깊은 강도 있고, 나무도 울창한 게 딱 소금강 닮았어.」 운전석 옆에 앉아 얼굴을 뒤로 돌리면서 손짓하는 차창 밖의 풍경은 그가 말하지 않더라도 좌석의 맨 뒤에 혼자 앉아 있는 나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가파른 돌산과 그 사이사이에서 힘들게 솟아 있는 수목들이 검게 드러났다. 나는 ‘이런 메마른 곳에도 숲이 우거져 있구나’ 하는 정도의 감흥밖엔 일어나지 않았다. 비록 메마른 곳이라도 하늘과 땅과 물이 숨 쉬고 있고, 당연히 수목도 깊이 박혀 있을 터였다. 울란바토르를 안고 흐르는 톨강의 울창한 숲과 벌판을 사행하는 강물의 깊이와 수량을 보아온 우리에게는 그리 새로운 풍경은 아니었지만 규호는 ‘그래도 이런 곳에 저런 것도 있네’ 하는 어투로 오사바사하게 설명했다. 난 귀를 기울이는 척했다. 다시 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내 머릿속은 정선 골짜기를 그리고 있었다. 화암 약수터의 가을은 현란했다. 맑은 약수가 흐르는 계곡과 그 곁을 따라 길게 이어진 식당, 기념품 가게, 한적한 여관까지 모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짙붉은 단풍으로 덮인 지표에서 슬며시 솟아오른 조형물이었다. 약수와 어우러져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물도 그 밑바닥은 온통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깔려 있었다. 그곳에서 일주일을 그와 같이 보냈다. 그리고 그는 떠났다. 이것저것 자기중심으로 요구만 하는 까다로운 여자들 숲에서 직장 생활을 해 오던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동안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 시달림을 받았다는 느낌만 던져 주고 그는 떠났다. 마흔 중반까지 지방의 금융회사에서 지내오면서, 복잡한 업무보다도 그들을 관리하면서 다가왔던 많은 여사원들의 터무니없는 생태를 보아 온 나는 단순하면서도 표정 하나, 간단한 단어 하나로 자신의 의사를 나타내는 그의 명료한 머리 구조에 마음을 던졌다. 우리는 긴 이야기가 필요 없었다. 그의 이야기는 항상 한 발 앞에서 살아 움직였다. 내가 첫마디를 시작하면 그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서너 마디를 듣고는 즉시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몇 발자국 건너편에서 짧은 말로 내 생각의 끝을 마무리하곤 했다. 처음, 그곳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우리가 보아온 세계의 평범한 그림을 한순간에 지워버리고, 새로운 화선지에 엷은 녹색과 주황색, 핏빛이 혼합된 그 모든 풍경을 옮겨 놓은 듯한 계곡의 가을 속으로 서슴없이 뛰어들어 두 팔을 푸른 하늘로 뻗어 올리고는 크게 소리쳤다. ‘화이야―’하는 외침의 순간 탄탄하게 부풀은 그의 가슴과 함께 나는 십 몇 년의 출퇴근에 짓눌린 마음을 계곡 속으로 던져버렸다. 앞으로 전개될 불확실한 시간이 슬며시 끌어당기던, 망막하고 어두운 미래도 순간 잊어버렸다. 승진이라는 도가니 속에서 우글거리던 동료들의 영상도, 그들과 별다른 척하면서도 틈틈이 책과 씨름하던 지난 모든 일들도 버렸다. 승진에 탈락되던 그 순간의 모멸감과 아내와의 별다른 상의도 없이 종이 하나로 직장을 떠나던 그 씁쓸한 마지막 날도 잊었다. 그리고 아이의 사건도 잊어버렸다. 우리는 일주일을 보냈다. 언덕을 넘자 아래편으로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넓은 평야에 두 줄기의 강물이 합수하여 수목이 울창한 협곡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 사이에 현대식 호텔과 상가가 보였다. 「저기야! 울란바토르 사람들이 일 년에 한 번 올까 말까한 곳이지. 돈 있는 놈들이나 애인 데리고 하룻밤 자고 가는 덴데, 일반인들의 한 달 생활비가 몽땅 빠져나가니 함부로 올 수가 없는 곳이지. 아마 한국인들이 태반일 걸. 여름 한 철은 한국 놈들이 먹여 살린다고.」 차츰 가까워질수록 숲은 더욱 높고 무성해졌다. 건물들을 언덕 위에서 볼 때는 여름의 땡볕 아래에서 자글거리는 것 같았는데, 다가갈수록 무성한 숲의 그늘 속에서 서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3층 호텔 앞에서 내렸다. 관광객들은 모두 더위를 피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는지 밖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호텔 뒤쪽의 강가 숲에서는 띄엄띄엄 모여서 햇볕을 피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규호는 우리를 냇가로 데리고 갔다. 엘카는 우리를 내려놓고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작은 아치를 건너서 두 갈래 강물이 아우러지는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일 년에 3백 밀리도 채 안 되는 강수량이라 햇볕 아래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솟았지만 그늘로만 들어가면 습기가 없어서 아주 시원했다. 나는 신과 양말을 벗어치우고 바로 물속으로 들어갔다. 태백의 깊은 산중에서나 맞을 싸늘한 한기가 발바닥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갔다. 「굉장히 차네! 너무 차! 물도 참 깨끗한 게 그냥 마셔도 되겠어.」 「한국에서는 일급수다. 그냥 마셔도 돼. 강 위쪽엔 원시림뿐이니까. 물고기도 팔뚝만한 것들이 우글대는데 몽골인들은 물고기를 잘 안 먹지. 그러니 더 올라가면 물 반 고기 반이라니까.」 병호와 여자는 머뭇거렸다. 내가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자 마지못한 듯 여자가 들어왔다. 굵은 종아리가 유난히 희게 보였다. 병호는 그냥 그늘 아래의 썩은 통나무 토막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병호씨도 들어가 봐요. 몽골에서도 설악산 골짝 물맛이 살아 있으니까.」 규호는 바지 아랫단을 무릎 위로 말아 올리고는 물속으로 들어가면서 말했지만 병호는 씨익 웃을 뿐 담배만 부지런히 빨아댔다. 「야, 혁민이, 어떠냐? 말라비틀어진 한국에서 우글대는 것보다 여기가 낫지 않냐? 좀 생각을 바꿀만한 곳이잖아?」 「여긴 여기대로, 거긴 거기대로……. 전 단지 잠시 떠나서 있을 곳일 뿐, 다른…… 의미는 없어요.」 규호가 나에게 말을 던졌지만 담배만 줄곧 빨아대던 병호가 불쑥 말했다. 역시 얼굴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도착하던 날만 좀 밝은 표정을 지었을 뿐 그 다음날부터는 얼굴의 실근육 하나까지도 굳어버린 석고처럼 변함없이 그저 묵묵할 뿐이었다. 울란바토르에서 이곳까지 오면서도 별로 말이 없었던 그였다. 올해 갓 마흔인 병호의 호리호리한 몸집에 어울리게 목소리는 평소 가늘었지만, 지금은 말을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내뱉듯이 말했다. 난 이미 병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특히 병호에 대한 여자의 반응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두 남녀의 관계를 병호에게 직접 들은 바는 없었지만, 또 병호가 그런 일들을 나에게 말할 녀석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근 이십 년 간 우리들이 함께 한 모든 일들에서 병호의 세세한 성격 정도는 손금 보듯 알고 있었으므로 이곳까지 와서 씁쓸하게 뒷모습 보이듯 하는 일탈의 한 부분을 흥미 있게 보고 있었다. 건축사인 병호는 내 고등학교 후배이자 술친구로 지내왔었다. 특히 역사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는 편으로, 그의 서재는 온통 역사서, 그 중에서도 고대사에 관한 서적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아직 마흔의 나이로 보이지 않은 맑은 얼굴이지만 한번이라도 관심 분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반드시 자신의 논리로 끝장을 보는 성미여서 나는 가끔 그와 다투는 일이 많았다. 그런 녀석을 이곳으로 가자고 내가 슬며시 꼬이자 바로 ‘그럽시다’ 한마디로 옆에 여자를 붙이고 공항에 나타났다. 「넌 탈출이지, 난 여행이고. 마침 여긴 규호도 있고 해서 온 거지만.」 난 어색한 분위기를 돌리고자 떠들었다. 규호는 물론 그 의미를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친구였다. 경영대학 전체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4년 학자금 면제의 혜택 속에서 졸업한 후 우수한 성적으로 회사에 입사했다. 녀석은 그 후 화장실에 가서도 영어 회화 서적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뛰어난 업무 능력을 인정받고 미국과 프랑스에 십 년이 넘도록 주재하고 돌아왔을 때 이미 그가 차지할 자리는 없었다. 중요 부서는 명문 출신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그들의 세상으로 돌아가 있었다. 실력이란 종이 한 장 차이로 인식되는 세계에서 지방대 출신으로 인맥 하나 없는 규호의 입지는 극히 좁아져 있었다. 발붙일 곳 없었던 그는 결국 회사를 나왔다. 몽골은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원시의 공간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아니, 형은 너무 단순하게 말하네. 잘 알고 있으면서도……. 형이 여행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현실에서 잠시 피한 것이고, 난 말로는 잠시 머물 곳이라 했지만 나야말로 여행이란 뜻에 가깝겠어.」 병호는 썩어서 부석대는 나무 등걸에 앉아서 계속 담배만 피워대고 있었다. 그는 여자를 의식적으로 멀리 하는 기색이었다. 사실 그건 이미 도착한 그 다음날부터 알고 있었다. 같이 왔으면서도 병호는 여자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에만 신경을 써 줄 뿐 그저 방임하고 있었고, 여자도 여자대로 그의 가벼운 대화에 마지못해 대답은 하지만 친밀감 있는 분위기를 거부하는 표정을 보였다. 몽골에 온 지 사흘 된 아침, 병호는 나에게 말했다. 「저 여자, 공주병이 돋쳤어. 난 여기 데려오면서 그걸 굉장히 걱정했는데, 결국 어딜 가야 말이지. 남자들이 치켜세우니까 아주 부웅 떠버린 거야. 왜, 도착한 첫날밤에 규호씨 몽골 친구들과 같이 술 마셨잖아? 그때 규호씨와 몽골인들이 치켜 주니 아예 뿌리까지 녹아버린 거라고.」 「그래서, 너가 뭐라고 한마디 했을 것 같은데?」 「뭐라긴 내가 뭐라 해? 그냥 내 생각대로 말해줬지 뭐. 그러니 저 모양이야.」 병호가 무심하게 말은 하지만 이미 그는 여자를 마음속으로부터 떠나보냈음이 틀림없었다. 병호가 7년여의 결혼 생활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언했을 때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이든 했어야만 했다. 십대 말엽부터 같이 지내온 후배의 현실에 대한 작은 조언이라도 했어야 했지만, 그러나 난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병호도 나의 조언은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병호의 가정사보다 나에게 다가온 그 사건의 충격이 더 컸기 때문에 병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 당시 퇴근하면 나의 첫 발걸음은 선술집이었다. 지난 생각이 잠시 소름같이 돋아 오르자 다시 아랫배가 살살 아파 왔다. 변기에 앉아도 나오지 않을 배설물들이 다시 꿈틀거렸다. 난 얼굴을 찡그리며 손으로 배를 눌렀다. 「왜? 아직도 그 모양이냐? 미친 놈! 좋은 곳에 와서 좋은 양고기 먹고 배는 왜 그리도 못났냐?」 「시끄러. 거참 죽겠네, 이 노므 뱃속을 쑤실 작대기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병호, 넌 분명 잠시 탈출한 거고, 내가 여행한 거지. 애화씨 하고 잠시 벗어난 게 맞잖아?」 나는 슬쩍 여자를 병호와 결부시키며 여자의 반응을 살폈는데, 예상대로 펄쩍 뛰었다. 「아니, 무슨 말씀을……. 같이 벗어나다니요? 그런 게 아닌데……?」 여자가 물속에서 발을 담그며 ‘같이’라는 말에 유난히 힘을 주면서 정색을 하듯 말했다. 둘 사이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말이었다. 난 순간 밀알진 여자의 얼굴과 동시에 병호를 보았지만 역시 그는 들은 듯 못 들은 듯 무표정했다.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런가? 그럼 그렇다고 하고. 자, 난 괜찮은데 모두들 출출하지도 않은 모양이지?」 난 얼버무려버렸다. 쑤시는 아랫배를 문지르면서, 뻔한 사이를 그렇게 간단히 부정하는 여자의 얼굴에서 만들어지는 웃음에 오만한 백치미가 섞여 있음을 보았다. 또한 미간에 살짝 집힌 주름살 양편으로 멀쩡한 눈썹을 밀어버리고 검고 푸른 아이펜슬로 가늘게 그린 인조눈썹의 한끝이 지워져 있음도 놓치지 않았다. 3 헤렐지를 벗어나면서 난 계속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물도 계속 마셨다. 마시고 마셔도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물을 마실 때만 잠시 수그러들었다가 다시 입술이 부풀어 올랐다. 이들은 모두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갖고 간 진한 몽골 산 보드카를 몇 잔 들이켰을 뿐 난 포크를 잠시 손아귀에 잡았다가 바로 접시 옆에 던져버렸다. 양고기로 요리한 음식은 맛이 있었지만 도저히 씹어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깨끗하게 비웠다. 기름진 음식을 평소 못 먹는 것이 아니었다. 술안주로 먹는 기름기 넘치는 고기는 난 잘 먹었다. 특히 돼지비계를 좋아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봉고는 오던 길로 계속 가다가 왼쪽 곁길로 꺾어들었다. 그나마 국립공원 부근에만 엉성하게 지표에 붙어 있던 아스팔트는 어느 새 요철이 심하고 바짝 마른 황톳길로 바뀌었다. 「이제 얼림벌랑이란 곳으로 가는 게다. 가 보면 혁민이 넌 아마 까무러칠 게다. 그냥 분지가 수백 만 평이 너 발 밑에 기다리고 있을 테니. 잘못하면 혁민이 넌 안 나온다고 그냥 자빠질지도 몰라. 너 마누라 과부되기에 딱 좋은 곳이니까.」 규호는 되는 대로 뱉어대었다. 항상 자신만만한 표정과 어투가 이곳에서도 그를 지탱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한국으로 돌아오면 항상 나를 찾아 와서, 역시 지금이나 다름없이 자신만만하게 대화를 이끌어가곤 했었다. 그러나 난 알고 있었다. 왜 그가 이 황량한 곳에서 뿌리를 박았는지, 박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자신만만함 그 뒤에서 꿈틀거리는 현실의 어려움이 역설적으로 새어나오고 있음을 규호 자신도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규호는 현명했다. 학훈단의 겨울 제복을 멋지게 걸친 규호의 또렷한 구두 소리가 작은 어물가게로 이어진 골목길을 당당하게 울리면, 춥고 어질한 밤의 기온은 물기 먹은 시멘트 바닥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꿋꿋하게 그가 가는 곳은 단 한 곳뿐. 어머니의 두어 평 가게였다. 중앙에 연탄불이 항상 뜨겁게 피어오르는 원탁 두 개가 놓이고, 벽 쪽으로 낮게 임시 잠자리를 갖춘 시장터 구석의 술집에서 그의 어머니는 허름한 옷을 걸치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추위로 얼은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어슬렁거리면서 문을 열면, 규호 어머니는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고 우리를 맞았다. 자식의 장교후보생 복장이 영원한 출세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그곳에서 우리는 김 한 톳과 바다로 갈 시내버스 차비를 얻었다. 우리에게는 그런 가벼운 경비도 조달할 길이 막힌 터이므로. 값싼 소주 몇 병도 검게 물들인 내 야전군복 점퍼에 넣으면 우리들의 발걸음은 이미 바닷가 모래사장 위에 가 있었다. 겨울의 눈발이 점차 무거워지는 밤에 둘은 모래사장 위에서 김을 안주로 술잔 없이 들이키기 시작했다. 해안 초소의 서치라이트가 길게 부챗살처럼 퍼지면서 흰 이빨이 번뜩이는 바다 위를 한두 번 쓸고 지나갔다. 흰 눈은 규호의 베레모 위와 그의 검은 제복에, 내 머리와 점퍼에 쌓이고 있었다. 말이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밤바다의 검고 칙칙한 촉수가 내리는 눈발을 헤치고 다가와 우리들의 대화를 휘감아버리고는 파도 속으로 숨어들었다. 눈은 계속 내리고 쌓이고, 우리는 점차 눈사람으로 변해갔다. 가끔씩 손이 눈 더미 속에서 삐져나와 술병을 잡고는 입으로 가져가는 동작만 되풀이 될 뿐. 그의 술은 항상 울음으로 끝을 맺었다. 명문대에 다니는 애인 이야기의 끝에서도 울었고, 어머니를 들먹일 때도 울었다. 정식 결혼을 미루고 아이를 낳은 여동생 이야기에서도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자학으로 뭉친 내면의 덩어리가 술이라는 열쇠 하나로 단단한 눈물샘의 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한순간 내뱉곤 했다. ‘야, 우리, 저 바다를 쳐나가는 군함처럼 그렇게 힘 있게 지내자!’ 당시 나는 그의 울음에 공감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극히 어려운 환경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고, 모든 사물에서 받아들이는 부분이 어둠으로 치우친 점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해도 그의 울음은 나에게 깊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와 같이 울 수도 있었으니까. 나 역시 앞뒤로 꽉 막힌 상태였다. 그러나 난 울지 않았다. 그냥 속으로 삼켰을 뿐이었다. 술 깬 다음날, 왜 울음과 그리 친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냥 씩 웃었다. 나도 웃었다. 하지만 그 울음에 대한 의문은 지금도 난 버리지 않고 있다. 70년대. 당시 절박하게 다가오던 궁핍과 젊음의 고독을 약간의 과장된 절망감으로 포장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울음만은 딱히 그렇게 설명해도 뭔가 미흡함이 있었다. 혹시 자신도 몰랐던 삶의 원형질에 그의 휘어진 운명의 편린 한 점이 부딪쳤을 때 일어나는 희미한 불꽃같은 것, 그런 것이었을까. 졸업 후 군 입대와 제대의 수순을 밟은 다음 그가 그럴듯한 중견 회사에 입사하고 서울에서 만났을 때는 나는 아직 4학년의 늙은 학생이었다. 그는 술을 피했다. 「며칠 전 양동 술집에서 하루 자고 왔더니, 여기가 이상해서 병원에 좀 들락거리는 중이다.」 한 손으로 사타구니를 툭툭 쳤다. 학교 시절부터 그는 여자들에게 집요한 관심을 보였음을 생각하며 난 그냥 웃었다. 그는 주로 술집 여자들에게 접근했는데, 세상없는 중요한 일이 눈앞에 있어도 기회가 닿는 여자와의 하룻밤을 놓치는 일이 없었다. 소식이 끊긴 지 5년이 지난 어느 여름날 나에게 왔다. 꽤나 요염하게 생긴 부인과 딸애 하나를 데리고. 다시 몇 년이 지나자 어린 사내애를 덧붙여 찾아왔다. 프랑스 지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턱을 아래로 지긋이 깔고 가족을 소개하면서 그동안의 작은 성공을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지만 이미 삶의 단단함이 나에게 전해질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몽골에서 마지막 삶을 이어가리라고는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시골의 작은 금융업에서 밥을 먹던 나는 그렇게도 단단하던 그를 밀쳐낸 거대한 사회의 날카로운 손톱을 직접 맛보고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낡은 봉고는 얕은 구릉 사이를 넘다가 나무 울타리가 쳐진 곳에서 멈췄다. 겔 하나를 중심으로 사방이 낮은 나무울타리로 막혀 있었다. 봉고는 이리저리 돌면서 돌파구를 찾으려 했지만 가는 곳마다 막혀 있었다. 온 천지에 키 낮은 풀더미만 지표를 덮고 있는 완만한 구릉 지대에서 차 한 대가 지나갈 곳이 없다는 것이 신기했다. 투덜거리는 우리를 보고 규호가 말했다. 「한국 놈들이 이곳을 사서 골프장인가 뭔가 한다고 말뚝을 박아놓은 거야. 좆같은 놈들이지. 그저 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들이 바로 한국 놈이 아닌가. 한국서 하던 버릇이 어딜 가나?」 우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땅값이 없으니 이곳 관리들만 잘 구슬리면 몇 십만 평 정도는 그냥 빌릴 수 있는 곳이 몽골이야. 몇 푼 집어 주면 안 되는 일이 없는 곳이니까. 하여튼 한국 놈들은 알아줘야 해!」 겨우 울타리를 헤쳐 나가는 데는 삼십 분 이상 걸렸다. 오후 3시가 넘었다. 험한 언덕과 너설지대를 지나 바위와 부스러지는 마사토를 헤치고 내려갔다. 평지에서 우리는 차에서 내려 잠시 쉬었다. 여자는 병호와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나와 규호에게는 말을 걸면서 생글거렸다. 재미있는 분 같아요. 부인은 뭐 하세요? 사랑해 보신 적 있으세요? 눈빛에서 나타나는데? 아이 참,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니까요. 역시 병호는 무표정했다. 8월의 따가운 햇살이 내리꽂히는 풀 위에 앉아 잠시 쉬었다. 무심코 주위를 훑어보던 내 눈에 키 작은 꽃이 보였다. 둥글게 여러 개로 퍼진 잎의 표면에 은회색의 솜털이 보얗게 덮여 있는 아담한 꽃이었다. 에델바이스였다. 설악산에서 가끔 보던 꽃이 이곳에도 있었다. 그리고 쑥부쟁이도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한국에서 흔히 보던 쑥부쟁이를 이곳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이 설렜다. 「야, 이것 봐라! 별것 다 있네, 이게 쑥부쟁이고 요건 에델바이스야. 솜다리라고도 부르는. 거 참…….」 「왜? 한국에 있던 게 여기라고 없으란 법이 있냐? 거기나 여기나 별 차이가 없어. 인종도 같은 것들인데 별 다른 게 있냐?」 규호는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여자는 신기하다는 듯 몇 송이를 꺾어서 규호에게 내밀었다. 「형! 애화, 저 여자 말이야. 난 불안해. 저 여자가 어떻게 변할지, 어떤 행동을 할지 불안해.」 병호가 슬며시 다가와서 옆에 앉으며 낮게 말했다. 「그럼, 저런 여자를 데리고 오긴 왜 와? 가만 보니 속은 비어도 성깔 하나는 날이 선 것 같은데.」 「……그래도 부드러운 점도 있어. 내가 여길 간다니까 가곤 싶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머뭇거리는 게 좀 그래서 그냥 데리고 왔거든. 그런데 오자마자 저 모양이니……. 돌아가면 저 여자가 나에게 뭐라고 할지 궁금도 하고. 웃기지. 문제는 지금이야. 안심을 못하겠어. 꼭 무슨 사건을 벌일 것만 같아서. 럭비공처럼 행동하는 게…….」 사실 병호에게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몇 달 동안 보지 못하고 내 문제에만 잠겨 있었다. 병호가 이혼 후 어린 사내애 하나를 데리고 아이 할머니 집에서 기거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난 전화 한통 하지 못했다. 그의 부인이 테니스 코치와 붙어 지내다가 갑자기 이혼장을 내밀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몇 번 그 집을 갔을 때 그의 부인은 정중하게 술상도 차리고 정갈한 안주를 만들어 내놓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뜻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삶에서 어디 예측과 법칙대로만 굴러가는 일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으로 병호를 멀리서 보고만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일에 무관하지는 않았으므로. 「아이는 없고 결혼은 전에 했었는데 지금은 혼자 지내고 있어. 그림을 그리는데, 솜씨는 별로지만……. 평소는 부드럽고 괜찮거든. 역시 막상 자신을 벗어날 환경만 되면 본바탕이 드러나는 모양이야. 전에도 몇 번 그런 일이 있긴 있었지만 그냥 넘어갔었는데, 이젠 참 못 봐주겠어. 착각으로 똘똘 뭉친 허깨비처럼 노네. 그래도 동네에서는 제법 인기도 있는 편인데, 저렇게 뿌리 약한 걸 누가 알겠어?」 「할 수 없어. 이젠 끝까지 끌고 나갈 수밖에. 우리가 맞춰 줘야지. 여기서 그럼 어쩔 거야? 도대체 여잘 끌고 오긴 왜 끌고 와. 미친놈!」 규호가 봉고에 바짝 붙어 서서 여자와 웃음을 주고받고 있었다. 여자도 그와 거의 바짝 붙어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팔을 휘두르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 규호는 즐거운 듯 오른손으로 여자의 엉덩이를 슬쩍 쳤는데, 여자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생글거리는 얼굴로 규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 귀에 여자의 약한 말소리가 들렸다. 난 엉덩이에 살이 많아서 차를 오래 타도 괜찮아요. 여자의 는실난실하는 꼴이 진한 아교풀을 발라놓은 마네킹처럼 보였다. 「혼자 와야지. 그래야 여기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파묻혀 지내다가 다 털고 나가는 겐데……. 아마 규호가 저 여자 때문에 우릴 좋은 곳에도 못 데리고 갈 걸.」 「아휴 형! 그런 얘긴 그만 합시다. 정말 마음에도 없는 얘긴 듣기도 싫고. 저 여잔 그래도 마음으로 도와주고 싶었었는데…… 또 도움이 필요한 여자였는데, 이젠 다 귀찮네.」 병호는 손사래를 쳤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다. 병호의 사정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아래로 천천히 흘러내리듯이 완만하게 내리뻗은 길 좌측 언덕에 거대한 바위산이 보였다. 식물 한 포기 없이 뾰족하게 솟은 메마른 바위산은 몇 조각으로 벌어져 있고, 그 중 커다란 바위 하나는 타원형의 큼직한 덩어리를 등에 지고 있었다. 마치 거북 한 마리가 정상을 향해 기어오르다가 마지막 고비에서 힘이 다해 잠시 쉬고 있는 형상이었다. 목을 움추린 머리 부분과 둥근 등판이 여기서도 완연했다. 순간 짧은 생각이 반짝 스쳐갔다. 잠시 쳐다보고 있던 나는 규호에게 슬며시 다가갔다. 「야, 규호. 잠시 나 좀…….」 나는 애화와 규호를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잠시만 저기 저 바위산에 올랐다가 가자! 한 10분이면 넉넉하겠지. 생김새가 묘해서, 잠시만 보고와도 되겠지?」 「저기까지 왕복으로 한 이십 분은 잡아야 될 걸. 빨리 갔다 와. 사진도 한판 찍고.」 규호는 엘카를 부르더니 바위산을 손짓하면서 뭐라고 이야기하고는 카메라를 넘겼다. 마음씨 좋게 생긴 엘카는 우리를 보고는 웃으면서 앞장서서 걸어 올라갔다. 나는 병호와 애화를 곁눈질하면서 같이 갈 의사를 전했지만 둘 다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애화는 그냥 빤히 쳐다보면서 거부의 의사를 슬쩍 내보였다. 싫다는 병호를 강제로 끌고 천천히 올라갔다. 뒤에서 비치는 햇빛에 우리들의 그림자가 발밑에서 짧게 움직였다. 천천히 오르면서 나는 뭔가 하나 놓친 듯 가슴 한 구석에 저려오는 것이 있음을 알았다. 난 어렴풋한 윤곽을 잡았다고 생각했으나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그것을 떨쳐버렸다. 앞장서서 올라갔다. 오를수록 거북의 형상은 그냥 평범한 돌덩이로 변해갔다. 정상에 오르자 거대한 돌덩이들이 흩어져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가쁜 숨을 진정시키면서 우리는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몽골의 초원과 멀리 보이는 산기슭에 박혀 있는 원시림의 검은 수목, 그 사이를 가늘게 흘러가는 강물이 햇빛에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 높지 않은 곳이지만 우리가 있는 곳이 시력의 한계 내에서는 가장 높은 곳처럼 보였다. 아득한 곳에 완만히 솟은 구릉의 어깨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 위로 파르스름하면서도 옅은 회색빛의 기운이 땅과 하늘을 구분하고 있었다. 넓고도 황량한 천지에 우리 셋만 덩그러니 내려앉아 스치는 시간의 바람 속에 내팽개쳐진 느낌이었다. 「형! 돌아가면 애 엄말 다시 만나야겠어. 아무 것도 아니야. 우린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성깔만 살아서 갈라섰어. 애 문제도 힘들고.」 병호가 말했다. 그는 햇빛의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고 초원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관심은 병호의 반대편에 있었다. 봉고 곁의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난 병호와 같은 방향으로 몸은 돌렸지만 마음의 눈은 봉고를 주시하고 있었다. 병호가 눈치채지 않도록 병호의 말에 가볍게 응응거리면서 계속 뒤편의 저 아래에서 조용하게 일어나는 일을 감지하고 있었다. 난 담배를 꺼내어 병호에게 권하면서 빨리 시간이 지나가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몇 분 후면 그들이 차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담배 한 대 피울 동안 그들의 일이 끝날까. 난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그들이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사이일 것이다. 웃음소리에 병호가 내 얼굴을 보자, 난 병호의 말에 동의하는 척하면서 다시 말꼬리를 이어갔다. 그러면서 난 스스로 물었다. 규호에게 상황을 만들어 준 것이 내가 아닌가. 이곳에 오르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우리가 사라질 만한 장소가 마침 보였기에 온 것이 아닐까. 내가 언덕을 오른다고 말했을 때 이미 규호와 난 교감을 나눈 것이고, 바위산으로 오른다고 말한 그 순간 여자의 얼굴과 몸에서부터 나에게 전해지던 욕망의 내면을 난 파악하고 있지나 않았을까. 사실은 내가 바라던 그런 일을 은근히 기다리지나 않았을까. 담배를 거푸 두 대를 피우고 난 후 사진을 찍고 우리는 내려왔다. 규호가 운전석에 앉아 담배를 맨숭맨숭 피우고 있었다. 여자는 뒤에 새침하게 앉아 손거울을 위 아래로 돌리며 얼굴을 매만졌다. 엘카가 운전석에 앉는 것을 보자 병호가 말했다. 「내가 뒤에 탈 테니 형이 앞에 타요.」 난 뒷말 없이 운전석 뒤의 여자와 같이 앉았다. 병호는 뒷자리에 혼자 앉았다. 차가 출발하자 병호의 두 무릎이 내 좌석 뒤를 밀치는 느낌을 받는 순간 난 병호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바위산 위에서 병호가 움직이지 않고 계속 봉고와 반대편 쪽 정면만 주시하던 모습을 그렸다. 슬쩍 여자의 얼굴을 보자 아무 표정 없이 창밖으로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여자는 차창 밖으로 스치는 경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은 창밖으로 향했지만 자신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감정의 잔재를 보듬고 있음을 짐작했다. 바늘귀 같은 그 감정마저 깨뜨려버리고 싶었다. 나는, ‘지루하지 않느냐’고 낮게 말했다. 여자는 그대로 있었다. ‘답답하게 보여서 내가 도리어 답답하다, 차 안에 있는 것보다 같이 바위산에 올랐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가볍게 혀를 차듯이 말했다. 여자는 잠시 그대로 있다가 얼굴만 나에게 돌리고는, ‘고맙지만 신경 쓰지 마시라’고 신경질 섞인 어투로 말했다. 물론 나는 그런 말을 유도한 것이었고 여자는 그렇게 응답했다. 병호를 무시하면서도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겉으로는 안차 보여도 속은 더럽게도 가시센 여자라는 생각으로 난 담배를 물었다. 여자는 담배 연기에 얼굴을 찡그리며 나에게 고개를 돌렸지만 난 무시했다. 봉고는 거칠게 달렸다. 끝없이 이어진 황톳길은 엷은 초원 사이로 내려갔다가 어느 순간에 다시 오르막으로 변했다. 마지막 언덕인가 하면 다시 내리막으로 변하고 평원을 가로지르다가 언덕을 오르면 다시 눈 아래로 광막하게 널린 초원이 펼쳐졌다. 지루한 시간을 규호가 깨뜨리며 말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저 언덕 옆으로 여러 길이 보이지? 거기만 넘으면 혁민이 너가 자빠질 곳이니, 괜히 안 돌아간다고 떼쓰지나 마라. 애화, 엉덩이가 아프지 않아? 내가 좀 주물러주면 되는데?」 「전 괜찮아요. 거의 다 왔는데요, 뭘.」 규호의 걸쭉한 말에도 여자는 자깝스럽게 남저음의 콧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여자의 음성에는 비음이 유난히 많이 섞여서 감정이 정돈된 것 같아도 듣는 이에게 끈적끈적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었다. 난 규호가 여자에 대한 말투를 반말로 바꿨다는 것을 생각했다. 봉고가 마지막이라는 언덕을 막 넘을 때 길 옆에 붉은 깃발이 꽂힌 돌무더기가 있었다. 엘카는 차를 세우고는 가볍게 클랙슨을 세 번 울렸다. 몽골 성황당을 지나면서 참배 대신 던지는 작은 예의였다. 그리고 우리는 정면 아래편으로 펼쳐진 짙푸른 신세계를 내려다보았다. 아스라한 산과 산이 겹쳐 두르며 완만하게 솟은 산맥이 이 넓은 분지를 둘러쌓고 있었다. 희미한 안개가 하늘과 맞닿은 곳이 내가 볼 수 있는 한계였다. 산허리가 계속 둘러쳐진 사이로 부연 빛이 잠겨 있었고, 서쪽에서 비치는 햇빛의 경사면으로는 검은 빛이 뚜렷하게 보였다. 아마 원시림의 군락인 것처럼 보였다. 분지의 중앙에서 조금 오른쪽으로 비껴난 곳에 통나무집과 울타리가 손톱 만하게 보이고 그 너머에 흰 자작나무가 분명할 수목이 우거져 있었다. 수목 사이사이로 강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황톳길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빽빽하게 피어난 풀 위로 갖가지 흩뿌린 물감에 물든 야생화가 점점이 뒤섞여 있는, 전인미답의 공간만이 눈 아래 펼쳐져 있었다. 작은 움직임도 있었다. 그건 점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콩알처럼 보이지만 어슬렁거리는 몇 마리의 말일 것이었다. 「봤지? 어때? 잘 보이냐? 여기가 바로 내가 바라던 곳이다, 짜슥아! 수백만 평의 이 광활한 곳에 내가 뿌리를 내릴 곳이야. 적어도 수천 마리의 양이나 말떼를 기를 만한 곳이지. 강물도 있고…… 앞으로 내 뼈가 묻힐 곳이 여기야. 혁민이 너, 잘 봐 둬라. 맨날 좁쌀만한 곳에서 오글거리며 볶아대다가 이런 곳을 보니 눈이 확 안 뒤집히냐, 임마!」 얼마 전의 일과는 전혀 상관없을 규호의 말에 여자가 감탄의 콧소리를 내면서 차창을 썩 열어젖혔다. 뒤에 있던 병호는 말이 없었다. 난 눈만 크게 뜰 뿐 아무 말도 못했다. 굳이 입을 열 필요가 없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몽골의 초원은 붉은 황토 흙에 푸른 풀과 말라비틀어진 누런 풀들이 뒤섞여 있거나 피부가 벗겨져 붉은 내장을 처참하게 드러낸 풍경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건 아니었다. 황토의 흔적은 짙푸른 빛에 완전히 흡수되어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단 하나뿐! 「좋다!」 무심코 입에서 한 마디가 터져 나왔다. 「좋을 정도가 아니야. 몽골 애들도 이곳을 아는 놈들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이 넓은 곳에 지금 저 보이는 통나무집 하나만 살아. 내가 잘 아는 영감인데, 앞으로 같이 살게 될 곳이야. 여긴 부족한 게 없어. 물도 있고 말먹이 풀도 무진장이고……, 바람 많은 몽골에서 이렇게 푹 파인 분지라 바람도 심하지 않고……, 메마른 사막도 물은 흐르지만 기복이 심한데, 이곳 물은 수량이 일정해서 항상 그대로야. 그러니 가축은 무한대로 기를 수 있는 곳이야. 혁민이 너, 어때? 다 때려치우고 여기 와 살지 그래? 들볶아대며 살아봐야 그게 그거지 뭐 그래. 한세상 배짱 편하게 말 타고 살다가 콱 죽어버리면 그만이지. 뭔 한이 있냐, 혁민아.」 평소 습습하면서도 감상적인 규호는 목을 한껏 뒤로 돌려서 나에게 내뱉어대었다. 나는 그 말에 공감했다. 그러나 그건 삶에 대한 깊은 자신감이 필요한 문제임도 알고 있었다. 나는 흔적을 버릴 수 없는 놈임을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필름처럼 이어지는 흔적들과 나는 결별할 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봉고는 험한 내리막길을 천천히 내려갔다. 찻길이 따로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방향을 잡고 풀밭을 짓이기면서 나가면 됐다. 멀리 통나무집 옆에 한가롭게 풀을 뜯는 말들이 보이는 곳으로 밀고 나갔다. 바퀴에 짓이겨지는 잘 자란 풀과 야생 꽃들이 안타까웠다. 말발굽에 밟혀나가도 인공물에는 결코 스러져서는 안 될 것들이지만 봉고는 아랑곳없이 뭉개버리면서 다가가 통나무집을 둘러싼 나무판자 울타리 곁에 섰다. 모두 내렸다. 겨울 준비를 벌써 하고 있는지 군데군데 마른 풀더미가 높이 쌓여 있는 사이로 흑갈색 혹은 짙은 황색의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잘 발달된 근육이 단단한 털가죽 겉으로 삐져나올 것처럼 튼실한 놈들이었다. 우리가 넓은 마당으로 들어가자 차 소리를 듣고 늙은 부부가 나왔다. 규호는 부부와 구면인 모양이었다. 서로 반갑게 손을 잡고 그들이 둔징 바이신이란 부르는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우리들에게도 들어오라는 손시늉을 했다. 우리도 따라 들어갔다. 「사인 바이노.」 여자는 그 질척한 비음으로 인사를 했다. 몽골인을 만날 때마다 우리 중 맨 먼저 인사를 하곤 했다. 언뜻 보기에 귀틀집처럼 생긴 그 내부는 입구 이외에는 창문이라고는 없어 어두컴컴했다. 겨우 다섯 평 정도의 면적에 낡은 풍로와 엉덩이를 걸칠 ㄱ자 형태의 앉을 곳, 세 식구가 겨우 잘 수 있는 공간엔 낡은 담요와 그릇 같은 세간들이 널려 있었다. 50세라는 규호의 설명에도 주인은 너무 늙어 보였다. 겨울이면 영하 30°의 추위와 여름의 건조한 직사광선 밑에서 평생 가축의 뒷바라지에 그냥 삭아버린 모습이었다. 8살 난 어린 손자를 키우고 있는데, 아들 부부는 도시로 돈 벌러 갔다고 했다. 한국의 시골 모습이 생각났다. 겉으로 드러난 피부의 주름살 깊이에 따라 추함과 늙음을 한 묶음으로 가르는 우리들의 판단이 잘못임을 알 수 있는, 선량한 표정의 늙은 부인은 낡은 네발 탁자 위에 말 젖으로 만든 음료수인 희부연 아이락과, 역시 그것으로 만든 치즈 조각을 평화로운 미소와 같이 내 놓고 작은 사발에 아이락을 가득 담았다. 우린 가져간 담배와 과자, 사탕을 선물로 내 놓고 조금씩 아이락을 마셨다. 시금털털한 막걸리맛과 비슷했다. 주인은 여유가 있었다. 무엇 하나 바쁜 것 없는 사람처럼 규호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직감했다. 비록 손은 거친 황야에 시달려 죽죽 갈라지고 터져서 상처투성이지만, 한 번도 물맛을 본 적이 없었을 지저분한 작업복과, 남발한 회색빛 머리칼 속에 마른 검불이 틈틈이 박히고, 필터가 타들어갈 정도로 독한 담배를 연신 피워대지만, 그는 바람의 강약과 습한 정도에 따라 말과 양들이 그 해 먹어치울 풀의 성장점을 정확히 짐작할 수 있으며, 한겨울 북풍의 거센 눈보라 속에서도 말의 가벼운 신음이 두터운 천막의 올올을 헤집고 들어오는 미세한 소리도 끄집어 낼 수 있는 예민한 청각과, 8월의 아침 일찍 일어나 겔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서, 누런 황토를 빽빽이 덮고 있는 이슬 먹은 풀의 날선 눈초리만 보아도 곧 밀려 올 가을의 메마른 바람과 겨울의 칼날 같은 눈의 깊이까지도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들은 그렇게 가축의 커다란 눈빛에 잠기며 대초원의 밀밀하게 다가오는 바람의 틈에서 살아오고 살아갈 자연의 적자가 분명했다. 규호와 주인은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나는 답답해 졌다. 비록 어지럽고 지저분한 내부지만 그래도 세 식구가 평화롭게 생활하는 공간은 옛 우리 시골 풍경과 크게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광활한 대지 위에 한 점 통나무로 컴컴하게 막아놓은 내부 속에서 나를 계속 박아놓기는 싫었다. 바람을 받고 싶었다. 대륙의 거친 바람 속에 자신을 내 놓고 싶었다. 여자와 병호가 서로 외면을 하면서 앉아 있는 꼴도 보기 싫었다. 밖으로 나왔다. 역시 바람은 있었다. 해는 야트막한 좌측 산머리에서 한 발 정도 떨어져 아직 한여름의 뜨거움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끝을 모르는 광막한 대륙의 하늘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달아오른 가슴 속으로 깊게깊게 파고들었다. 계속 크게 들이마셨다. ‘너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 끝까지 올라가서 산산이 터져 죽어라!’ 고교 시절 일기장의 한 대목이었다. 그때 왜 그런 섬뜩한 말을 썼는지 지금은 명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다. 다만 빡빡한 삶의 그늘이 어린 나이에도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을 것임을 지금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의 실패 끝에 들어간 3류 대학의 경영학과를 거치고, 마흔 중반을 넘기면서도 붙어 있었던 금융회사. 그리고 어린 아들의 영상. 나를 이 몽골의 대초원으로 몰아온 것은 지금까지 쌓아온 예정된 삶의 한 지표일 것이다. 아들이 사라진 것도, 회사를 버린 것도, 그녀와의 짧았던 시간도, 현실의 자신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지표에 속할 것이다. 딸애와 아내와 난 지난 2년 간 서로 말을 아끼면서 지내왔었다. 겉은 멀쩡하지만 이미 밑돌부터 바스러지는 집이었다. 아내도 알고 있을 것이다. 굳이 그 사건을 내뱉어 멀쩡하게 보이는 집을 서까래 들어내듯 들쑤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가족 중 하나가 이 지상에서 사라졌다 해도 남아 있는 나머지 가족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해야만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에 모두들 말없이 따라주었다. 만약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면,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발을 뻗고 손을 펴고 고개를 쳐들어 혓바닥을 나불댈 것인가. 그저 말없이 현상을 따라갈 뿐이었다.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거의 마흔이 다 되어서 본 아들이었다. 나보다도 아내가 더 즐거워했다. 대개 사람들은 아내가 딸을 원하고 아비는 아들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잘못된 말이었다. 적어도 내 집에서는 그랬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아내는 큰 딸애를 낳고 은근히 아들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둘째를 잉태했을 때 아내는 자신의 둥근 복부를 쓰다듬으면서 계속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물었지만 무언가 차지 않은, 기대한 정량에 모자란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속에 들은 것이 힘이 없다는 거였다. 배냇짓이 약하다는 표정이었다. 난 그 사건 이후에야 당시 그 표정이 아들이 아니고 딸인 것 같다는 표현이었음을 알았다. 그렇게도 난 무심했었다. 아내가 집에 드러누웠다. 약한 소독약 냄새가 났다. 그리고 낮은 음성으로 ‘ 후련한 짬뽕 국물을 먹고 싶다’ 고 했다. 난 알아차렸다. 이미 뱃속의 아기는 사라졌음을. 난 아내의 생각을 존중했다. 나와 의견을 나누지도 않고 일방적인 행동을 벌인 아내에게 약간의 섭섭함마저 숨길 수는 없었지만, 아들을 원하는 생각에 그리 반대할 마음은 없었다. 병원에서 아들인지 딸인지를 은밀히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 일 후에도 2년이나 지나서야 본 아이였다. 아기 때 낮엔 잘도 자다가 밤만 되면 눈을 동글동글 뜨고 우리를 못살게 굴던 아이였다. 우리가 조금만 눈을 붙이면 악을 쓰며 울어댔다. 정말 잘 울던 애였다. 그 애는 6살이 채 되기도 전에 한길에서 덤프트럭 밑으로 사라졌다. 그녀를 만난 건 그 후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승진 시험을 앞두고 오후엔 근처 도서관에서 책에 묻혀 쓰린 기억을 잊던 어느 날 저녁, 지하 구내식당에서 식판에 음식을 담아서 층계로 오르다가 아래로 내려오는 사람과 부딪쳤다. 뜨거운 국과 밥과 김치 종류의 반찬이 그녀의 허리 아래 곧게 뻗어 내린 흰 종아리에 쏟아졌다. 서른 중반의 그녀는 하는 일없이 책만 보러 도서관으로 들락거리는 낡은 백조 신세였다. 사람의 정신이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창고는 차고 넘치는 부분과 모자라서 계속 추구하고 원하는 부분이 서로 충돌하면서 분열되고 결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세포를 만들어 내는 곳이라면, 우리는 그 창고에서 모자람과 넘침의 적절한 배급을 균형 있게 운영할 수 있는 공간을 서로 확인할 수 있었다. 몇 잔의 술이 오고가면서 서로에게 부족함과 넘치고 뻗는 부분을 서로 보듬어 나갈 길을 우리는 확인했다. 사학을 전공한 그녀는 나의 밀착된 실물 경제학적 사고를 지적했으며, 나는 민족 흐름의 원류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그녀의 행동과 말에 일침을 놓았다. 우리는 저녁만 되면 만나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인근 도시의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럴 때면 거역할 수 없던 아이의 가쁜 기억이 잠시 숨을 멈추었다. 남들의 눈을 피해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승용차 속에서 섹스를 나눴다. 먹고 마시고 섹스하고……. 그녀는 솔직했다. 웃어야 할 때에 웃고 말을 멈춰야 할 때 침묵했으며, 내가 사물에 깊이 파고들면서 거친 언사를 내뱉으면 가벼운 미소 속으로 끌어들여 휘어진 언어를 펴 주곤 했다. 몇 달의 만남으로 인해 승진 시험은 자연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직장 내에서의 내 위치는 가벼운 깃발처럼 미미한 바람에도 흔들렸다. 더 이상 버텨 내기가 힘들었다. 그녀와 같이 강원도 정선으로 떠났다. 4 해가 산등성에 두어 뼘 정도 다가섰다. 일행들은 통나무집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해가 있는 산기슭에서 작은 움직임이 보였다. 수많은 작은 물체들이 감실감실하게 계곡에서부터 빠져나오면서 부챗살처럼 넓게 퍼졌다. 그것들은 점점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는 것이 틀림없었다. 서둘러 햇덧 안으로 그들의 안식처를 찾아 내려오는 말떼들과 억센 몽골 청년들일 것이다. 그들이 이곳에 도착하게 될 때면 우리도 자리를 털고 나서야 한다. 무한한 공간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먹으며 커 가는 저 무리들에게 내가 앉은 자리를 양보해야 할 시간이었다. 다시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바람은 내 가슴 속에서 매듭지고 뒤틀리고 삭아가던 모든 잡것들을 휘몰아 내 가슴뼈 사이를 헤집고 등 뒤로 빠져나갔다. 따가운 햇살을 가리던 모자를 벗었다. 바람은 얼굴 정면을 향해 덤벼들었다. 맴도는 먼지구덩이처럼 어지럽던 머릿속 세포 덩어리가 일시에 세척되면서 허공으로 솟았다. 발밑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오직 이곳에서 자생하는 바람만 가득 차올랐다. 나는 바람처럼 가볍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몸을 버릴 수 있다면 나를 지탱하던 마지막 정신의 끝줄기도 이곳에서 사라지는 바람에게 맡길 수 있을 것이다. 다 버릴 수 있었다. 일행들이 나오자 간단한 작별 인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차가 막 출발할 즈음 무겁고 둔탁하게 지표를 울리면서 산기슭에서 달려온 말떼들이 도착했다. 그것들은 단순하게 땅만 밟아대는 것이 아니라 차 속에 앉아 있는 우리들의 가슴팍까지 짓밟아대듯 육중한 몸체를 이긴 단단한 말굽으로 바닥을 치면서 사방으로 돌아쳤다. 그것들은 흥분한 상태였음이 틀림없었다. 대략 백여 마리가 됨직한 살진 말들이 하루 종일 영양가 있는 풀을 마음껏 뜯어먹고, 넘치는 기운을 억제치 못하며 연신 콧김을 내뿜으며 차 주위를 돌며 날뛰었다. 검게 탄 피부의 억센 목동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긴 회초리를 연신 휘두르며 말떼를 진정시키고 있었지만 말들은 막무가내였다. 사람은 없었다. 말들이 이 천지의 주인인 것처럼 보였다. 아득한 옛날부터 이 대자연의 주인은 우리라는 듯 말떼들은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앞발을 높이 치켜들고 탐스러운 갈퀴와 꼬리를 감아 돌리면서 콧김을 연신 사방 천지를 향해 뿜어댔다. 털빛이 검거나 희고 갈기가 검은 것, 붉은 빛깔의, 주둥이만 검고 누른 빛깔, 거무스름한 것, 털은 희고 갈기만 검은 것 등 가지각색의 말떼들이 서로 앞발을 세우면서 목을 비비대거나 부딪치고 뛰어다니는 서슬에 봉고는 그냥 엔진만 달구면서 그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 주변은 갈초 더미에서 일어나는 티끌과 황토먼지로 가득 찼다. 여자는 얕은 비명을 지르며 차창을 닫았다. 「야, 가만 놔 둿!」 갑자기 뒷자리에서 병호가 소리쳤다. 그 소리는 여자의 뒷머리를 낚아채듯 거칠게 쏟아졌다. 여자는 움찔하며 뒤롤 돌아보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나 역시 그 먼지의 맛을 보고 싶었다. 옆의 차창을 활짝 열었다. 먼지가 안으로 부옇게 밀려들어왔다. 여자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래, 좋다! 여기 먼지는 보약이 될 수도 있어! 좀 마셔 봐라. 먼지도 등급이 있다면 이 먼지가 맨 꼭대기를 차지할 게다. 이런 장면도 좀처럼 보기 힘들어. 저 말들이 미쳐 날뛰는 걸 봐라! 요즘이 한창 살이 올랐을 때야. 힘이 넘쳐서 때론 저 녀석들도 함부로 다루지 못할 때도 있어. 혁민이, 어떠냐? 저 속에서 말을 타 볼 생각이 안 나냐?」 어떤 놈들은 떼 지어 차창에 커다란 머리를 바짝 들이밀기도 했다. 거대한 앞발을 번쩍 쳐들고 봉고의 앞 유리창으로 다가서는 놈들도 있었다. 남자 주인이 목동들에게 뭐라고 손짓을 하며 차를 가리키자 목동들이 일제히 차 앞으로 몰려와서 말떼들을 갈라놓기 시작했다. 엘카가 거푸 클랙슨을 울리면서 차를 출발시켰다. 봉고는 엘카의 능숙한 핸들 솜씨에 따라 날뛰는 말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왁실덕실한 틈으로 연신 급정거를 반복하면서 겨우 빠져나오자 우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말들이 계속 돌아치고 있는 사이사이로 아직도 들어가지 않고 손을 흔드는 통나무 주인 부부가 보였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그들이 보던 안 보던 상관없이. 역시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던 규호가 손을 멈추고 뒤로 돌아보면서 말했다. 「천고마비란 말이 흔한 말이지만 그 뜻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나? 나도 한국에선 몰랐지. 천고마비의 진정한 의미를 여기 몽골에 와서야 알게 된 거야. 방금 봤지? 지금이 몽골의 늦여름 초가을이거든. 겨울의 눈구덩이를 헤치고 얼어붙은 풀을 겨우 얻어먹어 바짝 말랐던 말들이 눈이 녹는 봄부터 지금까지 마음껏 풀을 뜯어먹고 힘이 넘쳐 날뛰는 살진 말로 변한 거야. 저런 광경을 봐야 천고마비의 의미를 알지. 흐흐흐흐흐…….」 「몽골 와서 볼 거 하나는 아주 제대로 봤네.」 병호가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장관이란 말이 바로 이런 때 써먹을 말이야. 정말 굉장했어. 백 마리가 넘는 말떼들이 미쳐 날뛰는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어? 정말 굉장한 걸 봤네!」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건 진정이었다. 영화 속에서 상상력을 덧붙여야 가능할 광경을 실제로 경험했다는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아직 볼 게 많은데 뭘 그래? 애화, 어때? 내일 말 한번 타 보지? 어차피 낼 계획은 시골로 가서 종일 말 타고 돌아치는 건데.」 「저도 타보고 싶어요. 그런데 정말 저 말들처럼 사납게 움직이면 힘들 것 같아요.」 「아니, 우리가 타는 말은 순하지. 특별히 애화에겐 큼직하고 사나운 말을 주지.」 규호는 뒤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여자도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럴 땐 꼭 잡아주셔야 해요. 무서우니까.」 봉고는 오던 길을 따라 북쪽으로 달렸다. 해는 이젠 산등성이 바로 위에 걸쳐 있었다. 우리는 모두 조용히 주변 경치만 바라보며 조금 전의 흥분을 삭였다. 가끔 정면에서 불어오는 회오리바람이 황톳길 좌우에서 하늘로 누렇게 치솟아 올랐다. 황량한 초원의 뿌리가 파헤쳐진 듯 군데군데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구덩이를 피해 봉고는 속도를 올렸다. 바람이 앞에서 부는 탓으로 먼지는 차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차창을 활짝 열었다. 대낮의 마른 바람과는 다르게 약간 습습한 바람이 불었다. 뭔가 정면 창에 작은 이물질이 달라붙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아주 작은 점처럼 보였는데 점점 커지더니 내가 앉은 좌석 속으로도 날아들었다. 작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띄엄띄엄 떨어지는 빗방울은 그리 굵지 않았지만 마른 몽골의 대지에 비가 내리는 광경을 지금 보고 있었다. 규호가 떠들었다. 「야, 이것 봐라! 지금은 비 오는 계절이 아닌데도 비가 오네! 혁민이 너, 참 좋은 때 왔다! 이런 데서 비 구경을 다 하고 말이야!」 그게 아니었다. 차 정면 북쪽 저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부연 기운이 점차 저녁 햇발을 먹어치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점점 넓게 퍼지면서 낮은 언덕을 삼키더니 어느 새 차 정면을 가득 덮을 정도로 가까이 와 있었다. 엄청난 먼지폭풍이었다. 강한 바람은 바짝 말라버려 뿌리가 약해진 풀뿌리를 할퀴고 파헤치면서 온 사방을 누런 황토로 가렸다.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서둘러 창문을 닫았다. 차창으로 바람은 금속성 음향을 울리며 맹렬히 스치며 지나갔다. 우리는 그 황토바람 한가운데 있었다. 「먼지바람이야. 한번 지나가면 괜찮아 져. 잠시 기다려 보자. 이 몽골 초원에서는 가끔 부는 바람이야.」 우리는 차 안에서 숨죽이며 앉아 있었다. 세계는 황토바람이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천지에는 달리고 꺾이며 멈추다가 휘돌고 솟구치거나 지표를 갉아먹으며 낮추 파고드는 황토 바람이 내뿜는 기운에 놀란 모든 물상들이 몸을 내맡기면서 부르짖는 위낮은청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때로는 날리는 모래나 작은 돌조각이 차창에 부딪치면서 자르랑거리는 소리도 들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그 모든 소리를 들었다. 시간의 저편에서 태고의 지표를 울리면서 다가오는 원시의 음향이 거대한 날개로 광막한 허공을 수만 갈래로 찢으면서 태양의 반대편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밤바다의 허연 이빨이 바위에 부딪쳐 깨어지는 소리를. 기억조차 희미한 규호의 울음도 있었다. 수백 마리의 말떼가 뒤섞여 토해내는 울부짖음도 들었다. 또 있었다. 단단한 지표가 갈라진 틈으로 거대한 알 하나가 밀려 내려가며 깨어지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어린애 울음으로 바뀌었다. 분명히 들었다. 순간 나는 숨 쉴 수가 없었다. 가슴이 수만 갈래로 찢어지는 소리 없는 비명을 들었다. 차 문을 열고 바람 속으로 들어갔다. 밀려오는 바람 정면으로 서서 온몸으로 파고드는 황토바람을 마음껏 들이마셨다. 텅 빈 내 몸 속으로 바람을 한없이 집어넣고 또 넣었다. 갑자기 아랫배에 감각이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배꼽노리 부근에서 점차 아래로 퍼지면서 맹렬하게 밑으로 밀려내려 갔다. 나는 한 움큼이라도 놓칠세라 벌린 입을 더 크게 벌려 마시면서 바지 허리띠를 풀었다. 그리고 차 뒤쪽으로 걸어갔다. 바지를 발목까지 내리고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눌리고 눌렸던 모든 것들이 내 몸에서 빠져나오고 있음을 알았다. 눌어붙어 있던 마지막 한 조각도 남김없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통쾌했다. 배변의 쾌락과는 또 다른 통쾌감이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전해졌다. 정신이 아늑했다. 바람에 밀려 온 미세한 황토가 차의 배면에서 세차게 맴돌면서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방이 흐릿하게 보였다. 눈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았다. 난 눈물을 닦지 않았다. 그대로 두었다. 황토와 눈물이 뒤엉켜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하나는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작은 인형 같은 물체가 나에게서 벗어나 바람을 타고 허공으로 구르며 치솟는 것을. 그것은 누런 황토바람 속으로 잠겨 들어가 순식간에 흔적 없이 사라졌다. 숨이 막혔다. 허공으로 얼굴을 곧추 세운 내 눈에 다시 진한 기운이 밀려들어 앞이 더욱 흐릿해졌다. 그것은 배변의 쾌감으로 인한 눈물 때문인지, 몰아치는 황토 때문인지, 몸에서 다 빠져나가고 마지막으로 남은 심장이 떨면서 남긴 눈물 때문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1.박문구 2. 강원일보 신춘문예 소설 3. 강원일보 중편소설 연재 4.단행본 '환영이 있는 거리' 출간 5. urimal21@hanmail.net  
250 와장창 내는 문/김인기 file
편집자
2463 2012-11-01
13.1월 32호 수필  와장창 내는 문 김인기 아마도 참사 현장을 둘러본 탓일 것이다. 중앙로역을 지날 적마다 나는 아득해진다. 바로 여기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고 다쳤다. ‘우리들이 으레 그러려니 믿고 이용하는 영조물이 이렇게나 허술하다니…….’ 당일 인근에 있던 나도 경악했다. 그로부터 9년 세월이 흘렀다. 문득 궁금하다. ‘우리들이 여기에서 교훈을 얼마나 얻었을까?’ 이내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간에도 갖가지 사고들이 일어났다. ‘이러다가 또 당하고야 말지…….’ 이것도 기우일까?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손으로 출입문을 만지며, 눈으로 안내문을 읽으며, 나는 의심한다. ‘만약에 지시대로 해도 문이 열리지 않으면 어떡하지?’ 나는 또 이러기도 한다. ‘사람들이 당황할 수도 있다.’ 이러면 우리들은 속절없이 불에 타 죽어야 하는가? 아니다, 이건 아니다. 나라도 출입문이든 무엇이든 부숴야 한다! 시설물도 마땅히 유사시에 맞춰 설계해야지. “이것저것 다 안 되면 유리창을 깨고 나가세요.” 이렇게도 가르쳐야 한다. 아무렴, 승객들 목숨이 중하지, 이까짓 유리판 몇 장이 중하랴. 나는 과거 그 사건도 다시 따진다. ‘그 많은 승객들이 왜 유리창을 깨뜨리지 못했을까? 그게 그렇게나 튼튼했던가?’ 내 눈에는 이게 단지 과거사로만 보이지가 않는다. 곳곳에 위험이 있다. 출입문도 종류가 많거니와 이의 개폐법도 동일하지 않다. 누구라도 다 익히기 어렵다. 손님들이 찻집에서 정담을 나누는 중에 불이 났다고 하자. 이들이 부랴부랴 바깥으로 나가려는데, 점주가 우선 찻값부터 받겠다며 출구를 가로막는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지 않느냐. 이런 판국에는 나도 잠잠하지 못할 것이다. “이봐요, 지금 이럴 게 아니잖아요?” 이래도 답답이가 걸리적거리면 이런다. “어허, 이 사람이!” 나는 완력을 숭상하지도 않거니와 그러면서 살지도 않았다. 이런 나도 급기야 주먹을 휘두르며 고함을 지르고야 말 것이다. 달리 방법도 없다. 내가 녀석을 와락 밀치거나 의자 또는 탁자 따위로 문이나 유리벽을 와장창 깨뜨리겠지. 우물쭈물하다가는 연기에 질식할 테니까. 여기에 대단한 지능이나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니다. 통계자료는 없어도 감각으로 짐작한다. ‘아마도 능히 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던 분들이 허둥대다가 많이 죽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허망한 죽음이 잇따를 것이다.’ 이래도 선무당들이 횡행한다. “어쨌든 파괴는 나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상말을 해? 쯧쯧, 역시 천박하고 과격해.” 구경꾼들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어 손가락을 입에 문다. 나는 뜨악하다. ‘어떻게 당사자들이 이렇게나 어설픈 주문(呪文)에 마비가 되어 판단력을 상실하나…….’ 바보가 따로 없다. 육신은 놓였으나 정신은 얽매였다. “당신은 이제부터 노예가 아니요. 그러니 앞으로는 본인 재량으로 다 하세요.” 누가 이러자, 녀석이 울먹였다. “주인님, 어쩌면 그렇게나 모진 말씀을 다 하십니까? 소인을 내내 거두어주십시오.” 이 나라에도 과거에 토지개혁이 있었다. 이것도 이래야만 할 사정이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어느 소작농은 ‘남의 땅을 내가 공짜로 받을 수 없다.’며 버텼다나. 이 시대에도 개혁해야만 할 것들이 있다. 미래에도 아마 ‘황당한 착각’을 ‘올곧은 소신’으로 여기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대안이 여럿 있으면 위기에도 차분하다. 여유가 있으니까. 전철의 출입문도 승객들이 이래야 더 잘 연다. 만사가 이렇지 않을까? 그러니까 여기에도 소화기만이 아니라 탈출용 망치도 비치하자. 사고가 어디에서 어떻게 터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구라도 이래야 할 때가 있다. “창문이 아니라 벽이나 지붕이라도 부수자.” 그런데 이런 발언에도 두려움을 느끼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매사가 저런 식이면 내 모가지도 잘리겠구나!’ 이런 지질한 작자들한테는 멀쩡한 상식도 몹시 불온하다. 서민들도 집권층의 횡포에 시달리면서 각성한다. ‘저것들을 그냥 그대로 뒀다가는 우리들이 도저히 살 수가 없겠구나.’ 주권재민의 원칙대로라면 잘나도 내 탓이고 못나도 내 탓이니, 누가 누굴 탓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런 대원칙마저 무너지고 말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뭘 어떻게 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역사를 돌아보라. 혁명 또는 폭동에는 피바람이 분다. 이 와중에 참혹한 일들이 벌어진다. 이를 미연에 막는 장치가 민주제도이다. 사람들이 우선 이걸 명심해야 한다.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정치인도 아니고 사학자도 아니다. 나는 외려 문외한에 가깝다. 이런 내 단견으로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몰상식하다. 언론인들도 그렇고, 법조인들도 그렇고, 종교인들도 그렇다. 문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왜 이래? 미쳤어? 이들이 잘 알면서 이런다면 교활한 것이고, 이들이 뭘 몰라서 이런다면 멍청한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정치과정을 두고도 이들이 뭐가 어떻단다. 이러면서 불신과 혐오를 양산한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세사에 초연한 것도 아니다. 의원들이 갑론을박으로 밤낮을 보낸다. 이들이 볼썽사납게 드잡이도 한다. 유권자들도 짜증이 난다. 그렇다고 이런 소란이 무가치하지만도 않다. 의원들이 국회의사당을 벗어난 모처에 끼리끼리 한통속으로 모여 조용히 법률을 제정해 보라. “재적 의원 과반 참석, 참석 의원 과반 찬성!” 오직 자리만 옮겼을 뿐이라고 해도, 이러면 후유증이 따른다. 그러니 누가 흉기를 들고 설치지 않는 이상은 그 ‘맹활약’도 모두 감내해야 한다. 그러다가 누군가는 ‘현실’을 깨닫고는 ‘말썽꾼’한테 ‘마아, 이제 그만해라!’ 하는 거다. 수십억 인류를 대표한다는 국제기구에서도 형편이 다르지 않다.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게 인간들이다. 여기에서 누가 나서서 나라의 실체조차 부인하고 그 발언권조차 박탈해 보라. 저마다의 체험에 뿌리를 둔 저마다의 진실로 누군가는 폭탄을 터뜨린다. 때로는 핵무장도 감행한다. 이들한테도 확신이 있다. 우리들 주위의 자그마한 동호회에서라면 누군가 이렇게 어깃장을 놓는다. “그래, 똑똑한 그대들이나 그렇게 열심히 하시든가.” 이런 꼴로 뭐가 제대로 되기는 어렵다. 그게 허영이었을까? 아니야, 그것도 애정이었을지 몰라. 권력자들이 지독했다는 건 분명하다. 이들은 저승에서도 확고할 것이다. “그런 절차 따위는 다 낭비야, 낭비!” 이들은 여전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풍문도 있나 보다. “내가 그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누구는 이러기도 했다더라. “그 분을 지금도 역시 존경하지만, 나는 그 때문에라도 그 분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궤변으로 자신들의 만행을 치장하는 자들도 부지기수이다. 어느 경우든 이건 불행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사려 깊지 못하다. “저것들이 호강에 겨워 저러니, 이참에 모조리 잡아다가 물고를 내야 해, 물고를!” 그 연놈들이 밉다. “상명하복(上命下服)! 일사불란(一絲不亂)!” 이런 걸 금과옥조로 삼는 터라 이견의 존재 자체가 애초부터 못마땅하다. “너희들이 뭘 안다고 따져?” 이렇게 반문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들은 극언도 예사로 한다. 그러면 이들의 언행에는 모순이 없는가? 그렇지도 않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초월과 예외가 넘쳐난다. 구성원들의 균일성이 집단의 화합을 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해롭다. 다양성의 상실은 불화의 조건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동일한 가치관으로 함께 생활하면, 이들이 우열에 따르는 서열을 가리느라 바쁘다. 이 불길도 치열하다. 이들은 서로 다를 게 없는 처지이다. 이러니까 더 환장하지. 남들과 다르면 따돌려질까 두렵고, 남들과 같으면 존재감이 없다. 도도해도 안 되고, 데데해도 안 된다. 남들이 선망하는 것들을 나도 해야겠는데, 이게 남들보다 조금은 더 나아야겠는데, 이런 사정마저 모두 같다. 너나없이 피곤하다. 급기야 진저리를 친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우리들이 정말 이럴 수밖에 없나?’ 그나마 이들은 철이 들었다. 성찰은 하니까. 과연 누구라도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이래서 이들이 가만가만 쉼터를 마련한다. 끝끝내 문을 내지 못해 불구덩이에서 나오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체제에 기생하는 무리들의 수작에 휘둘리지는 않으려 한다. 대다수 동료들이야 미련스레 만신창이가 될지라도 이들은 고요한 눈길로 만상을 응시할 줄도 안다. 사사물물은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그러므로 철이 든 위인들을 칭하는 용어들도 다양하다. 몽상가, 자유인, 낙오자, 방외인, 탈주범, 반역자, 지성인……. 누가 코딱지나 귀지를 바라보면서 물질의 시원과 종말을 헤아린다고 하자. 이게 수십억 광년 저 너머에서 명멸하는 은하계와 무관하냐? 그렇지 않다. 이것들도 따지고 보면 피차 통섭하는 우주의 먼지들이다. 하물며 그대가 겨우 그런 것들로 따따부따하겠다고? 차라리 산으로 들로 다니며 바람이나 붙들어라. 지하철은 실물이다. 탈이 나면, 나도 금방 감지한다. 그러나 이 공동체가 위기에 처한다면 한동안은 모르지 않을까? 누구라도 사태의 핵심을 깨닫지 못할 수가 있다. 만약에 이 사회가 불길에 휩싸인 집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야 너나없이 합심하여 불을 꺼야지. 여기에 실패하면? 어느 제독이 패배의 책임을 지고 전함과 함께 사라졌듯 일부의 사람들은 화염과 함께 타버려야 할 것이다. ‘나 어디에 가서 무슨 꼴을 더 보자고?’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일부의 사람들이다. 그래도 불이 난 곳이 지하철이나 집이라면 피할 곳이 있으나, 삼계(三界)가 화택(火宅)이라면 난감하다. 자문(自問)한다. ‘문을 낼 수 있을까?’ 자답(自答)한다. ‘물론이다.’ 그러니까 부처님도 설법하지 않았더냐. 오로지 각자가 아는 그 영역만이 자기 세계이다. 이건 아무리 뽐내봤자 그게 그저 그렇고 그런 누옥(陋屋)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에 불이 났다고? 놀랄 것 없다. 혹시라도 문이 없으면 발로 벽이라도 박차라. 이렇게라도 해서 밖으로 나가야지. 집이야 다시 지으면 된다. 나도 살면서 체득한다. ‘그때는 그게 대단했으나, 지나고 보니, 그것도 시시하더라.’ 자탄한다. “후회막급이다. 내가 왜 그렇게나 조급했던가!” 자신의 옹졸했던 속내가 다 드러났다. 시야가 좁으면 이렇게 된다. 무식한 자들이 용감한 척은 할 수 있어도 진실로 용감할 수는 없다. 이런 자들은 지레 겁을 집어먹고 자중지란에 빠진다. 그러므로 자신의 상상력에 맞추어 남들의 의견을 허황하다 이르지 말자. 그게 그런 경우도 없지 않으나, 그게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까. 우르릉 쿵쾅! 고대인들은 천둥소리를 자신들의 잘못을 꾸짖는 천신들의 경고로 들었다. 이들이 천둥이나 벼락의 정체를 몰랐으니 무지했다고도 하겠으나, 그래도 결과가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그 인간들이 더 선량해졌으니까. “네 이놈!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요즘은 아무도 이런 호통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들한테 두려움이 없어졌느냐? 천만의 말씀이다. 천지신명들한테 맡겼던 것들을 이제는 자신들이 직접 해야 하니 이래저래 고민거리가 더 늘었다. 오늘도 나는 지하철을 이용하며 안내방송을 듣는다. 비상시 출입문 여는 방법을 알린 이후 이어지는 끝말이 이러하다. “호기심 또는 장난으로 출입문을 열면 매우 위험합니다.” 출입문을 열 줄 몰라서 많은 승객들이 죽었으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는 뜻이렷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이런 생각도 한다. ‘누군가는 호기심 또는 장난으로 진작 그렇게라도 해 봤더라면, 그 사람들이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 거야.’ 이래서 나는 종종 ‘매우 위험하다’는 그 짓도 저지르고 싶다. 김인기 경상북도 영천 출생(1962). 《월간에세이》로 등단(1991) 수필집『함께 가는 우리들』(1999),『참 좋은 날』(2006). 대구작가회의 회원 전자우편: gagozigo@hanmail.net  
249 게자리 외1편/최형심 file
편집자
3562 2012-11-01
12.11월 30호 시  게자리 최형심 음영이 없는 내부로 물소리가 차오른다. 단단한 품안, 푸른 방 한 칸이 안으로 눕는다. 우두커니 바닥이다. 머리 위에 판각된 하늘을 기억한다. 환절기의 입질도 드물어지는 저문 밤, 물소리 너머 지상에서 꽃잎을 열고 닫는 소리 들려온다. 나비 한 마리가 읽어 내린 하늘과 바다 사이의 행간, 짓눌리는 수압이 바다의 연보가 된다. 물길을 풀어 이마를 헹구는 일이란 연질의 내부에 뼈마디가 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물길이 안으로 휘고 있다. 물렁한 내면이 맨 처음 두고 온 천공을 만지던 날, 그물에 걸린 노을 한가운데 서서 스스로 미로가 된 내력이 공중으로 흘렀다. 수중의 계단을 올라 야광의 무표정이나 될까. 견고해지는 감각이 갑각이 되면 모천에 이르기 위해 집을 짓는다. 질긴 파도소리에 묶였다. 물소리가 천공의 한때를 지나 천문학자의 눈가로 몰려갈 것이다. 균열이 없어 깊어진다고 그늘에 누워 썩은 살을 먹었다. 어떤 고요를 견디는 것은 갑각의 외연 안에 머무는 일이라고 거품을 문다. 바닥의 서사를 살아내는 저만치 여울이 있다. 모래시계 아래로 향하는 것들은 쌓여간다. 일기예보를 따라 누군가 모래시계를 뒤집는다. 도마뱀이 차도로 뛰어들고 있다고 양손에 가득한 전언이 뚝뚝 떨어지면 버찌의 시절은 가고 핏빛의 바닥을 건너는 발꿈치가 젖는다. 이내 물러지는 살들이 녹아내리고 인적은 드물어진다. 부나비들 사르르 내리는 소리 듣는다. 불빛은 불친절한 안내자라고 책방 점원은 비스듬히 앉아 책의 낡은 깃털을 만진다. 바람이 때로 방향이 될 때 서쪽 주방에서 마리, 마리아, 마리사가 운다고 끄적인다. 가는 목을 가진 시간이 휘어지고 맨 처음의 얼굴들은 낱알이 되고 오른편으로 저만치 기우는 슬픔을 가진 꽃들에게서 미립자의 꽃말을 빌린다. 흐느끼는 목덜미들이 멀리 갈 것 같다. 유성우 쏟아질 때, 갈잎큰키나무는 거꾸로 서서 숲이 된다. 발아래 낱말을 묻기 위해 지루한 수염은 자란다. 얼룩을 따라 푸른 파열이 유랑의 무리들을 저만치 보내고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목각의 시계를 지나 한 시절이 오고 한 시절이 갔다. 녹색 군무를 빠져나오는 잎 하나 기억한다. 피곤한 마리와 천천히 잠드는 천체가 나란히 이별한다. 마지막 모래알이 바닥을 향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약력 : 2008년 <현대시> 등단, 2009년 <아동문예>문학상 동화부문 수상, 2012년 <한국소설> 신인상 수상. 주소 : 133-850 서울시 성북구 용답동 232-1번지 신창 비바패밀리 406호 최형심 메일주소 : elqut@hanmail.net  
248 우포늪 외1편/김수화 file
편집자
2775 2012-11-01
12.11월 30호 시  우포늪 김수화 해질녘 방천길 따라 아버지 마중 나설 때처럼 옛길 그대로 반긴다. 깊은 잠에 빠져 든 아늑한 늪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심연에 잠겨 있던 오래된 기억들이 안개 되어 피어오르고 강물로 뛰어든 시간조차도 불러들이면 새들은 날갯짓으로 추억을 퍼 나르고 묶인 채, 물결 따라 꿈꾸는 사공 없는 배 위에 단발머리 소녀가 아버지를 기다린다. 그늘과 풍경 사이 달빛의 향기로 꽃물들인 달맞이 꽃 참매미 나무 품에서 한 생을 풀어 놓고 새들은 나뭇가지에 발자국을 남긴다 잠자리 풀잎 끝에 까무룩 선잠 들면 소나기 서러운 가락에 불어나는 도랑물 사는 게 달과도 같아 날마다 채우고 비우며 누구나 생의 여울목 소나기처럼 만나도 세월은 눈금 따라 삶의 무늬 새기며 가을빛 머문 산처럼 고웁게도 저문다 경북 선산 출생, <자유문학> 등단, 한국문협, 경북문협, 김천문협 회원, 경북여성문학회 부회장, 김천시 청소년 문화의 집 논술 토론 강사 시집 <햇살에 갇히다>, sohie4280@hanmail.net  
247 영천장(永川場) 외1편/권오윤 file
편집자
3130 2012-11-01
12.11월 30호 시  영천장(永川場) 이리가고 저기가도 영천장 가면 다 만나지 잘 가는 말도 영천장 못 가는 말도 영천장 거기서 다 만나지 콩 팔러 왔던 할매 쌀 팔러 왔던 아제 먼저 일어서고 뒤에 남아도 만불사 납골당 가면 다 만나지 사랑으로 다투고 원망으로 사랑해도 거기서 다 만나 더는 말없이 얌전하지 큰스님 큰스님, 노스님, 큰소리로 부르지 마라. 뜰 앞에 삼백년 배롱보살 계시고 산신각 향나무거사 오백세 넘으셨다. 연못엔 부처님 길 밝히던 연꽃동자 뒷산 숲 참나무나한 팔만사천 묵언수행 중 동자야, 다들 웃으신다. 귓속말로 하려무나.  
246 쌀벌레를 잡으며 외1편/김영애 file
편집자
2673 2012-11-01
12.11월 30호 시  쌀벌레를 잡으며 김영애 무더운 여름날 쌀자루에 벌레가 꼼틀댄다 빛깔 수수한 날개를 달기 위해 몸을 비비고 살을 에이면서 고행의 길을 간다 넓다란 그릇에 부어놓고 손가락으로 정신없이 잡아내는데 도망가던 한 놈이 꼼지락 거리며 문자를 쓴다 ‘나도 쌀벌레, 너도 쌀을 먹고 사는 벌레’ 몇 번을 읽어봐도 그렇게만 읽힌다. 봄 매화나무 한 그루가 창백한 얼굴로 나오는 사람도 들어가는 사람도 없는 잠긴 대문 앞에서 긴 잠에 빠졌다 열차의 긴 정적 트럭의 털털거림 아무것도 눈 감은 매화나무를 깨우지 못했다 어디서 왔을까 작은 새 한 마리가 바람을 물고와 가녀린 발로 가지 끝에 앉아서 모둠발로 뱅뱅 뛰어가며 바람을 꼭꼭 찍어 넣더니 매화만 알아듣는 긴 언어를 종알거렸다 봐줄 이 없어서 웃지도 못했다며 그제야 봄새 앞에서 감았던 눈을 뜨고 입술을 배시시 연다 골목이 출렁인다 머지않아 대문 열리는 소리도 날 것 같다. 여영 김영애 경북 영주 한맥문학 2005년11월호 신인상. 시조문학 2007년 가을호 신인상한국문인협회, 경북문인협회회 영주지부 회원한국시조시인협회. 월하시조문학회. 시조문학문우회원 .영주시조. 한국시조사랑운동본부저서 시조집: 별이 되는 꽃. 초승달에 걸린 반지, 쪽빛 하늘 한 조각 수상.국제문화 예술상.허난설헌 문학상 .에피포트 문학상. 시조문학 제4회 좋은 작품집상 2012 시조문학 작품상 연락처 경북 영주시 휴천2동 642-111 9010-7232-8054)  
245 작은 것 하나도 감사하자 외1편/박규해 file
편집자
2821 2012-11-01
12.11월 30호 시  작은 것 하나도 감사하자 時調 翠松 朴 圭 海 따뜻한 마음이 전해올 때 큰 기쁨 아픈 마음 달래주며 위로하여 주는 마음 그 마음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이 로구나 감사하는 마음이 주렁주렁 영글면 서로서로 상부상조 하는 세상 된다면 세상은 더 좋은 일이 번져가게 되겠지 나를 잊게 만든 마음 고마움이 존재하고 정으로 사는 세상 더 커지면 좋겠고 마음 속 평생 감사한 마음들이 있겠다 노인과 노을 강가에 앉은 노인 지는 해를 바라보고 시간흐름 세월흐름 가는 것을 보면서 세월이 빠져 가는 것 허허롭게 웃는다 강물이 유유히 아무 말도 없이 흐르고 노을빛에 물들었는지 강물도 붉으스레 노인의 허전한 마음 강물 따라 가고 있네 불빛들이 하나 둘 일제히 일어서니 긴 한숨 꺾어들고 지팡이에 의존하며 집으로 걸어가면서 깊은 생각 잠긴다 박 규 해 프로필 ㅇ 아호 : 취송(翠松) ㅇ 고향 : 경북 상주 ㅇ 단국대학교 국어국문과 졸 ㅇ 사랑․ 소설계사 기자 근무 ㅇ 함창중고등학교 근무 정년퇴임 ㅇ 현대시조 “바램”으로 천료(97) ㅇ 97 ~새 시대시조(계간) 출품 외 9곳 문예지 출품 ㅇ 시조집 : 희망의 횃불. 찔레꽃이 피면 ㅇ 수상 : 시와 수상문학 특별상 ㅇ 동인지: 시인파라다이스 외 50권 ㅇ 현재 : 한국 문인 협회 경북 지회 회원. 현대시조 인단 회원. 한울문학 회원. 창작과 의식동인. 만다라 문학 회원. 파라문예회원. 시와 수상문학. 국보문학 회원. 한비문학 회원. 시와 늪 문학 회원. 시와 글 사랑 회원 ㅇ 주소 : 경북 상주시 복룡동 2길 15 대신 아파트 301호 휴대011-9382-3375  
244 붉은 신호등 외 1편/고희림
편집자
2684 2012-11-01
12.11월 30호 시  붉은 신호등 \死後에도 그 존재가 확실한 용도의 돼지나 소 막창같이 질긴, 저 붉은 신호등의 붉음 앞에서 멈추고 멈추어 온 나는 지금도 멈춘다 저 붉은 신호등의 붉은 색은 다만 나를 잠깐 멈추게 하는 가식인가 내가 진짜 멈추는 이유는 신호등의 저 붉은 색이 질서를 아름답게 만든다는 환상 때문인가 그 무렵, 흙의 수염인 앞마당 잔디를 야금야금 가로질렀겠다 그 옛날 소 꼬랑지 벽을 문지르던 자리쯤 서서 팔짱을 끼자말자 눈높 이의 남산너머로 유월 석양이 한순간에 꼴까닥! 누군가 파심은 채송화와 매발톱 흰 쪽문 아래의 애기똥풀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얼어 붙었다 석양이 우리와는 확연히 다 른 존재라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엷은 술 냄새에 빈혈기마저 화악 끼치던 석양은 온 몸이 한 개의 등신불인 그것이 퉁 퉁 붓는다 그리고 특유의 이별식으로 우릴 새 피의 공급처 혹은 쓸쓸한 강가로 데려갔으니 꽃같이 죽은 아이 감꽃처럼 꽃 맺지 못할 송화처럼 분하고 부운 젖, 그 강에 가면 언어가 가난해지고 반대가 자유이다 기다리지 않고 기다리지 않아도 한 개도 없는 전화번호에 도시가 필요없다 너는 한 개의 강으로 누워 우리는 네 곁에서 무당꽃처럼 잠들고 준비한 한 필의 무명천같은 손길로 일상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한 접시의 박나물처럼 남기지 않을 짧은 순간을 오래 대접하는 너는 바로 하나의 희귀한 미련이며 하나의 속속한 정 유월이 자리해* 유감없이 낮은 석양은 강물따라 살아생전 끝낼 수 없는 장편, ‘소신공양’이 되었다 토란의 넓은 귀에 고인 이슬조차 생사의 눈물 구구절절 하였다 이 무렵, 온 나라는 강을 앓고 울음소리 끊이지 않았다 *인용구  
243 창/이병순 file
편집자
2794 2012-10-02
12.11월 30호 소설  창(窓) 이 병 순 기타를 튕길 줄 알지만 걸터앉을 창턱이 없었던 내게 창은 마냥 스테인드글라스 사탕 빛 정서는 아니었다. 남녀 한 쌍이 별 박힌 하늘을 바라보며 와인 잔을 들고 있거나 누군가 열어젖힌 창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창틀에 기대선 모습들은 창 아래서 연인을 향해 세레나데를 부르는 영화 장면처럼 실감나지 않은 이미지였다. 내게 창은 알맞은 양분의 햇빛을 관통시키는 프리즘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창은 프리즘도 사탕 빛 정서도 아닌 틀과 유리로 이루어진 건축구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깨달았다. 오전에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텅 빈 창틀을 언제 다 메울까 아득했다. 깨진 유리조각이 창틀 곳곳에 끼어 있었다. 나는 코팅장갑을 끼고 창틀이나 베란다 바닥의 유리조각부터 치웠다. 거실 베란다와 바깥 베란다 유리 모두 깨진 채 창틀이 뚫려 있어 28 층은 공중에 붕 뜬 것 같았다. 깨진 유리조각이 든 커다란 쓰레기봉투들이 베란다 한쪽 통로를 막고 있어서 작업하는데 거치적거렸다. 쓰레기봉투를 찢고나온 유리조각은 두껍고 날카로웠다. 과장을 따라다닌 지 열 달가량 동안 같은 집을 다섯 번 오기는 처음이다. A/S를 십 년 넘게 해 온 과장도 같은 집을 이렇게 자주 오기는 처음이며 새시에 묻은 가느다란 선 한 줄 갖고 보수수리를 신청하는 집도 이 집이 처음이라고 한다. 현관 입구에 있는 화장실 앞 마루판이 컵 받침 만하게 팬 것은 창틀 새시의 가느다란 줄에 비해 큰 하자인데도 집 주인 여자는 보수공사 신청을 하지 않았는지 올 때마다 마루판은 팬 채 그대로다. 과장 말 대로 여자는 창에만 붙어 있는지도 모른다. 사다리에 올라선 과장이 드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콧잔등으로 흘러내리는 안경을 밀어 올린다. 나는 잡았던 창틀을 벽에 기대세우고 과장한테 드릴을 건넨다. 치이잉. 과장이 드릴로 문고리를 겨누자 짧은 비명이 터진다. 과장이 입은 연회색 작업복의 왼쪽 가슴에는 ‘창에 대한 긴 생각’의 본사 로고가 붉게 박혀 있고 여기저기 허연 실리콘이 묻어 있다. 재바른 손놀림과 서두르지 않는 과장의 행동에서 오랫동안 현장을 누벼온 관록이 엿보인다. 과장이 문고리를 딸깍딸깍 매만지는 소리 사이로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쇼 호스트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자는 과장과 내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짜증어린 말투를 쏟아내던 때와 달리 오늘은 조용한 편이다. 이 집에 처음 불려 왔을 때는 창틀이 헐거워 유리가 흔들거렸다. 창틀을 조이고 실리콘을 먹여 틀에 유리를 고정시켜 주었다. 두 번 째 왔을 때는 문짝 손잡이 부분에 거뭇한 선이 쳐져 있어 제거해 주었다. 세 번 째 왔을 때는 베란다 맨 안쪽 새시문짝의 밑면에 못 자국 만하게 꺼진 홈이 있어 열풍기를 불어넣어 평평하게 펴주었다. 그것은 어지간한 눈썰미가 아니면 찾아내기 힘든 하자였다. 네 번 째 찾아온 그저께는 안쪽과 바깥쪽 베란다 유리문 모두 박살이 나 있었다. 관리사무실을 거치지 않고 여자 남편이 과장한테 전화를 했을 때부터 낌새를 알아차렸어야 했다. 서비스센터에 접수되지 않은 하자보수는 굳이 과장이 해주지 않아도 되지만 요즘 계속 이 단지를 돌고 있던 중이어서 우리는 지나는 길에 이 집을 들렀다. 깨진 유리는 A/S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과장의 말이 채 나가기도 전에 여자 남편은 다급하게 말을 뱉었다. 업무 중에 유리 때문에 잠시 들렀다는 그의 말투는 사정조였다. “동네에 있는 유리 집에서 맞추는 것보다 이왕이면 이 아파트 시공업체에서 담당하는 유리가 낫지 않을까 해서 전화했습니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여자는 그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샌들을 신은 발로 유리파편을 휘저었다. 유리조각에 여자의 발길이 닿자 짜랑짜랑 소리가 났다. 유리조각에 찍힌 거실 마루판 여기저기는 생채기처럼 긁혀 있었다. “일단 유리조각부터 다 치우시고 다시 연락하십시오.” 과장의 말투는 차분하고 단호했다. 유리 파편을 발로 살살 밀어내며 딛던 과장의 모습은 현장 감식을 끝낸 노련한 형사 같았다. 공구함을 들고 과장 뒤를 따라 나가던 나도 조심스레 바닥을 디뎠다. 아령으로 유리창을 향해 던졌다지요, 아마. 오늘 오전에 과장과 내가 유리를 맞잡고 승강기에 타는 것을 본 경비가 몸서리치는 시늉을 하며 중얼거렸다. 경비는 우리가 유리를 맞잡고 경비실 앞을 지날 때마다 한 마디씩 보탰다. 여자의 남편은 지방의 고위공무원이며 며칠에 한 번씩 집에 들렀다. 여자가 베란다에 뛰어내리려는 것을 그녀의 남편과 아들이 붙들었다는 말을 하며 경비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파트를 돌아다니다보면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저절로 귀에 들어왔다. 창틀에 끼운 창은 문짝끼리 딱 맞물려 있다. 과장은 사다리에 한 발을 땅에 내리고 창틀 롤러 쪽을 훑어본다. 문이 쓰륵쓰륵 열고 닫힐 때마다 우기에 젖은 텁텁한 바람이 들쳐든다. 어둑한 숲이 반사된 창유리에 드릴을 쥔 과장의 옆모습이 흐릿하게 비친다. 어디선가 창문 닫는 소리가 탁탁 들린다. 밤을 맞는 소리는 창문 닫는 소리부터 시작된다. 일곱 시가 조금 지나 있다. 여느 때 같으면 A/S를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도로 위에 있거나 사무실에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을 시간이다. 집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수진과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다보면 어느새 내릴 때가 되곤 했다. 수진은 요즘 학습지 회원 수가 많이 늘어 집에 도착하면 거의 열 한 시라고 했다. 나는 수진을 만나기 위해 도서관에 갔지만 이제 수진은 도서관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수진은 교직 임용고시 준비 때문에 주말이면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했다. 몇 달 전부터 수진은 임용고시에 대한 불안감이나 시험을 대비하는 새로운 각오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두 번이나 연거푸 임용고시 시험에 낙방한 수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수진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것뿐이라 여겼었다. 수진이 학습지 지국장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내 문자메시지에 답하는 걸 소홀히 했고 내 전화를 잘 받지 않았다. 그것은 도서관에도 나타나지 않은 시기와 비슷했다. 나는 답답한 마음을 친구 몇에게 털어놓았다. 친구들은 오래된 연인들이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수진이 제 발로 떠나는 걸 고맙게 여겨라 했다. “자, 여기.” 과장은 창의 위 칸 손잡이를 잡으며 내게 드릴을 건넨다. 텅 빈 창틀은 번들거리는 유리로 다 메워졌다. 일머리를 훤히 꿰고 있는 과장이 아니라면 하루 만에 끝내기는 힘든 작업이었다. 과장은 내가 보조를 착착 잘 맞춰줘서 일이 순조롭게 끝난다고 하지만 나는 고작 유리나 창틀을 맞잡아주거나 창틀에 매달린 과장에게 연장을 건네주는 일밖에 하지 않았다. 내가 복학을 하고 회사를 그만 두면 누가 과장보조로 나설 것인지 과장은 벌써 걱정이었다. 2학기에 복학을 하려면 여기서의 아르바이트는 보름가량이면 끝이다. 회사에 처음 올 때는 생산 현장의 바쁜 일손을 거드는 게 내 일이었다. 생산 라인뿐만 아니라 포장이나 래핑까지 각 팀마다 일손이 모자라 과장 보조로 외근 나올 만한 사람은 마땅히 없었다. 회사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람은 나뿐이었다. 낮은 임금에 비해 공단지역 주변의 집세는 비싼 편이라 일꾼 구하기는 어려웠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아니면 물량을 제대로 출하해내지 못할 만큼 일손은 귀했다. 본사에서 지시하는 주문량과 주문날짜를 맞추려면 생산 현장은 늘 밤 9 시까지 기계를 가동시켜야 했다. 나는 생산품 작업지를 뽑아 복사를 해 현장에 보내고 공문과 팩스를 챙겨 본부장한테 보고하고 남는 시간은 래핑이나 포장 실을 오가며 모자라는 일손을 거들어야 했다. 래핑실에 늘린 체리 빛이나 원목 색을 입혀놓은 창틀을 보고 있으면 창틀에 비칠 풍경들이 머리에 스쳤다. 본사 광고모델인 여배우가 창을 어루만지며 ‘창에 대한 긴 생각은 당신에 대한 긴 생각이에요’라고 속삭이는 것을 들었을 때는 군 내무반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대기업에서 새시문짝에까지 손을 뻗치는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을 뿐, 창에 대한 긴 생각을 하고 있기에는 생각할 게 너무 많은 제대말년이었다. 인문학부를 졸업해서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것을 몰라서 입학한 것은 아니었지만 제대말년쯤 되니 그런 공부에 대한 회의감부터 들었다. 복학하지 않고 공무원채용시험 대비를 착실히 하는 게 실속 있겠다는 것과, 복학을 해 학교 다니면서 언론고시공채 준비를 할까하는 생각들이 오가기도 했고 무엇보다 평생 엄마 아버지가 꾸려왔던 철물점을 비워줘야 한다는 게 마음이 무거웠다. 집 주인이 집을 헐어 5 층짜리 건물을 지어 새로 임대를 하겠다고 했지만 새 건물에 철물점을 임대하는 가격은 비싸서 다른 곳을 알아봐야 했다. 제대한 지 며칠 만에 나는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군에 가기 전에는 독서실이 내 거처였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밥 먹을 때 말고는 대부분을 집 근처에 있는 독서실에서 생활했다. 좀 더 빨리 독서실을 거처로 삼아야 했었다. 고등학생이면 부모가 단칸방에서 다 큰 아들과 함께 자야한다는 게 얼마나 커다란 고역인가 알 만한 때였다. 창문으로 어두운 색 도배지로 모조리 가린 독서실이었지만 그곳이 우리 집보다 편했다. 커튼을 드리워 엄마 아버지 방과 내 방을 나누었지만 커튼은 휘장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커튼의 벌어진 틈으로 보이는 거울에는 엄마 아버지가 다 보였다. 실금 같은 커튼의 틈이라도 거울로 보면 엄마 아버지 모습이 훤히 보였다. 자라면서 나는 커튼 사이로 벌어진 틈을 보지 않으려고 커튼을 등지고 벽을 향해 눕기 시작했다. 엄마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조금만 기다리면 창이 넓고 전망이 트인 곳에 내 방을 멋지게 꾸며주겠다는 말을 자주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보였다. 대형마트에서 공구나 철물을 팔기 시작하면서 철물점을 찾는 사람들은 나날이 줄었다. 겨우 세 식구 호구지책 하기에도 급급했다. 어릴 때부터 농짝에 창이 가려져있어 나는 창이라는 개념을 지니지 못했다. 다만 부모가 전망이 트인 창을 들먹일 때마다 창이 삶의 핵심 부품처럼 귀에 와 박혔다. 철물점 입구에는 개 줄이 주렴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바닥에는 똬리를 틀어 둘둘 말린 고무호스가 늘려있고 문 옆에는 삼지창처럼 마대가 버티고 있었다. 손님이 찾는 물건을 꺼내려면 선반에서 먼지가 풀풀 날렸다. 가게에 앉아 밖을 바라보면 호프집 간판 너머 역광이 비쳐 흘렀다. 역광은 우리 가게 유리문을 비추었고 그 빛은 호프집 유리에 되비쳤다. 유리끼리 반사된 빛이 우리 집에 어른거린 유일한 빛이었다. 넌 우리의 빛이다. 제대를 하던 날 아버지가 내 어깨를 두들기며 소주잔을 건네며 했던 말이다. 그것은 연기에 서툰 배우가 겨우 외워서 뱉는 대사 같았다. 빛이라는 말이 그토록 무겁게 들리기는 처음이었다. 엄마는 상추에 삼겹살을 싸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육십 살도 채 되지 않은 부모가 내 눈엔 노인으로 보였고 그들을 컴컴한 동굴에서 벗어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날 나는 삼겹살을 오래 씹었고 소주는 급하게 들이켰다. “터치펜으로 여기 좀.” 과장은 새로 끼운 문짝의 흠을 손가락으로 짚는다. 새시 문짝에 난 작은 흠집은 터치펜으로 문지르면 감쪽같다. 흰색 래핑에 얼룩을 지우는 도구가 물파스라는 걸 아는 입주민은 거의 없다. 그들은 로고가 찍힌 작업복과 덜컥거리는 공구함을 믿음직스러워 했다. “알았다니까요? 글쎄 잘 끼워졌어요. 네? 어디 걔만 고3인가? 고3, 고3 그만해요. 고3 엄마가 뭔 죄라도 지었어요? 일단 알았어요.” 여자의 목소리가 베란다로 흘러나온다. 우리가 처음 왔을 때처럼 다소 앙칼진 목소리다. G그룹이라는 대 기업에서 만든 창이 이게 뭐예요? 내가 마음만 먹으면 유리가 쑥 빠지겠어, 정말. 여자는 창틀에 벗겨진 실리콘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툴툴댔다. 우리 회사는 G그룹이 아니라 G그룹의 하청업체라는 말까지 여자한테 할 필요는 없었다. 과장은 여자가 가리킨 곳 말고도 흠집을 샅샅이 찾아 실리콘을 먹였다. 나는 커팅 칼로 창틀에 묻은 실리콘을 긁어냈다. 여자가 덜 마른 실리콘을 자꾸 손가락으로 문질러대는 바람에 짧게 끝날 일을 조금 지체했던 날이었다. 과장은 주스 잔에 빠진 날벌레를 손가락으로 건져내고 주스를 꿀꺽꿀꺽 마신다. 바지 뒷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온다. 스팸이다. 핸드폰 바탕 창에 수진이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웃는 모습이 떠 있다. 제대하고 얼마 있다 수진과 함께 튤립축제에 갔다가 찍은 사진이다. 부재중 세 통 중에 두 통은 엄마한테 온 것이다. 끼니 거르지 말라는 똑 같은 말을 엄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했다. 나는 더 이상 수진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수진의 핸드폰에 표시된 부재중 내 이름이 문자메시라면 문자메시지일 것이다. 나는 창틀 홈에 유리 모서리를 끼우고 손바닥을 탁탁 쳐보지만 과장처럼 단박에 쏙 들어가지 않는다. 과장이 하는 게 쉬워보였던 것은 과장이 문을 어루만지는 게 아니라 문짝을 갖고 노는 것처럼 비쳤기 때문이었다. 과장이 내 반대편 문짝을 잡고 창틀을 기울여 유리를 톡톡 치니 유리는 창틀에 쏙 들어간다. 과장이 한쪽을 훌렁 들자 맞잡은 내 팔이 문짝에 딸려가는 것 같다. 창틀과 유리가 축축하다. 는개인지 안개인지 모르겠다. 아침에 출근준비를 하면서 텔레비전에서 밤부터 비가 온다는 소리를 듣고도 나는 고시원의 창을 닫지 않고 나왔다. 그것은 창이라기보다 숨구멍 같은 쪽창이었다. 그 구멍으로 거미가 기어오르거나 날벌레들이 날아 들어오곤 했지만 요즘처럼 더운 때는 늘 열어두었다. 쪽창으로 팔을 뻗으면 옆 고시원 벽이 닿기 때문에 빗발이 들이칠 틈도 없을 터였다. 싼 월세에 비해 교통이 편리하고 주위의 싼 밥집도 많아 다른 곳으로 옮길 이유는 굳이 없었다. 간혹 고시원 주변의 편의점 앞에 놓인 간이 테이블에 나와 같은 고시원에 묵는 사람들이 맥주를 들이켜며 앉아 있곤 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나를 잡고 말을 했다. 갑갑해서 나왔슴다. 우리 고시원 말이오, 다 좋은데 창문이 좀 넓었으면 얼마나 좋겠소. 나는 쪽창이라도 좋으니 앞에 가리는 벽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답해 주었다. “앞이 트였다고 모두 전망인 것은 아니라고. 김 군도 아파트를 많이 다녀봐서 알겠지만 창 앞에 볼 게 뭐 있었어? 전망, 전망들 하지만 정작 전망 좋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전망이라 하지 않지. 요새 사람들, 세계로 어디로 다니면서 좋은 것은 다 보고 사는데 뭘 더 보고 싶겠어. 사람들이 넓은 창을 원하는 것은 뭘 보겠다는 뜻이 아니라 누가 저들을 봐주기를 바라는 거지.” 얼마 전 이 아파트 109동에서 우울증을 앓던 중년 남자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이야기는 입주민들 사이에 쉬쉬하던 이야깃거리였다. 과장은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베란다 창으로 뛰어내린 이야기는 또 언급하고 싶지도 않은 눈치였다. 좀 다른 방법으로 죽든가 하지, 참. 과장은 라디오볼륨을 더 높이고 가속기를 조금 더 세게 밟았다. 차창으로 바람이 펄럭펄럭 들쳐들었지만 나는 창을 쑥 내렸다. 과장의 말에 창밖이 절벽처럼 느껴져 섬쩍지근했지만 창이란 열어젖히는 맛이라는 게 창에 대한 나의 간명한 생각이었다. 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버스를 탔을 때 나는 창가에 앉아 바깥 풍경에 눈길을 주었다. 창으로 스치는 풍경에 눈길을 주고 있으니 내무반과 연병장을 누볐던 지난 시간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행군 때 발바닥이 갈라지는 듯한 고통과 특공훈련 때 무술 연습을 하던 것과 공수훈련 때 낙하하는 연습을 하던 것 등 힘들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시간만 흐르면 모든 게 끝이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그러나 제대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자 답답했다. 창이라도 확 열어젖히고 싶었지만 내가 탄 고속버스는 창을 열 수 없게 되어있었다. 유리는 차고 단단한 벽이었다. 접촉되지 않는 바깥 공기는 풍경이 아니라 감질 나는 미끼였다. 아파트도 창 광고와 다름없이 풍경을 미끼로 삼았다. 사람들이 모두 창 앞을 서성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아파트 분양 광고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베란다 창 앞에 선 광고 속의 여자는 펄럭이는 흰 커튼자락을 살포시 거머쥐며 속삭였다. 나는 ‘창밖은 햇살’에서 살아요. 아파트 광고인지 창 광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다니다보면 전망이 그럴싸한 곳이 많았다. 강줄기와 억새 숲이 보이는 아파트들, 구불구불한 기찻길이 펼쳐진 산 중턱의 빌라들, 바다가 훤히 보이는 마린시티의 타워들, 벽의 디귿자가 유리로 된 전원주택에 다녀온 날이면 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엄마 아버지의 골방이 떠올랐다. 엄마 아버지는 이사하면서 받은 전세금으로 예전에 받은 내 학자금 대출금을 갚아버렸다. 나머지 돈으로 집을 구하려면 전보다 더 나을 수는 없었다. 옮긴 철물점은 건물이 낡아 비가 많이 오면 벽에 물이 뱄고 창 앞에는 술 상자들이 쟁여져 있었다. 주점을 하는 옆집의 자지레한 물건들은 모두 뒷마당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둡고 습진 엄마 아버지의 방을 생각하면 내 마음은 눅눅했다. 유리에 빛이 달궈진 것만 보면 마음을 그 위에 올려놓고 싶었다. 가끔 사무실에서 복사물을 복사하기 전에 네모난 유리에 나를 비춰보았다. 복사기 유리 밑에 깔린 어둠이 투명한 거울이 되어주었다. 나는 거기에 비친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턱밑의 뾰루지도 어깨의 툭툭한 살집도 제대하고 나서 생긴 변화였다. 복사기의 검은 유리는 우물 같았다. 아무런 특징 없는 스물다섯 살의 희멀건 얼굴이 검은 우물에 풍덩 빠져 있었다. 넌 우리의 빛이다. 아버지의 그 말은 ‘우린 너의 빚이다’라는 말로 울려 퍼졌다. 우리 조금 떨어져 있어 보기로 해. 떨어져 있다 보면 뭔가 좋은 해결책이 있을 거야. 스물다섯 살의 여자에게 동갑나기 예비복학생 연인이 어떤 존재인지 떨어져 있지 않아도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 기계공학과도 졸업해 봐야 어차피 기름밥 먹어. 기계공학과가 바로 공돌이를 배출하는 과 아니야? 너 복학하지 말고 그 회사에 말뚝 박아. 공대 다니는 친구의 말이었다. 전공을 살려 취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정상적인 월급쟁이를 해서 평균적인 생활을 누리지도 못한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조바심이 약간 사라지곤 했다. 나는 우물을 휘젓고 싶어 복사기 전원을 켰다. 드르륵거리는 렌즈 조절기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시작’이라는 단추에 푸른 불빛이 들어오자 나는 복사기 뚜껑을 들고 유리판에 얼굴을 대고 버튼을 눌렀다. 위이잉 하고 복사기가 가동되면서 빛이 번쩍 터졌다. 눈이 부셨다. 옆모습도 찍고 손바닥도 찍었다. 용지 배출구로 빠져나온 비 포 용지는 검은 색이었다. 뭉텅 빨려 들어간 빛은 흔적도 없었다. 시커먼 용지를 꾸깃꾸깃 접어서 쓰레기통에 넣는데 본부장이 인터폰으로 나를 불렀다. “할 일이 없나? 저것 보라고, 본사에서 막 부려놓은 자재를 실장 혼자서 자재실에 옮기고 있다구. 어서 가서 자네가 맡아하게.” 본부장이 가리킨 곳은 벽 모퉁이에 달린 CC카메라였다. 거기에는 다섯 개의 CC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자재실, 래핑실, 포장실, 창틀 생산 라인, 사무실 등의 모니터에 나타난 사람들의 움직임은 꿈틀거리는 아메바 같았다. 어깨에 멘 새시뭉치들을 자재실에 쟁여놓는 실장의 모습도 보였다. 자재과 박 반장이 자는 모습을 잡은 것도 CC카메라였다. 박 반장은 정상 업무를 마친 뒤 밤 열 두 시까지 경비를 서서 업무 외의 수당을 챙겨야 아이 셋 뒷바라지를 할 수 있다는 거였다. 잠이 모자라는 그는 점심을 일찍 먹고 자재실에 가서 자곤 했다. 점심시간이 끝난 줄도 모르고 계속 자던 그는 CC카메라에 잡히고 말았다. 그 뒤 회사 여기저기에는 CC카메라가 몇 대 설치되었고 본부장은 박 반장에게 경비 업무를 보지 못하게 했다. 박 반장은 얼마 있다 회사를 그만두었다. 박 반장이 그만 둔 뒤 현장의 생산량은 다른 때보다 더 많다는 말이 들렸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1 층에서 살았어요. 베란다에 방범창을 가린 거기는 감옥 같았어요.” 언제 왔는지 여자가 베란다 문턱 앞에 서서 중얼거린다. 여자는 거실 벽에 기대 세워진 가족사진 앞에 서 있다. 가족사진은 이 집에 올 때부터 안방 입구의 벽에 세워져 있었다. 사진 속의 여자는 웨이브 진 단발머리에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다. 안경을 쓴 여자 남편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다.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아들은 여자 옆에 앉아 있다. 저때의 여자는 베란다 창가에 놓인 티 테이블에 앉아 남편과 찻잔을 기울였을지도 모른다. 계절마다 커튼을 바꿔 달고 그 앞에 예쁜 꽃병을 놓았을지도 모른다. 창 앞에 서성거리는 것만으로 행복했을 시절이 분명 여자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우울증은 남 얘기인줄 알았을 것이다. “이곳으로 이사 오고부터는 덜 마른 옷을 입은 것처럼 몸에 젖은 습기가 기분 나빠. 아저씨, 다른 아파트들도 이래요?” 베란다 안쪽에 있는 과장은 여자 말을 듣지 못한 것 같다. “이 아파트는 강을 끼고 있는데다 오늘 날씨까지 이러니 더 그렇겠지요. 이 아파트 25 층 이상에 사는 입주민들 중 빨래가 잘 마르지 않는다고 하는 집이 더러 있더라고요. 안개가 걸쳐지는 지점이라서 그러던데요.” 나는 그동안 보고 들은 깜냥에서 아는 체 했다. 여자는 우리를 볼 때마다 이사 온 이곳이 싫다는 불만을 나타냈다. 변기와 세면대가 모델하우스에서 본 것과 다르다든가 지하주차장에 고인 빗물이 웅덩이 같다는 말은 그렇다 쳐도 숲에 바바리맨이 숨어있다는 말을 할 때 여자는 꼭 여중생 같았다. 저 숲에 바바리맨이 숨어 있어요. 숨어 있다가 으쓱할 무렵에 아파트 뒷길에 나타나 여자들 앞에서 바바리자락을 젖힌다더라고요. 바바리맨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면서 호기심이 도사린 말투였다. 바바리맨이 바바리자락을 펼쳤을 때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면 그는 바바리 자락을 펼치지 않을 걸? 바바리 자락을 펼치는 순간, 괴성을 지르며 달아나는 여자가 있어야 그가 재미를 느끼겠지. 김 군은 폭우가 쏟아지는 높은 산봉우리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외로울 때가 없었나? 아마 처음부터 바바리맨으로 타고난 사람은 없을 거야. 모든 것을 창과 연결 지어 이야기하는 과장의 말이 재미있었다. 그때 차창 너머로 바라보이는 아파트 창들 모두가 바바리자락처럼 보였다. “아, 연락드린다는 게 깜빡 했네요. 여기서 마치면 바로 가겠습니다. 사모님이 도착하는 시간과 비슷하게 이곳 일도 마쳐질 것 같습니다. 예, 있다 뵙죠.” 맞벌이하는 입주자들의 하자보수 수리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이 퇴근한 뒤 찾아야 했다. 과장이 받은 전화는 며칠 전에 접수된 105동의 롤러 교환 건일 터였다. 밤 업무는 주로 과장 혼자 했다. 먼저 퇴근하는 내가 미안해하자 과장은 아무도 없는 빈집에 들어가기 싫어 일부러 밤일을 만드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말고 나 먼저 퇴근하라고 했다. 빈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말을 할 때마다 나는 과장과 결혼할 뻔 했다는 여자가 궁금했지만 물을 용기는 없었다. 혼자 빈 집에 들어서는 마음은 과장이라고 나와 다르지는 않은 것 같았다. 두 달 전쯤 회사 회식 때 나는 술을 좀 마셨다. 여느 때는 회식자리에 끼지 않거나 끼더라도 나는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늦게 시작한 회식자리였기 때문에 다음 날 아침 여덟 시까지 출근하려면 2차까지 갈 여유는 없었다. 더러 몇 사람은 2차를 가는 듯했지만 과장과 나는 자리를 빠져나왔다. 나는 과장이 자기 집에 가서 자고 다음날 함께 출근하자는 말에 따랐다. 과장 집은 원룸이었지만 베란다와 넓은 창도 있었다. 블라인드가 창을 가렸어도 공단지역이라 창밖 풍경은 짐작할 수 있었다. 창틀에 담배꽁초가 드문드문 끼어 있었고 베란다 한쪽에는 빈 소주병과 빈 맥주 캔이 수북했다. 입가심 해야지. 과장은 거실 바닥에 캔 맥주를 내려놓으며 텔레비전을 켰다. 우리는 텔레비전 마감뉴스에 눈길을 주면서 맥주 캔을 하나하나 비워냈다. 복학은 하라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학교를 다니면서 고민하고. 그날 과장도 대학교 2학년까지 마치고 군에 갔다가 제대를 한 뒤 복학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과장이 군에 가기 전에 사귀던 여자 얘기를 하는 바람에 나도 수진 얘기를 해버렸다. 그 아가씨가 김 군이 제대할 때까지 기다린 게 실수고, 김 군이 그 아가씨와 끝내지 않고 군에 간 것도 실수고. 과장은 알아듣기 어려운 알쏭달쏭한 말을 중얼거리며 소파 밑에 있던 무협지를 당겨 베고 누웠다. 잠든 과장의 얼굴 그 어디에도 커다란 창틀을 훌쩍 들어 올리던 기운 찬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새벽 한 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고 어두운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오렌지 빛 가로등이 희미했다. 그 빛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창에 엉겨 붙은 날벌레들이 꼼지락거렸다. 나는 수진에게 전화를 했다. 발신음이 떨어지자 이내 끊었다. 발신버튼을 눌렀다 끊었다 서너 번을 반복한 뒤 나는 바탕 화면에서 웃고 있는 수진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 뒤 나는 일을 마친 뒤 과장과 가끔 회사 부근의 피시방에서 'WAR ROCK'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윈도라는 영어자막이 뜨면서 퍼런색 화면이 떴다. 피시방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컴퓨터 창에 펼쳐진 장면과 대화를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화면을 보며 웃는 사람, 인상을 찌푸린 사람, 입술을 실그러뜨리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람 등 표정은 갖가지였다. 모두들 키보드를 다급하게 누르고 있었다. 나는 게임을 멈추고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나마나한 복학수속을 또 훑어보았다. 홈페이지 창 사진에는 대학생들이 책을 안고 활짝 웃으면서 본관 앞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모습들이 실려 있었다. 사진 속의 학생들은 나보다 몇 살 적을 뿐일 텐데 나는 그들보다 열 살 이상이나 더 먹어버린 느낌이었다. 아르바이트 일거리들을 훑어보았다. 시급을 많이 주는 곳은 여전히 치킨 배달원이었다. 복학을 한다는 것은 치킨 배달원이 된다는 뜻이었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과장의 창을 엿보았다. 과장의 창에는 ‘GAME OVER'라는 자막이 깜빡거렸고 과장은 의자에 기대 졸고 있었다. 컴퓨터의 알록달록한 화면은 충혈 된 눈동자 같았다. “영수증입니다.” 과장은 여자에게 창 설치대금 영수증을 내민다. "한 번 확인해 보시고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십시오, 그럼.” 과장은 접은 사다리를 옆구리에 끼고 현관을 향해 걷는다. 여자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고 거실 베란다 창틀을 잡고 서서 바깥을 바라본다. 어둠이 꽉 찬 창은 맑은 거울이다. 거기에는 과장의 뒷모습과 창턱을 딛고 선 여자의 모습과 공구함을 들고 두리번거리는 내 모습이 비친다. 여자는 베란다로 내려서서 창을 손으로 쓰윽 문지른다. 여자가 창에 다가갈수록 부스스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싸인 여자 얼굴이 또렷하게 비친다. 여자는 창밖에 서 있는 것 같다. 여자가 달그락거리며 갈고리를 만지는 소리가 창에 노크를 하는 것처럼 들린다. 여자가 창을 열자 빗소리가 세차게 들린다. 방충망 얼개 사이로 빗물이 들쳐드는데도 여자는 창 앞에서 꼼짝 않고 그대로 서 있다. 나는 실리콘 튜브와 커팅 칼을 주워 공구함에 챙겨 넣고 여자에게 인사말을 건넨다. 여자는 내 말을 듣지 못했는지 뒤돌아보지 않는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온다. 엄마다. 전화기를 귀에 대면서 현관문을 나온다. 빗줄기는 굵다. 아파트 뒤 공터에 주차된 차는 우리 트럭뿐이다. 나는 조수석 뒷자리에 공구함을 놓고 의자 레버를 당긴다. 과장은 트럭 시동을 걸어 둔 차창 앞으로 가 와이퍼를 들고 젖은 방문차량 스티커를 걷어낸다. 차창에 흐릿하게 비치는 과장의 얼굴에 창 앞에서 꼼짝하지 않던 방금 전의 여자 모습이 겹쳐진다. 창에만 붙어있는 사람은 여자만이 아닌 것 같다. 앞이 너무 어둡다. 나는 운전석으로 몸을 기울여 쌍 라이트를 켜준다.(끝) 부산 201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끌’로 당선  
242 꽃손/박종희 file
편집자
2721 2012-10-02
12.10월 29호 수필  꽃손 박종희 베란다에 가득 찬 볕살에 눈이 부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분으로 꽉 차있던 자리에 햇발이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같이 이름 있는 날 들어온 화분과 화원을 지날 때마다 사들인 화분이 오십 개가 넘었다. 아침저녁으로 화분을 들여다볼 때면 흐뭇했다. 그러나 예쁜 꽃을 보며 호사를 누리는 만큼 관리하는 것이 일이었다. 계절이 바뀔 때면 화분을 들여놓거나 분갈이하는 일이 어려웠다. 또, 추운 겨울에는 화초가 얼어 죽는 일도 있었다. 내 생활이 나태해지면 화초도 덩달아 게을러졌다. 이파리도 시들고 꽃도 피우지 않았다. 하나, 둘 말라비틀어지는 화초를 볼 때마다 화분정리를 해야겠다고 벼르다가 작정하고 베란다로 나섰다. 우선, 화분에 꽂혀있는 꽃손을 모두 뽑았다. 기린초와 베고니아, 수선화 등, 가늘고 여린 꽃나무가 쓰러질까 봐 세워놓은 꽃손이 제법 많았다. 플라스틱이나 철사로 된 것과 다급할 때 임시로 꽂아 쓴 나무젓가락도 눈에 띄었다. 그렇게 요긴하게 쓰이던 꽃손은 묶어 따로 두었다. 몇 차례 끙끙거리며 내다 놓은 화분을 지나가던 동네 아줌마들이 한개 두개씩 들고 갔다. 어떤 이는 나한테 화분을 가져가도 되겠느냐고 하더니 아예 열댓 개를 가져가는 이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 많던 화분이 순식간에 모두 없어졌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이 정말 신기했다. 요즘은 버리는 일이 더 큰 일이라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 고민스러웠는데, 뜻밖에도 쉽게 해결된 것이다. 옮기다 깨진 화분을 버리고 들어오며 나한테 쓸모없어진 물건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화분을 없애고 나니 새로운 공간이 생겼다. 학교에서 돌아온 딸애가 집 안이 훨씬 너르고 깨끗해 보인다고 좋아했다. 화초 때문에 속 태우는 나를 못마땅해하던 남편도 아주 잘했다고 했다. 서운해할 줄 알았던 두 사람이 좋아하니 스산하던 기분이 좀 나아졌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화초를 좋아했다. 친정 부모님도 꽃을 좋아하셨다. 자랄 때 집 마당에 꽃이 많아 우리 집을 꽃집이라고 했었다. 그래서 인지 길을 걷다 작은 풀꽃을 봐도 그냥 지나치질 못했다. 이른 봄, 돌 틈에 피는 제비꽃을 보면 집에 데려오고 싶어 안달했다. 그런 내 성격을 아는 남편이 가끔 종이컵에 제비꽃을 심어 내밀기도 했다. 화초를 좋아하다 보니 마치 화초가 집주인 같았다. 한 개, 두 개 늘어나던 화분이 거실을 넘어 안방까지 차지했다. 여름철엔 모기가 생겨 안 좋은 점도 있었지만, 꽃이 필 때면 참 좋았다. 눈을 뜨면 콧속으로 전해오는 향기와 황홀한 자태에 시름을 덜곤 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색색깔의 바이올렛은 한 번 피면 꽤 오래도록 지지 않았고, 까다롭게 구는 프리지어의 향기는 잠결에서도 매혹적이었다. 남편과 등산하다 가져온 야생 난도 일 년 내내 하얀 꽃을 피웠다. 아주 작고 가냘파 보기에도 안쓰러운 난이라 더 애정이 갔다. 거기에 질세라 제라늄과 시클라멘, 베고니아도 다투어 꽃을 피웠다. 어쩌다 한 번씩 물을 줘도 잘 크는 사랑 초와 기린 초, 영산홍, 공기 정화에 큰 몫을 하는 스마트 필름도 오래도록 정이 들었다. 다육 식물도 서른 개가 넘었다. 키우기 쉬워 주부들한테 인기 있는 다육선인장을 한꺼번에 서른 개나 사서 분갈이한 적이 있다. 아주 작아 앙증맞은 선인장을 화분에 옮겨 심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퇴근하고부터 시작한 분갈이가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화분을 선반에 올려놓고 나니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 덕분에 며칠을 호되게 앓았다. 딸애는 그렇게 미련스러운 엄마 때문에 화초가 보기 싫다고 했다. 화분을 정리하고 다시 며칠을 앓았다. 말이 오십 개지, 화분 오십 개 옮기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버릴 때는 몰랐는데 날이 갈수록 팔이며 어깨, 허리가 아파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내 살처럼 아끼던 화초를 버려야 했던 마음마저 같이 아팠다. 여기저기 파스를 붙였더니 꽃향기 대신 집안에 온통 파스 냄새가 진동했다. 이번에도 딸애는 매련스럽게 혼자 내다 버려 병이 났다고 툴툴거렸다. 화분을 버리고 나서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이유 없이 자주 베란다를 나가보는 일이다. 물을 줄 일도, 꽃 손을 세워 줄 일도 없는 데 말이다. 아마, 10년이 넘도록 몸에 배어 있던 일이라 그런가 보다. 이제 나는 여유로워졌다. 덕분에 화분에서 늘 벌쓰던 꽃손도 한가해졌다. 요즘은 나도 꽃손도 할 일 없는 ‘우두커니’가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아직도 화원을 지나는 길은 자유롭지 않다. 나도 모르게 눈길이 꽃으로 가고 자꾸 발걸음을 멈춘다. 언제쯤이면 이런 마음에서 자유로워지려는지 모르겠다.  약력 2000년 월간문학세계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 제3회 서울시 음식문화개선을 위한 전국수필공모전 대상수상 제5회 올해의 여성문학상 수상 제10회 전국시흥문학상 우수상 수상 외 다수 충북여성문인협회 부회장, 충북수필가협회 회원,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 한국작가회의 회원, 한국작가회의 충북지회 사무국장 충청일보, 중부매일 수필연재, 현 충북일보 ‘에세이 뜨락’ 연재 중 저서: 나와 너의 울림, 가리개 이메일: essay0228@hanmail.net  
241 숨은 꽃 외 1편/남태식 file
편집자
2608 2012-10-02
12.10월 29호 시  숨은 꽃 어떤 이에게 사랑은 벼랑 끝에 핀 꽃이다. 굳이 숨기지 않더라도 숨은 꽃이다. 사랑의 절정! 같은 말은 어울리지 않아라. 가슴 깊숙이 감춘 손은 오래 전에 자라기를 멈추었으니.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 사랑은 손닿을 수 없는 벼랑 끝의 영원히 손닿지 않는 꽃이다. 꽃과 새가 있는 집 1. 꽃들이 창백하다. 이 집에 든 꽃들이 창백하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이름만으로도 앞뒤 어떤 꾸밈말 없이 색깔만으로도 어울림만으로도 어여쁘고 빛나는 이름들이 이 집에 들어 창백하다. 하늘의 무지개 하늘의 별도 이 집에서는 경쟁이다! 전쟁이다! 모두, 창백하다. 2. 일요일, 봄맞이 산행을 갔다. 마른 나무껍질을 비집고 틘 어린 새들을 보았다. 무엇을 버티는 것일까, 날개를 한껏 오므린 어린 새들. 내려올 때 보니 올라갈 때보다 더 날개를 말며 웅크리고 있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뒤집힌 계절의 깡 추위와 오랜 가뭄이 이 어린 새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감옥이구나, 무덤이구나. 뒤이어 떠오르는 아이 생각. 0740 0730 0720 0710 0700 에서 2300 2310 2320 2330 2340 까지. 아이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학교에 갔다. 3. 나의 꽃잎, 너의 꽃잎, 나의 깃털, 너의 깃털, 하나만이라도, 창백한 꽃잎, 오므린 깃털, 그러하더라도, 하나만이라도, 내밀어, 내밀게 바꾸면, 자꾸 내밀고 또 내밀게 바꾸면, 처음엔 한 이파리 스치듯 지나는 가벼운 바람일지라도, 내민 꽃잎 내민 깃털 함께 꼭 잡게 바꾸면, 협력의 물결 고요하게 일렁이고, 공생의 바람 반란처럼 온 이파리 흔들어, 마침내 바뀌는 집, 마침내 따라 다 바뀌는 세상. 우선 하나만이라도, 내밀어, 내밀게 바꾸면, * 남 태 식 약력 : 2003년『리토피아』 등단, 시집 『속살 드러낸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내 슬픈 전설의 그 뱀』, 리토피아문학상 수상 주소 : 791-754 경북 포항시 북구 대안길 56, 103동 1408호(용흥동 우방타운) tsnbd@hanmail.net  
240 무화과無花果 외1편/최순섭 file
편집자
3708 2012-10-02
12.10월 29호 시  무화과無花果 꽃 피울 새 없이 아이들 낳고 세월만 흘렀다. 서러워 마라 지상의 나무들아 뼈마디 꺾이고 흐느끼는 것이 어디 너뿐인가 언제 우리 환한 꽃 한 번 피워 낸 적 있더냐 피웠어도 아주 잠시 세상에 왔다가기나 한 건지 꽃 목이 떨어지고 진물 고인 잔가지에 새순이 돋자 비로소 열리는 하늘 그래서 지상의 나무들은 모두가 無花果, 크든 작든 상처 끝에는 열매가 달렸다. 훈장처럼 달랑달랑 새하얀 구름젖 물고 달달한 숨 내쉬고 있다. 드럼통 화독 어둑새벽 인력시장에 서성이는 사람들 누군가 불씨하나 들고 와서 우두커니 서있는 드럼통에 불을 사른다. 온갖 잡동사니 어둠을 쏘시개로 활활 타오르는 화통 세상 사람들은 날아가는 불티를 보며 높이 올라갈수록 재수가 좋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모닥불은 식어가며 말한다. 내 비록 재가 될지라도 불씨는 남겨야지 눈감고 하얀 재가 되기를 기도한다. 화독보다 더 뜨거운 불씨 하나 하루 일자리 찾아 떠나는 사람을 위해 얼른 자리를 떠야 할 사람을 위해 드럼통은 뜨거운 몸을 이끌고 슬금슬금 먼저 자리를 뜬다. 최순섭 : 충남 대전 출생. 1978년<시밭>동인으로 작품활동시작. 2007년 <작가연대> 등단. 고양작가회 이사. 창작21작가회, 열린시조학회 회원. 주소 : 서울 은평구 불광동 미성아파트 5동 205호 전자주소 : css03@naver.com  
239 물방울 외1편/유준화 file
편집자
2595 2012-10-02
12.10월 29호 시 물방울 내가 잠시 당신의 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당신이 잠시 나의 속으로 들어올 수도 있겠군요 당신과 내가 잠깐 동안 하나가 될 수도 있고 당신과 내가 잠깐 동안 남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겠지요 내가 흘리는 한 방울 눈물이 당신의 마음 일 수도 있고 당신을 따라가는 내 마음이 금강물이 될 수도 있겠군요 우리 서로 흐름대로 있어도 천년을 같이 한다는 말이겠지요 학춤 오백원짜리 동전 두 개가 점퍼 주머니에서 엎어지고 잦혀지며 춤을 추었다 산마루에 해가 다리를 접을 때까지 나는 혼자서 경보 마라톤 선수처럼 숨 가쁘게 돌아다녔고 학 두 마리는 내 왼쪽 유두 위에서 포개졌다 떨어졌다 살을 비비며 날갯짓을 했다 한때는 화투장 솔광의 학처럼 두 다리를 세우고 목을 길게 늘여 입신양명을 꿈꾸며 소식을 기다린 적 있으나 그것은 물 건너 간 지 이미 오래되었지 불을 끄니 방안은 온통 칠흑의 바다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별빛도 잠들었다 들숨과 날숨들이 유빙처럼 떠도는 물결 위에서 한 평의 구명정에 올라 표류하는데 작은 불빛 하나가 멀리서 다가온다 등대 불빛인가 아니면 학의 머리인가 학은 승천 초월 장수 등을 의미한다 했는데 학의 등에 오르면 선계를 넘나든다 했는데 이 검은 속세의 바다에서 연뿌리처럼 선계의 꿈이라도 꾸는 것인가 노송처럼 늘 푸르지 못한 내 점퍼 주머니에서 학 두 마리는 내일 다시 춤판을 벌일 것이고 나는 갯벌을 돌아다니느라 바쁠 것이다 약력 -충남 공주생 -.2003 불교문예 -한국시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공주지부장 -.시집:초저녁 빗소리 울안에 서성대는 밤. 등 공저집 다수 -주소:공주시 옥룡동 중골4길 9-1호  
238 꽃무릇 외1편/고미숙 file
편집자
2610 2012-10-02
12.10월 29호 시  꽃무릇 고미숙 붉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종기처럼 박혀 있던 가슴앓이가 긴 목을 빼들고 소슬바람에 흔들리기도 하면서 길게 한숨 내뱉었다 나는 선운사 계곡 물속에서 울고 있는 일그러진 꽃이 나인 줄 모르고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이 몰려와 시린 몸속으로 흘러드는 물소리 노을 흠뻑 머금은 바다로 자라 파도의 손톱 날을 세우고 있는지 속이 붉게 파여 갔다 나를 만나고 있는 그도 내가 저인 줄 모르고 붉은 울음 터뜨리며 또 다른 나를 부르고 있었다 눈보라 속을 푸른 맨발로 걸으며 찾아 헤매던 이가 물거울 속에서 울고 있는 나인 줄 모르고 빨간 풍선 숨 가쁘게 날아오른 빨간 풍선이 0시의 가쁜 숨을 거두네 터지네 눈 내리네 마주 앉아 새벽을 맞자던 떡국을 먹자던 맹세가 거품의 날개를 달 줄이야! 조문객처럼 밀려드는 눈보라 가슴에 조등을 켜 달고 여자가 흰 국화꽃잎을 뜯어 하늘에 던지네 향기로워라 흩떨어지는 맹세들! 묘비명도 없이 바람의 골짝에 묻히네 전북 익산시 목천동 한스빌아파트 102동 1101호 sonagiiiii@hanmail.net  
237 가을을 팔다 외1편/이설야 file
편집자
2900 2012-10-02
12.10월 29호 시  가을을 팔다 이 설 야 서경주역에서 동대구행 무궁화호 열차를 탔다 열차 카페에 앉아 나는 준비해간 캔맥주를 마시고 열차는 성숙한 들판과 산의 풍경을 바퀴에 감으며 새로운 풍경들을 천천히 풀어놓으며 달린다 열차는 운치있는 시골마다 늘어선 가을을 도매금으로 사서 도회지 역과 사람들에게 내다 파는 것이다 이문이 많던 적던 별 상관 않고 가을을 꼭 사려는 사람들에게는 값을 깎아 달라면 깎아주기도 하고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외상도 준다 행선지인 동대구역을 빠져 나오니 역광장에 열차 두 량 분량의 벼가 줄을 맞춰 전시되어 있었다 열차가 벌써 가을을 팔아 놓은 것이다 아마, 올해는 코스모스가 제일 비쌀 것 같다 가슴통발 씨티 필름같은 가슴 뒷면을 오려내 통발 하나 만들었다 한번 들어온 것은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 새 통발을 감포 가을바다 파도의 경계 어디메쯤 매어놓고 전에 쳐 놓은 통발을 걷으니 등대 밤바다 수평선 뱃고동 집어등 소줏병 취기 등이 꼬리지느러미 하나씩을 달고 통발 속에서 파닥거리고 있었다 이만하면 괜찮은 수확이다 詩 두어 편 꺼리는 될 것 같다 오늘 놓은 통발에도 많은 詩語들이 잡히길 바라며 가을바다를 뒤돌아보며 또, 돌아보며 시멘트 견고한 회색 도시로 돌아와야만 했다 약력 1. 출생지: 경북 경주 출생 2. 본명: 이종문 3. 2007년 불교문예신인상 수상 4.시집: 수채화로 그린 여인 5. 현대불교문인협회 회원 나. 주소: 경주시 황성동 893 황성주공2차아파트 205동 201호 다. 전화번호: 라.메일 주소: moon2312@hanmail.net  
236 책임(責任) 외1편/김재수 file
편집자
2565 2012-08-31
12.09월 28호 수필 책임(責任) 김재수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신발을 새로 사 오시면 꼭 고무신 코에 빨간 색실로 수를 한 뜸 놓아 주셨습니다. 이런 일은 초등학교를 거의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고 심지어 중학생이 되어 운동화에까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표시를 해 주셨습니다. 새 신발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려는 할아버지의 배려였지만 난 빨갛게 수가 놓인 그 신발이 정말 싫었습니다. 우리 모두 경험이지만 그 시절엔 신발도 많이 잃어버렸지요. 학교에서 신발을 잃고 맨발로 터벅터벅 신작로를 걸어오는 날은 발바닥이 아픈 것 보다 어른들에게 들어야 할 꾸중이 무서워 가슴은 더 무거웠습니다. 이런 아픈 경험들을 가끔 생각나게 하는 곳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식당입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식당을 들어가다 보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이런 글귀가 보입니다. ‘신발 분실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 글귀를 보는 순간 솔직하게 그 식당을 나와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하긴 장례예식장에 갈 때는 ‘헌 구두를 신고 가라’는 우스갯말도 있으니 ‘아직도 우리 사회가 신발을 훔쳐가는 사회인가’ 하고 쓴 웃음을 웃곤 합니다. ‘책임(責任)’이란 ‘맡아서 행해야 할 의무나 임무’라고 사전적 의미는 말합니다. 흔히 ‘고객은 왕’, ‘고객은 황제’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찾아오는 고객의 신발은 식당이 당연히 책임져 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왕 같은 고객’을 향해 면전에서부터 ‘당신의 신발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은 고객을 우습게 보는 처사입니다. 오늘날 대부분 회사의 경영방침은 ‘고객중심’입니다. 다시 말해 고객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생존이 가능합니다. 이 고객중심이 관공서의 민원실에도 적용되어 고객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고객의 신발을 책임지지 않는 다는 것은 고객중심이 아니라 결국은 ‘주인중심’의 영업일뿐입니다. 물론 식당에도 할 말은 있습니다. 분실한 신발의 종류, 브랜드, 가격 등 주인으로서는 알지도 못하는 내용을 고객의 말만 듣고 보상해 주는 일도 쉽지는 않습니다. 어떤 가게는 분실한 신발을 보상했더니 이를 악용하는 고객도 있더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고객의 신발을 보상해 주었을 때 고객이 가지는 신뢰의 가치와 또한 보상으로 인한 금전적 손해 중 과연 어느 것이 유익한 것인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오늘도 저녁 시간에 식당엘 들렸습니다. 들어가는 정면 신발장 위에 어김없이 ‘신발 분실은 책임지지 않습니다.’라는 표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귀중한 신발은 주인에게 맡겨 주십시오. 잘 보관하겠습니다.’ 이렇게 멋진 표어가 신발장 위에 붙어있는 가게를 상상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일까요? 허허 글쎄요. 어떤 경매(競賣) 경매란 ‘물건을 사려는 사람이 여럿일 때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사람에게 파는 일’을 말합니다. 경매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고미술품이나 보석과 같은 고가의 물건도 있고 때로는 연예인, 스포츠 맨, 또는 사회적인 지위를 가진 이들이 평소 아끼는 물품들을 목적있는 행사에 내 놓았을 때 경매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어느 TV 에서는 훌륭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에게 적절한 경제적 이익을 보장 하고 기업은 아이디어를 경매를 통해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매는 사고 판 사람은 기쁨으로, 미처 사지 못한 이는 아쉬움으로, 이를 지켜보는 이들은 흥미로움으로 경매장을 가득 채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법원이나 집달관이 주도하여 동산이나 부동산을 경쟁하여 파는 경우, 물건을 싼값에 낙찰 받은 이는 기분 좋은 일이지만 파는 이의 입장에서는 가슴 아픈 현장일 수도 있지요. 그런데 참 아름다운 경매의 현장이 있었습니다. 이웃돕기 바자회가 열렸습니다. 원래는 경품으로 나온 자전거 6대를 주최 측에서 경매에 붙인 것입니다. 입담이 좋은 아마츄어 경매사가 가격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5만원부터 출발 한 가격이 조금씩 탄력을 붙이더니 이윽고 11만 5,000원까지 올라갔습니다. 첫 번의 자전거가 11만 5,000원에 팔렸습니다. 두 번째 자전거와 세 번 째는 12만원에 팔렸습니다. 이 경매를 지켜보는 손님들의 호기심도 점점 더해 갔습니다. 이윽고 마지막 자전거가 또 12만 5,000원에 팔렸습니다. 경매사는 모든 경매가 끝났음을 알렸습니다. 그 때입니다. 관중석에 앉아 있던 한 노인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아직 경매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자전거 한 대를 가져오겠습니다.” 모두들 의아한 눈으로 그를 봐라 봤습니다. 그는 어디선가 자신이 타고 다니던 중고 자전거를 번쩍 들어 무대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비록 중고 자전거지만 좋은 일에 쓰십시오.” 어쩌면 장난 끼 있는 노인의 표정을 살피던 경매사는 호기심으로 다시 경매를 시작했습니다. “ 자, 3만원부터 시작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중고 자전거는 마침내 6만원에 낙찰이 되었습니다. 자전거를 구입한 청년이 훌쩍 단상으로 뛰어 올라갔습니다. 그는 자전거를 끌고 한 바퀴 무대 위를 돌더니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자전거를 경매로 내어 주신 분에게 박수를 보내 주십시오. 비록 중고 자전거지만 좋은 일에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자전거는 저분의 유일한 교통수단임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분의 고마운 뜻은 마음으로 받고 이 자전거는 다시 그분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청년은 무대 위를 내려오더니 6만원에 구입한 자전거를 선뜻 그 어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터졌습니다. 가을 하늘이 놀랐는지 삽시간에 저녁놀을 비단처럼 펼쳐 내렸습니다. 이웃돕기 바자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아름다운 순간임을 모두들 가슴으로 마음껏 누리고 있었습니다. 상주아동문학회장. 낙서가 있는 골몰, 겨울 일기장, 농부와 풀꽃 동시집이 있고 사랑이 꽃피는 언덕, 하느님의 나들이 동화집과 트임과 터짐 산문집이 있음 khsal1145@hanmail.net 상주시 상산로 71-20 054-533-1115  
235 상상과 비밀/고창근 file [1]
편집자
3249 2012-08-31
12.09월 28호 소설  상상과 비밀 * 아내의 전화를 받았을 때, 발신자는 아내가 아니었다. 아내의 이름이 액정화면에 떴기에 그는 당연히 아내라 생각했는데 전화를 건 사람은 그가 사는 아파트 옆 동의 정미 엄마라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는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 했다. 그때 그는 세희와 함께 21년 된 위스키를 막 마시려던 참이었다. “어쩐 일이시죠?” 그의 건조한 말에 정미엄마는 잠시 말을 잇지 못 했다. “저, 현수 엄마가…… 우리 집에 있는데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두서없는 말이었다. 그는 위스키를 입에 털어놓고 혀로 한 바퀴 굴리다 꿀꺽 삼켰다. 식도에서 열이 확 났다. 세희는 잔에 술을 따랐다. “무슨 일이신지…….” 그는 샤워를 하고 속옷을 입지 않은 세희의 옷 밖으로 솟아오른 유두를 엄지와 검지로 만지작거렸다. “시내 공원에서…… 현수 엄마가…….” 정미 엄마는 말을 더듬거렸다. 그는 손을 세희의 남방 속으로 집어넣었다. 탱탱하고 탄력 있는 유방이 손 안 가득 들어왔다. “무슨 일인데요. 집사람 옆에 있어요?” 그는 유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화난 일이 있거나 못마땅한 일이 있을 때 하는 버릇이었다. 세희의 몸이 움찔거렸다. “있는데…… 전화 받을 형편이…… 못 돼요. 하여튼 빨리 집에 오셨으면…….”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정미 엄마의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휴대폰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공원에서…… 당했어요. 현수 엄마가.” “당하다니요?” 명확하지 않은 말투에 짜증이 났고 또다시 유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희는 또다시 움찔거렸다. “하여튼 빨리 집에 왔으면 해요. 1208동 1513호에요. 그럼 이만…….” 그는 어이가 없었다.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저녁 무렵 시장을 만나 우회도로 건설 건을 타협 짓고 오던 길이었다. H사와 D사가 함께 뛰어들었지만 그가 저번에 준 미끼는 유효했다. 타협되자마자 그는 또다시 큰 미끼를 입에 털어주었다. 시장은 현금만 고집했다. 수표도 차명통장도 싫어했다. 하지만 그는 미끼를 줄 때마다 녹음하는 걸 잊지 않았다. 아마도 교활한 시장은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터였다. “조 사장 걱정 마. 내 임기 동안만이라도 팍팍 밀어줄 테니.” 시장은 돈이 든 가방을 자신의 책상 밑으로 밀쳐놓고는 필요이상 큰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저 또한 시장님이 다음 선거 뿐 아니라 재직하시는 동안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그 또한 필요이상으로 목청을 높였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비록 시골이라 해도 제법 규모가 큰, 아버지가 창업한 건설회사에 들어와 지금껏 고향에서 있어 왔으니 초 중 고 동창만 해도 어마어마했고 회사를 운영하면서 다진 인맥 또한 그 못지않았다. 시장은 그런 그의 위치를 잘 꿰뚫고 있었다. 그는 세희를 침대로 데리고 갔다. 평소와는 좀 이른 편이었다. 시장과 담판을 짓거나 크거나 작거나 공사가 끝나면 그는 세희에게 왔고 머리꼭지가 돌도록 술을 마셨고 미친 듯이 섹스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술은 몇 잔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세희는 집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제, 세희와 헤어질 때가 되었구나, 그는 생각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야 되는데, 마음이 조급해지자 세희를 침대에 거칠게 눕혔다. * 전화를 끊고 나서 정미 엄마는 안방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현수 아빠에게 전화를 한 게 잘 한 짓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지 않을까. 고소를 하고 범인을 잡는다 한들 현수 엄마가 당한 상처가 치유될 것인가.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 아무도 모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당한 사람은 결국 가정이 깨진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가정이 깨진다면 범인을 잡은 들 무슨 소용인가. 현수 엄마를 우연히 베란다 너머로 보았다. 밤 9시 뉴스가 끝나고 연속극을 하기 전 막간을 이용하여 화분에 물을 주고 있을 때였다. 흘린 물을 훔쳐내고 베란다 밖을 바라보는데, 한 여자가 비틀거리며,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어두컴컴한 밤인데도 흰 색 바탕에 세로 보라색 줄무늬 운동복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헝클어진 머릿결이 나중에 들어왔다. 눈에 익었다. 아니. 그녀는 순간 현수 엄마라는 걸 알았고 직감으로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었다. 걸레를 베란다에 둔 채 밖으로 나갔다. 역시였다. 비틀거리며 주차장을 가로질러 오는 사람은 현수 엄마였다. “왜 그래, 현수 엄마.” 그녀가 다가가 어깨를 잡았을 때 현수 엄마는 흠칫했다. 눈의 초점은 풀려 있었고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 했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상의와 바지에도 나뭇잎과 마른 풀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직감했다. 당했구나. “공원에 갔었어? 현수 엄마?” 현수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원은 시내에 있는 야트막한 산에 꾸며져 있는데 몇 개월 전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대낮에 운동을 하던 주부가 강간을 당하여 발가벗긴 채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는 둥 바바리가 나타난다는 둥 하는 소문이었다. 공원에는 산 둘레를 따라 산책길이 놓여 있고 중간 중간에 운동기구도 설치되어 있어 시내 사람들이 자주 찾던 곳이었다. 그녀와 현수 엄마랑 더불어 7공주 회원들과 자주 공원에 운동하러 갔었다. “자자. 일단 들어가자.” 그녀는 현수네 집으로 가는 대신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침대로 가 눕혔다. “어찌 된 거야? 정말 공원에서 오는 길이야?” 그녀가 재차 다그쳤을 때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녀는 아차, 했지만 이미 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현수 엄마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경찰에 신고해야지. 병원도 가고. 잠깐 우선 마음부터 안정하고.” 그녀는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었다. “참. 현수 아빠 퇴근했어? 집에 있어?” 현수 엄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를 어째. 그럼 빨리 연락해야지.” 그녀의 말에 현수 엄마는 망설이는 듯 하다가 바지에서 휴대폰을 꺼내 주었다. “몇 번?” “2번.” 그녀는 안방을 나와 2번을 누르는데 자꾸만 허공을 누르는 듯 했다. 현수 아빠는 피곤한 목소리로 딱딱하게 전화를 받았다. 당했다고 했는데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지, 괜히 전화했나. 그녀는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안방 문을 열어 보니 현수 엄마는 팔을 이마에 얹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조금만 열어 놓고 거실에 앉았다. 밤에는 운동하러 잘 가지 않는데 웬일로 갔을까 싶다. 운동하러 가거나 여성회관이나 도서관에 문화강좌 듣는 멤버들이 있었다. 현수 엄마를 비롯해 일곱 명이 되었다. 모두들 작은애가 이제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난 상태였다. 큰애들은 군대를 갔거나 졸업반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오전에는 여성회관이나 도서관에서 문화강좌 한 강좌를 듣고 점심엔 어느 한 집에 가 비빔국수를 비롯해 전을 부쳐 먹었고 새로 개업한 집에 가거나 했다. 오후엔 주로 공원에서 운동을 했다. 이제 현수 엄마는 함께 못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아내는 형사와 마주앉자 고개를 숙이고 불안해했다. 그가 옆에 앉아 어깨에 팔을 두르고 안심을 시켰으나 여전히 아내는 가늘게 떨었다. “허 참. 이런 시골에서도.” 형사는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다. 그러면서 그때 일을 자세하게 말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여자 형사 분은 없습니까?” 그는 항의조로 말했다. 아무리 형사라지만 그때 그 상황을 남자에게 상세하게 말해야 한다는 게 그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전담 형사에는 여자가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다른 과 여경을 참석시키지요.” 형사는 어떻게 하겠냐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뜸을 들이자 형사는 말을 이었다. “물론 사장님도 사모님 곁에 계셔도 좋습니다. 오히려 마음을 안정시키는데 그게 좋을 수도 있고요.” “그렇게 하지요. 되도록 빨리 끝내 줬으면 좋겠습니다. 아내가 힘들어 하니.” “예 그러지요.” 형사는 전화기를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심한 흡연 욕구가 일었으나 꾹 참았다. 도저히 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내에게 닥치다니. 말로만 듣던 이야기였다. 내 아내에게, 살림밖에 모르는 순진한 내 아내에게. 처음 전화가 왔을 때 당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 했다. 당하다니. 뭘? 누가? 아내가? 설마, 그랬다. 근데 이게 현실인가. 정말이지 옆에 범인이 있다면 갈기갈기 찢어도 속이 후련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후 30대로 보이는 제복을 입은 여경이 왔고 형사는 조사실로 가자고 했다. 그는 여전히 아내의 어깨를 팔로 두른 채 조사실로 들어갔다. 조사실은 책상과 의자 뿐 다른 사무기구는 없었다. “조사 내용은 모두 녹화가 됩니다.” 형사는 여경을 옆에 앉히고 아내에게 마음 편하게 가지라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불쾌한 마음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여경이 비록 옆에 있다손 치더라도 조사하는 사람은 남자였다. “여자 분께서 조사하시면 안 됩니까?” 그는 항의 비슷하게 말했다. “그건 좀 곤란합니다. 최대한 사모님의 입장을 고려해서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여경도 그에게 이해하라고 했다. 그는 아내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렸다. 나가고 싶다. 조사고 뭐고 그냥 집으로 갔으면 싶었다. “이름은요?” “채연희.” 아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좀 더 크게 말씀해 주시고요. 주소와 주민번호 말씀해 주세요.” 아내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더듬거렸다. 그는 아내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럼. 일시와 장소 자세하게 말씀해 주시고요.” 형사는 컴퓨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녁 아, 아홉 시경에, 시, 시민 공원에서…….” “시민 공원 어디요?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면.” “산, 산책길에요. 크, 큰 나무 있고…… 운동기구 있는데…….” “혼자 갔습니까?” “예.” “왜 갔지요?” “우, 운동하러요.” “평소에도 자주 가십니까?” “예.” “음. 범인의 얼굴은 보셨습니까?” “아뇨. 뒤, 뒤에서…….” “어떻게요. 좀 자세히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뒤에서 어떻게요. 흉기는 있었나요?” “모, 모르겠어요. 갑자기 입을 마, 막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낯선 사내에게 그런 일을 상세하게 말하다니. 그는 지금 아내가 강간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진저리를 쳤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형사가 아무리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한다 해도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청사 밖으로 나와 모래가 들은 단지 곁으로 가서 담배를 빼물었다.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냉정하자 싶었다. 어쩌면 지금 이런 치욕보다도 더 큰 치욕이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범인을 잡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일은 벌어졌고 어떻게 수습을 잘 하느냐였다. 현재까지 이번 사건을 아는 유일한 사람은 정미 엄마인데 그녀한텐 절대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크게 신뢰가 가지 않았다. 비록 그녀가 비밀을 지켜준다 해도 좁은 시골이라 어차피 소문은 금방 날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쯤 소문은 빛의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번지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떤 놈일까. 나이 오십이 넘은 유부녀를. 가정밖에 모르는 가정주부를. 잠자리를 즐거워하지 않는 순진한 여자를. 어떤 미친놈일까. 그렇게 성욕이 일면 돈 주고 사든지. 천지가 여자투성인데.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공원에서. 혹 본 사람은 없었을까. 봤다면 아내가 자주 공원에 운동하러 갔기에 금방 아내를 알아봤을 텐데. 언제 아내와 관계를 가졌나. 그는 기억하려고 했지만 떠오르는 게 없다. 그러고 보니 아내와 잠자리를 가진 지도 오래 되었다. 아내가 어디 여자인가. 그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든다. 자신으로서는 여자로 느껴지지 않는 50대의 아내를 누가 강제로 성폭행을 했다는 게 이해가 안 되고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연달아 담배 두 대를 피우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조사실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소파에 앉아 초조하게 기다렸다. “다 끝났습니다.” 조사실에서 먼저 여경이 아내와 함께 나오며 말했다. 아내의 얼굴은 여전히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럼 병원에 갑시다.” 뒤따라 나온 형사가 말했다. “병원에요?” 빨리 집으로 돌아가려던 그는 불쾌한 기색으로 물었다. “검사 하셔야지요.” 그가 아내에게 다가갔을 때 형사가 물었다. “참, 그대로 오셨지요? 검사 받고 옷은 모조리 제출해 주세요.” “옷 모두요?” 그는 의아해서 물었다. “옷 모두 국과수로 보내야합니다. 그러니 사장님은 집에 가서 갈아입을 옷 가져오시고 피해자분은 함께 병원으로 갑시다.” 그는 순간 멈칫, 했다. 병원에 형사들과 함께 가다니. 제복 입은 형사들과. 어디 광고라도 할 작정인가. 그는 형사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데리고 가지요.” 형사는 순순히 물러섰다. “그러세요, 그럼. 성모병원 아시죠? 미리 전화해 놓을 테니 그리로 가시고. 겉옷과 속옷은 되도록 빨리 제출해 주세요.” 형사는 친절하게 말했지만 그는 조금이라도 경찰서에 있지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서둘러 아내를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가는 내내 내일 아침 아내의 속옷을 들고 경찰서로 가는 자신의 모습과 그 속옷을 들춰보는 남자 형사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는 소름이 온몸에 돋으며 갑자기 몸이 서늘해졌다. * 다음날 오후 정미 엄마가 현수네 집을 방문했을 때 현수 엄마는 다행히 문을 순순히 열어 주었다. 마음이 많이 진정 된 것 같았다. “현수 아빠는?” “아침에 나갔어. 경찰서에도 가고 회사에도 가야 한다며.” “그랬구나. 하여튼 오늘 강좌에 자기가 없어 허전했어. 빨리 나아서 또 나가야지.” 현수 엄마는 무릎을 양 팔로 껴안고 가만히 있었다. “다들 왜 현수 엄마 안 나오느냐고 그러길레 어디 아픈가 보다고 말했어. 그러니 빨리 몸 추슬러.” 그녀는 현수 엄마의 눈치를 보았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 지. 그녀 또한 어제 밤을 새웠다. “차 한 잔 줄까.” 현수 엄마가 일어서려는데 그녀가 먼저 일어섰다. “가만히 있어. 내가 탈게.” 그녀는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싱크대는 물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아마도 아침을 해 먹지 않은 모양이었다. “밥은? 해 주……까?” “아냐. 먹었어. 애 아빠가 죽을 시켜줬어.” 그래 어떻게든 힘을 내야지. 죽긴 왜 죽어. 살아야지. 그녀는 어젯밤 현수 엄마가 15층에서 떨어지는 상상을 했었다. “이제 맘 놓고 있어. 경찰에서 범인 잡고 하겠지.” “근데 나 다시 나갈 수 있을까. 애 아빠가 이사 얘길 하던데.” 현수 엄마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이사 가길 왜 가. 자기가 무슨 죄 졌어? 나쁜 맘 먹지 말고 빨리 몸 추슬러 예전과 같이 우리 재미나게 지내자구. 응?” 그녀가 일부러 경쾌하게 말을 하자 현수 엄마는 예전과 같이? 할 수 있을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럼 할 수 있지. 못 할 게 뭐 있어. 우리 모임이름이 7공주이잖아. 벌써 잊었어? 어, 하다가 20-30대 지나갔고 아차 하다가 40대 넘어 갔잖아. 이제 어어, 하다가 환갑이야.” “…….” 현수 엄마는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그래. 이제는 재미나게 살자구.” 그녀는 현수 엄마의 손을 잡았다. “이제 괜찮아. 어젯밤에 수면제를 먹어서 그런지 계속 잠만 와. 오늘 정신과 치료 받으러 가야 하는데.” “같이 가자. 같이 가 줄게. 다른 데는 괜찮고? 팔에도 멍이 들었던데.” 현수 엄마는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그런 현수 엄마를 그녀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찌 이런 일이. 말로만 듣던 일이었다. 왜 안 나타나지? 함께 문화강좌도 듣고 운동도 함께하는 7공주 회원인 P가 말했다. 어느 날 공원에서 운동을 마치고 막 헤어지던 참이었다. 그때 공원에서 어느 주부가 발가벗긴 채 강간을 당했다는 둥 바바리가 나타난다 둥 하는 소문이 돌 때였다. 그래서 은근히 운동할 때 신경이 쓰였던 무렵이었다. 누구? 일부는 웃고 있을 때 현수 엄마가 물었다. 정말 몰라? 자기는 은근히 안 기다려? P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놀리듯 말했다. 기다리긴 누굴 기다린다 말이야. 현수 엄마가 그런 말을 했을 때 모두들 폭소를 지르고 말았다. 엉큼하긴. 자기도 은근히 기다리면서. 설마 그 얘기? 현수 엄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을 때 또다시 폭소가 터졌다. 그러게 말이야. 기분도 꿀꾸리한데 바바리님 좀 나타나시지. 우리 같은 할마들한테 나타나겠어. 그러게 젊은 처자들도 많은데. 깔깔깔. 깔깔깔. 그래도 운 좋은 과부는 넘어져도 가지 밭에 넘어진데. 깔깔깔 앉아도 요강 뚜껑에 앉고? 깔깔깔 7공주 회원들은 배꼽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읏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깃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봄부터 매일 강좌를 들었다. 둘째 애들이 대도시로 대학 간다고 떠나고 나자 뭔가 허전했다. 남편들은 여전히 술에 취해 외박하거나 늦게 들어왔고 그녀들은 가끔 낮에 모여도 할 얘기가 없었다. 학원 정보도 과외 선생 정보도, 수시 정보도 공유할 게 없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우리 재미나게 살자. 그래 까짓거 하고 싶은 거 하며 살자고. 남편이 어젯밤 외박했다는 누군가 말했다. 그녀들은 7공주란 이름을 짓고 여성회관과 도서관에 문화 강좌를 신청했다. 월요일엔 도예를 화요일엔 글쓰기. 수요일엔 꽃꽂이…… 하는 식었다. 강좌가 없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영화를 보았고 산에 올랐다. 마치 전쟁을 치르듯 그렇게 매달렸다. 매달리지 않으면 왠지 초조했고 불안했다. 허전함과 외로움을 이기는 한 방식이었다. 오후에 공원에서 운동을 할 때면 그 소문이 돌고 나고부터 짜릿한 쾌감도 있었다. 강간이나 바바리가 나타난다는 소문에 온몸이 오싹했지만 공포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그런데도 자꾸 운동은 가고 싶어졌다. 어쩌면 우리들은 또 다른 감정이 있었던 지도 몰라. 그녀는 현수 엄마와 택시를 타고 가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벼락 맞을 일인 지 모르지만 그런 맘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공원에서 산책로를 걷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강간범.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하고 바바리 또한 징그러웠고 무서웠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스멀거려오는 짜릿한 쾌감, 또한 없었다고는 말 할 수 없었다. 운동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뭔가 뒤가 허전했고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그건 분명 또 다른 감정이었다. * 일주일쯤 뒤 그는 담당 형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다시 아내를 피해자 조사를 했으면 했다. 그는 단박에 거절했다. 아내의 속옷을 형사에게 가져다주던 날 그는 결심했다. 다시는 경찰서에 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근데 말이죠. 이상한 점이 많아요.” 형사는 공손하게 말했지만 그는 거만하게 들렸다. “이상하다니요? 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요?” 그는 따지듯 물었다. “국과수 결과가 나왔는데요.” “그래서요?” 그는 무슨 결정적 증거가 나왔으면 제대로 수사하면 될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로 말씀드리긴 그렇고. 내일쯤 사모님 모시고 한번 나오시죠.” 형사의 말에는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죄송하지만 그럴 순 없습니다. 이제 아내가 진정되어가는 중입니다.” “예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니요?” 그럼 정신과 의사도 만났다는 말인가. 그래서 아내의 정신 상태를 다 들었단 말인가. “근데 말이지요.” 형사는 뜸을 들이다 말했다. “피해자만 있고 실체가 없단 말이지요.” “무슨 말입니까, 지금.” 그는 음성을 높였다. “어쨌든 사모님을 한번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내일 한번 나오세요.” 형사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이만 끊지요. 아내가 좋아지고 있는데.” 그는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은 후 아내는 많이 좋아졌는 건 사실이었다. 약 덕분인지 밤에 잠을 잘 잤다. 매일 친구가 찾아오는 눈치이고 제법 표정도 밝아졌다. 하지만 문제는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를 생각하면 집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매일 밤 같은 침대에서 아내와 자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비록 잠자리를 하지 않지만 아내의 몸이 닿는 것이 싫었다.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도 몸은 따라주지 않았다. 이미 수년째 부부관계가 없었기에 잠자리 부담은 없다 손치더라도 이미 난 소문도 문제였다. 이사 가는 것까지 고려했지만 현 시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에 지역 기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특히 건설업체는 더 했다. 아무 탈 없이 자식 키우고 살림만 하는 아내 두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형사의 말을 거절하고 나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집에 있었다. 형사한테 전화 온 내용을 얘기하고 혹 전화할지 모르니 경찰서에 가서 조사 받는 건 하지 말라고 일렀다. 그럼요. 저도 싫어요. 다시는. 아내는 완강하게 말했다. 그는 퇴근하고 세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에 들어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세희는 음대 졸업반이었는데 스폰서를 자청했다. 대금을 전공했는데 대학원 진학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학원 진학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원룸을 얻어주고 소형차를 뽑아주었다. 그리고 매월 일정액의 용돈을 주었다. 대신 그가 찾으면 언제든 달려와야 했고 그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어야 했다. 서로의 깨끗하고 공평한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세희는 학교 연습실에 있었다. 곧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아내는 여자가 아니었다면 세희는 완전 여자였다. 아내는 애들을 낳고부터,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임신을 한 순간부터 이미 여자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세희는 이제 20대 초반의 나이에 걸맞게 탱탱한 몸을 유지했고 섹스에서는 열정적으로 대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둘째 애를 가지고부터는 거의 아내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성욕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또한 실제로 아내에겐 성욕이 일지 않았다. 그냥 내 아이 엄마였다. 세희는 집에 오면서 떡볶이를 사 왔다. 세희에게서 그는 떡볶이 먹는 것을 배웠다. 애들이 어릴 때 가끔 아내가 아이들에게 해 주었지만 그는 먹지 않았다. 세희는 군것질을 좋아했기에 그 또한 세희를 만날 때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십 대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위스키와 떡볶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음식을 세희는 탁자에 놓았다. 그게 세희의 매력이었다. “사모님은 어떻게 됐어요?” 세희는 위스키는 마시지 않은 채 떡볶이를 먹으며 물었다. 그는 의아하게 세희를 보았다. “왜요? 아직 범인 못 잡았대요?” 그는 다시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세희가 떡볶이를 입에 물고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는 떡볶이 받아먹으며 오늘이 세희와 마지막이구나, 다른 여자를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걱정하는 마음으로 물었을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묻지 말아야 할 말이었다. 그가 세희의 가족관계 등 사생활에 대해 전혀 모르듯 세희도 혹 통화하는 걸 들었다 해도 그냥 모른 척 넘어가야했다. 그는 떡볶이 먹는 세희를 바닥에 눕혔다. “이거 먹고요. 배고파요.” 그는 세희 입을 입으로 막았다. 그리고 거칠게 윗옷을 벗겼다. 옷이 부북, 찢어졌다. 세희는 벗어나려고 발버둥쳤지만 그는 바지를 찢었고, 팬티를 벗겼다. 세희가 발버둥칠수록 그는 심하게 다루었다. 다음날 점심 무렵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으로 형사가 찾아 왔다고 했다. 그는 점심 약속이 있어 막 나가려는 참이었다. 전화가 와서 경찰서로 오라는데 안 가니까 집으로 찾아왔다고 했다. 그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아내 혼자 있는 집에 남자가 찾아가다니. 그것도 지금 몸도 안 좋은 상태인데. “부득이 찾아 왔습니다. 서로 안 오시겠다니.” 집에 도착하니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형사는 일어서며 양해를 구했다. “대체 무슨 일이요. 여자가 혼자 있는 집에 이렇게 막 찾아와도 되는 거요?” 그는 화가 나서 숨을 씩씩거렸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사건 해결을 위해서는 한 번 더 피해자 조사를 해야겠습니다.” 형사 또한 단단히 각오한 모양이었다. 아내는 그 옆에 서서 묵묵히 있었다. “그동안 범인 안 잡고 뭐 했습니까. 이번에 알고 보니 몇 개월 전부터 공원에서 강간을 당했다는 소문도 났고 바바리도 나타난다는군요.” 그는 따지듯 말했고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 소문이 돌았지요. 물론 수사했구요. 하지만 그건 헛소문으로 밝혀졌습니다. “헛소문이라뇨?” 그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형사를 쳐다보았다. “이번 사건을 조사 중 저희들도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사건과 연관이 있는 거 같아 조사를 했습니다만.” “그래서요?” 그가 물었고 아내 또한 형사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형사는 아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성분들에게만 은밀히 나도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탐문수사도 하고 잠복도 했지만 바바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소문만 있었지 실제로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여자가 강간당해 발가벗긴 채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는 말도 본 사람은 없고 당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참 묘하지요.” 아내는 형사의 말을 들으며 그의 팔을 잡았다. “당신도 분명 들었잖아.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는 아내를 돌아보며 말했고 아내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건 그 공원에 가는 사람이면 다 아는데.” “물론 소문이 많이 났지요. 하지만 희한하게도 여성분들에게만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남자 분들은 대부분 그런 소문을 모르고 있더라고요.” 형사는 아내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요?” 그는 항의조로 물었다. “우선 앉아서 합시다. 사모님도 이리 앉으시고요.” “아냐, 당신은 방에 들어가 있어.” 그는 아내를 방으로 밀었다. 아내는 머뭇거리다 형사를 흘깃 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소파에 앉자 형사는 난감한 표정을 짓다 자리에 앉았다. “근데 말이죠. 이번 국과수에서 결과가 나왔는데…… .” 형사는 잠시 쉬었다가 침을 한번 삼킨 후 말을 이었다.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증거물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증거가 없다니요?” “그러니까 피해자의 옷에 다른 사람의 지문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정액도 발견되지 않았구요. 병원의 결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피해자의 질에서도 남자의 정액이 발견되지 않았구요.” 그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요? 그럼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일어났다고 거짓말한다는 말입니까?” 그는 형사를 향해 음성을 높였다. “물론 사건은 일어났겠지요. 근데 옷이나 몸에서 타인의 흔적이 전혀 없으니 저희로서는 수사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때 일어난 정황을 다시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그날 형사님도 이 사람 상태를 직접 봤지 않습니까.” “봤지요. 팔에 타박상도 있었고 옷도 더러워져 있었고. 그래도 사모님께 그때 상황을 다시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정신과 병원에서도 그렇고.” “정신과에서 뭐라던데요? 정신과에서는 함부로 환자에 대해 다 얘기 합니까? 환자의 사생활이 있는데. 이거 원.”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하고 그는 불쾌한 기색을 그대로 드러냈다. “수사상 할 수 없었습니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의 말이 자꾸 달라지더랍니다. 그리고 가끔 남자들에 대한 불신이 필요이상으로 강하다가도 반대로 남자들에게 관대하기도 하고요.” “그래서요?” 그는 화가 났다. “그러니까 어떨 땐 피해자로서 불안해하거나 분노를 느끼다가도 어떨 땐 전혀 피해자의 감정이 아닐 때도 있다고. 그러니까 환자가 지금 무의식적으로 어떤 혼란을 겪고 있는 게 아닌가…….” “이보시오. 그게 무슨 소리요?” 그는 탁자를 소리 나게 쳤다. “저희로서는 다양한 방향으로 수사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지요.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상상속의 일이 어떤 충격을 받으면 실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고요.” “상상이요? 참, 나. 지금 뭐 하자는 말씀입니까? 그때 아내의 옷차림이나 팔에 든 멍도 봤지 않습니까?” 그는 전투를 앞둔 군인처럼 나섰다. “아, 흥분하지 마시고요. 봤지요. 근데 그 타박상이나 옷이 더러워진 것도 남의 완력에 의해서일 수도 있지만 혼자 스스로 넘어져도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지요. 또한 저희로서는 단지 의사 말을 참조할 뿐입니다. 빨리 범인을 잡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때 상황을 좀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수사하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안 됩니다. 이제 아내가 많이 나아지고 있는 상태에서 또다시 그때 상황을 떠올리라구요. 안 됩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남자에게 또다시 그런 일을 까발리다니. 그건 치욕이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범인을 못 잡는다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요. 사모님께서는 사장님과 성관계를 가지신 지가 꽤 오래됐다고 하시던데. 맞습니까?” “그것도 정신과에서 그럽니까? 내가 왜 그런 말을 해야 하죠?” “중요합니다. 어쨌든 정신과 소견에서는 사모님은 상당기간 정신적으로나 성적으로 상당히 욕구불만이 많았다는 겁니다.” “그럼 제 아내가 강간을 당하기를 바랬다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피해자는 있는데 목격자는 없고 증거도 없고. 그때가 사람들이 많이 운동하는 시간이거든요. 현장에 몇 번 가봤고 또한 운동하는 사람들도 만나봤지만 그 장소는 가로등이 훤하게 켜져 있는 장소입니다. 그 위쪽이 약간 어둡긴 하지만 산책길에서 보면 다 보이는 곳이지요. 또한 그 시간대에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고요. 그래서 말씀입니다. 혹 사모님께서는 혼자 자주 넘어지거나 뭐 그런 적은 없었습니까? 또한 혼절을 했다는 적도.” “혼자 넘어지다니요. 또 혼절은 왜 합니까. 제 아내는 건강했습니다.” “건강하더라도 왜 남자도 그렇고 혼자 운동하다보면 넘어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어이가 없군요. 자작극이란 말 같군요.” “아닙니다, 분명 사모님은 분명 일을 당했습니다. 정신과에서도 그랬고요. 다만 그게 상상일 가능성도 있겠다는 정신과 전문의의 의견이지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상상도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느낄 수 있다더군요. 어쨌든 이해해 주시고요. 저희로서는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기에.” “상상이라면 범인이 없겠군요.” “어쨌든 가능성은 낮지만 만약 상상이라도 범인은 있지요. 그렇게 된 동기가 있으니까요.” 상상이라도 범인은 있다? 동기가 있다?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어쨌든 더 이상 아내의 조사는 안 됩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범인 잡거든 전화로 알려 주시오.” 그는 일어섰다. 형사는 머뭇거리다 일어섰다. “물론 그때 일을 떠올린다는 게 힘들 줄은 알지만 좀 더 생각해 보시고 협조해 주십시오.” “아니외다. 앞으로 다시는 그때 일을 얘기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빨리 범인이나 잡아 여자들이 맘 놓고 공원에서 운동하도록 해 주세요. 그 공원 내가 만들었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사장님이 만드셨군요.” 형사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하여튼 협조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아쉬운 듯 안방을 흘깃거리곤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그는 형사가 나간 뒤 현관문을 잠갔다. * 현수 아빠와 시장은 구속되었다. 현수 아빠의 경쟁건설업체에서 매번 관급공사에서 제외되자 시장과 현수 아빠 뒤를 밟아 비리를 캐어 검찰에 고소하였다고 했다. 현수 엄마는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1심이 끝나고 현수 아빠가 대구 교도소로 이송 되자 현수 엄마는 서울 아들한테 갔다. 집은 전세를 주고 서울에서 방을 얻어 아들 밥을 해 주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현수 엄마가 서울 갈 때 버스터미널까지 배웅을 했다. 현수 엄마의 표정은 밝았다. “운전 배워.”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그래야지 애 아빠 차 그냥 서 있는데. 정미 엄마 그동안 고마웠어. 서울 가면 운전도 배우고 여성회관 문화센터도 더 자주 갈 거야.” 현수 엄마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7공주 회원들은 여전히 오전에는 여성회관이나 도서관에서 문화 강좌를 열심히 들었고 오후엔 공원에서 운동을 했다. 여전히 누군가 강간을 당해 발가벗긴 채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산책로에 바바리가 나타난다고 했다. 그녀들은 소문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공원에 갔고 운동을 할 때마다 짜릿한 그 무엇을 느꼈다. 운동이 끝나고 집에 갈 때면 뒤꽂지를 누군가 당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뒤를 돌아보거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현수 엄마의 일은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지나가는 말로라도 누구도 꺼내지 않았다. 모두들 가슴에 비밀을 품었다. 그녀는 가끔 그 일이 가물가물 떠오를 때면 진짜로 그런 일이 있었나 싶기도 했고 혹 자신이 겪은 것 같기도 해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 소설집 <소도 (蘇塗)> <아버지의 알리바이> 서양화 개인전 1회. 웹진<문학마실>편집인. 한국작가회의 회원  
234 바람의 집이 쓴 편지 외1편/김종경 file
편집자
2755 2012-08-31
12.09월 28호 시  바람의 집이 쓴 편지 김 종 경 저 멀리 바다 건너에서 갯바람이 불어올 때면, 나 홀로 텅 빈 여객선을 타러 떠나고 싶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빠져나온 오름과 내림이 수인사하는 달동네 막차라도 좋아 폐항廢港의 포구에 처박힌 낡은 등대처럼 기꺼이 옛 사랑 찾아가 무릎 꿇고 싶다 한줌 폭풍이 날갯짓 할 때도, 내 마음은 밤새 출렁이다 쓰러지고 바람났던 유채꽃의 부음이 들려오면 뭍에서 지친 마음 꿈속이라도 일출봉에 오르는데, 가끔은 석양을 물질하던 한라의 미소가 사무치게 그리울 때 있다 성산포에 홀로 앉아 해삼 멍게에 소주를 마실 때면 푸른 파도가 달려와 함께 울어주던, 내 청춘의 서러웠던 시詩들이여 태초부터 바람의 환승역이나 종점은 아예 없었으니 이젠, 조용히 뭍에서 저물어 가는 또 다른 청춘들이여 빨간 편지함이 있는 바다 건너 올레길 옆, 어느 시인의 집을 지나거든 뒤뜰에 주저앉아 바람에게 장문의 연서를 쓰자, 하여 세상 모든 바람들이 모이는 날이면 내 첫사랑 부둥켜안고 펑펑 울고 싶은 정말, 그런 날이 있다 균형 잠자리 날자, 아팠던 마음 한쪽이 출렁거린다. 오후 6시, 저물어가던 운동장도 순간 기우뚱 흔들리고. 지친 노을, 불콰해진 어깨위로 유쾌하게 쓰러졌다. 경기 용인출생. 2008년 계간 『불교문예』등단.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현 용인신문 발행인 겸 대표 주 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운학동 29번지 이메일: iyongin@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