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1호...
   2019년 09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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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77896 2014-11-03
731 산과 강 외1편/임영석 file
편집자
379 2019-03-03
산과 강 산과 강 그 높이와 깊이를 생각하면은 포물선 하나가 그려진다 어느 거리에서는 산과 강이 하나라고 생각하는 데 나는 산은 산, 강은 강, 그대로 불러지기를 바란다 아직도 나의 오랜 그리움의 질투가 하늘이 되지 못하고 유성처럼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가시에 관한 素描 가시고기는 제 몸에 가시가 있어 다른 고기가 쉽게 덤벼들지 않는다 독(毒)이 아닌 가시를 지녔다는 것은 가시가 창이 아닌 방패라는 것이다 가시가 달린 가시나무는 가시가 있어 쉽게 꺾지 못한다 독한 냄새가 아닌 가시를 지녔다는 것은 악연보다는 인연을 맺어 살겠다는 것이다 가시고기의 몸에 가시가 있어도 흐르는 물은 아파하지 않는다 가시나무의 몸에 가시가 있어도 지나가는 바람은 멍들지 않는다 임영석/1961년 충남 금산 출생, 1985년 『현대시조』 봄호 등단. 시집으로 『받아쓰기』 외 5권, 시조집으로 『꽃불』외 2권, 시조선집 『고양이 걸음』, 시론집 『미래를 개척하는 시인』 이 있고, 제1회 시조세계문학상과 제15회 천상병귀천 문학상 우수상을 받았고, 글만 쓰고 살고 있다.  
730 마추픽추 나무 외1편/하재영 file
편집자
402 2019-03-03
마추픽추 나무 그것은 아득한 거리에 숨어 있는 사랑이었네. 잉카인들 삶의 무늬 부드럽게 넣었던 바윗돌은 비바람이 닦는 오랜 시간에 반질반질 숨을 쉬고 먼 우주에서 막 착륙한 우주인 모습으로 작은 우산을 펼치고 아득한 거리 구름안개 뭉개며 찾은 공중도시 마추픽추는 두꺼운 문 단단히 걸고 짙은 사색에 잠겨 있었네.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여행객 떨어지는 구름 빗방울을 또 다른 인연으로 바닥을 보며 날씨 맑은 후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미래를 떠올리며 좁은 비탈길을 밟고 밟았네. 찰흙 주무르듯 바위를 매만진 잉카인의 손길 태양의 신전 앞 나무 한 그루 허공 높이 곧게 올리고 망지기에서 태양의 신전, 달의 신전, 콘도로 신전으로 걷는 거리를 태양에서 지구, 그리고 달까지 거리라고 시계 방향으로 잉카 흔적 더듬으며 걷는 낯선 방문객을 바라보며 구름안개 저편 숨은 잉카의 속살 이야기 빗방울로 들러주고 있었네. 밝은 태양 밑 그림자를 신전 위에 그을 마추픽추의 키 큰 나무 한 그루 해시계로 머물며 가지에 푸른 바위 종 하나 단단히 걸고 잉카의 소리 은은히 울리고 있었네. *망지기 : 공중도시 마추픽추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구름의 그림자 내가 그대에게 가는 길은 구름의 그림자를 찾아가는 일 먼먼 나라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 사막 투어를 마친 그 다음 날 이따금 라마가 길가에서 풀을 뜯고 여우가 귀를 쫑긋하는 먼 길 앞으로 줄줄이 설산도 보이는 고원의 숨 가쁜 길을 현지 가이드이며 지프차 운전기사인 카멜은 앞차가 일으키는 부연 먼지에도 익숙한 듯 불평 없이 옛날처럼 세상을 달리네. 물 고인 우유니 소금 사막에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어린 맘으로 폼을 잡으며 사진 찍을 때 하늘과 호수가 몸을 합치는 몽환적 분위기에 풍덩 빠져들었네. 어쩌지 못하고 멍하니 풍경 바라보며 시간만 흐르게 할 때 소금 꽃을 피우던 태양은 붉은 놀 아래로 윤슬을 뿌리고 또 뿌렸네. 어제의 그제의 그 풍경 담은 폰 속 사진 되새김질하며 오늘 낯선 여행지 해발 고도를 높이며 찾아가는 저 앞쪽으로 새롭게 풍경을 만드는 안데스 설산들 그리워했지만 아직 내가 이름 모르는 산이라네. 해발 사천 미터 아래위로 이어지는 구불구불 긴 길 따라 오천 미터 이상 산들은 구름과 눈을 성자(聖者)처럼 걸치고 내가 그대에게 가는 길은 구름의 그림자 사랑 높은 그것이라네. ------------------------------------------------------ 하재영 199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별빛의 길을 닦는 나무들>, <바다는 넓은 귀를 가졌다> 등  
729 적송 외1편/조재학 file
편집자
325 2019-03-03
적송 몸에 검은 줄무늬가 있다 목을 쭉 빼고 날개를 높게 폈다 깃털을 쫙 펼치고 있다 다리를 뻗어 막 솟구쳐 오르다 영원에 붙잡힌 것일까 그의 각도와 내 시선의 각이 부딪힌 자리에서 한 마리 커다란 새가 난다 고개를 약간 비틀어 멀리 보는 네게 검은 사유가 어른거린다 푸른 날개를 펼치고 날았던 갠지스 강 내음을 기억하는지 하늘을 움켜쥐었던 손아귀에서 구름이 흘려 나온다 빛의 음계가 붉다 노랗다 초록이다 자주다 아무 것도 아니다 더께 앉고 갈라진 수피 사이로 검은 강이 흐른다 과학할까요 그대 입술이 내 입술을 더듬으면 마치 초콜릿을 녹이듯 혀의 감각이 살아나요 대뇌피질에서 신경전달물질 도파민이 앤드로핀이 분비돼요 입술의 감각이 더 예민해져요 그대 입술의 움직임을 내 몸으로 따라가요 말할 수 없는 쾌감에 젖어들어요 계속 하고 싶은 충동에 몸이 떨려요 온 몸이 나른해져요 온 감각이 한 곳에 모여요 심장의 박동수는 130까지 올라가죠 혀가 혀를 애무하는 동안 침 속의 그대 호르몬 테스통스테론은 나에게로 옮겨지죠 9mg수분과 0.18mg의 수용성물질이 교환 되죠 0.7mg의 지방과 0.45mg의 미네랄이 교환 되죠 박테리아 수백만 마리가 교환 되죠 나의 면역력이 높아지죠 뜨거운 키스는 한번에 12Kcal를 소모시켜요 키스가 길어질수록 그대 좀더 키스를 잘 할 수 있도록 내 입주변의 키스근육은 모양을 잡아주죠 그대의 흡입력에 내 몸이 빨려들어 나는 눈을 감고 그대 혀의 움직임을 음미하고 뭉크 씨는 아직도 절규하고 있다 함께 과학 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728 흔적 외1편/안민 file
편집자
331 2019-03-03
흔적 나는 나무나 풀꽃이 아니다 강물도 아니다 그저 길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때론 강물 넘쳐 흘러들거나 산과 나무 쓸쓸한 영혼이 스며들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내가 길 아닌 어떤 흔적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발목이 내 몸 아득한 오지에서 흔들리면 늦은 가을이다 그러면 어떤 얼룩이 선명해진다 오래전 우기雨期의 가을, 그날 소년은 우산도 없이 내 안에서 흘러가다 학교 교정 플라타너스 쪽에 닿았다 늦은 오후, 소년은 다시 내게 얹혔는데 뺨에 손바닥이 붉게 판각*되어 있었다 그러고는 한적한 곳 어디쯤에서 동그마니 접힌 채 동시 적힌 노트를 찢어 종이배를 접는 것이었다 이젠 어디도 소년은 없고 낡은 그림자만 보인다 밤이면 내 몸 위를 자주 비틀대는 * 열한 살 아이가 동시 숙제를 검열받기 위해 교탁 난간에 걸려 있다. 가자미눈으로 변이된 여교사의 눈, 엄마가 해줬다며 거칠게 몰아붙이는 붉은 입술, 이윽고 울고 있는 아이가 복도로 질질 끌려간다. 뺨에 손바닥이 판각된 채 추락하는 아이, 창가의 빗물도 하얗게 질려 흩날리고… 다음 날 아침, 아이는 얼굴에 판각된 선생의 손바닥을 쥐가 갉아놓은 비누로 씻어낸다. 밤일 다니는 엄마는 죽어가는 짐승처럼 쓰러져있고 침대가 있는 무대 1 입이 없다. 입이 없지만 때로는 운다. 나는 겨울이거나 낙엽. 밤이 오는 게 두렵다는 듯 아프게 우는 새에게 경의를 표한다. 새의 울음은 독백이거나 문학. 당신의 문학은 불온했습니까. 최소한 나의 구간은 눅눅하고 음습합니다. 몰락의 바닥이 어디쯤인지 알 수 없다. 몰락은 홀로 하는 전위예술. 깨어진 선인장 화분이거나 찢어진 명태. 2 복수複數 혹은 복합인 적이 없다. 나는 오리 알이거나 소녀의 잃어버린 한쪽 귀걸이. 몸을 사각 끝에 걸치고 있을 때 가장 위험하다. 사각은 감옥이거나 그믐. 어깨를 면에 기대고 있을 때도 위태하다. 그건 불면이거나 몽유. 무용하지 않지만 용이함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졸다가 나를 놓치게 되면 영혼이 출렁대거나 영혼이 얼굴을 놓아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3 눈이 내린다. 나무와 개와 불빛과 차량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검은 승용차와 위태한 인간이 쾅 부딪힌다. 떠나가고 떠나오는 눈송이들. 밖은 혼란스럽고 입 없는 물상은 어떤 동요도 없이 고정되어 있다. 친근하면서도 무서운 짐승이다. 입이 없다는 건, 의자이거나 젖가슴. 아무리 가슴을 더듬어도 꽃이 필 기미는 없다. 꽃을 아무리 더듬어도 가슴이 열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번 생에는 흥분과 발화를 모색하지 않을 거다. 4 가면증은 유전이다. 나무가 바다로 향하고 있다. 바다를 마신 사내가 나무를 끌어안고 운다. 가면증은 추상이거나 연극. 빗새가 향하고 있는 곳은 심장이거나 노을. 내 얼굴에 더는 걸칠 여분의 가면이 없다. 동공에서 자라는 건 원뿔이거나 얼음. 오독이 밤을 메우고 닿을 수 없는 곳에선 애인이 나를 위해 가면을 낳고 있다. 하나, 둘, 셋… 마흔다섯. 5 아름답게 태어나지 못한 생각이 가시밭에서 자란다. 누가 가시를 엮어 침대를 조립하는가. 가시밭은 전생이거나 후생의 오늘 밤. 내가 누운 곳은 한 뼘 지도일 수도 다쉬테 사막일 수도 있다. 수음을 설계하다 그만두는 밤이면 모래먼지가 뿌옇게 들이친다. 나도 침대도 더는 키가 자랄 수 없다는 걸 생각할 때면 눈 안에서 붉은 선인장이 피어난다. 6 그녀는 어느 별에서 폭발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죽은 개 때문일 수도 있고 미술 때문일 수도 있다. 추억엔 왜 꼭 배경이 필요한 걸까. 미술은 새의 울음이거나 푸른 독백. 매주 금요일에 새의 울음을 두 편씩 그리기로 했던가. 내가 분리 수거될 수 있음에 감사 기도를 드린다. 기도 또한 전위 예술이거나 선인장. 후생에선 찢어진 명태이거나 조화. 매일 밤 독거인 채로 낡아 가거나 액자가 된다. 7 화면 속에선 언제나 하나 이상이 펼쳐진다. 드물게 셋일 때도 있다. 둘 혹은 셋이란 건 섹스이거나 분쟁. 섹스이든 분쟁이든 고독에 대해 나무의 심장이 운다. 그것은 질투이거나 질색. 침대의 입장에선 얼마나 무기력할까. 나는 다리가 두 개, 침대는 다리가 네 개, 침대는 최소한 네 개 이상을 지탱할 수 있다며 단단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럼 여섯 개의 다리는 어떨까. 그건 이사移徙이거나 영화. 8 누구도 의도하고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 의도를 품고 절벽 아래로 낙하한다는 건 겨울새이거나 빗물. 자살을 위장한 무의식이 위통을 앓는다. 꿈이 너무나 선명한 것에 위통을 앓는다. 위통이 꿈을 정확하고 예리하게 해석한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가 많다. 9 노래를 짓는 식물과의 동침을 갈망하곤 했다. 혹, 그 날이 오면 체위는 나의 형태일까, 아니면 식물의 형태일까, 생각에 잠기면 회색 졸음이 목 근처에 도달한다. 10 오늘은 입이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말이 없다. 말없이 삐걱삐걱 울기만 한다. 내가 잠을 주인으로 섬긴 것인지, 잠이 침대를 주인으로 섬긴 것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침대가 여자를 꿈꾼 것인지, 왜 불면인지 도무지 말이 없다. 어쩌면 머지않아 침대가 무덤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슬픔을 함께했으니 서로의 수음을 관찰한다는 건, 달빛에 젖은 안개 같은 거. 몸이 나무처럼 딱딱해지는 것은 성욕이거나 식욕. 몸이 시트처럼 푹신한 것은 위통이거나 나무의 심장. 사춘기의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잤지. 그런데 왜 이 계절에도 눈은 식은땀을 흘리는 걸까. 침대의 키가 자라지 않는 것은 침대가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이고 침대 바깥에서 서성이는 누군가를 계산하기 때문. 오늘 밤에도 고양이처럼 웅크린 채 잠들 것이다. 그러면 내 머리 위로 토막잠처럼 낯선 새들이 토막토막 날거고 . 본명 안병호, 경남 김해 출생 . 2010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 2018년 『부산문화재단』 지역문화특성화지원사업 수혜 .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 제 18회 부산작가상 수상 . 시집 『게헨나』 현대시기획선 . 현재 부산작가회의 회원 dominiko8@hjanmail.net  
727 구두실 외1편/이순영 file
편집자
272 2019-03-03
구두실 뒤안 대숲이 무섭게 울었다 문풍지 밤새 버릉버릉 떨고 돌담으로 드나드는 바람 소나무 가지 내려앉는 소리에 뒤척이다가 새벽잠 든 날은 엄마 목소리 다락보다 높았다 청솟갑 쳐대는 매캐한 아궁이 불길 활활 치솟고 세숫물 데워 바가지 띄워 놓으면 튼 손등 따가워 고양이 세수를 했다 소반 위에 간장 종지 미끌어지고 문 꼬리 쩍쩍 붙지만 기름 동동 뜨는 고깃국이라도 먹는 날은 한 마장 넘는 등굣길 아랑곳 않고 북풍이 몰고 온 눈보라에도 기죽지 않았다 애면글면 아파도 고향집 삐걱거리던 마루 이끼 낀 돌담 그을린 정지문 흙 마당에 자욱이 깔리는 저녁 연기 젊은 엄마의 광목 앞치마 일곱 여덟 살 때의 겨울 농학 박사 비 개인 토요일 오후 이웃 논이 소란스럽다 삼부자 노란 줄 잡고 춤추듯 일렁인다 박사학위 받았다는 큰아들 큰 은행 다니는 작은아들 아버지는 이리저리 나락을 헤치며 약을 친다 경운기 딸딸거리는 소리와 멀리 약대를 잡은 아버지의 고함소리 압력에 약줄이 빠져 포물선 그리며 애먼 하늘만 허옇게 소독하고 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큰아들 둑 중간에 멀뚱이 줄 잡은 작은아들 논 한복판을 질러 뛰는 칠십 대 농학박사 아버지  
726 낯설지 않은/이원준 file
편집자
285 2019-01-31
낯설지 않은 정원 한가운데 서 있는 문관석(文官石)을 바라보던 병규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그어졌다.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근엄한 자세를 하고 있는 모습에서 아버지가 떠올라 기분이 묘하기도 했다. 고층 빌딩 앞을 장식하고 있는 다양한 조형물을 볼 때마다 다짐했었다. 식당을 개업하면 그럴 듯한 예술품 하나를 정원에 세워두겠다고. 그것이 공교롭게도 아버지를 닮은 문관석이 돼버렸다. 그것을 사들이던 때가 떠올랐다. “뒤탈은 걱정 마시고 일단 들여놓으세요.” 첫인상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지만 조사장이라고 불린 그의 경우는 어쩔 수 없었다. 한때 도굴꾼이었다는 골동품 판매업자인 그를 본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전직 정도는 짐작했을 것이다. 원한다면 박물관에 소장된 이성계의 전어도까지 가져다줄 수 있다는 말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주로 지하세계에서 살았던 이력 때문인지 피부색도 허여멀건 것이 그마저도 섬뜩하게 했다. 손은 물론 혀마저 합법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였다. 하지만 그쪽에서 나온 것 하나 정도 갖춰야 번성한다는 말에 솔깃했다. 그쪽이란 조선시대 양반가 문신의 무덤가로 불현 찜찜한 생각이 든다고 하자 그는 새봄맞이 특별 할인가를 운운하기도 했다. 새봄맞이? 특별 할인가? 터지려는 웃음을 눌러 삼켰다. 전문가에게 조형물을 의뢰하기에는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아 어쩔 수 없었다. 더군다나 벼슬과 인덕으로 명성이 자자한 집안이었다는 말에 지갑을 열고 말았다. 식당 개업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것은 고향에 있는 아버지였다. 병규는 종갓집 종손으로서 지금껏 무엇 하나 제대로 이뤄놓은 실체가 없었다. 종손이라고 이십 대 중반에 서둘러 결혼해 거느리게 된 처자식만이 전 재산이었다. 무거운 어깨를 벗어놓고 고향을 떠나온 천하의 망할 놈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지만 이제는 달라질 수 있었다. 꿈이었던 식당을 차리기 위해 일자리를 가리지 않고 노력했었다. 낯설고 힘들었지만 출발의 단단한 발판이 되었던 온라인마트 배송기사를 시작으로 생수대리점, 휴대전화 판매점, 반찬가게, 푸드 트럭, 실내포장마차 등. 아내와 맞벌이로 채워온 적금은 준비와 용기를 주었고 크지는 않지만 처갓집 도움은 결단의 응원이 되었다. 적지 않은 은행대출금마저 짐이 아닌 풀어볼 만한 숙제로 여겨지게 된 것은 자신감 때문이었다. 떳떳하게 문중 사람들과 세상을 향해 가슴 펴고 사는 일만 남았다고 확신했다. 가장 먼저 당당해진 가슴을 보여주고 싶었던 아버지는 자식의 새로운 출발에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도 흐뭇해했다. 아직 자식에 대한 기대의 끈을 놓고 있지 않았다는 증거였으리라. “허허, 일단 기쁘구먼. 바쁜 일 있어도 내 꼭 가마.” 장터에 있는 평범한 식당이 아니라 야외 정원이 갖춰진 고급 한정식집이라고 하자 아버지 특유의 반응이 흘러나왔다. “밥 처묵고 트림 남기고 나가는 곳은 같은디 머.” 순간 말문이 막혀 움츠러들 뻔했지만 병규는 더욱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대성정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대성정?”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잖아요. 천하의 망할 놈이지만 언젠가는 대성하라고요.” “허허허, 암튼 간만에 기차나들이도 할 겸 그날 갈텐께 그리 알고.” 개업식에 걸맞게 날씨마저 온화했다. 볕 좋은 봄날에 새로운 출발이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식당 안에서는 개업 축하손님들을 치를 준비로 분주했다. 대학 동창들은 물론 삶의 전선에서 인연이 된 사람들까지 빠짐없이 초대한 상태였다. 자신을 바라보던 눈높이가 대부분 낮았던 그들에게 새로운 존재를 알리고 싶었다. 병규는 그런 속내를 어루만지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를 마중 나갔던 아내가 잰걸음으로 오며 손짓을 해대는 것이 보였다. 현관 쪽으로 가자 한복에 은회색 두루마기까지 차려입은 중절모의 아버지가 꼿꼿이 서 있었다. 한 손으로 쥔 손때 절은 지팡이는 바닥과 아버지 사이에 건성으로 서 있는 형상이었다. 아버지는 그만큼 정정했는데 때로는 장식품과 같은 그것이 당신이 지금껏 심신으로 떠받들고 있는 종갓집 기둥이었으면 했다. 고향을 떠난 지 구 년 후 한 번 찾아간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다시 사 년 만의 부자상봉이었다. 그동안 명절 때마다 용돈이나 선물과 함께 겨우 목소리를 내려 보냈을 뿐이었다. “좋구나!” 아버지는 천천히 정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병규는 과연 오랜 세월 가슴 한구석으로 밀어두었을 자신에게 어떤 감탄사를 안겨줄지 궁금했다. 아버지가 조용히 입을 떼었다. “공들인맨치 성공을 혀야겄제.” “그럼요. 대성공을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 비법도 마련해두었으니까 다 잘 될 겁니다.” 병규는 속으로 문관석을 떠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은근히 신경을 썼던 그 믿음 앞에 아버지가 이르렀을 때였다. 병규는 순간 숨을 멈추고 긴장했다. 허허허, 이 양반은 나를 쏙 빼닮았네. 별걸 다 신경을 썼구나. 유쾌하고 흡족해서 더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의 반응이 나올 것 같았다. “으메!” 아버지에게서 단발마의 탄성이 들려왔다. 그런데 감탄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냉랭하고 경직된 기운이 담겨져 있는 듯했다. 아버지의 몸이 곧 쓰러질 사람처럼 한차례 휘청거렸다. 지팡이로 몸을 의지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저, 저건….” 아버지의 입에서 다시 건조한 목소리가 신음처럼 새어나왔다. “어떠세요. 아버지를 꼭 닮았죠? 일부러 골랐어요.” “시상에나.” “놀라실 줄 알았어요. 돈도 꽤 들었거든요.” “그려, 얼마나 주었드냐?” “사백.” 순간 병규의 안면으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사백에 이어 삼십만 원을 깎았다고 하려던 입이 휙 돌아가 버렸다. 눈앞에 별을 뿌려놓고 지나간 것은 아버지의 지팡이였다. 병규의 입가에 피가 맺혔다. “워, 워찌 지를 때리고 그러신다요?” 잊으려 애를 썼던 고향 말투가 튀어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열하며 고개를 꺾었다. “요것은 말이여, 지난 가을에 도적맞은 우덜 조상님 무덤 앞에 있던 문관석이다. 이 눔아!” 아버지는 할 말을 잃은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병규는 아버지를 일으킬 생각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가슴에서 무언가 터지려고 하는데 쉽게 열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지팡이를 의지한 채 천천히 일어섰다. “그나마 다행이여. 행여 일본이나 생판 낯뿌닥도 모르는 넘우 손에 넘어갔을 거라 생각혔는디….” 병규의 머릿속으로 쉽게 눈을 맞출 수 없는 빛들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다리가 후들거리려는 찰나 곧 수많은 빛 중에 하나를 잡아낼 수 있었다. “아부지!” 병규는 오랜만에 아버지의 품을 찾았다. 그토록 뿌리치고자 했던 고향의 냄새, 종갓집 대청마루 퀴퀴한 냄새가 구수하게 전해왔다.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문관석이 자신을 닮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 이원준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1991년 《현대시세계》로 등단한 시인, 소설가. 《흔들림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한 모습이다》 《김오랑》 《김구》 《이상》 《권정생》 《노먼 베순》 《넬슨 만델라》 《정약용의 편지》 《조선왕들의 속마음》 《누가 조선의 영의정인가》 외  
725 세계리 소개 외1편/송은영 file
편집자
325 2019-01-31
세계리 소개 일주일에 꼭 한 번은 부산 자갈치 아지매 목소리로 메르치젓 담~어~이~소 시잉싱한 메르치 담으이소 메르치젓 사람들을 애절하게 부르는 노래 무위에 들듯 골목 끝으로 가면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살찐 검은 고양이 길 건너 해병대는 오늘도 핫둘핫둘 구령에 맞춰 신 새벽을 깨우고 시끌벅적 파안대소와 뻥튀기 아저씨의 폭축 소리에 국화빵이 하루에도 여러번 엉덩방아 찧는 오일장 촌 동네가 식지 않는 밥이 되려고 용을 씁니다 즐거운 통일 라라라 처음부터 하나였어 어제는 발톱을 보였지만 오늘부터 경계를 지우는 거야 라라라 통일의 효능감 가재는 게 편 우리의 바램이 같은 것 이었으면 좋겠어 라라라 파도를 탔든 시간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는 결정적인 한 방 하여 통일은 평화를 푸는 열쇠인 것이야 : 송은영/경북 포항출생 2007년 시와 상상으로 등단 □ 시집 : 별것 아니었다  
724 글리제 581g 행성 외1편/손창기 file
편집자
448 2019-01-31
글리제 581g 행성 지구로부터 20광년 떨어진 천칭자리의 적색왜성, 해가 진 후 잠깐 동안 볼 수 있다 작고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해서 그대가 궁금해질 때 하나의 별빛으로 찾아 간다 170억 개 지구형 행성 중에 하나를, 글로제 581 항성계에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골디락스 존은, 그대 주위에서 사랑하기에 적절한 영역이므로 오래 헤매 다니는 시간도 아깝지 않다 사랑의 호기심은 큰 인력으로 작용하고 우주의 내벽엔 시꺼먼 연기 자국이 자욱하다 그런데 그대를 이해할수록 닮아 가는, 뜨겁지 않고 춥지도 않은 아주 적당한 온도의 사랑 글리제의 회전속도가 줄지 않고 공전주기는 늘지 않아 오래 사랑을 할 수 있을 테지, 달의 뒷면처럼 나의 등짝엔 크레이터들이 보이지 않는다 모든 행성이 한 방울 눈물을 위한 것이라면 내가 행성의 궤도를 도는 것은 단 하룻밤이어도 좋을 눈빛, 행성처럼 그대 주위를 돌다보면 별들까지 흔들리므로 별빛이 그대가 어디 있는지 환히 밝혀준다 눈물에 더 맑아지는 눈빛이 보인다 이슬이라는 시간 “아주 위험하죠. 그러니까 이제 텅빈 공간에는 이래 쳐다보고 감각으로 그냥 예를 들어서 우리 광산 댕기는 사람들은 점심 먹을 시간에 이래 보면은 쥐가 있다듣지 그죠. 그러면 그 쥐를 보호하잖아요. 그러면 인제 어느 순간에 그 쥐가 막 내뺀다든지 이러면은 이슬이라는 게 옵니다”(문경 석탄박물관) 이슬이라는 말, 천정에 탄가루가 조금씩 떨어질 경우 막장이 무너진다는 예감 같은 것 촉촉하고 위험스러운 이 말, 시간의 덫이라 할까 칠레광부 한명은 목숨 건지고 숨겨둔 사랑도 거둔 건 시간의 속도를 한 순간에 맞추고, 혼란한 감각에서 찌릿찌릿한 쾌감을 얻을 줄 알았기 때문 조강지처와 정부情婦 사이에서 죽음까지 내걸어야 쾌감이 배가 되는 법 사랑도 이만큼은 되어야지 쉬운 사랑들도 지금껏 안에서 숨 쉬고 있다 그러나 힘겨운 사랑은 ‘이슬’이라는 말이 혀에 닿는 순간 눈이 내린다, 호흡이 가빠온다 이 시간을 서서히 지배해 가는 꿈에 깃든 사랑은 자신의 죽음까지 익숙하게 만들고 있다 손창기/ 경북 군위 출생. 200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달팽이 성자』가 있음. jangoyes@hanmail.net  
723 플라타너스 모텔 외1편/김미지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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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 2019-01-31
플라타너스 모텔 초록이 무섭다 초록에서 초록으로 깊어가는 초록의 유목 초록에서 초록으로 이어지는 물의 유목 나무 둥치에 청진기를 갖다대면 종일 물소리 누가 샤워를 하고 있나 보다 줄지은 플라타너스 나즈막한 모텔 속으로 누군가가 걸어 들어가고 걸어 나왔다 조금 전 젊은 연인이 그 나무 아래서 사라졌다 물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듬지까지 올라가면 수갈래 복도가 나오고 빼곡이 들어차 있는 물의 방들 낡아서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접수부도 없고 자동차 가리개도 없는 무전숙박 햇살과 바람이 일렁이는 곳은 다 방이 되는 아주 오래된 모텔 우듬지 오른쪽 객실 쪽에서 스타킹 한 짝이 보도에 떨어졌다 또르르 말린 갈색 이파리 한 장 바람이 격렬해질 때 초록도 초록을 벗어 던진다 항해 아이의 방은 그리 크진 않지만 바다도 있고 별도 있습니다 푸른 줄무늬 벽지 위에 배들이 늘어서 있고 천정엔 야광 별들 별만큼 박혀 있습니다 불을 끈 하늘엔 형광빛 별들 밤새 반짝이고 아이는 별꿈을 꿉니다 아이가 학교 간 사이 바다는 썰물로 얕아졌다가 아이가 돌아올 때쯤 찰랑찰랑 수위를 높입니다 아이는 바지를 걷고 물 속에 하루를 씻고는 의자에 가만히 몸을 기댑니다. 책상 위에 어지러이 놓인 책들, 대양 속으로 떠나는 배 한 척 긴 고동 울리며 서 있습니다 아이의 방은 지금 만조입니다 김미지/1960년 대구 출생 199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문』 miji3406@hanmail.net  
722 우포 소묘 외1편/곽도경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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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 2019-01-31
우포 소묘 너를 만나기까지 일억 사천만 년 전부터 해가 뜨고 다시 그 날의 해 이우는 곳 있다는 것 모르고 살았네 밤새워 뱉어 낸 늪의 숨결 수십만 평 도화지 위에 마른풀들이 적어놓은 알 수 없는 언어들 물꿩 오 남매가 밑줄 그으며 읽고 지나가는 동안 해독을 갈망하는 내 귀의 달팽이관 수 없이 꿈틀거렸네 물안개 걷어내며 떠오르는 두 개의 태양을 향해 빈 나룻배 한 척 풀어 노 저어 가면 그 어디쯤에서 만나게 될까 인간 이전의 나 가시연 씨앗 한 톨 집의 등뼈 흰 광목 두 필 극락정토를 끌어올린다 지붕 위 두 목수가 한 숨결로 끌어올리는 집의 중심 한 평 하늘이 환하다 상량이오, 상량이오 소리가 내어주는 층계를 딛고 올라 가 덜컥 맞추어지는 등뼈 오래 전 구부러진 노스님 허리 순간 꼿꼿하다 대웅전 한 채 허리를 편다  
721 리어카 발전기 외1편/박순덕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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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 2019-01-31
리어카 발전기 형제가 칠 남매인 경식이네는 돼지가 새끼를 쳐야만 비료도 사고 기성회비도 낼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남의 집 일 가시고 경식이와 할배는 발정 난 돼지 때문에 옆집 수놈을 리어카에 싣고 와야만 했다 놈은 어찌나 힘이 센지 회초리로 후려쳐 보고 모가지를 잡아끌어 보아도 리어카에 태울 수는 없었다 겨우겨우 꼬리를 잡아당겨 리어카에 태우고 암컷을 만나게 했다 그 뒤로 옆집 돼지는 경식이네 리어카만 보면 올라타려고 안달을 냈다 생선장수 차돌이 한 달에 두어 번 그가 나타나면 마른땅도 놀라서 비늘을 세운다 짐자전거 거무튀튀한 나무상자에 꽁치며 고등어 갈치 바다를 끌고 나온 비린내가 헐레벌떡 숨이 가쁘다 바다와 뭍이 얼마나 먼 지 비린내가 쿰쿰하게 풀어졌다 그래도 그는 꽁치처럼 예리한 눈빛으로 바다를 송두리째 부려놓는다 오봉에 쪄 놓은 보리개떡 같은 얼굴로 동네 사람들 줄줄이 꿰어찬다 상고머리 그가 다녀간 날은 신문지에 바다를 두른 생선이 집집마다 짭조름하게 진동을 했다 여덟 살 내 어린 저녁도 차돌처럼 딴딴하게 배가 꺼지지 않았다 박순덕/경북 상주 출생. 시집 『붉은디기』로 등단. ‘느티나무시’ 동인 qkrtnsejr07@hanmail.net  
720 포장된 색의 공간에서 마음을 정화하다 외1편/김정옥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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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 2019-01-31
포장된 색의 공간에서 마음을 정화하다 누구든 후회스러워 되돌리고 싶은 과거들이 있을 것이다. 부끄럽거나 감추고 싶다거나 실수한 것들에 대한 자책으로 늪에 빠지듯 생각의 틀에 자꾸만 빠져 벋어나 지지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자기 위안도 했다가 변명도 했다가 결국에는 막다른 골목에 가서야 자기 포장을 하 기 시작하는 것 같다. 인생은 단순한 것이 아름다운 법인데 관계의 연속에 꼬인 실타래를 풀 생각도 못 하고 포장에 숨어 버린 부끄러운 자신, 오늘 내 맘과 같은 그런 그림들을 본 것 같다. 평소 빠듯한 점심시간이라 식사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오랜만에 후배가 회사 근처로 찾아오니 시간을 조금 더 할애해서 점심을 간단히 먹고 찻집 대신 근처 갤러리에서 그림 감상을 하기로 했다. 그림 전시회는 학교 다닐 때 과제로 밖에는 안 다녔는데 갑작스레 예술세계를 접하려니 조금 어색했다. 게다가 강남의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갤러리여서 심리적으로 약간 주눅이 들어 조심스레 문을 열었는데 아무도 없는 공간에 관람객은 우리 둘 밖에 없는데 카운터에 남자분과 눈이 딱 마주치니 나갈 수도 들어 올 수도 없는 어정쩡함에서 엤다 모르겠다란 심정으로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림도 볼 줄 모르는 사람이 그림을 감상하자니 아까 그 남자분의 시선이 느껴지는 게 뒤통수가 여간 따가운 게 아녔다. 아마 그림을 그린 주인공 같은데 자기 그림을 잘 이해해줄지 걱정이 되었던 모양인지 시선이 자꾸 우리 동선을 따라다니고 있으니 무슨 그림을 그렸는지도 모르는 추상화 같은 그림들에서 생각하는 척 연기를 할 수 없고, 분위기에 압도되어 감히 설명해달라는 말도 못 하겠고... 그래서 다 비슷해 보이는 형이상학적 그림을 그냥 건성건성 스캔하는 정도만 보고 금방 나오려니 미안해 서 인증 샷이라도 남기려고 우리 둘 사진 부탁을 했다. 그런데 시선이 자꾸 마주쳤던 그분이 기다렸다는 듯이 옆에서 같이 찍으려고 자연스레 포즈를 취하셔서 느낌상 알겠는 데도 예의상 "직접 그리신 화가님 세요?" ㅎ 그렇게 말문이 터지고 자연스레 작품설명이 이어졌는데 아까 밑도 끝도 없었던 작품들이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포장이란 주제로 인체를 다양한 형태로 덧칠해 포장하고 수많은 요소가 섞인 이미지로 변형시켜 보여주려 했다는 뭐 이런 설명을 하시는데 화가님의 깊은 의도는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림을 대하는 내 당시의 심리 상태서 바라봤을 때는 부끄럽거나 감추고 싶은 내면들을 색으로 덧칠하면서 포장시키고 싶었던게 아닐까 라 는 나름 추측도 해보며, 그제야 색감이나 터치감이 눈에 들어오고 숨은 그림처럼 희미한 사람의 형태도 보 이는게 좀 전의 건성건성 감상했던 거와는 달리 아주 흥미롭고 재밌어졌다. 그 화가님은 매 작품마다 엄마의 맘처럼 마치 사랑하는 자식 자랑하듯 설명하셨는데 어떤 작품은 못난이여 서 포기 상태였는데 덧칠하다 보니 새롭게 이미지 변신을 해서 반응이 좋았다는 하고, 어떤 작품은 미숙아인 채로 여백의 미를 살려 놔두었더니 스스로 진화하더라 하기도 하고, 심지어 밑그림에서 작업 완성하는 과정 을 사실적으로 설명해줄 때면 나도 따라 그리고 있는 거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이렇게 작가의 관점에서 배경지식까지 갖고 감상을 하니 상징성, 상상력, 주변 소재들의 창의적 표현, 색채의 조화로움 느낄 수 있어 처음으로 미술작품에 자꾸 시선이 가고 궁금해지고 감동으로 다가왔다. 아~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라 하더니.... 얼마 전 시에서도 시인의 작품배경을 듣고 시인의 맘으로 시를 읽으니 그 시가 다시 보이고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었는데 이번엔 그림이 딱 그랬다. 작품을 감상하면서 전시된 그림들 속에 유난히 노란색 색감의 형태들이 많이 띄어 물어봤더니 시골집 주변에 널려있던 호박꽃들을 다양하게 표현하면서 부모님 생각도 담고 싶으셨단다. 그래서인지 소박하고 정겨운 느낌까지 함축되어 추상적이지만 따뜻한 그림으로 잘 표현된 것 같았다. 잠시 나도 그림을 그린다면 주가 되는 소재가 무엇일지 궁금해졌는데 특히 우리 엄마를 그리워할 땐 뭐가 생각나려나? 무슨 색이 엄마를 대신할까? 그런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찡해져왔다. 난 평소 예술세계는 늘 작가만의 세상이고 그들만이 알 수 있는 이기적 사고로 표현했다고 생각해왔는데 우 연한 기회가 만들어준 예술학습으로 다양한 소재와 자유로운 발상의 작가 내면의 작품세계를 돌아다니며 초입에선 부끄럼을 감추려는 심리의 포장위주로 봤다가 감상을 마무할 무렵 땐 생각지 못한 따뜻한 노란색의 엄마가 그리워졌듯이 작가의 의도대로 볼 수도 있고 내가 느끼고 싶은 대로 느낄 수 있는 예술이란 같은 작품에서도 밑도 끝도 없는 감정들을 춤추게 하는 묘한 매력이 발산하는 색의 공간 같아서 요즘 내 맘이 맘 둘 데 없이 어지럽고 옹색했는데 이곳에 머물다 보니 저절로 치유를 받은 느낌이 들었다. 오늘 우연치 않게 들른 색의 공간에서도 짧지만 긴 여운의 힐링이 되는 게 이래서 사람들이 문화예술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나보다. 엄마 나랑 친구 먹어요 ‘엄마’ 이 단어는 참 오묘한 것 같다. 따뜻함과 포근함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강인함과 억셈도 같이 공존하는 것 같은 게 적어도 나의 엄마를 생각하면 그랬다. 작은 체구였는데 생각의 배포도 크고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 또한 엄청나서 어릴 적은 엄마처럼 강한 사람 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다른 엄마에 비해서 참 박할 정도로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강요하셨는데 매사 규제와 통제 속 생활 이 싫어서 입이 댓 발 나온 채로 투정을 부렸던 거 같다. 그 당시 다들 어려운 형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개인 학용품은 언감생심 부러지고 지저분해진 학용 품을 남자 형제들과 공유해야 하고 여자라고 분홍 옷 하나를 안 사주고 오빠들이 입다 작아진 검정 갈색 옷 들만 물려받으니 늘 선머슴이 따로 없었는데 외모에 신경 쓰면 공부를 못한다고 거울도 5분 이상 못 보게 하신 건 아이의 눈에는 엄마의 독재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는 일이지 않은가? 맛난 선물상자 같은 게 들어올 때 그 자리에서 열어보질 못하게 할 때는 불만의 절정이었으니... 엄마가 그리 지독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가 결혼해서야 알았다. 할머니에 학생이 4명인 가정에 공무원이신 아버지 월급으로 생활도 빠듯할 텐데 줄줄이 학생이라 교육비며 책값이 상당했을 것이다. 남자 형제들이 많아서 먹성들은 얼마나 왕성했는지 1달에 한 가마씩 먹을 정도로 생활비에 식비가 만만치 않 아을 텐데 다른 건 다 지독하게 절약하셨어도 유일하게 후했던 게 교육비였다. 공부한다고 하기만 하면 모든 일에서 제외됐고 책값이나 학원비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고 밀어주실 정 도로 엄마의 교육열은 대단하셨는데 교육이 아이들 인생의 최고의 투자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자식들이 나름 사회에서 번듯하게 한자리씩 하고 있는 건 이렇듯 엄마의 지극한 교육열의 때문 일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이라도 엄마의 손에서는 당연히 부업이 떨어질 리가 없었는데 난 그 부업 보따리들로 집이 지저분해지는 게 싫어서 매번 투덜거렸다. 그럴 때 마다 엄마는 한 번도 힘든 내색이나 싫은 내색을 안 하시고 오히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또 투덜 거릴까봐 한 쪽에 치워놓고 없을 때만 하시는 눈치였으니, 온종일 꾸부려서 만드시느라 힘이 드셨을 만도 하 셨을 텐데 지저분하다고 타박하는 딸 비위가 먼저였으니... 그런 자식에 대한 맹목적 희생과 배려와 사랑이 그땐 왜 안 보였을까? 오히려 엄마의 입장에서 한 번도 이해하려 들지 않고 강하기만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참 소견이 짧고 어 리기만 했었던 거 같다. 가끔은 철부지 딸이 답답했던지 엄마가 종종 했던 말이 ‘너 언제 철이 들래?’ 그 철은 결혼하고야 들기 시작하더라. 지금은 결혼이 선택사항처럼 여겨져 당연히 해야 한다는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데 그 당시는 20대 적령기를 넘기면 세상 불효이고 주변의 심리적 압박감에 주홍글씨처럼 붙어다닐 노쳐녀 딱지가 두려워 20대 후반에 가까스로 이 남자지 싶은 상대를 선택해 결혼했다. 이후 달달하기만 한 신혼생활이 어느 정도 흘렀는데 이번엔 아이가 제때 생기질 않으니 주변의 시선도 느껴 지고 스스로도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해서 나름대로 임신 잘되게 하는 한약을 지어 먹고 산부인과에서 배란일 을 맞추는가 하면 일시적 알칼리로 만든다고 새벽녘 잠에 취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신랑 깨워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쓰디쓴 커피를 마시게 했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어렵게 아이를 가졌으나 조금만 무리하면 유신 끼로 피가 비치고 입덧도 10달 내내 하는 등 엄마를 늘 긴장시켰던 뱃속의 딸아이는 급기야 세상에 나오려고 할 때는 장장 12시간 이상을 고생시키더니 제왕절개 직전에서 자연분만으로 어렵사리 나오긴 했는데 지도 뱃속에서 힘이 들었는지 태변을 먹었다고 해서 엄마랑 같이 퇴원도 못 하고 검사가 이만저만이 아녔다. 그때부터 본능적으로 모성애 발현, 젖먹던 힘까지 다 쏟아붓느라 실핏줄이 다 터져 검둥이가 된 얼굴과 난산 으로 인한 더딘 회복에 아이가 제때 먹어줘야 하는 젖은 퉁퉁 불러 아이 낳는 진통보다 더 심한 젖몸살까지 앓아야 했지만, 나의 고통보다 병원에서 아직 퇴원 못하고 검사받는 아이만 걱정 되어 12월 혹한에 꽁꽁 싸매 고 병원 문턱을 달게 쫓아다녔을 정도로 아이의 안위를 더 살피게 되는 나도 어느새 강인한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 엄마 생각이 제일 많이 났다 아이 낳느라 애썼다며 두 손을 꼭 잡아줄 때는 하염없이 눈물이 났었는데 엄마의 따뜻함이 뼛속 깊이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자식이 길고 험난한 인생길을 스스로 버티고 이겨낼 힘을 기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느라 늘 ‘난 괜찮다’, ‘난 됐다’ 했던 배려와 사랑을 당연한 희생에 가둬버린 채 ‘우리 엄마는 그런 거 싫어해’ 했던 아이에서 엄마가 되어보니 엄마의 맘이 이해되고 같은 경험을 공유해가면서 엄마의 세계를 나도 똑같이 걸어가는 듯했다. 나보다는 가족이 늘 우선이 되다 보니 검소해지고, 지독해 보이겠다 싶을 정도로 억척스러워졌고, 인내심, 책임 감이 커지는 게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하다’처럼 점점 강한 엄마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도 어쩔 수 없이 규제와 통제를 하게 되고 특히 딸아이에게는 더 강조했던 거 같다. 어렵게 갖은 아이가 10달 뱃속에서도 맘을 놓지 못하게 만들더니 태어나서도 한참을 애를 먹였을 정도로 까딸 스럽고 쉽지 않은 아이였는데 그 아이를 잘 다듬어 바르게 키워서 그 아이가 세상 밖을로 나갔을 때 아직은 여자에게 유리천장이 있는 사회에서 우리 딸만큼은 맘껏 능력발휘를 할 수 있는 멋진 전문여성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아이의 맘을 헤아리지 못하면서 엄하게만 하다 보니 엄마의 욕심이 과해 독재자 같았나 보더라. 딸은 오래전부터 엄마랑 친구처럼 지내길 갈망해왔던 것 같았는데 딸의 삶을 들여다보려고도 않은 채 내 입장 에서만 생각하느라 그 간절함의 맘이 이제 읽혔으니... 이제 생각해보면 좋은 엄마가 아니라 엄마가 역할에만 충실했던 게 아닌가 반문이 들었지만 그것도 사랑이 기 인한 것이었음을 나처럼 엄마가 되었을 때 알게 될 것이다 암튼 이제라도 어엿한 사회인으로 잘 자라준 딸에게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을 공유하는 친구 같은 좀더 따뜻한 엄마가 되어주고 싶었다. 내가 엄마의 사랑의 표현을 어느 순간 이해하고 존경하듯 내 딸과도 나를 그리 받아들이도록 많이 표현해주고 느끼도록 해줄 것이며 우리 엄마가 지금까지 내 든든한 후원자이자 인생 친구가 되어준 것처럼 내 딸에게 더없은 후원자이자 인생 친구가 되어줄 것을 다짐하면서.... 이제 친구먹자 우리 딸, 사랑한다. 경기대학교 응용통계학교 졸업 문학광장 73기 수필부분 등단 문학광장 문인협회 회원 현) 회사원  
719 모랫말 연가 戀歌 외 1편/권늘 file
편집자
313 2019-01-31
모랫말 연가 戀歌 아지랑이를 함께 싣고 온 화차는 건널목을 가로질러 섰고.하굣길 아이들 그 밑을 기어 집으로 가던 길 골목을 빠져나온 신작로는 날마다 열리는 난장의 몸살을 안고 도림천을 넘어선다. 행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장을 본 먹거리 한구석엔 엊그제 입학한 아들의 뽀얀 실내화도 자리 잡았던 그 날 가난 묻은 엄마의 일수 장부엔 입금도장이 하루를 건너뛰었다. 종합병원 같던 의원 앞길에는 워낭소리 남기고 멀어져가는 우마차 가득 실은 쌀가마의 풍요만큼이나 실룩거리는 황소를 가엾어하던 그 길 모랫말 어르신 쉼터라는 간판이 달린 시장 입구로 운동을 마치고 모여든 *두메산골에는 초로 初老의 아이들이 추억으로 잔을 채운다. 모랫말 : 지금 도림시장 주변의 옛 지명 두메산골 : 도림시장입구의 감성만점의 식당 숲의 전설 기어코 잘려나간 흔적은 차라리 깨끗했다 꽤 아팠던 모양이다 흘렸던 눈물이 두께로 남아 있기에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던 게였구나 음지를 바라보며 꼼짝없이 매서운 추위와 맞서던 그 겨울 그 서러움 제 몸에 새기며 기다렸던 봄날 제 땅에 뿌리내려 고목의 위엄을 스스로 얻기까지 키를 키우고 상처 난 허리춤에 진액을 뿜고 살을 찌워 가지를 넓혔던 그 많던 기억들 그것이 호적처럼 남겨져 있는 줄은 몰랐다 그렇게 울며 웃으며 아파하고 치유하며 숲을 이루어낸 생의 시간들 잘려나간 내 흔적을 보아달라 말하지 않겠다 다시 피울 수 없는 생명이라면 밑동의 고고한 멋스럼으로 이 숲의 옛이야기를 전해주리라 약력 본명: 권일영 문학광장 회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인천광역시 서구예술인회회원  
718 일상의 행복/고경하 file
편집자
311 2019-01-31
일상의 행복 아침에 눈 뜨면 부스스한 나를 보며 미소 짓는 당신 모습 말없는 행복 느낍니다 구수한 된장국 반찬 몇 가지 놓고 밥을 먹으며 오가는 대화 공감에 은은한 행복 느낍니다 출근하는 당신 잘 갔다 올게 하고 현관을 나서는 당신 뒷모습을 보며 애절한 행복 느낍니다 다정한 당신 추억은 멀어지고 가슴에 그리움 맴돌지만 당신 흔적 정리하며 청렴한 행복 느낍니다 저녁은 무슨 반찬 너털웃음 당신에게 나의 사랑을 고백 할 까? 나의 고민 돌아보며 일상의 행복 느낍니다 고경하/ 1965년 11월4일 광주출생 2017년 상주동학문학제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문집 [우리는 하나] [해풍에 피어나는 동백꽃이여] 서사시로 특별상 수여 신인등단 대구 시월문학제. 웹진 문학마실. 평화통일공동시집 [도보다리에서 울다 웃다], 대구신문 등 창작 詩 출품, 민족작가연합, 한국작가회의 대구경북지회 회원  
717 아메바 족속들 외1편/권혁재 file
편집자
435 2019-01-02
아메바 족속들 몇 번의 돌풍과 폭우가 부족마을을 덮치고 지나갔는데도 부락민들은 오히려 평온해 보였다 배가 가라앉아 젊은 전사들이 찬 바다 밑바닥에서 죽어나갔으나 몇 번 혀를 찰뿐 아무도 공분하지 않았다 족장은 마녀사냥을 나가 7일 만에 돌아와 인공눈물을 흘리며 부재를 증명하려 했다 며칠 후 씨족대표를 뽑는 선거에서 비문명접촉인들을 제치고 문명접촉인들이 전과를 무시한 채 대거 당선되었다 한번만 도와달라는 公約은 空約이 되어 부족사람들을 다시 졸개 취급하였다 씨족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명품이나 부동산, 아이들의 족집게 학원 등뿐이었다 부족의 공분보다는 맛집과 범칙금과 같은 사소한 것에 더 광분하였다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일정한 속도로 짜여 진 각본대로 잘 돌아가는 부족마을 몇 번의 돌풍과 폭우가 지나갔는데도 부락민들은 그 진원지를 캐내려 하지 않았다 오는 비만 탓하고 우산을 펼 줄 모르는 일회용 같이 속편한 족속들. A플러스 축제가 끝났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축제의 여흥에 빠져 있었다 중간고사가 이 주 후로 다가오고 교정의 은행잎은 물들기 시작했다 현실로 돌아가는 발걸음들이 빙판길을 디디는 듯 휘청거렸다 빈 강의실에서 들려오는 노교수의 자장가 같은 환청이 저녁바람을 타고 도서관을 지나 기숙사까지 따라왔다 이상은 이상의 것으로 간절히 바랬지만 현실은 현실 이하의 것으로 축제 뒤의 우리를 잔인하게 하였다 현실에서는 늘 최고라고 자부했는데 이상에서는 최악이 되어버린 우리들의 현실과 이상이 괴리된 슬픈 좌표 날이 갈수록 캠퍼스가 시들해지고 낭만을 빙자한, 청춘을 방기한 처절한 대가가 입동으로 치달았다 우리들의 야무진 기대는 기대한 만큼 실망으로 되돌아 와 가슴에 얹힌 돌덩이처럼 낙인을 찍었다 현실은 최고였지만 이상은 최악이 된 교정의 덫에 걸린 쓸쓸한 성적표. 권혁재/경기도 평택 출생 200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집 <<안경을 흘리다>> 외 다수  
716 비 갠 후 외 1편/오형근 file
편집자
465 2019-01-02
비 갠 후 윗가지에 매달려 있던, 마지막 남은 빗방울이 눈꺼풀 감기듯 떨어지자 바로 아래, 곧바로 빗방울 맞은 대추는 몇 번을 대롱대다 겨우 조용, 조용 대추는 아직 푸르네 나의 사전의료의향서 이제는 이곳에,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식보다 눈치 빠르게 먼저 알아차려서는 상처 입은 짐승이 외딴 곳에 가서 죽듯이 (홀로) 선승禪僧이 앉은 채 육신의 옷을 벗듯이 (무념無念으로) 떨어진 과일이 아래로 굴러가듯이, 죽음의 문을 넘고 싶으니 바라오니 그대로 그냥, 그냥 죽는 그대로 오형근/1955년 서울 출생. 1978년 《시문학》주최 전국대학문예 시 당선, 1988년《불교문학》과 2004년《불교문예》로 등단. 시집 『나무껍질 속은 따뜻하다』,『환한 빈자리』, 『소가 간다』.  
715 마을길 외1편/김진희 file
편집자
429 2019-01-02
마을길 -굿 보릿대 꺾어 보리피리 부우부우- 붉은 접시꽃 지나 키 작은 송엽국 무리 지나 차 온다- 보도블럭 사이 삐죽삐죽 놀란 어린 풀들 보건소 앞 팽나무 가파른 쇠가락 쟁강쟁강 접시꽃이 예까지 따라와 온몸으로 울고 아이들 오디 먹은 검은 손 살구빛 살구 두 알 다시, 은행나무에 걸려 겨울 지나고 봄 지나고 무성한 초록 부채손들에 둘러싸여 여름 맞은 빛바랜 빨간 우산 하늘과 접신하는 접시안테나 지나 아직 마늘 찧는 칼자루처럼 콩콩 뛰고 있을 처녀 무당 생각하다보면 아이들은 벌써 운동장으로 달려가 술래잡기를 하고 죽은 개구리를 만지고 급식소 뒤편 옥수수수염은 길-어지고 12월 오르막이 지쳐 스르르 눕는다 산허리가 딸려 내려간다 오봉산 능선 성근 속눈썹이 파르르, 선다 * 부산 출생, 시집 『굿바이, 겨울』, bullaeya@hanmail.net,  
714 바다낚시 외 1편/나병서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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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 2019-01-02
바다낚시 사실은 즐겁지않았어 바다를 보아야 될 것 같아서 따라나선 바다낚시 문득 내가 세상에서 배운 것을 깨닫게 했지 한 번도 남 속여본 적 없는 광어 우럭 게르치 노래미 펄덕이는 것들을 속인다는 것 물렁이는 미끼조차 가짜를 달고 그 펄떡이는 순수를 속이고 있었던 거야 모르겠어 -“속지말아, 제발 속지 말아...” 내가 말해주었는지 모르겠어 낚시대를 드리우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 이 것을 나는 배웠던 거야 나는 내가 역겹고 참 좆같다는 느낌이 들었어, 낚시 내내... 바다에서는 비릿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어 세상에 흐르는 피냄새같은. 사람처럼 망치 들고 어떤 짐승이 새끼달린 희고 이쁜 어미개 머리를 내리쳤다고 하더라 맞아서 눈알이 튀어나온 어미개 짖지도 않고 비명소리도 없이 조용히 새끼에게 다가가 젖을 물리고 주저앉아 떨리는 경련을 멈추었다더라 옜적에는 사람들이 많았다더라 잘 익은 감 까치밥 남기는 동네에 창피한 일 생기면 우물 메꾸어 버리고 다같이 여름갈증 한사발씩 마시고 깊숙히 마시고 고개숙여 하늘을 보지않았다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더라 세상은 개명하여 하늘아래서 망치들고 새끼달린 생명 퉁퉁부은 젖달린 애미를 내리치는 그런 짐승들이 사람처럼 걸어다닌다더라 사람처럼... 나병서/시집; 지렁이, 똥, 붉은 죽 외 주소;경기 고양 덕양 화전동 528 화전식물원 내 nabyungseo@naver.com  
713 당간지주(幢竿支柱) 외 1편/박찬선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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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 2018-12-01
당간지주(幢竿支柱) 마주보고 서 있는 것이, 서로 의지해서 서 있는 것이 마음의 성전이 사라졌다. 이름과 함께 깡그리 사라졌다. 화려했던 단청도, 불이문의 계단도, 두툼한 방석 자리도 신생대의 뜨거운 화석이 되었다. 속 불은 꺼지지 않고 길을 열어 간다는데 무로 돌리는 무자비함이 무섭다. 불사에 참석한 사람들의 짚신이나 거랑주머니가 삭아서 흙이 되었다. 야단법석의 진언은 깊은 잠에 빠져 진공을 이루었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의 적막. 폐허의 자리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바람에 일어서는 풀이다. 심폐소생술도 응급처방도 쓸 경황이 없었다니 무심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눈은 보이지 않는 것은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빈자리가 한때 가득 찬 역사라는 것을, 개발 제한 지역이 정밀의 문화라는 것을, 귀가 어두웠다. 혁명의 깃발도 올리고 여기가 큰 도량이라고 소리보다 큰 몸짓도 하고, 흐르는 강물 같이 심경도 읊지만 듣는 이가 없다. 보아주고 새겨주는 이가 없다. 시간의 뿔이 항변하듯 견고하게 솟았는데 흑백 사진의 슬픔이 넘친다. 여러 천년 받들고 있는 것이, 하늘 향해 받들고 있는 것이 거랑 주머니* 하늘(弓)과 땅(乙)의 이치가 담긴 아(亞)자가 수놓아진 거랑 주머니 메고 떠나고 싶네. 이른 아침, 늦은 저녁 이 마을 저 마을 낯익은 얼굴 만나 손 덥석 잡고 인간이 하늘이라는 통문 전하며 떠돌아다니고 싶네. 동수나무를 보면 손 모아 경배하고 큰 바위를 만나도 묵념을 올리며 길 가의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가 모두 다 사랑스럽네. 셈이 닿지 않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 지금 이곳에서 두루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너와 내가 다름없이 하나 된 기쁨이려니 풋풋하고 변치 않는 생명으로 살아있음은 해 뜨는 빛의 공부를 할 수 있음은 길을 내듯 모시는 일, 맥을 짚는 일이려니 냇물을 만나면 검어져야 맑아지는 이치를 익히고 바람을 만나면 열 석자 주문*을 실어 보내고 풀꽃을 만나면 풀꽃 속으로 들어 향기로운 잠을 청하며 꿈속의 우복동*을 품고 살아야겠네. 목마른 새벽 덜렁 거랑주머니 매고 떠나고 싶네. 아름다운 산하 오르고 내리며 만나는 사람마다 한울님의 얼굴이라고 거룩한 길상이라고 극구 칭찬하며 경배해야겠네. 빨갛고 노랗고 하얀 상생의 둥근 원이 그려진 거랑주머니에 물과 구름, 바다와 달, 푸른 숲*을 가득 담아 물과 구름의 시 ,바다와 달의 시, 새들이 사는 숲의 시 이런 자연의시, 동녘의 시, 빛의 시를 한 편 한 편 꼭꼭 심어주고 싶네. *상주시 은척면 동학교당에 전해오는 70×32cm 크기의 휴대용 대(垈)로 신호 및 당호, 공문이나 편지, 통문 등을 수발하는데 사용했다. 바탕은 청색, 대 중앙에 적색, 황색, 백색의 원 안에 아(亞)자가 새겨져 있다.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상주에 전해오는 이상향, 유토피아 *水雲 최제우, 海月 최시형, 靑林 김주희의 호에서 따옴. 약력: 경북 상주 출생. 197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돌담 쌓기」외. 상주, 동학, 낙동강 연작시를 쓰고 있음.  
712 말랑젤리 결투 외1편/김요아킴 file
편집자
447 2018-12-01
말랑젤리 결투 결투가 시작된다 흑백 필름으로 인화되는 토요일 밤 멀리서 구해온 아버지의 말랑젤리는 어린 우리들을 건맨으로 만들었다 꼭 황야와 석양이 반복되며 화면 가득 금괴를 약탈하는 악당들의 거친 태클처럼 포장지는 뜯겨진다 허연 설탕가루를 휘파람같이 날리며 등장하는 서부의 총잡이 한 개를 더 탈취하려는 막내의 아우성은 황급히 도망가는 마차의 바퀴소리로 기억된다 결투는 이미 주인공의 눈빛에서 읽혀진다 전광석화같이 표적으로 쏘아올린 총알들 정확하게 단맛으로 변해 갔고 쓰러진 검은 그림자들은 빈 봉지의 바스락거림으로 남는다 유창한 영어발음으로 엔딩자막을 차례로 호명하는 아버지의 목소리 그 판정에 불복하며 엎드린 한 인디언을 닮은 동생의 신음이 천천히 오버랩 된다 실험의 추억 형은 비글이다 입 안엔 옥시콘틴 냄새가 났다 예전의 반항기는 실종되고 축축한 눈망울만이 까맣게 묻어났다 타액 같은 눈곱은 ‘매번’을 상기하며 희뿌연 새벽을 견인했다 기계의 굉음은 귓딱지에 붙어 이내 방음상태다 ‘똑같이’란 동작이 우리 속에서 희생의 제의로 의심 없이 행해졌다 땀에 부풀은 꿈은 고통에 비례하며 짧게 깎여 나갔다 광기에 찬 주사바늘은 생을 마취시켰고 형은 여전히 비글이어야 했다 자본의 논리는 단 한 번의 오작동 없이 다음 공정으로 진행되었다 물지도 울지도 못한 그는, 결국 절망의 B등급에서 풀려났다 이미 안락사가 예정되어 버려질 운명을 아슬히 비켜간 것이다 그 대가는 왼쪽 다리의 깁스로 몇 달간을 덩그렇게 치러내야 했다 그리고 형은 그때 그 기억들을, 지금 한 자 한 자 목발로 오려내고 있는 중이다 *옥시콘틴: 암환자나 만성통증환자의 통증을 치료하는 진통제. -------------------------------------------------------- 김요아킴 1969년 경남 마산 출생. 2003년 계간 <시의나라>와 2010년 계간 <문학청춘> 제1회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가야산 호랑이』『어느 시낭송』『왼손잡이 투수』『행복한 목욕탕『그녀의 시모노세끼항』, 산문집『야구, 21개의 생을 말하다』. 한국작가회의와 부산작가회의 회원. 부산 경원고 교사. 메일: kjhchds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