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4호...
   2019년 12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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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83564 2014-11-03
126 시인 이면우/윤임수 file
편집자
2856 2011-06-01
시인 이면우 윤임수 보일러 새벽 가동 중 화염투시구로 연소실을 본다/고맙다 저 불길, 참 오래 날 먹여 살렸다/밥, 돼지고기, 공납금이 다 저기서 나왔다/녹차의 쓸쓸함도 따라나왔다 내 가족의/웃음, 눈물이 저 불길 속에 함께 타올랐다.//불길속에서,/마술처럼 음식을 끄집어내는 여자를 경배하듯/나는 불길처럼 일찍 붉은 마음을 들어 바쳤다/불길과 여자는 함께 뜨겁고 서늘하다/나는 나지막히 말을 건넨다 그래, 지금처럼/나와 가족을 지켜다오 때가 되면/육신을 들어 내게 바치겠다 이면우 시인의「화염경배」라는 시입니다. 신탄진에서 살고 있는 이면우 시인은 학력이 별로 없는 보일러공으로 오늘도 대전 시내의 한 건물에서 화염투시구로 연소실을 보고 있을 것입니다. 지난 일요일에 그를 만났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그를 청소년 문예지 일로 꼭 만나야 한다며 억지를 부려서 대청댐으로 나오게 했습니다. 한 시간 반쯤 그를 만나면서 사실 미안했습니다. 한 가족의 가장인 그는 노후의 생활을 걱정했습니다. 지금처럼 얄팍한 월급봉투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십이 넘은 나이에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고, 그 자격증이 자기의 생명줄이기 때문에 한 눈 팔 틈이 없으며 당연히 시도 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제2회 노작문학상을 탈 정도로 문단에서 인정받는 시인이며,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시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시인입니다. 그런 그가 생계를 위해 시를 쓰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저 또한 시보다 삶이 먼저라고 생각하지만 좋은 시인이 생계에 매달려서 시를 뒤로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그가 하루라도 빨리 자격증을 취득하여 다시 넓고 깊은 시 세상을 펼쳐나갔으면 좋겠습니다.  
125 자전거를 타는 사람(고 노무현 대통령 2주기 추모시)/조영옥 imagefile
편집자
4261 2011-06-01
11.06월 13호 시 <고 노무현 대통령 2주기 추모시> 자전거를 타는 사람 경남 김해 봉하마을 파란 뚝 길 한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갑니다. 제 발로 힘차게 저어야 균형을 잘 잡고 저어야 나아가는 자전거를 보면서 바른 삶의 모습을 다시 한번 믿었지요. 손녀딸 뒤에 태우고 울퉁불퉁 뚝 길 조심조심 갈 때도 사람은 사랑의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천국 같은 삶의 의미를 또 한번 느꼈지요. 나라도 제 스스로의 힘으로 우뚝 설 수 있어야 하고 사회도 균형이 잡혀야 더불어 살 수 있다는 생각을 자전거를 타면서 보여 주었지요 오리 키워 만든 봉하쌀 지인들께 보내면서 이 땅의 미래가 무엇을 붙들어야하는지 땀으로 보여주려 했지요. 군림하지 않고 부끄러움 없으니 숨어 있지 않고 환한 웃음으로 사람들을 만나니 낮은 자리에서 더 높아 보였지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갖지 않아야 가질 수 있고 버릴 줄 알아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은 보여 주었습니다 그냥 보여준 것이 아니라 생명을 다하여 보여주었습니다. 봉하마을 파란 뚝길 당신이 자전거를 타고 갑니다. 한없이 한없이 그러나 멀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끝없이 바라봅니다 팽팽한 근육의 긴장을 앞을 향한 시선을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으려 힘을 조절하는 그 배려를 잊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한없이 한없이 바라봅니다.  
124 민들레 외1편/이상훈 file
편집자
3919 2011-06-01
11.06월 13호 시 민들레 이상훈 아홉이나 낳아 훨훨 날려보낸 자식들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밥은 먹고 사는지 입을 건 있는지 이슬 피할 집 한 칸은 장만했는지 밤낮 걱정으로 살다가 저 세상에 가서도 눈을 감지 못하시는 우리 엄마 봄비 봄비 따사롭게 내린다 굳었던 흙덩이 틈을 비집고 들어서는 해맑은 얼굴들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고 내미는 왁자지껄 따사로운 손 무슨 일인가 새싹들 서둘러 갸웃 고개를 내밀고 연분홍 철쭉도 이른 눈을 뜬다 파란 등을 보이며 바쁘게 가던 개나리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벚꽃 사뿐사뿐 땅으로 내린다 멀리 산 안개도 성큼성큼 산을 내려온다  
123 다시 復活을 기다리며 외1편/신대원 file
편집자
4001 2011-06-01
11.06월 13호 시 다시 復活을 기다리며 신대원 나무도 풀들도 낙엽으로 몸 졌다가 꽃으로 오고 마른 검불로 누웠다가 새싹으로 오고 모두들 그렇게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데 아, 우리는 어찌 죽으려 하지 않는가. 부활을 애타게 기다리면서도 자유를 그렇게도 목말라하면서도 평화를 소망하고 정의를 희망하고 사랑과 믿음을 입술이 마르도록 이야기하면서도 어찌 죽으려하지 않는가. 復活은 죽어야 이루어지는 법 부활은 죽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법 나 죽으면, 부활로 이어질 것인데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살 것인데 사랑과 믿음의 강이 흘러넘칠 것인데 마른 가슴에 움돋아 다시 푸른빛이 돌 것인데 다시 생명으로 일어 설 것인데 소쩍새에게 무어 서러워 밤이면 그리 울음 우느냐. 그리 슬퍼 밤마다 훌쩍이느냐. 그다지도 그리워 목이 메느냐. 너도 서러우냐 나도 서럽구나. 슬프냐 나도 슬프구나. 그리우냐 나도 그립구나. 어저께 우곡으로 삶의 자리 옮겨 왔는데 등짐 짊어지고 와 그렇듯이 둥지 틀기 시작했는데 그대 서럽게 우니 나도 서럽고 슬피 우니 나도 슬프고 그리워 목이 메니 나도 목이 메는 구나 소쩍새야, 가슴속에 숨어사는 소쩍새야 우리들이 웃어 볼 날 있을까 우리들이 기뻐할 날 있을까 우리들이 서로 만날 날 올까 울지 마라. 소쩍새야, 소쩍새야, 울지 마라. 우리에게도 감동의 날이 올 터이니 우리에게도 감동의 날이 꼭 올 터이니  
122 취수탑 무너지다 외1편/박은숙 file
편집자
5198 2011-06-01
11.06월 13호 시 취수탑 무너지다 박은숙 콸콸 쏟아 졌던 수돗물이 끊겼다 수자원 취수탑이 무너졌단다 사전 통보 없이, 통보가 있을 리 없지 단수 이틀, 정수기마저 단수 경보 깜박깜박 한 방울 물이 하늘같이 보이는 사람도 집도 타는 목마름이여 단수삼일, 먹는 것, 벗는 것, 최대한 줄여도 몸속의 배출은 상주 관수루 아래, 낙단보 구미 보처럼 막아서 안 될 일 항문 열고 나오려는 구릿한 그것을 괄약근 조이며 속으로 밀어 넣으며 궁리 한다 차를 몰고 산속 숲 풀에 응아를 할까 마늘밭 풀 뽑는 시늉하며 시원하게 배출 할까 그럴 시간의 여유가 없다네 한 덩어리 시원하게 변기에 풍덩 해놓고 궁리하다가 옥상 위 낙수 물, 옳거니 그 물은 하늘 꽃밭에 주려고 받아 놓은 빗물 계단 오르고 내려 물 길어 부어도 변기 속 똥 한 덩어리 시원하게 흘러 보내지 못하더라 흘러 보냄으로 어디에도 거름이 되지 못하는 똥, 한 덩이 똥을 흘려보내기 위해 50원,19L의 물을 소비하는 오늘, 한 방울의 물 앞에서, 새벽부터 내리는 빗줄기 앞에서 생각 깊다 못밥 먹으러 가자 박은숙 푸른 나무들이 흔들린다 깃발이 날리고, 바다에선 흰 물결 인다 이렇게 손 놓고 발 놀릴 때가 아니다 수박 열통 막걸리 한 짝 차에 싫고 이왕 내친걸음, 아침놀에 가자 깊은 골짜기 오르고 내리면 꼴밭이 보일 것이고, 다랑이 논에서 마을 어른들 모를 심겠지 허리 굽혀 넙죽 인사하고 바지 단 동동 걷어 올려 풍덩풍덩 모를 심는 거야 이쯤에서 노래 가락 한수 써레질 끝낸 암소는 멍에 내려놓고 워낭소리 흥겨움에 푸른 풀 뜯고 그때, 태양은 공처럼 튀어 올라 머리위에서 열기 뿜을 때 한광주리 머리 이고 오시는 어머니 달려가서 두 손 받아들고 하얀 토끼풀꽃 수놓은 자리 펼쳐 놓은 밥상, 하늘 아래 이런 밥상 없지 내 어찌 그 밥상을 맨손으로 받으랴 (사) 한국작가회의 구미지부 회원 재능시낭송협회 경북지회 회원 혜암아동문학회 회원 수요문학 회원 경북 구미시 인의동 82-6 한솔하이츠301호  
121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고창근 imagefile
편집자
5100 2011-04-30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이유리, 임승수 지음) -베토벤보다 불온하고 프리다 칼로보다 치열하게 오래 전에 사 놓고 다른 책에 밀려 보지 못했던 책이다. 작년 여름 서양화 개인전 계획을 세웠고 그림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던 중에 책꽂이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읽었다. 떨리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정말 좋은 책을 읽을 때면 책장이 넘어가는 게 아까울 때가 있다. 이 책이 그랬다. 한 장 한 장 책장이 넘어가는 것이 아까웠다. 그래서 읽다가 책을 덮고 한참 동안 가만히 있기도 했다. “…이 책은 시대를 충실하게 그렸고, 때로는 시대와 맞서며 세상을 바꿔나가고자 했던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간 기록이다. 그 시대의 부조리와 혁명적 역사를 맑은 눈으로 보고, 자신의 작품 속에 담아낸 예술가들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참 벅찬 일이다.…” 책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이 책은 `기록이다, 라고 말했듯, 예술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예술 안내서가 아니라 어쩌면 역사 기록 같은 느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세상을 바꿀만한 훌륭한 작품을 생산해낸 예술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신이 살아가는 그 시대의 현실을 토대로 하여 활동해 왔다. 때로는 동시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으로, 때로는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시대를 바라보면서…” 이 책은 26개의 테마로 되어 있는데 주요한 26개의 예술 작품을 보여줌으로서 훌륭한 예술 작품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예술가는 어떻게 그 시대를 살아갔는지를 알게 해준다. 고야의 총살 그림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프린시페 피오 언덕에서의 총살)과 마네의 그림(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피카소의 그림(한국전쟁 대학살)은 야만의 역사 그 자체를 보여준다.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프린시페 피오 언덕에서의 총살)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한국전쟁 대학살) 무엇보다 내가 몰랐고 놀라웠던 사실은 베토벤이 사실은 음악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매우 ‘급진적’이라는 것이었다. 왕을 중심으로 해서 귀족들이 주인 행세를 하던 신분제 사회에서는 입에 담기도 무서운 ‘공화주의’를 꿈꾸었기 때문이었다. 그 유명한 <영웅>은 애초에 나폴레옹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자유 평등 박애의 가치를 내세운 프랑스 혁명의 총아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본 것이었다. 썩어빠진 귀족 사회를 갈아 엎고 민중들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공화주의’세상을 건설할 초인으로 보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귀족들의 우두머리쯤 되는 황제에 등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악보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2년 뒤에 다시 출판하면서 ‘한 사람의 영웅을 회상하기 위해 작곡했다’란 문구를 적어 넣었다. 베토벤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 언젠가 괴테와 베토벤이 함께 길을 거닐고 있는데 맞은 편에서 귀족이 다가왔다. 괴테는 모자를 벗고 공손하게 예를 갖췄는데 베토벤은 무슨 일이 있느냐는 듯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지나갔다. “…이 책을 읽은 계기로 독자들이 예술에 대해 흥미를 느끼게 된다면, 또 세계를 변혁하고자 했던 예술가들의 신념을 닮아 각자가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전망을 갖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이 책은 의무를 다 한 것이다.…” 지은이는 예술가가 아니기에 깊이 있는 미에 대한 분석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을 토대’로 활동한 예술가들의 훌륭한 예술 작품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그 어떤 다른 분석이나 설명이 필요치 않다. 그런 예술 작품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다. Overture by 이유리 Thema 01 |이유리| 남성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성' 미술가들:젠틸레스키<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Thema 02 |이유리| 촌철살인 '시사만평', 누가 먼저 시작했을까:윌리엄 호가스<매춘부의 편력> Thema 03 |임승수| 나폴레옹에게 바칠 뻔 했던 프랑스 혁명 찬가:베토벤 교향곡 3번<영웅> Thema 04 |이유리| 붓과 캔버스로 전쟁과 폭력에 맞서다:고야<1808년 5월 3일> Thema 05 |이유리| 혁명을 막기 위해 30년간 숨겨진 프랑스의 여신:들라크루아<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Thema 06 |이유리| 내게 천사를 보여달라, 그러면 그릴 수 있을 것이다:쿠르베<돌깨는 사람들> Thema 07 |임승수| 혁명을 꿈꾸는 자여, 이 노래를 부르라!:인터내셔널가 Thema 08 |임승수| '민요'보다 강한 음악은 없다:민요<새야 새야 파랑새야> Thema 09|이유리| 망각에 묻힐 뻔한 '처절한 봉기'를 되살린 판화:케테 콜비츠《직조공 봉기》 Thema 10 |임승수| 조성음악을 근본부터 무너뜨린 혁명적 작곡가:쇤베르크<피오노 모음곡 Op.25> Thema 11 |이유리| 멕시코의 벽, 민중의 캔버스가 되다:디에고 리베라<멕시코의 역사> Thema 12 |임승수| 천재 배우, 천재 감독, 그리고 '빨갱이':찰리 채플린<모던 타임즈> Thema 13 |임승수| 이상한 '흑인' 열매를 아시나요:빌리 홀리데이 Thema 14 |이유리| 어떤 이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나이트메어'였다:제이콥 로렌스《흑인들의 이주》 Thema 15 |이유리| 난 인디언 후원자가 아니다, 단지 진실을 전할 뿐:코자크 지올코브스키<성난 말> Thema 16 |임승수| 일본 적군파를 감동시킨 바로 그 만화책:타카모시 아사오<내일의 죠> Thema 17 |임승수| 나의 기타는 총, 나의 노래는 총알:빅토르 하라<벤세레모스> Thema 18 |임승수| 혁명을 '상상한' 불온한 노래:존 레논<이매진> Thema 19 |임승수| 신나는 레게음악? 사실은 운동권 노래:밥 말리 Thema 20 |임승수| 1980년대 해외수입 불온 비디오의 대명사:핑크 플로이드<벽The Wall> Thema 21 |이유리| 경제학 책을 던지고 사진기를 들다: 세바스티앙 살가도<세라 페라다의 금광> Thema 22 |이유리| 이 그림에서 '김일성 생가'를 찾아보세요:신학철<모내기> Thema 23 |임승수| 오타쿠를 비판한 오타쿠 애니메이션:가이낙스 <신세기 에반게리온> Thema 24 |임승수| 기네스북도 인정한 세계 최대의 공연: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아리랑> Thema 25 |이유리| 지구온난화에 맞선 얼음펭귄의 시위:최병수<남극의 대표> Thema 26 |이유리| 예술계의 괴도 뤼팽:뱅크시'그래피티' Finale by 임승수 인명 찾아보기 작품명 찾아보기 기타 찾아보기  
120 어른의 재구성/이창한 file
편집자
3856 2011-04-30
11. 05월 12호 수필 어른의 재구성 이 창 한 친구에게서 오래간만에 전화가 왔다. 반갑다는 저쪽의 안부 목소리가 왠지 힘이 없어 보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왜 건강이 안 좋아?”하고 물어 보았다. 친구는 애써 감추는 목소리로 “아냐 감기가 좀...” 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친구와 나는 지난 시절 살아 온 이야기며 사는 이야기를 반쯤 푸념인양 주고 받았다. 그는 정년퇴직 한지가 한참 지나니 이제는 백수로 모든 것에 별 흥미도 가지 않고 그저 시큰 둥 해진다며 잠시 짬을 두고 있다가,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한 결과 건강상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으니 앞으로는 건강에 유의하라는 의사로부터의 권고를 받았다고 했다. 나는 그 말끝에 “야 임마! 그깟 걸 가지고 뭘 그래. 우리 나이쯤 되면 이제 아플 때도 됐잖아.” 하며 위로 아닌 위로를 어설피하고 이래저래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윙’하고 귀에서 이명이 들려왔다. 따지고 보면 예순하고 세 살을 살아온 지금, 서두를 것도 없는데 바쁘긴 무엇이 바쁜지 하루가 후딱 지나간다. 조용한 정적이 감돌고 있는 거실에는 오래된 살림도구가 세월이라는 때로 얼룩져 퇴색해 있다. 그런 것들에 눈을 주고 있자니 문득 내가 구식 스타일이 되어간다는 사실이 퍼뜩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그래, 혈기가 왕성할 때는 열기가 펄펄 끓어 무쇠솥이라도 꽉 쥐면 바싹 부숴 질 것 같 았으며 생각도 저만치 앞서가곤 했었는데, 어느덧 세월의 흐름이 이만큼 흘러 와있구나. 그러니 구식이 될 밖에.....’ 괜스레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 같기도 해서 기분이 영 찝찝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책상에 앉으니 갑자기 노자의 말이 생각났다. 노자는 일찍이 말하기를 크게 이루는 것은 모자람이 있는 듯하지만 그 쓰임은 다함이 없고, 크게 찬 것은 텅빈 듯하지만 그 효용은 한계가 없으며, 곧은 것은 굽은 듯하게 보이고, 크게 교묘한 것도 졸렬한 듯 보인다고 하였다. 문득 내 자신이 왜소해 보인다. ‘눈치 빠르게 겉만 번지르르하게 살아온 삶은 아니었던가. 또한 시류에 아부하며 비굴하게 살아 온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며 과연 나는 주위나 집안에서 어른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지 한 번 생각에 잠겨 본다. 지난 일은 말고라도 좀 전에 전화한 친구를 내 딴에는 걱정 해준답시고 슬며시 나 자신을 과시 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또 오랜만에 전화 해 준 친구에게 바쁘다는 것을 핑계로 귀찮은 표정을 숨긴 채 음성으로 대신해서 감추는 약삭빠른 행동은 안했는지 이런저런 것이 두루 맘에 걸린다. 부끄러운 마음을 다잡아 생각해 보니 자신에게 그럴듯하게 거짓말하는 것보다 더한 거짓이 어디 또 있을까 싶다. 생각에 골똘히 잠길수록 갑자기 깊은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보게 된다. 그러나 한 편 나 자신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꼭 자괴감에 빠질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안 드는 바도 아니다. 그래도 오늘 날 까지 별 큰 탈 없이 생을 영위해 온 것은 매 순간은 아니더라도 간혹 내 자신의 속말에 귀를 기울인 덕분일 게다. 늘 그래왔듯이 양심은 살아 있어서 거짓을 이기게 하여 왔고 진실만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내가 아니던가. 여기까지 생각에 미치자 갑자기 지금까지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놓고 생각할 수 있었다는 나의 작은 양심에 순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이제껏 무리하지 않게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간다면 괜찮지 않을까 여겨 진다. ‘이 나이에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크게 호흡을 가다듬고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본다. 앞으로도 이런 용기를 가지고 넉넉하고 큰 어른의 모습으로 살아가야겠다는 용기가 부쩍 솟아 오른다. “나나 친구여, 우리 미진한 것일랑 떨쳐 버리고 앞으로도 이렇게 힘차게 살아가 보세나. 우리 모두 파이팅!”  
119 달콤한 잠/이홍사 file
편집자
3988 2011-04-30
11. 5월 12호 소설 달콤한 잠 이 홍사 오토바이 뒤에 수레를 달아서 네 명이 마주보고 탈 수 있는 툭툭이 몇 대가 호텔 앞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택시를 대신하는 툭툭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이미 책과 인터넷으로 훑어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창밖의 풍경을 한참 내다보았다. -참 감칠맛이 있겠다. 창밖을 내다보던 내 입에서 흘러나온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그 말에는 나가고 싶은 충동이 다분히 내포되어 있었다. 툭툭이를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볼까? 흥정을 하고 타야 된다던데....... 나는 조금 망설였다. 그 때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했다. 열어보니 문우정이라고 자기 이름을 거듭 얘기하던 한국인 가이드였다. 불편한 게 없냐고 건성으로 물었다. 아주 만족한다고 하자 에어컨 때문에 감기에 걸려서 가는 여행객이 더러 있다며 에어컨의 적정 온도를 조절해주고, 한국뉴스가 나오는 곳으로 텔레비전 채널을 맞춰주고 얼마간의 공동경비와 정해진 가이드 팁을 받아서 나가다가 돌아섰다. 그리고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저어~ 혹시 혼자 주무시기 뭣하면 아가씨를 불러드릴까요? 골프 치러 오는 팀들은 거의 다 아가씨들을 불러서 자거든요. 생각지 못한 뜻밖의 제안이었다. 나는 조금 어색한 말투로 화대가 얼마냐고 되물었다. 아가씨를 부르면 아침 여섯시까지 같이 자야하고 아가씨 화대와 호텔에 두 명이 사용하는 방값을 지불해야한다고 그 금액을 일러주었다. 가이드가 소개비로 얼마를 뜯어먹는다고 해도 턱없이 싸다. 콜걸의 화대를 알아보면 대충 그 나라의 물가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가 있다. -오늘은 제가 생리중이거든요. 필요하면 내일 말씀드리지요. -생리대는 많이 준비하셨나요? 까딱하면 야자수 잎을 이용하는 불상사가 생깁니다. 가이드도 워낙 많은 사람을 상대한 터라 만만치 않았다. 웃으면서 그렇게 농담을 하고 가이드를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짐을 풀 생각도 없이 다시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야자수가 가로수로 서있는 그 거리가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냥 잤다가 나중에 돌아가서 돌이키면 아까운 시간이라고 후회할 것만 같았다. 이번 여행은 순전히 셋째 딸 진이 덕분이었다. 덕분이라기보다는 진이 때문이었다고 표현하는 게 적절하겠다. 그러니까 지난해가 된다. 12월 30일 새벽이었다. 내가 ‘나 홀로 여행’ 계획을 세우고 인터넷을 뒤져 앙코르 와트로 여행 신청을 한 것이. 구정 전의 마지막 ‘땡처리, 라는 타이틀을 앞세우고 저렴한 가격으로 여행자를 모집하는 여행사의 스폰서링크를 찾아내고 바로 망설임 없이 회원가입을 하고 앙코르 와트로 가는 일정표를 훑어보았다. 가격은 저렴했다. 모든 일정의 경비가 캄보디아에 가는 일반인의 편도 비행기 삯보다 조금 넘어설 가격이었다. 패키지라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자유여행이나 배낭여행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가격이었다. 그 가격으로 왕복 비행기 삯과 사박오일의 호텔비와 식대, 그리고 유적지 입장료까지 포함되어 있다. 나는 바로 신청을 했다. 출발일은 바로 닷새 후였다. 신청을 하고 확인을 클릭하니 바로 메일이 들어왔다는 경고음이 울렸다. 메일을 확인하니 여행사에서 날아온 자동 메일이었다. 여행의 가부 결정은 24시간 이내에 전화로 통보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막연히 기다리기에는 너무 초조했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고 유명 대학에 가는 것이 행복의 척도는 아니지만 떨어지고 보니 서운했다. 서운한 건 둘째로 치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지방이지만 특목고 3년간 장학생으로 다닌 아이다. 수능을 좀 잘못 쳤다고는 하지만 그 대학에 수시입학에 떨어지고 또 정시 가군의 상위50%만 합격자를 발표했는데 그 학과에 또 떨어진 것이다. 물론 합격자 발표가 다 난 것도 아니고 또 그 대학이 아니더라도, 그 성적이면 서울 중상위권 대학에 충분히 갈 수가 있고 웬만한 지방대의 사 년 장학생으로 다닐 수 있는 성적이었다. 딸아이는 학교보다 인기 학과에 몰리는 경향이 진하게 두드러지고 있고 하향지원하는 학생들이 있으니까 등록하는 걸 보아서 나머지 50%의 합격자를 발표한다는 그 대학의 모집 전략을 설명하고 당연히 떨어질 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고 태연해하며 오히려 나를 위로하려 들었다. 하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건 그 대학의 전략이고 떨어질 것에 대비한 나의 전략은 전무했다. 합격자 발표가 난. 그날 저녁에는 연말이라 밖은 흥청거리고 나오라는 친구들과 후배도 있었지만 나갈 기분이 아니었다. 딸애는 제 기분을 숨기고 친구를 만난다며 나가고 아들 녀석이 들어오지 않은 밥상머리에서 아내와 저녁을 먹으며, 말없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반주로 소주 한 병 반을 비우고 취기에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실컷 잤다고 생각했는데 일어나니 열두 시가 되지 않았다.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참으로 어중간한 시간에 깨어난 것이다. 취기가 조금 남아있었지만 다시 잠이 들기 힘들 것 같았다. 거실로 나오니 언제 들어왔는지 집안의 골칫거리인 아들 녀석이 그 때까지 컴퓨터에 붙어 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 딸 셋을 낳고 아들을 낳겠다고 벼르고, 기도가 효험 있다는 절에 가서 불공까지 들여 계획생산을 해서 얻은 아들 녀석이 이렇게 속을 섞이고 있다. 제도권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던 녀석은 고등학교 1학년에서 자퇴를 하고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고 있다. 녀석이 하는 짓거리를 보면 울화통이 터진다. 일찍 자라고 고함을 질러 녀석을 방으로 들여보내고 입고 있던 트레이닝에 방한파카를 걸치고 사무실로 내려가서 컴퓨터를 켜고 앙코르 와트로 가는 패키지여행에 나 홀로 여행을 계획하고 덜컥, 신청하고 확인을 클릭 한 것이다. 그리고는 한 숨도 자지 못하고 내가 가보아야 할 미지의 나라에 대해서 인터넷으로 훑어보았다. 이곳저곳 훑다가 어느 사이트로 들어가 그 나라의 인사말 정도는 수첩에 적어가며 공부를 했다. 밤을 꼬박 새우고, 내 밥줄인 중기들이 현장으로 일을 나가는 것을 일일이 확인하고 사무실 문을 닫고 올라가서 아침을 먹었다. 밤을 새워 시리고 따가운 눈을 붙이려고 이부자리를 펴고 누우니 여행사에서 여권 사본을 팩스로 보내라는 전화가 왔다. 최소 출발 인원이 7명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신청자가 7명은 넘어선 모양이다. 혼자 가느냐고 여행사의 여직원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나 홀로 여행이라고 대답하고는 부랴부랴 옷을 다시 챙겨 입고 사무실로 내려가 여권을 사본으로 만들어 팩스로 송부하고 그곳의 호텔에서 방을 혼자 쓰는데 대한 얼마간의 추가비용까지 불러주는 계좌로 송금했다. 맘이 변하기 전에 후딱 송금해야지, 하며 길 건너에 있는 은행에 가서 송금을 하고나서 아내에게 여행계획을 말했다. 아내는 혼자서 자알~ 다녀오라고 비꼬듯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내와 함께 여행을 하고 싶지만 아파트가 아닌 상가주택이라서 집을 비울 수가 없다. 아내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할 수 없다. 저녁이면 기사들이 들어오고 마당에 설치해 놓은 주유기에 유류를 주입하러 들어오는 중기 때문에 집을 비울 수가 없다. 사무실과 집이 같이 있어서 불편한 점이 그것이다. 어쩌다가 야간작업을 마치고 늦게 들어오는 중기가 있으면 밤 열시고 열 한 시고 간에 사무실 문을 닫을 수가 없이 기다려야 하는 형편이다. 아내에게 허락 같은 것은 필요 없다. 그렇게 통보만 하면 된다. 여태 그런 식으로 거의 삼십 년을 살아왔다. 그렇게 통보만 하고 배낭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곳은 열대지방이라 이 겨울에 반팔 티셔츠와 여름바지를 찾아달라고 아내에게 부탁을 했다. 아내는 가려면 아직 닷새나 남았는데 성질 급한 것 하고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귀찮은 내색 없이 옷장을 뒤져 입을만한 여름옷을 챙겨서 내 방으로 디밀었다. 나는 무엇이 더 필요할까 수첩에 필요한 물건들을 적어가며 꼼꼼히 배낭을 챙겨 윗목에 놓아두었다. 사실 여행보다 더 좋은 것은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이다. 그 가슴 설레는 시간이 더 즐겁다. 막상 집을 나가면 고생하는 것이야 뻔히 보이지만 준비하는, 가슴 설레는 그 시간을 한껏 즐기는 것이다. 메고 떠나야할 배낭을 보며 설렘과 미지의 세계에 혼자 간다는 기분 좋은 두려움을 즐긴다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겠다. 공항에서 미팅시간은 비행기 출발 두 시간 전이다. 메일로 날아온 일정표에는 그렇게 되어 있었다. 일찌감치 버스 터미널로 가서 그 시간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는 인천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표를 미리 예약하고 은행에 들러 후진국이라 일 달러짜리를 많이 섞어서 환전까지 했다. 필요한 여행 경비는 얼마 되지 않겠지만 선택 관광도 있고 해서 여윳돈으로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금액을 환전 했다. 그리곤 심심하면 인터넷으로 그 나라의 역사와 언어에 대해서 찾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닷새! 언제나 기다림은 지루한 법이다. 닷새를 그렇게 설렘과 지루함으로 보낸 후 나는 배낭을 메고 버스 시간에 맞추어 터미널로 나갔다. 인천공항까지는 버스로 네 시간이 소요된다. 새벽잠이 깨면 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 노래나 듣고 책을 보겠다고 읽다가 만 소설집 두 권과 흘러간 노래를 다운받은 MP3를 준비한 것이다. 내 귀에는 MP3가 꽂혀 있었다. 버스에 오르니 일단은 이름 모를 해방감이 느껴졌다. 작업현장에 대한 문제도 배차에 관한 사항도 집안일도 모두 잊고 오로지 여행을 즐기다가 오리라고 맘을 다잡았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가 못 먹는 건 딱 두 가지가 있다. 없어서 못 먹는 것과 안 줘서 못 먹는 것, 이 두 가지만 빼면 뭐든지 다 잘 먹는다. 물론 배낭에는 아내가 기어이 넣어준 고추장이 들어있지만 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내가 준비한 먹을거리는 사탕 두 봉지가 건부다. 물론 내가 먹을 것이 아니고 그곳에서 아이들을 만나면 하나씩 주려고 준비한 것이다. 공항의 약속장소인 A카운터의 1번 테이블로 가니 여행사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몇 명이 출발하느냐고 물어보니 17명이 동행이라고 했다. 거의가 가족 단위이고 나 홀로 여행자는 정말 나 홀로라고 했다. 그 사람들이 걱정하는 그게 맘에 쏙 들었다. 혼자나 둘이 온 떨거지들이 있으면 성가시게 될 것만 같았다. 또 불특정의 인간이 한 잔하자거나 내가 불편해할까 조심하는 그 태도가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것 같았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혼자 즐기다 오는 것이 훨씬 편할 것이다. 17명이라고 했지만 동행 가이드는 없고 현지에서 가이드가 나오는 모양이다. 개별로 티켓을 끊고 출국심사를 마치고 면세점을 들러 필요한 물건을 사고 정해진 게이트 쪽으로 갔다. 나에게 필요한 물건이라고 해봤자 담배 한 보루가 전부다. 씨엠립으로 가는 비행기가 대기하고 있는 게이트로 갔다. 그곳으로 가니 탑승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같이 가는 일행이 누구인지 알 턱없다. 다섯 시간의 비행이다. 내가 그 동안 할 일이 무엇인가? 지독한 골초인 내가 할 일은 바로 흡연이다. 다섯 시간 동안 흡연욕구를 참자면 금단증상이 나타난다. 항상 비행기를 타면서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왜 새로 만드는 여객기에는 흡연실을 만들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불평을 한다. 공항에 있는 흡연실을 줄기차게 들락거리며 목구멍이 따갑도록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흡연실에 있다가 출발 오 분 전에 마지막 단배를 끄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벨트 사인 램프가 켜지자 바로 기내식이 나왔다. 밥을 먹고 일찍 자두라는 얘기다. 자는 편이 속이 편하다. 기내식을 먹고 나면 흡연욕구가 나타나기에 나의 경우로 말하자면 자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자려고 눈을 감고 있는데 승무원들이 그 나라의 입국신고서와 비자 서류를 나누어 주었다. 받아들고 보니 글씨가 너무 작아 도대체 알아볼 수가 없었다. 손가방에 돋보기를 찾았지만 없었다. 그렇게 꼼꼼히 챙긴다고 챙겼지만 휴대용 돋보기를 빠트린 것이다. 지나가는 스튜어디스에게 돋보기가 있냐고 물었다. 없다는 대답과 함께 자기가 적어주겠다며 쪼그려 앉아 내 여권을 보며 적어주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는데 비자 서류에 붙일 증명사진이 없어진 것이다. 분명히 사진을 여권의 비닐 커버 주머니에 꽂아 두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아무래도 티켓을 끊으면서 흘렸거나 출국 심사대에서 흘린 모양이다. 난감했다. 여행사에서 증명사진 한 장을 준비하라는 소리를 누누이 들었는데 이런 낭패가 없었다. 지갑을 뒤져 보았다. 넣은 기억이 없는 증명사진이라곤 있을 턱이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궁리하다가 적성검사 기간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운전면허증의 사진을 오려서 붙이면 되겠다는 생각에 머리 위 선반 아래 달린 콜 버튼을 누르고 스튜어디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나마 말이 통하는 국내 여객기라서 다행이다. 나는 쫒아온 여승무원에게 가위가 있느냐고 물었다. 가위는 없는데 가위를 어디에 사용하려냐고 되물었다. 상황을 설명하고 면허증을 보여주니 상관없다고 했다. 그곳 공항에 내려서 여권에 있는 사진을 스캔해서 붙이면 된다고 했다. 그런 방법도 있구나, 생각하며 고맙다고 했지만 그래도 번거로울 것 같아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비행하는 내내 증명사진이 마음에 걸려 어디선가 흘린 그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열대지방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코를 막았다.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을 따라서 공항으로 들어가니 내가 선택한 여행사의 피켓을 든 현지안내원이 나와 있었다. 여권을 거두는 그에게 사진이 없다고 말하고 비자피를 여권과 함께 지불하니 상관없다고 저쪽 통로로 나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입국심사도 없이 그냥 인원만 체크하고 단체 여행객들이 나가는 열려진 통로로 나가서 기다렸다. 눈치를 보니 인원수만 파악하고 입국심사는 단체로 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전전긍긍하던 사진은 문제가 되지 않겠다. 괜히 맘고생만 했구먼! 안도의 한숨을 쉬고 출구 쪽으로 나가니 바로 공항 주차장이었다. 국제공항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웬만한 기차역 정도의 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주차장 입구 재떨이 앞에서 담배부터 빼물었다. 지독한 골초라서 담배 한 대로는 그 동안 참았던 니코틴 보충이 되지 않았다. 연거푸 두 개비를 피우고 나니 피켓을 든 가이드를 따라서 같은 여행사로 온 일행들이 오합지졸, 우르르 뭉쳐 나오는 게 보였다. 후딱 담배를 끄고 그들의 몇 걸음 뒤에 따라 붙었다. 우리가 타고 갈 중형버스가 주차장에 시동을 걸고 대기하고 있었다. 버스에는 에어컨이 틀려있어서 시원했다. 비행기에서 두 시간을 뒤로 돌린 손목시계를 보니 밤 열 시가 좀 넘었다. 두 시간의 시차가 있으므로 한국시간으로 자정이 넘었다. 불과 다섯 시간 만에 두 계절을 뛰어 넘었다. 다섯 시간 전에 엄동설한이었는데 에어컨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인천공항에서 방한 파커를 벗어 배낭에 넣었으므로 내 복장은 날씨에 맞게 간편했지만 일행 중에는 그때까지 겨울옷을 입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둘러보니 가족단위로 온 여행객이 대부분이었다. 아이들과 노인까지 모시고 효도관광을 온 이도 있었다. 일행들이 차에 다 타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국인 가이드가 급하게 차에 올라와서 자기소개를 장황하게 하고 여행을 마치고 가는 날까지 자기 통제에 잘 따라 줄 것을 당부하는 동안 현지 가이드가 인원체크를 했다. 가이드가 둘이다. 현지 가이드와 한국인 가이드. 말하자면 한국인가 현지 가이드 하나를 조수로 데리고 다니는 셈이다. 현지 가이드가 차 문을 닫으며 오라이~,라고 기사에게 외치자 차는 주차장을 빠져 나왔다. 호텔은 겨우 차로 오 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그 오 분 동안 가이드는 우리의 여행일정을 대충 일러주었다. 이미 메일로 날아온 일정표에서 다 읽은 부분이다. 호텔에 도착하여 로비에서 가족 단위로 방을 배정받고 다음날 아침 모닝콜 시간은 일곱 시라는 것과 아침을 먹을 식당이 일 층에 있다는 것만 알려주며 식권과 카드로 된 키를 나눠주었다. 내가 쓸 방은 삼 층이었다. 방으로 올라가서 창을 열고 보니 거리가 훤히 보이는 넓고 전망 좋은 방이다. 트윈 침대가 놓인 방을 혼자 쓰는 것이다. 창밖은 불야성이다. 아마도 시내 번화가에 있는 호텔인 모양이다. 대만이나 중국으로 패키지여행을 가면 거의가 호텔이 도시 변두리에 있다. 작년에 대만의 타이베이에 가보니 호텔이 시내 식당에서 버스로 두 시간 이상 걸리는 변두리였다. 부근에는 슈퍼하나도 없는 빈민촌에 우뚝 선 호텔이었다. 그 가격에 맞추려면 여행사에서 그런 곳의 호텔을 예약할 수밖에 없겠지만 캄보디아는 달랐다. 시내 번화가에 호텔이 있는 것이다. 시 외곽에는 호텔이 없거나 시내 호텔과 가격에 차이가 나지 않는 모양이다. 야자수가 가로수로 서있는 거리를 바라보다가 문득 잊었던 진이 생각이 났다. 제 마음에 드는 대학에 합격해야 될 텐데....... 혼자 중얼거리다가 이마를 쳤다. 그걸 잊자고 떠나온 여행인데 그 아이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당분간 잊자고 마음을 도사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밖의 풍경은 매혹적이다. 나는 황홀한 밤거리에 유혹당하고 있었다. 그 매혹적인 풍경 속으로 풍덩 빠지지 않고 그냥 자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서운한 구석이 있었다. 결국 그 유혹에 못 이겨 지갑과 카메라가 든 손가방만 들고 호텔을 빠져 나섰다. 나서면서 로비의 카운터에서 호텔의 명함 한 장을 챙겼다. 내가 나가자 밖에서 기다리던 툭툭이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서툰 영어와 손짓발짓을 동원해서 시내를 한 바퀴 도는데 얼마냐고 물었다. 30분 정도 걸리는 코스를 흥정하고 맨 앞에 있는 툭툭이를 탔다. 우르르 몰려와서 서로 태우겠다고 난장판이 될 줄 알았는데 그건 지나친 기우였다. 나름대로 순서가 있었다. 그들이 맨 앞의 툭툭이로 안내했고 내가 툭툭이를 타자 손을 흔들어주는 다른 기사까지 있었다. 툭툭이는 나를 태우고 거침없이 대로로 나서서 달렸다. 가로등이 훤한 야자수가 있는 길을 달려보니 호텔에서 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압도적이었다. 길은 아주 옛날에 건설한 것 같은데 도시계획도로처럼 반듯반듯하게 구획정리가 되어 있는 도시였다. 이따금 한국음식점의 간판이 보이기도 하고 ‘평양랭면’ 이라고 쓰인 북한 식당의 간판도 보였다. 이곳 어디엔가 ‘김씨마트’라고 있을 것이다. 김용수라는 고등학교 동기가 하는 한국인마트다. 녀석은 우리와 같은 계원이었다. 칠판 년 전에 녀석이 동기회 총무를 할 적에 부도를 내고 곗돈과 친구 두엇에게 보증을 부탁해서 저축은행에서 거액을 빌려 캄보디아로 날아와 마트를 한다고 했다. 보증을 서 준 친구 둘은 알거지가 되었다. 씨엠립을 관광차 다녀간 어느 동기가 우연히 녀석을 만났다고 계모임 자리에서 느닷없이 잊혀져가는 녀석에 대해서 공포를 했고 앉은 자리의 동기들은 천인공노했다. 그 때 돈으로 모은 계금이 이천 만원이 넘었다. 결국 그 동기회는 재구성해서 돈을 모으지 않고 친목계 형태로 바뀌었다. 찾으려면 쉽사리 찾을 수가 있겠지만 나는 그 녀석을 만나고 싶지 않다. 지나가는 사람들 표정은 모두가 순박해 보였고 걱정이 없어 보이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툭툭이를 타고 지나가면서 재래시장 입구에서 몇 컷의 사진을 찍고 턴을 하자고 툭툭이 기사에게 손짓했다. 툭툭이 기사는 툭툭이를 돌리고는 비어~ 하고 말하며 맥주를 마시는 시늉을 했다. 내가 오케이 사인을 보내자 조금 달려 슈퍼 앞, 포장마차에서 맥주를 파는 곳에 툭툭이를 세웠다. 나는 내려서 길거리 파라솔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맥주 두 개를 시켜 툭툭이 기사에게 하나를 내밀고 나도 하나를 마셨다. 캔에 든 맥주의 상표는 베트남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타이거 비어였다. 맥주를 마시며 툭툭이와 맥주를 파는 아가씨를 카메라에 담았다. 아가씨는 한국인이냐고 물으며 사진을 찍기 좋게 포즈를 취해 주었다. 그 포즈에도 순박함이 잔뜩 배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막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이제 들어가면 쉽게 잘 수가 있겠는 생각으로 툭툭이 기사에게 돌아가자고 했다. 툭툭이는 호텔 현관 앞까지 나를 모셔다 주었고 호텔 지배인이 꾸뻑 인사를 했다. 나는 중세의 황제가 된 기분으로 툭툭이에서 내려 방으로 올라갔다. 잠깐이지만 씨엠립의 무늬만 훑고 들어와서 샤워를 하고 누우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천국은 언제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 이곳이 천국이구나, 모든 걸 잊고 자자, 천국을 헤아리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 모닝콜이 울리기 전에 일어났다. 담배를 한 대 물고 화장실에서 거사를 치루고 있는데 침대머리에 있는 전화기가 서너 번 울렸다. 느긋하게 거사를 치루고, 씻고 식당으로 내려가 아침을 먹고 여행사의 일정대로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따다 다니는데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패키지여행은 항상 그랬다. 앙코르 와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진으로 본 앙코르 와트를 실제로 밟아보는 것 밖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가이드는 일행들에게 그 유적의 역사와 전설에 대해서 땀을 흘려가며 설명하고 있었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하지만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앙코르 와트란 뱀의 사원이라는 뜻이란다. 앙코르는 앙고라 뱀의 변형된 말이고 와트란 사원을 뜻한단다. 가는 곳마다 뱀의 형태가 보였다. 머리가 일곱 개 달인 뱀이 가는 사원마다 돌로 조각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부처나 어느 신의 광배조차도 머리가 일곱 개 달린 뱀의 형상이었다. 그 날은 폐허가 된 작은 사원부터 건축한 시대의 순서대로 둘러보았는데 나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대신 연신 담배를 피울만한 구역을 찾아서 담배를 피우기에 바빴다. 그렇게 가이드를 따라다는 여행은 내 체질에 맞지 않는다. 나는 관광이 아니라 여행을 원했다. 일행들은 혼자 메모를 끼적이며 자꾸 뒤처지는 내가 뭐하는 사람이기에 혼자 왔는지 은근히 궁금해 하는 눈치다. 앙코르 와트, 거대한 돌덩이를 보고 나와서 식당으로 향하는 짬을 이용하여 나는 가이드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아직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우리 일행끼리 자기소개나 하자고 했다. 가이드가 화들짝 놀라며 인천공항에서 인사를 하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다. 인천에서 개별 출발했다고 핀잔을 주자 미안하다며 바로 마이크를 잡고 거듭 미안하다며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을 주었다. 마이크는 앞좌석부터 뒤로 전달되었다. 맨 처음에 소개한 육십 대 아저씨? 육십 대를 아저씨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할아버지라고 명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어느 전자회사의 사장까지 올랐다가 정년퇴임을 하고 초등학교 다니는 손자를 데리고 왔다고 했다. 그 다음 내 또래로 보이는 오십 대 가장은 아들이 군에 가는데, 입대 기념으로 아들 둘을 데리고 가족 여행으로 왔다고 하며 하는 일은 목재 무역업이라고 했으며 그 다음 삼십 대 후반의 젊은 부부는 아들과 딸을 데리고 가족 여행을 왔다고 소개했다. 한사람 소개할 적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다음 사십 대 후반의 아저씨는 장모님과 처조카들을 데리고 일곱 명이서 효도관광차 왔다고 했으며 맨 뒷좌석에 앉은 내게 마이크가 오자 나는 좀 장황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하는 일은 중기 임대업인데 그에 걸맞지 않게 소설을 쓰고 있으며, 소설집을 네 권 낸 바가 있고 저를 알려면 인터넷 검색창에 내 이름을 치면 내 프로필이 뜨고 혼자 여행을 다니는 게 취미이고 이번 여행은 유적지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소제를 찾아 소설 사냥을 왔다고 했으며, 내가 사냥감을 찾아서 나갈 수도 있다고, 혹시 내가 없어지더라도 걱정하지 말고 그냥 가이드를 따라서 여행을 잘 하라고 했다. 내가 없어져도 저녁이면 호텔에 있을 것이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출국하는 시간에 맞추어 공항에 있을 거라고 했다.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에 없어질지 모르지만 제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내 소개가 끝나고 마이크는 가이드에게로 돌아갔다. 가이드는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소설가 선생님! 없어지더라도 가이드에게는 귀 뜸을 해주고 가셔야 합니다. 금세 호칭이 소설가 선생님으로 변했다. 맨 뒤에 앉은 나는 가이드가 들리도록 알았다고 앞쪽을 향해 소리쳤다. 알았노라고. 소개를 하고나서 저녁을 먹으니 훨씬 화기애애해졌다. 저녁은 캄보디아 식당에서 압살라 민속공연을 보면서 현지음식으로 먹었는데 누가 가져왔는지 소주잔이 나에게도 돌아왔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친해져서 같이 앉고 장모님을 비롯한 여자는 여자들끼리, 술을 먹을 만한 사람끼리 따로 자리를 만들어 더 세부적으로 자기소개를 하면서 잔을 돌렸다. 그 식당은 외부 음식반입이 당연히 금지된 곳이지만 우리는 공범이 되어 물 컵을 이용하여 종이팩에 든 소주를 감쪽같이 네 개나 비웠다. 겨우 서로 카메라 셔터나 눌러주던, 서먹서먹하던 팀이 그렇게 친숙한 공동체로 변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여행은 한결 마음이 가볍고 수월하겠다. 식사를 마치고 남들보다 일찍 식당을 나와 식당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가이드에게 다가갔다. 거기서 나는 가이드에게 양해를 구했다. 다음날은 바이욘 사원을 관광하기로 되어 있지만 나는 빠져서 하루를 캄보디아 사람들이 사는 구경을 하며 혼자 돌아다니고 싶다고 양해를 구하자 가이드는 좀 걱정스런 얼굴로, 그렇게 하시면 여행자 보험이 안 되니 조심해서 다니시라고 하면서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일러주었다. 나는 수첩에 전화번호를 받아 적으면서 해외여행을 혼자서 많이 했기에 걱정 않으셔도 좋다고 했다. 허락은 그것으로 받은 셈이다. 내가 혼자 싸돌아다닌 곳은 많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개나 고양이와 삼십 분 정도 같이 있으면 교감이 형성된다. 동물이지만 눈빛만으로도 배가 고픈지 나를 좋아하는지 오줌이 마려운지 금세 알게 된다. 하물며 인간인데 어디를 가더라도 의사전달이 안 되겠는가? 내가 혼자서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생각하는 역사가 있다. 그건 역사이기 이전에 나에게는 교훈이다. 바로 전쟁을 두 번이나 참전한 세대가 있다. 1922년생에서 1926생까지, 그 불우한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에 학도병으로 전쟁터에 나가서 걸어서 중국 대륙을 거쳐 베트남이나 미얀마까지 갔다. 그곳에서 밀림의 총알받이로 전쟁을 치룰 적에 히로시마에 원폭이 터져 일본이 패망하고 지휘관이 없는 패잔병이 되어 그 대륙을 걷고 또 걸어서 고향까지 찾아왔다. 말이 통해서 찾아 온 게 아니었다. 그들이 찾아올 수 있었던 건 바로 눈치였다. 몇 년에 걸쳐 걷고 또 걸어서 고향에 찾아오니 이번에는 한국전이 터졌다. 그 때는 군에 갈 나이가 되었으니 당연히 국군으로 참전을 했던 세대가 있다. 내가 혼자 여행을 할 적마다 전쟁을 두 번이나 치룬 그 불우한 세대를 생각하고 비교한다. 그 세대에 비교하면 나 홀로 여행에 용기가 생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 홀로 여행을 한 나라는 많다. 티베트, 중국, 일본, 대만, 홍콩, 마카오, 몽골, 베트남,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나라를 홀로 다녔다. 일단은 그들보다 나은 여건을 지니고 있다. 전쟁이 아니고 여행이라는 점과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경비가 있고 말이 조금 통한다는 자신감과 가기 전에 그 나라에 대해서 미리 주의사항에 대한 공부와 인사말 정도는 알고 간다는 점이다. 가고 싶지만 엄두를 내지 못하는 나라도 많다. 유럽이나 미주가 그렇다. 순전히 담배 때문이다. 거의 스무 시간 비행하는 동안 담배를 참을 자신이 없어 그쪽은 애써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뿐이 아니라 담배 때문에 벌써 이십 년 전부터 아내와 각방을 쓴다. 자다가도 일어나 좋은 문장이 떠오르면 메모를 하고 담배를 피우기 때문이다. 이놈의 골초라는 딱지를 언제쯤 떼어버릴지, 아마도 죽기 전에는 어렵지 싶다. 다음날 새벽 모닝콜이 울리기 전에 일어나 여행자로서의 의관을 정제하고 소설사냥에 나설 준비를 했다. 최소한 아포리즘 하나라도 건져야 한다고 다짐했다. 워킹투어! 걸어서 캄보디아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다녀볼 생각이었다. 거기서 소설 한편을 구상하면 그보다 큰 수확이 없고 아니면 짤막한 아포리즘하나라도 떠올려 메모를 하는 수확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단어 하나라도 괜찮다. 담배를 두 갑이나 챙기고 사탕을 손가방에 두 봉지나 넣고 준비를 한 다음 일찌감치 내려가 아침을 먹고 호텔 밖으로 나오니 벌써 우리 일행이 타고 갈 버스가 호텔 마당에 대기하고 있었다. 한국인 가이드는 아직 나오지 않았고 현지 가이드와 기사가 있었다. 그들이 맨 먼저 나오는 나를 보고 알은 체 했다. 나는 버스에 올라 아이스박스에 있는 물을 한 병 챙겨 들었다. 그리고 사탕을 하나씩 현지 가이드와 기사에게 돌리고 투데이 워킹투어! 라고 짤막하게 말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버스 뒤편으로 돌아 호텔 마당을 빠져나와 대로를 따라 한참 걸어 내려가니 가로수로 서 있는 야자수 사이로 정글로 빠지는 비포장 길이 나왔다. 무작정 그 길로 들어섰다. 마을로 들어가는 지름길인 모양이다. 코끝에 낯선 바람이 휘감고 지나갔다. 내가 집시가 되는 순간이다. 익명성의 해방감! 그것은 바로 발기를 불러오는 것이다. 익명성은 발기를 유발한다. 이 말은 나에게만 국한된 명제다. 낯선 곳에 가면 이상하게도 발기인대회 주최자가 되는 것이다. 참 희한한 신체 구조다. 바지 앞섶이 잔뜩 부풀었다. 발기를 달랠 방법이 없다. 시간이 흐르도록 기다리는 수밖에는, 너무 팽팽히 부풀어 걸음을 걷기 곤란할 정도였다.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어 발기된 물건을 움켜쥐고 야자수 그늘에서 오래토록 서성이고 있었다. 해는 내가 들어가는 길 왼편에서 솟아올라 있었다. 그 쪽이 동쪽인 모양이다. 방향만 알면 길을 잊을 염려는 없다. 숙연하게 애국가를 속으로 몇 소절 부르고 나서야 발기대회가 끝났다. 마음이 몸을 지배한다는 말이 맞다. 나는 해방감을 느끼며 열대의 잡목들이 우거진 길을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조금 들어가니 들판이 보였다. 무논인데 벼를 베어 놓은 곳도 있고 갈잎으로 만든 모자를 쓴 사람들이 구부려 모를 심고 있는 논도 보였다. 삼모작 정도는 하는 모양이다. 그 길을 따라 쭉 들어가니 마을이 나왔다. 인터넷에서 보았던 판자로 만든 집이다. 그 첫 집을 기웃거리다가 무작정 골목을 들어섰다. 열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처녀가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학생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마당에 있는 평상에 걸터앉으며 인사를 했다. -쑤어 쓰다이. -쑤어 쓰다이. 처녀도 나를 보고 인사를 했다. 느닷없이 들어온 이방인에게 다소 수줍은 듯 나를 힐끔 보고는 구부려서 허리춤이 드러난 티셔츠를 당겨 허리춤을 감추고 하던 빨래를 하고 있었다. 벌써 땀이 이마에 맺혀 있었다. 수줍어하는 처녀에게 말을 걸지 않고 평상에 걸터앉아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일어나 집안을 둘러보았다. 전형적인 캄보디아 가옥구조였다. 우기에 습기가 차지 않도록 어른 키 높이의 사각으로 된 기둥을 세우고 수상가옥처럼 그 기둥 위에 판자를 깔고 벽은 야자수 잎을 엮어 통풍이 잘되게 세우고 지붕은 볏짚으로 비가 들어오지 않게 씌운 초가의 구조다. 기후에 맞는 아주 과학적인 구조였다. 집 뒤란은 정원이었다. 정원에는 바나나 나무가 있었다. 뱀이 바나나 나무에서 나는 향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집을 지으면 정원에 누구나 바나나 나무를 심는다고 했다. 뱀의 퇴치법은 그 뿐이 아니다 기둥을 사각으로 만든 이유 또한 뱀이 올라오지 못하게 사각으로 만들었다. 둥근 기둥이라면 뱀이 똬리를 틀고 올라올 수도 있다는 우려로 사각으로 만든다고 했다. 불교국가라서 집집마다 신주단지 모시듯이 나무로 깎아 세운 키 높이의 불단이 있다. 꼭 애완조류의 새집 같았다. 그 집도 마당 한 귀퉁이에 파란색으로 칠한 불단이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가서 옆에 놓인 향을 하나 집어 불을 피워 향로에 꽂고 합장을 했다. 이방인과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내 행동에 소녀는 놀라는 듯했다. 그 집을 나서며 처녀에게 인사를 했다. -오꼬지날! -바이바이! 처녀는 빨래를 짜다가 멈추고 영어로 잘 가라고 인사를 했다. 나는 골목을 나서다 말고 다시 들어가 처녀에게 주머니에 든 사탕을 한줌 집어주었다. 처녀는 고른 치아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으며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받았다. 처녀는 영어로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유창했다.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자 처녀는 오~ 꼬레! 라며 놀라워했다. 캄보디아에서는 한국이 꼬레라고 불리는 모양이다. 다시 처녀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사람간의 정은 이렇게 살아나는 법이다. 나는 골목 깊숙이 마을로 들어갔다. 가다가 꼬마를 만나면 사탕 하나를 내밀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을 만나면 쑤어 쓰다이! 하며 인사를 빼놓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다정다감해 보였다. 마을 깊숙이 들어가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다가 사람이 있으면 쑤어 쓰다이! 하고 들어가서 집안을 둘러보고 불단에 향을 하나 피워놓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어른을 만나면 담배 한 개비를 내밀고 아이를 만나면 사탕하나를 내밀곤 했다. 모두가 경계심을 허물어버린 얼굴로 친근하게 맞아주었다.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사람 사는 구경을 하고 나오니 어디선가 무엇을 두드리는 소리가 딱, 딱, 하며 일정한 간격으로 들렸다. 그 소리가 너무나 경쾌했다. 나는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보았다. 두 집 건너 바로 다음 골목의 공터였다. 꼬마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가운데 평상에 한 남자가 앉아서 무언가 조각품을 깎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하나씩 돌리면서 보니 사십대의 남자가 평상에 앉아 끌과 나무망치로 불상을 조각하고 있었다. 불상은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평상에 걸터앉았다. 소쿠리에 담긴 끌과 연장은 보잘 것 없지만 그것을 다루는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도면 같은 것은 없었다. 도면은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모양이다. 사탕을 받은 꼬마들은 하나 둘 돌아가자 작품에 몰입하고 있는 그에게 담배를 한 개비를 내밀었다. 그는 웃으며 받아 물었고 나는 불까지 붙여 주었다. 물론 나도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말을 통하지 않지만 영어와 손짓발짓으로 이것저것 물어가며 한참을 그와 놀았다. 그가 만들고 있는 것은 불상인데 광배로 머리가 일곱 개 달린 뱀의 형상이었다. 좌대는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연화대인데 반해 그가 만들고 있는 좌대는 뱀이 똬리를 틀고 있고 그 뱀이 부처의 등을 휘감고 올라가 머리가 일곱 개, 그중에서 중간에 있는 뱀 머리가 가장 크게 아가리를 벌리고 광배가 되고 있었다. 그는 끌질을 하다말고 바로 아래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 금세 조그만 앨범을 들고 나왔다. 앨범에는 나무로 만든 문이나 나무로 깎은 불상, 나무로 만든 호텔 장식장 등속이 찍힌 사진이었다. 모두 자기가 직접 손으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일테면 그는 소목이고 장인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작품이 좋다고 굿! 하며 엄지를 세워 내밀었다. 사진을 보며 자기 작품에 관심을 가져주자 그는 건강한 치아를 드러내고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끌질을 했다. 딱, 딱, 딱, 끌을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가 장구나 북을 두드리듯 리듬을 지니고 있었다. 그 리듬을 한참 듣다가 그에게 다시 담배를 권하고 몇 컷의 사진을 찍고 그 골목을 빠져나와 다음 골목으로 들어섰다. 아이들이 우글거리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천진한 아이들은 낯선 이방인을 구경삼아 나를 빙 둘러섰다. 나는 아이들에게 사탕을 하나씩 돌리자 바로 옆에 있는 집에서 아이 셋이서 밥을 먹다말고 사탕을 받으려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까지 사탕을 돌리고 집안을 기웃거렸다. 어른들이 밥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그 중에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합장하며 인사를 대신하고 신발을 벗고 나무계단을 올라갔다. 밥을 먹는 것을 보니 상은 없고 마룻바닥에 앉아 제각기 그릇에 밥을 퍼고 먹는데 반찬이라곤 손가락만한 이름 모를 물고기 튀김이었다. 젓가락도 없이 손으로 물고기 튀김을 소스에 찍어 먹고 있었다. 밥상머리, 아니 그 식사자리에 끼어 앉자 안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에게 뭔가를 물었다. 눈치로 미루어 밥을 줄까하는 말이다. 나는 다시 인사를 하며 거리낌 없이 달라고 했다. 금세 밥그릇에 밥을 가득 퍼서 숟가락과 함께 내 앞으로 내밀었다. 너무 많은 양이었다. 나는 밥을 조금 들어내고 그들과 같은 방식, 손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밥을 먹으며 아주 맛있다고 했다. 시간은 이미 점심시간을 넘어서고 있었고 시장기가 돌 시간이었다. 때를 맞추어 밥을 먹는 집에 들른 것이다. 그렇게 먹는 밥은 맛이 있었다. 반찬을 가만히 보니 물고기 중간에 좀 이상한 고기가 있었다. 내가 그것을 집어 들고 살펴보자 그 집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펄쩍펄쩍 뛰는 개구리 흉내를 내었다. 개구리 튀김인 모양이다. 내가 그 개구리 다리를 뜯어서 소스에 찍어 먹자 아주머니가 가만히 보더니 계단을 내려가서 서너 마리의 개구리튀김을 더 가지고 올라왔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개구리튀김으로 밥을 먹었다. 어릴 적에 뒷산에 소 풀을 뜯으러 가서 친구들과 어울려 잡아서 구워 먹어보고 처음 먹어보는 개구리다. 그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먹고 남은 뼈나 물고기 머리는 마룻바닥에 가지런히 모아두니 한 아이가 그것을 마룻바닥 틈이 벌어진 곳으로 밀어 넣었다. 가만히 보니 마룻바닥 밑에 키우는 닭들이 그것을 쪼아 먹고 있었다. 음식물 찌꺼기를 간단하게 처리하며 동물과 공존하는 방식이었다. 밥그릇을 물리고 주인 남자와 담배 한 대를 나눠 피우고 있으니 안주인이 텔레비전을 틀어주었다. 한국방송이었고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뉴스들은 내 관심을 끌지 못했고 나는 그들이 분리해놓은 방안을 슬쩍 훔쳐보았다. 야자수 잎을 잘라서 엮은 벽체지만 안방과 아이들 방을 분리해 놓았다. 밥을 먹고 앉아있는 곳은 바로 거실인 셈이다. 윗도리를 입지 않고 목도리만을 목에 걸친 그 집 아들로 보이는 스무 살쯤으로 보이는 청년이 영어로 이것저것 물었다. 나는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고 담배를 다 피우고 둘러앉은 식구 중에서 그 집의 안주인에게 지갑에 든 10달러짜리 한 장을 내밀고 합장을 했다. 고마움을 돈으로 표현하는 건 썩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그 방법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안주인은 사양하지 않고 합장을 하며 받아주었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골목을 빠져 나오려고 하니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집 아들이었다. 역시 윗도리를 입지 않고 햇빛가리개로 쓰는 목도리를 걸치고 열대의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어깨를 드러낸 채 좇아왔다.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는 나에게 내 숙소까지 오토바이로 태워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극구 사양했으니 내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그는 꼭 태워주겠다고 고집했다. 지금 워킹투어 중이니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오겠노라고 말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이집 저집 기웃거리며 마을을 돌았다. 집들이 대충 고만고만했다. 그런 집들을 훑어보며 지나가다가 아주머니가 서너 살 된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현대식 시멘트로 지은 집이고 마당이 넓은 게 집구조로 미루어 좀 부유해 보이는 집이었다. 쑤어 쓰다이! 밥을 먹이고 있는 아주머니께 인사를 하고 차광막에 밑에 있는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한눈에 보아도 아이의 할머니로 보이는데, 참 곱게 늙었다 싶을 정도로 정정하고 곱상한 얼굴이었다. 아주머니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고 보니 아주머니가 앉은 뒤쪽에 불단이 보였다. 나는 그곳으로 가서 향에 피우니 아주머니가 금세 새끼손가락 굵기의 노란색 양초를 가져와서 내밀었다. 나는 초에 불을 붙여 불단에 올려놓고 합장을 하고는 1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향로 옆에 올려놓았다. 일종의 시주인 셈이다. 아주머니가 그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고는 밥은 먹었냐고 물었다. 밥을 먹었다고 대답하며 배가 부르다고 배를 쓰다듬어보였다. 길손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고마웠다. 차광막 아래 의자에 앉아서 아이가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주머니가 집 뒤란을 가리키며 정원을 구경하라고 했다. 나는 그렇잖아도 정원을 둘러볼 참이었다. 집 뒤로 돌아가니 참 정성스럽게 열대수와 이름 모를 화초들을 가꾸어 놓았다. 키가 큰 야자수와 바나나나무를 비롯하여 열대의 식물원처럼 가꾸어져 있었다. 아주머니의 세심한 손길이 닿은 곳이다. 정원 가운데에는 야자수와 야자수 사이를 묶어놓은 그물침대가 있었다. 그물침대 위에 기둥을 네 개 세워 지붕은 함석으로 따가운 햇살이나 비가 스며들지 않도록 만들어놓은 쉼터였다. 나는 신발을 벗어놓고 올라가 누워보았다. 살짝살짝 흔들리는 게 참 안락하고 편안했고 흔들림에 기분 좋은 현기증까지 일었다. 나는 그 현기증을 즐기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꿈도 꾸지 않고 잔 달콤한 잠이었다. 이렇게 곤히 자본 적이 얼마만인가? 시계를 보니 겨우 이십 분 넘게 잤다. 너무도 꿀 같은 낮잠이었다. 일어나 신발을 신으려고 보니 내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신발 옆에 작은 소반에 파파야 하나와 과도, 그리고 물 한 컵이 정성을 담뿍 담고 놓여 있었다. 아주머니가 나를 주려고 가지고 왔다가 잠이 든 나를 보고 두고 간 모양이다. 그건 하나의 먹을거리이기 이전에 뜨거운 감동이었고 세심한 정성이었다. 신발까지 신기 좋게 돌려서 가지런히 놓아둔 배려! 울컥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나는 그물침대에서 내려와 소반과 그물침대를 카메라에 담았다. 이 사진은 돌아가서 내 노트북 메인화면에 올려놓고 노트북을 켜고 끌 때마다 이 달콤한 잠을 떠올리리라고 다짐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평생 가장 달콤한 잠이었다.  
118 괴뢰군 인형 외1편/임술랑 file
편집자
3989 2011-04-30
11.05월 12호 시 괴뢰군 인형 임술랑 개운못 예비군 훈련장 전봇대에 묶어 놓은 괴뢰군 프라스틱 인형 늠름하다 꽃도 피었다 지고 낚시꾼도 왔다가 가고 단조로운 햇살만 내리쬐는 날 바람 속에 멍하게 있다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그와 둘이서 듣는다 편하고 한가하다 그는 총을 들고 지키고 그 옆에서 나는 한숨 잔다 伏龍洞幢竿支柱 임술랑 내가 이 당간지주 앞에서 머뭇거릴 줄 몰랐다 그러다가 이 지주처럼 여기서 붙박일 줄도 모른다 거대한 기둥을 세워 佛깃발 휘날리던 하늘은 크고 바람도 많다 당간지주가 있는 횡단보도 여기 머뭇거릴 이유가 있는가 내가 그대를 몹시도 사랑하는가 살이 뽀얀 당신 아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117 예수의 가출 외1편/안병호 file [2]
편집자
6187 2011-04-30
11.05월 12호 시 예수의 가출 안병호 -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예레미야 5장 30절) 나의 본성은 원래 좌파였다.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섰고, 바닥에 팽개쳐진 이들을 위해 기도하였으며, 분별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뜻을 증거하였다. 그런데 동방의 목사들과 장로 때문에 삼류 드라마 보다 더한 막장을 보고야 말았다. 말도 소리도 아닌 역한 소음으로 인해 내 귀에선 진물이 흐르고 심히 쪽이 팔린다. 하여 관련된 증빙 몇몇만을 남겨두고 이제 나는 떠난다. (이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지금 집나간 예수께서는 찬바람 몰아치는 어느 지하도 계단 아래에서 추위에 떨며 담배 한 개비 물고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 붉은 불빛 출렁이는 이 밤에도 『관련된 증빙들』 . K모 목사 나는 얼음 깨는 배가 되어 앞으로 나아가겠다. 불교, 우상 깨부수고 나아가겠다. 봉은사에는 떡이나 얻어먹는 20만 명이 있다. . G모 목사 중들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하나님 믿어라. . S모 목사 내가 대놓고 이명박 찍으라고는 못하고, 그래서 뽑힌 대통령인데 어떤 사람들이 지금 막 퇴진하라고, 그런 싸가지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 같은 소리를 해야죠. 더구나 머리를 밀은 사람들이, 정신 나간 사람들이여. . J모 목사 (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사태에 대해) 일본국민이 신앙적으로 볼 때는 너무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 무신론, 물질주의로 나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위대한 장로 가카 못생긴 마사지 걸이 서비스가 좋다. 돈 없는 사람이 정치하는 시대는 끝났다. 부실 교육의 핵심은 교육을 책임진 사람들이 모두 시골 출신이라는 데 있다. (자식을 위장 취업시켰으면서) 우리 집 가훈은 정직이다. (등록금 반값 공약을 해 놓고) 등록금 싸면 교육 질 떨어진다 …… 배경 어느 별에서 추락한 물상처럼 나는, 아무도 없는 해변에 우두커니 박혀있다 경계 밖 시간을 함께했던 여자의 희미한 그림자가 섬 그늘에 포개져 실려 온다 오래 앓은 위통은 파도에 더욱 더 서늘해지고 몸속을 떠다니던 계절이 낙엽처럼 뚝 뚝 진다 백사장에 밀려 온 하얀 소라 고동 한 마리, 바다의 불규칙한 악장에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는데 저것도 위통을 앓았는지 내장이 모두 상해 있다 내가 지녔던 시간은 대체로 눈이 젖었고 여자가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릴 때마다 손가락 사이에서 바다가 시름시름 앓았다 파도와 음악 그리고 청담빛 섹스는 내가 지향한 불온이념이었기에 지워지지 않을 전과가 늘었는데 나는 불편한 형식으로 등장했고 불편한 형식으로 아웃됐다 버려진다는 것은 속부터 상해가는 것, 발을 떼면 할퀴어진 몸 안쪽 대륙이 점점 침식됐고 아팠으므로 매일, 죽지 않을 만큼 술을 마시고 내가 속한 별의 자전과 공전을 계산했다 그러므로 다시 아팠다 소줏집 은하포를 나와 어두운 바다에 서면 별들은 서론과 결론 없이 추락했고 쓸쓸했다 일인 병실, 말기환자처럼 꿈은 실종상태였고 피는 늙어갔다 증오마저 사랑한다는 것은 미지를 향한 고독한 항해이므로 방향을 잃고 한데서 끼니를 마셨다 내 문명이 된 위통의 배경은 그렇게 형성되었을 터 배경이 바람이 몰고 온 그림자 쪽으로 휜다 저 소라 고동도 어느 별에서 버림받고 추락하여 내장까지 할퀴어져 이곳까지 흘러왔는지 외계에서 수신된 소리로 울음 울고 있다 윙- 윙- (안병호) 프로필 . 경남김해 출생 . 2009년 『포항문학』신인상 . 2010년 『불교신문』신춘문예 당선 . . 메일: dominiko8@hanmail.net  
116 아브라카타브라 외1편/곽도경 file
편집자
4281 2011-04-30
11.05월 12호 시 아브라카타브라 곽 도 경 대가야체험축제 마지막 날 역사테마공원 입구 키 작은 나무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소원을 읽는다. ‘동성로 여자들 다 상혁이꺼’ ‘하늘에서 멋진 남자들 주룩주룩 떨어져라’ ‘나만 잘 되게 해 주세요 오직 나만......’ ‘똥방오빠 여드름 빨리 낫길’ 어이없고, 황당하고 이기적이고, 재미있고 기발한 소원들 훔쳐보다 무슨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소리 죽여 키득키득 웃는다 문득 내 소원은 뭘까 마음에게 묻는다 소원 하나 없이 살았는지 선뜻 답을 찾지 못한 마음이 남의 소원지 위를 몇 바퀴 서성인다 다른 이들의 소원 앞에서 오히려 내가 더 간절하다 아브라카타브라 아브라카타브라 복수초 곽도경 약속도 없이 너를 기다린다 네가 올 것만 같은 그 산자락에 언제나 너 보다 먼저 가 기다리는 동안 고장 난 심장은 늘 그렇게 쿵쿵거리고 세상 누구보다 먼저 봄을 데리고 온 네가 금빛 얼굴 세상 밖으로 쏘옥 내밀면 눈이 부셔 나는 너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오래 기다렸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환해진 허공만 널 만지 듯 가만히 쥐었다 놓는다 ********* 대구시민백일장 입상 한맥문학 신인상 계간 시선 신인상 고령문학상 현대불교문인협회 회원 은시동인 대구문학아카데미 회원 고령문인협회사무국장 시집/ 풍금이 있는 풍경  
115 아는 게 없네 외1편/육봉수 file
편집자
5004 2011-04-04
11.04월 11호 시 아는게 없네 육봉수 몽울 맺은 생강나무 꽃가지 꺾어와 연필꽂이 통 비워 모양대로 꽂는데 여보 이 꽃은 왜 생강냄새가 날까? 몰라 하루 종일 잔디 심고 받아 든 일당 팔만원 침 바른 엄지손가락 힘주어 세고 또 세는데 왜? 적어요? 글쎄요 사모님 잘 모르겠어요 수니파와 시아파가 얽히고 섥히고 민주와 반민주가 끼어들더니 반정부가 정부를 몰아 부치는 듯 하다가 다시 정부가 반정부를 쫓아다니고 있는 아랍 아프리카 상황 속보의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아빠! 저 나라들은 왜 맨날 지네들끼리 지지고 볶고 저 모양이야? 모르겠다 아들아 소문에는 고삐를 묶어 죄였다. 풀었다. 싸움을 붙이는 보이지 않는 검은 손들 있다는데 뭐가 뭔지 아빠도 정말 잘 모르겠다. 그리운 선생님께 육봉수 시린 바람받이 문풍지 운다고 방안 화로 곁불이나 쬐시며 성에꽃 망연히 바라보시던 분 아니셨지요 밤새 내려 가벼운 가지 같은 건 하얗게 뚝뚝 꺽어 내리시던 눈꽃 이셨지요 어느틈 촉촉히 내린 빗물들 모아 엉덩이 툭툭 두드려 얼리셨다가 햇살 아래 비로소 눈물 처럼 떨어져 스미게 하시던 얼음꽃 이셨지요 이영희 선생님  
114 어이쿠/고석근 imagefile
편집자
3577 2011-04-02
11. 04월 11호 수필 좁은 인도에서 자전거를 조심스레 타고 가는데 갑자기 가게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뛰쳐나왔다. 나는 양손으로 급하게 브레이크를 잡고 그와 부딪치기 직전 자전거는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어이쿠! 이 말을 함께 남기고 그와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각자의 길을 갔다.  
113 아름다운 시절/정복태 file
편집자
4167 2011-04-01
11. 04월 11호 소설 아름다운 시절 정 복 태 느티나무는 마을의 중심에 있었다. 여름철이면 거의 모든 마을 사람들의 쉼터로써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더러는 세상의 가장 나른한 모습으로 낮잠을 즐기던 동네 노인네들의 잠을 깨우는 바람에 시끄럽게 하던 아이들이 혼줄을 당하는 때도 자주 일어나기도 했다. 느티나무 가지속의 새들이 그런 광경을 보면서 소리를 질러대면 아이들은 언제 우리가 혼줄을 당했느냐는 모습으로 이곳 저곳을 쏜살같이 내달리고 있었다. 마을 앞은 강이 흘렀고 사람들은 그 강물을 퍼다 밥을 해먹었고 묵혀 두었던 빨래거리를 강물에서 빨았다. 강은 마을의 동쪽 끝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흘렀는데 여름철에는 더위를 못 참은 아이들이 해마다 그곳에서 빠져 죽었다. 그러면서 여름철 강물은 범람하여 마을의 논밭을 다 지은 농작물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강 맞은 편에는 산의 낮은 자락으로 나있는 신작로가 펼쳐져 있는데 그 길의 언덕머리에 관수루 정자가 우뚝 서있었다. 15C부터 세워져 그 당시의 시인묵객들이 주연과 더불어 시를 읊조리며 가까운 곳의 역참에서 밤을 보내고 정자의 한 자리에 자신의 시 한 편 씩을 남기고 떠난 곳이었다. 관수루에서 바라다 보면 동쪽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흘러가는 강의 전모가 한 눈에 드러나고 긴 모래밭이 강을 따라 길게 펼쳐져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름의 홍수를 위하여 강 입구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버드나무는 그 연한 목질로 하여 목재의 역할을 못하였지만 성큼성큼 자라는 성장 속도로 하여 사람들이 즐겨 심었던 수종이었다. 여름철 홍수로 불었던 물이 빠져나가면 동네 사람들은 버드나무 사이로 천렵을 하였다. 붕어며 버들치, 강새우 그리고 잉어 등 사시사철 보리밥 한 덩이로 단백질 부족의 마을 사람들의 영양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무엇보다 이 곳의 장관은 두 마을을 강이 막아서 서로 간 단절된 두 공간을 큰 목선을 만들어 서로 간을 소통하도록 이어주었다는데 있었다. 하루에 몇 차례 지나가는 버스도 이 목선으로 건넜다. 목선에서 일하는 사람을 사공이라고 했다. 대부분 뱃사공들은 이쪽 마을의 버드나무가 우거진 나루의 입구에 얼기설기 임시로 만든 집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부실한 목재로 지어진 처소에서 살았다. 목선의 입구로 신작로 옆으로 버스 승객들이 잠시 강을 건널 때의 머묾을 이용하여 작은 요기를 파는 가게들이 나란히 줄을 이어 생겼다. 그곳에는 막걸리만도 흡족하게 마시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처음보는 싸구려지만 양주도 있었고 양과자며 일본제 과자도 팔았다. 마을의 아이들은 목에 나무로 만든 목판을 만들어 목에 걸고 땅콩이며 자잘한 주로 먹을 것 중심으로 된 물품들을 버스 승객들에게 팔았다. 강물은 사공들의 튼실한 두 어깨에 의해 긴 장대로 강을 건넸다. 대부분 사공들은 아침이면 막소주 한 사발로 그런 힘든 일을 시작하여 종일 그렇게 거의 취해서 그 일을 하곤 했다. 해방 후 선거철마다 강으로 막힌 두 지역을 이어줄 다리를 국회의원 선거에 나선 입후보자들은 약속했지만 국회로 간 그들은 그 이후 그 약속을 까맣게 잊었고 조금 양심이 있는 인사는 그 곳에다 다리를 준비하는 다릿목을 하나씩 박았다. 그것이 선거용 다릿발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선량들을 비웃었다. 그러나 두 마을을 이어주는 다리는 세워지지 않았다. 더욱 난감한 일은 해마다 여름철의 홍수로 하여 수십만 년의 흐름으로 만들어진 삼각주 마을 평야의 다자란 곡식들이 물에 잠겨서 마을사람들의 한숨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라는 이런 작은 마을까지 국가적 지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옛적 목선에서 수십 걸음 가까이 일제 시대의 주재소와 동척 지소가 있었다고 하는 곳은 이제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도로를 따라 대부분 논으로 이어져 있고 그 뒤로는 밭이 넓게 펼쳐 있었다. 마을에는 초등학교가 하나 도로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세워져 있었다. 유일한 이곳의 교육기관인 이 초등학교는 마을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봄과 가을 두 차례 있었던 학교 운동회는 마을의 축제였다. 백군 청군으로 나누어 학부형은 자신의 아이들 편에서 어른들과 아이들은 맹렬한 응원으로 운동회에 열광하게 만들었다. 그 날은 마을의 축제였다. 술에 취한 어른들이 더러 말다툼을 넘어 드잡이도 벌어지곤 하는 것이 다반사였지만 마을 사람들은 운동회에 모두 모여 농사일로 힘들었던 시름겨웠던 일들을 이 날 하루만은 모두 잊어버리는 시끄러우면서 활기와 즐거움이 가득한 하루를 보냈다. 봄 가을 두 차례의 초등학교 운동회는 그렇게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공동 축제의 장 역할을 해 냈었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기 전 아주까리 기름이나 겨우 동네 시장의 철물점에서 한됫박 사온 석유 등잔이 마을 사람들의 어둠을 밝혀주는 재료였다. 우리는 어렸을 때 그런 어둠침침한 속에서 연필에 춤을 묻혀가며 숙제를 했고 이튿날이면 코끝이 새까매진 것을 서로 보며 웃기도 했다. 언제나 먹는 문제가 가장 큰 이 곳 사람들의 걱정이었다. 대부분 소작농이었던 마을 사람들은 사시사철 온몸으로 일을 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식량은 늘 모자랐다. 아이들은 그것을 못참아했고 그 어린 아이들을 보는 부모들은 돌아서서 한숨을 쉬었고 어미는 눈물을 훔쳤다. 봄이면 벌써 보릿쌀까지도 떨어지고 먹을 것이 없는 집들은 아직 겨우 올라온 쑥을 뜯어서 기울에 버물러 끼니를 이어가는 참으로 흉측한 궁핍을 견뎌야 했다. 그래도 철없는 우리는 앞산에 뛰어노는 야생 산짐승처럼 동네를 휩쓸며 뛰어 놀았다. 동네 한 가운데 동네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수령이 500년도 더 되었다고 전해 내려오는 느티나무는 자고 일어나면 우리 어린 것들이 뛰어놀던 놀이터였다. 느티는 아fot도리가 패져서 깊은 상흔에도 불구하고 희안하게 봄이 되면 잔잔한 잎을 솟구치며 여름으로 들어서면 짙은 녹음으로 우리 어린애들의 놀이터를 만들어 주었다. 단오가 되기 한 달 전부터 마을 장정들은 마을 어른들의 지시를 받으며 그네줄을 꼬았다. 느티나무의 실한 가지에 한 달 정도를 꼬은 굵은 동아줄로 그네를 매었다. 단오 전 날 마을 어른 한 분이 부디 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기원을 드리는 고사를 드리고 나서 이튿날 단오가 되면 동네 사람들은 동네 아낙네와 처녀애들의 치마와 함께 하늘 위로 솟구치는 아름다운 모습에 마을 사람들의 환성과 고함소리로 느티나무 밑은 분주해 지기 시작하여 거의 열흘 정도의 그네 타는 즐거운 축제가 이어졌다. 이 날 단오에는 아낙네들도 더러 치마가 바람에 휘날려 속 옷이 조금 드러나도 흠이 되지 않았다. 여인들에게 이 날 단오는 집안 담 안에서 지내다가 마음껏 바깥세계를 구경하는 날이었다. 오후가 되면 마을 풍악대가 흥겨운 풍악을 울리며 흥을 돋우며 한 켠에서는 돼지 한 마리가 삶겨져 온 마을 사람들의 뱃속을 즐겁게 하였고 술이 한 순배 돌아가면서 마을의 느티나무 아래는 최고의 놀이판이 벌어져서 여기저기서 춤을 치면서 왁자한 즐거운 웃음이 퍼져 올랐다. 그러면 우리 어린 것들은 덩달아 어른들 사이를 돌면서 한껏 단오의 기운과 무한한 즐거움을 느꼈다. 어른이 되어서야 옛 어른들이 단오절을 지켰던 세시풍속의 의미에 의하면 단오는 남자의 정기가 가장 강한 날이고 남의 집 일을 하는 머슴들에게도 이 날만은 용돈과 술과 고기를 주인이 대접했고 편안한 하루의 휴식을 허락한 날이라고 한다. 여인네들은 청포로 머리를 정갈히 감기도 했다. 단오도 끝나고 끊겨 나간 그네줄을 멍하니 보면서 흥겨웠던 단오의 기쁨을 떠올리며 시무룩히 느티나무 가지 위에 올라가 멀리 강물을 바라보면 강물은 미루나무 사이로 투명하게 빛을 품어내고 있었다. 긴 삿대로 목선이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까지 먼 빛으로 보였다. 동네의 장난꾸러기 아이들은 갑자기 할 일을 잊어버린 듯 시무룩해져 활기를 잃어버렸다. 빛을 반사시키는 강물 위로 목선이 움직이는 광경을 보면서 저 목선을 건넌 버스는 어디까지 가는 지 그 향방이 늘 동경과 더불어 마을의 아이들은 몹시 궁금하기만 했다. 그때 우리가 알던 거리 감각은 고개를 넘은 바로 그 저쪽이 사람들이 가는 대구란 곳인 줄 알았다. 사실 우리는 초등학교를 마친 삼촌들이 돈을 벌기 위해 갔던 서울에서 명절날 고향을 다니러 온 일이 신기하기만 했다. 우리 아이들은 한 번도 서울은 커녕 대구조차 가본 적이 없는 피안의 저쪽 땅이었다. 강어귀에서 놀다가 목선에 실려 가던 버스에서 잠시 내린 손님들은 우리들에게 특별한 사람처럼 신기하게만 보였다. 강의 저 먼 곳으로 주름지어 끝없이 이어진 산들의 겹친 모습처럼 느티나무 위에서 바라보는 버스의 향방은 언제나 그리움과 더불어 깊은 동경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때 이르게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여름이 천천히 저 멀리서 오고 있었다. 여름철에는 강물이 불어서 마을 옆으로 냇물조차 강폭처럼 깊어질 때가 있었다. 처음 비가 시작하면서 논배미마다 있는 작은 보에서 물이 흘러 강으로 흐를 때면 우리는 작은 찌그러진 양동이를 들고 시냇물이 모래밭을 적시며 보에서 강으로 향하던 붕어며 강새우와 메기들을 주어 담았다. 점점 강물이 불어서 강어귀로 밀려나온 피라미들도 양동이에 담기에 바빴다. 대충 반 시간쯤 되면 양동이는 민물고기로 거의 반쯤을 채워져 집으로 오면 그날은 각자의 집에서 매운탕을 끓여서 집안 어른들의 술추렴이 벌어졌다. 어른들의 누렇고 탁한 이빨 사이로 일제시대와 해방 후의 아팠던 사람들의 드난살이의 슬픔이 배어든 유행가가 육자배기의 민요와 함께 집집마다 흘러 나왔다. 그러나 대체로 동네 사랑의 장년층 사내들의 사랑방에서 함께 합창으로 흘러나오는 일이 많았다. 빗소리와 그 합창의 유행가 가락은 참으로 끈적하게 밀착하여 두 소리의 교합을 몹시 듣는 사람에게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마력을 가졌다. 그것은 이 땅의 장삼이사가 겪었던 사람살이의 공통된 슬픔이었기 때문일까. 밖에는 비가 내리고 노래 소리는 이윽하니 취한 장년 사내들의 힘든 농사일에서 겨우 한숨을 쉬게하는 축복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여름의 일은 이런 기쁨만은 아니었다. 뙤약볕을 견디지 못했던 조무래기 동네 애들 중의 하나가 강물에 익사하는 날이던지 이웃 마을의 처녀를 사모하던 떠거머리 못난 청춘이 큰 못에 몸을 던져서 동네를 온통 눈물 바다로 흥건하게 젖게 할 때는 마을에는 신원 굿이 벌어졌다. 원혼을 풀어주는 신원굿을 하는 큰 무당은 마을의 외곽지에 혼자 살았다. 젊은 나이에 원통하게 이승을 떠난 가여운 넋을 그 원혼을 풀어주는 굿은 온 동네 아낙네들이 모인 곳에서 사고로 죽은 집의 마당에서 벌어졌다. 무당의 징소리와 온갖 원색의 무녀의 옷차림, 머리에 쓴 모자, 듣는 사람의 마음을 헤집어 놓는 음색, 대나무을 잡은 대잡이가 무당의 신통력으로 죽음에 이른 과정을 쏟아놓게 될 때, 마을의 모든 사람들은 하릴없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고 눈물의 강을 이루었다. 남정네들은 차마 아낙네 틈서리에서 울지 못하고 멀리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사람의 슬픔은 무녀의 귀기서린 단장의 애끓는 타령에 무녀의 신통력에 감탄하며 흑흑하며 그 슬픔에 목이 메였다. 해마다 강의 신은 이런 어린 동네 아이들을 한둘씩 희생시켰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이 마을의 액운이라고 했다. 억울한 죽음에 대하여 신원을 풀어주어야 동네의 피해가 없어진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여름은 그렇게 길게 이어지면서 뜨거운 햇빛과 며칠씩 계속되는 지루한 장마와 지겨운 콩밭이며 논의 피살이 같은 힘든 노동과 더불어 깊어 갔다. 동네 한 가운데 서있는 느티나무는 오후의 한 때 마을 사람들의 휴식 공간을 톡톡히 해냈다. 우리 어린애들은 어머니의 걱정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느티나무로 올라가 술래잡기도 했고 소꼬리털로 매미를 잡기도 했다. 홍수로 강이 불어나면 강을 마주한 두 마을 사람들의 왕래가 당분 간 끊기기도 했다. 목선은 그 와중에도 마을을 지나는 버스와 트럭을 옮겨주기 위해 위험한 도강을 하기도 했다. 1930년 무렵 강은 그 아래의 바다에서 내륙으로 소금을 실어나르던 경유지였다. 나루라 불리어 지던 그 시절에는 주막이라는 이름의 밥집이 있었다. 보부상이라 불리어 지던 한 무리의 상인들이 나루에서 소금을 받아 더 큰 마을로 소금을 날랐다. 나루에서 마을의 중심을 지나 ‘부치데이 고개’라는 고갯길이 있었다. 근처에서 가장 높은 나각산이 뻗어내린 곳으로 가끔 화적이 출몰하기도 해서 도부꾼들은 고개에다 부처를 모시는 절을 세웠다. 그래서 이 고개를 ‘부처당 고개’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강의 선창은 언제나 막소주에 벌건 얼굴을 한 사공들과 동네 왈패들의 불콰한 술에 취한 모습이 있었다. 아비의 담배 심부름으로 나루에 가면 빼꼼히 내민 저고리가 풀어 헤쳐진 술집 작부들의 모습들을 보고 기이한 마음을 아이들에게 가져다 주기도 했다. ‘삐루’라 불리어지던 캔 맥주도 이곳 선창에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언감생심의 술이었다. 6.25전란과 더불어 유행한 이 삐루란 맥주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천상의 술로 마시기에는 너무 고가의 상품이었다. 6.25전란으로 나라가 어지럽던 시절 강은 피난민들이 여기저기 모진 목숨을 유지시켜 주기도 한 주요한 터전이기도 했다. 이 곳 강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남부여대하여 청도 밀양까지 걸어서 한많은 피난을 갔었다. 멀고 가까이 포성이 울리는 그 때 굶주림과 의식주가 최악의 상황에서 오직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마을 사람들은 난리를 피해야 했다. 마을마다 집안에 거름터라는 곳이 있었다. 이즈음으로 보면 쓰레기를 모아 놓는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다. 피난을 가는 사람들은 가벼운 귀중품은 피난살이에서 즉시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휴대해서 가져 갔지만 무거운 것들은 대체로 자신의 집 거름터에다 깊이 묻고 떠났다. 전란이 끝난 후 돌아온 마을은 가옥은 물론이고 논밭까지 샅샅이 폐허화 되어 있었다. 한숨을 쉴 사이도 없이 먼저 어른들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논밭마다 묻혀 있는 포탄알의 빼냈고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을 베어내고 먹을 수 있는 작물을 심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미국이 준 구호시품인 밀가루, 옥수수 가루, 분유 가루를 받아서 집으로 가져왔다. 들에서 자라는 먹을 수 있는 산채를 뜯어서 아이들이 가져온 가루에 버물러 겨우 죽지 않을 만큼 끼니를 이었다. 모질고 너무나 배고픈 시절이 계속되었다. 강물은 그래도 푸르게 흘렀다. 때 이르게 닥친 장마는 굶주림에 지친 마을 사람들을 영양결핍의 온몸을 나른하게 가라앉혔다. 강물이 불어나는 그 사이로 흘러들던 작은 시내에서 봇물에 갇혔던 민물고기를 쪽대로 후려 마을 어른들은 막소주를 마져댔다. 모두가 절대적으로 빈곤한 시절이어서 자고 나면 첫 인사가 식사에 대한 말이었다. 견디지 못할 정도의 결핍의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강 둔덕에 서있는 산복숭아나무에서 까칠한 설익은 복숭아를 따먹으며 소를 뜯겼다. 산복숭아 열매는 떫고 입안에서 까끄러웠지만 배룰 채우는 고마운 것이었다. 모두가 허기졌고 마음은 저녁 하늘처럼 힘을 잃었다. 강은 수만 년을 흘러서 마을을 휘돌아 흐르면서 종은 지질의 퇴적층 땅을 형성하여 대체로 물이 잘 공급될 수 있는 곳은 벼를 심었고 그 외는 밭으로 어떤 작물을 심어도 잘 되었다. 강 옆으로 여름의 끝에 칠칠한 녹청색의 남자 어른의 종아리 크기만한 무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무가 무성하기 전에 이 곳은 원두막을 설치하여 참외, 수박 농사를 지어서 여름 한 철의 수입을 거두어 들였다. 무는 그 때쯤 도시에서 온 트럭이 줄을 이어 실어 날랐다. 칠칠한 잘 자란 무는 산더미처럼 트럭에 실려서 마을 사람들이 입을 함지만하게 만드는 효자 작물이었다. 가을이 되면서 마을의 뒷산으로 잘 익은 밤알들이 떨어지면서 아이들은 주인 몰래 밤을 털어서 집으로 가져갔다. 햇밤은 간식으로 더할 수 없이 감미롭고 은근하게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 강어귀에서는 민물게가 통통한 살을 올려서 어른들의 술안주감으로 최고였다. 특히 가을의 미꾸라지는 노란 몸통을 굴려 농사철 수확이 끝난 뒤 못을 퍼내서 몇 동이의 미꾸라지를 잡아서 마을의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절대적 빈곤의 시절이었지만 그러나 모두가 같은 처지였기에 인심은 너무나 도탑고 정겨웠다. 공동체가 가진 인심이 그런 대로 궁핍한 시대를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작은 위안이었다. 인정은 풍요로운 시절이었다. 가을이 되면 마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여름내내 궁핍한 어려운 시절을 지내면서 가꾼 곡식들과 과일들이 마을 이곳저곳에서 황금색으로 빛나는 풍요로운 현장을 보는 기쁨이었다. 비록 소작농으로 힘든 노동에 비해서는 보잘 것 없는 몫을 가져갈 뿐이지만 가을의 황금색 들녘은 사람들의 마음을 풍성한 환상으로 가득 채워 주었다.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 맞이하는 추석, 집집마다 이 날만은 조상에 추원보본하기 위해서 떡을 빚고 먹지 못하던 고기근을 사서 삶고 지지고 볶았고 갖가지 나물을 새로 짠 참기름에 묻히면 마을은 고소하고 기름진 음식 냄새와 더불어 마을 사람들은 행복으로 이끌어 주었다. 아이들은 전을 부치던 가마솥에서 날쌔게 고기 한 점을 먹다가 어미에게 치도곤을 맞곤 했다. 또 누렇게 익어가는 논배미의 둔덕에서 잘 익은 햇콩을 뽑아서 쇠죽솥에 쇠죽과 함께 끓이면 햇콩맛의 구수함 그 맛은 참으로 최고의 미각을 느끼게 하였다. 소는 늘 우리네 농사꾼들과 함께 살아가는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 지금이사 소고기 수입 문제로 건강을 걱정하는 시절이 되었지만 그 시절은 소고기보다 소 한 마리는 한 집안의 재산 그 자체였다. 그런데 어떻게 가족 같은 소를 잡아 먹을 수 있었겠는가. 재산상의 가치는 고사하고 가족과 같은 그 정을 어찌 그 인연을 없앨 수 있었겠는가. 아이들은 학교를 다녀와 맨처음하는 일은 소를 이끌고 풀을 뜯기러 가서 소풀을 베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어느 곳에 가면 소가 좋아하는 풀이 많은 줄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고 그 곳에 닿으면 소를 풀어서 자유롭게 풀을 뜯게하고 풀을 베어서 망탱이에 채웠다. 마을을 굽어보는 산들은 대체로 낮았고 그 아래의 강은 마을 전체를 돌아서 유장하게 흘렀다. 마을 맞은 편은 옛날 역참이었고 이 곳은 멀리 부산포에서 소금을 내륙의 끝 지점인 안동 지역까지 실어다 주는 수운의 관문이었다. 장천이라고 옛날부터 불리어 졌다고 어른들이 말씀하는 것을 아이들은 들었다. 이 마을의 지역적 특성이어서인지 몰라도 마을의 구성원들 중 특별히 뛰어난 사람들도 없었고 거부의 대농장 경영자도 없었고 고만고만하게 찢어지는 가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햇빛과 산과 강과 논밭이 그들의 삶의 고단하면서도 즐겁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가을걷이가 거의 끝나면서 매서운 바람이 불어재키면서 겨울이 왔다. 겨울은 마을 사람들이 지게며 보따리를 가족수대로 하여 가까운 마을의 뒷산으로 땔감을 하러 다녔다. 유난히 오리나무와 참나무와 소나무도 많았다. 소나무 바늘끝 같은 갈색의 잎을 갈비라고 하여 아낙네들이 특히 많이 긁어 모은 땔감이었다. 갈비는 집안의 제삿날이나 축제 때 전을 부칠 때 매우 쓸모가 많은 땔감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은 대체로 소나무의 삭정이와 나뭇잎을 긁어모아 집체만한 땔감을 지게에 재워서 집으로 날랐다. 우리는 겨우 꼴망태 정도의 솔잎을 개미 보따리처럼 매고 어른들의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산 위로는 파아란 더 없이 맑고 높을 하늘을 기러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보리밥 한 덩이로 배를 채웠던 배는 다시 꼬르륵하는 소리가 났고 우리는 서둘러 감자며 고구마를 쇠죽 끓이는 부엌 아궁이에 넣었다. 겨울이 들면서 학교를 가야하는 아이들은 동네 골목의 따뜻한 양광이 비치는 곳으로 모였다가 함께 시끄럽게 재잘대면서 학교로 걸어갔다. 학교는 마을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십리나 떨어져 있는 아이들이 등에 책보따리를 매는 일에 비해서는 편했다. 대체로 교실 바닥은 가마니가 깔려 있었고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건물을 지어서 목재로 지어진 마루로 바뀌었다. 6학년이 되어도 아이들의 코 밑은 번들거렸고 옷소매는 콧물을 닦은 흔적이 햇빛에 반짝였다. 체육 시간은 언제나 달리기 한 종목이었다. 분단별 경쟁을 하면서 우리는 고함을 쳐대며 열광했다. 학교 운동장 담은 대체로 측백수로 빽빽이 줄을 이어서 둘레를 지었다. 일제 시대의 벚나무가 운동장 가로 서있기도 했다. 벚꽃은 봄에 꿈처럼 꽃망울을 터뜨려 어린 우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도 했다. 시험은 원지에 긁은 글씨 위로 등사 잉크를 발라 롤러도 눌러 시커먼 시험지에 등사하여 시험을 치렀는데 간혹 여러 번 눌러서 글자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늙은 대통령이 통치하던 그 시절 조회 시간이라는 아침 모임이면 애국가가 끝난 뒤 우리의 맹서를 소리 높여 암송하였었다. 당시의 선생님들은 마을 사람들의 우상이었고 숭앙의 대상이었고 마을의 처녀들 마음을 달뜨게 하는 대상이었다. 학교에서 우리는 토끼를 사육하였다. 물론 상급 학년이 되어야 그 임무가 맡겨졌다. 우리는 나각산 근처까지 올라 토끼가 좋아하던 씻냉이 혹은 씀바퀴를 뜯어러 당번이 되면 그 풀을 한 자루씩 뜯어서 학교로 돌아와 붉은 눈망울을 한 흰 빛과 잿빛을 띤 토끼에게 던져주면 토끼는 오물거리며 우리가 뜯어온 씀바퀴를 열심히 먹었다. 토끼들은 선생님들의 토요일 오후 술안주로 한 마리씩 희생되는 것을 우리 조무래기들은 이비 알고 서로 소리 낮추어 그 야만적 권위주의을 비웃곤 했다. 그러나 그 때 우리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은 정말 지극정성으로 우리의 교육에 열심이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군사부일체라는 동양의 고전적 이념에 우리는 일제시대가 끝난 때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일본인이 우리에게 남겨준 군국주의적 의식 교육도 더러 받기도 했다. 겨울이 들어서면 마을의 사랑방에서는 볏짚으로 가마니를 짰다. 가마니를 짜는 나무로 만든 기계와 함께 마을 어른들은 밤마다 모여서 술내기 화투도 쳤고 옛날 이야기를 목청 좋은 마을의 어른 한 분이 읽으면 가마니 짜는 소리를 탓하며 귀를 귀울려 이야기 삼매경에 빠지기도 했다. 마을에는 대부분 누구네 제삿날이라도 모두 꿰고 있었고 살아있는 집안 어른들의 생일까지 두루 알고 있었다. 제사를 지내면 음식을 한 밤중 돌려서 은근히 기다리기도 하는 풍습이 일반화 되었다. 동짓날 집안의 선조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 집안의 좋은 운세를 비는 고사를 지냈다. 갓 빻은 찹쌀로 팥고물을 뿌려서 시루떡을 공통적으로 해서 고사를 지낸 집은 한 조각씩 집집마다 아이들을 통하여 빠짐없이 돌렸다. 찰지면서도 또 그 양이 많지 않아서였는지 맛이 너무 입에 감겼다. 쫀덕거리며 혀 끝에 감겨드는 그 찹쌀 시루떡 맛은 이웃 간의 인정을 그렇게 긴밀하게 연결시키는 매개체였다. 그런 겨울의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밤에 돌아다니던 아이들은 고뿔이라는 감기에 걸린다. 아이의 콜록이는 기침 소리가 심해지면 집안의 할머니는 액운을 몰아내는 의식을 하여 몸살로 열이 오른 아이를 깨워서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어 머리카락을 세 번 문대고 침을 세 번 뱉어내라고 한다. 고뿔에 시달리던 아이는 고만 그 시퍼런 칼날에 간담이 콩알만 해진다. 문을 닫고 나가신 할머니는 천지신명과 조왕신에 간절히 빌다가 그만 바가지를 엎고 그 위에 칼을 꼽았다. 아마 이열치열의 고뿔퇴치법이었는지 모른다. 겨울이 더 깊어지면 마을 앞의 강이 얼어붙었다. 강이 얼면 목선을 띄우지 못할까 사공들은 밤새 얼어붙는 강물을 왔다갔다 하면서 얼지 못하게 했다. 적어도 그들은 그 일을 잠을 한 숨도 자지 않고 왕복하면서 계속했다. 도끼로 내려쳐도 언 강물이 얼음으로 단단해지면 우리는 나무 아래에 쇠줄을 씌운 썰매를 지치기 시작하였다. 더러 아이에 대한 엄한 어미들은 그런 아이를 강으로 가지 못하게 불호령을 내리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몰래 제 또래들과 지치도록 얼음판에서 썰매를 탔다. 썰매의 속도는 썰매 밑에 댄 쇠줄의 날카로움에 의해서 우열이 가려졌다. 동네 대장간에서 잘 연마된 쇠줄을 가진 아이들은 그 위에 대는 나무 조각도 매우 질 좋은 것을 대서 다른 아이들에게 과시하기도 하였다. 가난한 그 시대의 겨울밤은 너무 길고 길었다. 마을의 남자 어른들은 어느 집의 큰 사랑에서 가마니를 쳤고 그리고 묵내기 화투를 쳤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서 그렇게 긴 겨울밤을 보냈고 아낙들은 더러 길쌈을 하여 광목천을 짜기도 했고 아이들의 떨어진 옷을 꿰매기도 하고 양말짝도 깁으면서 한 없는 겨울밤을 견디었다. 그러다가 출출하게 배가 허전해지면 가을에 담가둔 쉬원한 통무우김치를 꺼내어 우적우적 씹기도 하면서 가까운 마을의 장터까지 걸어가 메밀묵을 사와서 신김치에 말아서 먹었다. 사실 어려운 살림살이에서 먹을 것을 돈으로 구한다는 일은 사치한 일이었고 또 그것을 살 돈도 그들은 없었다. 김장 때 묻어두었던 배추뿌리며 알맞게 물이 마른 고구마도 긴 겨울밤을 보내는데 요긴한 식품이었다. 배추뿌리는 적당히 물기가 빠져 껍데기를 깎아서 씹으면 그 알싸한 매운 맛과 더불어 한참을 씹으면 은근히 혀끝으로 느껴지는 단맛은 일품의 맛이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긴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동지가 되면 팥죽을 쑤어서 마을의 재앙을 쫒는 의식을 치르면서 죽 속의 새알심을 나이에 맞추어 먹었다. 더러는 마을 전체의 앞날의 무운장수와 행운을 빌기 위하여 수수떡을 빚어서 동네의 한 가운데 서있는 느티나무에 가서 치성을 올렸다. 느티의 둘레에 사람으로 말하자면 옷 같은 그 해 생산된 볏짚으로 엮은 연개를 휘둘렀다. 마을의 가장 나이 많은 할머니가 지극정성으로 손을 모아 빌면서 마을의 무사태평을 정성껏 빌었다. 느티나무 속에서 잠을 자던 새가 부리나케 날아가기도 하고 더러는 게으른 새는 두 눈을 껌벅이며 횃불 속의 이 광경을 내려다 보기도 했다. 그리고 일 때문에 미루어 두었던 처녀 총각들의 결혼식이 벌어진다. 대체로 두어 마장 떨어진 이웃과 사둔관계를 맺었고 이 날 사모관대를 한 신랑이나 청홍 비단으로 단장한 신부는 마을 사람들의 과분한 찬사를 받으며 전통 혼례식의 주인공이 되었다. 혼례를 준비하는 집에서는 돼지를 한 마리 정도는 잡았는데 결혼식 당일 마을 사람들의 식욕을 돋구어서 마을 전체가 즐거움의 극한으로 몰아가게 하였다. 겨울 밤에 우리 개구쟁이 어린애들은 어렵게 구한 전짓불을 가지고 처마마다 잠자는 참새를 손으로 잡았다. 간혹 처마에서 구렁이가 나와 기겁을 하는 낭패고 겪어 소란을 떨기도 했지만 작은 마을의 초갓집 처마마다 참새는 자주 우리 개구쟁이들의 손에 잡혀 나와 애처롭게 파닥이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겨울에는 가을에 말린 무청과 배추 시레기로 보리밥에 된장과 고추장을 비벼서 먹는 맛도 겨울만이 주는 한 맛이었다. 모두가 어려운 살림살이에 먹는 행위가 마을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리고 어느날 망을의 남자 어른들은 도끼와 새끼줄과 긴 장대를 들고 꽁꽁 얼어붙은 강으로 함께 나간다. 숨구멍을 도끼로 둘레를 깨서 만들어 긴 장대 끝에 못을 박아 강바닥으로 휘적이면 한참후 민물장어가 거짓말처럼 대롱대롱 대달려 못에 박혀 딸려 나왔다. 민물장어는 단백질이 부족한 마을 사람들에게 긴 겨울을 이겨내게 하는 영양분을 제공하는 귀한 물고기였다. 특히 장어 작살을 하는 날은 눈이 뿌리면 더욱 실하고 튼실한 굵은 장어가 많이 잡혔다. 장어들은 추위 때문에 강의 바닥에서 겨울잠을 자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끌려 나왔다. 간혹 많이 잡힌 날은 장어에다 고추장을 발라 구워먹는 맛도 천하 일미였다. 설날은 일년 중 가장 신성한 날이면서 가장 풍요로운 명절 중의 명절이었다. 서울까지 돈별러 갔던 청년들이 이 날만은 모두 번쩍이는 신사복을 입고 선물을 사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집집마다 그 해 농사 지은 것중 가장 귀하고 좋은 곡식으로 차례상을 준비하였고 우리들도 설빔이라하여 비록 광묵천에 염색한 옷감으로 만든 옷이지만 새로운 옷을 입게 되고 양말도 새로 마련하여 아이들은 설날이 오기를 참으로 간절하게 기다렸다. 조상님들께 차례를 드리고 마을의 어른들을 나이순으로 차례차례 세배를 드렸다. 아이들은 색색의 팽이를 꺼내 돌렸고 처녀애들도 이 날 더 예쁜 얼굴 표정으로 생글거렸다. 정월 대보름의 쥐불놀이, 부름 깨물기 귀밝이 술 ‘내 더위 사라’는 말장난 등 이때쯤이면 지난 보름 전의 강정들이 집안 여기저기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대체로 쌀강정이나 깨강정은 처음 선호하는 강정이었고 들깨강정이나 콩강정은 그 맛과 단단함 때문에 손이 잘 가지 않던 강정이 보름이 지나면 콩강정까지도 아쉽게 사라지게 되었다. 음력 이월이면 집집마다 소지를 올렸다. 한 해 농사의 풍년을 베풀어 준다는 영등 할머니신에게 비는 간절한 기원의 지성님 소지의 제를 지냈다. 이월 초하룻날 새벽은 할머니의 주름진 손에서 얇은 한지로 만들어진 소지가 식구들 수대로 사루어졌다. 대체로 영등 할머니신이 들어 온다는 부엌에서 이 의식을 치렀다. 못자리에 사용할 짚단을 밑에 깐 그 위에 소반을 놓고 몇 가지의 정성을 다한 나물을 올리고 신성한 물 한동이를 옆에 두고 할머니는 집안의 식구들 각자의 이름을 호명하며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간절히 기원하는 치성을 드렸다. 그 날 이후 집안의 며느리는 정화수를 매일매일 떠 받쳤다. 그 지극정성의 섬김은 사람들의 머리에 각인된 운명론적 간구, 절대적 종교와 같은 것이었다. 신령스러움조차 간직한 외경심의 극치였다. 차돌처럼 단단히 결빙되었던 강물이 풀리면서 겨울이 끝나고 먼빛으로 봄이 오고 있었다. 강물 위로 겨우내 찬기운이 풀리면서 엷은 안개가 조금씩 밀려왔다. 강어귀의 수양 버들 가지에서도 여린 잎사귀의 싹이 안간힘으로 솟아 올랐다. 다시 마을 사람들은 농사 준비로 바빠지기 시작하였다. 집집마다 외양간에 있던 쇠똥이며 돼지울을 치워서 얻은 거름을 논에다 뿌렸다. 집식구들의 뒷간도 말끔하게 퍼서 밭에다 뿌렸다. 겨우내 꼼짝대지 않던 개들도 함부로 뛰어 다니기 시작했다. 마을이 침묵 속에 갇혀 있다가 한바탕 크게 기지개를 펴면서 봄을 맞고 있었다. 목선이 있는 나루에도 버스에서 내린 손님들의 왁자한 소리들이 활기에 넘쳤다. 땅콩과 과자를 파는 소녀애들도 덩달아 신명나게 물건을 팔기에 고함을 돋구었다. 목선의 사공들은 일이 없는 늦은 밤에 막소주를 너무 많이 마셔대어 서로 간 드잡이도 자주 벌어지고 하는 것이 겨울이 끝나고 봄이 되면서 한층 고함 소리로 드높였다. 계절이 가져다 주는 따뜻한 축복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겨우내 움추렸던 마음을 한꺼번에 바꾸고 있었다. 봄이 되면 이웃 마을 사람들이 가득 목선을 건너서 장터로 몰려드는 때도 이 때였다. 장은 닷새마다 열렸지만 봄을 맞으면서 열리는 장터가 더욱 활기를 띄었다. 가축전에는 강아지와 어린 병아리가 둥주리 채로 가져와 팔았다. 아직은 쌀쌀한 기온에 이 가여운 강아지와 병아리들은 오소소 떨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연민에 잠기게 하였다. 국밥집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솟구쳐 장꾼들을 끌어 모았고 순대를 넣은 뜨껀한 국밥은 인기를 끌었다. 비단전이며 옷전은 별 재미를 볼 수 없었고 오직 사람들 발길이 이어지는 곳은 작물 씨앗전과 농기구를 파는 철물전과 농기구를 수선하는 대장간이었다. 건장한 사내의 땀이 흐르는 망치질 소리와 식칼이며 쟁기날이며 호미날, 괭이등을 두드리며 야금하는 주인 대장간 나이 든 대장장이의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일을 다 본 마을 사람들은 저녁에 돌아올 때 간고등어 한 손, 호미 고기 한 줄 간혹 파란 연록빛 싱기 한 묶음을 사가지고 돌아갔다. 이튿날은 무를 넣은 간고등어국이 밥상에 올라 땀을 흘리면서 그것을 먹어댔다. 싱기는 물에 풀어서 돌을 가려내고 물을 짜내고 양념을 하여 참기름과 파와 다진 마늘을 넣어 조근조근 무치면 그 맛도 일품이었다. 우리는 호미고기를 쇠죽 끓이는 부엌에서 구워 먹었다. 간혹 호미고기에서 알이라도 나오면 그 날은 행재를 만난 날이었다. 먼 빛으로 보이는 나각산도 부우윰하게 회색과 아른아른한 푸른 빛을 비치고 있었다. 비록 높지는 않은 산이지만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산은 늘 위엄을 가지고 그 곳에 서있었다. 우리들은 그 곳에서 학교에서 키우던 토끼며 닭을 위하여 지천으로 풀이 우거진 나각산으로 즐겨 오르곤 했었다. 나각산 정상에서는 강물이 휘돌아 마을로 스며들 듯이 한 눈에 들어왔고 마을 전체가 손바닥만하게 아스라이 보였다. 산의 정상 바로 밑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바위 곳곳에 이상하게 조개껍질이 박혀 있는 형상이 신비했다. 아마 수만 년 전 바다던 지층이 화산 폭발로 융기하여 지금의 산으로 형상화된 모양이었다. 언제나 그 산을 오르면 가슴이 탁 트이는 쉬원함이 있었다. 나각산의 끝에 이 곳 저 곳의 마을이 올망졸망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같은 성씨로 마을을 이룬 곳도 있었고 옛날 서울에서 큰 벼슬을 했다는 낙향한 집안의 기와집은 그들의 위세를 자랑하는 제실과 더불어 망루처럼 대단히 크고 위용이 넘쳤다. 흔히 그 집을 가르켜 마을 사람들은 ‘대감댁’이라 불렀다. 지금에사 신분제가 폐지된 사회지만 적어도 마을 사람들은 옛날의 상감마마 아래서 벼슬을 했던 그 집의 조상에 대한 극진한 예우를 해 주었다. 그런 마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윗 상전에 대한 자연스런 의식이 끊이지 않고 적어도 그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하였다. 사실 그 큰 고대광실의 기와집의 주인은 먼 일가가 살고 있을 뿐 정작 대감의 후손들은 그곳에 살고 있지 않았다. 해마다 그 기와집의 뒷산에 있는 제실에서 일가 문중이 모여들어 훌륭한 조상들을 위한 묘제를 올리곤 했다. 마을의 배고픈 아이들은 묘제를 지낼 때 쯤 슬며시 구경꾼으로 끼어들면 그 사람들은 아이 어른 가리지 않고 묘제에 올렸던 음식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언제부터인가 용바위라 불리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명주 실꾸러미 한 통이 다 들어가는 깊은 곳이라 일켣든 용바위 주변에 고무로 만든 기괴한 옷을 입은 사람이 입에 담배대 같은 것을 물고 들어가 가마니로 잉어를 잡아 올렸다. 잠수부가 건져올린 잉어는 꼬리를 세차게 흔들면서 잉어 본래의 힘찬 용틀림을 하며 퍼득였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얼마간의 적은 돈을 주고 잉어를 샀다. 잉어는 닭과 더불어 가마솥에 푹 고와서 특히 아이를 낳은 아낙네들에게 귀한 음식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용봉탕’이라 불리어진 이 잉어탕은 사실 맛은 별로였다. 용바위가 마을의 맞은 편에 있었는데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그 곳은 바위가 유난히 날카롭게 솟구쳐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곳이었다. 아이들도 수영에 능했지만 용바위 근처로는 수영을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곳에는 강신이 살기 때문에 해마다 제물을 필요로 해서 강신에게 잡혀간다는 전설이 전해져 왔기에 마을 사람들에게는 외경의 장소였다. 그런 곳이 위험해서인지 차 사고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아마 길이 험해서 운전하는 사람들도 용바위를 지날 때는 속도를 줄이고 유난히 조심스럽게 운전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마을 쪽에는 언덕이 있어 여름날 소를 뜯기러 가서 언덕 위에서 우리는 강물로 뛰어드는 담력 겨루기를 하기도 했다. 언덕 옆 방죽에는 복숭아며 산 사과나무와 돌배나무가 있어서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배를 채워주는 고마운 과일나무가 있던 곳이었다. 산복숭의 열매는 떫고 거친 맛이었고 돌배의 속살은 못이 박힌 것처럼 단단하기만 했고 사과 열매조차 사과의 조상이라는 능금처럼 그 크기가 너무나 작았다. 그러나 가난한 시대 아이들의 간식용으로 그 열매들은 반갑고 고마운 것들이었다. 강을 마주한 모랫벌 뒤의 긴 방죽은 소를 마음대로 풀어놓을 수 있었고 대체로 소풀이 언제나 풍성하게 자라 있는 곳이었다. 우리들은 그 강을 마주한 방죽에서 장난을 쳤고 풀을 뜯었고 소에게 풀을 먹게 하였다. 서쪽 하늘로 붉은 놀이 마지막 빛을 품어낼 때쯤 우리는 망태기와 소를 몰고 집으로 천천히 돌아왔다. 노을빛에 비친 우리들과 소의 그림자는 길게 돌아오는 우리들과 함께 길게 그리고 배 고픈 마음처럼 늘어져서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강은 그 시절의 마실 물이었고 사계를 마을의 아낙네들의 빨래터였고 농사 짓는 물을 공급해 주던 생명의 젖줄이었다. 수만 년 전부터 흘러왔고 끝없이 흘러갈 강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그렇게 끈질기고 온유하게 흐르는 강을 닮게 하는 어떤 힘을 가진 존재였다. 대부분 마을 사람들의 집은 근처의 산흙을 파와서 짚을 썩어서 흙벽돌을 찍어 만들었다. 나지막한 구조로 집의 높이는 그렇게 되었었고 아궁이에 산에서 나뭇잎과 삭정이를 해와 밥과 추위을 피하기 위하여 불을 때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여름에는 시원했고 겨울에는 따뜻했다. 가을철 타작을 한 뒤에 남은 볏짚을 이엉으로 엮어 해마다 지붕을 이었다. 마을 사람들 사이 품앗이로 그 일은 이루어졌다. 이엉을 올리고 그 위에 굵게 꼬은 새끼줄로 단단히 묶어서 지붕을 새로 덮었다. 벗겨낸 지난 해 이엉은 좋은 거름이 되었다. 집의 방 앞에는 툇마루가 놓여 있었다. 어머니가 매일 닦아서 마루의 표면은 오래된 고색창연한 오래된 빛깔로 어두운 빛과 더불어 거울처럼 맑게 비칠 정도로 은은한 빛살을 품어내고 있었다. 할아버지 거처 옆으로 ㄱ자로 꺽여진 곳에는 성주 단지를 모신 집안의 성스러운 곳이 각목으로 받침을 해서 일 년 내내 그곳에 안치하고 있는 곳이 있었다. 명절을 모신 뒤에도 그 곳에는 다시 상을 차려서 집안의 성주신에게 경건한 마음으로 절을 하였다. 마루위의 서까래 끝에는 제비집이 늘 봄에 와서 새끼를 길러서 가을이면 먼 곳으로 날아갔다. 간혹 제비가 눈 분비물이 마루에 떨어져 추했지만 집안의 그 누구도 제비를 탓하지는 않았다. 제비에 대한 우리 나라의 전래 동화에서 유래된 흥부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 제비란 존재는 신비한 우리가 갈 수 없는 이상향의 높은 곳에서 우리들 곁을 찾아준 외경의 새로 제비를 생각했고 봄날 새로 새끼를 얻은 뒤 어미 새가 가져온 먹이를 서로 탐을 내는 노란 여린 입이 너무나 귀엽게 느껴졌다. 서까래 끝에서는 어린 제비 새끼가 살았고 마을 사람들은 그 제비 새끼 같은 어린 자식들을 낳아서 길렀다. 마당마다 새로 부화하여 어미 닭이 갓 태어난 병아리를 몰고 다니면서 마당가의 풀잎이나 지렁이아 벌레들을 쪼으면서 종종걸음을 쳤다. 개는 봄날의 긴 기지개를 켜며 온몸을 길게 빼면서 한껏 게으른 몸짓을 하였다. 미국이 가져다준 밀가루 우윳가루 강냉이가루를 먹는 고단하고 궁핍한 시절인데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게 슬프지도 괴롭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시절이었다. 봄이면 겨우내 얼어붙었던 논밭을 갈면서 사람들은 비록 작은 소작의 전답이었지만 가을의 풍요로운 황금들판을 떠올리며 정성으로 일을 시작했다. 마을 앞으로 길게 흘러가는 강과 강에서 비롯된 기름진 땅에서 일을 했고 뒷산으로 이어진 산비탈에는 과실나무를 심었고 사람들은 정신적인 풍요로움에 모두 어느 정도는 느긋한 즐겁고 행복함을 서로 나누며 살고 있었다. 겨울의 끝에는 6 년간의 배움에서 떠나는 졸업식이 있었다. 교실 두 칸을 터서 교단 여러 개를 포개서 단을 만들고 만국기를 게양하고 작은 음악회도 마련하고 그리고 근처 장터의 노점상들이 주변을 채우고 졸업하는 아이가 없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졸업식을 하는 날이면 마을의 축제가 되었다. 특히 송사와 답사가 낭독될 즈음이면 여기저기 여자애들이 하나씩 울기 시작하여 이윽고 전체 졸업생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울어대는 가운데 졸업식은 절정에 이르른다. 더러 마을의 아낙네들도 두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기에 바빴다. 이월의 여린 햇살이 비쳐드는 졸업식의 광경은 기쁜 슬픔의 한 순간으로 삶의 한 잊을 수 없는 절대의 모습으로 마을 모든 사람들의 머릿 속에 간직되는 일이 되었다. 아이들은 더러 중학교로 가기도 하고 그 때만 해도 어렵던 시절이라 대부분 가정을 위하여 일을 하기 위해 그 공부 기간이 그것으로 끝은 맺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졸업하는 아이들은 정말 그렇게 섧게 울었는지 모른다. 새로올 삶이 그들을 기다리는 그런 졸업식이 그 때는 마을의 한 큰 축제였다.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끝> 정복태 경북 상주 출생. 영남대 국문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한국 소설가 협회 회원. 상주문협지회장. 작품 <환상의 덫> <행어의 죽음> <혜국사> <나른한 오후> <깊은 산 속 옹달샘> <언젠가 그런 시간이 온다> 외 다수 발표.  
112 낙동강/박희용 file
편집자
4245 2011-04-01
11.04월 11호 시 낙동강 박희용 늙은 어미 자르고 깎고 막고 파 성형수술하면 무엇해 늙은 어미 빨갛게 노랗게 파랗게 분칠해 다시 시집가면 무엇해 늙은 어미 팔자에 없는 호강은 싫다 평생소원 하나 태백산맥 가장 높은 곳에서 시작 해 영남의 가장 낮은 곳까지 소리 소문 없이 흐르는 것 늙은 어미 토막 내어 시장에 내 놓는 자식들아 내 팔리거든 부디 잘 살아라 배반을 가슴에 보듬어 안으며 황지에서 부산까지 저절로 흐르는 것 봄에는 꽃잎을 싣고 가을에는 풀씨를 품고 하늘이 준 수수한 옷 차려입고 하염없이 흘러 천삼백리 길 알알이 열린 강변 생물들 잘사나 못사나 여울마다 몸 뒤척이며 물어보다 하얀 머릿수건 흔들며 남쪽바다 깊숙이 한 생애 묻는 것  
111 봄이 오는 소리 외1편/신구자 file
편집자
4609 2011-04-01
11.04월 11호 시 봄이 오는 소리 신구자 내려오기 위해서 올라가는 가파른 길, 대둔산 마천대처럼 홀로 우뚝 솟은 중지만한 고드름, 파아란 이끼이불 조심스레 펴놓고 봄과 은밀하게 체위를 바꾸고 있는 중이다 수줍은듯 발소리 낮추며 계곡물은 졸졸졸 길을 나서고 있다 명자꽃을 보며 신 구 자 불임의 딸 가진 어미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날마다 장독대 정안수 떠놓고 지켜본 너의 여린 몸속, 드디어 잉태의 씨앗 눈 뜨기 시작했구나 황사바람의 늪 속에서도 앙다문 인내 앞에선 불타던 빙벽도 무릎 꿇었구나 종달새 탄주하듯 눈부신 새 아침 약력 경북 칠곡군 약목 출생 1994년 [대구문학]과 1999년 [불교문예]신인상 시 당선으로 등단 대구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불교문인협회, 대구여성문인협회, 칠곡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솔뫼시>와 <반짇고리> 동인으로 활동 시집 [낫골 가는 길] 출간  
110 퇴강 외1편/김숙자 file
편집자
4765 2011-04-01
11.04월 11호 시 퇴강 김숙자 매호골 부는 바람 퇴강의 나룻배여 어릴적 강심에서 달을 따던 소녀의 꿈 이제는 되돌아 앉아 퇴강 섶에 지켜 섰다 강건너 배띄우던 아버지 추억의 강 칠백리 백사벌에 물총새 고이 울고 물놀이 달리던 아이 옛친구는 어디로 갔다. 벼랑끝 버들가지 춤추는 강나루에 어풍대(御風臺) 홀로 앉아서 글을 읽던 조우인 선생 임호정(臨湖丁)그림자 안고 낙동강은 흘러갔다. 새마골* 가는 길 김숙자 운무 휘감긴 어풍대* 돌아서면 수양버들 머리 풀어 헤치고 멱감는 은비늘 곧추세우며 꿈틀대는 낙동강 벌개미취 뒤에 숨은 하늘 닿은 상풍교* 옛 나룻터 지키는 구멍가게 주인은 달바다 이고 춤추는 방랑자를 맞는다. 희망 보이지 않던 절망의 늪에서 수평선처럼 끝없이 펼쳐진 금모래 물총새 꽁지깃 흔들며 냉가슴을 보듬네 새마골:상주시 사벌면 퇴강리(새마) 상풍교:상주와 풍양을 잇는 다리 어풍대:관동속별곡과 매호별곡을 쓴 조우인 시인이 머물수 있는 곳을 찾다가 쉬던곳 조우인 시비 맞은편에 있는 (두평 정도되는 둥글 넓적한 큰바위) 아호:명헌(茗軒) 김숙자 드라마를 사랑하는모임 (작가) 3기수료 샘터인간승리상 수상 여성동아 체험수기공모 수상 전국독도사랑작품공모대회 안용복 장군상 수상 문학세계 시 등단 문학세계 신인문학상수상 나래시조 신인문학상수상 이육사 시낭송경연대회 수상 문학세계문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상주문인협회 회원 상주아동문학회 회원 경북문화유적해설사 회원 경북 향토문화연구사 회원 경천대를 사랑하는 모임 회원 정기룡장군 추진위원회 회원 함창초등학교 논술강사 역임 문경글사냥문학회 사무국장 역임 상주 시민신문기자 역임 저서:날고싶은 제비(장편소설) 공저:아름다운사람들(1,2,3,4,5,6,7집) 내마음은 독도, 푸른잔디, 경북의 얼굴 시조시인 100인선집외 다수 현:상주문화유적해설사 회장 다사랑복지센터 논술강사 문경글사냥문학회 부회장 dkll2004@naver.com http://blog.daum.net/love2004-2004 http://cafe.daum.net/myeong2011(별빛언덕) 경북 상주시 함창읍 오사1리 211  
109 서정적 풍경 외1편/황명강 file
편집자
4347 2011-04-01
11.04월 11호 시 서정적 풍경 황명강 전봇대 서있는 풍경은 서정적이다 책가방 둘러메고 뛰던 유년의 공터에 박힌 따뜻한 위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나는 전봇대에 얼굴을 묻고 자주 술래가 되곤 했었다 눈을 뜨면 사방 어둠이 물들어 딱딱한 어둠에 눌려 혼자 울곤 했는데, 젖은 어깨 토닥여 주던 전봇대의 크고 기다란 손 누군가 지금도 서정을 말하라면 내 마음 훔쳐보던 전봇대를 떠올린다 단발머리 계집애 하나 감꽃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는 촛불 황명강 어둠을 핥아대고 있는 저 널름거리는 혓바닥을 봐 비명 지르며 허공들은 불의 입속으로 삼켜지고 조금씩 어둠의 나라 정복하고 있는 저 짐승의 식욕을 봐 내 안에서 나를 핥아대고 있는 이 짐승 좀 보라지 내 오장육부를 삼키고 대뇌와 소뇌를 삼키고 마침내 나를 정복하고 마는 한 마리 광폭한 현재를 약력 황명강 경북 경주 출생 서정시학 시 등단 한국시협, 경북문협, 경주문협 회원 현, GBN경북방송(주) 대표이사  
108 별 외1편/서 하 file
편집자
3933 2011-04-01
11.04월 11호 시 별 서하 청송 쪽 35번 국도를 따라 흐르다 보면 하늘로 가는 길 열린다 천 길 낭떠러지가 길이었고 발부리 끝이 벼랑이었던 기억을 더듬어 별들이 길 내고 있는 보현산 천문대 소소리바람에도 시린 속내 들키는 시루봉 열어 살며 쪼이던 당신을 꺼낸다 아득히 멀어서 평생 말문 닫은 당신 차마 뱉을 수 없었던 말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데 주머니마다 꾹꾹 눌러 담은 그늘이 소복하다 비층구름이 겹으로 달려들어도 잎은 꽃이 되고 꽃은 별이 되는 곳 하늘말나리 뜨거운 이마위에 직녀별이 꾀꾀로 손 얹을 때 말라비틀어진 몸에도 물이 차올라 구불구불 당신 사랑한 날이 지붕에 푸른 박을 낳는다 새우 서하 힘들 때마다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잠수해버리겠다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가 정말 사라졌다 한겨울 얇은 이불에도 일곱 식구가 새우처럼 옹기종기 잠들던 아랫목에 두근두근 피어나던 꽃, 민망하기만 한데 세상을 안으로만 껴안은 탓인가 해 저문 뒷산이 내려다보는 마을 앞길도 굽을 데가 아닌 곳에서 슬며시 굽는다 찬바람 굽은 채 마당으로 깔릴 때 사라진 새우 기다리며 파도는 꼬박 밤을 새운다 ♧서하(徐 河) 경북 영천 출생 1999년 계간시지『시안』신인상 수상 현재 한국시인협회, 시안시회, 대구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현대불교문인협회 회원 시집 『아주 작은 아침』시안 출판  
107 쿠바를 생각하다/강태규 file
편집자
2507 2011-04-01
(쿠바를 생각하다) 강태규 우리에게 지리적으로 가까운 북한보다 남미의 북단 카리브해 연안의 섬으로 있는 쿠바는 우리에게 멀리 있기도 하지마는, 이념적 자기검열만 극복할 수 있다면 균열조짐이 보이는 신자유주의 추종국가 보다는 역설적으로 더 나은, 지속가능하거나 예측 가능한 미래가 더 잘 보일 수 있다고도 생각된다. 이미 부자를 위한 의료정책으로 가는 미국이나 한국의 방향과는 달리 쿠바의 우수한 일차 진료체계는 우리들에게 이미 번역서(『또 하나의 혁명, 쿠바의 일차의료』화이트보드와 브랜치 공저)를 통해 자세하게 소개되기도 하였다. 더구나, 지난 달, 서울에서는 쿠바의 대표적 사진작가 ‘알베르토 코르다’의 작품들이 성황리에 전시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자리 잡던 1959년, 쿠바 국민들은 쿠바혁명을 통하여 ‘라울 피델 카스트로’ 형제에 의해 오랜 통치를 지금까지 받고 있다. 그런 동안에 우리는 자유, 군정, 문민, 열린, 참여 등의 정치를 통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이념적으로 더 미국적으로 변하였으나, 쿠바는 오히려 반미국적으로 유지 또는 진화하여 왔다. 그러는 사이 다큐영화 '식코'에 의해 조롱받는 미국의료체계와는 달리 현재로서는 미래대안적인 쿠바식 일차 진료체계의 성공적 운용은 국가총생산량이니 인민(국민)의 행복지수를 제쳐두고서라도 최소한 신자유주의 자체의 균열이 분명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 하다. 비록, 경제봉쇄와 생필품 부족은 있다손 치더라도 최강의 군사력, 외교력의 막강한 힘을 가진 미국을 곁에 두고 버티고 있는 저력은 놀랍기도 하다. 칼럼기고가겸 출판인 이규항의 표현대로, 인민이라는 좋은 단어가 공산주의 국가에서 더 많이 번역되어 사용된 탓으로 국민이라는 표현에 익숙한 우리에게 또 역설적으로 전체주의적 단어처럼 독해되기도 한다. 즉, 국 + 민, 또는 국 > 민, 으로 해독되기도 한다. 동무라는 좋은 단어가 친구로 대치되어버린 처지와도 같다. 작년 방북으로 ‘곰프’의 석방유도에 성공한 카터 전 대통령의 탁월한 중재력도, 이번 3월, 쿠바법원에 의해 국가전복혐의로 구금된 ‘그로스’를 석방시키지는 못했다. 도박판으로 비유하자면, 쿠바가 북한 보다는 맞대면하기에 어려운 상대로 읽혀지기도 한다. 21세기는 문화정치 또는 문화전쟁의 시대가 분명해진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우리는 엄마친구 아들만 보아도 그 집안을 대략 가늠하며 상징적 기호에 규정짓기에 더욱 익숙해지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 아바나의 명물 말레콘, 센트로 아바나에 가득한 쿠바의 야구열광, 프라도 거리, 유기농산물이 넘치는 주말 장터, 헤밍웨이 박물관, 체 게바라 기념관 등으로 쿠바적인 문화적 기호가 넘친다. 또한, 쿠바혁명에 가담한 한인 2세, 임은조씨( 헤로니모 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1946년 한인 최초로 아바나 법학대학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체 게바라,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에 선봉을 선 바 있으며, 혁명 성공후 식량사업부에서 30년간 일하며 차관까지 역임하였다고 한다. 쿠바를 생각하며 우리와 북한을 떠 올린다. 우리 문화의 기호들을 나열해 본다. 그 기호들에 우리 국민, 아니 인민들은 열광하고 동의하며 살고 있는가. 더 귀한 것들이 천대받고 있는 듯 하다. 큰 도시 중심가의 환자로 차고 넘치는 뻔뻔스러운 대형 병원건물과 간판들을 보노라면. 온갖 기교를 다 부리며 우아하게 쓰여진 영어 간판들을 보노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