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6호...
   2020년 02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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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88239 2014-11-03
53 박향 - 얼음꽃을 삼킨 아이
누미
5485 2010-09-02
내가 좋아하는 소설 책 소개로는 안이한 말이긴 하지만,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에 분연히, 사사건건, 당차게 반기를 드는 ‘얼음꽃을 삼킨 아이’는 정말 재미있다. 작가 박향 씨는 무려 10년간 이 소설을 쓰고 다듬었다고 한다. 비슷한 연배라 그런지 작가가 복원해낸 1970년대 부산의 풍경은 게으름과 외로움과 아픈 기억으로 과거를 되도록 묻지 않았던 내 머릿속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10월 유신 유비무환'이라는 글귀, 등화관제의 검은 어둠, 쓰레기 같은 선생과 방과후 불을 꺼둔 교실에서 내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준 선생과 독한 사랑의 아픔을 가르쳐 준 선생, 부당함과 억울함과 분노와 잔인함을 끄집어내어 찢어발기면서 가해자와 피해자 노릇을 번갈아했던 친구들,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와 근거 없는 두려움의 기억까지. 육영수 여사의 죽음이 있었던 1975년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한 1981년까지 초·중·고를 다녔던 한 소녀가 겪은 시대사와 가족사를 읽으면서, (중년여성인) 우리가 어떤 상처위에서 커왔고, 어떤 기억을 삼킨 채 나이 들어가게 될 것이지를 더듬어보기를. 이 독서가 용케 잊었던 당신의 통증을 되살려낼지라도. -첫 장 <심부름> 편에서- 아버지는 재작년부터 나를 몇 번 낚싯집에 데려가더니 5학년이 되자 미끼 사오는 일을 아예 나에게 맡겨버렸다. (중략) 우리 집은 천마산 아래 남부민동에 위치해 있다. 검정색 루핑지붕과 슬레이트지붕, 나무판자로 이어 붙인 집들이 천마산 중턱에 무채색으로 모자이크한 도화지 그림처럼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 집들 중에서 그래도 우리 집은 산복도로와 맞붙은 아래쪽이다. 비록 페인트는 벗겨져 낡아 보이지만, 몇 년 전 태풍에 슬레이트지붕이 날아가는 바람에 아예 옥상이 있는 단층 양옥집으로 새로 지었다. 윗동네와 아랫동네는 빈부의 차가 보일 정도로 차이가 난다. 산 쪽으로 올라갈수록 루핑지붕의 타르는 쩍쩍 갈라져 있고, 처마도 더 내려앉아 있다. 썩은 판자 틈으로 가난이 오래된 이끼처럼 덕지덕지 묻어 아예 식구들을 잡아먹으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곳도 많다. 윗동네는 피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윗동네 아랫동네가 없었다. (중략) 아이들과 정신없이 놀다가 부산 최대의 공창가인 완월동까지 간 적도 많았다. 유리창마다 정육점처럼 벌건 불이 새어 나오는 그곳을 지날 때면 누구랄 것도 없이 발걸음이 빨라졌다. (중략) 낚시 미끼를 파는 집은 완월동 다음 정류장인 충무동에 있었다. 언제나 화가 난 듯 불어터진 얼굴을 한 낚싯집 주인아저씨는 미끼를 신문지 봉투에 넣어주었다. 신문지를 적당한 트기로 오려서 만든 종이봉투였다. 그 얇디얇은 종이봉투 안에 낚시 미끼인 갯지렁이가 들어 있었다. 몸에 털이 북슬북슬하게 나 있는 그것들은 축축하고 음탕했다. 서로의 몸을 칭칭 감으며 너나없이 뒤섞여 있는 무리를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구역질이 우웩 하고 치밀었다. 그런데 그것을! 그 징그러운 것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신문지가 터지는 위험천만한 일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렁이 몸에서 발산되는 습기로 인해 손바닥이 맞닿은 신문지는 축축해졌다. 혹여 찢어질까 봐 나는 지렁이가 하는 말이라도 들으려는 사람처럼 숨소리마저 죽여야 했다. 평소 신문 읽는 일은 없지만 지렁이를 담아갈 때만은 오로지 신문지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다른 인물사진도 만나지만 신문지 봉투에서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 각하였다. 어쩌면 신문에 나오는 사람 중에 대통령만이 내가 정확하게 얼굴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젖어들까? 봉투가 찢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종종 대통령 각하의 이마나 턱, 양볼 중 어느 쪽이 먼저 지렁이의 습기로 젖어드는지 혼자 내기를 걸곤 했다. 그러다가 입술이나 콧구멍 어느 한쪽이 젖어들기 시작하면 마치 불경죄라도 저지른 양 흠칫 몸을 떨고는 누가 보진 않았나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대통령께는 죄송하지만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내 손이 중요했다. 저자 박향 1963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199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1999년 제3회 부산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으로 『영화 세 편을 보다』가 있다. 현재 부산에서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사람이 사는 세상 이야기를 앞으로도 계속 소설 속에 담아내고 싶다. 요즈음은 특별히 청소년들의 마음속을 기웃거리고 있는 중이다.  
52 같은 빛깔로 물들어 간다는 것은/정경해
편집자
4334 2010-08-31
10.09월 4호 수필 사람은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닮는 것일까? 남편과 결혼해서 시댁 마을에 살 때, 그 마을 사람들은 우리 내외를 보며 모습은 물론 목소리까지 닮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만난 지 스물다섯 해가 흐른 지금도 풍기는 이미지가 너무 똑같다는 말을 주위로부터 듣는다. 그 말이 그다지 싫지는 않다. 그러나 닮긴 닮았다고 말하며 꼭 덧붙이는 말은 ‘알고 보면 너무나 대조적인 사람들’이라고 우리 두 사람의 취미나 특기를 거론하곤 한다. 결혼 전에는 남편이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말투나 행동을 보며 은연중에 우리는 오누이처럼 닮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취미만큼은 서로가 많이 달랐다. 남편이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갖기 바쁘게 직장의 축구팀에 가입 할 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축구를 좋아하나 보다’고 가볍게 넘겼었다. 그런데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시간만 되면 남편은 축구장으로 향했다. 텔레비전에서 스포츠 장면이 나오면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릴 정도로 스포츠엔 관심조차 없던 나는 그저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축구장을 찾는 것도 젊어서 한 때일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취미가 아니라 그것에 완전히 빠져서 주말마다 나를 게임 치르는 경기장으로 데리고 다녔다. 갈수록 운동장에 가는 것이 귀찮아졌다.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시도 때도 없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기만 하면 되는데도 때로 짜증스러웠다. 여행을 좋아하던 나는 경기장을 따라 다니며 짜증스러울 때마다 '여행'을 하는 것이라고 마음을 달랬다. 축구경기도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보고 싶을 때만 쳐다보고 먼 산 바라보기를 즐겼다. 어느 때 부터인가 공을 차지한 남편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이 상대팀에게 공을 빼앗길 때에는 나도 모르게 애가 탔다. 때로 골을 넣은 남편이 자랑스러운 듯 내 쪽을 바라보면, 손을 크게 흔들어 나 역시 기쁘다고 표시하였다. 텔레비전에서 스포츠 중계 해 주는 것을 편안히 앉아 보게 되면서부터 시간 되면 응원하러 오라는 남편의 말 한마디에 혼자서라도 운동장의 관중석에 앉아 응원을 하였다. 태어나서 지금껏 육지의 한가운데에 살아 멀게만 느껴지던 바다. 나는 슬며시 바다가 보고파지기 시작하였다. 친선 게임하러 울진에 갈 적마다 맛보기로 살짝 들렀다 오는 바다는 늘 나를 갈증 나게 하였다. 우연히 가보게 된 통영의 남망산에서 바라 본 새파란 바닷물과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는 한산섬은 나를 황홀경에 몰아넣었다. 그 후로는 근처를 지날 때마다 그곳에 들렀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우리 가족이 다 날아갈 것만 같았던 울산의 '대왕암'도 잊을 수 없는 곳이며, 그 근처에 있는 강동 방파제는 물이 깨끗하고 물고기도 잘 잡히며 아늑해서 틈날 때마다 우리 가족이 낚싯대 들고 찾는 곳이 되었다. 바다로 향하기 시작하면서 남편도 축구 뿐 아니라 낚시와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나와 큰아이가 '먼 산 바라보기'가 취미라면 남편과 둘째 그리고 막내는 조개를 캐고, 게 잡고, 낚시하는 것이 취미였다. 서로간의 취미는 달라도 바다로의 여행은 함께 즐길 수 있기에 몇 년 동안 운동장과 바다만 찾았다. 서로에게 익숙해진다는 것, 서로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더없는 불행이라 여겼었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음에도 어느새 가까이 다가섰음을 알았을 때에는 심한 자책으로 며칠이고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좋은 사람과는 끝없이 비슷해지고 싶고, 같아지고 싶은 것이 순수한 인간의 본능인 것을. 남편은 요즘, 전에 내가 그랬듯이 전망 좋은 우리 집 앞 베란다에 자주 나간다. "뭘 그렇게 바라보는데?" 전처럼 묻지 않는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창밖 먼 곳을 응시하기도 하고, 먹으려고 떠 온 지하수를 화분에 골고루 부어 주기도 한다. 뒤쪽으로는 폭 넓은 냇가가 휘돌아 흐르니 여유로워 좋고, 앞쪽으로는 아득히 바라다 보이는 곳에 크고 작은 산이 빙 둘러 앉은 우리 집. 바로 앞의 마을을 감싸 안은 평온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와서 좋다고 모두가 한목소리를 내는 우리 집의 앞 베란다. 큰 소리로 싸우고 나서도 함께 앞 베란다에 서면 어느새 한 마음이 되고 마는 우리 내외.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 받으면서도 같은 빛깔로 물들어 가는 것이 부부인가보다.  
51 그들만의 유희/주진
편집자
5569 2010-08-31
10.09월 4호 소설 그들만의 유희 주진 창밖이 훤한 걸 보니 아침이다. 용자씨는 고개를 들어 방 안을 둘러본다. 용자씨 침대와 기역자로 이어지며 이불 한 채가 바닥에 깔려 있고, 그 속에서 영감이 단잠에 빠져 있다. 방 안에는 길게 풀린 두루마리 휴지와 피 묻은 휴지 뭉치, 과자를 포장했던 비닐, 물컵, 효자손, 파리채, 때묻은 수건, 지난밤 영감이 빼준 기저귀까지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다. 자정 이후 기저귀를 갈지 못한 용자씨는 엉덩이부터 등까지 척척하다. 빨리 딸이 와서 갈아주길 바라지만 방 안 꼴을 보니 딸이 온다 한들 쉽지 않겠다. 그 년이 오기는 할까? 딸이 저녁 외출을 할 때마다 용자씨는 불안하다. 요즘 들어 히스테리가 심해지고 외박도 잦아졌다. 바지 주머니를 더듬어 딸의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꺼낸다. 딸이 나가 있을 때마다 만지작대다 보니 볼펜 글씨가 희미해지고 종이 결이 부슬부슬 일어나 너덜거린다. 집안에 영감과 둘이 남겨진다는 건 무방비상태와 같았다. 용자씨보다 열 살이나 많은 영감은 보행이 불편한데다 치매기까지 있었다. 욕실에 물을 틀어놓은 채 나오기도 하고 현관 문고리를 누른 채 마당에 나갔다가 문이 잠기는 바람에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는 용자씨 역시 애간장이 탔었다. 그러니 가스불을 켠다든지 욕실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당장 봐줄 사람이 없었다. 영감은 귀까지 어두워서 그 자신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소통 불능이다. 어젯밤에도 용자씨는 효자손으로 벽을 수십 번 두드리고 파리채를 던지고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러서야 그를 일으킬 수 있었다. 계월이한테 전화 좀 해보슈. 계월이한테 전화 좀 해보라니까. 영감은 용자씨가 건네준 쪽지를 들고 머리맡에 놓인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안 받아. 전원이 꺼져있대. 영감은 쪽지를 용자씨 가슴께로 던지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전만 해도 전화를 걸면 왜 전화질이냐고 욕이라도 해댔는데 요즘은 아예 전원을 꺼놓는다. 그래도 쪽지는 세상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다. 등짝이 젖어 불쾌한데다 양쪽 골반골 부위가 쓰리고 가렵다. 영감은 항상 기저귀를 거꾸로 댄다. 엉덩이에 대야 할 부분을 앞쪽에다 갖다 대니 흡수하는 면적이 작아져 소변이 금세 등짝으로 번진다. 게다가 쓸데없는 데에 공을 들인다. 접착밴드는 살짝 붙이는 시늉만 해도 될 것을, 골반 뒤편까지 바짝 잡아당겨 붙여놓으니 딱딱한 밴드가 살을 파고드는 것이다. 매번 지적하고 화를 내보지만 개선은커녕 그럴수록 영감은 기저귀에 손을 대려 하지 않는다. 영감 입장에선 힘들게 뒤를 봐줬는데 고맙단 소리는 못 들을망정 타박이니 그럴 만도 했다. 지난밤에도 그런 저런 문제로 난투극이 벌어졌었다. 기저귀를 갈아달라면 영감은 꼭 용자씨의 아랫도리를 벗겨놓고 매만지며 장난을 친다. 자라목을 하고 흐리멍덩한 눈으로 비척비척 다가왔다가도 용자씨의 속살을 보면 눈빛이 달라지는 것이다. 긴 손톱이 여린 속살을 스칠 때마다 아픈 것도 짜증나지만 손톱 밑에 낀 때를 생각하면 여간 찝찝한 게 아니다. 영감은 씻는 데에 게으르다. 그 손으로 사타구니도 긁고 리모콘도 만지고 용자씨에게 귤도 까서 먹여주고 떡도 집어 먹인다. 배… 좀… 타자. 영감은 기저귀를 갈기 위해 그녀의 비대한 몸을 돌려놓느라 낑낑대다가 침대 위로 한쪽 발을 올려놓았다. 이 양반이, 미쳤나. 하라는 일이나 똑바로 하슈. 용자씨는 머리맡의 효자손을 집어 영감의 대머리를 후려쳤다. 순식간이었다. 영감이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나동그라졌다. 손가락 틈으로 피가 흘렀다. 피를 보자 영감은 벌떡 일어나 주먹으로 냅다 용자씨의 이마를 쥐어박았고 그녀는 다시 효자손을 휘둘러 영감의 팔이며 어깨를 마구 때렸다. 오른팔은 용자씨가 움직일 수 있는 부위였다. 노쇠하여 굼뜬 영감은 다시 엉덩방아를 찧고 날라드는 효자손을 피하며 간신히 기어서 물러났다. 영감이 벽에 기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겨워하는 모양을 보자 용자씨는 심했나 하는 마음이 들었고 그러자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러게 왜 쓸데없는 짓을 해. 그놈의 손버릇은 죽기 전엔 못 고치지. 용자씨는 칠십 평생 정절을 지켜오기나 한 것처럼 아랫도리에 예민하다. 영감이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소원하는 배 좀 태워준다고 망가질 것도 아니지만 용자씨의 마음은 열리지 않는다. 그건 영감의 손길이 아쉽고 그립던 지난 시절에 대한 모욕이다. 그럴 때마다 딸은, 죽으면 썩어문드러질 걸 뭘 그리 아끼냐고 악다구니를 쓰며 아버지 편을 들었다. 용자씨는 내가 아무 놈한테나 훌러덩 내주는 니년하고 같냐는 욕덩어리가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지만 눌러 참는다. 딸은 어제 저녁에 친구를 만난다며 나가서 밤새 들어오지 않았다. 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서 용자씨는 더욱 과격했는지도 모른다. 같은 여자로서 남편 사랑 못 받고 홀로 생활을 꾸리다시피한 어미 편을 들 수도 있으련만 딸은 부모를 싸잡아 비난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비 편이었다. 흰 피부에 눈매가 처지고 입술선이 단아한 영감은 체구도 아담하고 그에 걸맞게 다감했다. 반면 눈빛이 매서운 호랑이상인 용자씨는 덩치도 영감보다 크고 다혈질이었다. 영감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사람들의 보호본능을 자극시키는 일면이 있었다. 어쩌다 그런 영감과 부부의 연이 되어 용자씨로서는 억울한 경우가 많았다. 찬바람 불면 중앙시장에서 신선한 소골 주문해 뒀다가 고아먹이며 수발한 정성은 그렇다 치고, 철새 따라 나도는 영감을 ‘오죽하면 그러겠느냐’고 편드는 말들이 더 참기 어려웠다. 얼토당토않은 동정표였다. 영감은 공사판을 따라다니며 토목 일을 보았다. 목돈을 만지면 방석집으로 갔고 없으면 대폿집을 드나들었다. 부뚜막에 먼저 오르는 얌전한 고양이처럼 가는 곳마다 여자 복이 많아 용자씨 속을 무던히도 썩였다. 한때 그녀에게 매독을 옮긴 적도 있었다. 딴 데 눈을 팔면서 조강지처를 홀대할 만큼 낯가죽이 두껍지도 못했다. 이래저래 성정이 불같은 용자씨 혈압만 오르내렸다. 용자씨는 칠 년 전에 뇌출혈로 쓰러져 몸의 반쪽이 마비가 됐다. 아기처럼 주는 대로 받아먹고 기저귀에 용변을 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용자씨의 일과는 먹고 싸는 일에 집중하고 매달리고 기를 쓰게 됐다. 배설이 항상 큰 문제였다. 뒤가 묵직한데도 일주일이 넘도록 변을 보지 못할 때는 아랫배가 불쾌하고 노폐물이 목까지 차오른 듯 답답했다. 온몸이 유독가스에 서서히 중독돼 가는 기분이다. 한번씩 아랫배를 누르고 괄약근에 힘을 주며 몸부림치다 보면 굳어 있던 몸이 니은자로 휘어 있곤 했다. 얼굴이 벌개지며 숨이 가쁘고 진땀이 난다. 미쳤어, 미쳤어, 죽을라고 환장했나 봐. 그러다 터지면 이번엔 정말 가는 거여, 알아? 그럴 때마다 딸은 빈정거렸다. 그려, 제발 가기라도 했으면 좋겄어. 오도 가도 않고 항문에서 딱딱하게 굳어가는 똥을 달고 일주일만 살아봐라. 용자씨는 속으로 웅얼거린다. 딸깍. 철문이 열리는 소리에 용자씨는 눈을 떴다. 딸이 왔다. 이제 됐다. 맛있는 냄새에 침이 고이듯 가까워지는 발짝 소리에 등짝이 스멀거린다. 우선 기저귀만이라도 빼줬으면 좋겠다. “아니, 이게 뭐야. 아휴, 나 미쳐. 아주 난장판이구만. 이 바퀴벌레 한쌍, 징허네 징해.” 바깥 공기와 함께 술 냄새가 훅 퍼져 들어온다. 또 섞었구먼. 음식물이 쉬고 썩은 내가 난다. “공주님 오셨어?” “공주는? 지랄!” 딸의 도끼눈에 용자씨는 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눈을 내리뜨고 손으로 자신의 아랫도리를 쿡쿡 찌르는 시늉을 한다. “알았어, 숨 좀 돌리고. 그러니까 엄마는 대접을 못 받는겨. 나 방금 문지방 넘었어. 어련히 알아서 해드립니다요. 안 그래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방에 들어오니까 지린내 땜에 토할 거 같아.” 딸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바닥에 널린 것들을 거친 발길질로 쓸어 한군데 모아놓는다. “그러니까 이것부터 빨리 빼달란 말여!” 용자씨가 참다못해 소리를 지른다. “사람이 참을성이 없어, 상황 좀 봐가면서 말하면 안 돼? 항상 그런 식이야, 엄마는. 남의 사정이야 어찌됐든 자기만 괴롭다 하고 자기만 편해야 하고, 자기만 알지.” “왜 이렇게 시끄러워?” 영감이 깼다. 귀가 더 어두워지는지 그런 척하는 건지 영감은 웬만한 말에는 모르쇠로 일관이다. 모녀가 싸우든 마누라가 물을 달라고 소리를 치든 모르쇠다. 그러다가도 분위기가 수위를 넘는다 싶으면 슬그머니 모녀 사이에 끼어든다. “왔냐? 밥 안 줘?” 영감은 딸만 보면 밥 타령이다. “아휴, 뭐든지 꼭 쌍으로 놀아요. 이쪽은 빼 달라, 저쪽은 밥 달라. 밥은 타이머 꽂고 갔으니까 다 됐을 테고 국만 데우면 돼. 사람 꼴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난리들이라니까.” 딸은 기어이 그대로 방을 나간다. 용자씨는 눈을 감아버린다. 예전의 용자씨 같으면 딸의 뒤통수로 벌써 재떨이가 날아갔을 게다. 갑자기 뭔가가 입술을 찌른다. 영감이 베지밀에 빨대를 꽂고 용자씨 입 속으로 들이밀고 있다. 누운 채 굶어죽을까 봐 틈만 나면 과자니 귤이니 입속으로 쑤셔 넣으려 한다. “먹어.” 대책없는 영감이다. 본디 타고난 품성과 상관없이 용자씨와는 하나에서 열까지 어긋나기만 하는 사오정 같은 사람이다. “저리 치우소!” 고개를 홱 돌려 빨대를 뿌리친다. “성질머리하고는.” 영감은 용자씨가 뿌리친 베지밀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간다. 그 바람에 빨대 구멍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용자씨 턱 밑으로 흘러 목 언저리까지 적셨다. 맑은 물도 아니고 이런 끈적끈적한 액체가 묻는 건 질색이다. 씻으러 갈 수도 없고 누가 알아서 닦아 주는 것도 아니니 이렇게 사소한 얼룩과 냄새들이 찌들고 발효되는 과정을 용자씨는 고스란히 견뎌야 한다. 아무도 용자씨의 그런 얼룩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럴 때면 자신이 커다란 오물덩어리가 된 것 같다. 큰 오물덩어리에 한 점 얼룩이 묻는 것이다. 오물덩어리에 묻는 것은 이미 얼룩이 아니었다. 모든 일이 그런 식이다. 깨끗한 곳에는 쓰레기를 버리지 않지만 쓰레기가 쌓여 있는 곳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휴지를 버리고 소변을 보는 것이다. 얼룩이라는 건, 얼른 세면실에 가서 씻거나 옷에 닦은 뒤 다음날 얼마든지 빨아 입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나 쓰는 말이다. 그래서 용자씨는 자신에게 묻는 것은 얼룩이 아니라 모욕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턱받이를 해주지 않고 먹이려들 때나, 배려한답시고 먹을 것을 입에다 쑤셔 넣으려 할 때 화가 난다. 비록 입속에서 구린내가 가실 날이 없고 살비듬이 생선비늘처럼 떨어지고 락스를 아무리 넣고 빨아도 지린내가 빠지지 않는 옷과 이불을 걸치고 있지만, 용자씨는 그랬다. 일상이 비록 남의 손을 빌려야만 유지되는 것이긴 하지만 용자씨가 고집스럽게 요구하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땀이나 눈물 닦는 수건과 음식물이 얼굴에 묻었을 때 닦는 수건을 구별할 것, 그리고 허리 아래를 닦는 수건은 절대로 허리 위에는 쓰지 말 것, 그녀가 먹는 것은 오로지 여러 가지 곡물 죽과 동치미가 전부인데 수저를 따로 쓸 것 등이다. 죽 뜨던 수저로 동치미를 뜨면 금세 국물이 지저분해지고 그렇게 먹다 남은 동치미를 버리는 것도 아까운 일이다. “벌려!” “생각 없어.” “아, 또 왜 그래? 심통 부리지 마. 죽 데웠잖아.” 딸은 죽을 뜬 수저를 용자씨 입 속으로 거칠게 들이민다. 용자씨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허옇게 더께가 덮인 용자씨의 혀는 플라스틱 같다. 혀 특유의 섬세한 감각과 부드러움은 남의 손을 빌려 수저질하게 되면서부터 잃어버렸다. 딸이 기계적으로 들이미는 수저를 혀를 놀려 밀고 당기며 조절한다. 입속에서 음미할 여유는커녕 기를 쓰며 죽을 삼킨다. 식도가 점점 차오른다 싶으면 혀로 요리조리 수저를 밀며 시간을 번다. 용자씨 이마에 땀이 맺힌다. 딸의 손놀림을 가늠해야 하기 때문에 딸을 향한 용자씨의 번득이는 눈빛은 자동차 헤드라이터를 켠 듯 형형하다. 그 눈빛 때문에 딸의 손놀림이 더 빨라진다. 꿈틀거리는 혀의 힘이 수저를 통해 전해질 때마다 딸은 진저리가 난다. 하루 세 번 반복되는 이 행위를 할 때마다 ‘왜?’라는 의문이 고개를 쳐든다. 오로지 먹고 배설하는 기능뿐이면서, 그마저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면서, 엄마는 왜 이다지도 먹을 것에 집착하는가? 그녀 자신은 속마음과 달리 왜 죽을 끓여내고 악착같이 먹이는가? 불가사의한 모순이었다. 대접이 비자 딸은 거꾸로 들어 비었음을 확인시킨다. 마지막으로 변비약 두 알을 입속으로 던지듯 집어넣고 물컵에 빨대를 꽂아 들이댄다.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홀수를 좋아하는 용자씨는 자신의 의지로 가능한 것은 모두 홀수 번으로 끝낸다. 용자씨는 딸의 눈을 보며 손가락으로 다시 뒤를 봐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알았다구. 아버지 식사나 끝내야지. 지금, 밥상 앞이야.” 보채는 아이 단도리하듯 딸은 단호하다. 용자씨는 고개를 들어 영감의 밥상을 본다. 영감은 둥근 소반으로 독상을 받고 식사중이다. “뭐 맛난 거 아버지만 따로 줬을까봐? 그런 거 없어. 하여간 그놈의 식탐은…….” 딸은 용자씨의 입가를 닦아주고 영감을 향해 돌아앉는다. 자박하게 조린 조기를 뜯어 영감의 밥숟가락 위에 얹어 놓는다. 마지못해 우물거리던 영감이 활기를 띤다. “너도 먹어야지.” 용자씨가 말한다. “입맛도 없고……. 여기저기 쑤시고 죽겠네.” “그러게 집에서 잠이나 잘 것이지, 왜 밤에 술 마시고 다녀.” 딸은 난데없이 뒤통수 맞은 얼굴이다. “말이라고 해? 일 년 삼백육십오일 하루 이십사 시간 꼬박이 엄마 아버지 옆에만 붙어 있으란 소리야? 내 생활은 어디 있고? 이러다 스트레스로 팍 뒈져야 엄마 속이 시원하지?” “밤에 나가서 술 마시고 남자 만나고 노는 게, 그래 네 생활이냐?” “환장허겠네, 내가 술을 마시든 남자를 만나든 엄마가 무슨 상관이야? 나도 낼 모레면 환갑이야. 동의서 받을 나이 아냐. 나도 자식 며느리 수발 받을 나이라구. 엄마 눈에는 아직도 내가 맨날 사고치고 다니는 어리숙한 년으로만 보여? 나 이계월, 밖에 나가면 똑부러져. 화끈하고 정 많고 의리있고.” “화끈하고 정 많아서 그래, 돈 한푼 없는 것이 보험쟁이 친구 보험 다 들어주구 건강식품인가 뭔가 파는 친구 물건 다 팔아주구, 쩔쩔거리며 이리 꿔다 저리 메꾸구 그러냐? 엄마 아버지 몫으로 나오는 교통비랑 노령연금 다 빼다가 의리 만들어?” “나 미쳐. 알지 못하면 주둥아리 닥치셔. 흑마늘이니 홍삼이니 다 누구 입으로 들어갔는데? 시도 때도 없이 그거 안 주나 하고 기다린 사람 누구여? 정말 이러니 정 떨어지는겨. 내가 뭣하러 몸 망가져가며 이런 놈의 집구석에 붙어있나 몰러.” 딱. 영감이 수저를 소리내며 놓았다. 딸은 붉으락푸르락 하며 소반을 들고 나간다. 오십 중반이 되어가는 딸은 아직 혼자다. 잠시 미용실이나 옷가게에서 일을 한다며 집을 떠나 살아보기도 하고 그러는 중간에 남자와 동거도 했지만 결국은 혼자 빈손으로 돌아왔다. 딸도 처음부터 사나웠던 건 아니었다. 용자씨가 쓰러진 뒤 2, 3년 동안 딸의 정성은 극진했다. 용자씨가 7년째 누워 있으면서도 큰 병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도 딸이 몸에 좋다는 약초를 끊이지 않고 달여 준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또 그 때문에 목숨이 이리도 질겨졌나 싶기도 하다. 딸은 심호흡을 한다. 들고 나온 소반 위의 남은 반찬을 플라스틱 볼에 쏟아 넣고 고추장을 한 숟갈 퍼 넣어 밥을 비빈다. 이러니 위장병이 나을 리가 없다. 위장, 관절, 혈압, 허리병에 불면약까지 복용하는 약만도 한줌이다. 한의사는 기혈이 막혔다 하고 양의는 스트레스성이라 했다. 어제는 순영이 미장원에서 등에 부황을 뜨다가 죽는 줄 알았다. 갑자기 손발이 저리고 두근거리면서 숨이 가빠왔다. 정신을 놓게 될 것 같아서 119를 불러달라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순영이 머리를 말다 말고 방으로 달려와서 주무르며 난리를 피운 뒤에야 진정이 됐다. 플라스틱 볼을 가랑이 사이에 놓고 비빈 밥을 입에 담는다. 먹다 보니 좀 전에 찜질방에서 미역국을 먹은 게 생각났다. 요즘은 끼니를 챙겼는지 말았는지, 배가 고픈 건지 부른 건지, 방금 뭐했는지 뭘 하려고 했는지 생각도 안 나고 머릿속에 부옇게 때가 낀 듯하다. 누워 있는 엄마는 아직도 서슬퍼런 성질이 그대로인데다 눈치는 어찌나 빠르며 귀는 또 얼마나 밝은지, 보기만 해도 상대방 속을 샅샅이 꿰뚫어 숨이 턱 막힐 지경이다. 골목에서 나는 발소리만으로도 누군지 알아맞히고 얼굴만 보고서도 무얼 하다 왔는지 알아낸다. 세월이 흐를수록 정신은 더 멀쩡해져간다. 사지가 굳은 사람은 엄마인데 목에 사슬이 걸린 것은 자신이었다. 어릴 때부터 엄마 품에서 벗어나려고 그리도 애를 썼건만 결국 이렇게 붙들려 살게 되다니 어처구니없다. 답답한 마음에 점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점쟁이는 용자씨가 그 해를 넘기지 못 할 거라고 했다. 영감은 진작에 갔어야 할 사람인데 마누라 지켜주느라 아직 못 가고 있다는 것이다. 용자씨가 가면 영감도 곧 따라갈 것이니 준비나 잘 하고 있으라 했다. 그 해 내내 딸은 마지막이려니 하며 귀하고 맛난 음식을 내놓고 품질 좋고 비싼 기저귀를 사고 용자씨 잔소리를 다 받아내며 정성을 들였다. 안방 문을 열 때마다 긴장이 됐고 잠든 용자씨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보기도 했다.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는 집 안까지 들어오지는 못했다. 딸은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창문을 열었다가 마당 장독대 위에 까치가 죽어 있는 걸 보았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대추나무 아래 고양이가 기어들어와 쓰러지더니 하루를 못 넘기고 죽었다. 그 뒤로 삼 년이 지났다. 안방의 붙박이로 누워 있는 용자씨와 영감, 그리고 딸의 눈동자 속에는 기다림에 지친 서로의 모습이 정물처럼 담겨 있다. 조바심과 지겨움도 한철 메뚜기떼처럼 지나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쁜 기억들만 남는다. 두어 숟갈 먹다 말고 찬장에서 약 바구니를 꺼냈다. 먹다 만 약과 새로 받아온 약이 한데 섞여 바구니는 약으로 수북했다. 아프니까 처방은 받아오지만 복용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어제 받아온 위장약 봉지를 일일이 뜯어 분홍색 작은 알약만 꺼낸다. 잠을 못 잔다고 하자 언제부턴가 의사는 분홍색 알약을 추가로 처방해 주었다. 이번에도 열흘치, 열 알이다. 흰 봉지들 틈에서 작은 갈색 약병을 찾아내어 그 속에다 모두 집어넣는다. 약은 이제 반 병을 채웠다. 딸은 절대로 용자씨처럼 삶을 이어가지는 않겠다고 다짐한다. 오줌으로 물컹거리는 기저귀를 빼내고 나니 용자씨는 살 것 같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딸만큼 자신의 몸을 잘 알아주는 이가 없다. 요즘 딸은 허리가 아프다며 기저귀 가는 일을 힘겨워했다. 딸은 용자씨 몸을 옆으로 굴리고 기저귀를 빼낸 뒤 따뜻한 물수건으로 등을 닦아내고 긁기 시작한다. 용자씨가 가장 기다리는 순간이다. 옷과 기저귀와 수건 따위에 짓눌려 돋을새김처럼 금이 그어진 등판을 딸은 손톱을 세워 사정없이 긁는다. 용자씨는 몸을 부르르 떨며 새소리 같은 비명소리를 낸다. 이럴 때 용자씨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 영감과의 잠자리도 이만큼 좋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순간 모든 게 멈춰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생각한다. 세상이 끝나든지 자신이 끝나든지. 얘야, 조금만 더, 조금만. 속으로 용자씨는 애원한다. 그러나 딸은 이내 한숨을 크게 토해내며 손을 놓고 주저앉는다. “야아, 어깻죽지 아래 뭐가 났나 만져 봐라.” 용자씨 목소리가 안타깝다. “으이그, 한도 끝도 없어. 이제 고만해.” 딸은 피가 스며들어 벌건 손톱을 용자씨 눈앞으로 들이댄다. 아물만하면 또 그렇게 긁으니 상처가 덧나기도 했다. 뒤를 해결하고 나니 무릎과 발목이 저릿저릿 쑤신다. 마비된 왼쪽과 달리 아직 감각이 남아 있는 오른쪽이 칭칭거리며 신호를 보낸다. “아씨, 거기 화장대 속에 물파스 있어?” “그냥 발라 달라 그래. 아씨니 뭐니 하지 말고. 그리고 한 가지 일이 마저 끝나거든 시켜. 아직 기저귀도 못 채웠어.” 그리고 물티슈를 뽑아 사타구니를 꼼꼼히 닦고 새 기저귀를 끼우고 골반골에 닿지 않게 헐겁게 접착 밴드를 붙인다. 딸은 용자씨가 쓰러지고 나서 YWCA에서 하는 간병인 교육을 받았다. 그래선지 초기에는 크게 힘들이지 않고 간병 일을 해냈다. 요령 있게 몸을 일으켜 하루에 한 번 침대에 앉혀주기도 하고 누워 있는 채로 비누칠을 하여 몸을 닦아주기도 했다. 변이 막히면 관장도 해주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딸은 함께 간병인 교육을 받은 이가 병원에서 하루의 반만 일을 하고도 150만원을 받았다더라고 했다. 용자씨는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그때만 해도 괜찮았다. 지방 변두리라 얼마 되지는 않아도 이 집의 전세금으로 딸의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딸은 부모고 돈이고 다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이 진심이든 홧김에 내뱉은 것이든 용자씨는 섭섭하지도 않았고 화도 나지 않았다. 용자씨 자신도 목숨에 진력난 지 오래였다. 더 기막힌 것은 목숨에 진력난 것과 먹고 싸고 편하고 싶은 욕구는 별도의 문제라는 거였다. 딸은 몸이 굳어갈수록 먹고 싸는 본능에 강렬해지는 용자씨에게 위선자라니 이중인격이라니 하며 서슴없이 욕을 해댔다. 이제는 그마저도 익숙해져서 용자씨는 차라리 딸의 욕설을 들으며 편안한 잠을 자곤 했다. 용자씨가 죽고 싶다 하면서도 혀의 힘이 강해지는 것처럼 꼴보기 싫다 하면서도 딸은 용자씨를 위해 콩을 불려 믹서에 갈고 팔이 아프게 저으면서 죽을 쑤었다. 방 밖 어딘가에서 약하게 전화 벨소리가 들린다. “전화 받아봐!” 기다리던 중요한 전화이기라도 하듯 용자씨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친다. “깜짝야. 어련히 받을 걸 왜 그리 큰소리야?” 딸은 투덜거리며 나간다. 딸의 휴대폰에서 나는 소리며 자신과 관계없는 전화라는 걸 알면서도 용자씨는 귀를 기울였다. 웅얼거리는 소리의 크기로 보아 통화는 작은방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내용을 알 수는 없었으나 딸의 목소리는 서슬이 사라져 부드러웠고 간간이 웃음소리도 섞였다. 평소 친구들과 통화를 한대도 저러지는 않았다. 별일이었다. 한번쯤 놀랄 만한 소식이 있었으면 좋겠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놀랄 만한. 쓰러져 누운 뒤로 이 세상마저 정지해 버린 건 아닐 텐데 용자씨는 진공의 세계에 갇혀버린 듯하다. 통화를 끝내고 들어온 딸의 표정이 사뭇 밝다. “누구여?” “알면?” 딸은 빈정대면서도 싫지 않은 기색이다. 용자씨는 때를 놓치지 않고 내지른다. “이 년아, 이렇게 누워 있어도 내가 니 에미다.” “지랄! 이러니까 틈을 주면 안 돼. 부탁이니까 좀 먹힐 소리를 하소.” 딸은 이내 받아치지만 비수가 담긴 어조는 아니다. 뭔가 딴 생각에 마음이 뺏겨 있다. 용자씨는 의기소침해진다. “참, 내, 살다 살다……. 내 안부 궁금해 하는 사람 첨 봤네.” 딸은 속에 담아두고 혼자 음미하는 체질은 못된다. 어제 딸은 남자를 만났다고 했다. 미장원 친구와 대폿집에서 한잔하고 있을 때였다. 옆자리에서 사십대 남자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누구를 기다리는 기색도 없고 한숨만 푹푹 쉬고 있어서 딸이 먼저 말을 걸었다 했다. 젊은 양반이 무슨 사연이 있어 혼자 앉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잔 받으시라고. 남자는 합석하고서도 묻는 말에나 겨우 대답할 뿐 말이 없었다. 그러다 식당이 문을 닫자 노래방에 가자고 제안한 건 남자였다. 노래방에서도 남자는 두 여자가 부르는 노래를 듣기만 할 뿐이었다. 마이크를 대줘도 한사코 사양하며 듣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했다. 말도 없고 노래도 안 했지만 분위기가 싫지는 않았는지 끝까지 앉아서 감상하더라고, 딸은 나긋한 목소리로 지난 밤 일을 늘어놓았다. “어제는 웬일로 노래도 어찌나 잘 되는지 밤새 부르라면 부르겠더마는. 마지막엔 내 십팔번 패티김 노래 있잖아. 가슴~속에 스며드는~ 고독이 몸부림칠 때~ 크아, 마무리 확실하게 했지. 순영이랑 나는 찜질방으로 가고 그 사람은 택시 타고 갔는데, 누님 잘 들어가셨냐고 전화까지 해주네. 어제 고마웠다면서.” “사내놈들 다 똑같아.” 용자씨는 체념하듯 내뱉는다. 고작 영감 한 사람 겪었을 뿐인데 용자씨는 이 세상 사내를 다 겪은 것처럼 말한다. 수요일은 자원봉사자 유 선생이 오는 날이다. 유 선생이 오는 날은 집 안이 생기가 돈다. 평소 같으면 늘어지게 자다가 아침인지 점심인지 애매한 시간에 상을 차리던 딸이 일찍 일어나 수선을 떤다. 딸은 마음 놓고 외출 준비를 하고 영감도 자리에서 일어나 은근히 기다리는 눈치다. 일주일에 한번 오는 유 선생은 용자씨와 영감이 유일하게 접촉하는 외부인이기도 했다. 딸은 옷을 이것저것 입어보느라 바쁘다. 나잇살이 찐 건지 스트레스 살인지 몇 년 새 체중이 많이 불었다. 양볼과 턱, 어깨, 팔뚝, 배와 허리, 엉덩이 에 이르기까지 질이 안 좋은 라텍스를 덕지덕지 붙인 것 같다. 재킷을 입으면 암홀이 끼고 섶이 벌어졌다. 바지를 입으면 지퍼 끝부분이 벌어지고 밑위가 찢어질 듯했다. 결국 딸은 투덜거리며 고무줄 바지에 바바리를 걸쳤다. “아니, 아버지가 우황청심원을 또 두 개나 잡쉈네. 엄마 것까지 먹어버렸어. 비상으로 두는 건데, 에구 웬일로 면도까지 하셨대? 면도하라고 노랠 부를 땐 못 들은 척하더니.” 영감 머리맡에서 빈 약병을 쳐들어 보이며 딸이 말했다. 영감은 여전히 못 들은 척 텔레비전에 눈을 박고 있다. 영감은 오늘 또랑또랑해 보인다. 그게 단지 우황청심원을 두 병이나 먹고 면도를 해서만은 아니라는 걸 용자씨나 딸은 안다. 딸은 재미있다는 듯 킬킬거린다. 먹을 때와 화장실 갈 때 빼고는 진종일 누워 사는 영감은 유 선생이 오면 그나마 일어나 집 안을 걸어다녔다. 어제부터 그들은 유 선생 얘기를 하며 오늘을 기다렸다. 40대 초반의 유 선생은 지난해 정기 방문 오는 보건소 간호사를 따라왔다가 인연이 됐다. 얼굴이 둥글넓적하고 싹싹한 여자였다. 청소하고 점심상 봐주고 몸도 닦아주고 얘기도 나누며 서너 시간 돌봐 주다 갔다. 영감은 유 선생에게 아기처럼 굴며 생떼를 쓰기도 했다. 딸이 해준다는 걸 마다하고 유 선생한테 손톱 발톱을 깎아달라는 건 점잖은 표현이고 숫제 누워서 일으켜 달라거나 밥을 먹여 달라고 했다. 유 선생이 손을 잡아 주면 영감은 팔까지 만지려 들고 거동을 도와주면 갑자기 몸을 돌려 유 선생을 껴안기도 했다. 그럴 때 영감은 호흡이 거칠어지고 팔 힘도 유 선생이 당황할 만큼 셌다. 그때마다 유 선생은 몸을 자꾸 움직여야 운동이 된다며 영감이 민망하지 않게 피해 갔다. 서너 번 그런 일을 겪더니 유 선생이 어느 날 커다란 곰인형을 가져와 영감 품에 안겨 주었다. “어르신, 여기 그림 속에 뭐가 있어요?” 유 선생은 8절 크기의 퍼즐그림판을 영감 앞에 내보이며 묻는다. 영감은 배시시 웃는다. “웃지만 말고 말씀 좀 해 보세요.” 그래도 영감은 웃기만 한다. “소방차, 구급차, 경찰차, 이삿짐차, 풍선 든 아이, 사탕 든 아이, 피자가게…….” 참다못한 용자씨 입에서 대답이 줄줄 나온다. 늘 같은 질문이었고 늘 같은 상황이 된다. 용자씨는 누워 있고 유 선생과 영감은 방바닥에 마주 앉아 있다. “할머니는 보지도 않고 잘도 아시네. 지금도 총기가 좋은데 젊을 때는 얼마나 좋으셨을까?” 유 선생이 웃으며 퍼즐조각들을 바닥에 쏟아 놓아 밑판과 분리시켰다. “자동차들부터 놓아 보세요.” 영감은 유 선생이 밀어주는 조각부터 집어 든다. “좋고말고지. 우리 아버지가 그 시절에 일찍 깬 사람이라 여자도 배워야 된다고 나를 학교에 보냈어. 어릴 때부터 하나를 가르쳐주면 내가 열을 알았다고. 어찌나 똑똑했는지 사촌언니들도 나한테 와서 배웠지. 여학교 가서는 내가 계속 반장을 맡았어. 일어섯, 앉아, 앞으로 가, 뒤로 돌아, 구령도 쩌렁쩌렁 얼마나 잘 붙였는지 운동장에서 조회할 땐 항상 내가 지휘했다우.” 용자씨의 레퍼토리가 시작됐다. 어린 시절 에피소드부터 부모 형제를 비롯해 동네 사람들과 얽힌 사건들, 영감과 결혼하던 당시의 일들. 용자씨가 입을 열어 이야기를 시작하면 누가 듣거나 말거나 자신이 됐다 싶을 때까지 이어진다. 용자씨는 어떤 말이든지 뱉을 만큼 내뱉어야 머릿속이 청소가 되고 가슴도 후련해졌다. 유 선생은 간간이 장단을 맞추고 영감은 말없이 퍼즐에 열중한다. 100개의 퍼즐 조각은 모양이 다 제각각이다. 영감은 퍼즐조각을 낱낱이 모양으로만 맞추어나갈 뿐 그림의 내용으로 맞추지 않는다. 그림 속에는 여러 종류의 차들이 도로를 달리고 아이들이 인도로 걸어가고 가게들이 즐비하다. 피자가게에 들어가는 아이, 풍선장수, 엄마 손을 잡은 아이……. 분주하면서도 정겨운 거리의 풍경이다. 유 선생은 일부러 그런 그림을 골라왔는데 영감은 수십 번을 맞춰도 퍼즐판 속에 어떤 그림들이 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영감은 배가 그려진 퍼즐조각을 들고 한참 헤맨다. 배는 강물이 있는 곳에 있겠지요? 강물이 어디 있나 찾아보세요. 힌트를 줘도 영감은 자신의 방식을 버리지 못했다. “…… 찾아봐요. 작은 방에 있나 찾아봐요. 유 선생님, 유 선생님.” 실타래처럼 풀어놓던 얘기 끝에 용자씨가 유 선생을 부른다. 용자씨는 딸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딸이 외출만 하면 불안해하는 걸 알고 있기에 유 선생은 그러려니 귓등으로 들어 넘겼다. 오늘 용자씨는 유난히 뜬금없이 말을 섞는다. 딸은 아무나 저 좋다는 사람만 있으면 밥이나 해주며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작은 방에 우리 애 가방이 있나 좀 봐줘요. 그 바퀴 달린 빨간 색 가방 있잖아. 끌고 다니는 큰 가방 말이우.” 가방은 작은 방 구석에 있었다. 용자씨는 또 딸에게 전화를 해보라고 성화다. 딸의 휴대폰은 역시 전원이 꺼져 있다. 유 선생이 퍼즐 맞추기를 끝내고 점심을 차리려 주방으로 나가자 영감이 비척거리며 따라 나간다. “이봐요, 이봐. 자리에 누워 잠이나 잘 것이지 쓸데없이 어딜 돌아다녀?” 용자씨가 영감을 향해 면박을 주었지만 영감은 못 들은 척한다. 영감은 엄마를 따라다니는 아이처럼 유 선생 옆에 우두커니 서 있다. 무슨 행동이 나올지 몰라 유 선생은 긴장이 된다. 들어가 계시라고 말하려는 참에 비상벨 소리가 들렸다. 벨소리는 날카로운 흉기가 유리를 깨고 들어온 것처럼 요란했다. 유 선생은 다급하게 안방으로 들어갔다. 용자씨는 오른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베지밀, 베지밀……. 냉장고에서 베지밀 세 개 꺼내서 선생님 하나 드시고, 나도 먹고, 영감도 주세요. 점심 차리지 말고 그걸로 한끼 때우고 치우자고.” 유 선생이 난감해했지만 용자씨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베지밀 하나로 점심을 때웠다. 용자씨 기저귀를 갈고 유 선생은 평소보다 일찍 나섰다. 대문 앞에는 담배꽁초와 과자봉지, 종이쪽지 등 쓰레기로 지저분하다. 처음 몇 번 유 선생은 쓰레기를 줍고 비질도 했으나 끝없이 쌓이는 쓰레기로 이내 지쳐버렸다. 영감이 거동이 자유로웠을 때는 날마다 비질을 해서 골목 안이 환했었다. 이제 이 근처는 사람의 발길이 끊긴데다 악취가 풍기고 스산한 기운이 돌았다. 영감과 용자씨가 들어있는 집 자체가 그대로 폭탄이었다. 뇌관을 슬슬 달래가며 저절로 용도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폭탄. 대문 앞에 설 때마다 선생은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야.’고 머리를 젓는다. 그러나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순간 유 선생에게는 다음 일과가 바쁘게 다가왔고 버스는 일상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오후 시간은 고요히 지나갔다. 유 선생이 돌아가자 영감도 다시 이불을 고치처럼 몸에 둘둘 말고 누워 버렸다. 한 방에 있으면서도 두 사람은 각자 타임머신을 타고 먼 차원의 세계로 떠난 것처럼 시간을 보낸다. 어둑해지도록 딸은 돌아오지 않는다. 딸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손에 쥐고 용자씨는 얕은 잠을 자다 깨다 한다. 창밖으로 나무 그림자가 얼렁거릴 때마다 숨죽여 귀 기울인다. 깜깜해지자 영감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일어난다. 창으로 희부염한 달빛이 들어오고 영감의 구부정한 실루엣이 드러난다. 영감은 용자씨 침대를 향해 비실비실 걸음을 떼어놓는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한나절을 보냈을 뿐인데 먼 여행에서 돌아온 것처럼 용자씨와 영감은 안부를 확인한다. 무사귀환에 대한 안도인지 실망인지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우두망찰 마주한다. 영감이 손을 들어 이불을 들추려 한다. 용자씨 입에서 난데없이 구령이 떨어진다. “뒤로오 돌앗!” 영감은 두 손을 차렷 자세로 붙이고 뒤로 돈다. “앞으로잇 갓!” 영감은 최대한 꼿꼿한 자세로 앞을 향해 걷는다. “우향 우! 앞으로잇 갓!” 영감은 방문 앞에서 옆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걷는다. “좌향 좌! 앞으로잇 갓!” 영감이 엉거주춤 멈추려할 때마다 용자씨의 구령은 채찍질하듯 쩌렁쩌렁 높아진다. 영감은 방 안을 돌고 돌았다. 소리를 지를 때마다 용자씨의 기저귀는젖어들어 이미 등짝까지 척척해졌다. 용자씨는 구령을 멈추지 못한다. 힤  
50 “시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문자답/박승민
편집자
3134 2010-08-31
“시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문자답 박승민 어영부영 야매로 시인노릇을 한지가 꽤 오랜 세월이다. 그럼에도 나는 “시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여전히 오리무중 속이다. 그러나 아무리 둔감해도 질문을 거듭하면, 대답은 아니지만 대답과 엇비슷한 무늬의 부스러기들이 머릿속에 잔광으로 남는다. 다시 “시인이란 무엇인가?” 자문자답해본다. 아마 내가 이해하는 범주 안에서 말한다면, 시인이란 “자기를 포함해서 이 세상 타자들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 혹은 “듣고 난 후에 이를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세심하게 기록하는 사람”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먼저 자기 자신이 문제이다. 80년대 우리문학이 시인 자신이 자기 존재문제를 정리하고 궁구하기보다는 -사실 시대적 급박함이 그럴 시간적 유예기간을 허용하지도 않았지만- 사회적 문제에 성급하게 투신한 결과, 일부 시인들의 경우 자신의 몸과 이념의 몸이 따로 논 경향들이 자주 목격되었고, 그 결과 작품의 형상화 과정에서 도식적, 교조주의적 경향들이 빈발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후,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함께 찾아온 소위 민중 시인들의 너무 가벼운, 또는 너무 빠른 투항의 결과로 이어졌고 -이것이 보수진영의 노골적인 비웃음거리가 된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충격은 지금까지도 여진으로 남아 현 한국문학의 환경자체가 지나치게 자연경도문학이 되거나 자신의 존재문제만을 과도하게 집착하게 하는 급우경화의 결과를 낳았다. 결국 시인이란 김수영이 말한바 대로 죽음의 문제, 즉, 자기 자신의 삶과 죽음을 향상 교직시키면서 혹은 쟁투시키면서 자기를 수면 가장 밑바닥까지 끌어내려 응시하려는 내면적 싸움이 없다면, 그 고통에서 건져 올린 무게가 아니라면 그의 문장은 티끌 같은 적은 세월에서조차도 쉽게 마모되는 모래알갱이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 자신이 자신의 내면적 존재문제에만 정착 혹은 유착한다면, 그는 타자와 유리된 채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저 지난 시절, 수없이 명멸했던 가난한 개별적 文士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타자가 머무는 곳을 향해 항상 자신의 귀와 마음을 열어두는 엄결한 자세가 필요하다. 이 때 타자라함은 타인은 물론이고 타 생물종, 타 외계, 타 제도와 법규, 도덕과 규율, 정치와 역사를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즉, 자기 절대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 상대주의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려 할 때, 더 나아가 가기 자신조차도 상대화시켜 끊임없이 반성하고 번복하고 갱신하려는 정신이 살아 있을 때, 그는 세월의 흐름에도 쓰러지지 않는 청년적 문장을 생산해 낼 것이다. 말하지 못하는 하늘의 말을 대신 전해주는 자, 서 있지 못한 나무의 아픔을 적어 놓는 자, 폭염에 바스라질 듯 위태롭게 매달린 시든 꽃잎의 운명을 대신 울어주는 자, 자신의 수탈을 정치적으로 발언하지 못한 채 고단한 일생을 한숨처럼 살고 있는 폐지수거노인의 안부를 물어 주는 자,,, 그리고 그 부당성을 언어미학으로 말 할 수 있는 자, 그가 시인이다.  
49 강 외1편/김재수
편집자
4621 2010-08-31
10.09월 4호 시 강(江) 김재수 흐르는 물도 가끔 거슬러 오르고 싶어 무작정 아래로 흐르며 가슴을 넓히고 더 많이 더 넓게 품는 일도 좋지만 언젠가는 모두 바다로 흘러 보내야 할 일들 가끔은 거슬러 올라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던 여린 빗방울 모아 가슴 채우던 골짜기 아주 작은 새들의 과의 속삭임 눈망울 깨끗한 물고기들의 눈 맞춤 작아도 넉넉해 노래 부르던 곳 달빛 환한 날은 물고기들이 물을 거슬러 하늘에 오르는 꿈을 꾸는 것처럼 강도 무거운 가슴 내려놓고 움질움질 물살을 일구며 오르고 싶어. 가로수 김 재 수 어깨를 건드린다 아는 체하며 돌아보니 살며시 등을 기대는 가로수 ‘쉬었다 가렴’ 푸른 물소리로 말을 건넨다. 그렇구나 숱하게 이 길을 오갈 때 마다 나무는 나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구나 등으로 전해지는 물소리 하늘엔 땡볕이 타고 있는데 기다리고 있었구나 나무는 푸르게 그늘을 만들며.  
48 고들빼기 외1편/김주애 [1]
편집자
5222 2010-08-31
10.09월 4호 시 고들빼기 김주애 면사무소가 있는 상촌리 흑돼지 식당 문에 기대어 놓은 걸레 옆 고들빼기가 피었다 번져갈 곳 없는 콘크리트 포장길 위로만 자라 층층이 뽀얗게 먼지를 안고 서 있다 쥐 죽은 듯한 골목길 윙윙거리는 파리소리에 흘러가는 시간 몇 개의 식당과 다방이 제법 시골티를 벗은 듯해도 허물어진 집들이 늘어난다 오고가는 이도 없는 한 낮, 제 몸뚱이 지켜줄 한 뼘 땅 위에 늘어진 거미줄을 걸고 먼지만 날리는 버스가 지날 때마다 간댕간댕 흔들린다 잠을 자려다 어릴 적, 잠을 자려고 누우면 천장을 뛰어 다니던 쥐들 때문에 쭈뼛쭈뼛 솟구치는 잠을 달래며 치를 떨었던 기억 내 머리마저 갉아 먹을 것 같은 쥐새끼들과 끝도 없는 싸움을 했던 기억 아이와 잠을 자려고 누워 있으니 누군가 천장을 뛰어 다닌다 -엄마 무서워- 아이는 본적도 없는 소리가 무섭다 가슴을 파고드는 아이를 토닥이는데 잠 위를 가로질러 가는 낯익은 발소리 쥐 새 끼 나는 방바닥을 걸어갈 뿐인데 아래층 누군가의 머리를 갉아먹고 있었다니 서로의 천장이 될수 밖에 없는 아파트 쥐 죽은 듯 살아야 하는데 아래층 또 아래층 머리통을 갉아먹고 살고 있으니 어쩌면 땅속 어딘가에 숨어 사는 쥐새끼들 밤마다 솟구치는 잠을 달래며 치를 떨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47 발가숭이 임금님 외1편/권현수
편집자
4217 2010-08-31
10.09월 4호 시 발가숭이 임금님 권 현 수 가랑잎 하나 버즘나무 가지 끝에 아직도 매달려 있다 가을이 가고 겨울도 가고 가지 끝까지 물길 트는 봄날인데 아직도 바삭바삭 매달려 있다 바싹 오그라든 핏줄 사이로 생명의 물줄기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말라죽은 세포들이 새 순처럼 다시 살아날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집트 파라오 투탕카멘은. 지압사가 하는 말 권 현 수 내 가슴이 아플 때는 너의 눈을 지압해야 한단다 나는 머리가 아프다는데 지압하는 사람은 손을 찾는다 엄지와 검지의 손끝을 모아 내 손아귀의 경혈을 찾아 지긋이 누른다 아프면서도 도리어 머리는 시원해진다 눈이 침침하면 새끼발가락을 멀미가 날 때면 손목을 지압해야 한단다 경혈이 막힌 곳을 풀어서 온몸의 기의 흐름을 조화롭게 하란다 머리는 머리만이 아니다 손은 손만이 아니고 발은 발만이 아니라 온 몸이 하나가 되어야 한단다 내 가슴이 아플 때는 너의 눈을 지압해야 한단다.  
46 아스팔트에서 춤추는 여자 외1편/안현심
편집자
5155 2010-08-31
10.09월 4호 시 아스팔트에서 춤추는 여자 메론 세 개만 사시면 제 춤은 공짜로 보여드려요 만원어치 메론을 사지 않는다 해도 메콩 강 붉은 물결 일렁이는 춤을 볼 수 있어요 굶주린 짐승으로 꺼이꺼이 울다가 먹을 것 찾아 팔려온 땅, 그러나 저를 산 남자는 맹수보다 무지하고 난폭했어요 딸아이 둘 데리고 월세방에서 재활용품에 의지하여 살림살이하지만 우리는 비로소 웃을 수 있어요. 질주하는 자동차도 무섭지 않아요 엠피쓰리 이어폰을 귀에 걸고 불화로 같은 아스팔트에서 춤을 팔다가 밤이면 부은 발을 찬물에 달래지만 처음으로 눈물겨운 사람이 되었어요. 우스꽝스런 제 몸짓은 아이들의 밥이 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이에요. 하늘사다리 우리집에는 청동 코끼리가 있네. 하늘로 오르고 싶으면 치켜든 코를 타고 기어오르네. 하늘에 닿는 하늘사다리 만년설 덮인 히말라야 봉우리에서 겨자씨 속에 잠든 우주를 보네. 안현심: 2004년 《불교문예》 봄호에 시 추천, 2010년 《유심》 1․2월호에 문학평론 추천,  
45 수박 앞에서 외1편/신대원
편집자
4735 2010-08-31
10.09월 4호 시 <수박 앞에서> 올해도 어김없이 말복은 왔다. 때가 다 영글도록 아직 난, 한조각의 수박도 입에 대어 본 적이 없다. 텔레비전 영상에 비친 수박 빨리 먹기 시합에 경기驚氣들린 듯 움츠려드는 미간眉間 그 틈새로 거꾸로 매달려 돌아가는 시계 시계 속엔 진땀보다 더 끈적거리는 시대時代가 허우적거리다 허우적거리다 윤간輪姦으로 실신해 가는 강물처럼 파닥인다. 마침내 수박에선 붉은 피 흐르고 노을 닮은 선홍빛 영혼들이 상념想念의 강江에 나와 바람을 쐰다. 수박이 꼭지부터 말라간다. 2천 십년의 말복은 또 그렇게 속절없이 지나가나 보다. <流星처럼 遊星이 되어> 초저녁 서녘 끝자락 붙박이 별 하나 개밥바라기 그대가 아니어도 아니 그대가 아니길 천번만번 빌고 또 빌어 마침내 서럽지 않을 流星으로 遊星처럼 흐르다 떠다니고 떠다니다 또 흐른다. 올 때도 흘러들어 왔으니 실컷 떠다니며 노닐다가 흘러나 가버린들 또 어떨까 바랑이나 지팡이만 있으면 그뿐 무얼 또 바랄까 流星처럼 遊星이 되어 무수한 붙박이들 按酒삼아 安否나 물어나 보며 살면 될 일.  
44 소설 알렉산드리아 / 이병주
주진
6140 2010-08-21
내가 좋아하는 소설 <소설 알렉산드리아>는 읽고 난 뒤에 여러 모로 얘기할 거리가 많은 소설이다. 시간적 공간적 배경도 크다. 일제강점기부터 6·25 전쟁, 5·16 혁명, 게르니카 폭격사건, 아우슈비츠 가 이어지고 공간적으로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까지, 작가의 체험과 인문학적 지식과 상상력이 잘 녹아든 중편이다. 작가 이병주는 1965년에 이 소설로 등단했다. 발표 당시 이 소설의 드라마틱한 스토리와 굵직한 스케일은 전통소설이나 사소설이 주류이던 문단에 파문을 일으키며 실험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반면 문학적 개연성이 허술한 면도 없지 않다.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는 주인공이 외국인들과 자유자재로 감정을 나눌 만큼 언어가 통한다는 점이나 사상범인 형 못지않게 지성적인 면 등등. 그러나 그런 허점을 메울 만큼 서사가 흥미롭고 글 속의 정신이 매력적이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인물을 통해 철저한 자유주의 사상을 이야기한다. 이는 일체의 권력이나 사상의 강요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자유로움이다. 사상이란 무엇이냐? 정과 부정을 가려내는 가치관이 아닌가. 선과 악을 판별하는 판단력이 아닌가. 그러나 자연의 작용에 정·부정이 있고 선과 악이 있는가. 사람은 자연의 일부가 아닌가. 자연의 일부인 사람은 자연 그대로 살면 될 것이 아닌가. 사상이란 자연 속에서 벗어져 나오려는 노력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상이란 인간을 부자연하게, 그러니까 불행하게 만드는 작용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아닌가. 흑백 이념이 뚜렷했던 군부독재 시대에 이쪽도 저쪽도 아닌 태도는 회색의 사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권력으로부터 핍박받고 현실을 비판하는 감옥 동료로부터는 비굴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이 소설이 시대를 넘어 여전히 힘있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한국적인 상황을 넘어선 정신의 자유로움 때문이리라. 소설은 필화 사건으로 감옥에 갇힌 형이 동생에게 쓴 편지를 통해 진행된다. 소설 속에서 형은 ‘조국이 없다. 산하가 있을 뿐이다.’라는 논설 때문에 단죄를 받았다고 했는데 실제로도 작가는 당시 주필로 있던 부산국제신보에 실린 이 글 때문에 실형을 살았다. 동생은 형이 그토록 가고자 했던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 밴드활동을 하며 살아간다. 형은 옥중에서, 자신은 황제이며 지금 알렉산드리아에 있다는 환각으로 고통스러움을 견뎌낸다. 알렉산드리아는 열린 공간의 상징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학문과 과학의 중심지였으며 수세기 동안 지중해의 교통, 교역, 문화의 중심지였다. 정복자 알렉산더가 각 나라의 관습과 제도를 인정하고 융화정책을 폈기에 여러 문화가 융합하면서 새로운 문화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는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사상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다. 작가는 그런 공간에서 형의 분신인 동생과 게르니카 폭격의 피해자 사라, 나치 학살의 피해자 한스를 데려다 놓았다. 그들은 죄없는 피붙이의 죽음에 복수를 꿈꾸며 모여든 사람들이다. 그들은 끈질기게 추적해온 나치 앞잡이를 살해한다. 그러나 원하던 복수가 이루어졌지만 결과는 허망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개인의 복수를 떠나 ‘병든 유럽문명을 단죄하는’ 의미로까지 확대된다. 법원의 결정은 ‘어떤 신문은 알렉산드리아 법원의 역사 이래 처음으로 보여준 파인플레이라고 격찬했고 어떤 신문은 법원이 정당한 의무를 회피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사건과 재판과정을 통해 작가는 세상의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잣대는 어디 있으며 누가 심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풀어낸다. 소설은 <스스로의 힘에 겨운 뭔가를 시도하다가 파멸한 자를 나는 사랑한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서 막을 내린다. 현실과 허구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마친 뒤의 심정을 토로하는 듯하다.  
43 노끈/모파상
고창근
5178 2010-08-18
내가 좋아하는 소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죽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는 어떻다고 단정을 짓지만 그 당사자는 그 단정 떄문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서로 보듬고 살아가는 그런 세상이 아닌,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도 않고 오직 자신의 세상에 갇힌 사람들 때문에 죽어간 한 농부의 이야기다. 노끈/모파상 그날은 마침 장날이었다. 고데르빌 주변 길은 모두 이 마을로 가는 농부들과 그 마누라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사내들은 어깨에 삽과 쟁기 따위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진 노동으로 뒤틀린 긴 다리를 한 걸음 한 걸음 무겁게 내디뎠다. 느릿느릿 걸을 때마다 온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짐의 무게 때문에 왼쪽 어깨를 약간 올리고 몸은 뒤로 약간 젖힌 자세였다. 두 다리는 계속되는 고된 농사일로 찌들어 가끔씩 비틀거렸다. 그들은 푸른 색 셔츠에 풀을 빳빳이 먹여 마치 왁스를 칠한 것처럼 번쩍이게 해서 입고 있었다. 깃과 소매부리에는 흰 실로 수를 놓았지만 가슴팍이 워낙 뼈가 앙상할 정도로 말라서 셔츠에 불룩하게 바람이 들어차 마치 공중에 떠도는 풍선처럼 보였다. 그 셔츠 밖으로 머리가 불쑥 튀어나와 있고, 또 팔다리도 삐져 나와 있다. 몇몇 사람은 암소와 송아지를 끌고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아낙네는 그 소의 꽁무니를 따라가면서 걸음을 재촉하기 위해 잎사귀가 달린 나뭇가지로 소의 잔등을 때리곤 하는 것이다. 그 아낙네들은 팔에 커다란 바구니를 걸치고 있었다. 바구니 한 쪽에서는 병아리의 대가리가, 다른 쪽에서는 오리 모가지가 불쑥 나오곤 했다. 그들은 남편에 비하여 걸음이 자꾸 뒤로 쳐지면 종종걸음으로 쫓아갔다. 아낙네들은 깡마르고 꼿꼿한 허리통에 폭이 좁은 옷감을 감고, 밋밋한 젖가슴에는 핀을 꽂고 머리에는 흰 수건을 둘러 머리카락 위로 여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모자를 덮어쓰는 것이다. 짐마차가 흔들리며 지나갔다. 마차 앞자리에는 두 사내가 나란히 걸터앉아 있었다. 마차 안쪽 깊숙이 들어앉은 여자는 마차가 흔들리는 것을 견디느라고 마차 모서리를 꼭 붙잡고 있었다. 고데르빌 광장에는 사람과 짐승들이 뒤섞여 엄청나게 혼잡스러웠다. 황소의 뿔이 여기저기 솟아 있고, 사는 것이 넉넉한 농부들은 기다란 깃이 달린 높은 모자를 쓰고 돌아다녔다. 촌 아낙네들의 모자가 여기저기 인파 위로 솟아 있었다. 거칠고 소란스러우며 찢어지는 듯한 말소리 때문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때로는 어떤 시골뜨기가 자기 딴에는 통쾌하게 웃는답시고 억센 가슴 밖으로 뿜어내는 웃음소리나, 어느 집 담벼락에 매어놓은 암소가 길게 뽑아내는 울음소리가 그 혼잡을 가르고 울려퍼지곤 했다. 어디를 가나 외양간 냄새, 우유 냄새, 거름 냄새, 마른 풀 냄새, 땀 냄새 등이 섞여 코를 찔렀다. 땅에 묻혀 살아가는 이 농부들에게서는 사람 냄새와 짐승 냄새가 뒤섞인 독특한 악취가 풍겨났다. 익숙치 않은 사람일 경우 그 냄새를 맡기만 해도 영 기분을 잡치게 되는 것이다. 브레오떼에 사는 오슈꼬른 영감은 방금 고데르빌에 도착했다. 그는 광장을 향해 걸어가다가 땅바닥에 조그마한 노끈 오라기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영감은 진짜 노르망디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지독한 노랑이였다. 조금이라도 쓸모 있겠다 싶으면 무엇이건 일단 집어드는 것이 버릇이었다. 그는 신경통으로 아픈 허리를 억지로 구부려, 땅바닥에 떨어진 그 보잘것없는 노끈을 집어서 정성스럽게 접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때, 말랑땡 영감이 눈에 띄었다. 그는 마구(馬具) 수선업자로 자기 집 문턱에 서서 오슈꼬른 영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은 전에는 서로 거래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어떤 일로 심하게 다툰 뒤로는 아직까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오슈꼬른 영감은 자기가 이처럼 쇠똥 말똥이 묻은 노끈 오라기 따위를 줍는 모양을 원수에게 보여 주었다는 생각 때문에 적잖이 수치스러웠다. 그는 자기가 주운 물건을 얼른 셔츠 속에 감추었다가 슬그머니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물건을 찾다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사람처럼 한참 땅바닥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쑥 내밀고 아픈 허리를 장터를 향해 들어갔다. 그리고는 곳곳에서 흥정을 하느라고 시끄럽게 웅성거리며 떠들어대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농부들은 암소 등을 쓰다듬으며 혹시 상대방에게 속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마주선 사람의 눈치를 살피곤 했다. 혹시 무슨 속임수라도 있는 것 아닌가, 자기가 사려는 소에게 자기가 알지 못하는 무슨 흠이라도 찾아서 트집을 잡을 게 없나 살피는 것이다. 아낙네들은 큼지막한 바구니를 발 밑에 놓고, 그 속에 들어있는 닭이며 오리를 끄집어내곤 했다. 그러면 벼슬이 빨간 닭과 오리들은 다리가 묶인 채 땅바닥에 쓰러져 눈을 두리번거리는 것이다. 농부들은 손님이 사고 싶은 가격을 말하면, 무표정하고 냉정한 태도로 자기가 받을 값을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손님이 포기하고 천천히 자리를 뜨면 결국 상대가 말한 가격에라도 팔려고 마음먹고 손님의 등뒤에 대고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그렇게 합죠... 그냥 그렇게 드린다굽쇼!" 이윽고 한낮의 종소리가 정오를 알리면, 시장 바닥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도 식사를 하러 주막으로 들어가게 된다. 주르댕의 주막 커다란 홀에는 손님들이 가득 들어찼다. 넓은 앞마당에는 짐수레, 이륜마차, 포장마차, 작은 짐마차 등 갖가지 마차들이 모여들어 북적댔다. 수많은 마차들이 있었다. 진흙이 묻거나 뒤틀린 것, 수레 채가 팔을 벌리듯이 하늘로 솟아오른 것, 코를 땅바닥에 박고 꽁무니가 공중에 치솟듯 땜질한 마차도 있었다. 자리에 둘러앉은 손님들 맞은편에 있는 커다란 벽난로에서는 시뻘건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뒤돌아 앉은 손님들의 잔등에는 더운 기운이 확확 느껴졌다. 닭고기, 비둘기 고기, 양의 넓적다리 고기를 꿴 꼬챙이 세 개가 불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고기와 껍질을 굽느라고 고기에서 국물이 흘러내리면서 구수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난로 근처에 모여앉은 손님들은 입에 군침이 돌았다. 농부들 가운데서도 돈푼깨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주르댕 주막에서 식사를 했다. 주르댕은 이 주막에서 음식점과 마구 장사를 함께 하고 있었다. 손님들은 누런 사이다 잔을 연신 비우면서 음식 접시를 바닥내곤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물건을 사고 판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 때 별안간 집 앞마당에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몇몇 무관심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홀 안에 있던 손님들은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과 들창가로 달려갔다. 다들 입에 가득 음식을 집어넣고 손수건을 손에 쥐고 있었다. 북소리가 그쳤다. 뜰에 서 있던 사내는 허겁지겁 외쳐댔다. "고델르빌 읍에 사시는 여러분께 알려 드립니다. 특히 이 장터에 계신 분들에게 알립니다. 오늘 아침 아홉 시에서 열 시 사이에 어떤 사람이 베즈빌 거리에서 까만 가죽지갑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지갑 속에는 돈이 5백 프랑, 그리고 서류들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주운 사람은 지금 당장 읍사무소나 만느빌에 사는 포르트네 울브레크 씨 댁으로 곧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돌려주시는 분에게는 보상금 20프랑을 드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사람은 가버렸다. 멀리서 다시 한번 똑같은 북소리와 그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주막집에 있던 사람들은 울브레크 씨가 그 지갑을 찾게 될 것이라느니 아니라느니 하며, 이 일에 대해서 열심히 떠들어댔다. 그러는 가운데 식사는 거의 다 끝났다. 사람들이 이제 커피 잔을 비우고 있을 때, 헌병대장이 문간에 나타났다. "여기 혹시 브레오떼에 사는 오슈꼬른 씨가 와 있소?" 오슈꼬른은 방 저쪽 끝 식탁에 앉아 있었다. 오슈꼬른이 대답했다. "나, 여기 있소." 헌병대장이 말했다. "오슈꼬른 씨, 미안하지만 나랑 함께 읍사무소까지 좀 가십시다. 읍장님께서 당신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농부는 놀라고 당황했다. 그는 작은 술잔을 단숨에 들이키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침보다 허리를 더 아픈 것 같았다. 이렇게 쉬고 나면 발을 내딛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걸음을 옮기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글세, 내가 오슈꼬른인데..." 그는 헌병대장을 따라갔다. 읍장은 안락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 마을의 공중인이기도 했다. 몸집이 뚱뚱하고 근엄한 표정에 항상 말투가 거창한 그런 사내였다. 읍장은 오슈꼬른 영감에게 물었다. "오슈꼬른 씨, 당신이 혹시 오늘 아침 베즈빌 거리에서 만느빌에 사는 울브레크 씨가 잃어버린 지갑을 줍지 않았습니까?" 이 시골 영감은 깜짝 놀라 읍장을 쳐다보았다. 그는 도무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튼 자기가 그런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는 겁을 집어먹었다. "제가요? 제가 그 지갑을 주웠다고요?" "네, 바로 당신이 말입니다..." "정말이지, 전 그 일은 전혀 모릅니다..." "하지만 본 사람이 있어요." "저를 봤다구요?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굽니까?" "마구상을 하는 말랑땡 씨 말입니다." 그러자 영감은 퍼뜩 생각이 떠올랐다. 아하, 읍장이 바로 그것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구나! 그는 화가 치밀어 핏대를 올리면서 떠들었다. "아, 그 자식이 저를 보았다구요? 그 썩을 놈이! 제가 실은 오늘 아침에 노끈 오라기를 줍는 것을 보고 그 자식이 그러는 거예요. 자, 보세요! 바로 이겁니다, 읍장님!" 그는 주머니 속을 더듬어 조그마한 노끈 오라기 하나를 꺼내었다. 그러나 읍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영감님, 절 속이지 마세요. 그 성실하신 말랑땡 씨가 설마 그래 그따위 노끈을 지갑으로 잘못 보았을 리 있습니까?" 농부는 화가 치밀어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손을 번쩍 치켜들고 자기의 결백을 입증하려고 침을 뱉은 다음 말했다. "하지만 이건 저 시퍼런 하늘이 다 보고 아는 사실입니다. 읍장님, 저의 양심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듭 말하지만, 제가 말한 게 사실입니다." 읍장이 계속 말했다. "당신이 그 지갑을 줍고 나서 혹시 지갑에 들어 있던 돈이 몇 푼 더 진흙 속에 떨어지지 않았나 해서 이리저리 한참 두리번거리며 찾은 것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 사실대로 말하세요." 영감은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겁이 나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나님 맙소사! 아이구, 그 사람 잡을 자식이... 그 따위로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그 빌어먹을 자식이 생사람 잡을 소리를! 어쩌면 그 따위로..." 그러나 그가 아무리 자기 결백을 내세워도 사람들은 곧이 듣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말랑땡 씨와 맞대면까지 하게 되었다. 말랑땡 씨는 끝까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들은 한 시간 동안이나 서로 옥신각신했다. 오슈꼬른 영감은 자진하여 몸수색을 받았다. 그에게서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읍장의 입장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검사와 의논해서 다시 통지를 보내겠다고 말하곤 오슈꼬른 영감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이 소식은 금세 사방으로 퍼졌다. 영감이 읍사무소를 나서자마자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혹은 호기심으로, 혹은 고소하다는 마음으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영감이 당한 봉변에 대해 전혀 분개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영감은 열심히 노끈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영감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를 붙잡고 어찌된 영문인지 물었다. 영감 역시 스스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붙들고 늘어지면서 그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그는 자기 호주머니까지 뒤집어 보였다. 자기가 아무 것도 줍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늙은 여우 같으니... 저리 꺼져버려!" 그는 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전혀 믿어 주지 않아서 화가 나는 한편 서글픈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저 만나는 사람마다 똑같은 얘기를 되풀이해 늘어놓곤 했다. 그가 집에 돌아갈 때에는 이미 밤이 어두워진 뒤였다. 그는 이웃에 사는 사람 셋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는 그들에게 자기가 노끈 오라기를 주웠던 자리를 가리켜 주었다. 그리고 줄곧 자기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있다는 되풀이했다. 저녁에 그는 브레오떼 마을을 한 바퀴 다 돌았다. 사람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을 그대로 믿어주지 않았다. 그는 밤새도록 끙끙 앓았다. 이튿날 오후 한 시쯤이었다. 브르통 씨네 농장에서 일꾼으로 있는 농부 마리우스 포멜이 그 지갑과 그 속에 든 물건을 만느빌 울브레크 씨에게 돌려주었다. 그 농부는 자기가 길에서 그 지갑을 주웠다고 했다. 그러나 글을 읽을 줄 몰라서 그냥 집에 갖고 가 주인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이 소문은 곧 근방에 퍼졌다. 오슈꼬른 영감도 그 소식을 들었다. 그는 즉각 동네를 한바퀴 돌면서 이제 그 문제는 완전히 해결을 본 것이라고 떠들었다. 그는 승리감으로 인해 의기양양해졌다. 그는 떠들었다. "내가 불쾌한 것은 이 사건 때문이 아니야. 알겠나? 그런 게 아니지. 다만 그 멀쩡한 거짓말 때문이야. 거짓말로 남을 비난하는 것처럼 몹쓸 일은 없는 거라구..." 그는 하루 종일 그 얘기를 하며 돌아다녔다. 한길을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도 그 이야기를 했다. 술집에서 술꾼들도 붙들고 그 이야기를 했다. 주일날에는 교회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붙들고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전혀 얼굴을 모르는 사람까지 세워놓고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의 마음도 어지간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꺼림칙했다. 어쩐지 자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저마다 비웃기만 하고 제대로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등뒤에 대고 뭐라고 이러쿵저러쿵 소근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월요일에 그는 다시 고데르빌 장터를 향해 길을 떠났다. 이 이야기를 계속 알려주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말랑땡이 자기 집 문간에 서 있다가 오슈꼬른 영감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웃고 있었다. 저 자식은 왜 웃는단 말인가? 그는 크리크토에 사는 어떤 농부를 만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농부는 영감을 툭 밀치면서 말했다. "이 여우같은 영감탱이야!" 그러더니 그 농부는 등을 돌리고 가버렸다. 오슈꼬른 영감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점점 더 불안해졌다. 왜 사람들은 자기를 보고 교활한 여우라고 할까? 그는 주르댕 주막에 들어가서 식탁에 앉자마자 다시 그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러자 롱빌리에 사는 어떤 마구 상인이 그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 그래! 이 늙은 것아! 나도 알아. 그게 노끈이었다 그 말이지!" 오슈꼬른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 돈지갑을 다시 찾았단 말이야..." 그러자 상대방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떠들지 말아! 이 친구야! 그 물건을 주운 사람하고 그것을 갖다 준 사람하고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단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자네가 그 일과 무관하다고는 말 못할 거야." 농부는 기가 막혔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그 농부를 시켜서 돈지갑을 주인에게 돌려준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그 농부와 짜고 저지른 일이라고 믿고서 이렇게 자기를 비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여기 대해서 뭐라고 항의하고 해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를 비웃을 뿐이었다. 그는 식사도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 그는 사람들이 비웃는 가운데 쫓기듯이 주막을 나오고 말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분하고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너무나 억울하고 화가 치밀어 눈앞이 캄캄하고 목이 조여오는 것 같았다. 그는 너무나 상심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에서 자신을 변호할 수 없다. 그 사건이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큰소리를 칠 수도 없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교활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이상 결백을 입증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의심은 너무나 부당한 것이다. 그는 억울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야기는 날마다 조금씩 길어졌다. 번번히 새로운 이유를 덧붙이고, 더욱 열렬히 항의하고, 더욱 엄숙하게 자신의 결백을 하늘에 맹세했다. 그는 혼자 있을 때면 몇 시간이고 사람들에게 말할 내용의 줄거리를 미리 생각하곤 했다. 그의 마음은 온통 그 노끈 이야기에 쏠려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논리가 복잡해지고, 그 증거가 더욱 확실할수록 그를 더욱 믿지 않았다. '그건 다 거짓말쟁이의 변명일 뿐이야...' 사람들은 그의 등뒤에서 수근거렸다. 그는 그때마다 몸에서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자신의 결백을 끝까지 증명하려는 그의 노력은 헛된 것이었다. 그저 자꾸 몸만 쇠약해질 뿐이었다. 그는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몸이 야위어 갔다. 이제는 장난꾸러기들이 심심풀이로 늙은이에게 노끈 이야기를 시키곤 했다. 마치 전선에서 방금 돌아온 군인에게 전쟁 이야기를 시키는 것 같았다. 그는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마음마저 허약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그 해가 다 갈 때쯤 자리에 누워버렸다. 그러더니 정월 초순에 죽어버렸다.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도 헛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자기 결백을 주장하는 그 이야기였다. "그건 그저 조그마한 노끈 오라기라구요... 조그마한 노끈 말이에요... 여길 보세요, 이거라구요, 읍장 나으리!" <끝>  
42 온다 리쿠의 <코끼리와 귀울음>
누미
4379 2010-08-03
내가 좋아하는 소설 정신이 약간 이상한 건지, 가끔 나는 그럴 때가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무료한 오후 3시쯤 컴퓨터 앞에 앉아 아련하게 밀려오는 졸음에 젖어들고 있을 때, 유체이탈을 한 내가 나를 바라보는 듯한 착각. 혹은 무수히 착각을 한 기억을 갖고 있다. 그 기억, 혹은 착각의 기억을 파고든다면 소설 한 편쯤 쓸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시도조차 못했다. 실체가 잡히지 않는 머릿속 회로를 따라가서 만나게 될 지점이 필시 50년 가까운 세월 빚어온 마음속 우물 안일 터. <여섯 번째 사요코>로 데뷔한 작가 온다 리쿠는 이 마음속 우물에서 일어나는 평범하면서도 기이한 일상을 추리형식으로 재현해내고 있다. 제목은 <코끼리와 귀울음>. 전직 판사 출신인 세키네 다카오와 그 가족이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별 것 아닌 것 같은 사건을 만나고 해결해가는 과정을 열두 편의 짧은 이야기로 담고 있는 단편소설집이다. 재밌는 건 아버지인 세키네 다카오는 <여섯 번째 사요코>에서 남자주인공 슈의 아버지로도 나왔고, 아들인 슈운은 슈의 형이자 <PUZZLE>의 주인공으로, 딸인 나쓰는 슈의 누나이자 <도서실의 바다>의 주인공으로, 그리고 세키네의 산책친구인 미쓰루는 <메이즈>의 도키에다 미쓰루로 나왔다는 것. 말하자면 온다 리쿠의 다른 작품 속 캐릭터들이 이 책 <코끼리와 귀울음>에 등장해서 추리 경쟁을 벌이는 셈이다. 이 가운데 담배 대신 캐러멜을 우물거리며 날카로운 관찰력과 직관력을 발휘하는 세키네 다카오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포와로와 마플처럼 탐정캐릭터로 남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특히 매력적이다. 이들 각자가 따로 또 같이 벌이는 추리를 통해 멀쩡한 사람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의 기저인 인간의 머릿속 회로와 그 회로 끝 마음속 우물을 들여다보기를. # 밑줄긋기 친구 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친구 언니의 대학선배 S코 씨는 회사에 다니며 시내 아파트에 혼자 살았습니다. S코 씨는 옛날부터 공부도 잘하고 착실하고 책임감도 있어서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S코 씨는 신상품 개발 때문에 매일 야근을 했습니다. 어느 날 밤 S코 씨는 회사에서 혼자 야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S코 씨의 직장은 건물 10층입니다. S코 씨는 컴퓨터 잎에 앉아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이제 됐나?”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S씨는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잘못 들었으려니 하고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러자 얼마 있다가 또다시 “이제 됐나?” 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S코 씨는 깜짝 놀라 또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S코 씨 뒤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습니다. 그 창밖에 글쎄, 커다란 빨간 개가 공중에 떠서 S코 씨를 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S코 씨는 겁이 나서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S코 씨는 열이 나 앓아눕고 말았습니다. S코 씨는 아파트 5층에 살았습니다. 앓아누운 지 사흘 만에 열이 내려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S코 씨는 커튼을 걷었습니다. 그러자 공중에 그 빨간 개가 떠있었습니다. 개는 또다시 S코 씨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됐나?” S코 씨는 무심코 “이제 됐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빨간 개는 큰소리로 웃으며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습니다. 며칠 뒤 S코 씨가 아직도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것을 걱정한 동료가 S코 씨 집에 찾아왔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온몸에서 피가 빠져 쭈글쭈글해진 S코 씨 시체가 있었다고 합니다. 빨간 개를 본 사람은 개가 “이제 됐나?”라고 묻는다고 “이제 됐어”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혹시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도고 씨, 도고 씨, 도고 씨”라고 세 번 읊으면 사라진다고 합니다. <코끼리와 귀울음>에 들어있는 ‘마술사’ 중에서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은 눈에 들어오는 법이야. 자기와 같은 곳으로 가는 게 아닐까 싶은 사람은 그 외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서서히 두드러져 보이지 않나. 이만큼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한자리에 있어도 어차피 자기 목적밖에 보이지 않아. 이것도 현재의 격자창이라는 생각, 안 드나? <코끼리와 귀울음>에 들어있는 ‘신 D고개 살인사건’ 중에서  
41 사평역/임철우
고창근
7135 2010-07-31
내가 좋아하는 소설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를 소설로 쓴 작품이다. 시나 소설이나 매우 좋은 평을 받은 작품이다. 소설은 어느 시골 간이역의 대합실에서 완행열차를 기다리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과 내면 심리 묘사를 통해 산업화 시대의 현실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그렸다. 중년 사내 무기수, 술집 여자, 돈을 벌기 위해 음식점을 경영하는 과부, 운동권 학생, 잠자는 미친 여자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곽재구의 시<사평역에서>와 함께 소설을 비교하며 읽으면 재미있을 것 같아 시와 소설 모두 전문을 소개한다. 임철우 1954년 전남 완도군 평일도에서 태어났으며 1973년 광주 숭일고교를 졸업하고 전남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제대 후 복학하여 광주민주화운동을 체험했다. 서강대학 대학원 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전남대학 영문학과 시간강사로 근무했다. 1990년 광주 가톨릭센터 부설 문예창작 아카데미에서 소설 창작을 강의했고 1995년부터 한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 198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개도둑》이 당선, 등단했다. 그의 작품은 분단의 문제와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개도둑》《동행》《직선과 독가스》(1989), 《붉은 방》(1988), 《봄날》(1998) 등은 19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또 1990년대 들어서 발표한 《그 섬에 가고 싶다》(1991), 《등대 아래서 휘파람》(1993), 《붉은 산 흰 새》등은 임철우의 고향인 평일도가 배경이며 이야기의 중심은 6.25전쟁과 분단의 문제에 두었다. 서정적인 문체로 이야기를 엮는 특징이 있는데 이 때문에 주제가 무거워도 읽기에 부담이 없다. 단편소설 《사평역》(1983)은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를 소설화한 것으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뒤안에 바람소리》는 낙일도의 6.25전쟁을 배경으로 친구의 죽음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한 청년의 죄의식을 다루었는데 그의 소설의 대부분은 6.25전쟁, 광주민주화운동 등의 역사적 사건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는 주인공들의 죄의식을 다룬다. 그밖의 작품으로 《아버지의 땅》(1984), 《그리운 남쪽》(1985), 《달빛밟기》(1987), 《물그림자》(1991) 등이 있고 동화 《황금동전의 비밀》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영화로 상영되었다 사평역에서 _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퍼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클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낮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장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사평역 - 임철우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곽 재구의 시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별로 복잡한 내용이랄 것도 없는 장부를 마저 꼼꼼히 확인해 보고 나서야 늙은 역장은 돋보기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놓고 일어선다. 벌써 삼십 분이나 지났군. 출입문 위쪽에 붙은 낡은 벽시계가 여덟 시 십 오분을 가리키고 있다. 하긴 뭐 벌써라는 말을 쓰는 것도 새삼스럽다고 그는 고쳐 생각한다. 이렇게 작은 산골 간이역에서 제 시간에 정확히 도착하는 완행 열차를 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님을 익히 알고 있는 탓이다. 더구나 오늘은 눈까지 내리고 있지 않는가. 역장은 손바닥을 비비며 창가로 다가가더니 유리창 너머로 무심히 시선을 던진다. 건널목 옆 외눈박이 수은등이 껑충하게 서서 홀로 눈을 맞으며 희뿌연 얼굴로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송이눈이다. 갓난아이의 주먹만한 눈송이들은 어둠 저편에 까맣게 숨어 있다가 느닷없이 수은등의 불빛 속에 뛰어 들어오면서 뚱그렇게 놀란 표정을 채 지우지 못한 채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굉장한 눈이다. 바람도 그리 없는데 눈발이 비스듬히 비껴날리고 있다. 늙은 역장은 조금은 근심스런 기색으로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대어 본다. 하지만 콧김이 먼저 재빠르게 유리창에 달라붙어 뿌연 물방울을 만들었기 때문에 소매로 훔쳐내야 했다. 철길은 아직까지는 이상이 없었다. 그는 두 줄기 레일이 두툼한 눈을 뒤집어쓴 채 멀리 뻗어나간 쪽을 바라본다. 낮엔 철길이 저만치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모습가지 뚜렷이 보였다. 봄날 몸을 푼 강물이 흐르듯 반원을 그리며 유유히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철길의 끝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도 모든 걸 다 마치고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어느 노년의 모습처럼 그것은 퍽이나 안온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철길은 훨씬 앞당겨져서 끝나 있다. 수은등 불빛이 약해지는 부분에서부터 차츰 희미해져 가다가 이윽고 흐물흐물 녹아 버렸는가 싶게 철길은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그 저편은 칠흙 같은 어둠이다. 어둠에 삼키워져 버린 철길의 끝이 오늘밤은 까닭 없이 늙은 역장의 가슴 한구석을 썰렁하게 만든다. 그는 공연히 어깨를 떨어 보며 오른편 유리창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쪽은 대합실과 접해 있는 이를테면 매표구라고 불리는 곳이다. 역장은 먼지 낀 유리를 통해 대합실 안을 대충 휘둘러본다. 대합실이라고 해야 고작 국민학교 교실 하나 정도의 크기이다. 일제 때 처음 지어졌다는 그 작은 역사 건물은 두 칸으로 나뉘어져서 각각 사무실과 대합실로 쓰이고 있는 터였다. 대개의 간이역이 그렇듯이 대합실 내부엔 눈에 띌 만한 시설물이라곤 거의 없다. 유난히 높은 천정과 하얗게 회칠한 사방 벽 문에 열 평도 채 못 되는 공간이 턱없이 넓어 보여서 더욱 을씨년스런 느낌을 준다. 천정까지 올라가 매미마냥 납작하니 붙어 있는 형광등의 불빛이 실내 풍경을 어슴푸레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지금 대합실에 남아 있는 사람은 모두 다섯이다. 한가운데에 톱밥 난로가 놓여져 있고 그 주위로 세 사람이 달라붙어 있다. 난로는 양철통 두 개를 맞붙여서 세워 놓은 듯한 꼬락서니로, 그나마 녹이 잔뜩 슬어 있어서 그간 겨울을 몇 차례나 맞고 보냈는지 어림잡기조차 힘들다. 난로의 허리께에 톱날 모양으로 촘촘히 뚫린 구멍 새로는 톱밥이 타들어가면서 내는 빨간 불빛이 내비치고 있다. 하지만 형편없이 낡아빠진 그 난로 하나로 겨울밤의 찬 공기를 덥히기에는 어림도 없을 듯싶다. 난로가에 모여 있는 셋 중 한사람만 유일하게 등받이 없이 의자에 앉아 있는데, 그러고 있는 것도 힘겨운지 등뒤에 서 있는 사람의 팔에 반쯤 기댄 자세로 힘없이 안겨 있다. 그는 아까부터 줄곧 콜록거리고 있는 중늙은이로, 오래 앓아 오던 병이 요즘 들어 부쩍 심해져서 가까운 도회지의 병원을 찾아가려는 길이라는 것을 역장도 알고 있다. 등을 떠받치고 있는 건장한 팔뚝의 임자는 바로 노인의 아들이다. 대합실에 있는 다섯 사람 가운데에서 그들 두 부자만이 역장에겐 낯익은 인물들이다. 그 곁에서 난로를 등진 채 불을 쬐고 있는 중년의 사내는 처음 보는 얼굴이다. 마흔은 넘었을까 싶은 사내는 싸구려 털실 모자에 때묻은 구식 오바를 걸쳐 입었는데 첫눈에도 무척 음울해 뵈는 표정을 지니고 있다. 길게 자란 턱수염이며, 가무잡잡한 얼굴 그리고 유난히 번뜩이는 눈빛이 왠지 섬뜩하다. 오랜 세월을 햇볕 한오라기 들지 않는 토굴 속에 갇혀 보낸 사람처럼 사내의 눈은 기묘한 광채마저 띠고 있다. 그 셋 말고도 저만치 벽을 다라 길게 붙어 있는 나무의자엔 점퍼차림의 청년 하나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그리고 청년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는 미친 여자가 의자 위에 벌렁 누워 있다. 닥치는 대로 옷을 껴입은 여자는 속을 가득 채운 걸레 보퉁이 모양 모집이 퉁퉁하다. 청년은 추운지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놓은 채 어깻죽지를 잔뜩 웅크리고 있으면서도 무슨 까닭인지 난로 곁으로 갈 생각은 하지 않는 눈치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청년은 들여다볼 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시멘트 바닥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다. 톱밥이 부족할 것 같은데...... 창 너머 그들을 하나하나 들러보다가 문득 난로 쪽을 슬쩍 쳐다보며 늙은 역장은 중얼거린다. 불을 지핀 게 두어 시간 전이니 지금쯤은 톱밥이 거의 동이 났을 것이다. 톱밥은 역사 바깥의 임시 창고에 저장해 놓고 있었다. 월동용 톱밥이 필요량의 절반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역장은 아까서야 알았다. 미리미리 충분한 톱밥을 확보해 두는 것은 김씨가 맡은 일이었지만 미처 확인하지 못한 자신에게도 책임은 있다고 역장은 생각한다. 역원이라고 해야 역장인 자신까지 합해 기껏 세 명뿐이니 서로 책임을 확실히 구분지을 수 있는 일 따위란 애당초 있을 턱이 없었다. 하필 이날 따라 사무원인 장씨는 자리를 비우고 없는 참이었다. 아내의 해산일이라고 어제 아침 고향인 K시로 달려갔으므로 그가 돌아올 때까지는 역장은 김씨와 둘이서 교대로 야근을 해야 할 처지였다. 하지만 톱밥은 우선 당분간 창고에 남아 있는 것으로 이럭저럭 견디어낼 수 있으리라. 대합실 난로는 하루 두 차례씩만 피우면 되니까. 역장은 웅크렸던 어깨를 한번 힘차게 펴 보기도 하고 두 팔을 앞뒤로 흔들어 보기도 한다. 역시 춥긴 마찬가지다. 그새 손발이 시려 오기 시작했으므로 역장은 코를 훌쩍이며 엉금엉금 책상 앞을 되돌아간다. 그리고는 사무실용으로 쓰고 있는 석유 난로를 마주하고 앉아 손발을 펼쳐 널었다. "아야, 말이다. 이러다가 기차가 영 안 올라는 갑다." "아따, 아부님도 참. 좀 기다려 보십시다. 설마 온다는 기차가 안 오기사 할랍디여." 아들은 짜증스럽다는 듯이 얼굴도 돌리지 않고 건성 대답한다. 그는 삼십대 중반의 농부다. 다시 노인이 쿨룩거리기 시작한다. 그때마다 빈약하기 그지없는 가슴팍이 훤히 드러나도록 흔들리고 있다. 아들은 힐끗 노인을 내려다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돌리고 난로만 들여다본다. 노인에겐 미안한 일이긴 하나 아들은 모든 게 죄다 짜증스럽다. 벌써 몇 달째 끌어 온 노인의 병도 그렇고, 하필이면 이런 날, 그것도 밤중에 눈까지 펑펑 쏟아져 내리는데 기차를 타야 한다는 일도 그렇다. 그 모두가 노인의 괴팍한 성깔 탓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버럭 소리라도 질러 주고 싶은 심정이다. 아들이 전에도 여러 번 읍내 병원에 가 보자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우며 죽더라도 그냥 집에서 죽겠노라던 노인이 난데없게도 이날 점심나절에는 스스로 먼저 병원엘 가자면서 나선 것이었다. 소피에 혈이 반이 넘게 섞여 나온다는 거였다. 부랴부랴 차비를 꾸리고 나니, 이번엔 하루 두 차례씩 왕래하는 버스는 멀미 때문에 절대로 타지 않겠다며 노인은 한사코 역으로 가지고 우겼다. 이놈아, 병원에 닿기도 전에 내 죽는 꼴을 볼라고 그라냐. 놔라. 싫으면 나 혼자라도 갈란다. 어쩌나 엄살을 떠는 통에 할수없이 노인을 등에 업고 나오긴 했는데, 그나마 일이 안 되려니까 기차마저 감감 무소식이었다. "빌어묵을 눔의 기차가......" 농부는 문득 치밀어오르는 욕지거리를 황황히 깨물며 지레 놀라 노인의 눈치를 살핀다. 다행히 눈곱 낀 노인의 눈은 아까처럼 질끈 닫혀져 있다. 아들은 고통으로 짙게 고랑을 파고 있는 노인의 추한 얼굴을 내려다보고는 약간 죄스러운 맘이 된다. 이거, 내가 무슨 짓이다냐. 죄 받는다. 죄 받어...... 노인이 또 쿨룩쿨룩 기침을 토해 낸다. 가슴 밑바닥을 쇠갈퀴로 긁어내는 듯한 고통스런 기침소리. 그들 부자 곁에 서서 등을 돌린 채 난로의 불기를 쬐고 있는 중년 사내는 자지러지는 기침소리를 들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시늉을 한다. 기침 소리를 들으면 사내에겐 불현듯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다. 감방장인 늙은 허씨다. 고질인 해소병으로 맨날 골골거리던 허씨는 그것이 감방에 들어와 얻은 병이라고 했다. 난리 후에 사상범으로 잡혀 무기형을 받은 허씨는 스물 일곱 살부터 시작한 교도소 생활이 벌써 이십 오 년에 이르고 있었지만, 언제나 갓 들어온 신차마냥 말도 없고 어리숙해 뵈는 사람이었다. 자네 운이 좋은 걸세. 쿨룩쿨룩. 나가면 혹 우리집에 한번 들러봐 줄라나. 이거 원, 소식 끊긴 지가 하도 오래 돼놔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사내가 출감하던 날, 허씨는 고참 무기수답지 않게 눈물까지 글썽이며 사내의 손을 오래오래 잡고 있었다. 사내는 저만치 유리창 밖으로 들이치는 눈발 속에서 희끗희끗한 허씨의 머리카락이며 움푹 패어 들어간 눈자위를 기억해내고 있다. 아마 지금쯤 그곳은 잠자리에 들 시간일 것이다. 젓가락을 꼽아 놓은 듯한 을씨년스런 창살 너머로 이 밤 거기에도 눈이 오고 있을까. 섬뜩한 탐조등의 불빛이 끊임없이 어둠을 면도질해대고 있을 교도소의 밤이 뇌리에 떠오른다. 사내의 눈빛은 불현듯 그윽하게 가라앉고 있다. 그곳엔 사내가 잃어버린 열 두해 동안의 세월이 남아 있었다. 이렇듯 멀리 떨어져서도 그 모든 것들을 눈앞에 훤히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어느덧 사내는 이미 그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출감한 지 며칠이 지났건만 사내는 감방 밖에서 보낸 그간의 시간이 오히려 꿈처럼 현실감이 없다. 푸른 옷과 잿빛의 벽, 구린내 같은 밥냄새, 땀냄새, 복도를 걷는 간수의 구둣발소리, 쩔그렁대는 쇳소리..... 그런 모든 익숙한 색깔과 촉감, 냄새, 소리 그리고 언제나 똑같이 반복되는 일과 같은 것들이 별안간 그에게서 떨어져나가 버린 대신에 전혀 생소한 또 다른 사물들의 질서가 사내에게 일방적으로 떠맡겨진 거였다. 그 새로운 모든 것들은 다만 사내를 당혹감에 빠뜨리고 거북하게 만들뿐이었다. 그 때문에 사내는 출감 후부터 자꾸만 무엇인가 대단히 커다란 것을 빼앗겼다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감방 안에서 사내는 손바닥 안에 움켜 쥔 모래알이 빠져나가듯 하릴없이 축소되어 가고 있는 자기 몫의 삶의 부피를 안타깝게 저울질해 보곤 했었다. 하지만 기이한 일이다. 낯선 시골 역에 홀로 앉아 있는 이 순간 정작 자기가 빼앗긴 것은 흘려보내는지 모르게 보낸 지난 십이 년의 세월이 아니라, 오히려 그 푸른 옷과 잿빛 담벼락과 퀴퀴한 냄새들이 배어 있는 사각형의 좁은 공간일지도 모른다는 가당찮은 느낌이 문득문득 들곤 하는 거였다. 쿨룩쿨룩. 아, 저 기침소리. 사내는 흠칫 몸을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찾는다. 그러나 그것은 감방장 허씨가 아니다. 낯모르는 사람들 뿐. 사내는 낮게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흔들어 버리고 만다. 밖엔 간간이 바람이 불고 있다. 전기줄이 윙윙 휘파람을 불었고 무엇인가 바람에 휩쓸려 다니며 연신 딸그락 소리를 낸다. 대합실 안은 조용하다. 산골짜기를 돌아 달려온 바람이 역사 건물을 지나칠 때마다 유리창이 덜그럭거리고 이따금 난로 속에서 톱밥이 톡톡 튀어오를 뿐 사람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저만치 혼자 쭈그려 앉은 청년은 줄곧 창 밖의 바람소리를 헤아리고 있던 참이다. 이윽고 청년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딱딱한 나무의자로부터 스며오는 한기로 엉덩이가 시리다. 창가로 다가가다 말고 그는 문득 누워 있는 미친 여자 쪽을 근심스레 살핀다. 여자는 새우등을 하고 모로 누웠는데 시체가 아닌가 싶을 만큼 미동조차 없다. <저작권 보호와 관련하여 출판사측의 요청에 의해 중략합니다> 그들이 문을 열어제치고 플랫폼 쪽으로 바삐 몰려가고 있을 때 저편 어둠을 질러오는 불빛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뜻밖에 기차는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은 채로 그들을 지나쳐 가고 말았다. 유난히 밝은 기차 내부의 불빛과 승객들의 거뭇거뭇한 머리통 정도조차도 언뜻 분간하기 어려웠을 만큼 기차는 쏜살같이 반대쪽으로 내달려가 버렸다. 기차가 사라지고 난 뒤 사위는 다시금 고요해졌다. 눈발이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을 뿐 모두가 아까 그대로 남아 있다. 달려나왔던 사람들은 한참이나 어안이 벙벙하다. 방금 그들의 눈앞을 스쳐 지나간 것은 꿈속에서 본 휘황한 도깨비불이거나 난데없는 돌풍에 휩쓸려 날아가 버린 무슨 발광체였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기차가 스쳐간 어둠 저편에서 손전등을 든 늙은 역장이 나타나 그것이 특급 열차라고 알려 주었을 때에야 사람들은 풀죽은 모습으로 대합실로 어기적어기적 되돌아왔다. "나 원 참, 좋다가 말았구마이." 누군가 투덜댔다. 난로를 차지하고 둘러서서 한동안은 모두들 입을 봉하고 있다. 저마다 실망한 기색이다. 대학생은 아까처럼 창을 내다보고 있고 미친 여자는 의자에 멀뚱하게 앉아 있다. 조금 있으려니, 문이 열리며 역장이 바께쓰를 들고 나타난다. 바께스 속엔 톱밥이 가득 들어 있다. "추위에 고생하십니다요." 농부가 얼른 인사를 차린다. 그에겐 제복을 입은 사람은 무조건 존경의 대상이 된다. "뭘요. 그나저나 이거 죄송합니다. 기차가 나꾸 늦어지는군요." 눈이 오니까 그렇겠지라우, 하고 너그러운 소리를 농부가 또 덧붙인다. 역장은 난로 뚜껑을 열고 안을 살펴본다. 생각보다 톱밥이 꽤 남았다. 바께쓰를 기울여 톱밥을 반쯤 쏟아 넣은 다음 바께쓰는 다시 바닥에 내려놓는다. 역장은 돌아가지 않고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그도 역시 무료했으리라. 눈 얘기, 지난 농사와 물가에 관한 얘기, 얼마 전 새로 갈린 면장과 멀잖아 읍내에 생기게 된다는 종합병원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화제는 이어진다. 처음엔 역장과 농부가 주연이지만 차츰 여자들도 끼어들게 된다. 그들 중 음울한 표정의 젊은 사내만이 끝내 입을 열지 않은 채로이다. 역장이 나타나는 바람에 자리가 더욱 좁아졌으므로, 중년 사내는 난로 가까이 놓아둔 자신의 작은 보퉁이를 한켠으로 치워놓는다. 보퉁이엔 한 두름의 굴비, 그리고 낡고 때묻은 내복 따위같은 사내의 옷가지가 들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사내가 벽돌담 저쪽의 세상에서 가지고 나온 유일한 재산이다. "선생은 향촌리에 사시우?" 늙은 역장이 곁의 중년 사내에게 묻는다. "아, 아닙니다." "그래요. 근데 무슨 일로....." "누굴 찾아왔다가 그만 못 만나고 가는 길입지요." "누굴 찾으시는데요. 어디 말씀해 보구려. 이 근처 삼십 리 안팎에 있는 동네라면 내가 얼추 다 아니까요. 허허." "아, 아닙니다. 제가 주소를 잘못 알았었나 봅니다." 오, 그래요. 역장은 사내가 뭔가 말하기를 꺼려한다는 느낌을 받았으므로 더 캐묻지 않는다. 톱밥 난로의 열기가 점점 강하게 퍼져 오르고 있다. 역장은 난로의 뚜껑을 닫고 나서 한산도를 꺼내 사내와 농부에게 권한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다. 사내는 기차를 타기 전, 서울역 앞에서 그 굴비 한 두름을 샀었다. 언젠가 감방에서 허씨가 흰쌀밥에 잘 구운 굴비를 먹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록 허씨 자신은 먹을 수 없겠지만, 홀로 산다는 허씨의 칠순 노모에게 빈손으로 찾아 갈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역 광장의 행상꾼에게서 한 두름을 샀다. 그리고 밤 내내 완행 열차를 타고 이날 새벽 사평역에서 내려 허씨가 일러준 대로 그 조그마한 산골 마을을 찾아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허씨의 노모는 이미 만날 수가 없었다. 죽어 묻힌 지가 오 년도 넘었다고 했다. 노모가 죽은 이듬해, 허씨의 형도 식솔들을 데리고 훌훌 마을을 떴고, 그 후 그들의 소식은 영영 끊어졌다는 거였다. 그 말을 전해 듣는 순간 사내는 사지의 힘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듯한 허탈감을 맛보았다. 어느덧 초로에 접어든 허씨의 쓸쓸한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노모의 죽음조차 모르고 비좁은 벽돌담 안에 갖힌 채 다만 다른 사람들의 것일 따름인 그 숱한 계절들을 맞고 보내다가, 어느날인가는 푸른 옷에 싸여 죽음을 맞아야 할 한 늙고 병든 무기수의 얼굴이 사내의 발길을 차마 돌릴 수 없도록 만드는 거였다. 등뒤에 두고 돌아서려니, 사내는 그 마을이 바로 자기의 고향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고향은 본디 이북이었지만 피난통에가족들과 헤어져 집도 부모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커 왔던 것이었다. 하염없이 눈송이만 펑펑 쏟아지는 살길을 걸어 나오며 사내는 자꾸만 발을 헛디뎠다. 문득 되돌아보면 멀리 산골 초가의 굴뚝에선 저녁 짓는 연기가 은은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눈 내리는 산자락에 고요히 묻혀 가는 저녁 무렵의 산골 풍경은 눈물겹도록 평화스러워 보였다. 이보쇼, 허씨. 당신이나 나는 이젠 매양 마찬가지구료. 피차 어디 찾아갈 곳 하나 없어졌으니 말이오. 하지만 그래도 당신은 나보다야 낫소. 그 속에 있으면 애써 고향을 찾아 나설 수도, 또 그래야 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말이외다. 허허허. 그나저나 난 도대체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 한다는 말이요. 사내는 휘적휘적 눈길을 헤쳐 내려오며 몇 번이나 그렇게 넋두리를 했다. 역장은 시계를 본다. 아홉 시 반. 이거 너무 늦는걸. 그러다가 역장은 저만치 창가에서 서성이고 있는 청년을 새삼 발견한다. 청년은 벽에 붙은 지명수배자 포스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참이다. 포스터엔 스무 명 남짓, 지극히 평범하게 생긴 한국 사람들의 얼굴이 적혀져 있고 그 밑에 성명, 나이, 범행 내용, 인상착의 따위가 기록되어 있다. 그 중 몇은 '검거'라고 쓰인 붉은 도장이 쿵쿵 박혀져 있다. 수배자들의 사진 가운데엔 대학생이 아는 얼굴도 하나 끼여 있다. 그는 청년의 선배이다.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선배는 몇 달 전부터 수배되어 있는 중이다. 청년은 지금 그 선배의 사진과 무슨 얘기라도 나누는 양 골똘히 마주 대하고 있다. 바로 그때 역장이 청년을 불렀으므로 청년은 저으기 놀란 모양이다. "이봐요, 젊은이. 추운데 거기 있지 말고 이리 와서 불 좀 쬐구려." 청년은 우물쭈물하더니 이윽고 난로 쪽으로 걸어온다. 그리고 역장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다. "누구.....더라." 역장은 의외라는 표정이다. 청년의 얼굴이 금방 기억나지 않는다. "저, 역장님은 잘 모르실 거예요. 고등학교 때 통학하면서 줄곧 뵈었는데..... 재너머 오동삼씨가 제....." "아아, 이제야 알겠네. 자네가 바로 오씨 큰아들이구먼. 지금 대학에 다닌다면서, 그렇지?" "예....." "맞아. 작년 여름에 내려왔을 때도 봤었지. 그래, 방학이라서 집에 왔구먼." "예....." 역장은 청년을 새삼 믿음직스러운 듯 바라본다. 역장은 그를 기억해 낼수 있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성실하고 착한 학생 같았었다. 여느 애들과는 다르게 생각이 많아 뵈고 늘 손에 책이 들리워져 있는 것도 대견스러웠다. 그러길래 청년이 인근 마을에선 유일하게 도회지의 국립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게 우연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다. "아믄,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해야지. 뒷바라지하시느라 촌구석에서 뼈빠지게 고생하시는 부모님 호강도 시켜드리고. 고향에 좋은 일도 많이 해야 하네. 알겠는가." "예....." 역장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격려했고. 청년은 고개를 떨군 채 희미한 대답을 한다. 불현듯 청년의 뇌리엔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소나무 등결처럼 투부룩한 아버지의 손. 그 손으로 아버지는 평생을 논밭만 일구며 살아왔다. 아버지의 꿈은 판사 아들을 두는 거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일 죽어도 한이 없노라고, 젊은 시절을 남의 집 머슴으로 전전했던 가난한 아버지는 대학생이 된 아들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곤 하던 거였다. 청년에겐 동생이 다섯이나 있었다. 모두가 국민학교만 겨우 마쳤거나 아직 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청년은 그의 집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어김없이 찾아올 밝아 오는 새벽이었다. 그런 부모와 형제들 앞에서 끝내 퇴학당했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언젠가 여름에 자기도 그냥 집에 내려와 농사나 짓는 게 어떻겠느냐고 한마디 건넸다가 그만 노발대발한 아버지에게 용서를 비느라 혼줄이 난적도 있었다. 결국 아무런 얘기도 꺼내 보지 못하고 이젠 누구 하나 찾아갈 사람도 없는 그 거대한 도시를 향해 집을 나섰을 때 청년은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하였다. 자. 이거 받으라이. 느그 아부지가 준 돈은 책값하고 하숙비 빼면 니 쓸 것도 부족하꺼이다. 괜찮다이. 내, 그동안 몰래 너 오면 줄라고 모아둔 돈이니께. 달걀도 모았다가 팔고 동네 밭일 해주고 품삯 받은 거이다. 아무쪼록 애껴 쓰면서, 공부도 좋재만 항상 몸을 살펴야 쓴다이. 동구 밖가지 따라나온 어머니는 꾸깃꾸깃 때에 절은 돈을 억지로 손에 쥐어 주었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마른버짐이 허옇게 핀 얼굴로 그가 고객를 꼬박 넘어설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흥, 대학생? 그까짓 대학생이 무슨 별거라구..... 춘심이는 역장과 청년의 대화를 들으며 입을 삐쭉인다. 춘심이가 벌써 삼 년이나 몸 비비고 사는 민들레집 근방 일대엔 서너 개의 대학이 몰려 있었으므로 허구한 날 보는 게 대학생이었다. 그 녀석들은 덜렁대며 책가방을 들고 다니긴 하지만 대체 언제 공부를 하는 줄 모르겠다고 그녀는 늘 의아해했다. 아침이면 교문으로 엄청난 수가 떼를 지어 몰려 들어갔고, 어쩌다 교문 앞을 지나치다 보면 거의 날마다 무슨 운동회다 축제 행사다 해서 교정이 뻑적지근하도록 시끄러웠다. 게다가 삐끗하면 데모다 시위다 하여 죄없는 부근 주민들까지 매운 냄새를 맡게 만들었기 때문에 번번이 장사에 지장도 많았다. 하필 학교 정문으로 통하는 네거리 길목에 자리잡은 민들레 집으로서는 데모가 터졌다 하면 그날 장사는 종을 쳤다. 그런 날은 일찍감치 문 닫고 그녀들은 옥상으로 올라가 한여름에도 신라 시대 장군들처럼 투구에다 갑옷차림으로 학교 문앞을 겹겹이 막고 도열해 있는 사람들을 재미나게 구경하는 거였다. 하교시간이면 술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차기 시작했다. 무슨 뼈빠지는 막노동이라도 종일 하고 온 사람처럼 열나게 술을 퍼마시는 녀석들, 알아듣지도 못할 골치 아픈 얘기 따위나 해대며 괜시리 진지한 척 애쓰는 배부른 녀석들. 그것이 춘심이네가 생각하는 대학생들이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자정이 넘어서야 곤드레가 되어 더러는 민들레 집을 찾아 기어 들어오기도 했는데, 가끔 술값이 모자라 이튿날 아침이면 가방을 잡혀두고 허겁지겁 돈 구하러 뛰어나가는 얼빠진 녀석들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입을 비쭉여 대긴 해도 대학생은 역시 부러운 존재였다. 그들은 모두 멀잖아 도심지의 고층 빌딩을 넥타이차림으로 오르락내리락 할 것이고, 유식하고 잘난 상대를 만나 그럴싸한 신혼 살림에 그럴싸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빤한 사실 때문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춘심이는 민들레집 계집애들과 함께 일이 없는 오후에 근처 대학교로 놀러갔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교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수위한테 내쫓김을 당했다. 씨발, 여대생은 얼굴에 무슨 금딱지라도 붙이고 다닌다던. 춘심이는 홧김에 씹고 있던 껌을 교문 돌기둥에 꾹국 눌러 붙여놓고 왔었다. 쿨룩쿨룩. 노인이 기침을 시작한다. 농부는 노인의 가슴을 크고 볼품 없는 손으로 문질러 준다. 난로가 달아오르고 있다. 훈훈한 열기가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몸을 기분좋게 적신다. 남자들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여자들은 문득 입안이 허전한가 보다. 아낙네 하나가 보따리에 손을 집어넣고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이윽고 아낙의 손끝에 북어 두 마리가 따라나온다. 그녀는 그걸 대뜸 난로 위에 얹어 굽더니 북북 찢어내어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준다. "벤벤찮으요만 잡숴들 보실라요. 입이 궁금할 때는 이것도 맛이 괜찮합디다." "고맙긴 하오만, 이렇게 먹어 버리면 뭐 남기나 하겠소?" 역장이 한 조각 받아들며 말한다. "밑질 때 밑지드라도 먹고 싶을 때는 먹어야지라우. 거시기, 금강산도 식후갱이라 안 합디여. 히히히." 아낙은 제법 유식한 말을 했다는 생각에 스스로 대견해서 익살맞게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농부와 대학생과 춘심이도 한 오라기씩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다. 뚱뚱이 서울 여자는 마지못한 시늉으로 그걸 받더니, 행여 더러운 것이라도 묻지 않았나 싶은 듯 손가락 끝으로 요모조모 뜯어보다가 입에 넣는다. 그녀는 여전히 마지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그게 생긴 것보다는 맛이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저녁을 거른 채로였다. "북어를 팔러 다니시는가 부죠." 뚱뚱이 여자는 북어 얻어먹은 걸 반지르르한 서울말로 갚아야겠다는 속셈이다. "북어뿐 아니라 김, 멸치, 미역 같은 해산물도 갖고 다녀라우. 산골이라 해산물이 귀해서 그런지 사평에 오면 그런 대로 사주는 편입디다." "저쪽 아주머니두요? 보따리가 꽤 커 보이는데." "아니라우. 나는 옷장사요. 정초도 가까워 오고 해서 애들 옷가지랑 노인내 솜바지 같은 걸 조까 많이 떼어 와 봤등만, 이번엔 영 재미를 못 봤쏘야. 삼사 일 전에 다른 옷장사가 먼저 들러갔다고 그럽디다. 오가는 차비 빠지기도 힘들게 돼 부렀는 갑소." "아따, 성님도 엄살은. 그만큼 팔았으면 됐지, 손해는 무슨 손해요." 젊은 아낙은 북어 두 마리를 더 꺼내어 난로에 얹으며 호들갑을 떤다. "근데 여기 기차도 다 틀린 건 아닌지 모르겠네. 어떡하믄 좋지. 이눔의 시골바닥엔 여관 하나도 안 보이던데, 쯧." 서울 여자가 코를 찡그린다. "누구, 아는 사람을 찾아오신 게 아닌갑네요?" 젊은 아낙이 퍽 호의를 보이며 묻는다.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수. 이런 두메산골은 눈 째지고 나서 첨 와봤다구요. 말만 들었지, 종이쪽지 하나 들구 찾아와 보니깐 이거 원. 이게 모두가 다 그....." 모두가 다 그 몸쓸년 때문이지 뭐야, 하려다가 서울 여자는 입을 오무리고 만다. 단부지같이 누렇게 뜬 사평댁의 낯빛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 까닭이다. 뚱뚱이 여자는 이날 아침 버스로 사평에 도착했다. 하지만 사평댁이 사는 마을은 고개를 둘이나 넘어야 하는 산골짜기에 있었다. 커다란 몸집을 절구통 옮기듯 씩씩거리며 두어 시간이나 걸려 마을에 다다랐을 때는 점심나절이 한참 넘어서였다. 그녀는 사평댁을 만나면 머리채부터 휘어잡고 그동안 쌓인 분풀이를 톡톡이 할 참으로 벼르고 있었다. 그녀는 서울에서 음식점을 하나 갖고 있었는데 몇 달 전만 해도 사평댁은 주방에서 일을 했었다. 갓 서른이 넘은 나이에 성깔도 고와 뵈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녀는 남다른 신뢰와 애정을 베풀어주었노라고 지금도 자부하고 있는 터였다. 한데, 믿는 믓에 뭐가 핀다더니 바로 그 사평댁에게 가게를 맡기고 단풍놀이를 갔다가 돌아와 보니 사평댁은 돈을 챙겨 넣은 채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없던 거였다. 이상한 건 금고에 돈이 더 있었는데도 없어진 것은 다만 삼십여 만원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가 분해하는 것은 없어진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상이 아무리 막되었기로소니 친언니보다도 더 극진히 믿고 위해 주었던 은혜를 사평댁이 감쪽같이 배신했다는 사실이 더욱 분했다. 처음엔 그저 잊어 버리고 말지, 했으나 생각하면 할수록 부아가 치밀어 올라 급기야는 어설픈 기억을 더듬어 사평댁의 고향으로 이날 쫓아 내려온 거였다. 사평댁이 살고 있는 마을은 지독한 빈촌이었다. 겨우 이십여 호 남짓한 흙벽돌집들은 대부분이 초가였고, 한결같이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듯한 험상맞은 꼬락서니를 하고 있었다. 산비탈 여기저기 에 밭을 일구어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아가는 화전민촌이라는 사실을 첫눈에 쉽사리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이눔의 동네는 그 요란한 새마을 운동인가 뭔가도 여태 구경 못했담. 발 디딜 자리 없이 쇠똥이 지천으로 내갈겨진 고샅을 더듬어 올라가며 그녀는 내내 오만상을 구겨야 했다. 엄청나게 큰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똥통이며 두엄더미, 그리고 어쩌다 마주치는 시골 사람들의 몰골은 하나같이 수세미처럼 거칠고 쭈그러져 있었다. 금방 주저앉을 듯한 초가 사립을 들어섰을 때 그녀는 이미 그때까지 등등하던 기세가 사그라져 버리고 없었다. 기척을 들었는지누구요, 하고 방문을 연 것은 바로 사평댁이었다. 순간 그녀를 보자마자 사평댁은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고 마는 것였다. 처음엔 그녀는 송장같이 핼쓱한 그 여자가 바로 사평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만큼 사평댁은 오랜 병석의 기색이 완연했다. 에그머니나. 이게 무슨 꼴이야. 곱던 얼굴이 세상에 이렇게 못쓰게 될 수가 있담. 아니, 정말 네가 사평댁이 틀림없니, 틀림없어? 머리채를 박박 쥐뜯어 놓겠다고 벼르던 일은 까맣게 잊고 뚱뚱이 여자는 사평댁의 허깨비 같은 몸뚱이를 부둥켜안고 안타까와 어쩔 줄을 몰랐다. 속사정이야 제쳐두고 우선 두 여자는 한참 동안 울음보를 풀었다. 서울 여자는 일찌기 젊어 과부가 된 제 팔자가 새삼 서러웠을 테고, 송장같이 말라빠진 사평댁 또한 기구한 제 설음에 겨워 눈물을 쭐쭐 쏟아내었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차츰 그간의 경위를 들어 보니 사평댁의 소행이 이해가 갈 만도 했다. 본디 사평댁은 결혼 후 그 마을에서 죽 살아왔노라고 했다. 주정뱅이에다가 노름꾼인 건달 남편과의 사이에 아이 둘을 낳았으나, 갈수록 심해지는 남편의 손찌검에 못 견뎌 집을 나온 거였다. 물론 그런 사실을 사평댁은 까맣게 숨기고 있었다. 그런 어느날 식당에 우연히 들어온 고향 사람을 만났고, 그에게서 지난 겨울 술 취한 남편이 밤길 눈밭에서 얼어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모 없이 거지 신세가 되어 이집 저집에 맡겨져 있다는 아이들을 생각하니 한시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노라고 사평댁은 울먹이며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방 한쪽 구석에는 사평댁의 아이들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그녀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머리통은 부스럼딱지로 더갱이가 져있고 영양 실조로 낯빛이 눌눌한 아이들은 유난히 배만 불쑥 튀어나온 기이한 모습들이었다. 다시 한바탕 설움에 겨운 넋두리를 퍼붓다가 뚱뚱이 여자는 몸에 지닌 몇 푼의 돈까지 쓸어모아 한사코 마다하는 사평댁의 손에 쥐어 준 채 황황히 그 집을 나오고 말았다. 젠장맞을, 하여간 나는 정이 많은 게 탈이라구. 그 꼴을 하고 있는 줄 알았으면 애당초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 아냐. 쯔쯔쯔. 서울 여자는 분풀이라도 하듯 북어를 어금니로 쭉 찢어서 씹기 시작한다. 짧은 순간, 사람들은 모두 바깥의 어둠에 귀를 모은다. 분명히 기적소리다. 야아, 오는구나. 저마다 눈빛을 빛내며 그들은 서둘러 짐꾸러미를 찾아 들고 플랫폼을 향해 종종걸음을 친다. 그러나 맨 앞장선 서울 여자가 유리문에 미처 다다르기도 전에 문이 드르륵 열리며 역장이 나타났다. "그대로들 계십시오. 저건 특급 열찹니다." 그렇게 말하고 역장은 문을 다시 닫더니 플랫폼으로 바삐 사라진다. 참, 그러고 보니 저건 하행선이구나. 대합실 안의 사람들은 일시에 맥이 빠진다. 이번에도 특급이야? 뚱뚱이는 짜증스레 내뱉았고 아낙네들은 욕지거리를 섞어 가며 툴툴대었으며, 노인은 더 심하게 기침을 콜록거렸고, 농부는 이번엔 늙은이의 가슴을 쓸어 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중년 사내와 청년도 말없이 난로가로 되돌아갔고 맨 뒤로 몇 발짝 따라나왔던 미친 여자는 쭈뼛쭈뼛 눈치를 살피며 도로 의자 위에 엉덩이를 주저앉힌다. 그 사이, 열차는 쿵쾅거리며 플랫폼을 통과하고 있다. 차 내부의 불빛과 승객들의 미이라 같은 형상들이 꿈속에서 보듯 현란한 흔적으로 반짝이다가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사위는 아까처럼 다시금 고요해졌고, 창 밖으로 칠흑의 어둠이 잽싸게 제자리를 찾아 들어온다. 열차가 사라진 어둠 저편에서 늙은 역장의 손전등 불빛이 휘적휘적 걸어오고 있는 게 보인다. 그 모든 것이 아까와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대학생은 방금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열차의 불빛이 아직 자신의 망막에 남아 있는 듯 한 느낌이다. 그것은 어느 찰나에 피어올랐다가 소리 없이 스러져 버린 눈물겨운 아름다움 같은 거였다고 청년은 생각한다. 어디일까. 단풍잎 같은 차창들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마지막 가 닿는 곳은 어디쯤일까. 그런 뜻 없는 질문을 홀로 던지며 청년은 깊숙이 가라앉은 시선을 창 밖 어둠을 향해 던지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대합실 벽에 붙은 시계가 도착시간을 한 시간 반이나 넘긴 채 꾸준히 재깍거리고 있었지만 누구하나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다. 창밖엔 싸륵싸륵 송이송이 쌓여가고 유리창마다 흰보라빛 성에가 톱밥 난로의 불빛을 은은하게 되비추어 내고 있을 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말을 잊었다. 어쩌면 그들은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년 사내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성냥불을 당기려다 말고 멍하니 난로의 불빛을 들여다보고 있다. 노인을 안고 있는 농부도, 대학생도, 쭈그려앉은 아낙네들도, 서울 여자도, 머플러를 쓴 춘심이도 저마다의 손바닥들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망연한 시선을 난로 위에 모은 채 모두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저만치 홀로 떨어져 앉아 있는 미친 여자도 지금은 석고상으로 고요히 정지해 있다. 이따금 노인의 기침소리가 났고, 난로 속에서 톱밥이 톡톡 튀어올랐다. "흐유, 산다는 게 대체 믓이간디....." 불현듯 누군가 나직이 내뱉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말꼬리를 붙잡고 저마다 곰곰히 생각해 보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산다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중년 사내에겐 산다는 일이 그저 벽돌담 같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햇볕도 바람도 흘러들지 않는 폐쇄된 공간. 그곳엔 시간마저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마치 이 작은 산골 간이역을 빠른 속도로 무심히 지나쳐 가 버리는 특급 열차처럼..... 사내는 그 열차를 세울 수도 탈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기다릴 도리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앞으로 남겨진 자기 몫의 삶이라고 사내는 생각한다. 농부의 생각엔 삶이란 그저 누가 뭐해도 흙과 일뿐이다. 계절도 없이 쳇바퀴로 이어지는 노동. 농한기라는 겨울철마저도 융자금 상환과 농약값이며 비료값으로부터 시작하여 중학교에 보낸 큰아들놈의 학비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걱정만 하다가 보내고 마는 한숨 철이 되고만 지도 오래였다. 삶이란 필시 등뼈가 휘도록 일하고 근심하다가 끝내는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리라고 여겨졌으므로, 드디어 어려운 문제를 풀어냈다는 듯이 농부는 한숨을 길게 내쉰다. 서울 여자에겐 돈이다. 그녀가 경영하고 있는 음식점 출입문을 들어서는 사람들은 모조리 그녀에겐 돈으로 뵌다. 어서 오세요. 입에 붙은 인사도 알고 보면 손님에게가 아니라 돈에게 하는 말일 게다. 그래서 뚱뚱이 여자는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손님들에게 결코 안녕히 가세요, 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또 오세요다. 그녀는 가난을 안다. 미친 듯 돈을 벌어서, 가랑이를 찢어내던 어린 시절의 배고픈 기억을 보란듯이 보상받고 싶은 게 그녀의 욕심이다. 물론 남자 없이 혼자 지새워야 하는 밤이 그녀의 부대자루 같은 살덩이를 이따금 서럽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두 아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소중한 두 아들과 또 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쓰여질 돈, 그 두 가지만 있으면 과부인 그녀의 삶은 그런 대로 만족할 것도 같다. 촌심이는 애당초 그런 골치 아픈 얘기는 생각하기도 싫어진다. 산다는 게 뭐 별것일까. 아무리 허덕이며 몸부림을 쳐본들, 까짓 것 혀 꼬부라진 소리로 불러 대는 청승맞은 유행가 가락이나 술 취해 두들기는 젓가락 장단과 매양 한가지일걸 뭐. 그래서 춘심이는 술이 좋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게 해 주는 술님이 고맙다. 그래도 춘심이는 취하면 때로 울기도 하는데 그 까닭이야말로 춘심이를 모를 일이다. 대학생에겐 삶은 이 세상과 구별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스물 셋의 나이인 그에게는 세상 돌아가는 내력을 모르고, 아니 모른 척하고 산다는 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그런 삶은 잠이다. 마취 상태에 빠져 흘려보내는 시간일 뿐이라고 청년은 믿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전부터 그런 확신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는 걸 느끼고 있다. 유치장에서 보낸 한 달 남짓한 기억과 퇴학. 끓어오르는 그들의 신념과는 아랑곳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강의실 밖의 질서..... 그런 것들이 자꾸만 청년의 시야를 어지럽히고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행상꾼 아낙네들은 산다는 일이 이를테면 허허한 길바닥만 같다. 아니면, 꼭두새벽부터 장사치들이 때로 엉켜 아우성치는 시장에서 허겁지겁 보따리를 꾸려 나와, 때로는 시골 장터로 혹은 인적 뜸한 산골 마을로 돌아다니며 역시 자기네 처지보다 나을 것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시골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 참말 다 발라가며 펼쳐놓는 그 싸구려 옷가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들에겐 그 따위 사치스런 문제를 따지고 말고 할 능력도 건덕지도 없다. 지금 아낙네들의 머릿속엔 아이들에게 맡겨 둔 채로 떠나온 집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어린것들이 밥이나 제때에 해 먹었을까. 연탄불은 꺼지지 않았을까. 며칠째 일거리가 없어 빈둥대고 있는 십 년 노가다 경력의 남편이 또 술에 취해서 집구석에 법석을 피워놓진 않았을까..... 그러는 사이에도, 밖은 간간이 어둠 저편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고, 그때마다 창문이 딸그락거렸다. 전신주 끝을 물고 윙윙대는 바람소리, 싸륵싸륵 눈발이 흩날리는 소리, 난로에서 톡톡 튀어오르는 톱밥. 그런 크고 작은 소리들이 간헐적으로 토해 내는 늙은이의 기침소리와 함께 대합실 안을 채우고 있을 뿐, 사람들은 각기 골똘한 얼굴로 생각에 빠져 있다. 대학생은 문득 고개를 들어 말없이 모여 있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여겨본다. 모두의 뺨이 불빛에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청년은 처음으로 그 낯선 사람들의 얼굴에서 어떤 아늑함이랄까 평화스러움을 찾아내고는 새삼 놀라고 있다. 정말이지 산다는 것이란 때로는 저렇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청년은 무릎을 굽혀 바께쓰 안에서 톱밥 한 줌을 집어든다. 그리고 그것을 난로의 불빛 속에 가만히 뿌려 넣어 본다. 호르르르. 삐비꽃이 피어나듯 주황색 불꽃이 타오르다가 이내 사그라져 들고 만다. 청년은 그 짧은 순간의 불빛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본 것 같다. 어머니다. 어머니가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다시 한줌 집어넣는다. 이번엔 아버지와 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또 한줌을 조금 천천히 흩뿌려 넣는다. 친구들과 노교수의 얼굴, 그리고 강의실의 빈 의자들과 잔디밭과 교정의 풍경이 차례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음울한 표정의 중년 사내는 대학생이 아까부터 톱밥을 뿌려 대고 있는 모습을 곁에서 줄곧 지켜보고 있는 참이다. 대학생의 얼굴은 줄곧 상기되어 있다. 이 젊은 친구가 어쩌면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그러면서도 사내 역시 톱밥을 한줌 집어낸다. 그리고는 대학생이 하듯 달아오른 난로에 톱밥을 뿌려준다. 호르르르. 역시 삐비꽃 같은 불꽃이 환히 피어오른다. 사내는 불빛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얼핏 본 듯하다. 허씨 같기도 하고 전혀 낯모르는 다른 사람인 것도 같은, 확실히 앉은 얼굴이었다. 사내의 음울한 눈동자가 간절한 그리움으로 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사내는 다시 한 줌의 톱밥을 집어 불빛 속에 던져 넣고 있다. 어느새 농부도, 아낙네들도, 서울 여자와 춘심이도 이젠 모두 그 두 사람의 치기어린 장난을 지켜보고 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사평역을 경유하는 야간 완행 열차는 두 시간을 연착한 후에야 도착했다. 막상 열차가 도착했을 때, 대합실에서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승객들은 반가움보다는 차라리 피곤함과 허탈감에 젖은 모습으로 열차에 올라탔다. 늙은 역장은 하얗게 눈을 맞으며 깃발을 흔들어 출발신호를 보냈고, 이어 열차는 천천히 미끄러져 가기 시작했다. 얼핏, 누군가가 아직 들어가지 않고 열차 난간에 기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역장은 그 사람이 재 너머 오씨 큰아들임을 알았다. 고개를 반쯤 숙인 채 난간 손잡이에 위태로운 자세로 기대어 있는 청년의 모습이 역장은 왠지 마음에 걸렸다. 이내 열차는 어둠 속으로 길게 기적을 남기며 사라져 버렸다. 한동안 열차가 달려가 버린 어둠 저편을 망연히 응시하고 서 있던 늙은 역장은 옷에 금방 수북이 쌓인 눈을 털어내며 대합실로 들어섰다. 난로를 꺼야 하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역장은 뜻밖에도 아직 기차를 타지 않고 남아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미친 여자였다. 지금껏 난로 곁에 가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이었던 그녀는 이제 난로를 독차지한 채, 아까 병든 늙은이가 앉았던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집이 어디며, 또 어디서 왔는지 역장은 전혀 모른다. 다만 이따금 그녀가 이 마을을 찾아왔다가는 열차를 타고 떠나곤 했다는 정도만 기억할 뿐이었다. 오늘은 왜 이 여자가 다른 사람들을 따라 열차를 타지 않았을까 하고 역장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아 그 여자에겐 갈곳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있어서 출발이란 것은 이 하룻밤, 아니 단 몇 분 동안이나마 홀로 누릴 수 있는 난로의 따뜻한 불기만큼의 의미조차도 없는 까닭이리라. 역장은 문득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올 겨울 같은 혹독한 추위에 아직 얼어죽지 않고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꿈이라도 꾸는 중인지 땟국물에 젖은 여자의 입술 한 귀퉁이엔 보일락말락 웃음이 한조각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이거 참 난처한걸. 난로를 그대로 두고 갈 수도 없고..... 하지만 결국 역장은 김씨를 깨우러 가기 전에 톱밥을 더 가져다가 난로에 부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사무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눈은 밤새 내내 내릴 모양이었다.  
40 8월 외 1편/송은영
편집자
5414 2010-07-30
10.08월 3호 시 8월 8월에는 생기 잃은 풀뿌리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있었다 나는 사랑의 노고와 무게를 알지 못해 모두에게 이방인이 되었고 어느 해 보다 뜨거운 정오의 태양은 새로운 유전자를 쏘아 비취색 바다를 금빛으로 수 놓았다 만남과 이별 사이에서도 공손하지 못한 8월은 매일 찻물을 끓이듯 활활 타올라 나를 더 미치게 만들었으며 그 여름 파장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한 나는 인연을 부둥켜 안고 목 조르는 버릇이 생겼다 신의 직장 저들은 우리가 내신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 우리는 힘겹게 살아도 아무 관계없이 등따숩고 배부른 직장인이라는 것 탄핵되는 대통령 하루 살이 장관 대법관도 징계를 먹지만 저들은 기물을 파손하고 법을 어겨도 어느 누구 처벌 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 신의 직장이란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드는 것 눈먼 돈을 삥뜯으며 명령만 하면 되는 직장에 사는 저들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뒤에는 강력한 신이 있다는 것 혀끝에 녹아 드는 초콜릿처럼 달콤한 사명감으로 일하는 저들은 어떤 혁명도 없이 한끼 벌어서 한끼 먹는 사람보다 알고 보면 더 빨리 명퇴 된다는 것  
39 아니오 외1편/남태식
편집자
5023 2010-07-30
10.08월 3호 시 아니오 남태식 무덤의 나라에는 아니오가 없다 아니오가 없는 무덤이 허물고 쌓고 허물고 쌓는 것들은 모두 무덤 무덤들 위에 새로 피우고 돋우는 꽃들도 무덤 풀들도 무덤 무덤이 된 꽃들이 슬프다 풀들이 슬프다 아니오가 없으면 아니오가 없는 나라도 무덤 그 나라의 산천이 모두 무덤 아니오가 없는 무덤이 슬프다 아니오가 없는 나라가 슬프다 그 나라의 산천이 모두 아프다 벗다 무덤에 안 드니 경칩 지난 눈바람도 무지 매섭다. 골골 휘저으며 눈발로 등성이를 내리 뭉개니 시려 가슴을 웅크려 오므린다. 눈밭에 몸을 숨기니 겨울은 아무래도 못 건넌다. 무덤에 드니 한겨울의 칼바람도 다소곳하다. 찬 기운 오래 일도록 밤새 빚은 눈의 뼈 굳히지 않고, 잠깐 든 햇살에도 모두 삭힌다. 무덤에 몸을 묻으니 겨울은 아무튼지 건넌다. 무덤에 들어 겨울을 건너니 느닷없는 봄이 오고, 드디어 무덤마저 다 벗는다. 남 태 식 시집 <속살 드러낸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내 슬픈 전설의 그 뱀> tsnbd@hanmail.net  
38 병(甁) 속의 새 1 외1편/신순말 [1]
편집자
5437 2010-07-30
10.08월 3호 시 병(甁) 속의 새 1 신순말 포로로 새 한 마리 나뭇가지에 앉았다 몇 번 몸을 출렁이다 이내 반듯해지는 가녀린 나뭇가지라도 그 무게쯤 가뜬하다 움직이는 새를 못 움직이는 나무가 저렇듯 품어주고 있음을 생각하니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가득하다 새가 깃든 고운 병 깨트리지 않아도 입이 좁은 병속 새를 누군가 꺼냈을까 앉은 새 떠난 후에도 가뿐히 선 나무처럼 해우소에서 -근심에 관한 명상- 신순말 어설피 씹은 하루 트릿하게 있노라면 매 순간 순간이 하루가 되는 거라 그 말씀, 생목 오르고 새 한 마리 날았다. 저 새, 순식간에 근심 풀어 나는데 한 길 사람 속 삭히지도 못하여 한나절 열두 고개를 돌고돌아 가는 길. 없는 복에 눈멀어 자꾸만 그윽대며 서리어 앉히는 일 늘 쉽기야 하는가 근심이 근심이도록 길을 내어 주는 일.  
37 창작과 의식
편집자
4206 2010-07-30
주목! 이 문학단체 본지(문예지 ‘창작과 의식’)는 2004년 11월 창간호를 발행하며 한 척의 배를 오늘 우리 문단에 띄우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지만 제호의 원칙에 따라 ‘창작’에 몰두하되 ‘의식’있는 작가로 3-40명 정도의 작가들로 결성된 것입니다. 당시의 우리 문단에는 등용문은 열려 있었지만 너무 흔쾌히, 즉 아무나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문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큰 차이점이 있는 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등단비용이 어느 정도 설정이 되면 작품에 관계없이 마구잡이 형식으로 등단이 가능했다는 게 본지 결성에 큰 영향을 준 것이라 봅니다. 이에 본지 작가회(당시 ‘문학회’) 회원들이 십시일반 협조하는 체제로 글다운 글, 시다운 시를 게재해 보자는데 뜻을 모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는 많은 담지 못할 입방아도 들었습니다. 이에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걸어온 길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며, 본지 제호를 벗어나지도 벗어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아쉽다면, 초심에서 벗어난 경우 뼈를 깎아내는 아픔이었지만 과감히 배제를 시켜야 했다는 것입니다. 즉 ‘大를 위해 小를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몇 번이고 접어야하는가를 고심하기도 했습니다만 본지가 추구하고자 했던 ‘문학상’ 및 ‘청소년 백일장’에 미련을 버리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청소년 백일장은 전국적 내지 지역적으로 선별하여 즉석이거나 메일로 접수하여 시도하면서 ‘장원’ 1명, ‘우수’ 2명, ‘가작’ 3명을 당선시키면서 상장이나 부수적인 상품권 지급에서 본지의 어려운 재정난에 부닥치기도 하여 6회를 마감으로 일단 보류하고 있습니다만, 본지 작가회에서 월 회비 1만원씩 갹출하여 새로운 발돋움을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운영이사님 외 몇 몇 지인들로 하여금 본지에서 주관한 ‘문학상’ 제도를 개설하여 상금 50만원 지급과 동시에 상패를 증정하여 2009년 창작문학상 ‘신 영’ 작가님, 의식 문학상 ‘김청수’ 시인님에 이어 올 해 2회는 통합하여 ‘창․의 문학상’으로 설정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1급 뇌병변 장애인 ‘김철이’ 작가님을 선정하기도 했습니다.(참고로, 본지 문학상 선정에 있어서는 작품의 우월성은 물론이지만 문학 활동함에 있어 어려움이 있는 작가를 선정하기도 함.) 본지의 카페는 문학지의 홈페이지와 다름없다고 봅니다. 그저 카페활동이 아닌 작가의 작품을 올리고 이에 선정되는 작품은 문예지의 텍스트화로 출간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본지 출간에 있어서 등단식과 함께 통상 3개월에 한 번 정도 모이는 것으로서 어떤 모임이 되었던 문학의 고취성이 담기지 않는다면 모임을 갖지 않습니다. - 참고 1 : 본지는 현재 통권 22호(여름호) 발간 중이며, 출판사를 겸하고 있으므로 개인시집 30호를 출간 했습니다. 창작과 의식(http://cafe.daum.net/feelingpoetry) 발행인 박세문("백강" <tpans1114@hanmail.net)  
36 용사동락락龍蛇同樂樂 외1편/차영호
편집자
4637 2010-07-30
10.08월 3호 시 용사동락락龍蛇同樂樂 차 영 호 문경 가은에 가면 연개소문 세트장이 있고 삼족오三足烏 날개 펄럭이는 고구려적 안시성도 있어 성안 옥사獄舍에 걸린 주련柱聯 용사동락락龍蛇同樂樂 톡 까놓고 뒹굴면 왕후장상이나 백정고리짝이나 매일반이라는 말씀 저거 요새도 유효한 쿠폰일까 고치를 짓다 어둑발 내리는 대둔산 북사면을 오른다 머나먼 절집, 비단길앞잡이처럼 앞길 걷던 노인이 손사래 치며 주저앉는다 이윽고 일주문 턱인 돌 틈을 삐져 모롱이 도니 보인다 산이 반도가 지축이 기울어질 만큼 육중한 성곽, 저걸 딛고 어디까지 오르라는 것이냐 계단 밑 쪽방마다 틀어박힌 머리 파르란 여치들, 어쩜 그리 고치 속 번데기처럼 말갛게 길들여져 있을까 모두들 한사코 끌어안은 보퉁이 어여 내던지라고 한 무더기 새떼 높이 울며 허공을 난다 갑자기 엉치등뼈가 아프다 내 친구 젊어죽은 오쟁이가 불쑥 발치에서 튕겨 나와 독성각 괘불탱 수염 같은 터럭을 뽑아 고치를 짓는다 친친  
35 타인의 생/이중기
편집자
3901 2010-07-30
10.08월 3호 수필 타인의 생 이 중 기 잠에서 깨어난 나는 아까부터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는 방안의 공기를 꼼꼼하게 읽고 있다. 조용하다. 너무 조용해서 벽시계 초침소리가 귓속을 텅텅 차댄다. 나는 방문 쪽으로 머리를 돌려놓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쪽으로 난 방문 앞에 붙박혀 있던 손바닥만한 햇살이 기척도 없이 걷히어 가고 제법 서늘한 기운이 깔린다. 어디 먼데서 낙엽 타는 냄새가 코끝에 와 닿는다. 내 코는 습자지처럼 낙엽 타는 냄새를 빨아들인다. 설핏, 어둠이 내린다. 환경의 변화가 아무런 충격이 될 수 없다면 어둠의 도래가 그러하리라. 나는 기분 좋게 눈을 감으며 정신이 무척 맑아져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방바닥을 차고 올라오는 냉기에 소스라친다. 나는 망설이다가 벌떡 일어나 앉는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갑자기 허기가 아랫배를 왈칵 거머잡는다. 나는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는다. 몇 끼를 굶었던가, 지난 며칠을 찬찬히 훑어본다. 그러나 아무것도 제대로 기억해낼 수가 없다. 내장을 타고 물 흐르는 소리가 차갑게 들린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크게 들이쉰다. 나는 언제 어떻게 집으로 돌아 왔는지 기억되지 않는다. 숙취에서 깨어날 때처럼 단절된 기억의 이쪽과 저쪽을 부지런히 들락거려 본다. 그러나 기억은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며칠째, 엄습해 오는 오한과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콧물을 간신히 견디다가 해거름에 집을 나선 게 어젠지 그저껜지도 희미하다. 종규에게도 그는 연락두절이었다. 술에 취해 내게 들렀다가 간 기억이 희미한데 집을 비운지가 열흘이 지났다고 한다. 휴대전화는 전원이 끊어져 있고 노모와 누이가 있는 도시의 집에서도 그는 연락두절이었다. 나는 종규에게 애써 초조함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했던성싶다. 종규의 강요로 두 점 접바둑을 두었는데 두 판을 내리 졌던 것 같다. 나는 마지막 돌을 팽개치듯 내던지며 고꾸라졌던 기억이 난다. 이마를 찡그리며 아득하게 먼 기억의 끈을 당겨본다. 나는 혼미한 상태에서 신열을 앓는다. 끊임없이 뒤척거렸으리라. 누군가 내 손을 잡고 바람개비처럼 빙빙 돌린다. 개들이 자지러지게 짖으며 달려들어 전신을 낭자하게 물어뜯어 놓아도 나는 꼼짝할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사람들이 턱없이 발길질을 해대고, 갑자기 대형 화물차가 달려와 깔아뭉갰고, 느닷없이 주먹들이 날아와 명치끝에 박힌다. 으으으으, 씹어뱉듯 뇌까린 신음과 뒤척거림이 끝없이 이어졌으리라. 어쩌다 간신히 잠의 늪에서 빠져나와 게으르게 눈을 떠도 그러나 내 눈빛은 사물을 제대로 붙들어내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냅다 등을 떠민다. 몸 곳곳에서 땀이 질척거린다. 나는 소리 없이 방안에 들어차는 어둠의 부피가 두터워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 새벽의 희미한 기억 속에서 빠져나온다. 가슴에 손을 대자 공명함처럼 울린다. 마치 부스럼이 앉은 상처나 물집을 건드렸을 때의 감촉과 흡사하다. 나는 등과 배를 쓰다듬으며 전신이 하나의 상처나 물집으로 변해버린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나는 그것이 엉망으로 앓은 몸살의 후유증임을 안다. 나는 허리 뒤에 두 손을 대고 힘을 준다. 끊어질 듯 허리가 아프다. 아직 다 철수하지 못한 몸살의 잔류병 탓이다. 나는 허리를 반듯하게 눕힌다. 어느새 방안은 수중처럼 깜깜하다. 어둠의 무게에 숨이 가쁘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기고 대문 쪽에다 신경을 매복시킨다. 발소리가 들린다. 발소리는 거침없이 마당을 가로질러와 방문 앞에서 멎는다. 나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연다. 그러나 그는 거기 없고 찬바람이 이마를 치고 간다. 나는 멍하니 어둠 속을 바라보다가 문을 닫고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무릎을 당겨 배에 붙이고 새우처럼 척추도 접어 몸을 조그맣게 만든다. 문득 배고프다는 생각 끝에 허기가 사정없이 아랫배를 걷어찬다. 내리 여섯 해나 농사를 망친 그의 부엌 냄비 속에는 가끔씩 거미가 줄을 치기도 했다. 달포 전에 내가 갖다 준 김치는 맛이 변했을 것이고 라면을 끓여 먹고 남은 찌꺼기를 노린 쥐들이 냄비 속을 들락거릴 것이다. 땟물이 줄줄 흐르는 서른여섯 사내의 부엌과 방을 나는 눈을 감고 찬찬히 살피다가 어금니를 깨문다. 이마가 넓은 갓 서른 사내를 빚더미에 앉혀버린 건 순전히 내 탓이었다. 그는 열심히 살았으나 농사는 어설펐다. 농운은 늘 그를 비켜갔다. 올해 고추농사마저 징그럽게도 쏟아 부은 장맛비가 깡그리 망쳐버렸다. 2천 평을 조금 넘는 부재지주의 땅을 얻어주며 꼬드긴 6년 전의 내 잘못을 술이 취해 탓하던 그의 젖은 목소리가 가슴을 후빈다. 형님…… 이건 내 인생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이 타인의 생 이었어요. 그 젊디젊은 나이에 6년이나 타인의 생을 살아주다 만 사내의 절규 앞에 나는 안주도 없이 소주만 들이켤 뿐 무어라 한 마디 변명할 자신이 없었다. 젊은 사내의 생을 파탄 내버린 것은 나라의 농업정책이 아니라 내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는 어디에서 무었을 하고 있을까. 나는 그를 만나고 싶다. 6년이나 타인의 생을 살 수밖에 없었던 그의 아픔을 20년 넘게 타인의 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나의 말 몇 마디로 덮기에는 태부족이겠지만, 나는 그를 만나 이 한 마디는 꼭 들려주고 싶다. 궁색한 변명일지라도, 빨래줄 가득 흰 기저귀가 펄럭이는 나라가 그리웠노라고. 이제 막 말을 배운 어린 것들의 깔깔거림을 보고 싶었노라고. 단지 그것뿐이었노라고.  
34 붉은 밭 1외1편/박명희
편집자
4776 2010-07-30
10.08월 3호 시 붉은 밭 1 박명희 집에서 먼 밭 돌 반 흙 반이던 붉은 밭 엄마는 그 밭가 느티나무 아래 밥을 부려놓고 나를 부려놓고 온종일 밭을 일구셨다 사방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 어린 나는 면벽수행법을 배웠고 엄마는 한숨 같은 휘파람을 배웠다 밭 가운데에 맑디맑은 옹달샘을 품은 밭 아홉 식구 밥을 품은 밭 이따금 미풍이 책장을 넘기 듯 나를 넘기면 붉은 밭이 나오고 옹달샘이 나오고 무지개가 나오고 하늘빛 나이아가라치마를 입은 젊은 엄마가 나온다. 붉은 밭 2 박명희 제 어미 자궁을 찢고 목화꽃 탄생하는 목화밭을 온종일 바라보고 있었지요. 몸이 무려울만큼 심심했지요. 그래서 꿩처럼 껄껄 울어보았지요 산도 껄껄하고 울었지요. 엄마, 빨갱이 내려온다며 옹달샘에서 물 한 바가지 떠다 보리밥 한 덩이 말아줬지요 열여섯 살 어린 빨갱이 내려와 밥 빼앗아 간다며 겁 줬지요 그때 나는 빨갱이가 밥 뺏어가는 짐승인 줄 알았지요. 살쾡이 같은 너구리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