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3호...
   2019년 11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 오늘방문자 : 
    267
  • 어제방문자 : 
    615
  • 전체방문자 : 
    448,123

지난호 보기

분류에서 보고싶은 호를 선택한후 GO 를 누르세요.

번호 닉네임 조회 등록일
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81264 2014-11-03
19 순대 먹는 여자 외 1편/권형하
편집자
4493 2010-06-18
10.07월 2호 시 순대 먹는 여자 아이에게 사탕 물리고 풍선 하나 들리고 가슴이 토굴 같아 토막 낸 순대를 먹다가 노을도 소금으로 찍어 산마루에 걸어본다. 어둠이 쑥쑥 자라나 목을 빼는 가로등 손마다 휘저어보면 핏기 없는 달로 뜬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배웅한 그 사람일까. 어떤 길이라도 밟아보면 힘이 되던 것이 집 가까이 다가오면 어깨 짚어주는 전신주 잡아본 아이 손목만 빠져나가는 바람 한 채. 만월 십이월 달 속으로 여자가 누워있다 양수가 다 부풀어 산달이 된 만삭으로 핏줄이 아기 핏줄이 나뭇가지로 어린다. 이 산골 산동네에 얼마 만에 경사이랴 산자락마다 깔아놓은 곱고 고운 보료를 사내가 숨도 가쁘게 방문을 열고 있다. 권형하 시집 「새는 날면서도 노래한다(1990)」, 「바다집(1997)」,「꿈꾸는 섬(2005)」. 경북문학상 수상(2005).  
18 유무우거(有無寓居)/신대원
편집자
3799 2010-06-16
10.07월 2호 수필 <유무우거(有無寓居)> 신대원 뒷산자락에 솔바람 일고 아랫마을 누구네 집에서 저녁 태우는 연기 모락모락 피어나면, 가끔씩 난 ‘그리움’이라는 말마디를 떠올린다. 어린 시절 고향마을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전기도, 전화도 없었던 고향집엔 이렇듯이 오늘처럼 마른나무로 저녁을 태우고 호롱에 석유를 부어 온 밤을 밝혔었다. 그럴 즈음 마을에는 온통 모깃불 타는 향내가 동구 밖 어귀 당산나무 가지를 흔들어대고, 놀란 소쩍새의 구슬픈 하소연은 하염없이 이승의 하늘을 날기도 했었지. 그러면 소쩍새 울음소리에 잠이 깬 별들은 우수수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고. <유무우거(有無寓居)>- 얼마 전 파르스름한 문종이에 작은 붓으로 먹물을 묻혀 적어 두었다가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문설주 위에 떡하니 붙여놓은 글귀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깃들어 산다는 뜻이다. 이미 사라져버려 없는 것들이 기억으로 되살아나 비로소 있는 것이 되기도 하고, 언제까지나 있어야만 해야 할 것들은 어느 순간 사라져버려 없는 것이 되고 마는 현실이다. 우리들의 현실은 언제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고, 있음과 없음이 서로 뒤엉켜 사는 시간이고 공간이지. 어쩌면 ‘유무우거’라는 말은 인간살이의 이상(理想)이고 꿈인지도 모르겠다. 이상이고 꿈이라면 그것은 풀어야 할 수수께끼이고 풀지 못할 신비(神秘)일 것이다. 수수께끼이고 신비라면 그것은 그저 동경(憧憬)할 수밖에 없는 ‘그리움’이 아닐까? 사람들은 있기를 바라면서 있는 것들은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없는 것을 다시 초대 하려고 애를 쓴다. 하늘의 계획하심에 따라 흐르고 있는 낙동강의 물길을 가로막고, 가로막은 물길을 한줌도 안 되는 인간이 다시 흐르게 한단다.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용쓰지 않아도 좋을 것을 굳이 용쓰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어쩌면 모두 참으로 똑똑한 멍청인지도 모를 일이다. 없는 것과 있는 것이 서로 기대어 사는 시간이며 공간은 우리의 의지와는 별개다. 어린 시절의 고향마을과 지금 내가 사는 마을이 함께 있는 건 내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그리움’이라는 ‘신비’가 내 곁에서, 내 속에서 나를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 아니더냐? 문학과 과학이 만나고, 겉과 속이 함께 살며, 무늬(文)와 바탕(質)이 공존하고, 움직임과 고요함이 어울려 있어야 비로소 사람이 산다고 할 수 있지 않더냐? 공자는 이를 두고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고 했다. 대동(大同)의 세상,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상이 곧 있는 놈과 없는 놈이 거기에 함께 깃들어 사는 거지. 그건 신비이고, 동경이고, 수수께끼이며, 그리움이며, 이 그리움이 끝에 가서는 희망으로 되는 게지. 우리는 모두 가슴 속에 저마다의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그리움이 없다면 눈물 흘릴 일도 없고, 견디어내는 인내도 없어지고, 빙그레 미소 짓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더 이상 사람이라 할 수 없지. 사람은 그리움이 있어야 사람이다. 거기에는 있음과 없음이 서로 깃들어 살고, 기억과 현실이 공존하게 되며,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할 수 있고, 사랑을 나누고, 정의와 평화를 일구고, 마침내 참 행복을 꿈꾸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솔숲에 바람 인다. 그리움이 짙어지면 질수록 바람은 더욱 나의 오감(五感)을 두드려댄다. 아랫마을에 피어오르던 연기도 멈추고, 떨어지던 별자리마다엔 오색(五色)의 그리움이 찬란하다. 그 찬란한 그리움들이 살아서 이승의 하늘을 흐른다. 흘러서 딱딱하게 굳고 바삭 마른 사내의 가슴에 강물로 스며들어 상념(想念)의 시간이 되고 공간이 된다. 이럴 땐 누구라도 그리워지는 법이지. 없는 이라도 찾아오면 가난한 술잔이라도 기울이고 싶다. 돌아오는 길, 문설주 상단에 어설프게 적어 놓은 <유무우거>라는 글귀가 유난히도 반짝인다. 반짝이는 건 아마도 그리워하는 이의 그리움일 것이다. 신대원 (천주교신부, 들문학회원)  
17 얼바우 박치대를 기리며/위초하
편집자
2945 2010-06-12
얼바우 박치대를 기리며 1. 박치대의 생애 박치대는『지크미』,『밀도살꾼』,『토종』,『잡종』,『고삐』,『21세기』등 초기엔 토속적인 단편들을 통해 농민들의 피폐해가는 모습을 지근거리에서 천착해왔다. 아울러 도시화가 가속화되는 과정에서 소외되고 밀려난 우리 이웃의 문제와 사회적 갈등을 차분한 문체로 펼쳐 호평을 받았다. 이외에도 『기류』,『아 백두여』,『올가미 상․하』,『부평초 상․하』,『대역 상․하』,『철쭉으로 피어나리』등의 장편소설을 썼다. 정의롭지만 역사의 변방에 짓눌려 고통 받고 사람들과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가는 사람들의 삶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대역 상․하』는 일본의 천황과 황태자를 폭살하려다 일경에 체포돼 재판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은 독립 운동가이자 사상가, 아나키스트였던 박열의 생을 다룬 장편소설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으며『철쭉으로 피어나리』는 박치대가 마지막으로 남긴 소설이다. 박치대는 1946년 예천 금당실에서 2남 2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박노문으로 금당실의 함양 박씨 문중의 문장 노릇을 하는 지역의 몇 안 되는 마지막 선비였다. 따라서 박치대는 어렸을 때부터 한학과 신학문을 두루 배우며 자랐다. 6․3사태 때 현실에 대한 절망감으로 낙향을 시도 대학을 중퇴하게 되었다. 가정을 꾸린 뒤에는 중등학교 영어과 자격 검정 시험에 합격하여 영어 교사가 되었다. 그 뒤 문경여중과 예천여중으로 와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임을 몇 달 앞두고 2009년 2월 갑작스럽게 타계했다. 2. 박치대의 문필활동 박치대의 문필활동을 살펴보면 예천의 ‘한내글모임’의 초창기 멤버로서 좌장 역할을 하였고 가까운 문학 단체나 먼 곳의 문학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대구․경북민족문학회’와 그 후신인 ‘경북․민족문학작가회의’의 회원으로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였다. 중앙 문단보다는 지역 문학 활성화에 심혈을 쏟았던 것은 박치대가 늘 한내와 고향을 변방이 아닌 자신의 중심에 두고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문학의 상업성을 거부하였다. ‘민족’, ‘역사’, ‘민중’, ‘의리’ 등이 그의 문학을 대변하는 화두였고 스케일이 크고 웅장하였다. 특히 아나키스트이며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박열 의사’와 관련된 내용을 소재로 하여 상상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의 만주와 중앙아시아에서 고난을 겪는 민족의 운명과 독립운동을 천착하기도 했다. 그는 박열의 삶을 작품화하기 위해 문중사람들과 그의 행적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 외 자료는 국회도서관에서 자료를 많이 열람한 것이라 이야기한 바가 있다. 소설 『아 백두여』의 마지막에 붙인 ‘쓰고 나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만주는 내 마음의 고향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어려서부터 ‘만주’라는 이름을 자주 들으며 자라 왔다. 콩밭을 매는 할머니를 따라 들에 나가 있노라면 쉴 참에 할머니는 혼자말로 중얼거리시곤 했다. “만주 고모가 있었으면 너를 업고 다닐 텐데.” 누님이 없었던 나는 고모님들의 등에 업혀 마을을 다니곤 했다. 친고모, 종고모 합쳐서 대여섯씩 모여 앉으면 반드시 만주 고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해심이 있고 마음이 넓은 만주 고모가 있었더라면 집안의 분위기가 한결 좋았을 거라는 식의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니까 어릴 때 나는 광주 , 부산, 대구, 서울 등의 이름보다는 만주라는 이름을 훨씬 자주 들었다. 고모님들이 살던 곳을 고향이라 생각했다면, 만주 고모님이 살던 곳을 제2의 고향이라고 느꼈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 지도 모른다. 조금 더 자라서는 아버지가 만주에 다녀오신 이야기를 들었다. 길림, 장춘, 하얼빈, 목단강 등을 거쳐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는 삼국지를 읽으면서 중국 대륙을 무대로 활약하던 군웅 호걸들의 이야기만큼이나 내 어린 가슴에 박혀 들어 왔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역사라는 것을 배우면서 나는 만주에 대한 것이라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고, 그 뒤로도 만주에 관한 자료라면 무턱대고 모아 두곤 하였다. 그러다가 그 모든 것을 어떤 형태로든 나타내고 싶은 충동이 나이를 먹으면서 크게 일어났다. 그것이 이렇게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할까. 그런데 막상 책으로 묶어져 나온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앞선다. 내 서투른 솜씨로 얼마나 내 마음을 그려낼 수 있을까? 광활한 만주 천지에서 나타나거나 숨겨진 무수한 역사의 숨결을 어떻게 감히 내가 접근해 볼 수 있을까. 이제까지 만주에 관한 자료라 해 봐야 단편적이고 한 쪽 부분밖에 나타난 것이 없다고 하겠다. 다른 한 쪽 부분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금지되거나 특수한 집단에게만 독점되어 왔다. 그러한 가운데 1930년대의 격변기를 무대로 하여 이 글을 썼다. 무력 항일 투쟁의 역사에서 민족 세력과 공산 세력의 알력이 가장 극심했던 그 시기를 무대에 올렸다는 것이 지나친 욕심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될 수 있는 한 어떤 편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한 입장에서 필을 잡았다는 것은 장담할 수 있다. 아무쪼록 많은 뜻있는 분들의 꾸중과 채찍질이 있기를 바란다. 이 글을 만주 고모님의 영전에 바치고 싶다. 올 여름에 세상을 떠나신 만주 고모님! 지금 만주 길림에 살고 있는 고종 형제 이장춘, 광춘의 앞길에 신의 보살핌이 있기를 빈다. 1989년 10월 박치대 3. 작품 속에 나타난 반제국주의자 박열 “민중은 우리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기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생활에 불합리한 일체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 할지니라” 이 글은 단재 신채호가 1923년 1월 <조선혁명선언>에 남긴 글이다. 당시 ‘문화운동’을 부르짖는 인사들을 향하여 “문화는 산업과 문물의 발달한 총적(總積)을 가리키는 명사니 경제약탈의 제도 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족의 보전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망이 있으랴”며 일갈한 신채호는 구체적인 폭거를 다음과 같이 열거 했다. 1.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2. 일본천황 및 각 관공리 3. 정찰꾼, 매국노 4. 적의 일체 시설물 (위의 4가지를 폭력, 암살, 파괴, 폭동의 목적물로 열거) 소설 『대역 상․하』(월드컴미디어;2000년 10월15일) 는 수난의 민족사에 자긍심을 일깨워 줄 수 있는 통쾌하고 매력적인 한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소설로 다시 되살려 놓은 것이다. 박열을 흔히 아나키스트로 규정한다. ‘아나키즘’은 국가의 존립 자체를 거부한다는 측면에서 ‘무정부주의’로 해석하거나 국가가 없는 혼란 상태를 일컫는 말로 생각하지만 ‘아나키즘’의 본질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박열이 소속했던 ‘의열단’ 조직의 경우 무력적인 충돌을 통해 반제 운동을 전개하려 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폭력에 우선권을 부여하였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반제국주의’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일제 식민 통치 35년은 우리 민족사에 나라를 빼앗긴 고통 못지않게 수많은 지식인들을 친일 변절자로 만든 뼈아픈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더 큰 아픔은, 변절의 역사가 8ㆍ15광복으로도 끝나지 않고 그 후 5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잔재들이 남아 역사의 진로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제 식민지 시절을 돌이켜보면 독립지사도 많았고 애국지사도 적지 않았지만, 박열(朴烈) 열사만큼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까지도 감동시킨 매력적인 독립운동가도 흔치 않았다. 일본의 천황과 황태자를 폭살(暴殺)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박열은 일본제국의 대배심원 법정에 서면서, “나 박열이 법정에 서는 것은 피고로서가 아니라 조선민족을 대표해서다. 따라서 재판관이 일본 천황을 대변하여 법의(法衣)를 입고 나오니, 나 박열은 조선의 전통예복을 입겠다”. 는 주장을 관철시켜, 사모관대(紗帽冠帶)에 부채까지 들고 재판을 받은 그 기개와 당당함은 지금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박열 열사는 행동하는 독립운동가라 하기에는 정치․경제․철학․문학 등에 두루 통달한 뛰어난 지식인이었으며, 고뇌하는 지식인이라 하기에는 행동하는 혁명가였다. 그는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기에는 너무나 휴머니스트였으며, 휴머니스트의 우유부단함을 연상하기엔 너무나 단호한 역사의 심판자였다. 박치대는 이러한 박열의 정신을 그려내고자 수십 년간의 자료수집과 각고의 집필로 만든 소설이며 작가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 많은 애정과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작품이다. 박치대는 박열을 통해 여느 독립운동가와는 달리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평등, 인권이란 사상적 바탕 위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은 물론, 천황제의 허상을 무너뜨림으로써 일본 사회내부의 혁명적 변혁까지 기대했던 사상가를 그려내고 있다 실제로. 그의 정치철학과 조국의 미래, 민족이 가야할 길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신조선혁명론新朝鮮革命論>(일어판)을 읽어보면, 박열 열사가 단순히 행동만 앞세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준비된 민족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1923년부터 1925년에 걸친 총 20여 회의 조사과정에서 박열 선생은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그리고 사형 판결이 나자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일갈하며, 불굴의 정신을 표출하기도 했다. 이후 무기형으로 감형되었지만 일제 패망 이후에도 ‘대역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지 못하다가 1945년 10월 27일에야 풀려나게 된다. 해가 바뀌고 박열은 무척 바쁘게 움직였다. 일월에 신조선건설동맹이 결성되어 박열이 위원장으로, 이강훈이 부위원장으로 뽑혔다. 삼월에는 옛 동지들과 후원회의 도움으로 간다구에 있는 공회당에서 가네코 후미코 추도회를 개최하였고, 김구의 부탁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세 의사의 유해를 발굴 본국으로 송환하여 칠월에 반장 행사를 하였다. 시월에는 재일조선거류민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되었고, 십이월에는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길에 도쿄에 들른 이승만과 회담을 하는 등, 여러 가지 큰일들을 치러내느라고 제대로 쉴 날이 없었다. 22년이 넘는 형무소 생활을 하다가 나온 사람으로 믿기 어려운 활동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박열에게 제2의 인생을 열어준 일이 있었으니, 바로 장의숙 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장의숙은 도쿄여자 대학에 다니면서 국제신문에 근무하던 여인인데, 박열 석방 1주년을 맞이하여 박열에 대한 특집을 내려고 그를 면담하러 찾아갔던 것이 인연이 되어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박열과 결혼(1946년 재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박열과는 열여섯 살이나 차이가 났다. 이처럼 남다른 사랑과 투쟁의 길은 길었다. 4. 민족과 국가를 넘어선 동지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가 옥중에서 죽은 날이 오면 박열은 하루 종일 바깥출입을 하지 않은 채 방에 들어앉아 묵상에 잠겨드는데, 그럴 때면 장의숙도 그 날 하루를 엄숙한 가운데 추모하는 마음으로 보냈다. 가네코의 정신에서 체 게바라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체 게바라가 다른 혁명가들과 다른 존재로 생각되는 것은 그가 언제나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혁명의 최일선에서 행동했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가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의 관계 속에 그 실상을 깨닫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던 것처럼 가네코도 천황제와 제국주의의 실상 속에서 식민지 조선인의 고통을 직접 겪고 이해한 것이 그녀를 혁명의 일선으로 나가게 만든 이유가 됐다. 더군다나 일본 여성과 함께 조선 남성이 범행을 공모했다는 사실은 식민 지배자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라틴 아메리카 민중의 비참한 삶을 직접 목격한 체 게바라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든 것처럼 가네코도 박열과 함께 천황을 폭살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첩경이라고 본 것이다. 체 게바라에게 카스트로라는 동지가 있었다면 박열에게 가네코가 있었다. 가네코의 불우한 환경은 곧 국적이나 성별을 뛰어넘어 인간성 회복이라는 화두를 던졌고 이는 박열의 정신과도 통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체 게바라의 혁명정신과도 일맥상통했다고 볼 수 있다. 가네코는 충분히 만국의 혁명가의 기질을 드러낸 셈이다. 박치대는 앞으로 남은 일은 가네코 후미코도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힘쓰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민족과 국가의 틀을 벗어나 인류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힘겹게 싸웠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박치대의 생각이었다. 당시 식민지하에서 민족성을 통제하는 정치적, 사회적 억압적인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 항일운동의 한 몫을 담당했던 아나키스트들은 해방 뒤 분단체제가 되면서 이승만과 김일성, 두 정권 모두에서 배척받았던 인물들이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박열이다. 1949년 9월에 박열은 일본에서의 모든 활동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6.25전쟁이 일어나게 되자 박열은 북으로 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인간의 참 자유를 찾자는 이상으로 일생을 바쳐 싸웠던 그의 높은 뜻도 남북 분단의 벽에 가려져 빛을 잃어 갔다. 사반세기의 세월 속에 이름조차 잊혀져가던 박열이 1974년 1월 17일 사망했다. 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회장직을 수행하던 중 죽음을 맞은 박열은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묻히게 되었다. 명동 YMCA 대강당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이은상의 추도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 우리들이 의사의 영전에 추도의 제전을 바치는 것은 한갓 의사의 영혼을 위로해 드리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요, 실로 의사의 정신과 기백과 이상을 계승, 실천할 것을 다시금 다짐하는데 참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의사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민족의 통일 염원과 인류 평화의 큰 목적을 향하여 한 걸음 전진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시옵소서.” 라고 이은상은 절절한 추도사를 낭독했다. 그는 곧바로 복원 되지 못하고 15년의 세월이 더 흘러서 1989년 3. 1절에 가서야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게 되었다. ‘’체 게바라는 인간불행이 불의不義 때문이라고 보았고 간디는 진리(생명의 실상)에 대한 무지無知 때문이라고 보았다. ‘체 게바라’는 불의의 대상을 공격 제거의 대상으로 삼았고, 간디는 무지와 탐욕의 병을 치유하여 변화하고 공존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가네코는 목적을 위해 분노, 증오, 음모, 술수가 정당하다고 보았다. 국가나 인종이 전혀 문제될 게 없었던 셈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가네코는 박열보다 더 진일보한 생각을 가진 여성이었다. 가네코를 독립유공자로 추대하려는 박치대의 생각이 미처 열매를 맺기도 전에 급작스러운 사망을 접한 나로서는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의 명복을 다시 빈다.(위초하. 시인)  
16 하마터면 말할 뻔 했다 외1편/조재학
편집자
4168 2010-06-12
10.07월 2호 시 하마터면 말할 뻔 했다 달이 돋았다 황금실로 수놓은 달이 검푸른 하늘에 돋았다 저 병풍 한 폭 그대에게 보내도 좋겠다 꽃이 진다 꽃진 자리가 붉다 바람의 울음은 거세고 우는 소리 천지에 가득한데 누군가 슬픔처럼 노란 달맞이꽃 속으로 가고 있다 맞장구 치다 머리카락 올올이 일어서고 겉옷이 깃발처럼 나부끼는 날 강바람을 안고 선 나무에 시화(詩畵)를 걸었다 ‘꽃이 필 때부터 꽃이 질 때까지’ 란 부제를 단 입간판도 세우고 ‘벚꽃 시화전’ 이라 현수막도 걸었다 시화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어깨 춤 들썩인다 흘끔거리며 가는 사람 아예 서서 읽어보는 사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어린 꽃송이 몇 피워 든 가지가 덩달아 몸을 흔든다 벚꽃 피는 때에 벚꽃을 보는 건 벚꽃들의 시화전을 보는 것 한 꿈이 다른 꿈에게 제 꿈을 보여 주는 것 맞장구 치듯 봄이 불어와 머리카락 올올이 일어서게 하고 마음을 펄럭이게 하는 것 오고 가는 것들 다 즐거움으로 펄럭이게 하는 것 생각느니 저 꽃나무 아래 정자 하나 짓고 ‘시와 꽃이 있는 주막’이라 이름하고 밤이 흥건히 젖도록 사는 일 ** 조재학 jaek5621@hanmail.net 시집 <굴참나무의 사랑이야기><강 저 너머>  
15 김영하의 [오빠가 돌아왔다} [2]
이홍사
7843 2010-06-11
내가 좋아하는 소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오빠가 돌아왔다}의 전문을 찾을 수가 없네요 하여 작품은 싣지 못하고 (제 독수리 타이핑 속도가 늦은 관계로) 김영하 소설 [오빠가 돌아왔다]의 서평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1인칭 전지적시점으로 씌어진 화자는 여중생이다 썩 괜찮은(?) 오빠가 주정뱅이 아버지를 밧줄로 묶어놓고 집을 나간지 3년만에 애인을 하나 꿰차고 돌아와 속칭 콩가루 집안에 살아가는 과정을 리얼하게 그려냈다. 아버지는 애인을 아들을 성매매범으로 고발하고 그러는 아버지를 아들은 들어가서 줘패고...... 함바식당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어머니가 아들이 들고 들어온 애인을 자신이 하는 식당으로 데려가 일을 시키고 삼류층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을 역동적인 상상력과 유려한 문체로 군더더기 없는 서사를 풍자와 해학적으로 그린 소설인데 이 웹진에 들어오는 분들이라면 안 읽은 독자가 없으리라 생각하며 제가 심심할 적이면 문체와 서사과정의 전환을 필사 해보고 싶을 정도로 잘 읽은 소설이다 전문을 싣지 못하는 점을 아쉽게 생각하며 혹 못 읽은 독자가 있다면 찾아서 읽어보시길 바라며 내가 좋아하는 소설에 숙제를 간단히 마침니다 사실 요즘 제 개인적인 사정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을 뒤적일 실정이 아님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다음에는 정성과 각고의 노력이 보이는 평을 소개할 것을 약속합니다  
14 꽃무릇 외1편/정숙
편집자
4648 2010-06-11
10.07월 2호 시 꽃무릇 -------아름다운 법문 58 주황빛 나비 몇 마리 모여 잎도 없이 바람에 흔들리더니 어제 저녁 비바람에 빈 허물만 꽃 대궁을 지키고 있다 보름 달빛은 보이지 않고 소쩍새 울음만 ‘꺼이꺼이’ 하룻밤 새 날아가 버린 그 꽃나비의 행방을 누구에게 물어보고 있는가 매듭을 위해 ---아름다운 법문 54 사람의 매듭은 무덤이라고 어느 노시인이 말했던가 더듬더듬 꽃 한 송이 피워가면서 조심스레 세상을 건너가는 나팔꽃들을 보면 식물들의 매듭은 꽃이 아닐까 고단한 삶, 잠시 한 숨 쉬면서 간절히 하늘 한번 쳐다보다가 매듭 하나 지은 뒤 건너가고 사람도 콧김 열불나게 살아가면서 세월의 마디마다 곱든 밉든 꽃을 피우기도 하는데 저 나팔꽃 송이처럼 아름다운 매듭 묶으며 짧은 한 생을 길게 늘이며 출렁이는 흔들다리 건너는 이도 있던데 시인 [정 숙 ] (jungsook48@hanmail.net) 경산 자인 출생 경북대 문리대 국어 국문학과 졸업 1991년 계간지<시와시학>으로 신인상 등단. <신처용가> <위기의 꽃> <불의 눈빛> <영상시집><바람다비제> 시집<DVD> 출간 우수도서선정 [바람다비제] 현대시 박물관에서 제정한 제1회 ‘님’ 우수상 수상 대구문학아카데미 현대시 창작반 강의 인터넷 포엠토피아 '포엠스쿨 정 숙반 강의' http://poetjs48.ivyro.net/ 010-9992-3317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궁전맨션 2동 406호 [706-010]  
13 (독자 투고)억새2 외2편/이성준
편집자
3985 2010-06-10
10.07월 2호 시 억새 2 백제 여인네의 하얀 치마가 바람이 날린다 정복자 당나라 놈들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짜릿한 죽음을 택한 백제 여인들의 하얀 영혼이 가을을 수놓는다 시간이 갈수록 되살아나는 치욕 패망한 나라의 역사는 어차피 쉰 밥그릇 곰팡이가 슬도록 내버려둔다지만 남편 잃고 자식 잃고 아비 잃고…… 남자의 씨를 말려버린 전쟁에서 정복자의 먼 말발굽소리보다 먼저 백마강에 몸을 던진 하얀 영혼들이 삼천궁녀, 의자왕의 눈요깃감으로 날조된다 해도 억울할 것도 없지만 천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침묵의 역사가 서러워 진실을 말한다 해도 곧이듣지 않을 현실이 무서워 드넓은 가을 하늘을 향해 하얀 웃음 흘리며 소복(素服)의 춤을 춘다 죽은 역사를 추모하기 위해 패망한 백제가 바람 속에서 일어선다 안경을 닦으며 세상은 늘 그 자리에 있었는데…… 변덕스런 다초점 안경의 농간에 흔들리기 시작한 세상은 멀어져갔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만큼이나 눈 감을 줄 모르는 안경알은 먼지며 빗물이며 손때까지 묻어 개기름 번들거리는 얼굴만큼이나 탄력을 잃고 세상은 늘 그 자리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멀리한 세상은 흐린 기억만큼이나 아득하기만 하여 폐허의 잡초들 속에 파묻혀버렸다 이제 뼈마저 찾을 수 없는 무덤 속 주인 없는 영혼처럼 하얗게 늙어가는 안경닦이를 찾아내어 아직은 마르지 않은 찌든 입김으로나마 세상을 향해 소리 없는 대화를 시작한다 안경을 닦으며 세상을 향한 마지막 나의 창 안경이라도 깨끗이 닦을밖에 안경알이 맑아질수록 흐려 보이는 세상일지라도 억새 3 하얀 평복으로 뒤주 속에 갇힌 사도세자의 영혼 아버지 영조와 장인 홍봉한의 눈을 피해 수원성 마른 들판에 섰다 아내에게마저 배반당하고 물 한 모금 없이 한여름 여드레를 견딘 강인함으로 인왕산을 바라보며 하얗게 웃는다 14년 동안 눈물에 잠긴 관 속에서 빌고 빌었던 아들이 드디어 용상에 오르고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 말 한마디에 하얗게 얼었던 노론들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작당을 하며 웃고 있으리니 아들마저 재위 24년만에 독살당한 250년의 눈 먼 세월이 그렇게 흘러가는가 죽은 사람에게 인자하고 넉넉하듯 역사도 후하게 장사지내 버릴 것인가 자신의 흰 옷 위에 새 역사를 쓰라고 사도세자의 하얀 영혼이 수원성 남문 위에 억새로 깃발로 소리친다 이성준 1962년 제주 조천 출생 시인, 문학박사 2006년에 시와창작 신인상(시부분)을 수상했고 시집 <억새의 노래>, <못난 아비의 노래>를 출간했고 작가회의 회원  
12 시골뜨기 부처 [1]
관리자
4820 2010-06-08
내가 좋아하는 소설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잘나가는 인생을 살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몇 가지 있다. 개중 하나가 이른바 소수자로 산다는 것, 그들이 처한 삶이다. 어딜 가나 ‘일반’에 소속되는 이들도 대강 감은 잡을 수 있으실 거다. 소수자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이른바 동성애자, 장애자, 불법체류자, 외모가 너무 받쳐주지 않는 여자 혹은 키가 너무 작은 남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그 삶의 이면이 어떨지. 「시골뜨기 부처」는 인도 이민2세인 영국 청년의 성장소설인데 소수자의 삶을 밀도 있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을 낸 출판사(열음사)에서 근무했던 모씨는, ‘참 재미있고 괜찮은 책인데 너무 안 팔려서 창고에 한가득 쌓여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출판편집부에서 거론하는 참으로 아까운 책이라는 게 바로 이런 책을 두고 하는 말이겠다. 작가 하니프 쿠레이시(Hanif Kureishi)도 이민2세다. 1954년 파키스탄 이주민을 부모로 영국에서 태어나 런던의 킹스 칼리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동성 간의 사랑을 통해 이민족 간의 벽을 허무는 장면을 연출했던 영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1984)의 시나리오 작가이다.「시골뜨기 부처」가 전하는 메시지 역시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 이름은 카림 아미르. 아버지는 인도 귀족이고 어머니는 영국 중산층 출신이다. 계층과 문화가 다른 두 사람을 부모로 태어난 카림의 시점으로 소설은 진행된다. 귀족 출신인 아버지는 현실적으로 지극히 무능한데, 에바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에바에겐 찰리라는 아들이 있으며 카림은 잘생긴 찰리와의 관계에서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인간관계가 복잡하게 얽힌다. 성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사람과 사회를 접하면서 혼란을 느끼던 카림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지 보여주는 소설인데, 읽다보면 스스로의 정체성을 되짚어보게 될 거라 본다. 결혼과 취업으로 이주민이 늘어나는 이 시대를 비추고 있다는 점에서 일독을 권한다. <책 속 밑줄 긋기> 나는 재미있는 사람과 착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왜 그런 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을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사람들이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재미있는 부류의 사람들은 남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과 같이 있으면 무미건조하거나 반복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모든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에바가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즉 자밀라를 어떻게 생각하고, 그녀가 샹제와 결혼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에바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에바는 분명히 속물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엇을 보거나 어떤 음악을 듣거나 어떤 장소에 가게 되면, 에바가 어떤 방식으로 그 대상을 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기 전까지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하나의 관점에서 사물을 인식하고, 그 사이의 상관관계를 찾아냈다. 착하기는 하지만 재미없는 사람에게 어떤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묻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처럼 착하고 유순한 사람들은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종국에 가서 모든 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에바처럼 재미있는 사람이다. 아버지를 차지한 것처럼 말이다.(본문 159쪽) (안지숙)  
11 양말에 구멍이 났다 외 1편/박찬선
관리자
4532 2010-06-01
10.06월 창간호 시 양말에 구멍이 났다  지렁이가 땅속에 살듯  늘 밑에서만 살았다. 옥죄는 가죽이나 질긴 고무 고얀 화학재질의 깁 속에 갇혀  영어囹圄의 세월을 보냈다. 잘못 내닫은 발길의 끝  닭똥냄새는 안개처럼 자욱하고  벗겨져 내동댕이처졌다. 꽈배기처럼 뒤틀려 시원한 날 몇 날이나 있었던가  낮은 대로 임하라는 그 분의 말씀을  한 시도 잊은 적이 없는데 눌리고 짓밟히면서도  보자기로 감싸듯 지켜왔는데  양말에 구멍이 났다.  이제야 맨살이 보였다. 동그랗게 하늘이 보였다.      길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비는 오래된 사랑을 불러온다. 푸른 잎들 사이로 분홍빛 꽃잎을 내미는 봉선화처럼 소리 없이 지난날들이 피어난다.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달렸던 융단 같은 풀밭 길 싸락눈이 살짝 깔린 초겨울,산촌의 찻집에서 마신 커피향 늦은 밤 잘 익은 감빛 포장마차의 소주 발목을 덮었던 산 속의 눈길 어느 날 문득 생활에 눌려 두고 온 우산을 생각하고 유월에 피는 선홍빛 석류꽃에 눈을 멈춘다. 생각이 머문다는 것은 저울추가 기울듯 가벼운 오늘이 어디론가 쏠리고 있다는 것 우리는 잊고 벗어나기 위해 아니 그리움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적한 옛길을 간다. 바닷가에서 온 젊은 소설가를 만난 산 속 주막 붉은 햇살을 얼굴에 받으며 겨울나무들이 기도하듯 팔 벌려 서 있는 산길을 연다. 보호수로 지정된 묵은 나무가 선 마을이나 오랜 침묵의 물이 담긴 저수지가 있는 골짜기를 돌아 빗속에 회상의 길을 간다. 눈에 남았던 석상은 간 곳이 없고 이정표도 세월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길은 지난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묵은 사랑의 그리움만 남길 뿐이다. 박찬선  sun631@paran.com 시집<돌담쌓기><상주>외 다수     
10 작가지망생
관리자
3765 2010-06-01
주목! 이 문학단체 작가지망생 카페는 99년 12월 26일에 창설된 이후,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과 만남의 장으로써의 역할에 충실해왔습니다. 2010년 현재, 10여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회원은 꾸준히 늘어 16000명을 넘어서게 되었고, 여전히 많은 분들이 카페에 가입을 하고 계신 상태입니다. 카페는 기본적으로 순수문학을 공부하고 창작하는 과정을 돕는 것을 카페의 주된 활동 방향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작가를 지망하는 분들만 카페에 가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카페에는 문학을 창작하고자하는 분들을 위한 어드바이스 및 정보공유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질문 & 답변 게시판과, 각종 문학 공모전 소식과 문학관련 소식을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공모전 & 문학소식, 서로서로 좋은 책을 소개하기위한 추천도서 게시판을 운영하고 있고, 이외에도 좀 더 본격적으로 본인의 습작을 게재하고 어드바이스를 받을 수 있는 시, 소설, 수필, 시나리오 등의 게시판과 좀 더 심화된 토론을 갈무리하여 게재하기위한 합평 게시판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온라인 토론만으로는 분석이 어렵다고 생각되는 글들은 오프라인 합평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순수문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바른 언어습관을 습득하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에, 대부분의 세대문학카페와는 달리 작가지망생 카페에서는 카페 내 통신체 및 이모티콘 사용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는 것이 카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언어는 변하는 것이고,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언어란 생활의 기능적인 편리성이 아닌 그 고유의 음운체계를 기준으로 변화할 때 변용이 아닌 발전적인 흐름을 띠게 된다는 것이 카페에서 생각하는 언어의 바람직한 발전 방향입니다. 더불어 순수문학을 통한 정식 등단을 꿈꾸는 지망생이라면 올바른 맞춤법과 언어습관은 당연히 갖춰야할 부분일 것입니다. 카페에서 이모티콘과 통신체를 규제하는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이런 규제들로 인해 카페가 다소 엄격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카페가 꼭 반드시 지켜야할 규칙에 의해서만 운영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카페를 만들어 온 것은 회원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회원 분들의 의견에 의해 카페는 계속해서 끊임없이 변화해왔고, 그 변화는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십 수 년이 지났음에도 카페가 여전히 활기차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카페라는 인터넷 공간을 사랑하고 끊임없이 비판의식을 가지고 카페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기위해 노력하신 여러 회원 분들의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카페의 규칙과 규정들은 회원 분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정립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운영방침은 얼마든지 변화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본인의 습작을 게재하고 평가를 바라면서 타인의 소설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회원이나 스스로에게 필요한 지식이나 자료에 대한 도움만을 기대하고 카페에 가입하는 회원은 카페가 생긴 이래, 어떤 사람도 반갑게 여긴 적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카페는 문학을 공유하기 위한 공간이고, 문학의 공유란 단지 자신을 위한 글을 쓰는 것이나 스스로에게 필요한 것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만 아니라면, 카페는 누구나 부담 없이 들러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주소: http://cafe.daum.net/write  
9 배준표 <내 안의 또 다른 나>
관리자
4616 2010-05-31
<내 안의 또 다른 나> 배준표 , 작은 씨앗 2010.3.24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삶을 사는 ‘나’인가. 남이 보는 ‘나’. 남에게 보이기 위해 사는 ‘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나’로 살아가지 않을런지.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떠나는 심리 치유 에세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네 번의 이혼, 동거를 반복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며 격게 되었던 유년기의 심적 고통, 극심한 정신적 질환을 겪으며 잃어버린 십대 시절, 정신질환 치료기간, 정신질환을 자가 치료 후 꿈을 가지고 이스라엘로 떠난 배경, 그리고 심각한 식이장애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해 있었던 아내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진실한 사랑을 찾아 가는…’이라고 작가의 말에서 하고 있다. 작가는 어릴 때의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학교의 퇴학과 자퇴, 가출, 자살 기도, 정신 치료 등을 겪으며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 무엇이 ‘나’를 이렇게 살도록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그래서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글로 적는다. 결국 ‘나’는 ‘… 세상의 아름다운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만을 보는데 주력을 한다는 것, 감정을 스스로 억압하며 내 마음의 요구보다는 남들의 비위를 맞추며 산다는 것, 남들 앞에서 보여질 내 모습에 지나치게 예민하다는 것…’ 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하여 작가는 자신의 문제를 이기기 위해 거꾸로 살기로 한다. ‘… 이제는 전과는 반대로 세상의 아름다운 면만을 보려고 노력하고, 내 감정을 스스로 존중하며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남들의 눈치보다는 내 마음의 요구를 더욱 들어주고, 남들 앞에서 보여질 나를 생각하기 보다는 내가 나를 스스로 어떻게 보느냐에 생각을 집중하고…’ 작가는 이렇게 하여 서서히 자신의 정신질환을 극복한다. 작가가 자신의 병을 극복한 것은 결국 ‘나’를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남이 나를 보는 ‘나’가 아닌 원래의 ‘나’를 보고 존중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남이 보는 ‘나’는 어떤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남들과 비교해 자기를 비하하고 자학하는, 그래서 탐욕심에 가득찬, 그런 ‘나’가 아니겠는가. 그럼 원래의 ‘나’는 무엇인가. 때어날 때의 때가 묻지 않은 그 순진무구의 인간, 자신의 존재감을 존중하는,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 자체가 극락이요 천국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인간은 살아가면서 남과 비교하고 사회의 물질적 욕망에 빠져 원래의 ‘나’를 잃어버리고 남이 보이는 ‘나’, 오직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다른 사람의 관점에 좌우되는, 그런 ‘나’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원래의 ‘나’를 회복해야한다. 그래야 자신을 존중하고 남을 존중한다. 흉악범들을 봐도 불우한 환경 때문에 성격이 비뚤어지고 사회에 적개심을 품어 끔직한 일을 저지른다. 모두가 잘못된 환경(가정환경, 사회환경)으로 인해 원래의 ‘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에세이라서 인간의 심리를 심층적으로 파헤치기 못 한 점은 아쉽다. 프로이드의 이드 자아, 초자아 론이나, 융의 그림자 이론을 바탕으로 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그런 이론 없이 오직 원래의 ‘나’를 찾은 작가는 위대하고 그만큼 이 책은 유익하다. 고창근 sgamm@hanmail.net 소설집 <소도(蘇塗)>  
8 타인의 얼굴/한수산
관리자
5295 2010-05-31
내가 좋아하는 소설 한수산의 <타인의 얼굴>은 1991년 현대문학상 수상작품으로 죽음을 통해 살아있는 삶을 성찰하는 소설이다. 대학교 때의 은사의 부음 소식을 들으며 소설은 시작된다. 일본에 살고 있는 ‘나’혹은 ‘그’ (시점이 ‘그’와 ‘나’로 혼용된다.)는 스승의 부음 소식을 듣고 그동안의 스승에 대한 회상에 빠진다. 스승은 암에 걸렸다는 모교수의 전화를 받고 병동에 들려 스승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본다. -이미 노오랗게 물들어 있는 선생님의 눈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병이 저렇게 만든 것일까. 검고 컸던 선생님의 눈. 우리는 이다지도 무력한 가. 우리가 무엇을 이룩하겠다고. 무엇을 남기겠다고 매일을 고단하게 살았단 말인가.- 라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스승은, “끊임없이 싸워. 정상적인 자아와 병든 자아가 이십사 시간을 싸워. 이게 나야. 내가, 두 개의 내가 살아 있어. 내가 나를, 정상적인 자아가 병든 자아를 두 시간만 재워놓자. 그러면서 잠이 들어. 여덟 시에 깨우자. 그러면서 살아. 병든 자아를 달래서 약을 먹이고, 병든 자아에게 사정해 가며 물도 몇 모금 먹고 ” 라고 말한다. 부음 소식을 들은 나는 결국, -아니, 가지 않겠어. 병든 자아와 정상적인 자아가 아냐. 수없이 많은 내가 내 속에 있어. 그의 죽음을 지켜보며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자아와 싸웠던가. 때로는 두려웠던 나. 때로는 슬펐던 나. 그의 무너져가는 몸을 보며, 건강에 조심해야지 하고 쥐가 천장을 갉아대듯 속삭인 나도 있었어. 라고 생각하며 문상을 가지 않는다. 한수산 1946년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하남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가 근무지를 옮길 때마다 이사를 다녀 어린 시절 한곳에 오래 머물러 살지 못하였다. 춘천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6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고,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4월의 끝》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1973년에는 《한국일보》 장편소설 현상공모에 《해빙기의 아침》이 가작으로 입선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소설 《해빙기의 아침》(1973), 《부초》(1977), 《4월의 끝》(1978), 《바다로 간 목마》(1978), 《욕망의 거리》(1981), 《밤에서 밤으로》(1984), 《거리의 악사》(1986), 《모래 위의 집》(1991), 《벚꽃도 사쿠라도 봄이면 핀다》(1995), 《말 탄 자는 지나가다》(1998) 등과 수필집 《젊은 나그네》(1978), 《저녁에는 그대여 아침을 꿈꾸어라》(1986), 《이 세상의 모든 아침》(1996), 산문집 《단순하게 조금 느리게》(2000) 등이 있다. 타인의 얼굴 차들은 밤에만 와서 섰다. 자디잔 자갈이 깔린 그 주차장으로 차들은 밤이면 쥐처럼 모여 들었다. 주인은 차의 문을 잠그고 잠을 자러 갔다. 낮의 주차장은 언제나 비어 있었다. 백여 대의 차가 들어설 공간에 남아 있는 것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였다. 아침이면 그들은, 식후의 담배를 피워 물고 마치 남의 차를 몰래 훔쳐 달아나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비가 내린다. 텅 빈 주차장에 빗발이 쏟아지고 있었다. 주차장 건너편의 숲은 어두웠다. 비에 젖고 있는 검은 숲은 음모 같았다. 가야 하지 않을까.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 말에 대답을 할 사람을 그는 자신의 속에 가지고 있지 못했다. 공항까지 두 시간, 거기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두 시간, 서울은 거기에 있었다. 서울은 거리가 아니라 시간의 저편에 있었다. 빗물이 주차장에 남아 있는 차들의 차체를 번들거리게 하며 흘러내렸다. 주차장 입구의 자동판매기도 비에 젖은 모습이다. 그 위에 대형 광고판의 여자도 비를 맞고 있다. 예약을 하자. 그의 안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속삭였다. 비를 맞고 있는 광고판 속의 여자를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정확하게 석 달이야. 이건 지켜진 약속이야. 너는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 여기까지 왔었다. 이제 서울로 돌아가서 무엇을 어쩌겠다는 것이냐. 전화가 온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빗소리에 섞여서 그는 아내가 받는 전화소리를 들었었다. 최명하 교수가 돌아가셨대요. 아내가 와서 그 말을 전했을 때, 그는 아 하고 짧게 비명을 질렀다. 처음에 그것은 놀라움 때문이었다. 갑작스런 소식이 그의 이제 막 잠이 깨려는 의식을 흔들어 놓았다. 놀라움은 슬픔으로 변했다가 다시 놀아움이 되었다. 석 달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석 달로 예견되었던 삶이었다. 최 교수님의 남은 시간은.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정확했다. 서울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하지 못한 채 그는 일어나서 욕실로 갔고, 머리를 감았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아침을 먹었고,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는 숲과 그 앞의 텅 빈 주차장을 내다보며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담배연기를 뱉어내면서, 이것으로 나는 내 예정된 삶에서 오 분쯤 빨리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창문에 커튼을 치고 돌아선 그는 천천히 책상 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책들을 정리해서 책꽂이의 제자리에 꽂았고 연필들을 연필꽂이에 꽂았고 종이들을 가지런히 해서 한옆에 밀어놓았으며 재떨이를 가져다 물기를 닦았다. 그때 그의 안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이건 죽음이군. 그에게 물었다. "무엇이." "이 책상. 깨끗이 정리된 책상. 이건 죽음이야." "그게 삶이지. 정리된 책상에는 네가 없어. 네가 걷는 시간도 거기에는 가라앉아 있을 뿐이야. 그게 죽음이야." "정리된 삶이 죽음이라니. 죽음이란 삶의 진행에서, 그 움직임이 멈추는 거야. 아무도 그 무엇도 정리하지 못해." 그는 이마를 짚으며, 서울에 갈 때 있을 수 있는 일들을 헤아려 보았다. 조문 눈물 지나가버린 날들의 아쉬움.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들. 자기에게 맞게 변형된 추억을 하나씩 꺼내들고 나누는 속삭임들. 숨길 수 없이, 그 얼굴과 얼굴들에 드러나 기름처럼 번져가고 있을 안도감들. 아,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나는 아직 죽지 않았거든. 그 안의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죽음은 우편물 집배원이 아니다. 주소와 이름을 들고 찾아오지 않는다. 예정된 순서, 치러야 할 고통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누구나 다 그렇다. 깨끗이 정리된 책상을 손바닥으로 짚고 그는 일어섰다. 그는 그때 서울에는 가지 않을 것이며 조의 전보를 치는 일마저도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주 큰 것이, 그에게서 사라져갔다. 따뜻했던 움집 같은 것, 새들이 날아가 웅크리는 것 같은 것이. 이제 내가 다시 내 젊은 날로 돌아갈 수 없듯이, 나는 다시 그런 사람을 내 시간 안에서 갖지 못하리라. 돌아서서 그는 집을 나서기 위해 현관으로 갔다. 세 개의 우산이 거기 있었다. 물방울 무늬가 있는 푸른 우산, 검정 우산, 그리고 비닐우산이었다. 그는 어떤 우산을 쓸까 잠시 생각했다. 바람이 불고 있으니까 비닐우산을 써서는 안 되겠지. 구두를 신으며 그는 집안을 돌아보았다. 그는 거기에서 자신이 놓아두고 나가는 다른 자기를 보았다. 그래, 잘했어. 바람이 부는 날은 비닐우산을 쓰지말고, 길을 건널 때는 조심하고, 이런 날은 누구와도 약속 같은 건 안하는 게 좋아. 그가 다가와 그의 등을 쳤다. 보라구. 이 세상은 여전히 처녀지야.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어. 수도꼭지를 왼쪽으로 돌리면 물이 나오는 것도 여전하다구. 태초의 그날처럼 땅 위에는 삶이 가득하다는 걸 잊지 마. 하루하루는 아침 우유처럼 싱싱해. 영혼의 빛나는 발견 혹은 존재의 형식에 대한 이해, 그런 말들이 내 젊은날의 노트에는 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 있어야 하는가를 나는 존재의 형식이라는 말로 썻으리라.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그 영혼의 걸음걸이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찾고 싶어했으리라. 그 어떤 길목에서 나는 최명하 교수를 만났었다. 그러나 내가 대학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가를 뒤돌아볼 때 나는 언제나 우울했다. 거기에는 물론 나의 불성실도 얼마간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낭비였다고, 대학 사 년이라는 시간을 내가 그렇게 말해버리는 이유는 그 기간 동안 대학의 도움으로 어떤 모습으로든 발전이라는 것을 겪지 못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내가 그때 다른 학생들은 이미 다 떠나버렸을 대학이라는 제도에 대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그렇다, 그것은 낭비였다. 덧없이 시간을 흘려버린, 아니 아무것도 흐르지 않고 머물러 썩어간 정체였다. 그 수렁에서 내가 최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러므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누구나, <애너밸 리>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사랑은 특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특별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모든 사랑은 다 개인에게 특별한 것이고 그러므로 그것은 결국 일반적인 것이거늘. 나는 아직도 그 목소리의 부드러움까지도 잊지 않으며 기억한다. 문과대학 이층에 있던 강의실이었다. 높낮이가 거의 없는, 어느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로 최 교수는 오후 강의를 하고 있었다. " 헤밍웨이는 한 번도 실패를 겪지 않은 작가다. 그러나 토머스 울프는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도전했었다. 위대한 실패라는 면에서 울프는 헤밍웨이보다 위대하다. 이 말은 동시대의 작가 가운데서 누가 위대한 미국 작가냐는 말에 대한 윌리엄 포크너의 대답이었다." 미국 문학사 시간이었다. 미국의 작가들 가운데는 유난히 알콜 중독이 많은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런 말을 곁들이다가 최 교수는 말했었다. "나는 이 세상을 둘로 나누라면 토머스 울프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고 싶다." 그 말은 나에게 하나의 영혼의 울림으로 다가왔었다. 흑판과 책상과 교수라는 그것만으로 대학교육이 시작되고 끝이 나던 그 무렵의 학교에서, 나는 그만큼 목말라 있었는지도 모른다. 토머스 울프라는 그물을 들고, 인류를 둘로 나누다니. 낭만주의 가 영국에서 어떻게 태동했는가를 들려주던 시간도 내 기억속에는 살아 있다. 꿀벌이 잉잉거리는 어느 봄날의 들판처럼 그것은 아직도 나에게 푸르다. 낭만이라니. 우리가 흔히 한자어를 쓸 때의 그 낭만이라는 말. 어딘가 미숙하고 비합리적이며 정서에 얽매이고 비과학적이며 충동적인 행위의 냄새가 그 한자에는 있다. 그는 로맨티시즘의 건축을 이야기 했고 신비주의를 말했고 반합리성과 반고전주의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워즈워드의 시는 우리는 읽었다. 그 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최 교수는 흑판에 Plain Living, High Thinking이라고 썻다. 그것은, 공자였고 맹자였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산 영어참고서 첫 장에, 소년들이여 희망을 가져라 하고 쓰여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 가. 평범한 생활, 고아한 사고. 아니면 생활은 평범하게 이상은 드높게 . 그런 말로 옮겨질 그런 경구를, 그 워즈워드의 말을 나는 하품을 하며 바라보았다. 그것은 입시생이 책상 앞에 <인내>라고 써붙이거나 시골에서 통신강좌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누군가가 <성공>이라고 써붙이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플레인 리빙. 하이 싱킹. 강의를 듣고 있는 어떤 녀석이 일기책 앞장에 저 말을 적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직도 일기라는 것을 적는 녀석이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강의실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일기를 매일 밤 적으며 보낼 녀석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이 말을, 내 동생의 모자를 통해서 배웠다." 갑작스런 최 교수의 말이 나에게 날아와 낚싯바늘처럼 꽂혔다. 워즈워드를 동생의 모자를 통해서 배우다니. "군에 가 있던 동생이 첫 휴가를 나왔을 때였다. 그때는 다 가난할 때였다. 나라도 가난했고 군대도 가난했다." 다 가난했다는 최 교수의 말에 나는 동의했다. 나도 가난했었고 우리 아버지도 가난했었다. 내 어린시절의 동네사람들도 다 가난했었다. 그때는 워즈워드도 가난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아는 학생은 알겠지만, 이라는 것이 있었다. 사람을 긁게 만드는 그 이라는 작은 벌레 말이다. DDT라는 것이 그 이를 죽이기 위해 요즘의 항생제만큼이나 유용한 약품이었을 시절의 이야기다. 군대에서 휴가를 온 동생에게 목욕을 하라고 옷을 갈아입히다 보니, 그 애의 옷이 옷이 아니었어. 속옷을 보니 거의 실밥자국이 보이지 않게 이가 가득하지 않겠냐. 이가 이렇게 꾄 옷을 입고 지내야 할 정도의생활이라면, 그 애의 군대생활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에 생각이 미치자 거의 분노 같은 게 치밀어 오르는 거였다. 차마 빨아서 입히기에도 어렵게 때묻고 이투성이인 속옷을 버리고 나서, 나는 그 애가 쓰고 온 모자를 들여다보았다. 까맣게 대가 묻은 그 모자 안쪽에 희미하게 써 있는 말이 있었다. 그것이 이 말, 플레인 리빙, 하이 싱킹이었다." 그리고 나서 최교수는 강의를 끝냈다. 나는 가슴속을 헤집고 무언가 덩어리 같은 것이 목을 아프게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꼇다. 이와 세상을 나누는 이분법으로 나에게 문학을 가르친 사람. 나무도 날아다닌다. 그날 아침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창 밖에서 너울거리고 있는 오동나무잎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침햇빛이 그 위에 얹혀서 빛나고 있었는데 그 빛은 가을날처럼 가벼워 보였다. "네, 그렇습니다. 접니다." 낯선 목소리에 그렇게 대답을 하면서 그는 그 오동나무가 이제 여름을 지나고나면 자신의키만큼은 자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동나무는 풀처럼 자랐었다. 처음 그 나무가 집 마당으로 날아왔을 때,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었다. 모든 풀과 나무는 흙에서 자랐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이 풀이 아니면 나무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무엇에 의해서 옮겨 심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무릎 높이로 자라오른 나무가 잎을 틔우기 시작했을 때에야 그는 그것이 오동나무인 줄 알았고, 오동나무의 열매도 민들레꽃처럼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가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그것을 자르거나 뽑아내지 않고 기르리라 다짐했었다. 그런 결심의 바닥에는, 나무도 날아다니는구나 하는 작은 놀라움이 있었다. "절 아실까 모르겠어요. 대학에서 중급영어를 가르치던 박인희예요." 그녀가 그가 다녔던 대학과 자신이 그곳 대학의 교수라면서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그녀가 서른은 넘었을 것이며, 사회생활이라고 흔히 말하는 집안일이 아닌 세상 밖의 일에 꽤 단련되어 있으며, 자신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그는 느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저물어 가는 봄날, 이제 이글거리며 다가올 여름날을 준비하며 나뭇잎 위에서 너울거리고 있는 햇빛이 갑자기 자디잔 빛의 조각들이 되어 부서져내렸다. 갑자기 모든 빛이 자디잘게 부서져서 떨어져내리고 그 자리가 아무런 색깔도 부피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으로 남는 것을 그는 보았다. "아 이제 생가나세요? 네, 저예요. 그동안 소식은 듣고 있었어요. 전 남편 따라 외국에 나갔다 오고 그러느라 주욱 학교에만 있지 못했어요. 실은 알려드릴 일이 있어서 전화했는데 이런 얘기를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최명하 교수님 아시지요? 물론 잘 아시는 사이인 거야 나도 알지만요 혹 교수님 소식 듣고 계시나 모르겠네요." 박인희 교수의 목소리로 듣는 최명하라는 이름이 갑자기 그의 가슴속에서 징소리같이 두웅하고 울렸다. 비로소 하나씩 선명해지는 것이 있었다. 그랬다, 박인희 교수는 모교의 교수였고 그는 한 학기 그녀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중급영어라는 교과목의 그 강좌는 영미 작가들의 단편을 읽는 시간이었다. 그녀의 남편이 외교관이었다는 것, 강의를 하던 무렵의 그녀는 매우 젊었다는 것, 그리고 몇 번인가 최명하 교수가 있는 자리에서 만난 일이 있지 않았던가 하는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최명하. 그는 그 이름을 입속으로 되뇌며 물었다. "무슨 소식인가요?" "그러셨군요. 모르시지 않나 생각했어요." 최명하라는 이름. 따뜻하게 아주 따뜻하게 달구어진 돌처럼 언제나 가슴속에 포개져 있던 이름. 그러나 그는 그분을 만난 지 또 해를 넘기고 있었다. "입원하신 건 아시지요?" "입원을 하셨습니까? 언제요?" 그렇게 해서 박 교수는 그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지난해에도 입원을 했었고 큰 수술을 받았으며. 그동안 많이 아프셨다는 이야기들을 그녀는 그가 알고 있지 못하다는 걸 확인해가는 방법으로 그에게 알려 주었다. "수술하신거 모르시죠? 지난해 입원하셨던 거 모르시죠?" 그녀가 말했다. "오늘부터 항암치료에 들어가세요." "항암 이라면?" "네. 지난해 받으신 수술이 암이셨어요." 갑자기 방안의 무엇인가가 솨아 소리를 내며 그의 머리와 어깨에 쏟아져내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 모든 것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선생님을 스쳐갔구나. 아니다. 그 모든 것을 모른 채 나는 어딘가로 도망쳐 있었구나. 이제 창 밖에는 햇빛이 없었다. 그것은 다만 희고 텅 빈 공간일 뿐이었다. "오늘부터 항암치료를 들어가시는데, 교수님이 참 보고 싶어하세요. 어제 저녁 병원엘 갔는데도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다른 분들이 소식을 알리겠지 하다가 전화하는 거예요." 차갑고 투명한 얼음 하나가 그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지난달이었다. 그는 왜 내가 이글을 지금 쓰고 있나 하는 절박함에 의구심을 숨기지 못하면서 최명하 교수에 대한 글을 썼었다. 그것은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써나가고 있던 연재 에세이였다. 그 산문에서 다루고 있는 시간의 순서로도, 그가 가지고 있던 전체적인 구성으로도 그때는 최명하 교수의 이야기가 나올 순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도 모를 이상한 힘에 이끌리어 두 회에 걸쳐 최 교수의 이야기를 썼었다. 살아온 이야기가 끝나면 마지막 부분에 가서 그동안 만났던 사람의 이야기를 쓰겠다는 것이 그 산문의 구성이었다. 이제 그 산문은 자신이 자란 자연과 사회라는 환경의 이야기가 끝나고 시간 속에서 그의 날들이 어떻게 굴절되었나를 다루고 있었으므로, 사람의 이야기를 하기에는 아직 몇 회 후가 되어야 했을 텐데도 그는 최명하 교수의 이야기를 썼던 것이다. 그리고 그 두회분의 끝부분이 실린 잡지가 나온 게 십여 일 전이었다. 그걸 가지고, 부끄러움으로 머리를 긁으며라도 선생님을 뵈러 가야지. 그때 내가 드릴 수 있는 말이란,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런 말밖에 더 있으랴. 항암 이라니. 이 소식이 그 스스로도 알 수 없던 절박함에 대한 대답이란 말인가. "시간 있으시면, 한 번 찾아가보세요. 교수님이 좋아할 거예요." 박인희씨의 그런 말이 그에게는 들려오지 않았다. 한 번 찾아간다는 표현이 용납될 수 없는 부피를 가지고 최명하라는 이름으로 그를 내리 눌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가 살아오면서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크고 부드러운 사랑이었기 때문이었다. "병실은요, 신관이에요. 응급실 있는 쪽을 지나서 가면 있는 E동인데 7층이에요."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고 있던 잡지의 표지에 병실 번호를 적었다. 그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바로 가 뵙겠습니다." 창 밖에는 유리관 저편처럼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속에서 나뭇잎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햇빛은 어디로 갔는가. 문득 그는 배반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누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떠오른 말이었다. 무언가 엄청난, 회복될 수 없는 배반이 그에게서 자라 있었다. 나무 하나가 내 뜰에 와 뿌리를 내려 잎을 틔우며 자라듯이 하나의 사랑이 그렇게 왔고 그와 같은 높이와 굵기를 가지면서 배반이라고 뉘우쳐져야 할 나무 하나가 또 그렇게 자랐던 것이 아닌가. 두 개의 나무가 창 밖에서 너울거리는 오동나무 옆에 우뚝우뚝 자리를 잡았다. 그는 아무것도 내다볼 수 없었다. "병명은 뭔가요? 어디가 아프신 건가요?" 나는 물었었다. "암이에요. 췌장암. 그런데 그 주위로까지 번졌다고 해요." 아, 하느님. 나는 누군가라도 부르고 싶었다. 누군가가 가까이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두세 달 전부터 아프시기 시작했어요. 수술 후에는 괜찮으셨죠. 학회에서 세미나도 준비하시고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고통이 시작된 게, 한달 전부터는 진통제를 쓰기 시작할 정도로 심해지셨어요. 수술 끝나고나서 회복이 되시니까 좀 쉬셔야 하는데 무리를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암세포가 임파선으로 번졌다는 얘기에요." 주치의를 만났던 이야기를 박 교수는 알아 들을 수 없는 의학용어를 섞어가며 말했었다. 항암치료라는 게 뭔가. 암은 잘라내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아는 암의 전부였다. "투약을 시작하면 혼수상태가 되기도 하고. 머리카락이 다 빠지는 사람도 있고 그래요. 그걸 이겨내야 되는데 의사 이야기로는 교수님 경우는 오십 대 오십이라고 해요." "못 이겨내시면요? 그건 의사가 아니라 몸이 해내야 할 일 아닙니까." "결국은 몸이 의지죠. 삼 개월이래요. 한계가. 항암치료가 효과가 없을 때 사실 수 있는 건 삼 개월이란 이야기지요. 그러면서도 의사는 오십 대 오십이라고 해요." 그 순간 나는 누군가를 향해서 욕을 퍼붓고 있었다. 이건 게임도 아니다. 이런 식의 반칙이 어디 있느냐. 적어도 그것이 무엇이든, 준비하고 정리하고 치러낼 시간은 주어야 하는 거 아니냐. 세상에는 재기한다는 말 까지도 있지 않느냐. "베토벤 좋아하시는 거 아시죠.? 선생님이." 박 교수가 갑자기 그렇게 물었다. 삼 개월이 남아 있는데, 겨우 삼 개월인데 베토벤이라니. "선생님이 그러세요. 베토벤을 들을 수 있고, 울 수도 있는, 그렇게 맑은 정신으로 죽고 싶다고 말이에요. 선생님도 이젠 자신에 대해서 아시는 거 같아요. 암이라는 건 알리지 않았었거든요, 전번 수술에서도 말이에요." 나는 그를 부를 수 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는 나에게 어떤 무형의 것이었다.그를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사람들의 관계란 대개 일반적이고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다. 일반적이란 거기에 특별한 의미, 그 만남을 위한 어떤 의식적인 자아도 끼어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학생과 선생으로 이루어지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학생인 내가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고 있던 그를 만났다는 데에는 아무런 특수성이 없다. 우연이란 것도 그렇다. 우리의 만남이란 더 없이 흔한 그런 것이었다. 그는 한 학기가 거의 다 지나갈 때까지 나의 얼굴과 이름을 하나로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그만큼 그의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다. 그의 눈만이 아니다. 나는 누구에게나 그랬었다. 나는 그를 교수님이라고 불렀다. 교수님. 그러나 나는 이 호칭에 한번도 개인적인 애정을 가져본 일이 없다. 그것은 하나의 직업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대학사회에서 그것은 때때로 직위로 통용된다. 강사 다음의 조교수 다음의 조교수 다음의 부교수 다음에 있는 대학선생의 자리. 어디서부터 사람들은 그의 직업과 인격을 동일시하기 시작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가늠하는 자는 무엇일까. 수위라든가 청소원이라든가하는 직업만이 아니다. 조각가라든가 성악가같이 그 직업에 성을 붙여서 들어가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그들의 직업에 성을 붙여서 부르지 않는다. 김 수위, 박 청소원, 정 조각가, 최 성악가라고 부르는 것을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약속도 예의도 아니다. 어딘가에서부터 그것은 깨어지고, 사람들은 불러댄다. 김 변호사님, 최 목사님, 조 기자님. 그를 최 교수님이라고 부를 때. 나는 그의 성 뒤에 오는 교수라는 명사가 직업을 말하는 것인지 직위를 일컫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를 그렇게 부를 때마다, 그것이 그에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가르친다는 일이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에게 어떤 변혁이나 성장을 가져다 주는 힘을 잃어버려가던, 그가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대는 그런 시대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에게 그 말을 묻지 않았었다. 그도 그렇게 믿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원의 영어시간이나 별로 다를 게 없는 대학 영문과에서, 그는 영미시와 문학사를 가르치는 교수였고 나는 학생이었다. 그는 열정적으로 가르쳤고 나는 열등한 학생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다감했으나 나는 학회실이나 연구실에 찾아가 본 기억도 없다. 그는 여럿속에 함께 있었고, 나는 혼자였다. 어쩌다 나는 생각하곤 했다. 저분은 누구를 가르치며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고. 그는 너무도 다면체였다. 그는 선이나 면 혹은 형태에 대해 선험적일 정도의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소리에 얼마나 강했던가. 그는 호앙 미로의 그림을 음악으로 이야기 했고,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형태로 말하곤 했었다. 그는 슬픔을 웃음으로 환치시키는 미다스의 손을 가졌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기쁨을 말할 때면 언제나 가슴이 눅눅해지곤 했었다. 그가 했던 영문학사 백이십 분 강의는 마치 써가지고 온 원고를 읽듯 정연했었다. 그가 종교를 가질 수 없으리라고 나는 한때 생각했었다. 그는 너무나 만화가였고 건축가였고 귀가 열려 있는 음악 애호가였고 화가였고 때로는 전방 부대의소대장이었고 혁명가였고 파계한 수도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종교를 가질 수 있으랴. 종교는 단순성이거늘. 내가 그에게 묻지 못한 것 가운데 하나가 또 있다. 그는아마 연애라는 것을 해보지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그것도 내가 그렇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저 시정의 연애라는 것-조금의 거짓과 조금의 소유욕과 조금의 무책임과 조금의 자기기만과 조금의 욕정과 조금의 보상심리가 겹쳐져서 만들어내는 진실이란 이름의 거대한 수렁, 어떻게 그가 그런 곳에 빠져들 수 있었으랴. 그는 어떻게도 자신을 내던질 수 없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는 아마도 종교를 가졌으리라, 누구보다도 뜨겁고 견고하게. 그는 참혹한 연애에도 스스로 족쇄를 채웠었으리라. 그는 아마 스스로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를 부를 이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말하고 느끼고 주장하고 슬퍼하면서 용서하고 나누어 주고 함께 하면서 기쁨을 아는-밥을 먹고 걷고 손을 잡으며 사는 그 사람을, 인체의 한기관과 기관이 불가해의 신비로 묶여져서 그의 행위를 만들어 내는, 그 인간을 각 기관으로 제각각 떼어 놓는다면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어렸을 때 읽었던 슈바이처에게 찾아와 말했다. 저는 삼겹살이 아픈 데다가 어쩐지 제 양지머리에도 병이 든 거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푸줏간의 고기처럼 말했었다. 우리 핏속의 소금기는 바다의 소금기와 그 짜기가 같다고 한다. 그러나 피는 바닷물일 수 없다. 강의실에서였다. 오월이었고 아직 푸르기보다는 더 많은 갈색으로 뒤덮여 있는 잔디밭에서 학생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 노랫소리가 가늘게 강의실 안으로 새어들었다. 우리는 T.S 엘리어트의 시를 읽고 있었다. 그것은 읽는 것이 아니라 관찰이었고 해부였다. 우리는 그 시를, 허파와 간과 심줄과 늑골을 각각 끄집어 내어 무게를 달고 색깔을 들여다보고 어떤 기능을 가지는가를 관찰하고 있었다. 영시 해부학 교실은 지루했고 졸음이 우리들의 메스를 든 손을 감싸고 있었다. 창 밖에 모여 앉아 노래를 하고 있는 녀석들을 저주하며, 차라리 나는 그들이 더 좀 크게 노래하기를 바랬다. 우리들의 메스를 든 손이 잠이 깰 정도로. 그때 그가 말했다. "나는 최소한 하루에 두 개 이상 사과를 먹는다." 그의 느닷없는 말에 나는 엘리어트를 자르고 있던 메스를 든 채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시의 주인공은, 결국 <나는 인생을 커피 스푼으로 되질해왔노라>하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저런 세상일로 허비한 자신의 시간을, 커피 스푼으로 설탕이나 뜨는 걸로 이야기하고 있거든," 사과라는 말과 커피 스푼으로 되질한 인생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인가. 어느 성급한 녀석이 있어, 사과가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겁니까 하고 묻지도 않았고, 교수님은 무슨 사과를 좋아하시는데요. 국광인가요 후지인가요 하고 실없이 묻지도 않았다. "내가 하루에 두 개씩 사과를 먹었다면, 보자, 나는 도대체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사과를 먹어치웠다는 얘기가 되지? 이 주인공이 커피 스푼질이나 하며 일생을 보냈다면 아마 나는 사과나 씹으며 보냈노라 해야 하겠지." 나는 웃었다. 사과나 씹으며 보낸 인생, 그가 그렇게 어석어석 씹어삼켰을 몇 트럭의 사과. 사과. 사과. 강의실 뒤쪽 창가에서 내가 킬킬거렸고 이어서 많은 여학생과 몇 명의 남학생이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종로 5가에서 인삼방사를 하는 집 아들인 옆의 녀석이 내게 물었다. "왜 웃니? 사과가 어쨌다는 건데?" 창 밖의 기타소리가 사라지고 우리들이 다시 엘리어트의 허파와 심장과 발톱가지를 도려내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가 말했다. "강의를 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면, 킬킬거리며 따라 웃는 학생이 있고, 조금있다가 웃는 학생이 있고 나중에 옆의 녀석에게 물어보고 웃는 학생이 있어." 나는 그를 향해 킬킬거리면서 그렇게 돌 하나씩 놓아 징검다리를 만들어갔을 것이다. 던져놓은 돌들이 다리가 되고 다음에는 물을 막으며 길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함께 잠을 잘 수는 없다.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 하는 시간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함께 할 수 있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걷고 함께 웃을 수 있다. 사랑도 함께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잠들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섬이다. 물위에 홀로 솟아오른 땅의 이름 그것이 섬이다. 우리는 혼자다. 그 무엇도 함께 할 수 있지만 잠이 들 때는 각자로 돌아가 혼자여야 한다. 하나의 섬에서 다른 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뱃길이 필요하다. 섬은 움직일 수 없다. 배가 그들을 이어준다. 그러나 그 길은 물 위의 길이다. 지도에만 있는 길을 배는 오고간다. 이내 사라지고 마는 물 위의 길, 뱃길은 그러므로 시간 속에서 아무런 영속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 학기, 엘리어트의 해부학 교실이 끝나던 때였다. 우리는 이글거리는 여름을 창 안팎에 놓고 시험을 치렀다. 이제 교실 밖의 잔디는 충분히 푸르게 변해 있었다. 엘리어트의 시를 살갗과 근육과 뼈와 내장으로 갈라낸 녀석들이 하나 둘 시험지를 내고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나도 무딘 메스에 엉긴 피를 닦아내고 나서 시험지를 들고 교탁 앞으로 나아갔다. 강의실에는 반쯤의 학생들이 남아 있었다. 나는 B를 바라면서 C여도 좋을 시험지를 교탁 위에 놓았다. 그때 그가 물었다. "너, 그 수산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냐?" "할아버지가 지어주셨습니다." "너희 할아버지가 좀 무식했냐?" "아, 아뇨." "거짓말 마, 임마. 얼마나 무식했으면 그렇게 쉬운 한자만 갖다 붙였겠냐." 밖은 여름이었다. 드문드문 교정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그림자와 같았다. 햇빛이 모든 것을 불태우고 난 자리에 남아 있는 불티 같았다. 나는 웃었다. 세상의 원칙이란 질서를 위한 약속일 뿐이다. 세로의 형태가 가로의 꼴로 바뀔 때 필요한 것은 원칙이 아니다. 두 곳에 적용될 수 있는 질서일 뿐이다. 나는 웃었다. 내 이름을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니. 사학과의 조교 하나가 더위에 땀을 흘리며 내 옆을 지나갔다. 나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이 말하고 있었다. 자식이 더위를 먹었나. 웃기는. 그렇게 해서 그는 내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왔다. 그는 휴식이었고 종교였고 나에게서 권력이 되어갔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추악하지 않은 권력이었다. 때때로 그리고 그 후의 오랜 시간에 걸쳐서 나는 그에게 안겨 쉬었으며 그로부터 엄정한 계율의 질책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힘이었다. 한강을 건넌 차가 청량리로 들어섰을 때 그는 시계를 보았다. 11시였다. 종합병원의 까다로운 면회시간을 생각하면서도 그는 차를 빨리 몰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차라리 시간이 늦어져서 면회시간에 대지 못해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그의 두려움을 조금 부축했다. 이런 식으로의 참담한 만남을 치러내야 한다 해도 최 교수를 만난다는 것은 기쁨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그는 집을 나오기는 했었다. 그리고 그는 기뻤다. 그것은 최 교수의 병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그와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데 대한 기쁨이었다. 은사와의 오랜 헤어짐 끝에 그를 만나러 찾아간다는 것이 그 은사의 병보다도 기쁘게 다가오는 데 대해 그도 처음에는 놀랐었다. 그러나 차가 한강을 건너가서 청량리로 진입하기 위해 차선마저 헝클어져 있는 혼잡 속으로 들어섰을 때 그는 이미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세 개의 염려와 일곱 개의 기쁨으로 집을 나왔다면 한강을 건너며 그것은 여섯 개의 고통과 네 개의 간절함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항암이란 말도 또한 그렇게 달라져 있었다. 그는 항암제의 그 항자를 너무 믿었던 아침을 떠올렸다. 암에 저항하는 내성을 기르는 치료라면, 그런 치료가 시작되었다면 그것은 이미 아이라는 것에 그만큼 지배되어 있다는 뜻이 아닌가. 지난해의 큰 수술이라는 것만 해도 그랬다. 한번의 수술이 도려낼 수 없었던 운명이란 무엇인가. 수술이란 매매나 이혼이나 합격같은 용어가 아니었던가. 그것은 다시 돌이키거나 이의가 없는 일회성의 완결은 아니었던가. 어떤 운명이 수술의 폐허를 헤집고 다시 씨를 뿌렸는가. 그의 육체는 그다지도 기름졌던가. 이제 교수님은 돌아가신다는 말인가. 클랙슨이 다급하게 울리면서 바로 위에서 그 순간 쇳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소리쳤다. "운전 똑똑히 해, 이 새끼야." 그는 놀라 브레이크를 밟으며 목소리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는 트럭 운전수였다. 그가 눌러쓴 모자 밑으로 길고 더러운 머리카락이 내려와 귀를 덮고 있는 것을 그는 보았다. 그가 미안하다고 손을 저어 보였다. 트럭운전수는 재판정의 판사처럼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만화 속의 악한 같은 얼굴을 했다. 차선을 바로 잡으며 그는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눈에 익은 거리가 또 그만큼 낯설게 늘어난 건물들과 함께 다가서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그는 이곳에 와보는 일이 헤아리기도 어렵게 오래 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를 졸업하고난 후 몇번, 그나마 최근에는 이쪽으로 와볼 일이 없던 그였다. 최 교수는 모교의 부속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것이다. 학교 정문이 가까워졌을 때 그는 길가에 세우져 있는 몇 대의 전경 호송차량을 보았다. 학교에서 오늘 시위가 있을 모양이구나. 길이 막히기 전에 병원을 빠져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정문 옆을 돌아 대학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울 때쯤에 그는 또 달라져 있었다. 여섯 개의 고통과 네 개의 간절함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일곱 개의 고통과 세 개의 절망 같은 것이었다. 그는 마치 무슨 민원사항을 가지고 관공서를 찾아온 사람처럼 화를 내면서 병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시위로 하여 길이 막혀도, 그가 병원에 하루종일 갇혀 있어도, 면회시간이 지나서 저녁까지 기다려도 좋다는 식으로 조금씩 자신을 포기해갔다. 신관을 찾아가며 그는 소아과 앞을 지나쳤다. 그는 그곳이 산부인과가 아닌데도, 사람은 결국 병원에서 죽기도 하고 태어나기도 하는구나 하고 소리없이 중얼거렸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옆에는 정형외과에 입원해 있는 게 분명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석고붕대를 한 다리를 대포처럼 앞으로 치켜들고 있었다. 뒤에 서 있는 그의 아내는 몹시 지쳐 보였는데도 환자인 그는 머리를 깨끗이 감아 가리마를 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는 대포의 뒤를 따라가 듯 다리를 치켜든 환자를 다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서였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병원 앞에 오면, 문병객을 위한 물건들을 파는 상점들이 있게 마련이므로 그는 거기서 과일이든 꽃이든 사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서둘러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5층에서 엘리베이터는 멎었다. 시위 때문이었어. 골목에 진을 치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차가 막히거나 병원진입로가 봉쇄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엉망이 되어 버린거야. 그는 묵묵히 구두 끝을 내려다보며 5층복도에 서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최 교수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가 진료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환자들을 보면 어쩐지 저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환자로 태어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그것은 노인을 보면 그들은 처음부터 노인으로 태어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장례식엘 가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거기서 죽음은 사라진다. 죽은 사람은 지금 자기만의 특수한 체험을 치르는 중일 뿐이다. 문상을 온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아무것도 실감하지 못한다. 그는 늘 그랬었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의문이 열렸다. 과일을 사러 가는 일도 최 교수를 만나는 일도 그는 다 포기하고 싶었다. 자기가 느끼고 있는 슬픔이나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미묘한 상실감도 그리고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르게 와서 자신을 내리누르기 시작한 운명의 손길, 최 교수와 자신을 얽어 맨 그 줄마저도 그는 다 포기하고 싶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3.2.1. 그건 숫자에 불이 들어왔다 나가면서 엘리베이터는 내려갔다. 간호원 둘이 뒷굽이 넓은 구둣발소리를 울리며 그의 뒤를 지나쳐 갔다. 목소리만 남았다. "어머, 얘는 등산가서 만난 남자를 뭐 시내에서 또 만나는게 뭐가 이상하다고 그러니." 한쪽 팔에 링게르 바늘을 꽂은 채 최 교수는 병상 옆에 놓여 있는 사물함의 서랍을 열었다. 그가 꺼내드는 담배를 나는 놀라며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피우셔도?" "여기 누워서 담배 피우는 자유도 없으면 어떻게 하냐. 자네도 피워." 나는 선생님께 라이터를 켜 불을 붙여드렸다. 담배를 끊는 거야 얼마나 쉬운 일이냐, 나는 평생 담배를 수백 번도 더 끊었다. 그런 유쾌한 말을 한 흡연론자의 말을 들려준 이도 선생님이었다. 조금 여위긴 했지만 그것은 그분이 입고 있는 환자 가운 때문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선생님은 여전했다. 오히려 그의 조금 마른 듯한 얼굴이 보기좋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선생님은 쓰러져 있는 사람이 아니라 조금 쉬고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병은 어디에 숨어 있는가. 나는 선생님의 병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 유혹의 탈을 쓴 속삭임처럼 생각되었다. "그래 박 교수가 전화를 했어? 그런 짓들 하지 말라고 했는데." "교수님이 절 보고 싶어한다기에 왔지요." 나는 아주 작아져서 조그맣게 웃었다. 벌레 하나씩을 눈 위에 붙여 놓은 것 같은 그의 짙고 두터운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치 연기의 맛을 보듯이 그는 조금씩 연기를 빨아들이며 담배를 피웠다. "그래, 며칠 전에는 김선영이가 전화를 했어. 네가 내 이야길 쓴 게 있다면서 말야. 그래서 뭐라고 썼드냐고 물었지. 옛날 자기 얘기도 거기 들어 있다더군. 자기를 미모의 신인이라고 썼다기에 그건 한 아무개가 잘봤다 그랬지. 그리곤 또, 글을 쓰는 거보다는 물장사로 나가는게 더 낫겠다고 썼다기에, 그것도 진실인 거 같다고 했지. 김선영이 말이 재미있어. 그때 자네 말처럼 물장사나 나갔으면 좋았을걸, 이제 애가 둘이나 있는 여편네가 됐으니 어쩌느냐더라." 김선영은 대학 후배인 소설가였다. 언제나 최 교수님 댁에서 작은 모임이 있었고 그때 나는 몹시 취해서 그 후배에게 물장사 운운하는 망발을 했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쓰면서 그 삽화를 곁들였는데 김선영이 그것을 읽어본 모양이다. "그 전화를 받고 내가 그랬지. 한수산이도 이제 큰일났구나. 내 이야기까지 써서 글로 팔아먹고 있으니, 아마 그녀석이 상상력의 고갈이 왔나보다." 나는 선생님의 팔로 끊임없이 떨어져 들어가고 있는 링게르 병의 방울들을 바라보면서, 네 그런가 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 상상력의 고갈이라는 게 작가들에게 자꾸 술을 마시게 만들지. 너는 어떻냐 요즘?" "많이 마십니다." "청탁불문, 소주 양주 아직도 그렇게 마시니?" "상상력의 고갈인가 봅니다." "그만 마셔라 이제. 할 일이 늘 많나 보던데." "헤밍웨이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상상력의 고갈이 술을 마시게 하지는 않지만, 지나친 술은 상상력에 장애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런 얘기를 했거든요." 우리는 아무도 병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링게르가 다해가고 있었다. 담배를 서랍에 집어 넣으며 선생님이 중얼거렸다. "야단맞을라." 선생님이 인터폰을 눌러 간호원을 불렀을 때야, 나는 야단맞는 다는 말이 간호원을 두고 한 말임을 알았다. 다 맞은 주사를 거두고 새로운 링게르를 꽂아놓고 간호원이 나갔을 때 최 교수가 말했다. "난 평생 제복 입은 사람이 무섭더라. 간호원도 그래. 그 옷에서 이상한 힘이 나와. 그게, 옷이 아니라 상징이거든." 선생님은 마치 이 병상 위에서의 시간들을 즐기고 있는 표정이었다. 간호원이 무섭다는 말도 그랬다. 주사를 갈아 끼우던 간호원이, 아프시죠? 하고 덤덤히 물었을 때도 선생님은, 간호원들이 저마다 들어와서 아프죠? 아프죠? 해대니까 안아프다가도 참 이 주사가 아픈 주사라지 하게 돼요, 하며 길게 말했었다. 그것마저도, 선생님은 지금 이 시간을 즐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게 했다. 나는 들고 간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그것은 내가 쓰고 있던 긴 소설의 세 번째 권이었다. 나는 그것을 아홉 권으로 계획하고 있었고, 이제 그 세 번째 권이 책으로 나왔던 것이다. 집에서 서명을 해가지고 온 책을 받아든 선생님에게 내가 말했다. "세 번째 권이 마악 나왔습니다." 책을 넘겨보며 최 교수가 클클거리며 길게 웃었다.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이었다. "그래 고맙네. 네가 보내준 두 권은 읽었지. 야 그러고보니까 너도 참 촌놈이더구나. 그렇게 지독한 산골에서 살았냐?" 그 소설의 이야기는 강원도의 내설악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삶의 터전으로 볼 때 도시는 도금된 곳이야. 원형이 아니지. 인간 존재랄까 혹은 삶의 방식의 원형이 오히려 시골에 오래 남아 있어. 그래서 그것이 뛰어난 소재가 될 수도 있는 거지. 포크너의 요크나파 토파 컨트리라는 것도 그런 존재의 원형이거든." 그때 손님들이 우르르 병실로 들어왔다. 두 여자분과 최 교수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 중의 여자분이 대뜸 말했다. "사람이 왜 이래. 또 들어와 누워 있어. 나이값을 해야지." 병실 뒤쪽에 서서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끔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칠 층의 높이 때문에 창 밖으로는 건물의 지붕 몇 개가 바라보일 뿐이었다. 그들이 이제 막 공항에 내려 병원으로 왔으며, 여자분 중의 한 분이 최 교수 누이라는 그런 것들이 이야기 속에 드러났다. 집에 가서 짐이나 우선 풀고 좀 씻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들이 나갔을 때였다. 봄날의 안개처럼 가슴 밑바닥을 기어나와 깔리는 것이 있었다. 미국에서 누님이 날아올 정도로 선생님의 병은 지금 무겁다는 새삼스런 깨달음이었다. 마술사의 손에 홀리듯 나는 최 교수의 그 유쾌함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누이가 병실을 나가자, 최 교수는 다시 한 대의 담배를 꺼내물었고 나는 또 라이터를 켜 불을 붙였다. 그가 여전히 즐거운 얼굴로 말했다. "내 누님이야. 미국에서 삼십 년을 있는데도 저렇다니까. 전혀 미국에 사는 사람 같지가 않아. 나보다도 더 한국사람이야." 선생님이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지난해에 아주 큰 수술을 했어. 다 잘라냈지. 난 아파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인데 췌장 위 다 잘라내서 여기 아무것도 없는 상태야. 의학이 자르고 떼어내는 건 잘하는데. 살아나는 건 의학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몫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회복이 안 되나 모르겠어." 물이 한 방울씩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선생님의 혈관 속으로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는 링게르액이 목소리가 되어 새어나오는 것도 같았다. "다시 입원을 하면서 주치의를 만나 물었어. 수술이 뭐가 잘못되었던거냐. 의사 이야기는, 수술은 퍼펙트했다는 거야. 퍼펙트했는데 왜 다시 입원을 해야 하느냐." 선생님의 담배를 받아 나는 주스를 담았던 종이컵에 껏다. "다시 입원은 했는데 간호원들이 자꾸, 주사가 아플 거라고 하는 거야. 주사는 원래 아픈 건데 뭘 그러냐며 있었는데, 오늘부터 맞는 건 많이 힘들 거라고까지 해. 그래서 병원의 실장하는 친구에게 여기서 전화를 했어. 야, 그 내가 내일부터 맞는 주사가 많이 아프다면서?힘들다던데 무슨 주사인데들 그러냐? 그런데 이 친구가 쉽게 대답을 하는 거야. 아프지, 힘들지, 항암제니까." 어제, 그러니까 어제 겨우 선생님은 자신의 병이 암이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것도 친구가 무심하게 내던진 말을 통해서였다. 나는 선생님의 눈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암이었다니. 그걸 알고 나니까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어. 2시에 잠이 깼는데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어." 쓸쓸함이란 무엇인가. 고독인가. 절대의 고독. 아니면 비애의 감정인가. 고통도 쓸쓸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쓸쓸함의 고통.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아닐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합쳐놓은 것보다 더 드넓은 심상, 지금의 이 쓸쓸함이란 말은, 자기에게 남아 있는 시간, 자기 삶의 예정된 진행을 눈치챈 사람의 가슴이 아닐까. 비로소 홀로 있음을 안 사람의 마음의 들판.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주 유쾌하게 다가왔다. "여기서 내려다보면, 이 건물 맨 밑이 응급실이고 그 옆이 영안실이야, 그게 보여. 여기가 칠층이니까 십층쯤 올라가서 거기서 뛰어내리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바로 그 앞이 응급실이고 옆은 영안실이니까, 순서대로 운반하기도 쉬울 테고 그런 생각을 하는데도 그렇게 쓸쓸한 거야." 강물이 출렁거리고 있다. 햇빛이 그 위에서 부서진다. 물빛은 푸르지도 검지도 않다. 강 건너편에서 공사를 하고 있는 대형 중장비들이 움직임도 없이 움직이고 있다. 주차장을 걸어나온 그는 선착장 건물로 다가갔다. 유람선 회사에서 틀어대는 음악이 귀에 따갑다. 왜 여길 왔지?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고 그 말을, 어떻게 여길 왔지? 하고 바꾸어본다. 선착장 건물 삼층으로 그는 걸어 올라갔다. 강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주스 한 잔과 커피 한 잔을 샀다. 커피를 마시고 싶었고 목이 말랐으나 물이 없었다. 햇빛을 등지고 앉아 그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때, 여의도까지 가는 배가 출항하겠다는 안내방송이 따귀를 때리듯 다가왔다. 여자의 목소리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감사합니다를 외쳐댔다. 삶은 감사하는 나날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오늘 나에게는 감사할 일이 없다. 그의 손에서 다 마신 종이 주스컵이 구겨져 나갔다. 담배도 안 피우셨는데 입원하시면서 피우시는 거예요. 최 교수의 둘째 아들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렇게 말했었다. 아주 불안해 하세요. 자주 좀 와 주세요. 아무데도 아버지를 닮아 보이지 않는 얼굴로 아들은 또 말했었다. 그에게 주소와 전화번호를 따로 적어주면서 그는 말했었다. 위암도 그렇고 췌장암도 그렇고 몹시 아프실 텐데, 가족이 힘을 내셔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말을 했던 그 태연한 얼굴의 사내가 탁자 맞은편의 빈 비닐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일어섰고, 사내는 사라졌다. 그는 다시 한 컵의 주스를 사들고 와 자리에 앉았다. 아홉 권까지 써야 할 책입니다. 이제 겨우 세 권이 끝났습니다. 빨리 건강해지셔서, 지켜봐주셔야지요. 병실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던 자신을 그는 또 떠올렸다. 앞자리에 그 사내가 앉아 있었다. 햇빛이 탁자 위에 만들고 있는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그는 중얼거렸다. 넌 계꾼이야. 계꾼이 낙찰계 일 년짜리 끝나면 한 해가 간다고 말하듯 너는 책 숫자를 가지고 세월을 계산하는 거냐. 앞자리의 사내는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삶. 그는 소리내어 그 말을 중얼거렸다. 삶. 배가 떠나가고 있었다. 여의도로 향해 가는 유람선이었다. 배 위의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뱃전에 서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선착장 매표소와 주차장에 늘어선 차들이 햇빛 속에 정물화 같았다. 선착장으로 내려오는 계단에서 젊은 남녀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강을 등지고 선 여자를 향해 삼각대 위의 카메라 셔터를 누른 남자가 뛰어왔다. 잠시 아무 움직임도 없이 남녀는 서 있었다. 사진이 찍혔는가, 여자가 남자의 팔을 잡으며 깡충깡충 뛰었다. 아무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속에서 그들의웃는 모습이 햇빛에 부서져 갔다. 그가 중얼거렸다. 이제 누가 있어, 나에게 가르치고, 감화를 주고, 아낌을 받으랴. 그는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냈다. 눈물을 가리기 위해 그는 그것을 썼다. 선생님의 아픔에 동참할 그 무엇도 자신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이제 혼자가 되어가는 것도 자신임을 그는 알았다. 갑자기 닥쳐온 죽음에 대한 실감조차 그것이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을 내일에 던져진 갑작스런 공포라는 것도 그는 알았다. 그는 울었다. 덧없이, 덧없이 울었다. 인도 여행에서였다. 옛 왕조의 자취는 델리의 성벽에 남아 있었다. 땅을 지배한 권력은, 어디에서나 같다. 하늘을 향해 구조물을 올린다. 웅장한 대리석의 성벽을 걸으며 생각했었다.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런 무위한 행위에 빠져드는 것인가. 불멸의 그 무엇을 찾아가는 삶들의 무위-부나비가 불을 찾아 날아들어서 제 몸을 태우며 죽어가듯, 우리들 또한 그런 허무의 불에 우리들의 시간을 태워가는 것인가. 그 성벽을 거닐다가 붉은 대리석이 삭아서 작은 모래알로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었다. 풍화였다. 바람이 불자 대리석 성벽에서 자디잔 모래들이 흘러내렸다. 삭아서 모래가 되어 흘러내리는 대리석, 그 붉은 가루들. 최 교수를 찾아갈 때마다 나는 인도에서 만났던 그 거대한 성벽의 풍화를 떠올렸다. 그의 쇠약을 확인하며 나는 그의 몸에서 떠나가고 있는 영육의 모래알을, 그 풍화를 보아야 했다. 하루는 다리에서 하루는 팔에서 그렇게 우리를 살아 있게 하던 그 무엇이 떠나가고 있었다. 항암제 투여가 끝나면 그는 집으로 퇴원을 했다. 박인희 교수에게 이따금 전화를 해서, 선생님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차츰 그의 병이 두려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찾아갔을 때도 나는 그분의 병이 어디쯤 와 있는가를 묻지 못했다. 자신의 병이나 치료과정에 대해 말하지 않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암세포가 임파선으로 들어가 있는 상태래요." 박 교수에게서 그런 말을 전해들으면서도, 나는 그 말이 의미하는 게 어떤 상태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배가 부르다든가 속이 메슥거린다든가 아니면 가슴이 저린다든가 하는 어떤 종류의 느낌도 그 말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암이라고 하는 것도 세포였던가 싶었고 임파선이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열차 이름 같았다. "방사선 치료를 안 받으시겠다고 하세요. 의지가 점점 약해지시는 거 같애요." 박 교수가 목이 잠겨서 전화를 해왔을 때도 나는 그의 말에서, 선생님이 겪고 있을 어떤아픔이나 떨림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이 며칠 동안에 그에게서 또 무엇인가가 무너져내렸구나 하는 암울함이 가슴에 무겁게 내려 앉았다. "다같은 암환자들 아니겠어요.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해 와 있는 사람들 말예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저게 어떻게 사람이냐 원숭이들 같지 않으냐,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저런 꼴로 살고 싶지 않다고도 하시고요," 주르륵 주르륵 바람이 불 때마다 흘러내리던 대리석 성벽, 선생님의 피부가 머리카락이 손톱이 그렇게 부서져서 선생님의 몸에서 흘러 내리는 것 같았다. 감정을 통제하느라 꿈틀거리듯 움직이던 선생님의 검은 눈썹이 눈앞에 어른거렸다.선생님이 탄 말이 내 앞에 와 무릎이 꺾이며 팍팍 쓰러져가는 것 같았다. 말들은 그렇게 끊임없이 달려와서 쓰러져갔다. 엘리베이터를 내려 아파트의 초인종을 누르려다가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괜찮아 괜찮아. 그는 누구에게인지 알 수 없이 중얼거렸다. 들고 온 과일 바구니가 어쩐지 선생님에게 욕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잘 익어 싱싱한 과일이었다. 그러나 잘 읽어 싱싱하다는 과일의 상태는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그것을 먹을 수 없는 사람에게 썩은 것과 떫은 것과 싱싱한 것이 무슨 차이가 있으랴.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아들이었다. 집 안은 조용했다. 응접실 소파에 앉아 어느새 눈에 익은 벽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굵은 선으로 가을산을 그린 유화였다. 안에서 아들의 목소리가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이 웅얼웅얼 들리고 나서 최 교수가 밖으로 나왔다. 가운을 입은, 깨끗한 모습이었다. 원숭이처럼 그렇게 되어 하던 말이 언뜻 떠올랐지만, 최 교수의 모습은 단정했다. 어쩌다 동물원에 갈 때마다 참 야비한 얼굴을 한 동물이구나 하고 늘 같은 생각을 갖게 하곤 하던 원숭이와는 전연 먼 모습이었다. 많이 수척해 있긴 했지만 눈에는 여전히 빛이 있었다. "바쁠 텐데 ." 그런 말로 인사를 건네고 나서 최 교수는 아들에게 말했다. "나 담배 좀 갖다다오." 그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놓았다. 약한 걸 피우느라 최교수가 낮게 중얼거리고나서, 아들이 가지고 온 양담배 켄트를 꺼내 불을 붙였다. 드시는 건 어떠세요. 요전에 전화 드렸더니 식사를 하러 나가셨다고 하던데요. 병원에는 한 주일에 한 번 가신다고요. 그는 모래가 뿌려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먹고 싶기도 한데 소화가 돼야지. 냉면이 먹고 싶어서 나갔었어. 병원에 가고 오는 시간이 힘들어, 차 안에 앉아 있기가. 문득 어느 쪽이 환자이고 어느 쪽이 문병을 온 사람인지 모르게 서로의 목소리가 뒤바뀌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최 교수는 그렇게 담담했다. 초인종이 울린 건 그때였다. 아들이 문을 열자,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원에서 왔는데요." 아들이 돌아와 그런 말을 했다. 그의 등뒤에 커다란 화분을 든 사내가 둘이 보였다. 아주 커다란, 거의내 키에 가까운 소철을 그들은 무겁게 들고 서 있었다. 화분이 놓일 자리를 가르쳐 주고나서 최 교수가 말했다. "조금 이쪽으로 돌려놓지. 아, 그래요, 그게 좋구만." 커다란 화분이, 푸른 잎을 내뻗으며 응접실과 현관사이에 놓여졌다. 화원에서 온 사람들이 돌아가고 나자 최 교수가 말했다. "풀도 이따금 병원엘 보내야 해. 잎이 자구 안 좋아지길래 화원엘 보냈었지. 한 두 달 보냈더니 아주 좋아져서 왔군." 십 년쯤 자라면 저런 크기가 될까. 풀을 길러본 적이 없는 그는 우람한 소철의 나이를 헤아려 보면서, 최 교수보다는 소철 쪽에 눈길을 보냈다. 지금 왜 풀이 그에게 필요할까. 병은, 그의 병은 그와는 무관한 어딘가를 지나가고 있는 건가. 나는 지금 저 풀이 최 교수보다도 오래 살 거라고 믿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 전화 왔어요. 이사장님이신데요." 아들이 건네주는 송수화기를 받은 최 교수가 느릿느릿 말했다. "나 아직 안 죽었다 그래. 아무렴 너보다야 오래 살아야지. 나쁜 짓을 해도 네가 나보다 더했을 테고, 일을 해도 네가 나보다 더 많이 했을 테니 순서를 봐도 그렇지 않냐." 최 교수가 낮은 소리로 웃었다. 소철은 물기를 머금은 듯 푸른 빛이다. 그는 갑자기 무어라 표현할 길 없는 배반감을 느낀다. 이 분이 지금 병과 친해지고 있는 건가. 병과의 싸움이 아니라 병과 무언가 은밀히 속삭이고 있는 건가. 전화를 끝낸 최 교수가 그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아는지 모르겠는데 이번에 내가 잘못 만났어." "네? 누굴 만나셨는데요?" "누가 아니고, 내 몸 말일세. 내가 이번에 잘못 만났어." 최 교수는 자신의 병을, 만났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하. 그가 앉은 자세를 바로했다. "지난해 수술을 할 때였어. 내가 암이라는 걸 다들 알았으니까, 나한테 와서 울고, 기도하고 그랬는데 나는 이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내가 정신을 차려서, 그 빚을 갚아야 하지 않나 싶고 ." 최 교수가 말끝을 흐렸다. 잠시 후 그는 표정을 밝게 하며,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고생한 걸로 말하면야 난 지금 죽어도 돼. 남이 칠십 팔십까지 할 고생을 난 버얼써 다 했으니까. 고생의 양으로 보자면 그런데 사람 빚을 갚아야 할 게 많아." 그리고 그가 웃었다. "오혜령이라고 하든가 그 여자.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할까봐. 기도하고 일어나서 비추든가 그것도 하고." 최 교수에게 인사를 하고 나올 때도 그가 가지고 간 과일 바구니는 현관 한 옆에 놓여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그는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최 교수는 어디에 있는 건가.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이제 죽어도 좋을 정도로 그가 겪은 고생 속에 있는가. 소철을 화원에 보내 싱싱하게 살려내는 그가 최 교수인가. 사람들에게 빚이 많아서 더 살아야 한다는 그는 또 누구인가. 일어나서 비추어야 겠다는 그가 최교수인가. 내가 사가지고 간 그 과일 바구니의 상대는 최 교수가 아니었던가. 임파선에 암세포가 들어가 있다는 사람, 곧 다른 환자나 똑같이 원숭이처럼 변해갈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 것인가. 아파트를 나섰다. 경비원이 수돗가에서 자루 끝에 달린 걸레를 빨고 있었다. 그는 뜻없이 중얼거렸다. 저것도 삶이다. 그러나, 그 후의 하루하루는 붕괴였다. 사람의 삶에는 어떤 모습의 가설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그것을 확인하는 하루하루가 그에게서 흘러갔다. 한번의 삶, 한 번의 평생은 그러므로 그에게 쓰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삶은 모아나가는 것도 쌓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몫으로 받아 가지고 있던 것을 하나씩 써나가는 나날이었다. 단 한 번의 평생을 살 뿐이라는 것을, 그토록 절실히 느껴가면서도 그는 붉은 도장으로 경고라고 찍힌 쪽지를 들고 민방위훈련을 받으러 갔고, 자동판매기의 커피를 맛없다고 중얼거리며 마셨고, 아내는 왜 점점 살이 찌는가 무심히 생각했다. 달그락거리며 부엌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심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눈앞이 흐려져 와서 나는 묵묵히 선생님의 맨 발을 내려다보았다. 무너졌다. 그런 말을 나는 그 맨발에서 보고 있었다. 발톱 옆으로 하얗게 가루가 묻은 듯이 흰 것이 드러나 보이는 선생님의 맨발은 가늘게 야위어 있었다. 발가락 위에 나 있는 털마저, 그럴 리 없겠는데도, 바싹 여윈 듯 싶었다. "좀 누우세요. 앉아 계시면 더 힘드시잖아요." 요 위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선생님에게 내가 말했다. 그가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어떤 포즈를 해도 편하지가 않아. 편한 포즈가 없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유머많은 여전하시구나 싶었다. 이런 것을 이성이라는 말로 불러도 되겠지. 어떤 포즈도 편하지 않다니. "사람들은 나에게 투병을 하라고들 해. 투병을 하라는데 난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무엇과 싸우라는 거야. 투병 그래서 내가 3,4년을 더 산다고 해봐. 그게 무어야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 아무것도 할 수가없는데, 싸우라니 ." 갑작스럽다고나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선생님은 무너져 있었다. 그의 육신이 그랬다. 그는 응접실로 나오지도 못하고 안방에 딸린 침구 위에서 나를 맞았다. 전번에 찾아오려고 했을 때, 병원에 가고 안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두 주일이 지나 있었다. "그렇겠지. 막 살아왔다면, 그렇게 아무렇게나 살아왔다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무슨짓이든 하겠지. 그러나 난 그렇지가 못하잖아. 그렇게 막 살지도 못했잖아." 얼음 조각을 하듯 그렇게 사셨을 것이다. 깨뜨리면 잘못 부수면 회복이 안 되는 것으로 사신 시간들일 것이다. 선생님의 시간. "폭력적인 생각이 자꾸 들곤 해. 뛰어내릴까. 그래서라도 죽는 게 낫지 않나. 딱 죽는 약이 있으면 먹을까도 싶고. 이런 폭력적인 생각을 또 고쳐. 내가 이래선 안 된다, 안 된다 하고." 왜 그런 약한 생각을 하세요. 나는 겨우 그렇게 중얼거리려다가 목이 아프게 누르며 그 말을 참았다. 아무것도 선생님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것을 나는 가지고 있지 못했다. " 죽음이 화려하게 까지 느껴지기도 해. 그게 두렵지가 않아. 이상하지. 전에 할아버지 무덤에 가 앉아 있을 때 생각이 나. 그때, 그 융단같이 푸른 잔디를 보며 앉았노라면 그렇게 좋고 평화스러울 수가 없었어. 내가 이제 여길 내려가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고, 얼마나 많은 나쁜 짓을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속이며 살아갈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지. 물론 살아가며, 순간순간의 기쁨이야 있겠지. 그러나 ." 이미 노오랗게 물들어 있는 선생님의 눈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병이 저렇게 만든 것일까. 검고 컸던 선생님의 눈. 우리는 이다지도 무력한 가. 우리가 무엇을 이룩하겠다고. 무엇을 남기겠다고 매일을 고단하게 살았단 말인가. 메마른 입술을 적시며 선생님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길이 커튼이 열려진 창에 가 멎었다. 텅 빈 하늘이 거기 가득했다. "끊임없이 싸워. 정상적인 자아와 병든 자아가 이십사 시간을 싸워.이게 나야. 내가, 두 개의 내가 살아 있어. 내가 나를, 정상적인 자아가 병든 자아를 두 시간만 재워놓자. 그러면서 잠이 들어. 여덟 시에 깨우자. 그러면서 살아. 병든 자아를 달래서 약을 먹이고, 병든 자아에게 사정해 가며 물도 몇 모금 먹고 그때, 왜 그 생각이 떠올랐을까. 그것은 내가 본 처음이자 마지막 한번의 선생님이었다. 그때 선생님은 대학의 보직을 맡고 있었다. 마침 약속이 있어서 학교 본관의 처장실로 찾아갔을 때였다. 그때 다른 단과대학의 학장을 했던 원로 교수 하나가, 최명하 너 이놈 하고 고함을 치며 처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었다. 그는 아마 선생님보다 스무 해는 나이가 위였을게다. 그를 향해서 그때 선생님이 소리쳤다. 학자라는 게 나이 값도 못하고! 당신하고 할 이야기 없으니 당장 나가! 놀라서 집무실 한 구석에 나는 서 있었고, 선생님은 그 노교수의 등을 밀어 밖으로 내몰았다. 문을 닫아걸며 선생님이 내뱉듯 말했다. 무슨 부정입학생 명단을 수첩에 적어 가지고 합격을 시키자니! 그걸 내가 못한다고 잘랐더니 저 주책이야! 그때는 마침 대학입시철이었다. 그처럼 격렬하고 단호했던 선생님의 모습이 갑자기 왜 떠오르는 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때의 그 선생님, 또 다른 선생님의 자아를 생각했던 것일까. 메마른 발을, 여윈 발을 당겨 앉은 자세를 바꾸며 그때 선생님이 중얼거렸다. "황 교수. 그 사람이 뭔데 나보다 이십 년을 더 살아. 말이나 되는 소리야. 나보다 이십 년을 더 살다니." 황 교수. 그 분은 선생님과는 가까웠던 국문과 교수였고, 원로 소설가 였다. "오늘 비행기는 전연 예약이 안 되네요. 그냥 비행장으로 나가보실래요. 좌석이 있으면 탈 수도 있을 테니까요." 아내의 그런 말을 들으며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아니, 가지 않겠어. 병든 자아와 정상적인 자아가 아냐. 수없이 많은 내가 내 속에 있어. 그의 죽음을 지켜보며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자아와 싸웠던가. 때로는 두려웠던 나. 때로는 슬펐던 나. 그의 무너져가는 몸을 보며, 건강에 조심해야지 하고 쥐가 천장을 갉아대듯 속삭인 나도 있었어. 그는 새로 빤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맸다. 비뚤어진 매듭을 거울속으로 바라보며 다시 맬까 어쩔까를 그는 잠시 생각했다. 그는 양복을 걸치며, 넥타이를 고치지도 다시 매지도 않을 또 하나의 자신에게 말했다. 두 시의 약속을 미룰걸 그랬어.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기 위해 구두를 그는 오늘 저녁에는 술을 마시자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많이 마시지는 마. 밖으로 나섰다. 바람이 빗발을 뿌려 그의 구두를 젖게 했다. 그는 우산을 바람 쪽으로 기울이며 걸음을 빨리 했다. 비는 모래알같이 뿌려댔다. 골목에는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사막 같았다. 비를 맞고 있는 집과 나무와 아스팔트 포장이 된 골목을 바라보았다. 사막. 순간 그는 자신 속에 아무도 살아 있지 않다고 느꼈다. 어떤 모습의 그도. 고창근 sgamm@hanmail.net 소설집 <소도(蘇塗)>  
7 월인(月印) 외1편/김은령
관리자
4171 2010-05-29
10.06월 창간호 시 월인(月印) 개봉되지 않는 날이 길어질수록 절명을 꿈꾸는 밤은 깊어 그래, 저기쯤이면 될 수도 있겠다 작정하고 찾아 간 곳 땅과 바다의 경계에 선 순간 허공으로 한 뼘만 솟구치면 되리라는 속내를 알아차렸다는 듯 꽝, 내 몸뚱어리에 찍히는 달빛 전해들은 풍문엔 모든 무게들의 소리까지 삼켜 주었다는 바다여 난 왜 안 된다는 거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수천수만 동백의 모가지를 베어 간다는 해풍이여 왜 나는 안 된다는 것이냐 천개 만개 몸을 나투어 土末을 지키는 달 깊고 검은 바다를 잠그는 달 꽝, 꽝, 꽝, 꽝 다시 내 몸을 잠그는 달 접견하다 서울 사는 오모 시인이 부처님 오신 날 즈음해서 ‘부처님의 자비가 가득하길 기원합니다.’라는 문구가 들어 있는 안부를 전자 우편으로 보내 왔다 첨부해서, 아내와 함께 도봉산 산행 길에 들렀던 관음암에서 찍었다는 사진 한 장도 보내 왔다 설명글에 섬돌위에 놓여 있는, 했는데 섬돌은 보이지 않고 나란히 계신 흰 고무신 한 켤레 닳고 닳아서 찢어진 뒤꿈치를 이제는 사라진 일거리인 이불호청 꿰맬 때난 쓰는 굵은 흰 무명실로 꽁꽁 꿰맨 고무신 한 켤레 나도 모르게 두 손 가슴에 모우고 모니터를 향해 꾸벅 절했다 김은령 er803@hanmail.net 시집 <통조림>  
6 스토커의 문법/안지숙
관리자
4102 2010-05-27
10.06월 창간호 소설 스토커의 문법 당신하고 자러 갈 일은 없을 테니 천천히 마셔요. 천천히… 말하는 나를 의아한 듯 쳐다보는 눈길이 돌연 차갑군요. 괜찮아요. 이제 시작인걸요. 내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는 사이 당신은 앞에 놓인 잔을 홀짝 털어 넣듯 마시는군요. 스티로폼 접시에 담긴 무지개떡이 참 예쁘네요. 연두색 귀퉁이를 떼어내 우물우물 씹는 당신 표정이 소 같아요. 개업 떡을 많이 먹으면 새로 시작하는 일이 다 잘될 거라고, 카운터를 지키는 아저씨가 갑자기 끼어드는군요. 당신이 사레들린 듯 잔기침을 하더니 주방 쪽을 보며 소주 한 병을 외치는군요. 하긴 오늘처럼 꽃샘추위가 매운 날은 소주가 나을 거예요. 소처럼 순해진 얼굴 위로 경련이 이는 걸 보니 살짝 미안해지는데요. 내내 잘 견디다 결국 메일을 보내고 만 것, 전화를 걸고 만 것이요. 지난 금요일이었어요. 프린터기 앞에 서서 교열대장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문화면 대장이 먼저 밀려나왔어요. 나무의 방식. 새로 시집을 냈다는 그의 인터뷰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려 있더군요. 아, 제가 지금 ‘그’라고 했나요? 당신 앞에서, 당신을 ‘그’라고 하다니 우습군요. 근데 썩 그럴듯하지 않나요. 아무튼 그날 저는 나무처럼 풀잎처럼 존재하는 삶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인이라는 서평에 어울리는 그의 표정을 한참 들여다보았지요. 운명처럼, 그를, 예전의 당신을 바라보던 때가 있었다는, 붉고 슬픈 생각들이 내 앞에 슬며시 내려앉더군요. 그러나 그를 다시 만나는 건 차마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알아요,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싶을 거예요. 그러나 잠시만요. 잠시만 그냥 제 얘기를 들어주실래요? 한번쯤은 당신과 내가, 내가 알던 예전의 당신을, 그를 안주 삼아 술잔을 들 수도 있지 않겠어요. 아, 막상 말을 하려니 어렵군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기사가 실린 대장을 프린터기에 내려놓고 돌아서지 못한 것은, 아니오, 결혼을 앞두고 있고, 그래서 행복하다는 인터뷰 내용이 놀랍기는 했지요. 놀랍긴 했지만, 저를 돌려세운 건 기사 말미에 들어있던 시였어요. ‘나무의 방식’이라는 표제시요. 끌어안지 못하여 / 나무는 그저 바라봅니다 / 목숨처럼 꽃가루 날리며 / 전하는 이에게 교태를 부려야 하는 / 겨운 운명을 지녔습니다 / 마음으로 보듬은 사이로 / 바람이 붑니다 / 다가서지도 멀어지지도 않은 채 / 한 풍경을 이루며 / 나무는 늙어갑니다 포옹하지 못하는 나무의 사랑은 온천천변을 걸으면서 당신이, 아니 그가 내게 들려주었던 밀어였죠. 강대나무가 무리를 이루고 서있는 곳에서요.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더 멀어지지 않은 채,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거리에서 다시 돌아선 것, 당신을 찾아온 것, 그런 이유에서죠. 놀라지 않으시네요. 그래요, 지금 나를 바라보는, 차분하고 무심한 그 눈길이오. 나를 사로잡았던 눈길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죠. 조심하노라 했는데 아차 하는 순간 종이컵을 놓치고 말았던 그때……. 커피가 쏟아진 탁자에서 다리를 뒤로 물린 그가 나를 천천히 돌아봤지요. 내가 아차 했던 건 종이컵을 놓친 순간이 아니라 초빙강사로 온 기자에게 인사말을 건네던 순간이었죠. 누가 귀를 잡고 당긴 듯 그의 얼굴이 한쪽으로 심하게 쏠리면서 움찔거리던 순간, 그러니까 그와 내가 눈길이 마주쳤던 그 순간. 괜찮아요? 그가 물었고, 괜찮으세요? 내가 동시에 물었죠. 묻는 내 입술이 조금 전 그의 얼굴을 지나간 경련에 전염된 것처럼 불불불 떨렸구요. 웃음이 나왔어요. 내가 웃는 걸 본 그가 따라 웃더군요. 눈과 입이 한쪽으로 쏠린 얼굴로 비죽이 웃는 그를 보는데 눈물이 핑 돌더군요. 모르겠어요. 푸르르 웃다가 왜 갑자기 울컥 뜨거운 응어리가 치밀었는지. 병원에서는 혈행장애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산소부족 때문이겠죠. 모든 병이 다 그럴 거지만요. 정말로 그렇게 믿어서 하는 말인지, 소장이 잡아끈 뒤풀이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증상을 산소부족 탓이라 설명했어요. 그래서 제 소원이 산소 같은 여자랍니다. 그의 농담에 장애인 문화유적탐방 프로그램에 그를 강사로 넣었던 소장이 호탕하게 웃었고, 따라 웃던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보더군요.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오른쪽 뺨이 실룩거리면서 부드러운 미소가 입가에 얹혔지요. 그 이튿날 소장님을 설득해 문화신문 한 부를 신청했어요. 신문을 받으면 먼저 그가 쓴 기사가 있는지 찾아보았죠. 그리곤 신문홈피로 들어가서 그가 쓴 유적순례 기획기사를 다시 찾아 읽었고요. 지름 약 14m에 너비 약 2m 안팎, 깊이가 최고 2m 내외로 밝혀진 토층이 확인됐다는 낯선 문장에 밑줄을 긋고, 우물과 기둥 구멍 흔적이 드러났다는 문장을 눈으로 꾹꾹 누르며 읽곤 했어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원형우물의 흔적 위로 그를 떠올리면 잊고 있던 오래전 내 몸속의 떨림이 뱃속을 짜르르 지나갔지요. 신문을 빠짐없이 들여다보기도 했지만 아마 그런 걸 운명의 계시라고 하겠죠. 계약직 교열기자 모집. 문화신문에 입사원서를 보내놓고 시험일 새벽까지 외래어사전을 통째로 외웠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간 출판사에 다녔던 이력도 도움이 됐을 거예요. 출근하고 며칠은 분위기도 낯설고, 행여 오타를 잡아내지 못하면 어쩌나 긴장이 돼서 옆에 누가 오고가는지 신경 쓸 틈도 없었어요. 사흘째 되던 날 출입구를 들어오는 그를 보았죠.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서 잠시 나를 바라보던 그가 웃더군요. 커피를 쏟고 눈이 마주쳤을 때처럼 웃으려는데 딸꾹질이 나왔어요. 한 해 사이에 머리가 희끗희끗 센 채 후줄근한 카디건 차림으로 서있는 그가 문득 허깨비나무처럼 보였지요. 우린 자주 함께 걸었어요. 회사근처 온천천변은 우리가 특히 좋아했던 산책코스였죠. 평소 등을 꼿꼿이 세우고 마음속으로 박자를 세며 규칙적으로 걸음을 내디딜 때면 무릎과 고관절 쪽으로 저릿한 통증이 일었는데, 그와 함께 걸을 때는 달랐어요. 나직나직 들려주는 그의 말이 하나의 이미지가 되고 따뜻한 기운이 되고 내가 걷는 리듬이 되었죠. 그는 종종 멈추어 서서 담배를 꺼내 물었고 반 박자쯤 어긋나는 걸음으로 따라가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곤 했어요. 그를 향해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면 온몸이 노곤하게 풀어지는 느낌이었죠. 온천천변을 걸으며 그는 지난 한 해 자신에게 일어난 불운을 털어놓았어요. 노후에 살 전원 주택지를 마련해두자는 친구의 말에 무리를 해서 사들인 임야가 이중계약 사기를 당했고 그 일로 크게 빚을 지게 됐다고요. 공동매입을 했던 친구의 대출보증까지 서는 바람에 다달이 갚아야 할 돈이 월급여의 절반이 넘고, 그 와중에 사사건건 부딪치던 아내와도 갈라섰노라고. 온천천변 산책 말고 그가 좋아했던 건 막걸리를 마시는 술자리였죠. 아참, 여기 혹시 막걸리도 파는지 물어볼까요? 소주는 별로 안 좋아했잖아요? 하긴 섞어 마시면 뒤끝이 안 좋죠. 술꾼은요, 이런 몸으로 술꾼 흉내나 낼 수 있나요. 그를 따라다니며 막걸리 맛을 배우긴 했죠. 그를 따라 제일 많이 간 데가 서부시장 안쪽에 있던 막걸리 집일 거예요. 거기서 대학시절부터 시 공부를 같이 했다는 그의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죠. 친구들하고 있을 때면 그는 말을 하기보다는 듣는 쪽이었어요. 막걸리 집에서 나오면 전철역 쪽으로 걸어가 새벽까지 영업을 하는 카페를 찾아들었어요. 카페에 앉을 때면 이상하게 우린 늘 마주앉았지요. 옆으로 나란히 앉게 되지가 않았죠. 옆자리에 내려놓은 그의 묵직한 가방 때문이었을 거예요. 하긴 그보다 더 이상했던 건, 이상했다기보다 서운했던 건 내 이야기를 전혀 묻지 않았던 거죠. 내가 왜 멀쩡하게 잘 다니다가도 한 번씩 다리를 몹시 저는지, 어깨에 메고 다니던 가방을 들어 올리지 못해 어정쩡하게 들고 서있는지, 까끌까끌한 피부가 가려워 몸을 비트는지, 약을 거른 다음날이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코미디언처럼 인상을 쓰며 간신히 웃는지. 생각난 김에 약을 먹어야겠군요. 오늘처럼 저녁 대신 술을 먹는 날은 약 먹을 타이밍을 놓치기가 쉽죠. 요즘은 눈이 문제예요. 기자들도 교열부에 있어보지 않으면 잘 몰라요. 장편소설 한 권 읽는 것보다 하루저녁 교정지 열댓 장 보는 게 눈이 더 피곤하다는 거. 오늘 낮에도 출근하는 길에 안과를 들렀는데 당장 일을 그만두셔야겠다, 거의 협박을 하더라고요. 근데 머 일을 관둘 순 없죠. 병원비며 아파트관리비며……. 옆에 앉은 선배 말이 교열부에서 몇 년 근무하다보면 안구건조증은 기본옵션으로 따라붙는 거라니까 그런가보다 하죠. 물론 괴롭죠. 간지대장을 보고 좀 쉬었다 저녁 6시30분께부터 교정지를 보기 시작하는데 본판대장 나올 때쯤이면 활자가 제멋대로 튀어 오르는걸요. 그럴 때는 눈을 감고 먼 곳 어딘가를 보곤 해요. 먼 천장, 먼 나무, 먼 산, 먼 섬, 그리운 먼 그를 생각하면 눈이 시려오고 마침내 눈물이 고이고 촉촉해지는 걸 느낄 수 있거든요. 자료를 찾으러 간 조사실에서 그가 긴 파마머리의 여직원 곁에 비스듬히 서있는 포즈를 볼 때도 눈이 시려오곤 했어요. 유적지에 관련된 화보며 발굴사진을 부탁하는 그의 목소리는 어눌하고 나직하고 부드러웠죠. 여자 가까이 고개를 기울이고 선하게 웃는 모습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그만한 질투쯤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갈 수 있었어요. 어차피 견뎌내야 할 일인걸요. 사실 저는 견딘다는 말을 무척 좋아해요. 그 말 속에 들어앉은 외로움 때문에요. 외로움에는 스스로를 결연케 하는 무엇인가가 있잖아요. 그래서 견딘다는 것에는, 견딘다는 말을 관통하는 단단한 뼈 같은 것이 느껴져요. 근골무력증 진단을 받은 뒤 나는 눈 감고 귀 막은 채 서른 나이들을 건둥건둥 건너왔어요. 옷을 벗고 돌아서서 거울을 보면 곱사등이처럼 휜 척추는 내가 봐도 징그러웠죠. 몸이 굳지 않도록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시시로 찾아오는 통증과 일주일씩 열흘씩 계속되는 불면을 견디면서 나는 좀 달랐어요. 다른 환자들처럼 우울증에 걸리지도 않았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어요. 몇 년간 차도를 보이는 것 같지 않더니, 어느 날부터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병원에서 알게 된 인연으로 장애인인권센터 간사 일을 맡게 되었죠. 소장님이 퍽 인간적이었어요. 시민단체라는 게 결국 사람 장산데 제가 센터에 오는 사람들과 쉬 어울리지 못해도 그러려니 넘어가주기도 했고요. 신문사에 들어온 뒤 그를 만나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술을 마시고 그가 쓴 시를 읽으면서 내내 그를 바라만 보았던 것도 그래서였죠. 그저 바라보는 거리에서 멈추는 것, 포기하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았어요. 국밥을 파는 막걸리 집에서 느릿느릿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카페 유리창 가 맞은편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 앉은 그를 보면서 생각했어요. 그에게로 가는 길이 천리만큼 멀어져도 견딜 수 있을 거라고. 그 일이 있었던 건 작년 3월이었어요. 가만가만 내리는 봄비에 마음이 젖어들던 수요일 밤이었지요.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는데 그가 불렀어요. 우산이 없느냐고, 오늘은 마침 차를 가져왔으니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회사에 차를 가지고 오는 적이 거의 없었는데 그날은 아마 어디 지방취재를 다녀왔던가 봐요. 제 아파트주차장에 차를 대고 그가 잠시만 앉아있자고 했을 때 제가 그랬어요. 같이 올라가자고요. 그의 얼굴이 한쪽으로 당겨지면서 경련이 일었고, 나는 웃는 주름이 잡히는 얼굴이, 그의 모습이 좋았어요. 뱃속이 따뜻해지더군요. 내 안에서 오래된 무언가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어요. 그때 생각을 하니 지금도 여기 아랫배가 아프네요. 상상력이 뛰어난 게 아니라 실제로 아픈걸요. 한동안은 엄청 고통스럽기까지 했죠. 그게 이상하긴 해요. 지독하게 아프던 게 차차 덜해지는데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결정적으로 뭔가를 잃어버린 듯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이요. 그게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데, 지금의 당신 표정 같았겠죠, 아마. 방안에서 둘이 멀뚱하게 앉아있자니 어색하더군요. 마실 걸 가져오겠다며 일어섰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와인이라도 사둘걸 그랬다고, 서둘러 커피를 끓이고 귤과 사과를 챙겨 들어가자 그가 등을 보인 채 비스듬히 누워있더군요. 탁상시계를 보니 10시를 넘어가고 있었죠. 그는 비스듬히 누운 채 건네주는 사과를 먹으며 주절주절 말을 이어갔어요. 온천천변을 걸으면서,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서 들려주던 이야기를 다시 들으며 나는 그를 마주보고 싶었는데 돌아누우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어요. 오래된 비석을 찾아가는 일이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자식놈만큼 좋다고 잠긴 목소리를 내던 그가 문득 몸을 돌려 눕더니 나를 잡아끌었어요. 여기서부터는 말하기가 참 쑥스러운데, 이왕 시작한 거니까 계속할게요. 퇴행성류머티즘과 합병증으로 무력해진, 엉성한 몸을 드러내면서 나는 그의 표정을 돌아보지 못했어요. 한숨 소리 같은 게 났던 것도 같고, 도무지 민망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지요. 그가 엉거주춤 앉은 나를 눕히고는 묵묵히 내려다봤어요. 그의 표정이 어딘지 화난 사람처럼 사나워 보여 나는 눈을 딴 데로 돌려버렸어요. 그가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바로 내 몸속으로 들어왔어요.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죠. 병색이 있고 혼자 사는 여자라 해도 설마 이 나이에 성관계를 한 적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겠죠. 그의 이름을 부르며 힘껏 밀어냈는데 그는 내 양팔을 방바닥에 누른 채 막무가내였죠. 아팠어요.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아팠는데 더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어요. 속절없이 바라보기만 했던 그가, 그의 성기가 내 몸속에 들어와 있다는 감격에 엉치뼈가 어긋나는 것 같았어도 이를 악물고 참았어요. 그렇게 짓누르는 통증과 함께 비로소 그와 한몸이 되는 거라고, 그가 토해내는 숨소리에만 매달렸어요. 그게 얼마나 미련한 짓이었는지 나중에 병원치료를 받으러 다니면서 알게 됐지만요. 거칠게 움직이던 그가 움찔 하더니 몸을 옆으로 굴려 방바닥에 누웠어요. 나는 그대로 누워 얼얼해진 아랫도리의 감각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몸을 일으켰죠. 그의 이름을 불렀어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있는 그의 곁에 앉아 대답을 기다렸어요. 숨을 고르느라 오르내리는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서요. 그는 곧 잠이 들었죠. 낮게 코를 골면서요. 작년 이맘때 일인데 말을 하고보니 그때처럼 몸이 옥죄는 거 같네요. 아, 한 병 더 시키시려고요? 주인아저씨가 힐끔 쳐다보는 게 우릴 걱정하는 눈치 같아요. 그래봐야 겨우 세 병짼걸. 당신은 영 기분이 가라앉는 눈치군요. 잠시 이쪽으로 와서 바깥골목을 한번 내다봐요. 마치 영화세트장 같지 않나요? 여닫이 유리문이며 파르스름한 빛이 흘러내리는 저 가로등이며……. 당신하고 나하고 이렇게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영화세트 속 장면 같겠지요.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는 모든 게 영화처럼, 아니 악몽처럼 흘러갔지요. 다음날 아침 샤워를 하고 나온 그가 젖은 수건을 이불위로 던져놓고 허둥지둥 옷을 입더니 현관문을 나섰어요. 쫓기는 사람처럼 그가 몹시 서두르는 바람에 나도 허둥거려지더군요. 아침을 차려주겠다는 말을 꺼내지도 못할 만큼요. 복도를 지나는 동안 그는 내 쪽으로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지요. 엘리베이터에 탄 그를 보며 정박아처럼 웃었을 때도 그는 웃지 않았어요. 그때 이후 지금까지 그는 나를 보며 웃은 적이 없었지요. 그날 나는 삼판 당직이어서 다른 날보다 늦게 출근했어요. 그는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있더군요. 교정지를 읽다 한 번씩 그를 돌아보았고, 그때마다 아랫배를 칼로 긁는 듯한 통증이 지나갔어요. 저녁 내내 이마랑 코에 굵은 땀방울이 맺히는데, 그는 교열부 옆으로 지나가면서도 내가 보내는 눈길을 모른 척했어요. 그도 나처럼 컨디션이 몹시 좋지 않은가 보다, 불안하고 서운한 맘을 달랬죠. 그런데 퇴근시간이 다돼갈 때였어요. 흡연장소로 사용되던 복사실에서 나오던 그가 나하고 맞닥뜨렸죠. 회사에서는 가급적 서로 말을 건네지 않고 지냈지만 그때는 내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뗐어요. 입을 떼려고 했지요. 그가 몸을 홱 돌리더니 복사실 안으로 도로 들어가 버리더군요. 황당했죠. 그때 우리 두 사람 말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는 전화조차 받지 않았어요.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길게 신호를 보내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어요. 그는 내 눈길을 피했고 내가 있는 자리를 피해 다녔어요. 그게 이해가 되나요? 당신은? 하긴 당신 역시 설명하기가 힘들 거라 생각해요. 나는 그의 이상행동을 나 자신에게 설명해야 했어요. 한번 이혼을 했으니 여자를 대하는 게 힘들겠지, 남모를 상처가 있겠지. 나를 피하는 그를 볼 때마다 주문을 외우듯 반복했던 말이었죠. 알아요, 지금 당신 기분이 어떨 거라는 것, 당신 입장에서는 왜 내가 이 자리에 앉아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 이게 웬 뒷북인지 어이없고 불쾌하기도 할 거예요. 그러나 부탁인데 잠시만 더 앉아계세요. 저는 꼬박 한 달을 그렇게 보냈어요. 전화조차 받지 않는 그를 보며 속을 끓이다 메일을 보냈죠. 내게 왜 이러는지, 귀찮게 매달릴까 겁이 나는 거라면 부담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내가 불편하거나 기분 나쁘게 한 게 있다면 솔직히 말해달라고. 그는 답장을 하지 않았어요. 구구절절 변명하는 게 귀찮았다면 단한번의 표정, 단한번의 눈짓만 보내왔어도 됐을 텐데……. 그리고 알다시피 그는 여름 끝 무렵 회사를 나갔구요. 이거, 당신 가방에서 나는 소리 같은데요. 벨소리, 다운받으셨나 봐요. 요즘 뜨는 드라마 오에스티죠. 음, 잠시만요. 화장실이 깨끗하네요. 개업이라 구석구석 신경을 썼나본데 손님이 이렇게 없으니 내가 괜히 미안해지는데요. 안주를 조금 더 시켜야 하나 어쩌나. 메일이요? 이제 봤나 보군요. 아까 회사에서 나오기 전에 그 여자에게 메일을 보냈거든요.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험악해 보여요. 어쨌든 블로그에 올려 사람들이 다 보게 하는 것보다 낫지 않나요? 구조조정 명단이 돌고 이튿날 등산백과 쇼핑백 가득 짐을 챙겨 나가는 그를 지켜보는데, 내가 앉은 쪽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울적하더군요. 브랜드시인이 아닌 다음에야 전업시인으로 살기 힘든 세상이니까요. 명예퇴직이니 어쩌니 해도 결국 고과점수에서 밀려 회사를 나가게 된 그를 위로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의 블로그를 찾아들어갔던 거고요. 비어두다시피 했던 블로그에 예상대로 글이 올라와 있더군요. 지면을 뺏겼어도 기자본능이 어디 가겠어요. 퇴직한 뒤의 일상사가 차곡차곡 올라오는 블로그를 하루도 빠짐없이 방문했어요. 그런데 막상 방명록을 열고나면 입이 떨어지질 않는 거예요. 원망을 해야 할지 위로를 해야 할지 헷갈렸던 거죠. 몇 달을 아무 말 없이 들여다보다 온천천 겨울풍경을 방명록에 올렸어요. 강대나무를 찍은 사진이었죠. 그가 떠난 뒤에도 나는 온천천변을 자주 걸었고, 강대나무를 보면 어떤 견딜 수 없는 심정이었거든요. 내게서 돌아섰지만 아직 내 마음이 이러니 그가 나를 모른 척하건 말건 상관없다고 사진 밑에 덧붙이기까지 했어요. 상관없노라 해놓고도 매일, 하루에 열 번도 넘게 그의 블로그를 들락거리며 방명록을 확인했어요. 일주일째던가, 답글이 달리지 않고 있던 내 방문글이 삭제됐지요. 그가 일본에 갔다 왔노라며 후기를 올려놓은 날이었죠. 기가 막혀 조금 웃기까지 했어요. 그는 나를 삭제하고 싶었던 걸까요. 일본여행 중 찍은 사진에서 그의 어깨에 착 붙어선 여자가 긴 파마머리의 조사실 여자라는 사실보다 무심하게 눌렀을 삭제키가 가슴을 세게 쳐왔어요. 그땐 눈에 뵈는 게 없더군요. 다시 글을 올렸어요. 거두절미하고 물었죠. 나한테 왜 그랬느냐고. 그래도 한때 나를 좋아하지 않았느냐고. 엉겁결에 잠자리 한번 같이 한 게 이렇게까지 나를 피할 이유가 되는지, 뼈마디마디가 휘어진 몸뚱어리가 그토록 끔찍했는지 정말 알고 싶다고. 당신이란 인간의 진짜 이유가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라고. 비밀글이 아닌 공개글로 버젓이 올려놓았으니 모르긴 해도 블로그 자체를 삭제하고 싶었겠죠. 그러나 자기이름으로 낸 시집을 소개하면서 꽤 많은 독자가 찾아드는 블로그를 포기하는 게 어디 쉽겠어요. 들어가 보니 내 글은 삭제돼 있고, 글쓰기를 금지해 놨더군요. 접근하면 발포하겠다는 경고팻말 앞에 서있는 기분이었죠. 솔직히 닉을 바꿔가면서까지 글을 올려 그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어요. 욱하는 마음에 까발리듯 따지기는 했어도, 그는 내게 가장 가까이 왔던 사람이고, 내 고통을 함께했던 단 한 사람인걸요. 인터뷰기사를 본 날, 다시 그의 블로그를 찾았죠.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그 여자, 알고 보니 그의 블로그를 대신 관리하고 있더군요. 귀여운 폰트며 요즘 뜨는 드라마 촬영지로 꾸며놓은 배경화면이 딱 서른 중반의 여자취향이던걸요. 그 여자 닉을 클릭해 메일주소를 알아냈어요. 그가 성욕을 풀고 간 지 사흘째 되던 날부터 출혈이 시작됐다, 첨부한 건 핏줄이 터진 채 부어오른 질 천장과 자궁경부를 찍은 사진이다, 몇 달째 출혈이 멈추지 않았고 스트레스성 출혈이라 소견을 밝힌 의사의 진료기록과 처방전을 스킨해서 보낸다. 그 여자, 메일을 열어보고 꽤 놀란 모양이네요. 병원을 찾아가서 겨우 얻어낸 사진이랑 진료기록을 오늘 그 여자에게 보내고, 그러고 나서 당신한테 전화를 한 거거든요. 스토커요? 정신병자 같은 집착이라고요?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굳세게 믿는 척하고 내 사랑을 증명하겠노라 애쓰는 것이, 내 시간 내 정열 내 사랑을 바치는 게 다 집착일 뿐이라고요? 내가 그를 실제로는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랑의 절망을 감추려는 꾸며낸 집착일 뿐이라는 건가요? 하, 어쩌면요. 좀 이상한 논리이긴 하지만, 당신 말대로 제가 어차피 스토커라면 내가 내 사랑을 포기해야 할 이유는 더욱이 없는 거겠지요. 당신을 통해 그를, 내 사랑의 끝을 따라가야겠지요. 아무리 그래봐야 죽은 나무에 꽃이 피겠느냐고 빈정거리는 당신의 말투도, 노려보는 눈길도 다시 냉랭하네요. 제 말이 아직 이해가 안 되는가 봅니다. 당신이 내 마음속에서 강대나무로 서있는 거라는 것. 그 사람에게로 가는 말라죽은 나무의 방식이라는 것. 답답해하지 말아요,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죠. 그는 지금 당신 뒤에 숨어 나를 지겹고 역겨운 스토커로 몰고 있지만, 내가 그를 놓을 수 없음은 당신의 존재 깊은 곳에서 그 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나를 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기형의 외로운 몸으로 그를 껴안았던 내 사랑이 나날이 순정해지듯 그 또한 나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거라면, 당신이 내게 일러준 게 그것이 아니던가요. 사랑하는 대상보다 사랑을 전하는 메신저에게 교태를 부려야 하는 나무의 방식이오. 처음 정해진 거리 그대로 세상의 풍경을 이루며 늙어가는 나무의 방식 말이지요. 네? 눌러주다니요? 갑자기 그게 무슨……? 아,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당신답지 않아요. 당신을 통해 당신 뒤에 숨은 그를 사랑한다느니 에두를 것 없이 그렇게 소원이라면 다시 한번 눌러주겠다는 식의 천박한 말투라니요. 취하신 거 같으니 넘어가 드릴게요. 아뇨, 제 손은 놓고 앉아보세요. 아까도 말했지만, 당신하고 잠은 자지 않을 거니까. 당연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게 두려워서죠.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 말이에요. 야윈 가슴과 마디마디 부어오른 등뼈와 살점 없는 엉덩이에 욕정을 쏟고 나면 누구랄 것 없이 기분이 좋지 않을 텐데 말이지요. 견딜 수 없는 사랑보다도,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게 여자로서 두렵고 치명적인 것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전화, 또 그 여잔가요? 받아보세요. 그래요 그럼, 짧게 할게요. 간사직을 집어던지고 나온 장애인센터까지 끌어들여 당신을 초청시인으로 모셔 달라 부탁하고, 그걸 빙자해 당신을 만나려한 것……. 그가 회사를 나가고 난 뒤 나 혼자서도 종종 온천천변을 걷는다는 말은 했지요. 때로는 집까지 한 시간이 넘는 길을 걸어서 퇴근하기도 했는데, 강대나무가 늘어선 둔치를 지날 때면 늘 그가 생각났어요. 그것도 봄비 내리던 3월 방바닥에 누운 나를 묵묵히 내려다보던 사납고 무심한 표정의 그가 떠올랐어요. 어김없이 아랫배에 냉기가 스치는 게 느껴졌고요. 서늘한 사막처럼 뱃속이 비워져 가는 그 느낌에는 묘하지만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뭔가가 있었어요. 아마 내 몸에 일어난 변화 때문일 거예요. 그와 관계를 한 뒤 몇 달간 지속되던 출혈이 멈추면서 생리도 같이 끊겼지요. 치료를 해준 의사 말로는 스트레스로 인한 출혈성 질환이 폐경을 앞당긴 듯하다더군요. 그게 아니라면 관절치료를 위해 장기간 복용해온 스테로이드제가 조기폐경의 원인일 수도 있다고요. 이제 마흔둘,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던 인생이지만 어찌 보면 흔하디흔한 삶이었어요. 딴엔 눈앞에서 놓쳤던 많은 것들을 아쉬워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았지요. 내 몸에 깃든 병과의 오랜 싸움 끝에 드디어 생을 달관해서가 아니라 독한 약에 절어 남들보다 빠르게 늙는 몸에 맞춰 마음이 낡아버렸기 때문일 거예요. 이젠 애를 써도 꼿꼿할 수가 없어요. 오랜만에 찾아뵀는데 센터 소장님도 제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매년 장애인 시화전 행사에 초청되는 시인이 따로 있다는 걸 알면서 굳이 당신을 추천하는 의도가 뭐냐고요. 나에 대해 무슨 말을 전해 들었는지, 내가 내 마음을 어찌하지 못해 강간에 가까운 상황을 상상한 거라고, 치료를 받아보는 게 어떻겠느냐고요. 당신, 내게 그랬듯, 그날 나와 있었던 일을 소장님한테 감추고 싶어한 거 이해해요. 사랑이란 게 원래 감추는 거니까요. 나 또한 오늘 당신을 찾아온 것, 우리 두 사람 감쪽같이 숨어들 서늘한 사막 같은 공간을 품고 있노라 알려주고 싶어서인걸요. 설사 당신이 이미 내가 내민 강사초청장을 던진 채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해도요. 그 전에 당신이 밥이라도 먹자며 끄는 내 손길을 마다한 채 택시를 잡아타고서 진작 가버렸고, 나 혼자 여기 들어와 빈 소주병을 늘려가며 넋두리를 하는 거라 할지라도요. 어쩌면 당신을 만난 적조차 없이 늘어놓는 이 장황한 고백 앞에서 여전히 침묵하는 그를 만나 토란액처럼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나 혼자 젖어든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그리운 몸으로 촉촉이 스며들고 싶었던 것뿐이라는 것, 아실 테니까요, 당신. 안지숙 annumi@hanmail.net  
5 날아라! 택시/이홍사
관리자
3508 2010-05-27
10.06월 창간호 소설 날아라! 택시 세상에는 없다. 홀로 누운 홀아비가 제 아랫도리 주물럭거리듯이 호락호락하고 만만한 게 세상에는 없는 모양이다. 택시를 시작하고 목표를 달성한 날은 겨우 어제 하루였다. 목표치를 달성했지만 어제도 곱게 넘어간 날은 아니었다. 출퇴근시간과 초저녁에만 일을 하고도 내가 정해놓은 액수를 벌었다. 나름대로 정해놓은 금액을 달성하고 나니 저녁 아홉시 경이었다. 룰루랄랄~ 콧노래를 부르며 들어오는데 집 부근에서 느긋하게 택시를 세우는 사내가 있었다. 뒷문을 열고 K시까지 얼마냐고 물었지만 어두워서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K시라면 바로 인근에 붙은 작은 도시였다. 장거리는 처음이기에 잠시 뜸을 들이다가 왕복을 계산해서 사 만원을 불렀다. 사내는 말없이 뒷좌석에 타고 문을 닫았다. 나는 신나게 산업도로를 달렸다. K시 까지는 도로가 좋고 한산해서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K시 입구에 들어서면서 어디로 모시면 되냐고 뒷좌석에 대고 물었다. 그런데 대답이 없는 것이었다. 잠이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다. 역시 대답이 없었다. 차를 세우고 뒤를 돌아보았다. 뒷좌석은 빈자리였다. 사내는 비싸다고 생각했던지 차를 타지 않고 뒷문을 쾅 닫은 것이었다. 나는 차 문 닫는 소리만 듣고 손님이 탄 줄 알고 달렸던 것이다. 화가 나기보다는 너털웃음이 나왔다. 손님이 탄 줄 알고 빈차로 K시까지 갔으니 역시 초보는 틀리는군, 하면서 실내등을 켜지 않은 죄로 좀 비싼 경험을 했다고 내 불찰을 관대하게 덮어주고 아쉬운 가슴을 쓸어내리며 되돌아 내려왔다. 오늘도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럴 땐 예상이 살짝 빗나가도 좋으련만, 역전에는 이미 택시가 사오십 대 줄지어 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택시들이 정차해 있는 줄, 맨 뒤에 택시를 세우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택시 줄은 역 앞 승강장에서부터 민주약국 앞까지 늘어져 있었다. 내가 선 곳은 민주약국 앞이다. 앞차들이 빠지지 않는 한, 내 뒤에는 택시들이 서지 못한다. 바로 버스정류장이기기 때문에 그곳은 비워둬야 한다. 켜놓은 라디오에서는 오늘은 가끔 눈이 올 거라는 예보가 나오고 있었고 정말 눈이 오려는지 구름은 낮게 깔리어 도시하늘을 덮고 있었다. 날씨 탓인지 내 마음마저 우중충하고 지나다니는 행인이 눈에 띄게 줄었다. KTX가 들어올 시간이 어지간히 되어 간다. 그러면 앞에 있는 차들이 술술 빠져나가겠지. 또 진눈개비라도 내리면 더 많은 사람들이 택시를 탈 것이다. 택시기사로서 초보인 나도 이젠 그 정도는 예측 가능하다. 택시를 시작한 지 오늘로서 꼭 나흘 째 되는 날이다. 나는 택시기사로서 체질이 아닌가 보다. 아니, 거꾸로 생각하면 나에게 딱 맞는 직업인지 모르겠다. 운명적으로 정해진 그런 직업. 가만히 생각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이제 겨우 나흘 째 되는 날인데 아직은 단언하기 힘들겠다. 영업용 화물차를 경력이 삼 년 넘어서면 개인택시허가를 시청으로부터 받는 게 아니라 살 수 있는 자격이 된다는 말에 나는 영업용 개별화물을 덜컥 사서 사 년이나 끌고 다녔다. 물론 무사고 경력이라야 한다. 일 톤 트럭으로 영업보다는 순전히 개인택시를 사기 위한 수단으로 자가용 삼아 끌고 다녔다. 결혼하기 전부터 다니던 전자 부품회사가 노조의 연중행사로 하던 거룩한 사명을 띤 파업을 바탕삼아 부도가 나고 개별화물을 시작했으니 정확히 따지자면 사 년이 좀 넘었다. 먼저 화물차 자격증을 따고, 화물차 영업교육을 받고 나서 중고차에 개별화물 넘버를 달린 차를 샀다. 화물차부터 사고 출퇴근하던 소형승용차를 폐차처분 했다. 그리고 오로지 화물차에 매달렸다. 그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명분상 백수였기에 때문이다. 일 년에 한 번씩 받는 영업용 화물 운전자의 교육도 빠짐없이 받았다. 중고차가 나달나달해 질 때까지 끌고 다니다가 화물차를 처분했다. 차는 나달나달해도 개별화물의 넘버 값이 있어서 꽤나 받았다. 막상 개인택시 자격요건을 갖추고 택시를 사려니 마음이 달라졌다. 택시를 사는 것까지는 자신이 있었지만 택시 기사로서는 영 자신이 없었다. 그럼 그 동안 화물차를 왜 끌고 다녔으며 택시면허는 왜 받아놓았는가? 스스로 질책하며 한동안 심리적 갈등을 겪은 끝에 정 안되면 좀 비싼 자가용을 끌고 다니는 셈 치겠다는 생각이었다. 개인택시를 전시해놓고 파는 중고시장은 없다. 개인택시 조합에서 팔 사람이 있는지 암암리에 정보를 입수해야 한다. 각 지자체마다 개인택시의 가격에 차이는 있지만 인구 사십만이 사는 도시에 개인택시 천사백 대와 회사택시 오백 대면 택시로는 과잉공급을 넘어서서 포화상태다. 그렇다고 찻값이 만만한 게 아니다. 생각하면 국산 승용차 중에서 제일 비싼 차가 바로 개인택시다. 또 돈만 있다고 함부로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파는 사람이 개인택시를 못 할 무슨 결격사유가 있어야 한다. 있어야 한다기보다는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이민을 간다거나 신체적으로 다시는 개인택시를 할 수 없는 사유를 만들어서 시청 교통행정과에 신고를 하고 살 사람을 선택해야하는데 살 사람도 마찬가지다. 택시기사 자격이 있어야 하고 택시기사나 사업용 차량의 경험이 삼 년 이상 있어야 하며 무사고라야 매매허가가 나온다. 아무튼 개인택시를 사서 이전하고 개인택시 조합에 가입하고 핸들을 잡기까지 서류철차에만 보름 이상이 소요된다. 그러고 보면 내가 택시를 시작한지 꼭 나흘째라기보다는 벌써 한 달 가까이 걸린 셈이다. 아니다. 자격요건을 갖추기 위해 영업용화물차를 끌고 다닌 것까지 합치면 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하긴, 그런 것까지 다 따지자면 내가 택시를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성장과정의 세월까지 합쳐야하는 것이니, 다 접어두고 택시 핸들을 잡을 날부터 따지자.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꼭 나흘째다. 나는 나흘 만에 산전수전 다 겪었다. 다 겪었다면 좀 과한 표현이고 앞으로 어떤 공중전이나 우주전이 펼쳐질지 모르나 나흘 만에 다른 사람이 겪어보지 못한 경험을 맛보았다는 말이 맞겠다. 사흘 전, 핸들을 잡은 첫 날은 마침 대입 수능을 치는 날이었다. 아침에 집에서 나갈 적에는 그저 시내나 한 바퀴 돌고 와서 아침을 먹겠다는 계산이었다. 말하자면 택시기사로서의 연습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나선 길인데 동네 어귀를 빠져나가자 인도에서 내려와 차도 일 차선까지 나와서 차를 세우는 청년이 있었다. 손님을 태우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상태였다. 책가방을 든 것을 보니 교복은 입지 않았지만 고등학생임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도로는 좀 한산한 편이었다. -아저씨! 현구고등학교까지요. 빨리요. 학생은 앞좌석에 몸을 던지듯이 급하게 올라타며 말했다. 나는 이 도시가 면소재지일 때부터 사십 년이 넘게 살았기에 지리에는 꿰뚫고 있었다. 현구고등학교라면 도시의 저쪽 끝이다. 가는데 아무리 빨라도 신호를 받고 가려면 사십분은 걸리는 거리다. 첫 번째 신호를 받고 있는데 학생은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며 재촉했다. -아저씨! 중앙선 넘어서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세요. -그러다가 카메라에 한 방 찍히면 오늘 일당 다 날아가요 나이는 어리지만 손님이기에 말을 높여주었다. -오늘은 괜찮아요. 저 앞에서 경찰이 수신호를 하고 있잖아요. 수능 치는 시간이 다 돼간단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그날이 수능을 치는 날이라는 게 생각났다. 정말로 사거리에는 경찰이 수신호를 하고 있었고 신호등은 점멸등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비상등을 켜고 중앙선을 넘었다. 경찰이 호각을 불며 다른 차를 세우고 내가 가는 방향으로 신호봉을 흔들었다. 나는 비상등을 켠 채로 달렸다. 다음 신호도 마찬가지로 경찰이 지키고 있다가 내 차부터 보내주었다. 신호를 무시하고 밀린 차들 사이로 종횡무진 달렸다. 달리다가 보니 택시미터기를 누르지 않은 것이었다. -이런! 학생이 하도 바쁘게 굴어서 미터기도 누르지 않았군.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학생은 주머니를 뒤져 만 원짜리 한 장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요금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냥 바쁜 수능생 하나 태워주는 좋은 일을 하고 싶었으나 택시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손님을 태우는 마수걸이라는 생각에 받아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나에게는 거스름돈으로 줄 잔돈마저 준비되지 않았다. 사거리 신호마다 경찰이 지키고 섰다가 내 차가 가면 다른 차를 막고 내 차를 우선으로 보내주었다. 아마도 무전으로 경찰들끼리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목적지인 수험장까지 가는 데는 이십분이 걸리지 않았고 신호를 한 번도 받지 않았다. -어휴! 씨발 오 분 남았네. 학생은 교문 앞에서 차에서 내리며 시계를 보며 중얼거리고는 인사도 없이 차문을 꽝 소리가 나게 닫고는 교문 안으로 뛰어 올라갔다. 내가 학생에게 해야 할 ‘시험 잘 쳐라’ 는 말은 입안에서 맴돌다 혀 밑에서 녹아 침으로 고였다. 나는 그 침을 꿀꺽 삼켰다. 교문 앞에서는 후배들로 보이는 아이들이 징과 꽹과리 북을 들고 벌이던 응원전을 마치고 집기들을 거두고 있었다. 나는 학생이 뛰어 올라가는 걸 한동안 바라보다가 앞에 있는 경찰이 차를 빼라고 호각을 부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비상등을 끄고 교문 앞을 에워싸고 있던 인파사이로 조심스레 차를 빼서 집으로 향했다. 아침에 나가서 마수걸이로 만원을 벌었다. 만원, 만원이라........ 생각하니 아내가 오전 내내 이불가게에 앉아서 여름 이불 하나 팔면 남는 이문이다. 아내는 중앙시장 입구에서 이십년이 넘게 이불 가게를 한다. 내가 용달을 할 적에 가장 많이 실은 짐이 바로 이불이다. 아내를 태우고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이불공장에서 공장도가격으로 한 차씩 싣고 오고 또 팔리는 이불도, 짐이 많으면 배달해주곤 했지만 이젠 이불을 배달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날, 해장에 나가서 만원을 벌어보니 은근히 욕심이 생기는 것이었다. 회사택시 경우 사납금이 팔만 원이나 된다. 사납금 팔만 원이나 채우고 LPG값을 빼고 나머지는 택시 기사가 가진다. 그러나 내 차는 개인택시이므로 연료비만 빼면 나머지는 다 내 돈으로 굳는다. 회사 택시에 비하면 일을 반 만해도 먹고 살만하다. 나는 목표를 설정했다. 욕심내지 않고 연료비를 빼고 회사 택시들의 사납금만큼만 벌겠다고, 그 정도는 출근시간에 두어 시간 뛰고 낮에는 한 숨 자고 퇴근시간부터 초저녁에 손님이 많은 시간만 일하면 될 것이기에 자신만만했다. 생각하니 용달을 하는 동안은 순전히 아내의 이불가게 수입으로 살았다. 화물차는 명분이고 아내의 수입으로 살았으니 좀 미안하다기 보다는 이 고장 말로 하자면 좀 거시기하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하셨다. -욕심 부려 사업한다고 설치지 말고 내 재산을 그대로 지키고 있기만 하면 네놈 평생 숟가락 쥐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게다. 장담했던 아버지의 말씀이 맞았다. 도시가 커지면서 할아버지 때부터 농사를 짓던 과수원이 신도시 구획정리에 들어가면서 땅값이 튀고 그 보상금으로 아내가 하는 이불가게의 상가를 지었다. 상가에서 월세가 나오고 또 지금은 도시의 변두리가 되어 버린 곳에 있는 값이 오른 땅을 팔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내가 죽을 때까지는 먹고 살 수가 있겠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 그런가? 있는 재산을 야금야금 뜯어먹으면서 백수노릇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택시를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버지의 훈수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회사를 그만두면서 가장 안전한 사업,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지긋지긋한 노조에 걸려들 일이 없고 말아먹어도 본전이 되는 업을 한다고 찾은 것이 바로 개인택시였다. 어쨌거나 첫날 해장에 만 원짜리 한 장을 쥐고 와서 목표를 설정했다. 회사 사납금만큼만 벌겠다고, 목표를 설정해 준 그 만원, 얼마나 의미 있는 돈이었는지 첫날 번 그 돈은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두고 싶을 정도였다. 첫날 아침에 그렇게 한탕을 하고 아침을 먹고는 아내에게 있는 잔돈을 탈탈 털어서 조끼주머니에 넣고 선글라스를 챙기고 본격적으로 택시기사노릇을 하겠다고 나갔다. 한 사나흘 하고 나니 지금은 좀 무던해졌지만 첫날, 택시를 끌고 나가니 길에 보이는 게 택시뿐이었다. 널린 게 택시였고 마주치는 차가 택시뿐인 것처럼 보였다. 길가에서 기다리는 손님은 마주치기가 어려울 거 같아서 역전으로 왔었다. 세상에! 역전에는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가 과장을 좀 보태서 오십 대는 넘겠다. 예전에는 대수롭잖게 보아오던 모습이었다. 그 뒤에 서서 두 시간을 기다려도 손님하나 태우기가 어려울 거 같아 버스터미널 쪽으로 갔다. 거기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어느 곳이나 손님이 택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택시가 손님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거기도 틀렸다는 생각에 대형 아파트단지가 밀집해있는 동네로 갔다. 그곳에는 차를 세우지도 않았다. 대여섯 대의 택시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기사들은 아예 차에서 내려 잡담을 하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상황이 저런데 회사 택시들은 사납금을 어떻게 채우는지 의문이 일 정도였다. 거기서는 안 되겠다 싶어 종합병원으로 갔다. 병원에도 택시가 줄을 서 있었다. 손님이 없으면 찾아다녀야지 생각하며 무작정 두 시간을 넘게 끌고 다니다 보니 연료비가 걱정이었다. 그 날 태운 손님은 길가에 서서 택시를 기다리는 손님 셋이 고작이었다. 그날 번 돈으로 연료를 넣어보니 어쩌면 그렇게 꼭 맞아 떨어지는지. 이거 이러다가 진짜로 자가용 삼아서 타고 다녀야하는 거 아닌가 하는 우려가 먹구름처럼 밀려들었다. 저녁에 들어가서 생각하니 다른 택시들은 어떻게 손님을 태우는가? 그것이 궁금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저녁을 먹고 택시를 끌고 역전으로 나왔다. 마찬가지로 택시가 사오십 대는 줄지어 서 있었다. 나는 그 맨 뒤에 줄을 서서 무작정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서 기가 막힌 상황을 발견했다. 발견한 게 아니라 터득했다. 한 삼십분 기다리니 앞에 서 있던 차들이 술술 빠져 나가는 것이었다. 기차가 한 대 들어오면 적어도 삼사십 대는 손님을 태우는 것이었다. 옛날 말에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하고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것이 가장 보기 좋다고 했는데 택시를 해보니 앞에 서 있던 차가 술술 빠져 나가는 것이 그렇게 보기 좋았다. 가만히 보니 택시 기사들은 기차시간을 완전히 꿰뚫고 있는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어느 시간대에 들어오는 기차가 택시손님이 많다는 것까지 알고 있는 듯했다. 내가 관찰한 결과 KTX가 들어오는 시간에 앞에 있는 택시가 자장 잘 빠진다는 것을 알았다. 이 작은 도시에는 하루에 KTX가 세 번 선다. 왕복 여섯 번. 그 시간대에는 앞에 택시가 몽땅 다 빠져 나간다. 나는 당장 역으로 가서 기차 시간표를 확인했다. 그리고 안내소에 가서 역에서 발행한 작은 시간표를 받아서 그 시간을 달달 외웠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나름대로 스케줄을 세웠다. 택시란 게 길에서 세우면 손님을 태워야하는데 딱 맞아떨어지기야 하겠는가만 그래도 대충 어디를 돌아서 어느 시간대에 어디를 가야겠다고 마음을 도사렸다. 계획이란 항상 빗나가게 마련인 모양이다. 다음날 내 택시의 동선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빠졌다. 기차 시간에 맞추어 역전까지 가는 것은 좋았으나 거기서 태운 손님은 전혀 예상 밖의 손님이었다. 그 손님이란 작자는 이십 몇 년 전의 친구 셋을 알거지로 만들어 놓고 종적을 감춘 중학교 동기 최치구다. 녀석이 친구들 입에 오르내린 것은 남녀 공학이었던 중학교 동기와 결혼 했는데 처갓집 재산을 결혼 삼 년 만에 탕진을 하고 더 빨아먹을 건더기가 없자 교묘하고 비열한 수법으로 동기생이었던 마누라를 학대하여 자살의 길로 몰아넣고 사라진 작자였다. 중국으로 날았다는 설도 있고 목포 어디에선가 새살림을 차렸다는 풍문도 있었다. 그가 역 광장에 걸어 나올 때 나는 그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내가 그를 한눈에 알아본 건 그의 걸음걸이였다. 팔자걸음, 다른 것은 다 바꿔도 걸음걸이는 고칠 수가 없는 모양이다.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어, 저거 최치구 아니가? 하는 소리가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최치구가 틀림없었다. 아무튼 그로 인해 제 아내는 정신병적인 증세를 보이다가 자살했고 또 한 친구는 농약을 마시고 헛간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피해를 당한 다른 친구들은 그 타격으로 지금은 어느 도시로 흘러 들어가 무엇을 하며 사는지 친구들 사이에도 화젯거리로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최치구가 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꼬마의 손을 잡고 역 광장을 가로 질러 하필이면 내 차의 뒷좌석에 오르는 것이었다. 데리고 오는 꼬마는 잘 보면 일찍 본 손자로 보이고 잘못 보면 늦게 둔 아들로 착각할 정도로 그가 데리고 다니기에 어정쩡한 나이대의 아이였다. 나는 그에게 불알 차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알은 체 하고 싶지가 않았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최치구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선글라스가 아니더라도 뒤통수만 보고는 알아보지 못할 만큼의 세월이 흘렀다. 입에 올리기 싫지만 말이 났으니 뱉고 가자. 내가 군에 갔다 오니 최치구는 벌써 결혼식을 올리고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군에 있을 때 최치구가 나에게 면회를 온 적이 있었다. 그때 같이 따라온 여자, 중학교 동기생 여자가 있었는데 제대하고 오니 그녀와 신혼을 즐기고 있었다. 그 여자는 나와 너무나 가까운 여자였다. 나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때 최치구의 직업은 금융업이었다. 이름이 좋아 고리대금업자가 아니라 금융업이었다. 뒤에 들은 말이지만 최치구의 머리에서 나온 사기수법은 아니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법, 최치구는 뛰는 놈이었고 그 뒤에 나는 놈이 버티고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펀드의 형식이었다. 일단 가까운 사람에게 돈을 빌린다. 듣기 좋은 말로 금융업의 투자자를 모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자를 십오 프로로 쳐서 매달 빠지지 않고 현금으로 지급하는 방식이다. 그때 은행이자가 겨우 육 프로였으니 촌사람들은 이게 웬 떡이냐 싶었으리라. 그게 소문이 나니 너도나도 농협의 싼 이자로 대출해주는 돈과 영농자금 명목으로 빌린 돈을 계속 재투자해 나갔다. 최치구는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돈을 받지 않았다. 처갓집 돈부터 시작해서 친분이 두터운 사람 돈만 투자에 응해주었다. 소문이 나자 그곳에 끼이지 못한 동네 사람들은 커미션을 주고 투자자로 끼이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러나 최치구는 출처가 분명치 않은 돈은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명성과 주가를 높여 갔다. 급기야 동네 사람들은 땅을 잡히고 빌린 돈을 싸들고 최치구의 처가로 찾아오는 기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누구 돈인지 알아보고 골라가면서 받아 갔다. 그건 최치구의 판단이 아니고 최대주주에게 투자자로서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그럴듯한 명목이었다. 수법은 철저했고 위장술은 능숙했다. 최치구는 처가에 돈을 싸들고 오는 작자의 돈을 절대 받지 말라고 엄포를 놓을 지경이었으니 상황은 보지 않아도 짐작이 된다. 후문에는 최치구가 두목이 아니고 행동파에 불과했으며 결국 부도를 내고 날아버릴 적에는 최치구도 그 시기를 몰랐으며 그에게 떨어진 돈은 조족지혈에 불과했다는 풍문이 한동안 채권자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어쨌거나 최치구로 인하여 그의 아내와 친구 하나가 자살을 했고 그 당시의 금액으로 십억 이상이면 한 동네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지금은 공소시효가 지났지만 그 장본인을 내 택시에 태웠다. 기분이 묘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차를 출발시키면서 내가 룸미러를 힐끔 보고 물었다. -봉평동으로 갑시다. 이미 예상했던 대답이다. 봉평동이면 지금은 도시의 변두리가 되어버린 최치구의 고향마을이다. 봉평동은 강 건너에 있는 마을인데 공단이 들어온다고 지금 한창 공사 중이다. 나는 가타부타 말없이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봉평동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최치구가 예상하는 옛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을 것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봉평동으로 가는 동안 최치구는 옆에 앉은 아이에게 여기가 아빠의 고향이며 옛날에는 여기와 저기가 논과 밭이었고 저기 강에서 썰매를 탔으며 어떤 추억이 서린 곳이라고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나 아이에게 떠들어대던 최치구도 봉평동에 닿자 크게 실망하는 눈치였다. 옛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고 여기 저기 산을 깎아내는 중장비들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나는 고소한 깨소금 맛을 느꼈다. -너무 많이 변해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구나. 저기 저 산 밑에 마을이 있었어. 아빠가 태어난 곳이지. 참 많이 변했구나. 어림잡아 아이에게 자신이 태어난 마을이 있었던 자리를 휘둘러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신곡면 상당리로 가자고 주문을 했다. 신곡면 상당리라면 최치구와 무슨 연고가 있는지 나도 몰랐다. 어쨌거나 신곡면 상당리로 차를 몰았다. 신곡면 상당리라면 한 삼십 분 걸리는 마을인데 그곳에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나는 최치구가 나에게 무슨 말인가 걸어와서 나를 알아볼까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최치구는 택시 운전사에게는 필요한 말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자신의 꼬맹이 아들에게만 신경을 썼다. 역시 나를 몰라보는 것이다. 그렇다. 몰라볼 정도의 세월이 흘렀다. 상당리 입구에 들어서자 동네로 가지 말고 들길을 따라 저쪽 산자락 쪽으로 가자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목적지를 일러주었다. 나는 추수가 끝난 들길을 따라 최치구가 말하는 야트막한 산자락 아래 차를 세웠다. 최치구는 뒷좌석에 실린 가방에서 소주와 종이컵 오징어 등속을 꺼내 비닐 봉투에 담더니 나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는 아이의 손을 잡고 산으로 난 오솔길로 올라갔다. 아마도 최치구 선산인 모양이었다. 나는 택시를 그 좁은 농로 삼거리에서 몇 번이나 수정하여 가까스로 돌렸다. 차를 돌려놓고 내려서 줄담배를 피우며 기다렸다. 이십 분 쯤 지나자 그가 산에서 내려왔다. 택시를 탄 그가 역으로 가자고 했다. 도둑고양이처럼 스며든 그의 귀향, 나는 역에서 그를 알아보는 순간부터 농로를 빠져 나올 때까지 기분이 우울했다. 마음 같아서는 아무도 없는 그 농로에 녀석을 끌어내려 흠씬 패주거나 싹 죽여서 어디 끌어다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유는 무엇이냐? 나는 그에게 당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러나, 녀석에게 당해서 가산을 탕진하고 종내에는 친정의 눈총과 그의 학대로 자살의 길을 택한 중학교 동기생인 혜정이는 촌수로 따지자면 바로 내 재종고모가 되는 사람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쑥대밭이 된 집은 바로 나의 작은 집이다. 나는 그렇게 패 주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으며 역으로 향했다. 핸들을 잡은 손이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역에 도착하니 마지막 KTX가 들어올 시간이 다 되었다. 녀석은 내리면서 미터기를 보더니 한마디 던졌다. -택시비가 꽤 나왔군. 단 그 한마디만 하고는 택시비를 건네주었다.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택시비를 받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역 광장으로 향하는 녀석을 한숨을 푹 내쉬며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녀석은 꼬마에게 뭐라고 하고 역 광장에 세워놓고 내 차로 다시 다가와 조수석 유리를 두드리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의 목소리만 건너올 만큼 조수석 창문을 내렸다. 녀석은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한마디를 차 안으로 던져 넣었다. -황태! 개인택시를 하시는군. 오늘 고마웠네.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농락당했다. 녀석은 진작부터 나를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미꾸라지 같은 녀석에게 당했다. 이빨이 갈리고 치가 떨렸다. 내 이름 황명대에서 비롯된 어릴 적 별명인 황태가 그의 혀를 통해 거침없이 나왔다. 그리고는 제가 할 말은 다했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유히 역 광장으로 사라졌다. 빌어먹을....... 나는 핸들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치를 떨었으나 이미 늦었다. 저 혀를 잘라야 마땅할 녀석은 한 때 내 재종고모부였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은 끝났다. 나는 마지막 확인사살까지 당했다. 그 날은 더 일을 할 수가 없어 택시를 끌고 집으로 들어와 누웠다. 누워서 생각해도 이가 갈렸다. 나는 가끔 만나는 어릴 적 동기들 누구에게도 그를 보았다는 말을 하지 못 할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아는 척하고 일이 왜 그렇게 되었냐고 물어보고 내 궁금증을 해소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최치구는 그렇게 나를 농락하고 떠났다. 망할 놈의 택시, 내가 택시를 하지만 않았어도 최치구를 보지 않고 죽을 때까지 살 수 있었을 텐데....... 분풀이 할 데가 없어진 나는 그날 이 택시를 원망하고 있었다. 아니, 택시기사가 된 자신을 한탄하면서 안마시던 소주를 세 병이나 비웠다. 소주를 비우면서 그 녀석을 잊겠다고 내 차에 태우지 않았다고 최면을 걸 듯 다짐을 하고 머리를 비웠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꾸 떠오르는 나를 농락한 그 얼굴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개자식! 다음날은 잠이 일찍 깨었다. 그러나 술기운이 남아 누워서 미적거리고 있었다. 누워 있으니 잊고 있던 그 자식의 얼굴이 떠올라 미칠 것만 같았다. 차라리 일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차를 끌고 집을 나섰다. 개인택시들은 거의가 새벽운행을 하지 않는다. 사납금을 채워야하는 회사택시에게 그 시간대를 양보하는 차원이다.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해장운행을 나섰다. 그러나 나는 내 목표만 달성하면 바로 들어오겠다는 심산으로 나선 길이다. 역전으로 가다가 길가에 서서 택시를 기다리는 취객 하나를 태웠다. 나이는 사십대 중반인데 밤새 어디서 얼마나 마셨는지 만취상태였다. 그는 신평동 대우트린빌로 가자고 했다. 그리곤 차에 타자말자 뒷좌석에서 곯아떨어졌다. 나는 대우트린빌까지 가서 손님을 깨웠다. 그 작자는 차창 밖을 휘 둘러 보더니 102동 앞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동 번호를 살펴가며 102동 앞으로 갔다. 그는 102동 앞에서 내려 집이 203호인데 택시비를 가져오겠다고 하고는 아파트 현관으로 사라졌다. 그리고는 십 분이 지나도 종무소식이다. 나는 십 분 정도를 더 기다렸다. 혹시나 했던 취객은 역시 택시비를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나는 203호로 올라갔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집에 들어가자 다시 잠이 들었나? 거칠게 문을 두드리자 204호의 아줌마가 문을 열고 나와 새벽부터 무슨 난리냐고 곱지 않은 눈길로 항의 했다. 택시비를 포기하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오늘 해장 운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재수 옴 붙었다 싶어 차를 끌고 집으로 들어갔다. 정말이지 세상에는 호락호락하고 만만한 게 없었다. 얼어 죽을 취객 하나 집에 데려다 준, 불가에서 말하는 공덕을 쌓은 셈치고 마음을 접었다. 어제도 빈차로 K시까지 갔다 왔는데 오늘은 해장부터 취객하나가 남의 심사를 뒤틀어 놓았다. 해장부터 젊은 여자에게 욕이나 먹고 생각하니 오늘도 조짐이 좋지 않다. 조심해야겠다. 이 시간은 출퇴근 시간은 이미 지나고 손님이 별로 없는 시간이다. 나는 줄 끝, 민주약국 앞에서 KTX가 들어와 앞 차들이 술술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택시가 늘어선 길이로 보아 이번 열차가 들어오더라도 손님을 태울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 때 이게 웬 떡이냐 싶게 민주약국에서 나온 삼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내 택시의 앞문을 두드렸다. 여자는 좀 여느 손님과 달랐다. 앞문을 열고 나를 한참 살피더니 타도되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기사를 골라가면서 탄다?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내가 범죄형으로 생겼다면 절대 타지 않겠다는 그런 내심인가? 억지로 웃어 보이며 흔쾌히 타시라고 했다. 차들을 워낙 바짝바짝 붙여 놓았기에 중간에 끼인 차는 타고 싶어도 탈 수가 없는 실정이다. 앞에 늘어선 차들에게는 좀 미안했지만 맨 뒤에 서 있는 차에게 얻어걸리는 행운이었다. 역 앞 승강장까지 한참을 걸어 올라가서 맨 앞차를 타던가 아니면 맨 뒤에 서 있는 차를 탈 수밖에 없는 이치다. 바로 앞에 서 있는 택시에게 좀 미안한 감이 들었지만 차를 약간 후진 시켜 공단 쪽으로 출발 시켰다. 택시 손님은 대게가 여자 손님은 뒷좌석에 타고 남자 손님은 혼자일 때는 앞좌석에 탄다. 헌데 여자는 뒷좌석이 아닌 앞좌석에 타는 것이었다. 좀 당돌한 여자들은 그렇거니 생각하고 대수롭잖게 여겼다. -어디로 모실까요? 미터기를 누르며 손님에게 물었다. 차는 공단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헌데 여자는 좀 망설이는 투였다. 이 여자가 실연 당했나? 곁눈질로 여자를 살피는데 한참 있다가 한마디 했다. -아저씨! 택시 하시면 피곤하시죠? -아~ 예. 조금........ -저 오늘 시간 많거든요. 아저씨 가고 싶은 데로 가세요. 애교가 살짝 묻은 낭창한 목소리였다. 가고 싶은 데로 가라니. 좀 난감했다. -집에만 계시면 우울증 걸리죠. 가끔 이렇게 드라이브하면서 바람을 쐬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나는 강변도로를 드라이브 삼아 한 바퀴 돌아올 요량으로 여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여자는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스타킹은 신었지만 허연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곳을 핸드백으로 가리고 있었다. 강변도로를 들어설 적에 여자는 무릎에 올려놓은 핸드백에서 약봉지를 꺼내더니 드링크와 약봉지를 꺼냈다. 약봉지를 뒤적이더니 피로회복제로 보이는 약을 꺼내 한 알은 까서 여자가 입에 털어 넣고 드링크를 한 모금 마시더니 나에게도 약을 한 알 건네며 드링크 뚜껑을 따서 내밀었다. -피로 회복제예요. 드시죠. -예 고맙습니다. -같이 드라이브 한다고 택시비를 반만 드리겠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여자와 마찬가지로 나는 여자가 주는 알약을 입안에 털어 넣고 드링크제를 마셨다. 운전하면서 드링크를 다 마시자 여자가 빈병을 받아서 약봉지에 넣어 다시 핸드백에 넣었다. -강변도로를 한 바퀴 돌아서 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저씨 마음대로 하세요. 아니 그러지 말고 강변도로를 따라 Y시로 내려가죠. -그럴까요? 나는 여자가 시키는 대로 강변도로를 따라 Y시를 향했다. 나는 여자가 원하는 곳으로 태워주고 요금만 받으면 그만이다. 여자는 다소곳이 앉아 있다가 이따금 내 얼굴을 빤히 보며 무슨 말인가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나이는 있지만 갸름한 얼굴에 긴 목덜미를 지닌 그런대로 봐 줄만한 미모였다. -음악을 틀어드릴까요? 이럴 때 여자에게 무슨 말인가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겨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요. 음악을 틀지 말고 재미있는 얘기 좀 해주세요. -저는 말 주변이 없어서........ -택시를 하신지가 얼마나 되셨나요? -오늘로서 꼭 나흘쨉니다. 완전 초보죠. -그랬군요. 그래서 그렇게 숙맥이군요. 눈치 없기는....... 힐책하는 여자의 목소리에는 애교가 묻어 꽃가루처럼 풀풀 날리었다. 나는 좀 의아했다. 이 여자가 말로만 듣던 꽃뱀?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런 생각이 들켰는지 여자는 다음 말을 낭창하게 뱉어냈다. -전 꽃뱀은 아니에요. 다만 남편이 해외 파견근무 나간 지 이년이 넘었어요. 오늘은 아저씨 마음대로 하세요. 절 가져도 좋구요. 나는 귀를 의심했다. -뭐라구요? -아저씨! 형광등이에요? 절 가져도 좋다구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전율이 흘렀다. 요염한 목소리였다. 나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여자의 혀로 만들어낸 헤비급 펀치에 맞아 하마터면 핸들을 놓칠 뻔 했다. 일이 요사스럽게 흘러가고 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공중전이 기다리는 모양이다. Y시 외곽에는 모텔이 많이 들어섰다. 무인 모텔, 일실 일 차량 모텔, 하늘이 열리는 모텔, 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 있다. 그래서 Y시로 가자고 했구나. 내가 눈치 없는 형광등인가 의심하며 여자를 흘깃 보았다. 이젠 손님이 아닌 여자로 보였다. 여자! 옆 좌석에 앉은 여자의 벗은 몸을 상상하는데 어느새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먹은 약이 의심스러웠다. 하늘색 마름모꼴의 약은 아무래도 피로회복제가 아니라 다른 용도로 쓰이는 약이 틀림없다. -좀 전에 주신 약이 피로회복제가 맞나요? -왜요? 신체 어느 부위에 이상이 느껴지나요? 호호호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그리고 아저씨 이건 아무것도 묻지 않는 속칭 ‘묻지마’ 드라이브예요. 아셨죠? 더 이상은 묻지 마세요. 약효가 한 이틀은 갈 걸요. 나머지는 오늘 밤 사모님께 시주하세요. 말을 마친 여자는 요염하게 웃어 보이며 장난스럽게 한 손으로 운전을 하고 있는 내 아랫도리를 슬쩍 쓸어내렸다. 내 아랫도리는 이미 힘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는 무릎에 얹어놓은 핸드백을 뒤지더니 봉투를 하나 꺼내 내 무릎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거 오늘 택시비예요. 하루 택시비로는 충분할 거예요. 여자는 봉투를 운전하고 있는 내 무릎에 올려놓으며 또 힘이 실린 그 곳을 손등으로 툭 치고 지나갔다. 솔직히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봉투는 의외로 두툼했다. 나는 봉투를 집어 택시 문에 붙어 있는 서랍에 넣었다. 택시가 내 적성에 맞지 않다는 말은 아무래도 수정해야 될 거 같다. 오늘은 아무래도 공중전이 펼쳐질 모양이다. 아니다. 공중전이 아니라 기도다. 나는 기도를 할 것이다. 앞으로 내 택시 사업이 잘 되도록 성스럽게, 아주 성(性)스럽게 기도를 할 것이다. 강변도로를 따라 내려올 적에 흩날리던 진눈개비가 Y시로 들어서자 함박눈이 되어 내리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길은 아무래도 눈이 쌓여 미끄러울 것이다. 그러나 돌아올 걱정은 잠시였다. 오로지 기도를 생각하며 달리는 한산한 Y시 외곽도로는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으로 눈송이가 차창으로 흩날렸다. 와이퍼를 켜고 길을 밝혀 기도의 장소를 향한 내 택시는 거침이 없었다. 잠깐 사이에 외곽도로를 벗어나 들길로 들어섰다. 들길을 콘크리트로 포장이 깔끔하게 되어 있어 미끄럽지도 않았다. 저 멀리 들판너머로 보이는 조그맣게 보이는 무인 모텔이 여러 채 보이기 시작했다. 무인모텔은 셔터가 올려진 아무 방이나 주차를 하고 셔터를 스위치를 내리고 방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올라가서 방문에 돈을 넣으면 방문이 저절로 열린다. 방바닥 아래 주차장을 하나씩 가진 모텔이다. 그 곳에서 신에게 바치는 거룩하고 성스러운 기도를 마치고 나오면 그 뿐이다. 누구와도 마주칠 일이 없다. 무인모텔의 간판이 보이기 할 때 나는 가속페달에 힘을 주며 속으로 외쳤다. 날아라! 택시! 그렇게 외치는 내 눈에, 오늘 신의 제물이 될 여자의 벗은 몸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외치고 또 외쳤다. 날아라! 택시. 이홍사 lhongsa@hanmail.net 소설집<아버지는 맞아도 싸요>외  
4 나는 나다/조영옥 image
편집자
4830 2010-05-25
10.06월 창간호 수필 지난 5월 5일 북천에서 열린 어린이날 행사에 우리 강습사는 낙동강 사진전시와 모래그림그리기, 그리고 나무목걸이 만들기 코너를 운영하였다. 나무목걸이 만들기는 낙동에서 농사짓는 석민씨가 재료를 모두 가져와 운영하였는데 얼마나 많은 아이들 이 왔다갔는지 모른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나무프레임을 사포로 문지르고 그 위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 그리고 줄을 매달아 걸면서 그렇게 기뻐했다. 나는 그 속에 들어 설 엄두도 못내고 석민씨에게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고 행사를 마칠 즈음 석민씨가 목 걸이를 하나 주었다. 조그맣고 둥근 나무에는 “강은 (중간에 빨간물고기 그림) 나다” 라고 쓰여 있었다. 처음에는 귀엽고 앙증맞은 아름다움에 기뻐하였지만 좀 있다 마음은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강과 물고기의 일체감, 강과 하늘, 별, 새.... 이런 자연과의 일체감을 부르짖는 물고기의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이내 비명으로 바뀌어졌다. 지금 낙동강에서는 얼마나 많은 물고기 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고 도망치고 강가 버드나무는 허리를 베이며 울고 있다. 하늘은 물속에 제 얼굴을 비치기 두렵다. 별도 물속에 잠긴 채 빛을 뿌릴 수가 없다. 모든 사물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부대끼고 의지하며 공존의 끈을 붙들고 살고 있는데 그래서 서로가 서로임을 알게 되어 고마워하며 살아가고 하는데...인간은 이 끈을 느끼지 못하거나 단절 시키거나 외면하면서 저렇게 탐욕의 갈쿠리를 강물 속에 던지고 있는 것이다. 두렵다. 인간이 무섭고 내가 무섭다.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지만 꺼집어 내면 줄줄이 끌려나올 나의 욕심을 생각하면서 조금이나마 덜고 싶은 마음, 그 마음으로 오랜만에 강길을 걸어보았다. 비가 한방울 두방울 뿌려 은근히 걱정을 하였는데 다행히 힘들 정도는 아니게 그러면서 차라리 뜨거운 햇살 이 없어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경천교를 향했다. 서울에서 거제에서 진안에서 그리고 우리 지역에서 찾아온 서른여섯명이 출발하였다. 경천교에 닿으니 지율스님이 열심히 자전거를 저으며 오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강창교에서 상주보 건설지를 보고 자전거도로길을 걸어 경천교까지 오면서 낙동강을 느끼는데 오늘은 거꾸로 가기로 했다. 뜨거운 여름햇살을 바로 받으며 걷는 것보다 등으로 받으며 걷는 것이 덜 힘들 것이라는 판단에서 였다. 경천교에 서서 다리 이쪽 편과 저쪽 편을 확실히 비교할 수 있었다. 아직 포그레인의 손자국이 없는 아름다운 강과 파헤쳐지고 잘라져 나간 모래벌의 흉측함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강은 제 몸의 의미 를 잃어가고 변화되었다. 그러나 달라져도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강의 슬픔이나 죽음마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습격의 현장에서 우리는 비로소 ‘생명의 강’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상주보는 이미 보를 세울 축대공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밤샘을 하며 일을 한 덕택이리라. 7, 8월 장마가 오기 전에 보의 한쪽을 완성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인명의 피해를 입어가며 미친듯이 공사를 하고 있다. 공사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자들이야 무슨 죄가 있나만 그래도 육중한 덤프트럭이나 굴삭기를 보면서 야속한 마 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무언가 일을 할 때 그 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런 일의 의미를 생각하는걸까? 정말 멋지고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걸까? 아니 우리의 대부분의 의식들이 그런지도 모른다. 자연을 변화시켜 쾌적한 환경을 만들고 그것을 내가 누리고 그것이 행복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우리 문명인의 의 식은 이런 공사가 정말 대단한 역사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한강이 항상 그랬던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 아닌가? 그 속에서 즐기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들, 서울사람들이 아닌가? 그 이전의 모습을 모르니 지금의 모습이 한강 자체인 것이다. 나중에 우리의 후손들, 우리 자식들도 직강이 된 모래벌도 없는 그런 강이 낙동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즐기면서 홍수가 나면 하늘 탓만 할 것이다. 비가 한방울 두방울 뿌리고 비는 아카시꽃향기를 함께 뿌린다. 길 가 찔레꽃 하얀 꽃도 아름답다. 우리는 공덕천을 가서 큰 강을 변화시키는 것이 지류에도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 할 수 있었다. 이 땅의 수천 모든 지류들이 직강천으로 바뀌게 되는 미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삼강교를 가기 전에 상풍교에 들러 34공구 쪽 공사 진행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은 이 나라를 지켜야 하는 육군 공병대가 강 파헤치기 공사에 투입된다는 곳이다. <상수도 보호구역>이라는 표지판이 무색하게 물은 온통 흙탕물이다. 그 아름답고 투명하던 물은 어디로 갔나? 상풍교를 걸어가는데 다리 위에는 수십톤급의 덤프트럭이 연신 지나가고 다리는 휘청거렸다. 삼강교에서 지율스님은 버스에서 내려 자전거를 몰고 혼자의 길을 갔다. 원래의 계획은 안동쪽으로 가서 병산습지나 부용대쪽을 보려했으나 가는 시간에 비해 보고 느끼는 시간이 적을 것 같아 우리는 계획을 바꾸어 회룡포 쪽으로 가서 내성천을 따라 걷기로 했다. 지율스님의 말에 의하면 이곳 내성천이 강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 한다. 그저께 비가 왔기에 회룡포마을로 들어가는 뿅뿅다리는 물에 잠길듯 걸어갈 수 있었고 많은 관광객들이 휴일을 이용해 이곳을 찾았다. 언젠가 무슨 드라마의 촬영지라 해서 한동안 찾아왔는데 1박 2일의 촬영지가 되고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 자본의 힘, 광고의 힘,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의 한정된 삶의 괘도까지 함께 보니 씁쓸하다. 저렇게 다리를 건너며 아름다운 모래밭을 걷는 사람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모래들이 사라질 것을 알지 못한다. 상류쪽에 보가 들어서면 더 이상 모래도 유입되지 않고 있던 모래마저 쓸려나가고 물의 수위를 높여 이곳이 물에 잠길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내성천을 따라 걸었다. 강물에 의지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소박함을 이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모를 심기 위해 물을 채워 놓은 천변의 논이 안쓰럽게 보인다. 내성천에 발을 담그고 물수재비를 뜨고 우리는 잠시 놀다가 그곳에서 오늘 하루를 마무리했다. 모두 손을 잡고 원을 만들어 잠시 묵상을 하고 ‘강은 흘러야한다’는 노래를 부르고 서로의 소감을 나누면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작은 힘이나마 이 강을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며 돌아 나왔다. 빗발이 점점 굵어졌다. <경천교에서 오른편으로 바라 본 풍경-아직 공사를 하지 않은 곳이다> <경천교에서 자전거 도로 쪽으르는 이렇게 가물막을 치고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예전의 모래밭은 그 모습이 사라진지 오래다> <경천교에서 상도촬영장 쪽으로 가고 있는 일행들> <오리섬- 예전에는 농사를 짓기도 하고 비가 오면 잠기기도 했던 섬- 자연생태가 참으로 잘 보존되었던 곳인데 이렇게 모래를 쌓아 그 모습을 없애버리고 그 곳에 생태공원을 짓는단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 <무슨 용도로 쓸 것인지 이렇게 산허리에도 나무를 베어 버렸다. > <비봉산 꼭대기에서 바라본 낙동강 버드나무 군락지- 강물따라 자라고 있는 이 버드나무를 누군가 야금야금 베고 있는 중이다.> <자전거 길을 따라 걸어서 상주보 건설현장으로 향하고 있다> <맑은 물의 회귀? 녹색뉴딜? 그들이 세워놓은 구호는 하나하나 이런 반문을 하게 만드는 어처구니 없는 것들이다.> <가슴이 턱턱 막히는 거대한 구조물..이런 것들이 전국에 이땅의 모든 강에 만들어져 물을 막는다. 흘러야 할 물을 막아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강의 모습과 일의 진척에 사람들은 눈을 뗄 수가 없다> <모래로 만든 도시- 강의 모래를 퍼올려 또 다른 세상을 만든다- 그들에게 모래란 무엇인가? 모래가 생명이 아니고 물질일 뿐- 그래서 이런 모습이 가능한 것이다.> <거대한 모래성을 밟고 내려갔다- 중동면 소재지에 가서 점심 먹고 원기를 내기 위해 우리는 모래산을 내려갔다> <낙동강 지천인 공덕천- 높아지는 수위에 대비해 한쪽면은 이렇게 변했다> <이쪽은 앞으로 변할 공덕천의 현재의 모습이다.> <상풍교 아래 이런 팻말이 무색한 공사현장- 지자체는 골재를 팔아 얼마나 챙길까?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는 것일까?> <모래만 파헤치고 퍼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강의 둔치까지 훼손을 시켜 직강으로 만든다> <회룡포 뿅뿅다리- 뒤편에 관광객들의 차가 보인다. 그러나 앞으로 이런 관광이 가능할까? 아마도 안될것이다.> <마지막 목적지-내성천에 다달았다. 강의 원형이 그대로 살아있다는 내성천-비가 제법 많이 뿌렸다> <강물에 발을 담그고 물을 느끼고 물과 내가 하나됨을 느낀다. 우리가 "강은 나다!"라는 일체감을 갖는다면 이 강을 영원히 흐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3 속리산 휴게소 외 1편/임술랑
임술랑
4376 2010-05-17
10.06월 창간호 시 속리산휴게소 밤새 달려 온 그대는 바퀴를 멈춘다 아- 가득한 산바람 잠시 마시더니 詩가 가득한 지갑을 꺼낸다 그 중 낡은 것 한 수 집어서 커피 자판기에 주르르 밀어 넣더니 향기로운 차 한 잔 탁 앉힌다 딸깍딸깍 쇳덩어리 利子처럼 떨어진다 九屛山 꼭대기에 눈발이 희끗한 풍경 속에서 한 모금 한 모금 행간을 새기며 가슴 속에 뭉친 긴 숨을 내쉰다 우리 어머니 임술랑 파란색은 우리를 가둔다 더 이상 하늘 멀리 보지 못하게 산 봉오리 끝 허공은 짙은 파랑이다 분명 저 쪽 속 깊이깊이 어떤 사물이 존재할 것인데 먼 곳까지 갈 수 없도록 하늘에 친 파란천막 바람 불어서 그 천막이 펄럭거릴 때면 가끔 우주 저 너머가 보일 듯도 한데 바람은 마음자락 흔들다 가 버리고 우리는 우리에 갇혀 뒤척인다 어머니! 파란 하늘 산밭에서 두더지마냥 땅을 파는 우리 어머니 우주는 넓고 끝도 뵈지 않는데 초라하게 초라하게 땅을 긁고 계십니다 임술랑 imsullang@hanmail.net 시집 <상 지키기>  
2 『우리들의 하느님』(권정생, 녹색평론사, 2008)
무궁화
2544 2010-05-11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다 『우리들의 하느님』(권정생, 녹색평론사, 2008) 1.반대편에서 우리와, 나와 주변을 다시 보게 하는 귀한 글 개정증보판을 구해서 읽고 생각하는 동안 끝끝내 마음이 편치 않는 이상한 경험은 몇 가지 원고가 증편되기 전에 읽었던 기억과는 사뭇 다르다. 흉내조차 내기도 힘들 기준으로 부단히 재촉하는 나무람이 산문 속에 절절이 날을 세우며 나 자신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차라리 솔직하게 표현하면 불편하다. 우리 한국사회는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부모의 직업으로 이어지는 것이 잠정적으로 거부되어왔기 때문에 노동자로서의 프라이드나 정체성이 없다고 본다. 그럼에도 묘하게 작가 권정생은 철저한 계급의식과 전복성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은 혁명가의 정신이 섬뜩한 것은 왜일까. 재단사, 재봉사로서, 꼴망태와 멍석짜기를 하는 농부로서, 기도하는자로서, 아미쉬(amish)적인 삶을 굳건한 토대로 한 분명한 계급성을 실천한 이야기꾼이다. 이토록 스스로의 비판을 끊임없이 할 수 있는 고백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하느님 앞에서 ‘믿음이 없는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해서인가? 라는 자문 속에서도 ‘직업은 달라도 품삯은 같아야 한다.’와 같이, ‘이미 주신 것을 가지고 함께 나눠먹는 것이 바로 성서의 가르침이다.’라고 직설하듯이, ‘가난한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 가난한자 곁에서 함께 가난해지는 것뿐’이라는 주문 속에 독자의 운신 폭은 더더욱 조여든다. 신자유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주체를 예수의 사상에서 그대로 제시하는 데 무소유, 무계급, 그리고 무정부(독자로서 세계정부를 칭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였다)이며, ‘세상왕의 말을 듣지 말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 세상감사는 죄다 이기적 감사라.’ 따끔하게 제언한다. 화해하고 사랑으로 함께하는 제사가 되지 못함까지 남과 북의 냉탕, 온탕식 대적 상황에 직접 묻고 답한다. ‘천국이어야 할 땅을 업수이 여기지 말라’ 권정생 선생이 쓴 백여 편의 동화를 제대로 보고자란 세대는 아니지만 이 산문집을 통해 권정생 선생께서는 하느님의 경전이 어린이에 있다는 것을 아시고 맨 앞에서 실천하셨다. 어쩌면 그 나라의 복음을 동화 속에 꼭꼭 숨기셨다. 어른들만 모르게. 기독교인과 성자(聖者)로서의 권정생 선생의 표상들이 같은 기표로 가슴에 겹치지 않는 이유는 예수를 닮는 삶과 (현재의) 기독교인이 비춰지는 모습에 균열이 분명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차라리 무신론자가 아닌 독자로서는, 무척 당황스럽고 단호한 당신의 신관(神觀)은 차라리 괴로울 지경이다. 현재 우리의 기독교인들에게 금기시되는 우상에 절하지 말라 라는 근본주의, 원리주의적 견지와 일견 배척되는 고목나무에 절하는 어머니의 지순한 마음은 참다운 평화와 순수의 종교임에 우회하지 않으며, 동시에 원래의 하느님을 이야기 하며, 더 나아가, ‘마음의 소’를 잃지 않기 위하여 ‘고목나무’ 나, ‘큰 바위’에 매어 놓는 의식, 어머니 당신이 주체가 되어 요구한 약속이며, 어머니의 능력에 맞춘 약속으로 설명한다. 하느님의 임재가 특정지역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에스키모 부족, 아마존 부족, 일본의 작은 섬마을, 한국의 산속 바위덩어리와 집안에서도 아주 먼먼 옛날부터 하느님이 있었다는 글을 읽으며, 젊은 시절 오랫동안 품어왔던 의문들이 풀어졌다. 산문집을 읽어나갈 수록, 당신의 글 쓰는 작업과정과 내면의 목소리를 동화와는 사뭇 다르게 들을 수 있는 통로가 생성된다. 일관되게 흐르는 서정은 ‘삶의 방식’ 자체가 고통을 감내하며 사는 것으로 인생에 맞서는 자세이다. 지구에 현현한 성자들의 예를 들면서까지 당신 고통의 동반을 무기로 삼듯이 굳건한 주체로 서있다. 당신께서는 교육계를 포함한 아동문학계에 대한 지난날의 부당한 체제 순응적 ‘외로운’ 반성을 포함하여, 권력에 대항하는 문화정치를 동화와 산문 속에 담고 있다. 종국에 당신이 그리도 갈망하는 ‘평화’ 조차, 고요한 소리 없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힘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괴로움을 내재하고 있음을 간파한다. 끈기로서 논지를 따라가면 드디어 당신이 추구하는 평화가 구체적이 된다. 최후의 만찬( Last Supper )에서, 피와 살(포도주와 빵)을 나누어 먹이는 의식의 해설에 그 평화의 함의를 끄집어낸다. 빵과 목숨은 하나의 개념이며, 빵이 곧 내 살이고, 내 목숨이며, 내 이웃의 목숨임을 깨닫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피가 내 피가 되고, 내 피가 이웃의 피가 된다는, 나아가 온 인류가 한 핏줄로 이어진 것을 알아차릴 때, 평화가 가능한 때로 풀이한다. 이것을 독자인 내가 자문해 볼 때, 괴로운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설명이고 두려운 설명인가. 평화가 고요가 아님을, 풍요가 아님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감출 길이 없다. 다시 <최후의 만찬>에서 피카소의 <게르니카>로 옮긴다. 게르니카에서 광주까지, 당신께서 가정을 만들지 못한 채, 수많은 가정과 동물들의 고통까지도 가정파괴범을 보는 인정의 시각에서, 현재까지 유전되는 아픔을 지적하고, 예수의 가르침대로 두 벌 옷 갖기조차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한 채, 선물 받은 노란셔츠를 15년 넘게 입는 모습으로, 스스로 남의 몫을 쓰고 있지는 않는지 스스로 경계하며 ‘검박’하게 실천하신 그것만으로도 독자로서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산문을 통독하는 과정 내내, 예수의 삶을 계급적으로 독해하는 독자로서, 전복을 꿈꾸는 주체로서 당신을 상정해 볼 때, 대응하는 틈새의 전략이 때때로 혁명적 이어야함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종국은 비폭력 저항주의이며, 철저한 비폭력 평화주의자의 모습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자면 하루속히 무기를 없애야 한다.” 며, 강대국과 종속국가의 지도자에게 직접 책임을 추궁한다. 서해 천안함 침몰에 따른 불편한 상황을 보는 각계각층의 인식과 반응들을 대비해 볼 때, 이 평화주의자의 농민과 농촌, 어민과 수병들, 노동자에 대한 슬픈 인정을 읽게 된다. 2. 태기네 암소 눈물 독자인 나는 시를 쓰기도 하고 53살인 현재 다시 인문학공부를 하는 대학원생이기도 하지만, 주업은 수의사 노릇을 하며 산다. 그리하여 요즘 농촌의 삶이 도시의 삶 못지않게 팍팍함을 읽으며 살고 있다. 권선생의 시선들은 훨씬 깊고 넓은 생명을 조관한다. 조탑리 마을의 태기네 할머니의 안쓰러움을 뒤로한 채, 암소의 생식기에 연분 없는 정액을 주입하는 모습 뒤로 권선생의 안쓰러움의 눈길을 느끼고도 남는다. 당신이 거두어 기르는 강아지 뺑덕이에게 조차 자연적인 교미를 시켜주지 못하는 자괴감과 미안함을 토로한다. 농촌후계자들에 대한 희망도 포기하지 않는다. “농사야 말로 성직중의 성직이다”를 대명제로 노정하여, 건강한 농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하여야 나라와 전 인류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다급함을 강조한다. 지금, 농촌의 상대적 빈곤이 뚜렷함을 걱정하며, 집집이 빚더미에 억눌리고, 일할 만한 일꾼의 부재도 걱정한다. 자연과 교감하며 사는 삶의 복원, 또는 회복을 꿈꾸는 「제 오줌이 대중합니다」라는 산문에서 시계보다 더 자연친화적인 생체시계의 암시는 현재 우리가 자연과 생명들, 제 몸뚱이조차 들여다보는 교감능력이 떨어지거나 퇴화하는 모습에 대한 탄식을 읽는다. 「슬픈 양파농사」에서는 마을 승현이네 아버지의 제초제 음독자살로 잠 못 이루는 밤의 슬픔을 농촌문제로 제기한다. 농사는 사람 살리는 일이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이 가장 대접받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대부분 글 쓰는 직업의 사람들은 여행이 많거나 많이 움직이며 글 소재를 체험한다. 권선생은 먼 여행을 건강상 문제뿐만이 아니라 자동차에 대한 혐오 때문 등과 겹쳐서 자발적 여행은 없었다. 심지어 아동문학상 수상식에도 참석을 마다하셨을 정도이며, 그 좁고 어두운 책들로 둘리고, 세계전도가 붙어 있는 공간에서 주로 책으로 세상을 조관하신 것을 읽을 때 다시 부끄럼이 밀려온다. 「유기농 실천대회에 다녀와서」처럼, 봉화, 춘양, 불영사, 울진 및 후포로 도는 여행의 기록조차 숙연한 느낌을 감출 수 없다. 강아지를 위해 저녁밥을 해서 먹인 뒤에 피곤한 여독을 추스르는 모습에서 그 미안함은 절정으로 달린다. 대구의 김종철 선생께서 주간으로 있는 녹색평론사의 책을 통해서도 당신께서 원고를 작성하기도 하였지만, 수준 높은 자연주의, 생태주의의 글들을 열독하셨음이 틀림없다. 그 중에 큰 관심은 전술한 아미쉬적 영성의 삶을 이상적 공동체로 보았고, 이에 대한 열망들이 이 산문집 곳곳에 어김없이 담기고 있다. 특히 이 산문에서는 일리인의 『인간의 역사』를 인용하며 노동의 신성성과 더불어 하늘의 뜻을 살아온 위대한 인간의 역사를 강조하며, 대지의 주인으로 당당한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계급성을 강조한다. 다시금 인간이 위대해 지기위해서는 ‘노동하는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머리로 사는 것 보다 부처처럼, 예수처럼 바보같이 몸으로 살아야하고 성직자들도 흙으로 돌아가 몸으로 일하는 것이 하늘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 주장한다.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당신의 생태주의적, 도시혐오적 자세는 아이누족의 동요와 이사야 11장 성구를 인용함으로 압축시킨 「녹색을 찾는 길」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쨔쨔는 이렇게 들려주었다 아이누 옛날 눈 속을 맨발로 다닐 때 용감했단다. 나이도 셀 줄 모르고 끓이거나 굽지도 않고 그냥 날것을 먹던 때 아무한테도 지지 않고 진짜 용감했단다. 샤모가 와서 아이누 샤모 흉내내게 되었고 샤모 나으리들처럼 으스대었지 그때부터 배가 아파지고 다리가 아파지고 우린 보통 배가 아프면 맨발로 산 다녔단다. 눈이 내려도 맨발로 산 다녔단다. 그래서 우리 모두 사이가 좋았지 샤모처럼 째째하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안했고 허풍도 안치고 나쁜 짓은 모두 샤모가 가르쳐주었단다. 아이누 나라는 진짜 사람의 나라야 우리 모두 죽은 뒤에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세상이 되지 못하면 샤모도 다른 나라도 망하고 말거야. 끓이거나 구워서는 안 된다. 그냥 날것이 좋단다. 우리는 거짓말하지 않았으니 모두 망한다 해도 하느님은 다 알고 계실거야 거짓말하면 하느님 혼내실 거야. 알았지 너희들 내가 말하는 것 비웃으면 진짜 혼날 줄 알아라, 거짓말 아니야 우린 거짓말 하지 않는다. 권선생께서 가장 좋아하신 성구에 그의 삶이 담겨 있다 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 없다 (이사야 11장 부분 인용) 3. 그리운 자연, 그리고 어린이 가난한 어린이 동포소녀 스에꼬와 윤복이의 일기는 1955년과 1965년에 쓴 일기를 산문 「편지」에 소개하며, 아이들의 일기야말로 ‘율법의 완성’ 즉, 예수님의 어린아이로 돌아가라는 성구를 강조한다. 당신이 하고 싶고, 전하고 싶은 많은 열망들이 아프고, 가난하고, 처절한 환경 속에서 동화세계 안으로 꽃피우며, 미래 속, 희망의 연대를 꿈꾼 혁명가를 읽는다. 낙동강 개발 사업을 생전에 보시지는 못하였지만, 한 해에 5만종이나 되는 생명의 목숨을 절단 내며 살아가는 우리가 위대하고 축복받은 인간인가를 벌써 제시하며 미리 슬퍼하셨다. 동화 속에 등장하고도 남을 자연의 이름들을 본다. 버들강아지, 찔레순, 보리깜부기, 밀이삭, 보리밭 속의 종달새, 시냇가의 박하풀, 미나리아재비, 여뀌풀, 도깨비바늘, 꺽지, 퉁가리, 꾸꾸리, 은빛 피라미, 얼룩 피라미, 모래무지, 냉이, 까실쑥부쟁이, 진달래꽃……. 그리고 깊은 물에는 가물치, 잉어, 민물자라, 메기, 뱀장어, 얕은 물에는 쟁게미, 미꾸라지, 납꾸래기, 등미리, 금빛 붕어, 쟁피리,수수미꾸라지, 쌀미꾸라지 등 산골 개울의 가재와 버들치들이 벗고 뛰어든 시냇물에 배꼽과 발등을 스치고 지나는 모습을 담는다. 「용구 삼촌」에 등장하는 멍청한 회갈색의 산토끼 「오두막 할머니」에 등장하는 검둥이와 옥토끼, 그리고 배고플 때 먹는 풀도 있다. 참꽃, 빼기뿌리, 무논의 올미싹과 올미뿌리, 쌀버들강아지, 송기, 찔레꽃, 삐삐, 띠뿌리, 풀무꽃줄기, 고수대풀, 수수풀떼기, 달래나물, 달래뿌리 등, 또 머리감을 때 쓰는 두꺼비찰밥풀, 창포, 약으로 쓰는 겨울보리뿌리, 싸리나무 기름, 겨릅대 태운 것, 치자물, 강냉이뿌리, 쑥, 아궁이 흙들도 기술한다. 산문 「새야 새야」에서는 추운 겨울 굶주린 새들을 거두는 장면을 보자. 오롱오롱 떠는 참새를 위해 묵은 쌀 한 바가지를 마당에 뿌리고, 그 후 참새는 물론 까치, 굴뚝새, 산비둘기, 양진이, 오목눈이의 등장을 보며 새들의 말을 동화적으로 상상한다. 오히려 동식물의 언어를 배우면 사람이 지혜로워질 것이라 주장한다. 옛사람과 자연에서 배운 농부들은 자연의 소리를 잘 알아듣고 소통할 것 같기도 하다. 당신께서는 사람만 빼고 자연을 훼손하는 동물이 또 없다며 새를 부러워한다. 산문을 읽으면서 가장 감동적인 마무리의 발문을 인용하고자 한다. “지지배배 짖던 작은 새가 숲속으로 날아가듯 그는 그렇게 가버렸다. 가장 치열하게 싸운 전사에게만 돌아가는 휴식이다” -(이대근) 강태규 itiscool@hanmail.net 시집<늙은 대추나무를 위하여>  
1 진달래 피는 풍경 외1편/권석창
임술랑
3997 2010-04-29
10.06월 창간호 시 진달래 피는 풍경 서울 큰 병원 갔다 오는 영감 기다리는데 저 멀리 영감 지팡이 짚고 오시네 그래, 다리는 고쳐준답디까? 아니, 연골인지 뭔지가 닳아서 가망 없다네 그럼, 이제 지팡이 짚고 살아야 되니껴? 그렇지 뭐 할미는 앞이 캄캄하다 아이고, 우리 영감 다리가 세 개 됐네 곁에 있던 수다쟁이 할머니 세 개는 뭐가 세 개? 내사 보이 네 개다마는 할미가 그 흔적만 남은 한 개의 다리를 추억하는 동안 앞산 진달래 지천으로 피고……, 있었다 낟알 이 풍진 세상에 한 알의 낟알로 태어나 껍질이 벗겨지는 아픔을 겪으시고 쌀 이 되시다 뜨거운 솥에서 고난을 겪으시고 밥 이 되시어, 도반들과 더불어 구절양장 머나먼 고행의 길을 거쳐 해우소에서 면벽수도, 용맹정진 하시다가 문득, 해탈하시어 똥 의 형상으로 부활하시다 이 밭 저 밭 다니시며 이 세상 살아 있는 것들의 거름이 되시더라 권석창 kweon51@chollian.net 시집<눈물 반응><쥐뿔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