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1호...
   2019년 09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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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77481 2014-11-03
691 봄날은 간다 외1편/최영 file
편집자
599 2018-10-01
봄날은 간다. 장사익이 자제요양 병원에서 무료 공연을 합니다 무대에 오르기전 와상 환자들이 있는 병실에 왔습니다. 환자마다 악수를 하더니 의식이 혼미한 환자의 귀에다 대고 <봄날은 간다>를 부릅니다. 노래를 들은 환자가 눈을 떳습니다. 그리고 미소를 짓습니다 장사익이 웃습니다. 모두가 행복합니다 장사익이 이렇게 외칩니다. "여러분 노래 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기쁘게 하는 줄 몰랐습니다. 우리 다같이 불러요. 가래가 그렁그렁한 목소리로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빛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마음으로만 부르는 환자도 있습니다. 봄날이 이렇게 가고 있습니다 202 호실의 죽비 스물 다섯에 혼자 되어 70년 동안 수절했지만 마지막까지 여자이고 싶어 안개꽃 무늬 부라우스 입고, 스카프 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이 죽비가 되어 내 가슴을 탁 친다. 이십년 동안 아들의 아들들을 키우다 뇌출혈로 쓰러져 말문이 닫힌 모습도 죽비다. 살아온 날들을 더듬더듬 털어놓을 때 네, 네 그러셨어요, 로 답해주면 잇몸을 환히 드러내며 합죽하게 웃는 죽비 돌이켜보니 죽비 아닌 게 없다. 최영/ 1958년 전라북도 무주 출생 97년 신라문학 대상 대구 경북작가회 회원 현불문 회원  
690 일상의 행복 외1편/고경하 file
편집자
624 2018-10-01
일상의 행복 아침에 눈을 뜨면 부시시한 나를 보며 미소짓는 당신 모습에 행복을 느낍니다 구수한 된장국에 반찬 몇 가지 놓고 밥을 먹으며 오가는 말 속에 잔잔한 행복을 느낍니다 출근하는 당신 구두를 닦으며 잘 갔다 올게 가벼운 입 맛춤을 하고 현관문을 나서는 당신을 보며 행복을 느낍니다 아이는 학교에 가고 가족의 남아있는 흔적을 정리하며 행복을 느낍니다 저녁에는 무슨 반찬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줄까? 고민하는 나를 보며 일상의 행복을 느낍니다 가을향기 잠자리 날개 짓 하며 날아오를 때 코스모스 한들한들 정답게 이야기할 때 당신과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려본다 불면 날아갈까 놓으면 넘어질까 갈대처럼 여리고 약하다며 든든한 기둥이 되어야 한다고 부족한 나를 사랑으로 채워주는 당신은 나에겐 가을의 향기입니다 고경하/ 1965년 11월4일 광주출생 2017년 상주동학문학제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문집 [우리는 하나] 특별상 [해풍에 피어나는 동백꽃이여]. 시월문학제. 웹진 문학마실. 민족작가연합 평화통일공동시집 [도보다리에서 울다 웃다] 창작詩 출품, 민족작가연합 회원.  
689 전사의 보고 외1편/김대용 file
편집자
692 2018-10-01
전사의 보고 -추모시- 조국분단 18년째 되던 1963년 5월 어느 따스한 봄날,동구밖 새색시 배웅을 뒤로하며 칠흑같은 어둠을 헤치고 잘리워진 조국의 허리를 기여히 잇겠다고 갈구리 같은 두손 불도저 같은 두발로 전선을 넘었다가 결국 철조망에 찣기고만 붉은심장 펄덕이던 젊디 젊은 이준원 전사 날개꺽인 감옥, 뒤이어 사선을 넘어온 옆방 동지에게 아기 출산 소식을 듣고 다시 두주먹 불끈쥐며 황무지땅 남녁에서 전사는 밭을 일구고 집을짓고 동지들을 묶어 내었습니다. 허리를 다쳐 지팡이에 의지한 노구를 이끌고도 2차 송환 기자 회견에 미선,효순 추모 촛불에 광우병 촛불에 탄핵에 디뚱 디뚱 가장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장기수 선생들 모을려면 이준원선생에게 연락하면 됩니다" "동네 아파트 하수구가 막혔으면 이씨에게 부탁하면됩니다" 처녀 총각 중매도, 홀로 사는 동지들 살림살이도, 한반도 정세분석도, 젊은 일꾼 교육도, 먼저간 동지들 추도사도 이준원선생에게 부탁하면 다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조선인민군 이준원 전사의 땡크같은 두발 두손이 지나가면 "괜찮아 괜찮아" 하며 "허허" 한번 웃으면 다 됩니다. 통일의 그날 전사 이준원 보고합니다. 종놈들의 세상 친북을 종북으로 부르고 싶으면 친일도 종일로 불러야 하고 친미도 종미로 불러야 마땅하다 멀정한 국회의원도 "종북보다 종미가 문제다"라고 했다가 9년이나 감옥살이를 하는 나라 친박은 종박으로 친이는 종이로 친노는 종노로 친문은 종문으로 친척은 종척이 되고 친구는 종구가 되고야 마는 식민지 분단조국 이놈의 나라는 종놈들의 세상이다. 김대용 민주노총 대구본부 전통일위원장 wlqrnjs21@hanmail.net  
688 가시 /김철순 file
편집자
1114 2018-08-31
가시 가을의 끝자락에 다시 나선 길이었습니다. 나이아가라 강물이 흐르는 기슭을 따라 걷다가 한여름 녹음에 가려서 보지 못했던 가시가 무성한 나무를 만났습니다. 나무의 팔뚝에 매달려 깃발처럼 나부끼는 노란 단풍잎 사이로 흉물스러운 가시가 드러났습니다. 나무의 두루뭉술한 허리에서 가슴까지 사방으로 뻗어 나온 무성한 가시를 보는 순간 요양원에 있는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가슴을 적시고야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치매로 고생한 어머니를 병시중하면서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그 몹쓸 병 때문에 점점 더 쇠약해져 가는 어머니의 몸이 안방 구들을 지키기 시작할 때는 자식에게조차 짐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식의 생각을 먼저 읽기라도 한 것처럼 어머니를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를 병구완하는 것은 평생 당신을 위해 고생한 아내에게 진 빚을 갚는 것이라고요. 아버지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칠 년 반을 살다가 어머니는 이승을 떠났습니다. 고향 뒷산 양지바른 언덕 중턱에 어머니를 묻고 내려올 때도 당신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아픈 아내와 함께 하는 동안 눈물은 이미 가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당신은 아내를 찾았습니다. 경부선 철도와 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고 사방으로 뻗어 나간 국도와 지방도가 보이는 그곳에 당신의 아내를 묻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쁘게 사는 자식이 달리는 차 안에서도 어머니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깊은 배려였습니다. 아내를 묻고 돌아와 여생을 혼자 살겠다며 자식의 근심을 덜어주던 아버지에겐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이 시간이 갈수록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여 년이 넘는 세월을 외로움과 서러움 속에서 살다가 기력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어느 날 새벽, 산책길에 나서다가 집 앞에서 넘어졌습니다. 수술 후, 조금씩 거동이 불편해지자 어느 자식도 선뜻 당신을 떠안을 수 없었습니다. 서울에서의 생활이 행복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허구한 날 빈집을 지키기 일쑤였고, 공원을 찾아다니며 만난 노인들과 친구가 되어 온종일 밖에 있어야 했습니다. 팔십 중반의 노구를 이끌고 해거름 무렵에야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꼿꼿하게 몸을 세우고 자식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자식이라는 달콤하면서도 쓴 열매 앞에서 가슴이 아팠을 당신은 오히려 따뜻하고 자상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이 우선인 당신의 가슴엔 얼마나 많은 상처를 품고 있었을까요. 아들과 딸 사이의 미묘한 차별에서 오는 서운함만 늘어놓던 내가 결혼 후, 신혼여행을 마치고 친정집에 들어섰습니다. 반갑게 맞아주는 아버지의 얼굴이 그렇게 환한 적이 있었을까요. 당신 앞에 나란히 앉은 딸과 사위를 지긋한 눈길로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말없이 사위의 손을 잡더니, 셋째 딸인 ‘나’를 데려가 줘서 고맙다며 사위의 손등을 토닥였습니다. 골칫덩어리였던 과년한 딸을 혼사 시킨 안도감과 시집을 보내고도 불안한 당신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시댁에 가려고 막차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습니다. 어느새 부쩍 야윈 당신의 등은 그날따라 더 측은했습니다. 역 대기실을 빠져나왔습니다. 플랫폼엔 기차가 막 들어섰습니다. 기차에 올라타기 전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개찰구에 돌기둥처럼 서 있던 아버지가 옷소매로 눈물을 연신 찍어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당신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저 역시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두 언니와 두 오빠를 혼사 시키면서도 활짝 웃던 당신이었으니까요. 말썽꾸러기인 셋째 딸을 떠나보내는 후련함과 미덥지 못한 마음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아버지라는 엄청난 생의 무게로 허망한 세월 앞에서 잠시 흔들렸을까요. 세월이 흘러 이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나이가 훌쩍 넘었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나 또한 가슴에 박히는 가시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속수무책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식은 행복이며 아픔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자식과의 추억을 반추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자식은 가슴에 묻고픈 애틋함이기도 했습니다. 바람이 한바탕 울음을 토해냈습니다. 밤새워 비가 왔습니다. 아직도 단풍 몇 잎 붙잡고 저리도 아파하는, 가시가 무성한 나무를 뒤에 두고 떠나올 때야 알았습니다. 셋째 딸인 나는 당신이 눈을 감는 그 날까지, 평생 당신의 가슴에 품어야 하는 가시라는 것을. 아직도 사는 게 힘들면 한국에 나와 같이 살자, 하는 구순의 아버지 생각에 돌아오는 내내 목이 메었습니다. ******************* 약력 2004년 캐나다 한국일보 신춘 문예 당선 2018년 미주 한국일보 신춘 문예 당선 현재 토론토 한인 문인협회 회원 <추천의 말> 토론토에서 활동하는 김철순씨와 이현숙씨를 한국의 '문학마실'에 추천, 소개합니다. 그동안 지켜본 결과 두 사람 다 글쓰기에 대한 진지함과 잠재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았기에 토론토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코자 함입니다. 김철순씨의 수필쓰기의 능력은 이미 공인된 바도 있지만, 작품의 진지성과 육화된 체험의 글쓰기로 읽는 이에게 공감을 불러내기에 충분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꾸준한 노력으로 정진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이제 한국에 이름을 알리고자 합니다. 이현숙씨의 역시 이곳에서 이미 인증된 바 있습니다. 그동안 무게 있는 수필을 써 왔으나 근래에 시를 창작하는데 열의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매우 조심성 있는 태도와 사려 깊은 감성으로 글쓰기에 접근하고 있음이 돋보이며, 앞으로 나올 시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2018년 8월 31일 권 천 학 (시인 ․ 국제 PEN 한국본부 이사)  
687 나의 그림은 아직도 / 이 현 숙 file
편집자
1079 2018-08-31
나의 그림은 아직도 적당하게 낀 안개가 편안한 아침이다. 가시거리가 길지 않아 제한속도보다 천천히 가야 한다. 운전대를 잡고 가는 길이 여유롭다. 북쪽으로 올라가는데 부분적으로 정전되었는지 몇 군데 신호등이 점멸되어 있다. 사거리에 길게 줄을 지어 너도 한 번, 나도 한 번, 하면서 교대로 지나간다. 약속 시각은 이미 지나가고 있다. 뿌연 안개 속에 온몸이 젖어 들 것 같다. 기계적이고 허둥대는 일상적인 삶에서 오늘만큼은 풀어지고 싶다. 저 안개처럼... . 약속 장소가 가까워질수록 설렘이 일어나고 있다. 그 ‘언제 한 번’이 바로 지금이다. 토론토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친구 하나, 그리고 그 반대편인 서쪽에 사는 나와 가운데 사는 다른 친구, 비슷한 시기에 이민 와서 만난 셋이다. 사는 거리도 거리이지만 각자 생업에 매달리다 보니 서로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다 하는 전화기 속의 마지막 말은 늘 ‘언제 한번 보자’는 막연한 기약이었다. 몇 번의 번복 끝에 드디어 날을 잡았다. 이른 아침에 만나 그림도 보며 지난 이야기도 하자고 했다. 는개가 내리고 있다. 미술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준비해 온 두 종류 겉옷 중에 두터운 것을 걸친다. 봄을 느끼고 싶었는데 바람이 아직 차다. 몸이 마음을 이기지 못한다. 표 파는 곳 앞에 두 여인의 모습이 어슴푸레 보인다. 창을 바라보며 도란거리는 둘의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두어 발자국 뒤에서 머물 듯 서 있다. ‘늦어서 미안하다.’ ‘괜찮다.., . ’이런 인사는 우리에게 필요 없다. 가슴 저 밑에 있던 반가움이 얼굴로 올라와 있으니까. 카페에서 차 한 잔부터 하자며 자리를 옮겨 숲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는다. 숲은 아직 잔설이 남아있다. 그 기슭에 비스듬히 서 있는 비쩍 마른 나무들이 우리의 이야기가 궁금한가 보다. 모두 몸을 꼬아 창 쪽으로 가지를 바짝 기대고 있다. 그 가지에 눈웃음을 보낸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기 삶의 한 토막을 연다. 다른 친구도 보여 준다. 나의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이민의 강 가운데는 망각의 늪이 있었는가 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 아득하게 잊고 있다. 새롭고 낯선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삶만을 유지하고 있다. 늘 눈앞에 보이고 밀려오는 것들 때문에 볼 수 없었던 지난날들의 마디가 하나씩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나’였던 ‘내’가 살아가면서 주위의 환경과 상황에 따라 작아지고 희석되고 어우러져 가고 있다. 그런 얼기설기한 나의 모습이 가끔은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서글퍼지기도 한다. 저 멀리 있던 어린 날의 한 자락도 꺼내 본다. 한여름, 만삭의 몸으로 가정방문을 왔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 이름을 기억해 낸다. 가파른 북선동 산허리 길을 올라오시느라 힘이 들었는지, 뒷목에서 성글 성글 맺히던 땀방울에 무안하고 어색했던 일. 개량 한복이 잘 어울리던 그분의 연세를 헤아려 본다. 중학교 가정 과목의 숙제였던 뜨개질을 늘 내 것까지 해 주었던 단짝 ‘희야’도 가슴을 치고 올라온다. 웃으면 양쪽으로 덧니가 보이던 친구, 학년이 올라가 다른 반이 되었을 때도 방과 후면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기다려 주던 친구, 보고 싶다! 주위에 가득한 안개 덕분에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다. 셋 중 누구도 그 흔한 스마트 폰조차 보는 이가 없다. 숲은 우리가 처음 앉았던 그 시간이나 지금이나 옅은 안개로 싸여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희미한 기억들을 이야기하면서, 뭉클하게 가슴 적시는 삶의 토막토막들을 쌓아 올리고 있다. ‘아 - , 살고 있었지. 그렇게 소중하게 나도 살아왔었지... .’ 과거는 흘러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연결하고 지탱하게 해 주는 길고 긴 다리였다. 산다는 것, 추억이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내가 있다는 것은 잔잔한 감동이다. 창밖에 휘청거리며 얽혀 있던 나무들이 조금씩 허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안개가 위로 올라가는 모양이다. 처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미술관 직원이 이제 문을 닫을 시간이란다. 그림 구경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러나 작품 감상을 못 한 것을 아쉬워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우리의 그림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아직 그려야 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언젠가 그리워 할 이 순간을 충실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려나가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그림을 보러 언제 한 번 다시 와야겠다고 셋이 입을 모았다 미술관을 뒤로하고 내려오다가 남겨 놓은 우리의 이야기가 못 잊혀서 뒤를 돌아다 본다. 조금 전 미술관에서 같이했던 안개가 산봉우리 중턱을 단단히 둘러싸고 있다. 우리의 마치지 못한 그림들을 잘 보관해 줄 모양이다. '언제 한 번'이 다음에 다시 올 때까지. 이현숙/토론토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2014년) <추천의 말> 토론토에서 활동하는 김철순씨와 이현숙씨를 한국의 '문학마실'에 추천, 소개합니다. 그동안 지켜본 결과 두 사람 다 글쓰기에 대한 진지함과 잠재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았기에 토론토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코자 함입니다. 김철순씨의 수필쓰기의 능력은 이미 공인된 바도 있지만, 작품의 진지성과 육화된 체험의 글쓰기로 읽는 이에게 공감을 불러내기에 충분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꾸준한 노력으로 정진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이제 한국에 이름을 알리고자 합니다. 이현숙씨의 역시 이곳에서 이미 인증된 바 있습니다. 그동안 무게 있는 수필을 써 왔으나 근래에 시를 창작하는데 열의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매우 조심성 있는 태도와 사려 깊은 감성으로 글쓰기에 접근하고 있음이 돋보이며, 앞으로 나올 시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2018년 8월 31일 권 천 학 (시인 ․ 국제 PEN 한국본부 이사)  
686 사랑이란 외1편/차영호 file
편집자
1181 2018-08-31
사랑이란 샌들을 신고 엄지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 그리하여 무꽁댕이 같은 발가락부터 노닥노닥 세상을 죄다 바람 들게 하는 것 감나무님 말ᄊᆞᆷ 나 같은 늠들도 살기 팍팍하면 속을 먹같이 썩혀서라도 탱글탱글 내 새끼들 영글리는 거 모르나? 정말 모르나? 사람 탈을 쓴 짐승님들아 차영호 (車榮浩) 1986년 《내륙문학》으로 작품 활동. (사)한국작가회의 회원. (사)우리시회원. 시집 『어제 내린 비를 오늘 맞는다』, 『애기앉은부채』, 『바람과 똥』 등  
685 과학할까요 외1편/조재학 file
편집자
1135 2018-08-31
과학할까요 그대 입술이 내 입술을 더듬으면 마치 초콜릿을 녹이듯 혀의 감각이 살아나요 대뇌피질에서 신경전달물질 도파민이 앤드로핀이 분비 되요 입술의 감각이 더 예민해져요 그대 입술의 움직임을 내 몸으로 따라가요 말할 수 없는 쾌감에 젖어들어요 계속 하고 싶은 충동에 몸이 떨려요 온 몸이 나른해져요 온 감각이 한 곳에 모여요 심장의 박동수는 130까지 올라가죠 혀가 혀를 애무하는 동안 침 속의 그대 호르몬 테스통스테론은 나에게로 옮겨지죠 9mg수분과 0.18mg의 수용성물질이 교환 되죠 0.7mg의 지방과 0.45mg의 미네랄이 교환 되죠 박테리아 수백만 마리가 교환 되죠 나의 면역력이 높아지죠 뜨거운 키스는 한번에 12Kcal를 소모시켜요 키스가 길어질수록 그대 좀더 키스를 잘 할 수 있도록 내 입주변의 키스근육은 모양을 잡아주죠 그대의 흡입력에 내 몸이 빨려들고 나는 눈을 감고 그대 혀의 움직임을 음미하고 뭉크 씨는 아직도 절규하고 있다 함께 과학 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환승 후배의 부친 문상을 다녀오다가 그 때의 호수에 가 보았네 작은 보트 한 척이 묶여서 흔들리는 기슭을 지나고 바람이 드나드는 소나무 울타리를 지나 굵은 줄기들이 제 몸을 비틀고 있는 등나무를 지나 그때 꽃이 흐드러졌던 그 나무 밑에 서네 흰 오리 서너 마리와 계절을 잊은 듯한 청둥오리 몇 마리가 호수에서 자맥질을 하고 있네 구름 몇 조각이 천천히 흘러가네 예순일곱 살의 내가 건너편에 앉은 스무 살을 물끄러미 보네 가버린 것은 보이지 않네 사라진 시간 사라진 해 사라진 바람 사라진 천둥 겨울 호수를 한 바퀴 도네 침침해진 눈을 자꾸 껌뻑거리며  
684 아버지의 흔적 외1편/권천학 file
편집자
2196 2018-08-31
아버지의 흔적 무적함대였던 등판과 막강했던 어깨가 아버지였다 힘없는 두 다리 사이, 습하고 냄새나는 아버지의 부자지를 주물럭거려가며 내가 태어난 DNA의 통로가 되어준 흔적과 씨앗주머니의 주름 사이사이를 닦는다 퀴퀴한 역사의 어두운 길을 더듬어 들어간다 초점 없는 시선으로 그윽하게 나를 들여다보시는 아버지, 부끄러움도 없다 어쩌면 아버지는 지금 생명의 시원을 찾아 바이칼 어디쯤을 고비사막의 모래언덕 어디쯤을 찾아 헤매며 원시 이전의 시간이 고여 있는 웅덩이를 응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회로의 어디쯤에서 우린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돌아오세요! 5, 아버지의 DNA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법이다’ 하지만 아버지, 살면서 그 성깔 못버리겠어요 아버지의 그 충고 때문에 헤깔리며 살았잖아요 그리고 아버지도 그리 사셨잖아요 아버지나 아버지의 딸인 나나 일급수 물고기로 사는 게 편하잖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아버지 살다보니 일급수에 사는 물고기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아버지 가신 곳 거기, 틀림없이 햇빛이 눈부시게 찰랑대는 일급수 바다, 맞지요?  
683 폭설暴雪 전前에 외1편/구재기 file
편집자
1281 2018-08-31
폭설暴雪 전前에 바람이 일고 한 잎, 낙엽이 진다 두 잎, 진다, 그리고 또 한 잎… 그 위에 어른하는 눈발 지나온 길 점점 묻혀가면서 보깰 틈도 없이 낙엽 한 잎, 한 잎… 진다 다시 바람 일고 낙엽 쌓일 틈도 없이 떨쳐 드날리는 눈발 *어른하다: 얼핏 한 번 나타났다가 없어지다. *보깨다: 무슨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자꾸만 쓰이어 불편하다. 시詩란 무엇인가 시詩란 무엇인가 누가 그렇게 말했던가 詩는 사람이라고… 그러나 그것은 詩를 말하고 있는 것일 뿐 詩를 생각하는 순간의 일일 뿐 詩를 詩처럼 詩를 詩같은 삶이라고 얼마나 거짓으로 살아왔는가 그러나 이런 말들은 이미 내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詩앞에서는 말[言]이 없다 말이 필요 없다 다만 詩앞에서는 말을 잃을 뿐 단 한 편의 詩를 앞에 두고 전혀 말하지 않고 있음은 詩 앞에서 詩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 부끄러워하라, 다만 詩 앞에서 詩를 말한다는 것은 자유로운 사람의 마음 씀씀이가 행동이, 표정이 부드러워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詩를 말할 수 있는 말[言]을 멸滅할 수 있는 가장 체계적이고 완벽한 존재의 위장술僞裝術 < 구재기 약력 > • 충남 서천 출생 • 197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시집『휘어진 가지』와 시선집『구름은 무게를 버리며 간다』등 다수 • 충남도문화상, 시예술상본상, 충남시협본상 등 수상. • 충남문인협회 회장과 충남시인협회 회장 역임 • 현재 40여년의 교직에서 물러나 <산애재蒜艾齋>에서 야생화를 가꾸며 살고 있음  
682 꽃의 무게 외1편/박경조 file
편집자
1128 2018-08-31
꽃의 무게 서른 살도 더 먹은 우리 집 목련나무 꽃샘바람도 저 혼자 받아내나 싶더니 금세 허공이다 개화와 낙화, 찰나의 무게를 담장아래 내려놓았다 겨우 봄 한철 앓다 사라진 여든 여섯 어머니, 지극한 생애인 듯 휑하다 이 느낌은 목련의 낙화만은 아니다 대를 이어 꽃 피워내느라 낡고 허술해진 여자의 일생 그 완결을 본 때문일 것, 바람에 쏠려 떨어진 저 고목의 봄날을 비질하며 종량제 봉투 가득 채워 드는 생각 피워내고 지워지면 또 다시 꽃눈 틔워 생명을 기르는 모든 본래는 어머니라는 이름, 그 무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수상한 연분홍 청량산 오르막길이 허락한 색깔일까 발길과 눈길 확 잡아당기는 저 연분홍 눈부시게 화려 하다고, 아니 수상하다고, 저 색(色)이라면 한번 수작 걸어 보고 싶다고 한 마디씩 말(言)탑을 쌓으며 오르다보니 청량사 법당이다 속된 마음 꿇어 108배도 잠깐 이상하지, 자꾸만 내 마음 끌고 가는 저 색을 두고 누굴 닮아 맹물 같다고 아니, 저리 섹시한 민낯도 있냐고 이 여자 저 남자 참견하지만 예까지 끌고 온 불온한 세상 위로하듯 작년 그 자리 다시 온 걸까, 연분홍 첩첩 내리막길 뛰던 봄바람 연달래 그 꽃잎 하르르 스치며 하는 말 누군가의 본색(本色)찿는 일이란 참 어렵더라고, 맞다, 박경조;경북 군위출생 2001년 『사람의 문학』등단, 『사람의 문학』편집위원 시집 《밥 한 봉지》 《별자리》출간  
681 노을 속으로 외1편/이승호 file
편집자
1207 2018-08-31
노을 속으로 저 연꽃밭! 우리에게 누락된 장(章장)을 세기의 장인들이 놓쳤을 리가 없다 대성당이 내게 열어 보여준 그 충만한 색깔과 쏟아져 들어오는 빛의 일렁임까지 어제의 메아리들이 돌아오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몹시 지쳤으나 내심 우리의 눈빛이 생에게 말하려는 것들 노을 속으로 세월의 저 망연자실에게로 태양과 암흑의 왕들이여 나와서 보라. 하늘 아래 어느 해인가, 그 마을에 여자 거지가 아이 하나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들은 뽕나무 아래서 맴을 돌다 허겁지겁 오디 열매를 따먹기 시작했다 이 가지 저 가지를 휘어 당겨 고픈 배를 달래고 이따금 어린 거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어진 이가 있어 다음 해도 그 다음 해에도 뽕나무는 그들 차지였다 오디를 먹으면 거지가 된다더라 하늘은 이미 그 뜻을 알고도 남았다 주린 자의 양식을 빼앗지 말며 가난한 자의 좌판을 발로 걷어차지 말며. 이승호 춘천 출생. 2003년 《창작21》로 등단. 시집 《행복에게 바친 숱한 거짓말》외.  
680 오메가 외1편/안민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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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6 2018-08-31
오메가 야훼시여, 아브라함께서 이복누이를 아내로 맞은 것[창세20:12]은 거룩한 오류입니까. 내밀한 법칙입니까. 근친과 본향의 경계는 석양 물드는 사막 능선 구간 같은 것. 아내를 매도賣渡하여 목숨을 구하고 재물을 얻은[창세12:16-19, 20;2] 유인원의 심장 쪽으로 다이아몬드 비가 내립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께서는 두 딸을 잉태[창세19:36]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초승달의 기운과 혼미한 기도가 은밀한 구원을 잉태케 한 것이지요. 지금도 소돔과 고모라는 눈물 속에서 불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아들 이삭께서도 어머니 장례식 때 질녀를 장막에 들였습니다. [창세24:67] 리비도와 안식은 어떤 애곡哀哭보다 상위의 관습법. 취한 새들이 흐린 창공을 향해 비상합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께선 외삼촌의 두 딸을 취하였고[창세29:28] 야곱의 아들 유다께옵서는 며느리 다말과 관계했습니다. [창세29:25] 믿음은 신화의 완성입니다. 아방가르드는 관계적 예술의 복원입니다. 할렐루야. 위대한 왕 다윗께서는 밧세바를 범한 뒤 그 남편을 사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지만, 죄의 결실이 지혜의 왕 솔로몬[사무엘하12:10]이시니 손금마다 젖과 꿀이 흘러야 합니다. 만인의 영도자인 모세께서 구스 여자를 탐한 것[민수기12:1]은 거룩한 기도이며 계시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는 언약궤 위로 야생화가 피어납니다. 그리하여 야훼시여, 당신의 말씀이 그리스에서는 철학이 되고 아메리카에선 기업이 되고 동방의 공화국에서는 찬란한 대기업이 되고 황홀한 드라마가 되었습니다. 동방의 공화국 목자들은 참으로 물질을 사랑합니다. 음지를 사모합니다. 그들은 아버지들의 아버지보다 더 빛납니다. 각본이 성서만큼 무결하고 완전합니다. 병인病因은 세계世系의 유전입니까. 구약의 언약입니까. 묵찌빠 전면전을 선포했다 아름다운 네가 돌아오면서 무엇도 하지 않을 권리를 외치며 무엇도 할 수 있는 권리를 외치며 피할 수 없는 전쟁, 공격이 개시되었다 어떤 연민도 없이 갈등도 딜레마도 없는 너 갈등도 딜레마도 많은 너 그렇다 너는 애초에 번역될 문장이 아니었다 어떤 문양이든 지문이 흘러나왔다 나는 포위되었고 * 유리는 깨어지기 위해 만들어지고 손은 무너지기 위해 태어난다 백동전은 딱 하나 너는 오빠들의 백동전을 훔쳐 피아노를 장만했다 피아노 위를 횡단했던 건 손가락이 아니라 주먹이었다 주먹이었다 쾅- 쾅- 쾅- 소리에 놀란 너 음률이 악보 뒤편으로 넘어가듯 너는 사춘기로 사춘기의 문양으로 그 성격으로 여기에 왔다 * 네가 묻는다 산산이 부서진다는 게 뭐죠? 웃자란 네 애인들이 대답한다 피아노의 손을 찾아봐 나무의 손금을 찾아봐 귀 잃은 악사의 손바닥을 들여다봐 닮았다는 건 곧 몰락 닮았다는 건 곧 침몰 늙은 네 오빠들이 도끼로 피아노를 내리찍는다 피아노의 내장들이 이빨을 들어내 놓고 웃는다 가위를 든 네가 또 묻는다 그럼 너희들의 어제는 뭐지 손목을 덜렁거리며 잘린 손목을 이어붙이며 네 애인들이 대답한다 손목 없는 바위지 몸을 버린 우직한 주먹…… 손바닥을 펴라 손금이 깨어져 버려라 손금이 깨어져 버려라 * 전쟁에 속하지 않으려는 손들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있다 그사이 패배와 승리가 밀물과 썰물처럼 드나든다 또다시 저녁은 오고 긴 평화가 시작되고 있다 숨이 막힌다 전쟁은 전쟁이 끝난 뒤 시작되는 법 규칙대로 네 애인들이 죽는다 잎사귀들도 차례대로 죽는다 죽은 네 애인들이 내 몸을 정탐한다 귀퉁이에서 패배의 눈물을 마신다 어둠의 보자기를 펼치면 그 사이로 가위 같은 비가 내린다 비는 누가 버린 눈물입니까? * 간첩은 밖에도 안에도 거주한다 자주 갈등한다 자주 망설인다 그리움도 유통 기한이 있습니까 가위바위보를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상이 다른 지대입니다 그럼 난 누가 버린 폐기물입니까 영혼을 꺼내 말려야 한다고 간첩이 자주 속삭인다 정말이지 세상은 네 손처럼 의아하고 다수이며 나는 한 번도 다수에 속하지 않았다 룰을 배운다는 건 자기를 지우는 여정이라며 네 애인들이 울먹거린다 화분 잎사귀에서도 안개가 흐르고 서랍 속엔 길 잃은 손들이 그득하다 프로필 . 본명 안병호, 경남 김해 출생 . 2010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 2018년 부산문화재단 지역문화특성화지원사업 수혜 .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 현재 부산작가회의 회원  
679 둘이 모여 하나 외1편/박일아 file
편집자
1111 2018-08-31
둘이 모여 하나 하얀 눈사람 동글 둥글 둘이 모여 하나가 된 눈사람 겉과 속이 모두 하얀 항상 변함없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세상 살고 싶다 벼꽃 바람만 스쳐도 간지럼 타는 벼꽃 바람이 전해준 사랑에 부끄러워 나날이 고개 더 숙인 벼 약력 ; 2009년『사람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하루치의 무게』 대구 경북 작가회의 회원  
678 아버지의 등뼈 외1편/신성철 file
편집자
1061 2018-08-31
아버지의 등뼈 아버지 등뼈는 바퀴를 닮았다. 구르는 언덕이 가 파른 만큼 숨도 가쁘다. 한숨 돌리려할 때마다 등 떠미는 것들 모퉁이를 돌때면 휘어짐에도 가속도가 붙는다. 성한 것 옹골진 것 마다하고 하필이면 이울어진 것들만 한가득 이젠 내려 놓으세요.. 아버지. 오늘도 아버지의 등뼈는 비탈길을 구른다. 허수아비 빈 들판이었다. 가을걷이 막 끝난 늦가을 저녁 무렵 노을 속 아버지는 야윈 하루의 뒷자락을 잡고 있었다. 거적인 듯 짚단인 듯 바람에 넝마는 너덜거리고 지고 온 세월만큼이나 무거운 표정으로 들옄 끝을 보고계셨다. 서리 내리는 가을마다 제자리걸음인 추곡수매 값으로 쌓이는 볏단만큼 깊은 시름에 휘청이는 허리 한숨인 듯 울음인 듯 이야기 듣다보면 고봉밥을 먹어도 배가 고팠다. 말뚝인 양 붙박히신 아버지 죽 한 그릇도 많다시며 덜어주시던 기억이 떠오른다. 볍씨, 호박씨, 상추씨, 씨 라는 것들은 모르는 게 없으시지만 글씨만은 심어 본 적 없으신 당신 지금은 땅에서 무엇을 읽으시는지 다가가 보니 추위에 떨고 있는 아버지 옷을 걸친 허수아비였다. 2004년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대상 2010년 열린시학 2013년 지필문학 2014년 문장21 신인상 2011년 백교문학상 수상 2010년 시집 3천원짜리봄 출간  
677 오사쯔 외1편/박은숙 file
편집자
1139 2018-08-31
오사쯔 많이 사주 세요 해태제과 식이섬유가 함유된 고구마스낵입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질소보다 과자가 빵빵하게 들어 있어 둘이 먹어도 셋이 먹어도 마음과 손이 즐겁습니다 싸울 일 없습니다 착한봉지 대열에 떡 올려 봅니다 그렇다고 해태제과 사장님께 이상한 거 받은 적 없습니다 7월의 태양빛은, 열기는,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을 위협하고 있다 저기 밭고랑 고구마 잎들도 시들시들 우리는 양동이에 물을 퍼 나르자 8월을 베고 누워 입추가 왔다 어제, 내 몸은 아직 7월의 열기로 뜨겁다 아~~~~ 후~~~~ 뿜어내지만 식지 않은 열기여, 8월을 세로로 두고 나를 가로로 놓는다 너와 나의 맞댄 솔기에서 푸른 바람의 빛깔을 호흡한다 둥글게 둥글게 몸을 굴려 나는, 푸른 고치 속 애벌래 건드리지 마세요 64년 전북무주출생 동인지, 그리움의 힘으로 소멸되는 것들로 작품활동 대경작가회원  
676 나의 푸른 꿈 외 1편/조성순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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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9 2018-08-31
나의 푸른 꿈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느 동물보다 가족과 집단생활을 하면서 화장실을 구분한다. 새끼들을 분만할 때는 보금자리를 찾아 멀리는 1.5Km 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천부적으로 흙을 밟고 살아야 할, 흙을 먹으면서 살아야 할, 나는 모태에서 나와 싸늘한 철망에 갇혀 몸도 제대로 돌리지 못하는 사육틀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우리들의 운명! 혼자서 6~70마리를 인공수정으로 가능한 것은 강인한 체력, 다량 번식의 특징은 1년에 두 번 새끼는 많으면 12마리까지 출산하는 우리들의 고통을 아는가? 우리는 개처럼 옷과, 침실에서 같이 생활은 못할망정, 최소한의 활동공간을 준다면 목욕은 생각지도 못하고 불행과 고통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사실을 안다면, 동물사랑에 최소한의 생존환경을 바랄뿐이다. 인간들은 인격에 상처나 명예의 훼손에, 돼지취급을 한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 권리주장을 하면서, 우리들의 현실을 생명의 존엄성을 변호할 생각은 없는가? 우리들에게 장난감도 마련하는 덴마크의 자연방목장을 보라! 얼마나 즐겁게 뛰어 놀고 초원에서, 춥거나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가고 좁은 공간에서 군집생활의 스트레스가 없어 질병도 없다. 운송하는 자격증 운송거리 속도 통제 관리자는 내 좋아하는 녹색 옷을 입고, 간이계류장 온도는 15℃ 도축은 이산화탄소로 안락사는 얼마나 평안한 죽음인가? 우리의 복지 항생제사용금지, 수의사 처방에 의거 사용, 스트레스 대응 호르몬이 높은 기계식 밀집사육 틀을 철거, 사람들과의 공존이 우리들의 마지막 푸른 꿈이 이루어질 날은 언제일까. 원고지 옛날엔 암각화, 파피루스에 해독이 어려운 문자를 오늘은 딱나무 한지 개발 나무의 회생 노동 기술의 결정체 지금은 텅 빈 화면 연필 Insert 과 지우개 Delete 의 기능을 다양한 언어조합체로 탄생한 문자에 매달린 약속에서 세계는 국가는 직능조직으로 구성 때론 부와 권력 국가의 존립 목숨까지 내 놓아야 할 내용들 무섭고 위엄 있는 운명이 결정되는 틀에 갇혀 나의 지식은 빛바랜 파지조각 상식은 보통사람들이 동의하는 공유물 창작이라는 빌미로 원고지에 그 위험한 문자를 그 위험한 문자를. 약력 현 : 국제PEN한국본부 ․ 한국현대시협 ․ 부산문협이사 한국문인협회 해양문학 연구위원. 역임 : 토지문학제 추진위원 고운 최치원문학상 본상 외 2. 『금정산 그리고 중앙동』외 8권  
675 커피잔 이야기/美山정경해 file
편집자
1120 2018-08-01
커피잔 이야기 이번 북유럽 여행에서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의 눈은 오직 한 곳에 머물렀다. 매장 진열대에는 갖가지 종류의 화려한 물건이 관광객의 눈길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건성으로 바라보았다. 그저 진열된 커피잔에 발길을 고정시킨 채 몇 번이고 반복해서 훑었다. 일행 중 한 명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녀는 나의 귓전에 대고 또 커피잔 살 것이냐고 묻는다.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미소의 의미를 그녀가 모를 리 없다. 그녀만이 아니다. 단 한 번이라도 나와 함께 여행을 했던 사람이라면 저절로 알게 되는 사실이다. 나는 커피잔 모으는 취미를 갖고 있다. 어디에 가든 커피잔을 산다.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잔을 모으는 것이 아니다. 대상이 어떤 것이든 그것이 상징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것은 지역의 축제를 알리는 것이기도 하고, 뮤지컬 공연을 기념하는 것일 때도 있다. 박물관이나 기념관에 가서도 그 나름의 특색을 드러낸 커피잔을 사 온다. 나는 커피잔에 새겨진 디자인에 의미를 둔다. 그렇다보니 다양한 의미를 지닌 잔을 꽤 많이 모았다. 그 중에는 아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 받은 잔도 있다.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강의를 하고 나오면서 받아온 잔도 있다. 표면에는 그 학교 로고가 새겨져 있다. 커피잔 모으는 취미가 있다는 나의 말에 선뜻 내 준 것들이다. 커피잔에 나름의 의미를 붙이기도 한다. 친정에서 가져 온 것으로 소싯적에 산 나뭇잎 커피잔이 있다. 작은어머니와 막내이모가 쓰시던 커피잔도 있다. 그것에는 흔히 볼 수 있는 꽃 그림이나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지만 유달리 애착이 간다. 그 커피잔에 커피를 마시면 그들과 함께 했던 시절이 떠올라 감미롭다. 새로운 커피 잔에 대한 기대로 설레기도 한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해외문학기행을 앞두고 있을 때다. 나는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챙기기도 전에 미리 모아놓은 포장지(일명 뽁뽁이)부터 가방에 넣는다. 포장지가 하나 둘 줄어들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커피잔이 채워지면 말할 수 없이 뿌듯하다. 커피잔을 모으기 시작한지 십년 정도 되었다. 2008년 2월에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했다. 서유럽을 여행하던 그때, 우리는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이리저리 따라다녔다. 바쁜 일정 탓에 끌리는 것이 있어서 좀 더 보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주어진 시간이 후딱 지나가기 일쑤였다. 비스듬히 기울어져 유명한 피사의 사탑 주변을 돌아볼 때였다. 그 사탑 모양을 닮은 커피잔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사진을 찍느라 바빴고, 주어진 시간을 다 썼다. 가족들은 시간이 없다며 커피잔은 일행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가서 사자고 했다. 하지만 우리들 모습이 보이자 일행은 기다렸다는 듯 재빠르게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 커피잔은 끝내 손에 쥘 수 없었다. 독특했던 그 커피잔을 사지 못해서 속이 쓰렸다. 그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 마음이 커피잔에 대한 집착을 만들었던 것일까. 그 이후로는 가는 곳마다 눈에 들어오는 커피잔을 손에 넣기 시작했다. 한번 여행을 떠날 때마다 십여 개의 커피잔이 귀가하는 나를 따라왔다. 여행지에서 돌아오면 며칠에 걸쳐 그 커피잔에 맛을 본다. 커피잔마다 맛은 다르다. 유난히 커피 맛이 좋은 잔이 있고, 뭔가 모르게 씁쓸한 잔도 있다. 어떤 잔은 쌉쌀하기도 하다. 또 어떤 잔은 유난히 감미로워서 연거푸 마시기도 한다. 그렇게 맛을 본 커피잔은 여행지의 추억과 함께 장식장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모은 커피 잔이 삼백여개다. 커피잔에는 수많은 추억이 담겨 있다. 그 나라의 모습이 있고, 그곳의 거리를 거닐던 기억이 있다. 거닐다가 만난 사람들의 모습도 있다. 커피잔을 구입할 때의 다채로운 모습도 고스란히 묻어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점원에게 사정하던 순간의 안타까움이 있다. 고개만 가로젓는 점원의 모습에 당황하여 통역이 가능한 일행에게 다급히 도움을 청하던 기억도 한편에 저장되어 있다. 그런 과정조차 기쁨이었다. 커피잔은 내 삶의 엔도르핀이다. 삶이 버거운 날에는 푸쉬킨을 음미하고, 마음이 답답할 땐 헤르만 해세를 마주하며 알을 깨고 나오는 한 마리 새를 떠올린다. 프로이드와 마주하면 그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동영상과 그것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던 외국인들의 애틋한 마음을 생각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죄와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의 숫자를 세며 걷던 순간과 무릎을 꿇고 대지에 입맞춤하는 장면으로 가슴이 저리다. 기분 좋은 날은 모차르트를, 우울한 날은 유난히 짙은 눈썹에 우수어린 동그란 눈을 가진 카프카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 속으로 빠져든다. 때로는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바라보며 신비로운 어딘가로 한없이 달린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한다. 나는 좋아하는 커피와 함께 수많은 추억을 매일 마신다. 그것을 음미하는 하루하루가 즐겁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커피잔 추억을 갖게 될 것인가. 그 추억으로 인해 나의 삶은 또 얼마나 설렐까. 매장 진열대에 진열된 수많은 커피잔 중에서 헨릭 입센에게 눈길이 간다. 나는 그의 모습이 담긴 커피잔을 손에 들고 미소를 짓는다. * 美山정경해 * 경기 안성 출생 * 수필집 『같은 빛깔로 물들어 간다는 것은』2008 『까치발 딛고』2011 『내 마음의 덧신』2016  
674 오래 된 크리스마스 /고요한 file
편집자
1253 2018-07-31
오래 된 크리스마스 고만고만한 단층집 사이로 성당 첨탑이 보였다. 삼각형 모양으로 생긴 성당 첨탑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있어 읍내 어디서든 보였다. 열시가 되어 성당 첨탑 속에 걸린 종이 뎅그렁 뎅그렁 울리자 성탄미사에 가는 사람들이 종종걸음을 쳤다. 은석은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 속에서 요안나를 찾았다. 요안나는 보이지 않았다. 성탄미사 시간인 열시가 맞선 시간이라 은석은 더는 요안나를 기다리지 못하고 읍내 아래쪽으로 차를 몰았다. 막걸리 양조장, 장시계점, 진안 인삼점, 태극당, 동아서점, 농협, 레스토랑…… 눈을 감고도 어디에 무슨 가게가 있고 어디에 무슨 건물이 있는지 훤했던 읍내 풍경이 요안나와 헤어진 후 낯설게 보였다. 현금을 인출하려고 농협을 찾다 반대편에 있는 군청으로 갔고 군청을 찾다가는 농협으로 간 적도 있었다. 길을 한 번 잘못 든 다음에야 은석은 쌍다리 다방을 찾았다. 쌍다리 다방은 농협이 아니라 군청 앞에 있었다. 차 키를 뽑아 주머니에 넣고 은석은 다방 창가에 앉아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한 셈치고 나왔지만 마음이 어수선했다. 아침에 일회용 면도기를 사러 집 앞 슈퍼에 갔다 요안나를 보지 않았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나왔을까. 은석은 면도하다 베인 턱을 쓸어 만지며 약속시간을 십 분 넘겨 다방에 들어갔다. 여자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커피를 시켰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어머니한테. 여자의 말에 은석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머니는 있는 이야기는 물론 없는 이야기까지 꺼내 아들 자랑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간밤 어머니가 슬그머니 사진을 내밀었을 때 은석은 당황했다. 놀랄 것 없다. 그만하면 얼굴도 반반하고 직업도 괜찮더구나. 이젠 네 나이도 생각해야지. 크리스마스만 지나면 너도 마흔이야. 맞선 이야기에 분위기가 냉랭해지자 제수씨가 화제를 돌렸으나 어머니는 듣지 않았다. 요안나 때문에 시뻘건 청춘을 다 보낼 거냐. 어머니는 기어이 요안나 이야기를 꺼내고는 얼굴은 구겼다. 그만 할 때도 됐건만. 그만 잊을 때도 됐건만. 하지만 요안나를 잊지 못하는 건 어머니가 아니라 은석이었다. 은석은 본다, 안 본다, 대꾸를 하지 않고 밥을 먹었다. 한 번 만나 봐. 어머니에게 크리스마스 선물 하는 셈 치면 되잖아. 묵묵히 밥을 먹던 동생이 한 마디 거들자 의기양양해진 어머니는 형하고 동생이 바뀌었다며 푸념했다. 은석이 못마땅할 때마다 하는 말이었다. 은석도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동생이 형으로 태어났더라면. 동생은 키가 크고 여자에게 인기도 많았다. 내성적인 은석과 달리 외향적인데다 붙임성까지 좋아 먼저 결혼을 했다. 은석은 동생의 말을 들은 뒤에야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오지 않을 걸 알고 식탁에 놓인 사진을 챙겨 일어났다. 내일 아침 열시 쌍다리 다방이다. 성탄미사는 안 가도 되니 늦지 말거라. 신부님도 이해하실 게다. 어머니는 또 신부님까지 끌어들여 자신의 말을 합리화시켰다. -읍내가 조용하네요. -크, 크리스마스라 그런가 봅니다. -하긴요. 크리스마스 아침에 맞선을 보는 사람은 우리 밖에 없을 거예요. 다방은 조용했다. 은석과 여자를 제외하면 다방에는 화장도 하지 않은 얼굴로 커피를 끓이는 여주인 밖에 없었다. 은석은 한 손에 바구니를 들고 다방 건너편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일요일 아침에 흔히 볼 수 있는 읍내 풍경이었다. 어릴 적 은석은 일요일마다 어머니가 챙겨준 목욕바구니를 들고 동생과 목욕탕에 갔다. 성당 뒤편에 있는 목조 가옥에 살 때였다. 남자 목욕탕은 이층에 있었는데 욕탕 안에 들어가면 창밖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고만고만한 단층집과 집집마다 심어놓은 감나무와 하늘을 찌를 듯한 성당의 첨탑. 욕탕에서 바라보는 성당 첨탑이 아름다워 동생 몰래 목욕탕에 간 적도 많았다. 욕탕 안에서 성당 첨탑을 보며 은석은 크면 어떤 여자와 결혼할까, 라는 생각을 했다. 은석은 다방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을 들으며 성당 첨탑을 바라보았다. 크리스마스에 맞선을 볼 줄 알았다면 집에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크리스마스에는 온 가족이 성탄미사에 갔다. 어머니는 추석이나 설날보다 크리스마스를 더 큰 명절로 여겼다. 크리스마스 무렵이 되면 어머니는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걸었다. 다른 약속은 잡지 말라는 일종의 압력이었다. 때문에 크리스마스면 은석은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매번 집에 내려왔다. 이번에는 새로 부임한 신부님과 맞는 크리스마스니 온 가족이 참석해야 한다고 몇 번을 강조한 터였다. 그런 어머니가 성탄미사 시간에 맞춰 맞선을 잡아놓은 건 요안나 때문이었다. 결혼 후 명절날에도 내려오지 않는 요안나가 크리스마스에는 온다는 걸 안 것이다. 말하자면 성탄미사에 갔다 요안나를 만날까봐 미리 차단을 시킨 것이었다. 어머니는 동생과 제수씨에게 요안나가 왔다는 말은 절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 게 뻔했다. 하루 먼저 내려온 동생이 요안나를 못 보았을 리 없었다. 은석이 아침에 일회용 면도기를 사러 간 슈퍼가 요안나의 집이었다. 은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무슨 말을 해야 했지만 말재주가 있는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숫기가 있지도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바꾼 것은 여자였다. 대화가 끊겨 분위기가 서먹서먹하자 스스럼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무주에서 태어난 여자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학원을 운영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는 십사 년째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무주를 떠난 때는 대학교 때였다고 했다. 여자가 말을 할 때마다 은석은 추임새를 넣듯 네, 그렇군요, 하며 되도록 짧게 맞장구를 쳤다. -오늘의 운세도 봤어요. -오, 오늘의 운세를요? 운세가 어떻게 나왔는데요? 은석은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천천히 물었다. -귀한님을 만나면 눈이 온대요. 말을 하고 무안했던지 여자는 얼굴을 붉혔다. -오늘은 눈이 올 것 같지 않아요. 마, 마이산 꼭대기에 구름이 끼어 있어야 눈이 올 징조인데 구름 한 점 없거든요. 읍내 사람들은 마이산을 보고 눈이 오는지 안 오는지 알죠. 여자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여자는 마이산을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씩, 한 모금씩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아침에 은석도 오늘의 운세를 봤다. 아침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운세를 보는 게 은석의 습관이었다. 물론 오늘 아침에는 여자의 운세도 봤다. 특별할 것 없는 운세였는데 여자는 그것을 특별한 운세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은석은 괜히 눈이 안 올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싶어 자신도 아침에 오늘의 운세를 봤다고 말했다. -77년 뱀띠. 뒤를 돌아보지 말고 무쏘의 뿔처럼 혼자 가라. 여자가 은석의 운세를 말했다. 아침에 보던 김에 여자는 은석의 것도 봤다고 했다. 은석의 것 역시 특별한 것 없는 운세로 한 달에 두 세 번씩 나오는 것이었다. 은석은 오늘의 운세가 맞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전 오늘의 운세를 믿어요. 귀한님을 만나면 눈이 온다니. 그래서 말인데 이렇게 앉아서 시간 보내지 말고 마이산에 갈까요? -마, 마이산엘요? -지금껏 한 번도 가보지 못했거든요. 은석이 커피 잔을 만지며 뭉그적대자 여자는 어서요, 하고는 엉덩이를 들고 일어났다. 별 수 없이 은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방에서 여자와 어색하게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느니 마이산에 다녀와 점심을 하면 시간이 갈 것 같았다. 점심까지 하면 상대에 대한 예의도 갖춘 셈이었다. 은석은 쌍다리 다방을 나와 세워둔 차에 여자를 태웠다. 여자는 조수석에 앉아 들뜬 얼굴로 마이산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바위가 땅에서 봉긋 솟아오른 듯 서 있었는데 그 모양이 말의 귀처럼 생겼다 해서 마이산이었다. 왼쪽이 숫마이산이고 오른쪽이 암마이산이었다. 숫마이산이 암마이산보다 높고 뾰족했다. 은석은 쌍다리를 지나 마령 쪽으로 차를 몰았다. 마이산 가는 길은 입구가 두 개라 어느 쪽으로 가든 상관없지만 겨울철에는 읍내 쪽에서 가는 것보다 돌아가더라도 마령 쪽으로 가는 편이 나았다. 읍내 쪽에서 가면 오르막인데다 눈이 쌓여 있으면 탑사로 넘어갈 수 없었다. 탑사를 보지 않으면 마이산의 반은 보지 못한 것이었다. 나머지 반은 화엄굴에서 내려 보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은석이 마령 쪽으로 간 것도 탑사를 구경시켜주고 바로 화엄굴까지 올라갈 생각에서였다. 은석은 룸미러로 멀어지는 성당 첨탑을 바라보고는 속도를 높였다. 지금쯤 미사는 말씀의 전례가 끝나고 성찬의 전례로 넘어갈 시간이었다. 성찬의 전례면 이제 미사의 반은 지난 것이었다. 은석은 미사 도중에도 주위를 둘러보며 요안나를 찾고 있을 어머니를 떠올리며 우회전을 했다. 우측으로 지붕이 무너진 창고가 보였다. 요안나와 처음 사랑을 나눴을 때 반쯤 무너져 있던 지붕은 그 사이 나머지 반쪽도 무너져 있었다. 지붕이 무너진 창고를 지나자 매표소가 나왔다. 은석은 매표소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고 매표소 입구를 따라 들어선 음식점은 크리스마스라 문을 연 곳이 없었다. 은석은 매표소에서 표 두 장을 끊고 저수지 오른편으로 난 길을 따라 여자와 탑사로 걸어갔다. 걸으면서 여자는 이것저것을 물었다. 집엔 자주 내려오느냐, 성당엔 언제부터 다녔느냐, 세레명이 뭐냐, 탑사엔 얼마나 와 봤느냐며 시시콜콜 질문을 했다. 말을 더듬을까봐 오는 내내 말을 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게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은석과 달리 여자는 설레는 마음으로 맞선을 보러 나왔을 것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화장을 하고 머리를 다듬고 몇 번씩 옷을 바꿔 입고는 오늘의 운세를 봤을 것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의 운세를 보는 여자의 모습을 떠올리자 은석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맨 위에 있는 게 천, 천지탑이죠. 천지탑은 탑사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뿐더러 가장 크죠. 돌탑의 우두머리래요. 저건 약사탑이고 저건 중앙탑이죠. 은석은 손가락으로 탑을 가리키며 하나하나 이름을 알려주고 친구가 운영하는 기념품 가게를 바라보았다. 기념품 가게는 문이 열려 있었다. 요안나와 이곳에 올 때마다 탑사 이름을 알려준 것도 기념품 가게를 하는 친구였다. 은석이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게 3년 전 크리스마스 밤모임이었다. 그날 밤모임에 나가지 않았다면 아침부터 맞선을 본다고 수선을 떨 필요도 없었다. 요안나와 어긋난 것도 그날 밤이었다. 은석은 요안나를 만나면 그날 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침에 면도기를 산다는 핑계로 슈퍼에 간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들어오는 바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슈퍼를 나왔다. -탑이 어떻게 흔들리지 않고 서 있죠?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음, 음양의 조화 때문이래요. 돌에도 암수가 있는데 돌을 쌓을 때 암수를 구분해 아귀를 맞췄대요. 음의 돌덩이 하나 쌓고 양의 돌덩이 하나 쌓고, 양의 돌덩이 하나 쌓고 음의 돌덩이 하나 쌓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고 백년을 버틴 건 이런 음양의 조화 때문이래요. 하지만 개중 흔들리는 탑이 있어요. 저, 저거 보이죠? 저 중앙탑이 바람이 불면 흔들렸다가 멎는데요. 일명 흔들탑이죠. 탑의 이름을 알려주고 나서 은석은 친구와 마주칠까봐 탑사로 올라갔다. 계단에 잔설이 있어 천지탑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고 흔들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한 번은 요안나가 탑이 흔들리는 것을 보려고 이 자리에 서서 흔들탑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오 분이 지나고 십 분이 지나도 탑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십 분이 지나 내려가려고 하는데 계곡에서 불어온 바람에 탑이 기울었다. 저것 봐. 탑이 흔들려. 요안나가 소리쳤다. 탑은 왼쪽으로 기우는가 싶더니 이내 반동으로 오른쪽으로 기울었다가 중심을 잡고 멎었다. 눈 깜짝할 사이였지만 은석도 탑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 후 탑이 흔들리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은석은 여자와 탑사를 내려와 숫마이산 기슭에 있는 화엄굴로 가려고 왼쪽으로 갔다. 화엄굴 입구에는 호위병처럼 돌탑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수십 개가 넘는 돌탑은 고만고만했지만 어른 키만큼 높이 올라간 것도 있었다. 돌탑은 위쪽까지 빽빽이 세워져 더 이상 쌓을 자리가 없었다. -이건 사, 사람들이 쌓은 겁니다. 여기에 다시 온다는 의미로 하나 둘 쌓은 게 이렇게 많아진 거죠. 여자는 돌을 주워 누군가가 쌓아놓은 돌탑 위에 올려놓았다. 은석도 이 자리에 돌탑을 쌓은 적이 있었다. 요안나가 돌을 주워오면 크기대로 분류한 다음 가장 넓적한 돌을 주춧돌 삼아 탑을 쌓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사랑한 햇수만큼 돌을 쌓고 일곱 번째 돌을 올려놓는 순간 돌탑이 무너졌다. 돌과 돌 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균형을 맞춰 쌓아도 일곱 번째 돌을 올려놓으면 무너졌다. 그때부터 육년 동안 쌓아 올린 사랑이 금가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해서 커피를 시키면 요안나는 다시 콜라를 시켰고, 콜라를 마시고 싶다고 해서 콜라를 시키면 요안나는 다시 커피를 시켰다. 비빔밥을 먹고 싶다고 해서 비빔밥을 시키면 갑자기 볶음밥을 하나 더 주문했다. 마치 세 사람이 앉아 있는 것처럼 언제나 테이블에는 콜라나 커피가 한 잔씩 더 놓여 있거나 손도 안댄 비빔밥이나 볶음밥이 놓여 있었다. 삼계탕집에서는 실랑이를 벌인 적도 있었다. 은석이 삼계탕을 못 먹는 줄 알면서 요안나는 두 그릇을 시켰다. -먹어 봐. 젓가락을 대지 않자 요안나가 닭다리를 뜯어 주었다. -먹어보라니깐. 닭다리를 받았지만 은석은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못 먹겠어. 닭다리를 밥뚜껑에 내려놓자 요안나가 다시 집어 들이밀었다. -언제까지 삼계탕은 안 먹을 건데? 사랑한다면서 이걸 못 먹어? 사랑이라는 말에 은석은 닭다리를 뜯었다. 이물질을 씹는 것처럼 닭고기는 입안에서 맴돌 뿐 넘어가질 않아 꿀꺽 삼켰다. 닭고기는 넘어가지 않고 목구멍에 걸렸다. 은석은 손을 입속으로 집어넣어 목구멍에 걸린 닭고기를 끄집어내 밥뚜껑에 놓았다. 요안나는 밥뚜껑에 놓은 닭고기를 집어 다시 주었다. 속이 니글거렸지만 은석은 요안나의 요구에 침으로 범벅인 닭고기를 입에 넣고 콜라를 마셨다. 콜라에 섞여 닭고기는 목구멍 안으로 넘어갔다. 닭다리 하나를 먹고 났을 때 콜라 두 병이 비워져 있었다. 은석은 남은 닭다리를 마저 먹고 삼계탕집을 나왔다. 얼마 못가 은석은 전봇대를 붙잡고 먹은 것을 토했다. 전봇대에 쏟아낸 구토물을 보며 못 먹는 삼계탕을 먹고 토하는 것도 사랑이라 생각했다. 참고 견디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속은 니글거렸지만 뿌듯했다. 다음에는 먹고 토할망정 닭다리 하나는 뜯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은석은 여자와 화엄굴 계단을 올라갔다. 여자는 계단을 잘 오르지 못했다. 탑사로 올라가는 길보다 가파른 데다 잔설이 많아 계단을 오를 때마다 난간을 붙잡았다. -그, 그만 내려갈까요? 하, 하이힐을 신고 오르기엔 무리에요. 최대한 티를 안내고 차분히 말하려 했지만 은석은 또 말을 더듬었다. 여자는 은석이 말을 더듬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은석은 어딘지 모르게 친근하게 느껴졌다. 여자는 난간을 붙잡은 채 구름 한 점 없는 마이산 꼭대기를 올려다보며 하이힐을 톡톡 찼다. -마이산에 올 줄 알았으면 굽 낮은 신발을 신고 오는 건데요. 근데 정말 눈이 안 올까요? 오늘의 운세는 분명 눈이 온다고 했는데…… 은석은 앞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힘들었다. 옆에서 나란히 걸어내려 가며 손을 잡아줘야 했지만 은석은 용기가 나질 않았다. 대신 여자가 미끄러질까봐 어깨에 힘을 주고 최대한 간격을 좁히며 내려갔다. 은석은 요안나와의 거리도 어쩌면 이 만큼이라고 생각했다. 한 계단의 거리. 은석이 한 계단 올라가면 이미 요안나는 한 계단을 올라가 있었고 은석이 한 계단 내려가면 이미 요안나는 한 계단을 내려간 후였다. 한 계단의 거리는 점차 벌어져 두 계단이 되었고 어느 순간 보이지 않을 만큼 간격이 벌어졌다. -성탄미사에 가지 않고 여긴 웬일이야? 계단을 내려갔을 때 기념품 가게 친구가 앞에 서 있었다. 갑작스레 친구와 부딪쳐 당황한 은석은 이쪽은, 이쪽은…… 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때 여자가 은석씨 친구에요, 하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친구도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은석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먼저 매표소 쪽으로 내려갔다. 괜히 미안해진 은석은 친구에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말하고 뒤쫓아 갔다. 읍내로 가면서 은석은 3년 전 크리스마스 밤모임을 떠올렸다. 그날 은석은 요안나와 밤모임에 나갔다. 그 밤모임은 읍내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이 만들었는데 은석이 모임장소에 도착했을 때 스무 명이 넘는 친구들이 마주앉아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불판에서 피어오른 연기로 실내는 자욱했고 다들 몇 잔씩 걸쳤는지 얼굴이 볼그족족했다. 은석은 삼겹살이 타는 냄새에 코를 찡그리고는 빈자리를 찾았다. 우영의 옆자리가 비어 있었지만 기념품 가게 친구한테 가서 앉았다. 성격이 거친 우영과 있으면 은석은 어머니 앞에서처럼 주눅이 들었다. 고교시절 내내 같은 반을 했지만 친해질 수 없었던 것도 성격 때문이었다. 아무리 어울리려고 해도 성격이 맞지 않았다. 은석이 자리에 앉자 우영이 건배를 외쳤다. 친구들은 서로 건배를 하려고 우영 앞으로 몰려갔다. 술잔과 술병이 엎어지고 깨졌지만 왁자지껄한 소리에 묻혀 버렸다. 은석은 요안나와 기념품 가게 친구와 셋이 조용히 술을 마셨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 불판에 올려놓은 삼겹살이 시커멓게 타들어갔을 때 우영이 어깨를 쳤다. 우영은 이게 얼마만이냐며 자신의 잔에 소주와 맥주를 반반 섞어 폭탄주를 건넸다. 은석은 폭탄주를 받아 마셨다. 소주를 많이 타 독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은석도 마신 잔에 소주와 맥주를 반반 섞어 주었다. 우영은 단번에 폭탄주를 마시고는 그 잔에 폭탄주를 만들어 요안나에게 주었다. 요안나가 폭탄주를 마시는 걸 보고 나서야 우영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삼겹살집을 나와 이차로 맥줏집에 갔다. 전에 없이 살갑게 구는 우영이 불편해 은석은 맥줏집에서도 떨어져 앉았다. 그런데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우영이 자신의 자리에 앉아 요안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저기, 저기…… 자리를 비켜 달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은석은 혀가 꼬인 것처럼 말을 더듬었다. 폭탄주 탓인가 하고 다시 말했지만 또 저기, 저기, 였다. 삼차는 소줏집에 갔고 사차는 노래방에 갔다. 스무 명이 넘는 친구들은 술집을 옮길 때마다 하나 둘씩 빠져 노래방에는 네 사람밖에 없었다. 기념품 가게 친구가 술에 취해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자 우영이 요안나의 손을 잡고 무대로 끌고 가 블루스를 췄다. 노래에 맞춰 블루스를 추며 우영은 요안나의 엉덩이를 더듬었다. 이번에도 은석은 저기, 저기, 였다. 그때 요안나가 우영의 뺨을 치고 나갔다. 우영은 멍하니 서서 뺨을 어우만지더니 은석을 밀치고 나갔다. 그 바람에 은석은 뒤로 넘어져 바닥에 떨어진 맥주병에 허리를 눌리고 말았다. 허리를 싸고도는 통증을 참고 밖으로 나갔다. 요안나는 보이지 않고 휘날리는 눈 속으로 천변 여관이 보였다. 은석은 그 밤을 떠올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여자는 차창으로 마이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마이산 꼭대기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여자의 오늘 운세는 맞지 않을 게 뻔했다. 물론 은석의 오늘 운세도 맞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무쏘의 뿔처럼 혼자 가라니. 오늘의 운세와 달리 은석은 아침부터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성당 앞에서 요안나를 만나지 못하고 맞선을 보러 가면서 뒤를 돌아보았고 쌍다리 다방을 찾다가는 길을 잘못 들어 뒤를 돌아보았고 마이산에 갈 때는 룸미러로 성당 첨탑을 돌아보았다. 여자와 있으면서는 요안나와의 일을 돌아보았다. 은석은 이제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정면의 성당 첨탑을 바라보았다. 성탄미사가 끝나 성당에서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정오였다. 은석은 읍내로 진입하자마자 점심은 반드시 하고 오라는 동생의 말이 떠올라 여자에게 뭘 좋아하냐고 물었다. -삼계탕요. 삼계탕이란 말에 은석은 목구멍에 닭뼈가 걸린 것처럼 헛기침을 했다. -삼, 삼계탕을 좋아해요? -원래 이 읍내가 삼계탕으로 유명하잖아요. 하지만 맞선자리에서 삼계탕을 먹는 여자는 없겠죠. 실은 어머님한테 은석씨가 삼계탕을 못 먹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해본 소리예요. 삼계탕은 먹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맞선자리인 만큼 우아하게 칼질을 해야죠. 은석은 요안나와 자주 간 레스토랑으로 가려고 읍내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순간 아침부터 여자와 간 곳이 죄다 요안나와 간 곳이라는 생각에 다른 곳으로 가려고 우회전을 했다. 그때 요안나를 보았다. 손에 미사책을 든 걸 보니 성탄미사에 갔다 오는 모양이었다. 성탄미사 삼십 분 전부터 성당 앞에 차를 세우고 기다렸건만 언제 간 것일까, 하고 은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석은 요안나의 발걸음에 맞춰 속도를 줄였다. 여자는 그것도 모르고 성탄미사가 끝나니까 읍내가 활기차다고 말했다. 은석은 점심은 반드시 하고 오라는 동생의 말을 저버리고 쌍다리 다방 앞에 차를 세웠다. -올, 올, 올라가봐야 할 것 같아요.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석을 쳐다보았다. 말을 더듬어서 그런 게 아니라 갑자기 올라가봐야 한다는 말에 놀란 모양이었다. 은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서글서글한 눈매하며 적당히 솟은 콧날, 야무진 입술. 뒤로 단정하게 머리를 묶어 여자의 얼굴은 단아해 보였다. 은석은 더듬거리지 않으려고 최대한 천천히 미안하다고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요안나를 만날 시간이 없었다. 작년 크리스마스에도, 재작년 크리스마스에도 성당에 갔지만 어머니 때문에 요안나를 만나지 못했다. 이 시간에도 어머니는 요안나를 만나지 못하게 슈퍼 앞을 지키고 있을 게 뻔했다. 사실 은석이 집에 내려온 것도 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요안나 때문이었다. -그럼 식사는 다음에 해요. 여자의 말에 은석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뒤따라 내린 여자는 다방 앞에 세워둔 자신의 차에 올랐다. 여자는 시동을 켠 뒤 운전석 창을 열고 무주에 도착하면 전화를 하겠다고 말했다. 은석은 여자의 차가 쌍다리를 건너가는 것을 보고 천변으로 갔다. 성당이 맨 위쪽에 있다면 천변은 맨 아래쪽이었다. 성당 첨탑에서 보면 읍내는 물고기가 마이산을 향해 헤엄쳐가는 형상이었는데 천변이 조성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물고기의 아랫배 부분을 따라 조성된 천변에는 팔십 년대 지어진 상가들이 줄지어 있었다.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천변을 따라 들어선 상가들은 더욱 낡아 있었다. 읍내에서 가장 낡은 건물이 많은 곳이 천변이었다. 은석은 3년 전 갔던 고깃집과 노래방을 지나 천변 여관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다시 뛰어갔다. 요안나는 천변 끝에 있었다. 은석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망설였다. 이게 몇 년 만이냐고, 그동안 잘 살았냐고, 우영은 잘 있냐고 물어야 하나. 아니면 명절에는 왜 안내려왔냐고 물어야 하나.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은석은 말을 더듬을까봐 최대한 짧게 말했다. -요, 요안나. 요안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은석아. 요안나가 은석이 일하는 성당 사무실로 찾아온 건 크리스마스 다음날이었다. 우영씨하고 잤어. 은석은 눈앞이 하얬지만 봉헌금 바구니에서 세려고 한 주먹 꺼낸 동전을 움켜쥐었다. 손바닥 안에서 부딪친 동전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쨍그렁. 하나가 떨어지자 손힘이 빠지면서 스르르 동전이 쏟아졌다. 은석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주우며 백 원, 이백 원, 삼백 원, 사백 원, 하고 셌다. 이 순간에도 동전을 줍고 싶어? 하긴 이게 은석씨지. 매사에 참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니까. 사람은 둘인데 콜라를 하나 더 시켜도 말 못하고 비빔밥을 하나 더 시켜도 말 못하고 못 먹는 삼계탕을 먹여도 꾸역꾸역 먹고 토하니까.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우영씨와 블루스를 춰도 가만히 보고 있는 게 은석씨지. 우영씨가 내 엉덩이를 만져도 모른 척 술만 마시고 있는 게 은석씨라고. 저기, 저기, 하면서 참고 견디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어디 그게 사랑이야? 사랑은 참는 게 아니라 사랑은 참지 않는 거야. 달려들고 악을 쓰는 게 사랑이라고. 다른 남자와 자고 온 나를, 내 뺨을 후려치리는 게 사랑이라고. 구둣발로 내 몸을 짓밟는 게 사랑이란 말야. 은석은 달려들고 악을 쓰는 대신 요안나를 붙잡았다. 하지만 요안나는 하이힐로 은석의 손등을 짓밟고 나갔다. 은석은 하이힐 자국이 찍힌 손등을 바라보다 다시 동전을 주웠다. 달려들고 악을 쓰는 게 사랑이라니. 커피를 시켜놓고 마시지 않겠다며 다시 콜라를 시킬 때도, 콜라를 시켜놓고 마시지 않겠다며 커피를 시킬 때도, 한 잔씩 남은 커피와 콜라를 마신 것도 사랑 때문이었다. 못 먹는 삼계탕을 꾸역꾸역 먹은 것도 사랑 때문이었다. 사랑에도 사순절처럼 고통의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참고 견디는 거라고. 그런데 그게 사랑이 아니라니. 참고 견뎠던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니. 참고 견디는 것이 사랑이라고 알았던 은석이었다. -마이산에 갈까. 천변을 걸어 나왔을 때 요안나가 말했다. -마, 마이산에? 은석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조금 전 여자와 다녀온 곳을 같이 가고 싶진 않았다. 또 친구와 부딪치면 뭐라고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은석은 요안나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차를 세워둔 쌍다리 다방으로 갔다. 여자를 태운 자리에 요안나를 태우고 차를 돌렸다. 순간 차창으로 여자 얼굴이 스쳐지나 갔다. 여자의 얼굴을 지워내며 은석은 마이산을 바라보았다. 서쪽 하늘에서 구름이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었다. 은석은 구름을 밀어내듯 속도를 높였다. 요안나는 차창 밖만 바라보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에 라이터 불을 붙이자 손가락에 낀 결혼반지가 반짝거렸다. 은석은 우영의 목을 비틀듯 운전대를 움켜잡았다. -우, 우, 우영인 왜 안 왔어? 은석은 우영이 옆에 앉아있는 것처럼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왜 이렇게 말을 더듬어? 어디 아픈 거야? -마음이. -마음이? 은석은 성탄절 밤부터 말을 더듬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요안나에게 그 마음이란 것을 꺼내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이란 것은 가슴 속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들어앉아 있어 꺼낼 수 없었다. 행여 꺼낸다 해도 보이지 않는 그 마음이란 것을 어떻게 보여준단 말인가. 은석은 차안에 흐르는 정적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다시 우영이 소식을 물었다. -외양선 탔어. -외양선을 탔다구? 읍내 소문이면 다 아는 어머니한테도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은석은 말없이 운전대를 움켜잡은 손을 붙였다 뗐다 하면서 전방만 주시했다. 요안나가 피운 담배연기가 차안에 고였다. 은석은 요안나가 피우는 담배를 집어 한 모금 빨고 싶었다. 한 모금 빨면 답답한 마음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담배 대신 은석은 한숨을 내쉬고는 지붕이 무너진 창고를 지나갔다. 그날도 크리스마스 밤이었다. 은석은 요안나와 천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마이산을 향해 걸어갔다. 마이산 매표소에 거의 다 갔을 때 눈이 쏟아져 지붕 한쪽이 무너진 창고에 들어갔다. 한 때 작업실로 쓴 창고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조각상이 군데군데 서 있었다. 한쪽에는 남자 조각상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여자 조각상이 있었다. 조각상 주변에는 타다 만 초가 널려 있었다. 타다 만 초에 죄다 불을 붙이자 한쪽이 찌그러진 하트 모양이 생겨났다. 누군가 하트 모양으로 초를 밝힌 모양이었다. 은석은 남자와 여자 조각상을 끌어다 위아래로 포개놓고 종이에 불을 붙였다. 종이에서 타오른 불이 여자 조각상의 다리에 옮겨 붙었다. 순식간에 여자 조각상의 다리 하나가 불에 타서 사라졌다. 불은 활활 타올라 여자 조각상 위에 포개져 있는 남자 조각상으로 옮겨 붙었다. 기묘하게 두 조각상은 서로의 몸을 얼싸안은 모양으로 타올랐다. 은석은 옷을 벗어 바닥에 깔고는 그 위에 요안나를 눕히고 남자 조각상처럼 그 위로 올라갔다. 서로를 껴안고 불에 타는 조각상처럼 사랑을 나누는 동안 반쯤 무너진 지붕 사이로 눈이 들이쳤다. 사랑이 끝나고 났을 때 은석의 엉덩이에는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결, 결혼까지 했으면 보란 듯이 잘 살 일이지 왜 외양선을 탄 거야? 은석은 매표소 쪽으로 우회전을 하며 물었다. 요안나는 조수석 창문을 열고 꽁초를 내던졌다. -죄책감이었겠지. 친구의 여자를 가로챘다는 죄책감 말야. 우영씨는 여길 떠난 후 외판원으로 일했어. 한 달도 못해 그만뒀지만. 그리곤 밤마다 술에 취해 바다를 바라봤어. 한 일 년 간 바다만 보고 살다 달랑 메모 한 장 남기고 외양선을 탄 거야. 그러니 어떻게 명절날에 올 수 있겠어. 오늘도 우영씨는 남태평양을 떠돌아다닐 거야. 자신이 지은 죄를 뉘우치면서. 요안나가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날, 은석은 사무장실에서 두 사람의 결혼식을 지켜보았다. 참지 않고 악을 쓰는 게 사랑이라면 달려가 결혼식을 막아야 했지만 은석은 성당 안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대신 요안나를 만나면서 시작한 성당 사무장 일을 그만두려고 사표를 쓰고 창가로 갔다. 그때 성당 정문이 열리면서 턱시도를 입은 우영과 웨딩드레스를 입은 요안나가 나왔다. 요안나가 볼까봐 은석은 창가 옆으로 몸을 숨겨 두 사람이 웨딩카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며칠 후 요안나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읍내에서 떨어진 바닷가에 신혼살림을 차린 후 은석은 읍내를 떠났다. -맞선은 잘 봤어? -어? 그거…… -어머니한테 들었어. 맞선본다고. -그, 그랬구나. 근데 성탄미사는 안 간 거야? -갔어. -어, 언제? -네 차가 읍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걸 보고 난 후. 참, 맞선 본 여자는 맘에 들어? 은석은 좋다, 싫다 말하지 않았다. 여자는 호감이 있는 눈치였다. 오늘의 운세를 말할 때는 그윽한 눈으로 은석을 바라보았고 탑사 이름을 알려줄 때는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였고 돌탑에 돌을 올려놓을 때는 표정이 진지했다. 은석이 말을 더듬는 것에 대해서도 여자는 불편해하지 않았다. 은석도 여자가 불편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할 생각으로 나왔다가 마이산까지 다녀온 것이다. 은석은 매표소 앞쪽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문을 열고 내렸다. 요안나는 손에 쥔 미사책을 놓고 내렸다. 은석은 앞서서 매표소로 갔다. 표를 끊으려고 매표소 안으로 돈을 밀어 넣자 안에 있던 직원이 아까 왔으니 그냥 들어가라며 되돌려주었다. 은석이 주춤거리자 직원은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니까요, 하고 웃었다. 은석은 돈을 집어 주머니에 넣고 요안나와 탑사로 걸어갔다. 오전과 달리 음식점 몇 군데는 문이 열려 있었다. 한 음식점에서 나온 남녀가 저수지를 따라 탑사로 올라갔다. 뭐가 재미있는지 남녀는 탑사에 도착할 때까지 까르르, 까르르 웃었다. 남녀는 탑사로 올라가지 않고 기념품 가게로 들어갔다. 유리창으로 친구가 보였다. 친구가 볼까봐 은석은 고개를 돌렸다. -누가 방금 돌을 올려놓고 갔나 봐. 요안나가 화엄굴 입구에 있는 돌탑을 가리켰다. 여자가 쌓은 돌이었다. 은석은 돌을 하나 주워 여자가 쌓은 돌 위에 올려놓았다. 돌은 미끄러지지 않았다. 은석은 두 개의 돌을 바라보다 까르르 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기념품 가게에서 두 남녀가 나오고 있었다. 뒤따라 친구가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기념품 가게를 하면서 친구는 탑사를 배경으로 손님들 사진을 찍어주는 모양이었다. 가게 앞에는 즉석 사진 바로 현상이라는 문구가 크게 적혀 있었다. 두 남녀가 탑사를 배경으로 포즈를 잡는 순간 은석은 카메라에 잡힐까봐 요안나와 흔들탑으로 올라갔다. 흔들탑까지 갔을 때 눈발이 날렸다. -어, 눈이네. 은석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두 팔을 빙그르르 돌리며 떨어지는 눈을 받아먹었다. 눈 오는 거 처음 보는 사람처럼 왠 호들갑이냐며 요안나가 말했다. 그런데도 은석은 떨어지는 눈을 받아먹었다. -미안해. 은석은 뒤로 젖힌 고개를 세우고 요안나를 바라보았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내려온 건 널 만나기 위해서였어. 널 만나서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미안하다고 말하면 우영씨가 돌아올 것 같아서. 은석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주머니에 넣어놓은 휴대폰이 울렸다. 은석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받았다. 여자는 들뜬 목소리로 무주에는 눈이 온다고 말한 후 진안에도 눈이 오냐고 물었다. 은석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휴대폰만 잡고 있자 요안나가 자리를 피해 계단을 내려갔다. 은석은 오늘의 운세를 떠올리며 요안나를 바라보았다. 요한나는 무쏘의 뿔처럼 혼자 눈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 작가: 고요한 전북 진안 출생/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등단: 2016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수상 2016년 <작가세계> 신인문학상 수상 메일주소: newspeople14@naver.com  
673 옥수수에게 외1편/하재영 file
편집자
1375 2018-07-31
옥수수에게 칠월 초이레 의성 장날 전통시장을 돌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막 찐 옥수수를 보았다. 손바닥만한 시장 한 바퀴 돌고 마늘을 파는 난전으로 걸음을 옮기고서야 옥수수 몇 개 살 걸 아득하지 않은 어린 시절이었다. 마늘 세 접 남짓 캔 텃밭 주변으로 옥수수는 무성해 이웃집으로 가는 길과 경계 지으며 날개 달린 풀벌레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옥수수 대는 아기 업은 모습으로 땀 흘리다 여름 중턱에 옥수수를 내려놓았다. 마당에 내건 무쇠 솥에서 옥수수는 익어가고 울타리를 타고 오른 호박꽃, 나팔꽃은 하오 햇살에 시들시들했다. 점심과 저녁 매미 울음 자지러지는 사이 가족의 맛있는 참이 되었던 옥수수 올 한 해 먹을 머드러기 마늘 두 접 전통 시장 난전에 잠시 두고 옥수수를 사러 시장을 다시 한 바퀴 돌다 식당 한 곳 들러 춘산 막걸리 몇 통 쓰러뜨리며 정치에 열을 올리는 노인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가 한 봉지 산 따근 따근한 옥수수가 시계를 거꾸로 돌리다 멈춘 것 같은 고향으로 처마 밑 씨 옥수수는 내년 봄을 바라보며 말라 있고 뻥튀기도 한 자리 했던 시골 집 주변으로 옥수수 줄기들이 쑥쑥 자라 슬며시 나를 당기고 당긴다. 쇠죽에 썰어 넣은 옥수수 대에서 군내도 풍겼던 사라져 더 그리운 고향 마을 옥수수 십 년 후에도 또 다른 장터에서 쑥쑥 자랐으면 좋겠다. 파리 여름 오후 의자에 앉아 잠을 청한다. 달콤한 낮잠이 스스로 바퀴달린 의자 미끄러지듯 잠에 떨어진다. 윙윙윙 파리 한 마리 잠결 날갯짓으로 얼굴 한 곳 앉았다가 무심한 손사래에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가 되돌아온다. 낮잠에 날개를 펴고 착륙과 이륙을 시도한 파리는 활공으로 낮잠을 끌어내린다. 대낮의 파리 한 마리 무의식의 영토에서 전원 버튼을 진동으로 누르고 낮잠을 갈퀴질 한다. 이놈 새끼, 저리 꺼져! 하재영 : 199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별빛의 길을 닦는 나무들』, 『바다는 넓은 귀를 가졌다』 등 7feeling@hanmail.net  
672 폭설 외 1편/정동재 file
편집자
1390 2018-07-31
폭설 아나운서의 폭설 경보라는 말마저 얼어붙어 있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길이 먼저 사라지고 사람과 사람의 길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 덕분에 하루 이틀 쉬면 좋겠다는 말도 녹아들지 못하고 쌓여있다 그만 그치라는 말이 창밖 나무에 걸려 있다 뚝 떨어진다 쩍 쩍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들이 흰 살결을 드러낸다 ​ ​대부분의 가난은 쌓인 눈보다 더 희겠다 독설 아닌 독설에 자꾸 미끄러지는 사람들 허한 고개를 넘고 있다 ​ 싸리비도 눈가래도 모두 손을 놓았다 눈밭에 발자국을 심는 드문드문 아이들과 멍멍이가 보인다 하늘에서 하시는 일이다​ 족히 삼 일은 마음을 비워야 한다​ 성호에게 수많은 별이 성호를 긋는다 저 별은 너에게 저 별은 나에게 성호를 긋는다 밥상 위에서 숟가락 젓가락질 중이다 엄지에 모인 손가락 네 개가 성호다 해는 뜨고 지며 동서남북 성호를 긋는다 동방은 동서남북을 긋고 서방에서는 서동북남을 긋는다 늦은 밤까지 우리는 빌딩 속 알알이 누군가를 위해 성호를 긋는다 휴일에도 너는 卍자를 찾고 너는 十자를 찾고 너는 십자가를 찾는다 의미 없으며 빛나지 않는 개똥벌레가 있을까 성호가 아름답게 빛나는 이유는 두 손 모아 十을 만들어 기도하기 때문이다 정동재 / 별이소년@hanmail.net 2012년《애지》로 등단, 시집 『하늘을 만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