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09호...
   2019년 07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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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73413 2014-11-03
654 석물 부근(石物 附近) 외1편/박찬선 file
편집자
1219 2018-06-01
석물 부근(石物 附近) 어두워서야 밝은 모두가 움직이는 돌이네. 오랜 세월 동안 그냥 잠자코 있는 것이 아닐세. 불덩이로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다가 주저앉기도 하고 극지의 얼음장처럼 꽁꽁 얼어붙었다가 깊이 잠들기도 하네. 무엇이 되고 싶었네. 나무나 물고기나 별이 되고 싶기도 하고 죽어서도 못 잊는 사랑의 얼굴이 되고 싶었네. 뜨거운 여름이 식는 밤에는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네. 망가지고 깨지고 귀가 떨어지고 몸체를 잃은 것들이 자기가 있을 자리를 찾느라 뒤뚱거리며 배회하고 있네. 사라진 어느 절터 적막한 공간을 서성거리기도 하고 땅 속 깊숙이 묻힌 옛 고을의 금당을 기웃거리기도 하네. 나래를 잃은 새는 밤하늘의 별자리만 헤아리고 머리 없는 좌상은 흥건히 염불에 젖어 번뇌를 삭이고 있네. 떨어져 나온 서러운 파편 어디엔가 있을 짝을 그리워하며 굳어지고 있네. 밤이 깊을수록 새소리는 가깝고 떨어져 있으면서도 함께하는 그리움 아린 이야기가 별떨기로 쏟아지는 여름밤의 석물부근 다락방 깊은 바다에는 심해어가 산다. 수산시장의 어물좌판이나 수족관에서도 좀처럼 볼 수 없는 고기. 그는 어둠속에서 더욱 빛이 났다. 세(世)와 대(代)의 헤아림과 촌수를 넘어서 대문중의 어른 마냥 예우를 받았다. 천문의 괘를 보면서 소요하며 때를 기다렸다. 온돌이 달아올라 불붙은 모포를 끌고 뛰는 코 큰 군인의 여름이며, 부상당한 어린 병사의 신음소리며, 불 꺼진 등대로 예측 불허의 여름이 길었다. 바다에는 먹다가 말라붙은 깡통과 입 벌린 군화 짝과 영문자가 새겨진 푸른 군복이 떠다녔다. 돌담구멍으로 본 흑인병사의 몸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름푸시 알 즈음 심해어는 보이지 않았다. 바다는 요동치고 밝을수록 어두웠다. 석고처럼 굳어져서 수심 깊은 곳에 수장水葬되었다. 그물 없는 구름 속에서 동요가 흘러나왔다. 이제 심해어는 하늘에 산다. 약력 경북 상주 출생. 1976년 『현대시학』추천. 시집 『돌담쌓기』 『상주』 『우리도 사람입니다.』외 sunk631@daum.net  
653 둥근 만남 외1편/김요아킴 file
편집자
1088 2018-06-01
둥근 만남 -널문리 주막마을에서 굳게 닫힌 빗장문이, 마악 열리는 순간이다 한 발 한 발 내닫는 발자국의 보폭만큼 서로의 마음 속 앙금도 지워져간다 65년간 봉인된 금기의 역사, 날선 이데올로기는 피의 이끌림 앞에 속절없이 녹고 있다 반도를 가르던 무서운 광풍과 살육의 좌표는 DMZ로 기록되어 오늘을 기다렸다 만나야 할 이유와 간절함은 애타는 마음으로 당위처럼 찾아왔다 한때는 스스럼없이 남북으로 오가던 나그네들이 한 잔의 술잔으로 여독을 풀던 이곳, 서로 명명된 다른 주소들 앞에 ‘마침내’는 이제 고유어로 자리잡아야한다 맞잡은 두 손의 손금사이로, 아슬하게 버텨온 유전자의 뜨거움이 북받치고 있다 초대받지 못한 이 땅의 무수한 영혼들이 둥글게 모여앉아 기억해야 할 이곳, 2018년 4월 27일, 이날은 바로 스스로 문을 열어젖히고 담장을 허물어야 할 첫날이다 * 널문리 주막마을은 ‘판문점’의 옛 이름임. 행복을 시도하다 -목욕탕에서 고향에 돌아와 누운 날은 이른 아침이었다 인적이 뜸한 돌난간에 모로 누워 망막을 향해 사정없이 달려드는 산이 뒷배경으로 추억되었다 자궁 속의 온도와 똑같은 물이 벌거벗은 몸의 원형질을 되살려 놓은 동안, 벌써 강산이 두 번 바뀐 시간들은 거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서린 유리창에 내려앉은 정물들 불혹不惑의 꿈속에서 몇 번의 변형으로 나타났지만, 사라진 골목, 번듯한 양옥집과 넓어진 아스팔트가 꿈보다도 더 낯설게 다가왔지만, 학이 춤추는 봉우리가 털어낸 초로草露는 여전히 개울을 이뤄 낡은 바다로 향하고 첫사랑 계집애를 두고 다퉜던 소나무엔 아직 동무의 그림자가 깊다 훌쩍 커버린 마음에 박힌 옹이를 다시 찾을 단내 나는 여유는, 이미 주차장에 정박한 자가용이 대신하고 있다 다음에 고향을 또 슬쩍 만지작할 날도 이른 아침일 것이다 김요아킴 1969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경북대 사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2003년 계간《시의나라》와 2010년 계간《문학청춘》제1회 신인상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가야산 호랑이』『어느 시낭송』『왼손잡이 투수』『행복한 목욕탕』『그녀의 시모노세끼항』과 산문집『야구, 21개의 생을 말하다』가 있다. 한국작가회의와 부산작가회의 회원이며, 현재 부산 경원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메일 kjhchds@hanmail.net  
652 사람이 되어갔다 외1편/김재순 file
편집자
1185 2018-06-01
사람이 되어갔다 오늘은 세월호 4주기 소셜 네트워크 광장마다 노란 리본꽃이 만발했다 다가가지 못하는 사이버 공간에서 세월호를 그만 우려먹으라는 남자와 그에 대항하여 몸을 떨며 덤벼드는 내 페친이 있었다 남자는 누구의 아비이고 페친은 아비가 된 적이 없는 떠꺼머리다 그날 바짝 마른 안구 때문에 안과 대기실 TV로 봤다 수백 명의 아이를 수장시키고도 물결에 편히 기댄 세월호 아이구 소리를 냈을 뿐 마른 눈물샘은 아이들 인신공양에도 물기 한 방울 내주지 않았고 유명 영화의 한 장면처럼 봤다 다음 날 일터에서 검은 끈으로 검은 리본을 만들다가 다시 노란 끈으로 노란 리본을 접어 일터 사람들에게 선물인 듯 나눠주고 장신구처럼 내 가슴에도 노란리본 하나 달았다 나는 오랫동안 시를 썼는데 무얼 썼던가 세월호는 아득한 이야기처럼 흘려보냈고 눈물샘을 막은 돌덩이도 여전했다 오늘은 세월호 4주기 세월호 때문에 악을 쓰며 싸우는 페친을 무심히 지켜보다가 밥을 먹었다, 순간 솟구치는 맑은 물줄기 4년이나 파 내려가던 암반이 트였다 내 친구의 아이 내 조카 내 새끼 으으으 넘어가지 않는 밥을 물고 한참을 이마를 식탁에 처박고 으으으, 나는 그렇게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갔다 연변에서 오신 할머니 고드름이 주렴을 내린 소한의 아침 자동차 바퀴가 눈 속에 오솔길을 냈다 저 끝 집의 할머니 유모차에 종이박스 몇 장 싣고 꺾인 몸도 반은 싣고 어긋지는 한 발을 끌며 오솔길을 간다 중국에서 왔다는 할머니 우리말이 유창하니 조선족이지 붉은 댕기 휘날리며 아비 등에 업혀서 이 땅을 떠나던 때도 이런 날이었을까 젖과 꿀이 흐르는 데를 찾아서 간 그곳 그곳은 어땠나요.소설처럼* 귀틀집에 우짖으며 달려드는 눈보라를 구멍 난 흙투성이 삼베 바지저고리로 막아내고 땅 주인이 빚을 갚으라고 머리채를 잡던가요 딸을 빼앗기는 사람도 있었나요 그런 날은 겨죽을 먹고 살던 이 땅이 그리웠나요 죽기 전에 꼭 오고 싶었을 조국이라는 이곳 이제는 경제대국이라는데 이 조국의 겨울은 왜 아직 이리 춥고 아득한가 영하 십도가 넘는 빙판길을 폐지 몇 장 실은 유모차에 의지해 미끄러질 듯 미끄러질 듯 혹한의 아침 눈길을 가는 할머니 *최서해의 홍염 김재순 : 경북 상주출생.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 시집⌜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 전자우편: nok9105@hanmail.net  
651 은둔 외1편/채형복 file
편집자
1126 2018-06-01
은둔 나는 지금 숨을 곳이 필요해 세상에 드러내기에는 두려운 황금빛 나는 내 모습을 가리고 세속에 물들기에는 아까운 태초의 순결한 내 생각을 감추고 뒤꿈치 들고 숨죽인 채 살금살금 현실의 뒤안길로 숨어든다 가진 자의 절망과 가지지 못한 자의 분노가 뒤엉켜 거대한 해일의 무리되어 진군하는 숨 가쁜 함성에서 비켜나 성난 군중의 눈에 띄지 않는 초라한 판잣집이 드리운 그늘로 마른 땅에 잦아드는 목마른 봄비처럼 기척 없이 스며들고 싶어 (궁지에 몰려 겁에 질린 생쥐의 반짝이는 눈을 보았는지 생존에 대한 간절한 기도와 체념이 뒤섞인 애절함이라니 고양이의 거만에 찬 앞발에 숨은 발톱의 위용은 얼마나 폭력적인지) 세상은 너무 훤하고 밝아 숨을 곳이 없어 처마 끝에서부터 은밀한 안방까지 투명한 거울로 둘러싸인 거대한 감옥 같은 주인의 허락 없이 자동으로 열고 닫히는 스크린도어 같은 세상에서 나는 행인들의 발길에 바스라지는 마른 낙엽으로 조각조각 부서진다 종은 울리지 않을 것이니 오래도록 죽음을 생각한다 살아온 시간만큼의 죽음과 살아갈 시간만큼의 죽음을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삶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에 매달린 먼지 낀 무쇠 종 죽음을 생각하는 동안 종은 울린 적 없다 살아가는 동안에도 종은 울리지 않을 것이다 한 술의 고독과 절망을 눈가에 주름진 나이로 버무린 중년에게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묻지 말자 죽음, 그 순간에도 종은 울리지 않을 것이니 아침에 일어나 마시는 진한 커피 한잔이면 충분하다, 조금은 눈물겨운 쓸쓸한 안식 같은 죽음의 삶이여 ************************** 채형복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경작가회의 회원. 펴낸 시집으로 <바람이 시의 목을 베고>(2017년 상반기 세종도서 문학나눔 시부문 선정)를 비롯 여러 권이 있다.  
650 오래된 의자 외1편/이미령 file
편집자
1083 2018-06-01
오래된 의자 상주풍물시장 좁은 골목길에 노인 몇 분 모여 이바구를 하신다 유모차를 앞세운 공검댁, 지팡이에 몸을 기댄 용이 할매, 폐지 줍다 쉬러 온 원골 아지매 모두 팔십 평생 걸어온 길이 휘청하다 왕년엔 나도 한가락 했지 꼭두새벽부터 오밤중까지 부지런 떨어 돈도 벌 만큼 벌어봤고 내가 쫙 빼입고 나서면 이 시장통이 다 환하다 캤다 자네들도 알지? 펑퍼짐히 앉아있던 이안댁 한마디하자 이제는 가야 한다며 바람도 끄덕끄덕 몸 뒤틀어지고 닳고 으스러지도록 안간힘을 다하여 받쳐주고 들어올린 일가(一家)의 안락 종아리 꺾여 빈병에 꽂힌 건어물집 진달래가 멀거니 바라보고 있다 큰아버지 청리집 떠나 요양병원에 드신 치매걸린 아흔의 큰아버지 갓 모내기 끝낸 들길 끝 외딴 섬 조가비로 누워 계셨다 작은아버지 내외분 형님 손 애틋이 잡고 건너온 세월 울먹울먹 펴고 계시는데 큰아버지 딴청피우시며 동문서답이시다 그 모자 좋아보이는데 나 도가 동생모자 뺏아 쓰신 큰아버지 얼굴에 고향집 복사꽃 활활 피어난다 소싯적 소설 쓰신다고 논판 돈 안고 서울 가셨다가 삼년만에 빈손으로 되돌아오시고 포대쌀 몇 번씩이나 스리슬쩍 팔아넘기고 동생들에게 뒤집어 씌우셨다는 한량 속은 칠남매 자식들에게 내어주고 푸석푸석 빈 껍데기로 남아 숨찬 이승 조금씩 발끝으로 밀어내는 중이다 -약력; 경북 상주 출생. 2014 시집 <문>으로 등단. -메일 : ryeong1233@hanmail.net  
649 산소발전기 외1편/권숙월 file
편집자
1184 2018-06-01
산소발전기 전국을 괴롭히는 미세먼지 이제 그만, 넓지 않은 거실에 산소발전기를 설치했다 “외출할 땐 마스크 잊지 마셔요” 직장에 다니는 세 아이가 힘 합친 어버이날 선물이다 “공기청정기는 뭐 하러 사”말끝 흐리는 아내 눈이 밖을 향했다 집 주변 소나무 대나무가 진을 치고 있는데 왜 샀느냐는 말이겠지 마당가 감나무 배롱나무도 산소발전을 위해 몸 바치고 있는데 왜 샀느냐는 뜻이겠지 그믐달 새벽하늘에 짧디 짧은 시 한 편 써 놓았다 첫 줄을 쓰고는 더 이상 시어가 떠오르지 않아 단 한 줄로 끝맺은 시, 밤새워 썼다 지웠다 반복한 흔적이 역력하다 좋은 시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시를 써본 사람은 알지 시상(詩想)이 잡혀도 쉬이 시로 녹아들지 않는다는 것 알지 잠 덜 자고 일찍 일어난 사람만이 읽을 수 있는 좋은 시, 하늘 원고지에 쓴 한 줄 시가 이리 깊게 읽힌다 자식이 쓴 시도 읽지 않고 떠난 어머니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로 읽힌다 권숙월 / 김천시 감문면에서 출생. 1979년 『시문학』통해 문단 등단. 한국문인협회 김천지부장, 한국문인협회 경상북도지회장 등 역임. 현재 한국문인협회 이사. 김천문화원과 백수문학관에서 시 창작 강의. 김천신문 편집국장. 시집 『하늘 입』『가둔 말』『민들레 방점』 등 13권 발간. 시문학상, 경상북도문화상, 경북예술상, 김천시문화상 등 수상.  
648 허공에서 외1편/김설희 file
편집자
1144 2018-06-01
허공에서 탯줄이 어디 있는 줄도 모르는 잎 하나가 끊어진 거미줄 한 올을 잡고 달랑거린다 공중이다 사방이 바람이다 어느 틈 기척만으로도 움츠러지는 바싹 오그린 몸이 매달려 있긴 땅이 멀다 하늘도 구름도 아득히 멀다 삶 한 장이 보일 듯 말 듯 한 오라기를 부여잡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깊이 흔들리는 허공 저 허공을 할퀴는 것이 내 놓지 못한 목숨일까 가느다란 숨을 죄는 바람일까 언제 녹아내릴지 모르는 한 생이 바람의 특성 날개를 가진 것들은 바람이 가득 찬 것들이야 팽팽한 것들의 껍데기는 얄팍해 터지기 전 양을 줄이려면 날개를 저어야해 날갯짓은 부풀어 오른 몸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거야 바람이 날개 등을 타고 훠이훠이 길을 나서는데 길에는 아롱아롱 빛나는 것들이 많아 유흥시설처럼 꽃들이 열려있어 어딜 가도 오락 같은 시간이야 날개를 저을수록 탱글탱글한 바람이 수그러드는 것 같아도 사실은 새 바람이 자꾸자꾸 생성되고 있어 멀리 날아가려는 속성이 더 키를 세웠는지 하늘 높이 허공을 젖더니 느닷없이 풀들이 살아있는 땅 쪽으로 내려오는 거야 바람의 본능은 방향을 바꾸는 일이야 김설희 2014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산이 건너오다』.  
647 지울 수 없는 정 외1편/박규해 file
편집자
964 2018-06-01
지울 수 없는 정 어린 시절 가위바위보 하며 쌓은 정 오늘도 그리워 그 기억 속을 더듬어 본다 사람들은 추억 속을 먹고 산다고들 하지만 삶속에서 늙어가면서 그래도 그 시절이 참 좋았지 하며 추억을 떠 올려 보기도 한다 세월 따라 강물도 소리 없이 흐르고 사람도 자기 길을 가면서 낙엽은 떨어지면 흙이 되고 그러면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이다 오십 여년 만에 만난 친구야 어찌 그리 무정하였단 말인가 이런 대화 속에서도 지난 날의 추억을 찾으며 웃음 웃고 잠시 잠깐 행복 했었지 그러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헤어지면 또 만나리라는 생각을 염두에 두지만 나이 칠십을 넘어서니 예측 못하지만 그래도 기대를 걸어보며 미래에 한 번 웃어 본다 우리 이제 남은 인생 자주 만나 회포를 풀어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세 꽃밭에서 오늘은 무슨 꽃이 피었나 이것저것 구경하다보니 작은 민들레가 웃으며 인사하네요. 나를 반겨주는 민들레가 꽃밭에 없었는데 언제 와서 뿌리박고 있는지 꽃을 피우고 반기니 그냥 둘 수밖에 없네요. 그 옆에는 꽃 잔디가 질투라도 하듯 웃고 겸연쩍게 보이기에 손으로 만져주니 웃고 있지요 우리들은 언제나 꽃을 보면 마음이 기쁘고 웃음이 나지요 마음도 편안 해 지네요. 박 규 해 프로필 ㅇ 아호 : 취송(翠松) ㅇ 고향 : 경북 상주 ㅇ 현 거주지 인천 ㅇ 단국대학교 국어국문과 졸 ㅇ 함창중고등학교 근무 정년퇴임(2002년) ㅇ 62년도 김용호 시인님의 추천 됨(4.19 3주년 기념 시) ㅇ 사랑․ 소설계사 기자 근무 ㅇ 현대시조 “바램”으로 천료(97) ㅇ 97 ~새 시대시조(계간) 출품 외 9곳 문예지 출품 ㅇ 시조집 : 희망의 횃불. 찔레꽃이 피면. 풋풋한 삶을 살자. 삶의 자락에서 ㅇ 녹조근정 훈장 외 각종 표창장 15 ㅇ 수상 : 시와 수상문학 특별상(2010) ㅇ 현대시조 이달의 작가상(97년도) ㅇ 한울문학 이달의 작가상(2000년 5월호) ㅇ 동인지: 시인파라다이스 외 55권 외 ㅇ 현재 : 한국 문인 협회 경북 지회 회원. 현대시조 인단 회원. 한울문학 회원. 파라문예회원. 시와 수상문학. 국보문학 회원. 한비문학 회원. 시와 늪 문학 회원. 시와 글 사랑 회원. 지필문학 회원. 문학광장 회원. 스토리문학 회원. 한국미소 문학 회원  
646 겨울, 마당 외1편/남효선 file
편집자
1437 2018-04-30
겨울, 마당 열세살 난 백구가 언 새벽 눈을 감은 날 이백년 된 감나무는 말벌집을 매달고 홍시를 마구 내 준다 직박구리떼 새벽부터 성찬이다 백구 뛰놀던 마당에 분주하게 나들던 참새떼 멧비둘기떼 주인 잃은 밥통 얼씬 않는다 눈부라리며 마당을 지키던 백구 마당을 빙빙 돌던 날 한사코 밥통을 넘보던 멧비둘기떼 참새떼 좀체 얼씬 않는다 사흘을 곡기를 마다하고 선한 눈빛으로 집 주인을 이슥토록 마당 한 켠 웅크리고 앉아 그윽하게 눈 맞추던 백구 기어코 이튿날 새벽 언 날 눈을 감던 날 멧비둘기 참새떼 배롱나무 가지에 앉아 좀체 자릴 뜨지 않고 웅성거린다 백구는 제 주인따라 나서던 징게골 뒷밭에 묻혔다 아침나절과 해거름녘 계란노른자만큼 노오란 햇살이 모이는 곳이다 백구 묻힌 지 열흘 숱한 날아다니던 것들이 틈만 나면 성찬을 즐기던 밥통, 백구 눈 감던 날 그대로 제 자리 지키고 있다 주인 없는 밥통 곁 얼씬도 없이 배롱나무 가지에 올라 한사코 웅성거린다. 죽변항 나이롱 목도리로 얼굴을 싸맨 몸빼 아낙이 리어카를 끌고 눈발을 간다 수북수북 쌓이는 포구 물양장에 어지런 리어카 바퀴 자국 뫼비우스띠처럼 뱀처럼 엉킨다 바다에 떨어지는 눈발은 아리다 금세 물방울로 번진다 괭이갈매기 한 마리 잽싸게 눈발을 쫀다 눈만 겨우 내민 몸빼 아낙이 남긴 자욱 바닷바람에 잘 마른 쥐치 냄새가 난다 눈발을 받은 포구는 죽변항 선술집 골목을 흐릿하게 비취는 가로등처럼 발갛게 몸을 뒤챈다 괭이갈매기가 쪼은 눈발이 다시 바다로 떨어진다 쿨럭쿨럭 일흔 해를 몸에 붙어 좀체 떨어지지 않는 해소 어린 홍합처럼 갯바위를 꽉 잡고 있다 포구 뒷골목 웅크린 쪽문 너머 안방은 따습다 몸빼 아낙 끌던 리어카 눈발에 묻힌다 몸빼 아낙 쪽문 너머 안방 캐시미론 빛바랜 담요 속으로 눕는다 구들은 따습다 경북 울진 생. 동국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안동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공부했다. 1989년『문학사상』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시집 『둘게삼』『꽈리를 불다』를 상재하고 사화집 『네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놓인다』등 다수를 펴냈다. 민속지 공저로 『도리께질 끝나면 점심은 없다』『남자는 그물치고 여자는 모을 심고』『온정면 사람들의 삶과 민속』『북면사람들의 삶과 민속』 『울진 민속총서 Ⅰ.Ⅱ.Ⅲ』외 다수가 있다. 경북도.울진군『울진의 문화재』민속문화 편을 공동 집필하고 울진군.울진문화원『울진군지』민속 편을 집필했다.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울진 편을 집필하고 한국해양문화재단, 울진군 『해양문화지도』울진 편을 공동 집필했다. 지역문화네트워크 이사, 한국작가회의와 대구경북작가회의 이사, 울진군축제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아시아뉴스통신 기자로 일하고 있다.  
645 슬픔의 표정 외1편/남태식 file
편집자
1261 2018-04-30
슬픔의 표정 늦은 아침에서야 사내는 옆지기 한하늘이 밤새 안녕을 고했음을 알았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사내는 어떤 슬픔의 표정도 그릴 수가 없었다. 희번덕이는 뱀들은 사내를 향해 혀와 손을 널름거렸지만 장례가 끝날 때까지 잊은 표정은 살아오지 않았다. 두고두고 상처는 덧났다. 슬픔의 표정을 앗겼던 사내는 더 긴 밤 자주 고요의 늪에 곤두박였다. 어이가 없구나, 시간이여! 아무에게도 사내는 그 상처를 들키지 않았다. 새하얀 것들 출근길, 터널을 벗어나자 먼 곳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청명인데, 눈이라니 저 눈은 청명 이전에도 내리고 있었지. 바람이 불고, 창문으로 돌진하며 시야를 가리는 것은 먼지다. 눈 같구나. 길이 두꺼워진다. 흐릿하구나. 봄, 가을은 사라졌다. 주기도 없는 남은 계절이 꾸준히 오고 간다. 번갈아서 와도 오는 건 여름이 아니니 당연히 겨울은 없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나는 아직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눈의 고장에 가지 못했다. 이 눈의 고장에 가고 싶다. 겨울이 없어도 눈은 내릴런지, 내려 쌓일런지…… 그런데 그곳은 어디였을까. 스리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였을까. 히로시마, 나가사키, 아님 더 가까운? 먼 곳에서 먼지눈이 내리고 있었다. 흰 가림막을 씌워 하얗던 세계 나는 투명한 짐승이 침입하는 공포에 질려 창문 밖을 못 보고 떨고 있었지. 이 섬을 벗어나고 싶다. 피난길처럼 보이는 출근길 기웃거리며 머뭇거리는 사이에도 쉴 새 없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쌓이는 새하얀 것들 이 섬은 내 피부를 숨기기에는 너무 좁다. 피난을 끝낼 수 있는 안식처는 있을까. 먼 곳에서 먼지눈이 점점 더 속도를 올리며 길을 바짝 조여오고 있다. * 시에 시 : 황인찬〈이 모든 일 이전에 겨울이 있었다〉 * 소설에 시 : 가와바타 야스나리《설국》 남 태 식 2003년『리토피아』 등단, 시집『망상가들의 마을』외,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644 아버지 외 1편 / 권순자 file
편집자
1292 2018-04-30
아버지 저문 아버지의 등에 어둠이 내리네 닳고 닳은 시간들이 눈처럼 쌓이네 그리워라 그 호통소리 무거운 짐도 거뜬히 들어올리던 어깨는 세찬바람에 메말라갔네 양식을 위하여 두려움도 슬픔도 뚫어버리던 당찬 발길 쏟아지는 피로도 밤이면 꿈결에 사그라져 자욱한 새벽을 열어제쳤네 가족을 위하여 스스로를 생의 거친 바람에 방패로 삼고 소나기에 우산으로 삼았네 한 생을 꿈꾸며 나날을 벼르고 깎아 닦아주신 길 내가 걸어가네 얼얼하게 닮아가네 은사시나무 어머니 그녀는 은사시나무를 닮았어요 비탈에서 스스로 단련시키고 봄빛에 부풀어오르는 꿈을 쟁이며 날마다 바람에 몸 씻는 나무를 닮았어요 지친 새가 쉬어가는 어깨 부서지기 쉬운 구름이 앉았다 가고 방랑자를 팔 벌려 반겨주는 은사시나무 외로워도 꿋꿋하게 운명의 시퍼런 칼바람이 위협해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험난한 파도에도 두 팔 벌리고 담담히 견뎌내며 환하게 야위어가는 나의 어머니 어머니는 은사시나무를 닮았어요 권순자 1986년 《포항문학》에 「사루비아」외 2편으로 작품 활동 시작, 2003년 《심상》신인상 수상. 시집으로 『우목횟집』,『검은 늪』,『낭만적인 악수』,『붉은 꽃에 대한 명상』,『순례자』,『천개의 눈물』등이 있고, 『Mother's Dawn』(『검은 늪』의 영역시집)이 있음.  
643 봄, 수레국화 외1편/김인구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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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2 2018-04-30
봄, 수레국화 연두빛 커튼을 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창 너머 잎, 잎들의 환호성이 생명의 경배를 배우는 봄날 너는 화단에 앉을 자리 잘못 찾아 앉아 울고 있는 연분홍빛 수레국화 깨지고 상처 받기 쉬운 이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톱니바퀴를 가진거야 햇살이 일정한 보폭을 들고 지나가는 네 곁에 나도 앉을 자리 잘못 찾아 앉아 울고 있는 또 다른 한 송이의 보랏빛 수레국화 나를 알 순 있지만 나를 버릴 순 없는 동병상련의 봄밤 쑥쑥 자라나는, 천 개의 사랑학 개론 사랑 밖에서 사랑이 한마디 했네 사랑은 참을성이 부족한 참치 캔 통조림 같은 표정으로 자지러지게 웃거나 비상구가 없는 폭파된 거울처럼 난폭하게 울거나 말이 없고 바람이 없는 연인들이 아는 척, 모르는 척, 기다림과 그리움을 꺼내먹고 물 한 모금 마시며 고양이 생애주기를 흉내 내는 저녁나절 금이 간 담벼락 위에서 사랑은 허리를 꺽고 고장 난 적막을 어깨에 두르며 야옹, 환하게 웃음 짓네 처음처럼 너무 낯선 인사는 입 안 가득 가두고 유일하게 망가진 고독을 끌고 천 개의 사랑 안으로 걸어 들어가네, 나는 사랑은 너무 위험한 우아함과 동침한 고단함 여전히 참을성은 잃어버린 창문을 넘어 달아나고 빛없이 비추는 얇은 거울은 깨진 채로 빈손으로 돌아오는 우리를 변함없이 절친한 반어법으로 맞아주네 사랑 밖에서 만난 숨이 커다란 구멍들은 금세 어두워지거나 깊어지거나 바퀴를 갖지. 전북 남원출생. 1991년 <시와 의식> 여름호에 <비, 여자> 외 2편을 발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 다시 꽃으로 태어나는 너에게> <신림동 연가> < 아름다운 비밀> <굿바이, 자화상>(2014년 세종 우수도서 선정) 외 다수의 공저가 있다.  
642 노숙자를 연대하다 외1편/임소형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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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 2018-04-30
노숙자를 연대하다 모란역 2번 출구 앞 인도를 점령한 무허가 가옥 어느 생의 행각일까 낡은 매트리스에는 세상과 단절된 유배 자의 고독이 흐른다 금싸라기 땅을 점령 제약 없이 경계 없이 새삼 부러울 것 없는 풍요의 행적에도 화해할 수 없는 빈곤한 희망 허무한 절망이 옆구리 터진 베옷을 입고 누워있다 어느 누군들 절망의 허파를 이식하고 싶었을까 마는 고독한 유배 자의 새우등에서 야윈 기억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내린다 가끔은 곰팡이 핀 절망을 씻고 밤하늘의 별을 세며 별빛에 누운 기록 하나쯤은 훔쳐내 보기도 했음 직한 남루한 홈리스니스* 기울어지는 나의 모습이었다가 너의 모습이었다가 무언의 공허를 유발하는 처연한 자화상에 시린 통증의 바람 몰아 친다 이 순간은 노을빛마저 섧다 늦더위가 남았다지만 이불을 끌어다 당기는 잠결의 반사적 행동 양식[行動樣式] 차디 찬 냉소의 시선을 쪼개어 온기를 포갠다 재활의 압박붕대를 칭칭 동여매어 곧추세우고픈 모호한 연민이다 대나무는 세찬 비바람에도 탄성을 유지하려 속통을 비우고 죽순은 퍼붓는 장맛비에도 파란 순을 내민다 는데 곰팡이 핀 운명의 지팡이에 선뜻 길을 내어 주지만 않았던 들 한 뼘 높이도 안 되는 낮은 세상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가치 없는 무형의 존재로 전락하진 않았을 터 그의 이력이 담긴 내용물이 빵빵한 검정 비닐봉지 먹다 남긴 소주 반병 그리고 이미 바닥을 비운 빈 병들이 세상 속에 널브러져 두런두런 아찔할 정도로 소란하다 액자를 바꾸다 허울 좋은 하눌타리 포용과 관용의 유연한 허세는 이미 신앙이 되었는데 사각 틀에 갇힌 묵화 향 잔상은 애닳게도 빛 좋은 개살구 빛 좋은 개살구를 읊조린다 고립된 환각의 늪에 빠져 얼마나 오랜 날 공인된 부정 합격으로 의기양양 춤추었을까 낯 가리지 않은 포옹 편견 없는 연민,오지랖 불치병인 오만이었구나 마르지 않은 안구의 습기 이슬을 먹고 산 세월이 거무튀튀하게 박제되어 거실을 맴돈다 무른 습성으로 한발 두발 뒷걸음질 친 여리디여린 나약함의 잔해 예리한 칼끝으로 도려내야만 옳은 혜안이라 단죄한다면 식별 가능한 나의 통찰력은 이미 집을 비운 지 오래다 초인종을 눌러도 여전히 부재중으로 굳게 닫힌 문 새벽을 달리는 요란한 자명 종소리에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서다 문득 낭떠러지 앞에 서 있듯 조바심 나는 순간을 본다 아직은 날개 꺾인 새가 아니길 염원하는 이 지독한 이기는 자위인가 너그러운 방생의 작태인가 자신을 위무하며 헛웃음 짓다가 , 헛웃음 웃다가 검은 고양이 기웃거리다 할퀴고 간 할인 행사로 전락한 액자에서 홰치는 소리 들려온다 재빨리 분주한 손놀림으로 빛바랜 사진을 교정한다 분첩을 두드리지 않아도 뽀잇뽀잇 사각 틀 안의 얼굴이 환하다 이윽고 수북한 깃털이 겨드랑이를 뚫고 홰를 치는 저 뜨거운 날갯짓 분명한 유체이탈이다. ◆임소형 (58년 경북 상주출생 서울 거주) 문학광장 시부문 신인 문학상 / 전북대 사범대 졸업 / 중등교사 역임 2018,2,25 시집 씨앗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 공저  
641 내 앉은 자리 외1편/신순말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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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2 2018-04-30
내 앉은 자리 여기가 꽃자리라고 자꾸자꾸 되뇌면, 꽃이 되나 꽃은 피나 무논 물결이 종일 배밀이를 하고 바람이 써레질을 마친 저녁 징검징검 거닐던 왜가리 날아가고 산이마에서 해가 제자리걸음 할 때 나무와 하늘이 옮겨오고 앞산이 걸어와 누워보는 참 희한하다, 저 얇은 물낯 이윽한 그 거울 세상 다 들어간다 신순말: 상주 출생. 상주들문학회.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 시집[단단한 슬픔]  
640 너를 위한 기도 외1편/이선정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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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7 2018-04-30
너를 위한 기도 사랑을 사랑이라 호명하지 못할 때 숨겨둔 그리움이 눈물로 흘러 빗방울이 된다 가슴에 더는 담지 못해 눈물이 강을 이루고 바다로 흘러 그제야 비를 뿌린다 사랑이 그리워도 소환하지 못할 때 눌렀던 외로움이 가슴에 불어쳐 뼈마디를 돌아다니는 칼바람이 된다 가슴을 후려치다, 더는 애처로워 상념의 밤을 남긴 채 돌고 돌아 깊은 산 어느 골짜기의 메아리로 윙윙거린다 비로, 바람으로, 나 견디는 저편 어디에서 너는 꽃으로 아름답고 너는 깔깔대는 춘풍(春風)으로 살거라 색깔론 사과는 빨간색, 오직 빨간색 초록 아오리 사과, 노란 딜리셔스는 애초부터 태어나지 않은 색 허리를 반쯤 깨물린 아삭한 기억은 빨간색을 강요한다 사과를 보다가 시인, 너를 본다 너는 무슨색? 허세 작렬 짧은시 칼질의 달인 날렵 은색, 잔뜩 치장 산문시 주렁주렁 비로드 짙은 보라색, 주릅* 뚝뚝 생활시 나를 팔아 쌀을 사니 하얀 쌀색, 이도저도 아닌 시답잖은 시, 무색, 물색 다 합치니 검은색.. 아, 역시 시인의 길은 어둡구나 어제 구겨서 던져놓은 팔렛트에 오늘은 쓰다 만 보라색을 양껏 풀어 헤친다 흘낏 넘겨다 본 옆집 사과 냄새가 담벼락에 붉게도 향기롭다 *주릅 / 꾀죄죄 하다 강원도 사투리 약력 문학광장 신인상 수상 (현) 황금찬 시맥회 정회원 (현) 격월간 문학광장 강원지부장 황금찬 시맥회 문학광장 하계백일장 대상 2017' 국제깃발전 초대작가 2017' 지하철 스크린도어 시공모전 당선 2017' 대한민국 공예대전 시화부문 특별상  
639 하얀 욕망/고창근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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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2 2018-04-01
하얀 욕망 그가 처음 몸에 이상을 느낀 것은 막 잠을 청할 때였다. 김장을 담근다고 며칠 동안 부산을 떨던 아내는 이미 얕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는 하루 중 가장 기분이 좋을 때가 막 잠자리에 들어 잠을 청할 때였다. 직장에서 나름 인정을 받고 있었고 가정에서도 초등학생인 두 딸은 무탈하게 잘 크고 있었다. 아내 또한 자신과 아이들의 뒷바라지하는데 만족하고 있었기에 하루를 바쁘게 보낸 후의 잠자리는 평온 그 자체였다. 하지만 평소와 달랐다. 잠이 들지 않고 자꾸 뒤척였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머리속은 엉킨 실타래가 가득 찬 것 같았다. 그는 아마도 퇴근하다 본 성폭행현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일은 좀 일찍 집을 나가 경찰서에 가서 퇴근 무렵 본 성폭행범에 대해 얘기할 작정이었다. 파란색 파카에 청바지를 입은 성폭행범의 뒷모습이 눈에 또렷했다. 그는 그 상황을 잊어버리고 잠을 청하려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러자 아내의 얼굴이 정면으로 향했고 따뜻하고 평화로운 콧김이 얼굴을 간지렵혔다. 그는 이불속에서 손을 꺼내 아내의 얼굴을 쓰다듬으려다 아내가 깰까 싶어 도로 집어넣었다. 아내가 무척 피곤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하니 아내는 잠들어 있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지만 이해했다. 며칠 동안 김장한다고 본가에 들락거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김장은 본가에서 누나 집이랑 남동생 집까지 네 집의 김장을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일도 많았다. 끝나고 나면 아내는 꼭 몸살을 앓았고 그는 매번 아내를 근사한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 와인에 좋아하는 것을 사 주었다. 아내는 무척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몸살이 확 달아난다고 환하게 웃곤 했다. 또한 어머니가 고생했다고 준 돈으로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하지만 아내는 그 돈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그나 딸들의 옷을 샀다. 그러지 말고 당신 옷 사 입으라고 지청구를 넣으면 입고 싶은 옷이 없다며 해맑게 웃곤 했다. 이틀 후에 그는 아내를 근사한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자야겠다고 다시 눈을 감자 또다시 성폭행 상황이 또렷이 떠올랐다. 그가 그 성폭행 현장을 본 것은 부장이 주재한 회식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부서원들을 깊은 이해심으로 잘 이끌어 신뢰를 받는 부장이었다. 그 또한 차장으로서 부장의 신뢰를 듬뿍 받고 있었다. 한우고기에 소맥을 마셨는데 부서원 모두 좋은 기분으로 양껏 먹었다. 누군가 2차로 노래방에 가자는 걸 그는 마다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참이었다. 그는 노래방 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오기 위해선 공원을 거쳐야 했는데 그는 아파트로 들어오기 전 공원 벤치에 앉아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산책하거나 운동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아 느긋하게 담뱃불을 붙였다. 담배 가격이 올라간 후 언제 끊어야지 하면서도 아직 못 끊고 있었다. 근데 이상하게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났는데 또다시 강한 흡연 욕구가 끓어올랐고 그는 다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피우기 시작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한 점은 회식 자리에서도 있었다. 한창 주위 부서원들과 한우고기에 술을 마시는데 갑자기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들어올리는 느낌이랄까. 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다들 옆 사람과 이야기하기에 바빴고 그에게 관심 갖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불쾌한 생각이 들었고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술에 취한 것은 아니었다. 두 번째 담배를 반 쯤 피웠을까. 갑자기 공원 구석에 자리한 소나무 숲에서 어떤 물체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다 싶으면서 그는 그냥 피우던 담배를 마저 피우고 집으로 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느낌이 왔다. 순간적이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번쩍 들어올리는 느낌도 회식자리에서와 같았다. 그는 요즘 무리해서 몸이 허약한 탓이라며 아내에게 말해 보약이라도 한 질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담뱃불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또다시 소나무 숲에서 어떤 물체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살그머니 소나무 숲으로 걸어갔다. 소나무 숲에 가까이 갔을 때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여자의 비명소리 때문이었다. 악다구니를 쓰는 듯한 여자의 비명소리에 그는 머리카락이 곧추 서는 것 같았다. 성폭행.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이었다. 순간 무서웠다. 그냥 되돌아가려다 다시 소리가 나는 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제야 파란색 파카를 입은 사내의 탱탱한 엉덩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무릎쯤에 청바지가 걸려 있었다. 사내의 밑에는 치마가 올라가고 허연 허벅지가 드러난 여자가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온 몸에 소름이 확 끼쳤다. 그는 뒤돌아서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사내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여자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몸은 도망치고 있었다. 도망치는 몸이 눈에 보였다. 뒤돌아가서 사내를 후려치고 여자를 구해! 가슴속에서 누군가 소리쳤지만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자신이 사는 아파트 706동 앞에 있었다. 이런. 그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이렇게 못난 놈이라니. 그는 스스로 자책하며 지금이라도 달려가 여자를 구하고 사내를 흠뻑 두들겨패고 경찰서로 데리고 가야 하나. 아님 경찰서부터 신고해야 하나. 그는 머릿속에 복잡하게 떠오르는 생각에 아파트 앞 화단에 주저 앉았다. 그는 평소에도 성매매하거나 바람 피우는 남자들을 극도로 증오했다. 어릴 때부터 장학사였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유난히 도덕과 윤리의식이 강했다. 초등학교 때 남자 아이들이 여자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을 두고 보지 못했다. 또한 문방구에서 슬쩍 물건을 훔치는 아이들도 용서하지 못했다. 그는 그런 자신의 생활에 만족했고 평생 그렇게 살리라 마음 먹었다.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화단에 앉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연거푸 두 대를 피운 후에야 그는 명확한 생각이 들었다. 가서 남자를 두들겨패고 여자를 구하자. 그는 굳게 결심을 하고 담배불을 꺼서 휴지통에 넣고 일어섰다. 한번 마음먹으니 다리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어? 그는 소나무 숲에 다다라 소리가 났던 곳으로 달려갔을 때 성폭행범 사내와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벌써 도망쳤구나.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뭇잎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풀잎이 옆으로 쓰러져 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경찰에 신고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망설였다. 피곤했다.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지금 경찰에 신고하면 경찰서까지 가서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 그러면 최소한 두세 시간은 걸린다. 12시가 넘었는데. 그는 망설이다가 스마트폰을 넣고 아파트로 걷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에 신고할 작정이었다. 지금은 너무 피곤해. 그는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아내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하면 아내 또한 겁에 질릴 것이고 신고하라고 할 것이었다. 내일 아침 좀 일찍 나가서 신고하고 회사로 갈 생각이었다. 그때 아내에게 말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밤새 비몽사몽으로 지냈는데 꿈에서 어떤 사내와 싸웠다. 어딘지 왜 싸웠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낯모르는 사내였고 무슨 일인지 그는 사내에게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처음엔 주먹질을 하며 서로 엉겨붙여 뒹굴었는데 나중엔 그가 일방적으로 사내를 때렸다. 왼손으로 사내의 멱살을 잡고 오른손으로 얼굴을 수없이 강타했다. 사내는 고스란히 맞고만 있었다. 전혀 모르는 사내였기에 그는 아침에 깨어나서는 어이가 없어했다. 지금까지 그는 누구와 싸운 적이 없었고 하물며 심하게 말다툼도 하지 않았다. 근데 주먹질까지. 그것도 일방적으로 때리다니. 그는 식은 땀을 흘러 축축한 몸으로 침대위에서 뒤척였다. 몸에서 진이 모두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일어날 힘조차 없어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없는 일이었다. 밤새 누군가 싸우다니. 그것도 일방적으로 때리는 꿈이라니. 하지만 또 하나 게름칙한 게 있었다. 사내는 파란색 파카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눈에 익은 옷이라 생각했는데 그 옷은 퇴근하다 본 성폭행범의 옷과 비슷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평소에 산에 갈 때나 산책할 때 잘 입는 옷과 비슷했다. 그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머. 아직 안 일어나고 뭐해요?” 아내는 몇 번이나 밖에서 불렀다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마, 땀 좀 봐. 당신 몸이 안 좋아요?” 그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아내는 놀라서 그에게 다가와 이마에 손바닥을 댔다. “아냐. 악몽을 꾸어서.” 그는 얼버무렸고 아내는 또다시 어디 몸이 안 좋으냐고 물었다. “오늘 회사 가지 말고 쉬는 게 어떄요?” 아내의 말에 그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하루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결근이나 병가를 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개근상을 놓치지 않았다. “가야지.” 그는 끙, 신음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잠깐 현기증이 일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제 몇 시에 들어온 거에요?” 아내는 그가 씻으러 방을 나가자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글쎄. 좀 늦은 거 같은데.” 그는 만사가 귀찮아 대충 얼버무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혹 무슨 소식 못 들었어요? 어젯밤에 아파트 공원 소나무숲에서 누가 성폭행을 당했다는데.” 아내의 목소리가 문이 닫히기 전에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그는 또다시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이런. 그는 바늘로 쿡쿡 쑤셔대는 듯한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의 옷과 흡사한 파란색 점퍼와 청바지를 입은 사내의 엉덩이 깐 뒷모습이 휙, 눈 앞을 지나갔다. 그는 분노와 현기증이 일어 주저앉을 뻔했다. 그는 아침을 먹지 못하고 출근을 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데도 몸이 허공에 떠있는 것 같았다. 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주 뜨거운 물에 몸을 푹 잠그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회사 건물에 도착했다. 그때 그는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했다. 회사 정문에는 경찰 둘이 한 사내를 수갑 채워 양쪽에서 팔을 잡고 연행하고 있었는데 수갑 찬 사내를 보고는 주저앉을 뻔했다. 자기 자신이었다. 아무리 눈을 감았다 다시 떠도 분명 수갑을 찬 사내는 자기 자신이었다. 감색 양복에 푸른색 와이셔츠. 불그스름한 넥타이. 모든 게 똑같았다. 이럴수가. 그는 꼼짝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이 경찰차에 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주위에는 부장을 비롯한 부서원들과 시민들이 둘러싸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모두 침통한 표정이었다. 그 사람은 내가 아니라고 뛰어가려는데 수갑 찬 그가 차에 오르기 전 잠깐 그를 돌아보았고 그는 순간 얼른 외면했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그는 회사로 가지 못하고 경찰차가 떠난 뒤에도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겨우 스마트폰을 꺼냈다. 하지만 손에 힘이 없어 스마트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신음소리를 내며 허리를 굽혀 스마트폰을 겨우 집어들었다. 하지만 전화를 하려고 스마트폰을 보았을 때 액정화면은 마치 거미줄처럼 방사형으로 가느다란 선들이 뻗어 있었다. 그는 액정화면이 깨진 것에는 개의치 않고 제발 전화를 할 수 있도록 고장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며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다행히 액정화면에 불은 들어왔으나 홈화면으로 있던 아내와 딸의 사진이 일그러지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개의치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우선 통화목록을 누르고 부서원 이름을 찾았다. 한참 밑에 박대리의 이름이 보였다. 그는 얼른 오른손가락으로 누르는데 또다시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집어들어 몇 번이나 시도한 후에 겨우 박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차장님 도대체 어찌된 영문입니까?” 신호음이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은 박대리는 다짜고자 물었다. “그, 그러니까. 지금 무, 무슨 이, 일이냐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아니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경찰서 아닙니까?” “아, 아니 그, 그게. 그, 그러니까.” 그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더듬거렸다. 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우차장이야? 바꿔봐, 하는 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박대리 주위로 직원들이 몰려 있는 것 같았다. “우차장,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설마 자네가 그런 건 아니겠지?” 부장은 반신반의하는 말투로 물었다. “도, 도대체 무, 무슨 말인지 모, 모르겠…….” 그는 말하다 또다시 스마트폰을 떨어뜨렸고 바닥에 뒹군 스마트폰에서 이봐, 우차장, 우차장,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힘겹게 허리를 굽혀 스마트폰을 들어 귀로 가져갔다. “그, 그러니까. 무, 무슨 일입니까?” “아니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하냐. 그러니까 자네가 어제 성폭행한 것은 아니란 말이지? 확실하지?” 부장은 추궁하는 심문관처럼 물었다. “예? 성, 성폭행……이요?” 그는 어이가 없었다. 성폭행이라니. 내가? 그는 크게 웃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었다. “그렇지? 맞지? 자네가 그럴리 있나? 분명 오해일 거야.” 부장은 여전히 의아하다는 투로 말했다. “절, 절대 아닙니다, 절대로.” “맞아. 자네는 그럴 사람이 아니지. 자네만큼 법을 잘 지키고 반듯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하여튼 빨리 끝내고 회사로 와.” 부장의 말에 그러면 그렇지, 차장님이 그럴 리가 있나, 하는 직원들의 소리가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왔다. “아, 알았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고 나서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다행히 부장과 부서원들이 자신을 믿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그는 담배를 꺼내며 앞에 있는 상가 골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좁은 골목안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는 다급히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입으로 가져갔다. 연거푸 연기를 내뿜자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어느새 필터까지 타 들어간 담배를 바닥에 던지곤 다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 담배 또한 얼마가지 않아 금방 필터까지 타 들어갔다. 목이 칼칼했다. 솜이 목구멍에 꽉 찬 것 같았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또다시 담배를 꺼내던 그는 순간 아내가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미치자 어떤 불기둥이 머리 꼭대기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그는 얼른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스마트폰을 꺼내 집으로 전화를 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골목으로 들어서던 행인이 멈칫 하더니 도로 돌아갔다. “당신이야?” 아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연락이 갔구나.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자 아내가 다급히 말했다. “당신, 맞지? 어찌 된 일이야? 아까처럼 끊지 말고 자세히 말해봐. 당신이…… 설마 아니지? 응? 말 좀 해봐.” 아내는 애원했다. “여보. 내 말 잘 들어. 이거 뭔가 음모에 빠진 거 같아.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려야 해.” 그는 아내에게 말을 하면서도 자신에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모? 무슨 음모라는 거야? 아침에 당신이 출근하고 곧장 경찰이 닥쳤어. 당신 서재에 있던 컴퓨터랑 서랍에 든 노트 같은 것도 다 가져갔어. 어젯밤에 일어난 성폭행 용의자라나.” 아내는 울먹이며 말했다. “뭐라고? 컴퓨터를?” 그는 기겁을 했다. 컴퓨터엔 여성의 누드 사진이 많았다. 취미로 사진을 찍기에 수시로 누드사진을 수집해 저장해 놓았는데 그걸 경찰이 가져갔다면 이상한 쪽으로 사태가 흘러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당신이 한 거 아니지? 응? 당신이 그럴 리가 없잖아. 얼마나 자상하고…… 나한테나 딸한테도. 근데 경찰이 당신이 그랬다고 물증이 나왔다고 그러는데 난 도저히 못 믿겠어. 참, 당신 자주 입던 옷 있지 파란색 점퍼랑 청바지도 가져갔어. 시시티비에 찍힌 거랑 같다면서.” “음.” 그는 할 말을 잊고 신음소리를 냈다. “당신 경찰서지? 내 곧 갈게.” 아내는 억지로 울음을 참는 듯 침을 삼키고 나서 말했다. “아냐. 오지 마. 경찰서 아냐.” “아니라고? 다 봤는데. 텔레비에도 나왔어. 경찰서에 있는 당신…….” “난 아니라고. 회사 앞이야. 왜 나를 못 믿어.” 그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믿어. 당신 믿지.” “그래. 하여튼 뭔가 잘못 됐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건지 나도 모르겠어.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고 있어.”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당신 아까 전화해서는 경찰서라고 했잖아. 그러더니 바로 끊었는데.” “내가 전화했었다고? 아냐. 잘못 걸려왔겠지. 난 당신에게 전화한 적 없어.” 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누굴까, 아내에게 전화한 놈은. 순간 어젯밤 엉덩이를 까놓고 성폭행을 하던 놈이 떠올랐다. 맞아, 그 놈이야. 그 놈이 나한테 덤터기를 씌우고 집으로 전화한 거야, 내 목소리로 변장해서. 그는 연거푸 담배를 빨았다. 또다시 금방 필터만 남아 다시 새 담배를 꺼내물었다. “분명히 전화했었어. 경찰서라고. 놀라지 마라고.” “아니라니까. 참, 그리고 당신에게 미처 말 안 한 게 있는데……. 어젯밤 사실 성폭행하는 거 봤어, 퇴근하다. 그래서 경찰서에 신고하려고 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오늘 아침에 하려고 했는데.” “당신이 봤다고?” 아내가 그의 말을 잘랐다. “응.” “아침에 그런 말 안 했잖아. 내가 어젯밤 성폭행 사건 일어났다고 얘기해도. 당신 설마…… .” “뭐야. 당신 엉뚱한 거 상상하는 거 아냐?” 그는 담배연기를 내뿜다 고함을 질러 사래가 걸려 켁켁거렸다. “당신 믿지. 하여튼 지금 경찰서로 갈게. 참, 변호사는 선임했어? 오빠한테 물으니까 변호사부터 선임하라는데.” “뭐라고? 형님한테도 전화했다고?” 그는 어이가 없었다. 아내마저 나를 성폭행범으로 믿다니. “아냐. 먼저 전화왔었어. 텔레비 보고.” 또다시 아내는 울먹였다. “알았어. 하여튼 난 범인이 아니니까 그렇게 알고 경찰서도 오지마. 나 회사 앞인데 좀 알아볼게 있어.” 그는 전화를 끊었다. 자꾸 통화를 할수록 자신이 범인 된 기분이었다. 벌써 텔레비전에 나왔다니. 그는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 맙소사. 그는 스마트폰을 내팽겨치려다 간신히 참고 다시 뉴스를 보았다. 어젯밤 일어난 성폭행 사건을 다루면서 그를 유력한 용의자로 경찰에서 조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이웃 사람의 증언이라며 착하고 성실한 사람인데 그럴 줄 몰랐다는 기사까지 있었다. 환장할 일이었다. 그는 담배를 물고 담벼락에 기대었다. 그는 거리로 나왔다. 회사원들이 모두 출근을 했는지 거리는 한산했다. 길이 낯설었다. 항상 사람들에게 떠밀리다시피 길을 걸었고 출근을 했는데 한산한 거리를 걸으니 다른 장소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회사로 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집으로 갈 수도 없다. 경찰서로 가기엔 두렵다. 그는 가방을 오른쪽 옆구리에 낀 채 무작정 걸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내가 성폭행을 했단 말인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구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었다. 하물며 미물이라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부터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부모님 말씀 잘 듣는 모범적인 생활을 해왔다. 대학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서도 준법정신이 강했다. 회사에서 회식 후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부른다거나 2차로 성매매 알선을 해 주는 술집으로 가는 걸 극도로 경멸했다. 지금껏 아내 외에는 누구에게도 추파를 던지지 않았다. 그런데…… 환장할 일이었다. 그는 길을 걷다 원조 해장국이란 간판이 걸린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침을 안 먹고 나온 터라 우선 뜨끈한 국물이라도 먹으면 정신이 돌아올 것 같았다. 벽에 걸린 텔레비전은 혼자 떠들고 있었고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일단 사람들이 없으니 안심이 되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해장국을 주문했다. “해장국은 아침에만 팔아요.” 얼굴이 수더분하게 생긴 여자가 말했다. 그는 벽에 걸린 메뉴판을 보며 그럼 설렁탕이라도 달라고 했다. 여자는 주방에다 설렁탕 하나요, 외치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보리차를 그 앞에 놓았다. 그는 보리차를 조금씩 마셨다. 뜨거운 것을 마시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설렁탕이 나왔다. 그는 공기밥을 전부 국에 넣고 말았다. 연거푸 떠먹으니 속에서 열이 나고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천천히 드시오, 그러다 체하겠소.” 여자의 말에 그는 아랑곳않고 계속 입에 떠넣었다. 씹는다기보다는 그냥 입에 퍼 넣고 삼키는 형상이었다. 어느새 국그릇의 바닥이 보였다. 이마의 땀방울 하나가 설렁탕 그릇에 툭, 떨어졌다. 그제야 그는 휴지를 꺼내 이마를 닦았다. 기운이 좀 나는 것 같았다. 죽다가 살아난 느낌이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국물까지 깨끗이 비운 후에야 입 주위를 물수건으로 닦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담배가 간절했지만 조금 있다 나가서 피우기로 했다. 우선 커피믹스를 종이컵에 타왔다. 휴식 시간에 부서원들과 담배를 피우며 마시던 커피믹스와 같아 무척이나 반가웠다. 마치 몇 개월만에 마시는 것 같았다. 이제 마음에 안정을 찾았고 처음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작정이었다. 그때였다. “저런 놈은 단박에 쥑이야 한다카께.” 여자의 쇠된 소리가 들렸다. 순간 그는 가슴이 쿵, 무너지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니 여자가 텔레비전에 눈을 박고 있었다. “저 보소. 저게 인간인가. 인간이 어째 저런 일을.” 여자는 혀를 쯧쯧, 찼다. 그는 고개를 돌려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자신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고개를 숙인 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화면 밑에는 성폭행범 태연히 출근하다 회사 앞에서 잡히다, 라는 글자가 씌여 있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프래쉬가 터지고 기자들의 여러 질문에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오직 죽을 죄를 졌습니다, 죄송합니다, 란 말만 연거푸 했다. “시상이 어째 돌아가는지. 저런 놈은 살려주면 안 된다카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쥑이야 된다카이.” 여자는 그 앞에 있는 식탁을 치울 생각은 않고 아예 의자에 앉았다. 전 그럴 사람으로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동료들에게도 잘 대해줬고 여직원들에게도 전혀 집쩍거린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퍼떡 고개를 들었다. 박대리였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구두로 바닥에 떨어진 물에 원을 빙글빙글 그렸다. 죄송합니다. 저희 직원이 그랬다는 게 믿기지가 않습니다. 어젯밤 늦게 술을 마시고 헤어졌지만 그러리라고는 전혀 몰랐습니다. 이번엔 부장이 나와 카메라 프래쉬를 받으며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 그렇소? 잉?” “예?” 여자의 말에 그는 깜짝 놀라 고개를 여자 쪽으로 돌리려다 텔레비전을 보는 척했다. “아, 집이나 직장에서는 그렇게 착하게 했다면서 이 무슨 해괴한 짓을 했단 말이요. 다 쇼야 쇼여, 착하다는 건. 안 그렇소?” 여자 또한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아, 예. 그럼요.” 그는 혹시 여자가 자신을 알아볼까봐 조마조마하며 말했다. “남자들은 다 똑같다니께. 늑대여 늑대. 속에는 다 늑대가 들어있다카이.” 여자는 그의 말에 아랑곳 않고 말했다. 그는 일어섰다. 우선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더 급선무였다. “여기 얼마입니까?” 그가 여러 번 말했을 때에야 여자는 느릿하게 카운터로 왔다. 팔천 원이요. 여자는 그를 보며 갸웃거렸다. 그는 재빨리 지갑에서 만 원을 꺼내 카운터에 놓고 몸을 돌렸다. “여기 잔돈…….” 여자의 목소리가 그가 닫은 문에 걸려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제 어디로 가나.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걸으며 중얼거렸다. 우선 집에 가서 푹 쉬고 싶었다. 푹 자고나면 모든 게 제대로 돌아와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순간 분노가 일었다. 아니다. 그 놈이 누군지 알아야 한다. 도대체 왜 내 행색을 하며 그런 끔찍한 짓을 했는지 그것부터 밝혀야 한다. 그는 갑자기 뒤로 돌아 허겁지겁 경찰서로 향했다. 가서 내가 아니라고. 저 놈은 내가 아니라고 밝혀야 한다. 그는 숨을 헉헉거리며 빠르게 걸었다. 아. 순간 그의 머릿속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쪼그리고 앉아 물을 끼얹는 여자의 모습.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직도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니. 그는 수취감에 몸을 떨었다. 그가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해질 무렵 여느 때와 같이 동네 아이들과 골목길에서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갑자기 길에 접한 건물을 가리켰다. 그 집은 새로 이사온 젊은 부부가 사는데 길에 면한 건물은 대문과 화장실과 수도가 있는 건물이었다. 아이들은 무슨 뜻이냐는 듯 건물과 아이를 번갈아보았다. 그러자 아이는 득의양양하게 아이들 곁으로 왔다. “시방 저 안으로 여자가 들어갔는데…… 봤대이.” 아이의 목소리 낮춘 은밀한 말에 다른 아이들은 여전히 말뜻을 꿰지 못하고 아이의 표정만 살폈다. 모두들 여자가 화장실에 간 것으로 여겼다. “시방 목간한다니께, 목간.” 목간이라는 말에 아이들은 숨을 멈추고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면서 일제히 건물로 눈길을 돌렸다. “내가 직접봤다니께.” 아이는 여전히 목소리를 낮춘 채 말했고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따라와. 아이는 턱짓을 했고 아이들은 떨리는 가슴을 안고 따라갔다. 흙벽돌에 시멘트를 바른 벽에 엄지손가락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었고 아이는 눈짓을 했다. 머뭇거리던 아이들 중에 머리통 하나는 더 큰 아이가 주삣거리다 벽으로 다가가 눈을 가까이 댔다. 아이들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는 집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망설이고 있는데 머리통이 큰 아이가 얼굴이 빨개져서 하, 하, 하며 숨을 크게 내쉬며 눈을 뗐다. 처음 본 아이의 눈짓에 다른 아이가 눈을 가져갔고 여전히 얼굴이 빨개지고 호흡이 가빠져서 눈을 뗐다. 마침내 그의 차례가 왔고 그는 머뭇거렸다. 그러자 처음 본 아이가 인상을 썼다. 공범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 뒤탈이 없으니까. 그는 호기심반 주눅반으로 구멍에 눈을 가까이 댔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숨이 가빠왔다.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눈을 뗐다. 처음 본 아이가 다시 한 번 더 구멍에 대고 안을 보더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눈짓했다. 아이들은 슬금슬금 물러나 각자 저녁 먹으러 갔다. 가면서 한 아이가 중얼거렸다. 여자들도 거기에 터러기가 있네. 겨드랑이에도 있고. 다른 아이들은 못 들은 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그는 심하게 몸살을 앓았고 학교에 가지 않았다. 죄책감이었다. 무언가 큰죄를 지은 것 같았다. 그 상황을 떠올리면 괜히 고추가 간지럽고 오줌이 마려웠다. 엄마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한동안 마을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집에서만 지냈다. 사춘기가 되어서도 여학생들에게 무덤덤했던 게 아마도 그때의 죄책감 떄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덕분에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이라는 곳에 갔다. 아직도 그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자신에게 또다시 놀랬다. 잊어버렸다고 여겼던 일이었다. 하지만 며칠 전에 일어난 것처럼 생생했고 가슴 역시 두근거렸다. 경찰서에 도착하자 정문에 서 있던 의경이 막아섰다. 그는 움찔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의경의 말에 그는 고개를 숙이고 수사과에 볼일이 있어 왔다고 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을 유심히 보던 의경은 오른쪽으로 쭉 가서 왼쪽으로 돌아가라고 하곤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휴, 한숨을 내쉬었다. 머뭇거리다 용기를 내어 내처 건물 안으로 들어가 수사과 팻말이 쓰인 사무실 앞에 섰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아 고개를 숙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일렬로 있는 형사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조사를 받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사과란 곳에 온 그는 긴장하며 성폭행범이 어디 있는지 살폈다. 잘 눈에 띄지 않아 한 발을 안 쪽으로 집어넣고 살피는데 순간 그는 몸을 움찔했다. 안 쪽, 창문이 있고 그 옆 시계가 달려 있는 벽 쪽에서 그는 수갑을 찬 채 조사를 받고 있었다. 형사는 다그치는 모습이었고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연신 고개만 주욱거렸다. 도대체 어떤 놈인데……. 그는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고함치는 형사들의 목소리에 그는 움찔거렸다. “그러니까, 직원들과 술을 마시고 퇴근하다 그랬다고 했는데…….” 형사의 목소리가 겨우 들리는 곳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고 창문 밖을 보는 척했다. “술을 많이 마셔서. 죽을 죄를 졌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그는 고개를 연신 주욱거렸다. “그 아파트 공원에서 3년 전에도 비슷한 성폭행 사건이 있었는데 당신이 그랬죠? 순순히 부는 게 좋습니다. 피해자한테서 나온 디엔에이 받아놓은 게 있어 금방 탄로납니다.” 형사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때도 회식 끝나고 집에 오다…….” 그는 말을 멈추었고 형사가 컴퓨터를 치다가 멈추곤 추궁했다. “집에 오다?” “집에 오다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데…… 여자가 지나가는 걸 보고는 그만…… 아이고 죽을 죄를 졌습니다.” “그러니까 술을 마시고 밤 늦은 시간에 여자를 보니 갑자기 욕정이 생겨 그랬단 말이지요?” 형사는 컴퓨터 자판기에 손을 가져갔다.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미치겠습니다.” 그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조사를 받던 그가 그를 쳐다보았다. 아. 분명 자신이었다. 옷도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는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왜요. 아는 사람이요?” “아닙니다.” 지나가던 수사관이 묻자 그는 황망히 얼버무렸다. 얼른 사무실을 나왔다. 더 이상 그를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복도를 걸어나오는데 문득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목욕하는 여자를 훔쳐본 후 심한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며칠을 앓았는데 그 뒤로 가끔 꿈을 꾸었다. 꿈에 그가 아무도 몰래 그 건물로 가는 것이었다. 가서 목욕하는 여자를 볼 때도 있고 목욕을 하지 않아 못 볼 때도 있었다. 몇 살 때까지 꾸었는지 모르지만 가끔 어른이 된 그는 그게 꿈이었는지 실제였는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수갑 찬 그가 자신의 목덜미라도 잡을까 그는 빠른 걸음으로 경찰서를 나섰다.* *** 경북 상주 출생, 소설집 『소도(蘇塗)』외 2권, 장편소설『갈대는 바람에 꺾이지 않는다』외 3권, 장편서사시집 『아리랑 아라리요』 서양화 개인전 3회  
638 솔기/박종희 file
편집자
1231 2018-04-01
솔기 어머니가 또, 옷을 벗었다. 밤 도깨비같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혼자 숟가락질도 못 하시는 분이 단추가 달린 환자복을 술술 벗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노인병원의 간병사는 “그러니 이곳에 계시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건 괜찮은데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이죠.”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은 퍽 언짢은 표정이었다. 밤새 환자복과 실랑이하던 어머니는 날이 밝으면서 깊은 잠에 빠졌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싶어 고민하다가 어머니가 벗어놓은 환자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뒤집힌 환자복의 솔기 부분이 내가 입어도 불편할 만큼 거칠었다. 수선이 필요 없는 환자복이라 그런지 겨우 솔기를 박을 수 있을 만큼 좁은 시접이 휘갑치기도 안 된 채 뭉쳐있었다. 그제 서야 옷을 벗는 어머니 심정이 이해됐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밤에 옷 벗으면 큰일 난다며 어머니께 으름장을 놓았으니. 땀 흘린다고 맨살에 환자복을 입혔으니 얼마나 불편하고 성가셨을까. 종일 누워지내는 어머니한테 솔기가 배겨 자국이 남았다. 나약한 어머니한테 솔기는 어쩌면 주삿바늘 같은 무기였을 지도 모른다. 뭉쳐진 솔기를 보니 아버님한테 가려져 평생 덧니처럼 살아온 어머니의 삶과 닮아 보였다. 정신이 흐려도 생각은 있으신지 솔기를 뜯다 만 환자복에서 어머니의 지난한 세월이 웅성거렸다. 어머니는 가난하고 형제 많은 집안에 장녀로 태어나 공부를 하지 못했다. 어쩌다가 바깥사돈끼리 중매서는 바람에 어머니는 종갓집 둘째 아들인 시아버님과 얼굴도 안 보고 혼인했다.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던 아버님은 성품이 바르고 인물이 출중해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학자였다. 그때만 해도 자식을 대학까지 보내는 집은 거의 없었다. 할아버님은 시아버지를 공부시킨 대가로 나이 어린 동생과 조카들을 공부시키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신혼 때부터 시동생과 큰댁 조카의 도시락을 싸느라 허리를 졸라매었다. 박봉의 교사월급을 쪼개 시동생 뒷바라지 하느라 늘 허기가 졌다. 아버님의 힘으로 대학까지 마친 작은아버님은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대기업에 취직하고 간호사로 일하는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 키도 작고 전라도 여자라고 집안에서 반대하던 작은아버지의 결혼성사에 큰 역할을 한 아버님께 작은어머니는 입안의 혀처럼 굴었다. 따지고 보면 작은아버님이 큰 인물이 되기까지 밥해 먹이고 빨래해준 어머니의 공도 컸는데 작은어머니는 아버님한테만 인심을 베풀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마을에서도 내로라했던 아버님과 배움이 없는 어머니와의 혼사는 애초부터 기울었다. 옷 속에 숨어 존재가 무색한 솔기처럼 잘나신 아버님에 묻힌 어머니의 자리는 늘 옹색했다. 직장생활을 오래 해 요령 많고 약삭빠른 작은어머니에 비하면 촌부인 어머니를 아버님도 은근히 무시했다. 아버님은 술만 드시면 어머니께 술주정했다. 미련한 곰 같다며 술 주전자를 방바닥에 집어 던지기도 했다. 아버님이 어머니를 무시하니 자식들도 어머니를 우습게 여겼다. 그런 아버님께 한마디 불평을 할만도 한데 잔사설이 없던 어머니는 가타부타 입을 떼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쓸쓸하던 마음 자락을 접어 솔기처럼 봉합했던 것 같다. 솔기는 옷감을 이어주는 재봉선이다. 옷감이 아버님이라면 솔기는 어머니였다. 부부가 일심동체이듯 솔기를 꿰매야 비로소 옷의 모양을 갖춘다. 솔기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바람을 막아주고 속살이 보이지 않게 내밀히 옷을 보호해준다. 그러고 보면 솔기는 단순히 옷감을 꿰맨 자국이 아니라 묵묵히 아내의 자리를 지키게 하는 마법의 바늘땀이었다. 숙명처럼 순종하고 살던 어머니한테 자유를 주고 싶으셨던 걸까. 아버님이 먼저 세상을 뜨셨다. 아버님을 떠나보내고 나서 어머니가 조금씩 이상해졌다. 아버님이 계실 때는 좀처럼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어머니가 변하기 시작했다. 사소한 일에도 벌컥벌컥 화를 내기 일쑤였다. 어둠 속에서 혼자 감침질하던 세월이 길었던지 어머니는 꿰맸던 솔기를 풀어헤쳤다. 치매를 앓는 사람처럼 변덕스러워진 어머니의 마음이 날씨처럼 맑았다가 흐렸다가 갈마들었다. 봉합했던 마음 자락을 뜯어내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어머니는 물건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사시는 동안 천 원짜리 팬티 한 장도 당신 손으로 사 입은 적이 없는 어머니는 옷에 욕심을 부리고 화장품에도 관심을 가졌다. 얼마나 부럽고 한이 되었으면 그랬을까. 어머니는 매일 당신 것을 만들었다. 화장실에서 치약이 없어지고 찬장에서 접시가 없어졌다. 어떤 날은 프라이팬이 없어지고 쟁반도 없어졌다. 그렇게 없어진 물건은 어머니의 장롱 깊숙이 숨어있었다. 평생 당신의 의견 한 가지 못 내고 사시던 분이 매사에 간섭하는 일도 잦아졌다. 내가 퇴근해 돌아오면 놀다가 늦게 다닌다고 억지를 부렸다. 목욕을 자주 간다, 음식이 싱거워 간이 맞지 않는다며 며느리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하셨다. 항상 뒷전에서 아버님 눈치만 보던 어머니가 어른 노릇을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기분이 맑은 날이면 어머니는 아버님 뒤에서 솔기처럼 사시던 이야기를 꺼냈다. 이일 저일 아버님과의 일을 순서 없이 늘어놓으면 내가 알아서 대충 솔기를 꿰매야 했다. 어머니를 보면 가끔 이해 안 되는 것이 있다. 과거가 무엇이 길래. 도대체 얼마나 무서운 놈이 길래 금방 왔다 간 사람도 잊어버리는 어머니가 과거에 있었던 일은 깨알같이 꿰고 계실까. 밤마다 알몸 소동으로 간병사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어머니의 환자복을 바꾸었다. 솔기가 뭉쳐 상처를 내는 환자복 대신 시접 처리가 잘 된 우주복으로 샀다.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환자복을 뒤집어 보여드렸다. 문득 무슨 생각이라도 나는 것일까. 솔기를 말아 쥔 어머니가 잇몸을 다 드러내며 활짝 웃는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아버님이 어머니의 솔기가 되어 주시는 걸까. 순하게 웃는 어머니의 얼굴 위에 아슴아슴, 낯익은 아버님의 모습이 보인다. 약력: 2000년 월간문학세계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 2014년 동양일보 신춘문예 소설‘가리개’ 당선. 시흥문학상, 매월당 문학상, 등대문학상 등 다수 수상 저서: 수필집『가리개』 한국작가회의,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충북작가회의 사무국장,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 지도강사로 활동 중 주소: 세종시 누리로 119, 405동 1703호 우 30130  
637 슬픔아 놀자 외1편/최기종 file
편집자
2229 2018-04-01
슬픔아 놀자 슬픔아 놀자 불 꺼진 외딴방에서 슬픔아 손잡고 놀자 슬픔아 놀자 별도 달도 들지 않는 연옥에서 슬픔아 얼싸안고 놀자 슬픔아 놀자 이토록 눈물주고 가슴 쓰리게 하는 슬픔아 동무하며 놀자 슬픔아 놀자 파랗게 점멸하는 묵시의 침실에서 슬픔아 신랑각시 되어 놀자 꽃불 눈 한 줌 난로에 놓으면 치르 치르 치르르 금방 녹아 없어지지 오징어도 난로에 구우면 지르 지르 지르르 금방 굽혀 구수해지지 아픔도 슬픔도 여기에 놓으면 피르 피르 피르르 금방 녹아 없어질까 도시락도 노릇노릇 익어가는 여기 꽃불에 쪼이면 너도나도 피어나서 붉어지는 것일까 최기종 1992년 교육문예창작회 작품 발표, 『나무위의 여자』, 『만다라화』, 『어머니 나라』, 『나쁜 사과』,『학교에는 고래가 산다』 목포작가회의 회원, 전남민예총 이사장 메일주소 jogi-choi@hanmail.net  
636 가난한 겨울 외 1편/강규 file
편집자
1375 2018-04-01
가난한 겨울 내 조상은 아마도 사냥꾼이었다고 생각해본다 호피 한 장이면 온 가족이 한해를 살 것이고 멧돼지라면 쌀 열 되는 될 것이다 아비의 이승이나 시어미의 이승도 그러했듯이 내다 팔 산삼은 없어도 손주먹일 산삼만은 구했을 것이고 시린 손발을 가진 부엌떼기 아낙은 왕겨에 피죽을 먹었을 것이었다 인제 땅에 없는 조상의 묫자리나 인제 땅에 없을 자식들을 생각하노라니, 나는 참으로 가난하다 나는 이미 가난하다 내 조상들은 백년 전후前後를 곱으며 살았는데, 축령산 순례기 정말로, 시인 한 번 되고 싶어 지훈 선생의 태胎를 묻은 곳, 지훈 선생의 뼈를 묻은 곳을 순례하였다 걷다보면, 당신이 네발로 기던 곳, 두발로 걷던 곳, 지팡이에 기대며 걷던 곳, 울던 곳, 웃던 곳, 취하던 곳들을 짐작한다. 읽다보면, 유불선이 하나 되고 대차고 각진 것도 하나 되고 님의 괘적도 흔들림 없는 하나였음을 깨친다 영양돌이나, 마석돌이나, 축령산의 돌들이 다, 한 권에서 나온 것도 읽었다 선생의 걸음을 가늠하는 내 눈동자는 여전히 둘 곳을 잃는다  
635 부지불식간에 외1편/권오윤 file
편집자
1420 2018-04-01
부지불식간에 내가 문득 고개를 돌려보면 오랫동안 쓰지 않던 그 무언가가 이제 낡고 기다리다 지치거나 혹은 너무 닳아서 이제는 대답하지 않고 돌아 앉아있다. 녹슬지 않는 쇠란 얼마나 비정한가, 산소와 만나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부스러져가다가 닦고 기름치고 살펴주지 않으면 그저 흙으로 돌아가는 저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것들과 같이 그저 모르는 사이에 하나씩, 세상과 나와 물건들은 그 사이에 세월과 산소와 무심을 벗 삼아서 어느새 툭, 하고 썩거나 부스러져 간다. 아, 저 녹슬지 않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들은 다 무엇인가 모든 것은 부지불식간에 부지불식으로 되어 가는데. 소리 나는 당신이 내게 사랑해 라고 말을 하려는 눈빛을 봅니다. 눈을 보고, 그 소리는 나중에 듣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더듬이를 세우고 있지 않을 때는 당신의 말이 내 귀를 때려도 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먼 별에서 당신을 봅니다. 당신은 내 별을 향해 사, 랑, 해...라고 말을 합니다.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 당신의 소리가 내 귀에 도착했을 때, 말한 당신도, 듣는 내게도 그 소리는 갈 곳을 잃습니다. 낡은 녹음테이프 속에서 풀려나오는 아이들 웃음처럼 오래 전에 보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린 사랑의 말이 우리 사이에 떠돌아 다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