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1호...
   2019년 09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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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78041 2014-11-03
671 아카시아 꽃그늘 외1편/서하 file
편집자
1486 2018-07-31
아카시아 꽃그늘 가만히 아팠다 희끗희끗 나부끼는 아픔은 희끗희끗 견디면 된다는 걸 술렁이는 그늘에 들면서 알았다, 앓았다 엇박자로 날리는 눈발처럼 그렁그렁한 눈인사 속속들이 앓는 중 아닐까 도원동에는 향기에 젖은 지느러미가 있어 버둥거리면서도 찔끔찔끔 잘 산다는 걸 알았을까, 앓았을까 이불도 걷어차며 잠이 드는 한 채의 병이 제 집이란 걸, 날 밝으면 바글거리며 해장하는 그늘도 있다는 걸 자잘한 꽃 씹으며 알았다, 앓았다 제대로 앓은 아픔은 향기롭다던 말 지우며 아카시아 그늘의 오후가 거짓말처럼 다디달다는 걸 알았다, 앓았다 파도 소리가 들리는 책장 높낮이 다른 책들 키순으로 정리했더니 책장에서 파도 소리가 들린다 둥둥 떠다니는 달을 건졌는데 활어였다 성대가 없는 활어의 이야기는 유효기간이 없다 내 활활 죽고 나면 지느러미 꽁꽁 묶여 횟집 저울추처럼 파들거릴 활어 움푹 패인 곳에서 건져 올린 물미역 같은 가름끈 옮겨가며 읽은 책 또 펼쳐 읽는다 당신을 읽는데 내가 젖는다 갈매기 깃털 닮은 책갈피가 할딱이는 해변, 난독의 해안선 한 권을 온전히 읽지 못하겠다 뭉툭한 눈이 삐댄 염분 탓이다 비린 해초가 더듬더듬 코끝에 매달리는 시간이다 높고 낮음이 없는 저 수평선,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건 흰 구름, 그의 몫이다  
670 돌탑의 이력 외1편/곽도경 file
편집자
1462 2018-07-31
돌탑의 이력 팔공산 갓바위 오르는 길 돌무더기 여럿 서 있다 산에 오르다 볼 일 급해 길섶에 숨어 해결하고 돌 몇 개 덮어 두었는데 몇 달 후 그 자리에 커다란 돌탑 하나 서 있고 주변에 크고 작은 돌탑 여럿 더 서 있더라는 말 자꾸 생각나 돌탑 향해 합장한 사람들 쳐다보며 속으로 웃다가 그 간절함 비웃은 내 마음 꾸짖는다 돌덩이 하나 올릴 때 마다 누군가의 기도와 염원 쌓이고 돌탑의 뼈 더 굳건해졌을 것인데 누가 감히 이 돌탑의 이력 비웃을 수 있을까 흰나비 한 마리 날아 와 앉았다가 탑을 물고 날아간다 신혼부부 구순 아버지 팔순 엄마 깨 볶는다 엄마가 아~ 여봉~ 하고 콧소리 빵빵 넣어 부르면 아버지가 아~ 왜 불러~ 하고 장단 맞춰 대답하고 어찌나 죽이 척척 잘 맞는지 그 모습 보고 있던 딸들 배꼽이 달아난다 육십 년 세월 함께 산다는 건 오장육보 다 꺼내어 놓고 서로에게 스며들어 둘이 하나 되는 일 서로를 오래오래 고소하게 볶아 감칠맛 나는 참기름으로 한 병에 담기는 일 곽도경/ 계간 시선으로 등단 시집/ 풍금있는 풍경  
669 흰 눈썹 위의 풍습 외1편/ 최형심 file
편집자
1340 2018-07-31
흰 눈썹 위의 풍습 삼나무에 내리는 눈*을 사랑했네 삼나무를 발음할 때 나는 앞머리가 없었네 눈이 오지 않아도 암스테르담행 기차를 탔네 당신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나는 긴 낭하(廊下)에 갇혔네 눈발은 점점이 잠을 이루고 나는 삼나무와 그리워하다를 자주 헷갈렸네 심지도 않은 삼나무 사이로 조무래기 풍습들이 내리고 우리의 청춘이 밀서처럼 다녀갔네 우리는 스물여덟 덜 떨어진 청춘들 신림엔 삼나무도 없어 우리는 귀퉁이 떨어진 법서들처럼 서로를 사랑했네 밤의 밑그림 아래를 눈발이 서둘러 떠나고 영성체를 모신 소녀들이 흰 꽃처럼 돌아눕는데, 하얀 눈썹으로 당신을 그린 날이면 나를 모르는 내가 무명의 목어로 자꾸만 넘어지네 밀실까지 밀려드는 눈 오는 거리를 차마 떠나지 못하네 무운시(無韻詩)를 외운 물별들에게 안부를 묻는 안쪽, 습한 사물에겐 사물함이 필요하다고 절대치를 가진 나무와 바람과 나를 나누었네 눈 감지 않은 물고기의 잠이 문장에 내려오는 날에는, 알약을 삼키지 않고도 하얗게 둥글어지는 무덤가에서 산짐승을 수습한 밤이 자주 묵어갔네 폐어(廢語)의 나날도 가고 조무래기 별들도 가고 그리하여 이제 삼나무에 눈은 내리는데, 외눈만 가지고 내가 못질도 없이 깊어지네 당신의 방에는 삼나무의 배꼽들 둥글게 실눈을 뜨며 내려오고 유순한 눈발이 아직 지상을 떠돌고 있는데 겁이 많은 건달들이 소년을 숲으로 데려갔네 국수를 먹은 저녁에는 품속의 풍속들 하얗게 비늘로 덧나는데 수런수런 설레던 수련(睡蓮)이 빗장을 걸고 있네 나의 지붕에는 당신을 다르게 말하기 위해 등이 굽은 사제들이 살고 있는데, 그리하여 삼나무에 눈은 내리는데 당신은 흰 날개를 타고 눈썹을 넘어오네 호금(胡琴) 슬픔이 많은 동물은 덩치의 오 할이 감정이다. 저녁의 가업을 반올림하며 여인들은 마두금 타는 소리에 머리를 잘랐다. 차가운 편자들이 천막과 천막을 지나 늙은 낙타의 눈썹에 달리고 내벽에는 연인들이 밀어낸 밀어들, 바람에 헹군 세간들과 둘러앉아 수테차를 마셨다. 둥근 방에 앉아 여러 생을 돌아서 오는 어린 낙타의 발소리를 들었다. 비천무(飛天舞)를 추는 새들 위에 누가 밤하늘을 뚫어놓았나. 양떼들이 그을음 위에 그을음을 올리고 별의 궤적을 오독했다. 두 개의 현 사이에서 모래산들이 켜켜이 쌓아올린 밤이 완성되고 짐승에게는 시(詩)가 필요했다. 파란 이마의 여인이 몸을 말고 울림통 속으로 들어간 후, 악사들은 오래 기른 눈썹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서로를 의심하지 않고 두 줄의 현을 건널 수 있을까, 고삐를 놓은 사내들이 빈둥거리고 있었다. 음악은 점선처럼 성실하게 사막에 묻힌 어린 몸을 만졌다. 길들일 수 없는 길을 걸어온 검푸른 소녀들의 비단이마엔 말발굽을 모아 모닥불을 피운 흔적들……. 사막에 서면 가난한 이들은 모두 동갑이었다. 이정표가 된 죽음을 따라 룬으로 떠나는 여인은 무명지가 없었다. 나는 하지 근처의 벌목공처럼 헐벗었으므로 목초지의 목관악기처럼 울었다. 모래 능선 하나가 일어나 마두금의 현 위를 걸어갔다. 졸고 있는 모닥불 옆 돌무덤에 심연 하나를 괴어주었다. 약력 : 2008년 『현대시』 등단 이메일 : ir48@daum.net  
668 내일로 가는 길 외1편/심승혁 file
편집자
1431 2018-07-31
내일로 가는 길 너저분한 회색빛 오늘이 안쓰러웠나 보다 꽃 하나 홀로 빨개져 어스름한 발걸음 위로 핀다 피어난 자리에 마른 오늘의 부스러기가 떨어지면 보슬보슬 비가 저녁을 짓고 물먹은 바람은 밤으로 익을 준비를 한다 밥솥 알람 같은 소리가 하룻길 두통을 날리고 더 깊은 오늘을 아구아구 먹어갈 테지 먹힌 오늘이 깊은 안식같이 소화된다 하루 동안 수고한 눈 밑으로 밤이 쏟아진다 포식의 나른한 시선 끝에 매달린 꽃 하나 회색빛이 두려워 후다닥 사라져 간 저 문은 그대로 있으라는 건지 들어오라는 건지 삐걱거리는 여닫이의 선택으로 흔들리고 있다 문 너머 빨간 꽃, 물음표였다가 느낌표였다가 매혹의 점 찍고서 내일이 오기 전까지 나를 유혹할 기세다 비, 내리다 낯익은 비가 내리면 모든 것 다 뿌리치고 커피 내릴 준비를 한다 세상 소리 모두 숨을 죽이고 투닥투닥 터지는 빗소리만 남으면 새액쌕 물 온도 높여가는 커피포트에 흥얼흥얼 빼쭉한 입반주를 얹어 똑똑 마음을 내린다 찰나의 행복일지라도 나를 내리고 너를 높여 세상 가장 작은 평상심이 안으로 욕심껏 스며들게 한다 비, 내리는 날이면 세상 것 모두 내치고서라도 커피 한 잔에 깊게 내려진 마음 한톨 휘휘 저어 마신다 ○ 약력 등 : 2017. 1월 격월간 문학광장 시 부문 등단 2017 황금찬 문학제 오이도 시화전 참여 2017 문학광장 하계 백일장 은상, 즉석시제 은상 수상 2017 상주동학농민 기념문집 참여 2017 문학광장 한국문학 대표시선(5) 참여 2017 계간 문장21 겨울호(39호) 참여 2017 국민예술협회 인천미술전람회 시화 부문 특선, 입선 수상 2018. 2월 (봉놋방 엔솔로지) “씨앗,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 공저 2018. 5월 제6회 황금찬문학제 시화경진대회 우수상 수상 2018. 5월 제13회 빛창공모전(한줄시) 최우수상 수상  
667 칼(刀) 외1편/이창한 file
편집자
1061 2018-07-31
칼(刀) 홍소 이창한 끝없이 갈았다 무딘줄 알고 날카로움으로 벼리어 손등에 굵은 핏줄 내려다 보며 잔뜩 긴장한채 호흡도 잠시 멈추고 쉬지않고 갈았다 한번도 베어보지 않은 칼날위를 엄지 손가락으로 스윽 가늠도 해보고 양날의 서슬을 시선안에 고정시키면 죄어오는 심장에 조금씩 금이 가는 것 무딘 것 같아 숫돌위에 물을 뿌린다 뜨거워 김이나는 심장에서 붉게 스며나오는 고통 날카롬이 무섭도록 벼린 칼날을 겨누어 언어를 상실한 혓바닥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칼날의 체온이 망각했던 것의 실체가 또렷이 떠오르고 본성을 감춘채 유치한 변명으로 속여왔다 내가 나를 베고난 칼날에 얹혀있는 생명의 맥박 동강난 이쪽과 저쪽을 훔쳐보며 아직도 칼이 무디다고 자위하는 혀가 칼날인줄 깨닫지 못하고... 여 보 게 어둠과 추위가 홑처마 들마루 지나 문풍지에 달라붙은 한겨울 몸서리가 신음으로 좁은 골목길 돌아 나설 때 아이 울음소리 지워진 텅빈 동네를 귀신 걸음으로 싸다니고 여 어! 부르고 넋을 놓아버린 한참이나 맨발로 기다리며 맞은 어저께 내린 눈 무게에 눌려 추녀 끝에 빛으로 매어달린 칼날 같은 고드름 추워질수록 날카롭게 끝을 세우고 아래로 향한 인내가 비수로 꽂혀 아파온다 겨울 외투로 둘러쳐진 담장안에 아까 불러모은 소리 조용히 바람에 밟혀 여 어! 돌아오는 소리로 툭! 툭! 떨어진다. 약력 : 성명 이 창 한 (홍소 泓沼) 경북 상주시 석단로 1706(개운동) 054)535-4411, 010-5535-4411 시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2009) 영강 지상백일장 시부문 당선 (2010) 월간 문예사조신인상 시 당선 (2010) 월간 문예사조신인상 수필 당선 (2011. 2.) 월간 문예사조문학상 본상 수상 (2012. 2. 17.) 한국문인협회 회원, 경북문협회원, 경북펜클럽회원, 상주문협회원 E-mail : saman01@hanmail.net  
666 그을린 욕망/고창근 file
편집자
1320 2018-07-05
그을린 욕망 풀에게 점령당한 텃밭에는 채소의 흔적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풀 사이로 삐죽하게 솟은 파가 보이고 연두색을 띤 잎이 보여 상추가 있으리라 짐작이 갈 뿐이다. 마당에도 잡풀들이 점령군처럼 으스대며 세력을 뽐내고 있다. 방안에서 엎드린 채 당신은 눈이 부신 듯 반쯤 뜬 눈으로 마당과 텃밭을 한 시간째 보고 있다. 가끔 눈이 깜빡거리지 않는다면 잠을 자거나 죽은 사람으로 오인 받을 수 있는 모습이다. 핏기 없이 하얗고 삐쩍 마른 얼굴이 마치 데스마스크 같다. 당신은 미라가 천 년의 먼지를 틀고 일어서듯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다. 반쯤 뜬 눈은 여전히 초점이 없다.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 후 또다시 꼼짝하지 않고 텃밭과 마당을 본다. 아니, 어쩌면 텃밭과 마당을 내리쬐고 있는 햇빛을 보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당신은 햇빛을 보는 게 아니라 실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가 어딘가. 당신은 기억을 더듬는다. 처음 보는 텃밭과 마당, 누워 있을 때 둘러본 천장과 낡은 가구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들이다. 어느 날 잠자고 있을 때 누군가 자신을 생판 모르는 이곳에 갖다 놓은 느낌이다. 하지만, 두렵거나 원망이 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은 한량없이 편안하다. 텃밭과 마당도 풀이 많을 뿐이지 어딘지 눈에 익은 것 같기도 하다. 풀만 모조리 뽑고 나면 지금껏 생활해온 집같이 느껴질 것 같다. 저 풀을 뽑으면. 당신은 중얼거리지만 입은 열리지 않고 소리도 나지 않는다. 죽음. 순간, 당신의 하얀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렇지. 죽으러 갔지.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생각에. 근데 여기로 죽으러 왔단 말인가. 남모르는 집에. 죽으려는데 누군가 나를 살려주고 이 집으로 데리고 온 건가. 당신은 고개를 돌려 방안을 둘러본다. 때가 절여 누르스름한 천장과 벽, 낡은 텔레비전이 보인다. 그 옆엔 역시 몇 십 년은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선풍기가 고개가 꺾인 채 서 있다. 저 가방. 회색 등산 가방을 보는 당신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가방을 메는데 다리에 힘이 스르르 풀리던 느낌. 죽으러 가는 길. 가방엔 든 게 별로 없어 가벼웠고 지금껏 살아온 인생이 이랬구나 싶어 더욱 서글펐던 기억. 인간은 기억으로 사는 동물이라지. 당신은 고개를 돌려 다시 텃밭과 마당을, 아니, 텃밭과 마당을 내리쬐고 있는 하얀 햇빛을 바라본다. 어째서 이곳에 왔을까. 보아하니 저승은 아니고. 집을 떠난 지는 얼마나 되었는가. 궁금하지만 그렇다고 꼭 알고 싶은 것은 아니다. 저 풀을 뽑으면. 당신은 몸을 일으키다 휘청, 거리며 벽을 짚는다. 마당이 빙글빙글 돈다. 짚고 있는 벽이 기우뚱거린다. 주저앉을 것만 같다. 다리에 힘을 준다. 풀을 뽑아야지, 풀을. 당신은 비틀거리며 마루로 나와 댓돌을 본다. 고동색 등산화가 한 쪽은 댓돌 위에 한 쪽은 마당에 뒹굴고 있다. 분명 자신이 신던 등산화다. 그제야 당신은 자신의 몸을 훑어본다. 잿빛 상의 등산복과 검은색 등산바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래 죽으러 갈 때 입었던 옷이지. 고개를 끄덕끄덕거린다. 비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풀은 잘 뽑힌다. 풀 사이 일렬로 솟아오른 파를 보며 손으로 풀 밑동을 한 움큼 잡고 뽑으면 흙을 잔뜩 부여잡은 뿌리가 올라온다. 뽑은 풀은 텃밭 너머로 던지고 나서 다시 허리를 숙여 풀을 뽑는데 뽑을수록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날카로운 햇빛이 당신의 정수리를 쪼고 등을 내리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은 아랑곳 않고 풀을 뽑는다. 당신의 얼굴에서 땀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진다. 상의 등산복은 땀으로 이미 다 젖어 등에 찰싹 들러붙어 있다. 하하. 당신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풀을 한 움큼 쥐고 상체를 일으키다 휘청, 거린다. 텃밭 너머 시멘트 담이 좌우로 흔들흔들, 거린다. 그때다. 아. 당신은 어지러워 눈을 감는다. 그래, 밤에 여기로 왔었지. 언제더라…… 길을 잃고 헤매다 외딴집을 발견했고……. 무척 안온한 느낌이 들었지……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슬레이트 지붕, 비록 불이 켜 있지 않아 어두컴컴했지만 마루가 있고 큰방이 있고…… 작은 방이 있고…… 무작정 집으로 들어갔지…… 그 뒤로는? 갑자기 누군가 눈앞에 검은 장막을 드리운 것 같다. 어지럽다. 당신의 손에 있던 풀이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무 생각이 안 난다. 죽음은 이미 두렵지 않다. 오히려 편안하다. 기분이 좋다. 비실비실 웃음이 나오려 한다. 당신은 한동안 면도날 같은 햇빛을 고스란히 받다가 천천히 텃밭을 나와 마당을 가로질러 마루에 걸터앉는다. 방금 나왔던 텃밭을 본다. 3미터 정도 되는 길이의 파 세 이랑 중에 겨우 한 이랑의 풀을 뽑았을 뿐이다. 풀에 치인 파가 똑바로 서 있지 못하고 풀을 뽑은 빈자리로 비스듬히 쓰러져 있다. 다시 텃밭으로 가려고 상체를 일으키다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래…… 멀리…… 되도록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죽고 싶었지. 무작정 버스를 탔고…… 내리고…… 걸었지. 무슨 절이 있었고…… 절 뒤로…… 산으로 올라갔지. 등산로가 아니라 잡목과 잡풀이 우거져 오르기가…… 싶지 않았고. 배고픈 줄도 몰랐지. 며칠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는 생각만 들고…… 단지 물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배낭을 벗어 안을 뒤져 보았지만 야속하게도 물병은 나오지 않았지. 하얀 로프가, 목을 맬 로프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고…… 산을 넘고…… 밤이 왔고…… 쓰러져 자고……. 당신은 마치 눈앞에 광경이 떠오르는 것을 잡기라도 할 양 미간을 찌푸리지만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단지 깨어나 산을 넘었는데, 외딴집인 이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없다. 당신은 마당을 둘러본다. 댓돌 밑에서 대문도 없는 입구까지 풀이 군데군데 쓰러져 있다. 자신이 걸어온 자국 같은데, 어젯밤인지 그저께 밤인지, 그도 아니면 며칠 전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신은 다시 일어나 텃밭으로 걸어간다. 날카로운 햇빛이 이제 드문드문 흰머리가 올라오는 당신의 정수리를 닭의 부리처럼 쫀다. 당신은 아랑곳없이 주저앉다시피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는다. 힘이 난다. 땀이 날수록, 힘이 들수록, 날카로운 햇빛이 정수리를 쫄수록 마음이 편안하다. 기분이 한결 좋다. 그때 아내의 벌레 보는 듯한 눈매가 떠오른다. 언제였나. 이번엔 한심하다는 듯한 장모의 눈빛, 저주가 담긴 듯한 장인의 눈빛. 눈빛을, 뽑아 멀리, 텃밭 너머로 던진다. 아내의 가소롭다는 눈빛도 밑동을 잡고 뽑아 멀리 던진다. 눈빛, 눈빛들을 뽑아서, 멀리 던질수록 힘이 난다. 마음이 편안하다. 어쩌면 그들이 원하는 것처럼 이미 자신은 죽었고 죽은 몸이 풀을 뽑는 기분이다. 파밭의 풀을 다 뽑고 나니 햇빛을 못 보고 풀에 치인 파들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비스듬히 혹은 아예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당신은 손으로 흙을 긁어모아 북을 주어 똑바로 세우려 하지만 흙의 양이 많지 않아 파는 똑바로 서 있지 못한다. 몇 번 더 손으로 흙을 긁어모았지만 손가락만 아플 뿐 흙이 파지지 않는다. 손톱 밑으로 흙이 들어가 까맣게 변했고 손가락 끝이 아려오자 당신은 할 수 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선다. 얼굴에서 소나기를 맞은 것처럼 땀이 쏟아져 내린다. 당신은 옷으로 얼굴을 닦지만 옷 또한 땀으로 젖은 터라 얼굴은 땀으로 번들번들하다. 자네가 인간인가. 장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짓을. 장모의 갈라지는 목소리. 우리가 자네에게 어떻게 했는데 우리를 이렇게 곤궁에 빠트리다니. 이제 우리는 무슨 낯으로 얼굴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우린 망했네, 망했어. 장모와 장인의 목소리가 천둥이 되어 귓속으로 파고든다. 당신은 두 손으로 귀를 막는다. 왜 그랬을까. 왜 참지 못했을까. 혀라도 깨물어 죽고 싶은 심정이다. 당신은 비틀거리며 마루로 건너와 뒤로 쓰러진다. 가쁜 숨을 몰아쉰다. 여고생. 그 학생만 보지 않았더라도. 봤어도 참고 그냥 지나쳤더라면. 그동안 잘 견뎌냈는데. 당신의 얼굴은 땀과 눈물로 번질번질하다. 검사장 승진을 앞둔 시점. 불안했고 긴장되었고 조심했다. 불안하고 긴장되면 화산 분화구의 마그마처럼 끓어오르는 욕정. 마치 누군가 자신을 조종하는 것처럼 행동이 제어가 되지 않았다. 몇 번의 일로 곤혹을 치렀지만 마무리를 잘했었기에 약을 먹으며 치료가 잘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검사장 승진 한 달여를 앞두고 부하직원들과 회식을 한 게 잘못 되었던가. 술을 먹지 말았어야 했던가. 술을 마셨더라도 곧장 집으로 갔어야 했는데. 음. 당신은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려 엎드린다. 그 여학생만 만나지 않았더라도. 왜 하필 그 여학생을 아무도 없는 길에서 마주쳤는가. 여학생이 떨면서 스마트폰으로 누군가에게 급하게 전화하는 걸 보면서도 팬티를 내리고 성기를 잡은 손을 멈출 수 없었다. 오히려 겁먹은 여학생의 얼굴을 볼 수록 전율로 몸이 떨렸다. 사정 후 수치감과 자괴감으로 팬티와 바지를 올리고 걸어가는데 공명처럼 피옹피옹, 하며 경찰차가 따라왔다. 왜 그랬어요? 점잖게 생긴 사람이. 경찰의 조사를 받으며 당신은 또다시 수치감과 자괴감에 빠져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마 고위직 검찰 직함은 말하지 못하고 무직이라고 했다. 몇 번 그랬듯이 조용히 넘어가길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유치장에서 채 밤이 지나가기 전에 기자들이 들이닥쳤다. 경찰들이 놀라는 눈치였다. 피해 여학생이 SNS에 당신의 얼굴이 나오는 사진을 올리며 피해 사실을 올렸고 순식간에 당신의 이름과 신분 주소가 밝혀졌다. 경찰들이 알고 나서 기자들을 경찰서 밖으로 내쫓으려 했지만 기자들의 수가 많아 역부족이었다. 장인 장모가 달려왔지만 언론의 보도를 막지 못했다. 당신은 다음 날 곧장 사직서를 제출했다. 구속되지는 않았으나 집은 구치소보다 더 좋지 않았다. 아내의 벌레 보는 듯한 눈빛, 두 딸의 외면하는 눈길. 참기 힘들었다. 가사도우미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몇몇 선배 동료 검사들이 전화를 해서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그건 오히려 독을 탄 물과 같았다. 집에 있을 수가 없어 일단 친구의 오피스텔로 옮겼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과 검찰 고위직의 나태와 도덕불감증에 대해 연일 기사가 쏟아졌고 성도착증에 대한 전문가들의 대담도 이어졌다. 불면의 밤이었고 지금까지 살아온 사회적 지위 명예는 물론 가족까지도 다 잃었다는 걸 알았다. 장인은 잠잠해질 때까지 어디 외국이라도 가 있으라고 했지만 수사 중이라 사표도 수리되지 않았기에 외국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당신은 상체를 일으켜 앉는다. 멍한 눈으로 마당을 내려다본다. 모든 사물이 정지되어 있는 것 같다. 바람도 한 점 없어 나뭇잎조차 흔들리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자신의 생도 정지했으면 하는 심정이 든다. 그때 부엌 앞의 수도가 보인다. 그제야 당신은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허우적거리며 수도가로 걸어간다. 수도 주위의 시멘트 바닥이 하얀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당신은 떨리는 손으로 수도꼭지를 튼다. 꾸르륵, 하더니 뜨거운 녹물이 왈칵, 쏟아진다. 당신은 엉겁결에 물에서 손을 재빨리 뺀다. 수도관이 햇빛에 노출되어 있던 터라 물이 뜨겁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맑은 물이 쏟아진다. 손을 넣는다. 이제야 물이 시원하다. 당신은 두 손바닥으로 물을 받아 마시다 아예 입을 수도꼭지 밑에 대고 벌컥벌컥, 마신다. 한참동안 물을 마시다 당신은 상체를 일으킨다. 물을 많이 마셨는데 갑자기 배가 고프다. 그제야 당신은 며칠 째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 깨닫는다. 또다시 입을 수도꼭지 밑에 대고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물을 마실수록 배가 고프다. 당신은 물 마시는 것을 멈추고 머리를 수도꼭지 밑으로 들이민다. 물이 당신의 흰머리가 올라오는 뒷머리에 쏟아진다. 당신은 시원함에 몸을 움찔거린다. 한동안 물을 받다 머리를 든다. 정신이 돌아온 느낌이다. 두 손으로 머리의 물을 훔치며 마루로 올라온다. 누가 살았을까. 텃밭에 각종 채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것 같다. 근데 주인은 어디 갔을까. 텃밭은 물론이고 마당까지 잡풀이 많은 것을 보니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 같다.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편안하다. 이 집이 편안한 것인지 아니면 모든 걸 잃었으니 오히려 편안한지 모르겠다. 그동안 얼마나 바쁘게, 긴장하며 살아온 인생이었던가. 오히려 사건이 터진 게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해방된 느낌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도 긴장하며 살고 있지 않겠는가. 당신은 마당으로 내려와 집을 둘러보다 초등학교 때까지 살았던 고향집과 많이 닮았다. 왼쪽으로 부엌이 있고 중간엔 안방, 그 옆엔 작은 방. 방 앞으로 마루가 있는 게 고향집과 흡사하다. 이래서 이 집이 편안하게 느껴졌는가. 당신은 집을 둘러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텃밭으로 간다. 이번엔 상추가 있는 곳이다. 이곳 역시 풀이 많아 겨우 상추 잎이 보일 뿐이다. 당신은 상체를 숙이고 풀의 밑동을 잡아당긴다. 역시 풀이 잘 뽑힌다. 중학교 때 서울로 갔지. 당신의 머릿속에 영화처럼 중학교 때가 떠오른다.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중학교를 다니기 위해 서울 고모집으로 갔다. 물론 그 전에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거나 면접 보러 몇 번 갔지만 막상 고향을 떠나 중학교 생활하러 가니 무서웠고 긴장되었다. 네 집처럼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라. 고모부는 인자하신 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인자하셔도 부모와 떨어져서 지내는 서울 생활이 편하지가 않았다. 꼭 성공해야 한대이. 판검사 되란 말이다. 평생 농사꾼이었던 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당신을 불러놓고 으름장을 놓았다. 마치 판검사가 되지 못하면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어릴 때부터 집에 일이 많아도 당신에겐 절대로 못하게 했다. 공부해라. 공부해서 출세해야 한다. 어린 동생들도 부모를 돕는데 당신은 방에서 공부만 했다. 당신 또한 야망이 있었다. 이런 촌구석에서 살 수는 없다. 출세하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 지역의 국회의원이 중학교 때부터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판검사를 거쳐 국회의원이 된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당신은 생각했다. 나도 할 수 있다. 어쩌면 부모가 일을 시켜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어쩌다 성적이 전교 1등에서 2등으로 밀리면 가차 없이 아버지의 손바닥이 당신의 등을 강타했다. 다행히 초등학교 6년 내내 두 번을 빼고는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하고 처음 치른 시험성적은 꼴찌에서 20번째였다. 정식 시험이 아니고 3월에 치른 시험이기도 했지만 차마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그날……. 어찌 그날을 잊겠는가. 당신은 풀을 뽑으며 앞으로 나아가다 멈추고 상체를 든다. 또다시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그날은 당신이 처음 몽정한 날이었고 어쩌면 그때부터 성도착증세가 나타난 것이라고 믿었다. 시골의 수재가 서울에 와서 둔재로 바뀐 순간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먼저 아버지의 손바닥이 떠올랐고 꼭 출세하리라 다짐했던 마음이 초조했다. 그날 밤 잠은 오지 않았고 뒤척이다 새벽에 잠이 들었는데 몽정을 했다. 몽정을 하고 나서 당황했고 수치스러웠지만 한편으로 마음이 편안했다. 이상했다. 마음이 이렇게 편안한 적이 없었다. 계속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첫 중간고사를 준비할 때 당신은 걱정되었고 긴장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험 전 날이었던가. 밤샘할 작정을 하면서 공부를 하다 머리 좀 식힐 겸 옥상으로 올라갔다. 팔짱을 끼고 불안한 마음으로 어슬렁거리는데 옆집 세면실의 열려진 창틈으로 불빛이 보였다.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그 쪽 방향으로 걸어갔고 중학생쯤 되었을 여학생이 옷을 모두 벗고 샤워하는 것이 보였다. 순간 당신은 온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고 자신도 모르게 팬티를 내리고 여학생을 보며 자위를 했다. 자위를 할수록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침내 사정을 했고 팬티를 올리자 수치감과 자괴감이 왈칵, 달라붙었다. 음. 당신은 상추 밭의 풀을 다 뽑자 옆에 있는 고추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풀에 치인 상추의 아랫잎은 농했고 위에 있는 잎 몇 장이 그나마 괜찮았다. 다행히 파처럼 옆으로 쓰러지진 않았다. 고추나무는 풀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고추가 많이 열렸다. 위에서 보면 풀에서 고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때부터였어. 당신은 풀을 한 움큼씩 뽑으며 중얼거린다. 왜 멈추지 못했을까. 그렇게 자위를 하고 나니 마음은 편해졌고 공부가 잘 되었다. 시험도 잘 치렀다. 중위권에 진입했고 학원만 다니면 상위권에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에 편지를 썼지. 당신은 여전히 풀을 뽑으며 중얼거린다. 동생들 학비며 자신의 학비로 인해 집이 쪼들린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고 곧 편지와 돈이 왔다. 돈 걱정 말고 공부만 해라. 오직 출세해야 한다. 집 걱정은 마라. 아버지의 편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 들었지만 자신이 출세를 해서 거둘 생각이었다. 그러다 기말 시험을 앞둔 어느 날 당신은 또다시 극심한 불안과 초조함으로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았고 잠도 잘 오지 않았다. 그러다 밤에 옥상에 올라갔고 또다시 그 여학생이 샤워하는 것을 보았다. 당신은 팬티를 내리고 여학생 쪽으로 몸을 돌려 자위를 했다. 한껏 쾌감이 올랐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사정을 하고 나면 심한 수치심과 자괴감에 시달렸다. 왜 멈추지 못했을까. 당신은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시험이나 긴장되는 일이 생기면 또다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다. 여학생이 샤워를 하지 않을 때는 길을 지나가는 여학생을 보며 자위를 했고 점점 더 과감해졌다. 고등학생이 되자 마치 진통제를 맡는 환자가 점점 더 센 진통제를 원하듯이 직접 길에서 했고 여학생이 보는 데서도 했다. 한번은 여학생이 기겁을 하자 더 쾌감을 느낀 당신은 계속 하다 지나가는 아저씨에게 잡혀 파출소로 가게 되었다. 당신은 제발 학교에는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사정을 했다. 경찰관은 학생증을 요구했고 당신은 망설이다 학생증을 주었다. 경찰관은 학생증을 보고는 놀라는 눈치였다. 우리나라 최고의 고등학교. 경찰관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장이라는 사람과 몇 마디 나누더니 학생증을 돌려주었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이런 짓을 하냐며, 공부 열심히 해서 출세하면 자신들을 잊지 마라며 집에 가라고 했다. 그때 만약 처벌을 받았더라면. 당신은 아쉬움이 남는다. 두 손에 힘을 주어 풀을 한 움큼씩 뽑아 멀리 힘껏 던진다.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누, 누구요?” 등 뒤에서 사람 소리가 들려 당신은 깜짝 놀란다. 돌아보니 노인 부부가 마당에 서 있다. “저…….” 당신은 할 말을 잊고 머뭇거린다. 그제야 자신이 남의 집에 와서 풀을 뽑고 있는 사실을 자각한 표정이다. “이 집하고 친척인가.” 할머니가 혼잣말을 한다. “친척이야 다 아는 사람일 텐데.” 할아버지가 당신을 바라보며 말한다. “누구신데 남의 집에 와서…….” 할아버지는 의심스런 눈빛으로 바라본다. “저, 그게 아니고. 지나가다, 어쩌다 들렸는데…… 밭에 풀이 많아서.” 당신이 더듬거리자 노인 부부는 마루로 올라앉는다. 마치 자신의 집에 온 것 같다. “이리 좀 올라오시오. 땡볕에 서 있지 말고요. 아이고, 이 더운 날에.” 할머니가 쯧쯧, 혀를 찬다. 당신은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마당을 가로질러 마루에 올라앉는다. “보아하니 이 근동 사람은 아닌 거 같고. 어디서 오셨소? 얼굴이 하얀 게 서울 사람 같네.” “예. 먼데서……. 그래서 잠시 쉬다가 그만 풀이 많아서, 밭에.” “난 멀리서 보고 깜짝 놀랐네. 영감이 살아왔나 싶어서.” 할아버지는 집을 둘러보며 말한다. “이 집 주인은 어디 계신가요?” 당신은 용기를 내어 묻는다. “왜요? 사실라고요?” 할아버지는 집을 싸게 내놨으니까 사려면 금방 살 수 있다고 한다. 이 집 주인은 자신과 또래인데 혼자 살다가 1개월여 전에 쓰러져 병원에 있다가 며칠 전에 죽었다고 말한다. 아들들이 모두 출세해서 서울에서 떵떵거리고 사는데 집 살 사람이 있으면 팔라고 자신에게 전화왔었다는 말도 한다. 가격은 알아서 팔아달라고 했다면서 살 생각이 있으면 싸게 주겠다고 한다. 당신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다. 살 수만 있다면 당장 사고 싶다. 그런데 죽으려고 했던 마음이 아직 있다.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잠시만 여기 있어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입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말이 툭, 튀어나온다. “그야 뭐 괜찮지만. 밥솥이나 냉장고도 쓸 수 있고. 근데 어디 아프시오?” 할아버지가 당신을 빤히 쳐다본다. “밥은 먹었소?” 할머니도 빤히 쳐다본다. “예, 먹……었습니다.” “뭘 안 먹었구만.” 할머니는 일어서며 땡볕에 일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다 쓰러지면 큰일난다며 집에 가서 먹을 것 챙겨오겠다고 한다. 할아버지도 함께 일어선다. 당신은 노인 부부의 등 뒤에 대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실로 오랜만에 살갑게 대해주는 사람을 만나니 코끝이 찡하다. 다들 경멸과 조소가 담긴 눈. 벌레 보는 듯한 눈빛. 한심하다는 듯한 눈길. 도저히 그런 눈빛들을 견딜 수 없어 피해왔는데 다행히 노인 부부를 만나니 오랜만에 사람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입구를 나가는 노부부를 보다가 당신은 문득 아내를 생각한다. 20여 년을 살아도 저렇게 다정하게 걸을 수 없었던 아내. 당신은 아내와는 애초부터 어울릴 수 없는 사이였다. 당신이 대학 2학년 때 사법고시 합격하고 졸업반이 되자 장차 장모가 될 사람이 찾아왔다. 겉보다 알부자로 소문난 집이었는데 수천 억대 부동산 자산가였다. 장모될 사람은 터놓고 얘기했다. 당신이 내 딸과 결혼하면 검사장까지 시켜주겠다. 그러니까 당신을 출세시켜줄 테니 가족회사의 불법 탈법을 막아달라는 제안이었다. 이미 당신의 가족에 대해 다 알고 온 상태였다. 중학교만 졸업하고 구미에 다니는 세 동생은 당장 대기업에 취직시켜줄 테고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니 땅을 사주겠다고 했다. 농사짓기 싫으면 가게를 내줄 수도 있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가 소망하던 것과 일치했다. 하지만 당신은 아버지를 만나보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좋습니다. 당신은 출세하기 위해 튼튼한 동아줄이 필요했기에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승낙했는데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아내 될 여자에 대해 한 마디도 물어보지 않았다는 생각에 폭소를 터뜨렸다. 이건 뭐 조선시대로군. 그 말 뿐이었는데 예상했던 대로 아내와의 결혼 생활은 평탄치 못했다. 기본적으로는 당신에게 문제가 있었다. 아내는 명문대 음대를 나왔는데 키가 크고 날씬하고 거기다 얼굴까지 예쁘니 외견상으론 꿩 먹고 알 먹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졸업을 한 달여 앞둔 겨울에 결혼을 했는데 신혼 첫날부터 당신은 긴장했다. 무엇보다 아내와 성관계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니 제대로 잠자리를 할 수 있을까, 아직 한 번도 여자와 잠자리를 해보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당신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와 나란히 침대에 누웠을 때 당신은 길거리를 지나가는, 경악하는 여자의 얼굴을 상상했다. 아내를 품었을 때 눈을 감고 길거리를 지나는 여자를 향해 팬티를 내리고 자위하는 상상을 했다. 그래서 겨우 성관계를 끝내고 나니 온 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아내가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피곤하다는 이유로 씻지도 않고 그대로 잤다. 하지만 매번 그럴 수 없었다. 사법 연수원을 마치고 검사로 임명되었는데 첫 직장이 서울중앙지검이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놀랐고 그때부터 실세가 당신을 후원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당신은 승진을 거듭할수록 긴장되고 불안했다. 누구에게 대접을 받아서 가건 혼자서 가건 업소에 한 달에 여러 번 갔는데 갈 때마다 여자와 잠자리를 하는 게 아니라 여자에게 옷을 몽땅 벗고 서 있게 하고 앞에서 자위를 했다. 여자는 기겁을 했고 그럴수록 당신은 더 큰 쾌감으로 몸을 떨었다. 처가에서 업소에 드나드는 것을 아는 눈치였지만 아무런 말이 없었다. 처가에선 가족회사의 이름으로 수천 억의 재산이 있는데 그 돈을 사적으로 빼내 쓰고 또한 불법으로 부동산 사업을 했기에 당신의 권력이 필요했다. 예전엔 고문 변호사를 두었지만 아예 검사를 가족으로 끌어들이는 게 더 안전하고 돈도 적게 들어간다는 사실 때문에 당신이 처가의 가족이 될 수 있었다. 결국 아내에게 들켰다. 아내가 샤워하는 동안 문틈으로 벗은 몸을 보며 자위를 하다 들켰는데 아내는 이렇게는 못 산다며 짐을 싸들고 친정으로 갔다. 그동안 아내와의 잠자리는 가뭄에 콩 나듯이 1년에 몇 번 하지 않았는데 그것도 겨우겨우 치렀다. 당연히 아내는 당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눈치챘고 그러다 자신의 샤워하는 모습을 보며 자위하는 걸 보고는 아예 이혼을 선언한 것이었다. 당신은 잘못했다고 아내에게 몇 번이나 가서 빌었지만 소용없었고 장인이 당신을 불렀다. 같이 살되 서로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않을 것. 그리고 업소에 드나들되 절대로 누구에게 들키지 않을 것. 당신은 오히려 그 조건이 고마워 미칠 지경이었다. 아내하고는 다시 결합했지만 각 방을 썼고 남들이 보기에 평화로운 가정을 유지했다. 아내는 나름대로 외출이 잦았고 화장도 짙어졌다. 당신은 오히려 그런 아내가 고마웠다. 누굴 만나든지 무슨 짓을 하든지 관심 없었다. 당신은 여전히 주요 보직을 맡았고 승진을 거듭하면서 오히려 더 길거리로 나왔다. 야구 모자를 쓰고 여차하면 뛰기 편하게 운동화를 신고서 어둑한 골목이나 인적이 드문 길에서 여자들을 기다렸다. 여자가 나타나면 주위를 보고 사람들이 없으면 바지와 팬티를 내리고 자위를 했고 기겁하는 모습을 보고 사정을 했다. 치밀하게 CCTV가 없는 곳에서 했다. 당신은 용케 잡히지 않았다. 아니 잡힌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경찰에서 신분을 알아보고는 스스로 해결해주었다. 물론 장인의 영향력이 컸고 대가는 충분히 전해줬다. 하지만 검사장 승진을 앞두고 조심했어야 했는데 운이 나빴던 걸까. 대부분 여자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가기에 바빴고 그 후에 신고를 했는데 이번의 여고생은 기겁을 하면서도 전화를 했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당신은 그런 여학생의 모습을 보며 주체할 수 없는 쾌감을 느끼면서 자위를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여학생이 사진을 SNS에 올렸고 걷잡을 수 없이 사건은 커졌다. 오히려 잘 됐다. 당신은 햇빛이 잦아든 마당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막상 사건이 터지자 오히려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이제 해방이다. 다시는 이런 수치심과 자괴감으로 몸을 떨 일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처음엔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잃는다는 허망함에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했지만 검찰수뇌부에서도 여론이 워낙 좋지 않아 본보기로 삼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당신은 잘 알았다. 자신을 처벌함으로써 조직의 부패를 가리려고 한다는 걸. 당신은 이제 아무도 발견할 수 없는 곳에서 죽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다. 제발 죽은 자신의 모습을 아무도 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죽으려고 마음먹으니 이렇게 마음이 편한 걸. 당신은 마당의 풀을 뽑기 위해 일어선다. 그때 입구에 좀 전에 다녀간 노인 부부가 보자기를 들고 들어서는 것이 보인다. “또 뭘 할라고? 몸도 안 좋아 비이는데.” 할머니는 가까이 다가와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잠깐만 기다리라고 한다. 할머니가 보자기를 풀고 내놓은 것은 밥이다. 하얀 고봉밥. 당신은 꼴깍, 침을 삼킨다. 갑자기 극심한 배고픔을 느낀다. 좀 전에 물을 마실 때 느꼈던 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렬하다. “찬이 없어서. 촌에는 다 이렇게 산다오.” 할아버지가 오히려 미안하다는 듯 말한다. 밥과 식은 된장국, 고추찜, 들깨김치, 배추김치가 전부다. 당신은 아, 아닙니다. 말하기가 바쁘게 숟가락으로 밥을 퍼먹는다. 어릴 때 어머니가 해주던 그 맛이다. 결혼하면서 잊었다고 생각했던 맛. 방학 때 내려오면 해 주던 밥맛이요 반찬이다. 여기 더 있소. 천천히 드시오. 그러다 체하겠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다른 밥그릇을 당겨 밥을 퍼, 먹는다. 먹을수록 배고픔이 더하다. 먹다가, 당신은 당황해 한다. 이런 미친놈이 있나. 죽으려고 하는 놈이 허겁지겁 밥을 먹다니. 예전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밥과 반찬을 놓고. 속으로 헛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입은 맹렬하게 밥을 달라고 요구한다. 손은 충실한 하인처럼 따른다. 할머니가 빈 그릇으로 마당의 수돗물을 떠오며 물 좀 드시오, 체하겠소, 한다. 순식간에 두 그릇의 밥이 사라졌고 그제야 당신은 할머니가 떠 온 물그릇을 들고 벌컥벌컥, 마신다. 살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당신은 차마 노인 부부를 마주 보지 못하고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한다.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게 먹어본 적이 없다. 다 돌아갈 걸. 할아버지는 혼잣말을 하며 주방으로 들어간다. 곧이어 윙, 하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밥솥을 여닫는 소리도 들린다. “이건 냉장고에 넣어둘 테니 나중에 드시오. 반찬은 저녁에 좀 더 해드릴 테니.” 할머니의 말에 할아버지가 주방에서 말을 이었다. “여 쌀도 있소.” “감사합니다.” 당신은 또다시 고개를 숙이며 진심으로 인사를 한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누구에게도 이렇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해본 적이 없던 것 같다. 모두가 의례적이었다. 그렇지. 당신은 자신의 삶이 온통 의례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얼른 갑시다. 우리 땜에 쉬지도 못하시고.”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재촉한다. 죽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집 정리하기가 거시기 했는데 안 하길 잘 했구먼, 할아버지는 중얼거리며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참, 밥할 줄 아시오?” 할머니의 말에 순간 당신은 난감하다. 지금까지 밥을 한 적이 없다. “쌀을 씻어 밥솥에 넣고 물을 요만큼 넣고 그 뭣이야, 취사 누르면 돼요. 오늘 저녁밥은 안쳐놓았지만.” 할머니는 손가락을 들어 이 굵기만큼만 높이 물을 부으라고 강조한다. 당신은 또다시 겸연쩍게 고맙다고 인사한다. 어째던둥 사시오. 할머니는 나지막이 말하곤 할아버지의 뒤를 쫓는다. 순간 당신은 섬뜩한 느낌이 든다. 죽음의 냄새. 할머니는 자신에게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마루로 올라와 마당을 내려다본다. 평온하다. 아무런 걱정이 없다. 이런 평화가. 이제야 내 집을 찾은 느낌이다. 항상 남의 집에 사는 기분, 남의 옷을 입은 기분. 당신은 처음으로 집에서 안온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언젠가는 성기를 잘라버리려고 했었지. 당신은 씁쓰레 미소를 머금는다. 무슨 일을 앞두고 불안하거나 긴장할 때마다 여자를 찾아 길거리로 나오니 환장할 일이었다. 끝나고 나서도 수치감과 자괴감이란. 차라리 성기를 잘라내기로 마음먹었다. 아내와도 남남으로 지내니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어느 스님이 수행에 욕정이 방해가 되자 돌로 성기를 잘랐다지 않는가. 하지만 용기가 없었다. 만약 그때 성기를 잘랐다면. 당신은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칙칙칙……. 밥솥에서 김이 빠지는 소리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소리다.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 고향집에 오면 듣던 소리. 어머니의 소리. 무척 정답다는 느낌이 든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졸업 이전의 인생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동생들과 마당에서 뛰어놀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아버지는 없다. 없으니 평온하다. 공부하란 소리도 출세하란 소리도 없다. 문득 어머니가 그립다. 지금쯤 어머니는 자신의 소식을 들었을 텐데, 얼마나 걱정을 하실까. 아버지는 아마도 약이라도 먹고 죽고 싶은 심정이겠지. 동생들은……. 문득 어머니를 모셔오고 동생들도 데리고 와 이 집에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처럼. 초등학교 졸업 이전처럼. 당신은 중얼거린다. 아버지도 모셔야겠다. 처가에서 결혼할 때 땅을 많이 사주었지만 노름과 술로 다 팔아먹었다고 했다. 이번엔 전자제품 파는 가게를 내주었는데 아버지의 노름으로 겨우 산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참에 아버지도 모시고 와 여기서 함께 살고 싶다. 어차피 그 생활도 아버지에겐 안 어울리기는 마찬가지야. 동생들도 마찬가지지. 중학교 졸업하고 구미 공장에 들어갔다가 처가의 도움으로 대기업에 취직했는데 그 또한 생활이 맞지 않을 터였다. 이런 곳으로 와서 사는 게 모두에게 맞을 거야. 당신은 풀을 뽑기 위해 마당으로 내려선다. 풀을 뽑는 아버지도 보이고 주방에서 달그락 거리는 어머니의 저녁 준비하는 소리도 들린다. 동생들은 마당에서 뛰어놀고 있다. 당신은 두 팔을 벌리며 마당을 뛴다. *** 경북 상주 출생, 소설집 『소도(蘇塗)』외 2권, 장편소설『갈대는 바람에 꺾이지 않는다』외 3권, 서사시집 『아리랑 아라리요)』 개인전 3회 .  
665 월성(月城) 외1편/김만수 file
편집자
1179 2018-07-01
월성(月城) 몸을 조금 비틀어 서천(西川) 건너는 달을 바라본 걸까 서쪽 문지(門址)에 누워 온 몸으로 성(城)을 떠받치며 반달이 된 사내들 북쪽 해자(垓字)엔 토우(土偶)들 휘적휘적 물 건너는 소리 화강암의 각을 떠서 제국(帝國)을 이뤄가는 자들의 종종걸음 소리 어허 달구 노을 속 토꾼들의 회다지 소리 감감한데 어쩌는지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 밤 몰래 성루에 오른 어머니 형산 아래 띄집으로 돌아간걸까 느릅 가지 헤치며 여드렛 달 서천 건너는데 어쩌는지 서행(西行) 마른 잔디 위로 늙은 개와 위층 여자 끈에 매달려 걷고 있다 십 육년을 묶여 산 해피 사십 년을 견딘 여자 머리를 쳐박은 채 서로 묶인 끈의 느즌한 간격으로 이승의 시린 회랑을 돌고 있다 킁킁거리지 않고 기척도 소리도 없이 애완의 시간을 봄볕에 말리고 있다 물 빠진 거죽들 감동 없이 서쪽으로 밀어내고 있다 그들 청춘의 시간들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 동사무소 캐비넷 속에서 마르고 있는 동안 은빛 나이프는 녹슬고 금발의 털은 빠져나가고 어디로도 응시하는데 없이 초점 풀어져버린 그들을 105동 직각 그림자가 가만히 가려주고 있다 약력) 김만수: 포항생. 1987년 <실천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한국작가회의 회원, 포항문학 회원, 해양문학상 장시<송정리의 봄> 시집<소리내기> <햇빛은 굴절되어도 따뜻하다>,<오래 휘어진 기억>,<산내통신> <종이 눈썹>,<메아리 학교>,<바닷가 부족들>,<풀의 사원>  
664 탈고 안 된 왕궁의 비밀 외1편/김길녀 file
편집자
1341 2018-07-01
탈고 안 된 왕궁의 비밀 뭉치뭉치 쌓여서 떠날 수 없는 두꺼운 바람 청록색 이끼 키우는 흩어진 돌무더기 사이에서 옛 전사들의 발과 손 여전히 자라고 있다 거짓된 희망과 무늬뿐인 혁명을 앞세우고 비탈길을 넘고 넘어 비밀로 채워진 긴 밤을 끌고 온 그 날, 짧은 아우성만 남긴 채 성벽은 쉽사리 무너졌다 그때부터 하늘이 지붕이 된 돌로 지은 목욕탕 밤마다 별이 된 공주들의 노랫소리 들려온다 달빛 없는 그믐밤에는 왼쪽 돌 목욕탕에서 왕자들의 웃음소리도 크게 들린다 가끔은 돌 목욕탕으로 사라지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마른 꽃씨처럼 퍼지기도 한다 함께 하는 이의 친절한 설명에 살짝, 꽃무늬 우산이 흔들렸던가 신들의 기도조차 멈추어버린 궁터의 나날 정적만이 황금 촛대 위에서 자주 서성인다 담장 아래 흙더미에서 뒹구는 어린 병사 가죽신발 안으로 충성을 잊어버린 벌레들 흔들리는 시간을 천천히 낳는다 성벽을 쌓던 노예들의 손톱에서 흘러나온 무거운 용서는 봉분 없는 무덤에 하양 꽃을 피웠다 생과 사를 풀어내는 방식이 종교에 따라 다른 나라 힌두교식 삶의 환희와 이슬람교식 죽음 하양 깜보자꽃을 해석하는 인니 방식이다 이국 사람들 지나간 발자국마다 하양 꽃잎들 함박눈처럼 무덤을 덮는다 꽃무늬 우산 속 이국 남자와 여자 비 내리는 돌담에 나란히 걸터앉아 오랫동안 염소들의 풀밭 식사를 지켜본다 쪽배를 타고 산책하던 돌계단 아래 연못 주인 잃은 황금신과 꽃신 몇 켤레 둥 둥 둥 따뜻한 비에 젖고 있다 염소들이 떠난 우기의 저녁이 빠르게 풀밭 위에 닿는다 문없는 돌기둥에 기대어서서 깊은 잠에 빠진 태양은 아침을 잊은 지 오래라는 빗방울 전언을 듣는다 그 시절 공주와 왕자의 이름으로 잠시 환생한 이국 남자와 여자 이천십삼 년 십이월 포근한 겨울 안에서 다시, 전생을 호명한다 오후의 사과나무 -봄 남루하지 않아서 더 슬픈 누군가의 생애를 들여다보는 한낮은 게으른 한 생이 더 느리게 흐른다 눈꼽재기창에 긴 목 내민 사과꽃 가지마다 못 다 부친 이국 안부 분홍꽃잎에 몽글몽글 써내려가는 중이다 저물녘 정원 연못 안으로 스며든 노을보다 애잔했던 그들의 사랑 높은 천장 서까래에 깊이 스미어 나무의 긴 생애를 탁본하느라 손끝이 아리다 *약력 강원도 삼척 출생 1990년 《시와 비평》 등단 시집 『푸른 징조』 등 여행산문집 『시인이 만난 인도네시아』 제13회 한국해양문학상(시) 수상 *이메일 namoo0208@hanmail.net  
663 벤치 위에 잠든 꽃 외1편/최순섭 file
편집자
1421 2018-07-01
벤치 위에 잠든 꽃 누가 버리고 갔을까 멀리서 보면 죽어 있는 듯 투명 비닐 관 속에 붉은 장미 한 송이 햇살 드는 공원 벤치에 쪼그려 앉아 자고 있다 처음엔 대가 굵고 푸르렀을 도심의 골바람이 스치고 간 뒤 목 줄기부터 거뭇해져 햇살 앞에 눈 들지 못하는 꽃 덥석 안아다 수반 위에 뉘이고 물을 주었다 다시 얼굴에 붉은빛이 돌아오고 슬픈 향기 때문일까 멀리서 보면 울고 있는 꽃 가까이 가면 지나온 길도 잊고 우는 듯 웃는 꽃 콧잔등에 이슬 송송 샹들리에 불빛 켜고 방 안이 온통 환하다 Me Too 비에 젖어, 여기저기 환하던 봄 동네 누구나 걸터앉아 쉬어가는 꽃그늘 목련 아파트 방마다 벼락이 떨어져 합선인가 불이 번쩍하더니 눈앞이 캄캄해 옵니다. 목련 하얀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Me Too, 밑동 넓은 엉덩이에 검은 뱀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밤이면 무서운 꿈에 가슴 쓸며 눈을 뜹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도 화들짝 놀라 Me Too, 벼랑 끝에 매달린 꽃들이 높은 가지에서 뛰어내립니다. 바닥에 떨어져 파닥거리는 하얀 속살, 속살들 울음을 들추며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고 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갈채 소리에 절벽을 뛰어내리는 하얀 목련 거뭇거뭇 타들어가는 가슴을 보면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최순섭_대전광역시출생. 1978년『시밭』 동인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말똥,말똥』등이 있음. (현)환경신문 에코데일리 문화부장, 경기대, 동국대, 이화여대 평생교육원 출강, 한국가톨릭독서아카데미 상임위원.  
662 함안휴게소에서 외1편/김진희 file
편집자
1260 2018-07-01
함안휴게소에서 뜨끈한 잔치국수가 울렁이는 속을 달래주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하늘의 젖꼭지를 물고 단비를 빨아대는 갈증 난 남해바다가 아직도 내 속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저 나무 이름이 뭐죠? -황금편백입니다, 햇빛에 금색으로 빛나요, 교목이죠 -아, 아니 저기 저 나무 말씀 하시는구나 갸우뚱하는 나를 보고 그는 말을 고친다 -종려나무입니다 종려나무 교목보다 주목받는 나무 작고 오래된 학교다 그리고 화단이 깊은 학교다 화단 사이 옥수수가 자라고 고추이랑이 있는 학교다 화단을 파보면 오래된 책상이나 낡은 생활기록부 같은 것들이 뿌리와 뒤엉켜 있을 것 같은 학교다 또한, 어디에도 바다의 흔적은 없으나 바다를 빼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 같은 학교다 그 학교에서 머리 밑과 등줄기에 끈적한 땀이 배어나오도록 강의를 한다 좀 더 그럴 듯하게, 좀 더 과장되게...... 그럴수록 얕은 뿌리가 발밑에서 덜렁거린다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종려나무처럼 나는 낯설고 매혹적이고 싶은 걸까 빗줄기는 굵어지고 다시 종려나무가 궁금해졌다 비 맞는 종려나무 후두둑, 후두둑 빗줄기를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먼저 두드려 맞는 종려나무, 머리가 먼저 비를 맞아도 땅 속 깊은 뿌리에 기댈 수밖에 없는 종려나무가 오래 나를 따라와 밤늦은 휴게소가 괜스레 술렁인다 텃밭에 다녀오다 -소설 ‘소년이 온다’에 기대어 텃밭에 갔다 돌아오는 저녁, 한낮 열기에 지친 화제천은 벌써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산그늘이 섞여 어둑해지고 있었다 아마 꿈결에 오래 그리던 강에 도착할 것이다 바스락바스락바스락바, 스락 흙을 떠나온 부추, 깻잎, 고추, 가지, 오이는 할말이 많아진 모양이다 나는 내 속에서 번성하는 낱말들을 물끄러미 본다 밭 주변 무성하게 자란 풀들이 길을 지워 장화 신은 발이 허둥대었던 것이다 말들은 마음의 길을 지우고 입으로 나오는 길조차 지워버려 졸지에 나는 벙어리가 되었다 강동호 축산 오늘 읽은 소설 속 인물과 같은 이름 열 여섯 푸르른 나이에 광주에서 희생된 이름 간판일 뿐인데 가슴이 쓰리다 한 도시가 도축장이었던 때가 있었다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저 여린 채소를 싸고 있는 얇고 투명한 비닐봉지 같은 것이 아닐까 푸르른 육신을 온전히 감싸고 그 향기를 기억하는, 바람을 만나 바스락바스락 말을 건네는, 가위로 오려낸 종이짝처럼 붙어 일렁이는 촛불 불어도 불어도 꺼지지 않는 이름들 위로 어둠이 한 줌 한 줌 검은 흙을 뿌리고 흰 고구마꽃이 나란히 불 밝힌 다리를 건너자 세상은 마침내 어둠 속이다 흙 속이다 부추, 깻잎, 고추, 가지, 오이는 제 집에 온 줄 알고 조용하다 별빛으로 잘 다독여진 밭흙에 두 발을 묻고 오늘밤 나는 얕은 잠에 들 것이다 잠결에라도 찰랑찰랑 강에 가닿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김진희 1969년 부산 출생. 시집『굿바이, 겨울』  
661 그리움 외 1편/오형근 file
편집자
1187 2018-07-01
그리움 모처럼 당신을 본 날, 내 마음속에 심어 놓은 당신의 나무에 단비가 내렸습니다. 한 달은 견딜 자신이 생겼습니다. 부끄러운 시 스스로 원해서 나는 흑염소 한 마리를 먹었다 기운 내서 힘찬 생활을 하려고 한 마리 먹었다 아내가 대신 흑염소 한 마리 팩에 담아 데리고 왔다 슈퍼에서 라면 사듯, 아니면 치약 사듯 그렇게 사서 먹었을 뿐인 것을- 나는 흑염소를 죽이지는 않았다! 애당초 네 몫까지 살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흑염소야, 너를 다 먹고도 무기력하기만 한 나! 달라진 게 없다 미안하다 나 대신 다른 사람이 먹었다면? 정말 미안하다 흑염소야 오형근 1955년 서울 출생. 1978년 《시문학》주최 전국대학문예 시 당선, 1988년《불교문학》과 2004년《불교문예》로 등단. 시집 『나무껍질 속은 따뜻하다』,『환한 빈자리』, 『소가 간다』등이 있음.  
660 초록겨울 외1편/나병서 file
편집자
1615 2018-07-01
초록겨울 1 초록벌레가 풍선군대를 따라간다 황금고리의 달과 별의 바다에 심겨진 황금나무 파도의 털외투를 바라본다 박쥐꽃이 날개달린 황금신발을 신고 도라지꽃에게 인사한다 원숭이꽃과 거인호박은 바람개비가 지키는 오두막신전으로 갔다 컵에 담긴 행성에서는 독수리가 호수를 긁고 있었다 2 호수 속에서 나무 미이라가 걷는다 자작나무 옆 붉은 옷의 여인이 붉은 나비를 사랑한 거북이를 질투한다 물위를 걷는 늑대는 폭탄머리 독수리를 쳐다본다 첼로켜는 도마뱀과 붉은 앵무새는 학의 군무를 노래한다 인어는 눈물보석을 잠자는 얼굴구름 속에 숨겨놓았다 3 숨겨진 눈물보석을 지키는 검은 머리 양은 황금배와 황금소와 같이 흔들리는 탑 속에 있다 수염기른 새가 붉은 바위산 너머로 날아갔고 밧줄다리 위를 움직이는 그림이 나무모자를 쓰고 건너고 있다 얼음파도는 고깔모자를 달무지개에게 전해주었고 거꾸로 번개는 얼음도너츠를 먹고있었다 4 얼음도너츠는 사각산에서 소금평원을 지나 얼음공룡인간이 가져다 주었다 별의 바다를 건너고 녹색얼음호수를 지나 용피나무는 사랑터널로 들어간다 핑크호수는 황금물 시내를 따라 붉은물 시내와 녹색물시내와 검은 시내를 찿아나선다 초록겨울이다 당신 잠시 머물다 떠날 너를 그리고 있어 북서쪽 산자락 내가 잠이 드는 곳에 버려진 너를 걸어놓았어 유기된 상처가 마를 때까지 수많은 당신을 걸어놓았지 가장 초라한 낡은 너를 선택하곤해 내가 필요한 것은 버려도 되는 당신인가봐  
659 죽은 미술가의 그림을 경매하다 외1편/정선호 file
편집자
1271 2018-07-01
죽은 미술가의 그림을 경매하다 죽은 유명 미술가들의 그림이 미술관 전시실에 걸렸다 죽은 미술가는 옥황상제의 허락을 받고 전시실에 와서 손님을 맞고 그림을 사려는 사람과 흥정 했다 이승에 좋은 작품을 남겼던 미술가의 작품들이 인기가 여전히 좋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미술가는 죽어서도 돈 벌어 저승으로 가져갔다 저승 왕실의 재정은 죽은 미술가처럼 그림을 경매하거나 죽은 작가의 문학관 입장료와 묘지의 입장료, 죽어서도 계속 팔리는 책의 인세로 충당하였다 죽어서도 저승에서 돈을 버는 미술가와 작가들은 옥황상제의 배려로 창작 활동을 이어 갔다 저승에서도 미술가들은 그림 전시회를 열거나 시인과 작가는 책을 발간하거나 시화전을 열었다 이승에서 배가 고팠던 시인들은 배고프지 않고 마음껏 쓰고 싶은 시를 썼다 그대, 미술관의 경매에 있는 날엔 그곳에 가 보라 수많이 죽은 화가들이 그림 경매를 핑계로 이승에 소풍을 와 저승엔 없는 밥과 술 먹고 나중에는 퍼질러 앉아 노래도 부르다가 경매가 끝나면 돈 가방을 들고 유유히 사라짐을 보라 교도소와 봄꽃들 교도소 밖 들녘에 매화꽃들 피었다 매화는 겨우내 교도소 안의 교화 수업을 엿들어 진리와 정의의 의미를 담은 꽃을 피워 냈다 주위 산에서 산목련도 교도소의 기운을 받아 희디 흰 죄수복 입은 소년범처럼 활짝 웃으며 피었다 이름 없는 꽃들은 죄수들 이름을 하나씩 받아 꽃이 질 때까지 가슴에 달고 살다가 땅속에 묻혔다 봄꽃들은 일제 강점기에 교도소가 세워 진 후 독립운동과 노동운동 하다 입소한 사람들, 해방 후 좌익운동 하던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대를 전했다 4.19 혁명 때와 유신시대의 봄에도 정치범들 위해 봄의 기운과 향기를 전해주었다 민주화 위해 애쓰고 노동운동을 하다 붙잡힌 일들에게 진달래는 붉은 희망을, 매화는 삭인 미소를 전했다 학원의 민주화를 위해 애쓰다 투옥된 학생들에게는 개나리는 싱그러운 젊음과 패기를 보여주었다 지금, 봄꽃들은 교도소에 사상범이나 정치범이 없어지고 생계 위해 죄를 짓거나 경쟁에서 낙오한 소년범 없어 교도소가 허물어질 날을 셈했다 대신 그 자리에 뿌리 내릴 꿈꾸며 향기를 세상에 전했다  
658 내 마음의 경전 외1편/허남기 file
편집자
1140 2018-07-01
내 마음의 경전 애당초 출발은 위대했다 오늘을 넘기면 달력 한 장 또 찢는다 지난 해 역시 내 몸속에 제대로 된 경전 하나 마음 비워 모셨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해마다 거룩한 해맞이의 상투적인 인파에 굽이쳐 돌고 돌아 신의 뜻과 인간의 바램이 피라미드를 만들면 비로소 현실로 다가 올 듯 늘 긴장하는 각오는 새로우나 그저 쓸데없이 빈 가슴으로 또 한해를 넘긴다 마냥 그럴 수도 없는 노릇 이런 젠장 몸 따로 마음 따로 계절의 경계 붉게 물든 계절의 몸부림은 마지막 시월의 밤을 보내는 아름다운 이별일 것이다 겨울로 가는 파리한 길목 하얀 세상 계절의 변신 좁은 문을 관통한 삭풍이 색동 옷 무늬를 깔고 투명한 자국을 새긴다 빛 고운 그들이 가면 자작나무 회초리가 운다 알몸으로 문지방을 넘을 때 마다 나목의 목을 어루만지며 월색을 몰고 간다 계절의 저편에서 유혹의 손길이 뉘우침으로 몰캉한 그들을 달래고 있다 --------------------- 허남기:경북 영천 출생 2014<문장21>등단/<문학광장>신인상 한국문협 경북 지회 회원/영천문협 편집국장 격월간<문학광장>시분과 심사위원.편집위원  
657 종소리 외1편/김수화 file
편집자
1449 2018-07-01
종소리 텅 빈 하늘 가로질려 바람결에 숨어들면 화들짝 그려내는 새들의 푸른 운무 멀리서 그대 숨결이 안부인 듯 들려온다. 온몸을 부딪쳐도 전할 수 없는 사연 하나 벼르고 벼루어서 바람의 힘을 빌려 능소화 애끓는 사랑 하늘빛을 물들인다. 김천의 봄 겨울잠 깨어난 연화지 잔물결에 벚나무 제 몸 열어 꽃물 들인다 꽃 그림자 마주 안은 가멸찬 향기 우리들 가슴에 삶의 무늬로 스민다 직지천 왜가리 하늘을 가르고 김천역 소나무는 손님 반긴다 황악산 바람 길에 흐르는 기운 자두꽃 해맑은 웃음 김천이 환하다 <김수화 프로필> 2003년 자유문학 시 부문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경북여성문학회 회장역임, 김천문인협회 사무국장, 김천예술총연합회 감사, 백수문학제 운영위원, 논술 토론 교사. 제3회 경북여성문학상 수상, 시집 ‘햇살에 갇히다’  
656 안어울림소리 / 이양섭 file
편집자
1414 2018-06-01
안어울림소리 연기가 사라지며 향내를 퍼뜨리고 있다. 파르스레 피어오른 연기가 시간과 공간을 가르듯 하늘거리다 흩어진다. 염불소리는 천수경에서 회심곡으로 이어져 홀로 처연히 흐른다. 빈소에 셋, 접객실에 다섯, 괜히 사람 수를 세었다. 어머니 영정을 일별한다. 저 엷은 미소는 괜찮다는 걸까? 장례를 치르는 내내 되도록 아내와 부딪히지 않으려 한다. 잠시만 마주봐도 그냥 면상을 갈겨 버리고픈 마음을 눌러야 하기 때문이다. 아내는 재바르게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고 있다. 그나마 내가 고마워해야할 어섯이다. 나는 집안일 앞에 늘 그렇듯 멀뚱거리며 제 역할을 찾지 못한다. 저녁이 되어도 빈소는 발길 끊어진 겨울 산처럼 황량하다. 어머니는 겨울을 기다려 온 눈처럼 때를 만나 깊은 산골의 암자로 들어가려는 것 같다. 막상 이렇게 되고 떠올려보니, 어머니가 가고 싶다던 그 암자는 이 세상에 있는 절이 아닐지도 모른다 싶다. 접수대 뒤에 여동생이 퉁퉁 부은 얼굴로 벽에 기대어 앉았고, 그 곁에 딸애가 입구를 쳐다보며 앉아있다. 문이 열리고 찬 기운이 들어올 때마다 고개를 들어봐도 이쪽 빈소로 오는 사람은 없다. 염을 하고 입관을 할 때, 실제로 눈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울음이 길었던 사람은 여동생과 딸애 둘뿐이었다. 나는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도 술을 많이 먹었을 때처럼 끅끅거리기만 할뿐 곡소리는 좀체 나오지 않았다. 건성 눈물을 찍던 아내에 비해 서럽게 울어준 딸애에게 가당찮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딸애는 고3이었던 지난해에 학원은 고사하고 진학을 포기하라고 종용했었는데, 기어이 대학에 합격해 놓고 애비가 등록금을 만들지 못할까봐 눈물을 찔끔거렸었다. 대학에 들어가 꼬박 아르바이트를 했고, 내 생일에 지폐다발을 편지와 함께 몰래 넣어줘 나를 울렸다. 올해 고등학생이 된 아들놈은 이 와중에도 어느 구석에서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멀쩡히 가만있을 수도 없고, 딱히 할 짓도 없다. 그렇게 자고 싶었던 잠도 오지 않는다. 코딱지를 후비다가, 손끝에 걸리는 코털을 신경질적으로 뽑았다. 더럽게 아팠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멍히 어머니 사진을 보다가 불쑥 울음 같은 웃음을 흘린다. 좀 전에 집어넣었던 전화기를 다시 꺼낸다. 지독히 울리지 않는 전화기. 냅다 던져버리고 싶다. 절실히 누구에게라도 전화를 하고 싶은데, 상대를 떠올려 생각하면 할 수가 없다. 이럴 때 누군가 전화를 해주면 말 배우는 애처럼 떠듬거리며 울먹일 것 같은데, 아무도 그럴 기회를 주지 않는다. 갑작스레 상을 당하고 애써 여기저기 연락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단체나 모임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야간업소 딴따라인 직업상 아는 이들에게도 때가 때인지라 연락하기엔 염치가 없다. 건너편 접객실에는 어머니가 다니던 경로당의 회장, 총무 할머니 두 분이 와있고, 아내가 두 여인과 마주앉아 있다. 보험회사에 다니는 아내는 여러 모임에 나가지만 시어머니 장례를 알리지 않은 모양이다. 낮에 아내가 다니는 교회 사람들이 몰려와 예배와 찬송을 하려했을 때, 내가 길길이 큰소리로 말리자 동서 내외도 그 일행과 함께 가버렸다. 나는 대뜸 장례식장 측에 염불을 끊이지 않게 틀어달라고 했다. 음악을 좋아한다며 나를 따르던 아내는 이제 음악이 제일 징글징글해졌고, 언제부턴지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운구 할 사람, 연락 됐어요?” 아내가 빈소로 건너와 똑 같은 질문을 세 번째 한다. 내가 행사에 불려갔을 때, 제 일만 잘하겠다고 딱딱거리는 진행요원 같다. “아, 새벽에 일 끝나면 애들 올 거라고 했잖아! 왜 똑같은 말을 몇 번씩……” 퉁명스런 말투에 아내는 구시렁거리며 돌아선다. 사실 아내의 염려처럼 나는 애들과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냥 베이스와 오르간을 믿고 있을 뿐이다. 설사 일이 잘못되더라도 내 어머니의 주검을, 생판 모르는 사람을 사서 옮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똬리를 틀고 있다. 유리된 이 공간의 바깥은, 이제 크리스마스이브 열기도 얼마큼 가라앉고 있을 것이다. 평소 같으면 우리들도 일을 끝내고 한잔할 시간이다. 하필 크리스마스라니! 어머니의 시간은 정지되었을까? 어머니는 이제 연기와 냄새와 소리 따위로 이루어진 막의 저편에서 어떤 표정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어머니의 온갖 말투와 표정과 행동을 기억하지만,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아직은 어느 경계에서 서성이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제단 뒤로든 어디로든 뚫고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제단 왼편에 ‘미인비즈니스클럽 사장 변명구’라는 리본을 단 조화가 서있다. 양복상의를 허리 뒤로 젖히고 바지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폼으로 침을 찍찍 갈기는, 대머리에 땅딸막한 똥개의 얼굴이 떠올라 얼른 고개를 흔든다. 똥개 변 사장은 내게 빚을 지고 있는데 그는 채무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나는 그것을 받아낼 재간이 없다. 두 번이나 그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어머니 명의의 아파트를 처분했고, 결국 내 목숨 줄 같았던 사업체마저 팔아 넘겼다. 내 돈이 투자된 영업장을 처분해 다른 영업장을 인수하면서도 내 돈은 투자 실패로 날아갔다고 억지를 부렸다. 돈 벌면 갚겠다면서, 그때까지 밥그릇 걱정은 말라는 그놈과 나는 어정쩡하게 갑을관계가 되고 말았다. 혓바닥을 뽑고 기름 낀 배때기에 구멍을 내주고 싶었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잘라버릴 수도 없거니와 놈이 던져주는 일거리는 나를 따르는 식구들에게 당장의 밥줄이었다. “어머니! 제가 이 친구, 돈 벌게 해줄 겁니다. 저 없는 놈도 아니고, 믿어주세요! 이리 착한 친구가 잘 돼야죠, 제가 어머니를 일찍 잃어 외롭게 컸는데, 이참에 제 어머니가 되어주십시오!” 8년 전, 그의 제안에 어머니가 불안해한다고 하자, 49평이던 우리 아파트에 찾아와 똥개는 어머니 앞에 엎드려 그렇게 말했었다. 어머니는 표정 없이 시선을 피하며 잡힌 손을 빼려했다. 나중에 피를 말리는 시간들이 지나고 결국 셋방으로 옮겼을 때, 어머니는 끝까지 말리지 못한 자신을 탓했고 방관하던 아내는 원망이 깊어졌다. 가족을 감싸고 있던 보호막은 나의 욕심과 오판으로 어이없게 허물어졌다. 책임도 미안도 없는 똥개는 이미 나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개새끼라는 욕은 개에게 미안한 인간말짜새끼! 주먹을 불끈 쥐며 입술을 아프도록 깨문다. 그 옆 조화에는 ‘성일엔터테인먼트 단장 성도화’라고 리본이 달려있다. 5년 전, ‘정성일 연예기획실’이던 악단사무실을 국악 하던 도화가 인수했는데, 성만 빼고 이름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나를 각별히 따랐던 도화는 그때부터 야멸친 사업가로 변신하여 거꾸로 나를 부리고 있다. 10년을 함께 일군 팀은 흩어지고 우리의 터전은 내 이름과 함께 도화의 돈벌이 수단이 되었다. 딸애의 등록금 때문에 아내와 대판 싸우고,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끌다시피 결국 도화를 찾아갔다. 악기를 담보하겠다는 내게 도화의 조건은 엉뚱했다. 자기가 하자는 대로 군말 없이 다하면서 생각 없이 하루를 같이 보내자는 것이었다. 사랑한다는 도화의 군말에 물든 볼모의 몸은 엉뚱하게도 강한 욕정이 일어났다. 양수리 강물이 바라보이는 러브호텔에서 붉은 와인을 마시며 발가벗고 뒹구는 동안, 강물은 햇살에 반짝이다가 붉은 울음을 토하다가 캄캄해져 갔다. 낡아가는 서로의 육체를 탐하면서 도화는 도취되려 했고 나는 이율배반의 야릇한 비애에 젖었다. “오빠, 우리 그냥, 이렇게 사랑하면서 살면 안 돼? 가끔 이렇게 만나면서……” “넌, 이게 사랑이니? 풋! 이건 마지못한 달램이거나 갈증해소일 뿐이야.” “아니지, 오빠가 내 사랑도, 내 맘도 몰라주고, 날 사랑 안 해서 그런 거지.” “난, 이미 여자한테 질리기도 했지만, 셋방살이 꼴에 사랑은 무슨……” “그니까, 내가 하잔 대로 하면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잖아? 그 여리고 예민한 감수성을 무디고 뻔뻔하게 만들어야 해! 오늘처럼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우리 이벤트 회사 만들자! 오빤 음악하지 말고 영업하고 관리만 해. 내가 오빨 정말 사랑하니까 하는 말이야.” “그럼 너, 내 속에까지 들어와서 사랑할 자신 있니? 사랑 그거, 결국 이기심을 가리는 탈이야. 남자의 가슴앓이, 그 날선 상처마저 안아줄 여자는 없어! 착각의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지.” “세상에 오빠 마누라 같은 여자만 있는 줄 알아? 어찌 이리 여자의 진심을 모를까? 오빠가 그리 닫혀 있으니까 소통이 안 되는 거야.” “소통? 어떤 소통? 그래, 우리 일로 말해볼까? 무대에서 연주하는 사람은 자길 위해서기도 하지만, 아래에 있는 청중을 위해 연주하는 거야. 들으라고 하는 거야.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열광을 하지. 자기가 못하는 연주를 해주니까. 그런데 봐봐, 청중이 음악이 좋다고 무대에 막 올라오면 되겠어? 설령 올라온들, 그 무대 위의 뮤지션들과 어떻게 어울리겠어? 당장 리듬과 조화가 깨지고, 내려가지 않으면 쫓겨나지. 그러니까 무대와 객석 사이엔 막이 있는 거야. 막이 열렸을 때만 자기 자리에서 자기 역할로 소통하는 거지. 또한 막은 서로의 세계를 넘보는 경계야. 안 그래? 닫혀있는 나의 막을 네가 진정으로 연다면 소통이 되겠지.” 군말과 생각이 되레 많았던 그런 하루가 있었다. 왜 알토를 두고 18살이나 많은 남자의 재취가 되었냐고 묻자, 서로가 가진 것을 공유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알토는 병사한 아내에 대한 죄책감으로 힘들어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도화와 새 보금자리를 틀고 싶어 했다. 하지만 도화는 애초에 알토를 그럴만한 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도화가 재력가와 결혼을 하자 외려 알토가 사무실에 나오기를 꺼렸다. ‘형, 온갖 구석이 다 불합리하고 불협화음이야……’ 알토는 다시 힘들어 했지만 도화는 종내 알토에 대해 한 마디 말이 없었다. 시간이 사연들을 데리고 흘러갔다. 제단 오른쪽에 있는 조화에는 ‘기라성스탠드바 임직원 일동’이라고 붙어있다. 내가 악기를 들여놓고, 금빛 반짝이 무대의상을 입고 찍은 내 사진이 붙어있는, 변두리 중년층을 겨냥한 복고풍 스탠드바이다. 12개의 코너를 두고 정면에 무대와 춤출 공간을 배치했다. 그런 곳이라도 악단은 서로 들어가려 했다. 똥개의 소개가 있었지만 룸살롱 마담 출신의 사장은 나도 익히 아는 여자였다. 몇 년째 떠돌이 악사였던 나는 무엇보다 후배들과 마음 놓고 연습할 공간이 생겨 흥감했다. 멤버들과 자주 만나 연습하려는 욕심은 그룹사운드 때부터의 습관이지만 이제는 나이 때문에 느끼는 위기감이 컸다. 나날이 진화하는 기계음에 밀려나는 생음악은, 자칫 방심하면 달아날 애인이어서 자주 다독이고 안아줘야 하는 슬픈 사랑이었다. 가게는 순탄하지 않았다. 현수막을 걸고 알려진 연예인을 불러올 때는 썩 괜찮았지만, 고비용의 프로그램을 줄이자 대번에 손님이 줄기 시작했다. 나는 인맥을 동원하여 싼 값의 밤무대 애들을 불러 온갖 이벤트와 쇼를 시도하며 단골손님을 늘이려 애를 썼다. 마담은 내게 고마워하며 희망을 가지자고 했지만 나는 당장 애들에게 약속한 개런티를 채워 줄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바깥일을 늘려야 했고 도화의 일이든 똥개의 일이든 가릴 수가 없었다. 술이 한잔 당기지만 참기로 한다. 문득, 난 이제 고아가 되었다는 생각에 어깨가 더 처진다. “명아! 가서 업이 찾아 와! 이놈이 상주가 되어가지고 어디서 뭐해?” 부러 대나무 지팡이를 두드리며 졸고 있는 딸애에게 말한다. 좀 있으니 눈을 끔벅거리며 아들애가 들어와 넌지시 옆에 앉는다. 자정이 지나 한기를 느끼던 터라 애에게 덧입힐 게 없나 두리번거리다 그냥 슬쩍 끌어당겨 어깨를 감싸 안는다. 갑자기 입구 쪽이 소란해지더니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들어오는데 행색들이 가당찮다. 어깨아래까지 장발은 대부분이고 빨간 가죽점퍼를 입은 놈, 찢어진 청바지에 부츠를 신은 놈, 선글라스를 목에 건 놈, 입술에 쇠고리가 달린 놈을 포함해 7명이 우르르 올라와 두 줄로 선다. 거기다 나름 심각한 그들의 표정 또한 가관이다. 어쨌건 적막하기만 하던 빈소에 아연 활기가 살아난다. 동생이 옷매무세를 다듬으며 눈이 휘둥그레졌고 딸애는 아내를 부른다. 뒷줄에서 제각각 엉성한 자세로 절을 따라하는 애들을 보며 나는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형님. 애들이, 일류 선배님들 여기 계신다니까, 꼭 뵙고 싶다고 해서……” 드럼은 강남의 유명업소에서 일하며, 친구가 하는 음악학원 일도 도와주는 실력파다. 크리스마스이브라고 학원생들이 드럼이 일하는 업소에 모여 회식을 했고, 드럼이 가야한다니 졸라서 함께 온 것이었다. 조금 후에 오르간과 보컬이 함께 와서 어제처럼 어머니께 절을 올린다. 딸애가 음식을 차려놓은 접객실로 옮긴 애들은 빈소에서의 표정과는 딴판으로 스스럼없이 먹고 마시고 떠든다. 메리 크리스마스! 한 놈이 잔을 들며 얼결에 말했다가 주위 눈살에 고개를 팍 숙인다. 아내는 이쪽을 등지고 앉아 되도록 쳐다보지 않으려 한다. 자기 동료에게 내 직업을 곧이곧대로 말했을 리 없으니 이 이상한 문상객들을 뭐라 설명할까. 그보다 얘들로 아침에 운구를 시킬 작정인지 기가 막혀하는 아내의 걱정이 뒷모습에 어려 있다. 밤을 새워주신다며 누웠던 경로당 할머니들도 일어나 애들을 힐끗거린다. 좁은 공간에 결코 섞일 수 없는 세 무리가 하나의 공통사로 자리하고 있다. 있으되 보이지 않는 막. 오르간의 어깨를 툭 치고 화장실로 간다. “연말행사 주문받은 일들, 애들 잘 맞춰졌냐?” “걱정 허덜 마소! 성님 이름에 금 가겐 안 할 텐게……. 참, 알토 성, 온다 했는디, 안 왔소?” “알토가 연락 됐냐? 강남 바닥, 오늘은 밤샘 영업할 텐데, 와 지겠냐……, 야, 올겐아, 똥개는 뭐라디? 온다는 말 없었냐?” “하따, 성님도 참. 아! 엄니헌티 죄 진 새끼가 여글 오것소? 아이고, 어째 우리 성님은 그 인간 같잖은 똥개한테만 쪽을 못 쓰까이?” “어떻게든 받아내야 될 거 아니냐? 울 엄마 피 같은 돈인데……” “성님, 처음 투자한 돈 받아낼 거라고, 우리 사무실 팔아 또 넣었자녀? 그라고 우찌 되었소?” “……, 세상엔 포기 못할 게 있다! 이걸 포기하면, 내가 그놈 죽일지도 몰라. 그럼 우린 어떻게 되겠냐?” 담배를 한 대씩 꼬나물고 소변기 앞에 나란히 서서 얘기를 나누다보니 또 눈물이 맺힌다. 화장실을 나오며 키가 작은 오르간이 팔을 높이 올려 키가 큰 퍼스트기타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건반 위에서 춤을 추는 그 손 위에 줄을 퉁기는 손이 얹어진다. 다시 한 번 입구가 소란해지더니 찬바람과 함께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선다. 베이스가 기라성의 사장과 직원들 사이에서 헤벌쭉 웃으며 허리를 굽실했다. 이번에는 짧은 치마에 키가 큰 여자들이 많아, 다시 졸다가 눈을 뜬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지배인과 웨이터들은 다 검은 양복을 입었다. 반품할 거라며 싸놓은 음식들을 풀고 아내까지도 분주하다. “좀 일찍 끝내고 오려는데, 글쎄, 손님들이 나가줘야 말이죠.” “아이구, 대목인데, 저 때문에 일찍 끝내셨네요, 사장님 못 오실 거라 생각했는데……” “당연히 와야죠. 어떡해요,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셔서…… 아, 참. 나중에라도 성 단장님 오실 거예요. 어쩌면 변 사장님 모시고 올지도 몰라요. 아까 통화했어요.” “아, 그랬어요? 고맙습니다. 자, 뭐 좀 드시죠. 여러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우리 어머니, 가시는 길이…… 그래요, 고마워요…….” 어머니 생각도 치밀었지만 도화가 내 마음을 알고 똥개를 끌고 오려 한다니, 고마워 눈물이 나려한다. 이제야 그나마 상갓집다워져서 서로 어울려 술잔을 주고받는다. 나도 덩달아 흔감하여 술을 받아먹고 권하기도 한다. 아내는 내가 술 먹는 꼴을 흘겨보겠지만, 아내의 염려보다도 똥개가 오기 전에 내가 술에 취할 수는 없다. 똥개가 온다면 설마 빈손으로 오지는 않을 것이다. “형님, 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데, 어머니 얘기 좀 해주세요. 많이 아프셨어요?” 주춤거리던 베이스가 느닷없이 말하자 좌중의 눈길이 나에게 쏠린다. 어떻게 말로 말할 수 있을까, 그 그림과 소리를. 그래, 똥개가 와서 어머니 앞에 엎드려 사죄를 하고, 이따 화장터에서 어머니의 몸이 연기가 되어 오를 때 도화가 살풀이 춤이라도 추어준다면, 나는 그만 어머니의 배를 놓아야 할 것이다. 내 가슴에 비끄러매어진 닻줄을 끊어주고 빈 배로 흘러가게 해야 한다. * 그날 아침 역시 밤새 일하고 맥없이 퇴근한 내게, 출근하는 아내는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당신이 업이 깨워 밥 먹게 해요! 학원 늦지 않게. 노인네가 어째 저리 아침잠이 많아질까? 좀 일찍 주무시면 될 텐데, 그놈의 텔레비전, 끝날 때까지 보시니 원…….” 밉살스런 말본새에 가려 말뜻을 채 헤아리지 못한 나는, 애를 깨워놓고 잠자리에 들면서 설핏 께름칙했다. 요 며칠 해 뜰 때에 맞춰 매일 하던 아침기도가 들리지 않았고, 아이를 깨우고 밥을 차려주는 모습이 전 같지 않았다. 양로원에 가고 싶다거나 꿈자리가 이상하다는 말도 들은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어머니가 어디가 아픈지, 자는지 잠깐이라도 확인을 해보지 않았을까? ‘어머니 몸이 안 좋으신가 봐요, 당신이 좀 챙기세요.’ 이렇게 말해 주었더라면 얼마나 고마웠을까? 아내가 어머니에 대해 말하는 본새에는 앙금이 있었다. 거기에 대꾸하자면 결국 내 아침잠만 망칠 테니 일체 대답을 하지 않는다. 며칠 남지 않은 12월은 마지막 날까지 바빠야 했다. 나는 쉬어야 했고 잠을 자야했다. 평소대로 어머니는 점심밥을 차려놓고 나를 깨울 것이고, 마주앉아 밥을 먹고, 어머니는 경로당으로 갈 것이고, 나는 가게로 나가 악기를 싣고 호텔 연회장으로 갈 것이었다. 내 또래들의 송년회에서 어린사람 행세를 하며 노래반주를 열심히 할 것이었다. 개런티 위에 얹어주는 팁보다도 행사가 일찍 끝나주어 야간행사 한 건을 더 뛸 수 있길 바랄 터였다. 그러고 가게로 가 취객의 흥을 돋우며 새벽까지 오부리(즉흥반주)로 푼돈벌이라도 해야 할 것이었다. 그래야 했다. 아래턱이 뒤뜰과 닿아있는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등지고 뒤뜰보다 낮은 침대에 누워 몸을 옹송그렸다. 나는 곧 잠으로 들어가는 막을 통과해 몸과 마음이 포근한 어둠에 잠겼다. 머리 위로 유리창을 흔들며 지나는 바람소리가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나는 아기가 되고 침대는 요람이 되어 일렁이며 현실을 떠나갔다. 너무 눈이 부셨다. 온통 반짝거리는 강물 위로 크고 작은 스팽글에 투사되고 어룽지는 무수한 빛살이 요동치고 있었다. 요람은 하얀 돛단배가 되어 바다로 흘러가고 있었다. 바다에는 완벽한 하모니로 어우러지는 소리들이 꼬리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변화무쌍한 빛의 안개 속에서 연주되는 그 소리는 보이는 음악이었다. 그 위 남빛 하늘에 구름이 층층이 계단을 만들고 있었다. 거기, 파르스레한 너울을 쓴 여인이 오르고 있었다. 누구일까? 나는 그녀를 불러야 하는데 도무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득하던 여인이 너울을 벗고 나를 보려는 순간,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몰아쳤고 돛단배가 세차게 흔들리며 나아가지지 않았다. 놀라 흠칫하며 눈을 떴다. 나는 양손으로 침대모서리를 꽉 잡고 있었다. 찬란하지 않은 한낮의 햇살이 빗각으로 들어와 오래된 장롱과 얼룩진 벽지를 더듬고 있었다. 이 무엇일까? 꿈도 현실도 아닌 시공의 틈 거기, 드리운 막이 스르르 나른한 심신을 휘감거나 풀어주는 몽롱한 순간, 결코 머물 수 없는 그곳에서 그때에 보인 4차원의 그림, 보이는 소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적요에 잠긴 집안. 거실에 놓인 접이식 침대에는 아들이 빠져나간 이불이, 벌레가 벗어놓은 고치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식탁은 애가 밥을 먹고 나간 그대로였다. 이어지는 이상한 느낌에 별안간 아침에 아내가 한 말이 겹쳐지자 섬쩍지근한 기운이 몸을 휘감으며 진저리가 쳐졌다. 경로당에 가지 않았으면 정좌를 하고 불경을 읽고 있을 어머니가 평소에 하던 일을 하지 않았다면 화가 많이 났다는 시위였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비어있는 딸애의 침대 아래 좁은 바닥, 언제나 그 자리에 어머니는 자고 있었다. 머리맡에 놓인 불경, 안약, 혈압약봉지, 천장을 향해 바로 누운 자세, 무엇 하나 다르지 않았다. 휴-, 안도의 한숨을 쉬고 돌아서려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짐과 동시에 어떤 소리가 들렸다. 우우우우웅웅웅웅…… 정수리로 들어오는 미세한 진동소리. 그리고 가늘고 희미한 낯선 냄새가 있었다. 그것은 알아 챌 수 없는 소리와 냄새였는데 나는 느꼈고, 이어 차갑고 날카로운 섬광이 등줄기를 타고 뒤통수를 쳤다. 나는 엉거주춤 비틀거리며 엄마-? 불러보았다. 목소리는 천번만번 되울리며 내 귓전에서 맴돌았다. 엄마아아아~ 그 울림을 지우려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사방이 굉음과 함께 빙빙 돌아가고 머리가 터질 듯 윙윙거렸다. 틀니를 뺀 어머니의 입술은 안으로 말려들어 함몰되어 있었다. 입이 벌어진 동그란 구멍은 무저갱의 입구처럼 보였다. 저 속으로 무엇이 들어갔을까? 엄마는 도대체 왜 이러고 있을까? 나는 싸울 듯 거세게 달려들었다. “안 돼! 아직 안 돼, 엄마! 일어나 봐, 얼른!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엄마, 엄마아!” 뺨을 비비고 눈꺼풀을 뒤집어보고 입김을 불어넣고 가슴을 치고 흔들어보다가, 맥없이 쓰러져 어머니 곁에 누웠다. 손은 차가웠고 방바닥이 차진 않는데 이불 속에 한기가 돌았다. 나는 어머니의 팔을 붙들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가는 거야, 엄마? 소원 푸셨네, 맨날 자는 길에 가게 해달라고 빌어 쌓더니…… 난, 어쩌라고? 응, 엄마? 이제, 내 소원은 어떡해…….” 몸이 마구 떨려왔다. 눈물과 콧물이 마냥 흘러내려 어머니의 옷과 요를 적셨다. 어딘가로 전화를 해야 할 텐데, 아무 짓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팔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점점 심하게 떨리던 내 몸도 자꾸 오그라들며 조금씩 굳어가고 있었다. 바퀴벌레 두 마리가 어머니의 목과 뺨을 오르내리다 사라졌다. 어머니의 몸은 오래 된 배였다. 세월의 강은 얼어 있었다. 어머니는 마지막 힘을 다해 얼음을 깨며 서쪽 강어귀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닻줄을 그러쥐고 있는 나를 외면한 채. 나는 세상에 태어난 이래 가장 무서운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빨이 마구 덜덜거렸다. 아득한 시간이 지난 후,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학원에서 온 모양이었다. * 기라성 사장이 통화하던 휴대폰을 쭈뼛쭈뼛 내게 내민다. 제기랄! 도화가 아니었다. 똥개의 지나치게 큰 목소리는, 음악소리와 남녀가 뒤섞인 술좌석의 소음 때문일 것이다. - 아, 정 실장! 내가 꼭 가봐야 되는데 말이야. 지금 중요한 약속에 와있어서, 하, 이거 참, 어머님께 정말 미안하지만, 정 실장한테 좋은 일일 수 있으니 좀 이해해 주소. 아! 실은 내 친구가 이번에 카바레를 개업한다고 악단 문제로 만났는데, 내가 정 실장을 적극 밀고 있어요. 능글맞은 똥개의 말에 대번에 부아가 치미는데, 감도 좋은 전화기의 저편에서 ‘나, 여기 있단 말 하지 마, 오빠.’하는 도화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심호흡을 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한다. “예에, 변 사장님. 그 마음 압니다, 꽃도 보내주시고, 네네, 근데, 도화가 거기 같이 있어요?” - 누구? 아, 성도화! 성 단장이야 요새 우리 가게 자주 오지. 몰랐나? 성일에서 우리 가게 스페어 대기로 했거든. 아, 성 단장도 같이 얘기 잘하고 있으니, 계약되면 한 턱 낼 준비나 하소. 나는 터져 나오려는 욕과 울분을 삼키며 잠시 숨을 고르고 목소리를 더 낮추었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래요, 잘되면 좋겠네요. 도화에게도 걱정 말고, 우리 애들 일이나 많이 만들라고 전해 주십시오. 예, 그럼.” 전화기를 돌려주고, 나에게 쏟아지는 마뜩찮은 시선들을 애써 외면하며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흘기던 눈길을 거둔 오르간과 베이스가 혀를 차며 술을 따랐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서서히 무너져 바닥에 꼬꾸라졌다. 발인제를 지내고 영구차가 출발할 때까지도 술이 채 깨지 않아 넋 나간 사람처럼 움직였다. 하늘이 잔뜩 내려와 사위는 온통 잿빛이었다. 오르간의 차를 앞세운 영구차는 미로 같은 길을 따라 도시를 벗어났다. 알토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비와 섞여오던 싸락눈이 함박눈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영구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물방울이 사선으로 흐트러지는 차창에 머리를 쿵쿵 찧고 있었다. - 형, 나 좀 취했어, 추워서 차안에서 혼자 막 마셨어. 미안해…… 어제, 나 혼자서라도 갔어야 했는데, 그 연놈, 데려가려다 일이 꼬여버렸네. 형이 내 몫까지, 어머니 잘 모셔줘요…… 그래, 괜찮아,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도 대답은 않고, 제 말만 잇는 알토는 점점 흐느낀다. - 형, 우리 만난 지 30년이야. 그 세월 다 어디로 갔지? 난 왜 나팔을 불었을까? 고등학교 때 형이 정해준 거였지? 그때부터 형 말이라면 다 들었는데……, 나 섭섭한 적은 있었지만, 형 배신한 적 없어. 알죠? 형, 우리 지금까지 뭐 한 거야? 아니, 뭘, 잘못한거야? 음악다운 음악 하자며? 형이 그랬잖아! 그러면 음악만 했어야지……. 차창에 눈송이가 달려들어 녹아내린다. 흐린 창밖에 알토의 우울한 얼굴이 다가와 있다. 산과 들과 함께 흔들리고 있다. 어디 있는 거니. - 나, 강가에서 눈 내리는 거 보고 있어…… 형, 화음이 계속 안 맞으면, 누가 삑사리를 내서라도 일단 멈춰야 하잖아? 그런데 다 눈치만 보면? 가만히 있는 게 비겁한 건데, 누군들 비겁하고 싶지 않겠어? 응? 아냐, 그냥, 우리 연습할 때 생각나서…… 옛날에 어머니가 팔다 남은 떡 싸주시면 뒷산에 올라가 연습했잖아, 그때가 생각나네! 좀 있으면 어머니…… 눈길 따라 하늘로 오르시겠네. 형,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올겐도 드럼도 베이스도……, 형, 괴로움이 없으면 치열하게 살지 못해, 한도 품고, 그냥 힘들게 잘 살아……, 에이 씨발! 전화가 끊어졌을 때, 차창 밖 저만치 수묵화인양 눈 내리는 언덕 위에 화장터가 보인다. 왠지 낯익은 풍경에 차에서 내린 나는 한동안 주변을 휘둘러본다. 어머니의 관이 화구에 들어갈 때마저 나는 끝내 시원한 울음을 토해내지 못했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이름이 빨간 빛으로 점멸하고 있는 대기실 의자에 나의 살붙이들이 지친 몸을 서로 기대고 있다. 어머니가 남긴, 지나가면 잊힐 시간의 그림이 애틋하다. 그날 아침의 그림도 소리도 어머니가 보여준 것일까. 어머니의 몸이 연기가 되어 하얗게 하늘거리는 동안, 함박눈 송이 송이가 저마다의 진혼으로 살풀이춤을 추는 동안, 나는 地, 水, 火, 風, 네 개째 담배를 태운다. 눈은 허공에서 나부끼다 유유히 산야를 덮어간다. 겨울나무 빈가지에 백화가 피어나고 있다. 바람이 별로 없고 그다지 춥지도 않다. 깊은 산속 암자를 찾아 가기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늘로 오르는 연기에서 향기가 날까 고개를 드니, 눈은 내 얼굴을 씻어주려는 듯 내려앉는다. 이대로 눈 속에 묻히고 싶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고 싶다. 눈을 감자 얼굴에서 녹은 눈이 물이 되어 눈가로 흘러내린다. 알토의 얼굴이 빗물 흐르는 창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려는 모습으로 떠오른다. 그가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는 얼굴이다. 퍼뜩 똥개와 도화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그제야 알토의 말이 섬쩍지근해진다. 설마, 사고를 칠까? 막아야 하는데……, 그냥 비겁해지기로 한다. 무심한 표정의 사내는 어머니의 유골을 모아 기계에 부었고 어머니는 삽시간에 눈보다 짙은 색의 가루가 된다. 아직 내 어머니인 상자를 안고 오르간의 차에 탄다. 조수석에는 아들이 할머니의 영정을 안고 있다. 나는 어머니의 유골을 오래 납골당에 안치하려고 생각지 않는다. 깊은 산속의 암자를 찾게 되면 그때 비로소 어머니를 완전히 놓아드릴 심산이다. 그때까지 어머니는 여전히 셋방에 있어야 한다. 오르간은 운전을 하면서 전화를 받는다. 어투로 보아 뭔 일이 터진 것 같지만 나는 짐짓 창밖으로 눈을 둔다. 눈꽃을 피운 나무들과 희끄무레한 들녘이 뒤로 휙휙 지나간다. 오르간이 백미러로 나를 살피며 말을 하려다 무르춤했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호들갑스레 입을 연다. “하아, 참, 이럴 땐 뭐라해야 쓰까요, 성님. 똥개하고 도화가 많이 다쳤능갑소. 시방 응급실이라는디…… 아따! 차말로 천벌이 따로 없당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미러로 오르간을 쏘아보며 다음 말을 독촉한다. “참 요상시럽네요이, 도화 고것이 어디 붙어 묵을 넘이 없어서 똥개허고 그딴 델 갔으까이. 아, 쩌거 양수리 뭔 호텔 앞에서 둘이 뺑소니차에 치였다는디요……, 근디, 기라성 사장이, 알토 성님 여그 왔냐고 자꾸 물어쌌네요.” 대번에 눈물이 차올라 고개를 돌리니, 안개구름 자욱한 저편 허공에 납골당 건물이 뿌옇게 떠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오르간에게 실없이 묻는다. “야, 올겐아. 너 혹시, 어디 깊은 산 속에 있는 암자 아는 데 없냐?” 시동을 끈 오르간이 뭔 엉뚱한 소리냐는 듯 뒤돌아본다. 눈은 안개비가 되어 흩날린다.  
655 조용한 펀치/노정희 file
편집자
1335 2018-06-01
조용한 펀치 불쾌감을 느낀다면 그것도 부정적 측면이 아니겠는가. 긍정을 바라보면 부정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마는, 나는 왜 요즘 들어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이 눈엣가시로 보일까. 남편을 이해하고, 혹여 실수를 하더라도 인정해 주는 것이 참된 배려일 텐데. 나의 좁고, 옹졸하고, 해진 마음이 밉다. 식구들이 다 모였다. 독립해서 나간 큰아이는 가뭄에 콩 나듯 가끔 집에 들른다. 작은아이도 알바 시간을 조정했다고 한다. 남편이 퇴근하자 모처럼 식구들이 둘러앉아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하였다. 내 딴에는 신경 써서 상을 차렸건만 덩치 큰 아이들에게는 이내 허기가 밀려왔나보다. 식사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자 한 판이 배달되어 왔다. 먹는 것으로 정겨운 시간을 더 연장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1 ₊1 보다는 딱, 1 이 더 맛있습니다. 공짜는 아무래도 성의가 부족하다니까요. 치즈분말도 뿌리고 핫소스도 기호에 따라 조절해서 드십시오.” 큰아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냉장고에서 존재를 잊고 있던 캔맥주가 화려한 복귀를 했다. “건배!” 그러나 우리 가족은 마시는 것에서는 일치를 보지 못한다. 큰아이와 나는 맥주 한 잔 정도는 입에 짝짝 붙도록 마시지만 작은아이는 한 모금 겨우 마시고 잔을 테이블에 고정시킨다. 그보다 더 심한 사람도 있다. 잔을 들었다 내렸다, 소위 지게차놀이만 하다가 아까운 술만 버린다. 식구들이 다 알고 있는 사정이니 분위기 못 맞추는 ‘분’도 감싸 안으며 그동안의 경계를 허물어갔다. 베이컨과 새우를 듬뿍 넣은 피자 도우, 쫄깃한 식감에 행복했고 유리잔에 넘치는 하얀 포말의 부드러움에 꽉꽉 조였던 마음의 나사까지 풀었다. 사드 배치도 잊자. 청년 취업문제도 접어두자. 나이 꽉 찬 딸아이들의 결혼 얘기도 묻어두자. 블랙리스트를 굳이 들출 필요는 없으니까. 열세 살의 멍멍이 아지와 네 살의 야옹이 랑구의 재롱에 웃음꽃 만발인데. “뿌우우웅 ~!” 일순간 모두 당황했다. 갑자기 침투한 이 어색한 소음이라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 화사한 분위기를 깨트린 주범을 어떡한다? 나의 눈초리는 범인 색출 모드로 바뀌었다. 분명 표정은 경직되고 눈빛은 날카로웠을 것이다. 그 순간, 큰아이가 아주 차분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유미야, 이 상황에서 방귀를 그렇게 크게 뀌면 어떡하니? 엄마, 아빠, 죄송합니다. 제가 동생을 잘 이끌어주지 못한 탓이 큽니다. 앞으로 이런 불상사가 없도록 주의 주겠습니다.” 제 언니의 훈시에 당황한 빛이 역력하던 작은아이가 잠시 멈칫하더니 공손하게 말을 받는다. “미안합니다. 음식을 앞에 두고 버릇없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조심성이 없었던 점을 사과드립니다.” 일그러졌던 나의 표정은 두 아이의 대화에 쿡, 웃음이 나왔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딸들아, 엄마가 미안하구나. 내가 너희들에게 밥상머리 예절을 잘 가르치지 못한 탓이 크니까 너희들은 자책하지 말거라. 생리적인 현상이야 어찌하겠느냐. 다만 음식 앞에서는 예를 지키는 게 문화시민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평온이 찾아왔다. 네 식구 분량의, 각자 두 조각씩 할당된 피자 여덟 조각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독 ‘한 분’이 마지막째 피자를 작은아이한테 슬며시 넘겨주는 게 아닌가. 나는 배가 아팠다. 이건 헛배가 불러서 아픈 게 아니었다. 혼자 웃음을 삭히느라 배를 움켜쥔 통증이었다. 주방으로 가는 척 일어서서 뒷베란다로 나가 통쾌하게 웃어 제쳤다. 그동안 밥상머리에서 염치도 좋았지, 폭주하는 오토바이 소리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던 ‘대주’때문에 어디 한두 번 입씨름하였던가. 나중에 어려운 자리에 가서 실수를 하면 어쩌려느냐고 다그치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분명 ‘대주’의 폭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눈치 챈 딸아이들은 극적인 연기로 저희 아빠를 위기에서 구출하였던 것이다. 나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그동안 우물거렸던 말을 짧지만 간결하게 죄다 게워내었다. 사람에게는 자신을 거울처럼 비쳐주는 타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남편은 어떤 방어도 변명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일방적인 삼모녀의 대화에 외톨이가 되었다, 아니면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 남편한테 쪼금 미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묵은 꽁지가 빠지고 새 꽁지깃이 새로 돋아 비상하는 듯한 이 기분을 누가 알랴. 그동안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언성을 높이고, 하 답답해서 입을 다물기도 했다. 삐치고 외면한 날이 어디 한두 번인가. 집안에서 무소불위 하는 대주에게 정면으로 맞서보았자 득이 없다. 노승발검怒蠅拔劍에 이란격석以卵擊石 일 터. 싸움은 힘으로 하는 게 아니야, 머리로 하는 거지. 봐라, 총칼 한번 휘두르지 않고 멋지게 한방 먹였지 않은가. 밤공기가 이렇게 시원할 수가 있다니, 모처럼 속이 확 뚫린다. 2016. 9 노정희 계간《문장》2007년 등단 수필집 『빨간수필』『어글이』 대구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부회장, 계간《문장》편집장, 수필교실 강사, 푸드칼럼리스트  
654 석물 부근(石物 附近) 외1편/박찬선 file
편집자
1326 2018-06-01
석물 부근(石物 附近) 어두워서야 밝은 모두가 움직이는 돌이네. 오랜 세월 동안 그냥 잠자코 있는 것이 아닐세. 불덩이로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다가 주저앉기도 하고 극지의 얼음장처럼 꽁꽁 얼어붙었다가 깊이 잠들기도 하네. 무엇이 되고 싶었네. 나무나 물고기나 별이 되고 싶기도 하고 죽어서도 못 잊는 사랑의 얼굴이 되고 싶었네. 뜨거운 여름이 식는 밤에는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네. 망가지고 깨지고 귀가 떨어지고 몸체를 잃은 것들이 자기가 있을 자리를 찾느라 뒤뚱거리며 배회하고 있네. 사라진 어느 절터 적막한 공간을 서성거리기도 하고 땅 속 깊숙이 묻힌 옛 고을의 금당을 기웃거리기도 하네. 나래를 잃은 새는 밤하늘의 별자리만 헤아리고 머리 없는 좌상은 흥건히 염불에 젖어 번뇌를 삭이고 있네. 떨어져 나온 서러운 파편 어디엔가 있을 짝을 그리워하며 굳어지고 있네. 밤이 깊을수록 새소리는 가깝고 떨어져 있으면서도 함께하는 그리움 아린 이야기가 별떨기로 쏟아지는 여름밤의 석물부근 다락방 깊은 바다에는 심해어가 산다. 수산시장의 어물좌판이나 수족관에서도 좀처럼 볼 수 없는 고기. 그는 어둠속에서 더욱 빛이 났다. 세(世)와 대(代)의 헤아림과 촌수를 넘어서 대문중의 어른 마냥 예우를 받았다. 천문의 괘를 보면서 소요하며 때를 기다렸다. 온돌이 달아올라 불붙은 모포를 끌고 뛰는 코 큰 군인의 여름이며, 부상당한 어린 병사의 신음소리며, 불 꺼진 등대로 예측 불허의 여름이 길었다. 바다에는 먹다가 말라붙은 깡통과 입 벌린 군화 짝과 영문자가 새겨진 푸른 군복이 떠다녔다. 돌담구멍으로 본 흑인병사의 몸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름푸시 알 즈음 심해어는 보이지 않았다. 바다는 요동치고 밝을수록 어두웠다. 석고처럼 굳어져서 수심 깊은 곳에 수장水葬되었다. 그물 없는 구름 속에서 동요가 흘러나왔다. 이제 심해어는 하늘에 산다. 약력 경북 상주 출생. 1976년 『현대시학』추천. 시집 『돌담쌓기』 『상주』 『우리도 사람입니다.』외 sunk631@daum.net  
653 둥근 만남 외1편/김요아킴 file
편집자
1193 2018-06-01
둥근 만남 -널문리 주막마을에서 굳게 닫힌 빗장문이, 마악 열리는 순간이다 한 발 한 발 내닫는 발자국의 보폭만큼 서로의 마음 속 앙금도 지워져간다 65년간 봉인된 금기의 역사, 날선 이데올로기는 피의 이끌림 앞에 속절없이 녹고 있다 반도를 가르던 무서운 광풍과 살육의 좌표는 DMZ로 기록되어 오늘을 기다렸다 만나야 할 이유와 간절함은 애타는 마음으로 당위처럼 찾아왔다 한때는 스스럼없이 남북으로 오가던 나그네들이 한 잔의 술잔으로 여독을 풀던 이곳, 서로 명명된 다른 주소들 앞에 ‘마침내’는 이제 고유어로 자리잡아야한다 맞잡은 두 손의 손금사이로, 아슬하게 버텨온 유전자의 뜨거움이 북받치고 있다 초대받지 못한 이 땅의 무수한 영혼들이 둥글게 모여앉아 기억해야 할 이곳, 2018년 4월 27일, 이날은 바로 스스로 문을 열어젖히고 담장을 허물어야 할 첫날이다 * 널문리 주막마을은 ‘판문점’의 옛 이름임. 행복을 시도하다 -목욕탕에서 고향에 돌아와 누운 날은 이른 아침이었다 인적이 뜸한 돌난간에 모로 누워 망막을 향해 사정없이 달려드는 산이 뒷배경으로 추억되었다 자궁 속의 온도와 똑같은 물이 벌거벗은 몸의 원형질을 되살려 놓은 동안, 벌써 강산이 두 번 바뀐 시간들은 거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서린 유리창에 내려앉은 정물들 불혹不惑의 꿈속에서 몇 번의 변형으로 나타났지만, 사라진 골목, 번듯한 양옥집과 넓어진 아스팔트가 꿈보다도 더 낯설게 다가왔지만, 학이 춤추는 봉우리가 털어낸 초로草露는 여전히 개울을 이뤄 낡은 바다로 향하고 첫사랑 계집애를 두고 다퉜던 소나무엔 아직 동무의 그림자가 깊다 훌쩍 커버린 마음에 박힌 옹이를 다시 찾을 단내 나는 여유는, 이미 주차장에 정박한 자가용이 대신하고 있다 다음에 고향을 또 슬쩍 만지작할 날도 이른 아침일 것이다 김요아킴 1969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경북대 사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2003년 계간《시의나라》와 2010년 계간《문학청춘》제1회 신인상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가야산 호랑이』『어느 시낭송』『왼손잡이 투수』『행복한 목욕탕』『그녀의 시모노세끼항』과 산문집『야구, 21개의 생을 말하다』가 있다. 한국작가회의와 부산작가회의 회원이며, 현재 부산 경원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메일 kjhchds@hanmail.net  
652 사람이 되어갔다 외1편/김재순 file
편집자
1274 2018-06-01
사람이 되어갔다 오늘은 세월호 4주기 소셜 네트워크 광장마다 노란 리본꽃이 만발했다 다가가지 못하는 사이버 공간에서 세월호를 그만 우려먹으라는 남자와 그에 대항하여 몸을 떨며 덤벼드는 내 페친이 있었다 남자는 누구의 아비이고 페친은 아비가 된 적이 없는 떠꺼머리다 그날 바짝 마른 안구 때문에 안과 대기실 TV로 봤다 수백 명의 아이를 수장시키고도 물결에 편히 기댄 세월호 아이구 소리를 냈을 뿐 마른 눈물샘은 아이들 인신공양에도 물기 한 방울 내주지 않았고 유명 영화의 한 장면처럼 봤다 다음 날 일터에서 검은 끈으로 검은 리본을 만들다가 다시 노란 끈으로 노란 리본을 접어 일터 사람들에게 선물인 듯 나눠주고 장신구처럼 내 가슴에도 노란리본 하나 달았다 나는 오랫동안 시를 썼는데 무얼 썼던가 세월호는 아득한 이야기처럼 흘려보냈고 눈물샘을 막은 돌덩이도 여전했다 오늘은 세월호 4주기 세월호 때문에 악을 쓰며 싸우는 페친을 무심히 지켜보다가 밥을 먹었다, 순간 솟구치는 맑은 물줄기 4년이나 파 내려가던 암반이 트였다 내 친구의 아이 내 조카 내 새끼 으으으 넘어가지 않는 밥을 물고 한참을 이마를 식탁에 처박고 으으으, 나는 그렇게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갔다 연변에서 오신 할머니 고드름이 주렴을 내린 소한의 아침 자동차 바퀴가 눈 속에 오솔길을 냈다 저 끝 집의 할머니 유모차에 종이박스 몇 장 싣고 꺾인 몸도 반은 싣고 어긋지는 한 발을 끌며 오솔길을 간다 중국에서 왔다는 할머니 우리말이 유창하니 조선족이지 붉은 댕기 휘날리며 아비 등에 업혀서 이 땅을 떠나던 때도 이런 날이었을까 젖과 꿀이 흐르는 데를 찾아서 간 그곳 그곳은 어땠나요.소설처럼* 귀틀집에 우짖으며 달려드는 눈보라를 구멍 난 흙투성이 삼베 바지저고리로 막아내고 땅 주인이 빚을 갚으라고 머리채를 잡던가요 딸을 빼앗기는 사람도 있었나요 그런 날은 겨죽을 먹고 살던 이 땅이 그리웠나요 죽기 전에 꼭 오고 싶었을 조국이라는 이곳 이제는 경제대국이라는데 이 조국의 겨울은 왜 아직 이리 춥고 아득한가 영하 십도가 넘는 빙판길을 폐지 몇 장 실은 유모차에 의지해 미끄러질 듯 미끄러질 듯 혹한의 아침 눈길을 가는 할머니 *최서해의 홍염 김재순 : 경북 상주출생.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 시집⌜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 전자우편: nok910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