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09호...
   2019년 07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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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4년 1월 41호부터 2014년 10월 53호까지...
편집자
73370 2014-11-03
634 오랄로피테쿠스 외 1편/김이숙 file
편집자
1225 2018-04-01
오랄로피테쿠스 불합격입니다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마트에서는 2시쯤 리치마트에서는 7시쯤 50% 반값 할인코너에 서성댄다 라면국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되도록 싼값에 쟁여둔 음식으로 버티는 일주일은 되돌이표 그렇게 몇 날 며칠 모은 돈으로 한 끼 같은 스타벅스 커피 마시는 게 숨 쉴 구멍 신문스터디 자료정리 점심밥터디 면접스터디 영어토익스터디 자습 저녁밥터디 인적성스터디 자소서스터디 개인공부 개인정비, 쪼개 쓰는 시간 편히 잠들지 못하는 하루가 줄창 꼬리 물어도 낙방의 연속, 면접 트라우마 토익 스피킹 HSK 기한 만료로 리셋, 모레 마감인데 원서 냈느냐 이번에도 잘 안 됐냐 묻는 말에 입만 진화한다 죄책감이 부풀어오른다 바닥에 들러붙고 싶은 날이 늘어간다 사냥본능도 도망칠 힘도 잃어버리고 울부짖는 소리는 벽을 뚫지 못한다, 오랄로피테쿠스 나는야 일평생 아가리 취준생 *오랄로피테쿠스(ORAL-opithecus): 취준생들이 원시인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빗대 입만 진화했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는 말 서울 나들이 27년 만에 만난 동창들과 언제 왔었나 까마득한 서울 야들아, 저 아파트 구경 좀 해 봐 래미안 아름답고 안전한 세상이 온다면야 e-편한 세상 마음껏 경험할 수 있다면야 푸르지오 생이 마냥 푸르를 수만 있다면야 왕족처럼 궁전에도 살아보고 술 좋아하니 참이슬에도 살아보고 꿈꾸는 현대연예인, 예술인에도 살아보고 5수 끝에 원하던 대학에 갔는데 대학 가면 제대하면 결혼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숨죽인 흐느낌 귓바퀴를 맴도는데 해밀마을 5단지 반도유보라메이프타운 가랑마을 10단지 동양엔파트월드메르디앙 대출금 늘어나듯 이름도 길어지고 좋은 것 다 갖다 붙이고 아파트도 앞다투어 개명하는 세상 그럴 수 있다면야 우리 아버지 의사야 우리 집은 이층집인데 우리 아버지는 내가 사달라는 건 다 사줘 입만 열만 거짓말이던 문디 가시나 아파트 구경하면서 나는 왜 그 가시나 자꾸만 생각나는지 김이숙 경북 상주 출생. 2014년 시집 『밥줄』로 등단. ‘느티나무시’ 동인.  
633 종이 책에 관한 단상/김불출 file
편집자
1187 2018-03-01
종이 책에 관한 단상 젊어서는 다른 일을 하다가 나이 들어 뒤늦게 서점을 하게 된 친구가 있다. 워낙 책을 좋아하니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내가 교직에 있었으니 관련이 있긴 했지만 퇴직 후에 둘 사이가 더 가까워진 데는 까닭이 있다. 책을 사더라도 현직에 있을 때는 그 친구 서점을 이용하지 않고 오히려 인터넷 서점에 거래를 했었다. 그런데 퇴직 후에는 인터넷 서점에 자주 들어가지 않으니 비밀번호를 잊어서 로그인도 안 되고 해서 이 친구에게 주문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친구도 나와 같이 전후의 베이비붐 세대이니 당연히 종이 책에 대한 향수가 있다. 다만 서점을 시작하기 전에 복사기 회사에 근무했던 경력이 있어서 나보다 전자책이나 디지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도 굳이 사연을 찾는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어쩌면 종이 책을 다루는 서점이 사양길을 걷게 되어 이 친구가 한가한 시간이 많은 것을 내가 아니까, 퇴직 후에 자주 들르게 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4학년 때라고 기억하고 있다. 두 살 아래 동생과 방에서 씨름을 하다가 내 다리 뼈에 금이 갔던 모양이다. 동네 병원에 가서 기브스를 했다. 1960년대 중반이었던 그 때는 의술과 의료장비가 요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해서 치료기간이 오래 걸렸다. 두 달 동안 학교에 못 가고 집에 혼자 누워 있는 동안에 심심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동네 집집마다 책을 빌려오다가 학교 도서관, 만화 가게, 나중에는 아버지께서 헌책방에 다니면서 위인전기집이나 더 어려운 책도 사다 주신 것 같다. 물론 요즘처럼 제대로 독서지도를 받았다면 독후감도 쓰고 했을 터인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머리 속에 남아있는 것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이 개월 후에 기적이 일어났다. 어머니 등에 업혀가거나 아버지 자전거에 실려서 학교에 다시 갔을 때 경상북도 전체에서 같은 학년끼리 경쟁하는 일제고사가 있었다. 평균 점수 89점으로 전교 2등을 한 것이다. 한 학급에 60명 이상이니 남학생 다섯 반, 여힉생 다섯 반, 10 학급이면 600명이 넘는데 말이다. 사실 내가 다치기 전에는 성적이 우리 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에 불과했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 때 담임 선생님께서 우리 집에 오셔서 아버지께 “아이가 전교 2등을 했으니 막걸리 한 말 내셔야죠?” 오래 전에 돌아가시고 지금은 계시지 않지만 그 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은 “내 아이 평소 성적을 내가 아는데 이건 소가 뒤로 걷다가 뒷발에 쥐 잡은 격이니 막걸리 못 내겠소.” 다시 담임 선생님께서 “아니, 컨닝한 것도 아닌데 윷으로 가나 모로 가나 서울만 가면 안 되능교?” 하셔서 아버지께서는 결국 막걸리 한 말 내고 한 턱 쏘신 걸로 기억된다. 나도 한때는 서점을 경영하고 싶었다. ‘서점을 하면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겠지?’ 물론 어림없는 소리라는 걸 이젠 알았다. 지금 서점을 하고 있는 친구가 책을 읽는 시간이 늘어난 걸 보면 장사가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시간이 있을 때 자주 들르는 편인데 손님이 없다면서 주 5일제 근무하고 토요일은 문을 닫을까 생각 중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적어도 당분간은 멀리 가버린 사건이 생겼다. 내가 서점을 방문한 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아직 시간이 이른데 문상을 가기 위해 일찍 문 닫을 준비를 하다가 건물 벽 틈으로 물이 새는 것을 보았다. 3년 전에도 주말에 2층에서 수도가 얼어 터져 월요일 출근해보니 서점 전체가 물바다가 된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옆집 수도 계량기가 얼어 터졌다고 한다. 이걸 못보고 그냥 갔더라면 그 날의 악몽이 재현될 상황이다. 상수도 사업국에 신고를 하니 올 겨울 극심한 한파로 이런 신고가 밀려 내일이라야 보수공사를 하러 올 수 있다고 했다. 사정을 자세히 말했더니 바로 출동해서 새지만 않도록 임시조처를 취해주고 갔단다. 내일은 일요일이지만 보수공사를 제대로 하는지 확인하러 와야 한다. 신경이 쓰여 마음 놓고 쉬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잠인들 제대로 잘 수 있겠는가? 책읽기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책을 팔아야 생활을 할 수 있는 서점을 경영한다면 이렇게 편히 책을 읽기는 어려운 법이다. 책읽기를 좋아한 것도 상당한 이유가 되겠지만 평생을 국어교사로 근무하고 퇴직을 하니 집에 쌓인 책이 엄청나다. 물론 욕심 때문에 사 두었더라도 읽지 못하고 꽂아둔 채 먼지만 앉은 책이 수두룩하다. 게다가 스스로는 제대로 글도 쓰지 않으면서 가입한 문인 단체에서 낸 기관지나 동인지, 그리고 소속된 시인과 작가들이 보내준 책들이 다 읽지도 못한 채 쌓여있다. 더욱이 오랫동안 이사를 다니지 않아서 포화상태인 책들을 이제는 어느 정도 처분해야 새로운 공간이 생긴다. 자주 쓰지 않는 물건은 버려야 한다. 필요할 때 새로 사는 한이 있더라도 버려야 한다. 책은 더욱 그렇다. 읽고 싶지만 책이 없는 사람에게 주거나 도서관에 기증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혹여 급히 찾아볼 일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 때문에 책을 쉽게 버리지도 못한다. 사실은 그것도 인터넷 검색하면 간단히 해결된다고 우리말 큰 사전이나 원색대백과사전 종류는 이미 다 버렸다. 책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내게 딸이 권한 책은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이었다. 이 책을 사서 읽은 후에 내가 내린 결론은 버리지 않는 한 정리하기 어렵다. 그런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의 문제가 정말 어렵다. 책을 버리기 위해 다시 책을 한 권 사서 우리 집 책은 또 한 권이 늘어난 것이다. 이런 현실에 놓인 내게 딸은 이렇게 말했다. “책을 손에 들고 가슴에 울림이 오지 않는 책이나 한 달 이내에 꼭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책은 다 버리세요.” 실제로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다 잊어버리고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면 안 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또한 읽을 때는 공감했다 하더라도 그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별로 효율성은 없는 셈이다. 더욱이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처럼 너무 많은 책을 읽은 사람들 중에 우유부단(優柔不斷)한 분들이 많다거나 지식인의 나약함을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 오히려 책을 읽지 않아서 단순노동을 생업(生業)으로 선택한 사람들 중에서 소신이 뚜렷하고 간단명료(簡單明瞭)한 행동철학을 가진 사람이 많다. 지식(知識)보다는 지혜(智惠)가 필요한 대목이다. 이제 눈도 침침하고 집중력도 떨어져 책읽기도 쉽지 않다. 어떤 분들은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니 말하는 것보다 듣는 시간을 많이 가지라고 한다. 더욱이 이가 상했다는 것은 젊을 때 이가 튼튼할 때보다 음식을 덜 먹으라는 것이고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은 그만큼 덜 보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혜택을 받아서 이를 치료하고, 덜 움직이면서도 많이 먹으니 배만 나온다. 그 뿐인가, 읽어도 실천하지 않으면서 필자는 아직도 부지런히 책을 사 모으고 있다. “직업도 없이 연금으로 사는 사람이 무슨 책을 그렇게 사다 날라요? 꼭 봐야 할 책이 있으면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면 되지 않아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집사람의 목소리다. 김불출 ; 본명 김우출. 1987년 ‘영주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1997년 ‘작지만 큰 이야기(고래출판사)’ 공저. 1999년 ‘월간 문학세계’ 수필 신인상 당선. 한국작가회의 대구·경북지회 회원 계간 영주문화 편집위원 E메일: k82115@hanmail.net  
632 탱자나무 울타리 속의 사랑/박래녀 file
편집자
1243 2018-03-01
탱자나무 울타리 속의 사랑 1. “간다.” 언니의 책가방이 탱자나무 울타리 위를 휙 날아와 내 앞에 떨어졌다. 길바닥에 패대기쳐진 책가방을 챙겨 뒤를 돌아보자 하늘에서 휙 날아와 내 뒤에 사뿐히 서는 사람은 호랑나비였다. 두 갈래 땋은 머리는 어깨에 찰랑거렸고, 칼라에 청색 띠를 두른 세라복 윗도리에 180도 퍼진 청색 교복 치마를 입은 언니는 장골 키 두 배는 되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장대 하나만 있으면 가볍게 휙휙 뛰어 넘었다. 교복 밑에 하얀 체육복 바지를 입은 언니는 땅에 발을 딛자마자 체육복 바지를 벗어 책가방 안에 쑤셔 넣으며 소리 쳤다. “이 굼벵아, 빨리 뛰라니까 뭐해?” 언니는 내 손을 낚아채어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탱자울타리를 뒤돌아봤다. 한껏 구부러졌던 장대가 탱자울타리를 치며 튕겨나가 마당에 떨어졌다. 우당탕 떨어지는 소리가 경쾌하고 맑았다. 대문을 열고 나온 아버지는 커다란 몽둥이를 손에 들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참새들이 일제히 조잘대기 시작하자 탱자 가시 사이에 핀 상아빛 탱자 꽃이 저희들끼리 낄낄거리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2. 우리 집은 사방이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었다. 삼천 평이 넘는 산비탈은 벚나무, 소나무, 목련나무, 은행나무, 사철나무, 장미, 소철 등 크고 작은, 흔하고, 귀한 관상수가 빼곡하게 심어져 있었다. 그 넓은 나무숲을 가꾸는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늘 일군들과 밭 매고, 거름 내는 일로 하루를 열고, 하루를 닫았다. 아버지는 뭘 하는 사람이었을까? 까짓 말단 공무원이었다. 공무원은 번드레한 겉치레고, 정작 하는 일은 새 여자 바꾸어가며 새 살림 차리기였다. 지금도 언니와 동갑나기 딸이 있는 과수댁과 눈이 맞아 한 살림 차렸다는 소문이다. 아버지는 여자가 생기면 아예 집에 발걸음도 하지 않다가 돈이 궁하면 집으로 기어들었다. 나무를 판다거나, 땅 문서 한 장 손에 쥘 때까지 우리 집 가장 노릇을 했다. 어제 저녁에 집에 온 아버지는 밤새도록 어머니를 달달 볶았다. 그 삼천 평 중에 백 평이라도 팔자는 소리였다. 어머니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삼천 평은 아버지 혼자 맘대로 처리할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외할아버지께서 당신의 고명딸에게 넘겨 준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S시에서 집을 몇 채나 가졌던 재산가의 아들이었고, 어머니 역시 C시에서 내 노라 하는 재산가의 딸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정략결혼을 했다. 어머니의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어머니는 그 꿈을 접고 스무 살 꽃띠에 시집을 왔다. 어머니는 시집오면서 자신의 손때가 묻은 피아노를 싣고 왔다. 아버지의 눈 밖에 난 것은 어쩌면 그 피아노 때문은 아니었을까. 지금도 ‘솔베이지의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르며 피아노를 치는 어머니를 보면 슬픔이 울컥 치밀곤 한다. 어머니는 나이 오십이 넘어도 여전히 꿈을 꾸었다. 책과 피아노 밖에 몰랐던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열등의식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책보다 노는 쪽으로 발달했으니 얌전하게 책 속에 빠져 있거나 피아노를 치고 있는 아내가 부담스러웠을지 모른다. 어려서 아버지가 없는 날은 어머니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우리는 곧잘 노래를 부르며 행복했다. 우리 집 딸들은 다들 피아노를 잘 친다. 어머니의 개인지도 덕이다. 어쨌든, 고생이라곤 모르던 어머니가 시집 와서 고생길로 접어든 것은 아버지의 바람기였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아내에게 마음을 붙이지 못했던가 보다. 더구나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대를 이을 고추를 원했지만 우리는 줄줄이 조개만 달고 태어났다. 그것도 연년 생으로 5공주가 된 것이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 했듯이 아버지의 바람기는 대를 이을 아들을 얻자는데 있었다. 여자가 바뀔 때마다 재산은 줄어들었고, 살림에 대해선 아예 관심도 두지 않는 아버지 덕에 다섯 채가 넘던 기와집은 막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남의 것이 되어버렸고, 전세방으로 나 앉게 된 딸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외할아버지는 S시 외각에 있는 다랑이 삼천 평을 사서 아담한 가정집과 창고 한 채, 다랑이마다 관상수를 심어 우리 가족을 옮겨 살게 해 주셨다. 덕분에 어머니의 뽀얗고 길던 손가락은 대나무 뿌리처럼 굵고 튼실한 농부의 손이 되었다. 그 손으로 피아노를 치며 속울음을 삼키던 어머니를 본 적이 많다. 그러나 아버지의 바람기는 갈수록 도가 지나쳤고, 우리가 어릴 때는 어머니께 손찌검도 예사로 했다. 아버지는 봉급을 받아도 생활비를 내 놓을 줄 몰랐다. 오입질하기에도 모자랐으니 어머니는 딸 다섯 먹이고 입히기 위해 외갓집에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돈을 몰랐다. 어려서부터 쓸 줄만 알았지 벌 줄은 모르고 자랐으니 그 씀씀이가 헤플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아버지는 학교 다닐 때도 공부보다 연애질 하는 것으로 농땡이 상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다. 할머니는 아버지대신 학교에 기부금을 왕창왕창 냈다고 했다. 아버지는 돈으로 졸업장을 받은 셈이다. S시의 농림보통 전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대에 갔다 온 아버지는 잠시 동안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했다. 집에 돈만 축내고 빈둥거리자니 돈도 궁했고, 연애 사업도 어려웠다. 아버지는 괜찮은 직장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공무원이 제일 나은 직업 같았다. 검사, 판사, 등 사자 붙은 직업이 최고였지만 공무원이란 직업도 여자들에겐 인기 만점이었다. 아버지는 머리 나쁜 부잣집 아들이란 딱지를 뗄 욕심으로 공무원 시험에 매달렸다. 운이 좋았던지 5급, 지금 9급에 해당하는 말단 공무원 시험에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그 시절 공무원이라면 대학 감투가 부럽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우리 아들이 과거에 급제 했다’고 돼지를 몇 마리나 잡아 동네잔치를 걸판지게 벌릴 정도였다. 그러나 문제는 마음에도 없는 장가를 들면서였다. ‘내 인생의 목표는 멋진 연애를 하면서 인생을 만끽하는 거다.’ 하면서 총각시절을 보낼 작정으로 꿈에 부풀었던 스물 네 살의 아버지, 공무원 발령을 받자마자 할아버지는 사주단자를 신부 집에 보냈다. “오래 전부터 니한테는 정혼자가 있었다. 인자 평생 묵고 살 직장도 잡았으니 내가 안심하고 니 혼인을 서두르기로 했다. 그라고, 아무래도 내가 올해를 못 넘길상 싶다. 니 장개 드는 것 보고 죽을란다. 만약 니가 장개를 못 들겠다모 내가 가진 재산을 전부 사회에 기부하겠다.” 결국 아버지는 결혼을 했다. 할아버지는 거짓말처럼 이듬해 돌아가시고 그 많은 재산이 고스란히 아버지 몫이 되었다. 아버지는 간덩이가 부어 버렸다. 집에 마누라가 있거나 말거나 신나게 총각 행세를 하면서 밖으로 나돌았다. 아버지의 그 헤픈 씀씀이에 할머니는 집 한 채가 남의 손에 넘어갈 때마다 속을 태우더니 “니가 아들을 못 낳아 준께 저 것이 밖으로만 도는 기라.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거늘. 쯧쯧 그래 가지고 남정네 건사 하긴 진작에 걸렀다. 나도 인자 아들 없는 셈 치고 살란다. 연락도 하지 말고, 찾지도 말거라. 내 몫 챙겨 갖고 절에 의탁해 살든가 할란다. 이런 저런 꼬라지 인자 안 보고 살고 싶다. 너거는 너거 알아서 살거라.” 하시면서 할머니는 자기 몫의 재산을 챙겨 떠나버렸다. 소문에는 영감 얻어 갔다지만 꼭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 년에 한두 번 명절 때면 집에 들리곤 하는데 늘 염주를 주렁주렁 걸고, 회색 법복 차림이니 아무래도 절에 의탁하여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집을 떠나자 완전 자유방임이 되었다. 간섭할 사람이 아무도 없자 아예 두 살림 하는 것을 숨기지도 않았다. 젊은 여자랑 살림을 차리고 살다가 여자가 떨어지거나 돈이 떨어지거나, 아버지 자신이 여자가 싫어질 때면 잠시 집으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다시 새로운 여자 꿰 차고 나갔다. 어머니는 그 때마다 딸 하나를 더 안아야 했다. 어쩌자고 한숨만 쉬면서 그런 아버지를 말릴 생각도 않는지 기가 막힐 따름이다. 내가 아는 아버지의 여자만 해도 열 손가락이 다 찰 지경인데도 이상한 것은 그렇게 여러 여자를 거느려도 아들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 여자든 아들만 낳았다 하면 어머니와 당장 이혼하고 새 장가 들겠다고 호언하는 아버지건만 어찌된 셈인지 아들을 낳았다고 찾아오는 여자는 없었다. 딸 때문에 울화병을 앓던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어머니 앞으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삼천 평 밭을 절대로 아버지가 손을 댈 수 없도록 했다. 외삼촌의 동의가 있기 전엔 팔 수 없는 물건으로 묶어 둔 것이었다. 그러니 아버지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애가 탔다. 그 삼천 평은 돈 덩어리였다. S도시가 커 가면서 도시 인근에 있는 산비탈은 전원주택지로 인기가 높아졌다. 우리 집 인근이 알짜배기 주택지로 부각되자 부동산업자들이 눈독을 들였다. 우리 집은 전원주택이나 전망 좋은 아파트를 지을 장소로는 적격이었다. 앞이 확 터인 전망뿐이 아니다. 멀리 도도하게 흐르는 푸른 강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하룻밤 자고나면 땅값이 눈뭉치처럼 불어났다. 아버지는 돈이 필요했다. 나이 오십 줄에 앉자 돈이 없으면 여자도 오래 붙어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젊은 여자든, 늙은 여자든, 돈, 돈, 돈이면 만사형통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어머니를 구워삶아 그 노른자위 땅을 팔아 자기 잇속을 챙겨야 했다. 그러나 수십 년을 당해 온 어머니도 만만찮았다. 젊어서야 어떻게든 아버지 마음을 돌려보려고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했지만 ‘저 화상 저 병은 다리에 힘이 빠져야 없어질 병이니 고칠 재간이 없는 기라.’ 하시면서 체념한 후로는 아버지가 어떤 사탕발림을 해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아니잖소. 구야한테 물어보소.’ 하면서 슬쩍 외삼촌 핑계를 댈 뿐이다. 아버지가 아무리 화를 내도 나사가 풀린 여자처럼, 그저 사람 좋은 얼굴로 웃기만 할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고, 화도 내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가 온 날은 어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머니는 우리들을 아래채 창고 방으로 내몰았다. 위채는 어머니와 아버지 차지가 되었다. 우리 역시 눈이 빛났다. 공부벌레인 막내만 빼고는 대환영이었다. 우리는 화투짝을 돌렸다. 막내는 언니들 틈에서 숙제도 못한다면서 부엌방에 떨어졌다가도 슬그머니 우리 사이에 끼어들곤 했다. 일단 우리끼리 모이면 신바람이 났다. 더 좋은 것은 옆방에서 밤새도록 끙끙대는 어머니의 신음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었다. 아래채 창고는 일꾼들을 위해 만든 방이었다. 방 하나에 농기계를 넣어 두는 창고가 딸린 집으로 밭 가운데 있었다. 일꾼들이 옷을 갈아입고, 간단하게 몸을 씻을 수 있는 방으로 만든 것이었지만 우리들의 놀이방이기도 했다. “엄마가 몇 번째 까무러치디?” 둘째 언니는 짓궂게 물었다. 중학생인 막내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눈을 흘겼다. “괜찮아, 너도 그 정도는 알만한 나이잖아. 그런데. 너희들 신기하지 않니? 저치가 젊은 년한테 진을 다 빼서 힘도 없을 텐데. 녹용이라도 마시고 왔나? 그런데 말이야. 신기한 건 우리 엄마야, 이젠 늙은 여우라니까. 전에는 저치 자고 가면 통장 째 내 줬잖아. 그런데. 며칠을 구슬려도 안 넘어가니 저치의 속이 탈 수밖에.”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패나 돌려 엉가.” 불쌍한 아버지, 언니와 동생들이 냉대하는 아버지지만 나는 그 아버지를 볼 때마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젊어서 고생 모르고 살던 사람이 어쩌다 저 지경이 됐는지. 아내와 딸들에게 대우 받지 못하고 자신의 집보다 떠내기처럼 이 여자, 저 여자 집으로 전전하다가 돈이 궁해지면 어쩔 수 없이 돌아와 헛기침 하면서 눈치 보는 아버지. 아버지도 속이 탈 것이다. 아버지의 여자는 자꾸만 돈 가져오라 조를 테지, 직장에선 명퇴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은근히 압력을 가하지. 퇴직금은 이미 대출 받아 바닥이 났지. 나 외에는 딸들이 아버지 취급도 하지 않는 집으로 돌아오기는 죽기보다 싫을 것이고, 어쨌든 늙은 아내보다 탱탱한 삼십 대 과부의 살맛이 더 좋을 테니. 그렇지만 돈줄을 쥐고 있는 사람은 본처라 아버지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 어떻게든 아내를 구워삶아 돈을 챙겨 가야 첩이 알랑방귀를 뀌며 콧소리를 낼 수 있고 밥상이 달라진다. 그러니 인두겁을 쓴 인간이라 해도 어쩌겠는가. 본처에게 돌아와 아내를 구워삶으려고 안간힘을 쓸 수밖에.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면 일단 엄마를 잠자리에서 잡았다. 그래도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폭력으로 나갔다. 폭력도 당사자가 피해버리면 딸들에게 풀었다. 이제 딸들조차 그가 오면 상대를 하지 않았다. 피해버렸다. 아버지는 어머니께 딸 자식들 교육을 잘못 시켰다고 난동을 부리지만 어머니는 묵묵부답이었다. 딸들이 머리가 굵어지면서 그 집에 아버지 자리는 없었다. 특히 아버지 성질을 그대로 물러 받은 언니가 둘째였다. 언니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절대로. 처치였다. 당신이었다. 왜 우리 집에 오느냐고 당신 집 아니니 발걸음 하면 도둑으로 신고 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것도 둘째 언니였다. 언니는 어려서부터 태권도를 배웠다. 여고생일 때 사범 자격증을 땄다. 이미 태권도로 단련된 주먹이니 아버지께 호락호락 당하지도 않았다. 단지 어머니 때문에 참았다. 아버지는 둘째 언니를 겁내면서 어머니께 하던 폭력을 멈추었다. “당신 한 번만 더 우리 엄마에게 손찌검 했다가는 병신 될 줄 알아.” 그랬다. 둘째 언니가 중학교 3학 년 때였지 싶다. 그날도 아버지는 오랜만에 찾아와 어머니께 저금통장 내 주지 않는다고 손찌검을 했다. 언니의 2단 발차기가 바로 들어가 아버지의 턱을 강타했던 것이다. 그 후로 언니가 있는 앞에서는 절대로 어머니께 손찌검을 하지 못했다. 대신 어머니께 폭언을 하는 것이었다. 말끝마다 ‘애비도 모르는 딸년들’이라며 아비를 아비로 대우해 주지 않는 것은 어머니 탓이라고 했다. 또한 둘 째 언니에게 태권도 가르쳤다고 야단치는 것이었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부터 난다더니 그 짝이라며 도장에 못 나가게 하라고 야단쳤지만 그럴수록 언니의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은 더 강하고 집요했다. 아버지가 오신 날은 보란 듯이 태권 도복을 입고 마당가에서 으랏차차! 하면서 운동을 했다. 그런 언니를 보며 아버지는 ‘에미가 지 남편을 우습게 보니 가시나들도 저 모양이이라’고 어머니를 몰아세웠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오신 날은 도복 입고 마당에서 운동을 못하게 했지만 소용없었다. 보란 듯이 장대를 짚고 어른 키 보다 높은 탱자나무 울타리를 멋지게 뛰어넘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밤새도록 어머니를 녹이려고 애썼지만 어머니는 넘어가지 않았다. 아침이 밝았다. 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자 아버지는 어머니를 방에서 못 나가게 붙잡고 앉아 딸들을 걸고 넘어졌다. 딸들이 아비를 본척만척 하니 집에 들어오려다가 도로 나간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밖으로 도는 것은 모두 어머니와 딸들 때문이라 했다. 특히 둘째 언니 때문이라 했다. 아버지를 팬 불효막심한 년이라는 것이다. 부엌방에서 아침을 먹던 둘째언니가 그 소리를 들었다. 언니는 당장 안방 문을 열어 젖혔다. “아저씨, 인자 고마 당신 집에나 가이소. 출근 해야지 예. 그래야 그 여자가 밥이라도 줄 거 아닙니까?” “아니 저것이. 또?” 아버지는 언니에게 옆에 있던 담배 재떨이를 날렸다. 날렵하게 피한 언니는 피식 웃으며 “눈에 멍 자국 또 만들어서 출근 하실라고 예?” “저 저것이 말하는 본새 보소. 이기 다 니 년 탓이다.” 아버지는 옆에 있는 어머니께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쳤다. “이봐요. 아저씨, 존 말 할 때 가시죠. 내 봉이 우는데.” 언니는 잽싸게 축담 옆에 챙겨 두었던 대나무 봉을 들고 왔다. 여차하면 한 대 갈기겠다는 뜻으로 대나무 봉을 만지작거리며 아버지의 거동을 살폈다. “이녀러 가시나가 애비한테 몽디를 디밀어? 내가 참자 참자했지만 갈수록 가관이네. 오데 애비한테 말끝마다 아저씨라니. 내가 너거 학교 교장 선생님 찾아가서 애비에미도 모르는 천하에 망나니 겉은 년이니께 퇴학시키라고 할 끼다.” “누구 맘대로? 지 얼굴에 똥 묻히는 짓도 인자 서슴지 않겠다 이 말이지?” “나도 동장 찾아가서 김 아무개가 이런 사람인데 모가지 안 자르냐고 하냐고. 학교 가서 그 년 머리끄덩이에 불을 확 싸질러버리던가 중대가리 만들어 놓고 너거 집에 있는 그 아저씨 때문이다. 함서 반쯤 죽도록 패 놓던가. 도장 머스마들 불러서 걸레 맹글어 놓던가 하모 우짤 긴교?” 빙글빙글 웃으면서 아버지의 속을 뒤집는 것에 선수인 언니는 그래도 장골인 아버지께 잡혔다 하면 힘을 못 쓴다는 것을 아니까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복장거리를 시켰다. “가시나를 조따우로 갈카 놓고. 당신은 집에서 뭐 하는 사람이야? 학교 당장 때려치우고 시집이나 보내. 옛날 같으면 시집가서 아 에미가 되고도 남을 년을.” 아버지의 화살은 다시 어머니에게 쏟아졌다. “아저씨, 우리 옴마한테 또 손댔다가는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자 가시죠. 미칭개이 아저씨.” “뭐라꼬? 저것이 죽을라꼬 환장을 했나. 뭐? 지 애비보고 미칭게이? 이 년아, 가서 문 짱가라. 저 가시나 버릇을 좀 고쳐 봐야 것다.” 아버지는 옆에 앉은 어머니를 향해 손을 올렸다. 뺨이라도 한 대 올려 부칠 참이었지만 “우리 옴마한테 손찌검만 해 봐라. 무슨 꼴 나는지.” 언니의 차가운 한 마디에 아버지는 얼이 빠진 얼굴로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렸다. “옴마, 내 학교 갔다가 그년 집에 들어가 난리굿판을 맹글어 놓고 올게 예. 학교 가다가 경찰서에 들려 가정 폭력범으로 이 아저씨 고발하고 갈낑께네 혹 주먹질 하모 맞고 있을소. 감옥에다 확 차 넣어삐낑께네.” 언니가 눈짓을 했다. 나는 슬그머니 가방을 챙겼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오늘 내가 저 년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놔야겠다.” 아버지도 단단히 화가 나셨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소매를 걷어 올리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당신도 퍼뜩 출근하소. 숙아, 니도 아부지한테 그라모 못 쓴다. 잘못 했다고 빌고 너거들 퍼뜩 가거라. 머 하노? 학교 늦을라.” 애가 탄 어머니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나는 슬그머니 내 가방만 챙겨 현관문을 열고나오며 이런 저런 꼴 안 보고 혼자 지낼 수 있는 큰 언니가 한없이 부러웠다. 큰 언니는 고등학교 졸업 후에 외삼촌이 경영하는 공장의 경리로 취직하여 C시로 떠나고 없었다. 동생들은 눈치껏 아침을 챙겨 먹고 이미 학교에 가고 없었다. 나는 대문 앞에서 언니가 나오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에서 언니의 악 쓰는 소리가 들리고,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탱자울타리를 넘었다. 오금이 저렸다. 나는 원래 겁이 많았다. 둘째 언니처럼 당당하고 싶지만 모두 나를 보면 바람 불면 날아갈까 겁난다는 이야기를 했다. 여고 2학년이면서 덩치는 초등학생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나에 비해 둘째 언니는 큰 편이었다. 여고 3학년인 언니는 몸매도 잘 빠진데다 얼굴도 이국적으로 생겼다. 곱상한 어머니와 선이 굵은 아버지의 잘 생긴 부분만 닮은 것 같았다. 성격도 똑 부러지고, 활달해서 언니를 보면 잘 익은 알밤 같았다. 언니는 초등학교 때부터 태권도로 단련된 몸이라 날렵했고, 2단 발차기는 태권도 도장의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아이고오!” 집안에서 갑자기 아버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언니가 또 일 저질렀구나 싶어 뒷걸음치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울타리를 넘어오고, 언니의 말대꾸도 골을 울렸다. “저것이 또 애비를 쳐? 이년 잡히기만 해 봐라. 다리 몽뎅이를 분질러 놓을 끼다.” “옴마, 학교 댕겨 오겠습니다. 저 아저씨한테 맞았는지 난중에 확인할 끼다. 우리 옴마 한대라도 팼다간 당신, 감옥 갈 줄 알아라. 다시는 우리 집에 얼씬도 하지 말란 말이야.” 우탕탕! 언니의 뜀박질 소리가 들리더니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서 언니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간다.” 언니의 책가방이 탱자나무 울타리 위를 휙 날아와 내 앞에 떨어졌다. 길바닥에 패대기쳐진 책가방을 챙겨 뒤를 돌아보자 하늘에서 휙 날아와 내 뒤에 사뿐히 서는 사람은 호랑나비였다. 두 갈래 땋은 머리는 어깨에 찰랑거렸고, 칼라에 청색 띠를 두른 세라복 윗도리에 180도 퍼진 청색 교복 치마를 입은 언니는 장골 키 두 배는 되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장대 하나만 있으면 가볍게 휙휙 뛰어 넘었다. 교복 밑에 하얀 체육복 바지를 입은 언니는 땅에 발을 딛자마자 체육복 바지를 벗어 책가방 안에 쑤셔 넣으며 소리 쳤다. “이 굼벵아, 빨리 뛰라니까 뭐해?” 언니는 내 손을 낚아채어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탱자울타리를 뒤돌아봤다. 한껏 구부러졌던 장대가 탱자울타리를 치며 튕겨나가 마당에 우탕탕 떨어지는 소리 경쾌하고 맑았다. 대문을 열고 나온 아버지는 커다란 몽둥이를 손에 잡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참새들이 일제히 조잘대기 시작하자 탱자 가시 사이에 핀 상아빛 탱자 꽃이 저희들끼리 낄낄거리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3. 한참을 달리다가 골목으로 꺾여 내려가는 아랫녘에 서서 우리 집을 돌아봤다. 아버지는 아직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대문간에 서 계셨다. “바보야, 또 넋 빠졌어? 들고 뛰어. 지각이란 말이야. 저 영감탱이 약발 받았다니까.”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딸에게 혼이 난 아버지가 풀 죽은 모습으로 대문간에 서 있었다. “엉가, 제발 아부지한테 너무 그라지 마라.” “내가 좀 심하긴 했지? 안 그래야지 하다가도 옴마한테 와서 하는 걸 보면 속이 확 뒤집힌다니까.” “엉가가 하는 걸 보모 아부지랑 똑 같애. 닮았단 말이야.” “나도 알아. 그러니 더 속상해. 곱게 좀 늙어주면 어디가 덧나나? 이젠 정신 좀 차리고 집으로 들어오면 좀 좋아. 또 돈 뜯어 나갈 궁리하니 더 밉지.” “아부지 소리도 안하면서, 집에 들어 오모 받아줄 끼가?” “당근이지. 하는 거 봐서 아부지, 아부지 함서 애교도 살살 부려 볼 텐데. 우리도 좀 아부지 사랑 받으며 살 날 있었으면 좋겠다. 니도 그렇제?” “아부지 보고 엉가가 그렇게 말해 보라모. 이번에 보이께 아부지도 많이 늙었더라. 남자들은 늙으모 집에 들어오고 싶어진다매. 엉가가 좀 살갑게 굴어봐라. 맘 고쳐 묵을지 모르잖아.” “몰라. 그나저나 굼벵이 니 땜에 또 지각이다.” 우리는 서로 손을 꼭 잡고 산비탈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멀리 푸른 강에서 물안개가 살살 피어올랐다. 오늘 하루가 참 따뜻할 것 같다.  
631 Y 외1편/차영호 file
편집자
1361 2018-03-01
Y 내가 사는 길목마다 니 몸내 나지 않는 곳 있을까 마음 속 체 눈을 더 성긴 것으로 바꾸어도 헛일 얼기미에조차 얼금 얼금 걸리니…… 상괭이*도 너끈히 삐져나갈 만큼 코가 큰 그물로 교체하여야겠다 물밑바닥 암초에 걸려 추 다 떨어지고 찢어진 그물이 풍력발전기 날개처럼 너풀거리는데 속살 속살 걸려 올라오는 목소리 목성 골짜기 깊숙하게 말을 숨겨도 저만치 안개 낀 성간星間에서 하늘 하늘 훌라후프 돌리는 허리 사랑의 흔적은 지울수록 푸른 바다에서 작살에 찔린 물고기 피같이 붉게 번져서 아직은 가본 적 없는 우주모퉁이 어디쯤 니 그림자 어룽이지 않는 곳 없을까 * 쇠돌고래 수평선 모텔 바로 코앞에서 바다가 남실거리는 방에 흰긴수염고래랑 함께 든 적 있지 둘이 팔베개하고 초근초근 겹주름위에 쟁여두었던 말씀들을 되새김질할 때 나이롱 화투장 팔 껍데기 같은 바다 위를 낮게 숨죽여 나는 낯선 건반 검은 해령을 가로질러 바다 몰래 바다 깊이 가라앉는 그 음계의 죽지를 겨냥하여 낚시채비는 내가 날리고 너는 손톱을 또각또각 젖몸살하는 동공 속 파도 어느 이랑에선가 솟구쳐 오를 악상 니 눈썹처럼 휜 수평선 저 너머 그랜드피아노 한 대 둥둥 화물선처럼 떠 있겠지 차영호 (車榮浩) 1986년 《내륙문학》으로 작품 활동. (사)우리시회원. 시집 『어제 내린 비를 오늘 맞는다』, 『애기앉은부채』, 『바람과 똥』 등  
630 1시간 40분이라고 안내자는 말했습니다 외1편/조재학 file
편집자
1285 2018-03-01
1시간 40분이라고 안내자는 말했습니다 유족대기실로 유족들이 옮아갑니다 화면에 글자만 지나가고 있습니다 화면에도 글자만 지나가고 있습니다 화면에만 글자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화장중화장중화장중화장중화장중화장중화장중화장중 수골대기수골대기수골대기수골대기수골대기수골대기 아기의 방 창밖이 컴컴해지고 때 아닌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진다 행인들은 낯선 집 처마 밑에 서거나 고개 숙이고 달려가고 그 때 나무는 번쩍 더 높이 팔을 들었을 것이다 늙은 나무뿌리 같은 손이 잠든 아기를 가만가만 도닥인다 아기는 천둥소리도 못 듣고 빗소리도 못 듣고 꽃이 가득한 풀밭을 날아만 다니고 머리 밑에 송송 땀을 피우며 날아다니고 어디에서 낙타는 와서 아기는 낙타를 타고앉아 낙타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몸을 흔들며 꺅 꺅 소리를 지르고 자는 아기가 번쩍 눈을 뜬다 으앙 울음이 터지려는데 늙은 나무뿌리 같은 손이 눈뜬 아기의 마음을 가만가만 도닥인다 아기는 스르륵 눈을 감고 노란 꽃 속으로 들어가고 꽃 속에서 노란 나비 떼가 날아오르고 나비 등에 탄 아기도 날아오르고 햇살을 만지며 노란 빛알을 만지며 하나님 얼굴을 만지며 하나님 목을 타고 앉아 하나님 머리카락을 붙잡고 몸을 흔들며 꺅 꺅 소리를 지르고 자는 아기가 번쩍 눈을 뜬다 벌떡 일어나 기어나간다 늙은 나무뿌리 같은 손이 아기를 들어 안아서 꼭 안아서 도닥도닥하면 아기는 다시 눈을 감고 잠 속으로 들어가고 어디서 무지개는 달려오고 무지개를 타고 앉고 무지개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몸을 흔들고 꺅 꺅 소리를 지르고 아기는  
629 스노우 볼 외1편/안민 file
편집자
1474 2018-03-01
스노우 볼 안민 국경도시 위로 궤도를 이탈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 몸은 욕망과 순수만이 혼재되었을 뿐이었다. 구원 없이 작곡된 레퀴엠처럼. 내상을 입고 피 흘리는 눈동자 곁, 흰 꽃들이 수북하 게 피어 있었다. 계절을 지운 식물의 비밀 에 관해 염려하지 않았다. 이국의 음률로 채색된 불빛들, 좌표를 잃은 것도 그곳에 흘러든 것도 포즈에 불과했다. 허공의 방, 밀폐 내부의 또 다른 밀폐. 기억 하고 있었지만, 기억을 잃어버린 처음이 적주赤酒 속에 담겨 일렁거렸다 한 번도 의지로 겨울을 설계한 적 없어요. 월경한 이들에 의해 엎질러진 풍경, 다친 꽃은 여전히 줄기 속을 흐르며 욕망했지만 태엽은 통증을 감고 있었고 눈보라는 그치지 않았고 음악이 다 풀리면 태엽이 멈춰야 했지만 그녀는 금세 녹아버릴 눈꽃 모양 위태했다. 흐린 날 눈빛처럼 아득하던 적주赤酒. 유리에 부딪히는 눈을 바라보다 고독도 모아 태우면 저렇게 흩날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갈빗대 사이에 박힌 고드름. 음률이 와류를 일으켰지만 침묵은 계속되었고 투시되지 못한 불빛만이 국경을 건너고 있었다. 엎질러진 사연은 증발하지 않는다는 지문이 심장 근처를 스쳐갔는데… 새벽녘, 나는 유체처럼 외부였다. 문득 돌아본 저편, 힘없이 흔들리는 손이 보였다. 인적 하나 없는 희뿌연 원형 속에서 알레그로–55b번 다 단조 91. 01. 어느 구간 눈 펑펑 내리는 흐린 허공에 짓눌려 나는 죽었 다 단조 02. 00. 어느 구간 차가운 스모그 알갱이에 뒤엉켜 나는 또 죽었 다 단조 16. 05. 어느 구간 아무도 없는 새벽 공터, 음률의 삼각 날을 맞고 흰 피를 뿌리며 나는 다시 죽어야만 했고 독하게 끊었던 담배를 독하게 다시 피웠 다 아- 쿵쿵쿵 함몰하는구나 나는, 그랬 다 난 세 번이나 죽었으므로 유령이 다 아- 이히히히 당신은 유령이 웃는 걸 본 적 있는가? 웃음을 생선회 썰듯 썰면 지난 시간이 보일 거다 이히히히 그래에, 펄럭대는구나 하양이다 검정이다 음통이 다 아- 내 웃음은 고음처럼 히득거리고 히히 헉헉 히히 헉헉거리 다 아- 나는 퇴고도 되지 못한 채 모든 음표를 죄다 잃었다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사막 바깥은 오로지 자신의 내면이듯 기억과 또 어떤 기억과 회상하기 싫은 기억과 온몸으로 떨쳐내려는 기억의 바깥이 나의 내부이다 나는 밀려오는 기억을 태우고 또 태워버리지만 나는 이히히히 유령이기에 기억에 매몰되어 기억에 감금되어 기억을 횡단해야 하고 모든 통각이 우수수 피는 곳에 던져져야 하고 내 발바닥 은 더 이상 그림자를 키우지 않아야 한다 이히히히 흐느적거리는 내 몸은 그림자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생도 뭐도 더는 나에게 어떤 수작도 부리지 않고 ****************** 프로필 . 본명 안병호 . 경남 김해 출생 . 2010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 부산 작가회의 회원 . e-메일: dominiko8@hanmail.net  
628 네 계절의 사내 2 외1편/이승호 file
편집자
1632 2018-03-01
네 계절의 사내 2 나 기쁨을 원하거늘 언제든 잠시 울음이 그친 언덕 위에서 갖가지 음률로 뒤섞인 새들의 노랫소리 다시 들려오리니 내가 어떤 세대나 시대에 속하든 한 생명체로서 기쁨에 젖게 하는 음악을 듣고 있으면 지난 노동이 온전히 나를 한 인간으로 만들려 했다면 하루 종일 해안가의 작은 숲과 모래사장과 수수한 마을길을 걸으며 나는 또 다른 기쁨을 맛보려고 그러나 광인들의 맥박은 불덩이를 던지며 나를 향해 울려오느니 바다여, 내 기쁨과 두려움 가운데 우뚝한 자여 오늘은 너의 대지 위로 비가 쏟아지는구나! 네 광활함 뒤에 숨어있는 어떤 의지가 저 붉은 빗줄기들을 다 감싸 안으려는 것처럼. 도로아미타불 그날 밤도 큰스님 옆에서 잠을 자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어찌할 수 없어 아뿔싸,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이 알대가리 중놈이 이리 마음이 넓은가 무량수전 한 채는 너끈히 짓겠구나 큰스님은 제자의 행각이 늘 미더웠지만 세상을 떠돌다 오너라고 내쫓았다 어린 스님은 돌투성이 산길을 내려오다 쏟아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큰스님, 세상에 이보다 더 재밌는 말이 어디 있어요 보름 전쯤 저잣거리로 탁발을 나갔다가 ‘털보지물’ 앞에 이르렀는데 거기서부터 시작한 웃음이 산중까지 따라와 문득 문득 그러나 질긴 웃음이 고약하게 도로아미타불! 이승호 춘천 출생. 2003년 『창작21』등단. 시집『어느 겨울을 지나며』『행복에게 바친 숱한 거짓말』외. 이메일 nacham1@hanmail.net  
627 걸신/이원준 file
편집자
1301 2018-01-31
걸 신 ‘아, 배고파서 안 되겠어.’ 과자를 챙겨오지 못한 불찰에 화가 치밀었다. 근무 중에는 물론 퇴근 후의 비상식량이었는데 서두르다 깜박했던 것이다. 노란 치즈크림을 품고 있는 그것이 자꾸만 아른거려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정우가 급히 차를 세운 곳은 집을 불과 이백여 미터 앞둔 중학교 정문 근처였다. 종종 그래왔듯이 단골 분식집에 들어가 대충 요기를 할 작정이었다. 도저히 아내가 기다리고 있을 식탁 앞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허기에는 늘 고통이 뒤따랐다. 이번만은 사력을 다해 견뎌내고자 스스로를 다그쳤다. 신혼의 아내에게 미안했던 마음을 오늘만큼은 덜어내고 싶었다. 기필코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앉아 오랜 만에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내리라. 다짐과는 달리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극도의 배고픔이었다. 이내 쓰리고 쑤시는 통증으로 변해갔다. 조금만 참으면 아내가 차려주는 저녁밥과 마주할 수 있었지만 또 한계에 이르고 만 것이다. 어질어질하고 팔다리가 후들거려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언제 괴성을 지르며 폭발할지 몰라 똥끝이 다 탔다. 퇴근길 분식집 출입은 꽤 오래 지속돼온 일과였다. 학창시절 하굣길 역시 그랬다는 고백에 아내도 어느 정도 이해하는 눈치였다. 실은 어쩔 수 없는 남편의 성격 탓에 포기를 해버린 결과일지 모른다. 연애시절보다 더 비만해져 백 킬로그램을 훌쩍 넘긴 정우는 먹는 일에 간섭을 하면 흥분하기 일쑤였다. “아줌마, 참치김밥 두 줄 빨리요.” 가장 빠르게 나오는 김밥의 주문은 이미 자연스러운 일이 돼버렸다. 잠시 후 김밥이 오자 손으로 두 개를 덥석 집었다. 그것을 우적우적 씹으며 한손으로 젓가락을 챙기고 다른 손으로는 어묵국물을 그릇째 들어 마셨다. 단 한 번 체하거나 소화불량에 걸린 적 없다는 사실이 새삼 뿌듯하게 여겨졌다. 정신없이 김밥을 해치운 정우의 입가에 시물시물 미소가 묻어났다. 반배부른, 그래서 약간 아쉬운 상태였지만 안도감이 나머지를 채워주었다. 그래서일까, 다급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은근히 경쟁의식 아래 서로 곁눈질을 하고 있는 입사동기의 이죽대던 입이 먼저 스쳤다. “배고픈 게 그렇게 참기 힘들어? 당장의 욕구충족이 불행을 불러올 수도 있다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잖아. 거울에 비친 몸을 좀 봐. 이제 막 결혼도 한 사람이 그게 무슨 무책임한 자기관리야. 지난번 검진 때 당뇨에 고혈압에 고지혈증까지 삼관왕으로 장난 아니었다며. 그런데도 왜 근무시간에 몰래 빠져나가 군것질을 하고 서랍에 숨겨놓고 야금거리느냐고. 화장실에 앉아서까지 핸드폰으로 인터넷 개인방송 먹방인가를 본다며. 허, 결국 정신력 문제 아니겠어?” 걱정으로 포장했지만 속에 든 비아냥거림이 선명히 보였다. 그런 상태로 저와 경쟁이나 되겠느냐는 조소가 숨겨져 있으리라. 그 은밀한 속내를 내비치듯 언젠가 회식자리에서 취기 앞세워 건네 온 말이 있었다. “넌 주변 사람들이 아니라 너 자신 때문에 패배할 거야. 가장 회복하기 힘든 패배. 만약 감당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얼마든지 내키는 대로 살라고. 근데 말이야, 방종이 지나치면 젊은 육체를 늙게 만든다는 말이 있거든. 여섯 살이나 어린 와이프는 어쩔 겨?” 그 대목에서 주먹을 날려주려다 겨우 주머니에 감췄다. 사실 정우도 정상궤도에서 벗어난 식습관으로 몸 관리가 엉망이라는 점을 모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 원하면 언제든지 먹을거리가 앞에 놓여졌다. 그것들을 만끽하는 외아들에게서 부모의 흐뭇함은 커져갔다. 나중에는 부모의 기쁨을 위해서라도 식탐을 부리다보니 일상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어김없이 두 시간 간격으로 찾아오는 심한 공복감에 지치고 짜증이 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 일은 없지 않은가. 과자와 빵을 사달라고 손 벌린 적도 없다. 순전히 자력으로 조달하여 해결하고 있는데 왜 눈에 쌍심지를 켜는지 분통이 터졌다. 정말 위기가 닥친다면 그때 관리하면 되지 않겠는가. 정우는 어차피 먹자고 사는 인생, 승진과 출세도 식후경이라며 쩝 입맛을 다셨다. 입구 쪽에 마주앉아있는 두 사람도 비로소 눈에 띄었다. 허기를 부여잡고 들어올 때는 미처 몰랐는데, 일흔 살이 넘었을 할머니 앞에 삼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추레한 차림의 사내가 속 빈 배낭처럼 앉아있었다. 차츰 그들이 조성해 놓은 어색한 풍경이 거슬렸다. 사내만 허겁지겁 먹어대고 있었다. 김밥은 물론 방금 앞에 놓인 라면마저 독식하는 모습에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허, 나보다 더한 인간이네. 어머니뻘 되는 노인네를 앞에 두고 혼자 걸신 든 것처럼 굴다니!’ 정우는 식식거리며 그를 향해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다. 순간 기다리고 있을 아내가 떠올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면의 유혹을 이겨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얼큰한 국물에 적신 김밥의 별미가 뒷덜미를 잡았어도 과감히 뿌리치고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휴대전화를 꺼내 식탁의 상황점검만은 빼놓지 않았다. “나 지금 집 앞인데 곧바로 밥 먹을 수 있지?” 그 소리에 사내가 흠칫하며 정우의 불룩한 배를 힐끔거렸다. 할머니가 말없이 단무지 접시를 밀어주자 자세를 고쳐 잡으면서도 떨떨한 표정을 쉽게 못 벗었다. 아내 대답에 반색한 정우가 눈으로 재빨리 사내의 라면그릇에서 한 젓가락 건져냈을 때였다. “국물도 마시면서 들어요. 그러다 체하면 어쩌려고.” 할머니의 말투가 예사롭지 않게 들려왔다. “네. 그나저나 또 저 혼자만···.” 두 사람의 대화가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지갑을 꺼내려던 정우는 머춤한 채 그들의 대화에 귀를 주었다. “난 집에 가서 대충 한술 뜨면 되니 염려 말아요. 하루 한두 끼가 전부일 텐데 매번 이런 바깥음식이라 미안해요. 집에 식구가 없고 일을 다니느라 마땅한 반찬 하나 해놓지 못하는 통에.” “무슨 말씀이세요. 늘 제가 죄송하고 고맙죠. 덕분에 다음 주면 다시 일을 나갈 수 있게 됐어요. 월급 타면 그땐 제가 대접해 드릴 게요. 이웃에 산다는 인연으로 그동안 굶지 않게 해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다친 몸 추스르며 잘 버텨왔어요. 나쁜 길로 가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 덕분에 다시 일을 하게 됐으니 천만다행이에요.” 밖으로 나온 정우는 잠시 길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서 걸음을 떼지 못했다. 처음 경험하는 전율에 시달렸다. 가슴에서 출발한 떨림 하나가 순식간에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갑자기 들이마신 겨울 찬바람 탓만은 아닌 듯싶었다. 명치 쪽이 둔해지면서 무언가 턱 하고 걸리는 느낌이 뒤따랐다. 차를 세워놓은 곳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그 부위를 연신 쓸어내렸다. “꺼억, 꺼억···.” 예사롭지 않은 트림이 이어졌다. 참치의 비릿함이 다른 날과는 달리 역겹게 치밀었다. 김밥의 밥알들마저 일제히 날카로운 쇳조각이 되어 위벽을 온통 난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장 숨이 멎을 듯 답답함이 심해졌다. 차 문을 열려던 정우가 휘청거렸다. 차창에 비친 얼굴이 낯설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여전히 흐리멍덩한 제 모습을 보던 정우의 입에서 신음 같은 한마디가 새어나왔다. “너···.” * 이원준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1991년 《현대시세계》로 등단한 시인, 소설가. 《흔들림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한 모습이다》 《김오랑》 《김구》 《이상》 《권정생》 《노먼 베순》 《넬슨 만델라》 《정약용의 편지》 《조선왕들의 속마음》 《누가 조선의 영의정인가》 외  
626 그녀가 나를 내려다봅니다 /美山정경해 file
편집자
1299 2018-01-31
그녀가 나를 내려다봅니다 쉿, 발자국 소리가 들립니다. 종종거리면서도 묵직한 걸 보니 그녀인가 봅니다. 기분 좋게 한 발 내딛던 나는 멈칫합니다. 저기 하얀 우산을 쓰고 그녀가 서 있네요. 토닥토닥 소리가 들립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우산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비가 제법 내리는 새벽인데도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집을 나섰나봅니다. 그녀는 나에게 오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어쩌면 나의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걸 느낍니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그 눈빛을 보면 알 수 있거든요. 나는 그녀가 오기를 은근히 기다립니다. 그녀가 나를 내려다봅니다. 그녀의 생각을 읽어봅니다. ‘오늘은 어떤 빛깔일까. 폭우가 내린 직후처럼 탁하지는 않겠지. 비가 내리고 있지만 흐리지는 않겠지. 그가 품는 모래알과 풀잎은 어떤 표정일까. 방긋 웃어줄까. 아님 몸을 살살 흔들며 싱그럽게 일렁일까.’ 그녀는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궁금하다는 표정입니다. 그녀의 생각에 장단을 맞추듯 나는 말갛게 씻은 얼굴을 내보입니다. 아직은 약간의 큼큼한 냄새를 풍기지만 그래도 신이 납니다. 빗방울을 맞으면서도 흥얼거리며 노래가 저절로 나옵니다. 그녀가 나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요.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네요. 다행스럽다는 표정입니다. 오늘은 그녀의 얼굴이 밝습니다. 그녀의 얼굴빛은 매번 다릅니다. 어떤 날은 걱정스러웠고, 또 어떤 날은 신기했습니다. 흐뭇한 표정이 되기도 했고, 암울한 표정이 될 적도 있지요. 그런가하면 귀여워 못살겠다는 표정을 지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때는 저 혼자 웃곤 하지요. 더러는 울상을 지을 때도 있어요. 하지만 오늘처럼 밝은 표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녀는 기분에 따라 표정이 변합니다. 어쩌면 그녀의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주로 나의 모습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밝은 얼굴로 나에게 와서도 내가 칙칙하거나 어두운 빛깔을 띠면 그녀도 덩달아 칙칙하고 어두워지거든요. 그녀에게는 나를 바라보는 나름의 기준이 있나봅니다. 단순히 나의 빛깔만 바라보지는 않거든요. 그녀는 올 때마다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세세히 훑어봅니다. 내가 품지만 나를 받쳐주는 모래와 자갈을 보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풀잎을 보고, 간간이 날아와 먹이를 쪼는 백로와 오리 떼도 바라봅니다. 그녀는 그들을 통해 나의 몸 상태를 짐작합니다. 그 사실을 안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그녀의 표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되었지요. 나는 그녀를 십 수년째 보고 있습니다. 그녀는 새벽이나 초저녁에 주로 나를 찾아왔지요. 날짜를 정해놓은 것은 아닌 것 같아요. 틈틈이 나에게로 왔으니까요. 꼭 한가할 때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뭔가 바쁘게 보일 때도 있거든요. 하지만 나를 바라볼 때만큼은 여유로워 보입니다. 종종걸음으로 와서는 말없이 한참을 내려다 볼 때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녀가 우산을 접어 손에 든 것을 보니 어느새 비가 그쳤나봅니다. 그녀의 눈빛이 여전히 나에게 머물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편안한 마음이 되어 내 갈 길을 갑니다. 힘차게 내딛는 발걸음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낭떠러지 같은 계단을 만나네요. 솟구치는 몸을 다잡자마자 나를 가로막는 돌을 만났어요. 급히 휘돌아 나오며 숨을 몰아쉽니다. 잠시 평온한가했는데 쓰레기장 같은 곳이 불쑥 나타나네요. 공기 중에 떠돌던 온갖 불순물이 부유물로 둥둥 떠 있습니다. 아찔합니다. 세상으로 나오자마자 만나는 것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한발 내딛는 순간 요동을 칩니다. 흰 거품을 요란하게 일으키며 평정을 찾으려 애를 써 봅니다. 발을 딛자마자 거대한 바위를 만나 한차례 튀어 오르기도 합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물보라 한번 일으키고 말지만 그 충격은 대단하네요. 현기증이 일지만 눈을 질끈 감습니다. 새롭게 태어나서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으로 스며드는 첫발은 나나 사람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듯 나와 끊임없이 만나고 합쳐지는 수많은 물줄기가 그렇습니다. 크고 작은 물줄기를 만나 손을 잡고 점점 넓게 퍼져나갑니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넓은 바다에 가 닿게 되지요. 사실 내가 이렇게 새롭고 깨끗하게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동안 무수히 흔들리고 깎였습니다. 부딪고, 깨어지고, 상처를 입었습니다. 병든 몸을 치료하고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만만치는 않아요. 모질게 재활훈련을 하고 건강을 되찾기까지, 다시 세상을 품어 안기까지 갈등은 또 얼마나 많았게요. 지금에 와서는 그조차 큰 기쁨입니다. 나는 작은 먼지를, 모래를, 돌멩이를 쓰다듬었지요. 물고기와 헤엄을 치고, 물가의 풀숲을 어루만졌지요. 그렇게 점점 퍼져나가 들판을 아우르고 거대한 산을 품었습니다. 살짝 말하지만 나는 욕심 많고 이기적인 그녀도 끌어안았습니다.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서 어느 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그렇게 느꼈지요. 나의 몸은 짙으면서도 엷은 빛깔입니다. 이제 막 떠오른 태양도 그런 내 안에서 더욱 빛이 납니다. 나는 태양을 안고서야 맑은 물로 거듭날 것처럼 그를 품어 봅니다. 태양도 나와 한 몸을 이루었다는 듯 깊숙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가 지그시 눈을 감네요. 그런 다음 물빛을 받아 더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온몸으로 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쩌면 마음을 가다듬고 싶을 때 나를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온갖 생명을 아우르며 끊임없이 흐를 수밖에 없는 나를 바라보며 잠시 주저앉았던 자신을 되찾고 싶어서 굳이, 빗물정수장을 막 통과하는 나를 찾는 것인지도. 약력) 수필가 美山정경해 *경기 안성 출생 *수필집 『같은 빛깔로 물들어 간다는 것은』2008 『까치발 딛고』2011 『내 마음의 덧신』2016 *이메일 주소 : jeang120@hanmail.net  
625 사투(死鬪)를 벌이는 이유 외 1편/임영석 file
편집자
1548 2018-01-31
사투(死鬪)를 벌이는 이유 보석 하나를 만들어 파는 데도 수많은 사람이 사투를 벌인다 어느 사람은 땅을 파서 원석을 캐야 하고 어느 사람은 그 원석을 가공해야 하고 어느 사람은 진열장에 놓고 손님을 기다려야 하고 어느 사람을 거금을 들여 보석을 구입해야 한다 이 과정이 없다면 보석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비싼 값을 지불하고 보석을 손에 넣은 사람보다도 사투를 벌여 보석을 만들어왔던 사람들은 이미 눈동자 속에 귀한 보석 하나를 숨기고 산다 그 귀한 보석이 눈 속에 없다면 사투를 벌여서 보석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보석은 사투를 벌여 지켜내는 것이지 거금을 들여 사고파는 게 아니다 아이스크림은 왜 달콤한가?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기 위해서는 적정한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너무 뜨거우면 녹고 너무 차가우면 딱딱해서 아이스크림을 보관하는 냉장고가 필요한 것이다 평화도 아이스크림 같은 것이다 너무 뜨겁지 않고 너무 차갑지 않는 평화를 지켜내는 냉장고가 필요한 것이다 내가 슈퍼마켓을 자유롭게 달려가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먹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국방비*가 43조원이 들어간다 아이스크림이 달콤한 이유는 평화롭기 때문이다 *2018년 우리나라 국방비 예산은 43조 1581억원이 편성되었다 임영석 1961년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1985년 『현대시조』등단, 시집 『받아쓰기』외 5권, 시조집 『초승달을 보며』외 1권, 시론집 『미래를 개척하는 시인들』이 있고, 2011년 제1회 시조세계문학상과 2016년 제15회 천상병귀천문학상 우수상 등을 수상, 계간 스토리문학 부주간.  
624 동백에게 외 1편/하재영 file
편집자
1391 2018-01-31
동백에게 시린 바람의 숫돌은 거칠었다. 뿌리 하나하나 날카롭게 다듬으며 무딘 허공을 베고 벨 삶이 그러하듯 날 것인 생생한 언어 허공 가지에 얹혀두고 다시 불을 피우겠다며 붉은 피를 삼켰다. 봄으로 낮은 봄으로 들어서는 입구 치열함 곁에 두겠다고 다짐하는 동백의 문안 편지 다시 열 때 겨울 시린 바람은 시들어 가고 이월의 하늘로 눈은 녹으며 동백꽃 그 끝없는 핏물을 닦고 있다. 안개 늪 영하 십도 이상의 한파에 수도는 동파하지 않았는지 걱정하며 앞을 가리는 안개를 헤치며 시골로 가는 길에 청주 공항에 착륙할 베트남 다낭발 비행기가 일기불순으로 인천공항에 내렸다는 문자를 받았다. 짙은 안개 때문이라고 했다. 그날 난 청주에서 세상에서 처음으로 해외로 편지를 썼던 베트남으로 다낭에 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방전된 것 같은 오래 된 문자를 씹고 씹을 때 삼촌들이 총을 들고 목숨을 담보로 갔던 베트남은 가까웠다. 비뚤비뚤 당시 썼던 위문편지 그 나라에 도착했을지 궁금했다. 귀신도 잡는다는 무용담에 써늘했던 안개는 늪처럼 겨울을 등에 업고 며칠 추위를 견딜 다낭으로 나는 나를 전송하고 있었다. 하재영 199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작품집 ‘별빛의 길을 닦는 나무들’ 등 7feeling@hanmail.net  
623 작은 배, 수평선을 건너다 외 1편/이민숙 file
편집자
1449 2018-01-31
작은 배, 수평선을 건너다 작은 바람이 분다 작은 키스가 실려온다 작은 샘이 출렁이고 작은 그리움을 낳는 시간이 작은 항아리를 이고 온다 작은 새댁은 작은 새벽에 깨어 작은 오줌을 싸고 작은 콩을 넣은 작은 밥을 짓는다 작은 사랑방에 차린 밥상을 작은 거지들이 둘러앉아 작은 슬픔으로 한 숟갈 떠서 먹는데 작은 새 한 마리 작은 햇빛을 모아 찍! 똥을 갈기고 날아간다 작은 소리는 감미롭다 작은 귀가 작은 음표로 받아적은 작은 하루 작은 거지의 작은 딸이 작은 배고픔을 찍어 작은 동화를 쓴다 작은 동화의 작은 주인공은 오늘! 지금! 너와 나! 작아서 금세 사라질 것들에게 첫사랑의 옷을 입혔다 첫사랑은 작고 갑자기 태어난다 첫사랑은 작고 갑자기 황홀하다 첫사랑의 배가 수평선을 건너간다 작은 등대가 깜박거린다 작은 불안이 작은 눈을 찡긋 윙크한다 작아지고 작아지는 생, 화안하다! 입동, 은행나무 빗살무늬 토기를 살짝 건드리며 노래하던 은행나무가 말했어요 내 이파리는 오줌방울이야 메마른 대지를 가만히 적셔주고 싶어 부엉이 눈빛으로 레일 위를 빠르게 굴러오는 겨울이 어둠을 톡톡 두드리며 걸어올 때 철로 아래엔 레드 카펫이 펼쳐지네요 머리칼 붉은 여행객들은 배낭을 맨 채로 잠이 들었어요 언제나 캄캄 밤이었던 열세 살 소녀의 가슴 속 소설책이 오줌에 젖어 녹아내려요 끝없는 이야기, 밤마다! 어둠의 옷을 벗기네요 은행나무가 더 투명해진 눈빛으로 말했어요 내 오줌방울은 뼛속까지 내려가서 쓴 노란 잉큿빛 시야 “뼛속의 만남만이 디엔에이를 바꿀 수 있단다” 골수이식을 마친 후 파르랗게 수염을 쓰다듬던 아버지가 말했어요 너는 나의 뼈, 나는 너의 이슬방울, 나머지는 뮤즈의 살(肉), 우연이나 순수 드디어 야생고양이가 된 은행나무 이파리가 갸릉 갈갈 으스대는 마을 골목길 오줌에 젖은 시가 은행이파리 연필 되어 춤추고 쓰러지고 하늘엔 열일곱 소녀의 가슴속 달이 흰 눈을 꿈꾸듯 창백하게 환한 이민숙 약력 1998년 《사람의 깊이》에 ‘가족’외 5편의 시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나비 그리는 여자』『동그라미, 기어이 동그랗다』등이 있음. 여수 샘뿔인문학연구소에서 책읽기, 문학아카데미 프로그램 운영하고 있음.  
622 밤안개 외1편/서하 file
편집자
1363 2018-01-31
밤안개 묽은 미음만 드시던 형은 이제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풀어진 미음처럼 누군가 또 짖는다 그와 새끼손가락 걸었던 무언의 약속은 밤에 더 뚜렷해지고 무더기로 모인 저 울창한 소리, 참 어이없는 방류다 잔뜩 웅크린 귀는 안다 소리 없는 생애가 더 슬프게 짖는다는 걸 그건 이름 없는 별들이 전해주는 말이다 묶어둘 수 없는 삽살개처럼 언뜻언뜻 아득해지는, 눈을 반쯤 뜨고 보아도 네 허물보다 내 허물이 더 캄캄하잖아 막막한 나는 언제 철이 들지 안아줄 수도, 밀어낼 수도 없는 저 지극한 컹컹컹 소리가 없다 물의 마을 구름의 지느러미도 강의 치마폭에서는 잠시 쉬어간다 등 뒤의 햇살처럼 뭔가 풀리기 좋은 날, 양팔 벌려 반겨주는 오어사 원효교에서 물푸레나무 가지처럼 늘어져 한 바가지의 나를 놓아 준다 잉크처럼 풀어지며 달리는 미꾸라지, 젖은 가슴 속으로 더 적시는 나도 저렇게 풀릴 때 있을까? 물 속 마을이 출렁한다 관절 풀리는 저 마을에도 사계절이 자라는지, 동네 어귀 당나무 그늘이 있는 집에서는 닭이 알을 품고 종아리 드러낸 채 아장아장 걷는 햇살 순해진다 이리 와! 걱정 많은 엄마 같은 물이랑이 저 혼자 부푼다 먼데 종소리 달려온다 완창이다 강물이 젖은 허리 접었다 편다 산그림자도 욜랑욜랑 없는 꼬리를 흔든다 차르르 날 밝는 게 두려워 밤마다 가슴에 돌을 안고 잠 들었다는 당신 엉덩이 털며 일어서는 구름 이야기 다 알아듣지 못하지만 젖지도 않은 그림자는 처음처럼 새것이다 서 하(徐 河) ♧경북 영천 출생 ♧1999년 계간『시안』신인상 수상 ♧2010년 시집 『아주 작은 아침』시안 출판 ♧2015년 시집 『저 환한 어둠』시와표현 ♧2015년 『대구문학상』수상 ♧한국 시인협회 회원, 대구시협 이사, 대구문협 회원  
621 구름 외 1편 /손창기 file
편집자
1293 2018-01-31
구름 구름 한 뭉치를 어머니는 절구통에 넣고 있었다. 절구통에 있던 구름이 가끔 튀어 오르기도 했다. 자궁 속처럼 시간이 갈수록 구름은 잘 빻아졌다. 구름은 자기끼리 뭉치고 헤어지곤 했다. 흙담을 드나드는 안개처럼 몸속에서 물기가 맴돌았으면 했다. 잘 빻아진 구름이 햇살과 함께 증발하기 시작하자, 구름이 어머니의 물기를 빨아 들였다. 구름이 허파를 점점 조여들게 하더니 어머니를 삼켰다. 부지깽이 두드리며 장작불을 지피자 굴뚝이 연기를 마구 뿜어냈다. 연기 품은 구름이 점점 비대해지자 어머니를 내놓았다. 프라이팬에 깨를 볶듯이 마당에서 물방울이 춤을 추었다. 몸속에 물방울이 맺혀 어머니가 식구들에게 슬픔의 구간區間을 줄였는지 모른다. 입을 따다 그대의 갈고리를 넣어 입을 따 보라. 짠물이 나가도록 간이 알맞도록 박달대게, 홍게의 입을 따 보라. 사각의 찜통 안에서도 사지육신四肢六身이 떨어지지 않고 바탕이 설 테니 쿠싱한 냄새를 끌어당기는 김살은 도드라진 모서리를 갉아 먹고 있다. 배 한척이 섬의 입을 따고 들어간다. 배가 지나간 자리에 마블링이 끊어지지 않는다. 저 섬은 곧 삶기고 있는 중이다. 김살을 뿜어내 섬이 둥글어진다. 짠물이 몸에 가득하니 입을 따 보라. 섬 안에다 쟁기를 델 수 있을 테니 어떤 이유든지 입을 닫지 마라. 시퍼런 식칼로 객귀客鬼를 풀어낸 적 있어 사지 멀쩡하고 입에 밥알 들어간다. 약력> 손창기 - 경북 군위 출생. 200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달팽이 성자』가 있음. jangoyes@hanmail.net 주소> 경북 포항시 북구 우현동 우창서길 34번지 대동고등학교  
620 부활 외1편/심승혁 file
편집자
1611 2018-01-31
부활 노랗게 익어 가다가다 숲을 닮으려던 초록빛 젊음이 퍼런 서슬에 댕강 잘려왔다 바다에서 태어나 햇살로 키워진 저 짠내나는 투쟁의 것들이 쏟아지자 싱싱한 죽음이 하얀 숨을 몰아쉬는 몇 번의 자맥질로 풀이 죽어간다 이대로 부패일 리가 없다 돌아갈 수 없는 흙과 고난의 바다, 그 틈으로 발갛게 삭혀질 세월을 얹자 생생하게 발효될 아삭대는 숨을 불어 넣자 잊었던 새 맛의 삶을 기억해 낸 목울대가 침을 꼴깍이며 분주한 손길로 인공호흡 중이다 담금질 네 심장이 겨울 바다의 온도와 같아지면 내 그곳, 역동의 뜨거움을 두 손에 담아 열풍의 여름 바람처럼 던져주리라 얼어붙은 밤의 소리로 깨진 너의 파편은 내 붉도록 터져 나온 핏방울에 닿아 녹아든 하나의 심장으로 뛰게 될 테니 네 가슴마다에 태양의 바람이 불고 네 파편이 내 상처의 뜨거움과 같아지는 날, 더 이상은 차가울 리 없을 바다에 빠져 죽어도 좋을 우리로 만나게 되리라 문학광장 시부문 등단 문학광장 카페 부위원장 2017년 상주문학제 기념문집<우리는 하나> 참여 2017년 인천미술전람회 시화부문 특선, 입선  
619 안어울림소리 / 이양섭 file
편집자
1289 2018-01-01
안어울림소리 연기가 사라지며 향내를 퍼뜨리고 있다. 파르스레 피어오른 연기가 시간과 공간을 가르듯 하늘거리다 흩어진다. 염불소리는 천수경에서 회심곡으로 이어져 홀로 처연히 흐른다. 빈소에 셋, 접객실에 다섯, 괜히 사람 수를 세었다. 어머니 영정을 일별한다. 저 엷은 미소는 괜찮다는 걸까? 장례를 치르는 내내 되도록 아내와 부딪히지 않으려 한다. 잠시만 마주봐도 그냥 면상을 갈겨 버리고픈 마음을 눌러야 하기 때문이다. 아내는 재바르게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고 있다. 그나마 내가 고마워해야할 어섯이다. 나는 집안일 앞에 늘 그렇듯 멀뚱거리며 제 역할을 찾지 못한다. 저녁이 되어도 빈소는 발길 끊어진 겨울 산처럼 황량하다. 어머니는 겨울을 기다려 온 눈처럼 때를 만나 깊은 산골의 암자로 들어가려는 것 같다. 막상 이렇게 되고 떠올려보니, 어머니가 가고 싶다던 그 암자는 이 세상에 있는 절이 아닐지도 모른다 싶다. 접수대 뒤에 여동생이 퉁퉁 부은 얼굴로 벽에 기대어 앉았고, 그 곁에 딸애가 입구를 쳐다보며 앉아있다. 문이 열리고 찬 기운이 들어올 때마다 고개를 들어봐도 이쪽 빈소로 오는 사람은 없다. 염을 하고 입관을 할 때, 실제로 눈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울음이 길었던 사람은 여동생과 딸애 둘뿐이었다. 나는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도 술을 많이 먹었을 때처럼 끅끅거리기만 할뿐 곡소리는 좀체 나오지 않았다. 건성 눈물을 찍던 아내에 비해 서럽게 울어준 딸애에게 가당찮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딸애는 고3이었던 지난해에 학원은 고사하고 진학을 포기하라고 종용했었는데, 기어이 대학에 합격해 놓고 애비가 등록금을 만들지 못할까봐 눈물을 찔끔거렸었다. 대학에 들어가 꼬박 아르바이트를 했고, 내 생일에 지폐다발을 편지와 함께 몰래 넣어줘 나를 울렸다. 올해 고등학생이 된 아들놈은 이 와중에도 어느 구석에서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멀쩡히 가만있을 수도 없고, 딱히 할 짓도 없다. 그렇게 자고 싶었던 잠도 오지 않는다. 코딱지를 후비다가, 손끝에 걸리는 코털을 신경질적으로 뽑았다. 더럽게 아팠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멍히 어머니 사진을 보다가 불쑥 울음 같은 웃음을 흘린다. 좀 전에 집어넣었던 전화기를 다시 꺼낸다. 지독히 울리지 않는 전화기. 냅다 던져버리고 싶다. 절실히 누구에게라도 전화를 하고 싶은데, 상대를 떠올려 생각하면 할 수가 없다. 이럴 때 누군가 전화를 해주면 말 배우는 애처럼 떠듬거리며 울먹일 것 같은데, 아무도 그럴 기회를 주지 않는다. 갑작스레 상을 당하고 애써 여기저기 연락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단체나 모임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야간업소 딴따라인 직업상 아는 이들에게도 때가 때인지라 연락하기엔 염치가 없다. 건너편 접객실에는 어머니가 다니던 경로당의 회장, 총무 할머니 두 분이 와있고, 아내가 두 여인과 마주앉아 있다. 보험회사에 다니는 아내는 여러 모임에 나가지만 시어머니 장례를 알리지 않은 모양이다. 낮에 아내가 다니는 교회 사람들이 몰려와 예배와 찬송을 하려했을 때, 내가 길길이 큰소리로 말리자 동서 내외도 그 일행과 함께 가버렸다. 나는 대뜸 장례식장 측에 염불을 끊이지 않게 틀어달라고 했다. 음악을 좋아한다며 나를 따르던 아내는 이제 음악이 제일 징글징글해졌고, 언제부턴지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운구 할 사람, 연락 됐어요?” 아내가 빈소로 건너와 똑 같은 질문을 세 번째 한다. 내가 행사에 불려갔을 때, 제 일만 잘하겠다고 딱딱거리는 진행요원 같다. “아, 새벽에 일 끝나면 애들 올 거라고 했잖아! 왜 똑같은 말을 몇 번씩……” 퉁명스런 말투에 아내는 구시렁거리며 돌아선다. 사실 아내의 염려처럼 나는 애들과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냥 베이스와 오르간을 믿고 있을 뿐이다. 설사 일이 잘못되더라도 내 어머니의 주검을, 생판 모르는 사람을 사서 옮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똬리를 틀고 있다. 유리된 이 공간의 바깥은, 이제 크리스마스이브 열기도 얼마큼 가라앉고 있을 것이다. 평소 같으면 우리들도 일을 끝내고 한잔할 시간이다. 하필 크리스마스라니! 어머니의 시간은 정지되었을까? 어머니는 이제 연기와 냄새와 소리 따위로 이루어진 막의 저편에서 어떤 표정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어머니의 온갖 말투와 표정과 행동을 기억하지만,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아직은 어느 경계에서 서성이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제단 뒤로든 어디로든 뚫고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제단 왼편에 ‘미인비즈니스클럽 사장 변명구’라는 리본을 단 조화가 서있다. 양복상의를 허리 뒤로 젖히고 바지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폼으로 침을 찍찍 갈기는, 대머리에 땅딸막한 똥개의 얼굴이 떠올라 얼른 고개를 흔든다. 똥개 변 사장은 내게 빚을 지고 있는데 그는 채무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나는 그것을 받아낼 재간이 없다. 두 번이나 그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어머니 명의의 아파트를 처분했고, 결국 내 목숨 줄 같았던 사업체마저 팔아 넘겼다. 내 돈이 투자된 영업장을 처분해 다른 영업장을 인수하면서도 내 돈은 투자 실패로 날아갔다고 억지를 부렸다. 돈 벌면 갚겠다면서, 그때까지 밥그릇 걱정은 말라는 그놈과 나는 어정쩡하게 갑을관계가 되고 말았다. 혓바닥을 뽑고 기름 낀 배때기에 구멍을 내주고 싶었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잘라버릴 수도 없거니와 놈이 던져주는 일거리는 나를 따르는 식구들에게 당장의 밥줄이었다. “어머니! 제가 이 친구, 돈 벌게 해줄 겁니다. 저 없는 놈도 아니고, 믿어주세요! 이리 착한 친구가 잘 돼야죠, 제가 어머니를 일찍 잃어 외롭게 컸는데, 이참에 제 어머니가 되어주십시오!” 8년 전, 그의 제안에 어머니가 불안해한다고 하자, 49평이던 우리 아파트에 찾아와 똥개는 어머니 앞에 엎드려 그렇게 말했었다. 어머니는 표정 없이 시선을 피하며 잡힌 손을 빼려했다. 나중에 피를 말리는 시간들이 지나고 결국 셋방으로 옮겼을 때, 어머니는 끝까지 말리지 못한 자신을 탓했고 방관하던 아내는 원망이 깊어졌다. 가족을 감싸고 있던 보호막은 나의 욕심과 오판으로 어이없게 허물어졌다. 책임도 미안도 없는 똥개는 이미 나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개새끼라는 욕은 개에게 미안한 인간말짜새끼! 주먹을 불끈 쥐며 입술을 아프도록 깨문다. 그 옆 조화에는 ‘성일엔터테인먼트 단장 성도화’라고 리본이 달려있다. 5년 전, ‘정성일 연예기획실’이던 악단사무실을 국악 하던 도화가 인수했는데, 성만 빼고 이름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나를 각별히 따랐던 도화는 그때부터 야멸친 사업가로 변신하여 거꾸로 나를 부리고 있다. 10년을 함께 일군 팀은 흩어지고 우리의 터전은 내 이름과 함께 도화의 돈벌이 수단이 되었다. 딸애의 등록금 때문에 아내와 대판 싸우고,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끌다시피 결국 도화를 찾아갔다. 악기를 담보하겠다는 내게 도화의 조건은 엉뚱했다. 자기가 하자는 대로 군말 없이 다하면서 생각 없이 하루를 같이 보내자는 것이었다. 사랑한다는 도화의 군말에 물든 볼모의 몸은 엉뚱하게도 강한 욕정이 일어났다. 양수리 강물이 바라보이는 러브호텔에서 붉은 와인을 마시며 발가벗고 뒹구는 동안, 강물은 햇살에 반짝이다가 붉은 울음을 토하다가 캄캄해져 갔다. 낡아가는 서로의 육체를 탐하면서 도화는 도취되려 했고 나는 이율배반의 야릇한 비애에 젖었다. “오빠, 우리 그냥, 이렇게 사랑하면서 살면 안 돼? 가끔 이렇게 만나면서……” “넌, 이게 사랑이니? 풋! 이건 마지못한 달램이거나 갈증해소일 뿐이야.” “아니지, 오빠가 내 사랑도, 내 맘도 몰라주고, 날 사랑 안 해서 그런 거지.” “난, 이미 여자한테 질리기도 했지만, 셋방살이 꼴에 사랑은 무슨……” “그니까, 내가 하잔 대로 하면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잖아? 그 여리고 예민한 감수성을 무디고 뻔뻔하게 만들어야 해! 오늘처럼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우리 이벤트 회사 만들자! 오빤 음악하지 말고 영업하고 관리만 해. 내가 오빨 정말 사랑하니까 하는 말이야.” “그럼 너, 내 속에까지 들어와서 사랑할 자신 있니? 사랑 그거, 결국 이기심을 가리는 탈이야. 남자의 가슴앓이, 그 날선 상처마저 안아줄 여자는 없어! 착각의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지.” “세상에 오빠 마누라 같은 여자만 있는 줄 알아? 어찌 이리 여자의 진심을 모를까? 오빠가 그리 닫혀 있으니까 소통이 안 되는 거야.” “소통? 어떤 소통? 그래, 우리 일로 말해볼까? 무대에서 연주하는 사람은 자길 위해서기도 하지만, 아래에 있는 청중을 위해 연주하는 거야. 들으라고 하는 거야.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열광을 하지. 자기가 못하는 연주를 해주니까. 그런데 봐봐, 청중이 음악이 좋다고 무대에 막 올라오면 되겠어? 설령 올라온들, 그 무대 위의 뮤지션들과 어떻게 어울리겠어? 당장 리듬과 조화가 깨지고, 내려가지 않으면 쫓겨나지. 그러니까 무대와 객석 사이엔 막이 있는 거야. 막이 열렸을 때만 자기 자리에서 자기 역할로 소통하는 거지. 또한 막은 서로의 세계를 넘보는 경계야. 안 그래? 닫혀있는 나의 막을 네가 진정으로 연다면 소통이 되겠지.” 군말과 생각이 되레 많았던 그런 하루가 있었다. 왜 알토를 두고 18살이나 많은 남자의 재취가 되었냐고 묻자, 서로가 가진 것을 공유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알토는 병사한 아내에 대한 죄책감으로 힘들어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도화와 새 보금자리를 틀고 싶어 했다. 하지만 도화는 애초에 알토를 그럴만한 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도화가 재력가와 결혼을 하자 외려 알토가 사무실에 나오기를 꺼렸다. ‘형, 온갖 구석이 다 불합리하고 불협화음이야……’ 알토는 다시 힘들어 했지만 도화는 종내 알토에 대해 한 마디 말이 없었다. 시간이 사연들을 데리고 흘러갔다. 제단 오른쪽에 있는 조화에는 ‘기라성스탠드바 임직원 일동’이라고 붙어있다. 내가 악기를 들여놓고, 금빛 반짝이 무대의상을 입고 찍은 내 사진이 붙어있는, 변두리 중년층을 겨냥한 복고풍 스탠드바이다. 12개의 코너를 두고 정면에 무대와 춤출 공간을 배치했다. 그런 곳이라도 악단은 서로 들어가려 했다. 똥개의 소개가 있었지만 룸살롱 마담 출신의 사장은 나도 익히 아는 여자였다. 몇 년째 떠돌이 악사였던 나는 무엇보다 후배들과 마음 놓고 연습할 공간이 생겨 흥감했다. 멤버들과 자주 만나 연습하려는 욕심은 그룹사운드 때부터의 습관이지만 이제는 나이 때문에 느끼는 위기감이 컸다. 나날이 진화하는 기계음에 밀려나는 생음악은, 자칫 방심하면 달아날 애인이어서 자주 다독이고 안아줘야 하는 슬픈 사랑이었다. 가게는 순탄하지 않았다. 현수막을 걸고 알려진 연예인을 불러올 때는 썩 괜찮았지만, 고비용의 프로그램을 줄이자 대번에 손님이 줄기 시작했다. 나는 인맥을 동원하여 싼 값의 밤무대 애들을 불러 온갖 이벤트와 쇼를 시도하며 단골손님을 늘이려 애를 썼다. 마담은 내게 고마워하며 희망을 가지자고 했지만 나는 당장 애들에게 약속한 개런티를 채워 줄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바깥일을 늘려야 했고 도화의 일이든 똥개의 일이든 가릴 수가 없었다. 술이 한잔 당기지만 참기로 한다. 문득, 난 이제 고아가 되었다는 생각에 어깨가 더 처진다. “명아! 가서 업이 찾아 와! 이놈이 상주가 되어가지고 어디서 뭐해?” 부러 대나무 지팡이를 두드리며 졸고 있는 딸애에게 말한다. 좀 있으니 눈을 끔벅거리며 아들애가 들어와 넌지시 옆에 앉는다. 자정이 지나 한기를 느끼던 터라 애에게 덧입힐 게 없나 두리번거리다 그냥 슬쩍 끌어당겨 어깨를 감싸 안는다. 갑자기 입구 쪽이 소란해지더니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들어오는데 행색들이 가당찮다. 어깨아래까지 장발은 대부분이고 빨간 가죽점퍼를 입은 놈, 찢어진 청바지에 부츠를 신은 놈, 선글라스를 목에 건 놈, 입술에 쇠고리가 달린 놈을 포함해 7명이 우르르 올라와 두 줄로 선다. 거기다 나름 심각한 그들의 표정 또한 가관이다. 어쨌건 적막하기만 하던 빈소에 아연 활기가 살아난다. 동생이 옷매무세를 다듬으며 눈이 휘둥그레졌고 딸애는 아내를 부른다. 뒷줄에서 제각각 엉성한 자세로 절을 따라하는 애들을 보며 나는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형님. 애들이, 일류 선배님들 여기 계신다니까, 꼭 뵙고 싶다고 해서……” 드럼은 강남의 유명업소에서 일하며, 친구가 하는 음악학원 일도 도와주는 실력파다. 크리스마스이브라고 학원생들이 드럼이 일하는 업소에 모여 회식을 했고, 드럼이 가야한다니 졸라서 함께 온 것이었다. 조금 후에 오르간과 보컬이 함께 와서 어제처럼 어머니께 절을 올린다. 딸애가 음식을 차려놓은 접객실로 옮긴 애들은 빈소에서의 표정과는 딴판으로 스스럼없이 먹고 마시고 떠든다. 메리 크리스마스! 한 놈이 잔을 들며 얼결에 말했다가 주위 눈살에 고개를 팍 숙인다. 아내는 이쪽을 등지고 앉아 되도록 쳐다보지 않으려 한다. 자기 동료에게 내 직업을 곧이곧대로 말했을 리 없으니 이 이상한 문상객들을 뭐라 설명할까. 그보다 얘들로 아침에 운구를 시킬 작정인지 기가 막혀하는 아내의 걱정이 뒷모습에 어려 있다. 밤을 새워주신다던 경로당 할머니들도 일어나 애들을 힐끗거린다. 좁은 공간에 결코 섞일 수 없는 세 무리가 하나의 공통사로 자리하고 있다. 있으되 보이지 않는 막. 오르간의 어깨를 툭 치고 화장실로 간다. “연말행사 주문받은 일들, 애들 잘 맞춰졌냐?” “걱정 허덜 마소! 성님 이름에 금 가겐 안 할 텐게……. 참, 알토 성, 온다 했는디, 안 왔소?” “알토가 연락 됐냐? 강남 바닥, 오늘은 밤샘 영업할 텐데, 와 지겠냐……, 야, 올겐아, 똥개는 뭐라디? 온다는 말 없었냐?” “하따, 성님도 참. 아! 엄니헌티 죄 진 새끼가 여글 오것소? 아이고, 어째 우리 성님은 그 인간 같잖은 똥개한테만 쪽을 못 쓰까이?” “어떻게든 받아내야 될 거 아니냐? 울 엄마 피 같은 돈인데……” “성님, 처음 투자한 돈 받아낼 거라고, 우리 사무실 팔아 또 넣었자녀? 그라고 우찌 되었소?” “……, 세상엔 포기 못할 게 있다! 이걸 포기하면, 내가 그놈 죽일지도 몰라. 그럼 우린 어떻게 되겠냐?” 담배를 한 대씩 꼬나물고 소변기 앞에 나란히 서서 얘기를 나누다보니 또 눈물이 맺힌다. 화장실을 나오며 키가 작은 오르간이 팔을 높이 올려 키가 큰 퍼스트기타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건반 위에서 춤을 추는 그 손 위에 줄을 퉁기는 손이 얹어진다. 다시 한 번 입구가 소란해지더니 찬바람과 함께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선다. 베이스가 기라성의 사장과 직원들 사이에서 헤벌쭉 웃으며 허리를 굽실했다. 이번에는 짧은 치마에 키가 큰 여자들이 많아, 다시 졸다가 눈을 뜬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지배인과 웨이터들은 다 검은 양복을 입었다. 반품할 거라며 싸놓은 음식들을 풀고 아내까지도 분주하다. “좀 일찍 끝내고 오려는데, 글쎄, 손님들이 나가줘야 말이죠.” “아이구, 대목인데, 저 때문에 일찍 끝내셨네요, 사장님 못 오실 거라 생각했는데……” “당연히 와야죠. 어떡해요,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셔서…… 아, 참. 나중에라도 성 단장님 오실 거예요. 어쩌면 변 사장님 모시고 올지도 몰라요. 아까 통화했어요.” “아, 그랬어요? 고맙습니다. 자, 뭐 좀 드시죠. 여러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우리 어머니, 가시는 길이…… 그래요, 고마워요…….” 어머니 생각도 치밀었지만 도화가 내 마음을 알고 똥개를 끌고 오려 한다니, 고마워 눈물이 나려한다. 이제야 그나마 상갓집다워져서 서로 어울려 술잔을 주고받는다. 나도 덩달아 흔감하여 술을 받아먹고 권하기도 한다. 아내는 내가 술 먹는 꼴을 흘겨보겠지만, 아내의 염려보다도 똥개가 오기 전에 내가 술에 취할 수는 없다. 똥개가 온다면 설마 빈손으로 오지는 않을 것이다. “형님, 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데, 어머니 얘기 좀 해주세요. 많이 아프셨어요?” 주춤거리던 베이스가 느닷없이 말하자 좌중의 눈길이 나에게 쏠린다. 어떻게 말로 말할 수 있을까, 그 그림과 소리를. 그래, 똥개가 와서 어머니 앞에 엎드려 사죄를 하고, 이따 화장터에서 어머니의 몸이 연기가 되어 오를 때 도화가 살풀이 춤이라도 추어준다면, 나는 그만 어머니의 배를 놓아야 할 것이다. 내 가슴에 비끄러매어진 닻줄을 끊어주고 빈 배로 흘러가게 해야 한다. * 그날 아침 역시 밤새 일하고 맥없이 퇴근한 내게, 출근하는 아내는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당신이 업이 깨워 밥 먹게 해요! 학원 늦지 않게. 노인네가 어째 저리 아침잠이 많아질까? 좀 일찍 주무시면 될 텐데, 그놈의 텔레비전, 끝날 때까지 보시니 원…….” 밉살스런 말본새에 가려 말뜻을 채 헤아리지 못한 나는, 애를 깨워놓고 잠자리에 들면서 설핏 께름칙했다. 요 며칠 해 뜰 때에 맞춰 매일 하던 아침기도가 들리지 않았고, 아이를 깨우고 밥을 차려주는 모습이 전 같지 않았다. 양로원에 가고 싶다거나 꿈자리가 이상하다는 말도 들은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어머니가 어디가 아픈지, 자는지 잠깐이라도 확인을 해보지 않았을까? ‘어머니 몸이 안 좋으신가 봐요, 당신이 좀 챙기세요.’ 이렇게 말해 주었더라면 얼마나 고마웠을까? 아내가 어머니에 대해 말하는 본새에는 앙금이 있었다. 거기에 대꾸하자면 결국 내 아침잠만 망칠 테니 일체 대답을 하지 않는다. 며칠 남지 않은 12월은 마지막 날까지 바빠야 했다. 나는 쉬어야 했고 잠을 자야했다. 평소대로 어머니는 점심밥을 차려놓고 나를 깨울 것이고, 마주앉아 밥을 먹고, 어머니는 경로당으로 갈 것이고, 나는 가게로 나가 악기를 싣고 호텔 연회장으로 갈 것이었다. 내 또래들의 송년회에서 어린사람 행세를 하며 노래반주를 열심히 할 것이었다. 개런티 위에 얹어주는 팁보다도 행사가 일찍 끝나주어 야간행사 한 건을 더 뛸 수 있길 바랄 터였다. 그러고 가게로 가 취객의 흥을 돋우며 새벽까지 오부리(즉흥반주)로 푼돈벌이라도 해야 할 것이었다. 그래야 했다. 아래턱이 뒤뜰과 닿아있는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등지고 뒤뜰보다 낮은 침대에 누워 몸을 옹송그렸다. 나는 곧 잠으로 들어가는 막을 통과해 몸과 마음이 포근한 어둠에 잠겼다. 머리 위로 유리창을 흔들며 지나는 바람소리가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나는 아기가 되고 침대는 요람이 되어 일렁이며 현실을 떠나갔다. 너무 눈이 부셨다. 온통 반짝거리는 강물 위로 크고 작은 스팽글에 투사되고 어룽지는 무수한 빛살이 요동치고 있었다. 요람은 하얀 돛단배가 되어 바다로 흘러가고 있었다. 바다에는 완벽한 하모니로 어우러지는 소리들이 꼬리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변화무쌍한 빛의 안개 속에서 연주되는 그 소리는 보이는 음악이었다. 그 위 남빛 하늘에 구름이 층층이 계단을 만들고 있었다. 거기, 파르스레한 너울을 쓴 여인이 오르고 있었다. 누구일까? 나는 그녀를 불러야 하는데 도무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득하던 여인이 너울을 벗고 나를 보려는 순간,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몰아쳤고 돛단배가 세차게 흔들리며 나아가지지 않았다. 놀라 흠칫하며 눈을 떴다. 나는 양손으로 침대모서리를 꽉 잡고 있었다. 찬란하지 않은 한낮의 햇살이 빗각으로 들어와 오래된 장롱과 얼룩진 벽지를 더듬고 있었다. 이 무엇일까? 꿈도 현실도 아닌 시공의 틈 거기, 드리운 막이 스르르 나른한 심신을 휘감거나 풀어주는 몽롱한 순간, 결코 머물 수 없는 그곳에서 그때에 보인 4차원의 그림, 보이는 소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적요에 잠긴 집안. 거실에 놓인 접이식 침대에는 아들이 빠져나간 이불이, 벌레가 벗어놓은 고치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식탁은 애가 밥을 먹고 나간 그대로였다. 이어지는 이상한 느낌에 별안간 아침에 아내가 한 말이 겹쳐지자 섬쩍지근한 기운이 몸을 휘감으며 진저리가 쳐졌다. 경로당에 가지 않았으면 정좌를 하고 불경을 읽고 있을 어머니가 평소에 하던 일을 하지 않았다면 화가 많이 났다는 시위였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비어있는 딸애의 침대 아래 좁은 바닥, 언제나 그 자리에 어머니는 자고 있었다. 머리맡에 놓인 불경, 안약, 혈압약봉지, 천장을 향해 바로 누운 자세, 무엇 하나 다르지 않았다. 휴-, 안도의 한숨을 쉬고 돌아서려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짐과 동시에 어떤 소리가 들렸다. 우우우우웅웅웅웅…… 정수리로 들어오는 미세한 진동소리. 그리고 가늘고 희미한 낯선 냄새가 있었다. 그것은 알아 챌 수 없는 소리와 냄새였는데 나는 느꼈고, 이어 차갑고 날카로운 섬광이 등줄기를 타고 뒤통수를 쳤다. 나는 엉거주춤 비틀거리며 엄마-? 불러보았다. 목소리는 천번만번 되울리며 내 귓전에서 맴돌았다. 엄마아아아~ 그 울림을 지우려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사방이 굉음과 함께 빙빙 돌아가고 머리가 터질 듯 윙윙거렸다. 틀니를 뺀 어머니의 입술은 안으로 말려들어 함몰되어 있었다. 입이 벌어진 동그란 구멍은 무저갱의 입구처럼 보였다. 저 속으로 무엇이 들어갔을까? 엄마는 도대체 왜 이러고 있을까? 나는 싸울 듯 거세게 달려들었다. “안 돼! 아직 안 돼, 엄마! 일어나 봐, 얼른!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엄마, 엄마아!” 뺨을 비비고 눈꺼풀을 뒤집어보고 입김을 불어넣고 가슴을 치고 흔들어보다가, 맥없이 쓰러져 어머니 곁에 누웠다. 손은 차가웠고 방바닥이 차진 않는데 이불 속에 한기가 돌았다. 나는 어머니의 팔을 붙들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가는 거야, 엄마? 소원 푸셨네, 맨날 자는 길에 가게 해달라고 빌어 쌓더니…… 난, 어쩌라고? 응, 엄마? 이제, 내 소원은 어떡해…….” 몸이 마구 떨려왔다. 눈물과 콧물이 마냥 흘러내려 어머니의 옷과 요를 적셨다. 어딘가로 전화를 해야 할 텐데, 아무 짓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팔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점점 심하게 떨리던 내 몸도 자꾸 오그라들며 조금씩 굳어가고 있었다. 바퀴벌레 두 마리가 어머니의 목과 뺨을 오르내리다 사라졌다. 어머니의 몸은 오래 된 배였다. 세월의 강은 얼어 있었다. 어머니는 마지막 힘을 다해 얼음을 깨며 서쪽 강어귀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닻줄을 그러쥐고 있는 나를 외면한 채. 나는 세상에 태어난 이래 가장 무서운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빨이 마구 덜덜거렸다. 아득한 시간이 지난 후,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학원에서 온 모양이었다. * 기라성 사장이 통화하던 휴대폰을 쭈뼛쭈뼛 내게 내민다. 제기랄! 도화가 아니었다. 똥개의 지나치게 큰 목소리는, 음악소리와 남녀가 뒤섞인 술좌석의 소음 때문일 것이다. - 아, 정 실장! 내가 꼭 가봐야 되는데 말이야. 지금 중요한 약속에 와있어서, 하, 이거 참, 어머님께 정말 미안하지만, 정 실장한테 좋은 일일 수 있으니 좀 이해해 주소. 아! 실은 내 친구가 이번에 카바레를 개업한다고 악단 문제로 만났는데, 내가 정 실장을 적극 밀고 있어요. 능글맞은 똥개의 말에 대번에 부아가 치미는데, 감도 좋은 전화기의 저편에서 ‘나, 여기 있단 말 하지 마, 오빠.’하는 도화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심호흡을 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한다. “예에, 변 사장님. 그 마음 압니다, 꽃도 보내주시고, 네네, 근데, 도화가 거기 같이 있어요?” - 누구? 아, 성도화! 성 단장이야 요새 우리 가게 자주 오지. 몰랐나? 성일에서 우리 가게 스페어 대기로 했거든. 아, 성 단장도 같이 얘기 잘하고 있으니, 계약되면 한 턱 낼 준비나 하소. 나는 터져 나오려는 욕과 울분을 삼키며 잠시 숨을 고르고 목소리를 더 낮추었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래요, 잘되면 좋겠네요. 도화에게도 걱정 말고, 우리 애들 일이나 많이 만들라고 전해 주십시오. 예, 그럼.” 전화기를 돌려주고, 나에게 쏟아지는 마뜩찮은 시선들을 애써 외면하며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흘기던 눈길을 거둔 오르간과 베이스가 혀를 차며 술을 따랐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서서히 무너져 바닥에 꼬꾸라졌다. 발인제를 지내고 영구차가 출발할 때까지도 술이 채 깨지 않아 넋 나간 사람처럼 움직였다. 하늘이 잔뜩 내려와 사위는 온통 잿빛이었다. 오르간의 차를 앞세운 영구차는 미로 같은 길을 따라 도시를 벗어났다. 알토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비와 섞여오던 싸락눈이 함박눈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영구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물방울이 사선으로 흐트러지는 차창에 머리를 쿵쿵 찧고 있었다. - 형, 나 좀 취했어, 추워서 차안에서 혼자 막 마셨어. 미안해…… 어제, 나 혼자서라도 갔어야 했는데, 그 연놈, 데려가려다 일이 꼬여버렸네. 형이 내 몫까지, 어머니 잘 모셔줘요…… 그래, 괜찮아,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도 대답은 않고, 제 말만 잇는 알토는 점점 흐느낀다. - 형, 우리 만난 지 30년이야. 그 세월 다 어디로 갔지? 난 왜 나팔을 불었을까? 고등학교 때 형이 정해준 거였지? 그때부터 형 말이라면 다 들었는데……, 나 섭섭한 적은 있었지만, 형 배신한 적 없어. 알죠? 형, 우리 지금까지 뭐 한 거야? 아니, 뭘, 잘못한거야? 음악다운 음악 하자며? 형이 그랬잖아! 그러면 음악만 했어야지……. 차창에 눈송이가 달려들어 녹아내린다. 흐린 창밖에 알토의 우울한 얼굴이 다가와 있다. 산과 들과 함께 흔들리고 있다. 어디 있는 거니. - 나, 강가에서 눈 내리는 거 보고 있어…… 형, 화음이 계속 안 맞으면, 누가 삑사리를 내서라도 일단 멈춰야 하잖아? 그런데 다 눈치만 보면? 가만히 있는 게 비겁한 건데, 누군들 비겁하고 싶지 않겠어? 응? 아냐, 그냥, 우리 연습할 때 생각나서…… 옛날에 어머니가 팔다 남은 떡 싸주시면 뒷산에 올라가 연습했잖아, 그때가 생각나네! 좀 있으면 어머니…… 눈길 따라 하늘로 오르시겠네. 형,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올겐도 드럼도 베이스도……, 형, 괴로움이 없으면 치열하게 살지 못해, 한도 품고, 그냥 힘들게 잘 살아……, 에이 씨발! 전화가 끊어졌을 때, 차창 밖 저만치 수묵화인양 눈 내리는 언덕 위에 화장터가 보인다. 왠지 낯익은 풍경에 차에서 내린 나는 한동안 주변을 휘둘러본다. 어머니의 관이 화구에 들어갈 때마저 나는 끝내 시원한 울음을 토해내지 못했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이름이 빨간 빛으로 점멸하고 있는 대기실 의자에 나의 살붙이들이 지친 몸을 서로 기대고 있다. 어머니가 남긴, 지나가면 잊힐 시간의 그림이 애틋하다. 그날 아침의 그림도 소리도 어머니가 보여준 것일까. 어머니의 몸이 연기가 되어 하얗게 하늘거리는 동안, 함박눈 송이 송이가 저마다의 진혼으로 살풀이춤을 추는 동안, 나는 地, 水, 火, 風, 네 개째 담배를 태운다. 눈은 허공에서 나부끼다 유유히 산야를 덮어간다. 겨울나무 빈가지에 백화가 피어나고 있다. 바람이 별로 없고 그다지 춥지도 않다. 깊은 산속 암자를 찾아 가기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늘로 오르는 연기에서 향기가 날까 고개를 드니, 눈은 내 얼굴을 씻어주려는 듯 내려앉는다. 이대로 눈 속에 묻히고 싶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고 싶다. 눈을 감자 얼굴에서 녹은 눈이 물이 되어 눈가로 흘러내린다. 알토의 얼굴이 빗물 흐르는 창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려는 모습으로 떠오른다. 그가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는 얼굴이다. 퍼뜩 똥개와 도화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그제야 알토의 말이 섬쩍지근해진다. 설마, 사고를 칠까? 막아야 하는데……, 그냥 비겁해지기로 한다. 무심한 표정의 사내는 어머니의 유골을 모아 기계에 부었고 어머니는 삽시간에 눈보다 짙은 색의 가루가 된다. 아직 내 어머니인 상자를 안고 오르간의 차에 탄다. 조수석에는 아들이 할머니의 영정을 안고 있다. 나는 어머니의 유골을 오래 납골당에 안치하려고 생각지 않는다. 깊은 산속의 암자를 찾게 되면 그때 비로소 어머니를 완전히 놓아드릴 심산이다. 그때까지 어머니는 여전히 셋방에 있어야 한다. 오르간은 운전을 하면서 전화를 받는다. 어투로 보아 뭔 일이 터진 것 같지만 나는 짐짓 창밖으로 눈을 둔다. 눈꽃을 피운 나무들과 희끄무레한 들녘이 뒤로 휙휙 지나간다. 오르간이 백미러로 나를 살피며 말을 하려다 무르춤했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호들갑스레 입을 연다. “하아, 참, 이럴 땐 뭐라해야 쓰까요, 성님. 똥개하고 도화가 많이 다쳤능갑소. 시방 병원응급실이라는디…… 아따! 차말로 천벌이 따로 없당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미러로 오르간을 쏘아보며 다음 말을 독촉한다. “참 요상시럽네요이, 도화 고것이 어디 붙어 묵을 넘이 없어서 똥개허고 그딴 델 갔으까이. 아, 쩌거 양수리 뭔 호텔 앞에서 둘이 뺑소니차에 치였다는디요……, 근디, 기라성 사장이, 알토 성님 여그 왔냐고 자꾸 물어쌌네요.” 안개구름 자욱한 저편 허공에 납골당 건물이 뿌옇게 떠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오르간에게 실없이 묻는다. “야, 올겐아. 너 혹시, 어디 깊은 산 속에 있는 암자 아는 데 없냐?” 시동을 끈 오르간이 뭔 엉뚱한 소리냐는 듯 뒤돌아본다. 눈은 안개비가 되어 흩날린다.  
618 흐엉 1 외1편/권혁재 file
편집자
1464 2018-01-01
흐엉 1 가뜩이나 작은 체구의 흐엉이 유골 상자에 담겨 더 가벼워졌다 오래 견딘 중독증에서 수은처럼 차가운 죽음이, 납빛 살갗을 태우고 세 시간 만에 투명인간이 되었다 세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야자수 빽빽한 흐엉의 외딴 집 긴 잠결에 유언도 없이 깃털 같은 발걸음으로 흐엉이 떠나갔다. 농카이에서 오다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당황한 낯빛에 주위를 경계하며 그녀의 푸른 입술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농카이 유 노 농카이? 되묻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농카이에서 마셨던 맥주냄새가 시리게 올라왔다 저녁 강변 불빛에 젖어 넘실넘실 거리던 맥주 경계를 푼 그녀의 웃음이 거품처럼 하얗게 넘쳤다 온 지 석 달 된다는 그녀의 머릿결에서 맥아향기가 풍겨 나오는 듯했다 농카이 강변 둑에 늘어선 가로등같이 맥주가 최대한 오래도록 제자리에 있기를 바랐다 여전히 주저하는 몸짓으로 돌아서는 그녀의 발걸음에 농카이의 저녁 강물이 깊게 밟혔다. 농카이 - 라오스의 국경지대에 있는 태국의 지명  
617 먼 땅에서 오고 있는, 외1편/김길녀 file
편집자
1312 2018-01-01
먼 땅에서 오고 있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겨울이 있는 도시 흰 눈의 계절을 살아보지 않은 나무의 생애는 외롭지 않고 명랑하다 사계가 없는 푸름 속에서 자란 나무들 성장촉진제를 맞은 키 큰 꽃과 같이 짧은 시간 안으로 긴 삶을 펼쳐놓는다 겨울 한가운데 일월과 이월 사이 식물원 제3산책로 초입에서 만난 늙은 아소카나무 한그루 죽은 이들이 잠들고 싶어 하는 나무의 지붕은 둥글고 따뜻하다 주먹만한 주황 램프꽃 조등처럼 주렁주렁 피어 빗속에서도 환하다 이파리 무성한 나뭇가지엔 공원지킴이 구렁이가족도 함께 지낸다 생애 처음 맞이하는 따뜻한 겨울 속 이국여자 창고 방에 쌓아둔 하양을 찾는 일에 열중이다 우기의 한 낮, 대서양을 넘어서 적도로 숨 가쁘게 달려온 귀한 햇살 지칠 줄 모르고 피고 지는 꽃잎들 족적을 환하게 비춘다 멀리 오면서 두고 온 먼 땅 얼음골의 함박눈 안부 폭설 같은 폭우 속 빗방울에 숨어서 이륙중이다 외투 안 깊이 겨울이야기 한아름 품은 채 오고 있는 당신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이국에서 만난 사람 기록도 없이 사라진 마을에 대해 말하던 노파가 있었다 노파는 마치 오래전 떠난 나의 누이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노파가 기억하는 가족사에 대한 일이라고는 바람이 푸근했던 골목길과 뚱뚱한 나무 한그루 있던 기와집 넓은 마당이었다 노파의 눈빛은 오래전 죽음을 경험한 사람을 닮아 있었다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마을 이야기는 노파의 입을 통해서만 전해진다고 했다 처음 간 나라에서 처음 만난 노파 죽은 나의 누이와 눈빛이 닮아 있었다 노파가 들려주던 이야기는 내 전생의 어느 한 시절이 아니었을까,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낯선 노파와 이야기를 나누던 식물원 산책길 12월 우기 속에서 주황 꽃송이 조등처럼 주렁주렁 피어 있었다 잠시, 따스한 바람이 내 곁을 스치고 갔음을 알았을 땐 한바탕 소나기가 다녀간 후였다 강원도 삼척 출생 1990년 《시와 비평》 등단 시집 『푸른 징조』 등 여행산문집 『시인이 만난 인도네시아』 제19회 한국해양문학상(시) 수상  
616 작은 시의 노래 외 1편/오형근 file
편집자
1499 2018-01-01
작은 시의 노래 네 속 침묵의 웅덩이에 연꽃 피길 기다리지 말라 네가 올곧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너는 그대로 한 송이 꽃이거늘 無題 아버지의 49재를 마쳤다 이제 죽을 자격을 얻었다 오형근 1955년 서울 출생. 1978년 《시문학》주최 전국대학문예 시 당선, 1988년《불교문학》과 《불교문예》로 등단. 시집 『나무껍질 속은 따뜻하다』,『환한 빈자리』, 『소가 간다』등이 있음.  
615 상선약수 외1편/나병서 file
편집자
1361 2018-01-01
상선약수 아래로 흐르더라 지나온 세월 미련없어 보이더라 하늘에서 땅끝까지 아래로만 스미더라 땅끝이라는 곳 가고싶지 않은 곳이 땅끝이라고 그곳까지 아래로 아래로 흐르더라 조약돌 어르신 산에 갔더니 작은 조약돌 시냇 가운데 우뚝 솟아선 바위 보고서 얘야 내가 어릴 적 꼭 너만 했단다 하더라 약력 2015년 2월 2015년 동경미술대전 한일문화교류축제 초대작 참가 *상수리 나무의 노래(일본 나가노시) 2016년 1월 한국.프랑스 수교 130주년기념 파리시화전 초대작 참가 *능소화 애가 (*france gainsbourg properties 2016 france paris new year exhibition france paris b. vhara/le d` art kfe) 시집 지렁이 똥